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랩 시퀀스
몽상
*실제 행사명 및 장소 등을 차용하였으나, 실제 행사 내용과는 무관하게 가상으로 재구성된 내용인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시월의 해운대는 어딘가 부산스럽다. 원체 일년 내내 관광객이 몰려들어 조용할 틈이 없는 동네이긴 하지만, 시월이 가까워올수록 공기의 흐름 자체가 어수선해지고 들뜨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마치 건달들이 보이지 않는 뒷골목에서 은밀하게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기도, 쥐들이 인간들이 잠든 틈을 타 도시를 헤집고 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일을 꾸미고 있는 쥐새끼 중 하나가 바로 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하오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비죽였다.
오전 6시 47분. 차 내부에 달린 시계는 약 4분 정도 느리므로 아마 실제로는 6시 43분 정도 되었을 것이다. 하오가 지금 핸들을 잡고 있는 모닝은 해안도로를 따라 부지런히 달리고 있다. 해가 곧 떠오르려는지 어스름해진 새벽 하늘 아래 해변가에는 까만 인영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그들이 새벽 운동을 나온 건강한 이들인지, 일출을 보러 나온 낭만적인 연인들인지, 파도를 안주 삼아 술로 밤을 지새운 이들인지, 뭐 알 건 없다. 바닷바람을 따라 춤을 추는 영화 포스터들을 무감히 바라보다 오른쪽을 흘긋 살핀다. 조수석에는 하오의 팀장인 예지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잠들어 있다. 어제 첫 프레스 행사를 치르고 오늘 있을 기자회견 준비까지 하느라 날밤을 샜을 것이었다. 그건 사실 하오도 마찬가지였으나 운전대를 잡게 된 이상 제 의지와는 관계없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어느새 얼음이 살짝 녹아 옅은 갈색으로 희석된 액체를 쪽 빨아들인다. 곧 죽어도 밀크티만을 고집해오던 하오는 이곳에서 아아를 배웠다. 생존을 위해서는 좋든 싫든 습득해야 하는 게 있는 법이었다.
한 손으로 핸들을 조금씩 틀어 움직이며 엑셀을 밟는 폼이 이제는 나름 여유롭다. 몇 년 묵혀 두었던 장롱 면허를 떠밀리듯 꺼내고 손 덜덜 떨면서 운전석에 올랐던 게 작년 이맘때였는데 그래도 2년 차라고 부산에서의 운전이 익숙해진 게 느껴져 조금 웃기기도 허탈하기도 하다.
이런저런 상념들을 흘려 보내는 사이 교차로의 직진 신호가 켜진다. 신호등 너머로 우뚝 솟아 있는 신세계백화점을 보며 엑셀을 지그시 밟는 순간 오른쪽 도로에서 오토바이 하나가 신호를 위반하고 무섭게 달려든다. 저도 모르게 클락션을 때리듯 눌러 버리자 귀를 찢는 날카로운 경적음에 예지가 뒤척이며 깬다.
"장하오...운전 똑바로 안하냐..."
"제가 아니고 쩌어 오토바이가 신호위반 한 거에요."
"시끄럽고...얼마나 남았냐."
"이제 다 왔어요."
"아, 씨...좀만 더 자려고 했는데."
예지가 고개를 짜증스레 털며 등받이에 털썩 소리가 나게 기댄다. 하오의 말이 전혀 거짓되지 않은 것이, 신세계백화점만 지나면 바로 그들의 목적지였다. 하오가 말없이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핸들을 천천히 돌린다. 백화점보다는 현저히 낮지만 그에 지지 않는 웅장함을 가진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하오와 예지의 목적지인 영화의 전당이었다. 좌회전을 한 번 더 하면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이제는 얼굴이 조금 익은 듯한 젊은 주차 요원에게 익숙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그도 하오와 예지가 맞춰 입고 있는 흰 티셔츠를 흘긋 보더니 별 말 없이 들어가라는 손짓을 한다.
부산국제영화제 2일차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하오의 직무는 대체로 사무직의 성향을 많이 띠었으나, 행사 기간에는 그런 거 얄짤 없다. 무조건 현장에서 미친듯이 뛰어다녀야 한다. 그 때만큼은 네 일, 내 일의 경계도 흐릿해지는지라 자기 일이 끝나도 언제 어디든 백업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오늘 중 가장 굵직한 행사였던 기자 간담회 하나를 무사히 쳐냈다. 기자 하나가 주연 배우에게 영화와 관계 없는 이상한 질문을 해서 회장의 공기가 일순 싸늘해졌으나 그 배우가 유하게 잘 웃어넘겨 예지가 더 곤란해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잖아도 예지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언론사의 기자였는데, 오늘부로 그는 예지의 데스노트에 제 이름 세 글자를 올리리라. 하오가 영혼 없는 눈으로 커피를 빨아들이며 생각했다.
스탭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의 휴게 공간을 위해 설치된 본부였지만, 여기서도 사람들은 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는 못하다. 지금만 해도 바쁘게 전화를 하고 있는 게 다섯 중 셋, 그 중 하나는 조금 전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뛰쳐나갔다. 그나마 가만히 숨을 돌리고 있는 건 하오와 하오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프로그램팀 팀장 현수였다. 둘은 10분 전 어색하게 눈인사를 나눈 뒤부터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는 중이었다. 나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사람에 치이고 치이는 일을 하는 만큼 각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아는 이들끼리의 배려였다.
정적 아닌 정적을 깨고 전화벨이 울린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 지 모르는 이곳에서 무음이나 진동 모드는 사치였다. 일단 하오 본인의 것은 아니었기에 옆에 있는 현수 쪽을 흘긋 본다. 현수는 왠지 불안한 눈으로 화면에 뜬 번호를 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김현수입니다. 하오는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리고 빨대를 이로 잘근잘근 씹어댄다. 커피잔에는 어느새 얼음만 남아 있다. 무관심한 척 현수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 네, 네, 네, 알겠습니다. 상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현수가 사근한 투로 건네는 대답들에서 느껴지는 묘한 떨림에서 하오는 곤란함을 읽어낸다. 철저히 을의 입장이 되어 귀하신 분들을 섭외하고 뭐 하나도 간곡히 부탁을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동질감이었다.
“하, 씨발. 좆됐네.”
전화가 끊어지는 음이 들리자마자 손에 얼굴을 거칠게 묻고선 낮게 읊조리는 현수의 목소리에 하오는 흠칫 떨었다. 자고로 행사란 사소한 것 하나만 틀어져도 모두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었기에 덩달아 불안해진 하오가 씹던 빨대를 입에서 떼어내고 묻는다.
“무슨 일 있어요?”
그러자 현수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 알죠. 중국 출품작.”
“당연히 알죠. 리키 션 감독 작이잖아요,”
중국어 원제는 我们生活的世界, 영어로는 My World. 홍보 자료를 작성하느라 외우듯이 읽은 시놉시스가 머릿속을 스친다. 제 나이 또래 정도 되었으려나 싶은 젊은 신인 감독은 작년에 혜성같이 나타나 참신하고도 심오한 소재와 독특한 영상미로 중국 영화계에서 급부상중인 인물이었다. 그 영화가 뭐 어쨌다는 걸까 싶은 순간에 현수가 한숨을 깊이 쉬며 덧붙인다.
“그거 이따 GV 잡혀 있는데 담당 통역사가 펑크냈어요.”
“…네?“
“못 온다 그랬다고, 하.”
씨발, 이걸 어쩌지. 평소에 굉장히 차분한 이미지로 봤던 사람이라 하오는 계속 욕을 쏟아내는 현수가 낯설면서도 동시에 안쓰러워진다. 그거 참 쌍욕이 나오고도 남을 만한 상황이지. 하지만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는 부분은 아니라 한껏 안타까운 눈으로 가만 쳐다만 볼 뿐이다. 그때 현수가 무언가 깨달은 듯 탄성을 낸다.
“아, 참. 하오씨.”
“네?”
“하오씨 중국 사람이지.”
“네…일단 뭐 그렇죠?”
이제는 한국에서 지낸 세월이 인생의 절반을 채워가고 있는 중이었고 영주권도 가지고 있었으나 일단은 외국인 신분이었기에 그렇다고는 대답했다. 방금 현수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제가 중국인이라는 사실도 완전히 까먹고 있을 뻔 했다. 그러자 현수가 하오의 손을 덥석 붙잡아 온다. 급작스런 동성 간의 스킨십에 하오는 영문 모르고 눈만 껌뻑인다.
“그럼 저 좀 살려줘요.”
“네? 그게 무슨 말씀…”
“이따 GV 때 통역 좀 부탁할게요.”
“아니, 그걸 왜 제가…”
“하오씨 정도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한국어 중국어 둘 다 잘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저는 통역 쪽엔 전문성이 하나도 없는데요. 그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현수의 간절한 눈빛에 꾹 눌리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전문 통역가의 역할을 한국에서 오래 살았을 뿐인, 일개 홍보팀 스탭인 제가 대신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중국어도 오래 쓰지 않아 많이 잊어버렸다. 업무 상 중국어를 써야 할 때에도 가끔은 헷갈려서 구글 번역기를 돌린 적이 있었다. 그런 하오의 걱정을 알아챈 건지 뭔지 현수는 상냥히 웃으며 말한다.
“아시겠지만 션 감독님은 말씀이 많으신 스타일이 아니라 걱정 안해도 돼요. 그럼 이따 여섯 시 반에 하늘연극장에서 볼게요.”
그 일방적인 통보를 마지막으로 현수는 하오의 어깨를 두드리며 본부를 빠져나간다. 그 뒤로 한 마디 하려 했지만 하오 또한 때마침 예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본부를 나서야 했다. 네, 팀장님.
결국엔 와버렸다. 현재 시각 오후 6시 33분. 장소 하늘연극장. <우리가 사는 세계> 상영 종료 15분 전. 하오는 상영관 옆에 마련된 대기실에서 현수가 건넨 통역가 목걸이를 건 채 감독과 주연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쓰는 중국어라 어색할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스스로도 조금 놀란다. 백금발의 머리칼을 제외하고선 발끝까지 전부 블랙으로 빼입은 리키 션 감독은 생각보다도 더 어렸고 생각보다 낯을 많이 가렸다. 내향형인 하오가 그나마 언론 관계자들을 응대하던 짬을 끌어모아 스몰톡을 조금씩 걸자 그는 수줍게 웃으며 조곤조곤 대답해 주었다. 짧은 시간 동안 꽤 많은 정보를 들었다. 미국 유학 시절 좋아하던 사람의 영향으로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것과,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삼겹살이라는 그런 사소하고도 사소한 이야기. 하오가 영화제 기간 동안 해운대의 포장마차촌에 꼭 가보라는 말을 덧붙이던 순간 영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스탭의 사인이 전달된다. 화이팅. 현수가 입모양으로 속삭이는 응원에는 그저 웃음으로 응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통역은 의외로 간단했다. 꽉 채워진 관객석을 앞에 두고 앉았을 때엔 온몸이 심장이 된 듯 두근대며 손끝이 약간 차가워졌지만, 금세 적응하여 제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중국어와 한국어 둘 다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져 있는 언어이기도 했고 감독과 배우들이 하는 멘트들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으니까.
“<우리가 사는 세계>라는 영화는…”
션 감독이 중국어로 한 작품 소개를 한국어로 통역해 전달하던 중이었다. 어디에선가 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하오는 단순히 기분 탓이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아무래도 외국 영화다 보니 한국인들이 대다수인 관객의 시선이 제 쪽으로 쏠릴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애써 메모장에 적은 키워드들에 집중하며 션 감독의 말을 놓치지 않고 전하려 애썼다.
감독과 배우들의 소개 인사가 마무리되고 어느덧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GV 행사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다. 질문하기를 두려워하는 한국인들의 특성답게 많지는 않았지만 용기 있게 올려진 몇몇의 팔들이 있다. 첫 번째 질문자를 선정하기 위해 관객석을 눈으로 훑어내던 하오는 어느 한 곳에서 시선을 멈춰 세울 수 밖에 없었다. 그만 알아채 버리고 말았다. 조금 전에 느꼈던, 묘하게 저에게 달라붙던 시선의 출처를.
온통 메마른 눈을 한 채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성한빈을 보았기 때문에.
그 순간 배경은 전환된다. 약간은 어둑한 상영관으로부터 따사로운 봄볕이 투과되고 있는 한 교실로.
고3에 전학을 가게 되었다. 입시에 생명줄이 달려 있다시피 하는 수험생으로서는 치명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었으나,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을 뿐더러 어딜 가든지 이방인 취급 받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태초의 기억부터 하오의 곁에는 엄마 뿐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혼자 저를 만들어 낳은 줄로만 알고 자랐다.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된 건, 서너살 즈음인가 엄마의 손을 잡고 나들이를 간 근처 유원지에서 엄마와 아빠의 손을 한 쪽씩 잡고서 웃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을 보았을 때. 구태여 엄마에게 의문을 표하진 않았다. 제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제가 엄마와 둘이 살아갈 세상이 변하는 건 아니었으니.
그러다 소학교를 졸업하기가 무섭게 한국에 가게 되었다. 아빠 만나러 가자. 앞뒤 설명 없이 그 한 마디 하고서 엄마는 바삐 짐을 챙겨들었다. 하오는 그저 엄마의 옷자락을 꼭 쥐고서 부지런히 뒤따라 걸을 뿐이었다. 그때 은연중에 알았던 것 같다. 제 아빠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안녕이라는 말도 겨우 어색하게 발음해내던 제가 한국어를 중국어보다 더 편하게 쓰게 되는 동안 친부는 흔적조차 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어느 순간부터 그를 찾으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에 여기에 온 목적이 그게 아니었던 것처럼 묵묵히 일만 했다. 하오는 그런 엄마의 옆에서 묵묵히 공부만 했다. 한국어가 빼곡이 적힌 문제집은 새빨간 동그라미로 가득 차 있었다.
고2 1학기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었던가. 한여름 낮의 하굣길은 유난히 더웠다.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는 친구에게 피곤해서 쉬겠다는 말을 남기고 하오는 집으로 걸었다. 낡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제 집 앞까지 갈 때만 해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 익숙하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현관문 건너편이 어딘가 소란스러웠다. 잠시 멈칫하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당겨 열면, 이 시간에 집에 있을 리 없는 엄마, 그리고 그녀의 앞에 선 한 낯선 남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엄마는 못 본 체하고선 옆에 서 있던 남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남자도 별 대수롭지 않게 응해왔다. 네가 하오구나, 반가워. 그리고는 신발을 고쳐 신으며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서 집을 나섰다. 잠시 외출했다 돌아올 사람처럼.
문이 닫히고선 한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하오야. 엄마의 부름에 하오는 말없이 고개만 돌려 눈을 맞췄다. 엄마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그 말을 하는 엄마는 어딘가 긴장한 것도, 들뜬 것도 같았다. 응, 축하해. 하오는 그리 대꾸하고 말았다. 엄마도 더 뭔가를 말하진 않았다. 그 해 가을에 엄마와 남자는 혼인신고를 했고 겨울에는 집을 합쳤다. 그 이듬해 하오는 그들을 따라 천안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딱히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아무튼 간에, 그렇게 교복이 갑자기 바뀐 건 의외로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한자로 章昊 두 글자 박혀있던 명찰에서 한글로 장하오 세 글자로 바뀐 명찰이었다.
모두가 점심을 먹으러 내려가고 비어 있는 교실에 홀로 앉아 괜히 조끼에 박힌 명찰에 자수로 도드라진 이름만 만지작대고 있는데 제 앞으로 종이 한 장이 불쑥 내밀어진다. 그 팔락이는 소음에 고개를 들자 저랑 비슷하게 교복을 단정히 입은, 하지만 명찰 색깔은 다른 남자애가 빤히 저를 내려다보고 있다. 눈동자만 흘긋 움직여 그 종이를 훑어보니 가운데에 엉성하게 배치된 영사기와 슬레이트 모양 따위에 고딕체로 큼지막하게 [영화 동아리 신입부원 모집] 이라고 쓰여 있다.
뭐지 얘는. 고3, 그것도 이 학교는 올해 일 년만 다니고 말 사람한테 동아리에 들라고 권하는 멍청한 놈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했는데 여기 있네. 헛웃음이 절로 터져나온다. 무심결이긴 했지만 명백히 조롱이었다. 그럼에도 걔는 여전히 제게 꽂은 시선을 피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불이 다 꺼진 교실 속에서 걔의 까만 동그라미 두 개가 조용히 반짝인다. 조끼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보니 파란 바탕에 성한빈 세 글자가 수놓여 있다.
“한빈.”
한국에서 산지 6년 차,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려면 뒤에 한 글자를 더 붙여야 한다는 것 쯤은 뻔히 알았지만 이름만 짧게 부르는 건 일부러 고치지 않은 버릇이었다.
“나 3학년인데.”
명찰 색 다른 걸로 저보다 어린 걸 뻔히 알고서 다짜고짜 반말부터 한 것도 일부러. 하지만 걔는, 한빈은 그저 생긋 웃으며 말한다.
“알아요. 명찰 빨간색이잖아요.”
“3학년인데 처음 보는 사람이라, 혹시 생각 있나 했죠.”
아, 그냥 빨리 받아줘요. 저 팔 아프단 말이에요. 은근히 애교를 섞어 말하는데도 이상하게 거북하지가 않다. 제 앞에서 힘없이 팔락대는 종이로 다시 시선을 옮긴다.
사실 하오는 영화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정도까진 아니고 누군가 보러 가자고 끌고 가면 보러는 가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정도. 영화를 다 보고 상영관에서 나올 때 특유의 꿈꾸다가 강제로 깨워진 듯한 불쾌한 감각과 함께 가슴 속에 끈적히 늘러붙은 감정들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애진작 거절했어야 맞지만 하오는 결정을 질질 끌고 만다. 잠시의 고민 끝에 하오는 결국 포스터를 받아든다.
그냥, 성한빈이란 애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가 궁금해서.
이름도 특별히 없는, 그냥 영화 동아리는 부원도 한빈 뿐이었다. 이건 뭐 유령 동아리 아냐? 한빈 나한테 사기 쳤네. 하오가 장난을 조금 섞어 구시렁대자 한빈은 그렇잖아도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서 반박해온다. 형이 안 물어봤잖아요. 언제 봤다고 저에게 벌써 형, 형 거리는 그 맹랑한 면모에 하오는 또 한 번 피식 웃고 만다. 이번엔 특별히 나쁜 뜻은 품지 않았다.
영화 동아리의 활동은 매우 단순했다. 일주일에 한 번, 방과 후 야자를 하는 대신 과학실에 모여 영화를 한 편씩 시청한 후 감상평을 간단히 나누고 조금 있다가 헤어졌다. 빔프로젝터가 설치되어 있는 과학실은 영화를 틀기에는 꽤 적합한 장소였지만, 각종 실험 자재들이라던지 표본들에 둘러싸인 채 로맨스나 느와르 같은 영화를 보는 것은 기분이 좀 묘했다. 영화는 늘 한빈이 제 취향의 것들을 멋대로 골라 왔고 하오는 영혼 없이 턱을 괴고선 화면을 쳐다봤다. 이따금씩 영화에 빨려들어갈 듯 집중한 한빈의 눈을 흘깃 엿보기도 했다. 그렇게 엔딩 크레딧까지 다 올라가고 나면 한빈은 볼펜을 찰칵대기 시작한다. 감상평을 나눌 시간이었다. 말이 좋아 감상평 나누기고 토론이지 실상은 영양가라곤 없는 아무말에 가까웠다.
“형, 어땠어?”
“어, 좋았어.”
“그게 다야? 아, 좀만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 보고서에 쓸 말은 만들어야 할 거 아냐.”
“주연 배우가 존나 잘생겼고, 연기도 잘 하네.”
“아이 씨, 안 해먹어 진짜.”
한빈이 짜증난 듯 볼펜을 집어던지면 하오는 그저 킬킬대며 웃어댄다. 하여튼 놀리는 맛이 아주 좋은 녀석이다.
“그럼 한빈은 어땠는데?”
하오가 되묻자 한빈은 고민하듯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대다 꽤나 구체적인 평을 내놓는다.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이 좋았고, 주인공의 감정선 표현이 어때서 좋았다던지, 어떤 장면의 이런 연출이 특히나 좋았다던지 하는. 눈을 반짝이며 종알대는 한빈에게선 영화에 대한 순수한 애정 같은 게 묻어난다. 영화 진짜 좋아하나 보네.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실은 하오 또한 영화를 보며 한빈과 비슷한 결의 생각들을 했다. 굳이 따지자면 영화가 표현해내는 감정들에 몰입이 잘 되는 편이었다. 다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기가 싫을 뿐. 누군가가 영상으로 연출해낸 감정에 동화되어 버리는 게, 그로 인해 며칠 간은 그 감정에 침잠해 있어야 하는 게 하오에겐 달갑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그걸 온전히 포용하고 그에 흠뻑 빠져 순수히 행복해하는 한빈을 보고 있다 보면 영화를 좋아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곤 했다. 매번 생각에서 그치긴 했지만. 그러다 어느샌가 감상평을 쏟아내고 있는 성한빈의 입술의 움직임만 쫓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뭐야 장하오, 내 말 듣고 있는거야?”
제대로 큰일났음을 예감했다.
그렇게 터무니없이 제 마음을 자각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한빈과는 매일 시시껄렁하고 의미 없는 카톡이나 주고 받았고, 일주일에 한 번 과학실에서 영화를 보며 실없는 농담 따먹기를 했다. 아, 가끔씩은 최신 개봉작 중에 보고 싶은 게 있다며 한빈이 주말에 저를 불러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쿨한 척 자음으로만 답장을 보내 놓고서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분주해졌다. 괜히 안 꾸민 척 멋을 잔뜩 냈다. 데이트도 아닌데 이게 왠 지랄이지. 속으로 자조하면서도 왁스로 머리를 세워 스타일링을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머리를 다시 감곤 했다. 그리고 머리가 덜 마른 채로 약속에 늦어 놓고는 한빈에겐 뻔뻔하게 자다가 좀 전에 일어났다고 거짓말이나 했다. 그럴 때마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잔뜩 성질을 부리는 한빈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눈치 없는 척 카라멜 팝콘 하나 사다 쥐어 주면 그새 풀려선 햄스터마냥 양 볼에 저장해놓고 우물대는 건 더없이 사랑스러웠고. 영화는 여전히 가슴 속에 꺼림칙한 감각만 남겼다. 이런 걸 왜 좋다고 돈까지 내가며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영화를 보며 시시각각 변하는 한빈의 감정을 관찰하고 있자면 아깝기만 한 시간은 아니었다.
유독 한빈이 피곤해하던 어느 초여름 밤이었다. 아마도 시험기간이었을 것이었다. 평상시완 다르게 축 쳐진 어깨에 눈 주변은 잔뜩 어두워져선 힘없이 과학실 컴퓨터에 외장하드를 꽂는 한빈을 보곤 피곤하면 오늘은 그냥 쉬자 했지만 한빈은 고집스레 도리질쳤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뒀다. 그렇게 안 생겨서 고집이 센 한빈을, 하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한빈은 가방 속에서 어디서 났는지 모를, 꼭 자기같이 생긴 말랑한 고양이 쿠션을 꺼내더니 거기에 얼굴을 묻곤 여느 때와 같이 프로젝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하오는 늘 그렇듯 의자를 뒤로 젖히곤 팔짱을 낀 채 영화를 보는 척 한빈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날따라 한빈이 골라 온 영화도 하필이면 두 사춘기 소년이 서로를 두고 아슬한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는 내용의 퀴어 영화였다. 화면 속에서 교복을 입고 있는 두 주인공이 서로를 마주하며 수줍게 웃는 장면을 무감히 쳐다보다 옆에서 들려오는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흘긋 보니 한빈은 어느샌가 잠들어 있다. 안 잘거라더니, 바보. 쿠션 위로 한쪽 볼이 눌려 있는 모양새가 귀여워 입꼬리를 올렸다. 저 볼을 찌르면 왠지 소리가 날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어 괜히 눌려 있지 않은 쪽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찔러 보기도 했다. 놀랍게도 소리는 나지 않았고, 생각보다도 더 말랑한 감촉에 귀끝이 불에 타듯 열이 오른다. 잘 때의 습관인지 한빈은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오물댄다. 그 움직임을 홀린 듯 보다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꼴깍 삼킨다. 마음을 깨달은 그날이 겹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날보다도 한 발짝 더 앞선 욕심 하나가 치밀어올랐다. 때마침 한 주인공 남자애가 또다른 주인공 남자애가 잠든 틈을 타 몰래 입을 맞추는 장면이 흘러나온다. 하오는 이끌리듯 고개를 천천히 아래로 내린다. 감겨 있는 눈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속눈썹이 가까워지고, 꾹 다물린 입술이 가까워지고, 이내 맞닿는다.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단 걸 알고는 있는 건지 심장이 빠르게 박동쳤다. 하지만 입술 위로 전해져오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느낌에 금세 중독되어 쉬이 떼어내지 못했다. 이대로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머물러 있을까. 그런 유혹을 끝내 이기지 못했다.
그 순간 한빈이 눈을 뜬다. 마치 하오가 그럴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약간은 몽롱한 듯한 눈 속에 저의 당황한 모습이 담기는 것을 본 하오는 무언가를 직감한다.
나는 아직 얘를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얘 또한 영원히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한빈이 아직 잠이 묻은 목소리로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하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과학실을 도망쳐 나왔다. 혹여 한빈이 저를 쫓아올까 온 힘을 다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정신없이 달리다 숨이 벅차오르는 느낌에 겨우 멈추고 나면 한빈과 종종 가던 정문 앞 탕후루 가게였다. 그리고 한빈은 제 뒤를 쫓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것인데도. 그걸 바라고 결국 실망하고 마는 자신이 절망스러울 만치 싫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그 후론 한빈과 연락을 끊어버리곤 철저히 피해다녔다. 사실 애초에 학년이 달라 우연으로라도 마주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고, 고3이라는 아주 좋은 핑계가 있었기에 하오는 마음 편히 어딘가에 숨어 틀어박히거나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학교를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마냥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편하려면 불편했다. 솔직히 한 번 쯤은 한빈이 제게 먼저 연락을 해올 줄 알았다.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왜 그랬냐면서 톡 쏘아붙이면 그냥 웃으면서 장난이었다고 넘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럴 기회조차 한빈은, 주지 않았다. 어차피 저만 놓으면 끝날 관계였던 것 같아 씁쓸해졌다.
얼마 뒤 졸업을 했다. 사범대로 넣어 두었던 수시 결과도 그럭저럭 좋았고, 수능도 꽤 만족스럽게 봤지만 하오는 재수를 택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나름 이름 있는 대학의 영화과에 들어갔다. 영화는 여전히 꺼림칙했지만 인체 해부를 하는 의대생마냥 영화를 해체하고 분석하여 머릿속에 욱여넣다 보면 그래도 좀 기분이 나았다.
그리고 다시 지금. 무슨 정신으로 GV를 끝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감독이나 배우가 하는 말 중에서 한 두 마디는 쏙 빼먹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관객들과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감독과 배우들에겐 알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수고했다는 현수의 말도 대충 흘려들은 채 목걸이를 벗어던지고선 극장을 빠져나갔다. 아니, 빠져나가려 했다.
“하오형.”
저를 부르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밖에 없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내심 그동안 잘 지내왔다고 믿어왔는데, 얘한테서 잘 지냈냐는 질문을 들으니까 잘 못 지낸 것도 같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서 천천히 뒤를 돌아보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주변의 인파는 페이드 아웃 되어버리고, 한빈의 건조하고도 어딘가 원망이 서린 듯한 눈빛만이 선명히 하오의 시야 속에 박힌다.
그때 하오는 느낀다. 역시 잘 못 지낸 게 맞다고.
하오가 바쁜 상황이라 간단히 연락처만 주고받기로 했다. 서로 휴대폰을 교환해 각자의 번호를 입력했다. 이제는 제 일부와도 같은 열 한 자리 숫자를 나열하는 것 뿐인데, 그게 뭐라고 손가락이 미친듯이 떨려 몇 번이고 잘못 누른 번호를 지우고 고쳤다. 그러는 동안 재빠르게 입력을 끝낸 한빈이 제 휴대폰을 건네온다.
“여기서 다 보네. 신기하다.”
“이쪽 일 하고 있을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근데 형은, 영화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
하오는 제 전화번호의 마지막 숫자를 누른 위치 그대로 굳고 말았다. 그때 딱히 좋아하지 않는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안 것일까. 들고 있던 한빈의 휴대폰 화면이 스르륵 암전됐다가 잠금화면으로 바뀐다. 화면에는 여자친구로 보이는 이와 같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으로 가득 찬다. 하오는 사진 속에서 해사하게 웃고 있는 한빈의 얼굴만 내려다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있잖아, 한빈.
내가 이토록 영화에 매달리고 있는 건 말이지.
아직도 널 이해하지 못해서, 그럼에도 널 여전히 사랑해서,
나에게 사랑한다는 건, 좋아하지도 않는 무언가를 죽을 만큼 끌어안고 견디는 일이라.
그런 생각을 하며 어딘지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는 하오를 보며 한빈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한빈이 졸업한 부장 선배를 마지막으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영화 동아리를 홀로 꾸역꾸역 이어가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래야 살 수가 있어서.
태어나길 눈치가 빨랐던 한빈은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이 제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너무도 잘 알았다. 어른들 말을 잘 듣고, 친구들에게는 상냥하고 친절한 아이. 의식 없이 한 행동에 쏟아지던 칭찬이 좋았을 뿐이었는데, 어느 순간 기대가 되어 있었다. 그걸 차마 실망시킬 수 없던 한빈은 그 기대를 그대로 이행했다. 어쩔 땐 진심이었고, 어쩔 땐 연기였다. 하지만 싫은 마음이 든다고 해서 이미 굳어진 그림을 바꿀 수는 없었다. 가면에 가면을 덧씌웠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지치는 날이 오기 마련이었다. 그걸 몰랐던 열넷의 한빈은 정체 모를 검은색 감정이 스멀스멀 저를 집어삼켜오는 무거운 감각에 짓눌려 몇 날을 방 안에만 틀어박혀 울기만 했다. 백 번을 잘 해도 단 한 번의 실수에 싸늘해지는 눈빛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제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차라리 나을까, 그런 생각도 해 봤다가 무서워져서 금세 그만 두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르는 눈꺼풀이 묘하게 가벼웠다. 볼에 말라붙은 눈물자욱이 까끌거렸다. 덜 마른 베개에 고개를 묻은 채로 벽시계를 보자 잠시 뒤 초침과 분침이 겹쳐 움직이며 6시 정각을 가리켰다. 암막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들어오는 빛에서 새벽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더 잘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방문 밖에서 무언가 웅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비척이며 나가보니 어둑한 거실 한가운데 티비가 홀로 빛을 내고 있었다. 아빠가 끄는 걸 깜빡하고 간 모양이었다.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끄려는데 흘러나오는 영상과 소리가 한빈의 눈을 잡아끌었다. 화면 속에서는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자가 울면서 악을 쓰고 있었다.
나도 내 마음이 맘대로 안되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앞뒤 맥락도 모르고 대사도 진부해 빠졌지만 이상하게 한빈에게 울림을 주었다. 티비 앞에 쪼그려 앉아 그 영화를 끝까지 다 봤다. 어설픈 연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처절하게 저들의 감정을 쏟아냈다. 구질구질한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한빈과는 하등 상관도 없는 치정극과 사랑 고백이었지만 왠지 제 감정을 대변해 주는 것도 같았다. 크레딧까지 다 보고 나자 비로소 숨이 트였다. 그때부터 한빈은 닥치는 대로 영화를 찾아보며 인물들의 목소리에 묵은 감정들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영화는 한빈의 해방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여러 유명 동아리들에게서 입부 제의를 받았지만 정작 한빈의 시선을 이끈 것은, 홍보를 할 생각은 있는걸까 싶을 정도로 대충 써붙인 영화 동아리 모집 공고였다. 그 자리에서 신청 문자를 보내자 곧바로 시간 되면 과학실로 올라오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약간의 의아함을 품은 채 과학실을 찾아가자 번호의 주인이자 동아리 부장이라는 사람이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름은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짙은 이목구비 그리고 흐릿한 듯 또렷한 눈빛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대로 그는 한빈의 유일한 면접관이 되었다.
“왜 여기 들어오려고 해?”
좋아하는 영화 장르니 인생 영화니 여러 예상 질문들을 머릿속으로 바삐 시뮬레이션하고 있던 한빈은 첫 질문에 사고회로가 멈춰버리고 말았다. 질문의 의도가 형식적인 면접 질문보다는 왜 굳이 여길 들어오고 싶냐는 순수한 궁금증에 가까워서. 우선 예쁘게 웃어 보이며 모범적인 답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마저도 모조리 증발해 버렸다. 그의 시선에 제가 모두 꿰뚫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만큼은 숨기고 꾸며내선 안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절박해졌다.
“...살고 싶어서요.”
다른 누군가 들었다면 무슨 헛소리냐며 웃었을 말에 그는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마치 제 말을 이해라도 한 것처럼. 그는 한참을 쓰지도 않을 볼펜만 딸깍이더니 제게 무언갈 건넸다. 쇳덩이가 찰랑이는 소리가 났다.
“자, 과학실 열쇠. 너 영화 보고 싶을 때 가서 맘껏 봐. 나는 가끔 동아리 시간에 갈거야.”
그는 정말로 가끔씩 나타났다. 동아리 시간에 온다던 말과는 다르게 한빈이 야자를 빼고 영화를 보고 있을 때 과학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영화를 몇 개 추천해 주고 가기도 했고 제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설명해 주기도 했다. 일 년 동안 나눈 대화는 열 손가락으로 꼽혔다.
졸업식 날, 꽃다발도 없이 축하를 건넨 한빈에게 그는 옅게 웃으며 딱 한 마디 했다. 잘 살아. 그리고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코트와 패딩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3학년에 새로 오는 전학생이 있다고 했다. 이 사람 저 사람 두루 지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듣게 되는 소식들이 많았다. 중국인이라느니 존나 잘생겼다느니 떠들어대는 말들은 웃으며 흘려들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를 두고 함부로 떠드는 가벼움은 늘상 그렇듯 불편했다.
그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부원을 한 명이라도 더 늘리지 않으면 제 영화 동아리가 폐부당할 수도 있다는 지도교사의 협박에 가까운 말에 못이겨 한빈은 안되는 포토샵 붙잡고 발로 만든 홍보 포스터를 들고 학교 곳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굳이 그걸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나눠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관심 없을거니까. 적당히 빈 자리 찾아서 몇 장 붙여놓고 끝낼 작정이었다. 3학년들이 점심을 먹으러 사라진 틈을 타 교실마다 대충 한 장씩 꽂아놓고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교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앞문을 열었는데 누군가 앉아 있었다. 이 학교 학생 전부를 아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 이 공간에 섞여들지 못하고 붕 떠 있는 듯한 분위기에서 직감적으로 소문의 그 전학생 선배임을 알아챘다.
그에게 다가가 포스터를 내민 것은, 순전히 호기심이었다. 장하오. 그가 매만지고 있던 빨간색 명찰 속 하얀 이름 세 글자와 먼저 눈을 마주했고, 그 다음에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약간 날이 선 눈빛으로 저를 응시해오는 하오를 한빈은 피하지 않았다. 진짜, 잘생겼네. 뜬소문같던 말들이 소문만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초면에 멋대로 굴길래 저도 내키는 대로 맞받아쳤다. 애초에 제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알 길은 없었고, 계속 볼 사람도 아니라 생각해서 굳이 눈치를 보지는 않았다. 그런 제 뻔뻔하고 되바라진 태도에 썩 내키지 않는 눈으로 포스터를 쳐다보던 하오는 별 말 없이 손을 뻗어 가져갔다. 그리곤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몇 번 만지작대더니 이내 제 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30726 장하오 영화 동아리 지원함]
“됐지?”
얼떨결에 폐부 위기는 넘겼다.
장하오는 이상했다. 마지못해 동아리에 들어온 것 치고는 성실히 활동을 나왔고, 성실히 활동에 나오는 것 치고는 매사에 건성이었다. 무엇보다 제일 이상했던 건, 영화를 보는 그의 눈이었다. 저만큼 영화에 관심이 많을 거란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 최근에 개봉한 신작을 하오와 함께 영화관에서 보고 돌아온 날 밤, 한빈은 일기장 위로 의미없는 선만 그어대며 생각을 했다. 확실히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싫어하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몰래 엿봐온 그는 저와 같은 부분에서 눈이 일렁였고 같은 부분에서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놓고선 끝나고 나면 끈적한 무언가를 묻히기라도 한 양 불편한 얼굴을 했다. 싫으면 싫다고 이야기라도 하면 나을텐데, 끝까지 그런 얘기는 안했다. 제가 하자는 대로, 가자는 대로, 보자는 대로 다 이끌려 다녀 주었다. 그것까지 다 싫어 보이진 않았다. 내심 안심했다. 무엇이 그에게 싫은 걸 싫지 않게 만드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장하오는 저까지 이상하게 만들었다. 항상 사람들 앞에 친절과 다정을 꾸며내던 저는 하오의 앞에만 서면 감정이 멋대로 튀었다. 하오의 짓궂은 농담에 곧이곧대로 짜증을 부리고, 별 것도 아닌 걸로 투덜대고, 누군가의 험담도 해 보았다. 열넷의 어느 새벽에 봤던 삼류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밑바닥을 그대로 보여냈다. 그래도 부끄럽거나 불안하지가 않았다. 변함 없이 올곧게 저를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보면 그냥 다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살 것 같았다. 아주 이상하게도.
밤을 꼬박 새웠다. 피곤해 보인다며 걱정하는 친구들에겐 시험 공부하느라 그랬다며 얼버무렸지만, 사실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랬다. 언제부터인가 자꾸만 장하오가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서로 층이 다른 교실에서 수업을 듣다가도, 체육관에서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가도, 집에서 문제집을 풀다가도 장하오였다. 장하오에게서 오는 가볍기 그지없는 연락에 하루종일 웃음이 새어나오고, 장하오와 함께 과학실에서 영화를 보는 수요일 저녁만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입시생인 그를 주말이며 평일에 불러내도 군말 없이 나와주는 그가, 늦었다며 짜증을 부려도 웃으며 팝콘이나 쥐어 주는 그가 장면 단위로 반복될 때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방관만 했다. 거기에 이름을 붙이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동이 터왔다.
다음 날 하루종일 꾸벅꾸벅 졸던 저를 병든 닭 보듯 안쓰러워하던 짝꿍은 오늘만 쓰라며 고양이 얼굴이 그려진 작은 쿠션 하나를 던져 줬다. 그걸 베고 계속 자다가 과학실에 그대로 들고 올라갔다. 사실 바로 집에 가고 싶었지만 왠지 하오와 함께하는 시간을 빼먹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는 잘 몰랐다. 피곤하면 쉬라는 그의 걱정 어린 말에 순간 울렁여오는 속을 숨기고 꾸역꾸역 영화를 틀었다. 예전에 선배에게서 추천받았던 작품들 중 제목이 제일 끌리는 걸로 아무렇게나 골라왔다. 저들처럼 하복을 입은 두 소년이 장난을 치며 웃기도, 사소한 일로 다투며 울기도, 다른 곳에서 서로를 떠올리며 혼란스러워하기도 했다. 그 위로 저와 하오를 겹쳐 보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못이기고 눈을 감았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지금까지도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 하오가 제게 입을 맞추는 감촉에 눈을 뜬 것인지, 아니면 제가 눈을 뜬 새에 하오가 입을 맞춰온 것인지. 다만 확실한 하나는 하오가 제게 몰래 키스를 하려고 했다는 사실이었다. 잠기운이 덜 가신 시야 끄트머리에 화면 속 소년들의 고개가 겹쳐있던 것도 같았다. 꼭 그 찰나의 저들처럼. 여태 저를 밤새우게 한 정체 모를 흐물거리던 감정이 어떤 형태를 갖추기 위해 모여들려다 다급하게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도망가 버렸다, 장하오가. 잠이 완전히 깨고도 한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완전히 길을 잃은 감정으로는 그 어디도 갈 수가 없었다.
하오가 그렇게 제게서 일방적으로 멀어진 뒤에도 한빈은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마다 야자 시간에 과학실에 올라가 불을 끄고 영화를 틀었다. 간혹 영화를 보던 중 옆에 있지도 않은 하오에게 말을 걸 뻔한 적도 있었지만 다행히 실제로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렇게 현실에 몰지각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대신 입 안쪽의 살갗을 잘근잘근 뜯어댔다. 일 년 넘게 한빈 혼자서 해오던 일이었는데 고작 한 서너 달을 함께 했다고 그새 무언가 허전했다.
가끔씩은 잠결에 맞닿아온 입술의 감촉을 떠올렸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매일같이 생각했다. 그리고 매번 화가 났다. 잠든 제게 몰래 입을 맞춘 그 행위의 의도, 그리고 제가 눈을 떴을 때 마주한 하오의 까만 눈동자 속에 담겨 있던 감정은 빤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가 내민 동아리 포스터를 보고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받아들었을 때부터, 아무 감흥 없는 눈으로 영화를 보면서도 제 옆을 꼬박꼬박 지키던 것에서부터 저는 이미 그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더 화가 났다. 왜 지가 저질러 놓고 지가 도망쳐 버리냐고. 나한테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묻혀 놓고서. 어떤 날에는 짝꿍에게서 뺏듯이 빌린 고양이 쿠션을 들고 가 영화를 틀어 놓고서 엎어져 자기도 해 봤다. 그렇게 하면 하오가 다시 몰래 다가와 닿아올 것도 같아서. 하지만 그건 개뿔이, 영화가 끝난 줄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다가 순찰 도시던 경비 아저씨의 손에 깨워질 뿐이었다. 학생, 여기서 자면 안 돼. 얼른 집에 가.
해가 넘어가고 졸업식이 다가올 때까지도 하오는 한빈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먼발치에서라도 한 번쯤은 보일 법 했는데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를 않았다. 아주 한빈의 인생에서 사라지려고 작정한 것처럼. 혹시 하오가 이 세상에서 아예 사라졌거나 아니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 그런 영화 시나리오에나 나올 법한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선생님의 심부름을 온 척 교무실에서 하오네 반 출석 명부를 훔쳐 보고서 그런 건 아니었음을 확인했지만.
졸업식 당일 아침, 교복 위에 코트를 챙겨입은 한빈은 교문 앞에서 장사꾼이 파는 싸구려 꽃다발을 하나 샀다. 새빨간 장미들을 중심으로 이름 모를 풀잎과 작은 꽃송이들이 꽂혀 있는, 다소 촌스러운 모양새였지만 그냥 말없이 현금을 내밀었다. 행운을 불러온다며 빨간색 물건을 사 모으던 제게 자기 여권이 빨간색이라며 농담을 던지던 장하오가 생각나서라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겠지만.
“장하오 걔, 재수학원 들어갔다던데?”
수시도 붙고 수능도 잘 본 애가 재수학원이 웬 말이래냐. 의대 가려고 그러나? 암튼 지금 아무도 걔랑 연락 되는 애가 없대. 야, 한빈아. 듣고 있냐?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흐릿한 어떤 선배의 목소리가 꿈처럼 아득해진다. 이렇게 영영 장하오를 만날 방법은 없어지는걸까. 서러움 같기도, 분노 같기도 한 어떤 감정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아, 아니에요. 졸업 축하해요, 형.”
하지만 그때 한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애초에 그를 위한 것이었다는 듯 장하오의 몫으로 산 꽃다발을 건네며 웃는 것 뿐이었다.
시간은 예외없이 흘러 한빈도 졸업을 했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의 경영학과에 무난히 입학했다. 그리고 관성처럼 학교에 있는 영화 동아리에 들어갔다. 이름도 없는 유령 동아리에 가까웠던 그때와는 달리, 거창한 이름도 있고 부원도 수십 명이나 있는 규모 있는 동아리였다. 그곳에서 영화 취향이 잘 통해서 친하게 지내던 한 동갑내기 여자애와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했다. 서연은 사랑을 가득 받고 자란 듯 모난 구석 하나 없는 아이였고, 군대도 기다려줄 만큼 저에게 헌신적이었으며, 속궁합 또한 나쁘지 않았다. 한빈은 그런 서연과의 관계가 만족스러웠고 자연히 만남은 길어져갔다. 그렇게 장하오는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가 싶었다.
어느 날 서연이 카톡으로 보내 준 부산국제영화제 홍보 유튜브 영상에서 스치듯 비친, 머리를 노랗게 탈색한 장하오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때부터였을까. 한빈이 서연을 보는 눈이 메말라가기 시작한 게. 서연에게 연락하는 일조차 잊은 채 영상 속에서 짧게 스쳐가는 노란 머리만을 미친듯이 쫓았고, 서연과 데이트를 하는 동안에도 장하오와의 기억만 필름처럼 돌려댔다. 관계는 급격히 권태로워졌다. 그렇게 좋아하던 영화도 이젠 지루했다. 서연은 그런 한빈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려 노력했다. 취준 때문에 힘들어서 그런가보다, 하며 안쓰러워했다. 하지만 그게 본질적인 원인이 아님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빈의 마음이 아예 공중에 붕 떠버렸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듯이. 그러면서도 서연을 챙기는 습관은 변하지 않는 게, 그게 더 서글펐다. 저를 향한 다정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닌 습관으로 퇴색되어버렸단 사실이. 결국 서연은 기념일 여행으로 온 부산에서 한빈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옆에서 제가 하는 말도 듣지 못하고 누군갈 찾는 듯 두리번대는 한빈을 보고서 쌓아온 모든 게 터져 버렸다. 너 이딴 식으로 굴거면 그냥 헤어지자, 우리. 하지만 한빈은 건조히 고개를 끄덕이곤 말았다. 그래, 알았어. 서연은 설움에 벌개진 눈으로 한빈을 노려보다 씩씩대며 영화의 전당을 벗어났고, 한빈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선 극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예매해 둔 GV 상영작이 곧 시작할 시간이었다.
중국어로 달콤한 고백을 쏟아내는 남배우의 목소리 위에 장하오의 목소리를 덧입혀 보았다. 그 형한테서는 중국어 단 한 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그러다 영화가 끝나고 GV 행사를 위해 들어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역가로 자리한 장하오를 발견한 순간, 약간 긴장이 어린 그 까만 눈동자가 저와 함께 영화를 볼 때의 그 눈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알아챈 순간 한빈은 생각했다.
난 사실 영화 자체가 좋았던 게 아니라, 장하오가 나 때문에 내키지도 않는 걸 꾸역꾸역 견디던 게 좋았던 것 같다고. 어쩌면 나에게 해방은 장하오였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냥 장하오가 좋았던 거라고.
[나 영화제 끝날때까지 부산에 있으니까 형 바쁜거 끝나면 연락해]
한빈의 연락처가 폰에 저장되고 카톡 프로필이 목록에 새롭게 등장하기 무섭게 한빈에게서 메세지가 온다. 하오는 거기에 답장하는 대신 한빈의 프로필을 눌러 확인한다. 누가 찍어준 듯한, 벚꽃나무 아래에서 한껏 포즈를 취한 사진이 든다. 거기서 하오는 늦은 밤 학교 교정에 있는 벚나무 아래에서 한빈의 사진을 찍어준 일을 떠올린다. 그 사진은 하오의 갤러리 깊숙한 어딘가에 아직 있을 터였지만 찾아 꺼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리고 배경에 띄워진 디데이. 아까 뜻하지 않게 봤던 배경화면 속 그녀와 꽤 오래 만났구나 싶다. 씁쓸해할 틈도 없이 밀려오는 호출에 하오는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원래 같으면 행사 마무리 작업을 하고 스탭들끼리 하는 뒷풀이를 가야 했지만 하오는 몸이 안좋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한빈을 영영 놓칠 것 같아서. 영화 공부를 하다 보니 연기가 다 는 건지 예지는 별 말없이 얼른 가 보라는 손짓만 대충 했다. 그대로 한빈이 보낸 호텔 주소를 찍고 빠르게 걸었다. 가을 밤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다소 서늘하고도 거칠었다.
한빈의 호텔방 앞에 서서 숨을 한 번 가다듬고 머리를 매만졌다. 떨리는 손끝으로 벨을 누르자 잠시 뒤 문이 열린다. 왔어? 한빈은 막 씻고 나왔는지 호텔 가운을 입고 있었고, 머리칼은 덜 마른 채에 그때와 다름없는 뽀얀 얼굴엔 옅은 홍조가 띄워져 있다. 저를 반기며 지어 보이는 눈웃음은 그때처럼 예뻤지만 마냥 말갛지만은 않다. 꼭 저를 유혹할 것처럼 야살스럽게도 느껴져 하오는 뒷목에 열이 올랐지만 침착하려 애쓰며 방 안으로 들어선다. 난 단지 오랜만에 만난 친한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여기 온 것이라, 자신을 세뇌하며.
기분이 좋은 듯 무언갈 허밍하던 한빈은 창가에 놓여 있던 샴페인 병을 들어 와인 글라스에 따라내곤 제게 내민다. 하오가 내밀어진 잔을 보고 멀뚱히 서 있기만 하자 한빈이 아, 하면서 생긋 웃는다.
“여자친구랑 같이 따려고 한 건데, 헤어졌어. 아마 어제 서울 올라갔을거야.”
예상도 못한 발언에 하오가 계속 눈만 깜빡이자 한빈은 덧붙인다. 아, 얘기 안했던가. 나 여기 여자친구랑 같이 왔어.
“근데 나 팔 아픈데. 빨리 받아주면 안돼?”
동아리 포스터를 건네던 목소리와 똑같은 투로 한빈이 말하자 그제야 하오는 잔을 받아든다. 그때나 지금이나 너를 감히 거절하지 못하는 건 여전하네. 하오가 쓰게 웃었다. 그 사이 한빈이 자기 몫의 잔에도 따라 짠-하며 내밀어오면 하오는 마지못해 부딪혀주었다.
침대 끄트머리에 나란히 앉아 표면적인 안부 인사와 근황 이야기를 하며 몇 잔 기울이다 보니 한빈은 어느새 온몸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눈이 풀려 있었다. 얘 술 약한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하오가 알 길은 없었다. 성인이 된 후로 본 적이 있어야지. 하오는 굳이 따지자면 술을 꽤 하는 편이라 약간 더워진 것 말고는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한빈이 늘어진 목소리로 졸리다며 하오의 어깨에 고개를 툭 기대왔다. 하오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걸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가만 어깨를 빌려주었다. 한빈이 완전히 잠들고 나면 침대에 눕혀주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더 오래 있었다가는, 위험한 일을 저지르고 말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안하네.”
자는 줄 알았던 한빈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는 말에 하오는 몸을 움찔 떨었다. 둘 다 기억 저편에 묻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한빈이 이렇게 먼저 꺼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는…”
“먼저 뽀뽀해 놓고 치사하게 도망가는 게 어딨어.”
“....”
“내가 그동안 얼마나 애가 탔는지는 알아?”
“....”
“그니까,”
오늘은 도망가지 마. 한빈이 멱살을 잡듯 제 티셔츠 목 부분을 쥐고 잡아당겨선 입을 맞춰온다. 오래 전 살짝 맞대만 보았던 보드란 입술이 농염히 저를 삼켜오는 것에 하오는 온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오는 혀는 떙볕에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진하고, 끈적이고, 달았다. 없던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꿈이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덮쳐오는 감각들은 현실이었다. 그 순간 하오는 느낀다. 아, 나는 여태 이 순간만을 꿈꿔왔구나. 오래도록 간직해 온 욕망에 순식간에 지배된 하오는 한빈의 뒤통수를 붙잡고 더 깊이 파고든다. 숨을 쉴 틈도 주지 않고 휘저어대자 한빈의 버거운 신음이 입술 사이로 울린다. 개의치 않고 몰아붙이자 한빈의 몸이 조금씩 기울어지다 침대 위로 풀썩 등이 닿는다. 자연스레 한빈의 위로 올라타자 맞춘 듯 동시에 서로의 몸을 더듬어댄다. 한시라도 닿지 않으면 죽을 사람들처럼.
꼭 맞붙어 뜨겁게 달아오르는 아래를 느끼자 하오가 잠시 입술을 떼어낸다. 덥혀진 두 숨소리만이 방 안에 울려퍼진다. 잠시 어떤 생각에 빠진 듯한 하오를 올려다보던 한빈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하오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나 뒤로는 처음이니까, 부드럽게 해 줘야 해?”
하오는 군말없이 한빈의 가운을 젖히며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길고 긴 밤의 시작이었다.
살짝 어스름해지던 바깥 하늘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오랜만에 온통 검은 잠을 잤다. 영화제 준비 기간 내내 야근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탓이었다. 서서히 돌아오는 의식에 팔을 뻗어 옆자리부터 더듬었다. 곁에서 잠들어 있을 한빈을 찾아 따스히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서늘한 시트의 감촉만 닿아왔다. 밤새 안았던 따끈한 온기의 주인은 이미 진작에 사라졌다는 걸 알리듯 식어 있었다. 반대편 팔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충전을 하지 못해 꺼지기 직전의 알림창에는 메세지 한 개가 떠 있었다.
[나 기차 시간 때문에 먼저 갈게. 체크아웃은 11시니까 그때까지 편히 쉬다 가. 일어나면 연락하고.]
시발, 진짜 개같네. 하오가 욕을 짓씹는다. 현재 장하오는 그야말로 개가 된 기분이었다. 어젯밤은 성한빈한테 발정난 개, 지금은 그냥, 성한빈이 끄는 대로 끌려다니는 개. 이번에도 답장은 하지 않기로 했다. 도로 침대 위에 털썩 누워 눈을 감는다. 프론트에서 걸려오는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린다. 웃기는 소리, 체크아웃 시간은 이미 지난 지 오래인데.
영화제는 끝이 났지만 하오를 포함한 스탭들은 남은 후속 업무들로 여전히 바빴다. 한빈에 대한 생각 따위는 나지 않아야 정상일 정도로 정신없는 날들이었다. 그럼에도 하오는 한빈을 떠올리는 일을 멈추지 못했다. 지난 시간동안 계속 한빈을 마음 한 켠에 품고 지내기는 했어도 이런 빈도로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열여덟의 잔상 뿐이었던 것을 스물다섯의 실체로 겪어버린 탓일까. 그러다 한빈이 남겼던 말들 중 하나를 상기한다. 저 때문에 애를 태웠다던. 당연하게도 알지 못했다. 그날 도망쳐버린 저를 한빈은 계속 쫓고 있었단 걸. 그날에 기억이 매여버린 게 저 뿐만은 아니었단 걸.
애가 탔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쥐어 주고서 없던 일마냥 사라져 버렸으니. 밤마다 품에 안겼던 희고 보드랍던 살결이, 제 이름을 부르며 울던 목소리가 떠올라 영 잠을 자질 못했다. 제게 애를 태웠던 한빈의 기분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 듯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그때는 저 혼자만의 마음이었고 저 혼자 저질렀던 짓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르잖아. 서로 간 합의 하에 함께 저지른 짓이잖아. 쌍방이었잖아. 짧은 밤이었지만 몸도 마음도 서로에게 맞닿았던 순간이었다고 생각한 건, 순전히 제 착각일까. 죄 없는 휴대폰 화면만 빤히 노려보다 예지의 부름에 벌떡 일어선다. 하오님, 잠깐 여기로. 넵. 한빈에게선 여태 연락이 없다.
그러는 동안 하오의 계약 만료일은 착실히 다가왔다. 작년에는 당연하게 재계약을 논했지만, 올해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언제까지고 이 일을 타지에서 몸 다 갈아가며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예지는 또 어느 세월에 사람 뽑고 가르쳐서 일 시키나 하며 투덜대면서도 진지하게 설득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일단 정리하고 서울에 올라가 좀 쉬다가 경력 살려서 조금 더 편한 일을 알아볼 작정이었다. 이쪽 업계에서 편한 일이란 게 존재할지나 모르겠지만. 2년 간 몸은 겨우 뉘었나 싶던 집도 처분하고 짐도 왠만큼 부쳐 두었다. 이제 작은 짐들만 가지고 기차에 몸을 싣기만 하면 되었다. 부산역으로 가기 전까지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뭐할까 고민을 하다 마지막으로 해운대 해변가에 가기로 한다. 잘 마른 모래사장에 자리잡고 앉아 시시각각 다른 모양으로 밀려들었다 빠져나가는 파도를 응시하고 있자니 여러 기억들이 스쳐지난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날이면 꼭 이곳에서 파도를 바라보곤 했었지. 그만큼 추억이 많이 묻어 있고, 미우면서도 동시에 몹시도 사랑하는 장소였다. 꼭 누구처럼 말이지. 픽 웃어버린 하오는 바지 곳곳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일어나볼까 싶었다.
“나 여기 옆에 앉아도 되지?”
불쑥 제 옆자리에 침범한 누군가가 아니었다면. 하오는 그만 하하,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정말, 너를 어쩌면 좋을까.
“한빈. 나는 정말 너를 이해하지 못하겠어.”
“그러는 형도 정말 이해 안 가는 거 알지.”
“너보단 아닐걸.”
“그래서, 내가 싫어?”
그리 묻는 한빈의 얼굴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당당하다.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하오에게서 저를 기다리고 애태웠던 흔적들을 보았기 때문에. 홀로 학교에 남겨져 그렸던 시간들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이만하면 만족스러웠다. 이제는 둘 모두가 오래도록 기다렸던 답을 적어내릴 차례. 그런 한빈에게 하오가 내놓을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아니, 내가 어떻게 널 감히 싫어하겠어.
사랑해.
싫어도 평생 끌어안고 살 만큼.
그런 말들 대신 하오는 있는 힘껏 한빈을 끌어안고 천천히 입을 맞춰올 따름이었다. 한빈은 눈을 감고서 입술 새로 전해져오는 하오의 진심을 이해하듯 부드러이 키스에 응했다. 호흡이 절반으로 줄었지만 숨통은 도리어 트이는 것 같았다.
나를 살게 하던 네가 이제 내 곁에 되돌아왔기에.
엇갈렸던 두 이야기가 마침내 오버랩 되고,
비로소 그들만의 시퀀스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