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문
403
모티브: 영화 ‘곡성’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 1:9)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욥 1:10)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욥 1:11)
이천 명이 거주하는 곡성군 덕곡면. 정기적으로 알코올 중독 캠페인을 장려하는 보건소 옆에는 주조장이있다. 이 무슨 모순이냐 하겠지만 세상일이란 원체 모순의 변주 덩어리다. 또 잡신 모시는 성한빈의 집의 건너편엔 교회가 있으며 산자락 따라 올라가면 이끼 낀 불좌상이 앉아있다. 엄혹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저마다 빽 하나씩 두고 살아야 했다. 뭐라도 믿지 않으면 손해 보는 세상. 언제까지 혈혈단신으로 맞짱뜰 텐가.
아무리 그래도 목사와 입씨름하는 신들린 남자라니.
"이래서 외부인 들이지 말랬던 거신디 어린노무자슥이 따박따박 말대꾸랑게."
실로 은혜 넘치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목사가 성한빈을 한대 쥐어박을 기세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령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주먹은 을용타를 날리기 일보 직전이다. 한빈의 관자놀이로 땀방울이 비죽 흐른다. 인상을 팩 구기고 상대를 노려본다. 땀에 젖은 등판에 상의가 질척질척 달라붙는다.
맴. 맴. 맴.
매미가 가열차게 운다. 일장 연설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일순 음소거된다. 한빈이 손바닥으로 차양을 만들고는 넋을 놓는다. 믿음만 넘쳐나지 구원받는 이 하나 없는 마을엔 생기가 돌지 않는다. 지구 위 모든 생물을 쪄 죽일 듯 열기를 내뿜는 태양도 밉기만 했다.
지난주에는 기약 없이 이어지는 무더위에 일소 현상 막겠다고 과수원에서 땀 빼던 성길 삼촌네가 단체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 비는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농작물은 뜨거운 태양에 말라 죽어간다.
와중에 오늘은 장하오가 난데없이 덕곡교회 외벽 콘크리트를 차로 들이받았다.
여파가 어찌나 셌는지 바퀴가 올라탄 화단 석재는 물론이고 십자가 모양으로 내어둔 1층 유리창이 터지는 소리를 내며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주차를 하던 도중에 엑셀과 브레이크를 헷갈렸다고는 하나 그는 양발운전 따위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못된 마음을 먹고 진입했다고밖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아. 그러니까. 사고였다잖아요."
목사가 수리 금액이 얼마고 보험이 어쩌고 침 튀겨가며 설교하는 내내 잠자코 있던 한빈이 짜증을 냈다. 하지만 중년 남성이란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 주는 핀잔에 주눅 들지 않는 특성을 지녔지. 목사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가슴을 활짝 내밀었다.
"느자구없는 새끼 보소. 하이고. 있냐. 니 그 소문 도는 거 그동안 나가 막아준 건 모르제?"
"뭐가요."
"너는 니만 잘살면 돼야? 그라제? 니 잡신한테 마을 팔아먹고. 아이고. 주여."
"제가 언제요."
마을에 개소문 떠도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단지 상대할 가치가 없어서 내버려 두었던 거다. 미용실 진희 누나가 걱정 하던 게 이런 거였군. 한빈아 너 계속 서울에 있었어야 했어. 진희는 습진이 일어난 손으로 한빈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었다. 성한빈은 주먹 쥐고 머리통을 떨었다. 장 보러 갈 때마다 수군대던 그림자들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등골이 오싹하다.
"니만 몰라야. 여기 저 사람들 싹 다 그런당께. 그게 아니고서야 니가 마을에 지랄날 거를 우째 알고 딱 고 시기에 서울로 가있었냔 말이여. 시방. 신병 고친 것도 갔다와서부터 아니여. 워따 하나도 안신기해부러야."
"..."
이건 시험이다.
한빈은 할 말을 잃고 손등으로 흐르는 땀만 훔쳤다. 해결해줄 수 없는 원망이 먹구름처럼 모여들어 마을 위를 뒤덮었다.
기실 재앙엔 제물이 필요한 법이다.
성한빈이 없던 몇 달간 마을엔 참사가 일었다. 인삼 재배하던 조 씨네가 초상을 치렀고 경찰 하던 종구 삼촌네도 일가족 줄줄이 황천길을 건넜단 말이다. 경찰은 원인을 집단 야생 버섯 중독으로 결론지었다. 두드러기가 난 것도, 환각을 보고 칼부림을 낸 것도 전부 그 부작용 때문이라 규명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 누구도 고작 버섯 하나로 쑥대밭이 되었다고는 믿지 않았다.
모두 숨죽여 각자의 종교에 귀의했다. 염주를 비벼대든 십자가 앞에서 울부짖든 노란 부적을 받아와 문설주에 바르든 갖은 노력을 들였다. 그럼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과 흉작이 이어졌다. 뒤이어 나타난 메뚜기떼가 작물을 갉아먹었다.
사지로 내몰린 이들은 호시탐탐 제물로 바칠 희생양을 고르며 이를 갈았다. 도끼눈 뜨고 밤잠 설친 사람들의 앞에 나타난 건 성씨네 외손주였다. 신병 때문에 서울로 날랐던 성한빈이 캐리어 끌고 돌아왔다더라. 입에서 입으로 가는 말들이 소용돌이쳤다. 소문은 원망을 먹고 덩치를 키웠다.
"마을 사람들 목숨 제물로 바친 거자네. 니 땜에 초상 치른 집만 몇이여."
"아니에요. 내가 믿는 신은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고 그런 분 아니에요."
빠아악.
한빈의 말이 끝맺음과 동시에 요란한 소리가 울린다. 손날을 세우고 오른팔로 연설하던 목사가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굽혔다.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돌무더기가 팝콘처럼 튄다. 철제 배트가 장렬히 담벼락을 강타하는 중이었다.
멀쩡한 차 갖다 박아놓고 뻔뻔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장하오는 마치 야구선수라도 된 듯이 배트를 힘껏 휘둘렀다. 대화 중인 이들을 빤히 쳐다본다. 우두커니 서서 뜸을 들였다.
목사와 하오의 시선이 교차한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원하는 반응이 아니었는지 장하오는 한 번 더 배트를 쥔다. 담벼락 상단에 놓여있던 벽돌이 굴러떨어진다. 그것을 타작질하며 내려쳤다.
깡! 깡! 깡!
목사의 낯이 허옇게 질린다. 메이저 오브 메이저 종교에 몸담은 남자조차도 신을 잊을 만큼 공포스러운 효과음이었다. 다음은 자신의 머리통일 것 같았는지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안 가?"
한 손으로 배트를 들어 올린 장하오가 외쳤다. 그 끝은 목사의 가슴팍을 향한다. 선전포고였다. 마치 오늘의 사고도 고의였다고 자백하는 꼴이었다.
"아따. 참말로. 미친 새끼를 다보네잉."
목사는 뒷짐 지고 슬금슬금 물러선다. 서둘러 차에 몸을 싣는다. 매연 내뿜으며 떠나는 승합차를 바라보던 한빈이 이마를 짚었다.
"이제 큰일 났다. 형. 어떻게 해결할래."
"무엇을?"
"안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나 엄청 미워하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형까지 이렇게 날뛰면..."
담벼락에 줄지어 붙은 썩은 전단에 시선을 빼앗긴다. 한빈이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린다.
<참사는 버섯 때문이 아니다! 심판이다! 종말의 때가 도래했다.>
팔을 뻗어 손톱으로 긁어냈다. 종이가 덕지덕지 제 살점을 남기며 떨어진다.
"..."
장하오는 눈만 깜빡인다. 그 꼴을 지켜보던 한빈이 철제 배트를 빼앗아 들었다. 장난으로 한번 허공에 휘두르자 공기 가르는 소리가 살벌하다.
"이런 걸 왜 들고 다녀. 압수야."
장하오는 대답 없이 혀를 한번 내밀고 홀랑 마당으로 들어가 버린다.
마침 압력밥솥이 밥이 다 되었다는 소리를 냈다. 하오는 알아서 마루에 밥상을 펼치고 개수대 옆을 뒤적였다. 작은 방 세 채가 마당을 감싼 형태의 민박이다. 물론 할머니 돌아가신 후로 제대로 운영된 적은 없다. 배트를 질질 끌던 한빈은 이 물건을 어디에 보관해야 하나 고민하다 장하오가 머무는 방문을 열었다. 밖에 있는 생물은 모조리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서 말라 죽어가는데 유달리 이곳만 서늘하다.
경첩이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한빈은 배트를 벽에 기대어두고 에이포용지가 너저분하게 쌓인 책상을 흘끗댔다. 발등을 오므린 걸음으로 다가가 몇 장 넘겨보았다.
온통 영어와 한자로 범벅이다.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떠듬떠듬 눈으로 훑었다. 조현병. 한국의 무속신앙. 한국의 종교. 샤머니즘은 과학과 양립할 수 있는가? 곡성 참사는 야생 버섯에 의한 감염과 환각 증세가 일으킨 집단 비극 사건이지만 그들은 종교적 심판이라 주장한다. 이는 폐쇄적인 마을 분위기와 지리적 위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탁.
책이 닫힌다. 한빈은 불쑥 끼어든 그 팔을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린다. 굳은 표정의 장하오가 얼굴을 가까이 붙여온다. 도르륵. 눈알이 구른다. 너도 내 연구 대상 중 하나일 뿐이야.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냉담한 눈길 속 숨겨진 메시지를 읽는다. 한빈은 곧 주눅이 들었다.
"그냥... 궁금해서."
저도 모르게 변명부터 튀어나온다. 장하오는 샐쭉 웃으며 성한빈의 손을 잡아 끌었다. 밥을 먹자. 밥을 먹자하. 이끌려 나간 마루에는 냉장고에서 잠자고 있던 반찬 몇 가지와 데운 탕국이 소담히 차려져 있다. 덜덜덜. 선풍기가 구형 모터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하오는 한빈에게 바람이 갈 수 있도록 각도를 조절했다. 마당이 이글거린다. 찬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목으로 넘겼다. 형 우리 수박도 꺼내먹을까. 우물거리며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맴. 맴. 맴. 찌르르르. 매미 우는 소리가 대화 사이사이 적막을 채웠다.
"마을 사람들한테 밉보일 짓 그만해."
"응? 왜?"
"그래도 나 어릴 때부터 보던 어른들이란 말이야. 목사님도 지금은 저렇게 화내지만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도와주시기도 했고."
"음. 난 그냥 연구를 위해 왔는 거야. 떠나면 보지 않을 사람들이야."
하오가 손으로 부채질하다 밥을 푹푹 떠먹는다.
"수리 피해보상 엄청 많이 달라고 하면 어떡할 거야?"
후루룩. 한빈이 국그릇을 들고 마시며 말했다. 장하오는 팔을 뒤로 쭉 빼어 마루를 짚고 곰곰이 생각했다. 글쎄. 그럼 줘야겠지. 대수롭지 않게 군다. 형은 참 대단하다. 비꼬는 말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려 보이고 만다.
그래서 교회 건물은 왜 들이받은 거야? 장하오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한빈을 가리킨다. 며칠이고 너를 괴롭혔지. 저 사람들이. 널 잡신이나 모시는 놈이라며 혀를 찼어. 한빈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욕하면 그들이 모시는 것도 당해야 맞아. 개신교에서도 모신다는 말을 쓰나? 잘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야.
"한빈은 진짜 신이 있다고 생각해?"
"갑자기 연구 시작이네에."
"하하. 나도 이제 마무리 하고 돌아가야지."
"나같은 경우는 선택지가 없지..."
한빈이 가늘게 뜬 눈으로 배를 두드리는 하오를 쏘아본다. 장하오가 좋아하는 무신론에 맞장구쳐주면 본인이 지금까지 겪은 건 정신병이 되는 건데. 그동안 앓았던 신병은 뭐가 되는 거냐고. 대체 형은 어떤 대답을 바라고 이러는 거지? 한빈이 인상을 썼다.
"너 잘 생각해봐. 이 세상에 신이라는 건 없어."
이것도 시험이다.
말문이 막힌다. 하늘이 무너질 듯 폭우가 내리던 날. 장하오는 쫄딱 젖은 모습으로 캐리어를 달달 끌며 돌아다녔다. 그 모습이 측은해 방을 내어줬더니 성한빈의 근간을 부정한다.
"있어. 나는 도움을 많이 받아왔거든."
형이 몰라서 그래. 한빈이 입을 앙다물었다.
"아니야. 없어. 난 몇 년간 이 분야만 연구했는 걸. 그럼 어떤 신까지가 진짜야? 아일랜드 태양의 여신. 아프리카의 태양신.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부족이 섬기는 여신. 중국의 물의 여신. 피지의 상어 신. 모두 다 믿어줄 거야? 방금 네가 본 목사가 모시는 신은? 유대인들의 신도 진짜야?"
"그럼 형은 거짓이라고 확신 할 수 있어?"
"반증할 수 없다고 해서 사실이 되는 건 아니야."
"기분 나빠."
"너를 위해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는 않아. 물론 적당히 편들어 줄 수 있어. 하지만 신은 없어."
"형은 그럼 내가 겪은 걸 전부 다 우연이라고 할 거야? 그동안 말해줬잖아. 내가 어릴 때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것도. 이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어갈 때 나만 화를 피한 것도 전부 우연이야?"
나는 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한빈이 밥그릇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푹 숙인다. 믿음을 부정당하는 기분은 최악이다.
가끔은 과분하다 느껴지는 신의 은총에 밤잠을 뒤척인다. 성한빈이 추락할 때마다 그 몸뚱어리를 끄집어 올리는 건 초자연적인 힘이 맞다. 최근 일만 해도 그렇다. 신의 음성이 채근하기에 서울로 향했었다. 그 몇 달간 마을에 재앙이 돌았다. 도착하자마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에 구역질 부터 했더랬다. 동시에 살갗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신의 애정에 몸을 떨었다. 피바람에서 오로지 성한빈만을 건져낸 편애. 선악의 잣대로 감히 판단할 수 없는 은총.
그리고...
어떤 편애와 은총은 고립이다.
"응. 전부 우연이지. 한빈은 운이 좋아."
"말이 안 통해."
한빈이 수저를 내려두고 몸을 홱 돌린다. 장하오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바닥을 치며 웃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학. 귀여워. 귀여워. 배꼽을 잡더니 발라당 드러누워 버린다. 토라진 한빈의 뒤통수를 곁눈질로 훑었다.
이제는 팔로 머리통을 괴고 뻔뻔한 낯으로 한빈을 불러댄다. 한빈아. 한빈아. 부름에 답이 없자 장하오는 선풍기를 꺼버린다. 생각대로 굴어주지 않을 땐 필요를 빼앗으면 된다. 한빈이 전원 버튼을 누르면 장하오가 다시 꺼버리는 장난이 이어졌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다 믿어. 저기 유명한 예수도 믿고 붓다도 믿고 알라신도 믿어. 그러면 더 좋은 거지?"
"시. 시. 신들은 하나만 섬기라고 하거든..."
한빈이 당황해 더듬댔다. 막상 모든 종교를 대변하려니 수가 떠오르질 않는다.
"이를테면 여러 신을 동시에 믿는 건 양다리잖아..."
"양다리?"
"내가 모시는 신은 질투가 엄청 많다구..."
한빈이 말끝을 얼버무렸다. 몸을 짓누르는 공포. 자신만을 섬기라는 압박. 무신론자들은 평생 느끼지 못할 목줄. 한번 신의 것이 되기로 맹세했다면 무를 수 없다. 한빈이 괜스레 자신의 팔을 쓸었다.
"한빈아. 성서에 이런 이야기 있어."
"뭐가."
팔짱끼고 있던 한빈이 답했다. 덜덜덜. 선풍기 고개가 다시 돌아간다.
"모세가 없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 금송아지를 경배 했어. 그래서 신이 엄청 질투를 했는 거야. 금송아지를 부수고 가루로 만들어버렸어. 레위 사람들을 시켜서 칼로 다 죽이게 했어. 삼천 명이나.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역병을 보내서 사람들을 괴롭게 했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네 말대로 신들은 질투가 참 많아. 그런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신이야?"
"..."
"내 논문의 결론은 이렇게 지을 거야. 마을의 집단 정신병."
"...쓰레기 논문."
"내기 할래?"
"무슨 내기."
"한빈. 나 봐봐."
무릎으로 기어 온 장하오는 어느새 성한빈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한낱 미물이 신의 권능에 도전해보겠다는 패기는 박수쳐줄만 했다.
뙤약볕 밑에서도 그늘을 유지하는 눈동자가 성한빈을 옭아맨다. 얼굴을 밀착해온다. 어디가 맞붙을지 모르지 않는다.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한빈은 어린아이처럼 넋을 놓고 눈만 깜빡였다.
매미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찌르르르... 하오는 내친김에 양손으로 한빈의 뺨을 붙잡고 입술 도장을 찍어댔다. 촙. 촙. 민망한 소리가 났다.
Q1. 신의 존재를 의심해본 적 없어?
"네가 믿는 신이 진짜라면 난 곧 죽겠지?"
"..."
"엄. 청. 질투 나겠지."
한빈의 볼이 상기된다. 비단 더위 때문만은 아니다. 장하오는 몸을 숙여 밥상 위 그릇을 차곡차곡 정리한다. 설거짓거리를 개수대로 가져가는 동안에도 성한빈은 고장 난 로봇처럼 굳은 채 허공을 응시했다.
쏴아아아. 물을 튼 하오가 잘그락 소리를 내며 그릇을 씻어낸다. 한빈은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심호흡 했다. 미워죽겠다...
나는 미움받고 싶지 않아. 신에게도 사람들에게도. 한빈은 장하오가 외출한 틈을 타 몰래 초를 켜두고 제 신에게 기도했다. 왜 사람들이 저를 미워할 빌미를 주세요? 평안을 주세요. 모두가 사이좋게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해요. ...장하오에게 벌을 주지는 마세요. 제가 당신을 믿고 있잖아요. 입바람으로 촛불을 끄자 회색 연기가 피어오른다.
한빈의 자립을 도운 손길은 여럿이다. 이 마을에 있는 어른들 중에 유년 시절 한빈의 정수리를 쓰다듬지 않은 사람 하나 없다. 신은 가끔 인간의 손을 빌려 제 사람을 보호했다. 인간은 타인의 도움 없이 성장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 품에서 자라던 한빈이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할머니가 세상을 뜨고 나서는 쌀이며 반찬을 모아 한빈을 키웠다. 측은지심으로나 해석할 수 있는 우연이 아니다. 성한빈은 매번 신의 보살핌 아래에 은거해왔다.
웃기지. 그렇게 저를 돌보아온 사람들 앞에서 고작 외국인 한 명의 편을 들기 위해 안달을 내고 있다는 것이.
사랑이 뭔지 몰라. 불신은 더더욱 몰라. 성한빈은 이제 벼랑 끝에 매달려있는 기분이다.
나는 모두를 등질 수 있을까?
문을 열고 나와 슬리퍼를 찍찍 끌었다. 흙길을 따라 나와 무릎을 감싸 안고 쭈그려 앉았다. 초록 물감을 쏟은 듯 넓게 펼쳐진 논밭이 점차 황금빛으로 물든다. 해 지는 하늘을 구경했다. 산자락을 기둥삼아 서서히 낙하하는 태양. 한빈의 낯도 일렁인다.
"한빈아!"
자전거 경적과 함께 진희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로등이 들어오기엔 이른 시간이다. 진희는 자전거를 내팽개쳐두고 뭐가 급한지 숨을 헐떡이며 뛰었다.
"누나. 그러다 넘어져요."
진희 누나의 손에선 항상 파마약 냄새가 났다. 한빈은 펄럭이는 치마폭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위태롭다.
"글쎄. 장하오가 또 사고를 쳤단다."
"네?"
"불좌상을 부수었대. 사람들이 아주 화가 단단히 났어."
왜. 숙영 이모가 항상 기도드리던 그 불상 말이야. 그거 몇 백 년은 됐다던데 이제 어쩌면 좋니? 노인네들 바닥에 주저앉아서 흐느끼고 난리도 아니야. 진희가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하소연했다. 이번엔 불교냐. 성한빈은 귀를 막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말라는 짓을 기어이 해내고야 만다.
다음엔 어디일까.
무당집 안방 문을 쳐부수기라도 할 텐가. 책상에 앉아 펜대나 굴려야 할 작자가 마을을 들쑤시고 다닌다. 참사가 일어나기 직전에 마을에 들어왔다던 일본인. 이번엔 중국인이다. 한빈의 기도내용은 완벽히 역행한다. 머리 한번 쓸어 넘기고 엎어져 있는 자전거를 세웠다.
"누나. 저 이거 좀 빌릴게요."
"한빈아!"
"네?"
"조심히 타야 해. 누나는 항상 네가 걱정 된다."
"..."
"응? 알았지?"
"그래도 내 편은 누나 뿐이네요. 누나도 차 조심해서 가요!"
한빈이 손을 흔들어 보인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페달을 밟는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바퀴가 덜컹거린다. 한빈은 상체를 숙이고 허벅지가 터질 때까지 나아갔다.
바보. 바보. 바보 자식. 마을 사람들을 전부 적으로 돌릴 심산이지.
도착해서 뭐라고 해야 할까? 이번에는 어떤 변명을 했을까?
산의 초입이 보일 때쯤 자전거에서 뛰어내렸다. 내동댕이쳐진 자전거 바퀴가 끝없이 돈다.
헉. 헉. 헉. 밭은 숨소리를 내며 산을 올랐다. 눈이 멀어버릴 듯 붉게 물든 하늘이 저주스럽다. 비탈길 위로 하오가 남긴 타이어 자국이 선명하다.
불좌상에 다가갈수록 노인들의 곡소리가 커진다.
"아이고. 아이고오. 나무아미타불."
흙먼지에 몸빼바지가 더럽혀지든 말든 개의치 않고 주저앉아 바닥을 친다. 순자 할머니는 나라 잃은 사람처럼 꺼이꺼이 울어댔다. 모여든 인파의 앞으로 박살 난 불좌상이 처연하게 굴러다녔다. 그 중 눈을 담당하던 조각이 한빈을 노려본다. 알 수 없는 음성이 성한빈을 질책했다. 네가 마을에 외부인을 들였다지? 사람들의 버팀목을 없애도 된다 허락했지. 느이 신만 신이냐? 환청에 한빈이 손을 떨었다.
"저. 저. 염병할 놈."
숙영 이모가 한빈을 발견하곤 손가락질 했다. 어제는 교회. 오늘은 불상이랑게. 우짤라고 저런다. 뭇한다고 외국인을 들여가지고 복장 터져부러. 안 그래야.
우리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마치 그런 뉘앙스였다. 목사와 대치할 때처럼 바락바락 대들지도 못하겠다. 한빈은 이 악물고 비처럼 흘러내리는 땀을 훔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푹푹 심장을 찌른다.
어릴 때부터 저를 키워온 마을 사람들과 낯선 외국인 중에 택하라면 당연히...
등돌려 뛰었다. 타이어 자국을 따라 미로 같은 숲길을 헤집었다.
낮게 자란 덤불에 종아리가 쓸린다. 마치 누가 목이라도 조르는 듯 숨소리가 고르지 못하다. 해는 아직 모습을 감추기 전인데 눈앞은 벌써 캄캄해지고 있다.
한빈이 바라는 것은 크지 않다. 모두가 평화롭게 지내는 것. 마을에 찾아온 재앙이 멈추는 것. 장하오의 손을 잡고 중국에 가보는 것.
이렇게나 어려울 일인가.
머지 않아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서 있는 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턱을 괴고 사이드미러를 보고 있던 하오가 운전석에서 내린다.
"내가 하지 말랬지!!!"
한빈이 달려들어 장하오의 상체를 붙든다. 꽈아악. 거세게 쥐어 잡힌 하오가 놀란 눈을 했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안 나게 생겼어? 마을 사람들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
"이건 말하자면 계몽이야. 보이지 않는 믿음? 그딴 것들로는 마을의 문제가 해결할 수 없는 거야. 또 한빈을 비난할 수단이 될 수도 없고."
그래서 믿음의 원천을 물리적으로 제거한다니. 학문하는 사람치고 극단적이다.
"그건 형 생각이야! 형은 떠나면 그만이지? 나는 계속 여기에서 살아야 해. 내가 형에게 준 배려를 이딴 식으로 돌려주지 마!"
해는 수평선을 넘어가기 직전인데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장하오도 마찬가지로 면괴하긴 커녕 해맑기만 하다.
"너 두렵구나?"
"..."
장하오는 팔을 뻗어 한빈의 머리통에 손을 얹는다. 신이 너를 지켜준다며? 왜 두렵지? 낮게 중얼대는 말엔 어떠한 답도 줄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이 너를 손가락질하든 내가 불좌상을 박살 내든 넌 무사할 테니 상관 없잖아.
"정말 신이 있다면 네가 손가락질 당하도록 내버려 둘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나는 이렇게 직접 너를 위해 보여줄 수 있어."
하강하는 태양을 등진 장하오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그의 외곽에 떠오르는 햇무리에 눈이 부시다.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기가 어렵다. 제 신념도 그렇게 되기 전에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한빈은 달콤한 말을 내치기로 한다.
"형은 막무가내야. 논문인지 쓰레기인지 빨리 쓰고 떠나버려."
"못됐어. 성함빙..."
"사람들이 얼마나 답답하겠어? 계속 마을에 이상한 일이 생기는데... 의지할 곳 하나 없잖아. 조금이라도 헤아려보려고 노력을 해봐."
"나도 노력했어. 네게 소중한 마을이니까. 많은 고민을 했어.“
그러니까 이 마을의 문제는 말이야. 고작 돌덩이에 기도를 드리고 십자가 앞에서 두손을 모으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 가뭄이 닥쳤다면 물을 끌어올 방법을 고심해야 하고 병충해가 일었으면 약을 뿌려야 해. 무슨 말인지 알아? 줄줄이 내뱉는 말에 어폐가 없다.
한빈아. 너 잘 생각해. 네가 여기서 사람들한테 욕 먹을 이유는 없어.
이렇게 이성적으로 몰아붙일 때면 성한빈은 말문이 틀어막히고 마는 것이다. 사람 바보 취급할 때는 꼭 저보다 한국말을 능숙하게 쏟아낸다.
기현상을 정신병으로 취급하는 건 쉽다. 뭐든 납작하게 누르고 나면 보기에 편하니까. 하지만 성한빈은 이성적일 수 없다. 몸소 겪은 신의 은총은 뇌에 자국을 남기고 한빈을 조종한다. 한번 신의 패가 되기로 맹세했다면 무를 수 없다.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그런데 나는 계속 두렵단 말이야. 자꾸만 형이 밉보일 짓을 하고. 신을 조롱하고. 넘보고. 부정하고. 나는 심장이 철렁해. 형이 벌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매번 머리를 조아려."
한빈이 자신을 이렇게나 생각한다. 무척이나 어리석은 방법으로. 하오는 슬며시 미소 지어 보인다. 작은 머리통으로 기특한 생각을 했구나. 그리고 너는 나를 매우 좋아하는 구나. 하지만 옳고 그름은 다른 문제이니까. 장하오는 팔을 뻗어 한빈의 목을 끌어안는다. 품에 안고 머리칼에 뺨을 비볐다.
"고마워. 성한빈. 그런데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믿어. 대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딴 신을 믿어서 뭐해? 사람들이 너를 손가락질 한다면. 그래서 괴롭다면. 나와 함께 떠나자."
또 시험이다.
신을 버리라고 종용한다. 네가 겪은 그것 모두 정신병이라고. 고백을 가장한 고집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니지만 주기도문을 줄줄 외우고만 싶은 지경이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성한빈은 남자의 가슴팍에 머리를 박고 퀭해진 초점을 흐린다. 남자도 나를 믿고 나도 남자를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믿지 않는다. 이런 건 사랑이라 할 수 없다.
품에서 빠져나와 뒤돌아 걷는다. 슬리퍼를 신고 이리저리 구른 발엔 생채기가 가득하다. 스멀스멀 차오르는 핏방울을 내려다 보며 울상을 지었다. 한빈의 뒤꿈치를 지켜보던 하오가 따라붙는다.
"한빈아. 화 풀어. 삐졌어?"
"..."
"업어줄게. 너 발 아프겠다."
"됐어."
토라진 한빈을 향해 좌우로 얼굴을 들이민다. 반응이 없어 나란히 걷는다.
신이 보는 장하오는 얼마나 시건방지고 같잖을지 생각해본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쓰레기다. 장하오가 성한빈에게 들이미는 무신론의 증거들 또한 쓰레기다. 포부와 패기는 높게 살 만했다. 그러나 장하오가 이긴다고 한들 마을 사람 어느 누가 행복할 수 있지.
"형. 그러고 보니까 나 자전거를 놓고 왔어. 빌린 건데..."
"차로 같이 가자. 돌려주러."
하오가 한빈의 팔을 끌었다. 축축한 바람에 초록 잎들이 나부낀다. 중턱에 올라있는 둘의 시야로 마을 전경이 훤히 들어온다.
마침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에 한빈의 걸음이 멈춘다.
형. 잠시만. 한빈이 벼랑으로 다가간다. 바쁘게 질주하는 앰뷸런스가 보인다. 한빈의 집 근처에 멈춘다.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감각에 몸이 굳는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왜 그래?"
"차에 시동 걸어. 빨리 집 앞으로 가야 해."
한빈이 목을 잔뜩 움츠리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걷는다.
"왜 그러냐니까."
장하오는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소를 띤 채로 따라붙었다. 채근하는 손짓에도 상기된 얼굴로 웃을 뿐이다.
네게 왜 그렇게 급하냐고 물으면 육감 때문이라 하겠지. 그것이 우스워 웃음이 비실비실 샌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둘은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기만 했다. 알 수 없는 벽이 둘 사이에 세워진다.
한빈의 얼굴이 회색빛으로 변하고 곧 토할 지경에 이른다. 차가 멈추자마자 번개처럼 튀어 나간다. 보닛 앞으로 그의 발에서 빠져나온 슬리퍼가 구른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운 장하오가 뒤따라 내렸다.
좁은 흙길 위에 전조등이 박살 난 트럭 한 대가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다. 사람 하나가 흰 천에 싸인 채로 들것에 실린다. 곳곳에 갈변한 피가 낭자했다. 사고가 났구나. 지레짐작할 뿐이다.
한빈은 털썩 주저앉는다.
이것도 시험일까?
흰 천 밖으로 튀어나온 손을 보고는 입으로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눈 밑을 쓸어내렸다. 아무도 듣지 않을 독백이었다. 헛구역질을 하며 목 긁는 소리를 내더니 울음소리를 토했다. 땅바닥에 타액을 질질 흘린다.
주검에선 파마약 냄새가 난다. 손톱으로 땅바닥을 파내던 한빈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다. 마치 원인이 장하오인 양 그를 쏘아본다.
"이게 우연이라고?"
내내 주고받던 입씨름의 재개. 눅눅한 음성이 장하오를 할퀸다. 무릎 한쪽을 바닥에 댄 하오가 팔을 들어 현장을 가리켰다.
"당연하지. 저길 봐. 사고잖아. 교통사고."
"나 형을 보러 가기 전에 누나를 만났었어..."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어. 그래서 차 조심하라고 했는데. 내가 너무 급해서 더 말은 못하고."
"네 탓이라고 하고 싶은 거야?"
"..."
"한빈아. 정신 차려. 모든 사건을 하나하나 확대해석하면 여기가 고장 나는 법이야."
장하오는 검지로 이마를 두드리며 말했다. 가여워라.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 사고에 갇혀있는 인간인지. 한 해에 일어나는 교통사고는 이십만 건에 달한다. 우연히, 확률적으로, 성한빈 집 앞에서, 안타깝게도, 한빈에게 잘해주던 여자가 비극을 겪은 것뿐이다.
"너 일어나."
장하오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명령조로 말한다. 흐느끼던 한빈의 어깨가 멈춘다.
"아직까지 내 편 들어주는 건 진희누나 하나였단 말이야."
"일어나라고 했어."
"..."
앰뷸런스가 멀어진다. 성한빈은 차가 아주 작아질 때까지 넋 놓고 쳐다보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한빈..."
"도저히 안 되겠다."
"..."
"형 미안해. 당분간 나한테 말 걸지 마."
Q2. 너의 소중한 사람 하나 지켜주지 않는 신을 믿어?
내려앉은 앞머리가 한빈의 눈을 가린다. 장하오는 머뭇대는 손으로 갈등했다. 허공에 남겨진 팔은 붙잡을 대상을 놓치고야 만다. 악의는 없다. 하오가 차키를 손가락에 걸고 빙글빙글 돌렸다.
말라죽은 작물이 온통 썩어가는 이 마을에서. 성한빈 또한 곪아간다. 먹구름 하나 없는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옥이라기엔 지나치리라 만치 맑고 연옥 정도가 걸맞다.
유일하게 한빈의 편을 들어주는 여자랬지.
그럼 이제 한빈에게 남은 사람은?
한빈은 모든 불을 소등한 방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누웠다.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을사람들을 잃었다. 그들은 저만 보면 혀를 차기 시작했으므로. 이제 진희누나도 없다. 한빈이 잡고 있던 이들이 모래처럼 손안을 빠져나간다.
며칠간 겪은 모든 것이 꿈이길 기도했다. 입으로 줄줄 소리를 냈다. 마을에 도는 재앙을 멈춰달라고. 만약 이게 정말 제 탓이라면 나를 죽이라고. 더 나은 미래를 주지 않으시려거든 당장 내 목을 꺾어 비틀어 버리라고. 그 정도의 권능이 없다면 차라리 나를 보살필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어둠에 적응한 눈을 깜빡였다. 뱃속에 구렁이라도 들어찼는지 금방이라도 목구멍으로 무언가가 튀어나올 듯하다.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다. 천천히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꿈 속에서 한빈은 손전등 하나를 입에 물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해로 가라앉았다.
두려움은 없다. 빠져 죽는 날엔 그가 나를 건지리라. 믿음으로 무장한 성한빈은 심해 따위 겁내지 않는다
춤추는 머리칼이 구불구불 유영한다.
가장 아래까지 도달한 한빈은 팔로 바닥을 지탱하고 두리번거렸다.
바로 앞에는 논두렁이. 그 건너편에는 주조장이. 또 찢긴 현수막이. 부식된 트랙터가. 쓰레기장이 따로 없다. 아득한 느낌에 옆으로 누워 곤히 잠들고 싶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매미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다리를 저었다. 팔로 물살을 가른다.
수면위로 고개를 뺀 한빈이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희미한 햇살을 따라 뭍으로 기어 나왔다.
마침 지나가는 행인이 있어 물었다.
이곳에 왜 바다가 생겼습니까?
그야 비가 온종일 내렸기 때문이지.
정말요? 마을은 가뭄을 앓고 있었어요. 다행이에요.
다행일까?
다행이죠.
행인이 가리킨 곳엔 썩은 내를 풍기며 바닷물에 절여진 더미가 산을 이루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눈코입 달린 시체의 무덤이다. 그곳엔 교회 목사님도 있고 숙영 이모 순자 할머니... 모두가 켜켜이 쌓여있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쓸어버렸어. 당장 나가 한빈아. 내가 너까지 쓸어버리기 전에.
북소리와 함께 등이 떠밀린다. 한빈은 알 수 없는 곳으로 빨려간다. 가슴팍을 잡아끄는 압력에 팔다리가 깃발처럼 펄럭였다.
고막이 터질듯한 이명에 눈살을 찌푸렸다.
문간 너머로 동이 트고 있음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현실감각을 되찾으려 손가락으로 방바닥을 두드렸다. 서서히 눈을 뜬 한빈이 장판 위를 무릎으로 기어가 방문을 툭 밀어본다. 끼이이이익. 나사 하나 빠진 경첩이 위태로이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먹구름이 가득하다. 해가 떠오르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필시 예지몽일 것이다. 단말마의 비명이 터진다. 마루로 뛰쳐나갔다.
"형! 하오 형!"
옆 방으로 건너가 열심히 논문을 타이핑하는 장하오를 불렀다. 네가 말 걸지 말라며... 하오는 안경을 추켜올리곤 장난스레 대꾸했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저를 찾는 이유가 뭘까. 화해 신청?
"우리 빨리 나가야 해."
"왜? 나 지금 바빠."
"홍수가 날 거야."
"한빈... 자다가 갑자기 왜 그래. 악꿈 꿨어?"
"아니야. 밖에 먹구름 잔뜩 끼었어. 제발."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애원한다. 장하오는 정신병자라도 마주한 표정으로 상체를 뒤로 물렸다. 너 지금 정말 이상하네. 조금 더 자는 게 좋겠어.
한빈은 그 말을 무시하고 나프탈렌 냄새나는 자개장을 활짝 열었다. 고개를 처박고 내용물을 헤집어 우의를 찾아냈다. 장하오에게 하나 던져준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어 문밖을 슬쩍 내다보았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다.
"그런데 한빈아. 이거 봐."
장하오는 노트북에 날씨를 검색해 마을의 기상예보를 들이민다. 날씨는 맑음. 맑음. 맑음. 전부 맑음. 지독하게 맑음. 가뭄은 나아지지 않을 예정이다.
"지금 나가면 바보 되는 거야..."
하오가 어느새 우의를 껴입은 한빈을 향해 말한다. 성한빈은 무릎까지 꿇고 두손을 맞대어 싹싹 빌었다.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형. 제발. 제발 나가자. 우리 제발 떠나자. 신의 음성을 들었어. 우리는 잠겨 죽고 말거야. 심판이야. 장하오는 헛웃음을 내뱉는다.
"한빈아. 그런 건 없어. 너 지금 정신이 이상한 거야..."
"이 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 쓸어버린다고 했어. 떠나자. 떠나자. 응?"
"나 믿어. 비 따위 오지 않아."
"아니야. 모두 잠겨 죽을 거야."
"고집 센 성한빈."
"응. 그러니까 내 말 한 번만 듣자."
어찌나 애달픈 음성인지. 턱에 힘을 주고 말한다. 좀 전까지 논문의 마지막을 집단 조현병으로 결론짓던 장하오의 손이 무안해지는 순간이다.
노트북 화면에 뜬 주간예보와 무릎 꿇은 한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위성 영상에서조차 보이지 않는 구름이 무슨 비를 내린다는 걸까.
아직 잠이 덜 깬 상대를 맞춰주는 셈 치고 쭈그려 앉아 한빈과 눈을 맞춘다.
"한빈. 나 봐봐."
장하오가 핑거스냅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따라가 줄게. 네가 원하니까 그렇게 해줄 수 있어."
"응."
한빈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장하오의 손을 잡았다.
"너를 위해 잠깐은 멍청해질 수 있어."
"응."
"이 날씨에 바보처럼 우비를 걸치고 말이야. 신의 계시를 들었다고 하는 너를 위해서."
"응."
Q3. ...
"한번 물어보자. 누가 더 좋아?"
"응?"
일순 입꼬리가 하강한다. 이렇게나 절박한데 시시콜콜한 농담 따먹기를 건네는 상대는 정말...
"왜 대답을 하지 않아? 그럼 나는 네 말대로 홍수에 잠겨 죽을 거야. 한빈의 말을 따라주지 않을 거야."
"형..."
장하오는 실실 웃는 낯이다. 입으로 뽀글뽀글 소리를 내며 상대를 자극한다. 성한빈은 손톱으로 제 허벅지에 자국을 낸다. 흰 살을 거세게 틀어쥐고 상체를 덜덜 떨었다.
"네가 비이성적으로 구니까 나도 그렇게 할 거야. 빨리 내가 더 좋다고 말해. 신 따위 없다고 말해. 내가 좋다고 말해. 빨리.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성한빈은 고개를 떨구고 몇 초간 길게 호흡했다. 벌떡 일어나 방문을 박차고 나간다. 마루 위를 부산스레 걸어다니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 주방 식기가 쏟아지며 그릇이 깨진다. 재차 얼굴을 들이민 한빈의 손엔 과도가 들려있다.
이제야 알겠어. 형이 원인이야. 내가 신을 의심하게끔 몰아가고 있잖아. 이 상황에서조차 나를.
이 굴레를 끊어낼 방법은 형을 뿌리 뽑는 거야.
한빈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그러나 장하오는 꽤나 이 상황이 익숙한 사람처럼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거리를 좁혀온다. 상대의 손을 감싸 쥔다. 맥동하는 팔을 진정시키려 힘을 주었다. 칼날에 베인 하오의 손바닥을 타고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뚝. 뚝. 뚝. 초침과 같은 소리가 났다.
장하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한빈에게 말한다.
"너 나 못 이겨..."
"..."
"그러니 다시 기회를 줄게."
한빈의 동공 위로 자신만만한 상대의 얼굴이 반사된다. 문간 너머는 아주 고요했다. 요동치는 것은 오로지 성한빈의 심장으로.
이제 주의 손을 펴서
"응."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사랑해."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그리고 신 같은 건 없다고 말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응. 신은 없어. 없어. 형. 그런 거 없어. 내가 정신병자야. 내가 정신병자야."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불신을 담는다. 형은 정말 질투가 많아. 그리고 유치하고. 배려란 없고. 고집불통이고. 절박한 순간을 짓밟는다.
바깥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두 번째였다.
"나를 믿겠다고 해."
그의 등 뒤로 후광이 비친다.
"나는 형만 믿어."
"한빈아 너무너무 사랑해."
장하오는 건네받은 우비를 입고 한빈을 따라나선다. 마른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투둑투둑 낙하한다.
첫째는 마을 사람들이었지.
둘째는 누나였고.
마지막은 형이다.
마지막은 정말 잃고 싶지 않았어... 생각이 수증기처럼 흩어진다.
빗방울이 흙길을 짙은 회색빛으로 적신다. 곧 새카맣게 내린다.
쏴아아아. 쏴아아아.
돌풍이 몰려와 빗줄기의 방향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세상을 하얀 빗금으로 도륙 낸다.
새벽부터 일어나있던 노인들이 뛰쳐나와 만세 삼창을 하며 환호했다.
비 온다! 비가 온다!
저마다 자신이 마음을 두었던 신에게 영광을 돌렸다. 목사 아저씨는 십자가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고 순자 할머니는 땅에 머리를 박고 손바닥을 하늘로 돌린다. 개중 어떤 이는 누렇게 변한 부적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미지의 존재를 결과로만 올려다볼 수 있다.
가뭄이 해결됐다는 건 재앙이 그쳤다는 신호탄일까. 곧 병충해도 사라질 거야. 떼죽음도 멈출 거야.
희망을 노래하는 이들 사이에서 한빈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을 뗀다.
머뭇대는 순간 개죽음이다. 땅을 박차고 그들을 등졌다.
곧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하다. 해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물처럼 촘촘히 얽힌 빗방울들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한빈의 안면을 향해 와다다 꽂힌다.
쏴아아아. 쏴아아아.
물폭탄이 쏟아졌다.
"형! 하오 형! 어딨어!"
아주 가까운 소리도 버럭버럭 질러야만 알아들을 수 있다. 귀가 먹먹했다. 번쩍. 눈앞이 점멸했다. 낙뢰가 지상을 향해 돌격한다. 몇 초 후 하늘에서 지진이 일었다. 지대가 낮은 밭두렁부터 잠긴다.
장하오는 헤매는 한빈의 팔을 잡는다.
한빈아 우리 이쪽으로 가야 해.
장하오는 산을 가리켰다. 형 거기는 길이 없어. 한빈의 말에 하오가 무어라 입을 열어 대답했다. 빗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는다. 그는 높은 곳으로 향하길 원했다.
마을은 어느새 무릎까지 물이 차올랐다. 전조등을 켠 자동차가 오도 가도 못한 채 꼼짝없이 붙들려있다. 한빈은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묵묵히 장하오의 뒤를 따랐다. 물살에 깎인 산이 미끌미끌하다.
한참을 오르던 하오가 걸음을 멈추고 한빈이 앞서가도록 기다려주었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에 파고든다.
한빈아.
응?
이대로 계속 올라가야 해.
성한빈은 홀린 듯 끄덕였다. 뒤돌아보면 소금기둥으로 변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전신에 힘을 주었다.
얼마나 올랐을까. 산 정상에 다다른 한빈이 숨을 고른다. 철퍼덕 엎어졌다. 진흙이 사방으로 튄다. 몸을 뒤집어 하늘을 바라본다. 쏟아지는 비가 눈을 찌른다.
한빈은 드디어 장하오를 부른다.
"형."
대답하는 이가 없다.
"하오 형."
여전히 침묵.
"..."
어쩌면 최초로 신을 부정한 순간부터 상대의 표정은 이미 성한빈을 조롱하고 있었음을.
그것은 희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얄팍한 믿음을 떠보려고.
네 어디까지 나를 우선순위로 두는지 확인하고 싶으셨겠지.
주먹으로 땅을 내려친다. 분해 죽겠다. 날카로운 감각이 목덜미를 내려치고 지나갔을 땐 이미 늦은 후다.
마침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세 번째였다.
신은 정말 질투가 많아.
그리고 유치하고.
배려란 없고.
고집불통이고.
절박한 순간을 짓밟는다.
한빈은 흐느껴 운다. 차라리 광야에서 사십 년 넘게 헤매고만 싶다.
신들은 장난을 칠 때 정도를 몰라서...
피눈물이 주룩주룩 흐른다.
발단은 어디서부터였나. 기억나지 않는다. 설정부터 오류가 많았지. 눈치채지 못한 것은 제가 인간인지라.
신은 매번 자신을 향한 충성을 눈으로 보기 위해 인간의 탈을 쓰고 시험을 한다.
한빈은 까무룩 잠이 든다.
S#9.
EXT. 산 정상 - 낮
L.S 미치도록 더운 여름의 마을 전경.
흙탕물에 굴러 엎어진 성한빈이 파들거리며 눈을 뜬다.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마을을 비춘다. 산 아래로 바다가 끝없이 이어진다. 새소리가 울려 퍼진다. 고개를 들어보려 애쓰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검은 화면에 자막. '한빈아.' 신의 음성이다.
한빈 ...(침묵한다.)
검은 화면에 자막. '결국 내 손을 놓았지? 넌 불신이 쉽지.'
한빈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안면에 덕지덕지 묻은 진흙을 팔로 밀어 닦아낸다.
한빈의 독백. 성깔하고는... 코웃음 친다. 신을 비웃는다. 불순종할 때까지 사람을 몰아세워 놓고? 신의 가장 큰 형벌은 사랑을 주고 빼앗는 것이다. 당신의 유희에 미물은 말라 죽는다.
검은 화면에 자막. '너무너무 너무 귀여운 한빈. 성한빈 너무 사랑스러워. 다음엔 꼭 내 손을 놓고 내 손을 잡기를.'
한빈 ...(침묵한다.)
한빈 당신을 부정할 때까지 나를 압박했잖아요.
한빈 만족하십니까.
검은 화면에 자막.
'한빈아 너무너무 사랑해. 내 것. 나도 너를 사랑해. 한빈아. 너무너무 사랑해.'
'한빈아 너무너무 사랑해. 내 것. 나도 너를 사랑해. 한빈아. 너무너무 사랑해.'
'한빈아 너무너무 사랑해. 내 것. 나도 너를 사랑해. 한빈아. 너무너무 사랑해.'
'한빈아 너무너무 사랑해. 내 것. 나도 너를 사랑해. 한빈아. 너무너무 사랑해.'
한빈 컨셉은 쓸만했네요. 깜빡 속았어요. 그런데...
말을 잇지 못한다. 그렁그렁 차오르는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한빈 여기가 너무 아파요.
가슴 언저리를 손톱으로 긁는다. 누군가를 회상하는 눈으로.
한빈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
한빈 숨통을 끊어주세요.
심장과 세포와 골수가 모두 썩어 문드러지는 느낌. 상실감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한빈의 독백.
(소리)
형이 언제부터 내 곁에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아.
신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매 순간이 시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