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빈웹진: cinéclub

자나 깨나

두엽

첫 만남이 강렬할수록 악연이랬다.

하급 가이드로 사무업만 전전하다 드디어 센티널과 매칭된 순간 한빈은 축하가 아니라 명복을 빌어주는 동료의 모습을 봐야 했다. 왜 그러세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물었다. 동료는 안타깝단 투로 혀를 끌끌 찼다.

 

장하오 때문에 죽은 가이드가 여러 명이야. 꼭 네가 그렇게 되리란 법은 없지만.”

 

뒷말 생략. 그래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에이 설마 죽겠어요. 제가 누구인데. 자신감 넘치게 대꾸했으나 작은 머리통 안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세계를 구하는 센티널의 존재는 대단했지만, 개중 담당 가이드를 막 대하는 센티널이 없진 않았다.

 

네가 누구이긴? 하급 가이드지.”

저 성한빈이에요.”

 

어쩌라고? 동료의 눈이 무언으로 답하고 있어 애써 무시했다. 고개 휙 돌려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박았다. 가이딩 연습 공지를 훑었다. av 배우도 아니건만 옷 벗기, 눕기, 다리 벌리기, 애무하기 따위를 연습한단다. 신체접촉으로 가이딩하는 거라지만 이건 좀. 탄식이 새어 나오는 중에도 한빈은 잘하고 싶었다.

한빈은 뭐든 잘하고 싶었다. 밥도 잘 먹고 싶었고 요리도 유튜브 보면서 잘하고 싶었고 동생도 잘 돌보고 싶었고 세계도 잘 구하고 싶었으며 가이딩도 잘하고 싶었다. 간혹 끼니를 거르게 되거나 요리를 진창 망치거나 오빠는 병신이야? 동생한테 욕먹거나 바라던 센티널로 발현되지 않고 기어코 가이드라도 됐는데 하필 하급 가이드라 고꾸라질 때도 한빈의 이성은 절대 죽지 않았다.

흰색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 앞에서 가이딩 연습 이후에야 장하오를 만날 수 있었다. 이미 수치심 제로였다. 사각지대 없이 시시티브이가 다닥다닥 붙은 흰 방. 한빈은 복기했다. 곧바로 신체접촉을 하려고 하면 센티널이 거부할 수 있으니 적당히 대화부터 하시고요. 특히 장하오는 가족 얘기에 예민하니까 그 주제는 하지 마세요.

 

안녕 너 엄마 있어?”

 

. 놀라 입이 벌어졌다. 가족 얘기에 예민하단 사람이 먼저 가족 얘기를 물었다. 만국 공통으로 엄마를 화두로 삼는 건 삼가는 법인데 대놓고 엄마 있냐고 묻는 장하오를 응시했다. 성깔 있어 보이는 얼굴은 아닌데 어딘가 으스스했다.

 

빨리 대답해 줘.”

있었는데 돌아가셨어요.”

언제?”

십오 년도 그때.”

무서웠구나.”

 

공감인지 위로인지 혹은 장난인지 모를 대답이었다. 무서워? 당연히 그때 모두가 무서워했지. 그런데 부모가 죽었다면 무서운 것보다 슬픈 것이 먼저지. 너무 슬펐어. 그때 나는 슬퍼서 동생을 끌어안고 다짐했어. 잘해주겠다고. 과거는 언제나 현재를 압살했다. 장하오의 질문으로 말미암아 떠오른 과거에 한빈은 몸을 떨었다.

 

근데 왜 가만히 있어?”

?”

가이딩해 줘야지.”

 

과거를 꺼내놓고 제 잘못이라곤 티끌만치 없단 투였다. 시시티브이에 대고 손가락으로 V를 그린 장하오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한빈을 내려다보았다. 마주친 눈. 한빈은 깨달았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유는 눈 때문이었다. 심연같이 새카만 눈알.

수치심 따위는 사라져 당장이라도 빨가벗고 나체로 춤까지 출 수 있지만 한빈은 무릎걸음으로 장하오에게 다가가 손을 끌었다. 제 가슴 위에 얹었다. 센티널과 가이드 간의 라포르 형성 그런 건 좆 까고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하하하. 장하오는 복식 호흡법으로 웃어댔다. 호탕했다.

 

내가 신이야?”

 

오해할 만한 행동이었다. 침대 아래 무릎 꿇고 가슴 위 손을 올려두고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한빈의 눈은 자주 광신도 같단 칭찬 아닌 칭찬을 듣곤 했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맑은 광신도 같은 눈으로 장하오를 보고 있었으니 신을 모시는 행동으로 오해할 만했다.

 

아니면 가슴 자랑인가.”

맞아요. 가슴 자랑이에요.”

 

재빨리 맞장구쳤다. 냅다 가슴 근육을 움직였다. 비록 사무업 전전한 신세였으나 언제든 매칭 돼 가이드와 현장으로 나갈 수 있기에 틈틈이 가꾼 근육이었다. 유산소와 근력 운동 반복으로도 단단해지지 않은 가슴이 흔들렸다. 장하오는 마치 코미디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사람처럼 웃으며 관망했다.

아니 관망하는 척했다. 손아귀에 슬그머니 힘을 줬다. 서서히 움켜쥐었다. 한빈은 장하오의 표정을 살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거부하지도 않았고 막무가내로 굴지도 않았다. 예상외였다. 어딘가 차분하달까. 한빈은 벌떡 일어섰다.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쑥 내렸다. 알고 보니 영혼께 남은 수치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빤히 관찰하는 시선에 귓바퀴가 달아올랐다.

 

包茎 했네.”

 

당장이라도 번역기를 들이밀고 싶으나 애석하게도 곁에 있는 건 러브젤뿐이었다. 한빈이 괜스레 러브젤만 만지작거렸다.

. 명령이 떨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어떻게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한빈은 가슴팍에 남은 울긋불긋한 자국을 눈에 담았다. 등줄기를 따라서도 남아있을 자국들. 좋았나 혹은 나빴나. 단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연구원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한빈은 옷부터 주워 입었다. 장하오는 나른하게 누워 고른 숨을 뱉었다. 진이 빠져야 하는 쪽은 제 쪽인데 도리어 장하오가 맥을 못 추는 것 같았다.

내가 제대로 잘했나? 진짜 잘해서 뿅 갔나? 한편으론 자신감도 붙었다. 연구원 여럿이 들어와 장하오부터 챙겼다. 젤이 번들거리는 성기를 닦아주고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내고 옷을 입혔다. 한빈은 두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얼얼한 엉덩이를 문질렀다. 양팔을 붙잡혀 일으켜진 장하오는 한빈을 가리켰다.

 

쟤는 안 가?”

저는 가봤자 엉덩이에 약 바르고 끝일 걸요.”

피 안 났는데.”

그래요? 엄청 아픈데.”

아파?”

 

아프구나. 아팠구나. 이상한 공감에 한빈은 고개만 끄덕였다. 대충 대화가 마무리되었다고 여겼는지 연구원들이 장하오를 데리고 나갔다. 센터 내 가이드 숙소로 돌아온 한빈은 침대에 눕지 못하고 주위를 빙빙 돌았다. 안 죽고 돌아왔네. 축하해. 동료의 축하가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빈이 겪은 장하오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론 비뚤어져 있어 크게 위험하고 수상한 뒤죽박죽의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가이드 여럿 죽였을 살인자는 아니었다. 장하오를 둘러싼 오해와 판단은 어디서 누구로부터 시작됐을까. 다짜고짜 가족의 안위를 들먹이는 것 때문에? 트라우마일지도 모를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놓는 것 때문에? 어쨌거나 강렬한 첫인상이었다.

 

 

매칭률이 얼마인지나 가이딩이 어땠는지나 장하오가 어떻게 평가했는지 한빈에게 들려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까라는 대로 까고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이곳에 배운 것이었다만은 궁금했다. 정말 장하오는 가이딩을 받고 뿅 가버렸는지.

한빈은 갑작스레 숙소를 옮겼다. 위에서 짐 싸서 옮기라 했기 때문이었다. 바리바리 짐을 들고 새 숙소 문을 열어젖혔을 때 맞이한 사람은 장하오였다. 안뇨옹. 발음을 흘리며 짐 푸는 것을 도왔다. 이제 같이 살아요? 즉답을 받았다. 우리가 av 배우도 아니고.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다. 시시티브이가 없었다.

며칠간 으레 당연한 싸움이 이어졌다. 느닷없이 타인과 살게 된 결과였다. 생활 방식을 맞추고 규칙을 정해야 했다. 대부분 한빈이 먼저 제안했다.

 

장하오 씨 수건 바로바로 세탁기에 넣어요.”

 

이러한 제안에 장하오는 고분고분 알았다고 했으면서 또 수건을 의자에 던져놓거나 침대 위에 흩뿌려 놓았다. 장하오 씨. 장하오 씨. 장하오 씨.

 

발놈아.”

 

엄청나게 화가 치민 한빈이 참지 못하고 저질렀을 때 장하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욕먹은 건 개의치 않았다. 하하하. 반말. 하하하. 한참을 허리 꺾어가며 웃다가 한빈에게 다가왔다.

 

내가 병이 있어서 그래.”

고쳐줄게요. 제가 가이드잖아요. 무슨 병인데요.”

그럴 줄 알았어.”

 

반응을 어떻게 예상했단 것일까. 고쳐준다고 나댈지 어떻게 알았다는 걸까. 한빈이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예상했어. 장하오의 이야기에 한빈은 생각했다. 장하오의 능력이 사실 예지였나.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그의 센티널 능력은 센터에서도 나라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상의 되풀이. 서서히 서로 맞추는 중이라고 여겨질 즘 장하오의 차출이 이어졌다. 매칭된 가이드답게 한빈은 장하오와 현장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가이드는 숙소에서 대기하란 지시만 돌아왔다. 지시도 듣고 싶었으므로 한빈은 숙소에서 대기했다. 그러나 숙소로 돌아온 장하오를 마주할 적마다 윗선의 지시가 맞는 건지 의문이 생겼다.

장하오는 녹초가 된 채 어딘가 다쳐서 왔다. 큰 부상은 아니더래도 자잘한 부상은 끊임없었다. 팔꿈치가 찢어지거나 무릎이 찢어지거나 하물며 볼때기에 생채기를 달고 왔다. 폭주할 수준의 업무가 아니라고 들었다만 매일 같이 다쳐오는 파트너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빨리빨리.”

 

미간을 찌푸린 장하오는 대기하던 한빈에게 제 상처를 가리키며 가이딩을 요구했다. 후다닥 달려가 장하오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러브젤을 짜냈다. 한빈은 점점 장하오가 안타까웠다. 안쓰러웠다. 세상을 구하는 영웅의 뒷모습 이토록 고생이 많은데 모두가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여느 때처럼 차출된 장하오를 기다리던 한빈은 애꿎은 컴퓨터 화면만 쿵쿵 쳐댔다. 검색창에 장하오라 쳤다. 인물 정보에도 나무위키에도 등록된 인재였다. 괜히 때린 컴퓨터 화면에 사과 대신 쓰다듬기로 미안함을 표했다. 최신 정보 업데이트. 나무위키를 눌렀다.

다 아는 얘기 이미 들은 소식만 가득했다. 에이. 아쉬움이 섞인 탄식을 뱉으며 엑스 버튼을 누르던 찰나 장하오와 푸바오 동급이란 주장에 시선이 꽂혔다. 일정량 한국행 배경이 비슷하나 동급이라니.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한빈은 울컥했다.

 

이천십오 년도 전쟁이 발발했다. 이웃 나라 먼 나라 상호조약을 깨트린 전쟁이 아닌 정체 모를 것들의 침공으로부터 시작됐다. 누군가는 괴물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마물이라 일컬었고 흑자는 외계인이라 주장했다. 소시민은 물론이며 불치병이라 불리던 암마저 정복한 과학자고 의사고 머리깨나 비상하다던 정치인들도 그게 무엇인지는 정의하지 못했다. 많은 이가 생을 달리했다. 생의 끝. 생의 마감. 생의 종말. 전 세계 인구가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던 때였다. 제 형상을 본떠 만든 사람들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게 슬프다는 듯 오병이어 기적을 행했던 것처럼 전능이 생겨났다. 고르고 고른 선별된 사람들이 세상을 구원해 갔다. 점진적이자 순차적으로. 센티널이란 명칭이 그들에게 딱지처럼 붙으면서 나라 간 협약이 이루어졌다.

 

유럽 협약과 유대인 협약이 공표되는 날 동아시아 협약도 공표됐다. 중국에선 협약의 증표로 센티널 한 명을 한국으로 보냈다. 가족과 생이별당한 그 센티널은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우리의 특성은 정이라면서 그 센티널이 현장에서 덜덜 떨거나 울거나 도망쳐도 이해했다. 가족이랑 떨어진 게 얼마나 슬프겠냐면서. 오래가지 않았다. 지하철이 공격당해 많은 사람이 다친 날 참사의 원인으로 괴생명체가 아닌 센티널이 지목되었기 때문이었다. 대대적인 뉴스로 센티널을 차출했으나 그가 명령 불복종했다고 떠들었다.

그때 장하오의 나이는 고작 열여덟이었다.

 

오늘은 현장에서 대기하면 안 되나요? 한빈은 끓어오르는 가슴팍 요동에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중국에서 선물이랍시고 줬으니까, 푸바오와 똑같다는 사람들은 모른다. 장하오가 얼마나 구르고 있는지 몰라.

현장까지 갈 필요 없고 정 그러면 센터 앞에서 대기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한빈은 센터 앞으로 뛰쳐나갔다. 마침 일 처리 끝내고 돌아오는 센티널들이 보였다.

 

장하오는 왜 같이 안 와요?”

 

거의 다 돌아온 것 같은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한빈에게 붙잡힌 센티널은 멀찍이 세워놓은 대형 버스 하나를 가리켰다. 뭐라 더 말을 이으려 하길래 한빈은 넙죽 고맙다고 한 뒤 뛰었다. 설명 중략.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놀라게 해주려고 조심스레 승차했다. 그리고 마주하게 된 광경에 핏기가 가셨다.

 

지금 뭐 하는 거야?”

! 나 너무 놀랐어.”

뭐 하냐고 지금.”

보면 몰라?”

장하오 이 씨.”

발놈아 하려고 하지.”

 

뿅 튀어나온 것에 놀라는 게 아니라 장하오는 제 행동을 들켜서 놀라는 것이 마땅했다. 마땅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게 장하오 같은 짓이긴 하지만. 한빈은 최대한 역정을 억눌렀다. 하지만 그간 상황이 이해돼 허탈하면서도 장하오라는 사람은 이해가 안 됐다.

 

왜 일부러 그래?”

 

장하오는 칼로 제 허벅지를 찌르고 있었다. 세상을 구하는 영웅의 뒷모습은 이토록 고생하는 게 아니라 자해였다. 이럴 수가 있나. 한빈은 장하오의 대답을 기다렸다. 칼을 집어넣은 장하오는 반반한 얼굴로 뻔뻔하게 대꾸했다.

 

내가 병이 있다고 했잖아.”

정신병이라도 있다는 거야?”

여기선 처음인데. 빨리빨리. 나 다쳤잖아.”

안 해.”

지금 안 하면 폭주해 죽을 거야. 내가 죽길 바라?”

왜 협박해?”

협박 아니고 사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럴 줄 알았어.”

알면서 왜?”

 

나는 아직 아가야. 입술을 댓 발 내민 장하오의 대답을 끝으로 한빈은 힘이 빠져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고 생각한 적이 없진 않았다. 수건을 여기저기 던져두고 방 안에서 신는 슬리퍼도 여기저기 버려둬서였다. 이렇게 애정을 갈구해서가 아니라.

 

이제 일부러 안 할게.”

그래. 하지 마. 아프잖아.”

내가 아픈 게 싫어?”

그러면 좋겠어? 당연히 싫지.”

 

싫구나. 내가 아픈 게 싫구나. 성한빈은 장하오가 아픈 게 싫구나. 이제 와 들어 보니 공감이 아닌 것 같았다. 맥락을 파악하는 법인 듯했다. 의자에서 일어난 한빈이 손을 내밀었다. 가자. 숙소에 가서 가이딩할게.

 

 

어젯밤 장하오는 한빈의 목덜미를 작살냈다. 이빨을 세워 깨물었다. 질근질근 여린 살을 깨물면서 중얼거렸다. 너는 나를 만나려고 태어난 거야. 한빈은 그런 말이 듣기 거북하지 않았다. 도리어 필요로 하는 것 같아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그건 그거고, 슬슬 좀이 쑤셨다.

장하오는 여전히 차출이 잦았다. 부러 상처를 만들지 않아 멀쩡한 채 귀가했다. 대기 연속이란 뜻이었다. 사무업이라도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내 숙소에 있으니 답답하기까지 했다. 창수님 요즘 바빠요? 심심함에 못 이겨 사무업 동료에게 연락했다.

동료는 마침 잘 됐다고 하급 센티널 현장에 나가볼 수 있겠냔 답장을 보내왔다. 한빈도 마침 몸이 쑤셨다며 잘 됐다고 잘하고 오겠다고 장비를 챙겼다. 매칭도 안 된 하급 센티널과 하급 가이드의 현장에서 큰일이 벌어질 리야 만무했다. 가이딩하더래도 체온을 나누는 정도면 오케이였다.

 

현장은 당연하게도 급박히 돌아갈 일이 없었다. 기껏 챙긴 장비가 우스우리만치 시민들 대피를 돕고 길 막은 차량을 옮기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한빈은 열심히 했다. 근육을 써대니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맨정신인 것처럼. 푸른 하늘을 올려보다 한빈은 가족에 관해 생각했다.

이른 나이였다. 어린 나이였다. 부모는 평소처럼 출근했고 한빈은 침대 위였다. 굉음이 들려와 잠에서 깼다. 놀란 동생의 울음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동생의 방으로 달려가 달랬다. 굉음과 비명이 번갈아 강타했다. 엄마도 아빠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일지 몰랐다. 천둥소리가 너무 큰 것일지도 몰랐다. 번개가 꽝꽝 꽂히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일주일이고 이 주가 흘러도 부모님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 오빠, 오빠. 동생이 저를 부르며 자주 울었다.

그래서 한빈은 자주 눈물을 참았다.

 

아휴 조심 좀 하지. 지원 나온 가이드가 한빈의 무릎에 약을 바르며 혀를 찼다. 아휴 그러게요. 한빈은 웃으며 넘겼다. 감상에 빠진 게 잘못이었다. 피난길에 떠밀린 아이가 다리를 밀치는 바람에 넘어졌다. 새빨갛게 살이 벗겨진 무릎을 응시했다. 대단한 상처는 아니라서 고통이 크진 않았다. 그러나 상처는 상처라고 쓰라렸다. 장하오는 이 쓰라림을 여러 번 겪었을 테지. 그것도 일부러.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숙소 문 앞에서 얼토당토않은 대치가 개시됐다. 막는 자는 장하오였고 들어가려는 자는 한빈이었다.

 

왜 그래? 비켜.”

했어, 안 했어.”

가이딩? 하긴 했지.”

못 들어와.”

아니 왜. 나 피곤해.”

많이 해서?”

많이 안 했고 넘어져서 다쳤어. 씻고 치료해야 해.”

어디?”

 

장하오의 손이 빠르게 다가와 옷을 들쳤다. 들어가서 보면 되잖아. 한빈이 손을 막아내도 역부족이었다. 티셔츠를 가슴께까지 올린 장하오는 상처 찾아내기에 열중이었다.

 

거기 아니야 이 사람아.”

 

여기거든. 손가락으로 다리를 가리켰다. 장하오는 더럽지도 않은지 현관에 주저앉아 바지를 걷어 올렸다. 붙여놓은 반창고를 천천히 떼어냈다. 상처를 드러내놓고 생각 많은 얼굴이었다.

 

이제 들어가도 될까?”

너는 누가 치료해?”

처치 받았는데 장하오 님이 떼셨잖아요.”

엄마가 아픈 기분이야.”

 

두터운 아랫입술. 처음으로 올려다보는 시선. 앉아있는 찬 바닥. 다리 옆으로 널린 신발. 벗어 던진 슬리퍼. 뒤로 보이는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는 수건. 엄마. 한빈은 쪼그려 앉았다. 눈을 맞췄다. 깜빡이는 까만 눈알. 진짜 엄마가 됐나.

 

너는 오늘 안 다쳤어?”

 

대치를 벌여도 장하오가 걱정됐다.

 

 

숙소에만 있으니, 몸이 쑤셔서 그랬다. 솔직하게 털어놨다. 장하오는 알았다고 차출 때마다 한빈을 데리고 나갔다. 가이드 업무 지원은 불가였다. 일이 벌어진 현장 밖에서 무한 대기지만 일단 밖이라 그나마 답답함이 가셨다.

이날도 마찬가지로 장하오와 한빈이 현장으로 출동했다. 다 같이 이동하기 싫다고 낯가린다며 왈왈 짖어댄 장하오 덕분에 둘만 승용차로 이동했다. 정말 낯가려? 한빈이 물었을 때 장하오는 광대를 씰룩거리며 대답했다. 조금. 아주 조금?

운전은 한빈의 몫이었다. 현장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달리는데 풍경이 익숙했다. 폐허가 되긴 했어도.

 

여기. 나 옛날에 살았던 곳이네.”

옛날 옛적에?”

응 센터 입소 전까지 살았어. 바뀐 게 없다.”

성한빈 지금 얼굴 처음이야.”

초면이야 지금?”

. 초면. 슬퍼?”

예전 생각하면 슬픈데 또 그립기도 하구 복잡해.”

 

동생과 끌어안고 버텼던 아파트 부근에 잠시 멈췄다. 혹시나 부모가 살아있다면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간절히 더 간절히 기도했던 곳이었다. 한빈은 깊이 신음했다. 장하오의 손가락이 한빈의 볼을 쓸었다.

 

울진 않네.”

참는 것에 익숙해서 그래.”

울고 싶으면 울어야지.”

그건 할 수 있어.”

. 어떤 거.”

부탁. 장하오 이 아파트는 꼭 지켜줘.”

나도 그건 할 수 있어. 네 부탁 들어주는 거.”

 

둘만의 약속이었다. 아파트에 들렀다 오느라 장하오는 지각생이 됐다. 곧장 현장으로 사라졌고 근처에서 대기하는 한빈은 잔소리를 들었다. 네가 장하오인 줄 알아? 같이 지내니까 너도 뭐 된 것 같니. 쟤는 중국에서도 보고 있으니까 마음대로 해도 돼. 너는 아니야. 맞는 말이라 고개만 주억거렸다.

평소라면 배알도 없이 잘하겠다고, 노력하겠다고 했을 말이 나오지 않았다. 후후. 심호흡하며 명치를 두드렸다. 두어 시간이면 끝날 것이라 들었다. 장하오가 현장으로 들어간 지 세 시간째였다. 한빈을 제외한 모두가 바빠졌다. 수치가. 화면 좀 봐주세요. 상태가. 말끝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저 안 가도 돼요?”

때 되면 싫다 해도 가야 해. 바쁘니까 좀 가 있어.”

 

그래, 바쁘니까. 바쁘니까 언성 좀 높일 수 있는 거야. 바쁘니까 나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거야. 한빈은 다른 대원들의 적의와 무시를 그렇게 넘겨야 했다. 바쁘고 막 대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고 다르게 바빠도 살뜰히 남을 챙기는 착한 사람도 언제나 어디서나 있다. 그러니까 괜찮았다.

다 괜찮은데 눈치는 보였다. 장하오도 걱정됐다. 일부러 아니라 정말 다쳐오면 어쩌지. 폭주 직전의 예민한 센티널을 겪어본 적은 없었다. 장하오가 그 상태더라도 끌어안겠지만. 난폭한 장하오의 모습은 상상도 안 됐다.

한 시간이 더 지나 나타난 장하오는 오만 기력이 다 빠진 태였다. 태연자약한 얼굴이긴 했어도 손이 떨리고 있었다. 섣불리 다가가지 말래도 한빈은 달려갔다. 덜덜 떨리는 장하오의 손을 잡아챘다. 느리게 떠졌다가 감기는 눈.

 

부탁 지켰어. 잘했지. 빨리빨리 칭찬해.”

응 잘했어. 너무너무 잘했어. 고마워. 장하오 최고다.”

나도 알아.”

 

하여튼 자신감은. 한빈은 픽 웃어버렸다. 오래 걸린 것 치고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이마가 맞닿았다. 콩콩 제 이마로 이마를 박던 장하오의 입술이 돌진했다. 말랑말랑한 혀가 입술 새를 갈랐다. 오만 기력이 다 빠진 상대를 위해 한빈은 오만 정신을 집중했다. 열의에 차 장하오를 받아들였다.

가이딩을 끝낸 후 어깨를 부딪치며 차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장하오는 배고프다 노래를 불렀다. 한빈도 배 속이 텅 비어 있어서 가자마자 무엇을 먹을지 함께 고민했다. 고기 생선 샐러드는 싫어 어쩌고. 운전석 문을 열었을 때 한빈은 눈앞이 핑 돌았다. 뭐지?

 

 


 




 

 

장하오가 사라졌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도록 종적을 감췄다. 병실에서 정신을 차린 한빈은 첫 번째로 옆 보조 의자에 앉은 이가 장하오가 아닌 것에 당황했고 뒤이어 전달된 장하오의 실종 사건을 듣곤 황당해 벌떡 일어섰다. 다 죽은 사람도 침대에서 일어나게 하는 나야. 대단해 그렇지? 아마도 곁에 있었다면 이런 대사를 읊었을 터였다. 보조 의자에 앉아있던 동생이 열에 받친 표정으로 한빈을 응시했다.

 

오빠도 없으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별일 아니야. 너 요즘 잘 지내?”

나 때문이라고 하지 마. 니 책임감 때문이잖아. 오빠는 내 생각 안 하는 거야.”

 

왜 갑자기 비난을. 한빈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입꼬리를 당겨 웃으려는데 동생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병실이 휑했다. 장하오의 실종과 동생의 비난이 겹쳐 머리가 아팠다.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든 로켓 타고 달까지 가버리든지 어쨌든 어떻게든 무엇을 하든 장하오를 찾아내란 윗선의 명령이 떨어졌다. 명령이 아니더라도 한빈은 친히 찾아 나설 계획이 있었다. 모름지기 파트너란 그런 것이다. 동업자도 동반자도 애인도 연인으로도 통용되는 영어단어인 만큼 기필코 장하오를 찾아야 했다.

 

한빈은 혹시나 해 연락부터 시도했다. 수없이 통화를 걸어도 전화기가 꺼져 있단 안내 음성만 들렸다. 카톡이고 위챗이고 답장은커녕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맨 한빈은 장하오 수색을 위해 지원 요청했다가 시원하게 까인 채 센터를 나왔다. 아무래도 장하오 사라져서 온 나라가 난리가 났는데 멍청한 요구 좀 하지 마라. 골이 지끈지끈 울리고 있다는 듯 이마를 짚은 상사에게 한빈은 대꾸했다. 지원을 해주셔야 빨리 찾고 빨리빨리 수습하지 않나요. 멍청한가 싶어도 이따금 소름 돋게 통찰 깊어 당혹스럽게 만드는 한빈의 재주가 빛났다.

빛나는 재주가 진정 빛을 보려면 판을 깔아주어야 마땅하건만 상사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무참히 거절당한 후 홀로 센터를 나온 한빈은 근처를 뒤져댔다. 장하오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못했다. 행방이 묘연했다.

 

보고 싶으니까 이제 좀 나타나 이 사람아. 한 아름 인쇄한 사람 찾기 전단을 끌어안은 한빈은 무심코 중얼댔다.

혼자 생고생하는 게 불쌍한 모양인지 아니면 이것저것 취합해 장하오를 찾아내라는 건지 병실의 시시티브이를 확인하러 오란 연락을 받았다. 사라지기 전 마지막 장하오를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시시티브이를 보려 도착한 센터엔 사무업 동료였던 창수가 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흙빛이었다.

 

요즘 많이 바빠요? 얼굴이 너무 안 좋은데.”

너 그냥 사무업으로 돌아올래?”

에이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장하오 얼른 찾아서.”

안 찾으면 좋겠어. 뭐 너도 확인하면 바뀌겠지.”

 

창수의 말뜻은 영상을 확인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죽은 듯 병실 침대에 누운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장하오는 불쑥 손을 뻗어 목을 졸랐다. 진짜 죽으라는 것처럼. 진짜 죽이려는 것처럼. 화질 좋은 영상이었다. 세세한 표정을 전부 볼 수 있었다. 이를 악물고 있었다. 으스스했고 난폭했다. 거칠었고 강압적이었다. 그리고 울고 있었다. 얼굴에 내리는 장마였다. 눈가 아래 공병을 대놓았으면 일 리터는 족히 채웠을 양.

어디 갔는지 알겠다. 한빈은 창수에게 나가보겠단 말만 남긴 채 센터를 나왔다. 장하오와 타고 다녔던 차에 올라 내비게이션을 만지작거렸다. 이전에 갔으니까, 주소가 남아있을 터였다. 주소를 찾아 누르는 동시에 핸드폰이 울렸다. 안전 안내 문자였다.

 

 

 

 

한빈이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옛날에 가족과 살았으며 얼마 전 장하오가 지켜낸 아파트였다.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올 것 같긴 했는데 정말 올 줄 몰랐어.”

원래 엄마는 자식이 어디 갔는지 다 알아.”

너 엄마야?”

아니 나 성한빈.”

그래. 성한빈 들어와.”

 

집안이 나름 깨끗했다. 밥은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 같아 한빈은 냉장고를 열었다. 장 보러 갈.

 

아니네. 혼자 마라탕도 시켜 먹었네.”

밥은 거르면 안 돼.”

 

누군 아파서 누워있고 일어나자마자 실종 수사하느라 밥도 걸렀는데 말이지. 한빈은 장하오를 찬찬히 살폈다. 조금 살이 빠진 듯 보여도 반반한 낯짝은 그대로였다. 냉장고 문을 닫았다. 거실에 드러누운 장하오의 옆에 앉았다.

 

가자. 가서 사람들 도와야지.”

안 돕고 지옥 갈 거야.”

지옥 가면 엄청 무서운 개들이 지키고 있대. 머리 세 개 달린 개가 막 잡아먹으려고 할 걸.”

개면 귀엽잖아.”

머리가 세 개인데도?”

너 얼굴 세 개 달렸으면 좋겠다.”

그게 뭐야. 이상해.”

귀여운 얼굴이 세 개.”

내가 귀여워?”

알면서 묻는 거엔 대답 안 할게.”

 

맞아. 알고 있어. 네가 나를 귀여워하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궁금해. 너는 왜 도망쳤을까. 나는 왜 네가 내 추억 속으로 도망쳤다고 예상했을까. 너는 왜 내가 말해준 장소로 도망친 걸까. 한빈은 손을 뻗어 장하오의 팔을 감싸 쥐었다. 단단했다. 단단히도 회피한 장하오는 아무리 가자 해도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팔 말고 얼굴 만져줘.”

뽀뽀해 줄까?”

응 그런 건 묻지 말고 막 해도 돼.”

 

엉금엉금 장하오의 다리 위로 올라간 한빈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쪽쪽. 깜찍한 소리와 함께 문틈으로 굉음이 흘러들어왔다. 안 가. 안 가도 돼. 안 갈 거야. 장하오는 다짐하는 것처럼 중얼대며 한빈의 상의 안으로 손을 넣었다. 배를 쓰다듬다가 잡히는 살이 없자 울상이 됐다.

 

살 빠졌어.”

고생했잖아. 장하오 때문에.”

나 때문 아니야. 다른 사람들 때문이지.”

 

하도 당당해 손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장하오는 한빈의 손길을 따라 하듯 저도 손에 힘을 줘 배를 꾹 눌렀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아프면 안 돼.”

그게 우리 일이야.”

그래서 안 하려고.”

아니지. 장하오는 내가 있으니까 안 아프잖아.”

너는 내가 있어도 아파. 무서워.”

무서워서 그랬어?”

 

점점 굉음이 가까워졌다. 가슴이 벌벌 떨릴 만큼 괴로운 옛날 생각에 눈물이 찍 고일 만큼 귀를 틀어막을 만큼 큰 소리가 벽을 울렸다. 장하오는 대답을 대신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랑 있으면 돼.”

“.....”

성한빈이 없으면 나도 없어.”

 

사랑한단 뜻이야. 장하오는 한빈을 바닥에 눕혔다. 다리 사이 자리 잡았다. 고백했잖아. 대답해. 얼른 대답해. 강요하면서 하나씩 옷을 벗어 던졌다. 등에 맞닿는 바닥이 흔들렸다. 귀를 찢어먹을 듯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지금 센터는 어떨까. 한빈은 이 와중에도 이런 게 떠올랐다. 아마도 너무 바쁘고 예민하고 막 대하고 있겠지. 장하오를 막 찾겠지. 기도하는 사람도 있겠지. 공격받아 뇌가 터지겠지. 녹겠지. 우리 모두 지옥에서 만나겠지.

 

 

영화 <앤드 오브 에반게리온> 모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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