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빈웹진: cinéclub

퓨처 라이브즈

딸기

 

<패스트 라이브즈>

 

To love someone is to identify with them.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그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문을 열자마자 비바람이 들이쳤다. 비행기 연착이 계속됐고, 간신히 뜬 기체가 완전히 내려앉을 때까지도 기상 악화로 몇 차례나 하늘 위를 빙빙 돌았다. 남자는 옆에 낀 것을 꽉 끌어안았다. 한참 전부터 아무 말도 없고, 차갑게 식어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이 마치 시체 같았다. 그저 폭풍 때문이겠거니 했다.

 

 

 

15일 전

 

엄마! 아빠는 언제 와요?”

 

아빠는 일 때문에 중국에 가셨어.”

 

중국? 많이 멀어요? 몇 밤이나 자야 하는데요?”

 

중국에 가려면 비행기도 타고 바다도 건너야 해. 그래서 당장은 오실 수가 없어.”

 

그래도 한빈이는 아빠 보고 싶은데…”

 

열 밤 지나고 다시 네 밤만 자면 오실 거야. 한빈이 선물도.”

 

! 아빠 빨리 오면 좋겠다.”

 

방 전체에 따뜻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잘 관리되어 먼지 한 톨 찾아볼 수 없는 카펫에 그랜드 피아노. 고풍스러운 소파와 테이블은 집주인의 안목을 짐작게 했다. 이제 여섯 살이 된 아이가 소파 위에서 까르르 발을 굴렀다. 잠시 시무룩했던 얼굴은 어디 가고 엄마의 다정한 위로에 금세 면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작은 손으로 짝짝 박수를 쳤다. 희고 보드라운 피부에 볼이 통통하게 차오른 얼굴이 누구라도 귀엽다고 칭찬할 만했다. 어린 한빈은 하루하루 아버지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이 주일이란 긴 시간 동안 아빠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은 여섯 살 먹은 아이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한빈이 아버지의 부재를 견디는 방법은 매일 밤 엄마와 함께 중국에서 날아올 자신의 선물이 과연 무엇일지 상상하는 것뿐이었다. 아빠가 뭘 사 오실까. 장난감 자동차? 로봇? 한빈이 몸보다 커다란 곰인형일지도 몰라. 그럴 때면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마음과 선물에 대한 기대감이 한데 섞여 가슴이 콩닥거렸다.

정확히 보름이 더 지나 아버지가 그들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옆구리에 딱 달라붙어 있던 것.

정말이지 그건 성한빈에게 있어 인생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

 

 

 

 

 

틱, 틱-

 

여자가 손톱을 깨물었다. 도착하겠다던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남편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자 남자의 부인은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으나 밖으로 드러나는 초조함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어린 한빈은 소파 위에서 커다란 쿠션을 안고 현관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미 창밖은 어둠이 짙게 깔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진 한빈은 안고 있던 인형을 더 꽉 끌어안았다. 불길한 밤이다.

 

쿵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에 불규칙적으로 카펫 위를 왔다 갔다 하던 여자가 황급히 현관으로 달려갔다. 동시에 한빈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거센 노크 소리에 맞추어 성인 몸무게만큼의 발걸음이 쿵, 쿵, 쿵, 다시 한빈의 작은 소리가 콩, 콩, 콩. 다급하게 문을 열어젖힌 엄마의 몸 뒤로 한빈의 아빠가 서 있었다. 다행이다. 문을 연 한빈의 엄마는 안도의 한숨을, 뒤따라나온 한빈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한빈의 아빠는 이 날씨에 우산도 없이 여기까지 온 건지, 옷을 입은 채로 샤워한 듯한 몰골이다.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만났어. 짐이고 뭐고 전부 잃어버리고 겨우 비행길 탔지. 난기류 때문에 꼼짝없이 갇힐 뻔했는데, 천운이 도왔어.”

 

그런 건 상관없어.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어.”

 

엄마가 아빠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빠의 무사를 확인했으니, 이제는 한빈이 나설 차례였다.

 

아빠, 선물은요?”

 

한빈의 기대에 찬 목소리에 남자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약간 비켜섰다. 그 바람에 남자가 몸으로 가리고 있던선물이 드러났다. 그것은 장난감 자동차도, 로봇도, 한빈의 몸만 한 인형도 아닌, 한빈 또래로 보이는 깡마른 남자아이였다. 순식간에 집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세상에! 이 애는 누구예요?”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남자의 아내로,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여자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강도를 만나서 죽을 뻔한 걸 이 애가 도와줬어. 거리를 떠도는 고아 아이라는데, 도저히 두고 갈 수가 있어야지.”

 

대체 어쩌자고…! 설마 이 애를 우리 집에서 키우자는 건 아니겠죠?”

 

남자의 말에 여자는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한빈은 동그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엄마는 아빠에게 화가 나면 존댓말을 쓴다. 그렇다면 지금 엄마는 굉장히 화난 것이다. 한빈은 언성을 높이며 아빠를 몰아붙이는 엄마를 한 번 봤다가, 쫄딱 젖은 채 변명하는 아빠를 봤다가. 마지막으로 아빠의 등 뒤에 가만히 서서 한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저 아이를 본다.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한빈은 한순간 움츠러들었다. 뻘겋게 날 선 눈이 퍽 형형해서였다. 눈으로 보기에는 한빈과 비슷한 나이였지만, 그와 한빈은 야생의 늑대와 부잣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고작 여섯 살 먹은 한빈이 인생에서 겪은 시련이라곤 갖고 싶어하는 장난감을 사주지 않아서 슬펐다거나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 저녁 식사 자리에 올라오는 일 따위, 그리고 아버지가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오늘의 불안 정도가 다였다.

그러나 남자의 정장을 꼭 붙잡은 채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고 있는 이 소년은 달랐다. 그는 하루 종일 굶어야 했던 적도, 도둑질을 하다 가게 주인에게 흠씬 두드려 맞은 적도, 깡패에게 쫓기다 크게 다친 적도 있을지 몰랐다. 지금도 눈앞의 가족들이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고, 이 상황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자각 때문에 본능을 억누르고 있지만 언제라도 거리를 나도는 들개로 변해 달려들지 모르는 위험한 존재였다. 그 모든 과거가 소년의 눈동자에 잠겨 있었다.

그럼에도 한빈은 그가 마음에 들었다. 아니, 그래서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받았던 선물을 모두 합쳐도 이만큼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 한빈이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다시금 두 시선이 교차한다.

 

안녕…”

 

한 걸음, 두 걸음. 사뿐사뿐 발을 옮기던 한빈이 팔을 뻗어 덥석 아이의 손을 잡았다. 오랫동안 밖에서 비를 맞은 탓에 손이 아주 찼다. 아이는 잡힌 손을 묵묵히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빈의 목소리에 그제야 엄마와 아빠가 시선을 돌렸다. 현관에서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여자는 서둘러 한빈을 안아들고 거실로 사라졌고, 남자는 한숨을 푹푹 쉬고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이의 낡은 신발을 벗기기 시작했다. 한빈은 가만히 안긴 채로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정리하는 아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비에 흠뻑 젖은 남자와 아이가 움직인 자리마다 물 자국이 남았다.

 

 

 

 

 

뭐 하던 애인지도 모르는데, 날더러 어떻게 키우란 말이에요?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애를.“

 

당신 힘들게 안 할게. 지금 오시는 아주머니 있잖아. 그분더러 좀 더 봐달라고 하지 뭐. 이름은 장하오래구, 나이는. “

 

잠시 말문이 막힌 남자가 그다지 좋지 못한 중국어로 몇 마디 하자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화의 내용을 짐작한 여자가 남편을 쏘아보았다. 남자가 변명하듯 빠르게 덧붙였다.

 

제대로 못 먹어서 삐쩍 마르긴 했지만 키나 말하는 걸 보면 약간이지만 한빈이보단 나이가 많은 것 같아.“

 

당신 정말…!“

 

그러니 한빈이보다 한 살 더 많은 걸로 하자.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야 돼. 알겠지?“

 

!!“

 

자, 봐봐. 한빈이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당신도 한빈이가 너무 애 같아서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않을까 걱정했었잖아. 한빈아, 이제부터 형이 한빈이 지켜 주겠네?

여자는 끝까지 내키지 않는단 표정이었지만 평소보다 이르게 잠을 청했을 뿐 구태여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에도 한빈이 남편이 데려온 아이를 꽤나 마음에 들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될 대로 되라지. 정말 그런 심정이었다.

 

 

-

 

 

장하오는 놀라울 정도로 똑똑했다.

첫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그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언어를 습득했다. 아직 말하기는 미숙했지만, 들리는 말만큼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핏 보면 말이 조금 느릴 뿐 그닥 특별할 점이 없었다.

 

한빈의 엄마는 장하오를 그리 반기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나게 차별하지는 않았다. 남편의 눈치가 보여서기도 했고, 어린아이를 괴롭히기엔 아이의 잘못은 없다는 양심의 가책이 작용한 결과였다. 남편이 주에 삼 일 오던 도우미 아주머니를 주 5일 근무로 늘린 터라 실제로 그녀의 손이 딱히 필요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점은 한빈이 장하오를 매우 잘 따른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생판 모르는 남과 이렇게 빨리 섞여들 수가 있는 건가? 남편이고 아들이고 전부 말이다. 아이의 신변이나 이런저런 처리는 최근에 남편이 맡아서 했다. 이제 서류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됐으니, 정말로 저 아이와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여자는 휴,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집에서 장하오를 꺼리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듯했다.

 

 

 

그 말대로, 한빈은 갑작스레 생긴 군식구를 친형처럼 좋아했다. 아니, 한빈에게 장하오는 친형 이상이었다. 장하오 역시 한빈을 정말로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말 그대로 하루 종일 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의 관계는 좀 묘한 구석이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문을 자아냈다. 친형제든 친구 사이든, 어디에나 크고 작은 싸움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특히 저 나이 대 아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거기다 툭하면 치고받고 싸운다는 남자 애들. 옆 동 누구네 집은 형제끼리 뛰놀다가 다리가 부러졌다고도 하던데, 한빈과 하오는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가끔씩 한빈이 떼를 쓰는 것을 제외하면 언성을 높이는 일조차도 없었다. 정말 단 한 번도 말이다.

 

바로 지금처럼.

한빈과 하오가 같이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읽을 때는 확연히 더듬거렸는데, 어느샌가 한빈과 비슷한 수준이 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애라는 걸 말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하오랑 한빈이는 어쩜 저렇게 사이가 좋아요?”

 

우리 애들도 저 둘만 같으면 좀 좋을까.”

 

한빈의 엄마는 조용히 웃음지었다. 또래의 남자아이가 생긴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에게는 중국에 있는 먼 친척의 아이를 대신 맡아 기르고 있다고 둘러댔다.

말하자면 분명 착한 아이였다. 한빈과는 잘 놀았고 고분고분 어른들 말도 잘 들었다. 눈치로 자신이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걸 깨달았는지 집에 있을 때는 발소리를 줄이고 돌아다니는 듯했다. 제 아들만한 아이가 벌써 기민하게 남의 기분을 파악하고 행동할 줄 안다는 게 가끔은 안타깝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어쩐지 거부감이 느껴진다. 여자는 역시 그날 밤 더욱 강경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

 

 

-

 

 

형아!”

 

아기 새는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마주한 존재를 어미로 인식한다고들 한다. 한빈에게는 장하오가 그랬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바다 건너 제게로 도착한 형이란 존재는 한빈에게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첫눈에 장하오에게 빠졌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건 자신과 완전히 다른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여운 강아지를 기르고 싶다고 부모님을 졸랐었지만, 이제 강아지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좋아하는 상대가 생겼으니까.

한빈은 병아리처럼 하오의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서로 말도 안 통하던 때부터 그랬다. 하오가 한국어를 빨리 습득한 데에도 한빈의 공이 컸다. 대화가 안 되니까 일방적으로라도 소통하려 했다. 저와 비슷한 덩치인 하오의 품에 안겨 작은 입으로 종알종알 어린이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 아직 한빈도 아이라 떠듬떠듬, 그마저도 여러 번 뜸을 들였지만 안 듣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때 기억이 깊게 자리잡은 탓인지 여전히 둘은 자주 함께 책을 읽었다.

 

 

 

일 년 뒤, 장하오가 학교에 입학했다. 처음 학교에 갈 때, 문앞에서 한빈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세상 떠나가라 엉엉 울어댄 탓에 한빈의 엄마와 도우미 아주머니 모두 학을 뗄 정도였다. 결국 한빈은 한 손에는 엄마 손을, 다른 한 손에는 장하오의 손을 잡고 교문 바로 앞까지 가서 그를 배웅했다. 교문에서도 울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어쨌든 그랬다.

 

둘의 관계가 역전된 것은 이때쯤부터였다. 이제부터는 한빈이 장하오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장하오가 없을 때는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이제 장하오 없이는 모든 게 재미 없었다. 동화책 읽는 것도,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도 전부.

다행히 곧 한빈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문제는 해결되었다. 수업 시간을 빼면 언제든 형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유독 순했던 한빈을 괴롭히는 아이가 있으면 장하오가 혼내 주기도 했다. 그러다 앙심을 품은 한 아이가 하오보다 덩치가 훨씬 큰 자기 형제를 데려온 일이 있었는데, 하오는 단번에 귀를 물어 버렸다. 피를 본 덩치가 엉엉 울어 버려 싸움은 어이없을 정도로 빨리 끝났고, 뒷일은 어른들의 몫이었다. 다만 한빈이 아는 것은 아빠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는 것과 엄마가 장하오에게 한층 더 꺼림칙한 눈길을 보냈다는 것뿐이었다. 사실 한빈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건 장하오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아빠는 모르는 둘만의 특별한 유대가 존재했으니까.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둘은 함께 잤다. 같은 이불 속에서 밤새도록 떠들다가 지쳐 뻗어버리곤 했다. 각자의 침대가 분리되고 장하오가 방에 가서 자게 된 것은 그가 중학생이 된 이후부터였다. 이제부터 방을 따로 쓰라는 엄마의 강력한 주장 탓이었다. 나랑 자는 거 싫어? 한빈이 반쯤 울먹댔다. 장하오 본인은 상관없다고 했지만확실히 보편적인 형제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침대를 떨어뜨려 놓는다고 해서 둘의 사이까지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한빈아.”

 

기다림은 짧았다. 한빈이 뒤따라 장하오와 같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그는 쉬는 시간마다 한빈의 반에 찾아왔다. 한빈은 여전히 장하오가, 형이 너무 좋았다. 장하오가 없는 세상은 여섯 살 이후로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꼭 장하오가 제 반쪽 같았다. 같은 몸에서 떨어져나온 하나의 영혼처럼 느껴졌다.

 

 

 

그게 이상해?

 

한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에는 같은 반 친구들이 앉아 있었다.

 

야, 그럼 안 이상하냐?”

 

친구들도 한빈과 장하오가 친형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니까 저러는 거였다. 둘 사이가 알려졌던 초등학교 때부터, 호모니 뭐니 하면서 놀리는 애들은 늘 있었다. 과거 장하오가 귀를 물어 혼내 주었던 형제도 그런 식으로 한빈을 괴롭혔었다. 그래도 머리가 크고 난 요즈음은 좀 덜했는데, 이럴 때면 한빈은 장하오의 이름을 확 성하오로 바꿔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냥 친형 같은 사이니까 그러지…”

 

누가 형이랑 그렇게 딱 달라붙어 다녀? 우리 형은 맨날 나 패는데. 컴퓨터 뺏으려고.“

 

한 명이 분위기를 주도하자 나머지가 끄덕이며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는다. 우리 형은 너네 형처럼 멍청하지 않아서 그래. 한빈이 속으로만 반박했다. 지들이 나랑 장하오에 대해서 뭘 안다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한빈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한빈은 학교에 영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비단 공부가 싫어서만이 아니라 친구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어릴 때 유치원에 안 보내서 그런 걸까 자책했지만, 한빈은 알고 있었다. 이건 다 장하오 때문이라는 걸. 학교에서 노는 것보다 그와 있는 게 훨씬 좋은데, 어떻게 이런 애들한테 정을 붙일 수 있겠느냔 말이다.

 

 

 

 

 

,”

 

반 애들의 참견이 이어져 내내 기분이 안 좋았다.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곧장 집으로 향했다. 장하오가 오늘은 일이 있다면서 먼저 가라고 문자했기 때문이었다.

집 앞 놀이터를 지나가는데, 구석 정자에서 장하오를 봤다. 반갑게 장하오를 부르려던 한빈이 걸음을 멈췄다. 장하오 옆에 모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한빈이 가서 아는 척을 해야 할지, 그냥 지나쳐야 할지 고민하던 때에 둘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조금씩, 조금씩두 얼굴이 아주 가까워지고, 입술이 맞닿기 직전에야 깜짝 놀란 한빈이 황급히 등을 돌려 집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쿵, 쿵, 쿵, 쿵. 필통, 교과서, 참고서, 문제집, 그리고 한빈의 마음. 덜컥덜컥, 메고 있던 책가방이 거세게 흔들리며 등을 때렸다. 정신 차리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그럼 이게 안 이상하냐?

 

기억나지 않는 목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렸다.

 

 

 

 

 

헉헉대며 집으로 들어온 한빈이 얼굴이 빨개진 채 숨을 몰아쉬었다. 누군가 지금 한빈을 봤다면 혹 열이 나는 게 아닌지 오해했을 것이다. 금세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정말로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한빈은 다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빨리 씻어내고 싶었다. 이 모든 걸.

 

 

 

수업 잘 들었어?”

 

거실로 나왔더니 어느새 장하오가 집에 와 있었다.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장하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다. 한빈은 장하오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물어볼까, 말까. 채 몇 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빈은 속으로 수없이 질문했다.

물어보자. 내가 잘못 본 걸지도 모르잖아. 또자신과 장하오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했다.

 

그, 방금 누구야? 앞에…”

 

소파에 앉아 이리저리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장하오가 고개만 들어 슬쩍 한빈을 봤다. 여전히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조금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왜지?

 

아아, 봤어? 내 여자친구.”

 

“…?”

 

장하오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쿵.

 

책가방도 없는데, 가슴이 내려앉았다. 한빈은 드디어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건 바로 나였다고.

형제끼리는 이런 감정을 품을 수 없다.

 

 

-

 

 

한빈이 장하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장하오 외에는 먼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도, 크게 애착을 가졌던 사람도 없었으니까. 단순히 엄마와 아빠 두 분 다 바쁘시니까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그와는 부모님을 뛰어넘는 심리적 안정감을 공유했다. 물론 한평생 형제처럼 지내온 장하오를 그런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죄책감도 상당했다. 한동안은 매일매일 가슴에 무거운 바윗덩어리를 달고 생활하는 것 같았다. 옆에서 뭐라고 말을 걸어도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핀잔도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성한빈도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마음을 조용히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 뒀다가, 자신조차 잊어버릴 만큼 긴 시간이 지나면 먼지처럼 사라지게 될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에 물어보니 이 시기에는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착각을 비롯해서 여러 혼란을 겪을 수도 있다고 그랬다.

 

그런데 장하오는 그냥 남자가 아닌데.

Re: 혹시 형을 좋아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나요?

미친놈이라고 욕먹고 삭제했다.

 

 

 

정자에서 목격한 장하오의 여자친구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고 했지만, 장하오는 금세 다른 여자친구를 만들었다. 제 방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한빈이 장하오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속 그의 여자친구를 본다. 이번이 다섯 번째던가, 여섯 번째던가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어째서 쉴 틈 없이 연애를 하는 건지 한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소문을 주워모은 결과 전부 다 여자 쪽에서 고백했다고 했다. 한빈도 몇 번 고백을 받아 본 적이 있었지만, 자신이 별 마음이 없으니 사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역시 이해가 안 된다.

언젠가 한빈이 직접 물어본 적도 있었다. 왜 그렇게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는 거냐고. 그 말을 들은 장하오는 픽 웃었다. 아주 어이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그냥? 내가 좋다잖아.”

 

나도 형이 좋은데. 그 여자들보다 내가 훨씬 형을 사랑하는데. 그냥 나로 만족해 주면 안 되는 거야? 그렇다고 자신이 형의 여자친구들처럼 무턱대고 그에게 고백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하오는 이번에 사귄 여친도 금방 갈아치울 게 뻔했다. 한빈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형은 내 마음 같은 건 꿈에도 모를 텐데징그럽고 소름끼친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나는 아직도 가끔씩 형 침대에 기어들어가서 노는데. 분명 변태 같다고 생각할 거야.

생각할수록 우울한 밤이었다.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은 한빈이 낮게 신음했다.

 

 

-

 

 

안타깝게도 장하오의 알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목격하게 되는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장하오는 부쩍 혼자만의 시간이 늘었다. 아빠에게 부탁해서 학원도 여러 군데 다녔다. 가져오는 성적표마다 죄다 1이 찍혀 있어서, 엄마는 흡족해하는 듯하면서도 제게 눈치를 주기 일쑤였다. 그런다고 장하오를 질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방향으로 속이 상했다. 그를 좋아한다면 축하하고 응원해 줘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한빈은 장하오와 보낼 수 있는 절대적 시간이 줄어든 것이 못내 속상했다.

 

여느 때처럼 혼자서 하교하던 중이었다. 장하오도 저와 같은 중학생일 때는 수업이 끝나고 형과 함께 하교하는 일이 잦았지만, 오늘은 장하오가 학원 가는 날이라서. 형이랑 산책하고 싶다. 이따 학원 끝나고 오면 나가자고 해볼까벌써부터 마음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딱 터지기 직전 풍선 같았다. 오늘따라 날씨까지 좋아서 산책하기 딱이었다. 가는 길에 장하오가 좋아하는 빵집에 들러 이것저것 주워담고, 고양이를 만나서 마구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날듯이 발걸음을 옮기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곳에서, 발견했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그러나 잘못 본 것일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한빈이 장하오를 잘못 볼 리 없기 때문이다. 장하오였다.

 

장하오가 골목 담벼락에 비스듬히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옆에는 딱 봐도 껄렁껄렁해 보이는 선배들과 함께였다. 평소 같았다면 그런 무서운 무리들,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눈을 피했겠지만, 지금은 그 안에 장하오가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이번엔 장하오도 한빈을 발견하고 눈이 마주쳤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한빈은 자욱한 담배 연기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형, 여기서 뭐해.”

 

야, 얘 뭐냐? 니 동생이야? 완전 귀여운데? 나 소개 좀. 짧은 치마를 입은 누나들이 장하오에게 한 마디씩 했다. 매캐한 연기 때문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래, 다조용히 해. 딱 잘라 여자들의 입을 막은 장하오가 무심하게 담배를 비벼 껐다. 처음 보는 얼굴.

 

엄마 아빠한텐 말하지 마.”

 

여기서 뭐 하냐구…”

 

집에 가자.”

 

장하오는 한빈의 손목을 턱 잡고 빠른 속도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뿌리치기 위해 잡힌 손목을 흔들었지만, 장하오는 놔주지 않았다. 빵이 담긴 종이봉투가 나머지 손에서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한빈은 장하오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우다니, 장하오가 그런 걸 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장하오는 모범생이 아니었던가?

아닌가?

 

학원에 있던 거 아니었어?”

 

장하오는 말이 없었다.

 

말 안 해 줄 거야?”

 

한빈이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자 장하오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냥 좀. 힘들어서.”

 

힘들어? 뭐가?”

 

서러워진 한빈이 금세 울상이 됐다. 지금 장하오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금은 귀찮아 보이기도 했다. 한빈은 그런 장하오의 모습이 섭섭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는 건 언제나 더 좋아하는 쪽이라고 했다.

 

형 이리 와봐…”

 

?”

 

아니 그냥안아주게. 형 힘들다니까.”

 

더 묻지 않기로 결정한 한빈이 장하오를 끌어안았다. 아직 한빈은 입어본 적 없는 고등학교 교복에서 옅게 남은 담배 냄새가 났다. 이것도 장하오 몸에서 나는 거라고 생각하니 퍽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이렇게 꽉 껴안고 있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장하오는 몇 초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품에 안긴 한빈이 제 가슴팍에 뺨을 붙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야 한빈을 밀쳐냈다.

 

떨어져. 끊을 거야.”

 

진짜? 진짜 끊을 거야?”

 

.”

 

어차피 그게 마지막이었어. 장하오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한빈은 기뻐서 보조개가 푹 패도록 밝게 웃었다. 역시 장하오는 겉으로는 세 보이지만 자신에게만은 좀 무른 감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런 점이 꼭 민들레 같다고 생각했다. 끈질겨 보이지만 속은 여리다.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 민들레라, 그가 어떤 행동을 했어도 민들레 같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치만 아직 입 밖으로 내기엔 좀 창피해서 직접 전하지는 않았다.

 

 

 

 

 

장하오는 정말로 담배를 끊었다. 이제 교복에서는 담배 냄새 대신 한빈과 똑같은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고, 대체제로 사탕을 물고 다녔다. 그 많은 사탕들은 전부 한빈이 선물한 거였다. 장하오를 안은 그날 이후로 왜인지 분위기가 좋았다. 둘 사이가 나빴던 적이 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정말 뭔가 좀 달랐다. 연락도 자주 하고(대부분 한빈이 보낸 것이었지만), 장하오도 부쩍 다정해졌다. 뭐랄까, 이런 게 썸같기도 하고. 히히 웃는 한빈의 볼에 홍조가 드리웠다.

 

실제로 최근 둘의 관계는 이전보다 더 말랑해진 감이 있었다. 콕 집어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장하오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이전보다 훨씬 바빠졌는데도 한빈과 보내는 시간을 늘린 것부터가 그랬다. 장하오에게 특별 취급을 받는 기분이었다. 용기를 낸 한빈이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주말에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장하오는 달력을 펼쳐 일정을 좀 보더니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날 밤 한빈이 들뜬 마음을 안고 쉽게 잠들지 못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다 먹게?”

 

한빈의 손에 들린 음식은 팝콘부터 나초 칩, 오징어까지 다양했다. 오랜만에 장하오와 데이트한다고 생각하니까 신나서 아무 거나 막 주문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다 또 살찐다.”

 

내가 그 얘기 하지 말라고 했지!”

 

장하오가 중학생이고 한빈이 초등학생이던 일 년 동안, 장하오와 떨어져 받은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어 버려 잠시 몸이 동그래졌던 걸 장하오는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 장하오는 정말로 이상한 일만 자세히 기억했다. 아빠가 아이스크림 안 사준다고 입술 댓발 내밀고 버텼던 거랑 줄넘기 대회 나가서 상 받은 거 그리고 바로 지금 이런 거 말이다. 이것보다 좋은 일이 훨씬 많았을 텐데도.

한빈도 뭐라고 반격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장하오는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르지 않았던 적이 없다. 한빈이 말이 없자 화가 난 줄 알았는지, 장하오가 한빈의 손가락 사이로 슬쩍 제 손을 밀어 넣었다. 왜애. 삐졌어?

 

나는 그때도 좋은데~”

 

장하오의 말에 한빈의 볼이 확 붉어졌다. 장하오는 그게 창피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겠지만, 장난스러운 장하오의 행동에 두근거려서였다. 한빈은 어설프게 장하오의 손을 잡은 채로 아직 광고가 나오는 중인 스크린만 들여다봤다.

 

 

-

 

 

영화는 그저 그랬다. 어릴 때 서로를 좋아했던 두 주인공이 멀리 떨어져 살게 되고, 어떻게든 만나 보려고 노력하지만 자꾸만 어긋난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후에야 다시 연락이 닿았으나 한 쪽에게는 이미 연인이 있다. 마침내 마주한 주인공들은 짧은 시간 서로에 대해 끌림을 느끼면서도 감정을 억눌러 결국 아무 일도 없이 헤어지게 된다는 시시한 이야기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란히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한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하오는 빈 간식 박스들을 쓰레기통에 넣고 있었다. 결국 다 먹었네.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얼빠진 한빈을 이끌고 영화관을 나올 때까지도 한빈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왜 마지막에 키스 안 했지?”

 

한빈의 말에 장하오가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라서 대답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여자한테 이미 애인이 있었잖아.”

 

그래도 흔들렸잖아.”

 

한빈은 어딘가 확고한 표정이었다. 얘가 왜 이러나. 장하오도 장단을 맞춰 이런저런 질문을 늘어놓았다.

 

그래? 넌 그런 상황이 되면 마음 가는 대로 할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응. 난 그럴 건데? 맹세해.”

 

우웅, 성한빈 그래써. 장하오가 억지로 혀 짧은 소리를 냈다. 애 취급 하지 마뾰로통해진 한빈이 볼을 부풀리자 장하오가 크게 웃었다.

 

 

 

영화만 보고 헤어지긴 아쉬워서 근처에 있는 퓨전 양식집에 왔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번뜩 할 말이 생각났다. 아까 영화를 보면서 생각난 말이 있었다.

 

근데 형 있잖아, 내가 어디서 봤는데.”

 

장하오는 말없이 계속 말하라는 듯이 눈짓했다. 파스타를 씹는 볼이 둥그래진 게 귀여웠다.

 

사람은 전생에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 얼굴로 태어나는 거래.”

 

음식을 다 삼키고 나서도 장하오는 딱히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빈이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럼 형은 어엄청 잘생긴 사람 좋아했나 보다. 그치.”

 

장하오는 끝까지 별 말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이내 화제가 바뀌고, 한빈이 했던 말은 공기 중에 흩어졌다. 이걸로 조금이나마 장하오를 떠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수확은 없었다.

 

 

-

 

 

집으로 돌아온 장하오가 거울 앞에 섰다. 한빈은 다른 쪽 화장실에서 씻는 중이었다. 맞은편에서 날카로운 눈매가 자신을 노려본다. 눈동자에 비친 제 얼굴은 한없이 싸늘하고 텅 비어 있다.

 

이 얼굴을?

이런 얼굴을 좋아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장하오가 낮게 조소했다.

 

 

 

 

 

썸 같던 기류는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장하오는 금방 다시 연애 사업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한빈이 고등학교 2학년, 그리고 장하오가 고삼이 되자 한빈은 그전보다 더 장하오의 눈치를 보게 됐다. 딱히 장하오가 그러라고 한 적은 없었지만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장하오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아닌 척해도 은근히 신경이 날서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말했다시피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다.

장하오는 서울의 명문대학교를 지망하고 있었다. 깐깐한 상담 선생님이 성적은 충분하니 걱정 안 해도 되겠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할 말 다 했다. 나한테는 이 성적으론 아무 데도 못 간다고 호통쳤으면서한빈이 축 처진 문어처럼 흐느적거렸다. 옆에서 장하오가 왜 그러냐고 물어봤는데도 좀처럼 힘이 나질 않았다.

 

 

 

한빈이 시들었던 이유는 아마 가까워진 이별을 직감해서였나 보다. 장하오는 1지망이던 대학교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리고 장하오가 합격한 대학교는 집에서 통학하기에는 어려운 거리였다. 장하오가 합격을 확인한 그날 한빈은 방에서 몰래 숨죽여 울었지만, 홀로 장하오의 졸업식에 찾아가 제일 크고 예쁜 꽃다발을 안겨 줬다. 사실은 민들레를 주고 싶었는데 민들레로는 꽃다발을 못 만든다고 해서 아쉬운 대로 노란색 장미랑 프리지아를 섞어 달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장하오가 옆의 친구를 툭툭 치더니 꽃다발과 함께 한빈의 허리를 끌어안고 사진 좀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너무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장하오를 봤는데, 그 순간 셔터가 눌렸다. 아, 진짜 바보처럼 나왔을 것 같은데한빈이 발을 동동 굴렀다. 한빈과 찍은 사진을 두어 번 확인하던 장하오가 이제 나가자고 한빈의 손을 잡았다.

 

친구들이랑 사진은 안 찍어?”

 

응? 응. 아까 다 찍었어. 가자.”

 

하오의 말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문 쪽을 향해 걷기 시작하자 뒤에서 장하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두 사람은 아무런 주저 없이 학교를 빠져나갔다. 한빈은 그런 장하오의 무신경한 모습이 기뻤다. 장하오를 부르던 사람 중 그의 전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

 

 

대학에 붙은 장하오가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자 한빈은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본인도 고삼이면서 공부는 뒷전이라고 엄마에게 혼나기까지 했다. 커다란 캐리어를 든 장하오가 대학 기숙사로 떠나던 날, 한빈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은 엄마의 못마땅한 표정도 신경쓰지 못할 만큼 감정적이었다. 집에 자주 올 거야? 한빈이 묻자 장하오가 한빈의 볼을 약하게 꼬집었다. 장하오의 이런 점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나 걱정돼?”

 

으응.”

 

아니. 형이 아니라 내가 걱정돼. 나 장하오 없이 어떻게 살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결국 한빈은 찔끔 눈물까지 흘렸다. 장하오가 한빈을 애기 다루듯 하며 꼭 안아주었고, 그제서야 장하오를 보낼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주말마다 올 거니까.”

 

꼭 와야 돼.”

 

알았어.”

 

 

 

하지만 갓 대학에 들어간 새내기가 주말마다 집으로 온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무슨 놈의 술 약속이 그렇게도 많은 건지, 그렇게 먹다간 도저히 간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은데도 매일같이 약속이 생겨났다.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새내기 환영회, 오티, 엠티, 개강총회, 학생회 회식, 동아리 뒤풀이, 그냥 동기 모임…… 한빈은 대학생들이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지 처음 알았다. 장하오의 인스타 스토리에 여자가 낀 술자리라도 올라오는 날엔 내내 신경이 쓰였고, 전부터 계속 주시하고 있던 여자가 장하오의 옆자리를 차지기라도 한 날엔 상처받아 잠도 잘 못 이뤘다. 자신이 장하오보다 한 살 어리다는 게 이렇게까지 싫고 미웠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장하오와 같은 곳은 다니지 못하더라도 그 주변에 있는 학교에는 꼭 합격해야 했다. 그리고 둘이서 자취하게 해 달라고 엄마 아빠를 졸라 댈 작정이었다.

 

 

 

 

 

야, 넌 진짜 인간 승리다.”

 

매일 밤 코피 터지도록 공부한 한빈은 엄청난 상승 곡선 그래프와 장하오가 봐 준 탄탄한 자기소개서로 장하오네 학교 근처의 대학에 합격해내는 쾌거를 이뤘다.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 무서운 학생주임 선생님까지 모두를 깜짝 놀래킬 정도였다. 그때까지도 장하오는 학교 기숙사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빈이 부모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함께 살 집을 구해 달라고 시위하지 않았다면, 아마 졸업 때까지 그랬을 터다.

 

한빈 뜻대로 둘은 같이 살게 되었다. 꽤 좋은 투룸을 구해 주셔서, 따로 말만 걸지 않는다면 서로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것 같았다. 장하오와 자신의 짐이 섞인 집안을 둘러보면서 한빈은 집이 더 좁았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부끄러운 상상을 했다.

 

 

-

 

 

장하오가 일 학년이던 때, 집에 자주 내려오지 않는다며 서운해했던 자신은 정말 바보였다. 한빈은 오히려 그때의 장하오보다도 더 바빴다. 그렇지만 장하오는 별로 서운해하지 않았다. 술이 떡이 되었을 때 몇 번 데리러 와주기는 했지만 딱히 혼내지도 않았고하오가 데리러 와 주는 게 좋아서 일부러 주량을 초과해 마시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무슨 정신으로 보냈는지 모를 대학교 첫 학기가 끝이 났다. 학기 내내 오직 술, 술, 술밖에 없어 성적이 개판인데다 하오와의 동거도 그리 즐기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때문에 종강하고 나서도 집에 가지 않고 여기에서 지낼 예정이었다. 엄마 아빠는 대학 생활을 즐기느라 그런 줄 아시지만, 실은 장하오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였다.

 

 

-

 

 

장하오의 생일이 다가왔다.

한빈의 생일에는 시험으로 바빠서 둘 다 제대로 챙길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장하오의 생일만이라도 성대하게 치러 주고 싶었다. 미리 사 둔 케이크에 초, 색색의 풍선까지 야무지게 불어 둔 한빈이었다. 이제 주인공만 오면 됐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겠다고 했는데.

 

왜 안 들어오지…”

 

그래도 아직 열두 시 전이었다. 내일이 되기 전까지만, 그때까지만 돌아오면 된다.

 

 

-

 

 

한빈은 불 꺼진 집 안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더는 시간을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정은 이미 애저녁에 지나 버렸다. 그리고 장하오는 아직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

문득, 차라리 장하오 혼자 기숙사에 살았던 때가 더 나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땐 장하오가 이렇게 자주 외박하고 지내는지는 몰랐으니까. 마지못해 확인한 시계는 벌써 새벽 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열두 시 되자마자 제일 먼저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직접 주문을 넣고 픽업해 온 케이크는 초에 불도 붙이지 못한 채로 방치되고 있었다. 이 케이크의 모습이 꼭 자기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게, 이렇게 외로운 일일 줄은 몰랐다.

 

 

 

대학에 와서 좋은 점은 자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누구나 한빈이 중국에서 온 친척 형이랑 함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는데, 여기에선 한빈이 누구인지, 어떻게 사는지 전혀 모른다. 그래서 장하오의 이야기를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같은 학과 동기들 모두가 한빈이 애절한 짝사랑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람이 남자이고, 한빈과 가족 같은 사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지만.

한빈은 동기인 우진과 함께 걷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오늘 한빈이 집을 나설 때까지 장하오는 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울어서 빨개진 토끼눈을 한 한빈의 사정을 궁금해했다. 한빈도 자신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털어놓고 싶었다. 우진은 한빈의 짝사랑 연대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제, 그 사람이랑 만나기로 했었거든. 그 사람 생일이라…”

 

그런데?”

 

“…안 왔어. 나 여기 올 때까지.”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거 다 알면서

속마음을 꺼내놓으며 다시금 속상했던 기억이 떠오른 한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우진이 조심스럽게 한빈의 어깨를 토닥였다.

 

사실, 널 좋아하는 애들은 많아. 너무 그 사람만 찾지 말고주변도 좀 봐 줘.”

 

그렇게 말하는 우진의 얼굴이 붉었다. 지금 보니 이 애, 순하게 처진 눈매가 장하오를 조금 닮았다.

 

 

-

 

 

한빈이 장하오를 본 것은 그의 생일이 지난 다음날이었다. 강의를 끝내고 느지막이 들어온 장하오가 한빈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한빈이 안녕. 성한빈은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너 화났어?”

 

어제는 왜 늦었어?”

 

애들이 생일 파티 해준다고 해서.”

 

나 기다렸는데. 연락이라두 해 주지…”

 

미안.“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어리둥절한 장하오의 얼굴에 더 화가 나서 말투가 세게 나갔다. 한빈이 자기가 뱉어 놓고 자기가 놀라서 헙 하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으음…… 고민하던 장하오가 툭 던졌다.

 

내가 너만 신경써야 해?”

 

쿵. 던진 쪽은 아닌데 맞은 사람만 넉다운이었다.

또다시 심장이 내려앉았다. 우리 관계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건 나뿐인 것 같다는 불안감. 이렇게 장하오와 멀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 한빈은 장하오가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 어떡해?]

 

집을 뛰쳐나온 한빈은 우진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우진에게 고백을 받았다.

 

 

 

 

 

[네 마음 받아들일게 대신 시간을 줘]

 

잠든 성한빈의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장하오의 눈이 차게 식어 갔다.

 

 

-

 

 

저기 저 남자 보이지? 양복 입은 사람 말야.”

 

일곱 살의 장하오는 두목의 손가락 끝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여행객들 지갑 훔치는 거야 진절머리 날 만큼 많이 해봤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자신이 약하다는 것 정도일까. 거리에서 구걸하는 어린애는 많았고, 두목은 그들을 전부 제 발아래 두고 싶어 했다. 손이 빠른 장하오는 두목에게 제일 맛있는 먹잇감이었다. 제가 훔친 돈을 서열 순서대로 나누고, 말단인 자신에게 떨어지는 건 고작 동전 몇 푼뿐이었다. 그게 항상 불만이었지만,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장하오가 배운 것은 그런 거였다. 뺏고, 빼앗기고. 속고 속이는 것.

 

그 사람이 바로 성한빈의 아빠였다. 두목네는 어리숙해 보이는 남자에게 접근해 혼을 빼놓은 뒤에 먼저 캐리어를 채갔다. 안에 든 게 꽤 쏠쏠했는지 이젠 지갑까지 노리기로 한 거다. 장하오는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고, 아이는 그동안 한 번도 해본 적도, 해볼 생각도 한 적 없었던 일을 하기로 했다.

 

저 사람들이에요! 쟤네들이 아저씨 가방을 훔쳐 갔어요.”

 

남자가 경찰을 불렀고 허울뿐인 순찰대가 쫙 깔렸다. 그리고 장하오는 남자에게 살려 달라고 빌었다. 자기가 말한 걸 들켰으니 이제 죽을지도 모른다고 온갖 불쌍한 척을 하면서 들러붙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자에게 저만한 아들이 있었다는 건 세상에 다시없을 행운이었다. 동정심을 제대로 자극한 게 분명했다.

두목 말로 캐리어에 값나가는 게 장난 아니게 많다고 했으니, 분명 돈이 많은 사람일 거라는 철저한 계산 하에 벌인 일이었다. 그저 그런 관광객이었으면 고발은 무슨 자기도 지갑이나 홀랑 털어먹었을 거다.

 

아저씨랑 같이 가자.”

 

잘하면 한몫 거하게 챙겨받을 수 있으려나 생각했지만, 설마 자신을 비행기에 태워서 한국으로 데려갈 줄은 몰랐다.

 

그리고 만난 성한빈. 여섯 살의 성한빈은 따뜻하고 천진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그 애가 미웠다. 거리에 있던 아이들은 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 똑같은 고아에 거지 신세였다. 대부분이 소매치기나 구걸을 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다. 그러다 누구 하나가 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뿔뿔이 흩어졌다가 수색이 잠잠해지면 다시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장하오는 그런 삶만 알았다. 하지만 성한빈은 달랐다. 매일 제때 나오는 따뜻한 밥을 먹고 푹신하고 보드라운 이불에 싸여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성한빈이 한없이 애틋하다가도 순식간에 어두운 감정에 잠식되고 마는 것이다

사실은 나도 이런 곳에서 살고 싶었을까?

 

아니, 당치도 않다. 사람은 딱 자기가 겪어 본 만큼만 상상할 수 있다. 내가 원했던 건 키가 자라고 덩치가 커져서 두목을 쓰러뜨리고 혼자 설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거였다. 이런 삶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성한빈의 하얗고 말랑하고 통통한 손가락이 천사처럼 내 손 위에 닿았을 때, 그때의 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경외? 동경? 박탈감? 열등감? 내 이 감정을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 잃어버린 순수. 그걸 양 손 가득 쥐고 태어난 성한빈을 시기하고 질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달았다.

한빈이 빛이라면 자신은 그림자. 그림자가 있기 때문에 빛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한빈을 낳은 건 그의 부모일지 몰라도 한빈의 순수는 지금껏 제가 지켜온 것이라는 걸. 자신이 성한빈 대신 귀를 물어뜯었기에 그는 여전히 때묻지 않은 순정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한빈은 그 순진하고 깨끗한 눈으로 누구도 아닌 나를 본다. 성한빈의 눈을 거쳐야만 비로소 장하오는 순수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순정이야말로 바로 자신의 차지였다.

 

 

 

제가 장하오로 남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아빠의 무신경함 때문이었다. 새로 생긴 다 큰 아들이라니 개명을 한대 봤자 누구에게도 안 먹힐 변명이었겠지만, 저를 성씨 집안에 편입시켰다면 엄마는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관심을 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하오는 그런 관심 따위 한 번도 바란 적 없었으므로, 이제 와선 한빈과 완전한 가족이 되지 않은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엄마가 자신을 싫어하는 데엔 분명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 해외에서 만난 고아가 살려달라며 좀 빌었기로서니 그걸 한국에까지 끌고 들어오는 아빠가 이상한 거지, 그걸 가지고 엄마를 탓할 순 없었다. 엄마는 장하오를 마음에 안 들어했을 뿐 원체 육아란 일에 관심이 없어 성한빈을 정성을 다해 키운 건 아니라서, 결과적으로 장하오와 성한빈을 이어 준 연결고리라 할 수 있었다.

 

형은 민들레 닮았어.

 

자신의 고등학교 졸업식 때 한빈이 해 준 말이었다. 장하오가 보기에 민들레는 잡초였다. 밟아도 악착같이 자라나고, 조건만 맞으면 아스팔트나 하수구 틈 사이에서도 필 수 있었다. 그런 주제에 꺾으면 금방 시들어 버리는 그런 꽃. 그래서 꽃다발로는 만들 수 없는, 절대 길들일 수 없는 꽃이었다. 없애려 하면 없애지지 않고, 손안에 쥐려 하면 순순히 잡혀 주지 않는다.

물론 한빈이 민들레의 그런 속성을 생각하고 저를 닮았다고 한 건 아니었겠지만, 장하오는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한빈은 제 본성을 모른다. 한빈에게만은 영원히 모르게 하고 싶다가도, 전부 고백한 뒤에 그를 가져 버리고 싶어지기도 했다. 한빈과 있으면 자꾸 오락가락 정신이 이상해졌다.

 

성한빈과 있었던 일이라면 그는 뭐든지 기억했다. 성한빈을 놀릴 때 쓰는 기억들 말고도 그가 했던 말, 행동, 손짓 발짓 하나까지 전부 머릿속에 새겨놓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성한빈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성한빈은 비밀을 숨기는 방법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그건 성한빈 대신 자기가 받은 능력이었다. 온몸으로 너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투명한 성한빈이 좋았다. 그러나 성한빈은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나? 장하오는 성한빈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게 성한빈에게 상처가 된다고 하더라도. 장하오는 할 수만 있다면 성한빈의 가슴을 열어 놓고 그 안을 속속들이 관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성한빈. 차라리 여자를 사귀지 그랬어.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화나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널 죽이면 너는 내 얼굴로 태어날까?

 

 

-

 

 

우진의 고백을 받아준 건 순전히 충동적인 감정 때문이었다. 밤이라 어두웠고, 그래선지 우진의 모습에서 언뜻언뜻 보이던 장하오의 얼굴이 유난히 더 선명했고. 자신을 짝사랑해 왔다던 이야기를 풀어놓는 우진이 꼭 자기 같기도 해서 더 마음이 갔다. 그렇다고 우진을 바로 좋아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일단 보류. 우진도 자신이 장하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해해 주겠다고 말했다.

우진은 네가 좋아한다는 그 형에게 고백이라도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펑펑 울었더니, 그럼 커밍아웃부터 천천히 시작해 보라고 조언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포기할 수가 있다고. 이걸로 그의 반응을 떠볼 수 있지 않겠냐고. 좋은 생각 같았다.

 

 

 

형. 나남자 좋아해.”

 

내가 그거 때문에 요즘 좀 혼란스러워서형한테 얘기하구 상담하려고 한 거야.

한빈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꺼냈다. 과연 이 말을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한빈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왜 그걸 나한테 말해?”

 

?”

 

왜 그걸 나한테 말하냐고.”

 

한빈은 혼란스러웠다. 나한테 아무런 관심도 없었으면서. 내가 너만 신경 써야 하냐고 했잖아. 그건 더 이상 나를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말 아니었어?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수는 있다. 그럴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만에 하나 장하오가 호모포비아라서 자신을 비난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장하오는 왜 화를 내고 있지?

 

왜 형이 그렇게 화를 내? 내가 형을 좋아한다고 한 것도 아닌데.”

 

뭐라고?”

 

난 진짜형 이해를 못하겠다.”

 

이해하지 마. 어차피 넌 나 이해 못해.”

 

왜 그런 식으로 말해?”

 

사람은 내가 아닌 타인을 이해할 수 없어. 그냥 받아들이는 거야.”

 

그 말을 들으면서도 한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장하오는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래. 네가 날 이해할 수 있을까? 배를 채우려고 도둑질을 했던 나와 네 아버지의 돈을 털고 사기를 쳐서 한국에 온 나 마음에도 없는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던 나와 누구보다 널 원하면서도 모른 척 딴청 피우던 나를 네가 진심으로 이해할 수있다고?

우린 하나지만 그래서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지구에서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듯이 성한빈도 내 모습을 전부 다 알 수는 없는 거다. 내가 성한빈을 사랑하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로.

 

그냥 말을 해줘. 형 생각이 뭔지. 지금 왜 이러는지. 혼자서 그러지 말고 좀 알려달란 말이야.”

 

나 더 화내기 싫어.”

 

그러지 말고…!”

 

한빈아.”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안 말해서 그래? 나 형 좋아해. 형만 사랑해. 이제 됐어? 이 말이 듣고 싶었어?”

 

한빈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렇게 말하면 배신감에 치를 떨든지 비난하든지 욕을 하든지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하오의 표정을 보고, 한빈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런 장하오의 반응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장하오는 한빈의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네가 진짜 나를 사랑하는 게 맞아? 우리가 너무 오래 같이 살아서 헷갈리는 거 아니고?“

 

아니야아니야,”

 

우리 좀 떨어져서 살자. 생각할 시간 필요해.”

 

장하오!”

 

그리고 너도 생각해 봐. 네 마음이 진심인지. 관성인지.”

 

그러더니 진짜로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한빈은 너무 놀라 장하오를 말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입만 벙긋거렸다. 지금, 지금.

 

떨어져 살자고…? 여기서 나가겠다는 뜻이야?”

 

응. 간단하게 짐 싸서 바로 나갈 거야.”

 

갑자기 어딜 가겠다는 건데.”

 

어디든. 이제 난 처음 보는 아저씨를 따라가는 것 말고는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던 부랑자가 아니야.”

 

잠. 잠깐만. 형, 가지 마. 형 갑자기 왜 그래…”

 

눈앞이 하얘졌다. 장하오는 꼭 오래전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럴 수는 없었다. 이렇게 바로 집을 나가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거였다. 그동안 계속 떠날 준비를 해왔던 거야? 나한테 아무런 말도 없이? 지금 장난쳐? 이건 아니잖아. 이건

이건 너무하잖아.

 

한빈은 사라지는 장하오의 등 뒤를 멍하니 응시했다.

 

 

 

장하오가 집을 나갔다. 그날 이후 수도 없이 많은 연락을 보냈지만 전부 무시당했다. 설마 날 차단한 건 아니겠지.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서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학교에 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옆에서 툭툭 쳐서 정신을 차려 보면 이미 강의가 끝나 있었다. 영혼을 빼 놓고 다니는 것 같은 한빈을 보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실연이라도 당한 거냐며 웃어넘겼지만 한빈만은 웃을 수가 없었다.

 

우진에게는 당연히 차였다. 아니, 내가 찼다고 해야 하나장하오 때문에 줄곧 우울해하는 한빈에게 우진은 그렇게까지 했으면 이제 그 사람은 잊는 게 나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한빈에게는 곱게 들리지가 않았다. 그게 우진의 걱정이란 걸 알면서도 애먼 데에 화를 쏟았다. 야, 니가 뭔데. 네가 뭐라도 돼? 그 말에 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조용히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갔다. 그 후 한빈도 우진을 찾지 않았으니 사실 이게 헤어진 건지 만 건지도 잘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있던 친구까지 잃고 나니 이젠 정말 수업 들을 맛이 나질 않아서 대학 정문까지 갔다가 그대로 집에 왔다. 같이 강의를 듣는 동기 몇이 어디냐고 톡을 보내왔지만 전부 씹었다. 한빈이 기다리고 있는 건 이런 연락이 아니었다. 힘없이 도어락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더니자기 방에서 이것저것 짐을 싸고 있는 장하오가 있었다. 형 뭐 해…? 한빈이 묻자 장하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너 수업 들을 시간 아니야?”

 

지금 그게 문제야? 내 연락 왜 안 받았어.”

 

이제 내가 싫어?

혹시라도 장하오가 그렇다고 대답할까 봐, 한빈은 차마 묻지도 못하고 질문을 삼켰다. 그런데도 장하오는 어디 한 군데 아프거나 힘들어 보이는 기색조차 없다.

 

왜 이렇게 말랐어. 밥 안 먹었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내 연락 다 씹어놓고?”

 

생각은 해 봤어?”

 

그리고 실실 웃으면서 한다는 얘기가 고작 저거다. 생각은 이미 너랑 니 여친이 입술 비빌 때 마쳤다. 이제 한빈은 알았다. 고백할 때에 최악의 거절은 바로 좋아한다는 고백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것이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솔직하게 말해 제발. 나한테 왜 이래?”

 

솔직하지 못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저게 끝까지. 한빈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말장난으로 자길 놀리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래서 성한빈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분노로 떨리고 있는 오른주먹을 꽉 쥐고, 그대로 휘둘렀다. 뻑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장하오의 왼쪽 턱에 주먹이 꽂혔다. 요령이 없어 세게 맞지는 않았지만, 위치가 좋지 않아 입술이 터졌다.

 

!

 

한빈의 어깨를 붙잡고 벽에 밀어붙인 장하오가 똑같이 주먹을 날렸다. 그동안 못다한 육탄전이 계속됐다. 한빈은 그간의 울분을 풀어내듯 장하오를 퍽퍽 치다가 제압당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몸을 버둥거렸다. 장하오가 제 밑에 깔린 한빈을 꾸욱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한빈아. 정말 내가 좋아?”

 

놔, 놓으라고!”

 

근데 그 남자는 왜 만난 거야?”

 

한빈아 제발 부탁인데 내가 널 죽이지 않게 해줘

장하오가 성한빈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하, 하하하. 장하오는 도대체 뭘까. 나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한빈은 모든 걸 속속들이 꿰고 있는 장하오가 두려우면서도, 그의 터진 입술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사랑한다는 말은 죽이고 싶다는 말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

 

 

아파.”

 

한빈이 먼저 때렸어.”

 

미안해…”

 

서로 다친 부위에 연고를 발라주다 말고 몸을 웅크린 한빈이 작게 훌쩍였다.

 

우리 요즘 왜 이럴까. 서로 상처만 주고…”

 

네가 나 사랑해서 그래.”

 

그럼 형은 나 안 사랑해?”

 

“…나도 사랑하지.”

 

응, 그렇지그래. 내가 성한빈을……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장하오는 제가 한 말을 곱씹으며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연고 발랐으니까 만지지 마. 한빈은 어른스럽게 약상자를 정리하고 이부자리를 폈다. 오랜만에 같이 잠들고 싶었다. 자, 이제 자자. 한빈은 제 방에서 베개를 들고 왔다. 싸우고 울고 나니까 이제는 자자니. 장하오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게진짜가족의 화해인 것 같기도 했다. 장하오와 성한빈은 이제야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정말로 씻고, 바로 누웠다. 어릴 때처럼 같은 이불을 덮고 서롤 끌어안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성한빈이 느껴졌다. 같은 바디워시와 샴푸를 썼는데도 온몸이 보들보들하고, 성한빈한테서만 우유 냄새가 났다. 어릴 때도 그랬는데. 성한빈은 정말로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형 잘 자. 응. 한빈이도.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고 눈을 감았는데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한빈도 조금씩 뒤척이고 있었다. 장하오는 자는 척을 하면서 한빈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자꾸만 이불을 썼다 내렸다 하며 움찔대던 성한빈이 개미만한 소리로 말을 걸었다.

 

형 있잖아…”

 

장하오는 대답하는 대신 움직이지 않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옛날에 내가 했던 말기억나?”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으니 점점 성한빈의 목소리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포근한 목소리였다. 언젠가 안녕, 하고 처음 말을 걸어 줬던 한빈의 인사가 겹치는 환청이 들렸다.

 

인간은 전생에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란 말 있잖아.”

 

 

 

그래서그니까…”

 

 

 

나 다음에는 장하오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형은?

 

자기가 자는 줄 알면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해오는 게 딱 성한빈다웠다. 겁 많고, 울음도 많은. 장하오는 성한빈이 자기보다 한 살 어려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성한빈을 이렇게 귀여워할 수는 없었을 거다. 너무 어렸다면좀 애새끼 같았을지도. 한참 숨을 고르던 성한빈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근데 우리가 너무 오래 같이 살아서 그런가, 나는 형을 처음 만난 것 같지가 않거든그럼 혹시 이 모습이 전생의 형이 아닐까 싶어지는 거야.”

 

 

 

그리고 나는 또 형의 모습으로 태어나겠지.”

 

 

 

약속할게. 다음 생에는 장하오로 태어나겠다고.”

 

성한빈의 달콤한 목소리가 솜사탕처럼 방 안을 채웠다. 장하오는 감격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성한빈은 자기가 자는 줄 알고 있으니 이건 가감 없는 한빈의 진심이었다. 내가 깨어 있었다고, 네가 한 모든 말들을 다 듣고 있었다고 고백하면 성한빈은 어떤 표정을 할까? 얼굴이 빨개져서 화를 낼까? 아니면 울까? 당장 방문을 열고 뛰쳐나가 버릴지도. 방금까지 치고받고 싸우다 겨우 화해한 참인데 또 골려 주고 싶지는 않아서 조용히 눈이나 감았다.

 

이젠 우리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것도 운명 같아.

그 모든 확률을 뚫고 널 만난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제 장하오는 자신의 과거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그건 한빈도 마찬가지인지 둘은 비슷한 시각에 눈을 떴다. 이미 해는 중천이었다. 비몽사몽한 한빈을 일으켜 간단히 아침을 차려 먹고, 혼자서 나갈 준비를 했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장하오가 채비를 하자 침대에 누워 있던 한빈이 몸을 반쯤 일으켜 장하오를 봤다.

 

어디 가?”

 

본가에. 잠깐 놓고 온 게 있어서.”

 

나도 같이 갈까?”

 

금방 다녀올 거야. 집에 있어.”

 

굳이 집에 성한빈을 데려갈 필요는 없었다. 가면 못 볼 꼴이나 보게 되겠지. 집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주소를 불렀다. 이젠 무엇보다도 익숙해진 주소였다. 성한빈과 만났던 곳. 성한빈과 살았던 곳.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한빈에게도, 나에게도. 이젠 독립할 때가 온 것이다. 완전히.

 

 

 

역시 손에 익은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가자 엄마가 거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오래된 프랑스 영화였다. 역시 고상하시다니까.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엄마는 상대가 자기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쩐지 아쉬운 듯한 얼굴을 했다. 장하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짐 가지러요. 엄마는 대답 없이 다시 커다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고, 장하오는 한빈의 방에 들어가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찾았다.

장하오가 찾던 건 한빈의 어린 시절 앨범이었다. 이 집에서 가치 있는 거라곤 딱 이거 하나뿐이었다. 장하오를 만나기 전의 성한빈부터, 장하오와 함께했던 성한빈까지. 이곳에 전부 담겨 있었다. 장하오는 옆구리에 앨범을 끼워 넣고 방에서 나왔다.

 

엄마.”

 

장하오의 부름에 엄마가 리모콘으로 영화를 멈췄다. 그들의 시간 역시 멈춘 것 같았다.

 

엄마가 날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다는 거 알아요.”

 

“…”

 

제대로 봤어요.”

 

?”

 

난 한빈이를 가질 거예요. 아니, 한빈이가 날 가진 거죠.”

 

그러니까 끼어들지 마세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여자는 드디어 이전에 장하오를 볼 때 느껴졌던 거부감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것은 어머니로서의 본능이었다. 장하오는 위험했다. 저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우리 가족에게, 그것도 한빈에게 제일. 저 말고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누구에게라도 알려야 했다. 삐리릭. 어느새 문밖으로 사라져 버린 장하오를 따라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오자, 방금 주차를 마친 차에서 성한빈이 내리고 있었다. 금방 다녀온다고 했는데도 굳이굳이 장하오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장하오는 손쉽게 계획을 바꾸었다. 못 볼 꼴, 그거 좀 보면 어떤가 싶었다. 뒤에서는 현관문을 열고 엄마가 따라나오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얼굴. 아니 화난 건가. 장하오는 옆눈으로 그것을 확인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성한빈의 품에 안겼다. 한빈아. 장하오가 부르자 한빈은 엄마와 자신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장하오는 여전히 한빈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다. 심장을 꺼내서 볼 수는 없으니 이런 방식으로라도 한빈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사랑이 상대 평가라면 한빈에게 자신은 가장 위쪽에 놓인 존재여야 했다. 한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장하오가 고개를 들자 둘의 눈높이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한빈은 멍하니 장하오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둘만 남은 기분이었다.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하지만 지금 저기에 엄마가

장하오가 속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안 해?”

 

…?”

 

이런 순간이 오면. 망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장하오는 기억력이 정말 좋았다. 한빈은 장하오의 목에 팔을 감고서 그대로 끌어당겼다. 생각해 보면 장하오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온갖 단서를 던져 가며 사람을 헷갈리게 하지만, 막상 먼저 고백하는 건 두려워하는 사람. 그런 그가 문득 귀여워져서, 한빈이 소리 없이 웃었다.

 

장하오와의 키스는 말랑말랑하고 촉촉하고 폭신폭신했다. 장하오 입술이 두꺼워서 그런 건가. 그럼 장하오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졌다. 그건 아마 다음 생에서나 알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혀를 얽을 때마다 철벅철벅, 질척한 물소리가 온몸을 돌아다녔다. 제 입안에서 나는 소리인데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장하오의 입안에서 나는 소리이기도 했다. 장하오와 제 몸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기분이 야릇해졌다. 몸에 열이 확 오르며 뜨거워졌다. 영원히 사그라들지 않는 열기 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한빈이 장하오를 끌어안은 팔에 더 세게 힘을 주었다.

탁탁탁, 희게 질린 발소리가 멀어져 간다. 장하오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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