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생존
날개
-1.
기억은 거짓말을 한다.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므로.
1.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
인간이라는 동물은 때때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망각을 택한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 오랜 시간 함께한 반려동물이 죽었다거나, 끔찍한 일을 당했다거나, 비참한 이별을 당했다거나 하는 경우. 오랜 시간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마음이 곪다 못해 썩어들어가니.
스스로 기억을 지우지 못하면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하므로 인간들은 거대한 재난 앞에서 도망치는 법을 배웠다. 잊거나, 지우거나, 새로운 기억을 채우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 덕분에 기억 삭제 사업은 절망이 가득한 시대에서 대호황을 맞았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기억들도 본인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기 위해 줄을 서서 예약을 하고, 대기번호를 받고, 꽤 비싼 병원비를 지불하며 새로운 삶을 찾아나갔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쪽팔렸던 기억. 중요한 사업을 실패한 기억. 면접을 탈락한 기억. 소중한 동물을 잃어버린 기억. 죽은 연인에 대한 기억. 원나잇을 한 기억.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인 기억까지.
기억의 종류는 무궁무진하고,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한빈은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의 창단 멤버로 7년째 카운터에서 접수 및 응대 업무를 맡고 있었다. 기억 삭제 사업이 호황을 맞아도 나라에서 허가한 의사면허증이 없으면 개업이 불가능하기에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는 항상 몰려드는 환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온라인 사이트에 올라오는 예약 상담 역시 전부 고르고 정리해서 차트를 만드는 일도 한빈의 담당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개씩 쏟아지는 사람들의 사연들, 흔적들, 기억들, 볼품없이 버림받고 폐기되는 추억의 편린들.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와 두 블록쯤 떨어진 시청 광장에서는 몇 년째 기억 삭제 사업 반대 단체가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기억을 삭제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을 해치는 행위라며 목이 터져라 외치고 울부짖었다.
남겨진 자들의 기억은 누가 책임지는 겁니까!
기억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기억을 사람이 지운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마이크를 쥐고 연설하던 남자는 동정에 호소하며 감정적으로 절규하다 곧잘 울음을 터뜨리고는 했다. 나라에서 법적인 제제가 필요하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대부분 제대로 된 근거가 없고 허황된 이상일뿐이었다. 수십 년 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기억 제거 사업은 오히려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하나의 치료법이었다. 기술을 악용하는 몇몇 나라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시스템 자체를 안정화 시키고 기억 제거 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무턱대고 시위하는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기억 제거 사업은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만약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기억이 지워졌어도 그렇게 하실 겁니까?
기억 제거 수술은 본인의 동의가 없다면 절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미성년자의 경우 범죄 여부에 따라 법원에서 판결을 내리고 부모의 동의를 받았다. 기억을 지운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타인의 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내일 죽을 것처럼 힘들어하던 이들도 기억을 지우고 나면 평범한 예전의 삶을 되찾았다. 드문드문 기억의 조각이 빠져 일상생활에 미세한 혼란을 주는 부작용만 뺀다면 기억 제거 사업이 주는 효과는 아주 긍정적인 편이었다. 반대 단체가 주장하는 비윤리적인 행위 따위는 아직까지 그 어느 곳에서도 보고 된 사례가 없었다.
무엇보다 병원에서 기록되는 환자들의 기억 정보는 대개 보관 기간이 1년에서 3년 정도 됐다. 어느 병원이든 수술 날짜로부터 3년이 지나면 반드시 모든 기록이 폐기 처리됐다. 세상에 존재했던 무수히 많은 이들의 기억은 그렇게 소실되고 어디론가 사라져 영원한 안식을 맞이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때때로 잊혀야만 하는 것들이 존재했다.
그게 다수의 기억이든, 개인의 것이든. 반드시.
“B, 좋은 아침이에요.”
“아, 케이 왔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어제는 집에 잘 들어갔어요?”
한빈은 항상 일찍 오픈하는 집 앞 단골 개인 카페에서 샷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텀블러에 테이크아웃 했다. 시청 광장을 지나는 505번 버스는 배차 간격이 짧고 노선이 깔끔해 한빈이 애용하는 편이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 보면 시청 광장에서는 언제나 기억 삭제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505번 버스는 시간에 관계없이 늘 사람들로 북적거려 후끈거리는 열기와 미지근한 주파수의 라디오 소리,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지는 목소리들이 한곳에 뒤섞였다.
- 좋은 아침, 좋은 시작 nbc 라디오… 기억을 지우는 것은!… 오늘은 게스트로 밴드… 여보세요? 아, 부장님. 네, 네… 노래 한 곡 듣고 오시죠.
505번 버스가 멈추는 정류장 바로 앞에 위치한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는 총 4층짜리 건물로, 1층은 약국 2층은 안내 데스크 3층은 진료실 4층은 기억을 제거하는 수술실이 있었다. -한빈이 매일 건너는 횡단보도는 사고 다발구역으로 유명했다.- 한빈의 주 근무지는 2층 안내 데스크이지만 병원 사정 상 폭넓게 4층까지 쓰는 경우가 많았다. 들어온 지 이제 1년 정도 된 제이는 아직 데스크 업무만으로 벅차 진료실과 수술실에 필요한 서류를 전달하는 건 전부 한빈이 도맡아 했다. 수술을 진행하는 의사뿐만 아니라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역시 모두 국가 공인 자격증이 필요해 직원의 수는 현저히 적었다.
“아유, 어제 맥주를 몇 잔이나 마신 건지… 오늘 점심은 해장 어때요?”
“안 그래도 중국집 예약해뒀어요.”
“B는 정말 센스가 좋다니까.”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의 데스크는 업무 강도가 다른 병원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매일 같이 쏟아지는 환자를 둘이서 감당해야 하는 데다, 기억에 관련된 소품 역시 전부 데스크에서 접수하기 때문에 3년은 일해야 그나마 숨 돌리기가 가능했다. 한빈은 오늘도 간신히 지각을 면한 제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웃음을 참으며 왼쪽 머리 위를 톡톡 두드렸다. 제이는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를 키우는 미혼모로 한빈보다 세 살 많은 연상이었다.
“아… 정말 차가 있어서 망정이지. 이 쪽팔린 꼴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보일 뻔했네. 알려줘서 고마워요.”
“다들 좋아했을 거예요. 제이는 귀여우니까.”
“그런 멘트는 애인한테만 하는 게 좋을걸요.”
오전 아홉시부터 열한시까지는 수술 없이 오로지 데스크 업무만 진행됐다. 딸이 엉성한 솜씨로 묶어놓은 머리를 풀며 한빈에게 직접 싼 김밥을 건넨 제이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를 처리하려면 조금의 쉴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빈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며 핑크색 플라스틱 통을 받아들고 반쯤 처리한 온라인 업무를 다시 이어갔다.
도르륵 도르륵 마우스 휠 굴러가는 소리. 딸깍 딸깍 연신 링크를 클릭하는 소리. 온라인 사이트에 접수되는 예약은 스팸글도 종종 있고, 이상 성욕자의 기이한 사연도 드물게 들어왔다. 터무니없는 이유로 기억을 지우려는 사람들은 후순위로 밀고 치료가 가장 시급한 사람들을 먼저 선별해 차트를 만들었다. 요 며칠은 어디선가 이상한 소문이 돌았는지 눈에 띄는 별난 제목들이 많았다.
온갖 이모티콘 범벅에 페이지를 대부분 차지하는 줄글에 클릭을 유도하는 질문까지. 아이 입에 맞게 말아놓은 미니 사이즈 김밥을 우물거리며 분류를 끝낸 페이지의 글들을 이동시키던 한빈이 다음 페이지로 향했다. 스크롤을 쭉 내리는데 생각지도 못한 문장 하나가 시야에 턱하고 걸려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한빈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살피며 소름이 돋는지 팔을 슥슥 쓸어내리다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병원 내에서 한빈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만큼 극히 드문 편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니셜이 아닌 이름은 쓸모를 잃은지 오래였다.
제이도,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들도, 병원을 청소하는 아주머니들도, 보안 요원도, 약사도, 진료실과 수술실을 오가는 간호사들도. 한빈을 그저 B라고만 부를 뿐 이름은 몰랐다. 이름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한빈 고객님 메일 확인 부탁드립니다.
별다른 멘트 없이 담백한 한 줄. 조회수 0. 모두가 스팸이라고 생각한 글의 제목에는 한빈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한빈은 잠시 망설이다 제목을 클릭해 내용을 확인했다. 별다른 추가 문구 없이 제목과 동일한 내용이 적힌 글은 바로 삭제 처리했다.
작성자의 이름은 noname.
일의 특성 상 자주 사용하는 이메일은 항상 체크를 하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머리를 한데 모아 질끈 묶은 제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낸 한빈이 와이파이를 연결했다. 로그인 중인 업무용 이메일을 로그아웃하고 자동 저장되어 있는 바로 아래칸 아이디를 클릭하자 비밀번호까지 전부 입력이 됐다. 한빈은 마른침을 삼키며 로그인 버튼을 눌렀다.
메일 옆에 떠있는 빨간색 알림 창. 숫자 1.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끼며 미간을 찡그린 한빈이 메일창에 뜬 문구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단순한 스팸글로 치부하고 넘기기에 메일을 보낸 업체는 한빈도 잘 알고 있는 회사였다.
여러분, 기억을 지우지 마세요! 사랑했던 사람들, 반려견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형을 새롭게 다시 만나는 겁니다. 기억도, 피부도, 목소리도 전부 복제 가능한 안드로이드 회사 < New Normal >이라면 가능합니다! |
요즘 나오는 안드로이드는 사람과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하고 디테일했다. 죽은 사람 혹은 동물의 뇌가 있다면 기억까지도 전부 복제가 가능해 한쪽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안드로이드는 이미 인간들의 삶에 녹아들어 완전히 보급화된 상품이라 크고 작은 회사들이 존재했다. 그중 뉴 노멀 프로젝트는 가장 사람과 비슷한 안드로이드를 제작하는 회사로, 대표가 괴짜라는 소문이 퍼다 했다.
뉴 노멀 프로젝트 | 성한빈 고객님, 휴먼 안드로이드 ‘Z-725’를 연장하시겠습니까? |
휴먼 안드로이드 Z-725?
Y/N 대답을 클릭하면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한빈은 인간형 안드로이드를 태어나 단 한 번도 주문해 본 적이 없었다.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가 께름칙하기보다는 그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 컸다. 이미 널리 보급화된 가사 전용 휴먼 안드로이드는 주로 맞벌이 부부나 1인 가구, 학교 기숙사 등이 이용하는 편이었다. 한빈 역시 1인 가구에 속했으나 안드로이드가 필요할 정도로 집을 어지르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무리 인간을 닮았다 한들 대부분의 보급형 안드로이드는 티가 나기 때문에 사람 대용으로 보기도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건 뭐지?
메일에 첨부된 PDF 파일은 서면으로 작성한 종이를 스캔한 듯 보였다. 여지없이 한빈의 필체였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한빈이 직접 작성한 안드로이드 계약서.
기억을 더듬어 본다. 2년 전에는 뭘 했더라?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네모난 화면 박스 안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한빈은 안드로이드를, 안드로이드를, 안드, 로이드를….
“B!”
움칠, 어깨가 떨렸다. 어느새 돌아온 제이의 부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한빈이 고개를 들었다. 허리에 두 손을 얹고 황당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제이가 바람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심 박사님 오늘 일이 생겨서 연차 쓰셨어요. 방금 전화 왔으니까 스케줄 조정해야 돼요.”
“아… 네, 제가 전화 돌릴게요. 미안해요 제이.”
“괜찮아요. 오전 파트는 제가 전화 돌릴 테니까 B는 오후 파트에 전화 주세요.”
당일 수술 스케줄이 꼬이면 답이 없었다. 다른 날 연장근무를 하거나 주말을 반납해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한빈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이의 부름에 놀라 실수로 마우스 클릭 버튼을 눌렀는지 새로운 창에는 연장과 관련된 설명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만약 이번에도 Z-725를 수거하지 않으신다면 연장 여부와 상관없이 안드로이드를 폐기할 예정입니다.
마감 기한은 5월 31일까지입니다.
성한빈은 처음 보는 안드로이드. 연장 비용은 1년 전 미리 지불했으므로 사실상 본인의 동의를 얻는 절차라는 설명이 거북했다. 단순한 광고 글에 넘어갔거나, 아니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새카맣게 잊었거나. 그도 아니라면 누군가의 장난이거나.
여러모로 유쾌한 내용은 아니었다. 이런 장난을 칠만한 사람은 주변에 케이밖에 없었다. 당장은 오후 파트 예약 환자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일이 급했으므로 노트북을 종료한 한빈이 유선 전화기를 찾았다. 9시부터 업무가 시작되면 딴짓할 틈은 없었다.
한빈은 한숨 푹푹 쉬는 환자들을 어르고 달래며 연신 양해를 구하고 비어있는 파트타임에 수술 스케줄을 집어넣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하루에 두 타임 정도는 예약 스케줄을 비워두고 있어 주말 반납은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다. 틈틈이 시계를 확인하며 전화를 받지 않는 고객들에게는 정해진 양식에 맞춰 문자를 발송한 한빈이 몸을 일으켰다.
아홉 시 1분 전. 2층 문 앞에 걸린 CLOSE 팻말이 OPEN으로 바뀌었다. 한빈은 문을 열고 자리로 돌아와 차트를 정리하며 컴퓨터 화면에 예약 스케줄을 띄웠다. 내내 마음에 걸렸던 메일의 내용이 감쪽같이 휘발되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삼십 분 전부터 계단을 따라 길게 줄을 선 대기 환자들이 차례차례 질서를 지켜 입장하기 시작했다. 의무적인 인사와 함께 마치 안드로이드처럼 기계적으로 매뉴얼을 읊던 한빈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타닥타닥. 누군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기록하는 소리가 고요한 사위를 울렸다. 기억하는 장치로 기억을 지우는 아이러니한 삶.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손바닥만 한 창 너머로 물감을 얇게 펴 바른 듯 청명한 하늘이 보였다. 한빈은 빠르게 환자의 정보를 입력하며 접수를 끝냈다. 이미 예약 스케줄이 빼곡한 탓에 날짜와 시간을 마음대로 정하고 싶으면 순서가 많이 밀리기 마련이었다. 골몰히 생각에 잠겨있던 손님이 고민 끝에 스케줄을 체크하자 패드를 받아든 한빈이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약 일주일 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뵐게요. 다음 환자분.”
쳇바퀴 굴리듯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 삶은 언제나 특별할 것 없고, 사람들은 기억을 지우기 위해 무수히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부끄러웠던 기억, 쪽팔렸던 기억, 아팠던 기억, 끔찍했던 기억. 지워도 지우지 않아도 상관없는 기억들.
현시대에서 기억을 지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한 번 삭제된 기억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 뇌에서 완벽하게 제거한 기억을 되돌리는 방법은 3년 안에 방문했던 병원을 다시 찾아가 기억이 녹화된 필름을 가져갈 것.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 필름을 혼자 재생해 볼 것.
물론 필름을 찾는다고 해서 기억이 완벽하게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저 기억을 시각화한 영상을 머리로만 습득하며 그것이 자신의 것이었다는 걸 인지할 뿐이었다.
크기도 색깔도 기록된 기억도 다양하기 짝이 없는 필름들은 수술 일정이 모두 끝나면 저녁 여섯시쯤 기록보관실로 들어갔다.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가 개원한 이래 기록보관실의 문이 낮에 열리는 일은 없었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필름은 단 한 번도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아간 적 없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매주 금요일 다섯시에 폐기되는 필름들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잊힐 기억들을 일부러 뽑아내는 걸까. 기억을 지운다고 몸에 새겨진 아픔까지는 전부 지울 수 없을 텐데. 피부에 뼈에 마음에 남은 기억들은 죽을 때까지 그대로일 텐데. 심장에서 느껴지는 뻐근한 통증마저, 풋풋한 사랑의 징조마저 뇌에서 하달하는 명령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 뇌에서 잊히면 몸도 마음도 전부 잊을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죽은 연인의 기억을 지워주세요.
수척하다 못해 피골이 상접한 얼굴. 거죽밖에 남지 않은 볼품없는 몸뚱어리가 위태롭게 서있었다. 대기 순서에 맞게 데스크 앞으로 다가온 남자 A는 텅 빈 공허한 눈동자로 한빈이 내민 패드를 받아들며 주의사항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파트지만 남자 A와 비슷한 케이스의 사람들은 늘 마지막 문구 앞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호흡을 가다듬었다.
삭제된 기억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영원히.
기억은 지우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마지막까지 끌어안고 가는 게 나은 걸까.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남자 A는 동의 버튼을 누르는 대신 패드를 반납하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데스크를 빠져나갔다. 사랑하는 연인, 부모,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항상 똑같은 결정을 내렸다. 당장의 괴로움을 죽이기 위해 기억을 지우는 것보다, 평생 그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가기를 택했다.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추억을 지워버리면, 그건, 그 사람은, 그 사람의 흔적들은 영영 잊히고 마니까.
남자 A가 떠나고 고요한 대기실 위로 연신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빈은 패드를 쥐고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며 다음 대기번호를 눌렀다.
짝사랑하던 사람에게 차인 기억을 지워주세요.
두꺼운 안경을 고쳐 쓰며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 B가 접수 서류를 내밀었다. 간단한 안내 멘트와 함께 건넨 패드를 탭 하는 손길에 거침이 없었다. 남자 B는 일사천리로 동의 버튼을 누르며 남아있는 스케줄 달력을 확인했다. 접수 서류를 꼼꼼하게 확인하며 남자 B의 정보를 모두 상세하게 입력한 한빈이 텀블러를 집어 들었다. 얼음이 거의 녹지 않은 아메리카노로 목을 축이자 남자 B가 비어있는 칸을 클릭했다. 토독토독.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여러 번 탭 하자 한빈의 화면에도 열한 자리 번호가 떴다.
그쪽 마음에 들어요.
구닥다리 작업 멘트.
관심 있으면 연락 주세요.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인지.
없어도 기회 한 번 주면 좋고.
힐끔, 고개를 들어 남자 B의 얼굴을 살핀 한빈이 헛웃음을 지었다. 준수한 외모 덕에 이런 일은 종종 있는 편이었다. 짝사랑하던 상대에게 차인 기억은 아무래도 금세 잊은 모양인지 태연한 작태에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한빈은 접수 신청서를 휴지통으로 집어넣으며 패드를 돌려받고 다음 대기 번호를 눌렀다.
“안녕히 가세요.”
기억은 때때로 거짓말을 한다. 멋대로 미화하고 멋대로 사라지고 멋대로 심연 아래 가라앉았다가 멋대로 불현듯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떠오른다. 그렇다면 켜켜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추억과 기억들은 명확한 사실일까 보정이 가미된 약간의 거짓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꾸며낸 픽션일까.
자신의 일을 사랑하지는 않아도 한빈은 지금 제 직장이 마음에 들었다. 따박따박 잘 나오는 월급에, 보너스에, 매년 괜찮은 연봉협상에, 나쁘지 않은 워라밸까지.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도 좋았고, 근무 환경도 꽤 괜찮은 편에 속했다. 자신은 그럴 일 없겠지만 만약 기억을 지울 일이 생긴다면 직원 할인도 50%를 받을 수 있었다. 재수 없는 날마다 종종 만나는 진상들만 뺀다면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는 한빈에게 훌륭한 직장이었다.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생기거나 일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이곳에 오래오래 붙어있고 싶었다.
“나 시간 많아요.”
“…….”
“고려해 봐요.”
기억을 지우는 건 옳은 일일까. 아니면 광장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그들의 말처럼 그른 일일까. 남자 B는 두꺼운 안경을 고쳐 쓰며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흑진주 알처럼 새카맣고 반질반질한 눈동자가 꼭 블랙홀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호감형의 미남. 옅은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에 이유 모를 서글픔이 묻어났다. 저렇게 잘생긴 사람도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차이는구나. 슬퍼할 줄 아는구나.
남자 B는 더 이상 미련 없다는 듯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빈칸이 남아있는 스케줄은 그대로였고, 의식적으로 버튼을 누른 한빈이 다음 환자를 호출했다. 네, 신청서 주시고요. 약관 잘 읽은 후에 동의 버튼 눌러주시면 됩니다. 정해진 매뉴얼을 읊는 안드로이드처럼 기계적으로 착착착.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예약들.
오늘 따라 유달리 하늘이 맑았다. 업무에 집중을 하다 보면 자주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한빈은 남자의 번호가 적힌 창을 내려놓고 새 창을 띄우며 분주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쉼 없이 밀려드는 환자들의 정보를 입력하고 빈칸이 가득하던 스케줄러를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늘 그랬듯 쳇바퀴처럼 일정한 속도로 굴러가는 삶.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 불현듯 파고드는 예기치 못한 변주는 달갑지 않지만. 반복되는 일상에서 작은 서프라이즈는 사람을 들뜨게 하기 마련이었다. 점심시간 전 마지막 접수를 마치며 잠시 한숨을 돌린 한빈이 문득 아까 내려놓았던 창을 눌러 다시 화면에 띄웠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첫 문장과 다르게 대충 넘긴 본 내용은 허점투성이 시나리오였다.
짝사랑하던 사람에게 차인 기억을 지워주세요. 저는 우리가 오랜 시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저를 모르는 눈치더라고요. 그것도 모르고 용기 내어 고백했는데 결국 보기 좋게 차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사람의 기억을 지우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제 기억이라도 지워주세요.
밤에 이불 몇 번 차면 될 기억을 몇백만 원씩 주고 지우는 것도 사치라면 사치였다. 한빈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 남자의 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하고 지갑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창 바쁘게 일하던 제이도 이제 막 마지막 접수를 끝냈는지 기지개를 쭈욱 켜며 지친 얼굴로 우는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나 몰라.”
손바닥만 한 창 너머로 눈부신 햇살이 담뿍 쏟아졌다. 햇볕에 바싹 마른 포근한 공기와 부유하는 먼지가 싱그러운 여름의 초입을 알렸다. 여전히 숙취에 시달리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가방을 챙겨든 제이가 한빈의 팔을 잡아당겼다. 우리 얼른 해장하러 가요. 속이 너무 안 좋아.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손님이 모두 빠진 안내 데스크를 지나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며 예약해둔 중국집으로 향하던 한빈이 뒤늦게 합류한 간호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사람 좀 늘었다고 금세 왁자지껄 소란해진 풍경이 익숙했다. 언제나 그렇듯 평범한 하루가 오늘도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평온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조금은 지루한, 정해진 궤적의 삶이었다.
2. 휴먼 안드로이드 ‘Z-725’를 연장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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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불현듯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빈은 맥주 캔을 까며 노트북을 부팅 시켰다가, 제대로 꺼지지 않은 창이 화면에 다시 펼쳐지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휴먼 안드로이드, Z-725, 연장, 동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 때문에. 이상한 사람 때문에. 무료하게 흘러가는 일상 때문에. 새카맣게 잊고 지냈던 변주가 떠오르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다급하게 마우스를 움직여 컴퓨터 하단의 시계 탭을 누른 한빈이 오늘 날짜와 시간을 재빨리 확인했다.
5월 31일 금요일, 현재 시각 오후 7시 37분.
지체 없이 포털 사이트를 접속해 검색창에 뉴 노멀 프로젝트를 검색했다. 친절하게 적혀있는 영업시간은 오전 열 시 오픈 오후 아홉시 마감이었다. 휴먼 안드로이드 픽업은 지점 상관없이 모두 오후 8시까지이므로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하는 건 턱없이 부족했다. 한빈의 집에서 뉴 노멀 프로젝트 대리점까지는 자차나 택시를 타고도 30분이 걸렸다.
이거, 돈을 내고 동의했는데 단순히 픽업 제때 못했다고 폐기 당하는 게 맞는 건가.
안드로이드의 폐기는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평범한 인간들도 나이를 먹고 늙으면 죽듯, 안드로이드 역시 부품이 더 이상 나오지 않거나 연식이 오래되면 고장이 나 폐기되기 마련이었다. 그게 세상의 이치고, 만물의 법칙이고,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아주 당연한 일인데. 살아 숨 쉬는 생명도 아닌 안드로이드의 폐기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이는지 알 수 없었다.
한빈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잠시 고민하다 사이트 상단부에 있는 고객센터 버튼을 눌렀다. 자주 묻는 질문란이 세분화되어 있어 크게 힘을 들이지 않아도 원하는 항목을 찾기가 편해 좋았다. 각진 고딕 폰트로 쓰여 있는 안드로이드 연장 탭을 클릭하며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질문을 찾아 스크롤을 내리던 한빈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고객센터 번호를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직원 대신 학습된 AI가 차례대로 상담 과정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 휴먼 안드로이드 신청은 1번, 반납 및 폐기는 2번, 가정용 안드로이드 신청은 3번, 가정용 안드로이드 반납 및 폐기는 4번, 동물형 안드로이드 신청은…… 8번, 안드로이드 배송은 9번 버튼을 눌러주세요.
삐- 소리와 함께 안내 음성이 사라지자 휴대폰 액정 위로 키 패드가 떠올랐다. 한빈은 9번 버튼을 누르고 어렵지 않은 절차를 빠르게 밟으며 초조한 얼굴로 시간을 확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단계를 끝으로 과거의 성한빈이 주문한 휴먼 안드로이드 Z-725 퀵 배송에 관한 안내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빈은 주소지를 입력한 뒤 2-3일 내로 배송 가능하다는 안내 문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휴먼 안드로이드 Z-725 · 배송 준비 중 ]
안드로이드가 있으면 뭐가 달라지나? 과거의 성한빈은 왜 평범한 안드로이드도 아니고 휴먼 안드로이드를 신청했을까. 2년 전이면 여전히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에서 근무를 하고, 연애는 하지 않았고, 큰 굴곡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술김에 신청을 했나?
휴대폰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에 있는 서랍장 앞으로 간 한빈이 세 번째 칸을 열었다. 아날로그 감성을 추구하는 건 아니지만 달력은 휴대폰 보다 실물을 이용하는 게 편했다. 한빈은 날짜를 확인하며 2년 전 스탠딩 캘린더를 꺼내 하나하나 기억을 짚어갔다.
뭉텅이로 잘린 기억? 없음. 빼곡하게 채워진 캘린더가 비워진 날? 한 줄이라도 남겨 놓았음.
문제는 안드로이드였다. 안드로이드에 관한 기록은 달력을 통째로 뜯어봐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정말 술김에 주문한 게 아닐까. 그 즈음이면 지금은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를 그만둔 의사 H가 자주 회식을 잡을 때니까. 회식 자리가 워낙 분위기 좋고 참석율이 높아서 술을 많이 마신 날도 꽤 있었지. 그때가 딱 이 여름 즈음이었던 것 같기도 한데….
토막 난 기억은 없다. 연쇄된 기억만 있을 뿐. 고개를 기울인 채 물끄러미 달력을 응시하다 눈을 감은 한빈이 한숨을 삼켰다. 머나먼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으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비슷한 하루 비슷한 일상 비슷한 어제와 오늘 내일 그리고 비슷한 삶. 반복되는 성한빈의 일생.
한빈은 사고하기를 멈추기로 한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통째로 꺼내 헤집어봤자 고통스럽다는 걸 이미 알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버릇처럼 약통을 꺼낸 한빈이 물을 찾았다. 두통약은 효과가 좋아 먹으면 금세 잠이 들었다. 주말에 해치우기로 한 작업은 어쩔 수 없이 미뤘다. 당장은 잠에 들고 싶으니까. 이런 끔찍한 기분은 싫었으니까.
뒤집은 맥주 캔이 콸콸콸 탄산 섞인 물을 가득 토해냈다. 한빈은 몽롱한 정신으로 반복되는 구역질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의미 없이 버려지는 맥주 캔이 제 손으로 지워낸 기억들 같았다. 유폐되고 폐기되는 기억들. 사라지는 사람들 사랑들 사량들.
탈탈 털어낸 맥주 캔을 뒤집어 물방울이 맺힌 표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힘을 주고 캔을 구기자 볼품없이 비틀린 맥주 캔이 먹힌 비명을 내질렀다. 한숨 대신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캔을 분리수거한 한빈이 방으로 향했다. 맥주향이 그대로 밴 손을 숨긴 채. 덕지덕지 묻은 기억들을 모른 척하며.
수면 아래 가라앉아 꿈속을 무한히 유영했다. 마치 그곳에 숨겨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치듯이. 한빈은 끝없이 낙하하고 또 낙하했다. 한빈이 잃어버린 것은, 아마도…… 추락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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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휴먼 안드로이드 사용법
2년 전 기억을 더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당장 며칠 전 일도 깜빡깜빡하는데 2년 전 일이 제대로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 한빈은 지친 몸을 이끌고 빌라 계단을 오르다 문 앞에 놓인 커다란 박스를 발견한 순간 작게 탄식했다. 옆으로 누운 채 산세리프체로 크게 적어놓은 뉴-노멀 프로젝트 스펠링. 그 위에 아주 작은 글씨로 적힌 휴먼 버전.
성한빈의 첫 안드로이드, Z-725.
Z 옆에 붙은 안드로이드 번호는 생산 번호일까, 아니면 생성일일까. 보통 Z가 생산번호니까 옆은 생성 일이 맞지 않을까. 빌라가 한 층에 하나 있어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실례를 범할 뻔했다. 꽤 묵직한 무게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박스를 겨우겨우 옆으로 민 한빈이 도어록에 지문 인식을 끝냈다. 일반 안드로이드는 보통 분해된 상태로 온다던데, 휴먼 안드로이드는 조립된 상태로 와서 그런가. 엄청난 박스 크기에 도무지 집안으로 옮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박스는 접어서 분리수거해야 하고, 이 시간이면 빌라에 사람도 없을 테니까. 한빈은 택배 칼을 찾아 다시 현관으로 나왔다. 박스를 묶어둔 플라스틱 노끈을 제거하고, 테이프를 갈라 내용물을 토해내기 편하게 쿠션이 들어간 골판지 박스를 잡아 벌렸다.
“…….”
“…….”
기묘한 기시감. 막을 틈도 없이 깊은 한숨이 터져 나오자 고요하던 얼굴 위로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Z-725, 아니.
“놀랐어요?”
남자 B가 그때와 같은 얼굴로 웃는다. 시간이 많은 남자 B. 짝사랑하던 상대에게 차인 B. 인간이 아닌, Z-725 안드로이드.
“어어, 막, 만지면, 좀 부끄…러운데.”
박스에는 숨구멍이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팔을 잡아당겨 뒷덜미를 더듬자 충전 단자가 만져졌다. 박스 안 구성품에는 Z-725를 충전시킬 충전단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남자 B를 위아래로 훑던 한빈이 미간을 문질렀다.
“뭐예요?”
“장하오.”
“아니, 이름 말고요. 상황을 설명해 보라고요.”
“무슨 상황?”
“…….”
“아, 기억 지우러 온 고객이 왜 한빈이 주문한 안드로이드 박스 안에 있는지?”
남자 B는 제법 뻔뻔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야 한빈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으니까. 셀프서비스로 찾아간 거지.”
휴먼 안드로이드에게는 제 주인을 찾아가는 시스템이라도 적용되어 있는 건가? 도무지 납득이 어려운 대답에 의구심이 일었다. 한빈은 잠시 망설이다 남자 B, 아니 장하오를 집안으로 밀어 넣으며 마저 박스를 분해했다. 차곡차곡 접어 겨우 부피를 줄인 상자를 분리수거하고 다시 돌아오자 현관에 얌전히 서있던 장하오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마치 오랜 시간 주인을 기다린 강아지처럼. 해맑으면서도 가엾게.
“기분 나빴다면 미안. 하지만 한빈도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어.”
“죄송한데 저는 그쪽이 기억에 없어서요.”
“응, 알아. 하지만 내가 한빈을 기억하니까 괜찮아.”
“…….”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안 봐도 돼. 나는 메모리에 내장된 기억을 바탕으로 출력하….”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일단 들어가요.”
장하오는 지나치게 밝고 다정했다. 한빈의 주변에는 장하오만큼 자신의 감정 표현에 솔직한 사람이 제이 말고 거의 없어 낯설었다. 아니, 아니지. 장하오는 사람이 아닌 안드로이드니까. 아마도 이 설정값은 성한빈 자신이 원한 것임이 분명했다.
다정하고, 밝고, 근심 없이 행복한 사람. 안드로이드. 성한빈의 결핍.
“보다시피 저는 그… 장, 장.”
“장하오.”
“그래요. 장하오 씨를 주문한 기억이 없어요. 왜 주문했는지도 솔직히 모르겠고요. 아마 술김인 것 같은데….”
안드로이드도 상처를 받나? 인간과 비슷한 사고를 하나? 잠깐 닿았던 피부마저 정말 사람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한빈은 마른침을 삼키며 힐끗, 소파에 앉아 내부를 구경하는 장하오의 눈치를 살폈다. 안광 없이 반질반질한 눈동자는 사람 같으면서도 안드로이드 같았다. 첫 만남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상. 과거의 성한빈이 원했던 안드로이드.
혹시.
외로웠나?
생각을 더듬어 보면 그랬다. 그 즈음의 성한빈은 자주 무언가를 잊었고, 깜빡했고, 공허했고, 집에 돌아오면 적막한 거실을 보며 외로움을 느꼈던 것도 같았다. 연애는 하기 싫은데, 온기가 있었으면 좋겠어.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연필깎이 대신 커터 칼로 죽죽 그어내 만든 흑심. 차곡차곡 끄적였던 일기장. 그래, 성한빈의 일기장.
“잠시만요.”
러그에서 벗어나 서재로 향한 한빈이 책상 아래 마지막 서랍을 열었다. 빈틈없이 채워진 공간 속 2년 전 다이어리를 찾아 페이지를 펼쳤다. 7월의 어딘가. 성한빈은 자주 외로워했고 온기를 그리워했다. 이럴 거라면 안드로이드를 주문하는 게 낫겠어. 반듯하지 못한 글씨체는 삐뚤빼뚤 엉망인 마음을 따라 궤적을 그렸다. 명확하지 않은 기억에 의하면 아마도 한빈이 자주 가던 이자카야의 아르바이트생과 좋은 만남을 가지다 어그러졌을 즈음 같았다.
7월 23일. 날씨 흐림. 다이어리에 적힌 날짜와 날씨. 한빈은 제 뒤를 졸졸 쫓아온 장하오의 뒷덜미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제조일자 0725.
“안아줘?”
움찔, 어깨가 떨렸다. 장하오는 지나치게 성한빈의 감정을 잘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어쩌면 성한빈이 만들어낸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것치고는 키도 비슷하고, 체구도 비슷하고, 얼굴은… 잘생겼네.
“모르겠어요.”
“그럼 안아줄게.”
누군가에게 안기는 건 오랜만이었다. 어라, 오랜만이었나? 한빈은 두 팔 벌려 저를 끌어안는 장하오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기댔다. 두근두근.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맥박 소리. 정말 사람처럼 만들었구나. 이래서 사람들이 외로우면 휴먼용 안드로이드를 찾는 거구나. 기분이 이상했다. 맞닿은 심장 때문에, 아니지. 안드로이드에게도 심장이 있나? 갑자기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사람도, 안드로이드도.
“기분 좋다.”
간지러운 웃음소리에 속이 울렁거렸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웃고 있는 장하오를 쳐다보던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기분이 좋아요?”
“한빈을 안아줬으니까.”
“…….”
“한빈을 기쁘게 하는 게 내 일이야.”
그건 좀 불공평하지 않나. 평생 한 사람만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안드로이드라니. 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역할 정도로 싫은데 싫지가 않았다. 장하오의 품은 안드로이드답게 조금 서늘하고,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살갗을 더듬는 손끝이 부드럽고 또 다정해서. 온전히 저만을 위해 생각하고, 사고하고, 반응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라서.
고작 몸을 조금 기댄 것만으로도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한빈은 꼭 언젠가 안겨보았던 것처럼 익숙한 품을 찾아 얼굴을 비볐다. 기분 좋은 체향. 성한빈이 만들었고, 성한빈의 맞춤형으로 제작된 안드로이드. Z-725.
휴먼 안드로이드 사용법은 별거 없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일정한 기계음. 충전단자를 꽂지 않아도 장하오는 한빈의 기분에 따라 알아서 충전이 됐다. 안드로이드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만족감을 느끼고, 현재의 기억을 입력하며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한빈을 기쁘게 하는 행동은 안아주기.
“그럼 그때 엉망으로 쓴 신청서 속 짝사랑은 거짓말이에요?”
“안드로이드는 거짓말을 못해.”
짝사랑하던 사람에게 차인 기억을 지워주세요. 저는 우리가 오랜 시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저를 모르는 눈치더라고요. 그것도 모르고 용기 내어 고백했는데 결국 보기 좋게 차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사람의 기억을 지우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제 기억이라도 지워주세요.
“설마 그 사람이….”
“응, 한빈한테 보기 좋게 차였어.”
장하오가 해사하게 웃었다. 조금의 슬픔도 보이지 않는 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기억하는 지울 수 있지만 지워지지 않은 기억을 기억하는 안드로이드. 가물가물한 기억 속 장하오의 말들을 떠올린다. 시간이 많은 장하오. 관심이 있으면 연락 달라던 장하오. 기회를 한 번 달라던 성한빈의 유일무이한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를 동정하는 건 사치다. 안드로이드는 감정이 없으니까. 인간이 부여한 입력값으로 배우고 흉내 낼 뿐 고유의 감정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예민한 감각을 일깨우는 부드러운 살갗이. 닿아오는 시선이. 인공으로 만든 맥박 소리가. 성한빈이 가진 죄책감을 일깨우고 감정을 투여한다. 안드로이드에게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느끼며. 안드로이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피부 위로 새기고 새로이 학습하며. 한빈은 기어이 자신의 안드로이드에게 동요했다. 동정하고 공감하며…… 마음을 이해했다.
감정도 이름도 사치인 세계에서. 사랑이 지워지고 멸시받는 상실의 시대에서. 감정도 이름도 없는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을 학습시키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건 결코 그 누구에게도.
“그래도 괜찮아, 한빈이 나를 찾았으니까.”
좋지 못한 전조였다.
4. 성한빈의 안드로이드는 어딘가 좀 이상하다.
장하오는 은근 반골 기질이 있다. 안드로이드치고는 특이한 성질이었다. 평범한 안드로이드라면 보통 입력된 값에만 반응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애초에 성한빈이 장하오라는 안드로이드의 설계를 이렇게 설정한 건지. 그도 아니라면 묵혀놓은 기간이 오래되어 자체 내부 시스템에서 충돌이 일어난 건지. 종종 말썽꾸러기처럼 성한빈의 속을 썩일 때가 많아서.
크고 작은 문제에서 최종 결정권은 아무래도 장하오가 쥐고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배려가 습관인 한빈의 타고난 성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장하오의 결정은 고집스러워도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기 때문이었다.
식습관도 생활 패턴도 오랜 시간 묵혀온 개인의 버릇도 혼자 살기에 망가졌던 부분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지라. 사실 안드로이드는 대개 자신의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입력값이 정해진 것에 반해 장하오는 고집이 대단했다. 평소에는 한없이 다정하다가도 한빈에게 조금만 해가 되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섭섭해하는 한빈을 잘 어르고 달래면서도 봐주거나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최근 건강검진 결과가 눈에 띄게 좋아진 것도 있겠지만. 별수 없이 오늘도 좋아하는 칼국수가 아닌 탄단지의 균형이 완벽한 식단을 주문하며 소파 위로 몸을 던진 한빈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고 어린아이처럼 시위했다. 직장에서는 늘 제이나 선생님들의 기분에 맞춰 점심 메뉴를 선택할 때가 많아 저녁만큼은 제가 먹고 싶은 걸 고르고 싶었는데. 장하오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어림도 없었다. 한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채 빨래를 끝내고 돌아오는 장하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좀 이상한 안드로이드. 여기저기 비교해 보아도 눈에 띄게 특이한 안드로이드.
장하오는 안드로이드답게 머리가 똑똑하고 두뇌회전이 빨랐지만 할 줄 아는 요리가 거의 없었다. 청소 같은 가사는 제법 하면서 가사 전용 안드로이드의 기능은 전혀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 과거의 성한빈은 정말 사람의 온기만이 필요했던 건지. 아니면 술김에 주문한 탓에 온갖 기능을 다 빠트린 건지. 무엇 하나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미간을 찡그리자 귀신같이 새카만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왔다.
한빈, 화났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살갗 위로 감겨오는 두 팔이 시원해서 좋았다. 남들보다 체온이 조금 높은 성한빈에게 안드로이드처럼 차가운 피부는 둘도 없는 맞춤형이라서. 열을 식힐 겸 이마를 기대자 가벼운 입맞춤이 돌아왔다. 안드로이드를 연장할 때 이용 약관을 제대로 읽지 않아 몰랐는데, 나중에 확인한 장하오 사용 설명서에는 연인의 기능이 추가되어 있었다.
가벼운 스킨십부터 농도 짙은 수위의 섹스까지. 장하오가 가진 기능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술에 취한 성한빈이 아니었다면 도무지 불가능한 시스템 항목이기도 했다. 한빈은 간지러운 입맞춤에 어깨를 움츠리며 조금 어색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안드로이드와의 연애가 금지된 건 아니지만 께름칙한 건 사실이었다. 성한빈의 취향대로 입맛대로 설계된 안드로이드. Z-725. 장하오.
나의 희망 사항을 반영한 안드로이드를 사랑하는 게 맞는 걸까. 인간의 감정으로 안드로이드를 사랑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 걸까. 일렁이는 두 눈동자에서 동요를 읽었는지 입맞춤 대신 한빈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주던 장하오가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를 파고들었다. 손깍지를 껴고 살갗을 매만지며 의미 없는 궤적을 그렸다. 지문을 갉아내듯 고요한 맥박 소리를 인간처럼 흉내 냈다.
“오늘은 어땠어?”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에서의 하루. 장하오의 생활 반경은 극히 적은 편이다. 이 빌라를 포함한 버스 정류장까지의 5분 정도 거리. 한빈이 늘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는 단골 카페.
장하오는 언제나 한빈의 것인 텀블러를 챙겨 현관에서 기다리고, 나란히 서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하면 아쉬운 얼굴로 한빈을 배웅하고, 한빈이 돌아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 한빈의 하루 일과를 양식처럼 받아먹고 공감하기를 학습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성한빈만을 위해 설계된 안드로이드답게. 오로지 성한빈만의 이야기를 거름 삼아 장하오라는 안드로이드를 구축한다.
장하오가 아는 사람들은 카페 사장님, 제이,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의 원장, 의사들, 간호사들, 가끔 성한빈을 지치게 하는 진상들. 한빈이 말하기를 한참 동안 망설이고 꺼려하다 결국 토해내는 아픈 사람들이 전부다. 장하오의 세계는 오직 한빈으로만 이루어졌기에.
“그 사람이 또 왔어.”
“그 사람?”
“응, A.”
남자 A는 며칠째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에 출근 도장을 찍는 중이다. 문턱까지 왔다가 돌아가기를 수십 번씩 반복한다. 지우고 싶은 기억들을 모조리 압축해 제출하려다가도 결국 눈물을 쏟으며 후회한다. 죄송하다며 허리 숙여 사죄하고 다급하게 짐을 챙겨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를 빠져나간다.
사랑했던 연인을 도려내는 일은 그토록 괴롭고, 아프고, 힘든 일이라서.
한빈은 남자 A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막연하게 가정하고 공감을 학습할 뿐. 손을 들어 가슴께를 문지르다 고개를 숙인 한빈이 장하오의 뺨을 살살 쓸어내렸다. 사람처럼 보드랍고 미세한 온기가 느껴지는 피부. 생각해 보면 장하오는 자체 충전 시스템이 있는 건지 별도로 충전 단자를 꽂지 않아도 늘 가동이 잘 되는 편이었다.
어쩌면 에너지를 주입하지 않아서 자주 지치는 편인가. 안드로이드치고는 체력이 형편없기는 한데. 버릇처럼 뒷덜미를 쓰다듬자 장하오가 한빈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고작 이런 행위만으로도 충족감을 느끼는 건지. 충전이 되는 건지. 장하오는 한빈이 내주는 온기와 애정만으로도 아주 쉽게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전부인 양 굴었다.
장하오의 전부. 장하오의 세계. 장하오를 이루고 구성하는 유일무이한 사람. 성한빈.
한빈은 조금 머뭇거리다 뒷덜미의 충전단자를 꾸욱. 검지로 눌렀다. 파인 홈만큼 자국이 남는 손가락. 미세한 손짓 한 번에 불안을 읽었는지 고개를 든 장하오가 고요한 눈동자로 한빈을 응시했다. 연인인 듯 연인이 아닌 우리. 장하오의 모든 행동에는 불행하게도 애정이 묻어있다. 한빈은 그저 단순한 안드로이드의 주인이 아니라, 장하오라고 이름 붙인 안드로이드의 사랑을 받는 연인이다.
외로움이 당연한 시대에서. 계산된 애정이 팽배한 세계에서. 성한빈이 바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과거를 반추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없다. 기억은 제멋대로 조립되고 분해되고 보정되어 또 다른 기분을 낳기에. 한빈은 그저 연인처럼 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심장소리를 듣는 안드로이드를 마주 안을뿐이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너를 잃기 싫다는 불안을 손끝으로 표현하며. 장하오가 가장 바라는 것들을 충족시킨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성한빈을 위해서.
그러므로.
성한빈의 안드로이드는 어딘가 좀 이상하다.
안드로이드는 감정이 없기에, 사랑조차 고작 흉내 내는 것이 전부인데. 장하오는 이상할 정도로 성한빈을 인간처럼 사랑한다. 성한빈이 배운 적도 없고 보지도 못한 사랑을 모방한다. 인간의 심장 소리를 사랑으로 학습한다. 가짜 고철 심장을 달고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마치, 성한빈을 사랑해 본 적 있는 인간처럼.
성한빈의 안드로이드는 어딘가 좀 이상하다. 안드로이드는, 이런, 일…이….
403 Forbidden 접근이 거부되었습니다. |
5. 접근이 거부되었습니다.
남자 A가 기억을 지웠다.
눈물자국을 두 뺨에 덕지덕지 매달고 수술 예약을 잡은 남자 A는 기억을 지운 채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 전용차에 실려 집으로 돌아갔다.
죽은 연인의 기억을 지워주세요.
기억. 추억. 제거. 삭제. 완벽한 소멸.
기억을 지운 사람들은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조차 제거당한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길수록 다양할수록 무한할수록 공백은 커진다. 병원에서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고객에게 가짜 기억을 제공받고-대부분 환자들이 원하는 기억을 단어나 일기 형식 등으로 받는다.- 빈틈을 채워 새로운 삶을 조립한다.
진짜도 가짜도 무엇도 없는 삶.
A는 이제 더 이상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를 찾아오지 않았다. 한빈 역시 새로운 환자들로, 나날이 쌓여가는 장하오와의 추억들로 남자 A를 잊었다. 수면 아래 깊숙이 묻어둔 기억은 대부분 시간과 함께 풍화되거나 조금씩 갉아먹혔다. 남자 A가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 다시 찾아오지 않는 이상 한빈의 기억 속에 그가 떠오를 일은 없었다. 어떠한 매개체를 통해 불현듯 떠오를 수는 있어도.
“B, 그 소식 들었어요?”
남자 A를 다시 떠올리게 되는 계기가 이런 것만큼은 아니기를 바랐는데.
“요즘 세상이 어수선해요.”
피켓을 들고 목이 터져라 기억 제거 사업을 반대하는 시위 단체들이 모여있는 시청 앞 광장. 남자 A는 모두가 보는 그 자리에서 투신했다. 기억 제거 사업은 실패했어요. 한 줄의 유서를 남긴 채.
한빈은 제이의 목소리에 다급히 창을 내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게요. 요즘 들어 부쩍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를 찾는 손님들이 줄었다. 예약을 취소하는 일도 잦아졌다. 어차피 한두 달만 지나면 남자 A의 죽음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것이 뻔했다.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되는 불매운동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 마련이고. 예약의 빈틈을 노린 손님들이 하나 둘 늘기 시작하면 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
믹스 커피를 휘휘 저으며 아쉬운 표정을 짓던 제이가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았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도 기억 제거 사업 이야기가 나오나 보더라고요. 무심한 말투에 고개를 돌리자 마우스를 딸깍거리던 제이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기억을 지우는 게 뭐 대수라고.”
무의식에 가까운 대사는 한숨 같기도 탄식 같기도 했다. 제이는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짜증 섞인 신음을 토해내다 이내 한빈에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요즘 내가 애 때문에 너무 예민해져서.
“제이는 기억을 지우고 싶은 적 없어요?”
“갑자기요?”
“그냥, 그냥요.”
“있기야 있죠. 사람들은 다 지우고 싶은 기억 하나쯤은 품고 살지 않나? B는요.”
“전… 잘 모르겠어요.”
“뭐, 보통은 그렇겠죠. 근데 기억을 지운다고 뭐가 달라지나. 사람도 기억도 함께 만들어지는 건데, 그 기억을 지운다고 이미 만들어진 사람이 예전으로 변하진 않잖아요.”
“…….”
“우리가 지우는 건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지, 그 사람의 체온은 아니니까요.”
세상에는 지울 수 없는 것들도 있다. 한빈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시 몸을 일으키는 제이를 따라 시선의 궤적을 그렸다. 커피 사 오려고 하는데, B도 마실래요? 밤새 잠을 별로 자지 못했는지 눈 밑이 퀭했다. 몹시 피곤해 보이는 작태에 고개를 저으며 손을 흔든 한빈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제이가 사라지자 손님이 끊긴 데스크 안으로 적막이 감돌았다. 한빈은 내려놓은 창의 이름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마우스 커서를 옮겨 클릭 버튼을 눌렀다.
이상한 기시감. 은근하게 밀려오는 구역질. 403 Forbidden, 접근이 거부되었습니다.
한빈이 남자 A의 정보를 볼 수 없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는 단 한 번도 고객의 정보를 한빈에게 숨긴 적이 없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빨간 낙인이 찍힌 에러 창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빈이 제이의 자리를 차지했다. 망설임을 머금은 손끝으로 꾹 꾹 키보드를 눌러 하나의 이름을 완성했다. 잠깐의 로딩 끝에 펼쳐지는 페이지.
한빈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동요하는 대신 기록을 읽는다. 성한빈의 계정으로는 아예 접근조차 불가한 페이지. 말끔한 기록. 비워져 있는 창에 적혀 있는 날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기억 제거 사업은 실패했어요.
기억은 사랑을 지우지 못한다.
우리가 지우는 건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지,
그렇다면 성한빈은, 무엇을.
그 사람의 체온은 아니니까요.
지우고 싶었던 걸까?
6. 홈
“무슨 일 있었어?”
장마철이 다가오자 수시로 물비린내가 났다. 한빈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하차 벨을 눌렀다. 햄버거 사이에 낀 패티처럼 꾸역꾸역 사람들로 들어찬 버스 안을 비집고 내리자 눅눅한 공기가 느껴졌다. 으레 그렇듯 정해진 시간에 나와 한빈을 기다리는 장하오의 손에는 새카만 장우산과 편의점 봉투가 들려있었다. 한빈은 인사 대신 두 팔을 뻗어 장하오를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성한빈이 돌아갈 곳. 성한빈의 집.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도 사랑하는 연인.
들을 수 없는 심장박동 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가짜인 걸 알면서도 장하오처럼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으면 이유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한빈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뒤로하며 꾸물꾸물 장하오의 품을 파고들었다. 부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여 심장박동 소리를 하나 둘 세었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가 눅눅해 땀이 삐질삐질 나는데도. 장하오는 거부하는 대신 한빈을 꽉 마주 안고 머리를 기대왔다. 네가 원하는 것은 다 해주고 싶다는 듯.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낸 인간의 모방을 인간처럼 베풀며.
집까지 손을 잡고 걷는 일은 익숙했다. 걸음을 나란히 했다가, 서로를 마주 보고 의미 없이 웃다가, 비좁은 계단을 어깨 비벼가며 오르고. 집에 도착하면 인사치레처럼 입을 맞췄다. 쪽, 가벼운 소리를 내며. 기분이 좋으면 한두 번 더 맞추고. 마음이 간지러우면 조금 진득하게 살갗을 섞었다.
장하오는 안드로이드처럼 피부가 서늘한데, 안드로이드답지 않게 입안은 보드랍고 따뜻해서. 혀를 얽고 있으면, 쏟아지는 숨을 맞고 있으면 꼭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처럼 느껴졌다. 목덜미에 드러난 두 개의 홈이. 음각으로 새긴 제품명이. 인간임을 부정하고 있음에도.
눅눅한 공기를 털어내기 위해 에어컨을 틀었다. 한빈은 찬물을 맞으며 평소보다 조금 길게 샤워를 했다. 뜨거운 피부를 식히고, 복잡한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었다. 미리 챙겨온 속옷을 입고 욕실을 나서자 드라이기를 들고 서있는 장하오가 한빈을 반겼다. 장하오는 샤워를 하지 않아도 눅눅함을 느낄 수 없는 안드로이드라. 뽀송뽀송한 피부를 검지로 꾹 누르자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한빈은 장하오가 부르는 대로 소파에 앉아 잠자코 머리를 말려주는 손길을 받았다.
노곤해지는 느낌. 무거운 눈꺼풀. 깜빡, 깜빡. 수명이 다한 전구처럼 느리게 점멸하는 시야.
“장하오.”
“응.”
“안드로이드는 어떤 느낌이야?”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이 차갑다. 장하오는 온도를 적절하게 바꿔가며 머리를 말리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거울 너머 한빈을 쳐다보았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생각이 많아졌다. 드라이기의 작동을 멈추며 코드를 뽑은 장하오가 한빈의 앞에 앉아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솔직하게 대답해?”
“응, 솔직하게.”
“아무 느낌 없어.”
“…….”
“나는 인간처럼 씻을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어서. 그냥 내가 인간 같아.”
“그렇지만 안드로이드잖아.”
“그게 중요해?”
목덜미에 팬 두 개의 홈. 장하오는 망설임 없이 잡고 있던 손을 가져가 제 목 위로 얹었다. 힘주어 누를수록 붉게 변해가는 피부가 진짜 인간의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한빈은 다급하게 손을 뿌리치며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장하오를 끌어안았다. 내가 미안해.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꼭 빗소리 같았다. 장하오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뻐근한 통증이 진짜인지 아니면 머리에서 인지하는 문장을 환상처럼 느끼는 건지 구분하지 못했다.
“내가 왜 널 만들었는지 모르겠어.”
“그걸 꼭 알아야 하는 거야?”
입안에서 맴도는 말들이 수시로 조각조각 난다. 분해되고 절단되고 해체되어 소리 없이 흩어진다. 빌어먹게도 느껴지는 이상한 기시감. 배운 적 없는 사랑에 대하여 이토록 잘 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를 이토록 강하게 열망하고 사랑한 적 있던가. 성한빈이 지운 기억은 무엇이지. 왜 열람할 수 없는 거지. 끊임없이 되묻고 있지만 한빈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감정의 근간을 알고 있다.
누군가를 궁금해하는 것. 그의 전부를 알고 싶은 것. 제 전부를 내어주는 것보다 그의 전부를 가지고 싶은 것. 한빈의 사랑은 언제나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필요로 하기에. 끊임없이 내어주고 쏟아내고 토해내야만 살아있음을 느끼기에.
안드로이드를 사랑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고 습득하는 로봇이. 부품이 없으면 그저 폐기 처리되고 마는 고철 덩어리가. 심장이 없는, 인간을 표방하고 모방하는. 성한빈의 취향으로 만들어진 장하오는.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숨을 쉬는 것이 어렵다. 이게 사랑인지도 알 수가 없다.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은 마음을 삼키며 눈을 깜빡이던 한빈이 입술을 지르물었다. 장하오는 꼭, 성한빈이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 같다. 온전한 성한빈이 만들어낸 성한빈의 과거. 기억. 편린.
과거의 성한빈을 돌아본다. 성한빈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왜 기억을 지우기 전에 장하오를 만들었을까. 왜 기억을 지우고 장하오를 찾았을까. 성한빈은 대체 왜…….
“나는 그냥… 한빈을 사랑하고 싶어.”
이토록 끔찍하고도 사랑스러운 괴물을 만들어 냈지?
7.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
기록보관실의 문이 열렸다. 남자 A의 자살로 인한 수사 때문이었다. 원장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오가는 경찰들을 지켜보다 제이와 한빈을 따로 호출했다. 기록보관실이 열려있는 동안은 환자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일주일 정도 유급휴가를 주겠다는 말이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환자들을 제외한 두 사람은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의 직원이므로. 원장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기록보관실을 오가는 사람은 성한빈인데. 환자가 없으면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가 돌아가지 않는가?
일주일간의 예약을 다시 잡아야 하는 건 한빈의 몫이었다. 하루 이틀이면 끝날 일이지만 당장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마당에 원장의 권고는 완강했다. 제이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짐을 싸는 동안 데스크에 앉아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던 한빈이 몸을 일으켰다.
“B, 어디 가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덜어내는 것. 지우는 것. 한빈은 짐을 챙겨 화장실로 향했다. 휴대폰을 켜 장하오에게 오늘은 회식이 있어 늦는다는 거짓말을 전송했다. 가장 끝 칸에 들어가 커버를 내리고 시간을 세는 대신 눈을 감았다. 몸을 웅크리고 숨을 참았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멎었다.
원장의 한숨 소리. 짜증 섞인 목소리. 알 수 없는 대화.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데스크 앞을 서성거리던 원장이 멀어졌다. 네 시간, 다섯 시간. 분주한 발걸음 서너 개가 요란하게 바닥을 울렸다. 한빈은 발걸음 소리가 멎고도 한참을 기다리다 완연한 어둠이 찾아왔을 때 화장실 문을 열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기록실 대신 데스크 앞으로 향했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 쏟아진 기록들. 상자 뚜껑에는 익숙한 이름이 적혀있었다.
[ 성한빈 ]
수면제를 탄 음료가 바닥에 흥건하게 고였다. 끄트머리가 젖은 서류를 집어 들어 무감한 눈으로 내용을 읽던 한빈이 상자에서 쏟아진 물건들로 시선을 옮겼다. 사진이 프린팅된 머그컵. 커플링. 커플티. 액자. 놀이공원 티켓. 자주 가던 단골 카페의 쿠폰. 정갈한 글씨체로 꾹꾹 눌러쓴 편지들.
욕지기가 치밀었다. 한빈은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으며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신음을 토해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 속을 게워내도 시큼한 위액만 뚝, 뚝 떨어졌다. 벽을 붙잡은 채 한참을 구역질하다 고개를 든 한빈이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데스크를 벗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성한빈이 지운 것. 삭제한 것. 제거한 것. 그리고 다시 되살려낸 것.
성한빈은 왜.
“한빈아.”
장하오를 지웠을까.
“오지 마.”
인간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제거된 기억은 되살려낼 수 없다. 그럼에도 한빈은 장하오를 보며 이상한 기시감을 느낀다. 피부로 닿아오는 선연한 감각들. 체온. 익숙한 목소리. 어색하지 않은 시선. 성한빈이 원해서가 아니라, 성한빈에게 너무도 당연하게 주어졌던 것들.
장하오와 다정하게 뺨을 붙이고 찍은 사진은 한빈의 기억에 없는 것이다. 붉은 기가 도는 바짝 깎은 머리. 카메라 렌즈 대신 온전하게 한빈을 향해 있는 두 눈. 행복해 보이는 얼굴. 사랑을 숨길 수 없는 시선. 꾹꾹 눌러쓴 활자에 담긴 진심.
성한빈이 지우고자 했던 것.
돌아올 수 없는 기억을 붙들고 머리를 굴려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빈은 본능적으로 뒤돌아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음박질을 쳤다. 불규칙하게 치미는 욕지기에 숨이 모자랐다. 엉망으로 부서지는 숨을 거칠게 토해내며 깜빡이는 파란불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넌 한빈이…….
쾅!
둔탁한 소리에 얼마 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스키드 마크를 그리는 마찰음이, 처절한 비명소리가. 어지럽게 흩어졌다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엄청난 이명을 동반했다가. 한순간에 한빈을 차가운 현실로 이끌었다.
쿵.
쿵.
쿵.
마구잡이로 뛰는 심장박동 소리가 온몸을 울린다. 흐트러지는 호흡이 불안한 마음을 좀먹고 숨을 앗아갔다. 다시금 이어지는 누군가의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려 방금 막 지나온 횡단보도 너머를 바라보던 한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새하얀 보도 위로 시뻘겋게 번지는 피. 안드로이드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것.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숨. 누가 구급차 좀 불러주세요. 여기, 사람이 치였어요! 다급한 사람들의 목소리. 어지러운 시선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이명.
꿈보다 더 꿈같은 현실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물들었다. 기괴한 광경에 숨 쉬는 법을 잊을 정도였다. 한빈은 가벼운 호흡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진 장하오를 멍하니 바라보다 그대로 까무룩 기절했다. 성한빈의 안드로이드는.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8. 시스템을 종료합니다.
모든 것이 왜곡되고 굴절된 삶. 성한빈은 고요한 얼굴로 장례식장에 앉아 숨을 들이마신다. 손가락을 까딱. 까딱. 까딱. 보다 못한 제이가 한빈의 손을 잡아 내리며 눈을 맞춰왔다. B, 정신 차려.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에게도 ‘정신’이 있다는 건가.
망가진 사고 회로 때문인지 웃음이 났다. 한빈은 미친 사람처럼 한참을 웃다, 아니지. 안드로이드는 사람이 아니니까. 고장 난 로봇처럼 한참을 웃다, 우는 대신 눈을 감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죽은 사람은 장하오고. 성한빈은 장하오의 죽은 연인을 복제해 만든 안드로이드니까. 울면 안 되지. 울 수 없으니까. 안드로이드에게는 학습하지 않은 감정 따위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장례식장은 고요했다.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한빈에게 모든 진실을 토해낸 원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떠났다. 반 년 동안의 인연으로 한빈의 곁을 묵묵히 지킨 제이는 힘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안드로이드 연장 관련 문제는 제가 해결해 줄 테니 새 삶을 시작하자는 말. 한빈은 웃지도 일그러지지도 않은 장하오의 영정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장하오는 왜 죽은 성한빈을 복제했을까?
시뻘건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육개장을 받아 반찬이 세팅된 테이블 중 한자리를 차지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는 음식도 먹을 수 있고 씻을 수도 있었다. 완전한 사고는 불가능하지만 많은 정보들을 스스로 학습할 수 있고 감정을 흉내 낼 줄 알았다. 기쁨. 분노. 인내. 배려. 짜증.
장하오는 그중 성한빈에게 오직 슬픔만을 학습시키지 않았다. 안드로이드 자체에 눈물샘이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 안드로이드 성한빈은 슬퍼할 줄을 모른다. 장하오가 가르치지 않았기에. 학습한 적 없기에. 이름이 없는 안드로이드는 B. 비는 울지 않는다. 그저 흐르고 고이다 한꺼번에 쏟아져 내릴 뿐.
‘한빈 씨는 원래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 직원이었어요. 하오 씨와는 꽤 오랜 기간 연인 사이였고, 불행한 사고를 당하기 이틀 전에 기억을 지웠어요. 이유는….’
한빈의 기억은 불법으로 제거 당했다. 두 사람의 교제를 반대한 부모님의 짓이었다. 타인의 의지로 기억을 지운 한빈은 장하오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생전 처음 보는 순진무구한 낯으로 무력하게 서있는 장하오에게 연락처를 내밀었다. 작업 멘트가 구닥다리 같지만 싫지 않아서 좋아요. 기억을 지운 성한빈조차도 장하오를 사랑하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장하오는 그게 꼭 성한빈의 숨길 수 없는 진심 같았다.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성한빈이 기억을 지워도 장하오가 기억할 테니까.
‘한빈 씨가 죽고 하오 씨가 많이 힘들어 했어요.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폐인처럼 지내다가, 보다 못한 한빈 씨 가족이 허락을 해줘서 한빈 씨를 복제한 거예요. 다만 인간을 복제한 안드로이드는 사회에 적응할 기간이 필요해서, 복제한 사람에게는 반 년 정도 접근금지 신청이 떨어져요. 죽은 사람의 대용품이나 다름없으니까. 사회 구성원으로서 완벽한 동화가 되기 전까지는 혼란을 주면 안 되거든요.’
진짜 성한빈은 장하오와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사고로 죽었다. 사고 다발구역.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장하오는 성한빈을 잃고 힘들어했다. 성한빈은 장하오를 잊은 채 죽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니 사람을 되돌렸다. 죽은 온기를 끌어안고 시체처럼 사랑했다. 장하오가 성한빈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성한빈이 장하오를 위해 만들어졌으니.
플라스틱 수저를 쥔 손가락을 내려다본다. 선명하게 느껴지던 두 개의 홈. 음각으로 새겨진 안드로이드 번호.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입술을 씹는 한빈에게 원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요즘 누가 안드로이드를 그렇게 만들겠어요. 안드로이드를 안드로이드처럼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데.’
충돌하는 사고. 경고 문구와 함께 뜨는 에러 창. 기계의 착각. 오류. 성한빈은 처음부터 제 곁에 돌아올 장하오를 안드로이드로 인식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장하오의 의도는 알 수 없었다. 장하오는 그저, 한빈이 평생 자신의 곁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을까?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빈 씨라면 안드로이드를 절대로 폐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지도 몰라요. 하오 씨는 한빈 씨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했으니까요.’
죽은 사람은 답이 없다. 허공을 향해 끊임없이 되물어도 메아리치는 음성은 작기만 하다. 한빈은 육개장에 밥을 넣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영정 사진 아래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느껴지지 않는 심장박동 소리를 찾는다. 위이잉. 귓전을 맴도는 기계음. 장하오에게서 나는 것인 줄로만 알았던 성한빈의 작동음.
‘나는 그냥… 한빈을 사랑하고 싶어.’
눈꺼풀이 가물가물하다. 매일매일 장하오 덕분에 충전되던 몸이 3일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한빈은 충전 단자가 있는 배꼽을 문지르며 사고하기를 멈춘다. 눈을 감으면 그곳에는 장하오가 있을 것 같아서. 기억을 지우고 떠난 성한빈은 성한빈을 모르지만.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 그대로 성한빈을 복제한 안드로이드이니까. 부가적인 시스템은 장하오의 손을 거쳤을지라도. 안드로이드 B를 이루는 기억은 전부 성한빈이 베이스이기에.
9. 한빈은 기억을 지우지 않기로 한다.
장하오를 지우면 이 세상에서 그는 영영 없는 사람이 될 테니까.
10. R e b o o t . . .
새벽 다섯시 반.
알람시계 소리에 눈을 뜬 한빈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어제 어떻게 집에 들어갔더라? 왜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거지?
“이상하네.”
오늘 따라 몸이 가뿐했다. 한빈은 어제의 기억을 더듬기 위해 일기장을 찾아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흑심 하나 그어지지 않은 깨끗한 백지. 피곤해서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잠들었나? 얼빠진 얼굴로 공백을 엿보다 뺨을 문지른 한빈이 서둘러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토스트기에 노릇하게 구운 식빵을 한 입 베어 물고 일기장과 공책을 챙기며 분주히 머리를 말렸다. 미리 시간을 계산해둔 덕분에 허둥거리며 우왕좌왕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 날씨는 맑음.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이 청명했다. 한빈은 평소처럼 단골 카페로 향해 텀블러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 했다. 배차 간격이 짧은 504번 버스를 타고 햄버거 빵 사이에 낀 패티처럼 눌려 있다 시청 광장을 지날 즈음 목이 터져라 울부짖는 시위 단체들의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하루 일과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코너를 돌 때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버스. 후덥지근한 내부 공기. 공백에 공백을 더하는 하루 일정. 늘 내리던 딜리트 메모리 컴퍼니 앞 정류장을 지나 사십 분을 더 달렸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내리고 빈자리가 날 즈음 하차 벨을 누른 한빈이 뻑뻑한 눈가를 문질렀다. 아무 말 없이 카드를 찍고 정류장에 내려 걸음을 옮겼다. 초행길임에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알 것도 같았다. 한빈은 하늘을 향해 높게 솟구친 신식 건물 앞에서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지문을 갉아내듯 문지르고 또 서로 문지르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데스크로 향했다. 고요할 줄 알았던 로비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니.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모두가 정교하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일 수도 있으니까.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자 십분도 채 지나지 않아 손에 들린 종이의 숫자가 안내판 위로 떠올랐다. 마른침을 삼키며 동요를 끝낸 한빈이 창구 앞으로 가 의자를 꺼내 앉았다. 직원은 밝지도 그렇다고 불친절하지도 않은 얼굴로 한빈을 힐끔 쳐다보며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조금은 아날로그 한 감성.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잃을까 두려웠던 건가. 한빈은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다 구비되어 있는 팸플릿을 하나 꺼내 펼쳤다. 안드로이드 복제. 손끝으로 문구를 가리키자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직원이 접수 서류를 내밀었다.
“본인 신분증 주시고요. 복제 대상과의 관계는 명확하게 적어주셔야 해요. 증명 서류 떼오셨죠?”
장하오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 흔한 유언 한마디 남기지 않은 채. 눈을 뜨고 눈을 감고 내일을 기다리고 또다시 눈을 감아도 그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안드로이드가 아니었고, 안드로이드는…… 죽지 않으니까.
뉴 노멀 프로젝트 본사 건물은 엄청난 인기와 걸맞게 사람이 많았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직원들은 안드로이드 같기도 사람 같기도 했다. 제 것이 아닌 제 것의 신분증과 관계 증명 서류를 내밀며 안드로이드 신청서를 천천히 작성하기 시작한 한빈이 대상과의 관계 란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우리가 사랑을 하기는 했나?
장하오가 사랑한 것은 죽은 성한빈일까. 성한빈을 복제한 성한빈, B일까. 그도 아니라면 남겨진 미련일까.
이름이 없는 세계. 사랑을 상실한 시대. 한빈은 낭만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비어있는 칸을 채웠다. 연인.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은 적 없으나 장하오와 성한빈의 관계는 아주 명확했다. 한빈은 메모리칩에 저장된 짧은 추억들을 떠올리며 서명이 적힌 자리에 이름 세 글자를 또박 또박 적었다.
‘응, 알아. 하지만 내가 한빈을 기억하니까 괜찮아.’
-1.
기억은 거짓말을 한다.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므로.
0. 그럼에도 성한빈의 기억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장하오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 황병승 - 메리제인 요코하마
영화 <이터널 선샤인> 모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