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빗 레슨
무다
가파르지 않지만 걷다보면 힘든 이 오르막은 한빈을 금방 지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한빈은 원래 몸에 열이 많은 편이었기에 쉽게 얼굴이 달아오르고 관자놀이가 축축해지곤 했다. 그럼에도 한빈은 걸었다. 도착해야 할 곳이 있기에 멈추질 못했다. 왼편으로는 한빈의 키를 훌쩍 넘는 담장들이 줄지어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을 차단하고, 누군가의 방문을 금지하는 키높은 그것들은 언제 봐도 재수가 없었다. 그때 한빈의 옆으로 무식하게 생긴 오토바이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아, 깜짝아! 이 기척도 언제나 재수가 없었다.
한빈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곳은 장충동 고급 주택가의 한 대문 앞이었으며 그 앞에는 아까 전의 오토바이가 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빈의 눈이 맹렬히 빛났고 오토바이를 몰던 남자가 헬멧을 벗었다. 하이. 하이는 개뿔... 한빈은 젖은 반소매 셔츠의 끝단을 펄럭거리며 남자를 쳐다봤다. 힘에 부쳐서 저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져 째려보는 눈이 되었지만 굳이 펴내진 않았다.
"쌤, 완전 더워보여."
"완전 더워요..."
한빈의 말에 남자가 히히거리며 웃었다. 얇은 하복 셔츠 위에 걸린 명찰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장, 하, 오. 그게 그 남자의 이름이었다. 한껏 보송한 얼굴로 초인종을 누르며 자신이 온 것을 알렸다. 아줌마! 나 왔어요. 성한빈도 같이 왔어요. 한빈은 하오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날것으로 튀어나올 때 매번 놀랐다. 이유는 몰랐다. 발음이 부정확해서 그런가, 아직 친하지 않아서 그런가. 한빈도 그게 의문이었다.
프라이빗 레슨 : 장학생과 성생님
가방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진 장하오는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오늘 너무 힘들었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꽤나 진지해서 한빈은 잠시 속을 뻔한다. 장하오는 힘들 일이 없다. 학교도 대충, 공부도 대충, 인생도 대충. 타인의 삶을 함부로 정의 내리려 한 게 아니라, 장하오가 그렇게 말했다. 선생님~ 난 이런 과외 안 들어도 돼. 친구도 필요 없고, 그냥 대충 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거야. 그러니까 선생님도 너무 애쓰지 마요. 그때도 이렇게 장하오는 침대 위에 누운 상태였고 한빈은 뻘쭘하게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야 처음이라 어쩔 줄 몰라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한빈도 장하오에게 적응했고, 장하오도 한빈에게 적응했다. 장하오는 과외 시간 동안 침대 위에서 휴식을 가졌고 한빈은 하오의 책상에서 과제를 했다. 어떤 어른도 이 방에 관심이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둘의 인연은 굉장히 간단했다. 대학생이 되고 모든 경제적 지원이 끊겨 반강제로 독립하게 된 한빈은 시급이 높은 알바를 원했고, 그 조건이 맞는 건전한 알바는 과외밖에 없었다. 한빈은 큰 고민 없이 과외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만난 첫 과외학생은 순하고 조용한 남학생이었다. 함께한 3개월 동안 한빈은 즐거웠다. 수업도 잘 따라줬고 무엇보다 그 집 간식이 정말... 맛있었기 때문에. 그치만 그 행복은 3개월짜리로 끝이 난다. 그 이유는, 한빈은 과하게 잘생긴 편이었고, 넘치게 다정한 스타일이라는 것이었다. 학생은 한빈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밤샘 공부를 연이어 했고, 결국 학교에서 쓰러지고 만다. 아들을 잡아두고 무리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을 때, 아들의 입에서 과외 선생을 흠모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의 입장이 어땠을까. 한빈은 자신이 잘린 것에 대해 납득했지만, 한빈도 한빈의 사정이 있었다.
그 집 사모님은 그래도 양심이 있는 분이었다. 한빈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해서 미안하다며 다른 과외를 연결해 줬고, 그게 지금의 장하오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성한빈입니다."
장하오와 장하오의 어머니, 그리고 성한빈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인 자리였는데 말하는 사람은 하오의 어머니뿐이었다. 우리 하오가 숫기가 없어, 한국 온지 그래도 꽤 됐는데, 한국 친구가 많이 없어서, 선생님이 우리 하오랑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친구처럼, 동생처럼, 응? 보통 이런 부탁을 과외 선생님에게 하나? 한빈도 두번째 과외인지라 판단이 잘 가질 않았지만 일단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 없는 장하오를 쳐다봤는데, 동글동글한 광대가 착해보여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장하오는 고3이었지만 한빈보다 한살이 많았다. 어렸을 때 한국에 지내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고 어머니의 이혼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됐다. 보통 이런 가정사를 과외 선생님에게 말하나? 이것 역시 판단이 안 섰다. 한빈이 아리까리한 눈을 하고 있을 때, 하오의 어머니가 한빈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한빈 선생님, 잘 부탁해요. 그리고 입금된 과외비는 앞서 생긴 모든 의문을 해소시켜줬다.
어머니는 화장실 위치나 가정부에게 한빈을 소개시켜주는 등 기본적인 것만 해주시고는 금방 집을 나서셨다. 사모님께서는 늘 바쁘세요. 가정부 이모님이 흘리듯 말했다. 그리고 한빈은 2층 방으로 장하오와 함께 들어갔다.
"선생님."
"네?"
"공부 잘해?"
침대에 걸터앉은 장하오는 가방을 뒤적거려 하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곤 맨들맨들한 표면의 지포라이터를 손에 굴리며 한빈을 쳐다봤다. 분명... 어머니 옆에서 방실거리던 강아지였는데... 장하오는 싸늘하고 버석한 말투로 순식간에 방의 기류를 주도했다. 한빈은 순간 쫄아서 뒷걸음질 쳤고 장하오는 귀신 같이 그 모습을 포착해 웃었다. 흐흐... 쫄지 마요... 안 때려. 하나 줄까? 입에 물고 있는 담배 때문에 발음이 웅얼웅얼 착해보였다. 한빈이 거절의 의미로 고개를 저으니 장하오도 물었던 담배를 빼 도로 집어넣는다. 성한빈이라고 그랬지. 희한하네, 석형이 이름은 외우는데 일주일 걸렸는데. 선생님 이름은 쉬운 편인가?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뒤로 벌러덩 눕더니 말했다. 이런 과외도, 친구도 필요 없다고.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한빈은 장하오를 잘 몰랐지만 왠지 그 말이 조금 서운했다.
성한빈은 첫 만남에 쫄았던 것 치곤 장하오를 잘 괴롭혔다. 때리면 어쩌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신고하면 될 일. 한빈은 받은 만큼 일하고 싶었다. 누워 있는 장하오의 팔을 이끌어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엥? 장하오가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한빈의 손에 몸을 맡겼다. 이리 와요. 질질 끌려가서 책상에 앉히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한빈을 바라봤다. 와, 선생님 힘 왤케 세? 그러고 다시 일어나서 터덜터덜 침대행. 아이, 진짜... 빨리 앉아요. 응, 싫어. 한빈이 손을 뻗으면 하오는 빈틈으로 빠르게 몸을 옮겼다.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옷장 옆에 숨기도 했다. 한빈에게 잡혔을 때, 장하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한빈의 옆구리를 찔렀다. 결과는 대성공. 한빈이 아기처럼 웃으며 몸을 움츠러뜨렸다. 히히. 이거다. 자꾸 잡으면, 간지럽혀버린다! 다소 초등학생 같은 경고였지만 한빈은 공포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는 간지러움을 왜 이렇게 못 참는 거지? 이것 때문에 장하오 가까이 가지 못해서 억울하고 통탄스러웠다.
한빈은 작전을 변경한다. 이번엔 불쌍한 척해서 동정심 유발 작전. 나름 여기저기 잘 써먹는 방법이니 장하오에게도 통하길 바라며 아랫입술을 내밀고 준비했다. 한번만, 딱 한번만... 책상에 앉기라도 하면 안될까요? 공부하자고 안 할게요. 네? 흡사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그 얼굴에 장하오는 고민하는 표정을 했다. 여기서 좀만 더 입술을 내밀면 될 것 같았다. 한빈은 한껏 올라가있는 눈꼬리까지 축 떨어뜨리며 애썼다. ...그럼 앉아만 있는다? 장하오가 보기 좋게 넘어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빈은 눈치를 슬쩍 보고 문제집을 꺼냈다. 장하오는 한빈의 얼굴만 쳐다봤다. 수업 안 한다며? 히죽거리는 목소리가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책을 펼쳤다.
"이거... 한번만 같이 보면 안 돼요?"
"선생님."
"딱 한 문제만..."
"선생님 되게 귀엽네."
"에?"
"말할 때, 원래 그렇게..."
입술을 내밀면서 말해? 아니면 귀여운 척하는 건가. 근데 귀여워. 선생님 학교에서 인기 많지. 응? 장하오는 한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너무 낮고, 이상하게 다정한 목소리로. 마주친 눈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빈은 장하오의 눈동자의 움직임을 저도 모르게 살폈다. 이마부터 눈썹, 눈, 코, 볼... 그리고 입술, 턱. 찬찬히 자신을 훑는 장하오의 눈길에 한빈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리곤 장하오는 또 웃었다. 귀엽다며 한빈의 볼을 톡 치며 다시 침대로 갔다.
몇번을 구워삶아도 안 통했다. 침대 밑에 앉아서 누워 있는 장하오 옆에서 비문학 지문을 몇번 읽어주기도 해봤는데, 그대로 골아떨어지는 걸 보고 포기했다. 심지어 그 일이 있고서는 늦은 밤 한빈에게 전화해 잠이 안 오는데 그때 읽었던 그 글 좀 읽어달라는 어처구니 없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세상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이번 건 좀 빡세서 골치가 아팠다.
그렇게 초반은 몇주를 날렸다. 맛있는 걸 사다 줘도 안 통했고, 좋은 말로 타일러도, 꽤 무서운 목소리를 내도 안 됐다. 이런 식이면 더는 과외가 힘들 것 같다고 솔직하게 장하오에게 털어놓았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놀아! 엄마한테 안 일러.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한두푼 받는 것도 아닌데.
"왜 안 되지."
"네?"
"그냥 받아. 우리 집 돈 많아요."
그 말에 한빈은 침을 꼴딱 삼켰다. 이래도 되나? 양심에 찔렸지만 그 담담한 말이 너무 달콤해서 군침이 돌았다. 정말, 이래도 되나? 누워 있는 하오의 눈치를 보면서 한빈이 조용해졌을 때, 장하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좀 놀아. 뭐, 어때. 처음이었다. 한빈에게 놀아도 된다고 말한 사람이. 한빈은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피어올라서 그랬다. 고등학생 때도 안 했던 일탈을 저지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정말, 그래도 될까? 한빈이 다시 한번 고민할 때 장하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날아오는 느닷없는 윙크. 저게 뭐야… 질색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그렇게 휘말리고 말았다. 한빈은 그날로 팔자에 없는 가짜 과외를 시작했다.
대신 한빈은 장하오에게 딱 한 가지를 부탁했다. 혹시 모르니 어머니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리면 빠르게 책상으로 와달라고. 에이, 가오 떨어져... 장하오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한번씩 2층을 찾아오는 발걸음 소리엔 후다닥 한빈 옆으로 와줬다. 그게 좀 웃겨서 키득거렸더니 화낼 줄 알았던 장하오가 마주 웃어줬다. 재밌지 않냐고. 어른들 몰래, 우리끼리 만드는 비밀이 꽤 근사하지 않냐고. 그 눈이 너무 맑아서 한빈은 저도 모르게 한참을 들여다 봤다.
이렇게 말하면 장하오가 꽤 정상인처럼 보이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장하오는 재벌 망나니 막내 아들의 전형이었다. 어디서 싸우고 다니는 건지 얼굴에 상처가 하나씩 있었고, 교복 셔츠에선 담배 냄새가 풍겼다. 그래도 한빈 앞에서 대놓고 담배를 태우진 않았는데, 그건 아마 한빈이 비흡연자라서 그런 것 같았다. 장하오는 한빈을 놀려 먹는 걸 엄청나게 좋아했다. 특히 한빈이 과제하는 걸 구경하며 사족을 다는 게 취미였다. 와~ 이런 걸 배워? 너무 어려운데? 아니, 선생님... 왜 이렇게 선배한테 빌빌거려. 이리 줘 봐. 내가 혼내 줄게. 한빈을 갈구는 선배와의 카톡 대화를 훔쳐본 장하오가 한빈의 노트북을 가져다가 대신 지랄하려는 걸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그만해요! 아니, 너 이렇게 당하고만 산다고?! 내가 해결해 준다니까아! 아, 됐어요! 서로 노트북을 사수하려고 온 방을 쏘다니며 잡기 놀이를 했다. 한참을 그러다 결국 노트북이 한빈의 가방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며, 장하오는 아쉽다며 입을 쩝쩝거렸다. 재밌을 수 있었는데에... 손가락을 입에 물며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당신 재미 하나에 내 대학 생활이 날아갈 뻔했다고! 대놓고 이렇게 말하진 못했다. 아직 장하오가 그렇게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장하오는 제법 다정했다. 집에 들어온 과일들을 먹으라고 가져오기도 했고, 공부하고 있는 한빈을 일으켜세워 택도 안 뗀 자켓을 입히더니 너 가지라는 말을 하며 갑작스러운 선물을 주기도 했다. 됐어요. 내가 왜 가져요, 이걸... 한빈이 거절하려 했는데 장하오는 자신의 퍼컬과 안 맞는다며 안 입으면 갖다 버릴 거라는, 아주 배부른 소리를 해서... 결국 한빈이 가지고 갔다. 이걸 다정하다고 볼 수 있나? 아무튼... 막, 대놓고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한빈이 졸면 담요를 둘러주기도 하고, 특별히 맛있는 저녁 메뉴가 나오는 날이면 한빈을 조금 일찍 불러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하오와 한빈이 정말 친해진 줄 알고 엄청나게 좋아하셨고 덕분에 한빈은 보너스를 조금 받았다.
그런 이상하지만 평범한 과외 시간들이 쌓였다. 한빈은 일주일에 두번 장하오의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고, 그날도 과외를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연락이 왔다.
[비상]
[오늘 좀 일찍 와줘]
[나 큰일났어]
큰일났다고? 한빈은 멍하게 그 문자를 바라보다가 버스 하나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아, 망했다. 일찍 오랬는데... 조급함에 입술을 뜯었지만 그런다고 버스가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뭐예요?"
"왔어?"
그런 문자를 보낸 사람 치곤 태연해 보이는 장하오는 안경을 끼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한빈은 그 광경이 너무 어색해서 자신도 모르게 방을 한번 둘러본다. 혹시나 어디 자신을 촬영하는 카메라가 있나 싶어서 그랬다. 안경만 낀 게 아니었다. 샤프를 들고 문제집 속으로 들어갈 기세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한빈은 괜히 조용히 움직였다. 가방을 바닥에 두고 장하오 옆에 있는 의자를 조심스럽게 빼 앉았다. 왜 그래요? 한빈의 목소리 역시 작고 조심스러웠다. 그걸 들은 장하오가 문제집에서 눈도 안 떼고 웃었다. 일이 좀 있었어. 급하게 성적 좀 만들어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지? 결연한 눈을 한 장하오가 한빈의 손목을 잡아왔다. 네... 뭐... 제가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요.
자초지종을 들은 성한빈은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편하게 웃어도 돼. 장하오의 아량 넘치는 말에 결국 웃음이 터져나왔지만 말이다. 하오의 어머니께서 맨날 놀러다니는 아들을 걱정해, 오토바이 키를 뺏으셨단다. 그리고 다음 시험에 30점 이상 올리지 않으면 변기통에 내려버릴 거라고 으름장까지. 그거 꼭 타야 하나... 위험해보이는데. 한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더니 장하오는 불퉁한 얼굴을 했다. 선생님 태도가 왜 그래? 날 가르쳐야지! 빨리 이거 설명해 줘. 어려워. 한빈은 그 모습이 제법 학생 같아서 신기했다. 알았어요, 어디 봐. 음... 이건, 일단 지문 먼저 보자면... 그렇게 몇개월만에 진짜 과외가 시작됐다. 장하오는 오토바이를 위해서, 성한빈은 장하오를 위해서.
"...여보세요..."
-성한빈, 자고 있었어? 미안... 이해 안 되는 게 있어서.
이러는 거 얼마나 가려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장하오의 학구열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새벽에 전화하는 건 기본이었고, 학교에서도 휴대폰을 몰래 내지 않고 쉬는 시간 마다 전화해 한빈을 괴롭혔다. 한빈이 조금 귀찮은 티를 내면 화를 버럭 내며, 이때까지 놀고먹은 거 다 일러버린다! 라고 협박을 해오길래 어쩔 수 없이 졸린 눈을 비벼가며 장하오의 문제를 함께 봐줬다. 해설이 다 끝나고 나면 장하오는 꼭 고마워! 라며 발랄하게 화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에 잠이 깼지만 그런 목소리를 들을 때면 한빈도 꽤 뿌듯해졌다. 오토바이를 이렇게 좋아한다니... 정말, 위험한데... 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구...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눈을 깜빡거리다 잠에 들었다.
"뭐야?"
"오늘 시험이잖아요."
이거. 잘 보라구. 한빈은 꼭두새벽부터 장하오의 집 앞을 어슬렁거렸다. 고급 주택가에서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지만 제자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서 그랬다. 대문을 열고 나온 하오는 한빈을 보며 놀란 얼굴을 했고, 초콜릿 세트를 보고서는 환하게 웃었다. 대박... 완전 선생님 같아. 선생님 맞거든요. 그리고 이거... 한빈이 내민 건 조악하고 앙증 맞게 생긴 캐릭터가 그려진 부적이었다. 아트박스 갔다가 생각나서 하나 샀어요. 장하오는 그렇게 말하는 한빈을 빤히 바라봤다. 손 안에 들어오는 부적이 딱딱하고 얇았다. 아니, 그래도 이왕이면... 너무 어렵지 말라고... 장하오도 쑥스러워하는 한빈을 보며 기분 좋은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알았어. 잘 보고 올게. 학교 가는 길이야? 우리 학교 갔다가 너네 학교 데려다 줄게. 차 타고 가. 그 말이 끝나자 검은 세단이 타이밍 좋게 두 사람 앞에 섰다. 기사님! 오늘 성한빈 좀 데려다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한빈은 처음으로 기사님이 모는 차를 타고 등교했다.
3일간 치뤄지는 시험이었기에 한빈은 하오를 위해 특별 과외를 시작했다. 하오의 집에서 한다면 추가로 과외비를 주실게 뻔해서 한빈의 자취방에서. 좁았지만 두 사람은 충분히 마주 앉을 수 있는 곳이었다. 첫날 시험이 끝나고 하오에게 바로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주소를 줬고 두 사람은 점심을 먹은 후 본격적인 시험 대비에 들어갔다. 당장 다음날 시험 보는 과목을 스파르타식으로 공부하는 것이었는데, 의외로 장하오가 바짝 따라와줘서 고마웠다. 한 시간 공부하고 조금 쉬고, 한 시간 공부하고 조금 쉬고, 이것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장하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옆으로 쓰러졌다. 공부... 힘드네... 그래도 잘하시는데요? 진짜아? 그럼 다행이구... 사실 오늘 시험 보고 너무 어려웠어서 걱정했어... 목소리가 축축 처지는 게 안쓰러워서 한빈은 휴대폰을 들었다.
"간식 시켜 먹을래요? 뭐 좋아하는 거 있어요?"
"나? 나? 나는... 나는 밀크티!"
"밀크티?"
흠... 공차 시키면 되려나. 한빈이 배달 어플을 훑어보고 있을 때 장하오가 벌떡 일어나 한빈의 옆으로 다가갔다. 어, 우... 깜짝아. 너무 가까워서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신경을 안 쓰는 눈치였다. 나 뭐 먹지. 망고, 이거? 맛있을까? 장하오가 조심성 없이 고개를 휙 돌려 한빈을 바라봤다. 너무 가까워... 너무... 어, 이거... 맛있을 것 같은데요? 리뷰도 많아요. 그럼 나 그거! 한빈은 방금 자신이 바보처럼 말했는지 속으로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빨리 음료 시키고 공부 더 하자... 갑작스러운 충격을 애써 무시하며 숨을 골랐다.
그렇게 며칠을 함께 지냈다. 중간중간 한빈은 하오가 받아온 시험지를 대신 풀어보기도 했고 하오가 유독 어려워하는 과목을 위주로 인강을 들으며 어떻게 하면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장하오는 그동안 무서운 집중력을 보여주며 문제를 풀어나갔다. 신기할 정도로 공부 머리가 좋았고 한빈은 가르치는 족족 이해하는 장하오가 재미있었다. 평소에 공부를 해놨다면 전교권은 기본이었을 것 같았다. 왜 공부를 안 하냐는 말에 하오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그랬다. 어차피 중국 돌아가니까. 으음... 그렇군. 맞아, 저번에도 이런 이야기를 하긴 했지. 그때나 지금이나 한빈은 돌아간다는 소리가 어쩐지 서운했다.
"...왔어?"
"...괜찮아요?"
시험이 끝나고 일주일 정도 지난 이후 첫 과외였다. 그간 공부를 빡세게 했으니 일주일만 쉬게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한빈의 의견에 하오의 어머니는 큰 이견을 내지 않으셨다. 침대에 누운 상태로 한빈을 쳐다보지 않고 목소리로만 반긴 장하오는 기운이 없었다. 설마 성적을 못 맞췄나? 한빈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옆으로 다가가 조심히 엉덩이를 걸쳤다. 성적은요? 그 말에 장하오가 한빈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숨을 푹... 한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망했네. 딱 보니까 망했어. 그래,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했어야 성적이 나오지. 이렇게 단기간에 한다고 성적이 오르면 개나소나 다, 짤랑. 짤랑. 이거 봐라~ 누워 있던 장하오가 손에 들린 열쇠를 한빈에게 자랑하듯 흔들었다. 딱 35점 오른 거 있지? 몸을 일으킨 하오가 신난 목소리로 한빈에게 말했다. 하아... 진짜, 놀랐잖아요! 한빈이 주먹으로 하오의 가슴팍을 때렸고, 장하오는 엄살을 부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성한빈은 기대했다.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 줄 장하오를... 히히 웃는 얼굴을 보며 한빈이 문제집을 가방에서 꺼냈을 때, 장하오는 그대로 눈을 감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선생님, 저는 한숨 자겠습니다. 예의 바른 목소리로 얄밉게. 저는 이제 미련이 없어요, 선생님. 말 끝에 선생님은 꼭꼭 붙여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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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운이 안 좋았다. 눈 앞에서 버스를 놓친 바람에 1교시 전공 수업에 지각했다. 교수님의 눈초리가 그날따라 더 뾰족하게 한빈을 찔렀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가는 동기 중 하나가 한빈의 가방을 떨어뜨리며 빠르게 자리를 떴다. 미안하다는 말은 못 들었지만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안 괜찮았다. 가방에 들어있던 아이패드 화면이 멋지게 조각나 있었다. 더위가 끝이 안 났고 언럭키 역시 계속 이어졌다. 꿀이라고 소문나 신청한 교양이 갑자기 팀플을 시키질 않나, 모인 팀원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고 나몰라라 하질 않나. 그 사이에서 억지로 웃느라 광대가 아렸다. 어찌저찌 역할을 분담하고 학생회 회의를 하러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한빈은 그곳에서 선배에게 멱살을 잡혔다. 이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선배의 전 여자친구와 한빈이 만난다는 이상한 헛소문 때문이었다. 몇번 술자리에서 옆에 앉은 적은 있다만 연락처도 없고 단둘이 만난 적도 없는데, 발 없는 말이 제일 무섭다는 게 이런 것인가. 몸싸움까지 커지진 않았지만 선배의 전 여자친구와 삼자대면을 하기 위해 과방에 잡혀 있었다. 덕분에 학교를 나서려 했던 시간을 훌쩍 넘겼다. 지금 가도 제 시간에 장충동에 도착하기 힘들었다. 결국 한빈은 장하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아요. 어머니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무슨 일 있어?
"네?"
-목소리가 안 좋아.
"...아, 그냥... 좀."
-엄마 오늘 집에 안 계셔.
"그래요?"
-데리러 가줘?
-응?
장하오가 한빈의 대답을 재촉하며 되물었다. 하아... 기대고 싶다. 하루종일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오늘을 잊고, 그냥 이 다정한 목소리에 기대고 싶었다. 근데 그래도 되나.
성한빈, 괜찮아?
장하오의 목소리가 한빈의 상념 사이에 끼어든다.
괜찮냐고...?
"안 괜찮아요..."
-...
"여기, 학교 정문이에요. 데리러 와줘요..."
-알았어. 금방 갈게.
그리고 한빈은 얼마 안 있다 그 부탁을 후회한다. 굉음을 내며 대학가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설마 자신의 앞에서 멈출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장하오가 헬멧을 벗었을 때 한빈은 아차 싶었다. 왜 생각을 못 했을까. 하복 차림의 고등학생과 오토바이의 조합. 이목을 끌기 너무 좋은 풍경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지나가는 학생들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장하오다. 그냥 보통 얼굴이 아니라 장하오였다. 이거, 요상한 소문으로 번지기 딱 좋은 그림이다. 성한빈, 타! 그리곤 반말을 찍찍. 사람들은 이제 장하오와 성한빈을 번갈아 쳐다봤다. 한빈은 사진이 찍히기 전에 얼른 장하오의 뒤에 올라탔다. 헬멧이 갑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디 가요?!"
"어?!"
"지금 어디 가냐고!"
"놀러!"
"뭐?!"
심지어 목적지가 집이 아니었다. 바람 소리 때문에 대화가 잘 되진 않았지만 놀러! 라는 두 글자는 한빈의 귀에 정확하게 때려박혔고 한빈이 놀라자 장하오는 속도를 조금 높혔다. 으악... 점점 더 강한 바람이 들이쳤다. 장하오의 허리를 감싼 한빈의 팔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도착한 곳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번화가였다. 더운 날씨였지만 거리엔 사람이 많았고 모두가 저마다의 하루를 즐기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한빈이 잠시 그 소란 속에서 조용해졌을 때 몸이 이끌렸다. 가자. 장하오가 담백하게 말하며 한빈의 손목을 잡았다. 그 후로는 정신없이 놀았다. 장하오는 한빈을 코인 노래방 부스에 집어넣기도 했고 펀치 기기 앞에 세워놓기도 했다. 점수 내기를 하자며 기세등등하게 덤볐지만 한빈의 점수가 압도적이었다. 생각보다 주먹이 약하군. 한빈은 속으로 웃었다 생각했는데 장하오는 웃지 말라며 눈을 부라렸다. 두 사람은 길거리 떡볶이도 먹었다. 둘 다 먹성이 좋은 덕분에 사장님이 서비스로 어묵 국물을 주셨는데, 나갈 때 보니 어묵 국물은 원래 공짜였다. 그걸 알아차린 장하오가 나가면서 한빈에게 말하자 한빈은 짙은 배신감을 느낀 표정을 지었고 장하오는 그 얼굴을 보며 크게 웃었다.
여전히 거리는 시끄러웠다. 한빈은 장하오와 이곳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좋았다. 어쩐지 더 친해진 것 같기도 했다.
"우리 오늘 친해진 것 같죠."
"...뭐?"
"...아닌가..."
"우리 원래... 친한 거 아니었어...?"
"...아..."
와... 실망이다. 장하오가 금방 서운한 얼굴을 했다. 아니, 선생님은 안 친한 사람한테 막 데리러 와달라 그러나? 되게 특이하네. 안 친한 사람한테 자취방 주소도 보내주고? 막 자장가도 불러주고? 엄청, 친절하시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 다음 코스는 영화 보기야. 안 친한 사람이랑 영화 봐도 되나 모르겠네. 장하오의 모든 말 끝에 떨떠름한 세미콜론이 붙은 것처럼 빈정거렸다. 내가 언제 자장가를 불러줬다고... 아, 설마 그 비문학 지문을 말하는 건가? 아, 그건... 한빈은 진심으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고 장하오는 일부러 입술을 더 삐죽거렸다. 흥, 빨리 움직여. 영화 시간 늦겠어. 그러는 와중에도 한빈을 재촉하며 영화관으로 향했다. 그때 한빈이 휴대폰을 보고서 바짝 얼어붙었다. [장하오님 어머니] 그 이름이 부들부들 한빈의 폰을 울리고 있었다.
"어, 어떡하죠? 왜 갑자기 전화하셨지...?"
"일단, 일단 이리 와."
하오는 한빈을 이끌어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은 탓에 두 사람의 거리가 급격하게 가까워졌지만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전화 받아 봐. 네... 한빈이 조심스럽게 화면을 만져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수업 중이시죠! 죄송해요.
"어머니, 괜찮습니다. 어쩐 일이세요?"
-다른 건 아니구. 하오 이 녀석이 전화를 안 받길래. 저 이제 집 들어가려 하는데, 저녁 안 드셨으면 같이 먹을 것 좀 사가려구요. 출출하시죠?
"아! 네~ 그래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네, 네... 아, 20분 정도 걸리신다구요. 네, 알겠습니다. 네~ 전화가 끊기고 두 사람은 고민 없이 달렸다. 20분이면 그래도 가능한 시간이었다. 아무리 친구처럼 지내달라고 하셨지만… 과외를 째고 놀러 나온 걸 들킨다면, 한빈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다음 수업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건 싫었다. 장하오가 한빈의 손을 붙잡았다. 두 사람의 발에 점점 속력이 붙었고 오토바이가 있는 곳까지 늦지 않게 도착했다. 그리고 한빈은 익숙하게 헬멧을 받아 장하오의 뒤에 매달린다. 출발할게. 대답 대신 장하오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두 사람이 헐레벌떡 집에 들어왔을 때 다행히 집은 비어있었다. 고민 없이 2층으로 함께 향했고 한빈은 바쁘게 가방에서 문제집을 꺼냈다. 장하오는 그에 맞춰 책상을 정리하고 스탠드를 켰다. 바쁜 와중에도 이 상황이 너무 어이없고 유치해서 웃음이 막 튀어나왔다. 왜 웃어, 너? 장하오도 웃고 있으면서 한빈에게 그렇게 물었다. 성한빈은 헛웃음을 숨기지 않았고 장하오 손에 샤프 하나를 쥐어주었다. 자, 이제 웃지 마요. 너나 웃지 마... 아... 흐흐... 아, 진짜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도 몰라. 아, 그만 웃어요! 성한빈이 먼저 웃었잖아. 풉, 흐... 아, 진짜! 한빈이 계속 웃는 장하오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쳤을 때 하오의 엄마가 집에 도착한 소리가 났다. 마침 딱 과외가 끝나는 시간이었고 두 사람은 그제서야 편하게 웃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ㅎㅎ 웅 나도 재밌었어]
한빈은 그 담백하고 친근한 문자에 괜히 코끝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우리 진짜 친해졌네. 그동안 뭐가 그렇게 어려웠지? 아니다. 진짜 어려웠던 게 맞나? 잠시 장하오와의 사이에 대해 고민했다. 생각해보니 장하오의 말처럼 원래 친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그 사람 친구도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이제 친해진 것 같다는 소리에 서운한 티를 낸 게 조금 웃겨서 한빈은 킥킥거렸다. 이상한 사람이야, 정말.
분명 엉망인 하루였는데 한빈은 상쾌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누웠다. 잘 자라는 장하오의 연락 덕분이었다.
이어지는 수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빈은 과제를 했고, 장하오는 놀았다. 다만 한빈의 옆에서 수다를 떠는 날이 많아졌다. 별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저 가벼운 농담 따먹기, 장하오가 좋아하는 예능 이야기, 장하오의 고향 이야기, 한빈의 학교 생활 이야기. 고민 없이 할 수 있는 주제들로 많이 나눴다. 이따금씩 웃긴 영상을 함께 나눠보고 간식을 먹으며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 방에 들어서기 전 한빈은 모든 고민을 방 밖에 놔두고 들어갔다. 왔어? 반갑게 자신을 반기는 장하오를 보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됐다.
둘은 가끔씩 수업이 없는 날에도 만났다. 장하오가 가보고 싶었던 음식점이나 한빈이 궁금했던 카페를 가는 식이었다. 자연스럽게 연락 빈도도 잦아졌다. 뭐해? 이거 봐. 완전 웃겨. 이거 선생님이 좋아할듯. 바보처럼 생김. 여기 담에 갈래요? 오늘 먹어봤어요. 맛있어요. ㅋㅋ과 ㅎㅎ은 없었지만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잘 자. 잘 자요. 중국어로 잘 자는 뭐예요? 완안. 선생님 완안. 네~ 완안~ 종국엔 서로의 잠을 챙겼다. 그렇게 잠에 들면 깊고 편안한 잠을 잤다. 까치집을 얹고 일어난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장하오의 연락을 확인했다. 내꺼 읽고 씹었네… 양치를 하러 들어가 칫솔을 물고 몇번 칫솔질을 하다가 거품을 퉤 뱉었다. 어… 나… 장하오 좋아하나봐… 하얀 거품이 세면대에서 흐르고 있었다.
한빈은 양치거품이 입가에 가득 묻은 상태로 장하오와의 대화창을 한참 바라봤다. 그래도 바뀌는 건 없었다. 목소리가 들리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별거 아닌 그 대화들은 순식간에 한빈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된다. 두 사람의 사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그 대화 역시 분류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좋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장하오는 가볍고, 쿨하고, 재밌고, 무서웠다. 늘 매달려있느라 하얗게 질린 한빈의 손을 쉽게 느슨하게 만들었고 한빈이 풀어져 있는 틈을 타고 들어와 한바탕 휘젓는 사람이었다. 한빈이 애쓰는 고민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해결책을 던져주고 금방 한빈의 옆구리를 찔러 웃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아, 재미없는 거 그만 생각하고 나랑 이거 하고 놀자. 응? 과제 그만해~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부려도 밉지 않은 사람이었다.
마음을 인지하고 나서는 신경 쓰이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늦는다며 조금 기다리라는 연락도, 터덜터덜 힘 없는 발걸음도 한빈을 괴롭혔다. 무슨 일 있었는지, 왜 그렇게 힘이 없는지 궁금했다. 늦어서 미안. 방으로 들어오면서 그렇게 말하는 장하오를 쳐다봤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장하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눈치 빠른 장하오가 그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얼른 시선을 하오의 얼굴로 옮겼다. 장하오는 언제 또 싸움을 했는지 콧잔등에 밴드를 붙이고 나타났다. 얼굴이 왜 그래요? 한빈의 말에 인상을 쓰며 안 그래도 짜증 난다며 어깨에 걸친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한빈 옆에 앉았다.
"성한빈."
"아니, 입술 옆에도 다 터졌네요?!"
"왜 요즘 애들은 너 같지 않을까?"
"...무슨 말이에요?"
"애들이 너무 사나워."
우리 학교 애들 말이야. 내가 자기 여친이랑 얘기 좀 했다고 얼굴을 이따위로 만들어놨잖아. 그 말에 한빈은 상상한다. 어떤 여학생이었을지. 머리가 길었을까, 단발이었을까. 키가 컸을까, 작았을까. 강아지 상이었을까, 고양이 상이었을까. 멍하게 장하오 입술 옆을 바라보며 도저히 특정되지 않는 남의 여친 얼굴을 그렸다. 어떤 여자든 잘 어울리겠지. 다른 것보다 잘생겼잖아. 한빈은 입술을 지나쳐 장하오의 코를 구경했다. 오뚝하니 얼굴 중앙을 지키며 서있는 코. 그리고 길게 뻗은 그것을 타고 올라가면 눈… 얇은 쌍꺼풀을 가진 그 눈과 마주쳤다. 아... 장하오는 웃고 있었다.
"...아팠겠다."
"엄청."
근데 이제 안 아픈 것 같아. 선생님이 나보다 더 아픈 얼굴을 하고 있어 줘서.
한빈은 그제서야 자신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져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치만 이건, 장하오의 말처럼 한빈이 장하오 대신 아픔을 느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질투 때문이었다. 장하오와 이야기를 나눴을 그 여학생을 향한 질투.
-
입학 후 첫 학기가 마무리되고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한빈은 귀찮다는 이유로 자취방에 잔류했고 그 덕에 주변에 살고 있는 동기들에게 자주 이끌려나왔다. 오늘 밤도 그랬다. 덥다는 이유로 잠에 못 드는 젊은이들이 거리를 채웠고 한빈도 그 중 하나였다. 끈적거리는 목덜미에 신경질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에 놓여진 맥주잔이 다시 채워진다. 보글보글 탄산이 끓어올랐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한빈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드는 것. 한빈이 바라는 것이다.
벌써 7월이었다. 수능까지 4개월. 장하오의 어머니나, 장하오의 태도를 봤을 때 수능 결과가 그닥 중요하진 않을 것 같지만 두 사람의 시간이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빈을 조금 울적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정리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장하오는 정말로 중국으로 다시 돌아갈까? 거긴 카톡도 안 된다고 했는데, 그럼 잘 지내냐고 안부 연락도 못하겠지. 그럼 정말 다시는 못 보겠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홧김에 고백을 질러버리고 싶어졌지만, 장하오의 옆에 앉아있다보면 그 사람을 구경하느라 시간이 다 가버리곤 했다. 그런 시간이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 앞에서 한빈은 더욱 무력해진다. 내가 이렇게 겁이 많았나?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고 있을 때 등짝이 아프게 울렸다. 아야! 뭐 하고 있어? 한빈의 고민을 방해하는 건 동기의 매서운 손맛이었다.
"고민 있지?"
"아냐..."
"딱 봐도 연애 문제구만."
순진한 한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떻게 알았어? 맹탕한 한빈의 목소리에 동기가 능글맞은 눈빛을 보내며 잔을 들어 건배를 종용했다. 한빈은 바보처럼 잔을 들어 장단을 맞춘다. 원샷이다? 어? 꿀떡거리는 동기의 목젓을 보며 한빈도 잔을 입에 가져다댄다. 잘게 부서지는 탄산 방울들이 한빈의 목을 따갑게 괴롭히며 넘어간다. 크으. 동기의 감탄사가 귀에 들렸고 한빈의 입에도 비슷한 소리가 나온다.
"한빈아."
"왜."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다?"
한빈도 익히 들어본 이야기였다. 그치만 성한빈은 장하오를 잊고 싶진 않았다. 잊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상하게도 한빈은, 동기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과팅을 잡겠다는 말, 25일이 어떻냐는 말, 맞은 편 다른 동기에게도 같이 가자는 말. 안 된다고 할까? 잔에 다시 맥주가 채워지고 거품이 일었다. 하얀 거품을 닮은 장하오의 웃음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거품에 함께 휘발된다. 그래... 잊자. 잊어보자. 내가 품어도, 잊어도 모를 사람이니까. 한빈은 건배도 없이 혼자 맥주를 들이켰고 사방에서 야유가 들려왔다.
한빈이 장하오를 잊으려 다짐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김없이 과외를 가야 했고 하오의 집이 있는 완만한 언덕은 여전히 한빈의 숨을 막히게 했다. 7월이 되니 저녁에도 공기가 후끈거렸다. 한빈은 앞머리를 뒤집어까며 길을 걸었다. 초인종을 누르려할 때 저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이제 오네. 얼마 안 있어 장하오의 모습이 보였다. 한빈은 장하오를 기다리며 숨을 돌렸다.
"있잖아..."
"...왜요?"
달라진 건 없었지만 장하오는 그날따라 좀 이상했다. 평소랑 다르게 주저하는 눈빛이 말이다. 무슨 일 있어요? 한빈이 물어봐도 고개를 저었다. 분명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한빈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장하오를 잠시 바라봤다.
"할 말 있죠?"
"...혹시... 다음주 목요일에 시간 돼?"
다음주 목요일... 며칠이지? 한빈이 머릿속으로 날짜를 가늠하던 순간 장하오가 말했다. 25일이야. 아, 그날이라면... 동기가 잡은 과팅에 함께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러니까 선약이 이미 있다는 말. 거절해야 하는데 눈을 빛내고 있는 장하오 앞에 과팅이라는 계획을 말하기 미안해졌다. 사실 앞서 장하오가 같이 놀자고 하는 걸 몇번이고 거절해서 더 미안했다. 그치만 이대로 계속 가다간 끝이 안 좋을 것 같아서 한빈은 또 거짓말을 택했다.
"미안해요... 그날은 가족들이랑 약속."
"아, 가족들이랑..."
장하오가 서운할 수 없는 가짜 이유를 만들어가며 회피한다. 다음엔 꼭 같이 놀아요. 그래. 웃는 얼굴로 대답해오긴 했는데 씁쓸해보이는 표정이 끝에 남아서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나. 한빈에게는 마음을 접는 일이 더 중요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더는 어울릴 수 없었다.
그렇게 대차게 거절한 주제에 자꾸만 그 얼굴이 떠올랐다. 과팅이 잡혀있고 장하오의 약속을 까버린 당일이 되니 그 증상이 더욱 더 심각해졌다. 다른 때였다면 그냥 서운하다는 티를 냈던 것 같은데 왜 그때는 그렇게 씁쓸한 얼굴이었을까. 장하오의 표정이 자꾸만 아른거려서 한빈은 괜히 더 빠르게 술을 털었다. 잊자. 그냥 잊자. 미안해하지도 말자. 다른 친구들이랑 놀겠지, 뭐. 친구 많잖아. 동기들이 다른 여학생들과 떠들고 놀고 있을 때 한빈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냐는 질문에는 그냥 손만 휘적거리고 말았다.
한빈은 취한 발걸음으로 멀리 가지 못하고 근처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벽에 기대 앉아 휴식을 취했다. 후. 한숨 한번에 장하오의 생각을 떨쳐보려 애썼다. 연락을 해 봐야 하나. 아니야, 뭐라고 연락해. 할 말도 없어. 성한빈이 일방적으로 장하오와의 대화를 끊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그치만 보고 싶어서... 짝사랑이라는 게 어쩔 수가 없어서. 전화해볼까... 한빈은 술기운을 핑계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느릿느릿 장하오의 휴대폰 번호를 눌러 한참을 고민했다. 안 받으면 어쩌지. 아니, 받으면 어쩌지. 아아... 모르겠다. 그치만 목소리가 듣고 싶어... 통화 버튼을 누르고 들리는 수화음에 괴로워하던 때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장하오가 아니었다. 높고 발랄한 목소리의 여자였다. 이거 장하오 휴대폰 아닌가요? 누구세요? 라는 말이 나왔어야 하는데 한빈은 그저 잡은 휴대폰을 꽉 쥐어내기만 했다. 그리고 전화 너머에서 장하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냐는 말, 휴대폰 내놓으라는 소리. 한빈은 장하오가 넘겨받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짝사랑의 끝이 매서워서 눈물이 나려 했지만 꾹 참았다. 차라리 잘됐다. 이렇게 끝내기 좋은 때가 또 없다. 한빈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제서야 환상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재밌었다. 장하오와 함께 하는 건 즐거웠다. 그래, 그거면 됐다. 더 바라지 않을 것이다.
동기들은 늦게 돌아온 한빈을 장난스럽게 나무랐고, 한빈은 다시 잔을 들었다. 차가운 소주가 들어올 때마다 몽롱했던 기운이 훅훅 날아갔다. 그 덕에 기분이 조금 나아져서 웃는 얼굴이 금방 나왔다. 그래서였나, 헤어지는 길에 가깝게 앉아 있던 아이에게 연락처를 받았다. 키가 작고 하얀 피부의 단발머리였다. 한빈은 그 아이의 눈 옆에 작은 점을 한참 바라봤다. 연락하겠다는 그 아이의 말에 알았다고 대꾸해버린 건 실수가 아니었다.
한참을 아스팔트만 보고 걸었다. 가로등 빛에 검은 바닥이 반딱거렸다. 후덥지근한 공기와 술기운이 동시에 한빈을 괴롭혔다. 덥고, 습하고, 끈끈하고. 신발 바닥에서 뜨끈한 열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얼른 들어가서 에어컨을 틀고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한빈의 소원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이 멀지? 끝이 안 나는 귀가길이 한빈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다 느껴지는 인기척에 무거운 고개를 들었을 때, 한빈은 눈을 의심했다. 오토바이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장하오.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으로 옮기는 장하오. 그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그의 발 옆에 꽁초들 몇개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보여줬다.
"이제 와."
이제 와. 묻는 말이 아니었다. 타박과 같은 온점이 그의 말 끝에 따라붙었다. 화가 난 얼굴이 한빈을 향해 있었다. 그 속에 원망이 보여서 한빈은 눈을 몇번 깜빡거렸다.
"여기서 뭐 해요...?"
"왜 연락을 안 봐?"
한빈이 멍하게 물으며 다가갔을 때 장하오는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바닥으로 던졌다. 여전히 독한 냄새가 풍겼고 한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장하오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네가 먼저 전화했잖아... 가족들이랑 약속이라길래 다시 전화 안 했어. 그래도 휴대폰은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문자 남겼는데 한참을 안 보더라? 근데 이렇게 취해서 와. 너, 가족들이랑 술 안 마시잖아.
그 말을 듣고 한빈이 눈을 감았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눈 탓에 거짓말이 들통나버렸다. 이렇게 찾아올 줄 꿈에도 몰랐지, 나는... 한빈은 후회스럽다가도, 아까 전 들린 여자의 목소리에 반발심이 불쑥 떠올랐다. 여자친구랑 있던 거 아니었어요? 괜히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여자친구라 치부하며 장하오에게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학교 친구들이랑 있었어."
"..."
"...오늘 내 생일이거든."
그래서 너랑 같이 있고 싶었어. 근데 너는 거짓말까지 치면서... 그러면서까지 나를 피하니까. 근데도 나는...
장하오의 얼굴이 구겨지며 울었다. 그 얼굴을 본 한빈의 얼굴도 구겨진다. 한빈의 취한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한빈이 더 가까이 다가서자 장하오는 거칠게 얼굴을 닦았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내가... 수업 안 들어서 그래? 수업 열심히 들으면 다시 나랑 놀아줄 거야? 아이처럼 매달리려는 장하오가 안쓰러웠다.
괜히 친해진 것 같다. 이 사람을 이렇게 괴롭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괜히 기댄 것 같다. 이 사람이 웃는 것만 보고 싶었는데. 괜히 좋아한 것 같다. 이 사람은 내 마음을 모를텐데. 한빈은 조심히 하오의 얼굴을 닦아주며 말했다. 잘못한 거 없어요. 내가 미안해요, 거짓말 쳐서.
한빈이 살짝 하오를 당겨 안았다. 눈물을 매달고 가만히 안긴 장하오는 주저하다가 한빈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멋대로 찾아와서 미안. 불쌍한 목소리.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제멋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몇번의 거절로 기가 팍 죽어버린 장하오가 어색하고 귀여웠다. 생일 축하해요. 그 말에 장하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이제 이 관계를 정리하려 했다. 선생과 제자 사이도 아니고 친한 형 동생 사이도 아닌 이 이상한 관계를.
"근데 저 과외 더 못할 것 같아요."
"...왜?"
"내가..."
내가, 그쪽을 좋아해서요. 선생님이 학생을 좋아하는 건 우리나라에선 꽤 큰 문제거든요. 윤리적으로. 그러니까... 그러니까. 잘 지내요.
성한빈은 멍한 표정의 장하오를 잠시 바라봤다. 그러다 장하오의 입술 위로 가만히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댔다. 키스도 뽀뽀도 아닌 애매한 그것은 두 사람의 마지막을 알렸다. 자취방 건물로 들어가는 동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장하오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하오의 얼굴은 조금 바보처럼 넋이 나간 상태였는데, 한빈은 차라리 그 표정이 좋았다. 자취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순식간에 취기가 돌아서 그대로 신발장에 엎어져버렸지만 일어서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조금만 쉬고 싶었다.
장하오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한빈은 그날 새벽이 또렷하게 기억나서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최악이지. 학생한테 키스하는 선생님. 사실 키스도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멍한 표정을 짓던 장하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과외는 잘 마무리됐다. 얼굴은 보고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하오가 없는 시간에 집에 방문했다. 하오의 어머니는 엄청나게 아쉬운 티를 내셨다. 그리고 한빈에게는 조금 아픈 소식을 전해주셨다. 장하오가 곧 중국으로 돌아간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한빈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럴 철판이 아니라 아쉬울 따름이었다.
장하오의 집을 나선 한빈은 한참을 걸었다. 이 부잣집 동네는 다신 올 일이 없겠지. 경사가 완만한 이 길도, 높다란 담벼락도,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도. 이제 한빈의 일상에서는 사라질 것들이었다. 여전히 길바닥이 무섭도록 뜨거웠고 한빈의 이마엔 땀방울이 금방 잡혔다. 눈물이 찔끔 났지만 괜찮았다. 관자놀이로 흐르는 땀과 구별이 잘 안 돼서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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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무섭도록 흘렀다. 어느덧 한빈은 2학년 새 학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동기들과 함께 피씨방에서 수강 신청을 하고 개강 전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바쁘게 지냈다. 아직 2월이라 날이 추웠다. 멋부린다고 입은 코트 사이로 찬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한빈은 조금 늦게 술자리에 참석하게 됐고 그곳에는 아는 얼굴이 많았다. 이여~ 오랜만~ 동기와 선배들이 한빈을 반기며 자리를 내줬다. 입장주를 말아주는 선배의 손을 보며 기겁할 때 옆에 있던 동기가 한빈의 수저를 챙겨줬다. 어이,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그런가? 까맣게 꺼진 휴대폰 화면으로 얼굴을 비춘 한빈이 되물었다. 엉, 좀 빠졌어. 볼이 홀쭉해졌네. 다이어트 중에 최고는 맘고생이라 했나. 한빈은 장하오와 작별하고 한참을 앓았다. 거짓말 안 치고, 첫사랑과 헤어졌을 때보다 더 크게 아파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장하오가 첫사랑인가, 싶기도 했다. 원래 첫사랑은 안 이뤄지지. 이건 조금 위안이 되는 이야기였다.
술자리가 그렇듯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이번엔 유학생들이 대거 들어온다는 소식, 신입생 중에 인플루언서가 있다는 소문, 어떤 선배가 군대를 갔다가 다쳐서 의가사 제대를 했다는 뉴스. 얼마나 다쳤대요? 십자인대 다친 것 같던데. 친구들이 모두 인상을 쓰며 아픔을 함께 했다. 한빈은 앞에 놓인 안주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다음 학기에는 과외 알바는 안 해야지. 술집 알바나 할까? 그래도 학교 앞이면 친구들도 많이 보고, 재미있을 것 같은데... 아니다. 그냥 카페 알바를 해? 자격증도 있으니까 금방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날 이후로 몇번의 술자리가 더 있었고 몇번의 모임이 더 있었다. 아는 얼굴, 모르는 얼굴, 알아야 하는 얼굴, 한빈은 바쁘도록 사람을 만났고 학교 근처 카페에 저녁 타임 알바를 시작했다. 오가는 사람들 중에 한빈을 알아보는 사람이 반, 한빈을 보러 오는 사람도 반이었다. 이런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개강을 했다. 개강 직후엔 모두가 울며 학교를 나왔다. 한빈도 그랬다.
그 수업은 동기와 함께 신청했다가 한빈만 빼고 모두가 드랍한 교양이었다. 오티 때 커리큘럼의 레포트 폭탄을 보고 겁 먹은 친구들은 그 자리에서 수업 정정 신청을 넣었다. 한빈은 레포트만 내면 성적이 괜찮게 나온다는 선배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안 되면 뭐... 재수강 하지. 흔한 2학년의 배짱이었다. 동기들과 점심을 먹고 한빈 혼자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강의실이 정문과 가까워서 금방 도착했다. 한빈이 들어갔을 땐 아무도 없었다. 교수님과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 테이크아웃 해 온 커피와 가방을 두고 잠시 화장실로 향했다. 일찍 온 덕분에 복도가 조용했다.
다시 강의실로 가는 길목에 한빈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한빈이 맡아둔 자리 바로 옆에 누군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저렇게 빈 자리가 많은데 굳이? 덜 마른 손을 대충 닦으며 떨떠름하게 강의실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발짝 한발짝 그 사람의 뒷태를 보며 발을 옮기던 한빈이 멈췄다. 저... 귀가... 그러면 안되는데... 익숙해서…
한빈이 혼란스러워할 때, 강의실 뒷문이 열리고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들이 순식간에 소란을 만들었다.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신입생들, 피곤에 쩔어있는 고인물들, 그리고 그 사이에 한빈은 가만히 앉아 있는 뒷태를 향해 다시 몸을 움직였다. 설마. 아니지? 에이, 아닐 거야. 아니... 아니여야지…
작은 머리통이 고개를 돌렸다. 애석하게도 한빈의 예상이 맞아들었다. 익숙한 귓볼, 동그란 광대, 진한 눈썹. 모든 것이 그대로인 장하오였다.
"성한빈, 오랜만."
"..."
"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학생이 학생을 좋아하는 건 윤리적으로 문제없지, 한국에서? 능글 맞은 목소리가 여전해서 어쩐지 신경질이 났다.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 모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