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빈웹진: cinéclub

이별 연습

낮술

​#화양연화​

 

 

 






 

"헤어지자, 우리.”

"알겠어. 네가 원하면.”

 

 

얇디 얇은 와인 잔을 입에 대며 한빈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리깐 눈으로는 저쪽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리는 와인의 잔향이 썼다. 장하오는 말이 없었다. 그가 대꾸하길 기다리며, 내려놓은 와인 잔의 베이스를 검지 손가락으로 둥글게 문질렀다. 무심하게, 감정 없이, 그리고 태연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그러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무심하고, 감정 없고, 태연할 수가 없었다. 와인을 넘긴 목구멍으로 자꾸 무언가 차오르는데, 그게 비참함인지, 서글픔인지도 가늠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흘러내리는 촛농을 바라보며 성한빈은 생각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언제부터 이런 마음을 품게 된 걸까.

그날은, 장하오와의 마지막 밤이었다.

 

 

 

 

이별 연습

 

 

 

차라리 눈이라도 오면 좋을 텐데.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며 성한빈은 생각했다. 파리에 머무는 3일 내내 잿빛이었던 겨울 하늘은 마지막 날도 어김없었다. 누구를 만나든 단번에 사랑에 빠질 것 같은 그런 낭만적인 도시를 상상하고 왔는데. 이번 여행이 인생 첫 파리였던 한빈으로서는 다소 김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진짜 문제는 겨울의 파리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바로 전날, 몽환적인 불빛이 번진 밤의 파리를 거닐면서도 한빈이 느꼈던 건 공허함뿐이었으니까.

 

 

'그날' 이후 한빈의 속은 언제나 폐허였다. 그러나 괜찮은 듯 살았다. 별 거 아닌 것처럼 살았다. 오히려 이상증세가 나타난 건 그날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2년 전부터였다. 숨이 목에 걸린 듯 넘어가지 않는 듯한 느낌에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뜬다든가, 불현듯 찾아온 통증 같은 서러움에 밤새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든가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 증세가 한빈에게 덮쳐왔다.

 

 

신경쇠약과 불면 거기에 평균치보다 아주 많이 높은 내면의 불안. 우울증에서 비롯된 증상들이라고, 정신과 의사는 한빈의 상태를 그렇게 진단했다. 오래 전 한빈에게 찾아왔던 불행의 잔여물이라고 심플하게 결론 내렸다. 그러나 한빈은 동의하지 않았다. 슬픔과 외로움은 달랐다. 그날을 떠올리면 여전히 슬펐지만, 지금의 성한빈은 고독했다. 제 안을 가득 메운 어두운 감정 안에서도 그 둘은, 물과 기름처럼 뒤섞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성한빈은 알고 있다. 성한빈은 우울하지 않았다.

 

 

우울한 게 아니라 외로울 뿐이었다.

깨져버린 어항 안을 홀로 헤엄치는 붉은 금붕어 같은 삶이었다. 동그란 귀퉁이 한 켠에 금이 가서 물이 새어나가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점점 낮아지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또 가라앉으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아가미를 격렬하게 뻐끔거리며, 붉은 지느러미를 애처롭게 팔랑거리며. 투명한 유리벽 밖을 애타게 바라봤지만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세상 밖을 나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오래 버티다가는, 숨을 쉬지 못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죽기 직전까지 숨을 허덕이며 어항 밖을 헤매다가, 제 세상을 채워줄 사람을 데려왔다. 성한빈에게 어항 안의 물은 사랑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주는 사랑은 밀도 낮은 액체여서 시간이 지나면 줄줄 새어나갔다. 수면은 곧 바닥을 보였다. 사랑이 곧 바닥을 보였다. 그럼 한빈은 또 다른 누군가를 데려왔다. 아가미를 헐떡거리며. 곧 죽을 사람처럼 숨을 다시 또 헐떡거리며. 그가 이 안을 채워주길 바랐다. 그러나 언제나 똑같은 결론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틈을 통해 새어나갔고, 한빈은 얇게 깔린 물에서 죽지도 못하고 숨을 몰아 쉬어야했다.

 

 

그럼에도 한빈은 운명론자였고, 낭만주의자였다. 어딘가에 저를 이 안에서 살아남게 해줄, 갈라진 틈을 단단하게 메워줄 고체 같은 사랑이 존재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한빈은 여행을 결심했다. 27살의 성한빈에서 28살의 성한빈으로 넘어간, 1월의 어느 날이었다. 한빈은 진짜 사랑을 하고 싶었다. 이제껏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진짜 사랑을. 찰나의 시간 동안만 숨 쉬게 해주는 그런 것들은 전부 가짜였다. 가짜는 성한빈을 살리지 못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나를 살리는, 나를 살게 만드는 진짜 사랑을 해보자. 기왕이면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파리였다. 낭만과 연인의 도시 파리. 그러나 아무리 검색 해봐도 겨울의 파리는 추천하지 않는다는 말들뿐이었다. 춥고, 우울하고, 고독하다고. 마치 지금의 성한빈 같은 감상뿐이었다. 그렇다고 여행 시기를 미루고 싶진 않았다. 한빈은 지금 당장 사랑이 필요했고, 지금 당장 사랑을 찾지 못하면 정말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겨울에는 유럽 중에서도 스페인이 따뜻한 편이며, 스페인에 가기 위해서는 파리를 경유하는 비행기가 비교적 싸다는 걸 알자마자 티켓을 예매했다. 고작 몇 시간 경유할 바에는 아예 파리 인, 바르셀로나 아웃으로. 그렇게 하면 더 낮은 가격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낭만의 도시에 대해 아주 조금 남은, 미련의 한 조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하여 한빈은 파리에 오게 된 것이다. 첫날은 루브르 박물관 안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미술 작품들을 올려보는 것에 하루를 통째로 썼다. 다음 날은 몽마르트 언덕이며, 개선문이며, 에펠탑이며 하는 관광지들을 돌아다녔다. 그쯤에는 비수기인 것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번쩍거리는 에펠탑 밑에서 이름 모를 남자의 버스킹을 구경하며 애상에 잠겼던 때까지도 그랬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레 몰아닥친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한빈은 곧 파리에 온 걸 후회했다. 택시를 타기엔 애매한 거리였다. 세찬 바람 속에서 빨갛게 언 코를 훌쩍이며 센느강의 어느 다리를 건널 때에도, 엘리베이터도 없는 숙소의 3층까지 걸어 올라갈 때에도 한빈은 후회감을 곱씹었다.

 

 

사랑을 찾아 파리에 와놓고, 정작 사랑을 찾을 수 없는 곳들만 돌아다녔다. 제가 원했던 게 정말 사랑이 맞는지 의심마저 들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게 겁이 나는 건지, 사랑 따위 그냥 여행을 오기 위한 핑계였던 건지 스스로가 헷갈려졌다. 어느 순간에는 그저, 파리보다 훨씬 따뜻하다는 세비야로 얼른 떠나고 싶어졌다.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더 보냈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리멍덩한 하늘 밑에서는 어떤 사진을 찍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빈은 드디어 파리를 떠난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오기까지 20분은 남아있었다. 옆에 세워둔 28인치의 은빛 캐리어 손잡이를 꽉 붙잡고 주위를 둘러봤다. 소매치기의 천국인 파리에서는, 잠깐 한 눈 판 사이에 캐리어를 도둑맞는 일도 흔하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주변에 소매치기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애초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기는 했다. 그 중 동양인은 한빈을 포함해 두 명 뿐이다. 그럴만했다. 지금 한빈이 기다리는 버스가 향하는 곳은 여행자들이 흔히 선택하는 공항은 아니었으니까.

 

 

오늘 아침 한빈은 제가 가야 하는 공항이 어디인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보베 티예 공항이라니. 한빈이 알기로 파리의 공항은 두 개였다. 샤를드골 공항과 오를리 공항. 분명히 파리 출국으로 검색해서 구입한 티켓이었는데 덤벙대는 게 일상인 한빈은 출발지를 확인하는 걸 잊었다. 파리에서 세비야로 가는 것 중 가장 싼 티켓이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걸까. 황망하게 구글 지도를 검색해봤다. 그걸 파리의 공항이라고 불러도 괜찮나 싶은 위치에 보베 티예 공항이라는 이름이 찍혀있다. 네이버에 검색도 해봤다. 원래 공항에 갈 때는 우버를 부를 예정이었는데. 1시간이 넘게 소요되는 그곳으로 우버를 타고 갔다가는 한국 돈으로 10만원이 넘는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결국 한빈은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모를 Porte Maillot 역까지 우버를 타고 와서, 공항버스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다시 한 번 또 다른 동양인을 힐끔 봤다. 저 남자의 손에도 검은 캐리어 손잡이가 쥐어져있는 걸 보면 한빈과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게 맞을 텐데. 혹시 나처럼 실수한 걸까. 휴대폰을 내려 보고 있는 그 옆얼굴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 생긴 게 한국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디로 가는 걸까? 혹시 나처럼 세비야? 이런저런 궁금증이 자꾸 들었다. 그건 아마, 멀리서 보았을 때도 눈에 띄게 잘생긴 그의 얼굴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앞머리 때문에 절반가량만 드러난 이마 밑의 짙은 눈썹부터 해서 티존이 뚜렷한 높은 콧대와 옆으로 섬세하게 트인 기다란 눈매까지. 피부 결도 하얘서 조금 과장하면 루브르에서 본 그림 중 하나에 있을 법한 얼굴이다. 검은 롱코트를 입고 있는데 그게 또 어두침침한 겨울의 파리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그게 다였으면 좋았을 것을.

아주 오래 전, 한빈을 마주한 거울 속에서 느끼곤 했던 위태로움이 그 얼굴에 존재했다. 저를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지쳐서 모든 걸 놓고 싶고, 그래서 그냥 전부 다 포기하고 싶은 얼굴. 낯선 남자에게서 성한빈은 과거의 제 얼굴을 발견하고 말았다.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말이라도 걸어볼까 망설였지만, 휴대폰을 내려 보는 남자의 얼굴이 심각해보여서 용기가 나질 않았다. 어쨌거나 잘생긴 얼굴에 대한 흑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닌 터라, 괜한 수작처럼 보일까 걱정됐다. 버스가 도착하고 남자가 먼저 짐칸에 캐리어를 실었다. 뒤따라 캐리어를 넣으며 한빈은 남자의 뒤통수를 힐끔힐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버스에 올라타니 절반 가량이 차있었다. 어디 앉을지 두리번거리던 한빈의 눈에 꽂힌 건 남자 옆, 비어있는 자리였다.

그곳으로 발이 절로 향했다. 지금 이 순간 용기 내지 않으면, 공항으로 가는 내내 후회할 것 같았다. 자신이 옆에 앉는 걸 느꼈을 게 분명한데도 남자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버스가 출발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의 시선은 줄곧 창 너머 스쳐가는 파리의 거리에 향해 있었다.

나를 보게 하고 싶어. 내 존재를 알리고 싶어.

왜 그런 생각이 든 건지는 모르겠다.

"Hello."

 

 

소리 내어 인사를 건넨 건 다소 충동적이었다.

남자의 눈이 드디어 이쪽으로 향했다. ... 미쳤는데. 나른하고도 무심한 눈빛을 그대로 받으며, 한빈은 생각했다. 심장께가 꽉 조여 오는데 그게 남자의 미모 때문인지, 미친 척 말을 건넨 자신의 행동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살면서 그런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느낀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이 남자 때문에 파리에 온 걸지도 모른다는... 정말 운명론자다운 그런 생각을 그 순간 하고 말았다.

"혹시... 한국 분이세요?"

 

 

제발 한국 사람이어라. 한국인이어라. 변변치 않은 영어실력으로는 깊은 대화를 나눌 자신이 없었다. 속으로 소망을 되뇌는 동안 남자는 빤하게 한빈의 얼굴을 바라봤다. 대답을 기다리는데도 아무 말이 없다. 얼굴이 묘하게 굳어져있는 것 같기도 했다. 대답을 안 하는 걸 보면 한국인은 아닌 것 같았다. 영어도 할 줄 모르나? 설마... 현지인? 계속 되는 침묵과 거둬지지 않는 시선에, 한빈은 얼굴이 점차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파리에 있는 동안 너무 외로웠어서 미친 짓을 한 건가. 운명적 만남이고 뭐고 그냥 시간을 다 돌려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 쯔음에야 남자가 입을 열었다.

"중국인이에요."

"... 중국인이시구나... ?"

 

 

기대했던 것보다 더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그러나 한빈이 놀란 건 중국인이라는 그가 뱉은 말이 한국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발음도 정확한 편인데다가 어투도 자연스러웠다. 한빈은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방금 전 들은 말을 더듬으며 눈만 천천히 꿈뻑였다.

"한국말 할 줄 알아요."

 

 

남자가 덧붙였다. 의문이 풀린 한빈이 아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한국에 사셨어요? 지금은 어디 가시는 거예요? 몇 시 비행기세요? 신기하다는 감상을 감추고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 오래 살았어요. 세비야에 가고 있어요. 130분이요. 깊고 짙은 눈매를 한 남자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의 대답을 들을 때마다 한빈은 쿵쿵 내려앉는 심장을 몇 번이나 느껴야만 했다. 한빈과 같은 비행기였기 때문이다. 더 캐물으니, 심지어 세비야를 나가는 일정까지 똑같았다. 마지막으로 갈 도시가 바르셀로나라는 점까지도.

그 순간 한빈은 이 만남이 운명이라는 사실에 도장을 쾅쾅 찍고 싶은 심정이었다. 빈 소년 합창단의 노래도 이보다 더 경이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떠한 거대한 힘이, 이 남자를 만나도록 한빈을 파리까지 떠밀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한빈아, 이건 진짜 흔한 확률이 아니잖아.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빵빠레를 울리고 있었다. 버스는 파리를 떠나고 있는데, 낭만과 운명의 마법이 이 안에 짙게 깔려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는 성한빈이라고 하는데..."

 

 

들뜬 마음으로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냐고 물으려던 한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건, 그 순간 제 뱃가죽 밑에서 크게 울린 천둥소리 때문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한빈의 배로 향했다. 어쩐지 체념처럼 헛웃음을 지은 남자가 코트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초콜릿 바였다.

"장하오요."

 

 

껍질까지 뜯어주는 다정함을 보이며 남자가 제 이름을 내뱉었다. 한빈... 나직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되뇌면서. 그러나 그 순간 한빈의 심장이 작게 요동을 친 건, 그 목소리 탓이 아니라 그의 왼손을 봤기 때문이 더 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내내 한빈의 반대쪽에 있어서 잘 보지 못했는데. 장하오의 왼손 약지에는 누가 봐도 커플링인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생긴 사람이 애인이 없을 리가 없지. 차올랐던 흥분과 기대가 삽시간에, 실망감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그렇구나... 감사합니다."

 

 

한빈은 말을 멈추고 제 손에 남은 초콜릿 봉지를 부스럭거렸다. 기분이 급격히 침체되었다. 방금 전까지 운명이니 뭐니 하며 속으로 들떠있던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말없이 우물우물 초콜릿을 씹었다. 한빈이 말을 걸지 않으니, 남자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한빈은 다시 힐끔 남자가 끼고 있는 반지를 바라봤다. 애인이랑 맞춘 게 맞겠지. 아 혹시 중국인에게는 손가락의 반지가 의미가 다를 수도 있으려나. 괜한 희망을 가져본다. 그러나 그걸 또 묻기는 애매해서.

 

 

차창 밖 풍경이 시내에서 고속도로로 바뀌는 동안까지 침묵이 이어졌다. 초콜릿까지 얻어먹은 주제에. 다른 자리도 많은데 굳이 그 옆에 앉은데다가, 먼저 말까지 건넸으면서. 애인이 있는 걸 알고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게 웃긴 일이라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더 묻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기대를 너무 많이 한 만큼 실망도 컸다. 남자 역시 한빈과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 한빈은 눈을 감았다. 그냥 자면서 가야 하려나. 갑자기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한빈 씨는 왜 파리에 오게 됐어요?"

 

 

그래서 남자가, 그러니까 장하오가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한빈은 조금 놀랐다.

 

 

"저요? 그냥 갑자기 여행 오고 싶었어요."

"그냥 갑자기..."

 

 

그 말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장하오는 한 번 더 곱씹었다. 그래, 운명적 사랑이 아니라 운명적 우정이면 또 어때. 그런 생각이 다시 또 들었다.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애초에 이성애자일 가능성도 컸고. 애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신기한 인연이긴 했다. 버스를 기다릴 때의 남자의 표정도 자꾸만 떠올라서 신경이 쓰이기도 했고.

"근데...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그래서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공항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 시간은 더 가야했다.

 

 

"...스물아홉이요."

", 저 스물여덟인데. 저보다 형이네요."

 

 

그걸 시작으로 이런 저런 대화가 오고갔다. 파리에 오게 된 이유도 묻고, 세비야에는 왜 가는 건지도 물었다. 장하오 역시 별다른 이유는 없다고 했다. 그냥. 갑자기 가고 싶어져서. 한빈의 것과 판박이 같은 대답이었다. 그게 진짜여서인지, 더 이상의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냥.' 그 간단한 단어조차도 한빈에게는 운명처럼 느껴지는 것만이 조금 슬펐다.

 

 

파리에서 좋았던 곳이나 식당 같은 것들을 공유했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그곳이었지만, 당시에 있을 때는 우울감이 짙은 도시라고만 생각했지만, 지금의 한빈에게는 마법이 지나간 도시 같았다. 이 사람과 같은 도시를 공유했다는 점 때문에 그랬다. 장하오는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이끄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러나 묻는 말에 성의 없이 대답하거나 귀찮아하는 쪽도 아니었다. 그래서 공항에 도착할 쯤에는 성한빈도 장하오의 이번 여행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장하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빈은 제게 묻지 않은 것들도 주절주절 늘어놓았으니까.

 

 

그러다보니 어느덧 버스는 작고 낡은 공항에 진입하고 있었다.

 

 

"혹시 번호 줄 수 있어요?"

 

 

그냥 스쳐가는 인연으로 끝내긴 아쉬운 사람이었다. 세비야에 가면 밥이라도 한 두 끼 같이 먹으면 좋지 않을까. 정말로 그런 순수한 마음에서 물었다. 그런데 장하오의 안색이 그 말 한마디로 확 뒤바뀔 줄은 생각도 못했다. 마치 물어보면 안 되는 걸 물어본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미안해요."

 

 

돌아온 건 거절의 말이었다.

-

세비야는 파리와 달랐다.

 

 

공항 밖 하늘부터 새파랬다. 태양이 작열했고, 구름조차 새하얗게 빛났다. 막 빨아 널은 구름이 펄럭이는 것 같았다. 애초에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한 날씨였다. 그곳을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로 삼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겨울임에도 오렌지가 열리는 온화한 기온의 도시. 코로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빈은 제가 기대했던 유럽의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몸소 느꼈다. 파리에서는 얇게 느껴졌던 코트도 곧장 벗어던졌다.

우버보다 조금 더 싸다는 볼트를 불러 숙소로 향했다. 과달키비르 강을 따라 이어진 도로를 쭉 달리다가 이게 유럽이지 싶은 이국적인 건물들이 밀집 되어있는 곳에 도착했다. 차가 더 들어갈 수 없는 낯선 골목에서 내려, 구글 지도를 확인하며 걸음을 옮겼다. 울퉁불퉁한 벽돌길 위로 캐리어를 질질 끌고 가다보니 고딕 양식의 웅장하고도 거대한 대성당이 보였다. 숙소는 바로 그 앞이었다. 같은 가격임에도 파리보다 훨씬 좋은 집이었기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도 기대가 컸다.

 

 

숙소 문을 여는 순간, 한빈은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널따란 거실 테라스 통창 너머로 세비야 성당의 거대한 창문이 한 눈에 보였다. 이 광경 때문에 숙소를 예약했던 거라 모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보는 건 차원이 다른 감동이었다. 통창 바로 앞에 놓여있는 침대로 풀썩, 몸을 눕히며 성한빈은 허공에 발을 굴렀다. 배가 고프다는 걸 인식한 건 그 다음이었다. 쏟아지는 햇빛을 마음껏 즐기며 한빈은 세비야에서의 첫 끼를 만끽할 식당을 검색했다.

 

 

구비진 작은 골목들은 평일 낮임에도 활기찼고, 주황빛 오렌지가 가득 매달린 가로수들은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입까지 헤 벌리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보니 정해둔 식당까지 가는 데에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평점이 높고 리뷰가 많은 곳이었다. 역시 구글지도는 한빈을 배반하지 않았다. 골목 어귀에 햇살 쏟아지는 야외 테이블을 구비하고 있는 식당은 일단 분위기부터가 완벽했다.

미리 검색해둔 이름을 떠올리며 메뉴판을 짚었다. 세비야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한다는 오렌지 와인과 사진부터 먹음직스러워보였던 가리비 구이를 시켰다. 먹어보고 맛있으면 더 시켜야지, 생각하며 반짝이는 빛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골목 끝 어디쯤을 멀거니 바라봤다. 생각의 끝이 자연스레 장하오로 향했다. 그건 마치 관성과도 같은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충격이 컸다. 아니, 누가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니고. 남자끼리 번호 좀 달라는 게 그렇게 냉정히 거절할 일인가. 자신도 그렇지만, 장하오에게도 이곳은 낯설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머나먼 이국땅일 텐데.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도, 밥 한 끼 함께 먹을 정까지는 붙지 않았나? 몸 좋고 잘생긴 직원이 넓은 쟁반 가리비를 들고 나와, 그 위로 불을 붙이는 순간까지도 한빈은 장하오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했다. 기분 탓인지 오렌지 와인도 썩 취향은 아니었다. 그나마 구워진 가리비가 입 안에서 살살 녹았던 덕분에 잡쳤던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그래, 어차피 다시는 안 볼 사람. 운명은 개뿔이다. 새로운 와인을 주문하며 한빈은 지나간 인연 따위는 머릿속에서 털어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세비야가 그렇게 작은 도시일 줄... 성한빈은 몰랐다.

 

 

어째서 가는 데마다 그 갈색 머리가 눈에 들어오는 건지. 별다른 목적지 없이 이리저리 골목을 돌아다니는데도 자꾸 눈에 띄었다. 잠시 쉴까 싶어 앉았던 분수 앞에서도, 커피를 마시려고 들른 카페의 테라스에서도, 성한빈은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장하오를 목격해야만 했다. 모르는 척 하고 싶었지만, 절로 눈이 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분한 건 그렇게 까이고 나서도 여전히 장하오가 멋있어 보였다는 것이다. 퍼스널 컬러가 세비야라고 해도 과장이 아닌 사람 같았다. 주변의 건물에 색깔을 전부 빼앗긴 것처럼 재킷부터 바지까지 온통 블랙 계열인 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그게 그 우울한 얼굴과 어울려서 더 시크해보였다. 스쳐가는 건 분명 찰나에 불과한데, 잔상이 오래 남았다. 거기에 버스에서 함께 했던 대화나 기억이 덧칠해지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무시하고 싶은데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저 사람과 나름의 친밀한 대화를 나눴다는 게 꿈처럼 느껴졌다.

 

 

만약 해질녘 도착한 스페인 광장에서마저 그를 만났다면, 아마 한빈은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그곳에 장하오는 없었다. 아쉬움인지 뭔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노을이 번져가는 어느 계단에 앉았다. 그곳에는 한빈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많았다. 검정색의 긴 꼬리가 달린 드레스를 입은 집시가 넓은 나무판자를 한 가운데에 두고 다음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희가 판자 위에 올라서니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 어둡고 쓸쓸한 기타 연주와 함께 울부짖는 듯한 노래가 시작되고, 에스파냐 남부의 저무는 햇빛 아래에서 무희가 격정적으로 발을 굴렀다. 땅을 향해 발을 구르고, 또 굴렀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만 했던 애환을 풀어내려는 듯이.

 

 

절제된 손놀림과 눈빛에서 고독과 한이 동시에 느껴졌다. 남자는 절규하며 감정을 폭발시켰고, 여자는 현란한 기교와 함께 영혼을 뒤흔들었다. 붉어진 하늘을 배경으로 이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한을 푸는 그 모습을, 한빈은 넋 놓고 바라봤다. 뇌리에 깊게 박히는 강렬한 장면이었다. 플라멩코라는 게 이렇게 격렬한 감정을 담아내는 춤인 줄 한빈은 미처 몰랐다.

 

 

가수와 무희가 만들어내는 감정이 고조될수록, 도리어 한빈은 외로워졌다. 단단하게 쌓아왔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이었다. 마음 속 어딘가에 깊게 숨겨둔 고독과 절망이 끄집어져나왔다. 한빈도 울고 싶었다. 탁한 목소리로 제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는 저 남자처럼. 땀을 뚝뚝 흘리며 제 안에 눌러왔던 슬픔을 저 땅에 짓밟듯 풀어내는 저 여자처럼.

저 발은 얼마나 많은 상처와 흉터로 얼룩져있을까. 그 쓰라린 고통을 인내하며 얼마나 많은 밤을 피와 눈물로 지새야했을까. 그게 마치 지난날의 한빈을 생각나게 했다. 아니, 실은 엄마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엄마도 저렇게 제 안의 울분을 세상 밖으로 터트렸다면 좋았을 텐데.

먹고 사느라 그럴 시간조차 없었던 엄마의 뇌는, 어느 날 갑자기 혈관 하나가 터져버렸다. 소처럼, 아니 기계처럼 일하던 엄마가 간만에 쉬는 날이었다. 엄마 학교 갔다 올게. 안방문을 열고 말했을 때 돌아누워있던 등을 기억한다. 그 때 엄마는 한빈이 했던 말을 들었을까. 그게 엄마에게 건넨 한빈의 마지막 말이나 다름없었는데. 자정에 가까워진 시각, 학원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그대로 누워있는 등을 발견했을 때 한빈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엄마는 항상 한빈을 기다리며 거실에 앉아있었다. 엄마, 엄마. 애타게 부르며 마른 등을 흔들면서도 믿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믿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불빛조차 희미했던 장례식장, 상주석에 앉아 버림받은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을 때에야 한빈은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빠지직,

 

 

한빈이 살고 있던 세상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한빈은 제가 엄마와 함께 단 둘이 어항 안을 헤엄치던 금붕어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는 어미 잃은 금붕어가 되었다는 사실도. 두 사람이 살기에는 적당한 크기였던 어항 안에 자신 혼자만 남겨졌다. 혼자이기에는 너무도 큰 공간이었다.

 

 

결국 한빈은 북받쳐 오르는 무언가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이 아름다운 순간 혼자인 게 싫었다. 어항 안을 채워줄 사람을 찾아, 목숨 걸고 어항 밖으로 다시 또 나왔는데 한빈은 여전히 혼자였다. 죽어가는 눈으로 입만 뻐끔거리며. 아가미의 얇은 막을 보잘 것 없이 퍼덕이면서.

그 사람과 함께 있었다면 달랐을까.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지금 여기 홀로 이곳에 있는 게 그 사람의 탓도 아닌데 이유 모를 원망이 들었다. 입구를 향해 빠르게 걸어가던 한빈이 뒤를 돌았다. 남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밑으로 가로등 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있었다. 달빛과 조명 빛이 은은하게 내리깔린 널따란 반원형의 넓은 광장은 한 폭의 명화와도 같았다. 그러나 한빈에게는 그것마저도 그저 황량하게 느껴졌다. 덧없게 느껴졌다. 이 넓고도 아름다운 공간에 그 사람이 자신을 홀로 버려두고 간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눴을 뿐인 타인에게 왜 그런 감정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어둠이 느릿하게 깔려가는 공원을 가로지르며 한빈은 생애 처음 느끼는 이상한 감정을 마주했다. 엄마 없이 세상에 혼자 남겨졌을 때 들었던 것과는 또 다른 상실감이었다.

그러니 다음날 히랄다 탑을 오르기 위해 세비야 대성당에 발을 들인 한빈이 장하오를 발견한 건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람이 많은 게 싫어 아침 일찍으로 시간을 예약했었는데 하필이면. 그닥 많지도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정수리가 보였다. 황당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이쯤 되니 진짜 일부러 내가 가는 곳에 가있는 건가 싶기까지 했다. 아니면 나를 쫓아다니거나. 고작 번호 하나 주는 것도 거절한 사람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아 겁이 났다.

부러 텀을 두고 올라갈까 싶다가, 내가 왜 피하나 싶어 그냥 그 뒤를 따랐다. 탑은 계단 없이 오르막길처럼 경사로만 되어있었다. 1, 2, 3... 24, 25, 26... 몇 걸음 올라가면 코너를 돌게 되는데 그 때마다 눈앞에 보이는 숫자가 달라졌다. 장하오의 갈색 머리 역시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반복했다. 숨이 차고 다리가 무거워졌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결국 탑 꼭대기까지 오르는 내내 성한빈은 내내 장하오의 뒤통수를 바라봐야했다. 원해서 그랬던 건지, 어쩌다보니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좁은 계단을 오르며 한빈이 느낀 건 이제 그 동그란 뒤통수를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정말 웃긴 일이었다.

탁 트인 전경을 기대했지만, 사방으로 뚫려있는 창에는 철조망이 씌워져 있었다. 그 앞에 다닥다닥 붙어서 도시의 풍경을 내려 보는 사람들 뒤에 줄을 섰다. 장하오 역시 다른 어느 쪽에 줄서있는 걸 얼핏 봤지만, 일부러 그쪽으로 가지는 않았다. 한빈의 차례가 오기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이마 위로 얕게 맺힌 땀을 식혀주려는 듯, 철조망 사이로 느릿느릿 바람이 흘러들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제 모습을 지켜온 낡은 벽돌 건물들이 푸른 하늘과 맞닿아 낮게 펼쳐져 있었다. 지붕 밑으로 보이는 새하얀 벽들은 하늘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조금 허탈하기도 했다. 한 눈에 세비야의 모든 풍경을 담고 싶었는데. 촘촘하게 가려진 철조망은 감옥의 창살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약간의 실망감을 안은 채 탑을 내려가려던 한빈의 눈에 장하오가 들어왔다. 하필 왜 그때 마침 사람들이 물 밀려나듯 빠져나간 건지. 그래서 왜 철조망에 손가락을 걸고 저 밑을 내려 보던 장하오가 시선에 걸렸던 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좋은 풍경을 앞에 두고 곧 죽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장하오가. 그러면서도 혼자임을 고집하는 그 모습이.

그 순간, 머리 위에 무수히 달려있던 종이 일제히 울었다. 한빈은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고막이 찢어질까 두려울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였다. ! 내지른 소리와 함께 어깨를 크게 들썩인 장하오 역시 귀를 막았다. 소리의 출처를 찾으려는 듯 허공을 헤매려던 눈이 이쪽을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필름이 멈춰버린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렇게 서로만을 바라봤다. 오직 세상에 단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장하오가 저 밑을 바라보며 했던 생각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확신.

하늘과 맞닿은 이곳에서, 바다에 푹 잠겨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한빈이 있는 곳은 어항 속인데. 어항을 통째로 바다로 옮겨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숨 쉬기가 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항 속 물고기는 바다에서 살 수 없다. 그런데 장하오의 눈을 보고 있으면 이곳이 어항이든, 바다든, 하늘이든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멍청한 금붕어라서 그런 걸까. 저 사람이 저를 매몰차게 거절했던 것조차 까먹어버리고 싶다. 장하오가 갖고 있는 새파란 빛깔이 바다여서 그런 건지, 하늘이어서 그런 건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풍덩 빠져버리고 싶어졌다. 저 사람에게.

 

 

 

 

다시 시간이 움직인다. 주변을 둘러싼 공기들이 요란하게 진동하는 가운데, 장하오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우두커니 서있는 한빈을 지나쳐 좁은 계단 밑으로 내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빈 역시 그를 뒤따랐다.

"자리 낭비하지 말고 같이 먹어요."

 

 

그러니 어쩌면 그건 오기이자 용기였을지 모른다.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는 장하오를 쫓아가 비어있는 그의 앞자리에 막무가내로 앉아버린 것은.

 

 

 

 

장하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솔직히 한빈 스스로도 본인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맹세코 한빈은, 아무한테나 이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사람이 아니다. 친한 사람에게도 이러지는 않았다. 그러나 플라멩코 무희가 땅을 향해 집요하게 발을 굴렀던 것처럼, 제 안에 담긴 격렬한 감정을 춤을 통해 터트려버렸던 것처럼, 한빈도 참고 싶지 않았다. 참고 인내하다가는 엄마처럼 되어버릴 것 같았다.

 

 

"여기는 뭐가 맛있대요?"

 

 

뻔뻔하게 메뉴판을 펼쳐드는 한빈을 장하오는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직원이 다가와 비어있던 잔에 물을 채웠다. 사실 읽어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 눈에 들어오는 건 예상 했던 것보다 꽤 되는 가격뿐이다. 그러나 한빈은 고심하는 것처럼 메뉴판을 자세히 들여봤다. 한숨을 푹 내쉰 장하오가 한빈의 손에 잡혀있던 메뉴판을 쏙 빼갔다. 직원을 부르더니 메뉴판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짚는 그의 영어 실력은 꽤나 능숙했다. 나도 영어 공부 좀 할걸. 한빈의 의사는 물어보지 않고 음식을 주문하는 그의 태도보다, 제 몫의 하우스 와인을 주문하며 버벅거린 영어 발음이 더 신경 쓰였다.

"내가 뭐 어디에 번호 팔아먹을까봐 그래요?"

 

 

그냥 밥 한 끼 같이 먹고 싶었던 건데... 빈 접시만 가지런히 올려있는 진한 녹색의 테이블을 앞에 두고, 한빈은 꿍얼거렸다. 버스에서의 분위기가 분명 그 정도로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백 번 양보해서 번호는 그렇다 치더라도,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자신을 모른 척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버스에서 그 정도로 대화를 나눴으면 하다못해 눈인사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놓고 혼자 잘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했다면 또 모르겠다. 사람을 그렇게 신경 쓰이게 만드는 표정을 하고는,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리니.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는 마음이 컸다.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에는.

 

 

그러나 좋은 의도와는 달리, 지금 제 태도가 흡사, 술에 취해 옆 테이블에 시비를 걸고 있는 주정뱅이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면 화라도 내던가. 무슨 반응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는데. 장하오는 속으로 당최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눈으로 가만히 보기만 한다.

 

 

"아니면, 뭐 애인 있어서 그런 거예요?"

 

 

장하오의 손을 포크로 가리키며 한빈이 말했다. 장하오가 제 손가락을 물끄러미 내려 본다. 마치 반지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깨달은 듯한 표정이다.

"그래서 번호도 안 줘요? 애인 있는 게 뭐 어때서요. 같은 남자끼리. 아니면 내가 그렇게 별로였어요? 자꾸 말 걸어서 귀찮았어요?"

"...번호가 그렇게 알고 싶어요?"

"번호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혼자 온 사이끼리 시간 되면 같이 이렇게 밥도 먹고 만나면 인사하고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한 시간이나 같이 대화하며 버스타고 온 사이인데. 번호는 그렇다 치고 자꾸 무시를 하니까. 한국에 오래 살았다면서 왜 이렇게 정이 없어요?"

 

 

한빈이 쏟아낸 말을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던 장하오가 눈을 내리깔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올라와 한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저 로밍 안 해서 여기서는 번호 쓸모없어요."

"그럼 카카오톡 아이디라도..."

"저 카카오톡 안 써요."

"...그럼..."

"그럼, 위챗 아이디 주고받기로 해요."

"...위챗이 뭔데요?"

"카카오톡 같은 중국 메신저요. 없어요? 그럼 만들어요."

 

 

장하오가 손을 내밀더니 까딱까딱 흔들었다. 폰 줘봐요. 갑작스레 전환된 태도에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건넸다. 다시 건네받은 휴대폰에는 전화번호를 인증하라는 화면이 띄어있었다. 홀린 듯이 번호를 눌러 가입까지 끝냈다. 생성된 첫 아이디는 문자와 숫자가 뒤섞여 엉망진창으로 나열되어있었는데, 그건 장하오가 다시 폰을 가져가 변경해줬다.

 

 

BingBing.

 

 

한빈의 뒷이름을 딴, 조금 낯간지럽게 느껴지는 아이디였다. 역시나 한빈의 의견은 묻지 않았다. 이게 뭐예요. 바꿀래요. 한빈이 투덜대니 한 번 바꾸면 1년 간은 못 바꾼단다. 아니 그럴 거면 이름이라도 제대로 하던가. 빈빈도 아니고 웬 빙빙. 어이가 없었지만, 곧이어 그가 부른 아이디를 입력하느라 불만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JangJang.

 

 

입력하고도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장하오의 장이 Jang이 맞나. 아니 그보다 이거 무슨 커플 아이디 같잖아. 당연히 성한빈의 친구 목록엔 오로지 장하오만 존재했다.

 

 

성한빈은 더욱 더 장하오를 이해할 수 없어졌다.

-

노릇하게 구워진 이베리코 스테이크와 새까만 먹물 파스타는 성한빈의 입맛에 딱 맞았다. 그냥 아무데나 들어온 건줄 알았는데, 유명한 집인 건가. 어느새 식당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며, 한빈은 와인으로 입 안을 적셨다. 와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목구멍을 부드럽게 넘어가는 게 지금껏 먹어본 와인과 확연히 다른 게 느껴졌다. 한빈이 주문했던 건 이미 다 마셨고, 이건 장하오가 시킨 와인이었다. 아까 얼핏 보기로는 메뉴판 밑쪽에서 고르는 것 같던데, 꽤나 비쌀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꼴딱꼴딱 잘 넘어가나. 간간히 이어지는 의미 없는 대화 속에, 와인을 수차례 넘기다 보니 어느덧 한 병을 다 비워가고 있었다.

"한빈 씨는..."

"."

"내가 그렇게 신경 쓰여요?"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고 있던 한빈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식당 밖 어느 먼 곳에서 누군가가 첼로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무겁고도 애달픈 음악이 좁은 길목의 벽들을 부딪치고 또 부딪혀 두 사람 사이까지 흘러들어왔다. 한빈은 포크를 내려놓고 장하오와 시선을 마주했다. 취기가 올라서 그런지, 솔직한 제 심정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신경 쓰여요."

"왜요?"

"그러게요..."

 

 

한빈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접시 위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몇 조각의 스테이크를 바라봤다. 왜 신경 쓰일까... 잘생겨서. 물론 그것도 맞기는 하다. 그러나 조금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저 사람을 도무지 혼자 내버려둘 수 없겠는 가장 솔직한 이유.

 

 

"있잖아요... 저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남들 다 하는 줄 알았어요."

"......"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돌이켜보면 저도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안 했던 것 같더라고요."

 

 

왜 처음 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아니, 저 사람은 어째서 처음 본 사람이 이런 얘기까지 꺼내게 만드는 건지. 한빈도 알 수 없었다. 장하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주황빛 조명 빛을 눈에 담고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한빈은 깨달았다.

 

 

그래, 저 눈 때문이다. 이미 어딘가에서 자신을 죽이고 온 듯한 눈. 그래서 사는 것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것 같은 눈. 그러니 저 얼굴이 루브르에 걸려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앞둔 창백한 안색의 성직자였을 것이다.

 

 

이미 마음속에 죽음을 신앙처럼 품고 있는 사람. 그래서 죽는다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사람. 한빈이 마음을 조금만 달리 먹고 이곳에 왔다면, 저랑 같이 죽으러 가실래요? 물어봐도 크게 결례가 아닐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게 너무도 과거의 자신과 같아서. 자꾸 제 마음 속 안의 어떤 버튼 같은 것을 자꾸 눌러대는 것만 같아서.

 

 

"19살 때 고아가 됐어요. 그래도 견딜만했어요. 완전 어린 나이는 아니니까. 곧 성인을 앞두고 있을 때였으니까."

 

 

한빈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그럴 만했다. 엄마의 죽음은 벌써 10년 전 일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 와서 그 때문에 울기에는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다. 그때 느꼈던 거대한 감정은, 파도를 맞는 절벽의 바위처럼 조금씩 마모되어갔다. 조금씩, 조금씩 닳아 없어져 여기까지 왔다. 엄마 얘기를 꺼내도 울지 않을 만큼으로. 엄마를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올릴 수 있을 만큼으로.

 

 

"그런데 이상하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어느 날, 이 세상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건 중력밖에 없는 것 같다고. 옥상 위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지금으로부터 2년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의 여름이었다. 한빈을 괴롭히던 모든 증세가 시작될 쯤이기도 했다. 이렇게 텅 빈 어항 속에서, 아득바득 살아가는 삶이 의미가 있나 싶었다. 곁에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는 것 같았다. 영혼에서 가장 중요한 어느 한 조각이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죽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살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 저 멀리 내려보이는 바닥을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추락은 길지만 괴로움은 짧을 것 같다고, 그 순간 한빈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또 죽으려니... 죽기 싫더라고요. 죽는 순간까지도 혼자인 게 싫어서. 웃기죠?"

 

 

그래서 한빈은 결국 그 한 발을 내딛지 못했다. 그렇다고 누군가와 같이 죽기를 원했던 것도 아니다. 같이 죽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긴다면, 그러면 그 사람과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람을 정말 만난다면,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모순이었다. 혼자 죽기 싫어서 사람을 찾고 싶은데, 그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면 죽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한빈은 그 순간 처음으로 제 안에 사랑에 대한 낭만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죽음보다는 사랑에 매달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엄마가 떠올랐어요. 나도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때는 죽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거 하지 않았거든요."

 

 

사실은 그저, 두려웠던 걸지도 모른다. 엄마가 죽은 이후 줄곧 혼자였는데, 죽는 순간마저도 혼자여야 한다는 사실이. 한빈은 잠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용기 내어 목소리를 냈다. 말을 뱉으면서도 자신이 맞게 발음하고 있는지 확신은 서지 않았지만.

 

 

"Vivre sans aimer n'est pas proprement vivre."

 

 

한빈이 더듬더듬 내뱉은 어설픈 프랑스어에도 장하오는 웃지 않았다. 그저 하고 싶은 말을 계속 하라는 듯 바라만 봤다.

 

 

"사랑 없이 사는 것은 진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

"겨우 외워서 온 프랑스어예요. 맞는 말 같아요. 저는 엄마가 줬던 사랑이 아직 남아있어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 기억과 사실은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

 

 

물이 새어가는 어항이 바닥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엄마가 남겨준 사랑이 얇게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가미를 적실 정도로만 아주 얕게 깔려있는 그 물은, 갈라진 금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어항이 깨어졌어도 사랑이 새어나갈 수가 없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한빈은 살았다. 살 수 있었다.

 

 

"저는 아직도 죽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래도 살고 있어요. 언젠가는 나 같은 사람을 만날 것 같아서."

"...만나면요?"

"마이너스랑 마이너스랑 만나면 플러스가 되는 거잖아요. 죽고 싶어 하는 두 사람이 만나면 둘 다 살고 싶어지는 거 아닐까요. 그런데... 장하오 씨랑 같이 있으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장하오가 가진 절망에서 성한빈은 희망을 봤던 걸지 모른다. 설사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중이라 해도. 유럽에 있는 순간만이라도 함께 있다면,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살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러니 그것은 어쩌면 장하오가 아닌 자신을 위한 걸지도 모른다.

성한빈은 살고 싶었으니까.

살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으니까.

 

 

 

 

장하오는 말이 없었다. 빙빙 돌려 말하느라 어찌 보면 두서없게 느껴질 수 있는 한빈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한 걸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지 느끼고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장하오씨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데 왜 죽고 싶어 해요?"

 

 

그래서 직설적으로 물었다. 반지를 처음 봤던 순간부터 내내 묻고 싶은 말이었다.

한빈의 말에 잠시 멍하니 있던 장하오는 곧, 쓰게 웃었다.

-

장하오는 한참이나 테이블 한 귀퉁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한빈은 그저 그의 눈치나 살피며, 와인을 홀짝였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할 것 같았다. 말을 하지 않고 술만 마시다보니 곧, 취기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걸어서 20분은 족히 걸리는 스페인 광장까지 장하오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계산은 장하오가 했다. 멋대로 식사자리에 끼어든 한빈이 제가 내겠다고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국 지고 말았다. 그럼 다음번엔... 이란 말을 하려다가 그냥 삼켰다. 장하오가 원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배가 부르니까 산책을 좀 하다가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하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걷다보니 자연스럽게 발이 그쪽으로 향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중간 중간에 팔뚝이 스치고 손등이 스쳤다. 그때마다 바늘에 찔린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 그래도 그것마저 좋아서... 깜깜해진 공원은 남자 둘이라도 위험할 것 같다며, 부러 빙 둘러서 갔다. 성한빈이 그러자고 제안했다. 모르겠다. 그냥 함께 더 걷고 싶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한빈은 제 앞에 보이는 풍경에 취해있었다. 새벽에 가까워진 시간이라서 그럴까. 드넓은 광장에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새까만 밤하늘 밑, 은색 조명이 반짝이는 스페인 광장은 별빛이 물결처럼 펼쳐진 것처럼 보였다.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더라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은 도시는 오히려 이곳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모습만 보면, 낭만과 사랑의 도시 타이틀을 세비야에 내줘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어제 왔을 때는 분명 쓰라릴 정도로 고독감을 느꼈던 장소였는데. 혼자 앉아있던 계단까지 갈 것도 없이 광장 입구에 우뚝 서서, 눈앞에 보이는 신비로운 광경을 감상했다. 광장 안에 있는 것보다 광장 밖에서 보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 모든 풍경들이 그럴 것이다. 그 안에 있을 때는 모르다가, 한 발자국 밖으로 물러나고 나서야 그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 사랑 역시 그런 것 같다. 장하오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생겨나고 있는 이 마음은, 지금 당장은 안에서 한빈을 괴롭히지만 먼 훗날 돌이켜보면 아름다웠다고 느껴지지 않을까.

 

 

"예뻐요... 그죠?"

 

 

솔직한 마음이 입 밖으로 그대로 튀어나왔다. 맞아요. 예쁘네요. 장하오가 성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빈 씨 말이 맞아요. 저는 이 아름다운 도시를 묘지 보듯 봤던 것 같아요."

 

 

광장에 머물러 있던 한빈의 눈이 장하오에게로 옮겨졌다. 그가 처음 내비치는 솔직한 속내였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두꺼운 벽이 조금이라도 허물어진 걸까. 허물어진 게 아니라도 조금은 얇아진 거였으면 좋겠다. 장하오의 눈동자는 얕게 흔들리고 있었다. 겁을 잔뜩 먹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굳은 결의를 품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장하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건데. 어쩌면 다 이미 늦어버린 건데.

 

 

"그래서 부탁할게 생겼어요."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성한빈을 바라보며 장하오가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히랄다 탑에서 서로를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다른 점은, 지금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다. 소음 하나 없이 이 고요한 곳에서, 이 정적인 공간에서. 한빈은 도리어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시작되려 했다. 장하오가 입술을 열었다.

"세비야에 있는 동안 나를 좀... 한빈 씨가 도와줄래요?"

-

그가 제안한 건 황당하게도 이별 연습이었다.

애인이랑 헤어지고 싶어요?

.

그럼 그냥 헤어지면 되잖아요.

...그게 마음처럼 되질 않아서요.

졸지에 한빈은 장하오의 애인 역할을 해주기로 약속했다. 그와 헤어지고 싶다면서도 약지에서 반지를 빼지 않는 이상한 남자의 가짜 애인 역할을.

[일어났어요?]

 

 

눈을 뜨니 위챗 메시지가 와있었다. 장하오로부터의 첫 연락이다.

 

 

어떻게 씻고 잔건지도 모르겠을 만큼 엉망진창으로 술에 취한 채 잠들었던 것 같은데. 신기할 만큼 숙취가 하나도 없었다. 비싼 와인이라 그런 건지. 유럽의 와인은 다 그런 건지. 그도 아니면 그저 자신이 와인과 잘 맞는 타입인 건지. 멍한 눈으로 휴대폰을 바라보며 어제 일을 곱씹었다. 두 사람은 광장에서 다시 술집으로 향했다. 가벼운 타파스를 나눠먹으며 와인을 들이켰다. 분위기는 이전과 달리 한껏 풀어져있었던 것 같다.

[나랑 같이 점심 먹어요.]

 

 

휴대폰이 다시 울었다. . 그게 마치 영화감독의 신호인 것처럼 장하오가 한빈을 집까지 데려다주던 장면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조명 빛이 번져가던 구불구불한 세비야의 골목길. 그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비좁은 길을 걸으며 장하오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한빈이 던진 건 별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말들이었다. 그런데도 장하오는 쉽게도 웃었다. 그런 모습은 처음 봐서 그때마다 넋을 놓고 바라봤던 것 같기도 하다. 가끔은 뒤로 고개를 젖히고 크게 하하하 웃기까지 했는데 그 분위기가 이전과는 너무도 달라서. 말을 던진 한빈까지도 조금 얼떨떨해지곤 했다. 장하오는 후련해보였고, 서글퍼보였고, 동시에 행복해 보였다.

[언제 어디에서 만날까요?]

 

[한빈 씨 숙소 앞에서 봐요. 저 지금 여기에 있으니까.]

 

[? 지금이요?]

 

 

 

별 생각 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던 한빈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 만나기로 했던 건 맞지만, 시간은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일어났으니 한 시간 뒤쯤 정도가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며 던진 질문이었는데. 허겁지겁 테라스 문을 열고 나가, 난간 밑을 바라봤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대성당 앞,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익숙한 갈색 머리가 보였다. 샛노란 카디건을 입고 있는 장하오는 한빈의 대답을 기다리듯 휴대폰을 내려 보고 있다. 다시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자다 깬 몰골을 그대로 들킬 수는 없었다.

 

[아니 왜 마음대로 와있어요. 저 지금 일어났는데ㅠㅠ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나가볼게요.]

 

[괜찮으니까 천천히 해요.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앉아 있을게요.]

 

샤워를 어떻게 끝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씻지 않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후다닥 머리카락을 말리고 캡모자를 눌러쓸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급하게 머리를 정돈했다. 어쨌거나 괜찮게 보이고 싶었다. 애인과 헤어지고 싶다는 그 말이, 한빈에게는 한 조각의 기대감을 안겨줬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반지를 빼지 않는 건 속상하다. 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드는 장하오의 손에 아직도 끼워있는 은빛 반지에 한빈은 짙은 실망감을 느꼈다. 나왔어요? 맛있는 데 알아놨어요. 가요. 다가온 장하오가 한빈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갑작스레 훅 가까워진 거리감에 한빈은 귓바퀴가 달아오름을 느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모 아니면 도인 건지. 어제부터 오늘까지, 장하오의 행동 하나 하나에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오가고 있다. 온도차가 너무도 심해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실망감 역시 금세 또 증발해버렸다. 나란 인간 진짜... 얼마나 단순한 건지.

 

 

 

넋을 놓고 끌려가듯 따라간 곳엔 한빈이 어제 혼자 갔던 그 식당이 있었다. 평점 좋고, 리뷰 좋고, 야외 테이블이 아름다우며, 가리비 구이가 환상적으로 맛있었던 그곳. 한빈은 놀란 마음을 애써 감춰야만 했다. 세비야 맛집이라고 치면 나오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걸 알면서도, 이것 역시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이번에는 한빈이 주문을 했다. 처음 온 척. 이곳의 음식을 잘 모르는 척. 메뉴판을 하나하나 짚었다. 장하오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는 다른 환상적인 것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디어 나온 음식을 앞두고, 장하오가 맛을 보는 순간에는 조금 긴장까지 했다. 포크를 입에 넣은 장하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솜사탕을 처음 맛 본 너구리 같아 보여 귀엽고 웃겼다.

 

 

 

"...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접시가 반쯤 비워졌을 무렵에는 한빈도 제 것에 따라있던 와인 한 잔을 모두 비운 참이었다. 장하오가 무슨 말이냐는 듯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오 씨가 하자던 이별 연습이요."

"...지금 해볼까요?"

 

 

그렇다고 곧바로 시작하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명치 부근이 출렁였다. 긴장했기 때문도 있었지만, 약간은 설레기 때문도 있었다. 어쨌거나 애인 역할이다. 30초면 끝나버릴 역할이라 하더라도.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장하오의 진짜 애인을 대체하는, 가짜 애인이 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헤어지자, 우리."

 

 

느리게 감긴 영화 장면처럼 장하오가 말했다. 그리고는 곧장 미간을 구겼다. 본인이 뱉은 말의 무게를 그제야 실감한 듯 보였다. 다물고 있는 턱에 힘이 들어가며, 핏대가 세워졌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려는 것처럼. 아직 좋아하는 걸까. 그래서 생판 남을 상대로 연습하면서도 저렇게 마음 아파하는 걸까. 가슴 언저리가 저릿해졌다. 한빈은 테이블 밑 손톱 거스러미를 툭툭 뜯으며 제가 뱉어야 할 말을 곱씹었다.

"그래, 그러자."

 

 

한빈조차 조금은 당황했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깐이나마 설렜던 게 바보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걸 수락한 자신에게, 그리고 제안한 장하오에게 원망스러운 감정마저 들었다. 장난 같을 줄 알았던 이 연습에, 감정을 실어버렸다. 장하오가 느끼는 이별의 무게가 한빈에게로도 옮겨졌다. 헤어지자, 우리. 그래, 그러자. 이 단순하고도 짧은 문장을 서로 주고받았을 뿐인데.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장하오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굳어진 얼굴로 테이블만 내려 봤다. 그걸 보고 있으니, 이 우습지도 않은 연극의 방관자로 다시 빠져나오게 된다. 저러면서 무슨 이별을 하겠다고. 짠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정말 헤어지고 싶은 게 맞기나 한지 의문까지 들었다.

"잠깐 그만해도 돼요?"

". 그래요."

"하나만 물어볼게요."

"물어봐요."

"왜 헤어지려는 거예요?"

"......"

"진짜 헤어지고 싶은 건 맞아요?"

"...그게 그 사람을 위한 거라서요."

"뭐야. 사랑해서 헤어진다 뭐 그런 건가."

"아마도..."

"...이해할 수가 없네."

 

 

한빈의 말에 장하오는 흐린 구름처럼 웃었다. 한빈은 웃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질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장하오의 손가락 하나를 옥죄고 있는 그 사람을.

 

 

두 사람의 끝이 설사 이별이라 하더라도 부러웠다. 어쨌거나 그 사람은 장하오의 시간을 가졌잖아. 장하오의 기억을 가지게 될 거잖아. 이미 손 쓸 수 없이 커져버린 마음이 한빈의 안에서 속삭였다. 어항 밖은 잔혹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이곳에 사랑이 없다는 걸 실감하게 만들었다. 성한빈도 갖고 싶었다. 장하오의 과거를 갖고 싶고, 현재를 갖고 싶고, 미래를 갖고 싶었다. 심지어 장하오가 주는 이별까지도.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그가 줄 수 있는 사랑이 고체가 아니어도 좋았다. 액체도, 기체도 아니어서 성한빈의 세상을 아무것을 채워주지 못한다하더라도 좋았다. 그저... 나를 봐주기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아니라 나를.

 

 

그러나 그래서는 안됐다. 애인이 있는 사람에게 그런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한빈은 의연함을 가장하려 목소리를 다듬었다.

"다시 할까요?"

"좋아요."

"헤어지자, 우리."

 

 

장하오는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내가 없어도, 밥 잘 챙겨먹고. 네 탓이 아니니까 자책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는 한빈을 똑바로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지 않고 덧붙였다. 뭐야, 이거 상황에 따라 말이 덧붙을 수도 있고 바뀔 수도 있는 즉흥극 같은 건가. 그럼 한빈도 이번엔 다르게 하고 싶었다. 뭐라고 할까 짧게 고심하다가, 잠깐만요. 중얼거렸다.

"근데 헤어지자고 해놓고, 그런 말 하는 거... 너무한 것 같아."

"...그런가요?"

 

 

이별 연습 내내 장하오가 짓는 웃음은 버석하고, 건조하고, 서글프다. 지금도 그랬다. 저 웃음은 누구를 위한 걸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연습을 함께 하고 있는 나? 아니면 헤어지자고 하는 게 힘들어 이 머나먼 땅에서 생판 남과 함께 이별 연습을 하고 있는 장하오 자신? 그것도 아니면, 이러한 사실을 새까맣게 모른 채 장하오를 기다리고 있을 그 사람?

"그래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내가 곁에 없더라도... 그래도 어떻게든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밥 거르는 일 없이, 티비에서 재밌는 게 나오면 웃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사랑도 하고. 나랑 만났던 순간이 없는 것처럼. 나란 존재를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가끔 친구도 만나서 술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고, 농담도 서로 주고받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그저 행복하게."

 

 

결국 헤어지자고 말할 거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장하오가, 성한빈은 무척이나 잔인하고 야속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저 사람이 저런 마음을 먹기까지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으니까. 성한빈은 그들의 사랑 앞에서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더 이상의 참견은 주제가 넘는 짓이다. 장하오를 자신의 어항으로 데려가기엔, 그는 너무도 자신의 애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

 

 

세비야에 머무는 기간은 총 일주일이었고, 장하오와 이별 연습을 한 건 그 둘째 날부터였으니까 총 4일의 시간이 지났다. 결국 세비야에서 보낸 시간의 전부를 장하오와 만났다. 아침에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세비야의 골목을 거닐다가 알아둔 맛집에서 점심과 함께 와인을 마시고, 저녁에는 타파스와 함께 또 와인을 마셨다.

 

 

그것은 데이트 같기도 했고, 이별 의식 같기도 했다. 혼자 히랄다 탑을 올랐던 것을 끝으로 알카사르 궁전 같은 다른 관광지는 갈 기회가 없었지만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성한빈은 장하오를 체념했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체념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마지막 날 아침에서야 생각했다.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비행기는 내일 점심에 있었다. 그러니 이제 꼬박 하루하고도 몇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졌다. 장하오도 내일 저녁에 바르셀로나로 떠난다. 그러나 애초에 그가 부탁했던 건, '세비야에 있는 동안'이었다. 그곳에서는 자신을 만나지 않을 것 같았다. 바르셀로나는 훨씬 큰 도시이니, 세비야에서처럼 우연히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지 싶었다.

 

 

그날 저녁에도 하게 되었던 이별 연습에 집중하지 못했던 건 그 이유에서였다. 오래된 돌담으로 벽이 세워진, 은은한 촛불이 그림처럼 춤을 추고 있는 어느 낭만적인 식당에 마주 앉은 상태였다.

"헤어지자, 우리.”

"알겠어. 네가 원하면.”

 

 

얇디얇은 와인 잔을 입에 대며 한빈은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속은 어지러웠다. 이것이 진짜 자신들의 이별처럼 느껴졌다. 장하오의 애인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장하오의 애인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을 끝으로 저 남자와 헤어져야 한다. 무심할 수가 없었다. 태연할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새에 감정이 무척이나 깊어졌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한빈은 마지막 날이라는 핑계를 대며, 장하오의 손목을 이끌고 제 숙소로 향했다. 식당에서 마신 와인으로 이미 취기는 가득 올라있었다. 거대한 성당 창문이 눈 앞 가득 드리워진 테이블 위에 마트에서 사온 간단한 안주와 와인 병을 세팅했다. 테이블 옆에 세워진 조명의 밝기도 적당할 정도로 낮췄다. 어차피 통 유리창 밖으로 은은한 주황 불빛이 한아름 들어오고 있기에 이미, 술 마시기에 딱 좋은 분위기였다. 한빈은 그냥, 이 아름다운 분위기를 장하오와도 공유하고 싶었다. 정말 그 뿐이었다. 아무 말 없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장하오는 말했다.

 

 

오늘은 한빈 씨가 헤어지자고 말해달라고.

 

 

"헤어지자."

 

 

한빈의 말에 장하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이별 통보를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굳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장하오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침묵이 이어졌다. 대답을 미뤄서, 이 순간을 영원처럼 끌고 싶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난 헤어지고 싶지 않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런 대답을 할 줄 몰랐다. 장하오가 헤어지자고 하면, 성한빈은 언제나 순순히 받아들이곤 했다. 혹시 장하오는 상대방이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라고 있는 걸까. 그게 장하오가 숨기고 있던 초라하고도 이기적인 진심이었을까.

"그래도 헤어져야 해. 그러기로 했잖아."

"...너와 더 오래 있고 싶어, . 나는 너와... 네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하고 싶어."

 

 

한빈과 나란히 앉아있던 장하오가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그러고도 한참을 가만히 있는다. 숨을 조금 격하게 내쉬는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한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리 봐도 연기 같지가 않았다. 한빈은 쿵쿵 뛰는 심장을 느끼며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장하오의 손바닥을 붙잡았다. 잠깐의 거부 끝에 손바닥이 떨어져나갔다. 그 밑에 숨겨져있던 붉게 충혈된 눈이 성한빈을 피했다.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성한빈은 공포와 불안으로 얼룩져있는 장하오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장하오는 울고 있었다.

헤어지고 싶다 했던 말이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장하오는 울고 있었다. 젖은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가만히 그 얼굴을 내려 보고 있던 한빈은 저도 모르게 장하오의 머리를 품 안에 끌어안아버렸다. 장하오는 숨도 쉬기 힘든 것처럼 울었다. 타인이 이렇게 슬프게 우는 것을 목도한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내가 우는 모습이 이랬을까. 장하오와 과거의 자신이 겹쳐보였다. 동시에 질투가 났다. 장하오가 저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헤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게.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장하오는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뭍 밖으로 꺼내진 물고기처럼 아가미를 헐떡이며, 그 사람이 곁에 없으면 곧 죽어버릴 것 같은 눈을 하고서는.

 

 

그래서 성한빈은 이제, 누군지도 모를 그 사람까지도 사랑하고 싶어졌다. 결국은 그렇게 되어버렸다. 장하오가 그를 사랑하니까. 이렇게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사랑하니까. 그리고 그런 장하오를 자신도 사랑하게 되어버렸으니까.

"하오 씨... 울지 마요."

한빈의 말에 장하오가 고개를 들었다. 한빈의 품 안에서 붉어진 눈이 한빈을 향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이별 연습은, 장하오의 애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짧은 순간을 함께 보내고 헤어져야 하는 우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장하오가 지금 울고 있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나 때문이 아닐까.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저를 올려보는 장하오의 열기 어린 눈은 너무나도,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이었다.

목덜미가 잡혔다. 그 순간, 한빈의 얼굴을 잡아당겨 먼저 키스를 한 건 분명히 장하오였다.

-

 

 

눈을 뜬 건 새벽이었다. 여전히 주황 불빛이 벽면에 넘실거렸다. 노을이 짙게 깔리고 있는 바닷물의 수면처럼. 한빈은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제 옆에 앉아있는 형체를 바라봤다. 상체를 그대로 드러낸 채로, 장하오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든든하게만 보였던 등을 척추 뼈까지 보일만큼 둥글게 말고서. 그 뒤로 보이는 세비야 대성당의 거대한 창문은 바닷속에 깊이 잠긴 고대 유적처럼 보였다. 장하오는 그 앞에서 과거에 묻혀 울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현재 묻혀버린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오지 못할 미래에 묻혀버린 걸지도.

그러니 그건 정말... 아름답고도, 서글픈 광경이었다.

성한빈은 눈을 감았다. 자신이 이 장면을 본 걸, 그가 알아채지 못했으면 했다. 동시에 실감했다. 이 아름다운 사람과의 인연은 여기까지구나. 이 순간을 끝으로 저 사람을 정말 체념해야 하는구나.

 

 

내일은 정말 헤어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돌아갈 곳이 없어요.

 

 

잠들기 직전, 장하오는 말했다. 그건 분명하게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

우리에게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장하오가 모든 걸 정리하고 온 상태라면 우리의 관계는 또 달라졌을까. 아침에 눈을 뜨고 멍하니 생각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도 저렇게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 무엇보다 그 사람과 헤어졌다면 애초에 여길 오지 않았겠지. 한빈은 홀로 어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바라는 건 탐욕이나 다름없었다.

"번호... 주면 안돼요?"

 

 

그럼에도 한빈은 묻고 말았다. 도착한 승용차 안에 캐리어를 실은 직후였다. 아랫입술을 짓씹은 장하오가 성한빈이 건넨 휴대폰을 받았다. 화면에 번호를 찍는 장하오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먼저 떠나는 건 한빈이지만 사실상 이 관계를 놓아버린 건 장하오인데. 왜 저렇게 자신이 버림받은 거 같은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번호 뒷자리가 내 생일이랑 똑같네."

 

 

화면 속 숫자를 내려 보며 한빈이 중얼거렸다. 여기에서도 이런 감정을 느끼게 만들다니. 신이 있다면 정말 가혹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미련 없는 척 차 문을 열었다. 그럼 이제 갈게요. 눈을 맞추고 애써 웃으며 손도 흔들었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뒷좌석에 타려던 몸이 더 안쪽으로 밀쳐지기 전까지는.

"뭐예요?"

 

 

따라 탄 장하오가 차 문을 닫았다. 그걸 출발 신호라고 생각했는지 기사는 네비에 찍힌 목적지를 향해 말없이 출발했다. 황당했다. 장하오는 저녁 비행기라고 했다. 그래서 함께 공항을 가는 대신 배웅해주던 것이었는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손이 붙잡히는 게 먼저였다. 한빈을 바라보는 장하오의 얼굴은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었다.

"한빈아. 잘 들어. 이건 그냥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야."

 

 

한빈은 순간 말을 잃었다. 장하오가 다시 또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별 연습을 했던 어젯밤처럼. 우리가 함께 밤을 보낸 후의 새벽녘 침대에서처럼. 장하오가 제 손가락에 있던 반지를 빼냈다. 손이 덜덜 떨려 그것조차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빈의 손가락이 잡히고, 장하오가 여전히 떨고 있는 손으로 한빈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그것은 마치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 딱 맞아 떨어졌다. 어째서 제 손으로 옮겨진 건지 알 수 없는 그 반지를, 그리고 어째선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 반지를, 한빈은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처음 봤던 그날부터 네가 좋았어. 아마 예감했던 것 같아. 나는 이 정도로 널 사랑하게 될 거라고."

"...무슨 말이에요. 그리고 이건 왜..."

"너와 함께 하지 못한 지난 2년이 죽고 싶을 만큼 괴롭고 힘들었지만, 여기서 보낸 이 일주일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어. 그러니까 나는 이제 아무런 미련도 없을 것 같아."

"...아니 갑자기 왜 이래요."

 

 

갑작스러운 반말부터 해서 그가 하고 있는 말 전부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장하오는 성한빈의 반응을 아랑곳 않고, 손을 꽉 움켜잡으며 말했다.

"네 세상에 금이 갔으면 다른 멀쩡한 곳으로 옮겨주는 사람을 만나. 아니, 그냥 네가 있는 곳을 바다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어떻게든 그곳에서 숨 쉬고 헤엄치며 살아."

 

 

한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었는지 아는 것 같잖아. 금이 간 세상, 바다. 그런 유치한 생각 따위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꺼내본 적 없었는데.

"나는 네가 그럴 수 있도록 여기까지 온 거야."

"그게 무슨..."

"너에게 또 이런 기억을 남겨서 미안해. 이번 생의 너에게는 내가 모르는 사람으로만 남기를 바랐는데,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어. 아니... 내가 그럴 수가 없었어. 너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갖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어. 그게 너무 미안해. 그리고... 언젠가 너와 함께 죽어주지 못하는 것도 미안해. 너만 살아남게 해서 미안해. 그래도 살아줘. 너는 꼭 살아야 돼. 그리고..."

 

 

성한빈은 더 말할 수 없었다. 창문 너머 장하오의 뒤로 돌진하는 트럭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금 내 사랑이 네 세상의 얕은 물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걸로 네가... 버텨줬으면 좋겠어."

 

 

흐릿하게 웃은 장하오의 몸이 순식간에 성한빈을 감쌌다. 차체를 강타하는 엄청난 충격이 장하오의 몸을 통해 느껴졌다. 장하오의 팔로 보호받듯 둘러싸인 머리가 딱딱한 어딘가에 강하게 충돌했다. 그러나 의식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그 순간에도, 한빈의 머릿속은 장하오가 귓가에 속삭인 마지막 말만 울리고 있었다.

 

 

사랑해, 한빈아.

 

 

그제서야 성한빈은 깨달았다.

 

 

장하오의 이별 연습은 이 순간을 위해서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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