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만 취급합니다
독디
[해피엔딩만 취급합니다!] 는 삼류 비엘 로맨스 영화 제목이다.
부모없는 고아인 성유민(수)이 이름도 모를 아버지의 빚을 떠안고 자신을 쫓아오는 빚쟁이들을 피하며 살아오다, 어느 잘생긴 중국 부자의 눈에 들어 서로 사랑에 빠진다는... 그런 전형적인 신데렐라 풍 영화 이야기였다. 말 그대로 옛날 감성 그 자체인 영화. B급 인소감성을 제대로 버무린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다 그 영화에 나오는 공은 얼마나 잔악무도했는지. 마시는 물은 에비앙 뿐이고, 입는 옷은 무채색 옷일 뿐인 그에겐 행복이란 감정은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싸늘한 표정으로 성유민의 동태만 살필 뿐.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전부 귀찮은 방해물에 불과했다. 성유민을 향한 소유욕과 집착. 그것만이 그에게 전부였다. 엑스트라들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잔인했고, 그가 사랑하는 성유민한테도 사랑이 아닌 소유욕밖에 없는 남자. 그야말로 집착광공 그 자체. 이 영화는 집착광공과 미인수의 이야기였다.
딱, 그때 그 시절에 걸맞은 유치찬란한 영화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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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영화여야만 했다.
성한빈이 손톱을 물어뜯은 채 지금 자신의 눈앞에 놓인 상황을 바라봤다. 남들보다 두배는 작고, 딱 봐도 어려 보이는 가녀린 소년이 두 팔이 묶인 채로 흐느끼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이 안대로 가로막혀있었지만 모두가 그를 보며 알 수 있었다. 그가 엄청 아름답고 또 사람 마음을 동하게 만든다는 걸.
"제발 살려주세요...."
어쩜 목소리마저 저렇게 여리여리할 수 있을까.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성한빈은 본인이 한 일도 아닌데 괜히 양심에 찔렸다. 사실 알고 보면 내가 한 걸지도 모른다. 이 모든 상황이 성한빈 본인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 노후한 폐건물에 서 있는 것도, 검은색 정장을 입고 총을 주머니에 차고 있는 것들까지 전부 다.
"돈만 갚으면 풀어준다니까? 아가야... 왜 말을 안 들어-"
그중 깡패 한 명이 거만한 목소리로 흐느끼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냥 시간이라도 더 달라고 빌던지,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을 하던지... 아름다운 소년은 얼굴에만 스탯이 몰빵한 건지 아니면 그렇게 세팅이 된 건지 그저 고개만 가로저으며 눈물만 뚝뚝 흘러댈 뿐이었다. 답답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성한빈이 저기... 좀 봐주는 게 어때요? 라며 옆에 있는 다른 깡패에게 속삭였다. 물론 미쳤냐는 쌍욕이 돌아왔지만 말이다.
계속 눈물만 흘려대던 소년에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깡패 두목으로 보이는 남자가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전화를 거는지 말은 안 했지만 성한빈은 자동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이 아마 첫 번째 갈등 상황이었을 거다. 납치한 성유민을 짜잔- 하고 구해주는 흔해빠진 클리셰. 성한빈이 정장 주머니에 넣어둔 수첩을 꺼내 스토리의 타임라인을 읽어봤다. 어차피 깡패 중에서도 비중 없는 막내 역할이라서 그런지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별 시답잖은 통화가 끝나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그가 올게 뻔했다.
잔악무도하고 가차 없는 그 남자가.
다음의 일은 더 예측하기 쉬웠다. 아마 우리는 총을 겨누면서 악악대고 싸울 게 뻔했다. 물론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있겠지만 말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일 거고...
"....집 가고 싶어..."
암울한 미래를 이어가던 성한빈이 허공에 대고 답답한 한숨을 뱉어냈다. 분명 취준생이었던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현타감이 가득 차올라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제발 집에 보내줬으면 좋겠다. 따뜻했던 내 방이 그리웠다. 엄마가 해주던 따뜻한 밥 한 공기가 그리웠다. 지금이라도 이 모든 게 꿈이라고 하고 눈뜨면 모든 게 사라졌으면 좋겠다.
진짜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성한빈은 진심으로 엄마가 보고 싶었다.
해피엔딩만 취급합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을 설명하자면 한 달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대학을 졸업한 성한빈은 졸업식과 동시에 바로 취준생활을 시작했다. 취준하는 동안 양심 없이 엄마한테 빌붙어서 살 순 없었기에 먼저 성한빈은 과외 알바부터 시작했다. 어차피 취준이 중요했기에 길어봤자 6개월만 알바하고 때려치울 셈이었다. 원래 모든 졸업생이 다 그렇듯이 말이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낭랑 18세 여고생인 한가연을 과외하기 시작했다.
한가연은 착해 보이는 얼굴과 다르게 얼마나 인싸였는지 첫날부터 나한테 이런저런 얘기를 떠들어대기 일쑤였다. 자신은 한국대 연극영화과에 합격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래서 영화제에서 모든 상을 다 휩쓰는 게 꿈이란다. 유명한 배우들도 만나고 봉준호 감독도 만나서 악수하고 셀카도 찍고 싶다고 눈동자를 빛내며 마구 떠들어댔다. 딱 순수한 소녀처럼 말이다.
그래 그 얘기까지는 과외선생과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얘기니까 나도 좋게 넘어갔다. 처음부터 날 편하게 대해주니까 좋은 아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약간 말이 많긴 해도... 어차피 앞으로 6개월은 볼 텐데 친해지는 게 좋은 거라고 그녀의 말에 리액션도 잘해주고 연락처도 주고받았다. 그러다 보니 얘가 날 얼마나 신뢰하는 건지... 나중에는 본인이 비엘을 좋아하는 것도 알려주더라.
비...엘....? 그게 뭔데? 남자랑 남자끼리? 아... 소설? 그렇구나...
당황스러워서 그 순간엔 기계적으로 대답했음에도 한가연은 내가 꽤 개방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날 이후로도 몇 번을 나에게 비엘 얘기를 해대곤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 남자인데. 거기다 얘가 얼마나 노빠꾸였냐면,
'쌤은 진짜 비엘에 나올 것처럼 생겼어요. 완전 개존잘.'
'제가 나중에 비엘 영화 만들면 주연으로 나와주면 안 돼요?'
나한테 저런 말들까지 할 정도였으니 할 말 다 했다. 거기서 더 나아가선 만화책이든, 소설이든... 비엘에 관련된 책들을 들고 와선 읽어보라고 추천까지 해줬다.
이게 진짜 맞는 걸까? 진지하게 그 생각까지 들었을 때쯤. 어느 날엔 심할 정도로 비엘 얘기만 해대니 진도도 밀리고 나도 지치기도 해서 좀 뭐라고 했던 적이 있다. 처음으로 한가연을 혼냈던 거라서 솔직히 나도 쫄리긴 했다. 이것 때문에 주눅 들고 다시는 과외 안 한다고 하면 어쩌지? 그것 때문에 무서워서 잠도 설쳤는데... 오히려 한가연은 생각보다 쿨하고, 말을 잘 알아듣더라. 그날 뒤로 수업 시간에 비엘 얘기를 한 적은 일체 없었다.
'쌤 이거 옛날 거긴 한데 진짜 갓작이에요. 딱 한 번만 봐봐요. 네?'
물론 그게 비엘 얘기를 아예 안 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한가연이 어디서 구한 건지 비엘 영화 DVD를 구해와서는 내 가방에 쑤셔 넣었다. 나 이런 거 안 좋아한다니까? 성한빈이 억울하게 반박하며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려고 했지만 이것만은 꼭 봐달라는 그녀의 말에 저번에 혼낸 것도 있고... 그리고 좀 맞춰주는 게 뭐 대수일까 하고 그냥 못이기는 척 받고 왔다.
"....."
그렇게 밤에 구직사이트 한 번 훑어주고, 친구들이랑 카톡 좀 하다 보니 괜히 심심해져서 한가연에게 받은 영화를 한 번 찾아봤다. 장하오랑 성유민? 익숙한 이름과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 들어있었다. 장하오는 예능에 몇 번 나오기도 하고 중국에서 꽤 유명한 배우라고 해서 알고있었는데... 성유민은 이름도, 얼굴도 그냥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 거기다 DVD 발매일을 보니 5년 전 작품이었다. 장하오의 필모에 적힌 데뷔작보다 더 전이었다. 오류인가? 아니면 회사에서 일부러 숨긴 건가? 솔직히 장하오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장하오가 비엘 영화를 찍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뭐야 진짜 촌스러워."
처음부터 맨발의 가녀린 남자가 동네를 뛰어다니길래 성한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이런 촌스러운 전개가 다 있냐... 쫓아다니는 깡패들의 인상도 80년대 감성 그대로였다. 정장에 올백 머리. 그리고 어설픈 사투리와 팡파레 부는 듯한 괴상한 효과음까지 전부 다 C급 감성 제대로였다.
그렇게 한가연이랑 대화 가능한 정도까지만 보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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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계속 보다 보니 은근히 재밌더라.
분명 C급 감성은 맞는데... 왠지 영화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유치해 죽겠는데 괜히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고. 성유민이 도망칠 땐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고. 키스신 나올 땐 절로 꺅 소리 나오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2시간 30분 영화를 끝까지 다 봐버렸다. 마지막에 장하오가 칼에 찔려 죽는 장면에는 나도 모르게 질질 울면서 감독 새끼 죽여버릴 거라고 다짐까지 할 정도였다.
"어떻게 이래... 해피엔딩만 취급한다며... 왜 죽이고 지랄이야 개새끼야..."
성한빈이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면서 침대 위로 비척거리며 기어 올라갔다. 이건 아니지요. 애초에 개연성 좆된 영화면서 왜 마지막에 죽여버리고 지랄이냐고. 분노에 가득 찬 성한빈이 과몰입 max 상태로 인터넷에 영화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기사 한 줄도 없지? 블로그에도, 카페에도, 각종 커뮤니티 전부에도 이 영화에 대한 내용 자체가 없었다.
'해피엔딩만 취급합니다!'와(과) 일치하는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그저 이 한 줄 뿐이었다. 분명 장하오 얼굴에 비엘 작품이라면 화제성으로 난리가 났을 텐데 왜 아무것도 없지? 성한빈이 다시 DVD 표지를 이리저리 뒤집어봤지만 거기엔 감독 이름도 쓰여 있지 않았다. 무명 감독인가? 의문 가득한 채로 구글, 네이버 돌아가면서 계속 찾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는데 눈 떠보니까 이 세계관이더라.
"뭐야......"
평소처럼 자다 일어나서 핸드폰을 먼저 확인하니 내가 아는 친구목록들이 다 초기화되어있고 웬 철용형님, 두팔형님... 따위의 이름 살벌한 사람들 뿐이었다. 허세 가득한 프로필 사진을 내려다보던 성한빈이 눈을 두어번 정도 깜빡거린 뒤 짜증 섞인 손길로 핸드폰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아씨... 또 오류네..."
맨날 카톡 오류나 더니 이번에도 또 지랄이구나... 그렇게만 생각한 성한빈이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봤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아늑한 내방이 아니 개판 오 분 직전인 허름한 원룸이 날 반기고 있었다. 향긋한 섬유유연제 향이 나는 이불은 어디 가고 퀘퀘한 담배 찌든 내가 풍기는 낡은 이불과, 반듯한 옷장 대신에 행거에 아무렇게나 걸린 검은색 정장들... 뭐야?
당황스러워서 반쯤 감긴 눈을 제대로 뜨고 주위를 살펴보니 내 물건이 모두 사라져있었다. 노트북도, 아이패드도, 운동화도, 예전에 만나던 누나한테 받은 명품 시계까지 전부 다 말이다.
그제서야 심각성을 인지한 성한빈이 드디어 미친 상황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아무리 엄마를 불러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럼 납치당한 건가? 납치라면 입이 청테이프로 막혀있던가, 아니면 족쇄라도 차 있을 텐데 현재 성한빈을 옭아매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 나 꿈을 꾸고 있나? 성한빈이 자신의 볼을 세게 잡아 늘였다. 그러자 욱신거린 통증이 느껴졌다.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 그럼 이게 대체 뭐냐고. 팔을 허우적거리며 일어나자 자신이 원래 입고 있던 깔끔한 잠옷 대신 늘어진 흰색 티셔츠가 그를 반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떤 미친놈이 내 옷을 바꿔놓고, 핸드폰, 이불... 그리고 우리 집 전체를 바꿔놨다고?
성한빈이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문을 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 펼쳐진 광경은 확실히 불행이었다. 집 앞에 새로 생긴 신식 아파트들은 어디 가고 낡은 빌라들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내가 아는 동네가 아니었다. 거기다 핸드폰은 갑자기 통신 불량이 떠서 네이버 지도도 켤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대체... 뭐야....?"
패닉에 빠진 성한빈이 발길이 닿는 대로 뛰어다녔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익숙한 건물은 나타나질 않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전부 낯선 사람들 뿐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거기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살아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동네 이름이었다. 대한민국 서울에 이런 동네가 있었다고? 난 처음 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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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어디야!!!!!!!!!!!!!!!!!"
그렇게 한 30분 동안 동네를 뛰어다니며 고함을 질렀다. 지금 나를 상대로 몰카 하는 건가? 일반인 상대로 몰카 하는 유튜버들도 많잖아. 그럼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부 연기자인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일반인을 상대로 이렇게 대규모로 몰카를 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성한빈은 유튜브에 출연하겠다고 동의한 적이 없었다. 아니면 엄마가 나 몰래 동의라도 했을까? (겠냐) 아니, 동의했다고 해도 미리 사전에 공지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대로 성한빈이 미친놈처럼 허공에 소리를 질러댔다. 뭐가 됐든 간에 제발 좀 돌려주세요. 애절한 그의 울부짖음에 신이 응답이라도 하는 건지 맑은 하늘에서 파란색 수첩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대로 머리를 세게 가격당한 성한빈이 악! 소리와 함께 머리를 부여잡았다.
"수첩?"
불룩 튀어나온 혹을 매만지던 성한빈이 바닥에 떨어진 수첩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뭔가... 무조건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수첩이었다. 강하게 끌리는 느낌에 성한빈이 홀린 듯이 수첩을 주워 첫 장을 열었다.
♡♥ 축! 당신은 지금 [해피엔딩만 취급합니다!] 세계관에 들어왔습니다! ♡♥
영화 속 주인공들이 행복한 사랑을 이룰 수 있도록 함께 힘 써주세요♡
이 영화의 해피엔딩을 본다면 당신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결말까지 화이팅!
씨발 이게 뭐야.
읽어보자마자 절로 욕이 튀어 나갔다. 이건 분명 꿈이어야 한다. maybe 따위가 아니라 must 여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뺨을 아무리 거세게 내리쳐봐도 이 거지 같은 꿈에서 깨어나질 않았다. 그저 얼얼하게 볼만 아플 뿐이었다. 굴하지 않고 여러 번 뺨을 내려치는 순간에 묘한 의문이 성한빈의 머릿속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내 손이 이렇게 거칠었던가? 분명 성한빈의 손은 스킨케어 착실히 받은 섬섬옥수같이 예쁜 손이었다. 손에 물기 하나 안 묻힌 것 같은 손일 텐데... 괜히 낯설게만 느껴지는 자신의 손에, 기계처럼 뚝딱거리며 내려다보니 깊은 흉터투성이인 손이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마치 칼에 베인 흉터들....
꿈은 아닐 거고, 내 몸도 내 몸 같지 않은 이 상황 속에 성한빈이 길거리에 덩그러니 서 있는 채로 수첩에 쓰여 있는 글을 다시 읽어봤다. [해피엔딩만 취급합니다!] 익숙한 제목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눈물 콧물 질질 짜게 했던 영화제목.
"....."
진짜 정신 나간 소리 같지만... 수첩의 말대로 진짜 이 세계관에 갇힌 거라면 어떡하지?
성한빈은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수첩 뒷장을 펼쳤다. 그러자 뒷면에는 성한빈의 원래 프로필과 지금 이 세계로 떨어진 성한빈의 프로필이 적혀있었다. 거기다 이 모든 게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하기엔 자신에 대한 설명이 아주 상세했다. 원래 있었던 우리 집 주소부터, 내 첫 연애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연애가 언제인지. 그리고 어떤 이유로 헤어진 건지. (그건 왜 써놓는데 미친놈들아) 그리고......
"동성과 키스한 횟수? 이딴 건 왜 써두냐고."
어이없는 정보에 성한빈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유치원 때 옆집 형이랑 장난으로 뽀뽀한 것도 키스로 치는 미친놈들이 어디 있어...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 과거 회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상황 파악부터 먼저였다. 자신의 프로필 옆에 적힌 이 세계관 속의 나의 모습은 확실히 낯설기만 했다. 같은 얼굴이긴 하지만...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원래의 성한빈과 달리 어딘가 날이 서 있는 채로 싸늘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시선이 괜히 소름 끼쳤다. 마치 피도 눈물도 없는 무서운 분위기......
"이거 나 맞아...?"
거기다 이 세계관 속의 나는 성유민(수)에게 빚을 갚으라며 쫓아다니는 깡패조직의 막내 역할이었다. 엑스트라로 친다면 한 50번 대 정도? 존재감이 희미하다 못해 거의 없는 지경이라고 봐도 됐었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내가 아무렇게나 설치고 다녀도 아무도 신경 쓸 일이 없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래도 일단 빌런 무리의 역할이니 어느 정도는 사리고 다녀야 하나?
이어서 마지막 장을 보니 내가 어젯밤에 보고 잤던 영화의 줄거리가 5막 구조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역시 마지막은 장하오가 칼에 찔려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수첩 말대로라면 내가 이걸 막아야 한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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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수로?
어이없어서 할 말도 잃어버렸다. 고작 깡패무리의 막내 주제에 이걸 어떻게 바꾸냐고? 그러나 아무리 수첩을 다시 읽어봐도 해결 방법이나 힌트조차 보이질 않았다. 거기다 내가 엔딩을 막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지도 쓰여 있지 않았다. 만약 못 막으면 여기에 그대로 갇히는 건가? 나 아직 취업도 못했는데? 불안한 생각이 성한빈의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불안한 생각을 할 바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먼저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일단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 거지 같은 수첩의 말을 듣는 것 뿐이었다. 성한빈이 수첩을 소중하게 주머니에 넣은 채로 주위를 살펴봤다. 멘탈이 반쯤 나간 성한빈과 달리 주위 사람들은... 아니 엑스트라들은 제 할 일이 바쁜지 빠르게 움직일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나도 엑스트라로 보이겠지. 지나가는 엑스트라들을 바라보던 성한빈이 두 눈을 질끈 감곤 깊은 한숨을 뱉었다.
일단 괴상한 세계관으로 들어온 이상 내 목적은 하나 뿐이었다.
이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날 때까지 버티다가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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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돌아가자마자 빌어먹을 DVD는 갖다버리는 걸로.
***
그렇게 다짐한 날로부터 일주일 뒤.
이 영화에 투입되기 전까지, 성한빈은 깡패 역할에 아주 잘 적응하고 있었다. 형님들이 커피 사 오라고 하면 옙. 하고 달려가고, 어깨 주무르라고 하면 옙. 티비 채널 바꾸라고 하면 옙... 깡패라고 해봤자 수금하는 일이나 힘쓰는 일들은 전부 형님들이 알아서 해주니 성한빈은 그저 심부름꾼 그 이상, 그 이하의 역할도 아니었다.
거기다 주연들의 이야기는 성한빈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주위에서 친히 알려주고 있었다. 장하오가 성유민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둘이 연락은 하고 지내는지. 어제는 키스까지 했다는... 굳이 알고 싶진 않은 tmi까지 알았다. 뭐... 수다가 많은 깡패들 덕분에 성한빈은 자신이 시나리오 속에 투입될 날을 대충은 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깡패 역할이라서 괜히 겁도 나고 긴장하고 그랬는데... 성한 빈이 워낙 적응을 잘하는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장하오 성유민의 일이 아니라면 굳이 힘든 일도 없어서 그저 성한빈에게는 하루하루가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정말 영화 촬영을 대기하는 배우라도 된 느낌이었다. 엑스트라 배우 알바를 하는 기분도 나고, 내가 아무렇게나 돌아다녀도 뭐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그게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평화롭고... 자유로운 일상....
마치 지금처럼 커피 심부름 가는 길에 정자에 앉아있는 옆집 아주머니한테 인사도 드리면서 말이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아이고. 오늘도 커피 심부름 가는 길이야?"
"네네. 혹시 어머니도 필요하면 한잔 사드릴까요?"
그의 말에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성한빈의 배려 섞인 말 하나가 아주머니의 마음을 몽글하게 만들었다. 우리 아들놈도 저런 말 안 하는데... 자신의 친아들보다 본인을 더 챙기는 성한빈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띄었다. 분명 저번 주까지는 엄청 냉랭하게 생겨서 말도 못 거는 분위기였는데... 저렇게 예쁘게 웃는 줄 알았다면 밀 말이라도 걸어볼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아, 근데 총각이 자주 가는 카페 오늘은 문 닫았는데-"
아주머니의 말에 성한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어지는 말로는 사장님이 장기휴가를 떠난 것 같단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지. 아무리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동네 사람들이랑 친해졌다고 해도 이 세계관으로 떨어진 지 고작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다 이 세계의 성한빈은 핸드폰을 왜 이딴 걸 쓰는지.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으면 인터넷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아주머니에게 주위 카페가 있냐고 물으니 난감한 듯이 그것까진 잘 모르겠단다. 젠장.
그렇게 아주머니랑 헤어지고 난 뒤 성한빈은 정처 없이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와이파이 켜지는 곳을 찾아서 검색하고 가야 하나... 전자보다는 후자가 나을 것 같아서 대충 와이파이가 있을 법한 건물들을 찾고 있는데 성한빈의 시선에 아주 작은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고작 테이블 두세 개 정도밖에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인적이 드문 카페였다.
"....."
그 작은 카페에 괜히 시선이 사로잡혔다. 어차피 카페를 찾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저 카페에만 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조건 저기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느낌. 안쪽의 무언가가 성한빈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느낌... 에 거의 반쯤 홀린 듯이 카페 문고리를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딸랑- 소리와 함께 나이 지긋한 사장이 성한빈을 반겼다. 클래식한 인테리어와 LP판이 돌아가는 고전적인 카페였다. 그리고,
"어서 오세요."
"네... 안녕하세..."
성한빈의 말이 거기서 멈췄다.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분명 지금은 시나리오가 아닐 텐데.
그런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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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오가 여기서 나와?
가게 안에는 장하오와 성한빈을 제외하곤 아무 손님도 없었다. 사람도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 이 골목 구석에서, 손님도 많이 수용할 수 없는 카페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영화의 주연인 장하오를 만날 확률이 대체 몇퍼센트나 된다고 나한테 이런 이벤트가 펼쳐져? 거기다 성유민도 아니고 장하오다. 영화 속에서 그 잔악무도했던 장하오. 거기다 다리를 꼰 자세로 티라미수 케이크를 찍어 먹는 장하오에 성한빈은 공포감에 휩싸여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거기다 사고회로까지 고장 난 건지, 성한빈은 시선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장하오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 사람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시선이 안 갈 수가 있겠는가. 가만히 책을 보고 있던 장하오의 고개가 천천히 성한빈을 향했다. 왜 쳐다보는 듯한 시선엔 의문만 가득할 뿐이었다.
아씨 좆됐다.
그렇게 몇분의 아이컨택 이후 뒤늦게 정신 차린 성한빈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장하오의 흥미를 끌어버린 후였다. 아예 책까지 내려놓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성한빈이 뚝딱거리는 몸짓으로 카운터로 향했다.
"저... 그... 아메리카노 다섯 잔이랑... 카페라테 세잔이랑... 밀크티 한 잔 주세요.."
"네. 시간 좀 걸리는데 괜찮으세요?"
"네네."
"밖엔 더우니까 잠시 앉아서 기다리고 계세요."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다정하게 웃으며 성한빈에게 비어있는 자리 하나를 가리켰다. 문제는 그 자리가 장하오 테이블의 바로 앞이라는 점이었다. 천천히 웃으며 로봇처럼 걸어간 성한빈이 사장님이 가리킨 자리에 삐걱거리며 앉았다. 최대한 장하오의 시선을 피하며 메뉴판을 바라보고 있어도 장하오는 그저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이거 진짜 스불재라니까.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고 진짜.
그러다, 스스로 자책하던 성한빈의 머릿속에 번뜩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이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곧 시나리오에 투입될 거면 미리 주위 인물을 포섭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쪽 정보와 장하오 쪽 정보. 둘 다 가지면 아무래도 엔딩을 바꾸는 데 더 쉬울지도 모른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적을 알아야 이길 확률이 높은 법이다. 사실 장하오가 적이라기보단 아군에 가깝긴 하지만... 뭐 이러나저러나. 꿩 먹고 알 먹고 아니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진 성한빈이 피하던 스탠스를 바꾸곤 당당하게 고개를 쳐든 채로 장하오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그리곤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띤 채 장하오에게로 다가갔다. 물론 존나 쫄렸지만 최대한 티는 안 내고 말이다.
"안녕하세요-"
평소처럼만 하면 돼. 아주머니들에게 하던 것처럼.
성한빈이 스스로 암시를 걸며 장하오의 앞자리에 자리 잡아 앉았다. 그리곤 어르신들이 껌뻑 죽는 눈웃음까지 날려줬다. 그러자 장하오의 눈썹이 올라가며 성한빈을 위아래로 스캔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뻘뻘 거리며 시선을 피하던 남자가 갑자기 생긋 웃으며 다가오자 꽤 흥미로운 듯 보였다.
"네 안녕하세요."
"요즘 너무 덥죠? 밖에서 기다리려고 하니까 너무 더워가지고-"
문제는... 평소처럼 하면 된다고 너무 암시를 걸었던 탓일까. 성한빈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고, 들뜬 말투로 자신의 tmi를 봇물 쏟아내듯 빠르게 내뱉고 있었다. 거기다 식은땀까지 흘리는 게 '나 지금 이상한 속셈 있어요.' 를 온몸으로 티 내는 꼴이었다. 그러나 이미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성한빈은 멈출 수가 없었다.
길어지는 성한빈의 tmi를 계속해서 들어주던 장하오가 무감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최소한의 리액션을 날려주고 있었다. 그러다 10분 정도가 지났을 때, 드디어 성한빈이 말을 끝내자마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을 여는 순간에도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흔들림 없이 평온하기만 할 뿐이었다.
"혹시 이사 오셨어요?"
갑작스러운 장하오의 질문에 성한빈이 눈에 띄게 화들짝 놀래며 그를 바라봤다. 왜지? 내 신상을 알고 미리 조져두려고 그러나?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잔악무도한 장하오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입 다물고 거짓말을 하는 게 좋을까. 혹시라도 거짓말이 들킨다면 후자는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취업하기도 전에 다른 세계관에서 세상을 뜨고 싶진 않았던 성한빈이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 네네. 일주일 전에 이사 왔어요."
세상 자체가 바뀌었지만요. 차마 그 말까진 하지 못하고 성한빈이 생글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목덜미에는 여전히 식은땀이 한줄기 흐르고 있었다.
"그렇죠? 제가 이렇게 잘생긴 사람을 모를 리가 없는데."
"....네?"
장하오가 다정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투에 성한빈은 머리에 망치라도 맞은 것처럼 띵해 오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장하오가 맞나?
애초에 장하오가 이런 이미지였나? 그 냉랭한 집착광공이. 성유민이 아니라면 자기한테 말 거는 사람들에겐 욕을 뱉어내거나 주먹을 날리던 장하오가. 하물며 자기가 아끼는 성유민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장하오가. 저런 오글거리는 말을 나한테 한다고? 거기다 순수함 가득 담은 눈빛이 내가 아는 장하오가 아닌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인가? 그러나 소멸할 것 같은 작은 얼굴과 그 안에 빼곡히 자리 잡은 뚜렷한 티존은 장하오가 아닐 수가 없었다.
충격에 벙찐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성한빈에도 장하오는 그저 태연하게 쐐기를 박을 뿐이었다.
"그쪽 잘생기셨다고요."
엌.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구나.
충격에 헤어 나오기도 전에 마침 타이밍 좋게 테이크아웃 커피가 다 완성됐다는 소리가 들렸다. 성한빈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봐요. 라고 생긋 웃곤 커피를 받아서 들곤 도망치듯 카페를 나갔다. 나가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말이다.
***
이중스파이 역할을 맡은 지 또 일주일째.
장하오가 자주 가는 카페도 알았겠다. 어차피 깡패들 사이에선 내가 하는 일도 없으니(?) 맨날 커피 심부름이나 가는 척하면서 장하오랑 두세시간 정도 수다나 떨고 왔다. 거의 하루에 한 번씩 만나다 보니 처음에 겁나던 장하오도 이젠 옆집 형처럼 친근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장하오도 마찬가지였는지 나에게 꾸준히 하던 존댓말도 반말로 바뀐 지 오래였다. 물론 성한빈은 거기까지 하긴... 좀 쫄려서...아직 장하오에게 말을 놓진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장하오씨에서 하오형이라고 호칭은 바뀌었다.)
"안녕 한빈."
"안녕하세요 하오형-"
오늘도 어김없이 장하오가 환하게 웃으며 성한빈을 반겼다. 영화에서 봤던 무서운 집착광공의 모습은 어디에도 볼 수 없었다. 주문을 하고 장하오의 앞자리에 앉자 눈을 반짝이며 손을 맞잡아왔다. 보고 싶었어- 여전히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장하오에도 성한빈은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오늘도 심부름 온 거야?"
"네. 근데 좀 늦게 가도 돼요."
"왜? 상사들이 뭐라고 안 해?"
아마 성한빈을 직장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은색 정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게 꼭 대기업 다니는 직장인처럼 보이긴 했으니 말이다. 뭐...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다고 하는 게 맞겠지. 거짓말하는 게 양심 찔리긴 했지만 깡패라고 밝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 성한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러나 성한빈의 대답에도 장하오가 주위 눈치를 한 번 보더니 짐짓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한빈은 금수저야?"
"네?"
"이렇게 농땡이 피워도 되나 해서."
물론 난 좋긴 한데... 장하오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드러운 미소에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잘생긴 남자가 웃어서 그런가. 왜 심장이 아프지.
"와 하오형 진짜 똑똑하네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렇지? 딱 그렇게 생겼어."
"제가요?"
"응. 엄청 귀티 나."
얼굴이랑 행동 하나하나 전부 다.
장하오가 쌍 엄지를 치켜든 채 부끄러움도 없는지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아니... 대놓고 저렇게 말하니 좀 심하게 양심에 찔리는데... 오늘 아침에만 해도 낡아빠진 매트리스 위에서 과자봉지를 까먹었던 성한빈이 애써 찔리는 양심을 뒤로하곤 천연덕스럽게 말을 꺼냈다.
"얼굴만 보면 하오형이 대기업 임원 같은데."
"진짜? 나 그런 소리 처음 들어봐."
"에이- 거짓말... 형 엄청 돈도 많아 보이고 말 한마디면 사람들이 움직일 것처럼 생겼는데?"
사실 이참에 장하오의 정체나 알아보자는 마음에서 뱉은 말이었다.
영화는 성유민의 시점으로만 흘러갔기에 장하오의 정체가 대놓고 나오지 않았다. 그저 성한빈이 알고 있는 장하오는 냉혈한 집착광공. 중국부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대충 무슨 일을 하는 지 알면 좀 더 접근성이 쉬워지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칭찬 고마워."
그러나 성한빈의 질문에 장하오는 그저 이렇게만 대답할 뿐이었다. 더 캐내 볼까? 싶어 몇 번을 떠봐도 장하오는 그저 두리뭉실하게 대답만 할 뿐 명쾌한 답을 내주질 않았다. 오히려 그 주제를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였다. 지금 욕심으로 애써 만들어낸 장하오와의 관계를 모두 잃을 순 없으니.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 픽업하러 잠시 자리를 떴다. 자리를 뜨는 와중에도 장하오는 성한빈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질 않았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시선에 성한빈은 저절로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이런 모습 보면 꼭 영화랑 비슷하단 말이야... 픽업대에서 양손 가득 테이크아웃잔을 받곤 다시 자리로 돌아와선 애써 아무렇지 않게 장하오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형은 이렇게 구석에 있는 카페는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거예요?"
"여긴 사람이 없잖아. 조용히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러고보니 처음에 만났을 댄 장하오가 책을 읽고 있긴 했다. 물론 나랑 얘기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점차 안 들고 왔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 보여주면 안 돼."
장하오가 손으로 티라미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장하오는 달달한 티라미수를 먹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장하오가 달달한 걸 좋아했던가. 에비앙이나 아메리카노만 먹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지금 장하오가 마시고 있는 음료는 밀크티였다. 영화 속 설정이랑 이거 너무 다른 거 아닌가... 혼란스러워하는 성한빈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하오는 눈까지 반짝거리며 티라미수 한스푼을 떠선 내 입에 먹여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여기 티라미수가 진짜 맛있단 말이야."
"...."
"여긴 나만 알고 싶어."
꽤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게 꽤 귀엽게 느껴졌다. 거기다 날카로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입가에 티라미수 가루를 잔뜩 묻힌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긴 모습에 애써 터지려는 웃음을 참고 성한빈이 냅킨을 찾았다.
"되게 의외네요. 이런 것도 먹고."
"왜? 달달한 거 먹으면 기분 좋아지잖아. 한빈은 달달한 거 안 좋아해?"
"아뇨. 좋아하긴 하는데...."
그대로 장하오의 입가를 닦아주며 성한빈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성한빈에 장하오가 재밌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응 그래 보였어.
"근데 저한텐 알려줘도 괜찮아요?"
"티라미수? 아니면 내 모습?"
"둘 다요."
몸을 앞당겨서 장하오를 빤히 바라보니 그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입을 열었다.
"응. 너만 괜찮아."
장난기 빼고 말하는 목소리에 이번에는 얼굴도 같이 빨개질 것 같아서 냅킨을 더 가지고 오겠다는 이상한 핑계와 함께 카운터 쪽으로 빨리 도망쳤다. 아까랑 다르게 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알고 보니 나... 심장병 있었나? 시한부 설정인가? 분명 수첩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장하오가 안 보이는 곳에서 대충 손부채질을 하며 열을 식히고 있으니 나이 지긋한 사장이 미소 지으며 성한빈을 바라봤다. 뭔가 대놓고 감정이 들킨 느낌에 열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애꿎은 냅킨만 왕창 집어 갔다.
....
나.. 입덕한 것 같은데....
***
하루 걸러 한 번 꼴로 방문하던 카페에 딱 한 번. 일이 바빠서 못 갔던 적이 있었다. 깡패 주제에 뭐가 이렇게 할 일이 많은지. 아니면 농땡이 부리던 걸 들키기라고 한 건지. 별 시답잖은 일들로 깡패들은 한동안 성한빈을 들들 볶아대기 시작했다. 그게 유난히 심했던 어느 딱 하루였다.
'하루종일 기다려도 안 오길래 한빈이 이제 나 버린 줄 알았어.'
그러니까 딱 하루였다고요... 다음 날 평소처럼 다시 카페에 방문하니 장하오가 섭섭하다며 종일 칭얼거려댔다. 우리가 무슨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하물며 썸타는 사이도 아닌데 이러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장하오 앞에서는 또 생각이 멈췄다. 그래. 내가 잘못했지. 그리고 떠나는 순간에도 장하오는 이 일을 빌미로 반강제적으로 번호를 받아내 갔다.
솔직히 이런 흐름은 성한빈에겐 오히려 좋은 흐름이었다. 아무리 장하오가 친근하게 굴어온다고 하더라도 번호교환까지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장하오가 먼저 권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오히려 나야 땡큐지. 이주 만에 이렇게 가까워지다니... 해피엔딩...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거기다 아무렇게나 연락해도 되냐는 장하오의 질문에 2차 감동까지 먹었다. 이건 입덕이 맞다. 입덕부정기 따위도 겪지 않았다. 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면 장하오 빠돌이 하겠습니다. 땅땅.
그리고 그날 뒤로 장하오는...
말 그대로 정말 질리도록 연락을 해댔다.
지금 뭐하냐. 오늘 카페엔 언제 올 거냐. 미리 음료 시킬 건데 뭐 마실 거냐... 별의별 질문을 해댔다. 그러다 좋아하는 영화, 드라마, 음악취향까지 공유하고 어느샌가 카페에서만 만나는 게 아니라 맛집 탐방에 새로 나온 영화까지도 같이 보러 갔으니 절친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렇게까지 일상을 공유할 마음은 없었는데... 번호교환을 하고 난 뒤로 안 그래도 직진이었던 장하오는 더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왔다.
"뒤질래? 너 정신 안 차리냐?"
수금하러 온 깡패를 뒤따라 나온 성한빈이 결국 한 소리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속해서 징징 울려대는 문자에 성한빈이 종일 핸드폰만 붙잡고 있으니 말이었다.
"너 요즘 나사 빠진 듯이 행동하는 거 아냐? 안 그래도 요즘 예민한 시기인데 정신 좀 차리자."
"아... 네 죄송합니다."
장하오 때문에 처음으로 깡패한테 혼도 났다. 사실 문자 알람을 꺼둬 상관은 없었는데... 그래도 이상하게 장하오의 연락을 무음으로 해두고 싶진 않았다. 그냥 혼나고 말지. 뭐 이런 이상한 생각이 든다는 말이었다. 앞에서 수금하려는 사람의 신상을 캐고 있는 깡패의 눈을 피해서 몰래 마지막으로 온 문자 내용을 살펴봤다.
[누구랑 있는다고 그렇게 바빠.]
그 내용에 성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역시 같은 남자라고 할지라도 잘생긴 것에는 약해지는 법이다.
***
엑스트라 50번의 장점은 눈에 안 띈다는 거고,
단점은 온갖 잡일은 전부 내가 해야 한다는 거였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부터 쌍팔년도 망원경을 들곤 성한빈이 동네 한복판을 서성이고 있었다. 성유민을 납치하기 위한 사전답사를 다녀오란다. 음침스럽게 대낮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성한빈의 모습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진짜 쪽팔려서 깡패짓도 다 때려치우고 싶네.
그나마 다행인 건 성유민네 마을 사람들은 성한빈에게 아주 호의적이었다는 거였다. 아마 다른 깡패 형님들이 돌아다녔다면 눈치 보면서 피했겠지만... 훈훈한 얼굴과 딱 봐도 호감적인 인상을 가진 성한빈이 정장을 입고 다니니 그냥 별난 회사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 세계관이나 저 세계관이나 역시 외모가 전부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혹시 이렇게 생긴 분 보셨나요?"
거기다 말투까지 사근사근하니 누가 경계심을 가질까. 더운 날씨에 아무 편의점에 들어간 성한빈이 본인이 먹을 포카리와 캔 커피 두 개(원쁠원이었다)를 계산대에 올린 뒤 결제하는 아주머니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말을 걸었다. 물론 어른들이 좋아하는 눈웃음과 함께 말이다.
"어? 이 청년 맞은 편 고아원에 사는데?"
"어디 쪽이요? 저 빌딩 건너 건물 말씀하시는 거에요?"
"응. 가끔 여기 와서 물건 사 가곤 했어."
요즘은 잘 안 보이지만. 결제해주시던 아주머니가 그렇게 얘기하며 친히 건물까지 가리키며 설명해줬다. 나이스. 생각보다 성유민이 사리고만 다닌 건 아닌 듯했다. 이렇게 더운 날에 괜히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생할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성한빈이 정보를 알려준 아주머니께 감사하다며 방금 구매한 캔 커피 하나를 건네곤 빠른 발걸음으로 편의점을 나섰다.
아무리 빨리 일을 끝내서 기쁘다고 해도... 상대방의 뒤를 캐는 건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성유민의 사진 몇 장만 찍어가면 되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거 도촬 아닌가? 인간이라면 당연히 하는 이성적인 마인드가 성한빈의 양심을 아프게 찔러댔다. 아무리 그래도 일단 내가 먼저 돌아가는 게 우선이긴 했다. 이게 전부 장하오랑 성유민의 해피엔딩을 위한 거다... 응 그런 거다...
".....더워..."
그나저나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검은색 정장은 열병 걸리기 딱 좋은 조합이었다. 성한빈이 검은색 정장 재킷을 벗고는 저절로 더운 숨을 뱉어냈다.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아프게 얼굴을 쐬어댔다. 이렇게 더운데 무슨 가오를 부리겠다고 검은색 정장을 입고 돌아다녀야 하는지. 조금이라도 시원하려고 포카리를 샀는데 밍밍하게 식어버려 도움이 되는 것 같진 않았다. 차라리 아이스크림을 살 걸 그랬나. 신경질적으로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걸어갈 즘이었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성한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디가?"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눈을 하고 고개를 돌리자 장하오가 바라보고 있었다. 장하오가 왜 또 여기서 나와? 무슨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홍길동도 아니고. 내가 돌아다니는 위치마다 GPS를 달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찾아오곤 했다. 저번에는 잠시 술 사러 사무실 근처 마트로 갔었는데 그때도 장하오가 찾아왔었다... 번호를 교환하면 위치를 알 수 있는 서비스가 있나? (없다) 성한빈이 바보처럼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형은 왜 여기에 있어요?"
"난 잠시 볼 일 있어서. 너는?"
볼일이라고 짧게 말했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성유민의 동네에 나타난 장하오. 그렇다면 당연히 성유민에게 볼일이 있는 거겠지. 거기다 둘이 키스까지 한 사이라니까 시나리오 밖에서는 몇 번이나 데이트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지금도 데이트 하기 위해 친히 마중까지 나와준 건가.
장하오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니 장하오가 어깨에 팔을 두른 채로 다시 물었다. 여기엔 무슨 볼일이냐니까. 한동안 보여주던 다정한 목소리가 아닌,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나도 이상하게 섭섭함이 든다. 우리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그냥 나도 볼일이요."
그래서 나도 장하오의 눈빛을 똑같이 맞받아치며 대답했다. 어차피 장하오도 볼일이라고 얼버무렸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가 있을까. 어차피 할 말도 없었는데 다행이겠거니... 생각하고 있는데 장하오가 짧은 외마디를 뱉더니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안도감을 다시 박살 냈다.
"난 고아원에 볼 사람이 있어서 왔어."
"...."
"그럼 한빈이는 누구 보러 왔어?"
"...."
"기브앤 테이크. 그게 한국인의 예의라며 너가."
한빈은 한국인이잖아. 장하오가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봤다. 저번에 장하오가 비싼 레스토랑에 데려가 밥을 사준 적이 있는데 그게 고마워서 다음 날 내가 커피를 사주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냥 흘러가듯 장난스럽게 한 말이었는데... 그걸 이렇게 써먹을 줄 몰랐다. 이러면 내가 할 말이 없었다. 집착광공의 필수요소에는 지능이 있다는 걸 왜 간과했을까 내가.
"...."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장하오 앞에서 성유민의 언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아마 장하오한테 기절 당하고 고기잡이배에 팔려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낯선 곳에서 대체 누굴 만나러 왔다고 해야 하냐고. 이 동네엔 친한 사람도, 그렇다고 대충 둘러댈 사람도 없었다. 어디 가는 길이었어? 라는 질문에 '고아원이요-' 라고 말도 못하잖아. 결국 한참을 생각하던 성한빈이 어정쩡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산책?"
"여기까지?"
"제가 원래 걷는 걸 좀 좋아해서..."
어느 누가 정장까지 차려입고 산책을 해. 역시 장하오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로 성한빈의 옆에 섰다. 그리곤 나란히 걸으며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거짓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성한빈이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깡패인 걸 알아챈 건가? 진짜 시나리오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퇴장인 걸까? 장하오가 속아 넘어갈 수 있도록 천연덕스럽게 변명을 해야 했는데 뇌가 멈춘 것처럼 말이 나오질 않았다. 짧지 않은 정적을 참지 못한 장하오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연다.
"애인보러 온 거지?"
.
.
"...네?"
정말 난데없는 장하오의 말에 빠르게 굴러가던 머리가 뚝 멈췄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긴장한 게 무력해질 만큼 어이없는 발언이었다. 황당하다는 듯 다시 되묻는 성한빈에도 장하오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맞잖아. 그럼 네 손에 든 캔 커피는 뭔데. 애인 주려고 들고 온 거 아니야? 오늘 애인이랑 보내야 하니까 내가 보낸 문자에 답 안 하는 거 아니냐고. 따발총 같은 장하오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연애만 하는 줄 아니....
"뭐래. 저 만나는 사람 없어요."
내 말에도 여전히 확실하게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캔 커피 하나로 이러는 게 말이 되냐고. 의심은 또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내가 편의점을 가리키며 원플러스 원이라고 하니까 장하오가 눈을 가늘게 뜨곤 날 바라봤다.
"정말 사귀는 사람 없는 거야?"
"있어 보여요?"
"응."
너 잘생겼잖아. 그리고 문자에 빨리 답도 안 해주잖아.
이유도 참 어이없었다. 원래 집착광공은 친구한테도 집착을 하나요? 지식인에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래 연락은 늦게 하는 편이라고 그래도 카톡 즐겨찾기 해둔 건 형밖에 없다고 말하니 장하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뜨려졌다. 무슨 집착광공이 이렇게 애처럼 굴어.
거기다 당신 지금 성유민이랑 썸타는 중이잖아요.
***
번호를 교환하고 난 뒤로 일정한 내 생활패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름 깡패들 눈치 보는 것도 피곤했던 일이라 집에 들어오면 씻고 바로 잠을 청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기 전에 장하오랑 두 시간 정도 통화하다가 잠드는 게 일상이 되곤 했다.
무슨 썸타는 사이도 아니고... 장하오는 성유민에게 집중할 타이밍이 아닌가? 왜 나한테 이러는 거지? 그러나 혼자 있을 땐 이성적인 생각이 드는데, 정작 장하오가 전화하자, 만나자 하면 그의 말대로 곧이곧대로 나가곤 했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장하오의 잘못이 아니라 그에게 쉽게 휩쓸리는 성한빈의 잘못도 있다고. 마치 지금처럼.
"하오형 말대로 거기서 티라미수 포장해갔는데 상사분들도 전부 좋아하더라고요."
[그치? 거기 티라미수가 좀 더 꾸억? 해서 맛있어.]
"꾸억이 아니고 꾸덕이에요. 근데 형 진짜 쩝쩝 박사인 것 같아요. 추천하는 것마다 실패하는 게 하나도 없어."
저번에 장하오랑 놀러 갔을 때 그가 추천해준 맛집을 간 적이 있는데... 정말 태어나서 그런 환상적인 맛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허름한 골목에 이런 맛을 내는 집이 있다고? 충격 그 자체였다. 레시피를 훔쳐서 원래 세계로 돌아갔을 때 가게를 내고 싶을 정도로 환상적이랄까.
어제 일을 회상하며 다시 한번 감탄하니 장하오가 이번에는 쩝쩝 박사가 뭐냐고 되물었다. 매번 통화를 할 때나, 대화를 할 때마다 장하오는 모르는 단어나 신조어들이 있으면 꼭 메모하면서 다시 묻곤 했었다. 집착광공은 약간 양아치끼 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니었나. 그러나 장하오의 모습은 모범생에 가깝곤 했다.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공부하는 게.
"근데 형은 왜 한국어에 관심이 많아요? 한국어 공부가 필요해요?"
[한국어 공부하는 거 재밌어. 그리고 외부미팅 나갈때도 꽤 편하더라고.]
장하오의 말에 성한빈이 눈을 깜빡였다. 뭐지? 중국부자 아닌가? 외부 미팅 나가거나 그런 일은 다 비서 통해서 하는 게 아니었나? (드라마로만 부자를 배웠다)
"형 돈 많은 거 아니었어요? 그런 거 하나하나 다 신경 써야 해요?"
[그러니까 더 신경써야지. 책임져야할 사람들이 많은데.]
그나저나 너 내가 돈 많은 건 어떻게 알았어? 의문스럽게 되묻는 장하오의 말에 성한빈이 놀래면서 급하게 변명을 쏟아냈다. 그냥 형 입는 옷 스타일이나 그런 거 보고 알았죠. 다른 이유는 절대 아니에요. 그리고 저번에 형이 돈 많다고 말... 했을 걸요...? 부자연스럽게 따발총처럼 쏘아대는 말들에 수화음 너머로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나한테 관심이 많구나?]
놀리는 듯한 말투에 성한빈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물론 보이지도 않을 텐데 괜히 부끄러워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분명 놀리는 행동에 기분 나빠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데도 이상하게 심장이 간지럽게 쿵쿵 뛰어댔다.
입덕이 원래 이렇게 요란스러운 걸까. 원래 세계관으로 돌아간다면 이미 장하오에게 단단히 잡혀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취업해야 하는데 입덕부터 먼저 해버리면 어떡하냐고... 성한빈이 괜히 베개에 볼을 비비며 얼굴에 핑핑 돌아있는 열감을 식혀냈다.
"형은...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칭얼거리는 성한빈의 목소리에 장하오의 호탕한 웃음이 스피커를 통해 방 안에 가득 채워졌다. 그 웃음을 뒤로하곤 성한빈이 탁자 위에 올려둔 수첩을 다시 훑어봤다. 오늘 사무실에서 깡패들이 하는 말을 들어봤을 땐 내일이 시나리오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참 빠르긴 빠른듯했다. 내가 이 세계관이 들어온 지도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니 말이다.
그럼 내일은 처음으로 시나리오 설정상의 장하오를 만나게 되는 건가. 깡패들이 맨날 극악무도하다고 혀를 내두르곤 했는데... 사실 그런 모습의 장하오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다정하게 한빈아. 라고 불러주는 장하오가 익숙했으니.
"근데 저 내일은 카페에 못 가요."
[왜?]
"회사 미팅이 있어서... 그러니까 내일은 카페에서 저 기다리지 마세요 알겠죠?"
회사미팅은 아니고... 사실 성유민과의 미팅이긴 했지만. 그것도 좀 과격한 방식의 미팅이긴 했지만.... 성한빈이 찔리는 양심에 괜히 헛기침을 두어번 뱉어냈다. 평소라면 아쉽다며 섭섭한 티를 팍팍 냈을 장하오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왜지?
"이상하다."
[뭐가?]
"평소라면 나 혼자 심심해서 어떡하냐면서 칭얼거렸을 거잖아요."
[음... 그렇지.]
"근데 왜 오늘은 얌전히 받아들여요?"
혹시 애정이 식은 건 아니죠? 성한빈이 괜히 삐진 말투로 툭 뱉었다. 그러나 장하오는 웃음기 있는 말투로 장난스럽게 말을 할 뿐이었다.
[글쎄.]
"글쎄? 그게 할 말이에요? 이 사람아?"
몇 십년 동안 결혼한 아내처럼 쏘아대도 장하오는 그냥 허허 웃을 뿐이었다.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당연히 장난이지. 내가 그럴 리가 있겠어?]
"이미 늦었어요. 저도 됐거든요?"
[장난 한 번 한 것가지고 삐졌어?]
"삐질 리가요. 이제 저 피곤해서 자야 해요. 할 말 없으면 끊으시죠?"
유치하게 대응하자 장하오가 미안하다면서 웃어댄다. 미안하다는 거야? 아니면 비웃는 거야? 이상하게 장하오랑 얘기하면 할 수록 내가 유치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만 해도 억 소리 나게 오글거렸던 말도 안 해주면 뭐가 아쉽게되고... 물론 또 해주면 얼굴에 열이 올라서 제대로 대답도 못하지만 말이다.
얄밉게 웃어대는 장하오에게 이제 정말 잘 거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장하오가 한국어를 말할 때와 다른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晚安,明天见。]
갑작스러운 중국어에 성한빈이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문자도 아니고 전화로 저러는 건 반칙이었다. 검색도 못하게 만드네. 성한빈이 끊긴 전화화면을 한참 노려보다가 불을 끄곤 눈을 감았다.
***
"장하오 이 새끼 지금 건물 앞에 도착했답니다."
처음으로 영화 시나리오에 성한빈이 투입되는 날이었다. 폐건물에서 성유민을 협박하는 무리... 중 맨 뒤에 찌그러져 있었지만 그래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설마 그러진 않겠지만 여기서 장하오가 죽으면... 그리고 혹은 내가 죽으면 큰일 나니까 말이다.
그리고 성한빈이 생각했던 것보다 성유민은 더 여리여리하고, 어리고, 귀엽고, 예쁘게 생겼다. 모든 미인이라고 할법한 외적인 요소들을 다 때려 박은 모습이었다. 뭐... 수첩에 적혀있는 연약수, 미인수. 키워드를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긴 했다. 깡패들이 성유민을 한 대씩 때릴 때마다 저러다 뼈가 부러지는 건 아닐지, 맞다가 죽는 건 아닐지 섬뜩한 생각이 저절로 들 만큼 마르고 여리여리했다.
그나저나... 저렇게 예쁜 배우를 내가 몰랐다고? 아무리 영화에 문외한이었던 성한빈이었지만... 저런 마스크의 배우라면 한국에서 수요층이 있을 법도 한데... 아니면 내가 제대로 검색을 안 해봐서 그런가?
"막내, 이리로 와라"
갑자기 호출한 깡패의 말에 성한빈의 몸이 움찔거렸다. 다시 봐도 저 살벌한 비주얼은 익숙하지 않았다. 전부 하나같이 우락부락, 마동석 같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어깨가 넓고 뼈대가 굵어 여리여리하다고 볼 순 없지만 저 사이에 있으니 한 줌이라도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괜히 침을 꿀꺽 삼킨 채 깡패의 옆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꽤 진지한 척 목소리를 내리 까니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던 성유민이 몸을 부르르 떤다.
"밑에 장하오 새끼 오면, 우리가 걔 처리하러 갈 테니 네가 이 새끼 좀 맡고 있어."
"....네?"
내가 잘못들은건가.
지금 나한테 성유민을 맡는다고? 뒤통수를 망치로 내려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나는 그냥 조무래기 역할 아니였냐고. 성한빈이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시선으로 깡패를 바라봤다. 그러나 깡패는 성한빈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줄 알았는지 그의 반응 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고 더 충격받을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다.
"여차하면 바로 쏴버리고"
"네????!!!!!!!!"
폐건물 안에 성한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장하오에게 본인의 위치를 다 알릴 정도로 높은 데시벨에 깡패가 눈썹을 까딱거리며 살기가득한 모습으로 노려봤다. 그 무서운 와꾸에 입을 꾹 다물고 자동으로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이건 계획이랑 다른 일이었다. 어차피 난 엑스트라니까 평소처럼 지켜보다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면 조금만 개입하고 다시 빠질 생각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성유민이랑 붙어있을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어차피 장하오가 다 쓸어버릴 텐데. 내가 성유민이랑 단둘이 있다면 나조차도 썰어버릴 게 눈에 뻔했다. 그래도 우리 정이 있으니 목숨은 붙여주려나?
탕! 탕!
음. 아래에서 살벌하게 들리는 총소리를 보면 나도 안 살려줄 것 같은데.
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깡패들이랑 장하오가 싸우는 소리였다. 싸우는 소리에 조직원들이 슬슬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랑 몇 명의 조직원들만 남기고 힘을 좀 쓴다고 하는 깡패들이 일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렇게 가버린다고요?
"자세 잡아."
위에 남아있던 다른 형님이 나를 바라보며 한 소리 했다. 문제는 성한빈에게 지시했기 때문에 성유민의 곁에 있어야 하는 건 오로지 성한빈의 몫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뒤에 있다고 하더라도 문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것뿐이었다. 저랑 자리 바꾸실 분...? 억지로 웃으면서 깡패들을 바라봤지만 그들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이제 앞으로 너네 커피 심부름 안 해 시발것들아.
성한빈 머리 굴려
빨리.
머리속에서는 비상이 켜졌다. 일단 급하게라도 계획을 수정해서 짜야했다. 장하오가 이길 확률은 100%. 나랑 마주칠 확률도 100%였다. 그냥 장하오가 오기 전까지 숨어있는다? 지금 여기에 있는 조직원 형님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장하오가 문 앞에 서 있는 형님 세 명을 처리하고 나에게 다가올 때 곱게 성유민을 바치면서 싹싹 비는 방법. 그래도 우리가 만난 정이 있는데... 설마 죽이겠어..?
"총 장전하라니까."
바닥만 보면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 나에게 문 쪽에 있던 깡패 한명이 탐탁지 않게 쳐다봤다. 아 넵. 총 장전하고 대충 총구를 성유민의 머리 쪽에 댔다. 장하오가 이 꼴을 보면 눈 돌아갈 것 같은데. 나라도 그냥 쏠 것 같은데 어떡하지.
밑에서 몇번의 대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총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거센 총소리였다. 탕탕탕!! 소리가 들리고 고함이 들렸다. 역시 영화 속이라서 그런지 광공의 목소리는 일체 들리지 않았다. 비명과 고함, 그리고 계속해서 들리는 총소리에 성유민도, 그리고 총을 들고 있는 성한빈도 같이 몸을 움찔거렸다.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
총소리가 점점 커지자 성유민이 몸을 거세게 흔들며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좀 가만히 있어 봐. 애초에 모질지 못한 성한빈이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최대한 좋게 달래려고 하고 있었다. 무슨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따스한 손길로 채무자를 달래는 사람은 아마 성한빈 밖에 없을 거다. 혼자서 뻘짓을 하고 있는 성한빈을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깡패가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랄하지 말고 밟아."
"...넵..."
그 무서운 포스에 성한빈이 거세게 움직이는 성유민의 몸을 살포시 밟았다. 미안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어. 구두 밑에서 거세게 몸을 흔들리는 성유민의 몸짓이 그대로 느껴져서 죄책감이 배로 다가왔다. 조금만 있으면 장하오가 풀어줄 테니까 5분만 버텨. 제발. 장하오가 오면 바로 발 빼줄게.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면서 말이다.
"얘들아 준비하자."
몇번의 총소리가 들리더니 이젠 계단을 올라오는 장하오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마 한 사람의 소리만 들리는 걸로 보아 아래쪽에 있는 깡패들은 다 쓰러진 듯 보였다. 머리론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건 어찌나 무서운지. 총을 들고 있는 손에는 저절로 땀이 배는 듯했고, 다리는 저절로 떨려왔다. 엎어져 있는 성유민이 바로 알아챌 정도로 애처롭게 떨렸다.
깡패들의 고개가 문 쪽을 향한 채로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만난 정이 있는데... 설마.. 나를 죽이..겠어...? 우리 전화도 하고 문자도 했잖아. 하루라도 못 보면 심심했다며. 그러나 시나리오 속의 장하오의 무자비함을 생각하면 나를 고깃덩이로 만들고도 남았다. 거기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하고 썰어버리면 내가 뭘 어떻게 해.
점점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쿵. 쿵
성한빈 기억해. 계획대로만 하면 돼. 장하오가 깡패들을 쓰러뜨리면 문 쪽으로 뛰어서 도망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쫓아와서 죽이기야 하겠어. 안 그래? 성한빈이 마인드컨트롤을 하며 장하오가 바로 앞에 서 있을 문을 바라봤다. 제발 저는 살려주세요 하오형.
쾅!!!!!!!!!!!!! 탕!
장하오가 발로 문을 걷어차자마자 문짝이 커다란 굉음을 내며 날아갔다. 광공의 등장은 언제나 소란스러운 법인가. 천연덕스럽게 총을 겨누는 깡패들과 다르게 갑작스러운 큰소리에 면역력이 없었던 나는 저절로 두 눈을 꾹 감곤 온몸을 움츠렸다. 고개도, 어깨도, 팔도, 손가락도 전부......
..... 잠시만.
손가락을 움츠려? 나 지금 총 들고 있는데?
그러고보니 아까 총소리 이후로는 아무런 고함이나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이 넓은 폐건물에는 정적만이 감돌 뿐이었다. 예상과는 다른 일이 일어날 때. 그리고 상황이 좆됐을 때의 인간의 감은 언제나 정확한 법이었다. 에이 설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앞에서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장하오의 눈빛을 읽었다. 너 제정신이야? 라는 말을 담은 것 같았다. 광공의 얼굴이 아닌, 정말 얼빠진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데. 제발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랑 싸워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장하오도, 그리고 앞에 서 있는 다른 깡패들의 시선 조차도 모조리 성한빈을 향해있었다. 정확히는 성한빈의 발아래에 있는 성유민에게.
아 제발요.
불안한 기분이 온몸을 덮쳤다.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그들의 시선을 따라 나도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성유민은 아주 얌전히 엎드려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너 거세게 몸부림쳤잖아. 왜 지금은 얌전한건데... 짙은 회색톤의 폐건물 바닥에 빨간색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제발 저게 특수물감이면 좋겠는데. 지금쯤 감독이 NG를 외치며 나한테 씨발놈아를 외쳐줬으면 좋겠는데.....
.
.
.
"......이 미친."
그러니까.
죽여버렸다. 성유민을.
그 사실을 마주하자마자 성한빈이 로그아웃된 것처럼 정신을 잃었다.
***
"한빈. 일어나."
"...."
"일어나라고. 너 깼잖아."
"....네."
발로 툭툭 차면서 깨우는 소리에 결국 성한빈이 눈을 떴다. 모든 인테리어가 흰색인 공간에서 장하오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날 죽이려고 이상한 공간에 날 납치한 건가. 주위 환경을 살펴보니 인테리어가 흰색인 게 아니라 그냥 아무 구조도 없는 공간이었다. 침대도, 창문도, 옷도 아무것도 없는 곳. 그곳에서 맨바닥에 누워있던 성한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어디...."
성한빈이 천천히 뒤로 물어나며 입을 열었다. 이제 칼로 날 쑤시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총으로라도...? 총을 생각하니 다시 죽은 성유민이 생각나서 양심이 미친 듯이 찔려왔다. 진짜 죽은 건가? 현실에서도 유명하지 못했는데... 아직 둘이 해피엔딩도 만들어주지 못했는데... 시작도 못했는데... 여기서 좋게 만들어준다고 해놓고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여버리는 게 어딨어. 이건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이 모든 세계관을 만든 빌어먹을 다른 놈이 잘못한 거다. 수첩이 잘못이야. 다시 리셋이라도 시켜놔 제발.
성한빈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때쯤 장하오는 그저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에는 무슨 감정이 들어있는 건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일단 내가 쓰러지자마자 죽이지 않은 거에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제발 살려만 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까. 전자여도 죽임을 당할 거고, 후자여도 죽임을 당할 거다. 그럼 뭐 어쩌지?
"한빈아. 네가 다 망친 건 알고 있어?"
장하오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나를 노려봤다. 본인이 사랑하는 이가 죽었음에도 여전히 한빈이라고 말해주는 다정함에 아주 잠깐, 심장이 찌르르 떨렸다. 아직까지 날 아끼는 걸까. 아니면 이게 죽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는 배려인 걸까. 덜덜 떨리는 몸과 함께 저절로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죄송..."
"죄송한 건 둘째치고, 일단 어떻게 할지나..."
패닉상태에 빠진 성한빈이 말을 더듬거리며 빠르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장하오의 말을 잘랐다는 자각도 없이 두손을 싹싹 빌면서 랩하듯이 사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진짜 죽이려고 했던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정말 놀라서 그런 거예요. 제발 다른 거 전부 다 할 테니 목숨만 살려주세요. 네? 저 아직 취업도 못했단 말이에요. 부모님께 효도도 못 했는데 이렇게 갈 순 없어요.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 제발요.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어떻게 주인공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가 있어. 이건 아니지. 아무리 내가 실수로 쐈다고 해도 비껴갔다거나 장하오가 막아주는... 그런 전개로 이어져야지. 아니면 게임처럼 기회를 다섯번 정도는 더 주던가.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가 있냐고. 성한빈이 머릿속으로 모든 상황에 대해 원망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았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손에서 잔인하게 죽고 싶지도 않았다.
"나 아직 덕질도 시작하지 못했단 말이에요....."
기어가듯이 뱉어낸 말에 장하오의 눈썹이 위로 들렸다. 덕질? 장하오의 되묻는 말에도 성한빈은 우느라 정신이 없어 그의 말을 차마 듣지 못하고 계속 두손을 빌어댔다. 질질 울어대는 성한빈의 말을 가만히 듣던 장하오가 미간을 찌푸리며 애처롭게 떨리는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일단 울지 말고 들어. 지금 울 때 아니야."
누가 죽음을 앞두고 안 울겠냐고. 영문도 모를 공간에 갇힌 것도 서러운데 거기다 이제 날 죽이려고 드는 잔악무도한 장하오까지 있으니 겁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 거라면 더더욱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던 성한빈이 눈물범벅으로 뒤덮인 눈을 부릅뜨곤 장하오를 마주 봤다.
그래.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거라면, 갈 때 가더라도 지금까지 답답하게 입 다물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털어놓고 가고 싶었다. 그 빌어먹을 직장인이라고 거짓말한 것도. 바보처럼 회사 도련님이라고 농담 따먹기 한 것도. 그리고 중간에 너한테 입덕해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는 빠돌이 짓 해보려고 했던 것까지 전부 말이다.
"저 사실... 이쪽 세계 사람 아니에요."
성한빈의 말에 장하오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뭐라고? 팔짱까지 낀 채로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무거웠다. 나 머리 아픈 게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니까 이상하게 보지 말아줘... 급하게 말을 덧붙여도 장하오의 시선이 누그러지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영화 속 세계고 난 진짜 현실에서 왔어. 이상한 말인 건 아는데... 이게 진짜야."
"...."
"원래 영화에선 형이 죽고 끝나는 이야기인데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그걸 막아야 한대. 왜 그런진 나도 모르겠어."
"...."
"진짜 내가 말해놓고 이상한 거 아는데 이거 진짜 머리 다친 것도 아니고 이게 내가 겪은 사실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성유민을 죽이려는 건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어. 진짜 실수...."
성한빈이 중얼중얼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흰색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손을 싹싹 빌고 있음에도 장하오의 표정은 그저 냉정하기만 했다. 이제 날 죽이려고 하려나? 아니면 정신병원에 가둬두려나. 어떤 선택이든 최악의 결과만 남겨놨다. 내가 놀래서 손을 잘못 놀리지만 않았어도.
아니, 그러게 문을 왜 그렇게 열어서 날 놀라게 해......
"어쨌든 난 이쪽 세계 사람이 아니라고...."
"어. 예상했어."
"정신병원에 가둬도 좋... 응?"
정신없이 말을 이어가던 성한빈이 고개를 들곤 장하오를 바라봤다. 방금... 뭐라고 했어...?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에도 장하오는 뻔뻔하게 더 경악할 말을 뱉는다.
"나도니까."
나 원래 배우잖아. 안 그래? 쐐기를 박는 장하오의 말에 성한빈의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듣는 거야. 이건... 말이 안된다. 아니, 이게 진짜라고? 놀라면 사람이 언어능력이 퇴화한다고 했던가. 성한빈은 어...어.. 따위의 말만 뱉어내며 제대로 된 말을 구사하지도 못하고 장하오를 바라봤다.
"뭘 그렇게 놀라. 너도 마찬가지잖아."
"아니... 그럼 진짜 형도 이게 영화인 걸 알고 있었다고?"
"응. 내가 주연이고."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어이없다는 듯이 물어보는 성한빈의 말에 장하오가 천연덕스럽게 그를 바라본다.
"그럼 넌 왜 말을 안 했어?"
"형이 그런 줄 몰랐으니까...."
"응 나도 마찬가지야. 방금 한빈이 말해줘서 확신했지."
아. 그렇구나. 생각해보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미친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성한빈이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현실을 마주한다. 그렇다면 설마...
"그럼 형도 해피엔딩이어야만..."
"응. 근데 네가 망쳤잖아."
계약중인 광고도 있는데 어떡할 거야 한빈. 장하오가 물러터진 듯한 말투로 성한빈을 책망했다. 아까의 공포적인 분위기와 다르게 다정한 말투였다. 사실은 아까도 성한빈이 공포감에 장하오의 말을 왜곡해서 들은 경향이 없지 않아 있긴 했지만 말이다.
눈물자국이 이리저리 번져있는 성한빈의 얼굴을 바라보던 장하오가 자신의 옷소매를 끌어 그의 눈물 자국을 닦아냈다. 그러게 내가 일단 말부터 들어보라고 했잖아. 눈물 콧물을 꼼꼼하게 닦아주는 손길을 받으며 응..응.. 거리면서 멍하니 앉아있던 성한빈의 눈앞에 분홍색의 수첩이 하나 떨어졌다. 성한빈이 가지고 있는 수첩과 똑같은 사이즈였다.
"나도 이걸 받았어. 너도지?"
끄덕끄덕. 성한빈이 코끝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이팅이라고 쓰여 있는 앞부분에 불빛 비춰본 적 있어?"
도리도리. 이번엔 성한빈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러자 장하오가 핸드폰 후레쉬를 켜곤 첫 장의 메모지의 화면을 비췄다. 그러자 결말까지 화이팅! 의 앞에 숨겨진 글자가 드러났다. 이게 무슨 방 탈출도 아니고 이렇게 복잡해? 성한빈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수첩 안의 글자를 천천히 읽어봤다.
만약 중간에 실패할 경우 처음부터 리셋되어 다시 영화가 이어집니다.
그러니 결말까지 화이팅!
뭐 이런 게 다 있어? 정말 감독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묘미는 이런 이스터에그를 발견하는 재미가 아닐까... 무감한 말투로 감독의 입장을 말하는 장하오에 성한빈이 어이없다는 듯 허탈한 한숨을 뱉었다.
그러나 아직 해소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주연인 성유민이 죽어버렸다는 점. 아무리 리셋이 된다고 하더라도 죽은 인물을 되살리기엔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니면 감독이 천하무적이라서 다시 살릴 수 있을려나?
"그런데 성유민은 죽어버렸는데 어떡해?"
거기다 다시 내 발밑에서 죽어버린 성유민이 떠올라 죄책감이 물밀듯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만약 못 살아난다면 현실에서도 죽어버린 건가...? 그럼 내가 진짜 살인을 했다는 건가. 아무리 딱 한 번 얼굴을 본 사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끝내버렸다는 죄책감에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장하오가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성유민은 가상 인물이야."
"....."
"아마 다른 가상 인물로 또 대체되겠지. 아니면..."
장하오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적격자를 찾거나."
장하오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상한 공간 틈 사이로 가스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딱 봐도 몸에 좋을 것 같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성한빈이 몸을 일으키며 이리저리 움직여댔지만 도망칠 곳도, 그리고 숨을 곳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장하오는 평화로운 눈으로 공간을 돌아다니는 성한빈을 응시할 뿐이다. 마치 아주 익숙한 듯한 행동이었다.
"이게 뭐야 대체?"
괜히 뛰었나.
숨이 차서 장하오보다 배로 가스를 들이마신 것 같았다. 뛰어다니던 성한빈이 그대로 힘이 쭉 빠진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가스가 수면제의 역할을 하는 건지 몸이 나른해지고 눈이 점차 감기기 시작했다. 지금 눈을 감으면 난 어디로 가는거지. 불안한 마음 속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장하오는 그저 성한빈을 바라볼 뿐이었다. 웃고있는건지. 아니면 무표정인건지 가늠하기조차 힘들어서 눈이 빠르게 감기기 시작했다.
"또 보자."
아. 저건 웃는거다.
왜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 여유롭게 인사하는 장하오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들었을 때쯤, 이미 성한빈은 정신을 잃은 뒤였다.
***
눈을 떴다.
뜨자마자 보이는 건 곰팡이 슬어져있는 천장이었다. 그러나 깡패시절에 지냈던 원룸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이번엔 또 뭔데 그래. 괜히 불안한 마음으로 문을 벌컥 여니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낯선 마을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 축! 당신은 지금 [해피엔딩만 취급합니다!] 세계관에 들어왔습니다! ♡♥
당신과 장하오의 행복한 사랑을 이룰 수 있도록 그와 함께 힘 써주세요♡
이 영화의 해피엔딩을 본다면 당신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중간에 실패할 경우 처음부터 리셋되어 다시 영화가 이어집니다.
그러니 결말까지 화이팅!
이런 씨발.
성한빈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으며 소리없는 아우성을 질러댔다. 리셋된 이 세계관에서 다시 영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문제는 이번엔 내가 엑스트라가 아닌 호모영화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이번에도 해피엔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잔악무도한 광공인 장하오와.... 아직은 키워드가 밝혀지지 않는 성한빈의 호모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해피엔딩을 보지 못하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 세계관 속에서 말이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