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칠기삼
네리리
**도박 소재 주의**
9월 28일, 인천항
그날 밤 바다 위의 배는 한 척뿐이었다. 일찍이 폭풍우가 예고되었는데 돈 몇 푼에 목숨을 바꿔먹을 리 없다. 높은 파도가 뱃전을 때릴 때마다 갑판 위로 물이 샜다. 갑판이 내려다보이는 조종실 안에서는 말단이 홀로 손톱을 뜯고 있었다. 방해했다가는 처맞을 줄 알라던 선장의 으름장이 아무래도 발목을 잡은 것이다. 아버지의 학연으로 간신히 얻은 이 말단 자리마저 잃게 될지 몰랐다. 그때 거센 파도가 다시 한번 배를 덮쳤다. 선체가 크게 울렁였다. 핸들을 부여잡으며 겨우 균형을 지킨 말단이 결심한 듯 조종실을 나섰다. 일단 살고 보자는 심정이었다.
말단의 달음박질이 멈춘 곳은 남자 휴게실 앞. 귀를 바짝 대봐도 누가 있긴 한가 싶을 만큼 고요했다. 그러나 문을 열면 진풍경이 펼쳐졌다. 휴게실이라지만 그럴듯한 침대도 뭣도 없는 그곳의 찬 바닥에 화투판이 깔렸다. 중앙엔 현금다발이 수북했다. 참가자는 다섯. 그 주위를 둘러싼 구경꾼들은 그보다 서너 배쯤 많았다.
”죽어. 오늘 운빨 좆같네.”
”저두 다이요.”
참가자 중 둘이 패를 버렸다. 배가 기우뚱댈 때마다 몸을 가누기 어려운데, 제 패를 들키지 않기 위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힘을 준 나머지 셋. 석구와 선장, 그리고 가짜코. 화투 치다 처맞아서 무너진 코를 화투 치다 딴 돈으로 세워서 가짜코.
”오백.”
”오백 받고 천.”
”이런 판에 빠지면 븅신이지. 콜.”
선장이 패를 뒤집었다.일땡. 에라이. 선장의 패를 확인한 석구는 욕을 씹으며 패를 내던졌다.칠끗. 선장의 승이었다. 눈물이 글썽 맺힐 만큼 감격하며 돈다발을 쓸어 안는 선장을, 누군가 저지했다.
”간만에 땡 잡으셨는데 어떡해.”
가짜코가 선장의 눈앞으로 패를 들이밀었다.
”내 손안에 꽃이 폈어.”
삼땡. 선장이 무너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귀신이라도 본 듯 얼굴빛이 새파래졌다. 전 재산의 절반쯤을 순식간에 태웠으니 모름지기 귀신보다 살벌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짜코는 킬킬대며 돈을 챙겼고, 내기를 뒀던 구경꾼들도 저마다 돈을 나눴다. 그때였다.
”저 아저씨 손바닥 확인해봐.”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바깥의 천둥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을 쫓아 참가자와 구경꾼들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하지만 남자는 움츠러드는 것 없이 느긋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줄근한 인부 차림에 며칠 못 씻은 행색. 하지만 전혀 낡지도 남루하지도 않던 그 기묘한 아우라에 대해 선장은 언젠가 첨언했다. 꼭 파도를 문처럼 열고 나타난 것 같았지.
”손바닥에 없으면 빤쓰.”
남자가 가짜코의 사타구니를 가리켰다. 저 개새, 씨발, 씨발새끼가 뭐라는 거야. 가짜코는 반사적으로 아랫도리를 감춰내면서도 애써 객기를 부렸다. 선장의 눈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선장만큼은 아니지만 적잖이 돈을 잃은 참가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난장판이 벌어질 듯한데, 벌컥 문이 열렸다.
”뭣들 하고 앉았어! 나와서 물 퍼!”
어딘가에서 푸지게 자다 일어난 몰골의 선원이 소리쳤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다시금 재촉했다. 이러다 가라앉겄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구경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가짜코는 옳다구나 유들대며 석구와 선장에게 돈다발을 한 움큼씩 쥐여줬다.
”잡부 말을 믿어? 우리는 요, 요, 꾼인데 서로 간의 신뢰가 있어야지. 뽀찌들 챙기시구.”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던 가짜코가 남자와 눈을 부딪혔다. 순간 굳었지만, 남자는 아까의 폭로와 무관하다는 것처럼 손을 팔랑였다. 받아줘야 하나 고민이 될 만큼 천진했다. 어쩐지 잘못 걸렸다는 불길함에 가짜코는 뭐에 쫓기듯 사라지고, 덩그러니 남은 선장은 손안의 돈다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문득 뒤를 돌아본다.
어느새 남자는 그곳에 없다.
”뭐 해, 이 새끼야! 물 푸라고!”
갑판의 양옆으로 정신없이 바닷물을 퍼내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를 유유히 질러오는 남자. 신발과 바지 밑단이 척척히 젖어드는데도 발걸음은 사뿐했고, 비와 바닷물을 저항 없이 맞고 있는데도 전부 피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가히 성스럽게까지 느껴졌다. 남자는 뱃머리에 기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선원들의 사물함에서 아무거나 집어온 담배는 지독하게도 씁쓸했다. 무서울 정도로 캄캄한 밤바다 위로 연기가 흩어졌다.
화투 하면 대한민국에서 딱 세 명이랬다. 경상도에 짝귀, 전라도에 아귀, 전국적으로 평 경장.
그러나 말하건대, 빠져서는 섭한 인물이 하나 있다. 그는 다만 이름을 널리 알리기도 전에 화투판에서 모습을 감췄다. 아귀에게 잘못 걸려 맞아 뒈졌단 소문이 잠시 있었고 곧 잊혀졌다.
중국에서 온 장장.
아는 사람만 안다는 그 이름.
들어본 적 있는가?
10월 3일, 강남
비탈로 이어지는 고급 주택가. 평일 낮의 그 골목은 그저 한가로웠다. 그중 특징을 잡아내기 모호할 정도로 평범한 주택에, 가짜코가 들어섰다. 초인종을 누르고, 암호는 떡 사세요. 문을 열면 역시나 평범한 거실이 나온다. 그러나 지하로 들어서면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무도회장을 연상하는 붉은 카페트와 샹들리에. 단차가 낮은 무대에서 첼로를 켜는 여자. 실크로 된 테이블보 위를 오가는 현금 다발과 화투패.
회계사가 바들바들 경련하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벌써 열다섯 판째 돈을 잃은 탓이었다. 금세 번지는 담배 냄새에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시야가 좁아질 대로 좁아진 회계사는 그것들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재떨이가 없다는 것마저 이상하게 여기지 못하고 테이블보 위에 털어 낼 뿐이었다. 회계사의 맞은편, 벌써 열다섯 판째 돈을 딴 교사가 패를 섞으며 말했다. 길쭉한 손이 재빨랐다.
”처음이신가 봐요.”
”뭐?”
”여기 금연 구역이거든요. 얼른 끄셔야 될 텐데.”
”뭐라는 거야, 씨빨. 빨리 패나 섞…….”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회계사의 손이 비었다. 고개를 들면, 전국 순회를 마치고 돌아온 가짜코. 담배를 뺏어 든 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이 씨발새끼는 또 뭐야! 이성을 잃은 회계사가 달려들자, 가짜코는 우선 코를 방어하며 회계사의 팔에 담배를 짓눌러 껐다. 치이이익, 하고 어쩐지 군침 도는 소리가 났다. 회계사는 검붉게 탄 살을 붙잡고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가짜코가 상냥한 표정으로 벽면의 안내문을 가리켰다. 절대금연.
”뭔 씨발놈의 도박장이 금연이야!”
”울 실땅님이 담배 쩐내를 싫어하걸랑.”
가짜코가 테이블보를 살피는 척하며 회계사의 패를 읽었다.삼땡. 꽤나 좋은 패지만, 교사는 칠땡이었다. 회계사는 이번에도 큰돈을 잃을 것이다. 가짜코와 교사가 짤막하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굿잡.
”테이블보 물어 주셔야겠어. 이거 울 실장님이 메이드 인 쁘랑스로다가 딱 맞춘 건데.” (거짓말이다. 가짜코 본인이 직접 동대문 지하상가에서 구매.)
”이 사기꾼 새끼들이, 씨발, 내가 누군지 알…….”
”무슨 소리? 화투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한데. 아저씨, 깐바레. 이번 판에 꼭 따서 갚어.”
가짜코의 말에 회계사가 순간 눈깔을 번뜩이며 허겁지겁 패를 확인했다. 삼땡. 회계사의 얼굴 위로 환희가 번진다. 포커페이스를 모르는군. 너는 앞으로도 어렵겠다. 회계사가 전재산을 꼬라박는 소리 위로 휘파람을 불며 가짜코는 옆방으로 향했다. 방문 앞을 지키던 경호원이 가짜코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가짜코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옆을 비껴간 자개 명패가 벽을 뚫고 박혔다.
”야, 이 개새끼야! 너 내가 좆대로 쑤시고 다니지 말랬지! 인천항에서 개쪽 당했다고 옆집 개새끼가 말해주더라! 이 버러지 새끼야!”
실장 성한빈.
한참 언어폭력을 토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씨씨티비 앞에 앉은 한빈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했다. 보스턴백을 현금 다발로 꽉 채웠건만 칭찬 받긴 글렀다. 소파 구석에 박혀 덩달아 눈치를 보던 건욱에게, 가짜코는 속삭이듯이 물었다. 왜 저러셔? 그러자 건욱이 이 번 카메라를 가리킨 뒤 양손으로 육을 만들었다.
“육백?”
도리도리.
“육천?”
도리도리.
“뭐, 씨발, 육억?”
눈치고 뭐고 질겁한 가짜코가 씨씨티비 앞으로 부랴부랴 붙어 앉았다. 노이즈 낀 화면 위로 육억의 주인공이 비쳤다. 어떤 새끼야. 화질이 구려 인상을 한껏 찌푸린 가짜코는 잠시 뒤 하얗게 질렸다.
“형, 형님, 저 새끼예요.”
“뭐가.”
“인천항에서 나한테 개쪽 준 새끼!”
그 순간 씨씨티비 속 남자가 자신만만하게 올인을 선언했다. 패를 뒤집으면장땡. 육억에 삼천 추가. 가짜코는 말을 잃는다. 그때 한빈이 몸을 일으켰다. 와이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잠그고 손목시계를 풀었다.
”가시게요?”
”가야지.”
”직접 하시게요?”
한빈이 울컥해 손목시계를 집어던졌다. 가짜코는 또다시 반사적으로 코를 가렸다. 가짜코의 머리통을 맞고 떨어져 손목시계는 산산조각났다.
”그럼 나 말고 누가 가. 얼굴 다 팔리고 개쪽까지 당하신 너?”
”건, 건욱이 보내면 되잖아요.”
한빈이 눈알을 굴려 건욱을 봤다. 별일 없는 폰만 괜시리 만지작대던 건욱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한빈은 그저 무표정했다.
”됐어. 내가 가.”
”설마 저 새끼 반반하다고 직접 하시려는…….”
”뭐?”
”건 당연히 아니겠죠. 실땅님, 파이팅!”
건욱은 본능적으로 한빈의 곁에 총이나 칼이나 무엇이든 위협적인 물건이 없는지 살펴봤다. 실장실에서 오랫동안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절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있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고 즐기시라고, 경호원은 공지했다.
메인 홀과 실장실을 지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다섯 칸의 프라이빗룸이 나온다. 호구를 잡거나 선수가 모이는 등의 이벤트가 있을 때만 한시적으로 열리는 공간이었다. 경호원에 의해서 이곳까지 반강제로 끌려온 남자가 순간 멈칫했다. 명도 낮은 조명 아래 누군가 먼저 앉아 있었다. 빳빳한 와이셔츠와 가지런한 머리칼. 한빈이었다. 드물게 예쁘장한 얼굴이 이곳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고, 남자는 생각하며 한빈을 지켜봤다. 한빈은 씨씨티비의 전원을 끄고 새 화투패의 포장을 벗겨냈다. 그것은 속임수를 쓰지 않겠다는 퍼포먼스였지만, 그 방 곳곳엔 초소형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남자는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웃으며 경호원의 손을 툭 털어냈다. 다시 붙잡으려는 경호원을, 남자는 전에 없었던 힘으로 저지했다. 도망 안 가.
”내가 이 좋은 걸 왜 마다해?”
한빈은 테이블 위로 돈다발을 쏟아냈다.
”선수끼리 판 크게 가자.”
한빈은 남자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패를 만졌다. 남자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두려움도 조급함도 보이지 않았다. 밀폐된 이곳까지 끌려와 한빈을 마주하고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인물은 드물다. 숨겨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아니다. 휘둘리면 안 돼. 한빈은 정신을 다잡으며 패를 섞어냈다. 제가 원하는 순서로 패를 나열하는 것쯤은 눈 감고도 했다. 남자에겐칠땡을 줄 것이다. 무적은 아니지만 믿을 구석이 생기는 숫자. 돈이 꽤 쌓이겠지. 한판으로 해결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난구땡을 받는다. 한빈의 손에서 스무 장의 화투패가 아주 희미한 규칙성을 보이며 섞여나갔다.
그리고 남자는 한빈에게 잠시도 무언가 관찰하거나 간볼 틈을 주지 않았다. 패를 받자마자 고민도 없이 배팅을 한 것이다.
”십억.”
믿기지 않게도 그랬다.
”십억이라고?”
”응. 받아?”
한빈이 되찾고자 하는 육억을 한참이나 웃도는 숫자였다. 당황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빈으로서는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받아. 테이블 위로 보이지 않는 이십억이 쌓인다. 남자는 손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처음으로 난감해하는 기색이더니 말했다.
”너 꼬시려면 얼마 배팅해야 돼?”
”뭐?”
”이십억?”
한빈은 당황했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너 꼬시려면‘이 아니라 ‘얼마 배팅해야 돼‘ 부분에 집중해야 된다. 저 질문은 스스로의 패배를 전제로 한다. 판돈이 나한테 넘어와야 하니까. 그럼 자기가 졌다는 걸 아는 건가?칠땡도 나쁘지 않은 패인데 어떻게? 설령 그렇대도 삼십억을 태워? 한빈은 골몰했지만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다. 그래봤자 둘 중 하나겠지.
”몰라. 백억쯤?”
아주 좆같은 거에 걸렸거나.
”백억 콜.”
그냥 바보거나.
테이블 위로 이백이십억이라는 듣도 보도 못했던 금액이 쌓였다. 너무 큰 돈이라서 도리어 소꿉놀이를 하는 것 같다. 이 돈을 받아낼 수나 있을지 모르겠는데. 한빈이 먼저 패를 뒤집었다.구땡. 여간해서 꺾어놓기 힘든 그 숫자를 보고도 남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예상했다는 듯 키득키득 웃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외려 동요한 것은 한빈이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뒷목이 서늘했다. 남자가 패를 보였다.
장땡.
어떻게?
내가 실수를 했나? 그럴 리가 없다. 얼어붙은 한빈에게로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이 남자는 도대체 뭐지? 남자는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한빈을 내려봤다. 군림하는 왕처럼 거만한 눈이다. 이백이십억. 고 사장을 통해 중국 쪽까지 손을 벌린대도 구하지 못할 액수였다. 남자가 한빈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래. 맞는 걸로 끝난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반죽음도 상관없다. 한빈이 눈을 감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러나 한빈에게 닿아온 것은 손바닥도 주먹도 아니었다.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폭력 때문도 아니었다. 한빈이 눈을 번쩍 떴다. 남자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서 보였다. 강하게 붙잡힌 볼 때문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 사이를 축축한 무언가가 파고들었다. 그래. 폭력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나 거친 입맞춤이라면. 남자의 새카만 눈이 한빈을 뜯어봤다. 배려 없이 헤집어 놓는 바람에 숨이 빠듯했고, 침은 질질 샜다. 한빈은 한계에 다다라 남자를 마구 때렸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한빈의 아랫입술을 아프게 물어뜯은 뒤 입술을 뗐다.
”나는 장하오야.”
기억났다.
”이백이십억은 이걸로 까줄게. 아까 내 맞은편 애도 여기 직원이지? 육억. 그것도 다 까줄게. 근데 걘 짤라. 연기를 너무 못하드라.”
중국에서 왔다는 장장.
”그리고 너도 못해. 다른 일자리 찾아봐.”
들어본 적 있었다.
11월 29일, 광화문
[별일없지?]
한빈이 문자를 전송하고는 도로 정장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점심 시간대라 길거리에는 회사원들이 우글우글했다. 이렇게 입고 섞여 있으니 노름꾼이랑 회사원이 구분이 안 되네. 한빈이 조소하듯 생각했다. 그때 주머니가 울렸다. 건욱의 답장이었다.
[넵 천천히 들어오십쇼]
한빈이 화면을 닫고 스트레칭했다. 몸 여기저기서 경직된 뼈가 쑤셨다. 고 사장과의 숨 막히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겨우 긴장이 풀린 채 걷는 광화문. 한빈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광화문은 언제나 혼잡하고 다만 질서적이며 시끄러웠다. 무죄인 척 섞여들기에 이보다 최적인 공간이 없었다. 한빈은 고층 빌딩과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걸었다. 지나는 사람들의 대화에 몰래 귀기울이거나 가게 매대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제법 겨울에 가까워진 날씨에도 초코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으며, 한빈의 마지막 행선지는 교보문고였다.
새 책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부시게 밝은 조명과 조용한 활기가 공존하는 교보문고는 모든 창문을 커튼으로 감춘 강남 하우스의 정반대편에 존재하는 듯했고, 그 이질성은 한빈에게 이상한 안도감을 줬다. 소설과 에세이책 섹션을 지나 한빈의 발걸음이 멈춰 선 곳은 문제집 섹션. 한빈은 베스트셀러라는 검정고시 문제집을 펄럭였다. 괜히 눈칠 보며 문제들을 살펴보다가 누군가 다가오면 관심없는 척 딴청을 부렸다. 저번 년도 것보다 조금 어렵네. 살 생각도 없으면서 가격을 확인했고, 만약 산다면 이것보다는 이게 낫겠다고 따져보기도 했다.
”여기서 뭐 해?”
인기척 없이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놀라 손안의 문제집이 구겨졌다. 기겁하며 고갤 든 앞엔 장하오가 있었다. 역시 새 일자리를 구하기로 한 거야? 믿기지 않게도 교보문고 앞치마를 두른 채였다.
”너,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해?”
하오는 한빈이 흐트러뜨린 문제집을 바로 하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아르바이트.
”뭔, 이제 화투 안 쳐?”
”응.”
”왜?”
”빚을 다 갚았으니까.”
나 자신과 약속했거든. 한국 오느라 생긴 빚을 다 갚으면 더 이상 화투는 치지 않기로. 벙찐 얼굴의 한빈에게, 하오는 문제집을 쥐여줬다.
”훼손된 책은 구매 부탁드립니다, 손님.”
한빈이 계산줄을 기다린 뒤 미적거리며 결제하는 것까지 지켜본 하오는 그를 출입구까지 배웅했다. 여기는 직원이 귀가 서비스까지 해줘? 어쩐지 낯간지러운 기분에 한빈이 무마하듯 물었지만 하오는 조그맣게 웃을 뿐이었다. 사이에 적당한 거릴 두고 둘은 나란히 걸었다. 자동문 앞에서 하오가 멈춰 서고, 한빈은 밖으로 나와 문 너머 하오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 이제 가볼게. 그러나 하오는 마주 손을 흔들어주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한빈을 바라봤다. 머쓱함에 뒤를 도는데.
”너 이름이 뭐야?”
평이한 목소리로 하오가 물었다. 한빈이 삐걱거리며 다시 하오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였다.
”그러기야? 나는 첫만남에 장하오라는 이름을 줬는데. 너 말곤 다 날 장장으로 알아.”
본명을 쓰지 않아야겠다는 결심은 없었지만, 언젠가부터 한빈은 이름을 숨겼다. 건욱도, 몇 년을 붙어 지낸 가짜코도 한빈을 실장님이라고만 불렀다. 본명을 썼다간 화투판에 발이 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럼 뭐 해. 본명을 쓰지 않는데도 꼼짝없이 그렇게 되었다. 끝내 함구하는 한빈에 하오는 씁쓸하다는 듯 웃었다. 체념하며 보인 뒷모습에 혀끝이 썼다.
”성한빈!”
벽을 타고 한빈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나는 성한빈이야.”
이성적인 판단과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뒤돌아 씩 웃는 하오의 얼굴을 우두커니 보며, 한빈은 왠지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그 이후로 한빈은 점심마다 교보문고에 발도장을 찍었다. 뭔 씨발놈의 도박장에 점심시간이 있냐며 빈축을 샀지만 절대금연을 밀어붙인 고집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하오와 특별히 무언가를 주고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날이 익숙해진 폼으로 책을 정돈하는 모습이나 손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친절한 얼굴 따위를 멀찍이서 훔쳐보다 돌아오는 게 다였다. 한빈의 기묘한 외출에 대해, 건욱은 복수를 벼르는 것이라 주장했다가 가짜코의 야유를 들었다. 얌마. 이 애새끼야.
저거는 상사병이야.
물론 손보다 눈이 빠르다지만 손만큼 눈도 빠른 장하오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12월 8일, 종로
건욱이 백미러로 뒷자리의 한빈을 힐끔댔다. 창문에 머릴 대고 공상에 빠져 불러도 대답 없었다. 고 사장과 회의를 갖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몇 달 전 미지의 남자에게 크게 뜯긴 고 사장이 작업을 지시했다. 배우는 한빈과 건욱, 그리고 고 사장. 복수가 목적이므로 고 사장도 드물게 판에 꼈다. 호구 하날 잡고 물밑 작업에 들어가는 것은 한빈의 유구한 업무였지만 한빈은 늘 내키지 않아 했다. 다 같은 노름꾼이고 사기꾼이래도 작정하고 벗겨 먹는 것은 너무 잔인하댔나. 그렇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심란해하는 것은 아마…….
장장이 씨팔새끼가 삼억을 뜯어갔어! 뭔 꿍꿍인진 몰라도 요즘은 잘 안 보인다는데, 어떻게든 꼬드겨서 연안부두로 갖다놔. 여자 몇 명 쓰던가.
”건욱아.”
”어, 네, 네?”
”나 종로에 좀 내려줘.”
걸레질을 마친 하오가 허리를 세웠다. 오랫동안 수그리고 있었더니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영업이 끝나고 텅 빈 교보문고는 무서울 만큼 넓고 조용했다. 하오는 탈의실에 앞치마를 벗어놓고 잠시 서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한판 뜨자는 연락 몇 개가 쌓여 있었다. 하오는 자신이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전화번호도 묻지 않았으면서 무슨, 하고 힘 빠지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 번호쯤은 뒷조사로 알아낼 수 있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명색이 조직폭력배면서.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기적처럼 성한빈이 그곳에 있었다.
”한빈아?”
쪼그려앉아 무릎에 얼굴을 박고 있던 한빈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묻진 않았지만 어쩐지 아주 우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오는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췄다. 하오가 움직이는 것을 따라 한빈의 눈동자가 조용히 굴러갔다.
”여기서 뭐 해. 무슨 일 있어?”
”장하오.”
”응.”
”장하오…….”
”응.”
한빈이 특권처럼 가진 이름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하오는 그때마다 성실히 대답하며 참을성 있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랑 화투 한 판만 더 치자.”
그러나 그 말엔 얼굴이 굳는다. 하오는 맥이 풀렸다는 듯 무릎을 세우고 한빈을 내려봤다.
”싫어.”
”왜?”
”말했잖아. 나는 더 이상 화투를 치지 않아.”
”네가 이기면,”
”내가 이겨.”
”그래, 네가 이기면…… 네가 갖고 싶어 하는 거 줄게.”
”이미 받았어.”
한빈이 침을 꼴깍 삼키곤 말했다.
”잘게. 너랑…….”
하오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인적 드문 거리 위로 하오의 웃음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그렇게 웃는 하오의 주먹은 바들바들 후들댈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윽고 하오는 한빈의 볼때기를 내갈겼다. 한빈이 맥없이 옆으로 넘어갔다. 손이 제법 맵다. 입안이 터졌는지 비릿한 향이 고이는데, 한빈은 후련했다. 도리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태어났으면, 한빈아, 책임감이 있어야지. 너 갖고 싶어 하는 새끼가 나 하나인 줄 알아?”
하오가 한빈의 턱을 쥐고 자신을 보게 했다. 터진 입가를 쓸더니 피를 빨아먹는다.
”어디 가서 그딴 조건 걸기만 해.”
이딴 조건 너한테밖에 안 걸어…….
한빈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장하오가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12월 13일, 강남
오늘도 성 실장의 강남 하우스는 문제 없음. 점심 시간이 폐지되면서 보다 왕성했다. 가짜코의 활약으로 오늘 하루만 오천만 원이 쌓였지만 한빈은 암울한 기운을 풍겨내며 엎어져 있었다. 시야 끝엔 너덜거리는 검정고시 문제집이 있었다. 건욱과 가짜코는 영문을 모르고 눈치를 살피느라 떡볶이를 깨작댔다. 진짜로 안 먹으시렵니까? 다시 한번 물으려는데,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된다고요! 경호원의 만류에도 속절없이 뚫리는지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한빈이 천천히 상체를 들고, 문이 벌컥 열렸다. 경호원이 뒤에서 잡아당기는데도, 장하오는 꿈쩍하지 않았다.
가짜코는 얼마 전 화이트판에 끄적인 장장 척결 대작전을 황급히 지워냈다. 모르긴 몰라도 작전이 수월히 흘러간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한빈에게 엄지를 날리고는 건욱을 챙겨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건욱은 그런 소리를 들었다.
”책임져!”
정황상 실장님이 해야 할 말 아닌가?
"네가 나랑 잔다 어쩐다 한 이후로 네가 누구랑 섹스하는 상상밖에 안 하고 있어. 화나는 건 그 상대가 내가 아니라 다른 새끼라는 거야! 너무 화가 나서 와이? 사춘기와 성을 반으로 찢어버렸어!”
”…….”
”그래서 짤렸어! 책임져!”
”진짜 찢었어?”
”응.”
아랫입술은 톡 튀어나와서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다. 진짜 구리고 우습고 어이없는 동시에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한빈은 하오에게 찬찬히 다가갔다. 그리고 자석처럼 입술이 맞닿았다. 견디지 못하게 갈급했던 사람처럼 서로를 빨아들이고 더듬었다. 이번엔 아주 부드러운 키스였다.
실장님이 실장실에서 이래도 돼요? 하오는 제 아래 누운 한빈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내 작품이지. 한빈은 기분 좋은 신음을 내며 키득키득 웃었다. 내가 실장인데 뭐 어때. 허리를 처올릴 때마다 한빈의 미간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낮게 진동하는 신음은 하오에게만 들릴 것이었다. 하오가 소중한 무언가를 조심히 다루듯 한빈의 얼굴 위로 입을 맞췄다. 한빈은 그런 하오를 가만히 올려보다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아버지가 고 사장한테 나를 몇 번째로 팔았는지 알아?”
예상 못한 서문에 하오의 얼굴이 굳었다. 두 눈은 덩달아 촉촉해지며 한빈을 향했다.
”두 번째. 첫 번째는 우리집 강아지였어.”
”강아지 키웠구나.”
”응.”
”강아지 이름이 뭐였어?”
”몰라. 기억 안 나.”
”…….”
”기억이 안 나…….”
한빈의 얼굴이 으그러졌다. 오랫동안 삼켜낸 눈물이었다. 그럴 자격 없다 생각했으니까. 애써 눈을 감춘 팔뚝 뒤로 눈물이 삐져나왔다. 하오는 상체를 낮추고 한빈을 끌어안았다. 아래가 깊숙하게 맞닿았다. 한빈이 벅찬 듯 희미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나 몇 번째로 버릴 거야.”
그 질문은 자신 있었다. 어렵지도 않았다.
”안 버릴 거야.”
12월 24일, 연안부두
건욱이 운전대를 잡은 차 안. 뒷좌석의 양옆엔 한빈과 고 사장이 타 있었다. 고 사장은 백미러에 얼굴을 비춰 보며 매무새를 점검했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구렛나루도 슥슥 눌렀다. 그 옆의 한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창밖만 쳐다봤다.
”내가 코를 만지면 죽고, 입술을 만지면 판돈을 키워. 알지?”
”네.”
”분명히 장난질칠 거야. 멀쩡하게 보내지 말자고. 건욱아, 해머 챙겼지?”
”…….”
”박건욱.”
”아, 네. 챙겼습니다.”
새끼가 빠딱빠딱 대답해야지. 고 사장이 건욱의 머리통을 퍽퍽 때리며 말했다. 한빈은 눈알만 슬쩍 굴려 건욱을 봤다. 너머 멀리서 어선 한 척이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홀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형님, 저희는 화투패 하나 사서 들어가겠습니다.”
”왜?”
”그 새끼 예민해서 저희가 챙겨 온 걸로 안 칠 겁니다. 그 새끼 걸로 치자니 수 써놨을 것 같고.”
”역쉬 똑똑해.”
고 사장이 껄껄 웃을 때마다 차가 조금 흔들렸다. 건욱은 당황한 티를 숨겨내며 한빈을 힐끔거렸다. 건욱은 어젯밤 가짜코의 지시로 새 화투패를 여러 개 샀고, 한빈도 그걸 알고 있었다. 혹시 까먹으셨나? 하지만 어째선지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고 사장이 차에서 내렸다. 한빈은 차창을 내려 고 사장이 어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봤다. 마침내 뒷모습이 사라지자 한빈은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매서운 바람이 들이쳤다. 캄캄한 뒷좌석에서 이따금 빨간 불꽃만 일렁였다. 건욱은 섣불리 입 열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는 한빈은 처음이었다.
”건욱아.”
”네.”
”나는 들어가서, 건욱이가 무서웠는지 나 두고 튀었다고 할 거야.”
”네?”
한빈이 담배를 한번 더 빨고 말을 이었다.
”너 대학교 자퇴했댔나?”
”네.”
”뻥치지 마. 내가 사람 쓰기 전에 뒷조사도 안 할 것 같냐? 너 휴학했잖아.”
”…….”
”여기서 더 가면 너 고 사장한테서 못 벗어나.”
한빈은 발밑에서 보스턴백을 꺼내 조수석에 턱 내려놨다. 네가 딴 거야. 등록금으로 써. 건욱의 눈가가 축축히 젖어들었다. 한빈이 킥킥 웃으며 건욱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거 가져가고.
”다신 보지 말자.”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줘. 한빈이 건욱에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었다.
어선 안으로 물비린내가 진동했다. 파도가 부딪힐 때마다 몸체가 양옆으로 기우뚱댔다. 쓰이지 않는 그물망이 쌓인 지하 창고에 하오와 한빈, 그리고 고 사장이 속옷만 빼고 발가벗은 채 둘러앉았다. 그들 뒤엔 깡패 네 명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한빈은 애써 하오가 있는 방향에 시선을 두지 않고 패만 섞었다. 손끝이 잘게 바들댔다. 고 사장은 해머를 한손에 쥐고 하오를 삐딱하게 노려봤다. 그래봤자 하오는 심드렁히 웃어댈 뿐이었다. 고 사장이 해머를 바닥에 쾅쾅 찍어댔다.
”한 번만 더 강냉이 보이면 뒈진다.”
”화가 잔뜩 났네. 꼬추는 서?”
이 씨발새끼가! 해머를 번쩍 들고 선 고 사장을 만류하듯 한빈이 패를 돌렸다. 패를 확인한 고 사장의 얼굴이 살짝 핀다. 연이어 입술을 만졌다. 당연하다.팔땡을 줬으니까. 고 사장이 이천을 넣고, 한빈은 그에 더해 사천을 넣었다. 하오의 차례.
”받고 일억 더.”
고 사장이 낄낄대며 패를 뒤집었다. 웬 짱깨 새끼가 누굴 뱃겨 먹으려구. 돈다발로 하오의 머리통을 퍽퍽 내려치며 말하는데, 하오는 웃었다.
”난장땡인데.”
당연하다. 내가장땡을 줬으니까.
하오가 패를 섞는다. 뭐 하나 걸려만 보라고, 고 사장은 그 손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하지만 하오는 자연빵으로 패를 나눴다. 한빈이 패를 확인했다.망통. 개패 중의 개패였다. 고 사장 패 역시 애매한지 코도 입술도 만지지 않고 그저 다리만 떨어댔다. 마지막으로 패를 확인한 하오는 묘하게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겨우 십만 원을 걸었다. 고 사장은 판단한다. 걸어볼 만하다.
”삼천.”
”삼천? 아, 나 완전 개팬데……. 그래. 방금 화끈하게 잃어줬으니까 나두 화끈하게. 오천.”
”오천 받고 오천 더.”
고 사장이 패를 뒤집었다.갑오. 그것을 확인한 하오는 얄미울 정도로 크게 안도하며 패를 보였다. 구삥. 고 사장이 손을 뻗어 하오의 멱살을 쥐었다.
”이 씨발새끼가. 개패라매.”
”개패 기준이 다른가보지. 나는 끗이랑 사주가 안 맞거든. 손에 쥐여본 적이 없어.”
눈에 띄게 초조해진 고 사장이 한빈의 발목을 툭툭 쳤다. 손장난을 치란 뜻이다. 한빈이 패를 섞었다. 희미한 규칙성. 장하오를 처음 만났을 때도 같은 방법을 썼었지. 문득 그때 생각이 나면 한빈은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그때처럼 하오에겐 칠땡을 준다. 고 사장에게도 패를 주려는 순간, 손목이 잡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하오였다.
”왜 화투패로 퍼즐 놀이를 하고 있어?”
”무슨 소리야.”
”확인해볼까? 나는칠땡인데.”
하오가 패를 뒤집어 던졌다.칠땡.
”고 사장한텐 구땡줬지?”
정적이 늘어졌다. 한빈이 에스오에스를 보내듯 고 사장을 바라봤다. 하지만 고 사장이라고 별 수 있을 리가. 친구도 없는 새낀 서러워서 화투 치겠어? 하오가 손을 까딱이며 용역을 불렀다. 용역은 해머를 바닥에 질질 끌며 고 사장 앞에 섰다.
”뭐 해? 손 올려.”
그때 긴장을 깨며 높은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 사장의 휴대폰이었다. 한빈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새파랗게 질린 고 사장의 뒤로 용역이 붙어 속삭였다. 가짜콘데요. 하오와 한빈이 짧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한빈이 감지하는 불길함을 하오도 느끼고 있었다. 그를 알 리 없는 고 사장은 생명줄을 연장하려 빌듯이 말했다. 전화만 좀 받고 하자. 어?
”안 돼. 짜르고 받아.”
하오가 용역에게서 휴대폰을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 있던 고 사장이 낚아채는 것이 더 빨랐다. 하오는 고민도 않고 고 사장에게 달려들었다. 손에서 놓친 휴대폰이 허공을 날아갔다. 그러나 벽에 부딪히며 화면이 열렸다. 가짜코의 목소리가 아주 조그맣지만 분명하게 흘러나왔다.
”형님! 장장이랑 성한빈이랑 눈 맞은 것 같습니다! 작전인 줄 알았는데, 성한빈 휴대폰 보니까…….”
하오가 휴대폰을 콰득 밟아냈다. 깨진 액정의 유리조각이 맨발에 박혔다. 배가 저무는 방향으로 핏방울이 기울었다. 가만히 상황을 파악하던 고 사장이 이윽고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한빈이가 원수를 개좆같이 갚는구나. 고 사장은 엉금엉금 기어 그물망 아래로 손을 넣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한빈은 안다. 철컥. 한빈이 하오의 손을 움켜쥐었다. 총성이 울렸다.
얼마나 뛰었을까. 하오가 지나쳐온 방향을 따라 핏비린내 나는 발자국이 찍혔다. 총알이 떨어졌는지 총성은 멎었지만 만약 따라나온다면 싸워낼 자신이 없었다. 영하 날씨에 여태 전라라 온몸이 꽝꽝 얼어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때 브레이크가 걸렸다. 한빈이 주저앉은 것이었다. 멈추면 안 돼. 지금 멈추면……. 한빈을 일으켜 세우려던 하오가 멈칫거렸다. 한빈이 아스팔트 바닥 위로 붉은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다른 손으로는 복부를 움켜쥐고 있었다. 하오가 떨리는 손으로 한빈의 엎어진 몸을 제 쪽으로 돌렸다.
”안, 안 돼…….”
옆구리에서 울컥울컥 피가 쏟아졌다. 하오는 도저히 어쩔 줄 모르고 한빈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 피가 멈추지 않았다. 한빈아. 한빈아. 하오가 특권처럼 가진 이름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장하오.”
”말하지 마. 조금만 참아.”
”메리 크리스마스…….”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캐롤이었다.
영화 <타짜> 모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