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이매지너리
모래알
영화 아일랜드(2005)의 설정을 차용했습니다.
인간을 사고하도록 만든 건 신의 뜻일까. 잦은 두통이 거셌다. 들어차는 죄악감과 무력감을 끊임없이 회피한다. 다만 존재를 인지했기에 소용없는 짓이었다.
두서없는 발걸음은 휘청거려 위태롭다.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지고 외딴 길. 시설의 아이들에겐 출입이 제한된 구역이었다. 센서에 엄지손가락을 문대면 지문의 결이 신원을 확인하고, 육중한 철문은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린다.
“한빈?”
“…네가 왜 여기에.”
게이트 너머에 있어선 안 될 자가 어리둥절한 작태로 한빈을 반겼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센서는 절대적이다. 한 치의 오류도 용납할 수 없는 공간이기에 더욱. 눈앞의 소년은 무색한 웃음을 지었다. 원장님이 키를 주셨어. 한빈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여기로 가보라시면서…. 나 이런 곳이 있는지 처음 알았잖아. 조잘조잘 끊이지 않는 목소리에 낯이 점점 굳어갔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머뭇거리던 소년이 한빈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무슨 일 있어?
“오늘도 내내 나를 피해 다니고….”
“…내가 언제.”
“지금도. 눈을 못 마주치고 있어.”
걱정돼. 무슨 일이 있어? 따스한 시선에 숨이 막힐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쏘아지는 걱정 어린 눈동자에 뇌는 과부하였다. 달달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다 고개를 내렸다. 무엇도 스미지 않은 하얀 운동화가 시야에 들어찼다. 깨끗하다. 이곳은 그렇다. 상시 돌아가는 멸균시설, 외부와 차단돼 한 치의 오염도 허락지 않는 공간. 그 속에서 누군가의 뜻에 따라 한정된 가르침만을 받고 자라나는 모두는 물들지 않고 해맑았다. 단 하나, 한빈만을 제외하고. 새하얀 공간에 찍힌 이질적인 점. 한빈은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그러니 의구심 가진 적 없다. 너희는 나와 다르고. 그 간격을 좁힐 이유도 무언가 알아가야 할 필요도 전혀 없는 거라고. 일말의 의심 없이 살아왔는데. 정말, 그랬는데.
“장하오.”
“응, 한빈.”
“앞으론 나한테 말 걸지 마.”
“…응?”
“나 찾으러 다니지도 마. 내 얘기 누구한테 하지도 말고, 날 궁금해하지도 마. 내가 뭘 하든 널 피해 다니든 신경 쓰지 마.”
“…한빈, 내가 뭐 잘못했어? 말로 해줘. 무서워. 왜 그래.”
“…하. 말이 안 통하네.”
애들이 안 그래? 난 원래 니들이랑 안 어울려. 좀 놀아줬다고 귀찮게 진짜. 야. 짜증 나게 하지 마.
한껏 구겨진 표정으로 말을 마친 한빈이 금방 몸을 틀었다. 성큼성큼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육중하고 하얗고 깨끗한 문은 금방 닫혔다. 일체의 소음이 차단된다. 너머의 숨소리로 감정을 가늠할 수는 없게 됐다. 끈덕지게 들러붙던 얼굴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쏟아질 듯 큰 눈동자는 분명 무너지고 있었다.
언이매지너리
한걸음
“한빈 표정 좀 봐. 잔뜩 심술이 났네.”
“조용히 해. 들릴라.”
전혀 고려 않고 거친 걸음을 내디뎠다. 점심시간 이후 삼삼오오 모여 공을 차던 아이들이 그런 한빈을 힐끔거렸다. 요 몇 달 누그러진 것 같더니. 성질이 돌아왔나 봐. 장하오랑 다니고 나서 그랬지 아마? 난 둘이 정말 친구라도 되는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장하오만 안 된 거지.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은 멀어질수록 선명히 와닿았다. 우월한 신체는 투입만을 허락한다.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 정보의 선별이 가능하다는 것과 상통하지는 않는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도 듣고 싶지 않은 것들도 죄다 감내하고 살아야 했다.
빠른 걸음이 원장실 앞에 다다랐다. 마찬가지로 하얗고 깨끗하고 무거운 문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 너머의 인간을 생각한다. 이 시설의 총책임자. 아이들은 이따금 선생님, 원장님, 같은 정겨운 호칭으로 그를 따랐다. 인자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쓰다듬는 그가 역겹다고 느끼게 된 게. 언제부터였더라. 이전에도 그랬던가. 장하오와 만나기 전에도. 그랬던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두드림 없이 곧장 문을 열어젖혔다. 정면으로 마주친 그는 전혀 당황치 않은 기색이다. 마치 예상했다는 양 태연했고 이는 한빈을 울컥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예절 수업을 다시 받아야겠구나.”
“걔한테 왜 키를 줬어요?”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무슨,”
<장하오. 바깥이 궁금하진 않아?>
“….”
녹음된 음성은 가감 없이 흘러나왔다. <바깥? 응, 바깥. …글쎄. 난 위험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지구는 오염됐고, 우리는 선택받았다며. …넌 책 읽는 걸 좋아하잖아. 거기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을 거 아냐. 으응. 그랬지. 그런데, 역시 또 헤어지는 건 싫어. 난 한빈과 있는 게 좋아서. 아직은 여기 더 있고 싶…>
원장은 금방 전원 버튼을 내렸다. 잔음이 지지직거렸다. 한빈은 소형 녹음기 외형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장하오가 너한테 미쳐 있어 망정이지.”
이 애는 유독 특별한 고객의 상품이라고 말하지 않았니? 커피잔을 들어 올린 그가 우아하게 말했다. 빈자리를 눈짓한다. 독대가 길어질 예정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친구를 만들어줄 걸 그랬구나.”
네가 외로움을 느낄 줄은 몰랐지.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철퍼덕 엉덩이를 붙여 앉는다. 사나운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원장은 알만하다는 듯 웃는다. 다음 주부터는 실외 훈련을 받을 거야. 하던 대로 하면 돼. 달라질 건 없어. 그리고…. 가만 보자. 그래, 에밀리의 수술이 잡혔군. 추첨이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안 그래도 들떠 있을 테니 분위기를 정돈시키도록 해. 고상한 손짓이 이어졌다. 코끝까지 컵을 가져다 댄 그가 사람 좋게 웃었다. 곱게 휘어지는 눈가가 인위적이다. 한빈은 그것이 참을 수 없이 역겹다고 느낀다. 좋은 원두가 들어왔어. 너도 한잔하겠니? 필요 없어요. 그래…. 참, 다음 달엔 왕옌이 찾아올 거야. 접객을 도우렴. …할 말 끝났으면 일어나겠습니다. 더 앉았다 가도 되는데. 아뇨. 그리고, 알아서 처신할 테니 키는 다시 받아 가세요. 장하오가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럼 폐기해야지.”
“…뭐라고요?”
“실험 중인 연구가 있어. 곧 가닥이 잡힐 거야. 장하오를 첫 대상으로 삼는 것도 괜찮겠구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글쎄. 두고 보면 알겠지.”
“…대체.”
일시에 일어선 한빈이 성큼성큼 문 앞으로 다가섰다. 숨을 몰아쉬고 다시금 뒤를 돈다. 기다렸단 듯 마주치는 두 눈에 숨이 막힐 것 같다.
“…걔를 건드릴 생각 마세요.”
“너 하기에 달린 일이야.”
쾅. 굉음과 함께 문이 닫힌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꽉 쥔 두 주먹에 땀이 뱄다. 벌렁거리는 심장은 쿵쿵쿵 미친 듯이 요동쳤다. 폐기라니. 여태는 없었던 일이다. 시설의 아이들은 언제나 무해하고 멍청하고 해맑아서 원장의 뜻대로 자라났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 없이. 흠 한 점 용납지 않은 완벽한 상품으로.
24세기. 극심한 환경오염으로 지구 생태계는 파괴되었다. 급변한 기상과 대기권을 뚫고 쏟아지는 우주 잔해더미를 피하여 살아남은 인간들은 외부로부터 분리되는 ‘시설’을 짓고 그 안에서 안락한 생존을 갈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시설에 유통되는 지구 역사서에 서술된 바에 의하면 말이다. 안타깝게도 지구는 건재하다. 비록 이전 같은 아름다운 자연 현상은 희소성이 짙어졌으나 급진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어느 정도 상쇄 중에 있다. 근래에는 자연 복구 기술에 대한 투자 논의가 왕성하다. 기록에만 의존되던 사계절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인간 사회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뒤바뀌고 악으로 치닫는 환경 속에서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사고하고, 하염없이 성장해왔다. 그들은 언제나 위를 바라본다.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를 갈망한다. 영원하고 건강한 신체의 염원은 그들이 추구하는 진화의 정점이었다.
이 시설은 그 오만한 갈망의 집합체이다.
“….”
시설의 아이들은 1인실을 쓴다. 하필 옆 호실이 장하오였다. 문을 열기 직전 복도로 나오던 그와 마주친 건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다. 멈칫 시선을 흘기는 한껏 쪼그라든 작태가 볼품없다. 찡그린 표정을 풀지 않고 문을 열었다. 쾅. 부러 급하게 놓은 문고리는 거센소리를 냈다. 부끄러움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어린 애의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 이 감정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 누구도 가르치지 않은 영역이었다. 동시에 회의감이 든다. 배운다고 달라질 일이던가. 자연스러운 삶을 표방하고 있으나 처음부터 불가한 일일지도 모른다. 인위적으로 빚어진 주제에 인간 고유의 감정을 컨트롤 한다는 건.
성한빈은, 그리고 장하오는, 이 시설의 모든 아이들은.
자연으로부터 잉태된 생명체가 아니다. 그들은 본체의 유전자로부터 재탄생된 복제인간이었다.
“에밀리, 정말 보고 싶을 거야.”
“오글거리게 왜들 그래.”
멋쩍은 듯 웃는 두 뺨이 발갛다. 적응하고 나면, 종종 편지할게. 이곳의 주소를 알아? 무심히 그들을 지나치던 한빈이 멈춰 섰다. 날아든 의문은 장하오의 것이었다. 에밀리는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곧 웃었다. 가면 알게 되지 않을까?
“한빈, 너도 한마디 하지 그래.”
“뭘.”
“이제 에밀리를 볼 수 없잖아.”
“….”
알 바 아냐. 차갑게 내려앉는 목소리에 야유가 샜다. 정말 한빈은 한결같네. 에밀리가 불쌍해. 데이빗, 그만 해…. 얕게 올라온 홍조가 이젠 터질 듯했다. 힐끔힐끔 시선을 흘리던 에밀리가 바보같이 웃었다. 한빈, 그동안 고마웠어. 음….
“보고 싶을 거야.”
“….”
“잘 지내….”
그, 널 좋아했어. 작게 읊조리는 말을 듣고야 말았다. 정박 된 다리가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입술을 깍 깨물고 고개를 드니 하필 보이는 건 장하오다. 알 수 없는 시선. 언제나 웃거나 울 거 같은 얼굴만을 했으면서. 오늘은 왜.
송별은 울음과 웃음이 뒤섞여 어수선한 모양새였다. 분위기를 정돈하라는 원장의 충고가 알맞은 셈이다. 잔뜩 들뜬 아이들 사이에서 감시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야만 했다. 속은 곯아가고 있었다.
에밀리는 편지를 부칠 수 없을 거다. 이곳의 주소를 알아내지 못할 거다. 다시는, 이곳의 누구와도 만날 수 없을 거다. 그의 육신은 미국 캘리포니아 땅에 살고 있을 진짜 에밀리에게 헌신 될 테니.
한빈이 이들과 다른 지점은 여기에 있다. 한빈은 헌납될 본체가 없다. 그는 오로지 원장의 필요에 의해 그의 입맛대로 개조된 복제인간이었다. 절친한 친우의 유전자를 배양했다, 원장의 유전자 조직과 그의 죽은 애인의 것을 조합했다는 둥, 시설의 관리자들 사이서 오가는 말들은 제각각이나 안타깝게도 한빈으로서는 진실에 다가갈 수 없었다. 기억이란 존엄하고 고유한 상위의 영역이기에 전이시킬 수 없던 탓이다. 감히 신에게 도전해 뼈와 살을 만들어 영혼을 빚어낸 죄악을 저지른 그들일지라도. 만들어낸 껍데기에 그 인간의 오롯한 생애를 담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원장이 어떠한 염원으로 한빈을 탄생시켰든 한빈은 그가 원하는 과거의 유산이 되어줄 수 없었다. 이따금 그가 누군가를 투영하듯 한빈을 대한다는 건 역겹게도 절실히 다가왔으나, 한빈은 한빈이었다. 한빈을 이루는 뼈와 살 그 아래 흐르는 무수한 세포와 달음박질하는 심장의 헐떡임. 그 모든 것은 제 것이 아니었지만 단 하나, 이 세상에 눈을 떠 보고 익힌 것들만은 오로지 한빈의 전유였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머리칼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각각의 본체와 쏙 빼닮았을 시설의 모든 아이들에게도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한빈은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 아이들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싶었다. 각각의 생각과 그들을 이루는 기억과 간절한 꿈이 있다는 끔찍한 현실을 외면하길 원했다. 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때가 되면 본체의 결손을 보충하기 위해 팔려나가는 그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해서는 안 됐다. 원장의 말마따나 상품이다. 흠집이 나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하고 까다로운 상품.
그렇게 마음을 죽이며 일해왔다. 한빈의 역할은 간단하다. 이곳의 아이들이 어떠한 의문도 갖지 못하도록 막는 것. 안락한 울타리 속에서 먹고 자고 자라며 언젠가의 희생으로 인도하는 것. 시설은 기본적인 학습과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나 모래 위 쌓인 이 유토피아가 거짓이라는 의심은 할 수 없게끔 철저히 아이들을 배제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빈이 있었다. 똑똑하고 건실한 이미지의 한빈이 흘리는 일침은 날아들던 질문들을 바로 잡고 괜한 소리를 지껄인 아이를 위축되게 했다. 그런데.
‘지엔이 연락하지 않는 게 이상해.’
‘한창 적응하느라 바쁠 테니 당연한 거지. 장하오, 가서 네 책상이나 닦아.’
장하오는 달랐다. 모든 말들에 꼬투리를 달았다. 피어오르는 의구심을 지우지 않았고 날이 선 한빈의 반응과 아이들의 머쓱한 눈초리에도 꼿꼿한 낯을 했다. 장하오 걔는 좀 이상해요. 늘 있는 주간 보고에 올린 한마디는 원장의 심기를 거슬렸고, 덕분에 한빈은 장하오를 전담해야 했다.
장하오, 대체 뭐가 불만이야?
이번에는 지엔이, 저번 달에는 원철이 아일랜드로 이주했어.
그래. 엊그제 시설에 온 다섯 살짜리 알렉스도 아는 사실이야.
그런데 아무도 연락이 없잖아.
저번에 말했을 텐데. 적응하기 바빠 우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라고.
거짓말.
…뭐?
지엔은 내 베프야. 약속했어. 반드시 연락하겠다고.
마주친 두 눈이 형형했다. 집요한 시선은 무언가 꿰뚫듯 정교해서 한빈은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물렸다.
아일랜드. 이곳의 아이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이상향. 시설의 아이들은 선택받았다고 여겨진다. 혼란스러운 외부에서 구조되어 안락한 시설에서 살아갈 자격을 얻은 것이라고. 부족함 없이 편안한 생활이었으나 인간은 언제나 그 위를 올려다보는 족속이므로 여유에 멈춰서 안주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시설은 간헐적인 주기로 이벤트를 벌였다. 일명 아일랜드 거주권 추첨. 일전 아름답고 푸르렀던 지구 생태계를 본따 만들었다는 인공 섬에서 살아갈 초대권을 하사하는 것이다. 자연광 한 점 들지 않는 이 인공적인 내부 시설이 아닌, 푸르른 생명이 발돋움하는 진짜 자연 속에서 거주할 기회를. 인위적으로 조성된 환경인 건 똑같지 않냐는 냉소적인 반응도 있었으나, 시설의 미디어를 통해 선전되는 아름다운 전경에 홀리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적어도 이렇게 천장에 가로막힌 하루하루가 아니라, 태양 궤도 안에 들어가 그 빛을 쬘 수 있다는 거니까. 거주권은 평소 학업과 품행으로 쌓은 포인트를 기준으로 무작위 선정되는데, 과연 어떤 이가 당첨될 것이냐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연히 거짓이다. 아일랜드 이주권은 그들에게 있어 죽음을 의미한다. 각지에 살고 있는 이들의 ‘본체’가 건강상의 이유로 유보해둔 신체를 찾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순위라는 게 있으니까. 바쁜 일이 정리되고 나면 연락이 올 거야.’
‘…정말?’
‘어.’
‘지엔이 나를 잊은 건 아닐까?’
‘…그런 게 아니라,’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다.’
지엔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라, 내가 밀려난 거면 좋겠어. 말을 마친 장하오는 볼 장 다 봤다는 양 뒤를 돌았다. 숨이 턱 막히는 처연한 눈동자만이 끈덕지게 남아 한빈의 정신을 배회했을 뿐이다.
원장은 철저한 사람이었으므로 집중 감시는 금방 그칠 수 없었다. 눈에 띄게 붙어대는 꼴에도 장하오는 개의치 않아 했다. 한빈 정말 친절하다. 속 좋은 소리나 해댈 따름이었다. 제법 총명하고 예리한 감을 가진 장하오에 대한 경계를 누그리지 않았기에 과분한 호평이었다. 시설의 모든 아이들은 입 모아 한빈을 냉정하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장하오는 그 주류에 작게 반발하곤 했다. 아니, 한빈 되게 다정해.
‘지금도 봐.’
무척 다정하지.
아, 고마워…. 잔뜩 붉어진 낯의 에밀리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빈을 올려다봤다. 날아오는 공을 피하려다 엉덩방아를 찧은 탓이다. 한빈은 빠르게 공을 쳐내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킨 에밀리가 뜸을 들였다. 그러나 한빈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조심 해. 다치면 안 돼. 묵묵한 말투였으나 듣는 이의 속은 꾸준히 요란했다.
한빈은 한쪽 뒹굴고 있는 공을 주워들었다. 시설의 운동기구들은 특수 소재로 만들어진다. 과격한 플레이로 극심한 손상을 입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에밀리의 주인은 원체 몸이 약한 사람이라 신신당부한 참이다. 언제 어떻게 가짜 에밀리를 찾을지 알 수 없으니 그녀는 상시 건강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애초에 이런 운동을 금지하면 되는 거 아닌가. 다시금 뛰어노는 아이들을 응시하다 원장은 이상한 데서 무른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니, 이것도 나름의 계산일지도 모른다. 잡생각과 함께 요리조리 공을 돌려보던 한빈이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빤히 바라보던 장하오와 눈이 마주쳤다. 새까만 눈동자에 잔뜩 찡그린 제 얼굴이 비치는 기분이었다. 수 초의 대면 끝에 장하오는 방긋 웃는다. 금방 시선을 틀었으나 찝찝함은 배로 불었다.
원치 않아도 가까이 지내야 했다. 그날 이후 장하오는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가졌던 의문은 그저 친구의 부재로 인한 한탄이었나. 특별한 일이 없다는 한빈의 보고에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안 붙어 있어도 돼. 감시를 핑계로 장하오 곁에 머무른 지 두 달이 되는 날이었다. 더는 그의 주변을 기웃거리는 귀찮은 짓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한빈?’
‘…왜.’
‘왜 이렇게 못 먹어. 팍팍 먹어.’
그러나 한번 구축된 일상은 흩트리기 쉽지 않았다. 장하오는 너무나 당연하게 한빈과 함께했다. 아이들을 이끌고 챙기는 한빈의 뒤에 서서, 그런 한빈을 기다렸다. 다 했어? 밥 먹으러 가자. 어떤 날엔 먼저 나서기까지 했다. 한바탕 난장판이 된 교구를 정리하면서 맑게 웃는다. 내가 도울게. 얼른 하고 같이 가자. 그 자연스러운 흐름에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알맞은 짝을 찾은 듯 구는 장하오를 본다. 자꾸만 질문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를 쳐다본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지엔의 대신인 걸까? 절친한 친우의 빈자리를 나로 채우려는 걸까? 합당한 추론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기분은 급격히 다운됐다. 이런 데서까지 누군가의 대용이 되고 싶지는 않다.
퍼뜩 든 생각에 혀를 씹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몸이 자라고 나서의 한빈은 제 존재 의의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다. 시키는 대로 일하고 하라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니까.
아니, 어쩌면 스스로를 세뇌했는지도 모르겠다. 꾹꾹 억눌러오던 의문이 장하오의 손짓 하나에 터져 흘렀다.
헛기침을 연거푸 하며 의식적으로 알갱이를 씹는다. 터지는 신음을 들은 터라 장하오의 낯에는 걱정이 잔뜩이었다. 괜찮아? 제 몫의 물을 건넨다. 물잔을 받아들이며 손끝이 스쳤다. 뜨거웠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알게 된 것들이 늘었다. 장하오가 얕은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것, 음식은 잘 가리지 않고, 책 읽는 걸 즐기고. 그리고.
‘한빈, 손이 왜 이래?’
‘뭐 하는 거야, 놔.’
덥석 잡힌 손에 과민 반응이 출력됐다. 그는 스킨십에 거리낌이 없다. 얹어진 온기가 뜨거워 얼굴이 구겨졌다. 쳐내려는 손길에도 그는 꼿꼿하게 더 다가왔다. 반동에 물잔이 엎어졌다. 흐르는 물을 뒤로 하고 장하오는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상처투성이야. 이거 왜 이래. …넘어진 거야. 놔. 의무실에 가자. 내가 알아서 할게. …한빈.
‘너는 보면. 너를 너무 안 지키는 것 같아.’
‘뭐?’
‘어제도. 알렉스가 넘어졌을 땐 바로 의무실로 데려갔잖아.’
‘….’
‘한빈 상처가 더 심해.’
가자. 의무실. 단호한 눈빛에 맥이 꺾였다. 맞닿은 온기가 빌어먹게도 타올랐다.
장하오는 쉼 없이 중얼거렸다. 남을 먼저 위하는 네 모습이 멋있기도 하지만, 너를 좀 챙겼으면 좋겠어. 은근 자잘한 상처들을 달고 다니더라. 왜 그러는 거야?
안타깝게도 스미는 것 없이 튕겨 나갔다. 한빈은 그저 멍했다. 이건 특수훈련으로 인한 흔적이다. 원장은 한빈의 몸을 실험체 삼아 일반의 신체를 능가하는 여러 약물을 투입하고, 그 경과를 시험하곤 했다. 통각에 무던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다르다. 그는, 그들은, 상처가 나서는 안 될 상품이다. 한빈이 그들의 부상에 예민하게 구는 건 다른 게 아니다. 남을 위한다고? 그 ‘남’이라는 것에 이 아이들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한빈이 걱정하는 건 그들의 안위가 아니라, 고객을 위한 상품들의 품질보증이었다.
‘간단한 처치는 할 줄 알아. 내가 해줄게.’
의무실은 어쩐지 비어 있었다. 건강이 일 순위인 시설의 요충지이다 보니 드문 일이었다. 장하오는 밴드와 연고, 알코올 솜을 찾아서는 간이의자에 한빈을 앉혔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 고운 손으로 자잘하게 난 상흔을 소독하고, 닦고, 문지르고, 연고를 바른다. 살살 얹어지는 손가락이 그토록 섬세할 수가 없었다. 정말 인간을 대하듯. 인간이 인간을 대하듯. 인간이, 인간을 치료하듯.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이, 누구의 대용도 아닌 인간을, 그저 나로서 존재하는 인간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을….
‘따끔할 거야.’
괜찮아? 내리쬐는 뜨거운 시선에 녹아내릴 듯했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들은, 그리고 나는. 상품이 아니다. 누군가의 대체재도, 대용품도 아니다. 각자의 마음으로 고유의 삶을 사는 인간들이었다.
***
생각보다 고강도였다. 흐르는 땀을 훔치며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타이머를 든 연구원이 짧은 지시를 내뱉었다. 어떠한 변론도 없이 불구덩이 속으로 이 악물고 재차 달려야 했다.
“스탑. 나오세요.”
온몸은 죄 타들어 엉망이었다. 만족스러운 결과치를 얻어낸 연구원이 한빈에게 대충 물을 끼얹었다. 이런다고 식나. 아찔해진 정신 위로 미미한 연기가 연거푸 피어올랐다. 물집 잡힌 피부는 금세 새살이 차올랐으나 고통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원장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지. 이렇게 뜨거운 불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서 뭘 할 참이지. 통증을 삭이기 위해서는 잡생각을 늘어놓아야 했다. 이윽고 주변을 둘러본다. 텅 빈 공터가 그을린 흔적으로 채워진다. 이곳은 시설에서 일 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외부’의 장소다. 모두가 잠들었을 야심한 시각 한빈은 생애 처음 진짜 땅을 딛고 섰다. 폐부로 스미는 공기는 차갑고 매캐했다. 어두운 하늘은 별 한 점 없었고 까마득한 시야는 어지러웠다.
낙원은 존재하지 않기에 낙원인 게 분명하다. 위선으로 세워진 시설도, 존재치 않는 거짓의 섬도, 진짜들이 살아가는 진짜 지구마저. 지독하게 불쾌했다.
일전에는 시설 내부에서 제각각의 실험과 훈련을 반복했다. 원장이 마음을 바꾼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새하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이 한빈에게 턱짓한다. 돌아가자는 뜻이다. 들고 온 휘발유 통들을 이고 앞질러 걷는 모양새들이 우스꽝스럽다. 천천히 뒤따르던 한빈은 셈해본다. 지금 당장 이들을 따돌리고 질주하는 제 모습을. 일반을 초월한 튼튼한 육신은 쉽게 부러지지도 지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한빈의 탈주를 인지했을 즘엔 이미 늦었다. 도저히 찾을 수도 없을 만큼 먼 점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내뻗는 걸음이 향하는 곳이 무엇일지 전혀 모르는 채로.
“뭐하나?”
총책임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장은 확률을 분산시킨 게 분명했다. 그는 이런 허드렛일을 할 짬이 아니다. 특수부대 출신인 총책임자는 유사시에 한빈을 쫓을 마땅한 지원군이 될 거다. 하얀 무더기들 사이 딱딱한 군복과 무기로 중무장한 그를 가만 쳐다본다. 시선의 맞춤이 길어졌다. 이내 바보같이 웃으며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하지만 원장은 알고 있다. 그는 정말 보험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의 성한빈은 도망칠 수 없다. 두고 갈 수 없는 어떤 마음이 생겨버렸다. 어제의 성한빈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장하오를 만나기 전의 성한빈은. 그로 인해 무언가 깨달아버리기 전의 성한빈이라면.
장하오가 너한테 미쳐 있어 망정이지. 그 말속에 숨은 진짜 뜻을 이제야 알아챘다. 미쳐버린 건 그가 아니라 나다.
서로의 행동반경은 훤히 하는 처지였다. 그렇기에 마주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정규 일정이 아니면 장하오의 머리털 한 올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저녁을 거르고 방으로 돌아왔다. 약 이주 간 반복된 훈련 탓에 휴식이 절실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상처 없이 매끈한 오른손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첫 외부 훈련 시 투여한 약물의 연장선 같았다. 재생 능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괜히 주먹을 폈다 쥐었다 반복했다. 더 이상 상처를 빌미로 걱정 어린 시선을 받을 일은 없겠거니 생각한다. 아는 척하지 말라 일러놓은 주제에 머릿속으로는 허튼 생각을 차곡차곡 적립 중이었다. 스스로의 모순에 헛웃음 짓다가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여닫고 복도로 들어서며 생각한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이 주. 제가 선택한 결과가 올바른 해답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더 이상 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기 자신을 속이는 미련한 짓을 반복할 수는 없다.
발걸음은 익숙한 곳으로 향했다.
“한빈.”
“…너. 진짜 말이 안 통하네.”
원장이 게이트 키를 회수하지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제 아지트에 들어선 한빈이 마른 세수를 했다. 시설의 아이들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공간.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지고 외딴 길. 센서에 지문을 대고 문이 열리면, 내부의 계단을 오르고, 오른다. 그러면 유리천장으로 막힌 시설의 꼭대기가 나온다. 진짜 지구의 땅을 밟을 수는 없었지만 하늘을 올려다볼 수는 있었다. 마음이 턱 막혀 답답할 때면 종종 찼던 요행이었다. 왜 이런 공간을 설계했는지 부연은 없었으나 원장은 이 정도의 일탈은 허용했으므로 한빈은 단단한 유리로 가로막힌 지구의 하늘을 훔쳐볼 수가 있었다.
멍청하게 제 눈치를 보는 장하오를 지나쳐 구석의 계단으로 향했다. 따라붙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로 일관한다.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른다. 두 발치 뒤에서 쫓는 기척이 느껴진다. 이윽고 난간의 끝이었다. 붉게 노을 지는 하늘이 두 사람을 반겼다.
“우와….”
터지는 탄성을 감추지 않는다. 한빈은 말없이 그가 서 있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
“…여기까진 안 올라왔나 보네.”
“응. 그냥 밑에서 한빈 기다렸어.”
“내가 안 오면 어쩌려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한빈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찾아오는 정적에 곧장 안색을 살피는 낯이 무구하다. 너 말이야. 응, 왜? 몸을 틀고 손을 뻗는다. 맞닿은 온기와 가까워진 거리에도 장하오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한참 그의 옷깃을 뒤적거리던 한빈이 이내 일전과 다른 모양의 소형 녹음기 하나를 찾아냈다. 보란 듯 깨부순다. 발로 밟고 으깨고 내리찍었다.
“지금 뭐 하는,”
“장하오.”
의문투성이인 그를 불러 세운다. 부딪치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원장을 믿지 마. 아니 이곳의 모두를 믿지 마.
“아무것도 믿지 마.”
“….”
“계속해서 의심해. 너 그런 거 잘하잖아.”
모양을 외워둔 이유는 그것을 찾고자 함이 아니라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한빈이 장하오의 어깨를 털었다. 비교적 발견이 쉬운 곳에 원장이 보여주었던 것과 꼭 같이 생긴 모형 녹음기가 달려 있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곤 가만 들여다본다. 전류의 흐름이 없다. 원장은 철저한 사람이다. 완벽히 경로를 파괴했다는 확신은 서지 않는다. 어쩌면 이 난간 자체가 송출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한빈의 머리에 무언가 심겨 있을 수도 있다. 제가 생각하고 사고하고 기억하는 모든 감각이 공유되고, 사실 눈앞의 장하오는 장하오가 아니고, 이것은 원장이 내리는 시험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도 믿을 수 없었다.
장하오는 그런 한빈을 빤히 보다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유리 너머 하늘을 응시한다. 두 눈 가득 붉은 빛이 넘실거렸다.
“이 하늘도 믿지 말까?”
“…뭐?”
“엄청 예쁜데. 이것도 믿지 마?”
콱 박혀 든 질문에 사고회로가 정지된다. 아무 대답 없이 시간이 흘렀다. 장하오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운을 뗀다. 저번에 나한테 바깥이 궁금하지 않냐고 물었지. 그건 어떤 바깥을 말하려던 거야? 아일랜드? 아니면 우리가 사는 지구?
“지엔도 비슷한 질문을 했었어. 아일랜드에 가고 싶지 않냐고. 나는 당장 지엔과 헤어지는 게 싫어서 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답했고.”
“….”
“네 말대로 난 의심이 많아서. 그곳이 여기보다 평화로울 거라는 확신이 없었거든. 지엔이 떠나고, 너와 가까워졌을 때도 같은 마음이었어.”
노을은 빠르게 밀리고 있었다. 빨간 하늘에 깊은 어둠이 차츰차츰 덧씌워진다.
“그런데 처음으로. 바깥이 궁금해졌어.”
너랑 같이. 저 하늘을 보고 싶다. 진짜 땅을 밟고 서서.
금방 시선을 맞춰온다. 눈이 시렸다. 그의 뒤에 펼쳐진 푸르고 붉은 하늘의 탓이라 믿고 싶었다. 상상만 해도 좋다. 그치? 장하오는 기분 좋게 웃었다. 눈이 따가워서, 한빈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정말 미쳤군.”
“안부 인사치곤 격한 것 같네.”
팽팽한 신경전이 피부로 와닿았다. 한빈은 멀뚱히 서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풍채가 좋은 여자가 혀를 두어 번 더 차는가 싶더니, 이내 한빈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래. 이름이 한빈이었나. 많이 컸네. 예. 안녕하세요. 시설 관람을 도와드릴까요? …괜찮아요. 원장의 비웃음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이제 와 위선은…. 왕옌. 너도 참 변하질 않아.
“가서 도와주도록 해.”
원장이 눈짓했고 한빈은 말없이 앞장서 그녀를 안내했다. 한숨을 푹 쉬더니 별수 없단 듯 따라온다. 왕옌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자는 시설의 최대 투자자다. 그를 빌미로 시설의 이곳저곳을 출입할 권한이 있었는데, 복제실에 들를 때마다 끔찍한 표정과 폭언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미쳤어. 이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야. 밥 먹듯 토해대는 문장은 레퍼토리가 간단해 외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인간을 복제하는 것에 강력한 반발심을 갖는 듯했다. 모순이었다. 그녀의 자본이 이곳을 굴러가게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출입이 제한된 곳이에요. 이 문 너머에는 복제품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
“보시겠어요? 눈에 띄지 않을 장소를 몇 압니다.”
“…됐어요. 그만 돌아가고 싶은데.”
“아들의 복제품이 궁금하셨던 거 아닌가요?”
“…무슨.”
침묵이 번졌다. 불편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그녀를 보던 한빈이 한발 다가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양해를 구하며 그녀의 주변을 스캔한다. 전파 감지가 없다. 원장은 왕옌을 믿는 걸까? 천장을 응시했다. 이곳은 사각지대다.
“가짜는 잘 지내고 있어요. 진짜 아드님은 건강하신지 걱정되네요.”
“….”
“건강해야 할 텐데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없도록.”
왕옌은 자연을 거스르는 이 시설을 혐오하면서 동시에 이곳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한다. 그런 그녀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있다. 매 순간 건강을 염려하고 근황을 검사하며 존재를 확인받는 아주 소중한 아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잃고 싶지 않은 아주아주 귀중한 아들이. 흔들리는 눈동자는 죄책과 혐오로 혼란했다. 화살의 방향은 어디인가. 비인간적인 일에 가담한 것 치고 너무나 인간적인 사고를 하는 눈앞의 여자. 한빈은 그녀의 그 위선에 모든 걸 걸어야 했다.
“지금, 뭘 하는….”
곧장 바지춤에서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딸깍 불을 켜더니 열 손가락을 지지기 시작한다. 새살은 금세 차올랐다. 뜨거운 온도의 불씨에 다시금 손 마디를 가져다 댄다. 차오르면 다시, 또 다시. 몇 번을 반복하는 자학 속에서 여자의 눈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이 정도면. 될까요?”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죠? 내게 뭘 원하나요?”
“절 데려가 주세요.”
“….”
“보다시피 전 많이 튼튼해요. 아주 많이.”
“…지금 무슨 소리를,”
“아드님의 보디가드로 저를 기용해주세요.”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어요.”
“아드님이 다치지 않도록, 죽지 않도록 도울게요.”
“이봐요.”
“제가.”
“….”
“장하오를 지킬게요.”
“….”
“이곳의 장하오는 제 친구예요.”
“….”
“저는 모두 지키고 싶어요.”
그리고. 고발하고 싶어요. 이 시설의 실태를. 당신과 함께라면 가능할 거 같은데요.
왕옌은 말이 없다. 아닌 척했으나 꽉 쥔 주먹 새로는 땀이 흥건했다. 손바닥에 들어찬 라이터가 미끌거렸다. 협상은 기세다. 잃지 않는 자신감만이 제게 주어진 패의 전부였다. 왕옌은 말없이 꼿꼿한 낯의 한빈을 쳐다봤다. 눈동자는 결연했으나 어딘가 무르다. 필연적으로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는 눈빛이었다. 결국 웃음이 샜다. 하하. 하하하. 정말. 여전하구나.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더니 금방 표정을 지웠다. …그래, 자신이 있나? 내가 오늘 그쪽을 데려가면 원장은 나를 의심할 텐데요. 오늘이 아니에요. 저는 매일 저녁 외부 훈련을 나갑니다. 시설에서 일 킬로 정도 떨어진 곳으로요. 창이 없는 자동차로 이동하기에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어요. 그래도. 왕옌은 알 수 있겠죠?
“절 데리러 오세요. 힘껏 도망칠게요.”
기막히단 듯 웃는 얼굴에서 누군가의 흔적이 보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수업이나 받고 있을 바보 같은 낯짝이.
장하오. 여기 널 두고 가는 게 옳은 일일까? 내가 정말 이 비극을 멈출 수 있을까?
차올랐던 숨을 가다듬는다. 그러나 더는 돌이킬 수 없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그에 따른 몫은 빠른 속도로 떠밀려올 것이다. 온몸으로 받아내는 수밖에 없다.
두 걸음
“야. 성한빈.”
그때 걔가 어떤 표정이었더라.
“어쭈. 대답 안 해?”
너랑 같이. 저 하늘을 보고 싶다. 진짜 땅을 밟고 서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걸 나한테 물으면.’
“성.한.빈.”
헉. 몰아치는 숨을 토해내며 눈을 깜빡인다. 어둠에 물든 고요가 차츰차츰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익숙한 음성의 침투를 좇아 고개를 돌리니 성난 표정의 하오가 서 있었다. 몇 번 불렀는지 알아? 주위 조도로 추측건대 한밤중이었다. 대체 뭐가 불만이라 제 방까지 행차를 하셨는지. 한빈이 숨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왜. 왜 깨웠는데.
“…악몽 꾸는 거 같길래.”
“네가 꾼 게 아니고?”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래, 알았어. 고마워.”
어딘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썩 성가셨으나 고개를 끄덕인다. 말해. 뭐 부탁할 거 있어? 오밤중에 여긴 왜 왔어. …그런 거 아냐. 그럼 뭔데.
“…오늘. 네가 온 날이거든.”
“….”
“한빈 그날마다 잠을 잘 못 자잖아.”
걱정돼서 왔는데. 잘 자길래 나가려다가. 식은땀 흐르고 난리도 아니라서 깨운 거야.
“귀찮았으면 미안.”
“…뭘 또 미안하기까지.”
이번엔 한빈이 망설이는 낯을 했다. 하오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조금의 뜸도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나 여기서 잘래. 어느새 침대 위에 발을 걸친 채였다. 싫다고 하면? …떼쓸 거야. 너 이제 애 아니야. 몰라. 졸려. 내 방까지 갈 힘없어. 막무가내로 몸을 붙여온다. 어려운 일도 아니거니와 말씨름할 정신은 더더욱 없어서 한빈이 꼬리를 내렸다. 더 들어와. 이불 잘 덮고. 애늙은이…. 중얼거리는 말엔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저를 향해 돌아눕는 꼴에 경계심이라곤 찾을 수 없다. 첫 만남을 상기하면 제법 눈물겨운 일이었다. 미미한 미소가 번진다. 마음은 잔뜩 누그러지고 긴장은 이완된다. 그러면 퍼뜩 꿈속의 인물이 눈앞을 배회하는 거다.
너랑 같이. 저 하늘을.
블라인드 틈으로 숨은 하늘은 어둡다. 성한빈은 이곳에서 무수한 하늘과 마주하고 있다. 진짜 땅을 밟고 서서. 그리고 그 옆에는
“안 자?”
“자. 말 그만 걸고.”
“잠 안 와….”
장하오가 아닌 장하오가 있다.
‘너 뭐야?’
‘하오야. 네 소개를 먼저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니?’
‘어머니. 얘 누군데요.’
누구 하나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치켜뜬 두 눈에는 악의가 흉흉했다. 사람을 잘 믿지 못하나. 필연적으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의심이 많은 건 그를 이루는 공통된 특성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육체를 구성하는 산소, 탄소, 수소, 질소의 네 가지 원소. 각종 세포와 뼈대와 그를 덮고 있는 피부. 섭리를 나열하자면 밑도 끝도 없다. 한빈은 말없이 눈앞의 소년을 응시했다. 그를 이루는 기다란 눈. 오뚝하나 통통한 코. 도톰한 입술. 얄쌍한 얼굴선. 눈 밑과 볼에 콕 박힌 점. 그리고….
따스한 손바닥.
덥석 손을 잡아 오는 한빈에 소년이 눈을 크게 떴다. 뿌리치지도 소리치지도 않고 그저 커다랗게. 뭐, 뭐 하는 거야. 뒤늦게 갈라진 목소리가 익숙하다. 빠짐없이 눈에 담으며 머릿속으로는 미친 듯한 세뇌를 마쳤다.
인간을 이루는 것은. 느끼는 감정 걸어온 길 새겨진 기억 공유된 추억 그리고 바라는 꿈.
그러니 눈앞의 이 소년은 나의 장하오가 아니다. 꼭 같은 얼굴. 기다란 눈. 오뚝하나 통통한 코. 도톰한 입술. 얄쌍한 얼굴선. 눈 밑과 볼에 콕 박힌 두 점. 따스한 손바닥. 그러나….
‘손이 따뜻하네.’
‘…뭐라는 거야,’
‘나는 성한빈이라고 해. 오늘부터 네 친구가 될 거야.’
‘어머니. 설명 좀 해주세요.’
‘고용된 친구라고 생각해. 너 되게 외롭게 지낸다며.’
‘…뭐?’
‘나도 외로운 사람이거든.’
소년의 눈동자가 무참히 흔들렸다. 불안과 불신이 넘실거리는 홍채 끝으로 서서히 퍼지는 얕은 기대감을 한빈은 읽어낸다.
‘그러니까 기왕이면. 우리 같이 외롭자.’
맞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뿌리침조차 망각한 소년의 낯이 벌게진다. 마찬가지로 풋풋한 부끄러움을 흉내 냈다. 말갛게 웃으며 시선을 흩트린다.
원장이 목도했더라면 한껏 비웃었을 상황이다. 진짜를 만난 소감이 어떠니? 지독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착각이 든다. 허상 속에서 가까스로 깨어난 한빈은 홀로 다짐했다. 모두가 눈앞의 소년을 진짜 장하오라고 여기는 이 세상에서 나만은 그러지 않겠다고. 나의 진짜는 네가 아니라고.
‘저리 비켜.’
‘아주머니께서 같이 있으라 하셨어.’
‘넌 어머니 말이면 다 해? 죽으라 하면 죽어?’
‘원한다면 고려해볼게.’
‘…한 마디를 안 지네.’
한숨을 푹 쉰 하오가 몸을 돌렸다. 하오는 경계심이 뚜렷하고 유독 까칠했다. 타인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으며 본인을 파고드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다만 한빈은 굴하지 않았다. 한빈에게는 꼿꼿한 목표가 있었다. 이 소년을 지키고, 장하오를 구하고, 나를 찾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눈앞의 소년은 도구로서 기능했다. 깊은 정을 내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를 호명할 적엔 의식적으로 이름만을 불렀다. 세 음절을 정확히 내뱉을 마음은 없었다. 혼자만의 구별이었다. 듣는 이는 꿈에도 모를. 영원히 그럴 작정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보면 모르나.’
‘그 얘기가 아니잖아. 뭐해. 일어나.’
‘말 걸지 마….’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오는 욕조 가득 물을 담고 멍하니 누워있었다. 옷도 벗지 않고. 금방이라도 잠길 것 같은 몰골이었다. 혼란이 일렁였다. 왜 이러는 거야? 채근하듯 물으면 하오는 말 없이 고개를 돌린다. 텅 빈 눈과 마주했다.
‘가끔 너무 무력해.’
‘…’
‘그러면 이렇게 누워있는 거야. 시간이 잘 가거든.’
한빈은 입을 다물고 그의 팔을 붙잡았다. 차갑다. 감기에 들 게 분명하다. 뿌리치려는 손길을 저지하고, 마찬가지로 좁은 욕조에 몸을 욱여넣었다. 무게에 못 이겨 물이 넘쳐흘렀다. 이제껏 무력하게 누워있던 하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빈은 말없이 몸을 구겨 앉았다. 새하얀 셔츠가 속절없이 젖어갔다. 축축하게 들러붙어 불쾌했다. 하지만.
‘…같이 하면 더 잘 가겠지.’
‘….’
‘언제든 말해. 같이 해줄게. 뭐든 나랑 함께해. 네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삶을 잃은 듯한 눈빛을 보는 것이 배로 불쾌했다. 그와 꼭 같은 얼굴의 타인을 무참히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빈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정말, 그게 다라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미안.”
“나한테 집중 안 하지 또.”
“네 생각 중이었어.”
“…나를 앞에 두고?”
“응. 옛날 생각. 하오 너 많이 컸다 정말.”
“한빈 고향에서는 내가 형이래. 앞으론 형이라고 불러.”
“이제 와서?”
하오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날이 좋아 함께 걷자고 했다. 작일 비가 내려 축축한 땅을 나란히 밟았다. 의식 없이 뻗어지는 걸음은 사색에 골몰 돼 있었다. 제게 집중하지 않는 모습에 아무래도 성이 난 모양이다. 그는 입을 툴툴대며 덧붙였다. 싫음 말고. 형이라는 호칭은 어디서 배웠어? 그냥. 요즘 한국에 대해 공부 중이거든.
하오와는 금세 가까워졌다. 종종 날을 세우는 것은 여전했으나 욕실에서의 일이 기폭제가 된 것은 자명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경호라는 이름은 허울에 불과했다. 왕옌은 무슨 생각으로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수락한 걸까. 정말 친구라도 만들어줄 심산이었는지, 죄책감을 덜기 위함인 건지. 알 수는 없다.
걸음은 부단히 지속됐다. 하오는 여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한빈을 흘긋댄다. 그래서. 생각해봤어?
“한국에 가는 거 말이야.”
“…한국?”
“응. 한빈 고향이잖아.”
어머니도 요즘은 좀 풀어지셔서. 가벼운 여행 정도는 다녀와도 될 것 같아.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작스러워서.”
어쩐지 부채감 서린 얼굴에 말문이 막혔다.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인다. 난 좋아. 정말? 응, 같이 가자. 한국에.
무심코 고개를 든다. 초록의 풀들로 가득한 정원의 끝에는 높다란 벽이 자리했다. 감히 넘을 수도 올려다보기도 목이 아릿해지는 높이와 너비의. 왕옌은 과보호가 심했다. 왕옌과 그의 남편은 무법지대서 부를 쌓았다. 자연히 적들이 많았다. 원장과는 당시에 이미 아는 사이였다. 복제 사업을 시작하려던 그는 마땅한 투자자와 자문가가 필요했고, 왕옌에게 제일 먼저 손을 뻗었다. 왕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언가 거스르는 일을 재차 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지금 하던 사업에서도 손을 떼려던 참이었다. 더는 불안 속에서 살 수 없었다. 남편과 그 사이엔 사랑스러운 결실이 생겼다. 지켜야 할 소중한 아이가.
그렇게 아이가 태어났고, 남편이 죽었다. 복수를 벼르던 하청 업체 직원의 소행이었다. 왕옌은 덜컥 겁이 났다. 바르게 살아오지 못한 탓에 이 작은 아이가 죽을지도 몰랐다. 극심한 불안에 허덕이던 때에, 원장이 다시 찾아왔다. 진작 유전자 등록을 했더라면 살았을 텐데. 과다 출혈이랬나? 장기가 훼손돼서 손 쓸 도리가 없었다지? 만약 네가 고집을 굽히고 우리에게 힘을 실었어 봐. 네 남편, 죽지 않았을걸. 능구렁이 같은 말들은 가시가 되어 왕옌을 찔렀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결국 아들 하오의 유전자 등록을 마치고, 막대한 투자금을 상납했다. 그 후 왕옌은 곧장 미 대륙으로 떠났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아들과 단둘이서. 제 이기심으로 태어났을 또 다른 아이를 방관하며.
“한국 가면 뭐하지.”
“글쎄. 오늘부터 정하자.”
“해외 나가는 거 처음이야.”
가만 듣다가 문제점을 짚는다. 네 고향은 안 궁금해? 나 중국말도 잘 못 하는데 뭐. 그래도. 푸젠은 따뜻해서 지금 가면 딱 좋을 텐데. 푸젠?
“내가 푸젠에서 왔다고 말했던가.”
“…아주머니가 말해주셨어.”
“어머니도 참. 괜한 소리를.”
별로 좋은 추억은 없어. 아버지 생각이나 날 게 뻔해. 가벼운 투로 툭툭 던진 말에 한빈만 힐끔 눈치를 봤다. 하오는 어련하다는 듯 헛웃음을 짓다가 일시에 표정을 굳혔다. 고개를 더욱 가까이 한다. 짤막한 거리를 꼭 붙여온다. 하여튼 성한빈.
“자꾸 나한테 맞추려고 하지 말고.”
“….”
“한빈 하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거. 알려줘. 너 원하는 거 하러 가자.”
말을 마치고 웃는다. 날카로웠던 인상이 금세 유해진다. 이젠 이편이 훨씬 익숙하다. 잔뜩 날을 세우며 경계하던 어느 날의 만남이 기억 속으로 희미해져 간다.
동시에 장하오는 선명해졌다.
푸젠이라는 지명은 그에게서 들었다. 시설의 아이들은 눈을 뜸과 동시에 세 가지의 정보를 부여받는다. 이름. 태어난 날짜. 고향. 바깥의 혼란 속에서 이를 제외한 모든 기억을 잃고 시설로 구조되어 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원장의 통제하에 지능의 획기적인 발달은 자제되었으므로 이를 의심하는 아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장하오마저. 오히려 그는 즐겨하는 독서를 통해 기억 어디에도 없을 고향에 대해 풍부히 학습하기까지 했다. 바다가 푸르고, 따뜻하고, 아. 일전에는 상업 도시였다던데.
‘지구가 이렇게 된 시점에선, 소용없는 일이지만.’
‘….’
‘한빈은 고향 안 궁금해?’
‘전혀.’
‘한빈 정말 어렵다.’
‘…뭐가.’
‘널 좀 더 알고 싶은데.’
장하오는 말하다 말고 눈을 찡그렸다. 무언가 답답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사소한 감정의 변화를 인지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한빈 너무 틈을 안 줘. 치사해. 입을 내밀고 투덜대면 한빈은 알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고여 썩어버린 속을 꺼내다 보이는 그른 상상을 해본다. 모든 진실을 고하고 나면 장하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내 정신 상태를 의심할지도 모르지. 거머리같이 붙어댈 땐 언제고 이제 와 거리를 둘지도. 아니, 아니다. 의심이 많고 총명한 아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쩌면 머리를 맞대고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추려가고, 함께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간 힘들었지?”
“…어?”
“나 때문에 너도 갇혀 살았잖아.”
한국 가면 여기저기 돌아다니자. 둘이서. 말을 마치고 웃는 낯이 찬란하다. 한빈은 언어를 잃은 마냥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모두, 고하고 나면. 장하오는.
이렇듯 내 고통을 보듬어주진 않았을까? 혼자서 많이, 외로웠지. 힘들었지. 그치지 않는 허상은 매 순간 반복되었다. 눈앞의 소년을 본다. 어느새 훌쩍 자란 그는 어엿한 성년의 태가 났다. 선이 진해졌고 철이 좀 들었다. 날카롭던 성격은 무던해져 여유로운 분위기를 낸다. 제 아픔만을 부여안고 살던 아이가 남을 위한다. 두려움에 좁혀오던 세상을 넓히려 한다.
자연히 한빈은
전혀 확장되지 못했을 세계를 떠올렸다. 부끄러움이 엄습했다. 너무나 오래 멈춰 있었음에.
세 걸음
“슬슬 시작해야 해요.”
“연 닿은 기자들을 몇 포섭해놨어.”
“시설과 관계없는 사람들이겠죠?”
“얘는, 날 뭐로 알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제는 다른 고객들이야.”
이건 악수야.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개의치 않을 확률이 높아. 끝까지 모르는 척 할 수도 있지. 어쩌면 기사를 막으려고 들지도 모르고. 이 정도의 복제 기술을 가진 곳이 없어. 시설과 등지면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할 수가 없을 테고. 인간이 복제된다는 사실 자체에 문제점을 느끼지 못 할지도 몰라.
“…실상을 낱낱이 알고 있는 주제에 가담한 나도 있는걸.”
왕옌은 괴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 닿는 이 없는 반성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과거를 자책하는 행위는 자기연민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의 나를 힐난하며 현재의 나에게 끊임없이 당위를 부여하는 우스운 자기방어. 한빈이 표정을 굳혔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그래. 미안하다. 보도 자료는 충분히 준비해 놓을게. 최대한 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게 목표란다.
“우선은 한국을 다녀오렴.”
“….”
“이기적인 이야기지만, 하오는 아무것도 모르잖니.”
알게 되면, 더욱 괴로워하겠지. 내 욕심에 걜 가두고 말도 안 되는 분신을 만들어줬어. 일단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추억을 쌓게 해주면 안 되겠니?
한빈은 말없이 그녀와 눈을 맞췄다. 여린 눈동자 가득 뿌연 위선이 넘쳤다.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순간의 안락에 취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 눈에 비치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시설의 고객 중 실체를 아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하다. 가진 거 많고 잃을 게 두려운 그들은 제 안위를 위해 거액의 돈을 시설에 상납하지만, 복제의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있지는 않다. 등록된 유전자를 통해 유사시 필요한 장기를 복제해낸다는 정도로 설명을 일축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분신이 자신을 가장하여 출하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으리라는 상상은 꿈에서도 하지 못할 것이다.
“…얼마든지요.”
아니, 정말 그럴까?
“저는 왕옌을 믿어요.”
“…나도 그렇단다. 하오는 네 덕에 많이 밝아졌어. 네겐 빚진 게 많아.”
“….”
“반드시 갚을게.”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상상이라는 건 인간의 사고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상상도 못 한 일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인간 복제 논의는 꾸준히 제기되던 사회문제다. 윤리와 과학의 발전은 떼놓을 수 없는 상성이기에. 그럴듯한 기술이 뒷받침되었고, 인간은 제 욕심으로 한정된 신체의 수명을 늘리고자 한다. 그들은 아무 의문 없이 유전자 정보를 공유했을까?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이 끔찍한 현실을 알게 된다면, 과연 넌더리 칠까, 묻어두려 할까. 왕옌의 의견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최대한 치밀해야 한다. 어떤 틈도 허락지 않고 단번에 파고들 수 있도록.
“생각보다 별거 없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기대했길래.”
“아예 더운 나라로 갈 걸 그랬나?”
“내 고향에 데려다준다며?”
“…맞지, 미안해. 이기적이었어.”
“참나.”
노릇노릇 잘 구워진 호떡을 입에 물린다.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푸드 코너가 줄지어 있었다. 앗 뜨뜨. 뜨거워. 웅얼웅얼, 울상을 짓는 얼굴을 보다가 한빈은 웃어버렸다. 신식으로 쌓아 올린 쇼핑센터에는 붐비는 인파로 가득했다. 가히 익숙한 풍경이었다.
수없는 발전은 개성의 퇴색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지구의 모든 땅은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으로 극심한 생존 위협을 겪지 않았던가. 그 어떤 가치를 막론하고 일 순위는 안정된 삶이다. 모든 부가적인 것은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달리는 도시들은 고유의 정취와 이색적인 특색을 잃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하나씩 손에 쥔 호떡이라는 디저트가 아니라면 이곳이 한국인지 뉴욕인지 구별할 리 만무하다. 아쉬움 역력한 하오를 달래기 위함으로 한빈은 제안한다.
“내일은 경복궁을 가보자.”
“궁전?”
“응. 좀 다를 거야.”
“…꼭 달라야 한다는 건 아니야.”
답지 않게 잔뜩 눈치를 보는 행색이다. 부채감 서린 얼굴에 한빈은 의문을 갖는다. 그러면 하오는 꼬리를 내리곤 말하는 것이다. 미안해서 그러지.
“더 좋은 추억 만들고 싶으니까.”
너한텐 미안한 게 너무 많아. …안 그래도 돼. 나 충분히 재밌는데. 하오 너는 아니야?
“너랑 같이 해서 재밌어. 어디를 가느냐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함께인지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 내 생각에는 그래.”
다정한 언어에 하오는 머쓱한 듯 시선을 돌리는가 싶더니 결국 웃었다. 네가 실망할까 걱정했어. 바보 같은 고민이었네. 그러게.
한입 두입 베어 먹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중앙 광장 스크린에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최근 이매지너리 월드의 새 부지 건으로 떠들썩했는데요….
자연히 한빈의 걸음이 늘어졌다. 한빈은 한국어를 배웠다. 시설에서도, 하오와도 영어로만 소통했으므로 완벽히 구사할 수는 없었지만. 일반을 능가하는 신체는 한번 투입된 정보를 희석하는 일이 없었다.
<오는 9일 드디어 공사에 착수한다고 관계자가 밝혔습니다. 줄기세포에서 시작하여 장기 복제까지 이른 업계 유일 유전자 회사가 드디어 아시아 땅에도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일부에 한정됐던 고객 파이를 늘리려는 의도로 파악되는 가운데 소위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유전자 수술의 보급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하오는 그런 한빈의 시선을 따라간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창백한 안색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성한빈은 도대체가 혼자 끌어안기만 한다. 아무것도 아닐 리가. 손끝이 희게 셌다. 그러나 한빈은 웃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이럴 때면 언제까지나 무력한 사람으로 남는 것 같다. 비좁은 욕조로 다시금 침몰하는 기분이었다. 분위기는 급속도로 다운된다. 그렇기에 나온 심술이었다. 화장실 갈래. 같이 가자. 됐어, 애도 아니고. 끈적거리는 손을 들어 보였다. 씻고 올게.
“천천히 구경하고 있어.”
한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상시 대기 중인 인력이 그의 뒤를 따를 것이다. 한빈까지 짐이 될 필요는 없었다. 소식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한빈은 딱딱해진 눈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생명윤리에 대한 우려가 빗발치고 있는데요. 이 시스템이 과연 투명한 공정 과정을 거치고 있느냐에 대한 뼈 있는 지적이 뒤따릅니다. 다음으로 고유의 정보인 유전자 정보를 독점 회사에 공유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명윤리협회장 제노스 씨의 인터뷰를 듣겠습니다….>
원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를 키우고 힘을 늘리려 한다.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이는 경고인가? 그의 감시망을 벗어났을 거란 오만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래선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게 분명하다. 희생은 반드시 최소화해야만 했다.
긴장과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느리게 숨을 내리 쉬었다. 하오의 말마따나 느긋하게 걷는다. 여전히 북적이는 틈새로 시향지를 든 신식 로봇이 이동하고 있었다. 의식 없이 손을 뻗는다. 달큼한 향이 주변으로 퍼졌다. 퍽 기분 좋은 내음이었다. 시트러스 계열인가. 하오와 잘 어울릴 것도 같아 적힌 브랜드명을 훑어본다. 한빈은 순간, 직전의 행동이 제법 이곳의 인간 같음에 멈칫했다.
시설 밖 세계에 녹아든 지는 끽해야 오 년 남짓이다. 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이므로 단언할 수는 없다만 한빈에게는 무척 짧은 기간이었다. 쏜살같이 흘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한빈은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무엇이 인간을 이루는지. 나는 무엇인지. 그들과 내가 얼마나 다른지. 하오는 한빈을 한빈으로 대한다. 그 너머 다른 이를 찾지 않으며 더 나아가 존재조차 모를 터다. 그렇기에 한빈은 매 순간 의심한다. 자신의 선택과 그것이 몰고 올 결과와 이 순간에도 죽어 나갈 시설의 아이들에 대해서.
역시 혼자 있는 건 좋지 않다. 머릿속을 빼곡히 메우는 잡생각들로 성화였다. 불안과 걱정을 비우려 노력한다. 왕옌의 말마따나 주어진 마지막 휴식이다. 이 여행이 끝나면 아주 거친 바람이 불 것이다. 그 틈에 휩쓸릴지, 풍향을 바꿔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므로 현재를 즐기기로 한다. 그렇게 코너를 도는 순간이었다. 한빈의 뒤로 작은 기척이 졌다. 잽싸게 몸을 돌렸다. 하오를 경호하면서 낯선 감각에 기민해진 건 필연이었다. 아무도 없다. 시선을 흩트린다. 주위반경에는 쇼핑을 즐기는 고객들 뿐이다.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안녕.”
그 앞에는 장하오가 있었다.
“화장실이 꽤 가깝더라고.”
그래서 금방 왔어. 이제 어디 갈까? 방긋 웃으며 붙어오는 낯에 한빈은 걸음을 물렸다. 왜 그래? 묻는 낯은 천진하고 무구하다. 이건 마치.
“…하오는 어디 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정말 그라도 된 것처럼. 한빈의 시선이 분주히 움직였다. 낭패였다. 거리를 두고 따라붙던 경호원들의 기척이 전무하다. 말도 안 돼. 도대체 어느 틈에. 한빈.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
“…장하오.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아니 그보다, 네가 대체 여길. 어떻게. 두서없는 말들이 터져 나온다. 사색이 된 한빈은 식은땀이 가득 찬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어느새 의미를 잃은 종이 쪼가리가 볼품없이 구겨졌다. 마주치는 시선에는 걱정만이 가득하다. 지금을 이해할 수 없지만 눈앞의 네가 걱정돼 죽겠다는 아주 따스한 눈동자. 한빈이 눈을 감았다 떴다. 깜빡, 깜빡. 다시 깜빡, 깜빡. 새카만 홍채로 한빈이 하는 양을 빤히 응시하던 장하오가 이내 웃는다. 눈을 살짝 찡그린 채였다.
“아하하…. 너는 속일 수 없구나.”
“….”
“그 멍청한 인간들은 죄다 속던데.”
권태로운 시선이 한빈을 향한다. 경악으로 물든 얼굴, 잘 차려입은 상의와 하의, 그리고. 하얀 운동화를 신은 발까지. 느릿하게 스캔한다. 탐색을 마친 장하오가 다시 고개를 올렸다. 분주히 돌아갈 작은 머리통을 향해.
“이런 우스운 짓을 하느라 나를 버린 거야?”
“…장하오. 잘 들어. 원장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무슨 일?”
“…그래, 그래도. 내 말 들어. 일단, 일단 자리를 옮기자. 잠시,”
“네 말?”
“장하오.”
“진짜가 나를 보면 안 되니까?”
“…장하오.”
꽉 쥔 주먹은 핏기가 가셔 새하얬다. 혼잡한 머릿속은 과부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어떤 말로 시작해야 좋을까. 적막이 흐르고 장하오는 그런 한빈을 빤히 본다. 시간을 확인한다. 서둘러야 했다.
“나와 돌아가자 한빈.”
건네는 말과 눈빛은 무척 다정해 자칫 그러겠노라 답하고만 싶어진다. 일시에 휘어지는 두 눈은 물결쳐 아름다웠고 그 아래 콕 박힌 점은 한빈이 심히 그리워하던 장하오였다. 어디로 보아도, 장하오가 맞았다. 그래서 한빈은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다. 한빈이 무한히 고민하며 뒷걸음질 치는 와중, 장하오는 브레이크 없이 돌진한다.
“안 그러면 진짜 장하오를 죽일 거야.”
일순 변하는 눈빛에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볼품없이 고꾸라진 목소리가 처량하기 그지없다.
“왕옌은 계약을 어겼어. 더 이상 우리의 고객이 아니지.”
“….”
“원장님이 두 가지 선택지를 주셨어.”
한빈을 살피던 장하오는 방긋 웃는다. 요동치는 혼란은 오로지 한빈의 전유였다.
“진짜를 죽이고 진짜로 살아갈 것. 그게 아니라면, 성한빈을 데려올 것.”
전자를 선택하면 나는 물론 한빈 너까지도 자유야. 한빈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원장님은 꿰뚫어 보고 계셔. 그런 거 다 묻어두고 그저 여생을 보내면 돼.
“그런데 한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눈앞의 현실을 한빈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한빈, 내가 살인을 했으면 좋겠어?”
“…대체 왜 그런 말을 해.”
“아, 물론 네가 사라지고. 너를 대신해서 많이 하긴 했어.”
“….”
“한빈 대신. 친구들을 교육하고, 인도하고, 속이고, 속고…”
“….”
“…이제 와 소용없는 얘기지.”
분위기는 침잠하다가도 급변한다.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온 장하오는 틈을 주지 않고 한빈을 몰아세웠다. 그러니 선택해.
“내가 진짜를 죽이고 진짜로서 네 옆에서 살아가면 좋겠어?”
“왜, 왜 그런 말을 해.”
“그게 아니라면 돌아가자.”
“…진짜니 가짜니 그런 말을 해.”
한빈의 집중은 오로지 한 단어에 머물러 있었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단 한시도 빠짐없이.
‘진짜’라니. 이는 그의 생 전반을 부정하는 단어였다.
“왜 너를 그런 식으로 취급해.”
“….”
“넌 가짜가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전제가 잘못됐어….”
뱉으면서 동시에 모순을 인지했다. 끊임없이 존재를 의심한 주제에 장하오만은 장하오로 남길 원하고 있었다.
“아하하하. 아, 아 정말. 한빈. 지금 그게 중요해?”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내가…, 내가 얼마나….”
장하오는 참을 수 없단 듯 배를 부여잡고 웃어댔다. 이 지경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깜찍하기 그지없다. 아일랜드라는 이상 속에 갇힌 건 비단 시설의 아이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닌 듯했다.
“한빈, 있지. 나는. 정말. 상상도 못 했어.”
“….”
“상상도 못 할 일이라는 건 대체 뭘까?”
상상은 인간의 사고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망상에 가까운 상상 역시 현실에서 기인한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염원은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순간을 이동하고 싶다는 소망은 눈을 깜빡임에 따라 사라졌다 나타났다 반복하는 물체의 잔상효과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시간을 돌리겠다는 헛된 바람은 지나온 시간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인지하고 있기에 꿈꿀 수 있는 바람이다. 그렇기에
상상도 못 할 일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너머의 일을 감히 생각해낼 수 없다. 모든 사고는 현실의 경험과 미래의 염원으로 비롯된다. 장하오는 이 간단한 명제를 거슬러야 했다. 제 미래엔 존재하지 않았을 상상 너머의 끔찍한 현실을 조우한 대가였다.
“매일 밤 상상했어. 이보다 더한 일이 있을까.”
“….”
“나는 내가 아니고, 이 시설도, 아일랜드도, 온통 가짜고, 가족같이 여겼던 원장님이, 시설의 모든 어른들이 나의 적이고, 나는, 그리고 내 친구들은 그걸 평생 모른 채로 죽게 된다는 게.”
“….”
“이보다 더한 악몽이 있을까?”
숨이 턱 막혀 힘겨웠다. 마주 닿는 눈동자가 원망으로 가득해서 한빈은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네가 사라진 밤. 원장님의 호출이 있었어. 안 그래도 게이트 키를 돌려드릴 생각이라 흔쾌히 나섰지. 그날 너랑 본 노을은 정말 아름다웠지만. 난 네 개인 시간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거든. 그렇게 원장실에 들어간 나를, 원장님이 어디로 데려가셨을 것 같아?”
“…그만.”
“이제부터 재밌어질 텐데.”
“…그만, 그만. 제발 그만!”
“…나약하네, 한빈.”
시설 밖 인간들은 수명의 연장을 위해 기꺼이 제 유전자를 시설에 공유한다. 일명 유전자 수술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다. 기술은 진보하고 개성은 상실되었으나 인간은 불안과 의심을 통해 이제껏 살아남았다. 거리낌 없이 유전자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그들 사고 한 편에는 은은한 복제윤리 문제들이 뛰놀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인간 복제는 상상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은 현실이다.
그렇다면 시설 안의 아이들은? 먹고 자고 사고하고 꿈을 꾸는 하나하나의 사람들이, 우리가, 가짜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네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모른 채 죽었을 텐데.”
“….”
“아일랜드에 가는 행복한 꿈을 꾸며 죽었겠지. 안 그래?”
침묵은 때때로 소음보다 무겁다. 한빈은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가득 차오르는 죄책감으로부터 도저히 도망칠 수 없었다. 빠른 속도로 밀려오는 현실을 도무지 외면할 수 있을 리 없다.
장하오는 그런 한빈에게 한 걸음 다가온다. 두 걸음. 세 걸음. 그리고 네 걸음. 꼼짝없이 맞닿은 두 눈동자는 흐트러짐이 없다. 있지, 한빈.
“난 네가 너무 미워.”
고통에 무던해졌다는 오만은 오늘을 위한 착각이었을까? 수없이 지져지던 손끝의 통증 온몸을 벌겋게 익게 하던 뜨거운 열기는 성한빈에게 어떤 아픔도 주지 못했으나.
“…곧 진짜가 올 거야. 일이 있는 것처럼 꾸며서 경호원들의 시선을 돌려놨어. 아마 내 존재를 눈치챌 거고, 왕옌에게도 연락이 가겠지.”
차가운 장하오의 시선만이 성한빈을 병들게 했다. 이게 내 선택의 결과였구나. 장하오를 위한다는 오만이 장하오를 상처입혔고, 장하오가 상처 입었기에 성한빈은 병들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은 무엇으로도 아물 수 없다.
“어떻게 할래?”
그는 정말이지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사색에 잠긴 순간마저 사치라는 듯. 마지막 방아쇠를 당겼다.
“언제나 그랬듯 선택은 네 몫이야.”
무척이나 가볍고 이토록 잔인하게.
“나는 그저 따르면 돼. 늘 그래왔듯이.”
네 걸음
“재미있네.”
예상하지 못한 결과야.
그러나 입가에 그어진 호선은 채 숨길 수 없다. 유한 고갯짓을 잇는다. 앉으렴. 독대가 길어질 예정이었다. 그 언젠가처럼.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봐?”
턱을 괸 채 날아오는 질문은 오만했다. 한빈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시야 가득 들어차는 익숙한 탁상 익숙한 벽 익숙한 바닥. 원장의 방은 변함이 없었다. 지독하리만치.
“아이들에게는 네가 많이 아팠다고 해뒀어.”
“….”
“기뻐할 거야. 너를 많이들 따랐잖니.”
돌아왔다. 결국.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원장실 문을 닫고 나오니 장하오가 한빈을 반겼다. 말갛게 웃는 얼굴에 아무 사고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말없이 걸었다. 목적지를 모르는 채로. 그는 당연하단 듯 한빈을 이끈다.
“좀 쉬어.”
“…그대로네.”
“응. 매일 관리했어.”
내가 했어. 따라붙는 말을 회피한다. 여전히 한빈의 침실은 장하오의 옆이었다. 급하게 사라졌던 그 날로부터 전혀 변하지 않은 좁은 방. 정말. 무엇도 변하지 않았을까? 한빈은 말없이 눈앞의 남자를 본다. 꼭 같이 자랐다. 이 모든 게 하오가 꾸미는 장난이래도 믿을 수 있을 만큼.
“한빈. 지금.”
“….”
“걔 생각을 하는구나.”
“…뭐?”
“섭섭하네.”
말을 마치고 웃는 낯이 서글펐다. 그제야 한빈은 깨닫는다. 장하오를 앞에 두고 다른 이를 떠올렸다. 두고 온 이를 생각했다. 새삼스레 두 사람이 닮았다고 판단했다. 실책이었다. 적어도 장하오에게는 이래선 안 됐다.
무슨 말이라도 꺼낼까 머뭇거리면 장하오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선수를 친다. 푹 쉬어. 나 옆방이니까. 일 있으면 언제든 부르고.
“기다릴게.”
“….”
“…난 사실. 그걸 제일 잘해.”
“몸은 좀 괜찮아?”
“…오랜만이네.”
시설은 낯익었으나 때때로 위화감이 들었다. 아이들은 자랐고, 사라졌고, 새로 채워졌다. 운이 좋게 살아남아 시설의 하루에 일조하게 된 자들도 있었다. 데이빗은 그중 하나였다.
그의 본체는 염려보다 건강한 사람인가 보다. 그는 한빈을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오 년이라는 큰 공백에 이상을 느끼지는 못하는 모양새였다. 몸이 자랐어도 지능은 변함이 없다. 데이빗은 로봇 청소기를 점검하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간단한 업무를 수행 중이었다. 이대로. 쭉. 데이빗의 본체가 아프지 않다면. 일생을 건강하게 지낸다면. 그는 시설에서 평생을 살게 될까? 존재치도 않는 아일랜드 추첨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이곳의 일상에 그런대로 만족하면서?
그건 나쁘지 않은 삶일까? 존재는 인지 후에야 의미를 가진다. 적어도 데이빗은 어떤 슬픔 없이 살아가고, 죽을 것이다. 상상 너머 세계 따위 영원히 알지 못한 채로.
“안색이 좋지 않은데. 무리하는 거 아냐?”
“…신경 써줘서 고마워, 데이빗. 나는 좀 쉴게.”
“그래, 가서 좀 자는 게 낫겠다. 환영회는 나중에 하자구.”
맑게 웃는 데이빗을 보다가 한빈은 겨우 걸음을 돌렸다. 혼란으로 머릿속이 일렁였다.
하오와의 여행이 끝나고 나면, 한빈과 왕옌은 시설과 얽히지 않은 언론사에 시설의 실태를 고발할 작정이었다. 왕옌이 가진 지분과 한빈의 존재를 핵심으로. 불에 타지 않고 시속 백 킬로의 자동차보다 빠르게 달리고 쉽게 부러지지도 상하지도 않는 신체를 볼모 삼아 그곳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현실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복제인간의 존재가 까발려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과 꼭 같이 생긴 복제품들이 자신들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인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회는 혼란과 논쟁으로 시끄럽겠지만 한빈에게는 시설의 아이들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이 시간에도 새로 태어나고 새로이 죽어갈 가여운 영혼들을 반드시 구해야만 했다.
죽음보다 잔인한 일은 없다. 시설 바깥에서 생활하며 더욱이 실감한 진리였다. 인간의 목숨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 그러니 원장의 욕심으로 굴러가는 이 끔찍한 굴레를 끊어야만 한다. 한빈은 멍청하게도 이것이 장하오를, 아이들을 지키는 일이라 확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실은 죽음보다 끔찍한 일이 된다. 내가 가짜라는 걸, 만들어진 존재라는 걸, 누군가의 대신이라는 걸. 온몸으로 절감하게 될 그들의 절망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어쩜 인간은 이리 이기적인 걸까. 누군가의 대용이 되고 싶지 않다 했으면서, 나로서 존재하길 원했으면서. 장하오와 가까워진 이후, 본인을 괴롭히던 집념에서 해방되지 못한 주제에. 당장의 구출에 정신 팔려 잊고 있었다. 아이들이 느낄 혼란과 고통을. 완벽한 패착이었다.
발치에 장난감 레고가 걸렸다. 모서리가 둥글어 부상을 최소화하는 디자인이었다. 아이들의 손을 거쳤을 미완성 상태의 구조물을 본다. 둥근 돔 형태의 성을 쌓고 있던 듯했다. 의식 없이 바라보다 깨닫는다.
아. 경복궁.
가지 못했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이곳으로 돌아왔다.
결국 한빈은 그 무엇도 지키지 못했다. 지키겠다는 다짐도 곁에 있겠다는 약속도.
***
“그렇게 해서 뚫리겠니?”
“…이제 내가 있잖아요.”
장하오의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넘실거린다. 잘 벼린 칼날 같은 시선으로 원장을 노려봤다.
장하오는 많은 부분에서 한빈을 대체하고 있었다. 끔찍한 실험도 그의 연장선이었다.
“걱정해주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닦아내며 넌지시 묻는다. 핏발 서린 눈동자는 여전히 원장을 향해 있다. 장하오는 그게 못마땅한 모양이다. 시선을 가로채려 성화다.
“연고 발라줘.”
“…뭐?”
“전에 내가 해줬잖아.”
말을 마치고 배시시 웃는다. 볼을 가로지르는 상처가 함께 솟았다. 거북했다.
“…언제부터 이랬어? 원장이 또 뭘 시켰어?”
“천천히 물어봐.”
길게 난 생채기에 조심조심 연고를 덧발랐다. 가만 손을 타는 모습이 순한 강아지 같다. 일전의 재회는 거짓이었던 양. 날 선 원망의 눈빛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신경 쓰여?”
“….”
“걱정돼?”
“말이라고….”
“한빈은 여전히 다정하구나.”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다. 아. 아야. 아파. 살살해. 엄살 부리지 마. 엄살 아냐. 비교적 유한 분위기가 흘렀다. 상처는 금방 아물었다. 비슷한 약물이 투여됐겠지. 성한빈이 걸어온 모든 길을 답습했을 터였다.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아이들을 위하겠다는 허울은 보기 좋은 핑계였을 지도 모른다. 다만 적어도 한빈은. 장하오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네가 죽지 않도록. 네가 너로서 살아가도록.
이제는 무의미한 일이다.
장하오는 빤히 한빈을 바라보았다. 작은 머리통이 뱉어내고 있을 생각쯤은 쉽게 읽혔다. 무수한 자책과 후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겠지. 그 틈엔 ‘장하오’도 있을 것이다.
“걱정돼?”
“자꾸 물어. 당연한 거니까 그만. 그 훈련이 얼마나 거지 같은지는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아니. 나 말고.”
“….”
“장하오 말이야.”
공중에서 시선이 부딪친다. 무언가 균열이 가는 소리.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 빨려들 것만 같다. 길지 않은 정적이 흘렀다.
“걱정되지?”
“…말하지 마. 입에 연고 들어가.”
볼을 문지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연히 곡소리가 흘러나온다. 진짜 아파. 다물어. 툭 튀어 나간 소리에 다시금 고요가 찾아왔다.
물론 하오가 걱정된다. 갑자기 사라졌을 저를 찾고 있는 건 아닐지. 왕옌이 어떤 소리를 했을지. 이제 막 자신을 찾아가던 아이가 다시금 꺾여버리지는 않을지. 그렇지만.
“난 네가 제일 걱정 돼.”
“….”
“예나 지금이나.”
한빈의 모든 다짐은 눈앞의 장하오로부터 기인한다. 시설에서 도망친 것도, 다시 돌아온 것도. 온통 네가 이유인데.
대체 나는 어떡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돌풍은 그치지 않았다.
깊은 고민으로 겨우 잠이 든 밤이었다. 쾅쾅쾅. 문을 내리치는 소음에 눈을 떴다.
“한빈, 얼른 피해!”
급박한 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데이빗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한빈을 끌어당겼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멍청하게 되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없다. 다급한 발걸음만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워주고 있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경고음 소리가 미친 듯이 돌아간다. 그의 손에 끌려 복도 끝에 다다라서야 한빈은 정신을 차렸다. 장하오는?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시설에 문제가 생겼어? 와다다 뱉는 말에도 걸음은 멈추질 않았다. 데이빗은 비상구 계단에 진입한 뒤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겠어. 불이 난 것 같아. 다들 대피하고 있어. 장하오는 아마 원장님과 있을 거야. 분명 안전해. 너부터 챙겨.
들리는 모든 말들이 튕겨 나갔다. 화재? 시설에? 그럴 리가. 이곳은 그런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점화될 무언가가 있을 수가 없다. …설마. 왕옌의 짓인가? 혼란으로 범벅이었다. 부단한 발걸음이 일 층에 다다랐다. 불이 났다는 것치고 고요한 상태였다. 아이들은 한 방에 모여 있었고 그 틈에 장하오는 없었다. 불안이 엄습한다. 뒷걸음질을 잇던 한빈이 결국 뒤돌아 달렸다. 한빈, 어디가! 데이빗의 외침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시설은 두 공간으로 나뉜다. 복제품들의 생활공간과 복제가 이루어지는 핵심지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이층 맨 끝 복도에 도착해서야 숨을 고른다. 눈에 띄지 않는 흠 사이로 지문을 가져다 대면 그대로 벽이 밀린다. 시설과 시설을 잇는 게이트였다. 사고보다 행동이 앞섰다. 한빈은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실험실? 복제실? 그것도 아니라면 훈련실? 어디에 가야 장하오를 볼 수 있지? 뜀박질이 지체된다. 생각이 엉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 우선은 훈련실에 가 보자. 어쩐지 장하오에게는 외부 훈련이 허락되지 않은 듯했으니까. 한빈이 몸의 방향을 틀 때였다. 절박한 외침이 귓가로 꽂혀 든다. 낯익은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면.
“한빈!!”
“…하오?”
“다행, 이다. 안 늦었네….”
이곳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얼굴이 한빈을 반겼다.
마지막 걸음
‘…말도 안 돼.’
‘정말 말이 안 돼?’
‘…뭐?’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어? 정말로?’
‘….’
‘아마 네 집에는. 한빈과 꼭 같이 생긴 사람의 사진도 있었을 텐데.’
정적이 흘렀다. 장하오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웃었다. 나는 이렇게 생겼구나. 거울로 보는 것과는 또 달라. 음…. 나쁘지 않은 얼굴이네.
‘한빈이가 좋아할 만해. 그렇지?’
‘무슨 헛소리야 이게….’
‘길게 말할 시간 없어.’
거울을 댄 양 꼭 같은 얼굴을 마주 본다. 같은 위치의 점. 자로 잰 듯 동일한 이목구비. 눈앞의 사람은 의심의 여지 없이 장하오였다.
손을 씻겠단 핑계로 화장실에 당도한 참이었다. 지나치게 고요한 그곳에서 장하오가 장하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지 않은 대치 후, 그가 옷깃을 뒤적거렸다. 새까만 유에스비 하나를 꺼내더니 넌지시 건넨다.
‘자, 받아.’
‘….’
‘너 말이야.’
스스로 무언가 해본 적이 없지?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눈앞의 장하오는 얕게 한 번 웃더니 억지로 손에 유에스비를 떠넘긴다. 이번엔 네가 선택해. 너한테 달린 일이야. 그걸 보고 무슨 일을 할지는.
내가 해야 할 일.
그런 게 있을까?
지독한 보호는 언제나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나의 쓸모는 뭘까. 이렇게 죽은 듯 숨만 붙어 있으면 끝인가. 존재 의의에 대해 파고들다 보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진다. 그래서 하오는 종종 모든 의욕을 버리고 누워있었다. 말마따나 죽은 듯이. 어쩌면, 누군가 일으켜주길 기다리면서.
처음 욕조에서 발각된 날. 하오가 떠올린 한빈의 반응은 모 아니면 도였다. 조금 거리를 두거나, 억지로 꺼내려 들거나. 한빈은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있어 주었다. 따스한 온기를 나누면서. 그 다정하지만 무감한 위로에 하오는 용기를 얻었고 지금 이곳에 서 있다. 해외여행이라니. 일전의 그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천천히 하지만 뚜렷하게 하오는 성장하고 있었고 이 모든 건 한빈의 덕택이었다. 그렇기에 하오는 선택했다.
“…그 유에스비에 뭐가 있었길래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한빈의 표정은 심각했다. 혼란은 수습되지 못했다. 하오와 장하오가 이미 만났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고 동시에 벌어져야 할 일이었다. 한없이 침잠하는 낯에 하오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음. 길게 말할 시간은 없는데….
“원장은 시설을 불태울 생각이야.”
“…뭐?”
“그렇게 되면 어머니와 네가 준비한 계획에 차질이 생길 거고. 장하오…. 그러니까 나 말고. 그 장하오가 그걸 막을 거라고 했어. 자료를 빼돌리겠다는 말 같아.”
하오가 숨을 골랐다. 한빈의 두 눈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날짜와 시간까지 정해뒀더라고. 밤에 오는 편이 좋을 거라고 했어. 시설의 아이들을 구하려면 말이야. 어머니와 내가. 그들의 미래를 책임질 거야. 최대한.
“이건 어머니가 하는 속죄야.”
“…원장이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한다는 거야? 이해가 안 돼….”
“알아, 이해해. 그런데. 우선은.”
장하오를 구하러 가는 편이 낫지 않겠어? 걔, 같이 타버릴 작정이야.
행동은 다시금 사고를 앞섰다.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이젠 네가 어디 있는지 알겠어.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도 알 것 같아.
하오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길을 향해 착실히 걸어갔을 뿐이다. 그렇기에 한빈은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시속 백 킬로의 자동차보다 빠른 속력으로. 간절한 이를 구하기 위해.
복제실에 가까워지자 탄내가 진동했다. 조급한 마음이 튀어나와 토할 것 같았다. 뜨거운 열기가 피부로 와닿았지만, 한빈은 무리 없이 전진할 수 있었다. 거지 같은 실험에 감사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쿵. 무언가 하강하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으로 온몸의 털이 삐쭉 솟는다. 제발. 늦은 게 아니기를.
이윽고 문 앞이었다. 굳세게 닫힌 손잡이를 열어젖혔다.
빨갛고 거먼 형체들이 앞다투어 시야를 방해했다. 불길이 가장 거센 안쪽으로 진입한다. 타닥. 타닥. 타들어가는 소리. 파편이 잘게 튀는 소음. 엄습한 불안감에 입술을 꽉 깨물 무렵 자조 섞인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기어이 여길 오는구나.”
“…뭐 하시는 거예요, 대체.”
원장은 뒤돌아 서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너머로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원장은 알만하다는 듯 웃었다. 장하오를 찾니?
“걱정 마. 안 죽었어.”
“….”
“쉽게 죽지 못하게 되었잖니.”
“말장난할 시간 없습니다.”
“잠깐의 대화도 힘들까?”
말을 마친 그가 뒤를 돈다. 산발인 모양새. 언제나 각 잡혀 단정한 외양을 유지하던 그였기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넌 너를 궁금해했지.”
“….”
“네 기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잖아.”
“….”
“별로 알려주고 싶진 않았어. 의미 없으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
날 선 반응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글쎄…. 넌 너고 걘 걔야. 그렇지.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넌 걔처럼 행동하지 않을 텐데. 난 왜 널 묶어두려 했을까.
“네가 왕옌과 떠난 날, 그런 생각이 들더라.”
“….”
“내가 한 건 정말 헛짓거리였구나. 하고.”
맥락 파악이 곤란한 말들이었다. 한빈이 눈살을 찌푸렸다. 원장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 모습을 응시하다가 말을 이었다.
“…왕옌과, 나. 그리고 네 본체가 되는 사람. 우리 셋은 제법 친했어.”
“….”
“셋이서 찍은 사진도 있는데, 아. 타버렸겠구나.”
원장이 얕게 웃었다. 다만 한빈은 표정을 더욱 굳혔다. 여전히 공간은 쉴 새 없이 타고 있었다. 장하오의 안위가 염려돼 미쳐버릴 것 같았다. 콜록. 콜록. 때마침 익숙한 기침 소리가 귓가를 메운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면 구석진 곳에 쓰러진 장하오가 보였다. 숨도 채 뱉지 못하고 몸을 움직였다. 당장 그를 구해 나가야 했다. 지난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아니었다. 그 다급한 발걸음을 막아 세운 건 원장의 한마디였다.
“그 애가. 이 복제 기술을 만들었거든.”
“….”
“투자 유치를 위해 열심히 알아보고, 샘플을 만들어내고. 그랬는데. 어느 날. 단단히 잘못되었다면서 모두 폐기해버렸어.”
연구실 자체를 불태워버렸지. 어떤 흔적도 남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나 봐. 자료가 남으면, 누군가 반드시 이용하려 들 테니까. 그리고 그 자료에는 본인도 포함됐어. 이 기술을 만들어낸 그 두뇌가 가장 핵심이니까 말이야. 그렇게 활활. 타버렸지. 지금처럼.
한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벽에 등을 기댄 채 피 섞인 기침을 토해내는 장하오에게로. 손이 달달 떨려오고 있었다. 감기려던 두 눈이 뜨인다. 한빈…. 드디어 한빈을 인지한 듯 장하오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가만히 있어. 작게 읊조리며 그의 몸을 살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빌어먹을 실험 덕택에.
“그런데 그 애는 날 믿었나 봐. 나한테 보내준 것들은 없애지 않았거든.”
“….”
“가장 먼저 샘플이 되었던 본인의 유전자 정보도. 나에겐 그대로 남아 있었어.”
쿨럭. 원장의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불에 타지 않는 인간을 만들려는 수고가 이에서 비롯됐단 말인가. 이 불길에 그를 잃었기 때문에? 다만 원장에게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 사안이었다. 잠깐 살핀 그의 낯이 거무죽죽했다. 분명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희미한 미소는 그 누구보다 생기 넘쳤다.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계속해서 말을 뱉었다.
“돈을 벌겠다든가 신 행세를 하겠다든가 하는 어쭙잖은 반항은 아니었어. 난 그저. 그 애가 제 한 몸 불사질러 태워버린 이 흔적들을 소생시키고 싶었지. 네 희생은 아주 무의미한 거였다고. 네가 죽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고. 이 모든 건 너 때문이라고.”
“….”
“…그렇게 시위라도 하고 싶었나 봐.”
잔기침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탱하던 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원장은 무릎부터 쓰러졌다. 그의 뒤로는 화려한 불꽃이 여전히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알아. 멍청하다는 거.”
“…이걸 태우면 끝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 이미 세상에 나와버린 기술이야. 재현할 능력 좋은 연구원들은 쌔고 쌨겠지.”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흘렀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는 묻는다. 답을 줄 이는 없다.
“이건 내 방식의 속죄야. 건설적인 왕옌과는 다르지.”
“….”
“…어서 가렴.”
시설의 대외비와 폭로할 만한 자료들은 장하오한테 넘겨뒀어. 나는 이곳에서 함께 타버릴 거야. 그 애를 만나 사과할 거야. 갈라진 목소리가 볼품없이 찢어져 나왔다. 쾅. 폭발음과 함께 잔해더미가 낙하했다. 장하오의 근처로 파편이 박혀 든다. 움찔거리는 한빈을 보며 원장은 맑게 웃었다. 장하오는 너만큼 튼튼하진 않거든. 서둘러야 할걸.
“그래도 다행이야.”
“….”
“늦지 않아서.”
“….”
“…미안했다. 용서는 하지 말렴.”
콜록콜록. 재차 터지는 기침은 장하오의 몫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고 입술은 메말라가고 있었다. …넌 왜 죽으려고 한 거야? 두 눈으로 의문하니 장하오는 픽 웃는다. 글쎄. 그냥 기다린 거야. 하던 대로. 사실. 매일 밤 기다렸거든.
“한빈을.”
한빈을 직시하는 눈동자는 무른 데 없이 단단했다.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한빈. 있잖아. 실은.
“전혀 밉지 않았어.”
“….”
“사실. 널 다시 보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은….”
많이 힘들었지? 혼자서. 시선은 온전히 맞닿는다. 동시에 장하오의 몸이 한빈에게 쏟아졌다. 옅게 뛰는 심장에 머리가 울렸다. 타다닥. 타다닥. 어두운 공간을 힘있게 가르는 불꽃 소리가 현실감을 일깨운다. 한빈은 이 악물어 쓰러진 그를 일으켰다. 그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빠르게 뛸 태세를 갖춘다. 어느새 원장은 엎어져 있었다. 살짝 보이는 안면이 편안해 보였다.
사라지지 않은 그의 미소를 뒤로 하고 한빈은 앞을 보았다. 천장이 무너져 막힐 뻔한 입구를 겨우 넘는다. 마찬가지로 거멓게 그을리고 있는 복도를 내달린다. 빠르게. 쉬지 않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을 향해.
목적지는 알 수 없다. 얕은 숨을 몰아쉬는 장하오의 안위를 장담할 수도 없다. 우리의 사이를 가늠할 수도 없다. 우리의 미래를 확언할 수도 없다. 이 화재가 불러올 파장과 앞으로의 일들을 기약할 수도 없다. 전보다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지속될지도 모른다. 시설의 아이들이 바깥에서 무리 없이 적응할 수 있을지,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일지, 그들에게 향할 시설 밖 인간의 시선들도,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다.
그러나 한빈은 깨닫는다. 불확실의 연속이야말로 생이라는 것을. 무궁무진한 다음을 기대하고 상상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자체가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복도를 가로질러 외부로 발을 디뎠다. 시설과 시설을 잇는 게이트가 파괴되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구나. 언제나 절대적이었던 시설의 존재에 조소가 흘러나왔다. 한 걸음만 내뻗으면 바로 바깥이었다니.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다니.
외곽을 빙 돌아 아이들과 하오, 왕옌이 있을 곳으로 내달렸다. 푸른 밤이 내려앉은 시각. 어깨에 기대 질질 끌리던 장하오가 정신을 차렸는지 몸에 힘을 준다. 한빈의 부축을 벗어나 땅에 두 발을 디뎠다.
반짝이는 별빛이 쏟아진다. 언젠가의 다짐이 두 사람의 머리통을 관통했다
너랑 같이. 저 하늘을 보고 싶다. 진짜 땅을 밟고 서서.
동시에 눈이 마주친다. 단단한 땅 위에 서서 하염없이 반짝이는 별을 느꼈다. 서로의 눈에 담긴 각자를 느꼈다. 새살은 차오르고 있었으나 불에 댄 피부는 욱신거렸고 무언가 잃어버린 고통으로 충분히 괴로워했음에도. 마주 닿은 눈동자에는 간지럽고 애틋한 마음만이 넘실거렸다.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장하오다. 그는 스스로 걷고자 태세를 갖췄고 한빈은 그를 가볍게 저지했다.
“아직 안 돼. 다시 기대.”
“혼자 걸을래.”
“아니, 얼른 기대.”
한빈의 고집에 장하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너른 품에 서로를 감싸고, 이번에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려 넘어질 것만 같았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었다. 나란히 한 발 두 발 떼면서 결국 차오르는 웃음을 토해낸다. 시원하고 후련한 웃음소리에 장하오의 시선이 향한다. 잘게 난 생채기는 착실히 아물어 가고 있었다. 한빈은 거칠어진 그의 피부를 만지작거렸다. 참으로 애틋하게.
“고마워.”
“…왜?”
“그냥. 너무 고마워.”
있지, 모든 건 네 덕분이야. 묻어두었던 의심을 깨워준 것도. 여전히 멍청하게 진짜와 가짜를 판 가르던 내가 정신을 차린 것도. 자신의 아픔만을 부여안고 있던 건 나였는지도 모른다. 내 세계를 억제하고 있던 건 그 누구도 아니고 나였다.
장하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유하게 풀어진 눈빛이 어린 날의 그 같아서 한빈은 끊임없이 웃음이 나왔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내일이 기다려진다. 우리에게 펼쳐질 다음이 기대된다. 너와 하늘을, 별을 볼 수 있으리라 감히 상상하지 못했어. 내 사고는 폭이 아주 좁았던 건가 봐. 너는 그때도 그날의 우리를 그려보고 있었는데 말이야.
때마침 유성이 낙하했다. 번쩍. 잠시 어둠을 몰고 간 환한 빛이 주위를 깨운다. 한빈은 멍하니 서서 그 잔해를 응시한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별의 먼지를.
“장하오.”
“응.”
“미안했어.”
“….”
“그리고. 보고 싶었어.”
“…정말?”
“응. 정말.”
매일 네 생각을 했어. 두고 온 널 생각했어. 버린 게 아니야. 절대로.
하늘로 향하던 시선을 돌리면 귀 끝이 붉어진 장하오가 있다. 둘은 멈추었던 걸음을 잇는다.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야 할 곳을 향해 착실히 발을 내디딘다. 어깨에 걸쳐둔 그의 손이 한빈의 손가락을 얽었다. 영영 놓아주지 않을 듯 강한 힘이 실린다. 언제나처럼 따스한 온도에 한빈은 크게 웃었다. 더는 바랄 게 없는 듯이.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걸 바라보자.
그리고 하나씩. 이루어가자. 땅을 밟고 하늘의 별을 보고, 바다가 푸르고 따뜻한 너의 고향이 될지도 모르는 곳에 가 보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우리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그래, 감히 상상하면서.
비좁은 세상에 우리를 가두지 않고. 그 너머를 무한히 그려보면서.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면서. 닿는 한 함께하면서.
나아가자.
끝없는 상상 속으로.
Un imaginary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