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빈웹진: cinéclub

보인다는 착각

꽈리

 

 

제군, 우리는 지금부터 반년간 내년 영진위 공모전에 제출할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간다. 12월 20일까지 초고를 마감한 후 연말연시가 지나고 나면 1월 5일부터 1차 퇴고, 1월말까지 1차 퇴고를 마치고 2월 공모전 마감일 전날까지 2차 퇴고를 할 예정이다. 보통 한 달 전에 정확한 공고가 나니까, 상세 계획은 그때까지 정리하면 된다.”

송함빈.”

응?”

나 형이야. 함빈 지금 뭔가 말투가 형한테 아니었지?”

 

귀신 같은 놈. 나는 앞에 놓인 아이스커피를 쭈욱 빨아올리면서 표정을 관리했다. 이 중국인 새끼는 한국어가 딸리는데도 기가 막히게 흐름을 파악하는 재능이 있다. 장하오는 우리 연영과로 편입한 유학생이다. 그중에서도 연출 전공.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기 뭐하지만 그가 처음 학교에 왔을 때 나와 같은 이유로 꽤 화제가 되었다.

 

 

- 연기가 아니고 연출이라고?

 

그렇다. 우린 연출 전공자 중 이단아인 미남들이다. 원빈은 식구들에게 미남 아님 라이팅을 받아 자기가 잘생긴 거 몰랐다지만 우린 영상의 시대에 태어나 거울과 남찍사로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미남들이었다. 강의실에서 처음 맞닥뜨렸을 때 그의 눈빛은 국경을 넘어 나와 같은 소감을 읊었다. 얼굴이 장난이 아닌데?

 

연기 전공보다 빛나는 얼굴을 가진 우리 둘은 공통점으로 인하여 겁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한 여성이 우리 사이에 있었다. 아, 수진아. 나의 뮤즈였던 수진아. 나보다 두 학번 아래인 정수진은 배우 지망생이었고, 내가 재빨리 병역을 마치고 돌아와 복학하자마자 나와 사랑에 빠졌다. 연영과의 셀레브리티 커플, 옛날 헐리우드식으로 말하자면 브란젤리나였던 우리는 1년 가까이 알콩달콩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다.

장하오가 나타나기 전까지.

지독한 얼빠 정수진은 장하오의 와꾸에 저항하지 못했다. 수진이는 내게 헤어지자고 할 때 옛날 영화의 대사를 빌려썼다. 빌어먹을 연영과.

 

미안해, 난 어쩔 수 없는 여자인가 봐.”

 

이걸 고소하다고 좋아해야 할지 오히려 더 기분 나빠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수진의 노골적인 직진은 무위로 돌아갔다. 장하오는 수진에게 흔들리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셋만 좀 어색해졌을 뿐이다. 예쁜 수진이는 장하오를 포기한 후에 드라마의 단역으로 데뷔했고 우리 학교 출신이 아닌 탑배우와 공개연애를 하면서 유명해졌다. 수진이 내 곁을 떠나 레드카펫에서 볼하트를 만들기까지 걸린 1년의 시간 동안 나는 그렇게 자주 마주치는 장하오와 세 마디나 나눴던가 그렇다. 친화력의 화신인 나라고 해도 여친과의 이별 원인인 그는 못내 껄끄러웠다. 끝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도 나를 꿰뚫어보는 것 같아 괜히 쫄게 되어 싫었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 사이에서 가해자는 (너무 잘생겨서 내 애인의 마음을 흔든) 그인데, 그와 눈을 마주치면 어쩐지 내가 잘못한 것 같았다.

그는 중국에서 유명한 명문대에 다니다가 전공을 바꾸어 한국으로 왔다고 들었다. 내가 굳이 묻고 다니지 않아도 그에 대한 소식은 우리 사이에서 꽤 인기 있는 화제였다. 캠퍼스 이곳저곳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홀짝거리거나 담배 한 대를 태울 때 아무렇지 않게 귀에 쏙쏙 들어오곤 했다.

 

중국 재벌의 사생아라는 소문도 있던데. 알지? 진짜 부자는 중국에 다 있는 거.”

얼굴이 부티가 나긴 하지만 입고 다니는 건 그냥 평범해. 그건 헛소문일 걸.”

정수진이 대놓고 사귀자고 했다가 까였잖아. 난 수진이 김태운이랑 찍은 사진 뜰 때마다 그때 생각 하긴 해. 눈은 높아 걔가. 일관성이 있어.”

 

정수진 얘긴 그만... 아직 좀 아픔이 남았다.

 

지난 과제 때 배우 섭외 못해서 자기가 직접 출연해가지고, 그거 본 조교가 난리 났다잖아.”

대사는 없었다며. 장하오 한국말 좀 웃기고 귀여워. 들어봤냐?”

평소에 되게 과묵한데 한번 입 열면 장난 아니게 수다래. 잘생긴 게 단가. 말투 솔직히 웃긴데 자꾸 듣고 싶더라.”

기생충 보고 진로 틀었다던데 걔가 내는 스토리 다 재밌다고, 홍정석 교수 엄청 칭찬하더라.”

 

그들이 떠드는 모든 가십은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사실이다.

장하오는 어마어마하게 다양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가졌지만 한국어가 아직 딸린다. 그래서 혼자 힘으로는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없다.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좋은 편이었고, 홍정석 교수만큼 장하오를 높게 쳤다. 그리고 이 학과의 많은 연출 전공 학생들처럼 시네필을 자부하는 나는 이 빌어먹을 오티티의 시대에도 영화를 만들고 싶은 꼬마 영화인이었다.

나의 원대한 직업 계획에는 학부 졸업 전 공모전 합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계획에는 이 중국인이 필요했다. 그저 그런 중이병 같은 시나리오가 날뛰는 합평 시간에 말도 안 되는 문법이 삐죽삐죽 섞인 장하오의 이야기만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장하오는 주제가 정해지지 않는 한 아주 꿋꿋하게 사랑 이야기만 써 댔는데 와이씨, 연애물은 절대 취향이 아닌 나도 그 이야기에 환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지난 원한을 접고 장하오를 작가로 캐스팅하기로 했다.

 

우리 같이 공모전 준비하자.

언어의 장벽도 있었고, 영진위 공모전은 대한민국 국적자만이 대상이라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제출 명의는 나 혼자로 하고 저작물에 대한 재산권은 공동으로 해서 우리 둘 사이의 법적 효력을 공증해놓자는 빈틈없는 내 J적 설명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장하오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가만히 뭔갈 생각하다가 오른손을 척 내밀어 맞잡았다. 객관적으로 팩트를 말하자면(좀 아프지만) 나 성한빈이 장하오와 반대로 맥락은 없지만 꽤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외국인이라 항상 그게 아쉬운 하오에게 나는 꽤 구미가 당기는 파트너였다.

그렇게 과거의 어색함을 엎고 우리 두 사람은 맷 데이먼과 벤 에플렉이 되었... 언감생심. 그건 오바고 현재의 동맹을 이루었다. 가을에 시작한 우리의 협업은 처음에는 조금 소극적이었지만 시나리오의 첫 페이지도 나오지 않은 채로 종강을 맞이하자 갑자기 절실해졌다. 이유는 시나리오의 메인 작가라고 할 수 있는 하오가 곧 죽어도 이야기를 퀴어물로 만들고 싶어해서였다. 나는 시나리오를 제출하는 곳이 비엘 특화 오티티가 아닌 꼰대들의 영진위 공모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해봤지만 장하오의 똥고집은 어나더레벨이었다. 파워제이인 나는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하자 약간 미치기 시작했다.

 

형은 이렇게 말을 안 들어처먹을 거면 왜 같이 하자고 동의했어?”

공모전 이기고 싶어서? 공모전 이긴다고 네 말 듣기로 하진 않았는 거야.”

 

속마음을 잘 숨기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비결이었다. 내 얼굴 근육은 이 상황에서도 정말 예쁘게 웃을 줄 알았다. 음소거를 하고 본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입으로 내는 소리가 이거라고는 매치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달을 허비한 후에 이 정도는 인간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을까.

 

정말 오랜만에 보는 삼빡하게 재수털린 새끼네. 외국인 차별이 될까 봐 내가 욕 중에서 하나는 뺀다. 아니 시발 사람을 좆으로 봐도 유분수지.”

어? 널 좆으로 본다고?”

 

장하오는 얄밉게 과장하며 눈을 크게 떴다.

 

너 몰라? 소문이 그렇게 났는데? 난 좆 좋아해!”

 

좆을 넣은 욕설을 하고 이런 참신한 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라 난 멈칫했다. 얼굴에 가득 띄웠던 미소도 일단 잠깐 휴업했다.

 

어떻게 그걸 몰라! 너 친구 없어?”

 

그렇다. 수진의 직진 사건 후 한 학기 후에 장하오는 커밍아웃을 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인간들이 모인 과라고 해도 한국사회의 특성상 커밍아웃이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장하오는 밥 먹다가 갑자기 자기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은 과 친구가 ‘(지금은 명실공히 스타가 된) 정수진과 사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자 ‘어, 스타일이 아니어서’라고 대답하다가 ‘그럼 너의 스타일은?’ 같은 대화가 이어지는 중에 ‘나는 잘생기고 피부가 하얀 남자가 좋아.’라고 물 흐르듯이 대답한 것이다. 그 동기가 자신이 들은 대답에서 살짝 위화감을 느끼고 ‘남자?’라고 묻자 장하오는 떠놓은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서 또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어, 근데 너는 괜히 걱정 안 해도 돼. 너도 여자라면 다 좋아 아니잖아. 나도 똑같아.”

 

커밍아웃을 마친 장하오의 태도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주변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낄 정도였다. 처음에는 나의 태도가 LGBT 인권을 침해하거나 하지는 않는지 근심 걱정이 많아 조금씩 어색하던 사람들도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무엇보다 장하오가 좋아할 만한 잘생기고 하얀 남자들은 학교에 거의 없었고 있더라도 여친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연애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다.

물론 이 커밍아웃 사건은 게이에게 여친을 뺏긴 셈이 된 내 귀에도 들어왔다. 수진이에게도 어떤 친절한 친구가 알려줬겠지. 역시 내 미모가 안 통하는 놈은 게이야, 하고 그녀가 기분이 좀 풀렸기를 바란다.

이게 좋아할 일인진 모르겠지만 시간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졸지에 친구 없는 사람이 된 나는 기가 막혀서 잠깐 고개를 상하좌우로 돌렸다. 그 사이에 약간 진정도 했다.

 

요는... 이제 진짜.... 공모전에서 우승할 만한 작품을 쓰기... 시작해야 한다는 거야.”

난 이미 이야기를 다 생각했는 거야. 시작을 못하게 하는 사람은 함빈이야.”

“........”

 

나는 내 눈앞의 김조광수를 이를 갈며 쳐다보다가 항복을 인정했다. 네 알았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게이의 사랑 이야기를 씁니다.

 

 

#11.

 

정수  내가 어떻게 하면 돼요?

우현  나는 네가 그냥 아무것도 안 했으면 좋겠어. (양손으로 정수의 팔을 잡아 정수의 등 뒤로 돌려 뒷짐을 지게 만든다)

 

 

어떤 스토리에서든 가장 중요한 건 시련이야. 시련만이 그 전에 있었던 모든 빌드업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만들어.”

역시 함빈 말 멋있게 한다.”

 

결국 장하오가 원하는 이야기로 작업을 하기로 결정한 후로 작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리 진척됐다. 지금까지의 시간 낭비를 완전히 복구하겠다는 듯이, 장하오는 중국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초고를 하루에 열 페이지씩 채워서 왔다.

 

왜 남자들끼리 연애하는 영화여야 해?”

내가 진짜 제일 잘 아는 사랑 이야기니까.”

 

장하오가 만든 주인공 우현은 맹인이었다. 맹인 게이. 연애를 하고 싶은 타오르는 게이. 그는 그야말로 ‘뵈는 게 없다’는 주위 사람들의 평을 듣고 있다. 눈이 보이지 않지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오만 참견에 개드립을 치고 무대포적인 인생을 산다. 천부적인 음감으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는 음대생 우현은 연애를 하기 위해 어플을 이용하기로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시각 능력 없이 연애 상대를 물색하기는 쉽지 않다.

거기에 매우 착한 사람 병이 있는 소심한 후배 정수가 걸려든다. 그는 자신이 게이인지 아닌지 이 부분은 알쏭달쏭하지만 확실하게 차별이 없는 진보된 사회를 꿈꾸는 청년이다. 기세 좋게 동성애 중앙 동아리에 가입한 그는 연애하고 싶은 주인공을 돕기 위해 나선다. ‘선배, 제가 진짜 좋은 남자로 맺어드릴게요.’

둘은 매일 단둘이 만나 만남 어플을 검토한다.

 

 

#15.

 

정수  이 남자는 상탈한 사진을 올렸어요. 어필이 확실해서 좋기는 한데, 너무 몸만 밝히는 사람 아닐까요?

우현  전체적으로 이 어플이 몸부터 맞춰보자는 무드인 것 같긴 해.

정수  선배는 그래도 괜찮아요?

우현  그게 꼭 나빠? 대화보다 덜 속을지도 모르잖아. 말은 항상 정직해?

 

 

하오가 거지 발싸개처럼 작성한 초고를 잘 정리해서 시간 순서를 맞추고 문장을 다듬는 일은 내가 맡았다. 우리는 하루에 두 끼를 함께 먹었고 세 군데쯤 카페를 옮겨 가며 일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장하오는 패딩과 한몸이 되어 있었다. 그날도 나란히 앉아 타자를 치다가 자기가 살던 지역에는 영하는커녕 기온이 10도 밑으로 떨어지는 일도 없다고 설명하는 장하오의 손이 좀 차가워서 그 말을 듣고 나는 자기도 모르게 (인도주의적인 의도로) 그의 손을 살살 비비고 있었다.

 

한빈 손 따뜻하다.”

 

장하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감을 말했을 때 나는 내가 하던 행동을 자각하고 화들짝 놀랐다. 내가 남자 손을 그것도 게이 손을 이렇게 다정하게 녹여주다가 이 게이가 날 좋아하면 어떡해. 파랗게 질린 내 표정을 읽은 듯이 목소리만큼 부드럽게 풀어져 있던 장하오의 표정에 대번에 표독스러움이 감돈다.

 

야! 송함빈. 너 지금 속으로...”

어, 맞아. 나 잘생겨서 걱정돼서....”

한국 남자 자신감 진짜 대단해.”

 

한국 사람처럼 피에 아메리카노가 흐르게 된 중국인은 짜증을 내며 커피를 마셨다. 그래도 손 시린 건 싫은지 슬리브 위에 맨손이 아니라 후드티의 소매를 길게 꺼내서 댔다.

 

말 나온 김에 진짜 나한테는 그런 감정 안 가지는 거 확실하지?”

왜 계약서라도 써?”

 

각서’를 모르나 보군. 공증 문서 만들 때 설명했는데 말야. 나는 파르르 떨고 있는 장하오의 희고 작은 얼굴에 시선을 박은 채로 웃었다. 같이 복닥거린 지 좀 됐다고 슬슬 전 여친 제이 모 씨에 대한 더러운 기억이 조금씩 흐려지긴 한 모양이었다. 저 화상을 보고 웃기까지 가능해지다니.

 

나는 완전 로맨티스트야. 그렇게 쉽게 연애 시작하지 않는 거야.”

 

꽤나 새침한 얼굴로 조잘거리는 하얀 얼굴이 예쁘긴 예뻤다. 그는 자기가 사랑을 하기로 마음먹으면 누구라도 꼬실 수 있을 것처럼 훌륭한 눈과 코와 입을 자랑했다. 게이들은 이런 얼굴을 좋아할까? 여자들이 좋아할 웹툰 그림체 같은 얼굴이지만 남자가 남자를 볼 때엔 조금 더 남자 같은 유형이 인기 있을지 모른다. 나는 장하오에게서 뗀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잠시 모니터 대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받으며 자기 시선을 다시 자기 노트북으로 돌렸다. 타닥타닥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타자 소리가 이어지다가 끊어지기를 한참 반복했다. 다시 파일을 전달할 때까지 아무 말도 없을 것 같더니 뜬금없이 한마디가 슥 날아왔다.

 

한빈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어?”

어?”

한빈의 영화를 본 사람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어?”

음.. 웃거나, 울거나, 하여간 영화를 보고 감정에 변화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맞아. 팔짱을 끼고 어떻게 하나 한번 보자, 이건 싫은 거야.”

 

말하면서 실제로 팔짱을 껴 보이는 장하오가 또 귀여웠다. 아, 왜 자꾸 귀엽지.

 

그리고 가능하면 잠 자기 전에, 이불 이렇게 하고 영화 생각을 갑자기 다시 했으면 좋겠어.”

이불 이렇게 하면서 손을 턱 밑에 댄 건 반칙 아닌가?

어, 그거 좋은데.”

그렇지.”

 

마음을 흔들고, 마음에 남는다. 예술가가 바라는 것은 간단하고도 어렵다.

 

정수는 우현을 동정해. 우현이 게이고 시각장애인이라는 걸 불쌍하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우현은 자기를 불쌍하다고 생각 안 해.”

정수가 동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수 자신은 알고 있어?”

아, 나는 모른다고 생각해.”

 

하오는 시나리오 속의 인물들에 대해서 꽤나 진지한 태도로 설명했다.

 

그래서 우현이 그 사실에 대해서 지적할 때 정수는 수치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수치스.. 수치감, 어, 맞아.”

우현은 자길 동정하는 정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특별히 미움 느끼진 않아.”

우현이 그만큼 인격이 완성된 사람이라는 뜻이야?”

아니, 우현은 동정심을 좋은 인간성이라고 믿고, 때문이야.”

 

하오의 시선은 모니터에 그대로 붙박힌 채였다. 나는 맘껏 그의 높은 콧대를 구경하며 계속 그대로 그를 바라보았다. 카페 창밖으로 짧은 겨울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에는 제육볶음을 먹자고 해야지. 타닥타닥 소리가 잠시 멈추고 볼을 부풀린 그가 내게 짜증을 낸다.

 

넌 왜 일 안 해.”

 

나는 웃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

 

 

#20.

 

우현  마음하고 몸 중에 어떤 쪽이 더 먼저 간지러워야 하냐고 묻는 거잖아? 어려운데.

정수  그게 어려워요? 경험에 따라서 대답하면 되는 거잖아요.

우현  뭐가 먼저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렇지. 사람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정수  아 이렇게 얘기하는 거 보니까 알겠어. 딱 몸이네, 몸이 먼저네.

우현  왜 말투가 좀 비난하는 것 같지?

 

 

마감을 향해 매일매일 미친 듯이 시나리오만 쓰다가 둘이서 갑자기 일을 쉬고 하루 잡아 밖에서 놀기로 한 것은 장하오의 주장 때문이었다.

 

사랑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사랑이 많은 날을 그냥 보내는 건 안 돼.”

크리스마스가 사랑이 많은 날이야?”

한국에서는 모텔 가는 날이라던데. 모텔이 사랑 아니야?”

 

겠냐.

나는 한숨을 쉬며 장하오를 살짝 째려봤다. 오늘은 노는 날이라고 검은 롱패딩이 아닌 핑크색 그냥 반패딩을 입고 나왔다. 어디서 샀는지 되게 귀엽게 귀가 달린 비니까지 쓰고 있어서 나보다 어려 보였다.

 

곱창 먹자.”

또?”

함빈 또를 안 좋을 때처럼 말해? 또오~가 아니라 또 먹네! 이렇게, 끝을 올려!”

곱창 비싸...”

“3인분 먹고 밥 볶으면 맛있는 파스타하고 비슷하게 돈 드는 거야아.”

 

한국에 식당 깨러 온 것 같은 유학생은 진지하게 나를 가르치려 들었다. 3인분 중에서 네가 2인분 먹을 거잖아. 이 중국산 먹깨비야.

결국 장하오의 고집을 꺾는 데엔 실패하고 단골 곱창집에 자리를 잡았다. 데이트 코스는 아니어서 그런지 다행히 혼잡도가 평소보다 아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돌판 위에서 곱창이 노릇하게 익는 동안 장하오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은 채로 케이팝 댄스를 췄다. 모자에 눌렸던 앞머리가 살짝 헝클어졌는데도 귀여웠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오물오물 곱창 씹는 기름 묻은 입술이 통통한 것이 내 의지와 달리 자꾸 눈길이 가서 그것도 짜증났다.

계속 부산스럽게 곱창 먹고 부추 먹고 야물딱지게 식사중이던 장하오가 갑자기 기척이 없어져서 흘끗 쳐다봤더니 그는 곱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정성들여 자르고 있는 나를 쇠젓가락을 문 채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송함빈. 왜 다시 여자친구 안 만들어?”

형 때문에 없는데 그런 걸 왜 물어봐.”

정수진보다 예쁜 여자친구 기다리는 거야? 그러면 만들고 힘들어.”

그건 아니야.”

 

고소한 곱창 냄새 속에서 갑자기 툭 말이 나갔다.

 

형 정도면 돼.”

어?”

어?”

 

내가 말해놓고 내가 어 한다. 미쳤나. 어색한 침묵이라도 덮쳐오면 혀를 깨물고 싶을 판이었는데 다행히 그가 명랑하게 대꾸했다.

 

그건 더 만들고 힘들어!”

만들...기. 만들기 힘들어, 라고 해야 돼.”

만들기 힘들어! 작문할 땐 안 틀리는데 말할 때 틀리는 거야아.”

 

잠깐 저작운동을 멈췄던 그가 갑자기 소주를 주문했다. 고량주국 출신이지만 알코올에 전혀 강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지 싶어 일단 경계를 올렸다.

 

내일도 작업해야 돼. 오바하지 마.”

알아. 빨리 먹고 집에 가서 빨리 자면 돼.”

평소에 반주 잘 안 하면서 오늘 왜 갑자기 그래?”

사랑이 많은 크리스마스라서.”

 

장하오는 빙긋 소리가 날 것처럼 웃으며 눈 깜빡할 사이에 나온 소주를 잔에 꼴꼴 따랐다.

 

함비나, 마셔.”

“...고마워.”

 

이거 마시면 얼굴 빨개질 텐데 걱정하면서도 나는 그가 주는 술잔을 받아들었다. 둘이서 한 병을 비울 때쯤 곱창은 떨어졌고, 볶음밥에 한 병을 더 시켜서 마셨다. 곱창과는 달리 내가 2, 그가 1 정도의 비율로 먹고 나서 얼큰하게 취해서 식당을 나서자 일찍 먹기 시작한 터라 아직 시간은 일렀다. 살짝 휘청이는 걸음걸이로 그는 내 앞에서 걸어갔다. 아무리 봐도 살짝 주정뱅이인데도 사람이 예쁘게 생겨서 그런지 갈짓자 걸음걸이가 춤을 추는 스텝처럼 보였다. 그의 일렁이는 발걸음이 데이트 인파로 가득한 길거리를 밟고 간다.

그는 한국에서 외로울까? 저 작은데 숱 많은 머리카락으로 덮인 머리통 안에 있는 엉뚱한 생각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사람이 있을까?

살짝 붉어진 뺨에 광대가 뾱 동그랗게 솟고 그 밑으로 세로로 파이는 보조개가 보인다. 말도 안 되게 예쁘고 귀여웠다. 어디선가 캐럴 소리가 깔리고 성탄절에 맞는 일루미네이션이 반짝이는 가운데에 화보를 찍는 아이돌처럼 보이는 장하오를 나는 잠깐 정신을 놓고 구경했다.

 

송함빈.”

 

거짓말처럼 그가 입을 열어 내게 말을 걸었다.

 

시나리오 다 쓰고 연락해도 돼?”

 

나는 잠깐 그의 말을 알아듣기가 어려워서 얼큰하게 취한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응? 뭐라고요?

 

알았어. 싫음 관둬.”

 

내가 머리를 흔든 걸 오해했는지 갑자기 입가에 머물렀던 미소가 사라지더니 갈색 머리통이 팩하고 돌아서 앞으로 재빨리 전진하여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나는 다급하게 몇 발자국을 뛰어 따라가 그의 분홍 패딩 소매를 잡아챘다.

 

아니, 너무 황당한 소릴 하니까 그러지. 당연히 연락해도 되지 그런 걸 왜 물어봐?”

너 나 싫어하니까 연락 싫을 수 있잖아.”

 

크고 예쁜 눈이 헛소리를 하면서 날 바라본다.

 

내가 왜 형을 싫어해.”

싫어하잖아. 내 마음대로 한다고, 글 쓰는 거 도움 안 한다고 욕도 했잖아.”

 

어머, 전 거의 다 잊어버렸는데요.

 

안 싫어해.”

그리고 나 게이니까 친구 하고 싫을 수도 있어.”

안 싫어. 안 싫다고. 연락해. 맨날 해. 나 친구 별로 없어. 연락해줘.”

 

취하긴 취했는지 헛소리가 줄줄 나갔다.

 

정말?”

 

방금 전까지 토라져서 바람처럼 도망가던 장하오는 다시 배시시 웃었다.

 

우리 시나리오 써야 해서 맛있는 거 먹으러 못 갔는데 다 끝나고 가자.”

 

그동안 먹었던 삼겹살이랑 곱창은 뭐였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꾹 참았다. 무슨 말을 해서 또 토라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심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내 앞에서 웃고 있는 주정뱅이의 얼굴을 웃는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다.

 

“...형.”

응?”

우리 집 가서 좀 더 먹을래?”

집에 뭐 있는데?”

라면.”

“......”

 

길거리의 소란이 잠시 귀에서 멀어진다. 커플과 케이크로 가득한 도시의 대로변에서 그 모든 것이 블러로 문대버린 것처럼 아득하고 우리 둘만 남은 것 같았다. 하필이면 사랑 이야기를 쓰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스릴러였다면 달라졌을까?

 

늘씬한 그의 그림자가 센서등 때문에 길게 늘어졌다가 불이 꺼지면서 사라졌다. 우린 움직이지 않았다. 숨 막힐 것 같은 침묵을 깨려면 얼마든지 깰 수 있었지만 나는 작정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렸다. 나는 한 발자국을 움직여 다시 센서등을 켜는 대신 아주 조용히 장하오의 손을 잡았다. 거의 똑같은 높이에서 마주 보는 눈동자가 아주 조금씩 가까워졌다.

나는 그렇게 사고를 쳤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입술 위에다가 내 입술을 접촉시키고는, 어, 괜찮네 했다. 그 다음엔 그 입술 사이에 혀끝을 살짝 대고 어, 알코올 맛이 좀 나네 했다. 남자라고 해서 다른 거 없다고 생각하면서 혀 전체를 질척하게 비비며 깊이깊이 들어가는 찰나 말랐지만 단단한 남자의 손으로 장하오가 나의 가슴을 밀어냈다. 꺼져 있던 센서등이 반짝 하고 켜져서 현실로 우리를 돌려보냈다.

 

왜?”

 

내 침이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면서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이가 나를 노려보았다.

 

게이 이야기 쓰니까 게이 궁금해?”

“...아니, 하오 형.”

함빈 잘생겼다고! 키스하면 게이는 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쓰어?”

아, 아냐!”

좆 좋아한다고 아무 좆이나 좋아할 줄 알아쓰어?”

 

지금까지는 평범하게 말하다가 하필 이 말을 하는데 갑자기 볼륨이 확 커져서 나는 내 원룸 방음이 별로 훌륭하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내고 본격 허둥거렸다. 술이 확 깼다.

 

함빈 진짜 나쁜 사람이야!”

 

그는 ‘사장님 나빠요’ 톤으로 어눌하게 나를 쩌렁쩌렁하게 비난하고 나서 몸을 홱 돌려서 도망갔다. 이번엔 아까 길거리에서처럼 쫓아가 잡지 못했다. 어쩐지 망했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가운데 사랑이 넘치는 크리스마스는 저물어갔다. 곱창을 먹으면서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은 크리스마스였는데 다 망했다.

시발 진짜 라면만 끓일 걸. 이 타이밍에 애먼 것만 세워가지고.

 

 

#26

 

우현  이제 나 도와주지 마.

정수  왜, 내가 뭐 잘못했어?

우현  아니 내가 잘못했어.

 

 

시나리오 망했다, 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음 날 평소에 만나던 카페에 평소에 모이던 시간에 출석했다. 오늘은 정말 단 것이 필요한 상황이라 달달한 딸기라떼를 주문해서 통유리 앞 우리의 지정석 테이블에 앉았다. 한숨이 절로 났다. 안 오겠지. 한빈 나빠요 하고 달려가버린 놈은 오지 않겠지.

기다리면서 장하오를 생각했다. 내가 왜, 그 통통한 입술에 진하게 입맞췄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까지 같은 거 달린 놈한테 뽀뽀도 아닌 딥키스를 시도할 거라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더 놀라운 건 그 모든 과정이 당황스러울지언정 역겹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설마 나도 게인가?

눈가가 새빨개져서 앙칼지게 항의하던 장게이를 생각하며 가슴이 체한 것처럼 답답한 것은 내가 게이가 되어서인지, 그 게이를 속상하게 한 내 행동이 후회되어서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혹여나 만나서 대화를 나누게 되면 이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다. 나 게이야? 게이 선배로서 알려줄 수 있어?

 

딸기라떼를 다 마시기까지 10분쯤, 그후 멍때린 게 20분쯤. 오늘은 오지 않으려나, 앞으로 영영 못 보려나 생각하면서 노트북을 꺼내지도 않은 노트북 가방을 다시 집어들고 있는데 카페의 문이 열리고 김밥롱패딩을 입은 흰 얼굴의 중국인이 척척 걸어들어왔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내려놓고 어색하게, 정말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내가 와 있음을 알렸다. 장하오는 아아를 주문하고 음료가 나올 때까지 카운터 근처에 서 있다가 컵을 들고 우리 지정석으로 걸어왔다. 그가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숨막힐 듯 긴장이 더해졌다.

그는 가방과 컵을 내려놓고 패딩을 벗어 의자에 입혀 정리한 후에 나와 달리 노트북을 꺼내어 단정하게 세팅했다. 나도 허둥허둥 그를 따라 노트북을 꺼냈다. 장하오는 워드 프로그램을 가동시키면서 눈은 노트북에 고정한 채로(날 보지 않고) 말했다.

 

하던 일은 제대로 끝마쳐야 프로인 거야.”

어.”

 

그는 워드에 어지러운 대사와 지문을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그가 보내준 암호문을 정리해서 마치 글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침묵이 계속되다가 문득문득 질문과 답이 잠깐 오가고, 다시 또 조용해졌다. 또 한참이 지난 후에 얼음만 남은 그의 아아컵에서 스트로가 공기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작게 났다.

보그르르르.

나는 문득 눈동자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트로우를 물고 있는 통통한 입술이 붉었다. 남자 입술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고 있는 내가 아무래도 시나리오에 너무 과몰입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마음이 이상했다.

 

성한빈 나 그만 봐.”

 

정작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적도 없으면서 준열하게 나오는 경고가, 평소보다 발음이 훨씬 또렷해서 킹받았다. 장하오는 계속 모니터에 눈길을 박은 채,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고(그 정도로 멀티태스킹은 어렵다) 덧붙였다.

 

말 안 해도 알아.”

말을 안 하는데 무슨 수로 뭘 알아.”

“....안다고.”

뭘!”

나 좋아하는 거 아닌 거, 안다고.”

 

존나 성희롱을 규탄하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안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장하오에게서 그런 볼륨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멸망 한국어로 쪽팔린 게이니 좆이니 당당하게 말하던 그가 거의 속삭이듯이 그렇게 말했다. 너무 그답지 않은 말투에 잠깐 당황해서 침묵하는 사이에 또 혼자 쪼르르 말한다.

 

시작한 일은 끝까지 잘 마치는 게 프로야. 마감 안 늦자.”

 

어, 그렇지. 그럴 건데, 그렇긴 한데.

 

일해. 오늘은 초고 완전히 끝낼 거야.”

 

나는 노션을 띄워서 처음 회의 때 구성했던 플롯을 불러냈다. 그리고 장하오가 건네주는 파일을 묵묵히 고쳤다. 가슴에 돌을 얹은 것처럼 갑갑한데 이걸 어떻게 치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둘이 일하면서 세 시간 동안 정말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세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음료를 주문할 때 나는 장하오가 좋아하는 샌드위치를 사서 가지고 자리에 돌아왔다. 장하오는고마워’라고 말하고는 커피와 샌드위치 값을 그 즉시 카뱅으로 보냈다.

사주려고 한 거야. 하면 또 나쁜 사장님 될 것 같아서 꾹 눌러 참았다.

얄미운 말만 툭툭 하던 도톰한 입술이 꾹 닫혀 있었다. 손가락은 바쁘게 움직이고, 우리는 도합 여섯 시간을 카페에서 같이 있다가 정말로 초고를 다 만들고 나서 헤어졌다. 장김밥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손을 꺼내서 흔들어주는 게 그렇게 대단히 힘든 일은 아니지 않나? 김밥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던 나는 생각했다.

 

 

*

 

 

마감일 이틀 전에 2차까지 퇴고가 끝났다. 퇴고 과정에서 20% 정도는 다시 새로 썼다. 스토리에 대해서 두 달 가까이 한국어로 나와 싸우느라고 장하오의 뺨이 쑥 들어갔다. 물론 한국어도 많이 늘었다. 워드 파일을 마지막으로 교정을 보고 이미 내게는 지긋지긋해진 이 이야기를 이메일로 제출하고 나자 겨울은 거의 끝나 있었다. 마지막 일주일은 좋지 않은 기억이 없는 장하오의 자취방에서 합숙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두 달의 격한 시간 동안 내가 친 사고는 완전히 과거에 묻혔다. 대외적으로는 말이다. 우리는 할 일이 많아 어색할 여유가 없었다. 예전처럼 한국어는 서툰데 종알종알 재수없게 구는 장하오와 복장 터지는 나는 톰과 제리처럼 지냈다. 크리스마스에 발생했던 키스 사건은 정말 없었던 일 같았다.

하지만 솔직해지자면 나는 그날 이후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키스에 대해서 생각했다. 중학생이세요? 총각이시냐고요? 아니죠. 당연히 나는 정수진과 육체관계를 포함한 애인 사이였고, 내 여성 경험이 그녀 한 명인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조신한 편이어서 그랬다. (대충 이케저케 나를 넘어뜨리고 싶어하는 여성이 n명 정도 있었다는 뜻이다)

 

장하오와 닿은 건 고작 입술, 혀...를 제대로 쓰기 전에 파토가 났으니까 이건 딥 키스도 못 되고 대충 중간 깊이로 발 담글까 말까 키스. 남자랑 했다는 점이 지나치게 강렬해서 이런가 애써 생각해봤지만 그런 이유로 매일매일 떠오르는 건 이상하잖아. 시나리오 속의 주인공에 너무 이입한 거 아닌지 또 자신을 돌이켜 보지만 그것도 완전히 정답은 아닌 것 같고?

아 진짜 여친 진지하게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메일을 발송하고 나서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지만 과업을 마치고 나자 둘이서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결과 나오고 나면 연락하자는 말과 함께 내가 내 노트북을 챙겨서 나가면 끝이다. 아마도 장하오는 와이파이 비번을 바꿀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나를 다시는 이 집에 들여놓을 일이 없을 테니까.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난장판이 된 가운데 나는 일단 남이 보기에는 침착한 태도로 짐을 쌌다. 그리고 노트북 가방의 지퍼를 닫으면서 무심을 가장해서 한마디 던졌다.

 

“...곱창 먹을래?”

“......”

 

무심을 가장하긴 개뿔, ‘먹’ 정도에서 화려한 삑사리가 났다. 나는 고작 다섯 글자를 평범하게 말하는 데에 실패했다. 그리고 성한빈, 뇌 좀 장착해봐. 왜 또 곱창이야. 그날 곱창 먹고 사고 친 거 장하오가 생각이 나겠어, 안 나겠어. 그렇게나 많은 메뉴가 있는데 왜 곱창이야. 네가 장하오처럼 곱친놈인 것도 아닌데!

 

싫음 말고.”

아니, 먹자.”

 

어쩌면 정확한 공략이었다. 장하오는 진정한 곱친놈이므로. 나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제안했기 때문에 내심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애써 포장해본다. 힘든 일을 함께 해낸 동지끼리 뒤풀이 정도는 해야 도리다.

시나리오에 나오는 우현과 정수 얘기는 머리와 혀가 저릴 정도로 나눴지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선 대화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예쁜 얼굴과 골 때리는 언동 뒤에는 뭐가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많은 것 중에서 단 한 가지 확실했다. 나는 그 무엇을 알고 싶었다. 장하오가 궁금했다.

구워지는 곱창을 노려보는 그와 함께 곱창 위에 시선을 맞춘 채로 태연한 척 물었다.

 

한국 와서 곱창 누구랑 처음 먹었어?”

 

=한국 와서 처음 사귄 남자는 누구였어?

 

되게 웃기는 사람이었는데, 그... 麻将? 마쟝동?에서 곱창에 대해 배웠다고, 자기가 가자는 가게 말고는 가지 말라고 했어. 함빈, 그러고 보니까 궁금한데 한국은 곱창 가르치는 학교 이쓰어?”

 

겠냐.

 

이스면 나도 다니고 싶어.”

 

고기를 해체하는 장하오를 떠올려 봤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나는 마장동과 곱창에서 벗어나 그의 과거, 과거의 남자에 대해서 정보를 캐고 싶었다.

 

선배였어?”

어, 나 밥 되게 많이 사줘쓰어. 곱창도 일주일에 한 번 사줘쓰어.”

“...사귀었어?”

아니? 사귀자고 안 하던데?”

 

이제 먹어도 될 정도가 아닌가 면밀하게 곱창을 살피면서 장하오는 젓가락을 드릉드릉했다. 일주일에 한 번 곱창을 사줬는데 아무 흑심이 없었겠냐? 순수한 마음이 돼지고기까지라지만 돼지고기도 일주일에 한 번은 안 산다. 하물며 곱창을!

 

눈치 없다는 소리 자주 들어?”
눈이랑 눈치 다른 거야?”

어 눈치 있네.”

 

거의 다 익은 곱창 때문에 기분이 좋은지 장하오는 밝게 웃었다. 하지만 마장동을 알려준 선배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나는 포기하고 잘 익은 첫 곱창 조각을 하오 형에게 양보하는 것으로 호감을 표시해보았다. 예로부터 동물들의 구애는 먹이를 주는 것으로... 아, 이런.

 

술 시켜도 돼?”

 

자연스럽게 음주의 뒤를 따라오는 기억 때문에 우리 둘은 내심 주춤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기억나지 않는 척 자연스럽게 소주를 주문했다. 하오 형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듯 결연하게 두 잔만 마시고는 잔을 아예 뒤집어버렸다. 그래서 우린 결국 취하지 않은 상태로 식당을 나왔다. 식사 하면서 나누었던 영화 이야기가 우리 사이에서 아직 온기를 잃지 않고 떠다녔다. 나는 적어도 그에 대해 영화 취향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그는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 착하고 그 착함으로 인해 강한 사랑 이야기를. 세상에 있을 법하지만 거의 없는 이야기를 장하오는 좋아했다.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처럼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나중에는 태풍이 되는 사랑이 좋다고.

넋을 빼고 사랑 이야기의 끝나지 않는 목록을 듣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갑자기 한 방을 먹는다. 눈치가 없는 것 같았던 건 아무래도 연기였던 듯 하오 형은 내 쪽이 정면을 보며 멈춰서서 입을 열었다.

 

한빈 나에게 흥미 있는 거 그냥 흥미야. 그만둬줬으면 좋겠어. 원래 난 누가 날 좋아하고 신경 스지 않은 편인데, 한빈은 달라. 그만 흥미 해줘.”

 

그는 사장님 나빠요 절규와 딴판으로 조곤조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날 설득했다.

 

왜냐하면 내가 한빈을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신경 많이 스여. 신경 스여 힘들어.”

 

그림처럼 높은 콧대 아래 예쁘고 통통한 입술이 살짝 휘어진다. 왜 그렇게 슬프게 웃으면서 말하는지 모르겠다.

내 마음이 오히려 아프게.

 

내 마음 내가 정리할게. 연락하지 말고 시간을 주면 잘 정리할게. 많이 나중에 내가 괜찮다고 생각되면 내가 연락할게.”

 

멍해진 내 손을 그의 손이 다가와 꼭 잡고 나서 떨어졌다. 보송보송하고 살짝 서늘한 손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취했나. 맹세코 아직 질질 짤 정도로 그를 좋아하진 않는다.

 

 

*

 

 

심사 결과가 발표되는 날짜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응모 편수에 따라 달라진다나. 통상 매년 석 달 이상은 걸렸다는데 그러면 우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 봄이 왔지만 아직도 쌀쌀한 캠퍼스에서 나는 수상을 애타게 바랐다. 공모전에서 상을 받아서 그 시나리오로 곧장 영화를 만드는 기적에 가까운 요행을 바라서가 아니다. 수상을 하게 되면, 공동 저자인 그와 나는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장하오가 ‘정리’하고 나서 ‘연락’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장하오 말로는 내 마음은 그냥 흥미라는데, 내 고약한 흥미는 가라앉기는커녕 계속해서 불타올랐다.

 

 

#40

 

(우현 내레이션)

원래 처음부터 시각을 써본 적이 없는 경우보다 병이나 사고로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들이 더 불행할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은 한없이 정안인을 부러워할 거라고도. 음, 사실은 그 사람들의 생각보다는 덜 부러워한다. 다만 딱 그건 보고 싶었다. 정수의 얼굴. 존나 못생겼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냥 한번 보고 싶었다.

 

 

장하오 바보.

10작품이 뽑히는 4등에 우리 시나리오가 포함되었다는 연락이 도착했다.

진짜 뽑힐 줄은 몰랐지?

 

시상식에 같이 가자고 톡을 보내는데 손끝이 떨려서 자꾸 오타를 냈다. 1이 사라진 후로도 한참 답이 오지 않더니 15분 만에 답이 왔다. 공식적으로 제출자는 너 혼잔데 나도 가도 되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말할 때보다 훨씬 뛰어난 그의 한국어 실력에 감탄하다가 당연히 된다고 답톡을 보냈다. 뭐 그리 조그만 머리통으로 생각이 많은지 또 10분이 걸려서 답이 왔다. 시상식장에서 보자.

 

 

*

 

 

코엑스의 한 홀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나름 격식을 차린 원탁에 자리가 지정되어 있어 기분이 묘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낯익은 아나운서가 진행을 위해 마이크와 카메라 점검을 하고 있었다. 나는 진한 남색 재킷에 연청바지를 입어 나름 대학생의 풋풋함을 살려보았다. 아니 풋풋함도 풋풋함이지만 일단 이게 석 달 동안 못 본 장하오를 만나는 자리라는 점이 내겐 공모전 트로피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계속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장하오가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온다고 해놓고 막판에 마음이 바뀐 걸까? 정시에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져서 심장이 입밖으로 나올 것 같은데 정말 3시 정각에 그가 나타났다. 손에는 꽤 큰 꽃다발을 쥐고 있었다. 사실은 자기가 수상자면서 왜 축하꽃을 사오고 난리래, 좋으면서 괜히 속으로 틱틱대며 그를 향해 거의 달려갔다.

맑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순간 죄진 것도 없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잘 지냈어?”

어, 형은?”

나도 잘 지냈어.”

 

생각보다 나를 보는 표정에 복잡한 긴장이 없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들지. 그렇지만 복잡한 생각에 빠질 틈도 없이 장내에 식을 시작할 테니 착석하라는 안내가 울려퍼졌다.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이끌어 이름표가 놓인 자리에 앉았다. 그는 물잔이 놓인 식탁보 위에 손바닥을 비벼 땀을 닦았다.

 

미안해, 형.”

어? 뭐가 미안해?”

같이 올라가서 상 받아야 하는데...”

괜찮아. 진짜.”

 

속삭이느라 가까워진 두 개의 머리가 거의 맞붙었다. 나는 역시 내 ‘흥미’에 확신을 가진다.

 

시작한다...”

응.”

 

아나운서의 개회 멘트와 문체부 차관의 인사말, 국회의 영화 어쩌구 조직 소속 의원의 한마디, 지루한 몇 마디가 진행된 후에 영상으로 유명한 배우들의 영상 인사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4등부터 시상이 시작되었다. 열 개의 시상작이 호명되고, 호명이 될 때마다 단상에 저자들이 올라갔다. 우리 작품은 아홉 번째에 이름이 불렸다. 단상까지 가는 걸음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지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맹세코 문체부 차관한테 상 받는 게 떨려서는 아니었다. 상패의 내용과 상금이 같다 보니 첫 번째 작품만 상패 내용을 전부 읽었고 그후로는같습니다’로 대신했다. 주최 측이 준 상패와 꽃다발을 받고 있는데 장하오가 날쌔게 달려와서 자기 꽃다발도 안겨주었다. 나는 그가 준 리시안셔스의 향기를 맡으며 진정하려 애썼다. 호명된 순서대로 소감을 할 차례였다. 낭랑한 안내 멘트가 큐 사인을 줬다.

 

성한빈 님.”

 

그리고 나는 준비가 되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단상의 중앙에 있는 스탠딩 마이크로 걸어갔다. 기다리던 순간이 드디어 왔다.

 

안녕하세요, <보인다는 착각>의 작가 성한빈입니다. 그 누구보다 저와 함께 이 시나리오 작업을 해준 장하오 형에게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보인다는 착각>퀴어 로맨스인데요, 이 영화를 작업하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동성애자의 인권 문제에 매우 둔감한 한국 사회에 대한 생각도 하긴 했는데요, 좀 창피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더 많이 했습니다.”

 

굳은 결심에도 불구하고 여기선 떨렸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눈을 반짝이고 있는 예쁜 중국인을 내려다보았다. 꽤 넓은 회장 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만 보였다. 그렇다면 이거 그거 아니야? 이 정도의 흥미라면, 그거 아니야?

 

제가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 감정을 흥미니까 접으라고 한 그 남자분, 아니 마음이 종이도 아닌데 못 접는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고요. 거의 입을 틀어막힌 기분이 되어서 못 했던 말을 공개적으로 하겠습니다.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이 상을 그분께 바칩니다.”

 

말을 맺을 때쯤엔 진짜 하나도 안 떨렸다. 그리고 하오 형의 턱은 거의 땅까지 떨어져 있었다.

 

영진위 공모전 시상식에서 유튜브 라이브 중계 중에 시원하게 커밍아웃을 한 나의 디엠과 카톡은 난리가 났다. 내가 어마어마한 소음 속에서 단상을 내려오는 틈을 타서 고백의 대상은 도주했다. 하지만 이번 도주에 대해서 나는 그다지 초조해지지 않았다. 그도 날 좋아한댔어. 그리고 그 안광, 그 눈빛은 뒤로 구르면서 봐도 아직 날 좋아해.

 

나는 여유롭게 트로피와 개인 짐을 챙겨 묵례를 하며 회장을 빠져나왔다. 끝나고 단체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주의사항을 들었지만 내가 집에 가야 시상식이 정상 진행될 각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수상소감으로 커밍아웃하면 수상 취소한다는 규정은 없었으니까 나오는 상금은 하오 형이랑 야무지게 잘 써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진짜 키스해야지.

로맨스의 엔딩은 키스가 국룰이다.

 

 

#52

 

정수  형 지금 어플 지워.

우현  왜 이래 왜 오바야.

정수  이 어플 통틀어 나만큼 잘생긴 사람 없어. 나한테 만족해.

우현  나 안 보인다고 막 던지냐?

정수  못 믿겠으면 손가락으로 잘 봐봐.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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