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가 모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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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투게더>, <화양연화>의 장면 일부를 차용하였습니다.
네 목소리를 여기 녹음해.
너의 슬픔을 땅 끝에 묻어줄게.
-해피투게더(춘광사설) -
사거리에 사람이 북적였다. 신호등 불빛이 깜빡였다. 빠르게 줄어드는 카운트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장승처럼 선 한빈을 수군대며 지나갔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삶이 지긋지긋하다. 클락션이 울렸다. 고개를 퍼뜩 드니 어느새 신호등 위 홀로 서있었다.
“야 이 미친놈아! 빨리 안 건너?”
송장의 얼굴이 허둥지둥 생기를 띄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그를 둘러싼 승용차에게 굽신거리며 건너편으로 뛰어갔다. 턱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 했다.
붉은색 궁서체가 세로로 두껍게 칠해진 유리문 앞에 서 심호흡을 했다. 자꾸 정신이 한 곳으로 새나갔다. 아까 전 신호등에서의 일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미간을 꾹꾹 누르며 문을 당기자 소란한 세상이 열렸다. 무한리필 냉삼집 구석을 차지한 열댓 명이 일제히 이쪽을 쳐다봤다. 신침이 고였다. 바람막이 주머니 속 양손을 주먹쥐었다.
“한빈이 왔다!”
“성한빈! 왜 이제 오냐?”
“잘 지냈냐?”
술에 꼴아 제정신 아닌 놈들 반, 입을 가린 채 수줍게 인사하는 얼굴 반 이었다. 대부분 몰라보게 변해있었다. 전날 톡방에서 본 프사와 이름을 최대한 매치했다. 한빈이 웃으며 다가가자 꽉 차 있던 중앙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졌다. 주춤대니 팔목을 잡아 끌어 중앙에 제대로 꿰넣었다. 쏠리는 눈알 세례에 쓴침이 올라왔다. 곧바로 한빈 분의 맥주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잔을 잡고 몇 모금 마시자 야유가 몰아쳤다. 욕짓거리를 삼킨 뒤 눈을 감고 들이켰다. 박수와 환호가 몰아쳤다. 아. 지긋지긋하다. 피라미들…….
시간은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맥주 두 잔을 겨우 마시니 이젠 소주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부분 완전히 꼴아 있다는 것이다. 한빈이 지금 물을 마시는 지, 시계를 5분에 한 번 쳐다보며 집 갈 각을 재는 지 눈치채지 못했다. 어깨에 기대오는 동기들을 밀어냈다. 초조한 마음에 계속 때를 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순간이었다. 맞은편 유일하게 살아남은 반장 녀석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말이야. 너 기억나냐? 장하오?”
의미심장한 물음이었다. 술잔을 기울이던 놈들이 하나 둘 좀비마냥 흐느적거렸다. 알딸딸한 정신이 단숨에 맑아졌다. 한빈이 반장을 돌아봤다. 고3 시절 함께 다니다 대학 와서 멀어진 김진혁이었다.
“아아 전학 간 얼굴 반반한 짱깨?”
“알지. 기억나지. 얼굴이, 그걸 기억 못 하면 씹, 인간이냐? 내 구여친도 걔 때문에 어? 나랑 쫑났는데 씨이팔….”
한빈이 입술을 말아물었다. 괜히 남은 소주잔을 들어 입에 털어넣었다.
“어. 내 구여친도 걔 때문에 쫑 났었거든. 근데 걔 전학 간 이후로 단 한 번도 소식을 들은 적이 없거든 내가?”
“그르게? 걔 인별도 안하고 아무것도 안하고. 걔 전번 있는 사람 없냐? 면상이라도 보고 싶다.”
신발창에 껌이라도 붙은 듯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쓱하게 도로 앉아 그걸 다 듣고 있자니, 갑자기 이름이 불렸다.
“성한빈.”
술잔을 채우던 소주가 빗나갔다. 거스러미 떼어낸 자리가 따가웠다. 아, 씁. 반장은 성한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손을 훌훌 털며 청량히 되물었다. 응? 나 불렀어?
“너도 몰라? 걔 전학가기 전에 너랑 붙어다녔잖아.”
“…늬들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아냐.”
휴지 몇 장을 뽑아 손을 닦았다. 반 쯤 채워진 술잔을 버려 두고 일어났다. 하긴. 걔 중국으로 다시 떴을 수도 있겠다. 중얼거리는 반장의 말을 무시하고 계산대로 걸어갔다. 동창회 기념으로 초대된 일회성 단톡에 계좌를 쳤다. 카드를 받아들었다.
“벌써 가냐?”
“어, 미안.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계좌랑 금액은 톡방에 보내놨어.”
“그래 잘 가라. 하 씨팔 이 새끼들을 어떡하지…, 야 일어나.”
뻣뻣한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유리문이 원래 이렇게 무거웠나. 알콜내와 고기 누린내가 묻은 머리카락과 바람막이를 훌훌 털었다. 옷깃에서 묻어나는 불쾌한 냄새와 텁텁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가야할 곳은 명확한데,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다. 담배가 말렸다.
도어락 위에서 한빈의 손이 떠돌았다. 복도를 지나치는 여자는 한빈을 발견하곤 후다닥 계단을 올랐다.
꿈일 수도 있다. 근래 들어 악몽도 많이 꾸고 가위도 수 번 눌렸으니 생긴 이상현상. 또는 착시 현상. 또는 나도 모르는 새 발병한 조현병의 일환일 수도 있다. 용기를 갖자. 아무것도 아닌데 혼자 유난인 것일 수도 있다. 비밀번호 여섯 자리가 천천히 눌렸다. 낡은 철문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이 닫혔다.
“왔어? 오늘은 늦었네.”
“…….”
눈을 감았다. 차라리 꿈이라고 해줘. 눈을 뜨면 모든 게 신기루라고 해줘. 커다란 비눗방울이 울대를 막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관자놀이에 대못이 꽂힌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꿈이 아니라면… 그럴 리가 없잖아. 삶은 언제나 지독한 현실감에 절여져 있으니 이것 하나 구분 못 할 리 없다.
소파의 가죽이 눌리는 소리가 났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눈을 슬그머니 뜨니 왜 들어오지 않는가 묻는 듯한 얼굴이, 카시오페이아 자리의 점이, 쌍커풀 없는 눈이, 그를 이루는 모든 게. 선명했다. 명확히 보였다. 컨버스 뒤축을 눌렀다. 빠져나온 발이 원룸을 디뎠다. 갈피를 잡지 못한 입술이 오물거리자, 장하오가 웃었다.
코코넛 향이 불쾌한 냄새를 지웠다. 매일 한빈의 몸에서 풍기는 바디워시 향. 지금은 불쾌한 것들에 지워진 향이 장하오의 목덜미에 묻힌 코에서 진동했다. 등을 감싼 손이 느껴졌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지만, 냄새만은 분명했다.
“수고했어, 한빈.”
목소리가 낯설고도 익숙했다. 얼떨결에 등을 마주안았다. 손이 벌벌 떨렸다. 다시 눈을 감았다.
아니다.
이건 착각이 아니다. 가위에 눌린 것도, 언제나의 악몽도, 조현병도 아니다. 실제다. 진짜, 장하오다.
장하오가 다정히 웃었다.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한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기 냄새와 알콜내가 난잡하게 뒤섞여 맡아지는데도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한빈 이럴 땐 우는 게 아니라 다녀왔어, 라고 하는 거야.”
보고싶었다고 말하고 싶다.
***
둘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들 앞엔 맥주가 놓여있었다. 한빈은 이미 반 캔 쯤 비운 상태였다. 장하오는 캔만 따고 마시진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장하오가 기민하게 반응했다.
“안 마셔도 돼. 마셔도 안 취할 걸? 어쩌면 액체가 줄줄 흐르기만 해서 바닥이 더러워질 지도 몰라.”
“…마셔봤어?”
“아니. 그냥 상상.”
그 말에 답 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훨씬 전에 주량을 넘어섰으나 취하지 않았다. 장하오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장하오는 오늘 새벽, 갑자기 나타났다.
잠을 설친 한빈이 새벽 배송을 받기 위해 현관문을 열던 무렵이었다. 예상 못한 묵직함에 배송목록을 기억 속에서 뒤졌지만, 수면부족으로 이미 증발해버린 상태였다. 가물가물한 눈을 비볐다. 웬 남자가 쭈그려앉아 있었다. 택배 바로 옆에서 해마처럼 몸을 구기고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옆태를 목격하고 나선 지독한 악몽임을 확신했다. 아. 또 하루를 망치고야 말겠구나. 또 신호등 심장부에 멈춰 지긋지긋한 혐오에 휩싸이고, 알바 내내 실수를 하겠구나. 오늘도 불면으로 연명해야 하겠구나. 이젠 고루하게 느껴질 정도의 무의식은 죄책감 따위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었다. 한빈에게 그런 깊은 죄의식은 잠재조차 하지 않았다.
겨우 데운 자취방이 식어갔다. 처음엔 모를 수 없는 컨버스가 눈에 들어왔고, 다음엔 청바지, 다음은 흰 반소매, 말미엔 장하오의 얼굴이 보였다. 한빈은 확신을 부정하고 의심하고 체념하고 다시 의심하다 끝내 듣고야 말았다. 장하오의 음성이었다. 이전의 꿈에서는 들은 적 없던.
‘닫지 마, 부탁이야.’
‘…….’
‘나도 내가 왜 여기 있는 지 모르겠어.’
그 말에 한빈은 과거 장하오가 꿈에 나오면 어떻게 대처했는지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복기된 것은 사무친 감정 뿐이었다. 현관문이 서서히 밀렸다. 구겨진 장하오를 지나 어색한 몸짓으로 택배를 들여놓고 다시 손잡이를 잡았다. 목울대가 울렁였다. 냉기에도 식은땀이 새나왔다. 장하오는 여전히 구겨져있다. 아무 요구도 없었다. 환청이었나. 그래, 그럴리가 없지. 이건 꿈인데. 이제서야 변할 리 없지. 손잡이와 맞닿은 손아귀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장하오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케이크 박스에 아슬하게 붙어 달랑대는 폭죽처럼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부탁이라며.’
‘…….’
‘근데 왜 계속 그러고 있어.’
‘…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러고 앉아있냐고.’
장하오가 큼직막한 눈으로 한빈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정말 이상한 하루다. 꿈도 진화를 하나? 장하오가 한껏 움츠린 몸을 더듬더듬 세우고 접힌 무릎을 폈다. 비슷한 키. 나보다 조금 높은 눈높이. 카시오페이아 별자리처럼 수놓아진 점. 이상하다. 정말 이상해.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 같았다.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온 것 같았다. 장하오를 처음 본 순간도 아니고, 지금, 갑자기 연고 없이 찾아온 장하오를 만나기 위해. 어째서 여기있는지,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연락은 왜 없었는지, 왜 흔적을 지웠는지, 왜 실종됐는지, 이 집은 어떻게 알았는지 따위의 이성적인 질문이 떠올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한빈이 뒤로 물러섰다. 장하오는 장승처럼 서있었다. 희한했다. 인기척이 없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외로움도 함께 깜빡였다. 이질감이 입안에 가시처럼 돋았다.
‘계속 문을 열고있을 순 없어.’
‘…….’
‘그렇다고 형을 계속 거기 세워둘 수도 없어. 주민들이 신고할테니까.’
바깥을 응시했다. 노란 신호등이 깜빡이다 이내 점멸했다.
‘나, 들어가도 돼?’
‘별다른 방법이 없잖아. 어차피 이건 꿈이야.’
장하오가 입을 다물었다. 피색 컨버스가 조심스레 문턱을 넘었다. 바람처럼 속삭였다. 묘한 음성이었다. 순간 두피까지 쭈뼛 소름이 돋았다. 이건 익숙지 않다. 이 음성은 내가 알던 것이 아니다.
‘꿈, 아니야.’
꿈이 아니라면 현재가 말이나 되는가? 우습게도 대답할 수 없었다.
한빈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백열등이 느긋하게 작열했다. 현관문이 닫혔다. 숨을 삼켰다. 그림자가 하나 뿐이었다. 쓰게 웃는 장하오를 마지막으로 기억을 잃었다.
‘너 지금 실수하고 있는 걸 지도 몰라.’
그래. 정말 실수한 걸 지도 모르겠다.
눈을 뜨자 현관 조명이 보였다. 시퍼런 회빛이 스민 집안은 얼음장마냥 차갑고 딱딱했다. 눈을 깜빡이는 만큼 기억이 떠올랐다. 몇 시지? 몸을 모로 돌리자 가지런하게 모은 두 발이 보였다. 무릎을 굽혀 앉은 장하오가 한빈을 응시했다. 손목이 꺾였다. 어깨를 박았다. 발끝에 걸리던 택배가 밀렸다. 꿈이 아니다.
“요즘 잠을 못 자?”
장하오가 물었다. 회빛깔이 오묘하게 뒤섞인 존재가 한빈에게 기울었다. 손바닥이 드리운다. 목구멍에 무언가가 걸린 듯 한빈은 입을 뻐끔댈 뿐이다. 눈밑을 누르는 엄지손가락이 차갑다. 코코넛 내음이 물씬 풍겼다. 장하오가 한빈의 눈을 감겼다. 왼 눈꺼풀 위로 굳은살이 느껴졌다. 꿈이라면, 이 촉감은 뭐지? 겁 먹은 입가가 경련했다. 환각과 환청, 조현병같은 병명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장하오는 정성스럽게 한빈의 두 눈을 마사지하며 쓰게 웃었다.
“내가 실수하는 거라고 했잖아.”
엄지손가락이 떨어졌다. 장하오가 불쑥 일어났다. 부지불식간에 컨버스를 신고 현관 손잡이를 잡았다. 한빈은 그가 현관문을 닫고 떠날 때까지 눈을 계속 감고 있는 기분이었다. 장하오가 닿고, 그가 떠나간 모든 과정에 인기척이란 없었다. 멍하니 앉아있던 한빈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그가 박차고 현관을 뛰쳐나갔다. 복도 어디에도 장하오는 보이지 않았다. 우당탕 달려나갔다. 계단참에선 발목이 꺾였다. 눈물이 뺨을 적셨다. 말도 안되는 예감이 밀려왔다.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그러지 마. 가지마. 제발. 가지마. 빌라 정문을 지나 신호등을 건너고 미로 같은 골목을 지나 다시 사거리. 점심을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한빈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안돼. 안돼. 안돼. 안돼. 눈알을 바삐 굴렸다. 스텝이 꼬였다. 어디로 가야하지. 네가 어디에 있을까. 먼지덩이에 침투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떼어낸 손바닥은 눈물범벅 이었다.
“성한빈.”
한빈이 숨을 몰아쉬며 그를 바라봤다.
“아. 물어보는 거 안되지. 맞다. 근데 너 왜 울어? 아, 질문 그만.”
“…….”
나도 알아. 비현실적인 생각이라는 거 전부 안다. 어쩌면 망상, 환각 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겠지. 허공을 바라보며 우는 사람은 아무래도 일반적이지 않으니까. 그렇다해도 한빈의 시야는 오로지 장하오였다. 한빈은 첫만남을 회상했다. 햇빛이 쨍한 교실 맨 앞자리를 차지한 장하오를. 역광에도 뚜렷한 얼굴을. 묘한 눈과 처음 마주친 순간을.
“죽은 거지? 그런거지?”
한빈이 작게 읊조렸다. 눈물에 젖은 목소리가 불안정했다. 장하오가 입을 다물었다. 침전한다. 한빈이 팔을 뻗어 허공을 붙잡았다. 장하오의 소매가 늘어났다. 장하오는 잔뜩 까진 성한빈의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예상하는 모든 건 대체로 맞아떨어졌으니까.
“집에 가자. 응?”
눈물을 닦고 닦아도 마를 새가 없었다. 장하오가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떨구었다. 움켜쥔 주먹이 속절없이 떨렸다.
*
현관문이 열렸다. 회빛 하늘이 그새 맑은 청색을 띄고있었다. 한빈은 장하오의 팔을 이끌어 화장실로 들여보냈다. 우선 씻고 와. 단호히 말하는 한빈에게 그럴 필요 없다 대답하려다 말고 하오는 잠자코 샤워기를 틀었다. 미동 없는 물줄기를 애써 맞고 나오니 발패드 옆 개켜놓은 옷가지가 있었다. 거실 어디에도 한빈이 보이지 않았다. 젖지도 않은 몸을 닦는 시늉을 한 뒤 느릿 느릿 갈아입었다. 성한빈은 사라져있었다. 식탁 위엔 작은 메모가 있었다. 알바 다녀올테니 얌전히 있으라는 언질이었다. 그는 메모를 소중히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작은 투룸을 둘러보았다. 집안 곳곳 인생네컷이 가득했다. 지금보다 좀 더 앳된 성한빈이 모르는 남자와 활짝 웃고 있었다. 냉장고 위 동생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 티비 옆은 아까 봤던 남자와 대여섯이 한 데 모여 찍은 사진이었다. 여전히 친구가 많았다. 그럼 여전히 인형도 많을까? 방안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정말 인형 투성이인 침대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열어둔 창문 옆 책상이 눈에 띄었다. 정갈하게 정리해둔 충전기, 노트북, 다이어리, 그리고….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다이어리 위로 삐져나온 사진을 빼냈다. 새하얀 교복을 입은 하오와 한빈이 어깨를 둘러안고 어색하게 웃는 사진이었다. 다이어리 책등엔 장하오가 처음 전학 온 연도가 금박으로 박혀있었다. 옆으로 갈 수록 해가 바뀌었고, 펼치는 다이어리마다 장하오와 성한빈의 인생네컷이 한두 장씩 딸려나왔다. 어색했던 자세와 표정은 무섭도록 자연스러워졌다. 마지막 해엔 아예 뺨과 뺨을 맞대고 있었다.
하오는 사진을 원래 위치에 끼워넣었다. 한빈이 돌아올 때까지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집안은 어떻게 해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계절 내음이 창틀에서 새어나와 집안을 채웠다. 그는 계절에 갇혀 또 한 번의 죽음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다 현관 앞 인기척에 고개가 들렸다. 문이 더디게 열렸다. 고기와 술 냄새를 잔뜩 묻히고 온 한빈을 향해 애써 웃었다. 어깨에 얼굴을 박고 우는 한빈의 등을 어느 때보다 세게 끌어 안았다. 보고싶었어. 정말 보고싶었다.
“성한빈 이럴 땐, 보고싶었다고 하는 거야.”
*
몰랐는데 오늘이 마지막 알바였다고 한빈은 토로했다. 그간 정신 놓고 일해서 잘린 거라고. 이마 끝까지 달아오른 얼굴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상당히 피로해보였다. 손끝으로 캔 입구를 훑으며 장하오는 그의 일머리를 떠올렸다. 하루를 48시간 처럼 쓰고, 그 무엇도 소홀히 하지 않는, 총애 받는 학생이었다. 늘 웃을 줄 알았다. 눈밑이 꺼진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다. 한빈의 손가락이 선명하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마디마디를 구경하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큐티클과 어느 손가락의 손톱에 흠집이 났는지, 어느 약지 거스러미가 가장 매끈한지. 성한빈 그것도 몰랐겠지. 장하오는 그가 쓰는 한글로 한국어를 독해했다.
처음 성적표에 찍힌 숫자 ‘5’를 보고 뛸듯이 기뻤다. 성한빈은 그저 웃었다. 멘티 멘토로 한빈과 나란히 교무실에 불려가기 전까지 복도에서 신나게 5등급, 5등급 떠들었다. 초천재라 자부했다. 교무실을 나선 한빈은 잔뜩 미안한 얼굴을 했다. 장하오는 괜찮았다. 한빈의 배려심만 보였다.
한국어는 한빈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 때마다 당연지사 늘었다. 첫 기말에서 단숨에 한빈과 나란히 섰다. 다음 시험은 한빈을 뛰어넘고, 그 해 마지막 중간에선 놀랍게도 전교 15등 안에 들었다. 한국에서도 중위권인 인서울 대학이 이제 눈앞에 있었다.
그는 질투도 시기도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이 고작 1년 만에 전교권을 찍었는데 박수를 쳤다.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맛보는 성취를 성적보다 가치 있게 여겼다. 한빈. 한빈이 만들어준거야. 한빈의 품이 따끈했다. 한빈이 개척한거야. 대한민국의 장하오를. 장하오는 그 즈음 한국어로 사랑을 은유할 수 있었다. 중국어로 번역하여 노트에 수십 번 그려넣었던 어감, 목소리, 혓바닥이 굴리는 한글, 내미는 손, 눈빛, 혈색. 넌 사랑이 포괄의 단어라는 걸 알았고, 포괄적으로 성실했다. 그런데 왜. 왜 고작 나 하나 때문에. 나는 이제 너에게 그 무엇도 줄 수 없다. 해줄 수 없다. 소원을 들어줄 수도 없다.
“울면 어떻게 돼?”
“어떻게 안 돼.”
“울 수는 있어?”
“응. 근데 그거 왜 궁금해?”
“왜 안 우나 싶어서?”
“어?”
“슬프지 않아?”
장하오는 맥주캔을 따고싶었다. 그러자 뚜껑이 열린 맥주가 슥 밀렸다. 성한빈은 눈치도 빨라. 캔을 집어들었다. 한빈이 오기 전 커튼을 꽁꽁 닫아두길 잘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맞은편 빌라에서 캔이 둥둥 떠다니는 괴이한 광경을 목격했을 테니까. 건배를 했다. 탄산이 튀었다. 맥주를 들이켜는 한빈을 보며 취기를 마음 속에서 모사했다. 놀랍게도 나른해졌다. 아마 비행기 좌석에서도 그랬었지. 언제부턴가 한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흰자가 분홍색이다. 입술은 뻐끔거린다. 분홍 혓바닥이 호선을 그렸다. 성대를 주시했다. 튀어나온 목소리는 따끈하게 뭉개졌다. 서둘러 상을 물렸다. 멋대로 쏟아진 맥주가 한빈의 발치를 적셨다. 장하오의 옷깃이 멋대로 구겨졌다. 성한빈이 목놓아 울었다.
*
개같은 불면증.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이 뻐근했다. 눈꺼풀은 무겁고, 암막커튼이 쳐진 집은 온통 어둠이었다.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불빛에 눈알이 아렸다. 08:01. 여덟 시 일 분. 핸드폰을 껐다가 다시 켰다. 시간은 변함 없다. 이번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고작 일 분이 더 지났다. 그럴리가 없는데. 다음 날 저녁인가? 그럴리가 없는데.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상체에 힘을 주자 목소리가 들렸다.
“잘 잤어? 일찍 일어났네.”
장하오가 반대편에 누워있었다. 데자뷰다. 그러나 알 수 있다. 꿈도, 환상도 아니다. 분명한 현실이다. 기억의 전구가 깜빡이며 서서히 아침임을 실감하게 했다. 가슴이 뻐근했다. 장하오는 어둠에 가려져 흐릿했다.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그제야 장하오가 보였다. 침대에 편안히 동화돼있다. 아주 편안한 얼굴이었다. 장하오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왜 웃냐 물었다. 한빈이 뻐근한 광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형. 우리 나갈까?”
장하오는 분리불안 있는 강아지처럼 성한빈 주변을 빙빙 돌았다. 성한빈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묵묵히 쌓인 맥주캔을 치우고, 환기 시키고, 청소기 밀고, 먼지 닦고, 밀린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 돌리고… 해도해도 끝이 없었다. 마지막 쓰레기 봉투를 묶고 나니 허리에서 뼈 맞는 소리가 났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고 숨이 찼다. 아주 엉망으로 지냈구나, 성한빈.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자, 손톱을 딱딱 물어뜯는 장하오와 이마를 부딪혔다. 통증이 있을 리 없는데 괜히 이마를 붙잡고 그를 야렸다. 괜히 윽박질렀다.
“아 신경쓰이게 하지 말고 저기 앉아있어!”
“…한빈아.”
한빈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쓰레기 봉투 세 개를 들고 신발을 구겨신었다. 간신히 손잡이를 밀어내리다 말고 휙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등 뒤에 있었다.
“따라오지 마.”
두꺼운 철문이 무겁게 닫혔다. 장하오는 허망히 멈춰 떠나간 자리에 남아있었다.
5분이면 되는 일을, 성한빈은 10분이 지나도, 3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현관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아침을 끝없이 반추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무작정 거절했다. 잔뜩 토라진 얼굴로 집안일을 헤치우는 성한빈은 복잡해보였다. 손가락이 저릿햇다. 장하오는 갖춰지고 있었다. 간밤에 시작된 현상이라 추측한다. 눈을 감으면 죽음을 실감한다. 이 변화를 말하면, 성한빈은 과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까? 그의 영혼은 아직 너무나도 묵직했다.
장하오가 무릎을 세웠다. 발바닥에 무게가 서서히 실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있는 느낌은 단연코 구술할 수 없다. 그래서 희망고문할 수는 없었다. 연고 없는 땅에서 성한빈 하나만을 바라보며 적응했다. 모든 이가 외면할때 외면하지 않는 단 한 사람. 장하오의 모든 이유와 맥락과 계기는 성한빈이었다.
성한빈을 찾아야해.
생각하자마자 현관문이 열렸다. 묵직한 비닐봉지를 든 성한빈과 장하오의 육신이 부딪혔다. 얼얼한 엉덩이를 문질렀다.
“…아파.”
“괜찮아?”
놀라 달려온 한빈이 장하오를 일으켜 세웠다. 피부가 곤두섰다. 그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장하오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한빈아. 아침에 미안해.”
머릿속에서 온갖 계산이 스쳐지나갔다. 역광이 드리운 장하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 전과 달랐다.
“너가 나 신경쓰느라 피곤할 것 같아서 나가기 싫었어.”
붙잡은 손목이 미미하게 따뜻했다.
“거짓말.”
아랫입술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붙잡은 손에 악력이 실렸다.
“그때도. 지금도. 왜 맨날 거짓말만 해.”
실로 엄청난 감정이다. 살풋 웃는 장하오의 입가는 금방 다물렸다. 온몸이 무게에 짓눌렸다. 억울함이 성대를 비집었다. 한기를 토해냈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이명이 들렸다. 함께 죽은 이들의 비명, 체념, 주마등이 가슴을 찢었다. 한빈은 기에 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너지고 추락하고 짓눌리는 그를 봤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식은땀에 머리칼이 피부에 들러붙었다. 물이라곤 없는 곳에서 장하오는 익사 중이었다. 피부가 파랗게 물들고, 물을 뱉었다. 실감한다. 한빈이 알던 장하오는 없다. 장하오는 한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울음으로 살고있다. 그의 몸이 발악하는 전등처럼 깜빡였다. 생리적인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거부감이다. 장하오의 어깨에 손바닥이 닿았다. 겨우 무릎을 꿇자 바다냄새가 훅 끼쳤다. 그도 모르게 떨어트린 비닐봉지에서 금빛 복주머니가 햇살을 흡수했다.
집 근처 아무 무당집에 갔다가 돌려받은 오만원이 주머니 속에서 뭉개졌다. 한빈을 짠하게 보던 무당의 언질을 끄집어냈다.
‘소원을 들어줘.’
“소원을 말해.”
내가 들어줄게.
“그러니까 울지 마.”
사라지지 마.
‘손님도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무섭단 말야.”
푸르댕댕한 피부가 서서히 온기를 되찾았다. 깜빡이던 몸도 온전해졌다. 그가 한빈의 품에 쏟아졌다.
꿈은 없었다. 귀신에게 꿈이라. 가당치도 않았다. 이명과 주마등도 그 한 번이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했다. 죽은 자는 눈을 감는 순간 죽음의 얼굴을 알 수 있다. 그 대면은 아주 짧다. 추호의 시간. 이번 면담은 꽤 길었다. 마치 영원같았다. 관짝에서 나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생소하고 익숙한 감각이 아침인사를 했다. 목에 사하라 사막이 움 튼 감각이었다. 백 년 동안 쉬지않고 물을 마시고 싶을 만큼 갈증 났다. 배도 끔찍하게 고프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씹어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어났어?”
눈알이 얼얼했다. 직사광선은 고통스러운 거구나. 나는 지금 눈을 뜨자마자 온갖 고통을 겪고 있구나. 몸에 힘을 주자 허리에서 뼈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러니 정말 만화에 나오는 해골 귀신 같잖아.
생수통 하나가 얼굴 앞으로 내밀어졌다. 병뚜껑을 못따니 아예 따준다. 몸을 젖혀 끝없이 들이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빈은 경악했다. 그가 잠든 사이 서치의 힘을 빌렸다. 막 봉인이 풀린 귀신은 물부터 왕창 마신다는 미신을 잔뜩 봤다. 혹시 몰라 사오긴 했지만, 정말 2리터 물병을 한 번에 비워버렸다. 저러다 물귀신 되는 거 아닌가?
가벼워진 페트병을 든 장하오가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돌리고 꺾었다. 한빈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부지불식간에 페트병이 나동그라졌다. 왼뺨엔 붙같은 통증이 번졌다. 서늘한 공기가 뜨거운 뺨에 내려앉았다. 한빈은 화끈거리는 오른손을 주먹쥐고 있었다. 한빈이 싸늘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지끈.
어딘가에서 들린 소리였다. 근원지는 한빈의 턱뼈.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대들면 죽는다. 두 번 죽는다.
“아파?”
대답도 못하고 멍청하게 입만 벌렸다.
“멀쩡하네?”
“……."
“하긴 이틀이나 처잤으니. 멀쩡해야지.”
그렇게 많이 잤는지는 몰랐는데, 억울한데. 하지만 닥쳤다. 한빈이 이를 악 물었다. 하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돌아오는 건 페트병이 구겨지는 소리였다.
탁상 위 페트병이 가지런히 놓였다. 넓은 등이 굽어있었다. 처음엔 분노를 간신히 참는 줄로만 알았다. 그는 울음을 참고있었다. 슬쩍 보이는 옆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이전보다 날렵해진 턱선, 푸릇한 인중, 혈색을 잃은 피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한빈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알맞게 감겼다. 모질게 굴어봤자 결국 도로 다정을 베푼다.
“한빈아.”
“내가 어떤 마음이었겠어.”
“미안해.”
한빈이 몸을 돌렸다. 올려다본 얼굴은 울음을 참느라 엉망이었다. 잔뜩 붉어진 뺨과 눈물이 장하오와 다를 바 없었다.
“너는 왜 우는데.”
“미안해서.”
“미안해?”
“응.”
서로의 얼굴로 다른 온도가 오갔다. 한빈이 약간 부어오른 그의 뺨을 문질렀다. 완전한 불투명이다. 손등이 굽었다. 장하오가 소리를 질렀다. 아아악!!!! 미간이 잔뜩 성난 한빈이 볼을 찹쌀떡처럼 늘렸다. 눈이 번뜩였다.
“그럼 다물지 말고 설명해. 볼 찢어버리기 전에.”
“아라서, 아랏, 이거 노코, 노코!”
얼얼한 볼을 감싼 그가 허리를 굽혔다. 침이 바닥에 흐를 것 같았다. 화난 성한빈은 얄짤이라곤 없었다. 그저 존나 무서웠다.
“그러니까 형도 모른다고?”
“응.”
“…장난하나.”
입바람에 앞머리가 흐트러졌다. 하오는 무릎을 꿇느라 저린 발가락을 꼼지락 댔다. 한빈은 못마땅했다. 하오의 말에 따르면, ‘한국행 비행기를 타다 추락했다, 존나 무서워서 도중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눈을 뜨니 성한빈 집앞이었다, 성한빈을 보고싶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싶었다, 본인도 왜 사람처럼 변했는지는 모르겠다, 배는 이제 안 고프다, 근데 느낌 상 원하는 목표를 성취해야 하늘로 갈 것 같다.’ 가 끝이었다.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갑자기 사라지고 5년간 행방불명 되더니 알고보니 중국에 있었고, 모종의 불행한 가족사로 한국행을 결정했는데 그때 죽었다? 타인이 들으면 땅을 치며 통곡하고도 남겠지만 그들은 이미 많이 울어버린 상태였다. 비쩍 마른 멸치들이 할 수 있는 건 남은 감정을 해소하는 일 밖에 없었다. 한빈은 펴본 적도 없는 담배가 말렸다. 장하오를 기다리는 5년간, 여자친구는 커녕 남자친구도 만난 적 없다.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가져와 순식간에 반을 들이켰다. 지금 와서 말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건 확실했다. 그러나 장하오는 지금 귀신이고, 확실한 건 성한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오는 뚜벅뚜벅 걸어오는 성한빈을 멍하니 바라봤다. 늘 맑게 빛나던 눈은 여전했다. 찹쌀떡같던 볼을 흔적만 남았지만 여전히 하얗고 말랑해보이는 뺨도, 입술 근처 점도, 선이 고운 코도, 기다란 속눈썹도 여전했다. 성한빈은 마주 앉아 나머지 술을 들이켰다.
“소원을 말해.”
분명 저번에도 했던 말이었다.
“형이 바라던 걸 내가 들어줘야 하는 거 아는거잖아.”
“아마도?”
“들어줄게. 같이 죽자고 해도 솔직히 지금의 나로써는 좋다고 생각해.”
“성한빈. 그게 무슨 말이야.”
성한빈의 어깨를 붙들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위태로운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본 성한빈은 그늘이라곤 없었다. 갖가지 물건들이 널브러진 자취방과 어둠 아래 성한빈은 어울리지 않았다. 장하오의 죽음은 아주 짧았다. 고통은 1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도 강렬한 흔적을 남겼다. 자연사가 아닌 이상 성한빈을 이 감옥에 가둘 순 없었다. 한이 없을 가능성도 없거니와, 느낌이 왔다. 성한빈이 자신을 따라 죽는 순간 그들은 이승에 발이 묶일 것이다.
“한빈. 함부로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하오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는 간절했다. 다시 빛을 되찾아줘. 내가 너로써 한을 풀고가게 해줘.
“좋아해.”
그렇게 생각은 멈췄다. 성한빈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를 부여잡고 흔든 장하오만이 동하고 있었다.
“고작 이 한 마디가 5년이나 걸렸다는 게 믿기기나 해?”
이십대가 채 익기도 전, 그는 바텐더로 일한 적 있었다. 주량이 세고 친절하며, 입담까지 좋으니 지인의 입을 타고 찾은 조건 좋은 알바였다. 초로의 사장은 중후한 목소리로, 그와 어울리게 시를 읊는 채널을 운영하고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사장의 채널을 구독한 한빈이 실로 감탄을 자아냈다. 얼음을 조각하던 사장은 초짜 시절, 빗나간 송곳이 살갗을 스친 순간의 아찔함이 시와 닮아있다 답했다. 경력 30년이 넘는 사장의 손놀림은 섬세하고 냉정하며 때론 과격하게 정조준 하여, 초짜 시절이 상상도 채 되지 않았지만 한빈은 위스키를 들이킨 것 마냥 속이 뜨거웠다. 알바 마지막 날 사장은 한빈에게 투고한 시 한 편이 실린 시집을 선물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일요일이었다. ‘잠이 오지 않으면 차를 마시며 필사해봐. 그렇게 날을 지새우는 방식은 나쁘지 않아.’ 그때부터 시집을 모으기 시작했다. 또 다른 두 달이 지나자 사장의 채널이 사라졌다. 바를 다시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그 뒤로 소식은 모른다. 그의 시집만이 한빈의 자취방 구석에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자그마치 스물둘의 일이었다. 장하오가 혈중농도 백퍼센트로 남아 혈류를 뒤집던 시절이었다.
한국에 왔는지도 모르고 교감만 하다 떠나보낸 그 얕은 관계를, 한빈은 몇 년 묵은 숙취라고 생각해왔다. 때론 궁금했다. 이게 사랑이 맞나? 뒤늦게 읽은 모 소설, 단편집의 명문처럼, 연애같은 우정이었던 것 아닐까? 물음은 내내 맴돌아 스물셋에 해답을 찾고 서서히 바스라졌다. 정의 따위 필요없다. 내 사랑에 서사는 힘을 내지 못한다. 가지런하게 모은 네모난 손끝이 그리웠고, 깊은 눈은 감는 법 없이 밤마다 날 뚫어져라 쳐다봤다. 망가진 삶은 한빈의 의지였다. 그는 장하오가 돌아오길 끝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그래도 돌아왔으니까 그건 됐어.”
장하오가 나를 부정한다고 해도, 그의 혼의 길이 명징한 정답을 표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장하오가 성적으로 한빈을 뛰어넘었을 때만이 예외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성한빈은 지금 승리를 확신한다.
“운명이라고 들어는 봤나?”
고백받는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표정에 변동이 없었다. 굳은 걸까. 예상하지 못해서?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이미 단념했다. 무서워서 어쩔건데. 시간이 끝난 이에게 전하는 박동. 그건 생명을 주는 것.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장하오가 사라지고 5년간 망가진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니까, 대답해. 나는 지금 운명을 증명하고 싶어.
화답하듯 장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아. 중국어로도, 한국어로도. 근데 성한빈, 너 알고 있잖아. 한국어는 너한테 거의 다 배웠어. 내 선생님은 담임도, 엄마도 아닌 너였다.
굳은 표정에 조그만 가로선이 생겼다. 입꼬리가 어색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너무 늦었나?”
숨결이 콧등에 닿을 정도로 엉성한 목소리였다. 장하오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서툴면 나는 능숙해진다. 입꼬리가 매끈하게 올라갔다.
“아니. 하나도.”
“정말?”
“응. 우리한테 시간이 의미가 있어?”
한빈이 허탈하게 웃었다. 없지. 없어.
***
나태하게 핸드폰을 하던 알바생이 종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서오세요. 과자 코너 위로 두 명 머리가 툭 튀어나와있다. 한 명은 후디를 뒤집어썼고, 한 명은 갈색 머리였다. 컴퓨터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두 시였다. 이 시간에 과자를 먹네, 속으로 감탄하며 그들을 기다렸다. 남자 두 명이서 가져온 과자는 고작 영화관 팝콘 한 봉이었다. 잔돈을 내밀며 고개를 든 알바생이 숨을 삼켰다. 감사합니다. 친절한 미성이 흩어졌다. 아, 안녕히 가세요. 알바생이 뒤늦게 숨을 틔웠다.
“존나 잘생겼네….”
핸드폰을 집어들며 구석 씨씨티비를 확인했다. 미성의 후디가 누군가와 얘기하며 멀어져갔다. 씨씨티비를 유심히 보던 알바생의 무릎 위로 핸드폰이 떨어졌다.
“뭐, 뭐야 씨발?”
갈색 머리 남자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굳어있던 알바생은 급히 핸드폰을 줍고 카톡방에 들어갔다.
***
과자를 찬장에 넣어둔 한빈이 움찔했다. 어깨를 붙잡은 하오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지금 보자.”
“영화?”
“응.”
고백 이후 내내 이야기하고 부끄러워 하다보니 이 시간이었다. 퍼뜩 정신이 든 한빈이 그래서 소원이 뭐냐고 묻자 곰곰히 생각하던 장하오는 춘광사설 이라고 말했다. 영화관에서 보고싶다는 게 소원이었다. 춘광사설은 1997년 작으로 재개봉 해야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시대가 변하면서 젊은이들이 왕가위를 찾으며, 수많은 오티티에 왕가위전이 수개월간 펼쳐지고 있었지만, 시네마는 모르는 일이었다. 역시 CGV나 메가박스 같은 거대자본이 투입된 시네마에서는 왕가위의 이응 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심각한 얼굴로 골몰하던 한빈이 sns를 뒤지다 환호했다. 있었다. 인천의 작은 독립영화관 이었지만, 춘광사설이 아닌 화양연화 재개봉 이었지만, 여튼 있었다. 그렇게 합의한 결과가 오티티로는 춘광사설을 보고, 예약일에 맞춰 화양연화를 보러가는 것이었다.
한빈은 야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불면증이 중증에 이르렀을 때도 뭘 씹어먹기보단 취해서 잠드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지금 상황이 다소 어색했다. 넷플릭스를 틀고 거실에 나란히 앉아, 술 없이 과자만 펼쳐있는 오전 두 시 반.
“시, 시작한다.”
“응.”
오프닝시퀀스부터 장하오는 급속도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빈은 처음 보는 영화였다. 시작하자마자 들려오는 민망한 장면에 어깨가 굳었다. 장국영과 양조위의 거친 숨소리가 거실에 울려퍼졌다. 한빈의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동자를 도륵 굴려 장하오를 바라보니 그도 민망하게 웃고있었다.
“형. 알고있었어?”
“아, 아니.”
그러곤 삐그덕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번갈아 가며 헛기침을 한 번씩 하니 스크린의 두 남자는 이미 파국을 맞은 뒤였다. 한빈은 순식간에 흘러가는 미장센에 빨려들어갔다. 가난한 연인이 아르헨티나의 팔팔 끓는 아스팔트 위에서 헤어졌다. 이과수 폭포를 목전에 두고 길을 잃은 탓이다. 그들은 수 년 뒤 다시 재회한다. 한빈은 캬라멜이 끈적하게 달라붙은 치아를 쓸며 장하오를 바라봤다. 알아들을까? 장하오는 홍콩사람이 아니지만 조금의 광동어를 할 줄 알았다. 한 유명한 영화의 명대사를 따라했던 장하오. 그건 마치 핏줄에 새긴 문신의 흔적처럼, 혈류를 오래 떠돌다 응어리 진 염증같았다. 5년 전의 기억이지만. 그러니 다 잊어버린 척 물을 수 밖에.
“형.”
“왜에, 성한빈. 나 집중해.”
“광동어 할 줄 알아?”
“조큼? 버스에서 아저씨한테 내려달라고 밖에 못해.”
“에이, 뭐야.”
그 즈음 양조위가 술병을 집어던졌다. 날카로운 파열음에 장하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들썩이는 장국영에 한빈이 동요했다.
“와. 서럽게도 운다.”
“너도 저렇게 울었어.”
“내가? 언제?”
“삼일 전에.”
“참나. 그럼 형은 아예 몸이 젖었으면서.”
“어쩔 수 없었거든.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거든. 초현실적인 거거든.”
“형 공부 잘했으면서 그런 것도 논리적으로 설명 못해?”
“성한빈 날 놀려?”
“틀린 말 했나.”
장국영이 시계를 훔치는 동안 그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좁다란 골목길을 배경 삼아 다퉜다. 곧 폭포같은 웃음이 터졌다. 서로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웃었다. 이제 집중하자. 진짜.
영화는 대체로 흑백이었다. 드라이아이스에 뜨거운 물을 부은 것처럼 이과수 폭포의 수증기는 굉장했다. 중간중간에 회상하듯 나오는 자연은 왕가위 특유의 떡진 초록이었다. 한빈은 그들이 살아내는 삶을 관전하며 장하오와 숨을 쉬었다. 피떡이 된 장국영이 나타났을 때는 장하오의 손등을 잡았다. 손가락은 저절로 엉겼다. 과자에 손도 대지 않은 감촉이 상쾌했다. 괜히 신경쓰여 손가락을 빼내려 해도 놓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자.’
장국영의 음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건 알아들어?”
“응.”
“말할 수 있어?”
무릎에 파묻힌 발음이 웅얼거렸다. 장하오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我們重來.”
“…오.”
“…留在我身边.”
“그거는 무슨 뜻이야?”
리모콘 소리를 다시 키운 장하오가 중얼거렸다. 심장이 점점 크게 뛰었다. 아 왜이러지.
“나랑 같이 있어줘.”
깍지 낀 손에 땀이 찼다. …영화 괜히 틀었다. 명대사 수십 개가 흘러나왔지만 장하오만이 보고 들렸다.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이렇게 옆에 있는데, 이렇게 만져지는데.
“거짓말.”
“거짓말?”
“떠나기만 해봐, 먼저.”
“…….”
“진짜 그러기만 해봐. 놓아주나 봐, 내가.”
땀이 차든 말든, 손바닥이 끈적해질수록 한빈은 닿아있는 느낌에 집중했다. 입을 맞추고 싶었다.
***
영화관은 조용했다. 조조에도 중년보다 청년층이 더 많았다. 간혹 10대처럼 보이는 학생들도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오는 곳이었다. 좌석은 f열 10, 11. 중앙에서도 가장 중앙이었다. 메가박스로는 하루만 재상영한다고 하여 겨우 예매한 좌석이었다. 광고도 시작하지 않은 스크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벽에 먹은 팝콘 때문에 속이 더부룩했다. 물을 마시자니 중간에 화장실을 갈까 싶어 한 모금도 신중한 상황이었다.
오늘의 영화는 화양연화. 양조위를 연이어 보는 주간이다. 장하오는 누구보다 신난 듯 흥얼거리며 안경 렌즈를 벅벅 닦았다. 귀신도 눈이 안 보일 수가 있나? 막 광고가 시작하려 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한빈을 향해 손을 뻗어오던 장하오가 멈칫했다.
“한빈, 전화.”
“어?”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핸드폰을 딱 붙였다.
“나 영화관이야. 이따 전화할게.”
- 너 지금 장하오랑 있어?
한빈의 눈알이 불안하게 굴러갔다. 장하오는 이 대화를 들을 수 있을까? 다행히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기다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흡사 소가 달음박질 하는 것 같았다. 비상구 한 곳에서 멈춰 선 한빈이 숨을 골랐다.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붙잡듯 넘겼다.
“김진혁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지인이 꿈을 꿨어. 장하오랑 네가 같이 있는 걸 봤대.
“그래서 뭐. 지인이 무당이라도 돼?
-어. 맞아. 무당이야.
도통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코끝에 냉삼겹집에서 풍기던 누린내가 스쳤다. 알코올 냄새가 지독했다.
‘장하오, 지금 뭐하는 지 알아?’
‘네가 가장 친했잖아.’
그때부터 알고있었나.
-너, 장하오를 들였어?
“알아듣게 말을 해.”
비상구 손잡이가 덜컥였다. 한 층 더 내려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김진혁이 실소했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지 말고 한빈아.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관에 걔랑 같이 갔잖아 너.
“그래서. 용건이 뭐야? 왜 갑자기 연락한거야?
-야, 열내지 말고 들어. 너 자그마치 5년간 제정신으로 못 산 거 나도 알아. 그거 다 운명 때문이야. 장하오랑 너랑 이어져있대. 이상하게 인연이 일대일이래. 근데 장하오는 단명했으니까, 운명이 널 붙잡은거고. 알아들어?
김진혁은 이상하게 차분했다. 어지러웠다. 그러니까, 장하오를 만난 그날부터 이렇게 될 예정이었다. 김진혁이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빈아 너한테 장하오만 있었던 거 아니잖아. 나도 있었잖아.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어?
“난 장하오 못 보내. 나는, 난……”
-어. 알아. 너 못 보내. 그러니까 지금 소중히 대해. 소중히 시간을 보내.
김진혁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들은 과거에도 별 것 아닌 기승전결 속에서도 서로를 애틋해했다.
“소원을 잘 들어주고, 잘 보내주고.”
-…….
“그런 다음에 너도 돌아와 이제.”
김진혁은 성한빈을 잃은 5년을 두고 두고 되갚고 싶었다. 성한빈은 강렬한 운명에 심취해 고3 시절 그의 존재가 그다지 영향이 없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다. 버스 안에서 줄이어폰 하나로 케이팝 반절 씩 나눠듣던 걸 모른 척 지나갈 수 있던 건 성한빈은 빛나는 존재라서. 그것 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사소한 것 하나로 이어지고 교감한다. 그게 섭리다.
-장하오 얼마 안 남았어,
성한빈이 고개를 반짝 들었다.
-악령이 될 운명이 아니라 모든 게 빠를거야. 내가 말하는 소원은 장하오만의 소원이 아니야. 너희는 이상하게 일대일 이니까, 장하오의 소원은 곧 네 소원이야. 영화 잘 보고. 끊는다.
매정한 전화였다. 계단을 오르내리던 행인이 그를 힐끗 쳐다보며 스쳐갔다. 오래간 그곳에 서있었다. 마치 지박령이 된 것 같았다. 문득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광고가 끝나기 채 5분도 남지 않았다. 계단을 빠르게 올랐다. 좌석에 앉아 숨을 고르니 장하오가 생수를 건넸다. 곧 사방이 암전되었다. 강렬한 붉은색이 시야를 압도했다. 곧 까만 바탕에 소설처럼 글귀가 떠오른다.
‘난처한 순간이다. 여자는 수줍게 고개를 숙인 채 남자에게 다가올 기회를 주지만, 남자는 다가설 용기가 없고, 여자는 뒤돌아선 후 떠난다.’
그는 무척이나 슬픈 얼굴이다. 미세한 미소로 그것을 감출 수 없었다. 한빈은 손등을 덮은 손바닥을 고쳐 잡았다. 장만옥과 양조위의 대담이다. 비에 젖은 봄꽃잎처럼 피어나고 싶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 영화에선 비가 많이 왔지만, 장하오와 성한빈은 쾌적하게 맞잡은 손끝에서 피어났다. 영화는 지지부진했으나 사람을 끌어당겼다. 미장센의 힘은 실로 엄청났다. 불륜을 연기하다 완전히 그들을 이해한 남자와 포기한 여자. 장하오는 그렇게 읽혔다. 한빈은 지금 포기하고 싶을까.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전화를 마치고 들어온 한빈에게선 짙은 수분 냄새가 났다. 우리도 이 영화처럼 대단한 이야기를 가진 이들은 아니다.
영화는 끝을 향해 달렸다. 그들은 헤어진다. 10년이 지났다. 미련은 담배의 립스틱 자국으로 남았다. 모든 과거를 털어내기 위한 양조위가 구멍을 신중하게 바라봤다. 구멍에 속마음을 털어놓고 진흙으로 구멍을 막으면 진실은 영원히 그곳에 묻힌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임금님 당나귀 같은 속설이었으나 양조위는 키스하듯 구멍에 속삭인다. 그 모습을 주황색 도포를 입은 동자가 지켜봤고, 진실은 영원히 묻힌다. 장하오는 마지막 문장을 구멍 속 이야기를 직접 품은 돌처럼 오래 바라보았다. 붉은 색이 그의 얼굴을 덮치고 시퀀스가 끝나는 모든 시간을 받으며 그 자리를 지켰다. 단 한 번도 놓지 않아 찝찝해진 그들의 손바닥이 떨어진 건 문이 열리고 5분이 지나서였다. 그들은 건물에서 나서기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처음 입을 연 건 장하오였다.
“우리 등산가자.”
장하오의 손끝이 욱신거렸다.
다리의 감각이 점점 사라졌다. 옷이 땀으로 짙게 물들었다. 장하오는 축지법을 쓰는 것인지, 둥둥 떠서 가는 것인지 뽀송했다. 그는 입술을 질끈 물고 있었다. 다리의 감각이 점점 사라져갔다. 온전해지기 전엔 몰랐는데 이 감각, 실로 좆같았다. 장하오는 정상을 향하지 않았다. 자꾸만 길이 아닌 어디론가로 새었다. 모든 발걸음이 길을 만들어내는 것 같이 익숙했다. 한빈의 잇새를 치던 질문은 숨을 쉴 때마다 허공에서 잃어버렸다. 장하오는 산 중턱 어드메 즈음에서 멈췄다.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던 한빈의 입과 눈이 커졌다. 수 세기를 거친 거대한 소나무가 볕뉘를 낳고있었다. 양지다. 완전한 양지다.
장하오가 나무의 구멍을 찾는다. 화양연화에서 얻은 건 고작 이런 것 뿐이다.
화양연화를 보는 내내 장국영을 잊을 수 없었다. 지긋지긋하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연인에게서 윤회를 읽었다. 다시 태어나자. 다짐하니 손끝이 저려왔다. 온전해진 지 불과 사흘만의 일이었다.
그는 화양연화의 속설을 믿기보단 춘광사설을 떠올렸다. 성한빈과 별 것 없이 교감하던 어릴 적 홀로 그 영화를 보고, 한국에서는 <해피투게더> 라고 칭해지는 걸 처음 알았다. 극중에서 그 누구도 행복해지지 않았다. 묘한 기시감은 죽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실은 한빈과 재회한 후로는 죽음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건 마치 불면에서 막 기어나온 사람이 처음 깊은 잠에 들었다 깨어난 감각이니, 현실감이 없다. 눈 뜨면 네 곁이었으니 현실감은 오로지 그 옆에서만 존재를 되찾았다.
과거 귀국하자마자 본 영화가 춘광사설이었다. 너의 슬픔을 땅 끝까지 묻어준다는 남자의 위로는 어린 장하오에게 너무나도 절실하게 다가왔다. 한빈은 지금 어떨까. 너도 나를 잃어 슬플까? 유명한 무역상을 운영하는 부모님의 파견직이 빠르게 바뀌었다. 발밑에 감춘 그들의 어둠이 세간에 알려져 급히 끊은 귀국행이었다. 그들은 미리 중국에 가있고, 학교 자퇴 절차가 끝난 하오만 뒤늦게 비행운을 날렸다. 매년 새로 산 일기의 첫 문장을 기억한다.
‘언제 다시 만날 진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보고싶으면 어디서 찾을지는 안다는 것이다.’
나무를 더듬던 손끝이 푹 들어갔다. 한 마디가 넘는 깊이였다. 가장 깨끗하고 볕뉘가 닿지 않은 자리에 예쁘게 뚫려있었다. 한빈은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키가 맞지 않아 키스하는 것 처럼 보였다. 한빈은 보이지 않는 그의 입술을 상상하며 뒷목을 어루만졌다.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한빈아. 나 사실 영화에 나왔던 유적지 가봤어. 천 년의 역사래. 그래서 양조위가 그곳에 비밀을 묻은거야. 천 년이나 입을벌리지 않은 곳에.”
“…….”
“말 없이 사라진 거 미안해.”
장하오가 구멍을 등졌다. 빛이 그를 투사했다. 피부가 볕뉘 모양대로 그흘렸다. 아프진 않은가. 바보같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턱끝을 훔친 성한빈이 그에게 다가갔다. 어디선가 비둘기가 빛을 타고 올라갔다. 이제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아.
“형. 비둘기는 말이야. 원래 도시에서 살지 않는대. 산과 물이 있는 곳에서 살다가, 인간이 다 파괴하니까 아파트를 산으로, 땅에 고인 물과 한강을 맑은 물로 착각하고 둥지를 튼 거야.”
“응.”
“원래 깨끗한 생물이고.”
“응.”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하자.”
춘광사설의 양조위는 장국영의 손이 낫지 않기를 바랐다고 하지. 화양연화의 양조위는 비밀을 천 년의 땅에 묻었고. 이젠 장하오의 차례다. 한빈이 흙을 뭉쳤다. 장하오의 손으로 뭉친 흙을 빼내고 제 것으로 막았다. 손을 훌훌 털었다.
“나 여기 위치 다 기억했다. 몰랐지?”
“오오 성한빈 기억력 좋아.”
“그럼. 내가 누군데.”
너도 다시 돌아오라던 김진혁. 이렇게 되리라 미리 알았던 그의 마지막 목소리는 떼 지어 날아가는 비둘기 소리에 묻혔다. 수 세기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킨 나무에 숨긴 비밀도. 시간을 들여 다시 산을 내려갔다. 장하오가 말해주는 앙코르와트 사원 여행의 이야기, 그를 그리워했던 이야기, 서로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현관을 열었다. 마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행복을 간직했다.
“배는 안 고파?”
“괜찮아.”
장하오는 지독하리만치 무취였다. 목덜미에, 품에 얼굴을 박아도 별 냄새가 나지 않았다. 다만 고독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좋아한다고 해줘.”
“그런 말은 하면 안 될 것 같아.”
“왜?”
“성한빈 나 따라오면 오또케.”
“…잘 살게. 누구보다 잘 살아낼게.”
“결혼할거야?”
“해야지.”
거짓말이다.
“…나중에 성한빈 자손 내가 만나는건데 괜찮아?”
그건 별로.
“…안 할게.”
“아냐, 해. 근데 나보다 사랑하지 마.”
“사람을 쓰레기새끼로 만들어.”
“지금은 너보다 내가 쓰레기야.”
“좋아한다고 해 그러면.”
너는 몰라. 이건 영원을 약속하라고 협박하는거다.
“좋아해. 됐어?”
“어.”
부족하지만 충만하다. 이 모순을 채우는 건 서로 밖에 없다. 육신이 가벼워졌다. 한빈아.
“늦게 와. 아주 늦게 와야돼.”
“…응.”
“날 잊진 말고.”
“응.”
“비둘기가 모인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곳이 가장 찬란한 곳이니까. 착각하는 이들은 발끝도 내밀지 않는 곳이니까. 너와 나만의 공간일 테니까.
“그럼, 다시 시작하자.”
“사랑해 형.”
태양이 마천루 속으로 푹 꺼졌다. 하늘이 빛을 잃었다. 신기루처럼 사라진 장하오의 자리에 솔나무잎 하나가 내려앉았다. 한빈은 조용히 그것을 들어 인생네컷이 꽂힌 다이어리 사이에 끼워넣었다. 다신 열지 않을 것이다. 다신 울지 않을 것이다. 내 슬픔은 모조리 그가 들고 떠났다. 한빈은 핸드폰을 들었다. 한빈의 목소리가 가벼이 흐트러졌다.
“어, 진혁아. 형 잘 보내줬어. 술 한 잔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