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빈웹진: cinéclub

우리 사랑은 한여름 눈보라

녹턴

8월의 크리스마스

 

 

 

 





 

 

妈妈你见过下雪的圣诞节吗

 

 

무성한 가로수가 멋대로 뿌리내린 보도를 따라 걷다 보면, 그 모퉁이에는 볕에 바랜 목제 간판을 내다 건 낡은 사진관이 하나 있다. 손때 묻은 카운터 위에는 해묵은 필름 통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금이 간 유리창에는 노오란 박스 테이프를 덕지덕지 덧바른. 햇살 쨍한 날 더위에 쫓기던 이들은 한켠에 놓인 시원한 얼음물로 목을 축이고. 하교하던 아이들이 오래된 소파 위를 제집 안방처럼 뒹구는 곳. 그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카운터 너머, 한빈이 미소와 함께 자리를 지킨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더할 나위 없이 맑은 날이기도 했고. 눈이 빠져라 일을 하던 한빈은, 뻐근한 목을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처럼 몸을 풀던 그는 이내 창문 앞에 멍하니 섰다. 창틀 밖으로 보이는 모습이 너무도 낯설게만 느껴졌기에.

 

곧게 뻗은 가로수 잎새 사이로 산란되는, 대낮의 따사로운 햇볕. 바람을 따라 천천히 흔들리는 푸르른 갈래와 그들이 만들어낸 예상 밖의 음률. 그 아래로 소리 높여 지나가는 아이들의 투명한 웃음소리. 분명 매일 보던 사소한 풍경인데 오늘따라 왜 이토록 익숙지 않은지. 생경한 감각이 온몸을 덮쳐오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이렇게 살아도 괜찮으려나. 성큼 다가온 계절도 모른 채. 눈앞의 나무에 활짝 핀 꽃의 이름도 모른 채. 눈이 부실만치 푸르른 하늘 위로 흘러가는 구름 하나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까지 나무 탁자만 내려다보다 하루를 끝맺기엔 그의 생이 너무나 아쉬울 따름이었다.

 

누구에게나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 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한빈의 그것은 아주 은밀하고도 구원한 것이었다. 사진관 한편에 놓인 낮은 서랍장을 열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허공에 흩어졌다. 허리를 숙여 가장 깊숙이 들어있는 사진첩 하나를 꺼내 든다. 표지에 수북이 쌓인 먼지를 연거푸 털어내어도 거멓게 내려앉은 세월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안에 담긴 사진 또한 그러했다.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을 어린 시절의 기록.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마치 다른 이의 삶을 엿보는 것과도 같은 기시감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하나의 사진에 그의 시선이 멈추었다. 잊고 있던 기억이 손 쓸 새도 없이 물밀려 왔다. 아니, 사실 잊은 적 없던 기억. 너무도 소중해 한 움큼 감싸 안고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닳을까, 가슴 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지금은 사라진 마을 하천의 개울가. 무더운 여름날 물에 빠져 흠뻑 젖은 한빈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또래의 소년. 축축하게 물을 머금어 무거운 옷을 걸치고도, 서로를 바라보면 더없이 행복한 웃음만 터져 나오던. 이 크나큰 세상에 그와 나, 오롯이 둘만이 존재하던 그 시절.

 

장하오. 한빈은 잊혀진 소년의 이름을 조용히 읊조렸다. 덮어두었던 그 여름이 서서히 다가왔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한빈이 갓 중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맞는 여름이었나. 작은 마을이 떠들썩했다. 마을 초입 어귀에 홀로 살던 할머니의 손자가 여름방학을 보내러 온다는 소식에. 연고 하나 없는 줄 알았던 그녀에게 가족이 있었다는 것이 첫 번째 화두였고, 그런 자식이 손주가 장성할 때까지 당신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도 제법 입방아를 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소문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제 할머니 댁 대문 밖으로 한 발짝도 내딛지 않던 그녀의 손자 덕에.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어느 자식이 여태껏 코빼기도 안 비추겠어? 다 헛소문이라니까. 그렇게 그의 정체가 희미해질 즈음.

 

한빈은 보았다. 환상과도 같던 소년을.

 

그날은 낮게 가라앉은 구름이 골목을 집어삼키고. 하늘이 무너질 듯 무시무시한 장대비가 퍼부었다. 심부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목. 한 아이가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떨고 있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을 미처 피하지 못한 모양새였다. 한빈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고갤 숙이고 있는 아이. 한껏 움츠리고 있는 어깨너머를 살펴보니, 그의 품에는 카메라 하나가 안겨있었다.

 

"어, 이거 비싼 건데. 비 맞으면 고장……."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카메라다. 이런 시골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들짝 놀란 나머지, 그제야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에 당황하기도 잠시. 순간 떠올렸다. 소문 속의 아이에 대해.

 

"너구나. 채소가게 할머니네 손자."

 

저를 알아보는 듯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빈을 쳐다본다.

 

"길 잃어버렸어?"

 

이번엔 시무룩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내민 채 고갤 끄덕인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 한빈.

 

"내가 데려다줄게. 일단 우리 아빠부터 만나고."

 

그리곤 아차- 말을 덧붙인다.

 

"아빠가 사진관 하거든. 그거 안 고치면 큰일 나."

 

그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가리키며 두 눈을 반짝인다. 그런 한빈을 보며 슬며시 미소 짓는 낯선 소년.

 

 

그날을 계기로 그들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소년의 이름은 장하오. 유독 낯을 가린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어가 서툰 탓이었다. 중국 푸젠이란 곳에서 왔다던가. 크리스마스에 눈도 오지 않는 곳에서.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라던 하오와, 아버지의 사진관에 온종일 붙어있던 한빈. 제 전부나 다름없던 카메라에 잔 고장이라도 나면 그 핑계로 부리나케 한빈의 사진관을 찾아 눈도장을 찍었다. 문턱이 닳을 만큼 드나들다 보니 어느새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눈만 마주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그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꼭 붙은 채로 작은 동네를 쏘다녔다. 마치 영혼의 반쪽이라도 되는 양. 서로가 함께하는 일상이 영원하길 바랐으나.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대. 중국으로 돌아가던 날, 하오가 말했다. 엉엉 소리내어 우는 한빈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이상하리만치 덤덤한 그의 태도가 한빈을 더욱 서럽게 만들었다.

 

장하오, 형은 안 슬퍼? 우리 영영 못 만나도?

 

떠나는 이의 이름 석 자를 꾹꾹 눌러 담는다. 그럴수록 메고 있던 가방끈을 힘주어 쥐는 하오.

 

다시 만날 거야. 약속했잖아.

 

그 말을 끝으로 멀어지는 하오의 뒷모습. 그를 태운 고급 세단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망부석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한빈에게 달려올 것만 같아서. 한빈아, 나도 슬퍼. 나도 여기 떠나기 싫어. 그런 입에 발린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괜한 마음에.

 

길었던 해가 지고 어스레한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내내 제자리를 지키던 한빈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하오가 사라진 길의 들머리를 서성였다. 며칠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고. 며칠은 밤을 새워 눈물을 삼켰다.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끌어안고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렸다. 번호도 모르는 그가 수화기 너머로 한빈아, 나긋하게 저의 이름을 불러주길 매일 밤 바랐다. 장하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 한빈은 그만 자릴 털고 일어났다. 일말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 여기며. 약속은 무슨. 금세 잊혀질, 허울뿐인 말일 텐데.

 

그렇게 한빈은 하오를 잊었다. 그와 함께한 지난 여름의 기억마저 한데 묶어 깊숙이 숨겨두었다. 어린 날의 한빈이 오롯이 버텨내기엔 너무도 버거운 이별이었기에.

 

 

"그 애, 오랜만이네."

 

마침 사진관에 들른 한빈의 어머니. 오래된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말한다.

 

"엄마도 하오 형 기억해요?"

"당연하지. 우리 아들 첫사랑인데."

 

크게 숨을 들이쉰 한빈은 그새 붉어진 얼굴로 손사래를 친다.

 

"처, 첫사랑은 무슨. 그냥 친구였지. 그냥, 친구."

 

답지 않게 당황한 아들을 보며 묻는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진은 왜?"

 

그녀의 물음에 그의 시선이 또다시 사진 속 하오를 향했다. 오래도록 감춰두었던 이 사진을 꺼낸 이유는.

 

"아쉬워서."

 

그날의 우리를 여기 두고 가는 게 아쉬워서. 장하오와의 마지막이 원망과 슬픔뿐이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아쉬워서.

 

한빈이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 두 번째. 그는 생의 끝이 정해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주어진 삶은 고작 삼 개월. 이젠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기한.

 

생각보다 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누군가를 떠나보냈던 어느 여름처럼 며칠은 울고, 며칠은 울음을 삼키고, 그 후엔 훌훌 털어냈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고 틈틈이 정리도 했다. 남겨진 이들을 위해. 점차 비어가는 방안을 바라보다 보니, 마음 한구석의 두려움도 점차 사라지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기적은 바라지 않았다. 이만하면 제법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생각했고, 더는 연연할 추억도 남아있지 않다 여겼다. 이 사진을 마주하기 전까진. 하필이면 사진관에 숨겨둔 사진첩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미련이 남아있었다니.

 

환히 웃고 있는 그 여름의 하오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사진을 뒤집어 끼워두었다. 너무 커져 버린 그리움을 안고 갈 자신이 없어서.

 

 

* * *

 

 

카메라 좀 고쳐주세요. 갑작스레 들이닥친 손님이 다짜고짜 내뱉은 첫마디였다. 한빈은 익숙한 듯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카메라 수리는 안 해서요."

 

언제부터? 지난번엔 해줬어. 은근슬쩍 말도 놓는다. 진상 대응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카운터 위로 내밀어진 카메라로 시선을 옮겼다. 꽤나 오래된 연식의 카메라. 이 모델을 쓰는 사람이 아직도 있었네. 이런 유형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아주 극심한 아날로그 인간이거나.

 

"기억 안 나?"

 

낯선 손님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어투. 한빈의 고개가 서서히 위로 들렸다. 두 눈이 닿은 곳에는, 제 머릿속을 맴돌던 이가 서 있었다. 마치 한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나도 잊은 건 아니지, 성한빈?"

 

둘째,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한빈을 잊지 않은 장하오거나.

 

 

 

우리 사랑은 한여름 눈보라

녹턴

 

 

 

이제껏 그려온 그들의 재회는 이렇지 않았다. 물론, 재회가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던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건. 눈물겨운 포옹도, 해묵은 감정의 소용돌이도 없이. 저 얼굴을 보면 끝없는 원망이 치밀어오를 것이란 예상과도 달리. 그저 신기했다. 그때의 하오 형이 저렇게 컸다고? 그러고 보니 여전히 하얀 피부, 짙은 눈썹. 저를 보고 웃을 때 슬며시 솟아오르는 광대. 어릴 때의 모습 그대로다. 그제야 반가웠다. 정말 하오 형 맞아? 그에게 재차 물어도 본다.

 

"여기도 옛날이랑 똑같네."

"그럼. 사람만 바뀌었어. 아빠에서 나로."

 

맞아, 기억나. 원래 아저씨가 있었는데. 어렴풋한 기억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저씨는 잘 지내셔?"

 

하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빠도 형 보면 좋아하실 텐데. 오랜만에 우리 집 갈래?"

 

오랜만. 그 말의 끝에서 한빈은 생각했다. 하오 형, 우리 집. 이 두 단어를 함께 떠올린 게 대체 얼마 만이더라.

 

"미안. 나 오늘은 너 얼굴만 보러 왔어."

 

손목에 찬 시계를 톡톡 두드린다. 그 덕에 짧은 반가움이 산산이 흩어졌다. 맞다, 우리 이젠 어른이지. 각자의 일로 바쁜. 놀러 가자- 한마디면 소매 걷고 달려나가고, 그렇게 마음만으로 모든 걸 해내던 어린 시절은 지났지.

 

"다음에. 또 올게."

 

문 앞에 서서 한빈에게 손을 흔든다. 그 모습 위로 자꾸만, 그 여름의 하오가 겹쳐 보였다. 이번에도 저렇게 돌아온다는 말만 남기고 떠나버리면 어떡하지. 머릿속으로 저에게 주어진 시간만 떠올렸다. 그러자 심장이 미친 듯이 내달렸다. 이젠 정말, 영영 볼 수 없을 텐데.

 

"하오 형!"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떠나가던 하오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정말 또 올 거지?"

 

문 너머로 내민 고개가 세차게 끄덕인다.

 

"꼭 와. 너무 늦으면 안 돼!"

 

멀어지는 하오의 뒷모습을 향해 외친다. 어린 한빈은 하지 못했던 말을.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던 운동장에 서서히 그늘이 드리웠다. 목청이 터져라 소릴 지르며 뛰놀던 아이들도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가만히 그네에 앉아 떠나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애꿎은 아이스크림 막대만 꾹꾹 씹어대며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텅 빈 운동장에도 소란스럽던 찰나가 있었는데.

 

한빈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발치의 모래 위로 어지러이 찍힌 발자국을 내려다본다. 밤새 불어온 바람 한 번이면 이 순간의 흔적도 모조리 사라지고 말겠지. 한빈이 지나간 자리도 그렇게 다른 이들이 채워갈 것이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을, 한빈은 조금 일찍 마주하게 되는 것뿐.

 

그렇게 되뇌며 발을 세차게 굴렸다. 잔뜩 녹이 슨 그네의 이음새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그 모습이 꼭 저를 대신해 고함이라도 질러주는 것만 같아 속이 후련하다가도, 마음 한구석에 원인불명의 멍울이 남아 한빈을 괴롭혔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

 

혼자만의 생각에 얼마나 깊이 빠졌던지. 다가오는 하오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손에는 작은 아이스크림 통을 든 채, 한빈의 옆에 나란히 앉아선 입에 물린 나무 막대를 뺏어간다.

 

"그거 대신 이거 먹어."

 

지나간 건 버릴 줄도 알아야 해. 미리 챙겨온 플라스틱 숟가락을 하나 쥐여준다. 하지만 한빈은 이를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고선.

 

"아-."

 

입을 벌린 채 두 눈을 꼭 감는다. 그 모습에 싱겁게 웃어 보인 하오는 익숙한 듯 제 숟가락으로 한빈에게 떠먹여 준다.

 

"으음, 훨씬 맛있는데?"

 

모래바람을 실컷 맞다 한입 베어 문 아이스크림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달았다. 단물 빠진 나무 막대는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형이 사 온 거라 그런가?"

 

댕그랗게 뜬 한빈의 눈을 보고선, 슬며시 올라오는 광대를 애써 누르며.

 

"사실 나랑 있어서 그런 거야."

 

쑥스러운 듯 말끝을 늘인다. 그렇게 시시한 말을 주고받다 보니, 어디선가 용기가 샘솟았다. 하오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한국은 왜 돌아왔어?"

 

괜스레 바라본다. 그 이유가 한빈이길.

 

"할 일이 있어서."

 

나 여기서 영화 찍을 거야, 독립영화. 감독이야. 손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시늉을 한다.

 

형은 십 년도 더 된 꿈을 이뤘네. 한빈은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넨다.

 

"그리고 우리가 한 약속."

 

하오의 두 눈에 한빈이 가득 차올랐다.

 

"약속?"

 

고개를 끄덕이며.

 

"응. 약속 지키러 왔어."

 

한빈이 담긴 하오의 눈이 전에 없이 반짝였다. 한빈은 애써 모른 체한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다 알면서도.

 

"그런 게 있었나? 난 기억이 잘……."

"타임캡슐, 있잖아."

 

갑자기 웬 타임캡슐? 예상치 못한 단어에 당황하기도 잠시.

 

"같이 열어보기로 했던 거."

 

능청스레 말을 지어내는 그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렇지. 장하오는 약속 같은 거, 진작 잊어버렸을 텐데. 이제서야 돌아온 사람한테 뭘 바랐던 거야. 여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한빈이 바보겠지.

 

"거짓말. 그런 게 어디 있다고."

 

하오는 고갤 젖혀 웃는다.

 

"들켰네. 그냥 성한빈 보고 싶어서 왔어."

 

그의 웃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한빈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런 걱정 없던, 어리던 그 날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그러다 이내 입술을 부루퉁 내민다.

 

"형, 왜 연락도 없이 돌아왔어? 나 이사라도 갔으면 어떡하려고."

"그런 생각 처음부터 안 했어."

 

봐, 지금도 연락 없이 와서 만났잖아.

 

"우린 운명이야, 이렇게 함께 있을 운명."

 

하오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운명. 우리가 함께할 운명이라니. 죽어가는 마당에 운명이 무슨 소용이겠냐만, 듣기에는 제법 좋았다. 그래, 지나간 약속 같은 게 무슨 대수야. 지금 이 시간, 하오와 나란히 앉아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행복한데. 같은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는 게 이렇게 소중한걸. 그리고 깨달았다. 별다를 것 없는 아이스크림이 달게만 느껴지는 것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이 곁에 있어서라는 것을.

 

 

* * *

 

 

바짝 달아오른 아스팔트가 후덥지근한 열기를 내뿜고. 들이마시는 숨결마다 텁텁한 여름 공기가 눌어붙은 대낮의 어느 날. 잠시 시내의 은행에 들러 볼일을 보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어지럼증 탓에, 가로수 그늘 아래 발이 묶였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하오의 얼굴이 떠올랐다. 참 이상하다. 형이 함께 있다고 달라질 것 하나 없는데도. 그래도 그가 한빈의 손을 잡아준다면. 이리저리 흔들리는 한빈이 기대어 쉴 수 있는 가로수가 되어준다면. 하오 형의 잎새 아래선 여름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오겠지.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아, 넌지시 입가에 미소도 띄워본다.

 

"한빈아."

 

상상이 지나쳤나? 이젠 목소리까지 들린다. 요즘 장하오를 너무 자주 만났나 보다. 익숙함이 이렇게나 무섭다니까. 시도 때도 없이 그가 보고 싶어 이렇게…….

 

"왜 혼자 웃고 있어?"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눈앞에는 조금 전까지 제 머릿속을 헤집어 놓던 장본인이 서 있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 생각이 그에게까지 닿았을까 노심초사하며.

 

"그, 그냥 날씨가 좋길래."

 

되지도 않을 말로 둘러댄다. 붉어진 얼굴이 들킬까, 서둘러 그늘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핑- 도는 머리.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고 하오를 살핀다. 혹시 눈치라도 챘을까 봐. 하지만 하오는.

 

"사진관까지 태워줄까?"

 

다행히 휘청이는 한빈은 보지 못한 모양이다. 옆에 세워둔 자전거에 타서는 무심하게 말을 건넨다.

 

"혼자 웃고 있던 건 비밀로 해줄게."

 

짓궂은 그의 말에 다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 제 모습이 들킬세라 고갤 푹 숙이고 자전거 뒤에 올라탔다.

 

하오의 허리춤을 슬쩍 잡고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대었다. 바람을 가르며 힘껏 내닫는 두 바퀴 덕에, 후끈대던 열감이 서서히 내렸다. 얇은 옷 너머로 가만히 뛰는 하오의 심장 소리가 전해진다.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며, 꼭 그들이 하나로 연결된 것만 같다는 착각도 해본다.

 

"장-하-오."

 

왜 불러, 성한빈- 말끝을 늘이며 답하는 하오의 목소리가 등을 타고 들려온다. 그 목소리 사이로 쿵쿵. 쿵쿵. 점점 빨라지는 그의 심장 박동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장하오."

 

다시 한번 그를 불러본다. 한빈의 입에서 나온 저의 이름에 맞추어, 또다시 가쁠 만치 동하는 심장. 하오 형. 장하오. 그의 등을 끌어안고 연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쉴 틈 없이 뛰어대는 그 소리가 자꾸만 듣고 싶어서. 묵묵히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듣던 하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많이 미워했지."

"응?"

 

등에서 고갤 떼고 그를 바라보지만,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까만 뒤통수만 어른거린다.

 

"그날 그렇게 떠난 거."

 

내가 한빈이었으면 나 다신 보기 싫었을 것 같아.

 

곰곰이 곱씹었다. 어제 일처럼 생생한 그 날의 기억을.

 

"미웠지. 내 눈에 띄면 가만 안 둘 생각이었어."

 

분명 그랬는데. 다시 만난 하오에게 남은 감정이라곤…….

 

한빈의 머릿속이 일순간 멈추었다. 이게 무슨 감정이지? 하오를 다시 만난 그날부터 지금껏 가슴 속에 이상하리만치 답답한 구석이 남아있었다. 단순한 그리움도, 반가움도 아닌. 한빈이 아는 단어들을 한데 모아도 속 시원히 설명해낼 수 없는, 모호한 이 감정.

 

한빈은 혼란스럽다. 잊혀진 길목에 덩그러니 서서 쏟아지는 비를 속수무책으로 맞아내고 있다. 갑작스레 찾아온 유년의 파도가, 어느새 몸집을 불린 거센 격랑이 되어 저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하오 형."

 

품 안에 한껏 안고 있던 등의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단정하게 깎은 뒷머리를 들여다보고. 둥근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고. 귓바퀴를 따라 난 옅은 솜털을, 하얀 티셔츠 너머로 얼핏 비치는 어깻죽지 뼈를 가만히 눈에 담아내고. 응, 한빈아. 귓가에 다정히 울리는 그의 음성을 들으며 선명해졌다. 내내 저를 괴롭힌 이름 모를 감정이.

 

한빈은 하오가 한없이 미웠다. 돌아오지 않을 이를 기다린다는 게 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떠나가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밤잠을 설쳤다. 저를 힘들게 한 사람은 두 번 다시 보기 싫다며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다가도, 불쑥 튀어나오는 그리움이 그토록 사무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탓에 두려웠다. 눈앞에 나타난 그가 꼭, 저의 착각 같아서. 손이라도 닿으면 뿌옇게 흩어질 안개 같아서. 어린 날 꾸었던, 눈물 자국이 잔뜩 묻은 꿈만 같아서. 이제서야 다시 만난 그를 놓고 떠날 수는 없었다. 정말 운명이 있다면 이래서는 안 되었다. 장하오를 조금이라도 더 일찍 성한빈에게 데려다줬어야지. 저의 삶은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은걸. 그의 곁에선 자꾸만 이기적인 마음이 차올랐다. 생에 대한 미련이 불시에 제 마음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곤 했다.

 

그래서, 불안했다. 한빈이 사라지고 혼자 남을 하오가. 그 여름의 한빈처럼,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떡하지. 내내 울고 식음이라도 전폐하면 어떡하지. 그러다 성한빈을 미워하기라도 하면. 먼저 떠나간 저를 원망이라도 하면 어떡해. 그중에서도 견디기 힘든 것은, 그렇게 한빈이 하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다는 것. 서로를 묻어둔 채 그렇게 긴 세월을 보냈는데. 세상에 없는 사람쯤이야 금세 지워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곤 다시 떠올렸다. 하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깨달은, 그 케케묵은 감정을. 장하오만 곁에 있으면 무럭무럭 자라나는 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울창이 뻗은 잎새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듯, 어느새 피어난 한빈의 감정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한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감정은.

 

어쩌면 사랑. 한빈은 하오를 사랑했나? 그래서 그가 미웠고, 두려웠고, 불안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했기에 그가 끝없이 탐이 났고, 안고 싶었고, 내내 그리웠으며 지워낼 수 없었나. 이제야 모든 마음이 이해되었다. 저도 모르는 새 툭툭 튀어나오던 이유 모를 행동들도. 이따금 한빈을 휘감고 가는 끝없는 감상과 애타는 동경도. 그 모든 감정은 사랑이었다. 성한빈은 장하오를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한다. 그랬기에 보내줘야 했다. 혼자 남겨진 이의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제가 겪었던 아픔을 하오에게 고스란히 건네줄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한빈은 말해야만 했다.

 

"이제 안 왔으면 좋겠어."

 

사진관에도. 나 만나러도.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작스러운 한빈의 선언에 빙빙 돌던 자전거 바퀴가 멈춰섰다.

 

"처음에는 형 봐서 반갑기만 했는데, 자꾸 우리 헤어지던 날 생각이 나."

 

허공에 떠 있던 한빈의 두 발이 바닥에 닿았다. 바싹 마르는 입술을 꾹 깨물고 말을 잇는다.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르지. 나, 형 얼굴 보는 것도 힘들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떨리는 눈동자를 들킬까, 고갤 떨구며.

 

"이제 나 찾아오지 마."

 

부탁이야.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선다. 그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좁은 골목으로, 더 깊은 골목으로 달아나며.

 

더이상 하오가 보이질 않자, 그제야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가 너무 심했나? 내 진심은 이게 아닌데. 하오 형, 상처받았으면 어떡하지. 사람 하나 없는 골목길을 터덜터덜 걸으며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떠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어느새 장하오가 그리워서.

 

 

사진관이 가까워지자 소매를 끌어다 얼굴을 닦았다. 눈물범벅이 된 두 볼이 벌겋게 성이 났다. 그새 퉁퉁 부은 두 눈은 또 어떻고. 아니나 다를까, 사진관 안에서 저를 기다리던 할머니가 화들짝 놀라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젊은 총각, 왜 울어?"

 

한빈은 또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손사래 친다.

 

"아이, 바람을 좀 맞았더니 그런가 봐요."

"그래? 조심하지 그랬어."

 

그러게요. 사람 좋게 웃으며 생각했다. 이렇게나 저를 뒤흔들 바람일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마주하지나 말걸. 그저 인사만 건네고 꼭꼭 숨었어야 했는데. 불어오는 바람이 반가워 잊고 있었다. 한빈이 처한 상황을. 얼마 남지 않은 한빈의 삶을.

 

"많이 기다리셨죠?"

 

메고 있던 가방을 벗으며 바삐 카메라를 매만진다.

 

"나야 뭐. 덕분에 오래 꽃단장 좀 했지."

"오늘 사진 잘 나오겠네요."

 

흘러내린 머리를 느긋이 쓸어올리는 할머니에게 묻는다.

 

"마음의 준비는 하셨어요?"

"준비가 뭐 있어. 그냥 예쁘게만 찍어줘."

 

뷰파인더 너머로 바라본 그녀는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렌즈를 응시하고 있었다. 셔터 버튼을 몇 번 누르고, 사진을 넘겨 보여준다.

 

"이걸로 괜찮으세요?"

 

한빈의 물음에도 할머니는 작은 화면 속 얼굴을 묵묵히 들여다본다.

 

"나 한 번만 더 찍어도 될까?"

"그럼요."

 

흔쾌히 고갤 끄덕이고 다시 카메라 뒤에 섰다. 조금 전과 달리 환히 미소 짓고 있는 그녀.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눈도 한껏 접어 보인다. 하던 일도 멈추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한빈에게.

 

"왜, 이상한가?"

 

멋쩍게 묻는다. 그 말을 듣고 그제야 셔터를 누르는 한빈.

 

"죄송해요. 너무 고우셔서 저도 모르게."

 

 

내 마지막은 웃는 모습으로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할머니가 떠나고 나서도 그녀가 남긴 말이 내내 메아리쳤다.

 

카메라의 타이머를 맞추고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한 컷, 한 컷, 한 컷. 연거푸 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확인한 결과물은 참담했다. 조금 전의 할머니처럼 아름다운 마지막을 남기고 싶었지만. 아무리 입꼬리를 끌어올려 보아도 깊게 드리운 슬픔은 걷어낼 수 없었다.

 

하오 형이 간직할 나의 마지막도 이런 모습이면 어떡하지. 모진 말만 늘어놓던 우리의 마지막 장면으로 날 기억하면. 한빈은 후회했다. 그렇게 하오를 떠나보낸 것에 대해.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을 걸 그랬나. 장하오를 사랑한다고. 빛바랜 감정이 지금껏 한빈의 가슴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고. 하염없이 무더운 날에도, 진득하게 땀이 난 서로의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건. 성한빈이 장하오를 더없이 간절하게 바랐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현실은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 이미 엎질러진 물은 손 쓸 틈도 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거세게 밀어낸 사람은 돌아올 리 만무했고 한빈은 그의 연락처 하나 알지 못했다. 꼭 그때 그 여름처럼. 이번에도 지나간 시간을 붙잡고 견뎌내야 하겠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야 깨달은 제 오랜 사랑. 그걸 알고도 매몰차게 이별을 고했다니. 사랑해서 보내준다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이야. 사랑하면 끝까지 잡았어야지. 바보 성한빈. 미련한 성한빈. 낡은 소파 위로 몸을 웅크리며 끝없이 저를 탓했다.

 

 

* * *

 

 

날이 갈수록 한빈의 상태는 악화되었다. 온몸에 울긋불긋 피어오른 열병을 오롯이 버텨내며 까마득한 밤하늘을 한가득 끌어안았다. 지독히도 끊이질 않는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차마 떨쳐낼 수 없는 이를 기억했다. 소리 없이 찾아올 망각이 두려워 새파란 이름을 꿈의 고개마다 묻어두었다. 소복이 덮어둔 이름의 무덤을 부둥키며 소리 높여 부르다, 맞닿은 새끼손가락 위로 창백한 영원이 하이얗게 쌓인 순간. 입술 새로 새어 나온 입김이 온 세상을 희뿌옇게 물들이며 잠에서 깬다. 아침결의 첫 햇살이 옅은 살갗 위로 피리하게 스며든다. 꿈결에 그토록 부르짖던 영원은 흔적 하나 없이 흩어지고. 축축하게 땀에 젖은 한빈만이 거친 숨을 삼킨다.

 

그제야 깨닫는다. 무엇 하나 남지 않은 채 공허한 제 곁을. 그리곤 느낀다. 숨 막히는 고회. 마음껏 사랑할 수도 없는 제 초라한 넋을. 그래서 생각한다. 기나긴 영원이 자취를 감춘 입새를. 이내 불안해진다.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을 줄만 알던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한빈은 열리지 않는 사진관의 문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날 이후로 찾아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탓이었다. 오지 말라고 정말 안 오는 게 어디 있어. 언제는 운명이니 뭐니, 입에 발린 말 잘도 하더니. 그렇게 슬쩍 하오에게 닿지 않을 불평도 늘어놓는다.

 

사실 한빈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는 것을. 그렇게 밀어낼 땐 언제고.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인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한빈은 장하오가 너무나 그리웠다. 낡디낡은 서랍장에만 감춰두기엔 사랑이란 감정이 손쓸 수 없이 커져 버려서. 그저 그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 그 손을 슬며시 맞잡고 가만가만 다독이고 싶은 마음. 그에게 제 마음을 꾸밈없이 내어놓고 싶은 마음.

 

생각만으로도 점차 커지는 미련에 고갤 세차게 저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한빈만 사라진다면 흔적 하나 없이 사그라들 감정이었으니. 하오도 저 같은 건 금세 잊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지난 여름의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애써 되뇌며 불이 꺼진 사진관 문을 잠근다.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집으로 향했다. 굳게 먹은 마음과 달리, 두 눈은 자꾸만 주변을 살폈다. 혹시라도 하오를 마주칠까 봐.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다시 만나면 어떡하지. 자존심 다 접어두고 사과를 할까. 그간 키워온 사랑을 고백할까. 그것도 아니면, 거듭 그를 밀어내야 하나. 시도 때도 없이 뒤바뀌는 마음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집으로 가는 길.

 

좁은 길목에 있는 마을 정자 앞에서 발이 멈추었다. 그곳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 때문이었다.

 

"이거 주려고 기다렸어."

 

멋쩍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하오. 건네받은 필름 통 하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얼굴 봤으니까 이제 갈게."

 

下雪的夏天필름 상자 끄트머리에 적어둔 뜻 모를 한자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린다. 그날처럼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자 꾹꾹 눌러두었던 마음이 슬그머니 새어 나왔다. 사랑은 꼭 재채기처럼.

 

"나 안 보고 싶었어?"

 

다시 눌러 담을 새도 없이 비집고 튀어나온다. 그간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난 형 그리웠는데, 매일."

 

한빈의 쉴 틈 없는 고백에 하오의 입술이 들썩인다. 이제껏 전하지 못했던 말을 고하려던 찰나.

 

번쩍- 한순간 점멸하는 천지. 하늘을 가르는 천둥소리. 잇따라 쏟아지는 소나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끌어 잡았다. 황급히 정자 아래로 몸을 피하는 그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서야 맞닿은 두 손이 눈에 들어왔다. 슬며시 힘을 푸는 한빈을 단단히 그러잡는 하오.

 

"안 보고 싶었냐고?"

 

속을 읽을 수 없는 까만 눈동자가 한빈에게 닿았다.

 

"나도 성한빈 생각만 했어."

 

그해 여름부터 지금까지.

 

어지러이 퍼붓는 빗소리에도 또렷이 하오의 목소리만 들렸다.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던 한빈의 머릿속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잊지 않으려고 매일 떠올렸어. 하루도 빠짐없이."

 

하오는 생각했다. 두 눈이 반짝이는 낯선 소년으로 점철된 지난 시간을. 어린 날의 풋사랑치곤 제법 속절없이 빠져들었던. 저를 빤히 바라보던 그 얼굴을 틈만 나면 곱씹었다. 어둑한 밤하늘의 별 무리 같던 눈동자와 하얀 볼 언저리에 늘상 내려앉은 홍조. 어디선가 설익은 풋사과 향이 나면, 둥그런 뺨 위로 작은 보조개가 피어오르곤 했었다. 그런 소년을 망각할까 두려워 하오는 한빈을, 그해 여름을 습관처럼 반추했다.

 

그의 말에 한빈은 고갤 떨군다.

 

"난 아니었는데."

 

난 형 잊으려고 노력했어.

 

"장하오가 기억나는 건 죄다 숨겨놓고서 꺼낼 생각조차 안 했고."

"그런 건 상관없어."

 

푸젠의 집에서, 외로이 넓은 방에 앉아 밀려오는 한빈을 마주할 때마다 우스운 걱정에 빠지곤 했었다. 이젠 한빈이 없어도 한빈을 사랑할 수 있겠다며. 눈만 감아도 떠오르는 그 얼굴을, 저를 보고 활짝 내비치던 미소를 그리는 일이 너무 익숙해져서. 그 애를 만난 내 마음이 예전 같지 않으면 어떡하나. 내내 한 사람만을 떠올리며 새벽 해를 기다리던 나의 유년이 그렇게 부정당하면. 그래서 두려웠다. 다시 만난 성한빈을 더는 사랑하지 않을까 봐. 흘러간 시간 속에서 변해버린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멀리 밀어낼까 봐.

 

"이제야 너를 만났는데."

 

무작정 결정한 한국행의 끝에서 다시 닿은, 저의 오래되고 서툴렀으며 생애 처음 느꼈던 사랑. 긴 시간이 지난 후에 마주한 그는 여전했다. 그 눈에는 한결같이 가라앉지 않는 별빛이 숨 쉬고. 입가에는 한결같이 푸르른 능선이 미소를 그려내고. 낡디낡은 사진관에서 한결같이 홀로 빛을 내는 그 아이. 무엇보다도, 그런 한빈을 담아내는 하오의 한결같은 마음.

 

"그러니까 한빈아."

 

일말의 움직임도 없이 고정되어 있던 그의 눈동자가 크게 술렁였다.

 

"나, 밀어내지만 말아줘."

 

네 곁에만 있게 해준다면. 말을 미처 끝맺지 않고 크게 숨을 들이쉰다.

 

"약속할게. 이번엔 널 떠나지 않겠다고."

 

소나기에 젖은 하오의 맹세가 짙어졌다.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생각에 잠긴 한빈은.

 

"난 형한테 아무런 약속도 해줄 수 없어."

"그것도 상관없어."

 

그럼, 만약에.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저의 불운은 차마 고백하지 못한 채.

 

"만약에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어도?"

 

제 삶에 불어닥친 종말에도 잃고 싶지 않은 이를 향하여. 무너져 내리는 세상 속에서도 소곤히 영원을 귓가에 속삭이고 싶은 마음. 덮쳐오는 거센 파도 앞에서도 한 줄기 희망 같은 애정을 열렬히 실토하고픈 마음. 높디높은 고애 가운데 피어오른 그대의 숨결을 끝없이 간직하고 싶은 마음. 이 모든 게 제 욕심인 것을 알면서도 재차 묻는다.

 

"그래도 내 곁에 있고 싶어?"

 

느릿하게 끄덕이는 그의 머리.

 

"하루라도 더. 성한빈이랑 있을래."

 

갖은 미사여구 없이도 전해지는 하오의 진심에, 그제야 얽혀있던 한빈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하오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유통기한이 정해진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렇다. 마지막이 다가오기 전까지 온 힘을 다해 서로를 보듬어주기도 모자라다. 사랑 앞에 두려울 것이 뭐가 있어. 지레 겁먹고 각자의 테두리만 빙빙 돌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운걸. 성한빈이 장하오를 사랑하고, 장하오가 성한빈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이토록 자명한데. 지나간 그리움을 털어내고 찬란히 다가올 내일을 맞이하는 것. 사랑은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런 한빈을 놓치지 않으려, 덩달아 그러당기는 하오. 어느새 비는 그치고 하늘을 온통 덮었던 먹구름이 걷혔다. 서로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맑게 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빈은 하오와 함께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여느 때와도 비할 바 없이 소중했다. 다신 오지 않을 찰나의 그들을 만끽하며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잠깐, 아주 잠깐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이 행복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서서히 스며드는 그의 온기가 한빈을 다독였다.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괜찮다며. 저에게 남은 날은 마음껏 사랑하고, 끌어안고, 순간을 만끽하라며. 그들의 마지막이 아쉬움도 원망도 아닌 찬란한 한 장면으로 기록되도록.

 

포개진 손 위로 약동하는 맥박이 고스란히 닿았다. 이는 그들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파도였고, 의 끝에서도 서로를 간직하겠다는 일종의 맹약이었다.

 

 

* * *

 

 

아, 큰일 났다. 갓 인화를 마친 사진들을 확인한 한빈이 뱉은 첫마디였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하나하나 재차 넘겨본다. 그러다가도 도통 답이 나오질 않는지 고갤 젖히고 하늘을 향해 팔을 쭉 뻗는다. 이리저리 하얀 천장에 비춰보며 살피더니.

 

"이거!"

 

어린아이처럼 기뻐한다. 자세를 고쳐 앉아선 손에 들린 사진 한 장을 다시 살펴본다. 그 안에는 해사하게 웃어 보이는 한빈이 있다. 하오가 건네준 필름 사진 속 그는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도무지 하날 고를 수 없을 정도로. 그중에서도 가장 눈이 부신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린다. 이거면 됐다. 그토록 고민했던, 한빈의 마지막 초상. 저를 사랑했던 누군가가 문득 그를 떠올렸을 때 이렇게나 빛나는 모습으로 한빈을 기억해준다면. 시릴 정도로 푸르른 청춘으로 저를 남길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다.

 

기나긴 작업을 끝낸 후, 빛바랜 사진관을 찬찬히 둘러본다. 저의 오랜 시간이 곳곳에 상흔처럼 물들어 있다. 제 손으로 카메라를 만졌던 첫날. 어둑한 암실에서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인화. 처음 만난 하오를 무턱대고 데려와 앉혔던 나무 의자. 뙤약볕 아래 실컷 뛰놀다 돌아온 그들을 반겨주시던 아버지. 나른히 잠든 하오를 향해 머리를 기울이던 선풍기. 한빈이 호기롭게 망쳤던 하오의 첫 필름. 그날, 토라진 장하오를 달래느라 어찌나 힘들었던지. 그 옆에는 떠나간 하오를 원망하며 엎드려 울던 낡은 소파. 지극했던 통증이 여실히도 남아있다. 팔걸이에 남아있는 눈물 자국이 여태 지워지지 않던 것은, 그를 미워하면서도 잊게 될까 두려워하던 모순된 제 마음 탓일지도. 그리고 돌아온 하오가 두고 간, 광음이 빼곡히 덮인 카메라. 돌이켜보면 참 바보 같았다. 장하오도, 성한빈도. 사무치도록 서로를 그리워하던 날들은 어쩌고. 그가 종적을 감춘 길목 위로 목을 매고만 싶었던 그 날들은 또 어떻고. 저물어버린 사랑이라 치부하며 제 애정을 애써 외면했던 시간이 어리석었다. 실컷 안아주고 사랑할 겨를도 모자란 그들이었는데. 사진관에 담긴 한빈의 잔상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면, 그 자취의 끝이 향하는 것은 언제나 장하오. 가만히 스며든 하오가 어느새 소파 한편에 앉아 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본다. 푸르른 초록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여름날의 오후, 한가운데 자릴 잡고 한빈에게 난연히 웃어 보이는 연인. 더는 바랄 것 없는 평화. 아, 한빈의 꿈에서나 스쳐 가던 무결한 삶. 필름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제 으로 힘차게 발을 들인다. 한빈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오직 하나뿐인 그대의 어깨에 머리를 뉘며.

 

창밖에서 춤추듯 나부끼는 가로수 잎새가 손을 흔들어 보인다. 여전한 사랑이 노곤히 내쉬는 숨소리가 들린다. 그의 생명을 귓가에 한껏 담아내며, 그제야 느긋이 눈을 감아본다.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이 따사로이 한빈을 감싸 안는다. 저 멀리 지저귀는 이름 모를 새가 조용히 제 이름을 읊조리고. 새벽을 채우지 못한 별들이 기다리는 길의 끝으로. 장하오,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그 이름을 나지막이 되뇌며. 한빈은 발을 뗀다.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하오 형, 그때의 우린 뭐였다고 생각해?

 

그와 나누는 대화가 먹먹히 지나간다. 진탕 물장난을 치고 난 그해 여름처럼. 하얀 볼을 간질이는 그 날의 너그러운 바람결 새로 갓 멎은 소낙비의 푸릇한 물비린내가 스친다.

 

영원히 녹지 않을 사랑이었어.

 

그럼 한빈은 묻는다. 그의 답을 알고서도.

 

지금도 여전히 사랑?

 

햇살이 내리쬐는 얼굴 위로 숨 가쁜 애정이 한가득 떠오르자,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연하다.

 

지금의 우리는, 꺼지지 않을 기적.

 

하오는 환상을 꿈꾼다. 정오에 떠오르는 샛별. 바닷속에 쏟아지는 장대비. 사막에 들이치는 파랑波浪. 한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들꽃. 따사로운 봄볕에도 녹지 않는 눈사람. 터무니없는 그 모든 기적 중에서도,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은 펑펑 내리는 여름날의 눈. 오지 않을 이상 기후를 간절하게 기다린다. 성한빈과 함께 쏟아지는 눈을 마주 볼 수만 있다면. 흩어지는 함박눈 새로 빠짐없이 제 사랑을 고백하고. 앞다투어 반짝이는 불빛 아래 온 마음을 그려내고. 녹아버린 지난 시간 위로 새하얀 입김을 마음껏 덧칠하며. 그렇게 흐려지는 연인을 더는 놓치지 않는 것. 이뤄지지 않을 바람 위로 한빈이 콧노래를 흥얼댄다.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이름 모를 나무의 잎새가 소복이 내려앉는다. 그 모습이 꼭 희뿌연 눈송이가 흩날리는 것만 같아, 한빈은 슬며시 미소 짓는다.

 

하오 형, 저기 봐. 한여름에도 눈이 내려.

 

우리 소원을 이뤄주려고 그러나? 바싹 말라가는 한빈의 목소리에 하오는 감싸 안은 그의 어깨를 지그시 어루만진다. 아무리 움켜쥐어도 성긴 모래알처럼 자꾸만 새어나가는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은 욕심에.

 

장하오.

 

그때 직감했다. 그의 입술 새로 나온 하오의 이름이,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것을. 뜬구름 같던 모든 음절을 낱낱이 새기며 성한빈, 제 생에 유일할 애인의 이름을 되부른다.

 

나한테 형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

 

그토록 간절히 그리던 이의 손을 잡고 가벼운 발걸음을 떼는 한빈. 영영 깨지 않을 꿈속으로 나아간다. 아득하고 좁은 길의 끝에 서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본다. 그곳엔 변치 않을 하오가 저를 향해 손을 흔든다. 그 모습을 보며 한빈은 깨달았다. 삶의 결말에서도, 영원히 빛나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장하오는 나에게 오지 않을 기적이었어. 한여름의 눈처럼.

 

어깨 높이에서 메아리치던 고른 숨결이 고요히 사그라든다. 제 곁을 떠나는 신열이 원망스러워 연신 그의 손등만 다독인다. 한빈아, 한빈아, 성한빈. 조심스레 그 이름을 부르던 하오는 떠나는 이에게 약속한다. 우리의 영원을. 바래지 않는 애정을. 그 끝에 마주할 기적을. 품 안의 연인은 사느랗게 사라져만 가고, 창밖에선 그치지 않을 여름날의 눈보라가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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