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빈웹진: cinéclub

미래의 남자

Hz




 

 

한빈은 종종 운이 좋았다. 그 사실을 비교적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운이 좋았지만, 그만큼 운이 나빴다. 그나마 운이 좋았기에 남들처럼 살아갈 수 있었다. 맨홀에 빠졌지만 건져졌다. 모르는 아저씨를 따라갔다가 봉고차에 떠밀릴 뻔도 했지만, 어찌저찌 살았다. 자전거를 타다가 도랑에 빠져 기절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다. 울면서도 등짝을 후려갈기는 엄마를 보며 열둘의 한빈은 웃었다. 살았다. 이번에도 살았어. 영구치가 보기 좋게 부러져 있었지만, 요즘 치과에서는 그것도 말끔하게 고쳐주었으니 별일 아니었다. 가짜 앞니로 살아가는 세상은 더없이 반짝거렸다. 그것이 제게 주어진 몇 번째 새로운 삶인지도 모른 채, 한빈은 건장한 스물이 됐다.

 

무엇이 되면 좋을까. 고민하며 대학생이 됐다. 스물, 앞으로의 80년을 결정하기엔 너무 어렸다. 남들처럼 멋진 회사원이 되어야겠다. 가짜 앞니를 가졌지만 공부는 제법 잘했다. 머리가 좋았다. 그때 다리만 안 부러졌어도 유도는 계속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한빈은 적당한 서울 소재 대학의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가장 좋아한 사람은 엄마였다. 운동을 포기했을 때도 그랬다. 한빈은 절망했지만 엄마의 마음도 이해했다. 운이 좋지만, 그래서 운이 나쁜 성한빈이 계속 운동을 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나도 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엄마의 불안이 안타까우면서도 한빈은 조금 울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삐까뻔적한 대기업에 취업해 멋진 회사원이 되면 되니까. 그곳에서는 빠질 맨홀도, 처박힐 도랑도 없으니 나도 엄마도 괜찮을 것이다. 운이 나빴지만 운이 좋았던 성한빈은 그러므로 쉽게 일어섰다. 쓰러져도 나는 기필코 일어나리라는 것을 불운의 순간 이어진 막강한 운들을 통해 터득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므로 발랄했다. 꿈을 잃어도, 가짜 앞니로 살아도 방긋방긋 웃었다. 그것이 성한빈이었다.

 

6, 여름의 초입이었다. 초입이라곤 했지만, 여름의 한복판처럼 더운 날씨가 이어졌다. , 미쳤다. 30도래. 함께 학식을 먹던 동기 중 누군가 말했다. 그러네, 미쳤네. 괜히 돌솥 했다. 냉면이나 먹을걸. 냉면 그릇을 쥔 동기들 사이에 홀로 펄펄 끓는 뚝배기를 긁던 한빈은 생각했다. 이제 내 운도 슬슬 다했나. 고작 뚝배기 하나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운이 아닌 그저 선택일 뿐인데, 발랄하지만 운을 탓하는 습관은 본능 같은 것이었다.

 

어디 보자

 

오늘의 총운은 권토중래입니다. 주인 없는 풍요로운 들판을 지나듯 이익이 사방에 널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하루입니다. 기대하지 않던 곳에서 뜻밖의 희소식을 듣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토록 바라왔던 일이 바로 성사되는 기쁨을 맛볼 수도 있으며 행운의 중심에 자신이 주인공으로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곳 길을 가다 야생의 사과나무며 잣나무 따위를 발견하는 것처럼 오늘은 어디를 가도 좋은 일이 생깁니다.

핸드폰으로 오늘의 운세를 찾아보는 것도 습관이라면 습관이었다. 권토중래라. 자판기 옆 벤치에 앉아 다리를 떨던 한빈은 나이스. 주먹을 꾹 쥐었다. 그때 이 운세를 증명이라도 하듯 동기 이섭이 뚜껑도 따지 않은 캔 콜라를 건네면서 옆에 나란히 앉았다.

 

오늘은 데이터 나부랭이께서 뭐라시냐.”

이익이 사방에 널려 있으시단다.“

 

공짜 콜라를 시원하게 따 한 모금 마시면서 한빈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이섭은 한심하다는 얼굴이었다. , 그거 다 끼워 맞추기라니까. 점쟁이들도 똑같아. 집에 사과나무 있습니까? 없는데요. 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죄다 그런 거라고. 한빈이야 말로 한심한 얼굴을 했다. 닥쳐라. 미천한 중생이 뭘 알겠냐. 미천한? 하찮게도 투덕거리던 중 이섭이 한빈의 운동화 앞코를 툭 찼다. 턱짓하는 곳에는 가벼운 차림에 크로스백, 자연스러운 긴 생머리를 팔랑팔랑 휘날리는 수린이 있었다.

 

잘 돼가냐?”

그냥, .”

썸 탄지가 언젠데 대답이 그 모양이야.”

시험 기간이니까.”

 

이섭은 지랄한다는 얼굴이었다. 사랑에 타이밍은 있어도 연애에 시험 기간은 없단다. 그런 말을 하며 등짝을 확 후렸다. 얼른 쫓아가 보라는 뜻이었지만, 한빈의 티셔츠는 내뿜은 콜라로 거무죽죽했다.

 

야이씨, 마시고 있는데.”

쏘리쏘리. 저기 화장실, 화장실 있다.”

 

한빈은 수린도, 공짜 콜라도 내려두고 일어났다. 수업이 두 개나 남은 판국에 얼룩진 티셔츠는 보기 흉했다. 화장실 어디 있다고? 신관까지는 한참 걸렸지만, 이섭이 가리킨 별관은 금방이었다. 이제는 잘 쓰지 않는 버려진 건물이었다.

학교는 신입생 유치를 위해 헌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짓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별관은 마지막으로 남은 과거의 건물이었다. 이 역시 조만간 철거될 터였다. 그 자리에는 기숙사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떠돈 지는 이미 오래였다. 형광등은커녕 햇볕으로 겨우 연명하는 폐건물답게 화장실은 음침하기 딱히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높게 달린 창을 통해 한줄기 햇볕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럭키. 햇볕은 운이 좋은 성한빈을 향해 조명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느긋하게 셔츠를 문질러 닦다가 그것을 발견했다. 웬 핸드폰인식함과 동시에 추락한 그것은 한빈이 흘려보냈지만 배수구가 아닌 바닥에 고여버린 물속으로 풍덩 빠졌다.

 

아이씨, 누가 여기다가 핸드폰을!”

 

후다닥 집어 들었지만 활짝 펼쳐진 핸드폰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행히 깊게 빠진 건 아닌지 액정은 무사히 빛났다.

 

요즘에도 이런 걸 쓰는 사람이 있나.”

 

오랜만에 본 폴더폰이 신기해 닫았다 열어본 순간이었다. 한 칸 남은 베터리가 깜박거리더니 결국 꺼져버렸다. 씨유어겐! 발랄한 인사는 빌어먹게도 유언이었다.

 

, 이거 언제쩍 애니콜이냐.”

 

강의실에서 이섭은 신기하다는 얼굴이었다. 한빈이 책상에 둔 폴더폰을 펼치고 닫아보더니 이거 우리보다 나이 많은 거 아니냐? 물었다. 한빈은 알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맞을 걸. 이거 011 막 그런 거 아님? 우리 엄마 젊을 때 쓰던 거. 이건 뭐 하러?”

주인 찾아주게.”

이섭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게 주인이 있냐? 박물관이 주인 아니고? 누가 봐도 그런 얼굴로 전원을 꾹꾹 눌러댔다.

켜지지도 않는 구만. 고장 난 거 아냐?”

, 물에 좀 빠지긴 했는데.”

옛날 폰은 지금이랑 다르게 방수도 안 될 텐데. 수리는 될라나.”

 

그런 말을 하면서도 접었다 닫는 것을 멈추지 않기에 한빈은 얼른 빼앗아 버렸다. 이야, 그거 좀 중독적이다. 접는 맛이 있네. 부인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강의 내내 한빈은 주머니에 넣어둔 남의 폴더폰을 접었다 닫으며 시간을 보냈다. 공부는 잘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은 경영학은 아무래도 지루할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대를 갈 걸 그랬다. 영식이 인스타 보니까 재밌어 보이던데. 오로지 실기만으로 예대 연기과에 붙어버린 영식은 언제나 연습실, 아니면 공연장, 그것도 아니라면 학교 노천에 있었다. 웃는 얼굴이 즐거워 보여서 조금 부러웠다. 전공을 선택하고서도 한빈은 전공을 고심 중이었다.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믿었지만 가끔은 최악의 선택은 아니었는지 걱정이 됐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전공 서적에 줄을 그었다. 미래가 불안할 땐 현재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과거를 되짚을수록 미래는 불안해지니까, 과거 따위 되돌아봐서는 안 된다. 시간 참 안 가는 구만. 그렇지만 원래 공부라는 건 그런 거였다. 멈춘 시간 같은 것. 한빈은 오래된 핸드폰을 접고 닫으면서 무용한 시간을 보냈다. 아직도 해가 지려면 한참이었다. 하품을 참는 것이 힘들었다.

 

 

1999년 출시된 애니콜 미니 폴더. 정확한 제품 명칭은 그랬다. , 진짜 나보다 나이가 많네. 다락방에 있는 엄마의 추억 상자를 열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애니콜? 엄마도 썼었지. 삐삐만 쓰다가 처음 써본 핸드폰이라 얼마나 좋았던지.”

 

그걸로 너네 아빠랑 전화 많이 했었다. 요금 폭탄 맞아서 할머니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 빨래를 걷어 들어오던 엄마는 그 자리에 멈춘 채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사람처럼 향수에 젖었다. 어쩐지 아련해 보였지만, 한빈으로서는 결코 짐작할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었다.

 

충전기 찾으면 써도 되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외치지자 엄마의 대답은 조금 멀어진 목소리였다. 그걸 어디에 쓰게? 그때 한빈은 다락방 귀퉁이에 처박힌 엄마의 추억 상자를 꺼내고 있었다.

 

어디에 쓰긴요. 엄마 아들 착한 일 하는 데 쓰려고 그러지.”

 

나보다 오래된 핸드폰. 어쩌면 버린 물건인지도 모른다. 이섭은 그렇게 말했다. 그냥 버려. 찝찝하면 있던 자리에 두던지. 요즘 누가 그런 물건 쓰냐. 전원도 안 켜지는걸. 그러나 한빈은 분명 빛나던 액정을 보았다. 어쩌면, 그러니까 어떤 괴짜라면 아직도 이런 골동품을 쓸지도 모른다. 이런 골동품을 쓰는 인간이라면 아주 애지중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드니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핸드폰 주인을 찾는 일이야 밥을 먹는 것처럼 쉬웠다. 오는 전화를 받거나, 주소록의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면 된다. 전원만 켜진다면, 충분히 쉬운 일이었다.

, 바람을 불자 기침이 날 정도로 먼지가 일었다. 족히 20. 아들이 태어난 뒤 내내 봉인되어 있던 그것이 아들의 손에 의해 열리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 방전되어 버린 여러 개의 삐삐와 핸드폰들, 빵빵하게 부풀 만큼 애지중지 채워갔던 다이어리, 그때는 남자친구였던 공철과 주고받은 편지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앨범, 그사이에 끼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낡은 사진들

 

, 엄마다.”

 

무심코 넘겨본 사진에는 젊은 엄마의 모습이 있었다. 앳된 얼굴은 한빈보다도 어려 보였다. 색바랜 사진 속에서 어린 엄마는 수줍어 보였다. 그 옆으로 앞치마를 맨 젊은 남자와 또 다른 중년 남성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들 머리 위로 보물섬이라는 간판이 소박해 보였다.

 

19996, 보물섬 사장님과

 

사진 뒷면에 적힌 엄마의 글씨는 단정했다. 한빈은 조금 묘한 기분이 됐다. 너무 먼 과거를 바라보는 일은 이렇게 모호한 기분이 들게 했다. 시간선이 흔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최근 시간선을 다룬 다중 우주와 관련한 영화를 보았기 때문인지 상상력이 풍부했다. 역시, 시간선은 함부로 건드는 게 아니다. 한빈은 어깨를 흔들며 엄마의 사진을 다시 내려놓았다. 마침 오래된 충전기를 발견했기 때문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찾아볼 수도 없는 24핀 충전기였다. 이거 진짜 유물이네. 신기해하며 한빈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책상 위 LED 스탠드 불빛 아래서 낡은 핸드폰은 반짝 빛나고 있었다.

 

 

운이 좋기 위해서는 일단 운이 나빠야 한다. 그것은 때때로 찾아오는 불행에 맞서는 한빈의 마음가짐이었다. 그래서 한빈은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충전기를 연결하고도 켜질 기미가 없는 이 핸드폰은, 주인을 찾아주는 귀찮은 일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된다는 행운의 신호가 아닐까.

 

흐음.”

 

책상에 앉아서 한빈은 몇 번이나 핸드폰의 전원을 눌러보았다. 콘센트로 뽑았다가 껴보고, 콘센트의 자리를 책상 아래에서 침대 옆으로 옮겨보기도 했다. 진짜 물에 젖어 고장이라도 난 건가. 그럼 이거, 내 탓인가? 한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창밖으로 유난히 밝은 달이 하얀 얼굴을 시리게 비추고 있었다. , 모르겠다. 충전기에 연결된 핸드폰을 내려두고 잠시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늘 낮에 잠시 보았던 수린을 생각했다. 역시 인사를 했어야 했나. 수린의 옆에 달랑달랑 붙어 있던 시커먼 남자 하나가 거슬렸다. 그들보다 다섯 학번이나 높은 복학생이었는데, 신입생 위주로 여기저기 찔러 보고 다니다가 이제는 수린에게까지 들러붙은 모양이었다. 그닥 위협적인 외모나 성격은 아니었으나, 여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으니까.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을 때, 한빈은 조금 놀랐다. 달이원래 저랬나? 완벽하지는 않아도 보름달에 가까웠던 달이 별안간 초승달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눈을 감았다 뜬 찰나의 순간이었다. 뭐지? 어리둥절했지만 곧 알 수 있었다. 달은 조금씩 잡아먹히고 있었다.

 

, 개기월식.”

 

오늘 개기월식이란다. 포털사이트를 쓱쓱 넘기며 알려주던 이섭의 말이 떠올랐다. 그럼 그렇지. 한빈은 스탠드 불빛도 끄고 암흑이 되어가는 하늘을 즐겼다. 비록 도회지의 불빛은 달보다도 빛났으나, 달이 잡아먹히는 과정을 목격하는 일은 신기했다. 이럴 땐 소원이라도 빌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때 손에 쥔 것이 전원도 들지 않는 낡은 핸드폰이라, 한빈은 얼굴도 모르는 핸드폰의 주인을 생각했다. , 소원 하나 날렸다. 아쉬워하는 사이 문밖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한빈! 밥 먹자!”

!”

 

, 오늘은 불고기 냄새. 시간선이고 나발이고. 한빈은 발랄한 걸음으로 내달렸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쏟아지던 불빛이 한빈과 함께 사라졌다. 아빠, 지금 달 봐요! 개기월식이에요, 개기월식. 소란스러운 소리와 어울리지 않게 주인이 떠난 방은 어두컴컴했다. 고요하게 텅 빈 방이었다. 그 순간 내내 죽어 있던 낡은 핸드폰이 작게 깜박였다.

 

 

你在哪儿?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

 

 

한빈이 그 핸드폰을 다시 들여다본 것은 이섭때문이었다.

 

, 그 고물 주인 찾아줬냐?”

고물? 뭔 고물.”

아니, , 애니콜.”

아아, 아니. 전원도 안 들어오고, 그냥 서랍에 처박아 놨는데.”

 

이섭은 잘됐다며 자신의 폰을 꺼내 뭔가를 휙휙 넘겨 보여주었다. 누군가의 SNS 계정이었는데, 넘기는 사진마다 낡은 폰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너 그거 버릴 거면 우리 형한테 팔아라. , 친형은 아니고 사촌 형. 고물 수집가거든.”

 

고물 수집가라는 말이 웃겨서 한빈은 푸하, 웃었다. 그런 한빈에게 들어보라는 듯 팔을 툭툭 쳤다.

 

내가 그 이야기 했더니 당장 가져오래. 후하게 쳐준다고.”

켜지지도 않는데?”

상관없어. 그 형은 그런 거 고치는 걸 더 좋아해.”

고쳐질까?”

아마도? , 납땜도 직접 하거든. 그런 걸 뭐라 그러냐. 오타쿠? 아무튼 그런 거임.”

그럼 돈 주고 고칠 수도 있나?”

?”

아니, 그거 분명 켜졌었다니까. 주인 있을걸?”

 

다행히 이섭의 사촌 형은 수집가라기 보다는 화타에 더 가까웠다. 다 죽어가는 오래된 핸드폰을 제 손으로 살려 전원을 켜는 그 순간을 좋아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수리비는 받지 않을 테니 일단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래도 켜지는 영상은 찍어야 한대. 관종이거든.”

 

화타임과 동시에 관종이었던 그는 타인의 하트에 가끔은 목숨도 걸었다. 그러므로 오래된 핸드폰일수록 환장했다. 핸드폰의 출시 년 도와 하트는 비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한빈은 서랍을 뒤졌다. 주인 찾아주려고? 묻던 이섭은 뭘 그렇게까지 하냐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이 있기에는 너무 낡은 핸드폰이었다. 011? 016? 019? 그거 이제 개통도 안 될걸. 당연하게도 주인과 연락이 닿을 수 없을 거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보았다.

 

 

在那里吗

 

 

엄마의 충전기와 엉킨 낡은 핸드폰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미안. 안 고쳐도 될 듯.

 

 

한빈은 전원이 켜진 핸드폰 사진을 이섭에게 전송한 뒤 자신의 책상에 앉아 오래 고뇌했다. 이건 뭔 글자지. 아마도 핸드폰은 젖은 물기가 마르면서 자연스럽게 작동이 된 듯했다. 다행이다. 하지만 한자는 읽을 수가 없어서 자신의 핸드폰으로 번역기를 실행했다.

 

사진으로 찍어서. 번역. 요즘 세상 좋아졌다니까.”

 

만족스러운 얼굴로 들여다본 이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거기 있나요?

 

 

거봐, 거봐. 찾고 있었을 거라니까. , 여기 있습니다. 한빈은 당장 답장하고 싶었지만 낯선 자판 앞에서 잠시 버벅였다. 이건 대체 무슨 자판이람. 겨우 조작해 답장을 보내자 그쪽에서는 즉시 답장이 왔다.

 

 

다행이다.

 

 

이번에는 한국어였다. 핸드폰의 주인은 꽤 마음을 졸였던 모양인지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아니에요. 찾으셔서 다행이에요. ^^

 

 

오우, 이놈의 자판, 키감이 엄청 구리구나. 터치 패스만 써본 한빈은 뽁뽁 가라앉는 무거운 자판을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쓰며 힘겹게 답장했다.

 

 

어떻게 돌려드리면 될까요?

 

 

보통은 어떻게 하더라. 중간에서 만나려나. 아니면 찾으러 오려나. 내내 감사해하던 핸드폰의 주인이 이번에는 죄송한데라고 했다.

 

 

제가 일을 하고 있어서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아주 심부름을 시키네.”

 

 

사례할게요.

 

 

흐음, , 잠깐 들리는 것쯤이야. 핸드폰 주인의 근무지는 마침 학교 근처였다. 우리 학교 사람인가. 하긴, 그러니까 거기 흘리고 갔겠지. 말투가 정갈한 것이, 여자려나. 곧이어 도착한 주소에는 보물섬이라고 적혀 있었다.

 

 

보물섬. 어디서 봤더라. 어쩐지 낯익다는 느낌을 받으며 한빈은 골목을 지나 비탈길을 올랐다. 허억허억. 더운 날씨 때문인지 쉽게 숨이 찼다. 얇은 피부는 빠르게 달아올랐다. 학교를 벌써 몇 년째 다니고 있었지만, 이런 비탈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게다가 아무리 적힌 주소를 따라 오르고 올라도 보물섬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한계치였던 한빈은 숨을 헐떡이며 가방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냈지만 에이씨, 고물! 버럭 화를 냈다. 전화라도 걸 요량이었으나 낡은 핸드폰은 좋게 전원이 나가 있었다.

 

그러나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인지 고물이라고 외친 순간 알아차렸다. 보물이 오래되면 고물이 된다. 멀지 않은 곳에 낡은 고물섬이 보였다. 딱 봐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헌책방이었다.

책방은 입구에서부터 책들이 쌓여있을 만큼 그 작은 공간이 포화상태였다. 대부분의 책들은 햇빛을 오래 받아 누런색을 띠었다. 어떤 것들은 빵빵하게 부풀어 있는 것들도 있었다. 향수도 뿌린 뒤 오랜 시간이 지나면 향을 잃기 마련인데, 오래전 태어난 책들은 이상하게도 더 짙게 책 냄새를 풍겼다. 미로처럼 책이 쌓인 헌책방 고물섬은 책 냄새로 진동하고 있었다.

 

저기.”

 

겨우 찾아 들어간 카운터에서 한빈을 맞이한 건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돋보기안경을 쓴 채 오래된 명리학 서적을 들여다보다가 힐끔 시선만 들어 한빈을 보았다. 노인이라기엔 상당히 매서운 눈빛이라 한빈은 잠시 주눅이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핸드폰.”

 

거기까지 말했다가 아하하 웃었다. 그의 목에 걸린 빨간색 폴더폰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효도폰이긴 해도 지금 한빈이 들고 있는 핸드폰과는 비교도 안 되게 신식 모델이었다.

 

핸드폰이 뭐?”

 

노인이 자신의 핸드폰을 들며 되물었다.

 

아뇨, 혹시 알바생 있을까요?”

알바 뭐?”

 

책을 덮은 노인은 돋보기를 가슴께에 찔러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일이 있는 건지 한빈을 두고 어딘가로 바쁘게 걸어갔다. 내놓았던 책들을 다 안으로 거둬들이고 있었다. 노끈으로 뭉텅뭉텅 묶인 책들은 딱 봐도 무거워 보였다. 한빈은 저도 모르게 쪼르르 달려가 그것들을 함께 옮기며 알바생이요, 묻다가 너무 무거워 이를 꽉 깨물었다. 그것을 빤히 보던 노인은 말했다.

 

나는 알바고 뭐고 없어.”

알바생 안 쓰세요?”

그래, 안 써.”

언제부터요?”

한 이십 년은 되었지.”

 

순순히 대답하던 노인이 그새 심각해진 한빈을 가늘게 뜬 눈으로 빤히 보았다.

 

뭐가 궁금해서 왔어?”

, , , 아닙니다. 이거 안으로 들이면 될까요?”

 

높게 쌓인 책더미를 안으로 옮기던 한빈은 다시 빙글 돌아서며 노인에게 물었다.

 

여기 보물섬 맞죠? 고물섬 아니고.”

고물섬?”

 

그 순간 노인은 호탕하게 웃었다. 고물은 고물이구먼. 여기 모인 것들이 다 고물이지, 고물이여. 오래 웃는 것을 보니 이곳이 고물섬이 아닌 보물섬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래서 한빈은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작정하고 사람 엿먹이는 인간은 뭐지? 나 혹시 어디서 미운털 박혔나. 내가? 성한빈이? 그 순간엔 비까지 쏟아지는 바람에 결국 화가 났다.

 

어이고, 변덕스럽기도 하지.”

 

오로지 결리는 허리 하나로 날씨를 가늠해 책을 옮겼던 노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곰방대를 뻐끔거렸다. 한빈 보다 머리 두 개가 작은 그의 굽은 허리는 세월의 흔적이었다. 우산 없어? 망연자실 서 있는 한빈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노인이 빙글 돌아섰다.

 

으째, 나도 없는데.”

 

총총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한빈은 풀이 죽었다. 무슨 비가 이렇게도 갑자기 쏟아지나. 카운터의 노인은 어깨나 통통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발목이 시큰거렸던 것도 같은데. 훈련 중 결국 부러지고 말았던 오른발을 빙빙 돌리며 절망하고 있을 때였다. 방울방울 빗방울이 튄 운동화 앞으로 장우산 하나가 툭 쓰러졌다.

 

쓰세요, 마침 여분이 있어서.”

 

그러니까 운이 좋다는 건 별거 아니었다. 빈손으로 비가 쏟아지는 날, 갑자기 나타난 우산 같은 것.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서 받는 친절 같은 것. 올라올 땐 죽겠어도 내려갈 땐 수월한 비탈길 같은 것. 누군가의 친절 덕에 온몸이 아닌 고작 바짓단만 젖은 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 그 정도면 충분한 행운이었다. 무엇보다 그 정도의 운이 행운이라는 것을 아는 것. 어찌 보면 그것이야말로 한빈에겐 가장 행운인 일이었다.

근데, 우산 겟한 건 진짜 대운이다. 그치. 한빈은 헤헤 웃으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엄마는 주방에서 무언가 바쁘게 칼질 중이었다. 엄마, 뭐 만들어? 니네 아빠 비 오는 날 파전 좋아하잖니. 엄마는 아빠를 위해 쪽파를 채소, 해물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우리 엄마, 아빠 너무 사랑하네. 사랑하지 그럼. 성한빈 아빤데. 사랑이 넘치는 엄마는 이 집안의 축이었다. 그런 엄마를 닮아 성한빈도 때때로 찾아오는 불행 앞에서 햇살처럼 자랄 수 있었다.

 

근데 엄마, 그 프라이팬은 이제 버려도 되지 않아?”

버리긴 왜 버리니? 이렇게 잘 되는데.”

 

엄마가 기름을 두르는 프라이팬은 한눈에 봐도 낡은 티가 났다. 엄마가 혼수용으로 챙겨온 것이라는 것을 한빈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빈보다도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었다. 프라이팬은 자주자주 바꾸는 게 좋다던데. 그 정도면 고물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생각났다. 고물섬. 그리고 보물섬. 그리고 어린 엄마.

 

엄마.”

?”

보물섬이라고 알아? 책방인데, 헌책방.”

 

프라이팬에 쪽파를 깔던 엄마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어머, 그 이름 오랜만에 듣네. 중얼거리면서 쪽파를 촘촘히 채웠다.

 

엄마 처녀 때 단골이었는데.”

우와, 그랬어? 근데 거기 고물섬 됐더라. 나 오늘 거기 갔거든.”

거길갔어?”

. 누가 뭐 좀 갖다 달라 그래서. 근데 거기 주인 할아버지 진짜 무섭게 생겼더라.”

혹시 눈썹 이렇게 생긴?”

그렇게 말하던 엄마는 쪽파 두 개로 사나운 눈썹을 흉내 냈다. 그러고 보니 딱 그랬다. 하늘로 치솟은 눈썹이 성난 호랑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분명히 거기서 알바하고 있다고 했는데.”

 

엄마, 나 씻고 내려올게요. 젖은 양말을 벗으며 2층으로 오르는 아들을 엄마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짧게 한숨을 쏟다가 쪽파 위에 계란을 깔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웃고 있었지만 묘하게 어두운 얼굴이었다.

 

 

취하면 애미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막걸리는 두 통이나 마셨다. 이건 다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는 비 오는 날 막걸리와 파전을 너무 사랑했다. 그리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너무 사랑해서 막걸리를 다섯 병이 나 사놨다. 엄마는 술 대신 보리차를 즐기는 여성이라 대작은 언제나 아들인 한빈의 몫이었다.

 

아빠 꿈이 아들이랑 마주 앉아 술 마시는 거잖냐!”

 

그렇게 말하는데 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는 매일이 술 대작이었다. 고작 하루, 더 소중한 아빠를 위해 못 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아빠의 주사는 개그였다. 평소에는 어떻게 숨기고 살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술만 마시면 그렇게 말주변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날의 주제는 고물섬이 되어버린 보물섬이었다. 한빈에게도 보물이 고물이 되어버린 낡은 간판은 꽤 재미있는 에피소드였던 것이다. 그래선지 핸드폰으로 똥개 훈련을 시킨 망할 놈의 인간은 잠시 잊혀졌다. 자모음 탈락으로 전혀 다른 뜻이 되어버리는 단어 찾기에 혈안이 된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는 일진을 이진으로, 선물을 신물로, 공장을 고자로 만들어 놓고는 혼자 껄껄 웃었다. 역시 아재들의 개그란결론은 단골인 엄마와 달리 아빠는 보물섬이니 고물섬이니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십쇼.”

 

애미애비도 못 알아보는 막걸리라는 말의 본문을 잊지 않고 엉뚱한 인사를 끝으로 한빈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아빠는 골아 떨어졌지만, 아직 한창때인 한빈은 그래도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책상에 올려두었던 낡은 핸드폰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허공으로 휘익 치켜들었다. 부셔버려!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한빈이 그렇게 파괴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격이 없는 인간도 아니라 접힌 폴더를 부서져라 펼쳤다. 영 켜지지 않던 핸드폰은 집에 돌아오자, 거짓말같이 푸른 액정을 빛냈다. 열받으니까 전화. 전화 걸어. 다시 들여다본 메시지 함에는 역시나 보물섬이라고 적힌 문자가 있었다. 한빈은 그대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 미쳤나?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에 술이 다 깰 지경이었다. 몇 번이나 통화 버튼을 눌러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며 다시 확인 후 걸어달라는 말만 반복됐다. ! 한빈은 핸드폰을 자신의 침대에 냅다 패대기친 뒤 자신도 그 위에서 버둥거렸다. 화난다. 이렇게까지 화가 날 수가 있나.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단단히 약이 올라서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은 술이 확 깼다고 생각했지만 취객은 취객이었다.

야이놈새끼야, 미친놈이야? 또라이냐? 너 마주치면 죽여버린다. 어쩌고저쩌고 한빈은 보물섬이라고 보내온 발신 번호를 향해 태어나 몇 번 써보지도 않은 육두문자를 남발하고서야 아이 시원해! 햇살처럼 방긋 웃으며 잠이 들었다.

 

 

 

 

为什么骂人?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라던 번호에서 답장이 온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 한빈은 자신의 신상 아이폰으로 수린과 카톡 중이었다. 나는 언니랑 파리에 다녀오려고! 첫 유럽 여행이라 너무 떨려! 드디어 여름방학이었다. 수린은 언니와 해외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한빈이는 뭐할 거야? 수린이 물었을 때 한빈은 괜히 귓불을 긁적였다. 딱히 계획은 없는데, 없다고 하면 한심해 보이려나.

 

중국어나 배워보려고.

 

그렇게 말한 건 순전히 구라였다.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는 건 영 멋이 없었다. 그런데 꼴랑 그 네 글자를 읽지 못한 건 좀 한심했다. 거기 어디예요? 였나. 우와, 역시. 또 나만 딩가딩가구나. 수린이 머쓱해하는 곰돌이 이모티콘을 보내는 사이 그 투박한 핸드폰이 협탁 위에서 반짝거렸다. 여전히 읽을 수 없는 한자는 번역기가 필요했다.

 

왜 저주합니까? 뭔 소리야.”

 

한빈의 자신의 형형색색의 화려한 핸드폰을 내려두고 우중충한 연두색 화면을 응시했다. 곧이어 도착한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 때문에 내가 곤란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한빈은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잊고 있었던 짜증이 확 일었다. 먼저 또라이처럼 군 게 누군데? 익숙하지 않은 자판을 무자비하게 눌렀다. 자주 오타가 찍혔기 때문에 지우고 다시 쓰느라 또 짜증이 일었다.

 

 

먼저 사람 엿먹인 게 누군데?

나는 사람에게 엿을 먹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의 친구에게 욕을 했어요.

친구가 많이 놀랐습니다.

나야말로 당신 친구에게 욕한 적 없어

 

 

따질 말들이 많았다. 어제 겪었던 모든 일들이 따질 일이었다. 하지만 옛날 폰에서는 말도 많이 할 수 없었다. 이놈의 글자 수 제한! 이거 몇 바이트나 한다고. 게다가 설정을 바꿀 수도 없는 붙박이 자판은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아서 한빈의 손가락은 느림보 거북이었다. 왜 그딴 구라를 쳤어? 라는 문장을 완성하는 동안 건너편에서 먼저 메시지가 도착했다.

 

 

덕분에 핸드폰은 잘 찾았습니다.

 

 

?”

 

 

그러니 나의 친구에게 욕은 그만해 주세요.

 

 

에엥?”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서 한빈은 몸을 일으켰다. 여름이라고 엄마가 새로 깔아둔 인견 이불에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핸드폰을 찾았다니 무슨 소리야? 핸드폰은 아직도 나한테 있는데? 한빈은 괜히 핸드폰을 이리저리 살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기능이라고 해봤자 전화를 걸고 받고, 문자를 주고받는 게 다인 이 핸드폰으로는 그만큼 뭔가를 확인할 만한 것도 없었다. 고작 해봐야 Anycall이라는 기기명, 배경 화면이랍시고 찍힌 회사 로고, 날짜

 

가 왜 이래.”

 

누군가 어긋난 시간의 틈을 발견한 순간에도 흑백 문자는 그 틈을 통해 여지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너머의 사람은 물었다.

 

 

그런데 내 번호를 계속 사용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문자의 발신일은 1999/06/20일이었다.

 

*

 

 

중국인 장하오가 한국의 A대 교환학생으로 오게 된 것은 아주 사소한 이유였다. 최진실. 그녀가 출연하는 한국 드라마 질투를 봐버린 것이었다. 모두가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 ‘타락 천사’, ‘중경삼림에 빠져있을 때 장하오는 걸어서 하늘까지를 보고 마지막 승부를 보고 사랑을 그대 품 안에를 보았다. 그 바람에 사버린 중고 색소폰은 아직도 중국 본가 창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다. 그때쯤 한국은 1997년 불어닥친 외환 위기로 온 국민이 차가운 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위기라는 건, 곧 누군가에게는 아주 쉬운 기회이기도 했다. 그 위기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있는 타국인에게는 더 그랬다. 위기의 땅에 스스로 발을 들이는 이들은 드물었고 그래서 장하오는 비교적 쉽게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한 여배우로 인해 택한 한국행이었지만, 사소한 계기로 커다란 선택을 하는 이들은 의외로 많았다. 당시의 장하오는 그렇게 큰 선택이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기나긴 인생에서 고작 일 년일 뿐이었다. 고작 그 일 년으로 자신의 삶이 그리 크게 변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리고 서울이라는 도시는 지독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지만 그렇다고 다 죽어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중국과 한국은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같은 틀 안에 있었지만, 비슷한 외형을 하고도 많은 부분이 달랐다. 특히나 위기를 대하는 능력이 그랬다.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던 한국 가수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가 라디오를 통해 잔잔하게 울리던 날이었다.

 

“182돈이란다.”

 

사학과 동기 병수가 동동주를 주둥이에 들이부으면서 말했다. 182. 그래도 중국에서는 꽤 한국어를 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책으로 배우는 것과 직접 현지인들 사이에서 부대끼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김건모 말이야. 금 모으기에 182돈을 냈다고.”

애걔.”

 

시종일관 투덜거린다고 투덜이라고 불리는 민철은 오늘도 투덜거리고 있었다. 1000돈 정도는 해야 냈구나~ 하는 거지 182돈 가지고 뭘. 지는 한돈도 벌벌 떠는 주제에. 하여간, . 그것을 시작으로 고작 스물셋의 그들은 나라가 처한 현 정세에 대해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논했다.

 

“IMF라는 게 뭐냐. 국가 부도 아니냐. 한보도 가고, 삼미도 가고, 기아도 가고다 해고 되는 마당에 학교고 나발이고 공사판에서 시멘트나 날라야 하는 거 아닌지.”

시멘트 날라서 뭐 해. 요즘 건물 지을 회사도 없는데.”

저기.”

 

고요히 앉아 있던 중국인 장하오가 느릿하게 손을 들었다. 서로에겐 거친 말을 뱉을지언정, 사학과 동기들은 타국에서 온 교환학생에겐 따뜻했다. 다들 친절한 얼굴로 장하오가 말을 고르고 뱉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깜박거리는 눈이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182어디에 내요?”

이 자식이 또 존댓말이네! 우리가 늙다리 교수도 아니고!”

 

그들은 느린 말을 기다려 줄 만큼 다정했지만 존댓말만큼은 참아주지 않았다. ! 우릴 늙다리로 만들었으니까 마셔! 그런 이유로 병수의 등에, 민철이의 등에, 이름도 모르는 학우 등에 업혀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허다했다.

 

금 모으기를 왜 하긴. 나라 살리려고 하지.”

 

누구의 솜씨인지 엉망으로 깔린 요 위에 누워 장하오는 창밖의 반달을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나라를 살리려고 금을 모으는구나. 아야야. 서슴없이 눌러앉아 코를 고는 동기를 사이에서 장하오는 찌그러진 깡통처럼 찌그러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리 싫지 않았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금을 모으는 사람들.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우리는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껍데기와 그 안의 알맹이는 전혀 같지 않았다. 최진실이 좋았다. 전도연이 좋았고 심은하가 좋았다. 그래서 이 땅에 왔다. 그리고 점점 이 나라가 좋아지고 있다. 국가 부도라는 말도 안 되는 타이틀을 단 이 차가운 나라가, 장하오는 조금 좋아졌다.

 

장하오가 재학 중인 사학과는 별관을 통으로 썼다. 여학우들이 득실거린다는 다른 인문대와 달리 사학과는 10명 중 9명이 남자였다. 그래선지 그들이 차지한 별관에서는 지독한 홀아비 냄새가 났다. 짜식들아, 좀 씻고 다녀라! 그렇게 외치던 국방색 셔츠의 선배마저 양말에서는 오징어 썩은 냄새가 났다. 여학생이 없으니 씻을 필요가 없었다. 씻지 않으니 있는 여학생들마저 도망갔다. 그런 인과관계가 분명한데도 통찰력이라곤 신문 기사 볼 때나 쓰는 인간들의 일상은 영 고리타분했다.

 

그날도 장하오는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국 술 너무 독해요. 존댓말 몇 번 했다고 막걸리를 몇 잔이나 원샷했더니 또 하숙집까지 업혀 가고 말았다. 이제 병수나 민철은 장하오의 방에서 코를 고는 게 일상이었다. 아직도 하숙집 이모에게 꾸벅 인사하는 장하오와 달리 병수는 누님누님, 하며 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내가 위로 누나만 여덟이거든. 누나들한테 아양 부리는 거 껌이지. 그 옆에서 민철은 목석처럼 숟가락을 들었다. 여자라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캔디가 전부였던 민철은 여자가 그 누구건 간에 얼어버리는 병에 걸려 있었다.

탁주라고 했던가. 그냥 맥주나 소주로 취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숙취였다. 변기통에 헛구역질을 할 때마다 뇌도 같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쏟아내고 나면 안경이 사라져있고 시계가 사라져있고 가끔은 지갑도 사라졌다. 대부분은 화장실 세면대에서 다시 발견되곤 했지만 핸드폰은 달랐다.

 

手机

 

화장실을 나서며 깨달았지만, 다시 돌아갔을 땐 이미 사라진 뒤였다. 주머니를 뒤져봐도 마찬가지였다. 사물함도, 하숙방 서랍도 마찬가지였다. 책방에 있나. 보물섬 마감 알바였던 장하오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책방으로 향했으나 결국엔 카운터를 붙잡고 좌절했다. 없다, 없어. 역시 그렇게 비싼 걸 쓰는 게 아니었는데. 그냥 8282나 찍을 수 있는 삐삐나 쓸 것을 우중충한 얼굴로 쌓인 책들의 먼지를 털고 있을 때 머리숱이 유난히 풍성한 왕 사장은 혀를 찼다.

 

젊은 놈이 왜 그리 죽상이야.”

 

내가 네놈 얼굴 하나 보고 뽑았는데, 그러면 쓰냐? 화교 2세대인 그는 당연하게도 중국어에 능했다. 부모는 인천에서 탕수육이 맛있기로 소문난 중국집을 운영했지만 그는 대를 이를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 큰형 부부가 가게를 물려받으면서 왕 사장은 보물섬이라고 이름 붙인 간판을 올려놓고 뿌듯하게 웃을 수 있었다.

 

죄송어서 오세요.”

 

장하오는 얼른 표정을 바꿔 웃으며 책방으로 들어서는 손님들을 맞았으나 죽상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전히 삐삐를 사용하는 사람들 속에서 핸드폰은 최고급 기계였다. 그 비싼 기계를 주머니가 가벼운 유학생 주제에 덜컥 사버렸으니 분실 뒤에는 타격이 컸다.

 

중국 형님! 요즘 해외 전화가 얼마나 비싼데! 이 핸드폰 하나면 부모님하고 하루 종일 통화해도 단돈 만 원이라니까?”

 

그리 살가운 아들은 아니었지만, 집을 떠나 있으니 그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었다. 종종 찾아오는 향수병은 타국 생활을 서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터무니없는 영업에 홀랑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사기꾼

 

병수가 가르쳐준 말은 참 유용했다. 사기꾼이 남긴 흔적을 수습하기 위해 장하오는 이 보물섬에서 책을 팔았다. 한국말이 서툴렀던 장하오가 왕 사장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서비스직이라몇몇 곳에서 퇴짜를 맞은 뒤 만난 은인이었다. 수업이 끝난 6시부터 11시까지, 장하오는 하루에 5시간을 노동했다. 사장이 화교인 왕 사장이라도, 학교 인근 책방의 손님들은 대부분 한국인들이었다.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역시 잘생긴 게 장땡이지.”

 

장하오를 카운터에 세운 뒤 껑충 뛰어버린 매출에 왕 사장은 참으로 흐뭇해했더랬다. 지금도 카운터에는 여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이제는 타학교에까지 소문이 난 건지 모르는 얼굴들이 부쩍 들었다. 멀대같이 큰 키로 안경이나 추켜 올리는 저 얼빵이를 보기 위해 손님들이 모여들고 있었으니, 웃음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왕 사장은 흐뭇했지만, 오직 핸드폰 하나 때문에 일을 시작한 장하오는 시무룩했다. 그대 왜 나를 그냥 떠나가게 했나요. 이렇게 다시 후회하게 할 줄 알았더라면 아픈 시련 속에 방황하지 않았을 텐데 카운트한 쪽에 둔 오래된 카세트 라디오에서는 그런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핸드폰이 제게 하는 노래처럼 들려서 장하오는 더 슬퍼졌다.

 

저기계산할 수 있을까요?”

 

좋은 향기가 났다. 별관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잔잔하고도 진한 향이었다. 하얀 손목에 걸린 얇은 가죽 시계에서도 별관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섬세함이 느껴졌다. 멍청하게 팔이나 괴고 있던 장하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노래 감상하시는데

, 아뇨. 계산, 계산합니다.”

 

말을 더듬는 장하오를 보며 머리를 넘기던 여자는 웃었다. 웃는 얼굴이 햇살처럼 예쁜 여자였다. 단순히 청순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일요일 오전 햇살같이 화사한 그녀가 고른 책은 병신과 머저리였다. 병신과 머저리 맞으시죠? 묻던 장하오는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다. 술에 취한 병수와 민철이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을 때나 쓸법한 단어들이 적인 책을 보며 포커페이스를 유지 기한 어려웠다. 그걸 알았는지 맞은 편의 여자도 웃었다. 둥글게 말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 들린 무언가가 장하오의 시선을 끌었다.

 

저기

?”

 

종이봉투에 담긴 책을 건네받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하오를 봤다. 어색하게 웃던 장하오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말했다.

 

핸드폰빌릴 수 있을까요?”

, 이거요?”

제가 오늘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정말이에요?”

 

그녀는 미심쩍다는 얼굴이었지만, 기분 좋게 웃는 표정은 그대로였다. 장하오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정말이에요. 찝쩍, 수작질, 어어, 뭐더라껄떡! 그런 거 아니에요.”

 

출처가 너무도 분명해 보이는 단어들을 남발하며 장하오는 얼굴이 벌게졌다. 그런 그를 보며 맞은 편의 그녀는 샐쭉 웃다가 자요, 핸드폰을 건넸다. , 감사합니다. 장하오는 어설프게 인사하며 여자의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분명 자신과 같은 기종인데도 훨씬 예뻐 보인다면 기분 탓인가.

 

나는 한경주에요.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

你的名字是什么?”

 

핸드폰에 무언가 입력하는 장하오를 가만히 보던 그녀가 먼저 물었다. 장하오가 어버버거리자 너무도 익숙한 언어로 다시 물었다. 그래서 장하오는 더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런 장하오를 보며 경주는 또 웃었다.

 

소문 다 났어요. 보물섬 잘생긴 알바 중국인이라고.”

 

답장 오면 내일 알려줄게요. 내일 봐요, 잘생긴 중국 오빠. 건네받은 핸드폰을 흔들며 그녀는 빠르게 멀어졌다. 어어, 장하오가 손을 뻗어도 닿지 않고 보물섬을 떠났다. 그것이 수작질이 보통이 아닌 한경주와의 첫 만남이었다.

 

 

 

19997,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으로 전 세계는 물론이고 서울 곳곳이 떠들썩했다. 종로의 명신극장 앞 사거리에는 종말을 칭송하는 사이비들과 이에 반박하는 종교인들이 각자의 푯말을 들고 시위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나라를 살리겠다며 금을 헌납하기 위해 자진해서 모인 시민들로 왁자지껄했다. 진풍경이었다. 그 가운데서 장하오는 극장 앞에 걸린 낡은 포스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1999년 일급 프로젝트

쉬리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김윤진.

 

장하오를 한국으로 오게 만든 최진실이나 전도연, 심은하의 이름은 없었지만 그때쯤 장하오는 이제 여배우를 떠나 그저 한국과 한국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 어떤 전공 수업보다도 동기들과의 술자리가 더 흥미로웠으므로 장하오는 금세 그들의 정서에 녹아들고 있었다. 그래서 이 포스터를 지나치지 못하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국 영화는 쉬리 개봉 전과 후로 나뉜다.”

 

라고 말한 것은 양말에서 오징어 냄새가 나는 구 선배였다. 영상학을 복수 전공하는 그는 사학도이자 영화학도의 영혼을 동시에 가진 이였다. 차갑고 때로는 뜨겁고 구린 냄새는 언제나였다.

 

“200.”

헤엑?”

그건 서울만 더한 수치고, 전국 수치는 500만 그 이상.”

 

다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런 시국에 200만 명이, 아니 500만 명이 영화를 본다고? 물론 나도 봤지만. 나도. 나도. 재밌는 있더라. 한석규 미쳤지. 최민식 미쳤지. 나 김윤진을 사랑하게 됐어. 근데 7월에 진짜 지구 종말할까? 400년 전 할배가 한 말을 믿냐?

 

 

남색과 회색이 교차된 체크무늬 남방을 걸친 장하오는 무거운 뿔테 안경을 추켜 올리며 포스터에 적힌 제목을 읽었다. 이게, 우리말로는 뭐더라. 이해하고 싶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명신극장 간판에는 여전히 거대한 쉬리 포스터가 걸려있었다. 200만이니 500만이니, 결코 믿을 수 없는 수치였으나 개봉한 지 3개월이 훌쩍 지났는데도 이렇게 상영 중인 것을 보면 영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자막 없어도 괜찮으려나.”

 

토요일 3시 두 자리 부탁합니다. 매표소에서 티켓을 끊으면서 장하오는 조금 걱정이 됐다. 최진실이 좋아서 한국에 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가 출연한 영화 마요네즈를 관람하는 일이었다. 한국인들 사이에 껴서 스크린을 가득 채운 최진실을 보았다. 그것은 참으로 황홀한 일이었으나, 당연하게도 절반 이상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덕분에 김혜자라는 멋진 중년 배우를 알게 됐으니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둘이서 하는 영화 관람에 내용을 절반도 파악하지 못한다면 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고맙죠? 내 덕에 핸드폰 찾았잖아요.”

 

핸드폰은 같은 과 후배에게 있었다. 중고로 팔아버리려는 것을 경주의 반협박 덕에 찾을 수 있었다. 저기, 선배, 그 여자 너무 무서워요, 그렇게 전해 들은 건 며칠 뒤의 일이었다.

 

, 사례금은 너무 정 없는데.”

 

그렇게 생긴 종이는 나한테두 많구주머니에서 한국은행이라고 찍힌 푸른색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자 그녀는 심드렁했다. 그러더니 곧 반짝 웃었다.

 

그 돈으로 영화나 보여줄래요?”

 

쉬리 봤어요? 안 봤어요? 잘됐다. 자막이요? 뭐 어때. 내가 알려주면 되지! 찝쩍거리는 것에 대단히 소질이 있었던 그녀는 또 그렇게 사라졌다. 떠나던 그녀의 손에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들려 있었다. , 그거. 알아보는 장하오를 경주는 신기하게 보았다.

 

이 책 어땠어요? 납치당하는 남자가 불편하진 않았어요?”

 

장하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남자를 납치하고 거칠게 몰아붙이는 최진실의 모습에 철저히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강민주를 연기할 수 있는 것은 최진실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진실은 해당 영화로 1994년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다. 그녀의 팬이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법한 결과였다.

 

준비하십시오! 준비하십시오! 끝이 머지 않았습니다! 준비하십시오! 준비하십시오!”

 

여자랑 영화 보는 게 얼마 만이더라. 단정하게 멘 가방끈을 쥔 채 장하오는 혼돈의 구간을 가로질렀다.

 

사이비는 물럿거라! 종말은 물럿거라! 사이비는 물럿거라! 거짓 메시아는 물럿거라!”

 

옷은 이거면 괜찮은가. 좋은 향기가 나던 경주를 생각하면 여러모로 모자란 느낌이었다. 이래저래 추궁당할 게 뻔했지만, 여덟 누나의 지휘 아래 옷깨나 입게 된 병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딱 그짝이네. 대여비 통닭이다, 이놈아!”

말은 바로 해라. 얌전하지만 잘생긴 고양이지.”

 

옆에서 아무런 수고도 없이 통닭을 얻어먹던 민철은 오랜만에 맞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는 문신처럼 걸치고 다니던 안경과 남방 대신 병수의 힙합 바지에 쫄티, 벙거지 모자를 쓴 장하오를 보곤 튀김가루가 날리도록 폭소했다.

 

이 무슨 서태지 옷 뺏어 입은 신승훈이냐.”

, 그렇게 이상해?”

이상하긴. 넌 닥치고 그 팔찌나 풀어봐.”

! 안돼! 이거 엄마가 생일 선물로 사준 거란 말이야.”

엄마 타령하는 게 마마보이가 따로 없네. 소문낸다?”

 

여차저차 그러한 이유로 장하오는 멋쟁이 팔찌까지 낀 채 명신 극장으로 향했다. 햇볕이 좋은 초여름의 토요일이었다. 극장 앞은 주말답게 북적거리다 못해 미어터졌다. 서울의 모든 사람들이 이쪽으로 몰려드는 것만 같았다. 그 속에서 장하오는 누구보다 유행에 민감한 한국 멋쟁이처럼 보였지만, 본인은 머쓱해 몇 번이나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는 중에도 누군가는 준비하세요!”를 외쳤고 누군가는 물럿거라!”를 외쳤으며 또 누군가는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노래까지 불러댔다. 그런 아비규환을 뚫고 그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배꼽이 보일락말락 한 민소매 차림으로 각진 어깨를 그대로 드러낸 채, 장하오를 향해 웃었다.

 

오늘 되게 오렌지족 같다.”

 

그런 말을 들어버렸기 때문에 장하오의 얼굴은 오렌지빛이 됐다. 그런 장하오에게 쉬리로고가 떠오르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경주는 속삭였다. 멋있다는 뜻이에요. 그 순간 장하오는 깨달았다.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가 운명을 느꼈던 그날, 어느 때보다 멋쟁이처럼 서울 한복판을 누볐던 그날, 한 여자의 마음에 콕 들어박혔을지도 모를 그날. 영화 쉬리가 상영되던 영화관에서는 결코 막을 수 없는 불길이 치솟았다. 1945년에 개관한 종로의 영화관에는 스프링클러는 고사하고 비상구조차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사상자는 많았다. 생존자 명단에 한경주는 있었지만 장하오는 없었다. 400년 전 프랑스의 천문학자 노스트라다무스가 종말을 예고한 19997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

 

세상 참 좋아졌다. 이제는 실내에서도 파도 서핑을 할 수 있는 시대였다. 한빈은 수린과 함께 서초의 한 실내 서핑장에서 인공서핑을 즐겼다. 서핑장에서 대여한 쇼트 웻슈트를 착용한 채 젖은 머리를 휘날리며 파도 위를 날았다. 또 물보라를 일으켜 da da da da da da da da da da da da da da 눈치 좋게 깔린 배경음악이 흥겨웠다.

 

너어무 재밌다.”

 

흔들리는 보드 위에서 중심을 잡느라 힘들 법도 한데 수린은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수린의 그런 점에서 한빈은 진한 호감을 느꼈다. 한빈 역시 잔잔한 데이트보다는 이런 만남이 훨씬 좋았다.

 

나 여행 다녀오면 진짜 바다로 가자. 어때?”

.”

아아! 신난다.”

 

수린은 이틀 뒤 파리로 떠난다. 인터라켄을 지나 뮌헨, 할슈타트, 잘츠부르크, 프라하, 부다페스트, 베니스, 피렌체, 로마를 밟은 뒤 한국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한 달간의 이별을 앞두고 마지막 데이트인 셈이었다. 오늘 말하는 게 좋으려나. 한빈은 고민했다. 이 썸을 깰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러니까, 남사친 여사친이 아닌 남친 여친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 바삭하게 구워진 돈가스를 오물오물 씹으면서 수린은 귀엽게도 웃었다. 이제 그만 사귀까? 말만 한다면 곧장 응! 우렁차게 대답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한 달이다. 숏츠에 절여진 요즘 MZ에게 한 달은 일 년만큼이나 길었다. 마음이 변하기엔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시간이었다. 괜히 어정쩡한 사이가 되느니 가볍게 한 달 더 지켜보는 것이 좋다. 그래서 썸이라는 걸 타는 것이다. 때로는 연인보다 썸일 때, 관계는 더욱 자연스럽게 오래 흐른다. 그러다 흐지부지되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다는 건 결국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는 뜻일 테니까. 대학생들의 중심 활동지인 캠퍼스와 대학가를 벗어나도 사람을 만날 장소는 많았다. SNS, 어플, 하물며 게임을 하다가도 생기는 것이 인연이었다. 가벼운 인연들이 넘쳐난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더 고리타분한 시대가 됐다. 그러므로 한빈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갔다 와서 보자.”

. 너두 중국어 공부 열심히 해.”

 

언젠가 건넨 빈말을 잊지 않은 수린이 가볍게 인사하며 돌아섰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제야 한빈도 기억했다. 그랬지, 중국어. 당연하게도 집에 두고 온 낡은 핸드폰이 생각났다.

 

 

내 번호를 사용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의 연속이었다. 한빈은 그 섬뜩한 메시지를 받았던 그날을 여전히 잊을 수 없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A대 사학과 97학번 장하오에요. 그쪽은 누구예요?

 

 

남자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97학번이라니. 선배여도 너무 대선배인 바람에 한빈은 잠시 겸손해졌지만, 그래도 기죽지는 않기로 했다. 선배면 사람 똥개 훈련 시켜도 돼?

 

 

저는 A대 경영학과 22학번 성한빈인데요.

 

 

빈정 상한 마음을 애써 누른 채 답장했으나 남자의 답장은 이랬다.

 

 

장난은 나쁜 겁니다.

무슨 장난이요? 그런 거 안쳤는데요?

요즘 세상에 22학번이 어디 있습니까?

왜 없어요. 97학번도 있는데 22학번도 있죠.

 

 

그때의 한빈에게 장하오라는 97학번 선배의 발언은 다소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22학번이 학교를 다녀,와 같은 맥락으로 읽혀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럼 그쪽은 100살입니까?

그쪽은 50살이라서 좋으시겠네요?

 

 

남자의 비아냥은 끝을 몰랐고 그러므로 한빈도 질 수 없었다. 늙다리 주제에 어리다고 무시해? 역대급 꼰대네, 진짜. 그러나 남자는 곧 죽어도 자신의 늙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50살 아닌데? 절대 아닌데?

 

흐음,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말도 안 되는 발신일이라던가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10자의 발신 번호 같은 것들이 내심 신경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장난질을 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한빈은 이전보다 다부진 얼굴로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럼 이번엔 나와 보시던가요.

보물섬

아니 고물섬이던가?

 

 

장난질에 맞서는 건 장난질밖에 없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바람 맞춰주겠다고 생각하며 한빈은 낡은 폰을 휙 던져버렸다. 어디 종일 기다려 보라지. 그날 한빈은 행복한 얼굴로 잠이 들었더랬다.

다음 날 97학번 장하오와 고물섬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에 한빈은 이섭과 PC방에서 마우스를 놀리고 있었다. 잘하지도 못하는 롤에 심취해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게임에 임하고 있었다.

 

웬일이냐. 네가 롤을 다하고.”

, 가장 한심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거든.”

너는 말을 해도

 

저 새끼가 지금 나 깐 거 맞지? 본의 아니게 이섭의 뼈를 후려친 와중에도 한빈은 열정적으로 마우스 질을 하고 있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바람에는 바람. 쌤쌤이다 이거야. 컨트롤은 엉망이었지만 모니터를 응시하는 얼굴만큼은 프로게이머가 따로 없었다. 단 한 번 승리하지 못해놓고도 개운하게 집으로 돌아온 한빈은 97학번 장하오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게 된다.

 

 

你是我认识地韩国人中最坏地

 

 

그러므로 시원하게 복수를 해놓고도 찜찜한 마음이 됐다. 최악이라니? 살며 그런 말을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므로 한빈은 장하오와 다시 약속을 잡고 말았다. 최악이라니요? 먼저 바람맞힌 건 그쪽 이신대요? 97학번이 진짜라면 선배라는 호칭이 마땅했지만 어쩐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당한 게 있어서 그런지 상당히 유치했다. 그러나 상대도 못지않게 유치했으니 창피한 줄도 몰랐다. 바람은 나 혼자 두 개 맞았어. 따져 묻는 한빈에게 장하오는 그렇게 버럭버럭했다. 두 개는 배추 셀 때나 두 개고. 바람은 두 번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바보세요?

 

 

傻瓜是你

 

 

이 인간, 교묘하게 이럴 때만 한자를 쓴단 말이지. 나도 알아요. 자존심이 상한 건지 뻔히 틀려놓고도 박박 우겼다. 두 개 두 번 나도 알아. 그런데 왜 말은 까? 50살이라 이건가?

 

 

보물섬으로 와

이번에 안 나오면 경영학과 쫓아갈 거야

그래 고물섬

 

 

한빈도 지지 않고 말을 잘라먹었더니 장하오는 기분 나빠했다. 타인의 직장을 그런 식으로 비하하는 건 나쁜 놈이나 하는 짓이야. 가르치려 들 땐 또 한국말이 유창해서 어이가 없었다. 50살이라 그런가 능구렁이가 따로 없네.

 

고물섬을 고물섬이라고 하는 게 뭐!”

 

정말로 답지 않게 유치하게 군 뒤에는 핸드폰을 휙 던져놨다. 그 집 간판이 고물인데 나보고 어쩌라고? 어떤 아재인지 심히 궁금하네. 한빈은 은근 기대에 찬 얼굴로 잠이 들었더랬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한빈은 또 바람 맞고 만다. 97학번 장구렁이에게. 부쩍 더워진 날씨는 기울어진 비탈길을 오르기엔 다소 벅찼다. 아마 그래서 더 화가 난 모양이었다. 장하오는 유난히 긴 여름 해가 꼬리를 감추고도 한참을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켜지지 않는 핸드폰은 무용지물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법칙이 있었다. 핸드폰은 집 밖에선 켜지지 않는다. 그런 이게 핸드폰이야? 집 전화지.

 

 

나 보물섬에서 일해요.

 

 

그 말이 떠올랐기 때문에 한빈은 누런빛을 은은하게 내뿜는 고물섬으로 발을 들였다. 다른 매장들과 달리 에어컨을 전혀 켜지 않는 고물섬에는 천장과 벽 곳곳에 겨우 선풍기 몇 대가 달려 돌아가고 있었다.

 

여즉 안 갔어? 우리는 알바 같은 거 안 쓴다니까.”

 

언제나처럼 돋보기안경을 걸친 채 관상학 서적을 넘기던 노인은 건성으로 말했다. 옳지, 옳지, 여기 있구먼. 미간이 좁은 것이 고집이 엄청 셀 상일세. 노인이 활짝 펼친 관상학 책을 들고는 한빈과 번갈아 봤다. 제가, 제가 고집이 세요? 오늘의 운세를 찰떡같이 믿는 한빈은 금방 홀리고 말았다. 고집만 세? 자존심도 세고. 어디 보자. 눈썹이 진한 것이 재복이랑 인복은 좋겠구먼. 학교는 어디 다녀? 화개인중인 것이 예체능 기질이 다분하구만. 역시, 역시. 예대를 갔어야 했어. 춤이라도 췄어야 했어! 홀려서 듣던 한빈은 뒤 늦게야 정신을 차렸다.

 

그게 아니라요. 혹시 여기 장하오라는 알바생 있나 해서.”

장하오, 장하오라

 

노인은 침을 바른 손가락으로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한참을 넘기다가 한 페이지를 펼치더니 여깄구만, 여기. 투박한 중지로 툭툭 찍었다. 거기에는 턱이 얄쌍하고 짙은 눈썹에 독수리 눈매를 가진 남성의 얼굴이 있었다.

 

이 관상이 말이지 보통 관상이 아니다 이말이여. , , , 이마까지 이혼수가 강해서 평생 독신으로 살 팔자라 이거여.”

이게 누군데요?”

누구긴 누구야. 학생이 찾는 장하오지.”

 

한빈은 터덜터덜 비탈길을 걸었다. 조금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허탈한 얼굴이기도 했다. 우리 가게에서 일을 하긴 했지. 다른 애들은 몰라도 걔는 잊을 수가 없지. 그것이 쉽게 잊을 수 있는 관상이 아니지, 관상이. 관상책 속 독수리 눈매의 그림을 쓱쓱 매만지던 노인은 말했다.

 

죽은 놈은 왜 찾는 것이여?”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럼 나, 지금까지 귀신하고 연락한 거야? 귀신에홀린 거야? 그 순간엔 소름을 넘어 오싹해졌다. 한여름인데도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낡은 핸드폰이 담긴 가방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한빈은 오두방정을 떨며 가방을 뒤졌다. 당장에라도 집어 던질 기세였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발신인 일과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011로 시작하는 발신 번호, 이 모든 것을 동원해 장난질을 치는 97학번 선배. 노인은 말했다. 죽은 지 20년도 더 됐다고. 한이 남아도 천 번은 남았을 거라고.

 

파릇한 기운이 그리웠나 보구먼.”

 

그 말이 가장 무서웠다. 생각해 보면 핸드폰을 주운 위치도 섬뜩했다. 이제는 누구도 찾지 않는 폐건물. 거긴 왜 잠겨 있지 않았던 걸까. 비탈길을 내달리던 한빈은 쓰레기통을 찾기도 전에 핸드폰을 든 손을 치켜들었다. 가로등도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골목이었다. 그곳을 향해 한빈은 힘껏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활짝 열렸다. 아무래도 베터리가 분리된 것 같았다. 다행인지 뭔지 바깥에서는 결코 켜지지 않는 이상한 핸드폰, 아니, 귀신 붙은 핸드폰은 활짝 열린 상태에서도 시커멨다. 골목 밖을 향해 몸을 트는 순간이었다. 전력이라곤 없을 핸드폰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그 검은 골목에 미세한 초록 불과 함께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선명한 벨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그리고 뚝 끊겼다. 아니 연결됐다. 통화 버튼을 누른 적도 없이 핸드폰에서는 벨 소리 대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22학번 성한빈 씨?

당신, 어디야?

 

아주 선명한, 젊은 남자의 음성이었다.

 

*

 

 

다녀왔습니다.”

왕자 왔어?”

 

아직도 몸에서는 서핑장의 소독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이르게 귀가한 아빠는 엄마와 사이좋게 저녁을 준비하다가 낯 뜨거운 인사를 큼지막하게 했다. 왕자는 무슨. 옆에서 말리던 엄마가 반갑게 인사 했다.

 

우리 공주 왔어?”

예예, 왕자이면서 공주 귀가 완료하였습니다. 충성.”

 

아들의 재롱에 두 사람은 좋다고 웃었다. 그들은 결혼 20년 차를 훌쩍 넘어섰지만 참 사이가 좋았다. 특히나 엄마를 향한 아빠의 사랑은 열렬했다. 여전히 그 시절 복학생의 느끼한 눈으로 엄마를 보았다. 첫눈에 반했지. 얼마나 예쁘던지. 그 시절 이야기나 나오면 아빠는 마치 뮤지컬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신이 나서 흥얼거렸다. 엄마는 언제나 미소를 띤 채 가만히 듣기만 했다. 다 좋은데 극장 데이트를 한 번도 못 해봐서 안타깝지. 그치 여보? 어째 그때는 극장 데이트 한번 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 몰라. 그러고 보면 한빈 역시 엄마와 극장 데이트를 못 해본 건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활달한 사람이었고 한빈은 하나뿐인 아들이었기에 종종 데이트를 즐겼다. 엄마는 놀이동산도 좋아했고 오락기가 가득한 게임렌드도 좋아했고 가끔은 번지점프를 뛰자고 조르기도 했지만 영화관 데이트만은 이상하게도 꺼려했다. 엄마, 영화관이 싫어?

 

그냥, 답답하잖니.”

 

방탈출 게임은 잘만 하면서. 그보다 훨씬 넓은 영화관은 답답하다고 했다.

 

아들, 오늘 저녁은 샤브샤브다.”

, 씻고 내려올게요.”

 

우렁차게 대답하며 계단을 오르는 동안 두 사람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그러므로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언제나 행복하니까. 잘 웃고 우리를 사랑하니까. 영화관 따위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귀신 성불 시키는 방법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한빈은 책상머리에 앉아 그렇게 검색했다. 그리고 스탠드를 켜면 가장 빛나는 자리에는 그것이 있었다. 귀신 붙은 핸드폰. 이제는 여기저기 기스투성이라 더 볼품없었다. 이것이 왜 다시 이곳에 있냐고 묻는다면글쎄, 호기심? 다행히 저주받은 핸드폰은 아니라 제 발로 걸어들어오는 끔찍한 일은 없었다. 다만 그 가벼운 단어로밖에는 설명이 안 됐다. 한빈은 궁금했다. 20여 년 전 죽어버린 이 남자는 왜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도는지. 혹시 한이라도 맺혔는지. 아니면 잊지 못한 사람이라도 있는 건지. 그리고 왜 하필 나인 건지. 모든 혼이 그러하듯 남자는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거기 몇 년도에요?”

몇 년도긴. 1999년도지.”

 

베터리와 분리되고도 빛나는 핸드폰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한빈은 물었다. 남자는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냐는 투였다. 그리고 97학번 주제에 중년 남성의 기운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젊은 목소리를 들으며 한빈은 미간을 구겼다.

 

그쪽, 몇 살이에요?”

스물셋.”

 

순순히 대답하는 그는 역시나 그렇게 말했다. 비탈길을 벗어나 번화가 쪽을 향해 선 한빈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잘 들으세요.”

好的

나는 스물둘이고. 여긴 2024년도에요.”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당황한 것 같았다. 당신, 죽었어. 귀신이라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또 한 번 죽이는 꼴인 것만 같아서, 한빈은 벌겋게 달아오른 입술을 짓씹었다.

 

우와.”

……

미래의 사람이에요?”

안 놀라세요?”

조금 놀랐지만그보다 멋있다는 생각이 먼저야.”

 

그는 너무 쉽게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옛날 사람들은 다 고리타분한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한 여사도 꽤 개방적이지. 언젠가 옷 정리를 하던 엄마의 옷장에서 보았던 수많은 배꼽티들, 끈만 달랑 달린 민소매들을 보고는 놀랐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번화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그것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1999년도의 귀신을 향해 한빈은 말했다.

 

근데요.”

.”

왜 반말이세요? 저번부터 계속 거슬려서요.”

미안. 나 외국인이라 그런 거 잘 몰라요.”

 

하마터면 하다 하다 외국 귀신이세요? 하고 물을 뻔했다. 그때 1999년도 귀신은 말했다.

 

근데 내가 진짜 형이니까 반말해도 돼. 그치?”

 

귀신이 좋아하는 장소에 가보세요.

효과가 있을 거에요.

 

202312월 작성된 글과 답변이었다. 요즘 아무래도 운이 좋지 않아 귀신 좀 승천시키고 싶다는 글에 달린 글이었다. 2023년 적힌 글로 1999년의 귀신을 승천시킬 수 있을까. 한빈이 고민하는 사이 결코 충전 한번 시킨 적 없는 핸드폰은 어김없이 울렸다.

 

 

한빈아, 오늘 미래는 어때? 무사해?

 

 

이제 남자는, 아니 장하오는 한빈을 그렇게 불렀다. 한빈아, 라고. 귀신하고 이렇게 친해져 버려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한빈은 꽤 즐겁게 답변하는 중이었다.

 

 

이상 무. 미래는 안전하답니다.

 

다행이다. 여기는 종말 예언 때문에 오늘도 시끄러워.

하숙집에 휴지가 다 떨어져서 슈퍼에 사러 갔더니 매대가 텅텅 비어 있더라.

종말보다 사재기가 더 문제인 것 같아.

 

 

장하오는 종알종알 말이 많았다. 한글이 재밌다고 했다. 아직 주변에 핸드폰 가진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이렇게 문자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러한 이유로 종일 한빈과의 문자 시간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므로 한빈은 말할 수 없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19997월에 종말은 오지 않는다는 미래는 너무 쉽게 누설해 놓고 장하오 바로 당신이 귀신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중국에서 왔다는 그는 한국 생활에 누구보다 만족하고 있었다. 형편이 된다면 눌러앉고 싶어. 한국, 나랑 잘 맞는 것 같아. 너랑도 잘 맞는 것 같고.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과거의 남자였다.

한빈이 장하오에게 허물없이 마음을 열어버린 계기는 어이없게도 배우 최진실 때문이었다. 지구에 종말이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장하오는 물었다.

 

진실이 누나는?”

누구?”

우리 진실이 누나.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 탔어? 탔지?”

 

상당히 들뜬 목소리였다. 최진실이라니. 아는 이름이긴 했지만 익숙한 이름은 아니었다. 한빈에게는 먼 세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디 보자말을 늘이며 고물 폰과는 비교도 안 되게 번쩍거리는 자신의 아이폰에 그 이름 석 자를 검색했다. , 최진실 좋아하는구나. 응응! 좋아해! 진실이 누나 때문에 한국 왔어. 진짜야!

 

 

한빈은 머쓱한 얼굴로 턱 언저리를 긁었다.

 

? 대상 못 탔어? 에이, 그래도 괜찮아. 앞으로 타면 되니까. 우리 진실이 누나, 거기서도 예쁘지? 멋있지?”

그게.”

 

2008년 사망했다는 말에 장하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덜커덩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고물섬, 그 시절에는 보물섬. 그곳의 묵직한 미닫이문이었다. 그리고 장하오는 펑펑 울었다. 날파리가 잔뜩 붙어있는 가로등의 그림자 너머에 숨어 장하오는 오래 울었다. 이렇게나 인간적인 귀신이라니. 이렇게나 마음 약한 귀신이라니. 한을 품은 귀신들은 악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다던데, 장하오에게서는 그런 기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순수하고, 다정하고, 섬세했다. 그런 남자였다.

 

괜찮아. 지금 여기에선 살아 있으니까. 더 많이 좋아할 거야. 집에 가면 엽서 써야지.”

 

한바탕 울어 재낀 장하오는 그렇게 말했다. 아아, 이렇게 긍정적인 귀신이라니. 이렇게 사랑이 가득한 귀신이라니. 그러니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에요. 언젠간 소멸할 것이고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에요.

 

그래 맞아, 그러면 돼. 형은 형의 시간을 살면 돼.”

 

그러나 말할 수 없었으므로 한빈은 그렇게 장하오를 위로하고 말았다.

 

 

, 좋아하는 장소 있어?

 

 

한빈이 물었을 때 장하오는 곧장 대답했다.

 

 

어어어엄청 많지. 한국 예뻐.

하하; 그중에 하나만 꼽아 봐.

하나만? 너무 어렵다.

근데 좋아하는 장소는 왜?

 

 

, 승천시키려고. 이런 소리를 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책상에 손가락을 도로록 굴리며 고민하는 사이 문밖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빈아, 저녁 먹자!

 

, 곧 내려갈게요!”

 

대답과 동시에 낡은 폰 위에서 손가락을 굴렸다. 이제 한빈은 이 어색한 자판에 꽤 적응을 한참이었다. 글자를 조합하는 손가락이 빨랐다.

 

 

내가 형 소원 들어줄 거야.

그러니까 하나 골라!

 

 

그렇게 보내놓은 뒤 한빈은 방을 나섰다. 고기 엄마 아빠가 다 먹어버린다! 아빠의 유치한 도발이 너무 잘 먹혔다. 덩그러니 남은 캄캄한 방에서 핸드폰은 또 혼자 울었다.

 

 

구둔역, 반딧불이 보고 싶어.

 

 

낭만 있는 귀신이구만. 한참 뒤 배를 두드리며 문자를 확인한 한빈은 피식 웃었다.

 

 

 

 

수요일. 장하오는 수요일을 소원의 날로 잡았다. 생각보다 빠르잖아? 한빈은 가방을 챙겨 메며 낡은 핸드폰도 함께 챙겼다.

 

 

수요일이 그나마 덜 바쁘거든.

주말엔 약속이 있고

괜찮지?

 

 

전날 장하오는 그렇게 말하면서 조금 미안해했다. 그러면서도 들떠 있었다.

 

 

소원 들어준다는 사람 처음이야.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나도 이런 말 처음인데

(||)

(> . <)

지금 그거 뭐야? 무슨 모양이야?

토끼!

꽃을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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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미래의 사람들은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하는구나!

 

 

그렇게 말해버리는 바람에 한빈은 머쓱해졌다. 참나, 그러는 과거의 당신네들은 참 촌스럽네요! 요즘 시대의 메시저들이 어느 만큼 발달했는지 알려주면 기함하겠구만. 어찌 됐든 한빈은 자주 먹통이 되는 핸드폰을 들고 구둔역으로 향했다. 가는 길을 검색하다가 알게 됐다. 구둔역은 이미 오래전 영업을 마친 폐역이였다. 그쪽에서도 폐역인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핸드폰은 여전히 먹통이었다. 이러면 계획에 문제가 생기는데. 구둔역과 가까운 일신역으로 향하는 무궁화호 한빈은 걱정에 잠겨 있었다.

 

귀신 들린 핸드폰이라 그런가, 너무 낡아서 그런가. 이 오래된 애니콜은 조금 이상했다. 처음에는 그저 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충전은 전혀 되지도 않으면서 늘 꺼져있다가도 어느 순간엔 반짝거리며 우렁차게 울어댄다. 나중에는 역시 귀신 들린 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단순한 패턴이었다. 핸드폰은 귀신들이 활개 치는 해가 진 뒤에만 빛났다. 마치 하늘에 뜬 별 같았다. 뭘까. 정말 그런 섬뜩한 에너지로 작동하는 걸까. , 오싹하구만. 한빈은 핸드폰을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으며 어깨를 떨었다. 느리게 가는 무궁화호는 에어컨이 너무 빵빵했다.

일신역에서 구둔역까지는 도보로 15분 정도가 걸렸다. 하지만 한빈은 걸음이 빠른 편이었기 때문에 그보다 이르게 구둔역에 도착할 수 있을 테지만 어째선지 안내된 시간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이 좋았다. 높은 건물이 없는 하늘은 막힘없이 주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런 하늘 진짜 오랜만이구나.”

 

반딧불이를 보기 위해선 밤이 와야 했다. 그래서 한빈은 오후가 되어서야 구둔역으로 향했다. 아마 장하오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귀신인 장하오는 뭘 타고 거기까지 갔으려나. 날아서 갔으려나. 벽을 통과해서 갔으려나. 순간이동으로 갔으려나. 아무튼 나보다는 쉬웠겠지. 그런 부분은 조금 얄밉고 조금 부러웠다.

노을 지는 하늘 아래 선 구둔역은 꼭 연극 무대의 배경 같았다. 노이즈가 낀 오래된 영화 속 풍경 같았다. 옛 정취가 느껴지는 간이역이였다. 용산역이라던가, 서울역이라던가. 그런 거대한 역들은 물론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지하철 역사보다도 훨씬 작았다. 그래서 운치 있었다. 한빈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었다. 사진첩에 남겨두고 싶은 광경이었다.

 

철길을 조금 걸었다. 폐역인 만큼 선로를 따라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이 구둔역의 최대 장점이었다. 그래선지 표지판에는 여러 창작물들의 배경이 되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실제로 구운역 곳곳에는 카메라를 든 이들이 많았다. 사진쟁이들의 출사 명소가 된 것은 아마도 폐역이 된 뒤부터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이제는 멈춰버린 것들, 다시는 움직일 수 없는 것들, 추억이 되어버린 것들, 과거가 되어버린 것들. 현재의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지나간 시간들을 그리워했다.

반딧불이, 볼 수는 있는 걸까. 사진을 몇 장 찍다가 주변을 둘러보던 한빈은 조금 막막해 보였다. 반딧불이는 아주 어릴 적 시골에서 한 마리 정도 본 적 있었던 것 같은데. 그 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환상 속 동물처럼 도시의 강렬한 빛 속에서는 반딧불이의 은은한 불빛은 결코 반짝일 수 없었다.

 

인근 벤치에 앉아 꽤 묵직한 가방을 뒤졌다. 슬슬 해가 지고 있었으니 준비를 해야 했다. 한빈은 가방에서 막걸리 한 병과 떡 한 팩, 전 한 팩을 꺼냈다. 집 근처 시장에서 이천 원씩을 주고 산 것이었다. 위험하다고 판단한 촛불 대신 챙긴 미니 캔들도 꺼내 불을 붙였다. 제법 운치 있었다.

 

, 제사상까지 운치 있으면 어쩌란 말이냐.”

 

그것은 한빈이 장하오 귀신을 위해 준비한 제사상이었다. 사진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건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다이소에서 산 천 원짜리 액자에 꽂아둔 장하오명패를 앞에 두었다. 맞은 편에 세워진 그 이름을 가만히 보다가 한빈은 말했다.

 

이거 다 형 위해서 하는 거야. 알지?”

 

, 모르겠구나.내가 말해준 적이 없으니. 잘 될지 모르겠지만, 한빈은 오늘을 끝으로 이 과거의 남자와 이별할 생각이었다. 승천을 하고 안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무당도 아니고. 그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만큼의 도리를 할 생각이었다. 내 이런 마음을 알아서 승천도 해주면 좋겠지만.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역시, 내 추리가 맞다니까. 방금 전까지 환하던 하늘은 어느새 완전한 어둠이었다.

 

한빈아!”

 

장하오는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잔뜩 들떠 있었다.

 

, 도착했어요?”

. 여기 처음인데 정말 좋다. 서울이랑은 또 달라.”

맞아. 고즈넉하고 너무 좋네.”

고즈? 그게 무슨 말이야?”

, 고요하고 뭐 그런 느낌?”

한빈이도 잘 모르는구나.”

 

장하오는 킥킥 웃었다.

 

그냥 느낌으로 쓰는 거지. 누가 뜻 다 알고 쓰나?”

 

쳇쳇 거리자 장하오는 또 웃었다.

 

한빈이 귀여운 구석이 있구나.”

참나, 그걸 이제 아셨나?”

 

한빈은 그렇게 대꾸하며 젓가락으로 장하오의 이름이 적힌 액자를 툭 쳤다. 그 바람에 액자가 뒤로 툭 넘어졌다.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아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

, 잘못해서 간판에 머리 맞았어. 나 키가 좀 크거든.”

 

바보야, 그건 키가 커서 그런 게 아니야. 내가 형을 젓가락으로 이렇게 때려서 그런 거야한빈은 어쩐지 미안해져서 얌전히 장하오의 이름을 세워두었다. 한빈은 캔들이 은은하게 빛나는 풍경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달이 밝은 날이었다.

 

근데 형은 한국이 좋아?”

, 너무 좋아.”

어떤 면이?”

친구들 착하고, 음식도 맛있고 그리고

그리고?”

 

장하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저기 데이트에는 어떤 옷이 좋을까?”

갑자기요?”

아니나 주말에 데이트하게 됐거든.”

 

, 귀신이 별걸 다 하네.

 

극장에서 영화 볼 거야. 쉬리. 오늘 표도 끊었어.”

오호, 쉬리? 그 영화가 그때쯤 개봉했구나.”

, 엄청 인기 많아.”

맞아. 한국 영화는 쉬리 전후로 나뉜다는 소리도 있을 만큼.”

. 그거 병수도 같은 말 했어! 진짜구나!”

병수는 누구야?”

내 친구! 한국인! 착한데 존댓말 하면 술 먹여요.”

 

잔뜩 흥분해서 말하는 것이 쌓인 게 좀 많은 모양이었다. 한빈은 다리를 꼰 무릎에 턱을 괸 채 그 이야기를 들었다. 나 그래서 반말밖에 못 해. 존댓말 다 까먹었어. 그래서 한빈이한테도 반말한 거야. 이제 날 이해하겠어? 몇 주 새 부쩍 늘어버린 한국말이 신기하고 웃겼다.

 

맞다. 나 친구들한테 혼났어.”

?”

이상한 말 쓴다고. 한빈이 가르쳐줬잖아. 킹받는다. 외계어 쓴다고 혼났어.”

에엥? 외계어라니? , 20년 뒤에는 이 없으면 대화를 못 해요. 킹받는다. 킹왕짱. 킹정, 킹리적 갓심! 얼마나 많이 쓰이는데.”

잠깐만, 잠깐. 지금 너무 빨라서 외계어 같아.”

형까지 그럴 거야? 이 알못들아.”

, 알못?”

그래 이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

, 그렇게 심한 말을

 

장하오는 마치 욕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충격을 받았다. 아무래도 알못이라는 어감이 욕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형 그래서 데이트에 뭐 입을 건데.”

잘 모르겠어. 옷 잘 입는 거 어려워.”

, 형 평소에 어떻게 입는데?”

?

 

장하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리고 한빈은 장하오의 설명에 따라 그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간판에 머리를 찧을 정도로 큰 키에, 문신처럼 걸치고 다니는 흰 티셔츠와 청바지, 그 시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푸마 스피드캣을 신고 회색과 검은색 흰색이 섞인 남방, 혹은 푸른 빛이 도는 남방을 자주 걸치는 남자. 어쩐지 얼굴은 고물섬의 노인이 넘기던 관상학 서적 속 독수리 눈매의 그림이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관상의 얼굴.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처음이었다고 말한 덕에 독수리 눈매의 얼굴은 샤방사뱡했다.

그 순간 핸드폰 너머에서 딩딩딩딩, 열차 입차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이런 소리가, 들릴 수가 있나? 그런 의문을 품기도 전에 장하오는 한빈을 재촉했다.

 

나는 지금 3번 앞에 있어. 너도 거기 섰으면 좋겠어.”

 

굳이 그래야 하나 싶었지만, 오늘만큼은 그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좋아하는 것,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그것들이 완전히 충족되었을 때 혼은 승천에 가까워진다.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3번 앞에 섰어.”

좋아.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어. 들려?”

, 들려. , .”

.”

여기는 폐역이야. 그래서 기차가 다니지 않는대.”

그렇구나.”

서운해?”

서운하긴 한데

열차 때문에 바람 소리가 거셌다.

잘 들어봐.”

?”

거기선 들을 수 없는 소리니까.”

 

펄럭이는 바람 소리 속에서 장하오의 목소리는 불규칙하게 들렸다. 서운하긴 한데, 다행이라고 생각해. 어쩌면 사라진 과거는 오지 않은 미래와 다르지 않을지도 몰라. 내가 너의 세계를 궁금해하는 것처럼, 너도 나의 세계가 궁금할지도 모르니까. 사라진 과거가 신기할지도 모르니까.

그 순간 한빈은 언젠가 수화기 너머에서 장하오가 더듬더듬 연주하던 기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빈아, 뭐 하고 있어? 과거의 남자는 언제나 미래의 사람을 궁금해했다. 사실은 미련 많은 혼이 인간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일 테지만. , 나 지금 노래 들어. 한빈은 자주 잊었다. 어떤 노래? 거기선 어떤 노래를 들어? 좋아하는 아이돌 노래를 들려주자 장하오는 한동안 멍해져 있었다. 귀가, 귀가 터질 것 같아. 괴로워했다. 그럼 이렇게 듣는 건 어때?

 

의도치 않았던 우연처럼 네가 내게 나타난 이후

내가 알았던 모든 세상은 한순간에 뒤바뀐 기분

두 발이 떠올라 너를 맴돌아

스친 그 찰나

 

허밍 하듯 불러주고서야 장하오는 그마나 들어줄 만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래도 썩 못마땅했던지 장하오는 직접 기타를 들었다. 양말 선배한테 배운 노래야. 양말 선배가 누구냐면, 우리 과 복학생인데 발에서 오징어 냄새가 나거든. 그래도 목소리는 좋아. 대학가요제에도 나갔어. 상은 못 탔지만. 그래도 대학생들 중에서는 10위라는 거잖아. 진짜 대단해.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알아버렸네 그대 이미 떠난 후라는 걸

나는 혼자 걷고 있던 거지 갑자기 바람이 차가와지네

 

, 진짜 옛날 노래다. 더듬더듬 부르던 장하오에게 한빈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었다.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듣기 좋았던 것도 인정할 수밖엔 없었다. 노래에는 이상한 힘이 있어. 가보지도 않은 시절에 닿게 만드니까. 그런 노래를 형이 부르니까 더 신기해. 1999년도의 남자. 그곳에서 부르는 더 오래된 노래. 이런 경험을 나는 어쩌다 하게 된 걸까. 딩딩딩딩. 이제는 폐역이 되어버린 한 역사에 입차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텅 빈 역사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열차의 행선지를 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겹쳐들렸다. 그곳은 더 이상 폐역이 아니었다. 오래전의 간이역은 오가는 사람들로 활기찼다.

 

우 떠나버린 그 사람 우 생각나네 우 돌아선 그 사람 우 생각나네

묻지 않았지 왜 나를 떠나느냐고 하지만 마음이 너무 아팠네

이미 그대 돌아서 있는 걸 혼자 어쩔 수 없었지

미운 건 오히려 나였네

 

열차는 빠른 속도로 한빈의 앞을 스쳤다. 그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은 너무도 선명하게 피부를 간지럽혔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지켜보던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한빈아.”

 

돌아본 곳에는 자신과 같은 모양의 핸드폰을 든 남자가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체크 남방이 생동감 있게 흔들렸다.

 

전에 네가 불러준 그 노래 말이야.”

 

잘생긴 독수리 눈매의 남자는 그림과 달리 전혀 싸늘하지 않은, 다정한 얼굴이었다.

 

가사가 꼭 내 마음 같아.”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꼭 언제라도 사라질 것처럼 아련했다.

 

너를 만나고 전부 달라져 버렸거든.”

 

내 세상도, 내가 바라보는 세상도. 너를 만나고 나는 1999년도, 2024년도 아닌 애매한 곳에 있어. 그런데 그게 그리 나쁘지 않아. 우리가 언젠가 만날 수 있을까. 이 시간을 너머 만날 수 있을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너를, 나는 만날 수 있을까. 참 웃기지.

 

我有时会想念你

 

존재하지도 않는 너를, 한 번쯤은 보고 싶어.

 

한빈아, 앞을 봐.“

 

그 순간 분명 느껴졌다. 손안의 온기를 느끼며 돌아본 자리는 온통 반딧불이었다. 기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2024년에서 1999년으로. 어쩌면 1999년에서 2024년으로. 단단히 홀린 얼굴로 돌아본 옆자리는 역시나 반딧불이 뿐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짜 성불이라도 해버린 것처럼, 과거의 남자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

 

 

좋게 생각하자. 다시 일신역으로 돌아가 무궁화호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한빈은 어째선지 슬픈 기분이었다. 다시 들여다본 핸드폰은 밤인대도 켜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통화 버튼 역시 먹통이었다. 완전 제멋대로네. 제사상을 차린 건 저면서 섭섭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덜커덩덜커덩 흔들리는 기차 속에서 바라본 하늘은 흐리멍덩했다. 달은 먹구름에 가려 흐린 빛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비 오면 안 되는데. 우산 없는데. 한빈은 핸드폰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루가 몇 시간 남지 않은 이 시간에 오늘의 운세를 검색했다.

 

오늘의 총운은 사면초가입니다. 공허하고 외로운 마음이 생길 수 있는 날입니다. 하는 일도 본인의 뜻과 맞지 않으며 답답한 마음만 앞설 것입니다. 오늘은 무리하게 욕심을 내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섣부른 판단으로 일을 진행하고 계약이나 서류상의 일을 마무리한다면 후일 신경 쓸 일이 생기니 오늘은 자중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명언 : 역경은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 가르쳐준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욜)

 

어쩐지. 그래서 이런 마음이 들었구나. 오늘의 운세가 이 모양이라. 그래서 그랬구나. 한빈에겐 누군가와의 이별도 고작 운세 탓이 됐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했다. 다 그럴 일이었다. 다 그럴 운명이었다. 이 세상엔 내가 바꾸지 못할 흐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나를 엄습하던 불행, 그것을 지우던 행운.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오늘의 운세와 다름없다. 한빈은 눈을 감았다. 비는 굵게 쏟아졌지만, 도착역에는 편의점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럭키. 마지막 하나 남은 우산은 흐린 한빈의 기분을 환하게 만들어주었다. 역시 운이 좋다. 성한빈, 행운의 사나이!

 

발랄하게 집으로 돌아온 한빈은 땀에 절은 몸을 깨끗하게 씻고 개운하게 머리를 말린 뒤 다락 방으로 향했다. 손에는 자그마한 워치 박스가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장하오와 연락을 주고받던 낡은 핸드폰이 담겨 있었다. 차마 버릴 수는 없어서, 성불한 그를 그렇게 처리하기로 했다. 처리라는 말이 조금 그렇긴 했지만, 다락방에 모셔놓는 것은 추억한다는 말보다는 그쪽이 더 어울렸다. 어떻게 된 사람이, 아니 귀신이 성불도 반딧불이 같이 하냐. 장하오의 형상으로 모여들었다가 사라지던 불빛들은 아름다우면서도 오묘했다. 왜인지 코끝이 찡해지는 것 같았다. 아이고, 홀렸네, 홀렸어. 한빈은 벌게진 얼굴을 털면서 부러 더 웃었다. 별일 아니다. 그저 재수 없게 주워버린 핸드폰에 달라붙은 귀신을 성불시켰을 뿐이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잘된 일이다. 성불해야 다시 태어날 거 아냐. 언제까지 그렇게 1999년에 갇혀 살 순 없는 거 아냐. 형은 착한 사람이었으니까, 또 사람으로 태어날 거야. 언젠가 만나겠지. 나는 고작 스물둘이니까. 다시 태어난 형과 언젠가 스쳐 지나갈지도 모르지. 서로 알아보지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마주칠 수도 있겠지.

 

한빈은 축축한 코를 훔치면서 다락방에서 가장 큰 박스를 열었다. 엄마에게도 추억 상자가 있는 것처럼 한빈에게도 과거를 담아둔 상자가 있었다. 그곳에는 한빈의 어린 시절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엄마가 담은 것도 있고 한빈이 담은 것도 있었다. 다리 하나가 부러진 공룡, 여기저기 찌그러진 야구 방망이, 바람 빠진 축구공, 여자친구들에게 받은 편지들, 이제는 작아져 버린 도복 같은 것들. 이제 거기엔 장하오도 있다. 성한빈이 태어나기도 전인 1999년의 사람. 누구도 믿지 않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그렇게 상자 속에 잠들었다.

 

, 충전기.”

 

돌아서던 한빈은 걸음을 멈췄다. 상자에 함께 넣은 충전기가 엄마의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었다. 다시 꺼낸 충전기를 엄마의 상자에 넣어두다가 언제 봐도 신기한 엄마의 다이어리를 괜히 손에 쥐었다. 우와, 빵이라고 해도 믿겠다. 하필이면 커버도 짙은 색의 가죽이라 꼭 잘 익은 빵 같았다. 과거의 한빈이 밖에서 뛰어놀기 좋아하는 아이였다면, 과거의 엄마는 무언가를 기록하기 좋아하는 문학소녀임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얇은 다이어리가 이렇게 빵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엄마는 도대체 그 시절의 무엇을 그렇게 남기고 싶었을까. 궁금했지만 펼쳐보지는 않았다. 엄마의 프라이버시는 엄마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둥글게 굽은 가죽 커버는 정말 걸작이란 말이야. 엄마의 추억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긴 가죽 커버를 펄럭여보던 중 무언가 삐죽 튀어나왔다. , 엄마 젊을 때 사진. 보물섬에서 찍은 사진이던

 

19996, 보물섬 사장님과 장하오 씨 그리고 나 한경주

 

애정을 가진 뒤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독수리의 눈매를 가진 체크 남방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러므로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빈은 조심스럽게 엄마의 다이어리를 넘겼다. 그곳에는 좋아하는 사람을 사고로 잃고 힘들어하는 엄마의 과거가 담겨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이야기 속 주인공은 짐작대로였다.

 

그때 그 이름을 불러선 안 됐다. 그를 내게 오게 해서는 안 됐다. 나 대신 그를 죽게 해서는 안 됐다. 그 불길 속에서 죽었어야 했던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 그는 나 때문에 죽었다.

 

한빈은 괴롭게 눈을 감았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왜 하필 나였는지, 왜 나여야만 했는지. 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알 것 같았다. 장하오는 한경주를 구하다 죽었다. 199973, 영화 쉬리를 보던 중 발생한 사고였다.

 

그냥, 답답하잖니.’

나 주말에 데이트하게 됐거든. 극장에서 영화 볼 거야.’

 

그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본 적도 없는 엄마의 과거가, 만난 적도 없는 장하오의 과거가 한빈의 머리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지끈거리던 머리를 쥐고 견디던 한빈은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그러니까 어쩌면한빈은 다시 자신의 박스를 열었다. 마구잡이로 헤집어 꺼낸 낡은 폴더폰은 역시나 전원이 나간 상태였다. 평소라면 금방 포기했을 한빈이 포기하지 않고 전원을 눌러댔다. 무용지물인 배터리를 분리했다가 다시 끼우는 짓도 반복했다. 제발, 제발, 제발. 그 사이 먹구름은 비를 멈추고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구름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달은 빠끔히 고개를 내밀며 한빈이 있는 다락방을 비추었다. 그 순간 낡은 핸드폰은 거짓말처럼 환히 빛났다. 됐다, 됐어. 관자놀이에 땀이 맺힌 줄도 모르고 한빈은 빠르게 오늘의 통화 목록을 살폈다.

 

1999/06/29

 

역시. 한빈은 예상했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629. 확인하지 않아도 년도는 2024년도다. 그러니까 어쩌면. 장하오는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빈은 당장 통화버튼은 눌렀다. 몇 번의 연결음과 함께 이제는 익숙한 그 목소리가 들렸다.

 

한빈?”

, 그 데이트 가지 마.”

 

7월에 죽은 장하오를, 6월의 나는 살릴 수 있다.

 

 

*

 

그때 장하오는 015B슬픈 인연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 너를 또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흐르는 그 세월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하숙집에서 좌식 책상에 앉아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에 심취해 있는 동안 울린 벨 소리는 조금 산통을 깨는 소리였다. 옛날에 금잔디라니애상처럼 좀 세련된 노래를 벨 소리로 할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액정에 뜬 익숙한 번호에 화색이 됐다. 나랑 같은 번호를 가진, 미래의 남자. 성한빈이다.

 

한빈?”

, 그 데이트 가지 마.”

 

다짜고짜 던져진 말에 장하오는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데이트? 어떤 데이트?”

주말에 쉬리 보러 간다며. 그거 한경주 씨랑 보는 거 아니에요??”

 

한빈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장하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경주 씨를, 미래의 성한빈이 어떻게 알지? 혹시……

 

거기서 경주 씨 엄청 유명해? 아니면, 내가 유명한가?”

……

신문에 스캔들이라도 난 거야? 그런 거야?”

 

장하오는 조금 신났더랬다. 하지만 한빈은 김칫국은 그만 마시라고 했다. 나는 김칫국을 마신 적이 없는데.

 

아무튼 가지 말라구요. ? 나랑 약속해. 빨리.”

아니이미 약속했는데. 티켓도 다 끊고

티켓이 대수에요? 약속이 대수야?”

그럼 뭐가 대수야?”

내가!”

 

막무가내로 떼를 쓰던 한빈이 그 순간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하오가 핸드폰을 떼고 깜짝 놀랄 만큼 우렁찬 목소리였다. 그리고는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아씨 거리던 한빈은 뜻밖의 말을 했다.

 

내가 형을 좋아해.”

?”

 

장하오는 멍청하게 대답했다. 한국어 레벨로 따지면 아주 초급에 해당하는 쉬운 말이었지만 어쩐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형을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가지 말라고!”

 

2024년도의 고백은 박력이 넘쳐도 너무 넘쳤다.

 

대답. 대답!”

, 알겠어.”

 

넘치는 박력에 당혹스러움을 넘어 충격을 받은 장하오는 얼떨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한빈은 박력이 넘치다 못해 철저하기까지 해서 앉은 자리에서 장하오를 달달 볶았다.

 

지금 당장 한경주 씨한테 데이트 못 간다고 연락해. 그리고 다시 나한테 전화해. 알겠어?”

어어

알겠냐고!”

, 그래. 알았어.”

실시.”

?”

실시!”

, 실시!”

 

한빈과 통화를 마친 장하오는 당장 경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당연하게도 주말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경주에게 장하오는 책방 핑계를 댔다. 왕 사장님이 좀 아프셔서핑계라기보단 거짓말이었다. 해년마다 장어즙에 잉어즙까지 챙겨 먹는 왕 사장은 20대보다 팔팔했다. 누군가 아프다는 소리에 경주는 쉽게 물러났다. 왕 사장님 편찮으셔서 어떡해요. 걱정까지 하는 바람에 장하오는 심히 양심에 찔렸더랬다.

 

 

어쩔 수 없죠.

미안해요, 경주 씨.

미안해요?

그럼요, 엄청 미안하죠.

그럼 다음 주는 어때요?

?

이번에 개봉한 링이 정말 끝내준대요.

 

 

경주는 정말 좋은 여자였다.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또 한 번의 기회를 하사했다. 장하오는 당연히 가겠노라 했다. 다음 주는 꼭 경주 씨와 영화를 보겠노라고 약속에 약속을 거듭했다. 그럼 다음 주에는 꼭 봐요. 경주는 산뜻하게 인사했다.

기분 좋기 통화를 끊고 난 뒤에야 장하오는 자신에게 닥친 사건에 암담해졌다. 한빈이가 나를 좋아해? 남자인 한빈이가? 장하오는 턱을 쥐고 잠시 고민했다. , 그렇게 매력적인가? , 이놈의 매력. 한국 사람도 모자라 미래의 사람까지 홀려버리니. 참 피곤 하구만. 어쩐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라 장하오는 기타를 잡았다.

 

그대 모습은 보라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예쁜 두 눈에 향기가 어려 잊을 수가 없었네

언제나 우리 웃을 수 있는 아름다운 얘기들을 만들어가요

 

그 순간 샤방샤방한 보라빛 안개 너머로 누군가의 얼굴이 드러났다. 당연하게도 한경주인 줄 알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성한빈이었기에 기타 연주는 잠시 멈추었다. 이상하네. 이게 왜그대 모습은 보라빛처럼살며시 다가왔지다시 불러봐도 마찬가지였기에 이상한 노릇이었다. 충격이 심했나. 그래서 이런가. 그날 장하오는 참으로 혼란한 밤을 보냈다. 그러므로 경주와의 데이트는 더욱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이번에는 들키지 말아야겠다. 장하오는 그런 치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경주와 약속을 취소한 토요일에는 책방에서 억지 노동을 했다. 쉬는 날까지 나와서 책 정리를 하는 장하오를 보며 왕 사장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얼굴이었다.

 

사장님, 어디 아픈 곳 없어요?”

내가 어디 아팠으면 좋겠냐?”

.”

뭐 인마?”

니요.”

 

그런 의도는 절대 아니었는데, 사실은 그런 의도였기 때문에 장하오는 난감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쉬세요. 제가 다 할게요. 여기 앉으세요. 팔팔한 왕 사장을 카운터에 억지로 앉혀두고 장하오는 나서서 일을 도맡아 했다. 내가 억지로 시킨 거 아니다. 알지? 나 그런 악덕 사장 아니야. 알지? 단속하는 왕 사장에게 장하오는 예예, 걱정마세요, 제법 한국인 같은 반응을 했다. 다행히 장하오는 책방의 일이 그리 괴롭지 않았다. 책을 정리하는 일은 일이라긴 보단 놀이에 더 가까웠다. 즐겁다는 뜻이었다. 혼자라는 생각 때문에 힘들 때면 네 뒤를 돌아봐 나는 언제나 여기 서 있을게 혼자 가는 길이 힘들어 쉬고 싶을 땐 나를 한번 생각해 봐 언제까지 너와 함께 있으니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책에 쌓인 먼지를 털던 때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한빈이었고, 그 애는 많이 흥분해 있었다.

 

살았어, .”

?”

살았다고!”

 

그 한마디를 해놓고 어찌나 감격하는지, 장하오는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지 못했다. 그저 방방 뛰는 한빈에게 목이 잡혀 흔들리는 사람처럼 그 애의 기쁜 숨소리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 이제 괜찮을 거야.”

, 괜찮을 거야.”

고마워, .”

 

대체 무엇이 괜찮은지 알 수 없어서 한빈의 말을 앵무새처럼 흉내 내고 있을 때, 한빈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

 

나랑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 진짜, 고마워.”

그거야 당연히

나 형을 진짜 좋아하게 될 것 같아.”

 

! 오늘 하루 잘 보내! 발랄한 인사와 함께 끊긴 핸드폰을 보며 장하오는 ?’ 표정이 됐다. 진짜 좋아하게 될 것 같다니? 그럼 날 가짜로 좋아했다는 거야? 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2024년의 문화인가 싶어서 선뜻 연락도 못했다. 이런 식으로 , 세대 차이 난다. 역시 50이라고 놀림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하오는 관두기로 했다. 게다가 이런 걸 따지는 건 결국 그 애의 마음을 신경 쓰고 있다는 뜻 밖엔 되지 않으므로, 책임질 수 없는 마음에 불을 지피는 행위는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장하오는 한경주와 또 을 보지 못했다. 이번에서 한빈 때문이었다.

 

형도 나 소원 들어줘.”

그래, 들어줄게.”

나 에버랜드 가고 싶어.”

에버랜드? 아아, 자연 농원,”

 

자연농원이 에버랜드로 바뀐 지는 벌써 몇 년이지만, 병수와 민철에게 자연농원으로 배워버린 장하오는 그쪽이 훨씬 더 알아듣기 편했다. 사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

?”

안돼?”

그때는

나도 형 소원 들어줬는데, 형도 내 소원 들어주면 좋겠어.”

, 그게

우리 이 전화가 언제 끊길지 아무도 모르잖아.”

 

일리 있는 말이었다. 경주는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미래의 한빈과는 언제 연락이 끊겨도 이상 사지 않았다 결국 장하오는 또 경주에게 약속을 취소하고 말았다. 그래도 착한 경주는 간첩 리철진을 보러 가자고 했다.

 

이번에도 약속 어기면 나 정말 화낼 거예요.”

 

그렇게 무섭게 말하면서도 경주는 귀엽게 웃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장하오는 그 주 달랑 전화기 하나 들고 에버랜드로 향했다. 전화 연결도 되지 않아서 혼자 회전목마를 타고 혼자 다람쥐 통을 타고 혼자 범퍼카를 탔다. 그래도 저 너머의 시간에 한빈도 저와 같은 짓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혼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해가 지자마자 한빈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거기 퍼레이드는 어때?”

신기해. 멋있어.”

오길 잘했지?”

 

이상한 탈을 쓰고 걸어가는 퍼레이드 너머로 아름다운 불꽃이 터졌다. 덩그러니 서서 홀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장하오는 웃었다.

 

. 그런 것 같아.”

 

좋았다. 그렇다는 게 신기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한빈도 말했다. 나도. 나도 너무 좋아 형. 분명 그렇게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은데, 며칠 뒤 한빈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 대체 왜 그래요?”

 

그때 장하오는 야외 매대에 전시해 두었던 책들을 모아 안으로 들여놓던 중이었다.

 

뭐가?”

왜 또 한경주 씨랑 영화를 보느냐구요.”

떻게 알았어?”

 

텅빈 매대를 짚고 서서 장하오는 정말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번에야말로 장하오는 말하지 않았다. 한경주와 데이트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지만 이 혼란스러운 감정의 진짜 알맹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혼란이 그녀 때문인지, 아니면 이 녀석 때문인지.

 

가지 마요.”

, ?”

가지말라구요.”

 

한빈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막무가내였다. 하지만 장하오도 이번에는 마냥 수용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경주를 두 번이나 바람맞힐 수는 없다. 아무리 성한빈이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진짜좋아하는 지도 진짜알 수 없는 상황이고. 그리고 장하오는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있었기에 이번만큼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건너편에서는 거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떻게 살렸는데.”

 

형은 진짜 그러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장하오는 또 경주와의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 한빈이 너무 서럽게 울었다. 그것을 달래주다가 하루가 다 갔다. 경주와는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주는 생각보다 질겼다.

 

유령 어때요?”

 

최민수에 정우성까지. 최근 충무로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전쟁 영화였다. 하지만 장하오는 그런 것 따윈 상관없었다.

 

볼게요. 꼭 볼게요.”

흐응, 진짜죠?”

. 그럼요!”

 

 

형 진짜 이럴 거야?

 

 

한빈의 문자를 못 본 척했다.

 

 

형 진짜 이러면 안 돼. 큰일 난다고.

 

 

어쩐지 다급한 문자였지만, 장하오는 또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한빈아, 미안해. 갔다 와서 다 설명할게. 합장 인사로 답장을 대신하며 장하오는 한경주를 만나기 위해 종로의 명신극장으로 향했다. 토요일의 종로는 역시나 혼잡했다. 특히나 7월의 종로는 종말을 준비하는 사이비와 이에 대적하는 종교인들, 여전히 나라를 살리기 위해 금 모으기를 하는 시민들로 왁자지껄했다. 오늘의 장하오는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문신처럼 걸치고 다니던 안경과 남방 대신 병수의 힙합 바지와 쫄티, 벙거지 모자에 민철의 팔찌까지 빼앗아 꼈다. 그런 장하오를 보며 민수는 서태지의 옷을 빼앗아 입은 신승훈같다고 폭소했지만 병수는 완벽하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아무래도 어색해서 벙거지 모자의 챙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주말답게 북적거리다 못해 미어터지는 극장 마당을 가르고 그녀가 다가왔다. 배꼽이 보일락말락 한 민소매 차림으로 장하오를 향해 웃었다. 오늘 되게 오렌지족 같다. 그런 말을 들어버렸기 때문에 장하오는 오렌지빛이 됐다. 그런 장하오에게 로고가 떠오르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경주는 속삭였다.

 

멋있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장하오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살렸는데.’

 

그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결국 장하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경주 씨. 그 어두운 영화관에 경주를 혼자 두고 나온 것은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었지만, 이제 장하오는 충분한 답을 얻었다. 성한빈. 아무래도 혼란의 주범은 이쪽인 듯했다.

 

 

*

 

 

물어뜯은 손톱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초조했다. 초조해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책상에 펼쳐둔 엄마의 일기는 그대로였다.

 

그때 그 이름을 불러선 안 됐다. 그를 내게 오게 해서는 안 됐다. 나 대신 그를 죽게 해서는 안 됐다. 그 불길 속에서 죽었어야 했던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 그는 나 때문에 죽었다.

 

장하오는 죽었고, 엄마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1999710, 장하오는 죽었다. 그날의 화재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대강 알 수 있었다. 이제는 폐관한 종로의 명신극장에서 발생한 화재였다. 낡은 극장은 스프링클러는 고사하고 마땅한 비상구조차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최초 발화 지점은 영화 이 상영되고 있던 1관이었다. 전선 합선 등을 원인으로 꼽고 있었지만, 처참한 화재 현장에서 정확한 원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장 큰 관이었기에 그만큼 사상자도 많았다. 이로 인해 극장 등 다중이용시설에 대한 재난 매뉴얼이 국가 차원에서 재정비되었다. 일부 종말론 맹신자들은 이것이야말로 종말의 시작이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발생했다. 여전히 외환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정부는 서울 중심에서 발생한 화재로 많은 청년들을 잃었으며 나라 분위기는 더욱 뒤숭숭해졌다. 국가적 재난이라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역시나 똑같다. 기사는 그해 일주일 전 발행된 기사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영화 쉬리에서 으로, ‘에서 간첩 리철진으로 간첩 리철진에서 유령으로 변경되었을 뿐이었다. 그때쯤 한빈은 어떤 가설과 함께 불안에 시달렸다. 혹시나 이것이 반복되는 운명이라면, 끊임없는 시도에도 결국 장하오가 죽어야지만 멈추는 운명이라면. 나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지.

 

……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달이 뜨지 않는 오후, 한빈은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오래전 엄마가 남긴 다이어리의 내용이 바뀌기를. 또 한 번 한경주 씨가 장하오에게 바람 맞기를. 그 순간 엄마의 글자들이 출렁거렸다. 글자를 읽기 위해선 스탠드를 켜야만 하는 저녁 시간이었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잘생기면 다야? 다신 안 만나 줄 거야!

 

 

엄마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것을 보고서야 한빈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불효자가 따로 없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그 순간 책상에 두었던 핸드폰이 반짝거렸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그 청승맞은 벨 소리가 반가운 적은 오랜만이었다. ! 한빈은 활짝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막상 들려온 목소리는 낯설도록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살렸다는 말, 그거 무슨 뜻이야?”

, ?”

모른 척하지 마.”

.”

넌 나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거야?”

……

 

아니, 애초에 넌 누구야?”

 

한빈은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내가 당신이 오늘 만난 한경주의 아들이며 당신은 한경주를 구하고 죽는다. 이미 몇 번이나 그렇게 될 운명을 거슬렀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아니 사망선고를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말하지 않으면 난 내일 다시 경주 씨를 만날 거야.”

, 안 돼. 그러지 마.”

?”

 

장하오는 뭔가 알아버린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저를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손톱을 뜯으며 곤란해하던 한빈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 영화만 바뀌며 반복되는 이 거지 같은 운명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히려 이쪽이 아닐까. 어차피 형이 죽게 될 운명이라면. 그런 형을 내가 살리고 싶은 거라면.

 

, 오늘 죽을 수도 있었어.”

 

천기누설 따위 대수인가.

 

?”

 

역시나 장하오는 당황했다. 쉽게 믿지 못하고 화를 냈다. 그딴 장난은 너라도 용서하기 힘들어, 성한빈. 장하오가 한빈의 성을 붙여 말한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지금이 그 타이밍인지도 몰랐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지. 내 이름은 원래 한빈이 아니고 빈이야.”

그게 또 뭔

우리 아빠는 성공철이고 엄마는

그 순간 한빈은 마음을 다잡듯 마른침을 삼켰다.

우리 엄마는 한경주야.”

……

형이 우리 엄마를 만나면 늘 사고가 발생해. 그리고 형은 우리 엄마를 구하고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도 그 순간에는 목이 콱 막혔다. 단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구하고, 구하고, 구하고그 말만 반복했다. 그 굴레를 끊은 것은 역시나 장하오였다.

 

죽는구나.”

.”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기에 미안했다. 그저 미래를 알고 있을 뿐인데, 죄인 같은 기분은 어째서일까. 지독한 운명은 내 탓이 아닌데 왜 내 탓 같을까. 장하오가 엄마를 대신해 죽었으므로 내가 태어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역시 끔찍한 일이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에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늘 행복하지만은 않으니까. 오히려 더 불행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그것을 이르게 알게 된다면, 어쩌면 우리는 19997, 종말론 신도처럼 스스로 추락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하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서 한빈도 선뜻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나는 초조할 뿐, 진짜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은 그다. 진짜 절망 앞에서 어설프게 건네는 위로는 오만일 뿐이었다.

 

내가 경주 씨를 만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오랜 침묵 끝에 그가 물었다. 한빈은 거스러미가 올라온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니라서.”

이쪽에서 벌어진 일만 아는구나. 미리 알 수는 없는 거구나.”

미안.”

 

무능함에 사과하자 장하오는 작게 웃었다.

 

한빈이가 왜 미안해. 미안한 건 난데.”

형이 뭐가 미안해

한빈이는 참 착하구나.”

내가 죽지 않으면 너는 태어나지 않아.”

, 무슨 소리야. , ?”

그리고 운명의 답은 지금 네가 살고 있는 그곳이지.”

 

의심할 필요도 없이 확실한 미래. 그게 바로 성한빈, 너잖아. 장하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달빛 속에서 환히 불을 밝힌 핸드폰에 아무리 그 이름을 불러봐도 장하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전화조차 받지 않던 그는 한 통의 문자를 보내왔다.

 

 

就交给命运吧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장하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핸드폰에서도, 엄마의 일기장에서도. 장하오는 소멸했고 한빈은 그대로였다. 한빈은 핸드폰을 쥔 채 울었다. 성한빈이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장하오가 이 세상에 없다는 운명의 증거였다. 아 다시 올 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아 나의 곁으로 다시 돌아올 거야 언젠가 장하오가 서툰 기타 솜씨로 불러주던 감미로운 음악이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

 

 

8월이었다. 직장인 성공철 씨의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계절이기도 했다. 한빈은 퉁퉁 부은 눈으로 침대를 뒤척였다. 출근하지 않은 아빠가 직접 이층으로 올라와 아들을 깨웠지만, 한빈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전이 다 가도록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장하오가 나오는 꿈을 꿔 버렸으니까, 불 속에서도 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어서 가, 너는 미래로 가, 웃던 얼굴을 봐버렸으니까. 한빈은 퉁퉁 부운 눈으로 또 울 수밖에 없었다.

이불 속에는 엄마의 다이어리도 함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봐도 장하오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므로 사라진 한경주의 죄책감은 아들 성한빈의 것이 됐다. 한경주를 위해 죽었던 장하오는 결국 성한빈을 위해 죽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성한빈을 살리기 위해 장하오는 죽었다. 자신의 운명을 뻔히 알고도 운명을 향해 뛰어들었다.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얼굴도 모르는 성한빈을 위해. 장하오는 죽어버렸다.

 

나쁜 인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기 때문에 원망하고 말았다. 그래 놓고 또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나쁘긴 뭐가 나빠. 그 인간은 바보야. 너무 착한 바보. 그래서 한빈은 아팠다. 슬프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랐으므로 이것은 아프다는 말로밖에는 설명이 안 됐다.

아들의 그런 상태를 전혀 몰랐던 엄마는 산뜻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이불 속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아들, 오늘따라 너무 오래 자네? 또 어제 늦게까지 게임했구나? 못 말려 진짜.”

 

토닥이던 손길이 제법 맵게 엉덩이를 후렸다.

 

엄마는 아빠랑 극한학교보러 갈 거야.”

 

엄마의 말에 한빈은 용수철 마냥 벌떡 몸을 일으켰다. 끔뻑거리는 붕어눈을 보며 엄마는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아니, , 눈이 왜 그러니. 여자친구랑 헤어졌어? 아니, 여자친구가 있었어?

 

엄마, 영화관 가?”

, 아빠 휴가잖니. 근데 너 눈이 진짜 왜 그래, ?”

엄마가 영화관을 어떻게 가?”

얘 좀 봐, 엄마는 영화관 가면 안 돼?”

엄마 영화관 답답하다며. 그래서 못 가겠다며!”

 

빽 소리치는 한빈을 엄마는 정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한빈은 언제라도 펑펑 울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한경주는 곧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한빈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마른 등을 다정히 토닥였다.

 

괜찮아, 아들. 다 괜찮아.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시간이

 

눈물을 훌쩍이며 한빈은 궁금했다.

 

엄마, 장하오 몰라?”

누구?”

장하오

 

이름만 읊조려도 목이 막혔다. 그런 아들 앞에서 엄마는 천장 어딘가를 보며 꽤 고심하다가 떠올렸다.

 

그래, 그런 이름이 있었지. 너네 아빠 전에 일하던 책방 알바생. 엄청 잘생겼었는데.”

그게 다야?”

?”

뭐 사귀었다던가 그런 거 없어?”

 

엄마는 또 천장 어딘가를 보며 고민하다가 미간을 구겼다.

 

참 매너 없는 인간이었지.”

 

그리고는 맹하게 있는 자신의 아들을 보았다.

 

바람만 맞다가 끝났단다. 그 뒤엔 서점도 관둬버리고. 그 덕에 후임자인 너네 아빠 만나서 이렇게 잘생긴 우리 아들도 만나고. 어찌나 다행인지.”

 

아구구구, 우리 공주. 과거가 바뀌어도 엄마는 한빈을 그렇게 불렀다. 엉덩이를 마음껏 토닥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엄마는 아빠랑 오랜만에 마음껏 데이트하고 올 테니 우리 아들은 밥 잘 챙겨 먹고 있어. 알았지? 그때 밖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차 시동 걸어놨어. 얼른 와!

 

운명은 있어. 그 애가 아닐 뿐.”

 

여자에게 차였다고 생각했는지 엄마는 그런 말을 남기곤 떠났다. 여전히 멍하게 있던 한빈은 문이 닫히고 서야 젖어있는 눈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부쩍 얇아진 다이어리 사이에 낀 익숙한 배경의 사진을 꺼내보았다. 보물섬을 배경으로 한경주, 왕 사장, 그리고 성공철의 모습이 해맑게 담겨있었다. 어디에도 장하오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은 채 사진에는 19998, 이라고 적혀 있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계절이었다.

 

 

 

장하오는 어디로 갔을까. 정말로 죽어버렸을까. 믿고 싶지 않아서 한빈은 몇 번이나 인터넷에 그 이름을 검색했다. 하지만 어디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순 없었다. 하물며 명신극장 역시 명신시네마로 간판을 바꾸고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극장으로 운영 중이었다. 전혀 그 꼬리를 잡을 만한 정보가 한빈에겐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였다. 보물섬. 한빈은 검색창에 과거에는 보물섬이었고 현재는 고물섬이 된 오해된 책방을 함께 적고 검색했다가 그 기사를 발견했다.

 

1984년 영업을 시작한 작은 헌책방 보물섬이 결국 폐업한다. “그래도 학생들 덕분에 40년을 먹고살았죠오랫동안 학교 앞을 지켜온 왕 사장은 폐업을 앞두고도 활짝 웃었다. 인생의 절반을 책과 보낸 시간들은 충분히 행복했다고 지나간 시간들을 소회를 물었다. “저와 함께 보물섬이 고물섬이 될 때까지 함께 해준 직원들에게도 감사합니다. 덕분에 외롭지 않았어요잠시 머물다 떠난 직원들과 시대와 나이를 떠나 현재까지도 우정을 주고받고 있다는 그는 특별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많은 이들에게 향수가 되어준 보물섬은 8월 초까지 운영된다.

 

한빈은 내달렸다. 고물섬을 향해. 아니 보물섬을 향해. 현재와 과거를 잇는 그곳을 향해 한빈은 달렸다. 가파른 길이 그날따라 더 벽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버겁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 더 거대한 벽에 깔아뭉개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한 사람을 알기 때문이었다. 알고 싶다. 그는 어떻게 되었는지. 다시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그 목소리를 다신 듣지 못한다고 해도 알고 싶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한 노인을 통해, 그를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을 통해. 그의 마지막을 함께 기억하고 싶다. 그렇게라도 추억하고 싶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잊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고통스럽고 싶지 않다. 한빈은 이제서야 장하오가 알고 싶었다. 그가 사라진 뒤에야. 존재하지 않은 뒤에야. 너무 늦어버린 후에야 그가 보고 싶어졌다.

 

이게 누구야. 성공철이 아들 아니야.”

 

폐업을 준비하느라 휑한 가게 앞에서 헉헉거리고 있는 한빈에게 노인이 아는 척을 했다. 여전히 돋보기안경과 빨간색 폴더폰을 목이 걸고 있었다.

 

저를, , 저를, 아세요?”

그럼 모르겠냐, 이눔아. 내가 니네 부모 주례도 섰는데.”

 

바뀐 과거 속에서 왕 사장은 성공철과 상당히 긴밀한 사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고작 그 한 명 사라졌다고 모든 것이 이렇게 평화로워질 수 있는 걸까. 그를 대가로 우리만 이렇게 살아있어도 괜찮은 걸까. 나만 이렇게. 나만

 

사장님.”

 

돋보기를 슬쩍 내리고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던 왕 사장이 힐끔 한빈을 보았다.

 

혹시장하오라고 아세요?”

 

왕 사장은 핸드폰도 접어두고 한빈을 빤히 보았다. 주름에 가려진 얼굴은 그 표정을 짐작하기 어려워서 한빈을 마른침을 삼켰다.

 

이름.”

?”

이름이 뭐냐고.”

성한빈이요.”

잠깐 기다려.”

 

허리가 부쩍 굽은 그가 뒷짐을 진 채 책방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무언가 들고 되돌아왔다. ‘그곳이 멀지 않다그가 건넨 것은 얇은 시집이었다.

 

온다더니 진짜 왔네.”

 

그렇게 중얼거리던 왕 사장은 한빈이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책방 너머로 꼬리를 감춘 뒤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넘겨본 시집은 특정 페이지의 모서리가 접혀 있었다. 모서리가 접힌 페이지에 담긴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한빈은 결국 울고 말았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너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너에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나희덕 시인의 푸른밤이었다. 그러나 한빈을 눈물짓게 하는 글자는 따로 있었다.

 

命运可以改变

 

볼펜으로 휘갈겨 적은 한자를 보며 한빈은 지금껏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든 과거를 되짚었다. 마치 필름처럼 한꺼번에 제게로 흘러들어왔다. 모르는 아저씨를 따라갔다가 봉고차에 떠밀릴 뻔했지만, 누군가에게 구해진 일. 자전거를 타다가 도랑에 빠져 기절했지만 누군가에게 안겨 병원까지 가게 된 일. 아아, 이제야 기억난다. 한빈아, 눈 떠야지. 한빈아. 그때도 나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쓰세요, 마침 여분이 있어서.”

 

나는 장하오를 만난 적이 있다. 그러므로 한빈은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는 고작 몇 달의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시간이 되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나를 기다린 미래의 남자. 장하오. 이제 나는 내 삶에 드리워진 행운의 의미를 안다.

 

 

 

 

영화 <동감> 모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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