늘빈웹진: cinéclub

세레나데 다이얼로그

pernet & 탕탕

 

 

성한빈은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눈앞에 놓인 시놉시스를 응시했다. 너무 잘됐다, 빙빙, 천 감독님 영화는 당연히 해야지! 룸메이트 왕위완-잠들기 전 성한빈은 항상 왕위완안이라고 인사하는 버릇이 있다-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다 먹은 컵라면 용기를 탁자 위에 그대로 둔 바람에 냄새가 방 안에 가득 퍼져 오랫동안 빠지지 않았다

베이징 하이뎬구는 꿈에 그리던 도시였지만 방값이 너무 비싸 중심 부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눈을 돌린 곳은 가난한 대학생들이 모여 사는 구 외곽의 판자촌이었다. 두 사람이 쓰는 단칸방인데 청소는 항상 성한빈의 몫이었다. 그 점에 대해 성한빈은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프라이버시와 쾌적함을 잃었지만 시간과 기회와 원어민 수준의 중국어 실력을 얻었다. 삐걱거리는 창문을 힘겹게 열며 이쯤 되면 윈윈이지, 하고 성한빈은 생각했다. 미세먼지가 가득한 바람을 타고 들어온 질문 하나가 귀를 점령했다. 너는 어떤 영화야

왕위완은 침대 위층에 걸터 앉아 시놉시스의 감독진과 배우진을 보고 대박날 영화인지 쪽박칠 영화인지 에이전시 매니저처럼 점쳤는데, 촉은 대부분 다 맞았다. 너 이거 거절하면 안 된다? 당연히 거절 안 할 거야! 성한빈은 들뜬 얼굴로 침대 아래층에 몸을 던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별안간 천장 부근에서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빙빙, 너 이제부터 연습해야겠다. 너 자신을 너무나 사랑해서 스태프들의 안중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아 하는 연습. 위층의 전담 에이전시 매니저가 또 뭐라고 떠들었지만 성한빈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빙빙, 네가 장하오의 대역이라니.”

 

극장에 가기 전에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 이유는 다양할 거다. 예고편이라든가,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의 작품이라든가, 포스터라든가, 아니면 평점이라든가. 어떤 영화냐고? 전국 수만 개의 영화관 그 어디에서도 선택받지 못한 영화, 미완성된 영화, 라고 대답해야 할까? 대부분의 일이란 감독의 눈동자를 살피면서 ‘컷’이라던가 ‘자 배우님 들어가세요’라던가 뭔가 신호가 오기를 기다리며 입만 뻥긋하며 몸만 연기하는 것뿐이니까. 그저 엔딩 크레딧 구석에 대역 배우로 ‘성한빈’이 올라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좋아하는 건 좀 시시하니까.

 

 

 

장하오를 처음 본 건, 신작 제작이 확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천 감독님의 생일 모임에서였다. 감독들, 배우들, 코디네이터들과 의상 디자이너, 소품 디자이너, 필름 매거진 기자, 그리고 몇 년 간 함께 해 온 스태프들. 딤섬집의 길쭉한 방 안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장하오는 가장 어린 남자였다

장하오와는 대각선 방향으로 멀게 마주 앉았는데, 건배사를 붙인 축하주가 여러 번 돌고 자리가 좀 안정되었을 때 시선이 가끔 부딪쳤다. 뭔가 궁리하는 듯한 눈빛과 사탕을 물고 있는 듯 무표정한 입 주변이 이상하게 마음을 끌었다. 그 얼굴의 확실하지 않은 무언가가 성한빈을 포함한 공간의 모두를 떨리고 허둥지둥하게 만들었다. 저 남자가 장하오라는 것은 처음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인 양 당연하게 느껴졌다. 현실에서 저 정도로 존재감을 노출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배우인 것이다. 이 인간에게 ‘너는 어떤 영화야?’라고 물으면 ‘끝나지 않는 영화’, ‘언제나 내가 주인공인 영화’라고 답할 것만 같았다

장호. 독립 영화 감독이었던 어머니, 유명한 중화권 배우였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예술 집안의 가장이다. 열다섯에 아역배우로 시작해 백룡을 타고 다니는 소년에 관한 로맨스 판타지 시리즈를 찍으며 청소년 배우로서의 인기를, 연기력을 인정받기 위해 이웃집 선생을 사랑하게 된 가난한 청년에 관한 시놉시스를 시작으로 독립 영화를 찍으며 명성을 얻었다. 스물다섯인데도 경력이 10년이 넘어가 버리니 타고난 매력과 친화력과 잘 계산된 영향력 덕분에 오래된 인맥 안으로 동심원 안으로 배우로서의 새로운 입지를 끊임없이 쌓아왔다

장하오의 연기는 숨 쉬는 것을 잊게 만들었다. 너무도 지나친 그 완벽주의에 대중들은 ‘스크린에서의 장호를 건성으로 흘려 볼 수 없다’라는 평을 자주 했다. ‘장르를 불문하고 어떤 영화를 연기하든 너무도 능숙한 탓에 마치 재능을 갖고 노는 것 같지만, 동시에 사색적이기도 하다’는 평이 나오는 데는 장하오가 연기할 때 짓는 특유의 마치 체스판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도 한몫 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서야 사람들이 알게 된 건 장하오가 단순히 재능을 타고난 것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재능 중에서도 특히 좋은 것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날 장하오는 앞머리를 올리고 여기에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완벽하게 일상적으로 보이지만, 너무나 완벽해서 그 안으로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방탄복 같은 청자켓을 입고 있었다. 당시 구석에 있었던 성한빈은 커다란 조화 아래 그림자 속에 서 있어서 주인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남자의 목소리가 무방비 상태인 귓가로 곧장 울려 퍼졌다.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성한빈은 장하오에게서 무언가를 보고-듣고-말았다. 이건…

 

내 대역 배우라고? 쟤가?”

 

네가 감히?’라는 눈빛. 자기밖에 모르는 철저한 이기주의자이자 나르시시스트, 잘난 척이란 척은 다 하는 싸가지잖아

 

 

 

네 영화를 본 적 있어.

 

‘결구반복(結句反復)’은 모든 걸 잃고 마지막 사건을 추적하는 전직 경찰 리우예에 대한 천 감독의 야심찬 정통 액션 신작이었다. 영화의 제목이 입에 잘 붙지 않는 영화인 것만큼 감독님의 지시를 알아듣기 어려웠다. 첫 액션 영화라 그런지 욕심이 많으셨던 걸까? 갑자기 3층에서 떨어지라고 하질 않나, 달리는 트럭에 몸을 던지라고 하질 않나. 이번에는 벽에 부딪치고 바닥을 굴러야 했다. 바닥에 누운 성한빈은 숨을 몰아쉬었다. 특수한 설탕으로 만든 가짜 피의 맛은 달았다. 주인공의 얼굴이 페이드아웃되면서 내레이션이 들려올 것이다. 하늘이 새들보다 빠른가요? 아마도 그럴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동네 새들을 보면 항상 그 사이에 하늘이 함께 있거든요. 하늘은 자기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거기에 있어…. 곁눈질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천 감독의 옆에서 한 손으로 턱을 바치고 눈썹을 찌푸린 채

 

“컷! 빙빙, 몰입하는 건 좋은데 대사까지는 안 쳐도 돼.”

 

벌떡 일어난 성한빈은 끈적이는 빨간 설탕물을 흘리며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방금 액션은 정말 좋았어. 네가 주인공인 줄 알았다니까. 들려오는 칭찬에도 성한빈은 다시 시선을 흘겨보았다. 살짝 치켜든 고개에는 타고난 거만함이 약간 담겨 있었고, 다리를 꼬고 건들거리는 저 몸짓 하며

 

“대역이면 대역답게 행동해요. 대사 치지 말고.”

 

성한빈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옆에 있던 난간을 꽉 잡고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 뒤, 촬영 현장 쉬는 시간의 어수선함 속으로 고개를 숙였다. 장하오는 저와 똑같은 리우예의 검정색 셔츠를 입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가만히 앉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완벽히 역할에 몰입하는 것도 대역 배우의 일인걸요.”

“그건 제가 할 일이고요.”

“그렇다면 배우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게 제 일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런가요? 하하하.”

 

호탕하게 웃어 젖히면서도 눈은 그대로였다. 장하오는 이런 상황이 곤란해 보이지도, 이야깃거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유유히 성한빈을 바라볼 뿐, 눈빛에 담긴 여유는 방금 성한빈의 행동과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그 여유가 별안간 성한빈을 쿡쿡 쑤셨다. 해 보자, 이거지?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역시 이 그림을 바라왔어!

 

성한빈과 장하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는 동안 천 감독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두 손을 맞잡은 채 다가왔다. 내가 제일 동경하는 배우와 내가 제일 아끼는 스턴트맨. 중국과 한국의 조화! 미적 대칭! 데칼코마니 같은 리우예 쌍둥이는 천 감독의 마지막 문장에 몸을 동시에 움츠렸다

 

“심지어 둘이 닮기까지!” 

 

닮았다고? 이 인간이랑? 장하오도 살짝 놀란 듯했지만, 짐짓 시치미를 떼는 대신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촬영은 성한빈 씨와의 공통점을 찾는 여정이 되겠군요. 하하하. 하하하, 그러게 말이에요, 감독님. 최대한 가식을 담아 웃었다. 가짜 웃음은 어색해질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누군가의 대역으로 일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영화계의 고든 램지의 심사를 받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장하오는 쉴새없이 잔소리했다. 장면 하나 컷하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리냐고 잔소리하고, 액션 동작을 너무 느리게 혹은 빠르게 했다고 잔소리하고, 가방이 너무 무거운 거 아니냐, 샐러드 먹어라, 운동해라, 자기관리 해라, 잔소리하고. 대기실을 비워달라느니 밀크티를 사다 달라느니 하는 부탁도 주저 없이 했다. 빨리요, 라고 덧붙일 때조차 있어서 처음에는 화를 내야 할지 감탄해야 할지 몰랐을 정도였다. 언제든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빙그레 웃어 보였고, 말썽꾸러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눈빛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성한빈은 장하오의 재수없음을 맞받아치는 법을 터득했다

 

“메이크업 너무 오래 받으시는 거 아니에요?”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변신해야죠.”

 

메이크업 세례를 받는 화장신의 아기처럼 눈을 감은 채로 장하오는 말했다. 내 영화 내가 주인공인데. 눈을 뜨고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없을 비범한 아름다움. 그래요, 나 장하오입니다. 거울에 비친 장하오의 모습에서 재수없음만 가득할 뿐, 이 인간이 말한 아름다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서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괴짜야, 아님 왕자야. 왕자라면 참을 수 있는데, 괴짜는 못 참는다고!

장하오는 의상실 안 소파에 앉아서 이따금 두어 번씩 메이크업을 받는 성한빈을 훑어봤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저를 보고 숨이 멎을 듯 놀라는 모습은 감히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CCTV뉴스에나 나올 법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잖아.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성한빈의 얼굴에 점을 찍기 시작했다. 얼굴이 나오는 장면이 없으니 사실 할 필요는 없는데장하오 씨가 요청해서요. 꼭! 자기랑 똑같이 똑같은 위치에 점 찍어 달라고.

봐 줄 만하네요? 성한빈의 가짜 점을 스캔한 장하오는 씨익 웃었다. 갈수록 건방져졌다. 아니요, 점 찍으니까 못생겨서 싫어요. 불쾌해하기를, 놀라기를, 황당해하기를 기다렸지만 장하오는 별안간 웃기 시작하더니, 눈에 사람 우롱하는 기색을 가득 머금고 말했다. 하하하, 내가 되는 기분이에요? 고작 점 몇 개 찍어서? 나르시시스트의 공격에는 일찌감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게 된 터라, 그 상황에서도 뻔뻔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되어서 기분이 매우 불쾌하다고 하면, 싫어할 거예요? 장하오는 성한빈의 공격을 바로 받아쳤다. 저야 고맙죠

덩치도 비슷한 남자 둘이 똑같은 옷차림, 똑같은 머리스타일과 외형을 유지하다 보니 주변인들이 헷갈려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성한빈 씨? 아, 죄송해요. 장하오 씨였네. 스태프들의 화두에 오르내리는 리우예 쌍둥이라는 단어는 장하오와 성한빈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하나의 빌미가 되어 주었다. 둘 다 눈에 핏발이 선 것도 상태가 비슷했는데, 그건 밤샘촬영 때문이 아니라 서로에게 쏘아붙이는 갈고리눈 때문이라는 소문이 한번 돌기도 했다

배우가 이래도 돼요? 언제는 이렇게 물었는데, 장하오는 이상하다는 듯이 성한빈을 바라보았다. 왜 안 되는데요? 배우도 사람이에요. 사람에게는 단점이 있게 마련이죠. 제 단점이 바로 남한테 야박하게 구는 거랑 양심이 없다는 거랍니다. 이렇게 당당한 대륙의 꽃미남께서는 친히 성한빈을 비꼬고 비웃고 충격을 주는 일에는 도무지 피곤해하는 법이 없었다. ‘넌 내가 될 수 없어’, ‘난 너무 잘났어’, ‘전혀 아니니까’, ‘웃기시네’, ‘가만 안 둔다’를 무한 반복하는 반응이 단점이라는 건 다행스럽게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둘이 친해 보이네?”

 

당연하게도, 붙어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천 감독님은 좋아했다. 한빈 씨가 저를 좋아하게 됐어요. 장하오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쵸, 한빈 씨. 아니, 빙빙? 성한빈은 침을 꼴깍 삼키며 거부의 표시로 손사래를 쳤다. 아직 저한테는 좀 부담스러워서요. 천 감독의 눈이 반짝일 때마다 성한빈은 어깨의 손을 뿌리쳤다. 감독님, 저희 그렇게 가까운 사이 아니에요

 

“정말 아니라니까?”

“빙빙, 넌 어째 집에만 오면 장하오 얘기만 하는 것 같다?”

 

가짜 점과 가짜 피를 다 지우고 오리엔탈 드레싱을 20위안짜리 샐러드에 신경질적으로 두르고 있을 때면 그 뜬금없는 괴짜 왕자님 소환에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다. 왕위완은 성한빈에게 넌 고양이 사료만 먹어 본 고양이처럼 쥐만 보면 그냥 천성으로 쫓아다닐 뿐이라고, 물고기라도 봤다가는 삽시간에 그 유혹에 넘어가고 말 거라고 했다. 신이 내린 듯한 그 비유에서 성한빈은 고양이, 천 감독은 쥐, 그리고 장하오가 바로 그 물고기였다

성한빈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빠진 듯한 왕위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목소리는 단호하지만 제가 누굴 설득하고 있는 건지 성한빈도 잘 모르겠다. 장난하냐, 미쳤냐, 절대 아니야, 라고 했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강한 부정을 할 수가 없었다

한빈 씨가 저를 좋아하게 됐어요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한순간 귀에 감겨드는 듯한 기분 좋은 미련이 남는 장하오의 웃음 소리가 들려오자 성한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피곤해, 나 잘래애

 

 

 

자꾸 그 문장이 맴돌아서일까, 뛰어내리면서 폭발이 일어나는 장면을 찍으면서 불꽃을 일으키는 장치를 엎고 말았다. 스턴트맨의 민첩한 반사신경 덕분에 다행히 뜨거운 불꽃이 왼팔에만 튀어버렸다. 의상이 더러워지는 건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너무 뜨거웠다.

매우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누적된 피로로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여기서 더 급하게 행동하기에는 무리였다. 성한빈은 침착하게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화상 때문에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아픔보다는 짜증부터 밀려왔다. 다친 것도 짜증 나는데 다친 이유를 인정하기 싫어서 더더욱 짜증이 났다. 방심했으니까. 프로답지 않았으니까. 성한빈 씨! 괜찮아요? 네, 네, 괜찮습니다. 스태프들이 허둥지둥 구급상자를 뒤지고 있을 때, 갑자기 앞줄에서 손 하나가 불쑥 나오더니 성한빈의 앞에 얼음팩이 들이밀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장하오였다

 

“어쩌자고 그런 실수를 해요?”

 

성한빈은 다친 팔을 뒤로 숨겼다

재수탱이에게 경멸까지 받기는 싫어서인지, 아니면 그 미묘함 때문인지 팔이 갑자기 따갑지가 않았다. 생기를 잃은 듯했던 장하오의 눈빛에 다시 장난기가 가득해졌다. 화상 자국 다 보이는데…

 

“안 아파요?”

“어째 제가 아프다고 외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왜 걱정하세요? 장하오답지 않게.”

“내가 왜 걱정하는지 모르겠어요?”

 

성한빈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어쩌면 절 자르려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당신이 지금 딱히 할 일이 없어서일 수도 있죠

장하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할 일이 없어서가 분명했다

 

“나 때문에 당신이 다쳤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이상한 사람이야.”

“촬영이 늦어지니까 그러는 척하는 거 아니고요?”

“그것도 있고요! 얼음이 싫으면 흐르는 물로 씻어요, 얼른.”

 

얼음팩을 꼭 쥐고서는, 입술을 깨물며 걸음을 옮기려는 성한빈을 장하오가 다시 불러 세웠다

 

“성한빈 씨!

“왜!

“화장실에 가는 거잖아요?”

“그래요!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에요.”

 

성한빈은 장하오가 가리키는 쪽을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려고 한 길을 돌아보고는 불끈했던 만큼 괜히 더 창피해져서 장하오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급히 걸음을 옮겼다. 손가락이 왼쪽 귓불을 스칠 때 뜨거워서 깜짝 놀랐다. 이거… 이거 왜 이래. 거울을 보니 양쪽 귀가 터질 듯이 빨개져 있었다

 

 

 

빙빙, 자네를 보면 숫자 9가 떠올라. 왜요, 감독님? 9 10 바로 이전의 숫자잖아. 10이 되기 위한 기다림. 불완전하지만 완성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상태. 그 미묘한 경계선에 있는 완성과 미완성의 중간에 있는 숫자니까. 그럴 때 필요한 게 뭔지 알아? 숨통 트일 모험이지

그날 밤, 결구반복 촬영 쫑파티는 세트장 근처에 자리한 고깃집에서 열렸다. 천 감독의 설교 시간은 항상 쫑파티의 끝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마무리는 늘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일해 보는 게 어떻냐는 제의였다. 정말 생각 없는 거야? 네, 감독님. 성한빈은 천 감독이 내민 명함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생각이 바뀌면 말해. 성한빈이 어떤 엔딩을 향해 갈지 볼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쉬워서. 천 감독은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문을 열어, 성한빈이 홀을 나갈 때까지 문을 잡아 주었다

가게 바깥에 나섰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우뚝 솟은 장하오였다. 두 손이 주머니에 있는 걸 보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건 아니었다. 회색빛 거리 위를 끊임없이 오가는 택시와 버스에 대비된 거대하고 위풍당당한 장하오는 오히려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청력은 또 왜 좋은 건지, 성한빈이 기침을 하자마자 곧바로 고개가 돌아갔다

 

“공기가 답답해서 나오자마자 당신이 보이더라고요. 무슨 덜 완성된 시놉시스 속 장면처럼.”

“허접스러운 시놉시스를 너무 많이 보셨구만.”

 

장하오가 두 다리를 휘적거리며 다가왔다. 무심한 척 세심하게 신경 써서 세운 머리카락, 이런 회식자리에서 늘 입고 오는 청자켓. 위풍당당한 모습은 자연스럽고 거짓이 없었다. 장하오는 특유의 곁눈질을 잠깐 하더니, 붕대가 감겨 있는 성한빈의 팔을 가리켰다

 

“어떻게 촬영 마지막 날에 다쳐요. 타이밍 안 좋게.”

“타이밍이 좋은 거죠.”

“가끔 나보다 엄격할 때가 있다니까.”

 

강가를 돌며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삼륜차 모는 아저씨가 그들을 쫓아왔다. 아저씨는 100위안에 두 사람을 태우고 한 바퀴 돌아주겠다고 외쳤다. 장하오는 너무 비싸다며 상대하지 않았다. 20위안에 안 돼요? 그건 안 되지, 달랑 20위안 들고 허우하이에 놀러왔다구? 연예인 할인 없어요? 아저씨, 저 장호예요. 장하오, 몰라요? 장호는 알지만 할인 같은 건 몰러. 참~ 정 없으시네, 정말.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1호선에 출몰하는 두 할아버지들 같아서 웃음이 터졌다

삼륜차는 쥬먼 샤오츠 먹거리 골목에 멈춰 섰다. 장하오는 50위안을 지불하고 성한빈의 손을 잡아끌며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왕씨네 천엽, 연유튀김, 생크림튀김, 팥소 인절미, 순두부. 그렇게 저에게 자기관리 노래를 부르더니, 장하오는 촬영 끝난 날 아니면 못 먹어요, 라는 변명거리를 붙이며 먹거리를 모조리 소탕했다. 성한빈이 주목한 건 코끼리와 맞먹는 식사의 양이 아니라 장하오의 손이었다. 굳은살도 없고 궂은 스턴트로 거칠어지지도 않은 배우의 손이었다. 손등 중앙에는 파란 혈관이 희미하게 보이며, 한 겹 인공의 막을 친 듯이 매끄러웠다

거리에는 데이트하는 연인들이 가득했다. 저 사람 장호인가 봐, 지나가는 사람들의 힐끗거리는 시선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장하오는 남은 연유튀김을 다 먹어버렸다. 가방에 무슨 대사집이 그렇게 많아요? 장하오가 뜬금없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았어요.”

 

맨날 세트장에 들고 오면서. 장하오는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콘을 건네며 자신은 딸기 맛을 베어 먹기 시작했다. 성한빈은 다 낡아빠진 가방끈을 꼭 움켜쥐었다. 매일 드는 가방인데도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어떤 영화인데요?”

“덩차오랑 저우쉰이 나와서 서로 싸우면서 고백하는 장면이 유명한데요. ‘강가 재회’라고….”

“방관낭만?”

“네, 엄청 옛날 영화인데 아시네요?”

“그러는 당신은 어떻게 아는데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장하오도 아직 어린데 묘하게 늙은 느낌이 들었다. 덩차오 선배, 저우쉰 선배의 연기 차력쇼는 말하기도 입 아프고, 거기다 링 감독님 데뷔작이잖아요. 역시 잘 아시네요. 날 우습게 보지 말아요. 링 감독님은 나랑 같은 고향 사람이에요. 금계상의 도시, 푸젠에서 태어나셨군요. 샤먼시가 아니라 난핑시 출신이지만, 잘 아네요. 당신도 절 우습게 보지 마세요. 허, 이거 봐라. 장하오는 턱을 쓱 치켜들었다

 

“엄청 옛날 영화의 각본집을 굳이 들고 다니는 이유는?”

 

성한빈은 대답없이 아이스크림만 입에 베어물었다. 장하오는 그 얼굴에 드리워진 붉은기가 신기하게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의심스럽게 물었다. 뭔데요? 아니, 그냥 시시한 얘기라서. 그대로 걸어가려고 하는데, 장하오가 뒤에서 연신 ‘한빈 씨, 성한빈’ 불러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뒤를 돌았다

 

“배우가 되고 싶은 거죠?”

“….”

 

방관낭만. 성한빈은 멈칫했다가 아이스크림을 입 안에 넣고 그 영화의 제목을 우물거렸다. 무언가를 깊게 우물거릴수록 떠오르는 기억을 따라가 보면 그 영화의 끝에는 배우 지망생 성한빈이 있었다

스무 살의 성한빈은 중국어가 완벽하지 않았다. 읽는 건 그럭저럭이었지만 듣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게다가 중국 사람들마다 쓰는 말과 억양이 조금 달라서 한 박자씩 뒤늦게 의미를 생각해 내야만 했다. 그래서 서점에 들러 ‘방관낭만’ 각본집이 어디에 있는지 점원에게 물을 때 그렇게 애를 먹은 것이기도 했다. 난 그때 내가 이렇게 널 계속 좋아하는데도 넌 날 좋아하지 않으면, 나한테 낭만은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 낮에는 하이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화샤필름 본사 앞에 서성이며 주인공 허쥔샹의 대사를 중얼거리고, 한 영화를 반복해서 보거나 생각이 나면 발성 연습을 했다. 한국으로 따지면, 소속사 없이 데뷔를 준비하는 아이돌 연습생 생활을 하는 것과 같았다. 때때로 4-5일 동안 반복적으로 걸어 다녔다. 대역 배우가 되고 나서부터는 점차 궤도를 좁혀 아파트 블록 주변을 돌거나, 결국 방에 틀어박혀 계속 서성이다가, 각본집은 건드리지도 않고 그 앞에 앉지도 않다가 내리 이틀 동안 잠만 자기도 했다. 잊히지 않는다. 정말로, 그런 것은. 하지만 대부분 잊어버렸다. 어떤 걸 꿈꿨고 어디로 달려갔는지. 나의 엔딩을 모른다는 것은 정말 혼란스러운 일이니까

 

“지금은 되고 싶지 않아요. 오디션도 본 적 없고.”

 

부모님께도 이 이야기를 꺼냈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잘 결정했다, 한빈아. 그땐 마음속에 바위 하나가 쿵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덕분에 이제 이렇게 평온한 말투로 꿈을 접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방금 했던 말 취소

입을 벌리고 경악해하는 장하오의 표정을 보자니 아버지의 얼굴이 언뜻 스쳐 지나가며 바위 여러 개가 가슴도 아니고 머리 위로 굴러 떨어지는 듯했다

 

“시도해 보지도 않았다고요?”

“아니요, 그게,”

“배우가 되고 싶은데, 배우가 되기 싫었어요?”

“그게 아니라….”

 

끝까지 못한 것도 싫어서라기보다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성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언제부터인가 해내지 못한 일에 대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변명하는 습관이 생겼다. 사실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본다면 해낸 일보다 해내지 못한 일이 대부분일 테고 그것은 그것대로 추억이나 기억을 충분히 남겼을 텐데 말이다

 

“자신이 없어서요.”

 

성한빈은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다. 도박을 안 해서 천만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이기고 지는 게임에 사족을 못 썼다. 안타까운 사실은 승부욕이 강할 뿐, 늘 이기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주 지는 쪽이었다. 배우의 꿈을 포기하고 스턴트맨의 길로 접어든 것은 수많은 패배의 결과 중 하나였다. 또다시 변명하자면, 무너지는 친구들을 너무 많이 봐 왔다. 연기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겼는데, 왜 무명일까. 데뷔는 했지만 아직 본인들을 배우 지망생이라고 칭하는 그 친구들은 운 때문이라고 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실력 혹은 열정이 결과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프고, 운이 짐작보다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이 억울하다고. 스스로가 고작 엑스트라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실망감. 스스로를 빛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빛내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 주는 참담함. 한순간에 내 삶의 주연에서 낯선 삶의 조연으로 전락하는 기분. 성한빈은 그 기분을 잘 알았다. ‘낭만이란 그 엔딩이 없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뒷 이야기가 정해진 단조로운 시놉시스처럼 20대를 보내는 건 나도 다를 게 없었으니까

장하오는 그 자리에 멈춘 지 한참이 지나도록 걷지 않았다. 눈썹을 한껏 찡그린 채 먼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두 손을 주머니 안에 넣고 있었고, 팽팽하게 조인 아래턱이 살짝 떨렸다

 

“그건 자신감이 없는 게 아니라 오만한 건데.”

 

성한빈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길을 가다 돈을 주우면 높이 쳐들고 흔들면서 혹시 돈 잃어버린 사람 없냐고 소리칠 사람.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 별로라고 악평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두려워하는 일에 도전하는 사람. 그게 바로 영화배우 장하오가 무명인 적이 없었던 이유였다

 

 

 

성한빈은 침을 꼴깍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뒷좌석에 쌓여 있는 책들을 흘금 봤는데 주로 영화와 나라에 관한 두툼한 책들이었다. 확실히 연예인 차는 연예인 차였다. 평생 차 타이어 하나 살 형편도 안 될 거라고 확신하고 산 탓에, 감탄만이 절로 나왔다.

어째서 충동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장하오에게 연기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로 데뷔한 것도 아니고 장하오의 밴이 실제 촬영장도 아니고. 오직 한 사람만이-그 사람이 중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영화배우인 것을 제외하면-저를 보며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차의 주인이 느닷없이 방관낭만의 각본집을 먼지 날리게 펼치며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자, 갑자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느낌은 마치 수업 시간에 휴대폰 게임 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가, 고개를 들자마자 선생님이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 같았다

 

“집에 초대된 장면. 내가 린신루, 당신이 허쥔샹.”

 

장하오가 명령했다. 떨리는 숨이 절로 나왔다. 상대는 ‘진짜’ 배우야. 그래서 이렇게 떨리는 걸까. 성한빈은 몇 번이고 목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어두침침한 차 안에서 기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성한빈은 문득 제가 긴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에라, 모르겠다

 

“신루, 내가 망설였던 이유가 뭐였냐고? 난 그때 내가 이렇게 널 계속 좋아하는데도 넌 날 좋아하지 않으면, 나한테 낭만은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

 

성한빈은 장하오를 본 순간 살짝 움찔했다. 단지 내려다보는 눈동자 때문에 놀란 게 아니고, 마치 아무것도 들은 적이 없는 듯한 표정 때문이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기에 장하오의 창을 한참 응시해 봤지만 왜인지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눈이 확실히 마음의 창이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눈이 방범창이라서 보는 사람의 기술이 떨어지면 헛기침을 하며 침이나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다시.”

 

장하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각본집 여러 장을 동시에 넘겼다. 네? 다시 하라고요.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돌아오자 성한빈은 눈을 맞추지 않으려 피해버렸고, 뭔가 어색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눈을 힘껏 깜빡이다가 그제야 퍼뜩 깨달음이 찾아왔다. 긴장감으로 등 뒤는 아예 찜질방이 되었다. 성한빈은 다시금 숨을 들이쉬었다.

 

“신루, 내가 망설였던 이유가 뭐였냐고? 난 그때 내가 이렇게 널 계속 좋아하는데도 넌 날 좋아하지 않으면,”

“허쥔샹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내는 소리마다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해요. 그게 한숨 소리라도요.”

“신루, 내가 망설였던 이유가 뭐였냐고? 난 그때 내가 이렇게 널 계속 좋아하는데도 넌 날 좋아하지 않으면, 나한테 낭만은 없는 거라고,”

“아무것도 못하겠다면 연기하는 걸 연기라도 해요. 나만의 소리를 내라고요. 절박한 연주자의 악기처럼요.”

 

한동안 실랑이가 이어졌다. 성한빈은 계속해서 대사를 말했고, 장하오는 계속해서 ‘다시’를 외쳤다. 열심히 대사를 토해 봐도 장하오는 또다시 조용하고 묵직한 말투로 함축적인 야유-다시-를 건넸다. 이 인간도 물론 나름대로 이래저래 생각하는 바가 있겠지만, 이따금씩 ‘이번이 제일 별로였어요’라고 대답할 때면 절망감까지 들었다. 급기야 성한빈은 절박해졌다. 아까 먹은 아이스크림 콘이 올라오는 것을 애써 꾹 눌러삼키고 숨을 다시 들이쉬었다

 

“신루, 내가 망설였던 이유가 뭐였냐고? 난 그때 내가 이렇게 널 계속 좋아하는데도 넌 날 좋아하지 않으면, 나한테 낭만은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 솔직하게 말할게. 난… 너무 앞서 갔던 것 같아. 명확하고 투명해 보이던 네가 미처 알지도 못하는 나를 꾸짖는 것 같아서. 그리고 어느새 복잡한 너의 집으로 초대되었어. 내가 무슨 불평을 하건 단지 부럽고, 네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게 이유야.”

 

성한빈의 가슴이 가쁘게 들썩였다. 장하오는 이제 말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거의 겁이 날 정도였다. 이번에는 괜찮았나? 또 ‘다시’라고 말하려나? 이게 무슨 똥개 훈련이지? 형편없는 연기였군요, 라고 또 꾸짖겠지? 이 무한 허쥔샹의 굴레는 언제 끝나지? 이봐요, 아저씨, 너 내 대사를 듣긴 한 거야? 그 모든 가능성 대신에 장하오는 각본집을 덮었다. 그러더니 입을 뗐다

 

“난 어렸을 때부터 왜냐고 묻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

 

아는 것이 많았지만 말을 이어가기 전 한숨을 쉴 때는 약해 보였고, 가끔씩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장하오는 찰나의 순간에 린신루가 되었다

 

“어쨌거나 어른들은 크면 알게 된다고 하잖아. 그래서 난 어른이 되는 데 집착했지. 어른이 된다는 건 모든 불확실성의 비밀을 풀 열쇠였으니까. 난 당시에 이해하지 못했던 걸 모조리 또렷하게 기억한 다음, 어른이 되길 기다렸어. 어쩌면 그래서 내가 그 시절의 기억을 특히나 또렷하게 기억하나 봐. 어떤 어른이 그러더라. 사람의 집념은 종종 이렇게 시작된다고. 왜냐하면 아이는 철이 들 수는 있어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쥔샹.”

 

숨도 멈추지 않고 각본집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성한빈이 대사를 치는 동안 본인의 대사도 그새 외운 것이었다. 대사를 끝맺은 장하오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숨을 천천히 가라앉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서 있는 상태에서 성한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차분하고 직접적이면서, 이런 모든 복잡한 상황에서조차 전적으로 단순한 시선으로. 장하오의 연기란 그런 것이었다. 갓 생긴 상처를 보여주러 다가오는 아이에게 순수하게 건네는 어른의 입맞춤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단순한 것이었다

 

“…어땠어요?”

 

성한빈은 괜히 애꿎은 손만 만지작거렸다. ‘방관낭만’은 불확실한 사랑에 대한 영화예요. 그런 영화는 잘 찍으시겠네요. 아주 잘하기만 하면. 장하오는 일부러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오디션의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르죠.”

“그리고요?”

 

각본집을 건네받은 성한빈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제 연기에 대한 피드백은 하나도 없는데요? 장하오가 웃었다. 하지만 평소대로 성한빈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뜬금없이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나한테 말하는 거 같았고.”

“….”

“좋았어요.”

 

문득 린신루의 다음 대사가 성한빈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서 이유는 사실 중요하지 않아. 우린 이제 모든 게 불확실한 어른으로 자랐으니까.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급속하게, 말로 하는 설득 같은 것 없이, 이제서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런 게 낭만이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 영화를 너에게 보여주고 싶어.

 

국경절 황금 연휴가 떠들썩하게 시작되었다. 성한빈은 본가로 돌아가지 않고 하이뎬에 남아 틈틈이 오디션 준비를 했다. 이틀 전에는 밤을 새서 다섯 편의 시놉시스를 읽고 열 장 정도 분량의 대사 암기를 끝냈다. 처음엔 꼼꼼하게, 나중에는 요령껏 하면서 끝까지 버티다가 몽롱한 상태로 에이전시의 메일 주소로 오디션 지원 영상을 보낸 후, 곧장 침대 위로 쓰러져 곯아떨어졌다. 심야 라디오에서는 낮은 톤의 여성 진행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데뷔 전의 양조위와 유덕화가 날마다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요? 그들은 지금의 당신과 마찬가지로 아직 자기가 머잖은 미래에 스크린에서 빛나게 되리란 걸 모르고 하루하루를 보냈겠죠. 그렇습니다. 누구나 주인공이 되기 전의 자신을 살고 있었습니다. 내일의 주인공들은 지금 당신처럼 살고 있습니다. 아직 형태가 없는 것, 그것이 얼마나 로맨틱한지 상상해 보세요……

[사진

[이런 걸 먹었어요. 맛있어. 두리안 알아요?] 

장하오였다. 애매한 시간 오전 11시인 걸 보니 영화 촬영이 끝나고 난 분기에는 광고 촬영으로 스케줄을 채우는 듯했다. 성한빈은 지구본 모양을 터치해 중국어 자판을 가볍게 두드렸다. 음식물 쓰레기가 중국어로 뭐더라

얄미운-잘생긴-얼굴을 안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연기 수업 때 포착했던 위엄 있는 대선배의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그런 건지 장하오와 텍스트로 대화하는 건 의외로 편했다. 뜬금없이 자신이 먹은 것들을 찍어 보내기도 했고, 광고 촬영 장소가 얼마나 덥고 불쾌한지, 자기가 읽는 시놉시스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빙빙 바이올리니스트가 세상을 멸망시키는 시놉시스가 있다는 게 믿겨져?-주간 품평회를 열기도 했다. 아침이라면 ‘좋은 아침’이라고 덧붙였고, 밤이라면 ‘굿나잇’이라고 덧붙였다. 가끔 성한빈이 들려주는 왕위완의 우스꽝스러운 잠버릇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哈을 테러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의 연락을 굳이 기다리다 지치는 경우는 없었지만 자꾸 휴대폰에서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은 감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답장만 기다리고 있는 게 싫어서 핸드폰을 멀리 던졌다가, 다시 붙들고 앉았다가,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돌아오기를 몇 번째. 간혹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보면 그 속에는 휴대폰을 품고 답장을 어떻게 보낼지 심사숙고하는 남자가 있었다. 익숙한 얼굴에 낯선 즐거움이 걸려 있었다

대뜸 [형 저 오디션 보러 다녀요]라고 보냈을 땐 불과 4분 만에 칼 답장이 왔다

[내가 말한 대로 했어?] 

[

[그래서 결과는?] 

[아주아주아주 좋은 결과만 있어요

[의외네

[칭찬이야 빈정대는 거야

[네가 보기엔 어떤데?] 

성한빈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화면은 진작에 어두워졌지만 어렴풋이 그 문자를 볼 수 있었다. 그걸 보고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은 이랬다. 그래, 경력 10년 차 배우의 눈에는 의외인 것처럼 보이겠지. 역시 냉정하셔. 장하오는 몽상가가 아니었다. 그렇게 현실적인 사람이 오디션 몇 개 봤다고 배역을 턱턱 따낼 수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是意外。怎么样?너무도 단호하고 칼같아서 성한빈은 나름 철저하게 세운 미래 계획과 과도하게 높은 자존심이 난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장하오를 속일 수는 없다는 거였다. ‘아주아주아주 좋은 결과’라는 건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화샤필름은 꽤 오래 전부터 장하오에게 ‘정통 액션 상업 영화를 찍자’라는 제안을 해 왔다. 장하오가 이 업계에 대해 빠삭하다는 건 틀림이 없지만 그것이 경험과 재능, 그리고 자존심의 거의 유일한 기반이어서, 제작사의 형편없는 안목이나 섬세하지 않은 마케팅에 한숨을 내쉬고 상업 영화만 고집하는 뒤떨어진 예술적 감성을 탄식하며 ‘새로운 시도’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화샤필름 등이 구체적인 제안을 하면 짜증이 난 것처럼 ‘그런 건 어린애나 찍는 거다’하고 냉소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배우가 돈 때문에 상업 영화만 내리 찍으면 어떻게 되는지 열여섯의 자신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투자자를 못 찾아서 엎어지는 영화가 일 년에도 수십 편이나 되었기에 제작사-중국의 제작사는 영화의 제작뿐만 아니라 투자까지 동시에 수행한다-와 장기적이고 안정된 관계를 우선하는 중화권 배우들 사이에서 장하오는 단연 돋보였다

‘오로지 천 감독이 찍자고 해서 찍은 것이며, 다른 의도는 없었다’. ‘결구반복’의 성공에 대해서 장하오는 이렇게 발언했다. 중요한 건 액션이 아니라 감독의 예술 감각, 극의 긴장감, 인간의 깊은 감정을 측면에서 깊이 있게 분석해냈다는 점이라고. 화샤필름이 이 발언을 어떻게 판단할지는 미지수였다. 특히 영업부는 머릿속에 숫자에 대한 의식밖에 없기 때문에 실은 장하오가 주인공인 액션작을 몇 편이나 찍을 것이냐를 둘러싸고 매번 언쟁이 일어나곤 했다. 장하오의 길은 액션영화다, 라고 주장하는 화샤필름과 장하오의 커리어패스를 존중하는 에이전시는 얼마나 열심히 싸워왔는지 대중들은 몰랐다

장하오는 어떤 결심을 한 건지 노선을 갑자기 틀었는데, 이번 차기작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는 실적을 쌓아 두는 것이 화샤필름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에이전시 전 직원의 장래를 위한 일이기도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장하오가 차기작 논의를 위해 화샤필름에 몸소 등장했을 때는 하이뎬구 본사 건물에 축포가 끊이지 않을 기세였다

축포는 오래가지 못했다. 차기작 프로젝트는 ‘잘 팔리는 액션 영화’로 해 달라는 제작사의 요청과 장하오의 노선을 존중하려는 에이전시의 의도가 합쳐져 시작되었고, 시놉시스 선별도 까다롭게 했다. 그런데 그렇게 추진되어온 일을 장하오가 이제와 느닷없이 ‘대역 배우 사용을 중단하겠다’라고 말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유는 단지 ‘싫어졌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러나 화샤필름은 차기작 제작을 강행했다. 영화가 한창 제작되다가 모종의 이유로 중단되면 영업부의 화살은 자기자신에게 돌아갈 터였다. 촬영은 속전속결로 시작되었고, 결국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장하오가 대역 없이 계단을 구르는 장면을 직접 연기해 보려다가 발을 헛디뎌 심하게 넘어진 것이었다

 

“자칫했으면 부러졌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 다리 한쪽이 붕대로 칭칭 감긴 채 1인 병실에 누워 있으면서도 혼자 뭔가 나쁜 징조인 것만 같은 이 불쾌감을 지워버리기 위해 장하오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촬영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의 긴장과는 뭔가 좀 달랐다. 애초에 장하오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촬영장에서 꽁꽁 얼어버린 다른 신인 배우들을 딱하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평온함에 적잖이 의기양양해하기도 했었다

주웨이는 옆에서 누군가와 시끄럽게 통화하고 있었다. 상승 가도를 달리고 있는 주연 배우의 부상 소식에 제작사와 에이전시에게 불티나게 전화가 걸려 온 탓이었다. 네 매니저로서 하는 말이다. 주웨이는 장하오에게 건강은 꼭 챙기라고 여러 차례 당부해 왔다. 운동도 하고, 맨날 밤새지 말고, 다 혼자 떠안으려 하지 말고.... 결국 장하오가 귀찮다는 듯 말을 끊었다. 형, 천 감독님한테 전염이라도 된 거예요? 큰형님-주웨이는 줄곧 천 감독을 ‘큰형님’이라고 불렀다-한테도 연락해야 할 판이다! 장하오가 땡깡을 부린다고!

주웨이는 뜬금없이 상업 액션물을 찍기를 자처하며 화샤필름의 제안을 처음으로 승낙하고 대역배우 없이 찍고 싶다는 장하오의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즉각 알아챘다

그 대역 배우 때문이구나

장하오의 남자관계는 매니저로서 평소에 지근거리에서 함께하면서도 좀체 짐작할 수가 없었지만 그 한국인에 관해서는 금세 눈치를 챘다. 그 뒤부터 장하오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성격이 지독한 스턴트맨을 만났다는 얘기를 꺼내곤 했다. 한국인이 아니고서는 얼른 생각나지 않을 이름이었지만 장하오가 매일 언급했으니 누구라도 감탄사와 함께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장하오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중국어 잘해, 몇 개 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아는 것 같아. 연기도 잘하는 것 같고. 아니, 진짜 연기 말이야. 주웨이는 장하오가 누군가에 대해 그토록 열을 올려 말하는 것을 처음 본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내젓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걔 오디션 보고 다닌다더라. 네가 그 대역 배우랑 소꿉동무가 되었단 말은 못 들었는데. 근데 넌 걜 되게 챙긴다.”

 

반쯤 놀리듯 의중을 떠보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거의 추궁하는 말투가 되어버렸다. 소꿉동무. 이 둘은 서로 꼴도 보기 싫어하는 유형이겠지. 둘이 상극이어서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달려가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고, 기회만 잡으면 상대방 자전거 에어밸브를 뽑아버리는 짓을 하다가 다 크고 난 뒤 돌연 아! 그게 관심과 사랑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유형. 장하오는 그 느닷없음에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역시나 뜨악해하면서 걔는 자기 일밖에 생각을 안 해요, 내가 전부터 그런 줄 뻔히 알았어요, 라고 퉁명스러운 대답을 했다. 그래? 서로 친한 줄 알았는데. 아니, 혹시 그렇다고 해도 나무랄 수는 없어. 다들 그렇잖아? 대역 배우는 대역 배우의 일을, 배우는 배우의 일을 해야지

 

“네가 스턴트까지 하려고 하는 것도 좋은 의도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비즈니스야. 대역이야 다치면 다른 대역을 쓰면 되지만 너는 대체될 수 없는 장하오잖아!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 비판하려는 게 아니고 그게 현실이라는 얘기야. 내가 이런 얘기를 누구보다 현실적인 네게 해야 한다니, 이거 완전 거꾸로잖아!

 

장하오는 미간을 찡그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왼쪽 다리가 찌릿, 거리며 신경을 쿡쿡 건드렸다.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일부러 무시하거나 일부러 신경 쓰고 싶지 않았고, 일부러 냉담하거나 열정적으로 굴기 싫었고, 일부러 재치 있게 굴거나 냉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잘 처리해나가는 것을 생각해야지. 나도 내가 못하는 일은 너에게, 에이전시에 위탁할 때가 있어. 도움받고 싶어하지 않는 너를 나도 잘 알지만… 장하오는 뭔가 얘기하려다가 말이 나오지 않아 결국 고개만 끄덕였다. 입술을 깨물며 걸음을 옮기려는 주웨이를 장하오가 다시 불러 세웠다. 부탁 하나 해도 돼요?

 

 

 

침대 위 휴대폰에서 윙윙거리며 진동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성한빈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장하오의 매니저였다. 장하오가 촬영 중에 다리를 다쳤다며, 최대한 빨리 촬영장 근처 병원으로 와 달라는 거였다

 

‘그냥… 당신이 필요하대요.’

 

터무니없는 이유를 듣고 성한빈의 표정이 굳어졌다. 손에 쥔 시놉시스를 조용히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말해. 얼른 대답하라고. 네가 아무 생각이 없을 리 없어. 걱정이 안 될 리가 없다고. 성한빈은 장하오와 오디션에 관해 번갈아 가며 생각하면서, 스피커에서 침묵만이 흘러나오는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네게 중요한 사람이잖아, 성한빈. 아니야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지나오면서, 마침내 누군가 성한빈에게 확실하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던진 사람은 자신이었고, 하필이면 장하오가 촬영 중에 고집을 부리다 다쳤으며 누구 집 개를 부르듯 자신을 소환시켰단 소식을 들었을 때였으니 참으로 살풍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장하오의 진세미도 아니고. 지금 당장 갈게요, 라고 확신에 가득찬 대답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을 잽싸게 목구멍 뒤로 꿀꺽 삼켰다

 

“제가 오늘 다른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요. 못 간다고 전해주세요.”

 

말을 끝낸 성한빈은 휴대폰을 다시 침대 위로 던졌다. 베개와 부딪치면서 퍽, 하는 소리가 울렸고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성한빈은 그날 오디션을 망쳤다.

 

 

 

너의 엔딩이 되고 싶어서 그래.

 

“화샤필름이 방관낭만2’ 제작한다더라.”

 

몇 달 만에 에이전시 본사에 갔더니 오늘 따라 싸구려 캡슐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제일 좋아하는 코코아맛 캡슐은 동이 난 지 오래였고, 그래서 다른 캡슐을 넣었는데도 커피가 계속 나오질 않았다. 이러다가 캡슐이 곧 커피머신에 먹히겠다 싶어서 캡슐을 빼냈다가 그제야 빈 캡슐 껍질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캡슐을 넣고 에스프레소 샷을 눌렀는데, 샷이 그대로 쭉 바닥으로 흘러버렸다. 컵을 올려놓지 않은 것이다

장하오, 듣고 있어? 어디 정신 팔고 있는 거야? 정말 장하오답지 않은 덜떨어진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주웨이는 두 손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장하오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건성으로 대답했다. 별일 아니에요. 좀 피곤해서 그래요

 

“다리도 거의 다 나았잖아. 액션은 물 건너갔지만… 가볍게 시작해 볼 용기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

 

왼쪽 다리에 영원히 감겨 있을 것만 같던 붕대 없이 걷는 행위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장하오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휴대폰을 꺼냈다. 시간을 확인하다가 그제야 어젯밤에 받은 음성 메시지가 떠올랐다. 익숙하지 않은 건 오랜만에 듣는 그 명랑한-배신감으로 마음 한 켠에 묻어둔-목소리도 있었다. 그 상태로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장하오는 별안간 벌떡 일어나서 주웨이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시작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거예요. 아주 좋은 표현이야. 조용하고 침착한 말투였지만 목소리는 차가운 마룻바닥에 맨발로 내세워진 것처럼 가늘게 떨렸다. 왜? 뭐가 문제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알려준 말이에요. 장하오는 서슴없이 자켓을 챙겨 입었다

 

“화샤필름이랑 얘기해 봐야겠어요.”

 

 

 

초가을의 바람은 그다지 춥지 않았고 미세먼지를 품고 있어 바람이 상쾌하지 않았다. 등 뒤에 펼쳐진 호수는 잔잔했다. 헐벗은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 속에서 느릿느릿 흔들렸다. 드디어 오늘이야, 빙빙! 넌 할 수 있어. 단칸방 안으로 돌진해온 왕위완의 목소리가 성한빈의 머릿속에 쩌렁쩌렁 울렸다. 절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잡생각은 최대한 떨쳐내야 해

화샤필름은 집에서 가까웠다. 도보로 십여 분이면 충분했다. 공기는 신선하고 축축했고, 거리에는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사러 나온 아이와 운동하러 나온 노인이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여느 때처럼 각자 스타일이 다른 영화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잠시 대기하라는 영화사 직원의 말에 성한빈은 주머니에서 낡은 영수증과 구겨진 영화사 명함 사이를 비집고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이 깨진 아이폰XS가 오늘따라 묘하게 무거웠다

처음 화샤필름의 전화를 받았을 땐 얼떨떨했던 것 같다. 그날은 최종 오디션을 보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뒤 화샤필름에 제출했던 오디션 영상을 하루 종일 돌려 본 날이기도 했다. 진짜로 꿈을 꾸는 것처럼, 앞뒤 생각하지도 않고 소심하게 벌벌 떨지도 않고 겹겹의 장애물을 넘을 필요도 없이, 최초로, 처음으로, 가장 존경하는 링 감독의 ‘방관낭만2’, 그 대작의 주인공 링허 역을 위한 최종 후보가 되었다

 

‘여보세요, 장하오입니다. 나 정말 바쁜 사람이니까 메시지 남겨 주세요.’

 

떨어지는 게 익숙하다 보니 그때쯤은 혼돈스러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이기도 했었다. 기약 없는 배우 지망생 생활을 계속할지, 그냥 다시 스턴트를 시작할지. 언젠가 질식할 듯한 하루에 지쳐서 몇 차례 장하오를 바이두에 검색했었다.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푸젠에서 온 신예 소년. 이 아이는 열여섯 살,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구에게서도-심지어 영화계에서 이름을 날린 부모님도-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는 인터뷰 기사도 있었다. 예측하기 어려우며,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끈질기게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떠났다고. 성한빈은 그 소년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기개만으로 성립된 사람의 얼굴이었다. 시간도, 실수도, 선물도, 낭만도 없었다. ‘기개만으로 성립된 얼굴, 성한빈은 생각했다. 그때마다 마치 제가 모르는 장하오 내면의 서랍을 몰래 훔쳐보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검색된 페이지를 닫아버리곤 했다.

너무 힘들어서 정신 차리라고 잔소리라도 듣고 싶은 심정으로 연태구냥의 힘을 빌려 장하오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었다. 난 아직도 형한테 끌려다니네. 줄곧 그래왔지만 말이야. 매일매일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맞고 틀리고를 계산하는 건 제 몫이 아니라 알코올의 몫이었다. 열 번을 넘게 걸어도 받질 않으니, 그냥 화면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을 허쥔샹의 톤으로 린신루에게 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는데

 

‘다른 건 아니고 그냥…. 오디션을 보기 시작하면서 많은 기대를 하게 됐어. 어쩌면 형을 만나고 나서 모든 것에 기대를 가졌는지도 모르지.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기대가 늘어나면 느낌이 사뭇 달라져. 두렵기도 하고, 형이랑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면서 산책하고 싶기도 해. 사람들은 왜 항상 끝에서 시작을 그리워하는 걸까? 시작할 땐 끝을 염두에 두지 않는데. 심지어 영화를 볼 때도 그렇잖아. 저 세계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아서, 영화의 시작에선 끝을 생각하지 않으며 보잖아. 언젠가 반드시 끝나는 영화인데 말이야.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형은 나에게 시작할 용기를 줬다는 거야.’

 

이걸 보낼까 말까 하다가, 이런 제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휴대폰을 멀리 던졌다가, 다시 붙들고 앉았다가,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났다

그랬었다

성한빈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알림창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잠깐만, 내가 보냈었나

 

 

 

성한빈은 어깨와 손가락 끝이 떨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긴장하여 90도 인사를 하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안내하는 스태프가 의자를 권하고 앉기 전에 또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회의실은 난방을 틀어 놓았고 앉은 자리가 전면 유리 창가인 데다 그날은 햇살마저 강해서 청자켓을 입고 있으니 땀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 거기다 긴장까지 해서 목이 타들어갔다

링 감독은 감독 소리가 절로 나오는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다. 길거리에 돌아다닐 것 같은 중국인 아저씨 특유의 푸근한 인상과는 다르게 눈매는 날카롭고 목소리도 배우처럼 중저음이었다. 준비한 대사와 연기를 실수없이 해냈는데도 저 카리스마가 가득한 눈에게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감독님은 대체 무슨 말을 할 작정인가, 하는 긴장된 표정으로 성한빈은 링 감독을 응시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졌다. 그것을 바지 무릎에 슬쩍 닦고 있을 때였다

 

“배우란 직업이 엄청나게 늘어난 거 알고 있나요?”

 

링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성한빈은 작은 목소리로 ?’하고 말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상 현상이에요. 어디를 가도 배우들 천지고 그 대부분은 얼굴도 모르는 배우들입니다. 만들어지는 영화 편수는 옛날과 별 차이 없는데, 배우 숫자는 아마 천 배 정도 늘어났을 겁니다.”

 

눈앞에 쌓인 백 명분의 이력서를 보며 생각했어요.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얼마나 차별적이에요. 5백 명을 넘는 지원이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눈에 띄는’ 백 명분 정보가 테이블에 올려져 있어요. 그 외 4백 명은 라면 상자에 들어간 채 방구석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백 명 가운데 또 30명을 선별했고, 최종적으로 두 명을 선별했습니다. 선별…. 링 감독은 제 앞에 놓인 서류를 가만히 넘겨보았다. 손으로 꾹꾹 눌러담은 ‘成韓彬’이라는 한자가 얼핏 보였다

 

“대역에 관해서요.”

“…네.”

“이력서에는 어떤 영화를 작업했는지 쓰지 않았던데.”

“그렇습니다.”

“왜냐고는 묻지 않을게요. 줄곧 해 온 것을 포기하는 건 고통스럽겠죠? 아, 이 화제가 싫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한빈 씨 같은 배우 생활을 해 본 적 없는 지원자도 많았어요.”

 

자기는 배우가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배우야말로 자기 재능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는 배우가 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하고는 끝에는 반드시 그러니 기회를 주십시오, 하고 끝을 맺었어요. 배우를 해 본 적도 없는데 어째서 그렇게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고 의아했죠. 배우 활동을 동경한다기보다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하고 싶다는 것뿐이지 않을까

 

“그런데 한빈 씨는 동경하는 것 같아요. 영화배우라는 것을.”

 

그야 동경하는 영화배우가 있으니까. 성한빈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그런 사람이 한빈 씨밖에 없었으면 나는 한빈 씨를 캐스팅했을 거예요. 링 감독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하는 스태프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머릿속이 웅, 하고 울리며 뒤죽박죽이 되었다. 감독이 ‘액션!’이라고 외치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소음이 성큼 멀어졌다

문을 연 사람은 장하오였다

 

 

 

하얗고 살풍경한 회의실 벽을 따라 장하오가 방을 가로질러 테이블 맞은편에 서서 가볍게 인사하고 의자에 앉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지켜봤을까, 장하오는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주시자를 바라보았다. 성한빈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귀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거울에 비춰보지 않아도 무슨 색인지 알 수 있었다. 링 감독은 두 남자의 일련의-수상한-행동에 눈썹을 올렸다.

 

“두 사람은 어떻게 아는 사이지?”

“‘결구반복’에서 제 대역이었습니다.”

 

단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장하오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긴장한 듯 살짝 떨렸다. 그건 이해가 갔다. 영화계 거장에게 평가받는 자리니까. 한빈 씨와 같이 호흡을 맞춘 적이 있죠.

링 감독은 정말 놀랍다면서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했다. 불과 1년 만에 배우와 스턴트맨 사이에서 주연을 다투는 경쟁자 관계가 됐군요. 한 가지 제안을 하지. 두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링 감독의 제안은 제 앞에서 서로 대사를 주고받아 보라는 것이었다

장하오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성한빈을 흘긋 봤다. 그 작은 눈빛에는 복잡한, 부드러운 백 마디 말들이 담겨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느릿느릿 고개를 앞으로 돌렸고, ‘방관낭만’의 강가 재회 장면을 재연해 보고 싶습니다, 라고 선전포고해 버렸다

 

“내 앞에서 내 영화를? 자신 있나?”

“네, 자신 있습니다.”

 

성한빈은 한 5초가 지나서야 선전포고의 뜻을 알아차리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장하오를 바라보았다. 전설의 감독님 앞에서 전설의 장면을 연기하자고? 눈빛으로 텔레파시를 보내 봤지만 장하오의 시선은 확신에 담긴 채 여전히 링 감독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 요지부동은 ‘너도 자신 있잖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시작의 의미로 장하오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린신루를 자신의 안으로 소환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성한빈은 좀처럼 가만있지 못하는 장하오의 손가락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건 장하오의 손가락이 아니었다. 너의 공백을 미루어 봤을 때, 넌 사랑에 빠진 거지, 사랑을 했다고는 볼 수 없어. 회의실은 순식간에 강가의 습한 공기로 가득 찼다

 

“사랑에 빠지는 거랑 사랑을 하는 건 달라. 물론 사랑을 하려면 일단 사랑에 빠져야겠지.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을 하는 게 같은 건 아니야. 허쥔샹, 말해 봐. 너 3년동안 내 생각 했지?”

 

방관낭만에서 허쥔샹은 이별의 시간 동안 계속 린신루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리의 이별이 정당한지 반성해 보라고. 너의 사랑을 증명해 보라고. 그러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린신루가 3년 만에 재회한 허쥔샹의 앞에서 학생이 선생을 가르치듯 사랑의 정의를 논하고 있으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날 수밖에

 

“린신루, 넌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해?”

 

성한빈은 목소리가 더 이상 제 것 같지 않음을 느꼈다. 절박한 악기 연주자처럼, 목소리에 격한 감정이 실렸다. 넌? 넌 도대체 뭔데 날 안 찾아왔어? 넌 도대체 뭔데 나 찾아와서 달래지도 않았어? 넌 도대체 뭔데 내가 헤어지자 한다고 정말 헤어져? 네가 뭔데 나보고 널 생각했냐고 물어? 넌 어떻게 된 애가 아무것도 몰라? 허쥔샹은 목에 핏대를 돋우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물어봐야 했던 수많은 질문들을 쏟아냈다

얼마가 지났는지도 모르겠을 즈음, 린신루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한숨이 얼마나 길던지. 그러고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말했다. 네가 보기엔 내가 괜히 억지 부리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넌 몰라. 네가 절대로 알 수 없는 일들도 많아. 어떤 느낌들은 말로 분명하게 표현할 필요도 없다고. 난 그냥 알아. 꼭 내가 분명하게 말로 해 줘야겠어무슨 결심을 한 것 같기도 하고, 또 될 대로 되라는 심정 같기도 했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가장 단정하게 힘주어서. 그건 장하오의 대사였다

 

“전에 다치고 너무 힘들 때 그런 생각을 했어. 허쥔샹이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허쥔샹을 보고 있으면 괜찮아지겠구나, 별 걱정할 것도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 텐데 싶더라.”

“….”

“널 걱정했어.”

 

허쥔샹과 린신루는 마치 선로를 달리는 기차와 같다. 곧장 뻗어나간 철도의 선로는 저 멀리의 소실점에서 서로 만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을 하나둘 지나가도 풍경은 여전히 똑같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 평행하는 두 줄기 레일은 결코 교차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달라서 헤어졌지만, 서로를 완전히 떠나보내도 무언가는 남았다. 그것을 정성껏 보살피기도 하고, 괴로워 외면하기도 했다. 때로는 그것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는 한참을 방황하기도 했다. 설령 말로 사랑을 표현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금 이 순간 무엇이든 말해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목소리가 갈라지기 전에, 성한빈은 가까스로 다음 대사를 읽었다

 

“나도 걱정했어. …너를.”

 

 

 

긴장과 혼돈의 오디션이 끝난 뒤, 어쩐 일인지 화샤필름에서 가까운 양꼬치 집 음식이 너무 먹고 싶었다. 5분 만에 한 그릇의 꼬치를 거덜낸 성한빈은 식당 야외 의자에 털썩 앉았다. 10분쯤 기다리자 장하오가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죽지 않아서 실망이라도 했어?”

 

성한빈의 앞에 선 장하오는 팔짱을 풀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선, 오른발을 중심으로 짝다리를 짚었다. 다친 다리가 왼쪽이었구나. 성한빈은 눈은 장하오의 아래에서 위로 올라왔다

장하오는 이 일진 사나운 식당에 뭉개고 앉아 무제한으로 리필되는 인스턴트 밀크티나 마시자고 제안했다. 둘 다 계속 조용히 밀크티만 마셨다. 그러나 종업원이 밀크티를 다섯 번째 리필해서 가져다준 뒤에는 둘 다 마실 엄두도 내지 못했다

 

“혹시 에이전시 사람들한테 괴롭힘 당하는 거 아니지? 연기할 때 쌓인 게 많아 보이던데.”

“그냥... 분출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저 에이전시 없어요.”

“못 본 사이에 많이 인색해지셨네.”

“여전하시고요, 형은.”

“일단 내가 그 동안 어떻게 고생고생해 가며 지냈는지, 그것부터 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나?”

 

창밖에서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색을 바라보며 성한빈은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장하오는 곁눈질로 성한빈을 힐끗 봤다. 그래서, 그날 왜 안 왔어

 

“그날 병문안 못 간 건 미안해. 하지만 정말로 일이 있었어. 그날도 오디션 때문에....

“한빈아, 나 다리가 또 쑤시는 느낌이야.”

“진짜야. 혼란스러웠어서.”

 

장하오는 계속 조용히 있는 성한빈이 반성이라도 하는 줄 알고 승리의 기세를 몰아 더 고삐를 죄었다. 의심할 게 뭐가 있어? 어차피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난 그저 네 소식이 궁금했을 뿐이야. 성한빈은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을 놔주었다. 그래, 형 입장에서 보면 종적이 묘연했던 사람은 나였겠지

 

“형한테 연락을 안 한 건, 내가 마음을 쓰지 않아도 형은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형이 알아서 해낼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란 말이야.”

“날 내팽개쳤으면서 말만 뻔드르르하게 하고. 무슨 일이든 다 지 말이 옳다 이거지. 누구한테 배운 버릇인지 정말 모르겠어.”

 

다 형한테 배운 건데.... 성한빈이 조용히 중얼거리자 장하오는 고개를 저었다. 한나절을 싸워도 여기서 한 발치도 못 나가겠다. 됐다, 됐어. 우리 이 얘기 그만하고 좀 진지한 얘기나 하자. 둘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침묵 속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표정이 별론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얘기하고 싶어?”

“괜찮아, 형. 버틸 만해.”

“있잖아, 나랑 있을 땐 괜찮은 척 안 해도 돼. 그냥 힘든 얘기 다 해.”

 

너는 왜 이렇게 너에게 엄격한 거야. 네가 널 아끼는 마음보다 내가 널 아끼는 마음이 더 크겠어. 걱정이 담긴 장하오의 목소리를 들으며 성한빈은 조용히 침을 삼켰다. 설명하고 싶다, 정말로. 하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원점으로 돌아가긴 싫었다

 

“더 빨리 알았으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힘들지 않아도 됐을 거야.”

 

장하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링 감독님 설득하려고 감독님 10년 단골 카페에까지 찾아갔다니까. 한빈 시간 헛되이 보내지 않게 하려고…

 

“뭐라고?”

 

성한빈은 장하오의 폭탄 고백을 머릿속으로 훑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그날 밤 전화한 거 아니었어? 내 도움이 필요해서? 내게 기대고 싶어서?”

 

고요하면서도 기이한 분위기가 둘 사이에 가득 퍼졌다. 정말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내 말은, 넓게 생각하라는 거야. 아니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 장하오는 한술 더 뜨듯 밀크티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한빈 꿈을 펼쳤으면 좋겠어서 그런 거야. 네가 원했던 일이잖아.”

“하하하.”

 

정말로 내 힘으로 얻은 기회가 아니라고? 장하오의 입김이 없었다면 난 후보에도 들지 못했을 거라고? 정말로? 조금도? 장하오의 말을 자세히 되감아 곰곰이 생각해 본 바, 정말 그게 사실인 듯했다

장하오는 뒤를 졸졸 따라가며 물었다. 한빈, 화났어? 빙빙, 어디 가? 성한빈은 손을 휘휘 저었다.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화는 안 났지만 형 체면은 세워 줄게요. 그래, 열받아서 죽을 것 같아.”

“내 체면을 세워 준다고?”

“나 열받게 하려는 게 형 목적 아니에요?”

“누가 그래?!

“다쳐서 내가 필요하다느니 뭐니 병원으로 부른 것도, 다 그런 거였어, 형?”

“….”

“나는 늘 거기에 있는 거지? 형은 자유롭고 존경받으며 사랑받지만 나는 그렇지 않고 늘 제자리니까. 언제 어디서든 아래에서 형을 올려다보고 있으니까 딱한 마음이 들었어? 그래! 전화한 것도 힘들어서 그랬어. 그 빌어먹을 순간에도 형이 생각났어! 기분 좋아? 내 앞에서 생색 낼 수 있으니까? 날 아끼는 건 정말 아껴서야, 아니면 과시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직접 말한 문장들이었지만 그런 문장들 속에서 약간의 폐소공포가 느껴졌다. 아마도 그런 질식감 때문에 이렇게 숨을 헐떡이고 말을 삼키게 되었다. 한 사람은 다가가고, 한 사람은 물러났다. 성한빈은 그렇게 거리를 두고 섰다. 장하오가 다가서지 못하게 미심쩍어하며 팔짱을 끼고서. 나르시시스트의 손은 허공에 뻗은 채, 멈춰져 있었다. 면전에 한국어로 욕이란 욕은 다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도 바보, 멍청이, 나쁜놈, 개새끼, 재수탱이 같은 말을 되풀이한 것 같다. 그러나 성한빈이 하는 한국어들은 물 새는 구명보트처럼 가라앉고 말았다. 장하오는 성한빈의 한국어를 곱씹다가, 성한빈이 분노의 눈물을 훔치며 뒤로 돌았을 때 그것이 안 좋은 뜻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성한빈!

 

성한빈은 멈추지 않았다

 

“성한빈, 한빈아.”

 

성한빈은 뛰었다

 

“빙빙... 빙빙! 너 여기서 가 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나쁜놈. 장하오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성한빈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시멘트길을 성큼성큼 내려갈 때도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한빈 꿈을 펼쳤으면 좋겠어서 그런 거야.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이렇게나 부족한가? 눈속임 없이도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장하오가 모를 리가 없는데. 언젠가 같은 자리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단칸방 집 불빛이 보일 때 빗줄기가 쏟아졌으니 현관에 도착할 즈음이면 흠뻑 젖을 터였다. 왕위완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분명 오디션 어떻게 봤냐고 물어볼 텐데. ‘방관낭만2’ 주인공의 최종 후보 중 한 명이 장하오였고, 내가 최종 후보가 된 것도 결국은 장하오 때문이었다고. 허무했다고. 장하오를 미워하고 싶다고. 베이징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꼬질한 어린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동정의 말을 던지거나 돈을 쥐어주는 생색내기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성한빈 배우님, 영화 ‘방관낭만2’ 캐스팅 관련하여 말씀드립니다.] 

성한빈의 스크린 데뷔가 확정된 순간은 시작이라는 단어와 영 어울리지 않았다

 

 

 

넌 나의 시작이야.

 

우리의 마음속에는 육체와의 경계쯤에 가연성이 높은 부분이 있다.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그 한끝에 불이 붙으면 그것이 불길처럼 번져서 손을 댈 수 없게 되고 만다. 그 불길에 상대의 마음이 만나 불타버리면 두 사람은 단지 고통에서 달아나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원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방관낭만2’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는 몽환적인 링허의 내레이션이었습니다. 우리의 링허, 대륙의 첫사랑, 떠오르는 신예 배우, 성한빈 씨를 모시도록 하죠!

 

11월인데도 항구 도시 특유의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2024년 금계상도 역시 샤먼에서 열렸고, 벌써 올해로 61회를 맞이했다. 5일간의 영화제 일정 중 첫째 날인데도 천여 명의 영화 관계자들과 배우들이 도시에 모여들어 레드카펫을 더 뜨겁게 달구었다

성한빈 씨, 여기요! 여기 봐 주세요! 찰칵찰칵, 하는 셔터 소리가 이어지며 환호와 질문 세례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성한빈은 오른손과 오른발을 동시에 움직이며 어색하게 포즈를 취했다. 인터뷰 진행자는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오늘 아주 멋진 쓰리피스수트를 입으셨네요. 올해 신인상 후보이신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우선 너무 영광이고, 너무나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 참여한 모든 분들, 특히 링 감독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성한빈 씨에게 데뷔작 ‘방관낭만2’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하시겠어요?”

“음… 이거 어려운 질문이네요, 하하.”

 

성장통이 중국어로 뭐더라

 

 

 

성한빈은 시상식 홀을 둘러보았다. 천자에 드리운 대형 크리스탈 조명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조명 아래에서는 수많은 배우들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샴페인 빛깔 테이블보가 깔린 기다란 테이블 위에는 눈을 즐겁게 만드는 생화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빙빙 시상식 파트너 되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신인상 꼭 타길 기도하고 있을게! - 너의 동반자 팅팅

너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성한빈은 스크린이 꺼질 때까지 화면을 바라보았다. 상대 역이었던 메이팅은 성한빈처럼 무명의 여배우였는데 단정한 얼굴, 대륙 어디에라도 피어 있을 꽃처럼 동행하는 단짝 같은 매력이 있었다. 비어 있는 옆자리가 괜히 커 보였다

내가 금계상에 와 있다니!

지난 1년간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지 않아서 맨몸으로 부딪혔다. 메이크업도 스타일링도 심지어 운전도 혼자서 했다. 최고는 아니지만 괜찮은 에이전시에도 들어갔다. 성장하는 동료와 자신을 비교하며 채찍질했다. 영화계에서 촬영 현장 변수에 따라 유연하게 연출을 수정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완벽주의자에겐 그런 게 용납되지 않았다. 링 감독은 쉼표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뉴스 대본처럼 치밀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조명, 카메라, 세트, 소도구 등 거의 모든 영역을 직접 컨트롤했다. 그런 면에서는 성한빈과 잘 맞는 유형의 감독이었다

성장통을 이길 방법은 영화에 집중하는 일뿐이었다. 지칠 법도 한데, 아무리 그래도 로봇도 아니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일만 하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더 빨리 커리어를 쌓고 싶었다. 특히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하고 싶었다. 마음이 밉게도 급했다. 아마도 목표지점이 너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시작이 곧 나의 엔딩을 결정하니까

시작이란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려고 하자 거기에는 아무래도 어떤 남자의 얼굴이 언뜻언뜻 스쳐갔다. 아, 여기 푸젠이지. 그렇게 화를 내버리고 못 본 지도 1년이 넘었다. 화샤필름을 오고 가며 마주칠 법도 했는데 그런 적도 없었다. 활동 중단했대. 오랜 휴가를 갔대. 돈이 너무 많아서 광고도 안 찍는 거래. 다친 다리 때문이래. 들리는 말은 많았지만 모두 틀렸다는 걸 성한빈은 알았다. 그땐 미친 듯이 화가 났는데, 몸이 멀어지고 소식도 모르니 열도 감정도 자연스럽게 소강되어버렸다. 그래서일까, 그 남자의 모습도 이제는 어쩐지 방관낭만속의 한 장면처럼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금계상의 시작은 역시나 신인상이었다. 시상 개최 음악이 홀을 뒤흔들자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생수 뚜껑을 따서 단숨에 반을 들이켰더니 텅 비었던 위가 물주머니처럼 출렁거렸다.

 

“올해의 신인상 시상자를 소개합니다!

 

조명 불빛에 눈이 부셔서 성한빈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언제든 어디든 그곳에 있을 것처럼 하늘의 빛은 질 줄을 몰랐다. 조명이 더 환해지고, 더 눈이 부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한 불빛에 애써 적응하며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놓는데, 강렬한 불빛 속에 무대 위에 선 한 남자가 보였다

허공에 떠 있는 몇 십만 개의 조각들이 어느 순간 돌연 기적적으로 짜 맞춰져 하나의 도형을 만드는 퍼즐, 좀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뭔가 이상하다, 하는 이성의 후렴이 들렸다. 심장은 쿵쿵대며 음악처럼 귓속에까지 들려왔다. 실제로 음악이 들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요란한 시상식 조명과 금빛 장식들을 배경으로 장승같이 서 있는 하얀 실루엣. 몸에 딱 맞게 재단한 흰 연미복 차림에 리본 넥타이를 맨 모습이 잔인할 정도로 멋졌고, 이마를 덮는 풍성한 금발은 손에 든 트로피처럼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시상자치고는 이 무대의 주인공 같은 자태를 뽐냈다.

오랜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고향에 온 기분이군요. 실제로 제가 이곳 푸젠 출신이기도 하고요, 하하. 남자는 가볍게 웃으며 트로피를 힐끔 쳐다본 뒤, 금빛 봉투를 열어 신인상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좌석 한 곳에 시선을 던졌다. 나 지금 널 찾고 있어, 하는 강렬한 눈빛으로. 그리고 생각에 잠긴 표정 그대로, 마이크에 입을 갖다대었다.

 

“제가 신인일 때는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뛰어들고 돌진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어요. 그때는 눈이 멀고 귀가 먹어 버린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주 가끔 그 시절 속의 나와 마주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기도 해요. 이 배우에게서는 제가 보였어요. 그래서 예전의 저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했던 것 같아요.”

 

눈이 마주쳤다.

 

“성한빈, 축하드립니다.”

 

한빈 군, 축하해! 빙빙, 넌 될 줄 알았어. 어느새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성한빈은 3초 동안 상황을 되짚어 보려 했지만 막상 자신이 신인상을 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간단한 중국어 감사 인사조차도 생각이 안 났다. 무대 위에 서 있는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할 뿐이었다

물리적으로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가운데서 따가운 감정이 복잡하게 부풀려졌다. 날카로운 콧대며 짙은 눈썹이 가까워졌다. 고개를 살짝 들어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거리, 마음이 흔들리기 직전의 시간. 그 시간은 마치 경계선을 넘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생각의 능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았다. 어떻게 금빛 트로피와 형형색색의 꽃다발이 손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꽃잎 한가운데, 무언가 파묻혀 있었다. 무언가 얇고, 무언가 가벼운…

성한빈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남자는 살짝 성한빈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축하해, 빙빙.”

 

남자가 작게 속삭였다. 성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의 꽃다발을 꼭 껴안았다. 줄기의 날카로운 가장자리가 옷을 찔러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강 건너편을 바라보자 황갈색 석양이 튜브에서 짜낸 물감처럼 강과 하늘이 맞닿은 선을 타고 번지고 있었다. 몇 분 동안 하늘은 빛이 사라질 때까지 어두운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푸젠성 남부 하늘에 뜬 기름에 젖은 듯한 구름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결국 완벽한 검은색의 밤이 되었다.

방관낭만2. 아침 5 55분. 예매자 章昊. 꽃다발 한가운데 꽂혀 있던 건 영화 티켓이었다. 코팅까지 해서는…. 성한빈은 티켓을 수트 안주머니에 넣고 난간에 기대 스쳐지나가는 강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서서 강물이 철썩거리는 소리와 불꽃놀이 폭죽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배우님, 신인상 축하합니다.”

 

고개를 돌아보니 장하오가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있었다. 90도 인사라니 너무하잖아. 그걸 받아줄 생각은 없었는데. 성한빈은 입술을 깨물며 쓴웃음을 지었다. 화려한 꽃 필요없지? 꽃이 여기 있잖아. 꽃 다 시들겠어요, 형. 울어서인지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뭐라도 좀 말해 봐요. 조용한데 나만 울고 있으니까 분위기가 안 나

 

“나 요즘 되게 엉망으로 서로를 망치면서 사랑하는 시놉시스 읽어.”

 

흘러나온 장하오의 말은 생뚱맞았다. 성한빈은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분위기가 더더욱 맞지 않았다. 장하오는 담담하게 웃었다

 

“위로가 돼. 나만 망친 게 아니구나, 하고.”

“대부분은 실패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성공하는 남자의 이야기 같은 자전 영화가 나오는 거겠지?”

“그럼. 언젠가 성공할 거라고 믿고 싶으니까.”

“엔딩 크레딧 첫 번째에 네 이름이 있는 것까지 봤어.”

 

오랜만인데 오랜만이 아닌 느낌이야. 바이두에 네 얼굴 천지더라. 장하오의 말로는 개봉날 예매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영화 티켓이 이렇게 단조롭게 생긴지도 몰랐고, 베이징의 팝콘이 이렇게 맛없는 줄 몰랐다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영화를 보는 대륙의 인기 배우가 도저히 상상되지는 않았지만 진심인 것 같았다.

 

형, 오랜만이에요. 잘생겨졌네요.”

너야말로 여전히잠시만, 그럼 내가 예전에는 못생겼었다는 거야?”

형을 미워하긴 했지만, 형이 미남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적은 없는걸요.”

 

장하오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곧 과거에 대한 생각으로 빠진 듯했다. 가만히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던 성한빈이 물었다. 그거 진심이에요? 어떤 게? 아까 시상식에서 했던 말. 장하오가 돌연 고개를 숙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나 미워?”

 

성한빈은 낮게 응, 소리를 냈다. 어떡해? 나 이제 참을성도 없고 넓은 아량도 없는데. 장하오는 진지하게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척하다가, 잠시 뒤에야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자. 네가 잘생기고 먹성 좋고 미운 나 참아주는 대신, 나는 참을성도 없고 넓은 아량도 없는 너 참아주는 걸로.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나 없는 동안 영화 공부 많이 했나 보네? 형, 이거 방관낭만2’ 대사잖아!

 

우린 항상 대사로 하고 싶은 말을 말하잖아.”

“….”

하지만 나의 영화는 성한빈인걸. ‘방관낭만2’의 링허가 아니라.”

 

장하오가 손을 잡아당겼다. 어둠 속이라 성한빈도 장하오의 표정이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달빛에 반사되어 넘실대는 강물의 물결이 잠시 얼굴을 비춰줄 뿐. 그러나 저 눈에는 그 말의 의미를 성한빈이 잘못 파악하지 않을 만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성한빈은 장하오를 기다리지 않았다. 찾고 싶었던 길이 어쩌면 장하오와 마찬가지로 도움을 받지 않는 길이었는지도 몰랐다. 또 어쩌면 장하오와는 하나도 닮지 않은 길을 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고.... 그런 뒤 그 길을 오래도록 걸으며 싶었다. 장하오를 생각했듯 아낌없이 그 길을 사랑하면서. 그런데 기다리지 않았던 그 장하오가 우여곡절 끝에 또다시 성한빈의 앞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장하오는 성한빈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성한빈은 오래도록 말하지 않았다. ‘방관낭만2’ 촬영을 끝내면 홀가분할 거라고, 모든 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사나운 불길을 끈 것처럼.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장하오가 없으니 그 불길이 여전히 피어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성한빈은 배우 인생은 막힘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장하오는 그런 성한빈의, 이제 불타오르기 쉬운 부분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마음속에서 갑작스럽게 불타오르기 시작해 그 기세를 더해가는 불길이었다. 어떻게 이 불길을 끌 수 있을까? 답을 얻기 위해 장하오라는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다듬고, 영화처럼 후반 편집을 하고, 화면 각도를 조정했으며, 조명을 변화시키고, 배경음악을 깔았다

 

그래서.”

 

장하오가 웃었다.

 

“네 영화가 좋아. 아직은, 엔딩을 보고 싶지 않아.”

 

그 생각이 영화처럼 스크린에 투영되고 있나 보다. 장하오도 그 영화를 다 보고 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걸 보면 알았다

답이란 게 나올 리 없다. 아직 형과 나에게 엔딩이란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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