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달렉
영화 파워 오브 도그(2021) 모티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고, 모든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는 예정론. 그 예정론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전쟁이나 전염병, 자연재해같이 개인이 저항하기 힘든 시대적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그 흐름에 휩쓸려 예기치 못한 전개를 맞곤 한다. 그리고 때때로 그 흐름은 너무도 거대하고 거친 파도가 되어 한순간에 개인의 인생을 끝내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최악은 아닐지도 모른다. 덜 고통스럽고, 덜 복잡하며 믿음에 따라선 새로운 시작이 되어줄지도 모르니. 진정으로 잔인한 파도는 상처를 남기고 살려둔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을 알 수 없는 곳에 표류시킨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제시된다. 추악하게 살아남을 것인가, 명예롭게 죽을 것인가.
제국은 대륙 진출의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조선을 교두보로 삼은 일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대만을,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랴오둥 반도를 손에 넣었으며 같은 해,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했다. 일제는 랴오둥 반도에 만주를 가로지르는 철도를 건설했다. 섬의 총구가 유럽 대륙을 향할 수 있게 드넓은 땅에 길을 낸 것이다. 일제는 이 중요한 이음매를 관리하기 위해 요동 땅에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만철) 을 세웠다.
격동의 시기, 중화민국과 러시아, 조선을 잇는 교통로를 관리하게 된 만철의 경제적 이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륙의 교통을 장악한 만철은 만주의 해운업, 광업, 제철업, 관광업에 손을 뻗어 사실상 만주 전체의 경제를 장악했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1920 년대에 들어서 만철의 자본금은 일제 전체 법인 중 으뜸이었으며 연간 일제 총세입의 25% 를 벌어들였다.
만철에는 2 만여 명의 일본인이 근무했는데, 그들의 업무는 철도관리에 국한되지 않았다. 만철 본부의 ' 조사부' 는 전략적 요충지인 만주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아시아 전역의 경제, 군사, 지리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군부에 전달했는데, 그 업무엔 일제와 당시 식민지들의 최고 엘리트들이 참여했다. 압도적인 자본력과 우수한 인력, 정보는 만철 자체의 힘을 키워주었고, 곧 만철은 일개 기업으로 불리기엔 지나치게 거대해졌다. 그들은 랴오둥 반도를 관리하는 일제의 정부 기관인 도독부, 영사부와 맞먹어 권력의 한 축을 담당했으며 일제판 동인도회사라 불리기도 하였다.
동시에 만철과 함께 떠오르는 새로운 권력이 있었다. 만철의 보호를 목적으로 창설된 관동군이었다. 그들은 만철의 중요도가 높아짐에 따라 본국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걷잡을 수 없이 성장했다. 종래에 관동군은 만주 지역에서 일제 해군과 육군의 영향력을 배제했고, 사실상 제3 의 일제 직할군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만주를 집어삼킨 일제는 다른 모든 식민지에서 그러했듯이 잔혹한 탄압을 일삼았다. 당연하게도, 과만하게 계층적인 구조의 맨 아래에는 만주족과 한족 등 땅의 원주민이 피지배층으로 위치해 착취당했다. 그렇지 않아도 빈곤하던 시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잇달아 겪은 만주 지역 민중들의 삶은 가혹했고, 일제의 통치는 그들의 곤궁에 박차를 가했다.
VIDEO
一
사냥꾼
장하오는 청일전쟁이 끝난 해 랴오둥 반도의 끝자락, 해안마을 다롄에서 태어났다. 청나라가 중화민국으로 바뀌던 격변의 시기, 랴오둥 반도는 일제와 러시아의 권력 다툼에 끼어 전란에 휩싸이며 수 차례 주인을 바꿔갔다. 어린 장하오는 남들과 똑같이, 배를 곯으며 살아갔다. 결핍 속 유일한 희망은 제 인생이 최대한 고통 없이 끝나길 바라는 것이었다.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장하오의 운명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하오 본인조차 어느 정도인지 눈치채지 못했으나, 그는 두뇌 회전이 빨랐다. 조금 똑똑하다거나 잔머리를 굴리는데 능한 게 아니라 특출나게 머리가 좋았다.
셈이 빠른 덕분에 하오는 한 상단의 점원으로 일할 수 있었다. 상단에서 일하는 것은 커다란 특권이었다. 하루 한 끼 정도는 먹을 수 있을 만한 급여를 받았고, 중간중간 관리자들 몰래 조금씩 요깃거리를 빼돌려 먹을 수도 있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이, 하오는 대량의 주문 건을 처리하고 있었다. 주문과 발주 사이에 환불 건까지 섞여 복잡해진 계산에 끙끙대고 있는 관리자를 밀어내고, 순식간에 계산을 끝마친 하오를 누군가 붙잡았다.
그는 하오를 데리고 곧장 시내로 갔다. 복종이 몸에 배어있던 하오는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남자의 뒤를 따랐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들어간 거대한 건물의 방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 끙끙대고 있었다. 하오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책상에 앉혀지고, 종이 한 장을 받았다. 남자는 하오에게 종이에 적힌 문제를 풀어보라 말했다. 하오는 뜨문뜨문 익힌 한자들과 숫자들을 가늠해 어렵지 않게 문제를 풀어냈다. 답안지를 본 남자는 하오를 의심스럽게 흘겨보더니 곧 위층으로 끌고 올라갔다.
그날 이후 하오에겐 잘 공간과 먹을 것들이 주어졌다. 그 대가로 하오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알 수 없는 계산이었다. 매일매일 복잡한 수식들이 적힌 종이 뭉치가 하오 앞에 놓였고 하오는 펜을 끄적이며 문제를 풀어나갔다. 간간히 이해하지 못하는 기호나 문자는 옆에 앉아 비슷한 문제를 풀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는데, 그들은 이런 것도 모르냐며 나무라다가도 곧 그것만 알려주면 곧바로 수식을 풀어내는 하오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며칠이 지나자, 하오는 그 방에서 다시 또 위층으로 올라가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중년의 신사였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을 것 같은 특유의 기품 있는 분위기가 중후함과 더해져 하오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그는 하오에게 자신의 가신이 되지 않겠냐는 의외의 제안을 했다. 며칠 간의 평온한 삶은 거칠기만 했던 삶에 마약같이 느껴졌다. 그 안정에 취한 하오는 망설임 없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날 제가 했던 계산들이 제 동포의 머리 위로 떨어질 포탄의 궤적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하오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그의 정체는 만철조사부의 산하 기구인 조사부, 중앙시험소, 지질연구소 중 조사부를 총괄하는 부장, 성종희였다. 성종희는 만철 본부 근방의 거대한 저택에 살고 있었다. 그의 가신이 된 하오는 저택의 잡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그리고 밤과 새벽마다 여러 학문을 익혔다. 영특한 하오를 키우고자 하는 성종희의 명령 때문이기도 했으나, 하오 본인도 점점 학문을 배우는 것 자체에 즐거움을 느꼈다. 저택에 발을 들인 지 1 년이 채 되지 않아 하오는 여러 나라의 역사를 마치 직접 경험한 것마냥 줄줄 외웠고 다양한 정치 체제들과 국가 간의 관계를 이해했으며,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성종희의 모국어인 조선어도 어느 정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성종희는 을사늑약 당시 조선을 일본에 팔아먹은 주요 친일파 중 하나였다. 그는 그 공으로 공작의 지위를 받았고, 그의 가문은 조선 내의 여러 이권을 할애받았다. 그 후에도 일제의 충직한 앞잡이로 활약한 성종희는 완전한 신뢰를 쌓아 만철 조사부장이라는 중책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버젓이 일본 이름까지 얻어 대외적으로는 마치 본인이 진짜 일본인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정작 일본어를 말하는 것에는 그리 능하지 못했다. 때문에 성종희는 급하게 말을 하거나 생각나지 않는 어휘가 있을 때는 조선어를 내뱉곤 했는데, 하오는 그것을 보고 저택에서 일하는 조선인 하인에게 매달리다시피 해 조선어를 익혔다.
하오가 서툴게나마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조선어를 할 수 있게 되자, 성종희는 하오에게만 조선어를 쓰는 빈도수를 늘려갔고, 곧 하오를 만철 조사부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조사부의 말단 직원이었고 하는 일들이라곤 거진 성종희의 업무 보조에 불과했지만, 이는 파격적인 조처였다. 그 당시 만철, 그중에서도 조사부는 일제와 그 식민지의 엘리트들 중 엘리트들만이 일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
조사부 근무자들의 대부분은 태어나길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좋은 교육을 받은 콧대 높은 도련님들이었다. 그들은 이질적인 장하오를 배척하고 경멸했으며, 사소한 업무 정리부터 사무실 청소, 장하오에게 할당되지 않은 일들을 시키고 이내 본인들의 업무까지 미뤄주었다. 장하오는 묵묵히 그 일들을 감내했다.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오히려 좋다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그들이 미루는 업무와 사소한 서류들을 정리하며 장하오는 그것들을 단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제 것으로 흡수했다.
- 글쎄 오늘 아침 광장에 또 몸뚱아리 하나가 매달렸더군.
- 찢어 죽일 일본 놈들! 치안을 핑계로 조금만 거슬리면 잡아 죽인다니까.
이른 아침, 본부 앞뜰을 걸어 조사부 건물로 들어가던 장하오의 귓가에 ' 익숙했던' 언어가 들려왔다. 하오는 발걸음을 멈추고 한 글자 한 글자 음의 높낮이가 도드라지는 억양을 귀에 담았다.
- 뭐 그렇지만도 않아. 이번 놈은 죽을만했던데?
- 뭐, 사람이라도 죽였대?
만철을 청소하고 허드렛일을 하는 한족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앞뜰을 쓸며 지난 저녁 있었던 처형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베이징에서 일어난 5·4 운동의 여파로 중국 내 식민지들의 치안을 강화한 일제는 조금의 구실만 보여도 곧잘 애꿎은 사람들을 잡아 처벌하곤 했다. 억울하게 죽고 초주검이 되어 돌아오는 이웃들은 본 이들은 아득바득 이를 갈면서도, 저 역시 저런 꼴을 당할까 겁나 움츠러들곤 했다.
- 남창이었대. 그것도 비역질을 하는...
- 그럼 뭐...
빗자루에 기대 일을 멈추고 이야기를 하던 그들이 뒤늦게 장하오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애써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애꿎은 바닥을 연신 쓸며 천천히 하오에게서 멀어졌다. 하오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뒤를 돌아 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등을 흘긋거리는, 두려움과 경멸에 찬 시선을 느끼며.
계층 피라미드의 밑바닥에서 밧줄을 붙잡은 채, 어설프게 공중에 떠 살아가는 것의 의미는 그러했다. 피라미드 위의 이들에게는 천것이라는 비웃음을, 아래의 동포들에게는 배신자라는 경멸을 받는 삶. 억울하진 않았다. 그런 평가를 받아 마땅한 삶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불가피했다는 자위를 잊진 않았다. 어쩔 수 없었어. 나조차 몰랐던 내 가치를 알아주고, 하루하루 굶어 죽을까 두려웠던 삶을 끝내준 곳이 이곳이었을 뿐이야. 입 밖으로 내기엔 민망한 항변이었다. 어쨌든 본인은 일제에 저항하고 탄압받는 동포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니까.
하오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이른 아침에 출근하곤 했다. 성종희의 금일 업무를 준비하고 다른 직원들이 떠넘긴 잡무들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전날 늦게까지 야근한 직원들이 아무렇게나 흩트려놓고 간 서류와 책더미들을 정리했다. 성종희의 가신이라는 것은 최소한 이곳 조사부 사무실 안에서는 큰 방패가 되지 못했다. 조사부의 근무자들은 하나같이 높은 지위의 부모를 둔, 날 때부터 잘난 엘리트들이니까. 그들과 랴오둥 반도 부랑아 출신인 장하오는 성종희라는 강력한 아교로도 결코 융화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었다.
성종희가 출근할 시간이 되자 장하오는 서류철을 들고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노크 두 번 후 약 3 초간의 공백. 그리고 문을 열었다. 성종희는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를 등지고 책상에 앉아 시가를 피고 있었다. 그의 책상 앞에 멈춘 하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늘 그렇듯이 보고를 시작하려 할 때, 성종희가 먼저 손을 들어 말을 막고는 시가 연기를 크게 내뿜었다.
" 네 나이가 올해로 몇이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바로 조선어로 대답했다.
" 스물셋, 아니 조선 나이로 스물다섯입니다."
" 그래, 딱 또래야."
" 예?"
" 조선에서 내 조카가 올 것이다."
성종희가 한 번 더 손짓해 장하오에게서 서류철을 받아 가고, 서류를 읽으며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 얼마 전 내 동생 녀석이 죽고는 홀로 남았지."
"......"
" 멍청한 놈이 목을 매 자살했다더구나."
"... 자살이요?"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떵떵거리는 공작 집안에서 자살이라니, 참 배가 불렀구나. 하오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 그래, 어릴 적부터 심약하긴 했다. 내 조카 놈도 그 기질을 이어받았는지 제 어미가 죽고 나서부터는 그 충격에 시름시름 앓아 집안에만 처박혀 있었다 하더구나. 이곳에서 내가 돌보며 일을 가르칠 생각이다. 그 아이가 이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네가 돕거라."
" 예, 알겠습니다."
잡일도 모자라 이제는 철부지 도련님의 뒤치다꺼리라니. 답지 않게 꺼려졌다. 반항심 같은 걸까? 가슴 속 한구석이 움찔거렸으나, 하루에 한 끼도 먹지 못하고 잘 곳도 없어 추위에 떨어야 했던 짧은 날들을 회상하고는 삐죽거리려던 입술을 빠르게 묻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보고를 시작했다.
만철 본부가 있는 다롄은 해안 도시였다. 황해와 맞닿아 있어 아래로는 바닷길이 열려 있었고 위로는 중국 대륙과 러시아와 바로 이어져 있었다. 만철의 주 철도는 본부가 있는 다롄에서 시작해 신징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신징은 곧 하얼빈, 러시아로 향하는 철도와 이어졌다. 만철의 주 간선 중간중간에는 길고 짧은 노선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중 펑톈과 조선의 신의주를 잇는 노선은 주 간선 다음으로 손꼽히는 주요 노선이었다.
성종희의 조카, 성한빈이 이 노선을 따라 만주 땅을 밟은 것은 유월, 초여름이었다. 매미 울음소리가 여름을 알릴 무렵, 하오는 성종희의 로열 다임러 1918 년식 캐달락 리무진을 몰고 다롄역으로 향했다. 다롄역은 성종희의 저택에서 차로 약 25 분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뒷자리에 앉은 성종희는 긴장이라도 되는지 다롄역을 향하는 내내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다리를 떨었다. 열차가 방금 도착한 탓에 역 주변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성중희는 주머니에 고이 접어두었던 사진을 꺼냈다. 흑백 사진 속엔 한 청년이 약간은 어색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 이 얼굴을 찾거라."
사진을 받아 든 장하오는 남자의 얼굴을 골몰히 바라보며 차를 나섰다. 다롄 사람들은 역내로 들어서는 장하오를 보고는 곁눈질하며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마치 벌레 대하듯 하는 그들의 태도에 반사적으로 살짝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그저 한숨을 한번 내쉬고 아무렇지 않게 갈라진 홍해를 걷는 것마냥 거침없이 발을 뗐다.
복잡한 역내에서 어렵지 않게 움직일 수 있었으나, 움직이는 것과 사람을 찾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사진 속 남자는 찾을 수 없었다. 북적거리던 사람들이 빠지고 주변이 조금씩 한산해질 때까지 역 안을 서성거렸으나 하오는 사진 속 그를 마주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배회하던 하오의 어깨에 낯선 손길이 닿았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놀란 하오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며 어깨를 잡은 손을 내쳤다.
" 어이쿠."
남자는 과장된 몸짓으로 두 손을 들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 뭐요?]
[ 에... 그게 그러니까...]
그는 서툰 일본어로 말을 고르다가 하오의 손에 들린 사진을 가리켰다.
[ 사진! 그쪽이 내 사진을 들고 있습니다.]
남자의 얼굴과 사진 속 얼굴을 번갈아 본 하오는 그제야 그가 흑백사진 속, 성한빈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단번에 알아채지 못한 이유는 사진이 흑백인 탓도 있었지만, 그 인물을 다 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심약한 아이라는 성종희의 평대로 약간 수척해 보이는 사진과 달리, 직접 마주한 성한빈은 마르긴 했으나 어깨가 넓고 키도 저만큼이나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주한 그의 눈빛은 그동안 장하오가 상상했던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별이라도 박은 듯, 이제껏 본 그 어느 눈보다 생기있게 반짝이고 있었다.
"... 공작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엇!"
하오는 허리를 접어 크게 인사하고 곧장 몸을 돌려 역 밖으로 향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는 하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성한빈이란 인간은, 하오가 생각해 온 그런 종류의 심약한 도련님이 아닌 것 같았다. 밧줄 하나를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삶은 그런 것들을 경계하게 만들고, 틀에 박히고 안정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하오의 심장이 긴장감에 살짝 두근거린다. 부디 이 도련님이 ' 도련님다운' 인간이기를. 하오는 그저 그렇게 바랐다.
" 조선인이십니까? 만주 땅에 조선인들이 많이 산다고는 들었는데 도착하자마자 바로 마주치다니! 반갑습니다!"
"......"
한빈은 그런 하오의 심중은 모르고 들뜬 목소리로 말을 붙여왔다. 입가엔 빙글빙글 미소를 띠고 치대는 꼴이 마치 어린 강아지 같았다. 하오는 대꾸 없이 계속 걸어가 성종희가 기다리고 있는 차 앞에 멈추어 섰다. 성종희와 성한빈은 서로를 발견하고는 환히 미소 지으며 얼싸안았다. 조용히 운전석에 오른 장하오는 닮은 듯, 그러나 결코 같아 보이지는 않는 두 남자의 포옹을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숙부님!"
" 내 너를 아주 어릴 때 보고 이제야 만나는구나. 그래, 예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느냐. 어서 집으로 가자꾸나."
성종희와 성한빈은 뒷좌석에 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식도, 아내도 없는 와중에 후계자가 생겨 기쁜 것일까? 성종희는 과하게 나불거렸다.
" 저택은 한양에 있는 집보다 클 것이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고급스러운 집이지. 네 마음에도 들 것이다."
" 기대됩니다."
" 너 동물을 좋아했지? 저택에도 동물들이 많단다. 마침 경비견이 새끼를..."
하오는 후방거울 넘어, 샐쭉 웃으며 성종희의 말을 경청하는 성한빈을 훔쳐보았다. 다시 보아도 기분 나쁠 정도로 말간 얼굴이었다. 저를 바라보는 하오의 시선을 느꼈는지, 한빈 역시 후방거울 속 하오를 바라보았다. 두 눈이 부딪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시선이 엇갈렸다. 만철의 위용과 일제의 위대함, 그리고 그가 물려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성종희의 목소리만 가득한 차 안에서, 하오와 한빈, 그들은 후방거울 속 상대를 번갈아 주시했다.
二
줄
하얀 손이 빳빳한 지푸라기를 만지작거린다. 며칠, 몇 주에 걸쳐 정성스레 비벼 풀어진 그것은 곧 본래의 빳빳함을 잃고 거칠거칠한 실로 변했다. 하얀 손은 서툰 손길로 새끼를 꼰다. 손끝이 갈라지고 거스러미가 벗겨져 피딱지가 앉아도 꾸준히 새끼를 꼬았다. 끝내 그것은 기다란 밧줄이 된다. 하얀 손이 밧줄의 한쪽 끝부분을 잡고 매듭을 만들어낸다. 동물을 사냥할 때 쓰는 올가미처럼 당기면 빠르게 폭이 좁아져 사냥감을 조르는 매듭이었다.
여긴 어디지? 또 언제지? 하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제 처지를 셈해보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조용히 다가온 올가미가 목에 걸렸다. 화들짝 놀라 목에 씐 밧줄을 붙잡고 몸부림쳤지만, 반대쪽 끝부분을 잡은 하얀 손은 결코 힘을 풀지 않았다. 매듭이 빠르게, 단단히 조여지며 목을 끊을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호흡의 부재에 발끝에 힘이 들어가고, 입 밖으로는 비명도 되지 못한 추한 울음소리만이 흘러나왔다.
" 헉!"
짧은 비명과 함께 눈을 떴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잠시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던 하오는 이곳이 곧 제 방 안임을 깨달았다. 꿈이었구나. 그러나 목을 끊을 듯 조르던 밧줄의 감촉이 생생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옷을 벗어 맨몸을 적신 땀을 닦아내고 숨을 가다듬었다. 꿈을 자주 꾸는 편이 아닌데, 하필 오랜만에 꾼 꿈이 불길한 악몽이라 곧바로 다시 눈을 감기 힘들었다.
갈증도 심한 탓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몽 중에 쥐가 났는지 바닥을 짚은 다리에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 하오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절뚝거리며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저택에서 하오의 방은 2 층 손님방 중 하나였다. 본래 다른 하인들과 같이 별채의 허름한 쪽방에서 지냈으나 조사부의 정식 직원이 된 후엔 나름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오늘 만난 도련님 탓일까.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신경이 불필요하게 곤두섰나 보다. 문을 닫은 하오는 맞은편 방문을 바라보았다. 성한빈의 방문은 아무렇지 않게 닫혀있었다. 여독에 지쳐 제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고 잠에 푹 빠져있는 듯했다. 조심스레 어둠을 더듬어 계단 난간을 붙잡고 1 층으로 내려갔다. 부엌에 이르러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정신을 차렸다. 지금이 몇 시지? 다시 잠에 드는 것보다 출근 준비를 하는 게 나을까?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괘종시계를 찾아 눈을 찌푸려 희미한 빛을 모았다.
[ 거기 누구십니까?]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희미한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 하오 형님?"
"......"
친근한 척 저를 형님이라 부르는 목소리. 하오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익숙하게 가라앉은 낯을 취했다.
"... 목이 말라 잠시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제 잠꼬대 소리에 깨신 겁니까?"
" 아니요. 저도 목이 말라서요. 헌데 옷은 왜... 벗고 계십니까?"
하오는 뒤늦게 낯을 붉히고 제 몸을 가렸다. 빨갛게 물들었을 얼굴과 제 맨몸을 가려주는 어둠이 고마웠다.
" 하하, 더위를 많이 타시나 보네요. 저도 그런데."
제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그가 두려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제 일상을 뒤흔들 것이라는 얄팍한 불길함. 단지 그것만으로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다. 공작가의 도련님 주제에 제게 형님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이질적이었다. 장하오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한빈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 하오 형님."
그러나 낮게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등을 돌렸다. 어둠 속에 서로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아마 불이 켜져 있었으면 그의 눈썹까지 또렷이 보일 정도로.
" 저는 형님과 잘 지내고 싶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이방인이니까요. 제게 많은 것들을 알려주세요."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오는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삐걱 고개를 주억거리고 천천히, 다시 계단을 올랐다.
" 앞으로 네가 살아갈 곳이니, 우선은 천천히 다롄을 둘러보거라."
첫 아침 식사 자리였다. 한빈과의 첫 아침이 아니라, 말 그대로 처음. 이 집에 와서 아침을, 그것도 식탁에 앉아 먹은 것이 처음이었다. 성종희는 하오의 조사부 업무를 당분간 면제해 주며, 한빈의 적응을 도우라 명했다. 명백히 포상이라고 볼 수 있는 유급휴가였지만, 하오는 기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낯을 가리는 성격에 꺼림칙한 한빈과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조사부에 틀어박혀 이런저런 문서들을 훔쳐보는 것이 더 나았으니까. 그러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오는 마음 깊은 곳의 가식 한 톨까지 모두 긁어내 그러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하오 형님이 많이 도와주십시오."
말간 얼굴로 저를 바라보며 형님이라 부르는 저 도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하오는 아직 감을 잡지 못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시내로 나갔다. 만철의 시작점이자 황해와 맞닿은 무역도시답게 다롄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롄의 풍경은 같은 일제의 식민지인 조선의 한양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는데, 특히 이국적인 러시아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많아 한빈은 거리를 걸으면서 주변 건물들에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 저기서부터는 러시아 거리입니다."
" 노서아요? 이곳에 노서아인들도 많이 삽니까?"
" 조금 있습니다. 다롄은 철도 길로 러시아와 이어지니까요. 그리고 한때 이곳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요. 저 거리의 건물들은 대부분 그 시기에 지어진 것입니다."
한빈은 러시아 거리를 구경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러시아 거리는 하오조차도 많이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한때 랴오둥반도를 집어삼켰다가 러일전쟁의 패배로 빼앗긴 그들은 당연하게도 일제 기관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한빈이 적응을 마치기 전엔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하오는 한빈을 커다란 원형광장 쪽으로 유도했다.
" 러시아 사람들은 저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 저희요?"
" 예, 뭐. 일러 전쟁 패배의 결과로 랴오둥 반도 전체를 토해냈으니까요. 감정이 좋지 않죠.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다른 곳부터 구경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바닷가는 어떠십니까?"
"... 글쎄요. 우선 사람들이 사는 곳이 보고 싶습니다."
하오는 한빈을 데리고 시장 거리로 들어섰다. 한빈은 시장의 입구 골목부터 빼곡히 늘어선 좌판에 시선을 빼앗겼다. 한빈의 일본어는 성종희보다 서툴었고, 만주어와 중국어는 사실상 벙어리였기 때문에 하오가 옆에 꼭 붙어 상인들과 한빈 사이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곧 한빈의 손에는 탕후루와 각종 꼬치구이, 태엽 장치로 움직이는 인형 등이 빼곡히 들렸다.
" 온 세상 모든 물건들이 이곳에 있는 듯합니다!"
" 이곳은 무역도시니까요. 시장 더 깊은 곳에는 미국에서 온 상단도 있습니다."
" 정말요? 그쪽도 구경하고 싶습니다!"
그때, 시장 맞은편에서 웅성거림이 일며 사람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한빈이 까치발을 들어 바라본 곳엔 황토색 45 식 일제 군복을 입은 열 명 남짓의 군인들이 사람들을 헤치며 시장을 거닐고 있었다. 그들은 일부러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려는 듯이,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윽박지르거나 무작위로 사람들을 잡아 검문을 하기도 했다.
" 군인들이..."
" 작년에 조선에서 큰 소란이 있었다지요?"
"...3·1 운동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예. 그 폭동이요. 그 이후로 검문이 강화되었지요. 실제로 그 폭동에 영향을 받아 이곳 다롄에서도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금방 진압되었지만요."
1919 년 3 월 1 일의 사건은 조선 땅을 넘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 민중들의 자발적인 저항은 부당한 탄압을 당하는 다양한 민족, 국가에 영감을 주었다. 특히 같은 해 베이징시에서는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반제국주의 운동인 5·4 운동이 일어났는데, 학생부터 노동자까지 광범위한 계층이 참여했고, 중국 내 200 개의 도시로 번진 전례 없는 규모였기 때문에 일제는 중국 정부에 이를 항의하고 식민지들에 대한 엄혹한 통치를 강화했다.
"... 확실히 큰... 소란이었네요."
그 말을 듣던 한빈이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우연히도 멀리서 그런 한빈을 발견한 군인이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군중을 헤치고 한빈에게 다가왔다. 아마 저를 보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불순분자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 어이, 거기 너.]
[ 무슨 일이십니까]
거칠게 다가와 위협하는 군인을 하오가 막고 대신 대답했다. 앞을 가로막은 하오의 얼굴을 알아본 군인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 너는...]
[ 이분은 성 공작님의 조카이십니다. 어제 이곳에 처음 오셨지요.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지?]
군인은 잠시간 꼿꼿이 고개를 들고 있는 한빈과, 하오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바닥을 향해 침을 뱉고는 발길을 돌렸다.
"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돌아서 마주한 한빈은 약간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숙부님의 이름은 이곳에서도 힘이 있네요."
" 예, 만철의 고위직이시니까요. 하지만 너무 위험한 행동은 삼가주십시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시국이 좀 예민하여..."
" 하하."
시장을 나와서는 항만을 걸었다. 항구에는 무역선이 꽉 들어차 있었고, 주변에서는 온갖 언어들이 들려왔다. 개중에는 조선어도 있었다. 하오와 한빈은 그 장사판에서 한발치 떨어진 벤치에 앉아 바닷바람을 맞았다.
" 도련님, 제게 말을 높이실 필요 없습니다."
" 예?"
"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쓰이는 존대와 호칭은... 조선에서만 통용되는 것입니다. 저는 명백히 도련님의 아랫사람이니.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 아랫사람 아니신데요?"
"......"
" 하오 형님은 숙부님의 부하직원이지 제 부하직원이 아니시잖아요?"
" 그건..."
" 혹시 저 좀 고지식해 보이거나 권위적으로 보이나요? 저 완전 모던뽀이인데... 저희 집안 대대로 천주교도 믿어요! 그, 왜 온 세상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그거요."
또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와 대화를 나눌수록 그를 납득할 수 없어진다. 이 도련님은 정말 세상 물정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아니면, 타인을 당황시키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악취미라도 있는 걸까?
" 남들 시선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뭐, 여기서 조선어를 알만한 사람들은 적지 않나요? 저택에도 한두 분 정도만 계시던데... 저는 형님이라 부르는 게 편해요. 형님께서도 제게 말을 놓으셔도 됩니다!"
" 아니, 아닙니다."
" 그러고 보니 웃기지 않나요. 저희 집안사람들 다, 그러니까 숙부님도 천주교를 믿으세요. 숙부님 꼴에 그런 걸 믿다니 참."
"... 예?"
" 안 웃기신가?"
입가에 미소를 띈 한빈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하오는 좀처럼 그에 반응할 적당한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 저는, 어렸을 때 몸이 약해서 집 안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친구라는 걸 가져본 적도 없고, 우정을 나눠본 적이 없지요. 형님께는 귀찮은 뒤치다꺼리라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동년배인 형님과 이렇게 가까워질 기회가 생겨서 좋아요. 가능하다면 친우가 되고 싶구요."
"......"
" 안될까요?"
" 아니요!"
우정을 나누고 싶다고? 소박한 단어지만 하오는 결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우정, 그 개념을 배운 이후 좀처럼 곱씹어 본 적 없는 감정이다. 가슴 깊은 곳에 묻어놓고 잊은 줄 살았던 그 단어가 성한빈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열 손가락 손끝이 저릿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나도 어쩌면 외로웠었나?
"...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친우라. 어쩌면 그런 것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하오는 생각했다.
오후에는 도시 밖 벌판으로 나갔다. 새파란 하늘엔 붉게 타오르는 햇빛과 뭉게구름. 땅은 여름을 맞아 자라난 풀들로 무성했다. 하오는 옆자리에 한빈을 태우고 성종희의 캐달락 리무진을 몰았다. 한빈은 뒷자리를 놔두고 굳이 굳이 하오의 옆, 좁은 조수석에 앉겠다 떼를 썼다. 점점 거칠어지는 땅에 차가 덜컹거리고, 서로의 어깨가 맞닿을 때마다 하오는 긴장감에 몸을 굳히고 침을 꿀꺽이며 핸들 쥔 손에 땀이 나도록 힘을 주었지만, 조수석에 앉은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창에 기대 드넓은 벌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30 분 정도를 달려 낮은 언덕 위에 차를 멈췄다. 올라갈 때 완만했던 언덕은 막상 도착하니 바로 아래로 낮은 황야가 펼쳐져 있어 높은 절벽이 되었다. 한빈은 절벽 위에 서서 황야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태어나 쭉 한양에서만 살아왔던 그에게 만주의 광활한 벌판과 황야는 분명 이색적인 광경이었을 것이다. 잠시간 황야를 바라보던 한빈은 조금 떨어진 바위산을 향해 손을 모아 소리를 질렀다. 하오는 주머니에 손을 푹 찌르고 그런 한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저 산에 올라보신 적이 있습니까?"
돌아오는 메아리 없이 한참 동안 소리치던 한빈이 손가락으로 바위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 아니오. 울퉁불퉁한 데다가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바위산이라 아마 아무도 오르지 않을 겁니다."
" 그래도 보기엔 참 멋지네요."
바람이 불어 듬성듬성 하늘을 가리고 있던 뭉게구름이 빠르게 물러갔다. 하오는 차로 돌아가 뒷좌석에서 간단한 요깃거리가 담긴 바구니를 찾아 꺼냈다. 하오가 음식을 꺼내 식사를 차릴 때까지 한빈은 여전히 황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 무엇이 그리 신기하십니까."
" 산이 그림을 그려놨네요."
" 예?"
' 산이 그림을 그려놨다?' 하오는 한빈의 어깨너머, 그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산, 오직 울퉁불퉁한 산 하나가 우뚝 서서 태양에 달구어지고 있을 뿐이다. 저기에 그림이 있다는 게 무슨 뜻이지?
"... 그림이요?"
눈을 찌푸려 집중해 보았지만, 여전히 그곳에 그림이라 불릴만한 것은 없었다.
" 하하, 안 보이시나 보네요."
한빈이 뒤돌아 하오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곳에서 산 지 20 년이 넘었다. 그리고 이 절벽에 올라 저 돌산을 바라본 횟수는 아마 세 자릿수에 달할 것이다. 도대체 이 이상한 도련님이 저곳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다시 바람이 불고, 구름이 드리워지자 한빈은 천천히 자동차 방향으로 돌아갔다. 하오는 그 자리에 우뚝 서, 한빈이 음식을 들자고 부를 때까지 그 바위산을 바라보았다.
三
개
장하오의 삶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단어를 고르자면 그것은 ' 억압' 일 것이다. 그래, 억압. 억압받는 나라, 억압받는 땅에서 억압받는 민족으로 태어나 억압 속에 살아갔다. 그리고, 생의 어느 시점부터는 자기검열로 스스로를 억압해야만 했다. 이 시대 사람들 대부분은 저마다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지만, 그럼에도 하오는 제게 주어진 이 십자가의 무게만큼은 유독 버겁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저 도련님은?
마당 앞뜰에 누워 강아지와 놀며 까르르 웃고 있는 한빈을 바라보았다. 그는 더운 날씨 탓에 맨팔이 다 드러나는 민소매와 망측할 정도로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잔디 위를 뒹굴고 있었다. 한빈은 이 격변의 시기에, 그 어떤 그림자 아래에도 서 본 적 없다는 듯이, 온전하게 빛나고 있었다.
" 형님! 이 아이, 조선어를 알아듣나 봅니다! 손을 달라 하면 손을 주고 코를 달라 하면 코를 주네요!"
땀에 앞머리가 살짝 젖은 한빈이 하오를 향해 소리쳤다. 하오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부자연스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차우차우는 언제 돌변할지 모릅니다."
" 뒷마당을 지키는 개가 이 아이의 어미죠?"
" 예. 그렇습니다."
한빈이 다롄에 온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한빈은 천천히, 하지만 과감하게 하오가 쳐놓은 벽을 허물어갔다.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매번 애써 미적지근하게 반응하는 하오에도 한빈은 포기하지 않고 하오에게 치댔다.
정말 그가 원하는 것은 우정뿐일까? 하오는 그런 순수한 감정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그 좋은 머리를 아무리 굴려보아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한빈이 겪고 있다는 우정의 결핍. 그 감정이 사람을 얼마나 절박하게 만들길래 어떤 배경도,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천것인 자신에게 공들이게 만드는 것일까?
" 뒷마당의 개는 왜 늘 그렇게 사나운 건가요?"
" 애초에 투견으로 키워지던 개였다고 합니다. 공작님께서 최대한 사나운 개를 원하셨어요. 뒷마당에 누구라도 침입한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짖을 만한 맹견으로요. 그 사나움을 유지하기 위해 밥도 최대한 적게 주고 험하게 대하신다고 하더군요. 아마 목줄을 풀면 그 즉시 누구든 물어 죽이려 들걸요."
한빈은 강아지를 안아 들어 통통한 배에 입술을 한번 묻어주고는 풀밭에서 일어났다.
" 불쌍한 아이네요. 줄에 묶여서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건 앞뒤 가리지 않고 짖는 것밖에 못 하다니."
" 그렇죠. 하지만 뭐, 지금은 불쌍한 것들이 너무 많은 시대니까요. 이곳 사람들도 굳이 뒷마당의 개를 어여삐 여기지 않아요."
"... 하지만 우리는."
한빈의 옷에 묻은 풀과 흙을 털며 나지막히 말했다.
" 다른 존재들의 불행에 직면해야 할 책임이 있죠. 그렇지 않나요?"
"...... 네?"
옷 정리를 마친 한빈이 하오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아니, 하오의 뒤, 저택을 향해서. 하오는 그대로 등을 돌려 그를 스쳐 지나가려는 한빈에게 말했다.
"... 도련님은... 가끔 보면 조금 유별나세요."
"......"
한빈이 하오를 마주 보았다. 답지 않은 무표정으로.
" 형님은 무엇인가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 같구요."
"......"
그리고 바로 코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왔다.
" 우리는 편해지기 위해, 진실을 호도하곤 하죠."
"......"
"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고..."
"... 도련님?"
" 그렇게 하면 편하게 살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러면 놓치고 지나가는 것들이 생기죠."
"......"
" 어떤 것들은... 감정에 솔직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도 하니까요."
한빈은 때로 이렇게 알 수 없는 말들을 하곤 했다. 장하오의 속을 뒤집고, 머리를 뜨겁게 만드는 알 수 없는 말들을. 아니,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아 묻어둔 말들을.
" 조금 있으면 해가 지겠어요. 숙부님이 오시기 전에 씻어야겠네요."
한빈은 그렇게 말하고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한빈을 뒤쫓던 강아지는 한빈이 저택 안으로 사라지자, 강아지는 그제야 하오의 발치로 뛰어와 꼬리를 흔들었다.
저녁 식사는 대개 성종희가 퇴근하고 난 뒤 셋이 함께했다. 그날도 시작은 늘상 같았던 저녁 식사 자리였다.
" 한빈이 너도 쉴 만큼 쉬었으니 슬슬 일을 배워야지."
" 네?"
" 내일부터 조사부로 출근해라. 하오도 다시 출근하고."
" 예."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한빈은 당황한 눈치였다. 성종희 성격에 한 달이면 쉴 시간을 많이 준 것이다. 그가 이곳에 한빈을 데려온 이유는 예쁜 꽃이 아닌, 제 자리를 이어받을 어엿한 후계자로 키우려는 것이었으니 예견된 일이었다. 그 말이 꽤나 충격적이었는지, 한빈은 식사 내내 깨작거렸다. 잠에 들 시간이 되어 함께 2 층으로 올라가서도 어딘가 불편한 눈치였다.
" 걱정되십니까, 도련님?"
" 걱정이라기보다는 긴장... 아무래도 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 걱정 마세요. 누구나 처음엔 실수를 하기 마련이죠. 그리고 그 누구도 도련님을 나무라지 않을 것입니다."
"... 숙부님 때문에요?"
" 예. 그리고 저도 있으니까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저를 찾아주십시오."
이른 아침 일어난 하오는 잠에서 깨지 못해 해롱거리는 한빈을 깨우고 그를 화장실 안까지 밀어 넣었다. 아침잠이 많은 한빈은 눈을 뜨고 나선 한동안 칭얼거리곤 했는데, 평소 하오는 그런 한빈의 투정을 퍽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부터 그런 작은 즐거움은 오래 허락될 수 없었다. 오늘부터 한빈에겐 작은 흠조차 허락되지 않을 테니까. 있는 집 도련님들이 조사부의 낙하산으로 투입되는 일은 다반사였지만, 한빈은 근본적으로 조선인이었다. 대담하게도 뒤에서는 성종회조차 씹고 뜯는 콧대 높은 일본 도련님들이 한빈을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대놓고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보이지 않는 텃세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오늘부터 하오는 한빈의 방패로써 충실히 기능해야 했다. 아마 그것을 위해 성종희도 하오를 한빈 옆에 붙여둔 것이겠지. 그리고 한 달간의 시간을 거치면서, 하오의 마음은 이 도련님을 진심으로 보살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첫날은 하오의 출근 시간에 맞춰 한빈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평소라면 약 20 분 정도 거리를 걸어 출근했겠지만 오늘부터는 한빈을 위해 준비된 차가 있었다. 하오는 운전석에, 한빈은 조수석에 앉았다. 앞좌석이 미어터질 만큼 좁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도착한 하오는 먼저 한빈에게 조사부 건물을 구경시켜 주었다. 고즈넉한 서양식 석재건물 앞의 커다란 앞뜰부터 각층의 주요 방들을 둘러보고 문서들이 난잡하게 쌓여있는 조사부 사무실, 빈자리에 데려다주었다. 한빈의 자리는 하오의 자리에서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으로, 고개를 쭉 빼면 마주 볼 수 있는 거리였다. 제 자리에 앉은 하오는 그렇게 한빈을 향해 웃어주고는 휴가 전 매일 하던 업무 정리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출근한 탓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제 업무는 당연히 일보의 전진 없이 밀려있으며 다른 이들의 업무 역시 중간중간 하오 몫으로 미뤄졌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하오는 중간중간 고개를 빼 들어 한빈의 동글동글한 머리를 바라보곤 했는데,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불가항력적으로 작은 웃음이 터졌다. 뭔가... 기분이 몽글몽글했다. 한빈과 한 직장에 근무하게 되었다는 것이 예상한 것보다 설렜다.
한빈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문서를 보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답지 않으면서도 귀엽게 느껴졌다. 간신히 짬을 낸 하오가 한빈의 등 뒤로 다가가 살며시 어깨에 손을 올렸다.
" 도련님, 피곤하지 않으세요?"
한빈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한빈은 깜짝 놀라 파드득 몸을 떨며 하오에게 익숙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 아, 형님. 괜찮아요."
그래, 한빈은 잘 적응할 것이다. 하오는 한빈의 어깨를 살짝 주무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빈이 미간을 찌푸렸던 이유를 알아냈다. 첫날부터 꽤나 어려운 문서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말살정책 기획서라니.
" 오늘은 나와 퇴근하자꾸나."
성종희는 한빈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한빈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오는 한빈의 차를 끌고 한 발짝 뒤에서 그들의 차를 뒤따랐다. 퇴근 전 마주한 한빈의 표정은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괜찮은지 물어보아도 그는 그저 오랜만에 머리를 써 조금 피곤할 뿐이라며 손을 저었다. 집에 도착한 한빈은 피곤하다며 오늘은 먼저 잠에 들겠다 말하고 저녁도 들지 않은 채 2 층으로 올라갔다. 성종희는 제가 너무 조급했던 모양이라며 이번 주는 한빈에게 휴가를 주겠다 말했다. 그는 하오에게도 한빈을 돌보라며 다시 짧은 휴가를 내주었다.
다음날부터 하오는 한빈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제가 재밌게 본 책, 한빈이 좋아하는 간식들, 앞마당의 강아지까지 데려와 한빈의 침대 위에 올려놓고 함께 시간을 보냈으나, 한빈은 힘없이 웃어 보이기만 할 뿐 기운 없이 누워만 있었다. 한 달간의 기운찼던 도련님은 어디로 갔는지, 하오는 기운 없는 한빈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심약한 아이라던 성종희의 평대로, 어쩌면 이게 그의 본모습인 걸까? 혹시 불치병 같은 것을 숨기고 애써 해맑은 척을 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빈은 대부분의 식사도 거르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하오는 전전긍긍, 저러다 무슨 일이 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휴가의 끝자락인 토요일, 하오는 한빈의 방문을 열고는 깜짝 놀랐다. 한빈은 일찌감치 일어나 간단한 체조를 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 도련님! 몸이 좀 괜찮아지신 겁니까?"
" 네, 형님. 말끔히 나은 것 같습니다."
"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한빈은 다시 그 한 달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했다. 복스럽게 아침을 먹고 마당으로 나와 강아지와 놀고... 한순간에 바뀐 모습이 낯설게도 느껴졌지만, 하오는 그저 좋았다. 점심시간이 되고, 한빈이 건넨 잔에 담긴 주스를 마실 때까지만 해도.
" 그동안 고마웠어요. 형님."
" 네?"
그 말을 끝으로 하오의 시선이 흐릿하게 흩어졌다. 주스가 담긴 잔이 떨어졌다. 쨍그랑. 잔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하오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四
그림자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눈을 떴다. 성종회의 차 뒷좌석이었다. 하오는 손목과 발목, 상박이 단단한 밧줄에 묶인 채 차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좀처럼 가늠할 수 없었다. 왜? 도대체 나에게 왜?
운전을 하고 있는 이는 성한빈일까? 아니, 성한빈이 운전을 할 수 있을 리 없어. ... 아닌가? 확신할 수는 없다... 장하오가 성한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삶의 기록 중 한 달 남짓에 불과한 작은 조각이니까. 하지만 장하오가 아는 성한빈은 도저히 이런 짓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생각을 재빨리 이을 수 없었다. 그럴 리 없다며 배신감에 몸부림치며 바닥에 머리를 찧는 사이, 어느새 차가 멈추었다.
" 정신을 차리셨네요, 형님."
" 도련님?"
불행하게도 열린 문밖으로 보이는 이는 한빈이었다. 태양과 황야 사이, 절벽 위에 선 성한빈.
" 생각보다 빨리 깨어나셨네요.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으니 오히려 좋은가?"
"... 왜..."
" 아침마다 이곳을 지나는 약초꾼들이 있다지요? 그때까지만 좀 참으세요. 여름이라 다행이네요."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도련님!"
" 애초부터 이럴 생각이었어요. 사실 처음 계획으론 도착한 바로 그날 밤, 일을 치를 작정이었는데..."
"......"
" 하필이면 형님이 궁금했지 뭐예요. 아닌가? 그건 그냥 핑계였었나?"
" 무슨..."
" 제가 더 살고 싶었나 봐요."
한빈은 하오를 단단히 묶은 밧줄을 잡고 차에서 끌어 내렸다.
" 도련님 장난... 치시는 거죠? 왜... 저는 이해가 잘..."
" 원죄라는 말을 아세요?"
" 네?"
당황해 횡설수설하는 하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하오의 몸을 질질 끌며 말을 이어갔다.
" 아주 먼 옛날에, 아담과 이브라는 인간이 살았대요."
"......"
" 그들은 신이 직접 만든 인간들로, 에덴동산이라는 천국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갔죠. 평화로운 곳에서 분에 넘치는 삶을 살아가던 어느 날, 뱀 한 마리가 그들에게 말을 걸어왔어요."
하오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단순 종교적 교리나 전설에서 그치지 않고 서역의 윤리관과 철학의 시작점이 되는 창조신화.
" 사악한 뱀의 꼬임에 넘어간 그들은 신이 눈길 주지 말라 그토록 강조한 선악과를 따먹게 돼요. 그리고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을 얻게 되죠."
"... 그게 지금 하시려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예요. 도련님. 일단 이것부터 풀고 말해주세요."
" 신이란 존재가 그리 자비롭진 않은 모양이에요. 신은 크게 노여워하며 그들을 자신의 천국에서 내쫓아 버려요. 쫓겨난 그들은 이 땅에서 자손을 퍼뜨리며 살아가게 되죠. 서양인들의 창조 신화에요."
"......"
" 이 이야기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뭔지 알아요?"
" 도련님..."
" 그들의 자손들 역시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유전 받게 된다는 거예요."
"......"
" 소름 돋지 않아요? 태어나는 순간 죄를 물려받는다는 거 말예요. 부모의 죄를, 자식이."
"......"
장하오는 이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만 같았다. 제게 이러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만큼은 알 수 있었다.
" 어렸을 땐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냥 집이 부유해서 좋았고, 맛있는 것들을 먹고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어서 좋았지요."
"......"
" 스러져가는 사람들의 죽음과 비명은 무가치한 것, 쓸모없는 몸부림이라 생각했어요. 저는 편했으니까요. 저는... 그 어떤 고통도 겪지 않았으니까요."
바위산이 보이는 절벽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한빈은 걸음을 멈췄다.
" 어머니의 죽음에 아버지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요."
"... 네?"
" 어머니가 몰래 독립운동을 도왔다고 하더군요. 그걸 안 아버지가... 일제에 들키기 전에 미리 손을 써서 어머니를 사고사로 위장시켰구요."
"......"
" 고통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게 되더군요."
' 몸이 약해 집안에만 틀어박혀 살던 아이다. 얼마 전 내 동생 녀석이 죽고는 홀로 남았지. 멍청한 놈이 목을 메 자살을 했다더구나.'
" 뒤늦은 깨달음의 대가는 더욱더 쓰라린 후회. 그리고 원죄에 대한 죄책감."
" 도련님, 설마."
" 저는 제 남은 원죄를 속죄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아아, 그랬구나. 결국 당신에게도 나는 목적을 위한 수단, 장기 말에 불과했어.
저녁 8 시. 여름의 해가 뒤늦게 떨어져 어둑해진 하늘. 성종희는 집으로 돌아왔다. 하인들이 묵는 별채를 지나 커다란 마당, 잘 다듬어진 정원을 걸어 본채 문을 열었다. 평소와 달리 집사나 식모, 저녁에 일을 하는 하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저택은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으나 어딘가 서늘했다. 저를 마중 나온 하인이 없어 성종희는 외투도 벗지 못한 채 가만히 현관 앞에 서 있었다.
" 숙부님 오셨어요?"
" 한빈이 있었구나."
" 그럼요. 방금 돌아왔습니다."
" 다른 이들은 어디에 있니?"
" 다들 피곤하다고 하셔서 일찍 별채로 보냈습니다. 식사는 준비하고 가셨으니 어서 드시죠."
의아하다 생각했지만, 관성적으로 한빈을 뒤따랐다. 부엌 문턱에 다다라서야 성종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식탁 위엔 점심즈음에 차려졌을 식사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리고 한빈은 비스듬히 부엌 문턱에 서서 무표정한 낯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이.
"... 이상하구나 한빈아."
"......"
" 숨기는 기색도 없고. 원하는 게 뭐니?"
"... 원하는 거라."
한빈은 천천히 등 뒤, 허리춤에 꽂아놓은 권총을 빼어 들었다.
" 말하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 너..."
누군가 없는 건가? 장하오, 장하오는 어디에 있지? 성종희는 빠르게 눈을 움직이며 두 손을 들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 도망가시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 갑자기 왜 이러는 게냐."
"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요."
" 왜 이런 멍청한 짓을...! 재산이냐? 어리석은 것, 내 재산은 어차피 다 네 것이다. 난 너를 제외하면 물려줄 사람도...!"
" 단죄."
" 뭐?"
" 이건 내 원죄에 대한 단죄에요. 숙부님은 이런 상황이 닥쳐도 곧바로 생각나는 게 돈뿐인가 봐요. 숙부님이 죽어 마땅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나요?"
"... 설마 너도 독립운동 타령을 하는 게냐. 뭘 잘 못 먹은 게로구나!"
" 독립운동도 좋죠. 하지만 속죄라는 것은... 더 높은 가치의 행위에요. 내 손으로 끝내야 완성된다는 점에서."
" 어리석은 것...! 넌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어. 나는 자식도 없고 혈육이라곤 너 하나 있다! 내 모든 것은 너의 미래를 위한 준비야. 나의 땅, 나의 재산, 나의 권력! 얄팍한 민족주의에 휩쓸려 비이성적인 선택을 하려는 게냐?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총을 내려놓아라. 모두 없던 일로 생각하마."
" 숙부님의 땅, 숙부님의 재산, 숙부님의 권력중에... 숙부님 것이 어디에 있죠? 저희 가문이 오랫동안 쌓아온 것들은 전부 다른 이들을 착취해 쌓아온 것들뿐이에요. 그리고 숙부님 세대엔 그 기회주의적 비열함이 결국 선을 넘어버렸죠."
뒷걸음질 치던 성종희의 등이 벽에 닿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성종희는 벌게진 얼굴로 눈알이 튀어나올 듯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 미친놈! 정신 차리고 생각해 봐라! 그게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느냐? 우리 가문이 이룩한 모든 것은 너와 네 자식들, 우리 가문 미래의 핏줄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국가와 민족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핏줄이야! 바람 불면 방향을 바꿀 이념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다! 너는 네 자식에게 구질구질한 미래를 물려줄 거냐?"
" 숙부님."
"?"
" 그러니까요."
"... 뭐가."
" 그러니까... 저는 숙부님이 그토록 내세우시는 재산 같은 건 하나도 필요 없다는 거예요."
방아쇠에 올려진 한빈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五
구원자
"... 그래서요. 이건 뭡니까? 저도 그냥 그 저택에서 죽이시면 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로 일제의 부역자인데. 왜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세요."
" 말씀드렸잖아요. 형님 때문에 그걸 망설였다구요."
" 하..."
" 우리 처지가 참 닮아 있지 않나요?"
"......"
하오는 체념한 듯 똑바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곱절로 잔인한 시대예요."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 어쩌면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만났더라면 우리는 정말로 마음을 나눌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 너."
" 이 생각을 매일 밤, 배게 아래 총을 만지작거리면서도 떨쳐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렇게나 오래 걸린 거죠."
여기까지 다다라서 한다는 말이 투박한 고백이었다. 장하오는 성한빈이 원망스러웠다. 모든 걸 가지고서도 그 모든 걸 내팽개치는 저 무도함이, 저 올곧은 신념이 끔찍했다. 그리고... 비로소 이제야 감정을 마주한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사실 다 알고 있었다. 그것이 새어 나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파도가 될 것 같아 두려웠을 뿐.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릴 때마다, 손끝이 아릴 때마다, 그것을 한낱 불편함으로 치부하고 땅을 팠다. 더 깊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 그 감정들을 묻고 나왔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그것은 하오의 몸에 묻어버렸다. 떼어낼 수도, 도망칠 수도 없게.
" 멍청아! 그러면... 그냥 모른 척 살아가면 안 돼? 너는 모든 걸 가졌어. 넘쳐나는 재산과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권력, 든든한 뒷배, 그리고... 이젠 네 억압을 해소시켜 줄 수단까지. 모든 걸 갖췄잖아! 그냥... 그냥 외면하고 살아가면 안 되는 거야?"
"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할 만큼, 흔들린 것도 사실이고."
한빈 역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 조사부에 가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죠.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곧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나겠구나. 더 이상 내 피에 죄가 섞이는 건 두고 볼 순 없어."
"......"
" 그래도 좋았어요. 살면서 마음이 이어질 사람은 없을 줄 알았거든요."
한빈이 다시 하오를 내려다보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슬픈 눈은 닮아있었다.
"... 어떻게 알았어?"
"......"
" 그러니까 네 말대로면 우린..."
" 붉어지는 귀, 떨리는 손끝, 더운 숨과 흔들리는 시선."
" 넌..."
" 그걸 눈치 못 채면... 바보죠."
온몸을 흠뻑 적신 그것은 숨겨지지도 않고.
" 그리고... 형님도 알고 있었잖아요."
나 또한 알고 있었지.
" 나 역시 형님을 원하고 있었다는 걸."
" 성한빈!!!"
총구가 불을 뿜기 직전, 집안으로 장하오가 들이닥쳤다. 파드득 놀라 토끼 눈이 된 한빈의 손가락이 멈췄다.
"... 형님?"
" 하오야!"
성종희와 성한빈, 두 사람의 고개가 장하오를 향해 돌아갔다.
" 도련님, 진정하세요."
하오의 등장에 한빈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온몸이 생채기와 핏자국이 묻은 해진 옷. 그는 뛰어왔는지 땀 범벅이었다.
"... 어떻게 밧줄을 푸셨네요."
" 도련님, 이야기를 해야 해요."
" 이미 제 이야기는 끝났어요. 오직 속죄만이 남았어요. 저 사람은 여기서 제 손에 죽어야만 해요."
" 미친놈!!!"
하오가 발끈하는 성중회의 앞을 가로막고 천천히 한빈에게 다가갔다.
" 저를... 생각해 주실 순 없으세요?"
"......"
물기 어린 하오의 눈에 잠시 시선이 팔린 사이, 성종희가 쏜살같이 달렸다. 그는 꽁무니에 불이 붙은 듯, 히이익 거리는 볼품없는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달려 집 밖으로 나갔다.
" 이런!"
그 순간 당황한 한빈의 손에서 하오가 권총을 뺏어 들었다. 한빈은 엉거주춤하다가 하오의 손에 들린 권총을 빼앗는 것은 포기하고 성종희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한빈이 먼 거리를 달릴 필요는 없었다. 성종희는 마당에 있었다. 정확히는 쓰러져 있었다.
" 살려줘! 으아악!!"
성종희는 커다란 개에게 다리를 물린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뒷마당에 묶여있던 사나운 경비견이었다. 굶주림과 학대로 미쳐버린 개는 그동안의 분노와 억울함을 모두 풀겠다는 듯, 성종희의 다리를 물고 거칠게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성종희의 비명소리에 별채에서 쉬고 있던 하인들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살갗이 벗겨지고 뼈가 보일 정도로 덜렁거리는 다리로 몸부림치는 피투성이 성종희를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그 광경이 너무도 끔찍해 차마 다가가지 못하던 하인들은 성종회가 악에 받쳐 연신 다그치자 그제서야 쭈뼛거리며 몽둥이와 빗자루를 들었다.
탕!
그러나 주춤거리며 다가가던 하인들의 발걸음이 무색하게, 고통에 몸부림치던 성종희의 이마 한가운데에 총알이 관통했다. 하인들과 한빈,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총소리가 들려온 저택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총을 든 장하오가 서 있었다.
"... 왜..."
성종희가 죽은 것을 확인한 개는 축 처진 몸뚱아리를 몇 번 더 흔들더니 시체를 내팽개치고 하인들을 향해 돌진했다. 하인들은 피투성이가 된 개에게서 혼비백산 도망쳐 저마다 뿔뿔이 흩어졌다. 그 광경을 뒤로, 얼이 빠진 한빈은 멍하니 하오를 바라보았다.
" 잘 들으십시오. 공작은 제가 죽인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렇고, 모든 하인들이 봤으니 증거도, 증인도 충분하지요. 도련님께서는 그저 헌병들에게 '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장하오가 그랬다' 는 말만 하시면 됩니다."
"......"
" 이 저택과 공작의 재산, 모든 것은 이제 도련님의 것입니다. 이 재력을 이용해 뭐든 하세요. 바라시던 독립운동을 해서... 마저 속죄를 하시던지, 아니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여행을 즐기시던지..."
이 상황이 있는 그대로 이해되지 않는지, 한빈은 기쁨도 슬픔도, 그 어떤 표정도 담기지 않은 멍한 표정으로 하오를 바라보았다.
"... 이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어요."
" 저도요."
하오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 내가...! 내가 죽였어야..."
" 괜찮아요. 괜찮아..."
하오가 한빈을 안고 천천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히끅거리며 작게 떠는 몸을 느끼며 진실로 미소 지었다. 비로소 하오의 가슴이 사랑으로 충만했다. 영영 박제되어 있을 줄로만 알았던 사랑이란 감정이 생동감 있게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개가 짖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오는 한빈의 어깨를 천천히 쓸며 몸을 떨어뜨렸다. 못나게 구겨진, 눈물로 젖은 얼굴. 찰흙 같은 그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등을 돌아 걸었다.
마을 밖을 향해, 정처 없이 걸었다. 이게 내 끝이구나. 나답지 않은 결말이야. 나는 이런 멍청한 선택을 하지 않을 줄 알았어.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줄 알았어. 그리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줄 알았지.
마지막을 어디로 정해야 할까. 아무래도 그곳이겠지. 하오의 머릿속에 그 벌판, 바위산이 보이는 절벽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끝내자. 뒤늦게 온몸에 통증이 느껴졌다. 밧줄을 풀기 위해 거친 돌바닥에 몸을 비비고 부딪힌 탓에 생긴 상처들이 쓰렸다. 몸부림 끝에 하오가 밧줄을 풀어냈을 때는 석양이 지고 있었다. 그곳을 떠나기 전, 해가 비추는 바위산을 바라보던 하오는 발견할 수 있었다. 한빈이 봤다던 그 그림을. 돌산의 그림자가 만든 그것은 입을 벌리고 짖고 있는 듯한 개의 모습이었다. 무언가를 쫓고 있는 듯하기도, 쫓기고 있는 듯하기도 했으며 제자리에 멈춰 경계하며 짖고 있는 듯하기도 했다. 자연의 우연이 만들어낸 그 그림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리는 없었다. 하오 역시 그 그림에서 의미를 발견할 순 없었다. 그러나 한빈은, 저 그림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했을까?
' 어떤 것들은... 감정에 솔직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도 하니까요.'
그 순간 그 말이 떠올랐다. 한빈을 만나야 했다. 그가 아까운 몸을 바쳐 짓지도 않은 죄를 속죄하기 전에, 제 손으로 그의 죄책감을 덜어주고 싶었다. 생애 처음으로 사랑을 확인받은 하오는 마음은 맹목적인 헌신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장하오는 그대로, 쉬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도착해서는 곧장 뒷마당에 묶여 있던 개의 밧줄을 풀었다.
' 다른 존재들의 불행에 직면해야 할 책임이 있죠. 그렇지 않나요?'
책임감일까, 죄책감일까. 그것도 아니면 단지 마지막까지 이기적이었던 걸까?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 하오는 사랑을 증명했고 조용히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헌병에 잡히기전 죽는 게 낫겠지. 끝을 생각하며 천천히 걷던 하오의 등 뒤에서 굉음이 들렸다. 뒤를 돌아본 하오는 탄식을 내뱉었다. 저택이 불타고 있었다. 새빨간 불길이 어둠을 뚫고 온 도시를 밝히고 있었다. 하오는 형언할 수 없는 절망감에 빠졌다. 다시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뭘 위해서 내 주인을 죽이고, 안락한 삶을 포기했는데. 성한빈. 너는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야. 넌 그저 누리기만 하면 되는 건데... 하오의 시야가 뿌옇게 번졌다. 작렬하는 불길과 눈물에 흐려진 시야 사이로 신기루가 일었다. 그 환영은 불꽃을 뚫고 달려오는 성한빈의 모습같았다.
"... 도련님?"
환영이 아니었다. 힘차게 달려와 하오의 앞에 멈춘 그는 곧바로 주먹으로 하오의 뺨을 후리며 제 실존을 증명했다.
" 이 개새끼야! 나만 이렇게 두고 나면, 내가 잘 먹고 잘 살겠냐!"
"....."
발갛게 부푼 뺨을 잡고 벙찐 하오가 한빈을 바라보았다.
" 도련님 같은 개 같은 호칭도 집어치워! 애초부터 여기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
" 아니, 이러시면 진짜로 죽을 수도 있어요... 도련님은 여기 계시는 게..."
" 입 닥치라고!"
한빈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 착각하지 마. 네가 나 대신 손에 피를 묻혔다고 내 인생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너한테 빚을 진 건 맞지만, 갚는 건 내 방식대로 할 거야! 이건 우리가 서로를 원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야. 그러니까, 난 네가 그딴 식으로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떠나는 꼴을 못 본다고!"
눈물투성이 두 얼굴 뒤로 불길은 점점 커져만 갔다. 재와 불티가 온 도시를 삼키며 바람에 날려 흩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 난잡한 군화 소리, 우지끈- 저 멀리서, 커다란 저택의 대들보가 무너지는 소리.
" 그러니까... 흐윽, 나는 널... 그리고 넌 날..."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하오가 한빈의 손을 잡았다. 두 손이 하나가 되었지만 덜덜, 우스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래,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 떨림의 이유가 오직 두려움만은 아니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하오는 맞잡은 손에 단단히 힘을 주고, 불꽃의 반대편으로 달렸다. 두려웠지만, 주저함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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