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빈웹진: cinéclub

자각몽

산새

영화 전우치

 

 

 

一場春夢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께선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일장춘몽, 인생은 어차피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는구나. 그걸 옆에 손자 들으라고 말할 건 아닌 것 같긴 한데. 어쨌든 그러셨다. 그때 할아버지가 어떤 생각으로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말씀하신 건진 모르겠으나 요즘 들어 그 말씀이 자주 생각이 난다.

깨고 나면 아무것도 잡혀 있지 않을 덧없는 인생인데, 내가 이렇게까지 아득바득 살아야 하나. ,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아득바득 살았다. 취업 시장으로 뛰어들어서도, 그게 어릴 적 생각대로 안 풀려도.

퇴근길에 은행 앱을 켰다. 취업만 하면 내 인생 다 풀리고 남들이 말하는 꽃길 나도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학자금 대출에 부모님 생활비까지 챙겨 드리다 보니 꽃길은 무슨, 가시 돋친 지옥길이다. 어깨에 짊어진 게 백팩뿐만은 아니었다. 아득하다. 그래도 끝은 나겠지. 그렇게 버티다 보면 부모님에게 꼭 연락이 온다. 아들, 밥은 먹었어? 옆에서 챙겨 주지 못해서 미안해. 늘 건강 잘 챙겨야 한다. , 혹시 여유 있으면 돈 좀 더 보내 줄 수 있을까?

무심코 옆을 돌아보니 딱 봐도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이자카야가 있었다. 이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중에 취업해서 직장인이 되면 퇴근 후 업무 스트레스를 저런 곳에서 풀겠지, 하이볼 한 잔과 꼬치구이를 먹으면서 하루의 고단함을 날려버리겠지 하며 실없는 상상을 했었는데.

한빈은 이자카야 옆 편의점 문을 열었다. 계산대에서 문제집을 풀던 아르바이트생이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을 먹고 있었는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우물거린다. 저렇게 열심히 살아도 인생이 쉽게 펴지진 않을 텐데. , 그래도 저 집은 우리 집이랑은 좀 다르니 괜찮으려나. 스멀스멀 엿 같은 기분이 피어오른다. 억지로 미소 지으며 고개를 까딱이곤 컵라면 판매대로 가 작은 컵 하나를 집었다. 집에 햇반 사 둔 게 있으니까 오늘 저녁은 이거로 때우면 되겠다 싶었다.

백팩에 대충 구매한 컵라면을 구겨 넣곤 다시 길거리로 나왔다. 그래도 내일은 주말인데 소주 한 병 사 갈까 싶었지만, 꾹 참았다. 먹고 가계부 정리 좀 하고 자야겠다. 소비를 좀 더 줄여야 하는데. 생각이 많아지니 머리가 또 지끈거려 온다. 이제 슬슬 밤이 길어지는지 빠르게 어두워지는 하늘에 한빈은 한숨을 내뱉었다.

집에 도착해 백팩을 바닥에 내던지곤 그 옆에 쓰러지듯 누웠다. 주머니에 쑤셔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더니 부재중 전화 세 통이 와 있었다. 발신인은 모두 성세민. 한빈의 여덟 살 터울 남동생이었다. 이런 기분에 용돈 달라는 소리 들으면 욕 나올 것 같은데. 한빈은 통화 버튼을 꾹 누르곤 휴대폰을 제 귓가에 가져다 댔다. 신호음 두어 번 흐르자 세민의 목소리가 귀에 박힌다.

 

, 퇴근했어?’

, 집이야. 형 졸리니까 본론만 말하자.”

집이야? 우리 집? 나 집인데?’

아니, 자취방.”

우리 집 안 와?’

이번 주말엔 안 가려고. ?”

아니, 주말 말고 지금.’

 

이게 지금 대화가 되고 있는 건가? 한빈은 허리를 세워 앉곤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지금 거길 왜 가.”

오는 줄 알았지.’

그러니까 내가 가면 미리 말을 했겠지.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엄마가 말 안 했어? 오늘 굿하잖아. 무당도 왔는데, 방금.’

? 뭐라고?”

형이 엄마 굿하라고 돈 줬다며. 할머니 때문에. 난 그래서 형도 오는 줄 알았는데.’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한빈은 어디 한곳 주시하지 않고 허공만 바라보며 생각했다. 매번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아끼고 아껴 드렸던 그 돈이 다 이런 허무맹랑한 짓에 쓰였다니. 이거 꿈이겠지. 꿈일 거야.

짤랑

그 순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방울 소리와 어떤 남성의 목소리. 아무튼, 알았어. 일단 끊을게! 하며 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리는 세민의 행동에 한빈은 정말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휴대폰에 여전히 귀를 댄 채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이거 꿈 아니야. 어떤 미친 무당 놈한테 넘어가서 이 사달이 난 건진 모르겠어도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지. 한빈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신발을 신었다. 휴대폰 화면을 연신 두들기며 택시 앱을 찾았다. 안 쓴 지 오래돼서 업데이트를 하란다. 다행히 집 앞 차도에 빈 차 하나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머리가 뜨거워질 정도로 복잡했지만, 인사 하나는 절대 빠뜨리지 않는다.

집까지 택시 타고 한 시간은 넘게 걸릴 텐데. 한빈은 부러 미터기를 쳐다보지 않았다. 애꿎은 휴대폰만 연신 만지작댔다. 어쩐지 요즈음 돈 달라는 소리가 많더라. 한빈은 이를 으득 갈았다.

 

 

 

 

이미 다 정리된 모양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당황한 부모님 표정과 볼캡을 눌러 쓴 낯선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민은 방에 들어가 있는 건지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뒤돌아 저를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보든 말든 당장 부모님 앞으로 다가갔다.

 

미쳤어요? 제 돈으로 이딴 걸 하셨다고요? 제 돈을 저 무당 놈 뒷주머니에 쑤셔 넣으셨다고?”

네 할머니가 지금 불편하다고 하시잖아. 어쩔 수 없었어.”

그럼 아버지 돈을 처박으시면 되지, 그걸 왜 제 돈으로 하시느냐고요.”

아니, 한빈아. 네가 우리 준 돈 아니냐? 그럼 그게 내 돈이지, 네 돈이야?”

…….”

 

말문이 막혀 이딴 뻔뻔한 말에도 대답 하나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되려 한빈을 질책했다. 할머니가 힘드시다는데, 그것 하나 못 해 주니. 넌 우리가 죽으면 그냥 무시할 거니. 미친 게 분명했다. 무당 놈이 어떻게 회유한 건진 모르겠으나 정상은 아니었다. 씨발, 내가 힘든데. 당장 산 사람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크흠, 등 뒤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눈시울이 벌게지도록 그를 쳐다봤다. 볼캡을 눌러 써 눈이 잘 보이진 않았다. 하관은 보였는데 입꼬리는 위로 올라간 상태였다.

웃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입만 뻥긋 댔다. 그러는 와중 무당 놈이 먼저 한빈에게로 다가왔다.

 

무당 놈이라…….”

…….”

잠시 시간 좀 내 줄 수 있겠소.”

?”

 

이건 무슨 컨셉이야? 필요 이상으로 예의 바른 멘트완 달리 제 손목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가는 무당의 행동에 하마터면 자빠질 뻔했다. 저 신발, 잠깐, 신발 좀요! 지는 신발 신고 있었다고 그냥 계단을 바로 내려가려 하길래 겨우 멈추었다. 신발을 구겨 신는 중에도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에 괜스레 긴장감이 돌았다. 나 이런 거 안 믿는데 괜히 무당이라니까 저도 모르게 신경은 쓰인 모양이었다.

집 건물 옆 골목으로 들어서자 무당 놈이 몸이 찌뿌둥한 듯 세상 요란하게 기지개를 켠다. 쓰고 있던 볼캡 챙을 잡고 벗더니 다시 한빈을 바라본다. 그제야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 한빈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앳된 얼굴. 많이 먹어 봤자 내 또래일 것 같은데 어떻게 저리 뻔뻔하게 남의 집 돈을 처먹을 수 있는 건지. 겨우 진정됐던 속이 더욱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저기요.”

기억을 잃은 것이오?”

?”

 

허허, . 혀를 끌끌 차는 행동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던 한빈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딴 컨셉질 하는 패션 무당한테 돈을 뜯기다니. 그냥 이런 놈한테 돈 뜯긴 부모가 더 한심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대가 무당 놈이라 하는 것보단 망나니 도사 놈이라 불러 주는 게 더 나은 것도 같소.”

콩트 하세요?”

 

와중에 등 뒤에서 그를 찾는 일행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리가 다 끝났음에도 올라오질 않으니 저쪽에서 먼저 장하오를 찾는 것 같았다.

 

기억 못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무슨…….”

하나만 물어보지.”

 

내내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내려간다. 그에 맞추어 확 가라앉는 분위기와 냉해지는 눈빛을 보니 한빈의 뒷덜미에 소름이 올랐다. 잔뜩 굳어 있는 동안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뒷덜미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대,”

…….”

내 부적은 어디에 숨겨 두었소?”

 

순식간에 벌게진 그의 눈동자가 한빈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自覺夢 자각몽

 

 

 

 

 

한빈은 생각에 잠겼다. 작은 원룸에 공간 분리하겠답시고 달아둔 천막까지 닫고 생각에 잠겼다. 매트리스에 누우니 잠이 올 것 같아 고쳐 앉곤 쭉 생각에 잠겼다.

방금 그 사람의 헛소리, 무시해도 되는 걸까.

한빈은 초등학생 때 제일 유명했던 빨간 마스크 괴담, 안 믿었다. 빨간 펜으로 이름 쓰는 거? 신경도 안 썼다. 신년 운세 보러 점집에 간다느니, 그런 거 하나도 안 했다. 그러니 당연히 무당 말 믿고 굿하느라 돈 쏟아부은 제 부모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런데,

 

내 부적은 어디에 숨겨 두었소?’

 

그전까지 풍겼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위압감까지 들 정도였다. 눈동자는 충혈된 건지 티 나게 벌게져 있었고, 약간은 화도 나 보이는 것 같았다. 혹시, 빙의? 한빈은 손가락을 제 입술 쪽으로 가져와 깨물었다. 잘근잘근 씹다가 아파질 때쯤 손가락을 뺐다.

결론을 내렸다. 무시하자. 이미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나왔고, 하루가 지났고, 굿판은 이미 벌였고, 피눈물 흘리며 번 돈은 이미 그 새끼 뒷주머니에 꼬라박혔으니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겼으면 진작 생겼을 것이다. 그 젊은 무당 놈이 나한테까지 돈을 뜯어 가려고 수작을 건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불안감과 압박감에 시달리던 속이 훨씬 편해졌다. 한빈은 엉금엉금 기어 내려와 천막을 걷곤 어제 바닥에 널브러뜨리고 간 백팩을 열었다. 긴장이 풀리니 배가 고픈 탓이었다.

딩동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초인종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세요?” 제 말에도 대답은 않고 초인종 소리만 한 번 더 울려 퍼진다. 딩동현관 앞까지 발을 디딘 한빈이 문 너머에 귀 기울였다. 크흠, 헛기침 소리 한 번에 누군지 알아챈 한빈은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의 낭군이오.”

제정신이세요?”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건 그 무당 놈이었다. 맨투맨에 청바지를 입고 있으니 대학생이라 해도 믿을 외관이었다. 열린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와선 아무렇지 않게 신발을 신고 들어가려 하길래 곧바로 제지했다.

 

신발은 벗어야죠. 어떻게 알고 왔어요?”

그대가 그러지 않았소? 무당 놈이라고. 다 알 수가 있지.”

 

그대라 부르니 옛 생각이 나는구먼. 무당은 곧장 테이블 위 놓여 있는 메모지에 무언갈 적었다. 그러곤 한빈에게 건넸다.

 

기별을 보낼 수 없으니 답답해서, .”

이게 뭐예요?”

 

제 물음에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흔들어 보인다. 한빈은 다시금 메모지를 내려다봤다. 번호와 함께 무당 놈의 이름까지 함께 적혀 있었다.

 

장하오…….”

그냥 장하오 아니고, 도사 장하오.”

무당 놈 맞네.”

하하.”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제가 한 마디씩 던질 때마다 소리 내어 웃는 게 거짓된 웃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럴수록 어제 본 그 눈빛이 오버랩 되어 등골이 서늘했다. 혼자 살고 있소?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자꾸만 제게 시답잖은 질문을 던지는 장하오를 대답 없이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집 안을 돌아다니던 장하오가 벽걸이에 걸려 있는 한빈의 볼캡을 하나 집어 들었다. 제 머리에 써 보더니 한빈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런 문양의 모자는 어디서 구할 수 있소?”

왜 왔어요?”

……, 그대도 굿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장하오의 말 한마디에 금방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제 부모한테 돈 뜯어낸 걸로 모자라 자식한테까지 뜯어내려는 짓에 헛웃음이 나왔다. 한빈은 장하오의 머리에 씌워진 볼캡 챙을 잡아 던졌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볼캡을 쳐다보던 장하오는 허허, 또다시 실없는 웃음을 내보였다.

당장 이 새끼의 멱살을 잡아 올리고 싶은데. 그 다음은? 일 커지면 어떡하지? 이런 사기꾼은 돈 뜯어내는 게 일이다. 다쳤다며 치료비라도 요구한다면. 이 와중에 모든 생각이 전부 돈에 얽매여 있다는 게 좆같았다. 이를 으득 갈았더니 장하오가 제 입술 앞으로 검지를 들이밀었다.

 

내 그러지 말라 누누이 말했거늘.”

…….”

차라리 내 손가락을 씹으라고.”

나가요, 좋은 말로 할 때.”

복채는 받지 않겠소.”

나가라고.”

화를 입을 터인데.”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집 안 구석구석을 살핀다. ……. 혀를 짧게 찬 장하오가 바닥에 떨어진 볼캡을 다시 주워들어 머리에 쓰더니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정 그리 무상이 싫으다면 복채는 이걸로 대신하겠소.”

안 한다고.”

하하.”

 

까칠하긴. 그 아이는 안 이랬는데.

가만히 계단을 내려오던 장하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걷혔다.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화면을 여러 번 쓸어 보다 간신히 키패드 창을 켠다.

 

, 장하오. 뭐 좀 찾았어?

잘못 짚었어.”

 

여기 없어. 뒷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 장하오가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폰을 꽂아 두곤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라이터를 틱틱 거리다 잘 안 되는지 미간을 찌푸린다.

 

성생은 맞아?

내 그 아이 얼굴을 잊을 수가 없지 않나.”

샅샅이 찾아봤고?

, 숨겨 둘 공간도 마땅치 않아.”

, 요괴는 대체 언제 잡을 수 있을는지.

 

일단 사무실로 와. 신선의 말에 장하오는 끝내 불이 안 붙은 담배를 대충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 * *

 

 

 

도사 장하오. 물론 지금은 한빈의 말대로 무당 놈이긴 하나, 약 오백 년 전부터 장하오는 홍산 도사에게 배운 도술을 부리며 도사의 길을 걷는 중이다.

도사란 무엇이냐. 장하오의 말에 의하면 바람을 가르고, 마른하늘에 비를 내리고, 땅을 접어 달리며, 날카로운 검으로 천하를 가르고…… 등등. 어쨌거나 장하오는 부적을 이용해 도술을 부리며 그 시대 최고의 도사가 되는 것을 꿈꿨었다.

꿈은 꿨었다. 꿈은 꿨으나 이루질 못했다. 이유는 두 가지나 있었다. 첫째, 최고의 도사가 되려면 특정 각인이 새겨진 검과 거울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둘째, 도사 장하오는 부적이 없으면 도술을 쓰지 못했다. 마음을 비우라는 홍산 도사의 가르침에도 그저 욕심만 부리더니 여태 깨우치지 못했다.

후자를 이룰 수 없으니 전자의 조건이라도 갖추어야만 했다. 검과 거울. 그 시대 최고의 도사라고 하면 이름이 빠지지 않던 천영 도사에게 있을 것이 뻔했다.

장하오는 천영을 싫어했다. 가련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 게 도사이거늘, 천영은 그저 돈 많은 양반 댁 의뢰만 받아 제 배를 불리었다. 가없고 불쌍한 사람들이 더 가련하게 살게끔 하였다. 그런 사람에게 검과 거울은 아깝기 그지없었다. 최고의 도사라는 수식어를 그딴 도사 놈한테 붙일 수 없지.

장하오는 못할 게 없었다. 마음먹으면 망설이는 것 하나 없이 뭐든 해서 문제였다. 그게 도둑질이든, 뭐든. , 사람 죽이는 건 아직 안 해 봤다.

어쨌든. 천영의 공간에 들어가긴 쉽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천영과 친분을 쌓고 싶지도 않았다. 어찌할꼬……. 천영의 집 담벼락에 앉아 담바고 봉오리를 물었다. 빠끔, 빠끔. 그러다 쪽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하마터면 모양 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담바고를 바로 들곤 소리 찾아 시선 옮기니 멀끔한 사내놈 하나가 유유히 걸어 들어간다.

 

저자는 누구지?”

? 쟤가 왜 여기에 있지?”

 

머리카락 틀어 묶고 물을 길을 바가지 들고 가는 게 그저 이 댁 몸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누구냐는 물음에 제 제자인 청오가 바로 대답은 않고 입안에 쑤셔 넣은 떡만 짭짭 씹어대길래 저 바가지 물 뺏어다가 아가리에 부을 뻔했다.

 

성생이잖습니까. 스승님도 본 적 있을 텐데?”

모르겠는데.”

아비인가 어미인가, 몸 안 좋다고 한참 의원이고 도사고 찾아다니던 놈이잖아요. 스승껜 안 왔어요?”

…….”

, 하도 망나니라 소문이 나 있으니. 그럴 만도 하죠.”

 

감히 최고의 도사가 될 나 장하오를 빼먹어? 미간을 찡그리면서 성생의 얼굴을 유심히 관망했다.

.

곱게도 생겼구나.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성생은 천영의 침소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 . 담바고 끝을 담벼락에 두어 번 쳤다. 그리 단단하지 못한 물건에 금이 간다.

탐탁스럽지 않았다. 최고의 도사가 될 나를 빼먹어서. 아니, 저 자가 천영의 공간에 발을 들여서인가. 물론 발을 들일 수는 있다. 장하오는 고개를 틀어 입술에 묻은 찹쌀떡가루를 혀로 게걸스레 핥는 청오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상상했다. 청오가 천영의 공간에 발을 들인다면……. 그건 뭐, 어쩌라고. 이게 끝. 그럼 성생은 왜.

첫째, 얼굴이 고움. 둘째, 얼굴이 아름다움. 장하오의 이상형에 꽤 맞는다는 게 문제였다. 장하오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편이다. 사랑에 빠지면 앞뒤 안 가리고 전진하는 편이다. 장하오는 못할 게 없었으니. 단 한 번도 망설여 본 적 없었으니. 물론, 그렇게 빠르게 타오른 만큼 금방 식기도 한다. 근데 그건 나중 일이니까.

 

저 자에게 다가가 봐야겠어.”

 

저 자를 이용하여 제가 원하는 것까지 얻게 되면 마음껏 사랑도 할 수 있고 최고의 도사도 될 수 있고, 이 얼마나 완벽한 금상첨화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모습을 드러낸 성생이 제 보금자리로 추정되는 곳으로 재차 모습을 감춘다. , 저 자의 머리 푼 모습을 꼭 보고 말 테야. 검과 거울은 이미 뒷전이었다.

 

 

 

* * *

 

 

 

카페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한 건물을 유심히 바라본다. 스무디를 먹기엔 이젠 제법 날이 쌀쌀해졌다. 쪽 빨았더니 머리를 강타하는 서늘함에 골이 당긴다. 장하오는 이마를 톡톡 두들기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고정했다.

한빈의 집 주소는 이미 안다. 만날 생각이었으면 집으로 찾아가 그때처럼 무작정 들이닥치면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곳으로 찾아온 이유는, 성한빈 반응이 궁금해서인가.

 

아니, 여긴 어떻게 찾아오신 겁니까?’

다 알 수가 있지.’

지난번엔 저희 집에 찾아오시더니……. 연고라도 분명히 하십시오, 도사님. 제가 천영 도사님 밑에서 배우고 있는 것도 잘 아시면서.’

 

그 아이와 닮은 너의 반응 또한 궁금해서…….

시계 시침이 8에 다다르고 있었다. 야근이네. 할 게 없어 부적에 적힌 것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그래도 몇십 년을 함께했던 부적인지라 거짓으로 그린 거여도 꽤 태가 난다. , 엄지와 중지를 튕긴다. 5초 지났나, 부적을 손에 넣고 구겼다. 바스러져 재로 남아야 할 부적은 힘없이 구겨지기만 한다.

부적이 없으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제 부적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검과 거울이 없으면 최고의 도사가 될 수 없다. 그 이전에 부적이 없으면 최고의 도사는커녕 그냥 도사조차 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얻긴 개뿔. 어찌 보면 제 모든 것을 앗아간 게 사랑이었다. 장하오는 다시금 창밖을 바라보았다. 낯익은 자가 건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얼마나 봤다고 반가운 마음이 든다. 아무래도 그 아이를 닮아서겠지. 최고의 도사가 되긴 글렀나. 난 여전히 내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간 그 아이를 그리워하고 있는데.

 

지금 끝난 것이오?”

, 씨발. 깜짝아!”

 

반응은 이쪽이 훨씬 더 괴팍한 것 같구만…….

 

 

 

 

한빈은 생각했다. 대체 회사 건물은 또 어떻게 알고. 길거리에서 승강이 벌이기엔 보는 눈이 많아 꾹 참고 제 목적지까지 동행 중이다. 이 무당 놈의 목적지가 제 목적지와 같다는 것을 미리 인지하지 못한 탓에 버스까지 같이 타고 말았다. “……어디 가세요?” “그대 집에.” 어이없어 웃었다. 화낼 기력도 없었다. 제발 건드릴 거면 일 안 하는 주말에 와서 건드려 줬으면. , 아니. 주말까지 시달리는 것보다 그냥 평일에 다 끝내버리는 게 나으려나.

 

미안한데, 전 굿 할 생각 죽어도 없어요.”

알겠소.”

만일 굿 한다 하더라도 복채는 그 모자로 대신하겠다고 했으니까 나한테 돈 뜯어낼 생각 하지 마요.”

누가 뭐라 했나.”

……그럼 도대체 왜 또 찾아온 거예요?”

심심해 견딜 수가 있어야지.”

어이가 없네.”

하하.”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처음 한빈을 놀라게 한 이후로는 한빈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엔 말 한마디 먼저 하지 않는 장하오 탓에 둘 사이엔 금세 정적이 찾아왔다. 한빈은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곤 멍하니 밖만 바라봤다. 노래라도 들으면서 갈까 해서 이어폰을 꺼내는데 그걸 또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다시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대 부모가 내게 준 돈은 그대에게 돌려주도록 하지.”

…….”

미안하게 됐소.”

 

미안한 사람의 표정이 아닌데, 저건. 장하오는 저를 쳐다보는 한빈의 눈을 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있다가 옷 주머니에서 흰색 돈 봉투를 꺼냈다. 생각보다 그리 두둑하지도 않아 약간 머쓱할 지경이었다. 한빈은 액수 세어 볼 생각도 않고 봉투째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염려 마시오. 복채는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받으려고 하는 것이니.”

……뭘로요?”

그대가 나를 좀 도와야 할 일이 있소.”

 

신선의 사무실에서 나눈 대화는 그다지 영양가가 있는 대화는 아니었다. 그자가 성생의 환생이 맞는 것이냐. 맞는다면 부적의 행방 또한 그자가 알고 있을 것이고, 모른다 한들 어찌 됐건 그자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신선과 장하오에겐 한빈이 필요했다. 부적을 찾아야만 도술을 부릴 수 있고, 현재 유일한 골칫거리인 요괴를 퇴치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요괴가 다시 출몰하게 된 건 신선의 잘못이었다. 여러 요괴를 가둔 족자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이었다. 진작 태워버렸어야 했는데. 어쩌다 족자에서 풀려나 버린 요괴들을 퇴치할 힘이 신선에겐 없었으니, 본인이 가두었던 장하오를 본인 손으로 풀어 준 것이다. 횡설수설하며 간신히 자초지종을 다 설명하니 그제야 장하오가 한마디했다. ‘내겐 부적이 없소.’

신선은 마지막 그날을 떠올렸다. 부적을 뺏긴 장하오는 도술을 쓸 수 없어 힘없이 반쯤 쓰러져 있었다. 제 옆엔 천영, 천영의 제자들, 그리고 그중 장하오와 유독 친했던…….

 

장하오를 잡으시려면 부적을 먼저 뺏으셔야 합니다.’

그건 성생이 알아서 할 테니 염려 말게나.’

 

족자에 가두기 전, 장하오는 성생에게 부적을 뺏겼다. 고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도사 놈은 도술을 부리지 못한다. 고로, 요괴 퇴치는 씨발, 꿈도 꾸지 마세요…….

신선은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도사 놈들은 영생을 사는 놈들이 아니라 지금 요괴 퇴치 경력자는 이놈밖에 없단 말이다. 도사 신입을 좀 뽑아? 요즘 세대에 사는 것들이 요괴 퇴치에 힘 좀 써 달라 하면 정신병원이나 가라고 하지 않을까? 복잡한 심경 겨우 달래는데 장하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성생은 어디 있소?’

……장하오, 지금이 몇 년도인 줄 알아?’

천영 그 자는…….’

지금은 2024년이고, 천영은 죽었어.’

…….’

오백 년이 흘렀다고.’

 

나같은 경우는 뭐, 알다시피 영생을 사는 놈이라. 너 같은 경우는 족자에 갇혀 있었으니. 냉동 인간? 그런 거지. 그런 게 있어. 일단 내가 다 설명할 테니까, , 장하오. 울어?

아무튼 장하오가 족자에서 벗어난 지도 벌써 이 년이 흘렀다. 가끔가다 인간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살아가는 요괴를 마주한 적도 있긴 했는데, 부적도 없고 굳이 요괴를 퇴치해야 할까라는 생각에 모르는 척했다. 근데 요괴가 먼저 아는 척하더라. 장하오 아니야? 그때 그 도사 새끼? , 네 손에 뒤진 내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야! 평범한 사람은 듣지 못하는 목소리로 고막 찢어지도록 고함을 질러대는 것을 무시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녔다. 시종일관 같은 태도인 장하오의 모습에 요괴들이 먼저 나가떨어졌다. 내가 잘못 봤나…… 하고.

일단 살아는 가야 하니, 장하오는 무당의 길을 걷게 됐다. 물론 진짜 신을 받거나 그런 건 아니고, 어투나 하는 행동 때문에 잘할 것 같다는 신선의 판단이었다. 짭무당. 짭굿. 순진한 사람들한테서 벌어들이는 액수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때쯤 신선의 고민이 끝났었던 것 같다. 어차피 부적도 없어서 도술 부리지도 못하고 요괴 퇴치도 못 하는 놈, 다시 족자에 가둘까 싶었는데. 수입이 생각보다 좋으니 일단 내버려두기로 한 거다.

그렇게 요괴 퇴치는 잊고 산 지 꽤 됐었는데, 장하오가 성생을 만났다고 연락을 한 거다. 아니, 성생일 리는 없지. 그렇다면 성생의 환생인가. 신선은 그제야 다시금 요괴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장하오의 부적. 그것의 행방은 성생이 알고 있을 테다.

그래, 성생은 알고 있겠지. 성한빈 그자는 성생이 아니니 알 리 없지. 어쩔 수 없이 성한빈의 뒤를 캤다. 집 주소나 다니는 회사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외론 특이한 게 없었다. , 회사. , 회사. 이게 다인 듯했다.

 

, 이런 재미없는 놈이 다 있어…….’

 

하지만 요괴 퇴치에 있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여 준 한빈을 신선은 도무지 놓을 수가 없었다. 그건 장하오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생과 같은 얼굴을 한 그 아이를 도무지 놓을 수가 없었다.

일단 곁에 있으면 얻는 게 있긴 하겠지.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 한들 잃는 건 없을 테니 곁에 있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장하오는 또다시 한빈을 찾았다. 신선 또한 사무실에 앉아 장하오의 연락만을 기다렸다.

버스에서 내렸다. 한빈이 발을 떼지 않으니 장하오 역시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멀뚱히 장하오의 얼굴을 보다가 문득 머리에 쓰인 비뚤어진 모자가 거슬린다. 한빈은 장하오의 모자챙을 잡고 제대로 푹 눌러 씌워 주었다.

 

제가 그쪽을 무슨 수로 도와요?”

내가 부적 없이는 도술을 부릴 수가 없소.”

도술 같은 소리 하네.”

하하.”

 

장하오의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걸었다. 그러니 장하오 역시 발을 떼어 따라 걸었다.

 

마술사 같은 건가?”

마술보단 요술이지.”

하나 보여 줘요.”

내 지금 부적이 없다니까.”

……그럼 어떡해요?”

 

그럼 도사 아닌 거 아니에요? 한빈의 물음에 작게 미소 짓던 장하오가 대답했다.

 

방법이 하나 있소.”

뭔데요?”

그대가 도와야 할 일이오.”

 

어느새 한빈의 집 앞에 도착한 둘은 건물 앞에 마주 보고 섰다.

 

내 스승은 내게 부적 없이 도술을 부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소.”

…….”

그자가 옆에 있어야만 할 수 있는데…….”

 

모자를 깊게 눌러 써 눈가에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눈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한빈은 저도 모르게 턱에 힘을 주었다. 그걸 용케 알아챈 장하오가 손가락으로 한빈의 턱을 건드리려다 망설인다.

 

그대가 내 스승을 참 많이 닮아서.”

…….”

내 그대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한번 도사의 길을 가 보고자 하는데.”

 

괜찮겠소?

…….

그런 목소리로 부탁하는데 안 괜찮다고 하겠냐고.

한빈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오가 웃음 지었다. 씩 올라가는 입꼬리가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따라 웃었다. 장하오는 한빈의 웃는 얼굴을 보며 성생을 떠올렸다. 평생을 그리워하던 사람을 만난 것만 같았다.

 

 

 

* * *

 

 

 

도사님께서는 부적 없이 도술을 부리지 못한다고 하던데.”

……, 아직까진 그렇지.”

제가 좀 도와드려 볼까요?”

그대가?”

 

성생이 제 침구 밑에서 까칠한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그러곤 다른 손을 장하오에게 내밀었다.

 

부적 다 줘 보십시오.”

어허.”

평생 부적에만 의지하며 연명할 작정이십니까?”

 

성생은 장하오의 눈빛을 읽었다. 의심을 아예 꺼뜨리기엔 힘든 관계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성생의 스승인 천영과 장하오의 사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 성생 본인이니까. 그럼에도, 저 눈빛을 하고 있음에도 성생에게 부적을 넘길 수 있는 건 예상치도 못하게 커져 버린 장하오의 감정 하나로 인해 초래된 거였다. 성생 역시 느끼고 있었다. 바보 도사 같으니.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성생은 건네받은 부적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침구 아래에 다시 집어넣었다.

 

스승님께 배운 것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딴 놈한테 배우고 싶진 않은데.”

제가 그딴 놈입니까?”

…….”

제 스승님이 천영 도사님이라고 해서 그분이 도사님의 스승이 되는 건 아닙니다.”

…….”

제가 도사님의 스승이 되어 드릴게요.”

 

성생은 검지를 바닥에 짚었다. 따라 하십시오. 성생의 말에 장하오 역시 검지를 내민다. 눈 감으시고요. 성생의 말에 장하오가 눈을 감는다. 힘을 잔뜩 준 탓에 눈꺼풀이 부르르 떨린다. 성생은 웃음을 삼키며 장하오의 눈꺼풀을 살살 매만졌다. 힘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긴장을 푸십시오. 처음 맞닿은 성생의 피부에 장하오의 볼이 확 벌게진다.

 

긴장을 풀고 마음을 비우십시오.”

…….”

그다음에, 손가락으로 그리시는 겁니다.”

 

필요한 것을 그리시는 겁니다. 도사님께 필요한 건 부적이 되겠지요. 성생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장하오의 귀를 간질인다. 꿀꺽. 목울대가 넘어간다. 천천히 바닥에 글씨를 쓴다.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에 성생은 다시 한번 웃음을 삼킨다.

 

떨리십니까?”

 

투박한 글씨여도 꿋꿋이 잘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손등이 따듯해진다. 손가락 사이사이 타인의 무언가가 들어찬다. 제 검지 위로 따듯한 체온이 덮어진다. 감았던 눈을 떠 제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성생을 쳐다봤다. 고개를 돌리니 코끝이 닿을락 말락. 차마 성생을 밀 순 없어 허공에 발버둥 치며 뒤로 물러났다. 당혹스러운 성생의 표정이 눈에 담겼으나 장하오는 당장 홧홧해진 제 얼굴 먼저 식혀야 했다.

 

제가 도사님 잡아먹습니까?”

미리 언질은 주고 다가와야지.”

전 스승님께 이렇게 배웠는걸요.”

……천영 그 자식이 그랬단 말이오?”

 

하하. 결국엔 삼키지 못한 웃음이 터지고 만다. 성생의 얼굴 가득 해사한 웃음이 피어오른다. 그럼 장하오는 또 멍하니 성생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금방 머쓱해진 성생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그만 보시고, 다시 한 번 해 보시지요. 이번엔 다가가지 않겠습니다. 단호한 성생의 말에 장하오는 입술을 삐죽였다. 다가오지 말라 한 건 아닌데. 이번에도 웃음 삼키기엔 실패했다.

그렇게 그 좁디좁은 공간 안에서 몇십 개의 부적은 그린 것 같다. 마음을 비우고 그리라는데, 비우긴커녕 성생을 향한 감정이 크기를 키워 더 채워졌다. 엉터리 스승. 그러니 엉터리 도사 밑에서 배움을 이어가고 있지. 하지만 엉터리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장하오는 매일 성생을 찾았다. 성생의 공간으로 들어가 부적을, 제 모든 것을 맡긴 채 엉터리 도술을 배웠다. 배움을 이어갈수록 마음의 빈 공간은 더욱 사라지고 있는데 이게 맞는 건지. 엉터리 스승 밑에 엉터리 제자. 최고의 도사의 길로 가긴 개뿔, 감정 하나 때문에 지독하게 먼 길로 돌아가고 있었다.

 

 

 

* * *

 

 

 

그로부터 삼 주가 지났다. 한빈은 거울 앞에 앉아 머리 위에 얹어 둔 수건을 잡아 털었다. 토요일 오후 여덟 시. 거의 사흘에 한 번씩은 꼭 만나고 있는 것 같다. 평일엔 퇴근하고 나오면 늘 같은 카페에 장하오가 기다리고 있었고, 오늘처럼 주말엔 늦은 저녁 시간대쯤 집에 무작정 찾아왔다.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울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제 부모가 꽂아 넣은 돈도 돌려받았고, 부탁할 때 장하오 목소리가 떨리는 게 진정성 있어 보이기도 했어서. 사실 진정성은 모르겠는데, 그냥 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주 괴롭힐 거라곤 예상도 하지 못했다. 더 답답한 건, 이렇게 자주 만난다고 해서 뭘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퇴근하고 만나서 한빈의 집까지 같이 갔다가, 한빈의 집 안에서 물 한 잔 얻어 마시고 좀 앉아 있다 귀가. 어쩔 땐 같이 야식 하나 시켜 먹고 귀가. 주말엔 주말 예능 보면서 같이 저녁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하나 때리고 귀가. 정말 가끔은 양주 한 병을 사 와서 같이 한잔하다 귀가.

제가 도울 만한 게 이런 거예요? 참고 참다 뱉어낸 말에 장하오는 짧게 대답했다. 일단 그대와 다시 친해져야 할 것 같아서. 한빈의 입장에서 장하오의 문장은 부자연스러웠다. ‘다시라고 하기엔 장하오와 친했던 적이 없었으니. 그렇다고 해서 굳이 반박하진 않았다. 왜 장하오가 그렇게 말했는지, 이유는 알 것 같았으니까.

단순히 스승만은 아닌 것 같지? 맨투맨을 입으며 생각했다. 처음 제게 부적의 행방을 물었을 때 표정도 그렇고, 그 이후로도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장하오의 표정과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달랐다. 궁금한 마음에 물어도 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만한 분위기도 안 됐었다. 스승이라면, 장하오가 어릴 때 만났던 스승이 나와 닮았던 건가. 스승이라길래 당연히 나이 차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원래 어린 시절엔 선생님들 좋아하는 게 국룰이잖아. 킁킁, 옷 소매 부분에 코를 묻곤 냄새를 맡았다. 향수를 뿌리고 주변을 정리했다.

[장하오 무당놈]

저를 도사로 칭하긴 하나 지금까지의 행색은 영락없이 무당 놈이라. 이전에 장하오가 저를 무엇이라 저장했느냐며 물어보길래 보여 줬더니 입술 삐죽이던 게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사기꾼이라 저장해 두려고 했던 사실은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여보세요.”

, 일어났소?

, 일어났소. 이 시간에 자고 있겠소?”

하하.

이 말투부터 좀 어떻게 고치면 안 돼요?”

내 노력해 보지. 먹고 싶은 것 있소?

있소. 내가 알아서 시킬 테니 오기나 하시오.”

하하.

 

성생 어투는 이렇지 않았었는데. 장하오는 한빈이 귀엽다 생각하면서도 성생을 떠올렸다.

 

오늘도 흐지부지 넘기지 말고 뭣 좀 해 봐요,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딩동

 

……누구세요?”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을 텐데. 한빈은 현관문을 응시했다.

 

……무당님, 왔어요?”

누가 왔소?

누구세요?”

열지 마시오. 내 거의 다 왔으니.

 

영화나 드라마 보면, 꼭 열지 말라 하는 곳 열면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한빈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

……그렇다면, 내가 연 게 아닌데 열린 건 어떻게 되는 거지?

 

호오.”

……뭐야.”

천영 댁에 머물던 자가 아닌가. 어쩐지 장하오 그놈이 매일 이곳을 들른다 했더니.”

 

겉으로 보기엔 저와 같은 체형의 남자였다. 아니, 저보다 더 왜소한 면이 있었다. 그 사람과 제 사이엔 현관문이 종이 찢긴 듯 파손된 채 나가떨어져 있었다. 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자 또한 현관문을 이렇게 박살 낼 수 있는 체구가 아니었다.

 

도사 놈은 어디 있어?”

……아니, 누구, 아니, 이거 문을 이렇게 하시면 안 되죠.”

보아하니 이제 도술도 못 부리는 몸인 듯한데, 계속 얼쩡거리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어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

장하오 어디 있어!!!”

 

숨이 턱 막히는 소음에 한빈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휴대폰은 손아귀에서 벗어나 바닥에 곤두박질쳐진 지 오래였다. 휴대폰 너머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데 도무지 들리지가 않았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빠르게 올라오는 발소리.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앞을 막고 있던 두 사람이 제집 안으로 고부라져 쓰러진다. 그들의 등 뒤에선 반가운 사람이 제 손을 두어 번 탁탁 맞대 치며 집으로 따라 들어온다.

 

시끄러워서, .”

 

넘어진 둘이 장하오를 향해 자세를 고쳐 잡고 포효한다. 장하오는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쑤시며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 시대엔 그리 시끄러우면 포졸들한테 잡혀간다고.

 

들어보니 뭐, 내 도술을 부리지 못한다 알고 있는 것 같던데.”

 

휴대폰 너머로 대화를 전부 들은 모양이었다. 장하오는 과장되게 허리까지 꺾으며 웃었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한빈에게 신호를 보냈다. 한빈은 귀를 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려 장하오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것들은 장하오를 경계하느라 한빈의 움직임을 읽지 못했다.

 

네놈이 족자에 봉인되던 것을 우리가 몰랐을 줄 알고.”

그러는 너희도 갇히지 않았느냐?”

천영 놈에게 부적을 다 뺏기고 말이야.”

…….”

아니지. 그 제자 놈한테 뺏겼더랬지, 아마.”

…….”

네놈이 부적 없이 도술을 못 부리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인지. 장하오 쪽으로 다가간 한빈은 그 상태로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염없이 움직이는 눈동자에 두통이 오는 것만 같았다. 남자의 말에 장하오가 나지막이 웃었다. 남의 과거를 떠벌리고 말이야, 부끄럽게시리.

 

네놈들은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말은 똑바로 해야지.”

…….”

섞여 있어선 안 되는 것들이 섞여 사니 지들이 마치 사람인 줄 알고.”

…….”

요괴 주제에.”

 

요괴? 그 애니메이션 이런 데에 나오는 그 요괴? , 도깨비 이런 거? 한빈은 혼란스러웠다. 동시에 비현실적인 상황 때문인지 이 모든 게 꿈인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부터 계속 이상했던 게, 저 남자 눈동자 색이 자꾸만 바뀐다. 저 여자 송곳니가 자꾸만 길어져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다. 와중에 저 무당 놈 말로는 저것들이 요괴래. 한빈은 도망칠 생각도 않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기 바빴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더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그리고 부적이 없긴. 누가 그러더냐? 내 너희를 찾고 있었는데 오히려 잘 되었구나.”

 

장하오는 뒷주머니에서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를 꺼냈다. 부적 한 장을 검지와 중지 사이 끼운 채 꺼내 보였다. 그것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물러서거나 도망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전에, 우리 때문에 선량한 백성이 피해를 보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겠느냐. 이 자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네놈들 전부 잡혀가는 것인데. 그대는 얼른 나가시오.”

 

그러면서 한빈에게 손짓했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쥐가 나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어서 가시오. 장하오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한빈은 고개를 끄덕이곤 간신히 장하오 등 뒤로 향했다. 요괴라고 칭해지는 것들의 입에서 뱀 소리가 났다. 워워, 그럴 때마다 장하오는 부적을 흔들었다. 한빈이 무사히 집 밖으로 나가자 장하오가 고개를 돌려 한빈을 바라봤다.

어디든 멀리 가시오.

한빈은 고개를 끄덕이곤 계단을 급히 내려갔다. 그럼에도 이따금 고개를 올려 장하오가 있을 곳을 바라봤다.

 

내가 부적 없이는 도술을 부릴 수가 없소.’

 

못 부린다며. 부적 없다며. 저 부적은 분명 무당 일 할 때 쓴 짭 부적일 것이다. 한빈은 건물 밖으로 나와 이도 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진짜, 지금 저놈 만나고 몇 주 동안 대체 얼마나 많은 일이 생기는 거야. 어금니를 꽉 씹었다. 그러다 달렸다. 그러다 다시 건물 앞으로 돌아왔다. 휴대폰 키패드 창을 켜 숫자 세 개를 눌렀다. 신고해야 해. 저들의 정체가 뭐든 우리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건 맞잖아.

신호음 두 번 갔나, 위에서 들리는 소음에 한빈은 저도 모르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린다. 쿠당탕! 계단을 빠르게 내려오던 장하오가 한빈과 마주친다.

 

왜 아직도 여기 있소!”

 

내 도망가라고 하지 않았나! 한빈은 괜히 미안했다. 열지 말라는 곳 안 여는 건 잘하는데 그건 못하나 봐요. 아니, 그냥 내 성정머리가 그래! 그쪽 걱정됐다고! 머릿속에서 무수히 많은 말이 앞뒤 정리되는 것 하나도 없이 둥둥 떠다녔다. 정리할 새도 주어지지 않아 말 한마디 못 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얼른!” 장하오가 한빈의 손을 잡았다. 먼저 잡아 놓고선 당황한 건지 혹은 정전기가 오른 건지 본인이 먼저 움찔한다. 그래도 전처럼 물러나면서 넘어지거나 떨어뜨리지 않았다. 놓지 않고, 꼭 잡고 달렸다.

그것들은 매우 빨랐다. 인간의 모습이라 그런지 요괴일 때보단 덜 빠른 속도지만 확실히 장하오와 한빈보단 빨랐다. 무작정 큰길로 달렸다간 금방 잡힐 것이 뻔했다. 장하오는 사람이 없는 골목길로 꺾어 들어갔다. 한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눈앞이 핑핑 도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니 뒤에서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렸더니 그것들이 쌍으로 발이 꼬여 넘어진 듯했다. 대박, 하늘이 도왔다. 그렇게 또다시 사이 골목으로 들어가니 하늘이 돕긴 개뿔, 막다른 길이다. 왜 자꾸 영화에서만 보던 절정의 순간들이 내게 생기는 것인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막힌 벽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후우. 장하오는 쓰고 있던 볼캡을 벗어 던지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한빈보단 꽤 침착한 상태였다. 요괴들을 잠깐 넘어뜨렸으니 찰나의 시간은 벌었어도 금방 다시 올 것이다. 뭐를 고민하는 건지 장하오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괜찮을까. 그냥 한 번 확인해 보려고 한 거였다. 성생과 있어선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성생과 아무리 닮았어도 넌 성생이 아니니까. 그러니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 보려고 한 거였다. 그렇게 삼 주를 그냥 보냈다. 아니, 그냥은 아니지.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정을 붙였다. 물론 제로선 정 붙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첫날부터 정은 이미 붙어 있었다. 근데 한빈의 입장은 그게 아니니까.

달음질치는 발소리가 다시금 들리기 시작했다. 한빈은 왔던 길로 돌아가 그들을 마주치기 전 다른 길로 도망가자며 장하오의 손을 잡아 왔다. 장하오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정도면 많이 친해졌고, 마침 한빈도 오늘은 흐지부지 넘기지 말자고 했었으니.

그리고 확인도 했으니까. 장하오가 반대쪽 손으로 한빈의 뒷목을 감싸 잡았다.

 

……떨어지지 마시오.”

 

입술이 맞닿았다. 히익, 반사적으로 숨을 참은 한빈은 반대쪽 손으로 장하오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뭐야? 맞잡은 손이 뜨거워지는 듯하다. 장하오는 한빈의 아랫입술을 물며 검지로 첫 획을 그었다.

 

 

 

* * *

 

 

 

마음을 비우고, 긴장을 푸시라니까요.”

…….”

도사님께선 도술 부리기로 그리 유명하시면서 왜 깨우치질 못하십니까.”

 

아무리 망나니라 한들 이 바닥에 도사님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부적 하나 없다고 이리 아무것도 못 하시면 어떡합니까? 오늘따라 엉터리 스승의 잔소리가 심하다. 그럼 그대가 부려 보면 되지 않소? 툴툴거리며 꺼낸 말에 성생이 이마를 짚는다. 저는 도술을 못 부리는 거 알지 않습니까……. 목소리가 젖어 있는 것도 같았다. 장하오는 성생의 표정을 살폈다. 눈가가 벌겠다.

 

무슨 일 있소?”

깨우치셔야죠. 도사님이시잖아요.”

성생.”

부적 없이 어떡하시려고…….”

울지 마시오.”

 

천천히 손을 들어 성생의 볼을 매만졌다. 끝내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엄지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바로 또 눈물이 흐른다. 또다시 엄지손가락을 비볐다. 울지 마시오. 무릎걸음으로 바짝 다가갔다. 양손으로 성생의 볼을 감쌌다.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한 건지 성생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장하오의 손목을 잡아 내리려 해도 꿋꿋하다. 그저 감싸 쥔 꼴이 됐다.

 

울지 마시오.”

 

성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원래 남이 울지 말라 하면 더 눈물이 나는 법 아니겠는가. 숨이 다시금 차올라 헐떡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장하오는 그저 성생의 표정 변화에만 신경 썼다. 제 눈을 바라보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눈을 마주치다 끝내 시선을 피하는 성생의 젖은 눈과 벌게진 코끝. 이를 아득 물어 움직이는 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하지 말래도……. 볼을 매만지던 엄지손가락을 성생의 입술에 문댔다. 갑작스러운 장하오의 행동에 딸꾹, 저도 모르게 벌린 잇새로 장하오의 엄지손가락이 들어온다. 말랑한 혀가 손가락에 닿으니 딱딱하게 굳는다. 다시금 눈이 마주치자 엄지손가락을 쑥 뺀다. 고개를 틀어 입술을 맞댄다. 어디 둘 곳 없어 방황하던 성생의 눈동자가 그제야 모습을 감춘다. 처음 성생에게 배울 때 긴장했던 장하오처럼 눈꺼풀을 부들부들 떨었다.

장하오는 성생의 아랫입술을 물며 생각했다. 아니, 억지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서. 가까이에서 성생을 보고 있자니 입 맞추고 싶어 저지른 행위였는데, 막상 맞추고 보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불 줄 알았건만, 마치 잔잔한 수면 아래로 깊게 잠기는 느낌이다. 주변 소음 하나 없이 입술이 마찰하는 소리만 들렸다. 혀가 닿을 때마다 피가 몰리는 느낌이 생경하다. 고개를 반대로 트니 손목을 감싼 성생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심장이 목에 걸려 있는 것만 같았다.

볼을 감싸고 있던 손을 떼니 자연스레 제 손목을 감쌌던 성생의 손도 떨어졌다. 잠시도 아쉬워 곧장 깍지를 끼웠다. 으응. 성생의 뒷목에 힘이 들어갔다. 떨어질까 두려워 입술을 더 진하게 맞댄다. 깍지를 끼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장하오는 잡힌 손의 검지를 천천히 세웠다.

울지 마시오. 단골 주막 주모가 말하기를, 연인의 눈물을 그치게 하는 데엔 꽃이 최고랬다. 허공에 글씨를 썼다. 도사님, 잠시. 입술이 잠깐 떨어진 찰나 뱉어낸 성생의 말은 다시 장하오의 입안으로 먹혀들어갔다. 마지막 획을 긋고는 딱, 중지와 엄지를 맞대어 튕겼다.

울지 마시오.

순식간에 주변이 만개한 꽃으로 가득 찼다.

벽으로 막혀 있던 사방 역시 트여 바람이 불었다. 꽃 내음이 풍겼다. 입술을 떼어내고 눈을 뜬 성생의 시야 어느 부분에도 꽃이 없는 곳이 없었다. 너무도 아름다워 눈을 감는 시간이 아까웠다. 푸른 하늘 위로 꽃잎이 흩날렸다. 꽃잎 하나가 성생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조심히 감싸 잡고 고개를 돌려 장하오와 눈을 맞추었다. 딸꾹, 그제야 눈을 감았다가 떴다. 끝내 떨어지지 못했던 마지막 눈물이 볼 위로 흘러내려 간다.

 

주모 말이 딱 맞네.”

 

꽃만한 게 없구나. 장하오는 성생의 입술에 다시금 입 맞추었다.

 

 

 

* * *

 

 

 

단 몇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난 거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다 다시금 천장을 바라봤다. 옆으로 눕지도 못하고 정자세로 반듯하게 누워 있다 보니 담이 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면 이 사람이랑 닿을 것 같은데 어떻게 움직여! 가지런히 모은 손등 위에서 손가락이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자꾸만 목이 말랐다. 그렇다고 해서 일어나 물을 마시러 가지도 못했다. 일어나다가 몸 닿을 것 같아. 일어나다가 깨면 어떡해. 한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몇 시간 전, 그러니까 어젯밤. 장하오는 부적 없이 도술 부리는 법을 터득했다. 아니, 옛 스승이 알려 줬다고 했으니 터득은 예전에 한 거겠지. 그러니까 옛 스승이 알려 준 그 방법이 결국엔 이런 거고,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 게 결국엔 이 방법 때문에……. 잠깐, 내가 입술을 움직였던가. 즐긴 것처럼 보인 거 아냐?!

입을 맞춤과 동시에 도술을 부린 장하오는 요괴 둘을 단숨에 퇴치했다. 단단한 팔과 무슨 봉 같은 걸 들고 날아다니는 장하오 뒤로, 한빈은 주저앉아 멍만 때렸다. 그러다 또 도술을 부려야 할 때가 오면 한빈에게 빠르게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눈만 끔뻑이니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짓는 장하오를 보면서, 그제야 입을 틀어막고 저 미친 도사 놈이, 하며 한마디 겨우 뱉어냈었던 것 같다.

 

이곳은 이제 위험한 것 같으니, 당분간 나와 함께 지내는 건 어떻소?’

 

부서진 현관문 앞에 허망하게 서 있었더니 장하오가 태연히 말을 꺼냈다. 어차피 제 앞이든 네 앞이든 요괴가 나타나면 둘이 같이 있어야만 도술을 쓸 수 있으니 함께 있는 게 안전하다는 것이 장하오의 의견이었다. 그건 맞는 말이지. 그래서 어쩌다가 장하오 집에서 동거하게 된 거다. 좁디좁은 원룸에서.

가짜 굿으로 사람들 돈 다 뜯어먹었으면서 대체 왜. 제집보다 더 좁아 보이는 집 안을 둘러보다 장하오에게 물었더니, 신선이 다 먹는단다. 가짜긴 하지만 점보는 것도 신선이고, 굿할 때나 장하오가 가는 것이라고. 악덕 사장이네……. 한빈이 중얼거리자 장하오가 웃음을 터뜨렸다.

좁디좁은 원룸에 여분의 침구가 있을 리도 없었고. 급히 나오느라 속옷과 옷 몇 벌만 챙겨 온 게 다였다. 이불 좀 가져올걸. 그러자 장하오는 또 태연하게 말했다. 같은 침대 쓰는 게 싫소? 그 말엔 너 침대 싱글 크기잖아, 라고 한마디 하려다 말았다.

바닥에서 잔 다음 날 찌뿌둥한 느낌을 몹시 싫어하는 한빈은 무조건 침대에서 자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집주인을 바닥으로 밀어내기도 좀 그렇고. 어쩔 수 없이 저가 방바닥에 누웠는데 몇십 분도 채 안 되어 허리가 존나 쑤시는 거다. 참자. 참아 보자. 꾹 참고 자자…….

실패. 결국, 싱글 침대에 성인 남성 둘이 눕게 됐다. 늦은 시간인지라 장하오는 금세 잠이 들었다. 조용해지니까 또 몇 시간 전 일이 상기되었고, 그래서 한빈은 지금 이 상태이다.

첫 키스는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사귀었던 애인과 처음 입술을 맞댔다. 숙맥이었던 한빈은 그 상태로 굳어 입술에 닿은 촉감을 느꼈다. 그 촉감은 여전히 기억난다. 약간 까슬했다. 그 친구 역시 입술을 붙이고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았기에 그게 다였다. 잠시만, 그럼 이건 키스가 아닌가.

당장 몇 시간 전, 입술로 전해진 촉감은 그때의 것과 확연히 달랐다. 일단 까슬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말랑하기도 했고. 더군다나 그냥 붙이고만 있진 않았으니…….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당겨 덮었다. 얼굴의 열이 이불 안을 데웠다. 그러다 슬쩍, 옆을 바라봤다. 곁눈질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입술부터 보인다. 다시 눈을 감았다. 입술을 말아 다물었다. 장하오의 입술이 닿는 느낌이다. 미쳤네. 감각이 예민해진 듯하다.

그러다가 다시 눈을 떴다. 장하오는 태연하게 잘만 잔다. 진짜 도술을 부리는 도사가 맞다니. 심지어 비현실적인 도술을 부리며 비현실적인 존재인 요괴들을 퇴치하고.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도술을 부리고.

진짜 입술이 닿는다고 도술을 부릴 수 있는 건가?

그게 말이 되나. 슬금슬금 장하오에게로 다가갔다. 가뜩이나 간격이 좁았던 터라 금방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잘도 생겼네. 눈동자를 굴리며 이목구비를 탐색하다 결국엔 또 같은 곳에 시선을 멈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맞댄다. 폭신하다. 온몸, 손가락 마디 끝까지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감각이 불꽃처럼 튀어 입술까지 둥둥, 심장 박동에 따라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한빈이 급히 입술을 뗐다. , 조용한 공간을 메우는 소리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눈만 끔벅끔벅, 장하오와의 거리는 여전히 가깝다.

장하오가 눈을 뜬다. 이미 뒤로 물러나기엔 늦었다. 몸이 마비라도 된 듯 가만히 장하오를 쳐다봤다. 몽롱한 눈동자 속에 이윽고 한빈이 비친다. 고개만 돌려 한빈을 바라보던 장하오가 몸까지 틀었다.

 

……잠이 또 안 오나 보는군.”

 

조금 전보다 시끄러워졌다. 그러니까, 장하오가 깨서 시끄러워진 게 아니라 제 심장 소리 때문에.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머리 전체에 쥐가 나는 것만 같았다. 단순히 가까워서가 아니라, 입술을 맞춘 직후여서가 아니라,

 

그렇다고 그리 빤히 보고 있으면 내가 부끄럽지 않겠소?”

 

이 눈빛. 그동안은 모자에 가려져 장하오의 눈을 본 적이 없었던 건가. 아니, 아니다. 처음 보는 눈빛이다. 무거운 감정이 느껴진다.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숨을 쉬는 것조차 의식되었다. 품에 빈틈없이 안기면 숨통이 트일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성생.”

…….”

이리 와 안기시오.”

 

재워 줄 테니. 안기라는 말과 함께 장하오가 먼저 한빈을 끌어당겼다. 장하오의 품은 생각보다 딱딱했다. 입술을 물곤 눈을 감았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품에 안기니 숨통이 트였다.

내가 아닌 그 사람을 보는 눈빛이었구나.

그냥 스승이 아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정의할 사람이 아닌 듯했다. 장하오에게 있어서 생각보다 거대했고, 지금도 거대한 사람인 듯했다. 저 눈빛의 대상이 되는 기분은 어떨까. 저런 사랑을 받으면 어떤 기분일까. 저 정도의 사랑을 온전히 감당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군가를 향한 질투심도, 누군가를 향한 동정심도 아니었다. 한빈은 조용히 울먹였다. 감정이 전이된 걸까. 감정이 전이된 거라면 행복에 벅차야 하는데, 왜 이렇게 슬프지. 한빈은 한참 감정을 억누르다 겨우 잠이 들었다.

 

 

 

 

 

 

 

죽었소?”

 

우응. 코끝을 건드리는 손길에 한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해가 중천에 떴소. 이번엔 앞머리를 잡아당긴다. 쭉쭉. 이윽고 눈을 뜨자 바로 앞에 장하오의 얼굴이 있다. 히익, 뒤로 물러났더니 접은 무릎을 펴 일어난 장하오가 이내 냉장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생수 페트병을 꺼내 컵에 따랐다. 다시 다가가 컵을 한빈에게 건넸다. 몸을 일으켜 앉은 한빈이 컵을 건네받자 옆에 앉는다.

 

원래 이렇게 잠이 많은 편이오?”

……이 정도면 적당한 거 아닌가.”

 

어제 일과 새벽의 일 이후로 장하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분명 품에 안겨 잠이 들었는데, 장하오가 먼저 일어난 거라면, 꿈속에서 성생을 안은 게 아닌, 현실에서 나를 안았다는 사실을 모를 리도 없을 테고. 얼굴에 열이 오르려는 것을 억누르고자 물을 벌컥벌컥 삼켰다.

 

잘 잤소?”

 

대답하지 않고 물만 마셨다.

 

어제 입은 왜 맞춘 것이오?”

푸학!”

 

좆됐다. 방바닥에 물 다 뿜었다. 아니, 이것 때문에 좆된 건 아니긴 한데. 어허, 혀를 차던 장하오가 협탁에 놓인 티슈를 뽑았다. 방바닥을 닦아내는 동안 움직이지도 않고 장하오 뒤통수만 쳐다봤다. 입 왜 맞췄느냐고? 나도 몰라! 그냥 갑자기 그랬어! 심장이 또다시 요동친다. 와중에 다시 옆에 앉는 장하오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

 

자고 있는데 갑자기 입술에 뭔가가 닿길래.”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고요.”

난 꿈인 줄 알고.”

 

아는 사람이 나온 줄 알고. 목소리가 작아진다. 심장이 시큰거렸다. 굳어 있던 고개를 돌려 장하오를 보니 입술을 삐죽인다.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적인다. 좀 이상하긴 했소. 내 이런 꿈은 처음이었거든.

 

습관적으로 그랬던 것 같소. 미안하오.”

 

잠들지 못하는 연인을 끌어안아 토닥이는 게 습관적으로 나올 정도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걸까.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따지자면 먼저 입 맞추어 장하오를 깨운 건 난데, 애먼 사람이 사과하는 꼴이었다.

 

……뭘 미안해해요. 전 도사님 덕분에 잠도 잘 잤는데.”

 

미안해하니까 제가 더 머쓱해지는 기분이에요. 기분이 그다지 좋진 못했다. 새벽의 일로 설렜던 건 사실이고, 하룻밤 사이 장하오를 향한 감정이 전보다 다른 방향으로 훨씬 커진 것 같아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행동과 눈빛 때문에 사랑에 빠진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내가 원래 이렇게 사랑에 쉽게 빠지고 그런 사람이었나. 한빈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였다. 모든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놓아두었던 컵을 들어 다시 물을 마셨다.

 

그래서, 입은 왜 맞추었소?”

푸헉!”

 

또다시 방바닥이 축축해진다. 어허, 또다시 티슈를 뽑아 닦는다. 아니, 진짜 모른다니까. 그냥 순간적으로 했다니까. 얼굴 하나하나 뜯어 보다 보니 갑자기 하고 싶었다니까.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뭐 필요한 게 있었소?”

? ?”

도술을 부리게 하려 했던 것인가 해서.”

 

그 외 이유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순진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잔인한 건지. 그래도 입을 맞춘 건데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라는 경우를 이렇게 배제해도 되는 건가. 한빈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그것이 맞습니다.”

말하지 그랬소. 그대가 도술을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뭐였소?”

 

지금은 필요 없소? 장하오의 말에 한빈은 아주 잠깐, 정말 찰나의 순간 고민에 빠졌다. 도술을 부려 원하는 것을 주겠다 이건데, 그럼 입을 맞춰야 하는 거고……. 미친. 목적이 너무 불순하다. 하지만,

 

사과가 먹고 싶어서…….”

 

이 무슨 신혼부부 바이브인가. 한빈은 제가 말해 놓곤 으, 얕게 치를 떤다. 장하오가 미소 짓는다. 그것 어렵지 않지. 그러더니 바로 입술을 맞댄다.

잠시만, 조금 위험한데. 심장이 목 위로 솟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장하오가 한빈의 입술을 빨 때마다 볼과 귀 뒤에 소름이 올랐다. 그러나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입술을 뗀 장하오는 손에 든 과일바구니를 한빈에게 건넸다.

 

짜란.”

 

자칫하면 심장 박동 소리가 장하오에게까지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빈은 주춤거리며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가득 담겨 있는 사과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러자 사라진다. . 한빈의 반응에 장하오가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도술은 요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오.”

……그런데 어떻게 날아다니고, 요괴를 죽여요?”

그건 상대가 요괴라 가능한 것이고. 자고로 도사는 땅을 접어 걸어 다니는데 나는 것 하나 못 할까.”

…….”

왜 이리 귀여운 것이오?”

 

물러난 거리만큼 장하오가 다가왔다. 한빈은 가까워지는 거리에 고개를 뒤로 물렀다.

 

내 그대에게 입 맞추는 게 불편하진 않소?”

……이미 할 거 다 해 놓고 인제야 물어보는 거예요?”

하하.”

 

그건 그렇지. 고개를 푹 숙이고 웃다가 다시 들어 한빈의 눈을 바라봤다. 한 번만 더. 짧은 말과 함께 입을 맞춘다. 그에 한빈은 또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이 통통한 게 문제인 건지, 부드러운 게 문제인 건지, 닿을 때마다 발끝까지 전기가 오르는 느낌이 들어 미칠 지경이었다. 숨도 못 쉬고 입술을 받아냈더니 장하오가 또 먼저 입술을 뗀다.

 

애벌레.”

으악!”

하하.”

 

이것 또한 입에 넣으면 사라지지. 장하오는 고개를 틀어 한빈의 얼굴을 더 자세히 관찰했다. 한빈은 장하오가 도술로 만들어낸 애벌레를 손끝으로 쳐내곤 씩씩거렸다. 애벌레 때문인지 조금 전의 키스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얼굴이 시뻘게져 장하오를 노려봤다. 도술을 부릴 목적이었겠지만 키스하다 장난질 치는 장하오도 등신 같고, 그런 장하오한테 마음이 가는 저 자신도 등신 같았다. 한빈의 표정에 장하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모습에 한빈은 또 한 번 설렜다. 인간의 감정은 정말 어디로 튈 줄 모르는구나. 어이가 없었다.

 

 

 

 

 

 

 

보금자리를 옮겼다 해서, 현실적이지 못한 일들이 제 앞에 쏟아졌다고 해서, 생경한 감정을 느끼고 이에 마음이 동하게 된 사람이 생겼다고 해서 제 일상 패턴에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장소만 조금 바뀌었을 뿐. 장하오의 집에서 일어나 출근을 하고 장하오의 집으로 퇴근하고. 별일이 없으면 같이 저녁을 먹고, 장하오가 일 때문에 집에 없는 날엔 예전처럼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

일상 패턴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신기하게도 한빈은 매우 다른 일상을 사는 것만 같았다. 장하오의 말에 따르면 족자에서 탈출한 요괴 수는 총 일곱. 둘을 퇴치했으니 이제 다섯이 남았다. 출근할 땐 장하오가 데려다 주니 다행이었지만 퇴근길이 문제였다. 장하오가 없는 새 요괴가 나타날까 봐 매일 두려웠다. 무사히 집에 도착해 장하오의 얼굴을 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이유는 첫째, 안도감이 들어서. 둘째, 장하오를 봐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할 사람이 있다는 것도 한빈에겐 어색했다. 잠자리에 들 때 옆에 누군가 누워 있다는 것도 한빈에겐 굉장히 낯선 경험이었다. 심지어 그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있는 와중이라, 한빈은 잠도 쉽게 들 수 없었다.

그렇게 새벽에 장하오의 얼굴을 훔쳐본 게 몇 번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인기척 탓에 장하오가 눈을 뜨는 날이면, 한빈은 밀려오는 잠기운 탓인지, 아니면 장하오와 눈만 마주치면 맥락 없이 요동치는 이 심장 탓인지 제멋대로 말을 내뱉어버린다.

 

바다가 보고 싶어요.”

 

이 새벽에 웬 바다냐 묻는 말엔 그냥요.” 라는 대답으로 단정했다. 그 어떠한 일이든지 간에 이유로서 성립 가능한 이 말은 이 새벽에 장하오까지 납득시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키스에 한빈은 눈을 감고 장하오를 끌어안고 싶은 것을 꾹 참아낸다. 곧이어 들리는 바닷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곤 했다. 가끔 바닷소리가 들린 지 꽤 됐음에도 떨어지지 않는 입술에 숨이 차 잠들기 버거운 날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반복되고, 가끔 마주치는 요괴는 장하오와 함께 퇴치했다. 그렇게 요괴를 한 셋 더 퇴치했을 때쯤, 한빈은 퇴근길에 괴상한 것을 만난다.

한빈의 밑으로 들어온 후배 직원의 실수로 야근을 피할 수 없었던 날이었다. 장하오도 일이 있어 늦게 귀가한다 했었으니 굳이 칼퇴근을 고집할 필요도 없긴 했다. 그렇게 후배 직원과 머리까지 맞대며 일을 마무리하고, 맥주 한 잔 하고 가자는 말은 싹 무시한 채 한빈은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왔다. 가을이 벌써 다 지나갔나. 시린 손을 두꺼운 겉옷 주머니에 넣었다. 시간은 열한 시. 몇 시간 후면 다시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부터 나왔다.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장하오에게 와 있는 부재중 전화 세 통. 반가운 마음에 곧장 콜 백을 하려다 멈칫한다. 야근해서 예민한 탓인지, 새삼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거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 내 집이 요괴 중 몇에게 노출되었기 때문에. 장하오가 도술을 부려 요괴를 퇴치하려면 내가 옆에 있어야 해서. 일없는 날 매일 같이 밥을 먹고 노는 이유는, 같이 사니까. 새벽에 깼을 때 입을 맞추는 이유는, 내가 바다를 보고 싶어 해서?

아니, 내가 그 사람과 닮아서겠지. 한빈은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던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 사람의 대체품으로서 장하오의 옆에 붙어 있는 건데도 마냥 좋아? 마냥 장하오가 좋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 바보 같은 대답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글쎄, 좋은 것 같아. 그래서 바보 같다는 거야, 내가.

바보 같은 저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장하오의 부재중 전화를 무시하는 것, 고작 이런 것밖에 안 됐다. 물론 내일 새벽에도 눈을 뜨게 되면 되지도 않는 이유를 들먹이며 입 맞춰 달라 하겠지만.

안 그래도 일 많이 해서 머리 아파 죽겠는데, 생각들은 복잡하게 뒤엉켜 머릿속을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엉킨 생각들을 하나하나 풀어내는 동안 한빈은 장하오의 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부는 거센 바람에 다리를 휘청였다. 눈을 꾹 감고 버티고 서려 했으나 저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아야……. 엉덩이 윗부분을 손으로 문지르다 보니 매섭게 불던 바람이 금세 멎었다. 이게 뭐야. 단 몇 초 안에 일어난 일에 한빈은 어안이 벙벙한지 눈만 끔벅거렸다. 아직도 허공에 먼지인지 뭔지, 뿌연 공기가 가득한데. 한빈은 다시 일어나야 한단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앞만 쳐다봤다. 만약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면 금방 현실을 인지하고 일어났을 것이다. 한빈의 눈에 무언가 보이는 것이, 오히려 한빈의 행동을 굼뜨게 했다.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그 무언가를 주시했다. 보이지 않아 실눈까지 떠가며 집중했다. 저벅, , 저벅, . 한빈에게 다가오는 그 무언가에선 발소리와 함께 정체불명의 소리가 났다. 몸이 굳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모습을 드러낸 그것의 외모는 꽤 흉측했다.

동물의 얼굴을 했으나 사람의 몸을 가진 것. 그것들의 진짜 모습이라고 장하오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온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실제 모습을 볼 리 없으니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씨발, 없긴 뭐가 없어. 있잖아. 발소리와 함께 들렸던 정체불명의 소리가 그것의 꼬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한빈은 기절할 뻔했다.

어떻게 온 거지. 장하오가 이제 도술을 부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왜 온 거지. 장하오 말론, 요괴들은 인간이 아니므로,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므로 통용되는 상식선을 벗어나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굳이 이해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그러니 한빈의 의문은 풀리지 못한 채 바닥으로 내던져질 수밖에 없었다. 몸도 같이.

 

!”

 

그것의 머리에 치여 몇 미터는 날아간 것 같다. 다행히 낮게 날아 심각한 부상은 얻지 않은 것 같았지만 팔이 제대로 쓸려 찢어진 옷 사이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보자마자 일어나서 도망갔어야 했는데. 이제라도 도망가고자 일어서려는데 요괴가 제 앞으로 바짝 다가오는 것이 더 빨랐다.

 

호오, 천영의 제자가 아닌가.”

천영 댁에 머물던 자가 아닌가.’

 

그때 요괴도 천영이라는 자를 언급했었다. 천영의 제자, 천영 댁에 머물던 자. 그자가 성생이구나. 한빈은 이를 으득 갈았다. 긁힌 팔이 따가웠다.

 

내 분명 족자에 갇히기 전, 천영 손에 네놈이 죽는 것을 보았는데.”

?”

장하오에게 정이 남아 일을 그르친 죄지. , 기억이 나지 않나 보군.”

 

, 어쨌거나 천영 뜻대로 장하오는 족자에 갇히게 됐지만. 천영이라는 자는 장하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오백 년 전, 마을에 유명세를 떨쳤던 도사 중 제일 망나니 도사였다고. 도사로서 부끄러운 짓만 골라 하던 파렴치한 인간이었다고. 족자에 갇히게 된 것도 천영과 신선의 짓이었다고. 허나 성생의 이야기는 따로 들은 바가 없었다.

장하오가 족자에 갇히게 된 배후에 성생이 있었던 걸까. 그래서 처음 봤을 때 그 눈이 그리 매서웠던 걸까. 한빈이 말을 잃고 그저 허공만 바라보자 요괴가 허리까지 꺾어대며 웃었다. 그놈의 정, 그놈의 정.

 

, 나도 장하오 그놈 손에 죽은 친구들한테 정이 남았거든.”

…….”

복수는 하고 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장하오는 어디 있는 것이냐.

요괴들한테서 솟구치던 기세다. 이젠 좀 익숙해져 그 소리는 귀만 틀어막는 정도로 버틸 수 있었으나, 한빈은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였다.

처음 요괴를 혼자 마주했을 때, 제게 해한 적은 없었다. 그 이후로 요괴들을 만날 때도 매일 함께 있었던 장하오 덕에 몸에 상처를 입진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통이 상당했다. 고통이 커질수록 두려움은 온몸에 퍼졌다. 도사님, 어디 있어. 요괴가 찾고 있는 게 장하오인 것을 알면서도 장하오를 찾았다. 사리 분별이 안 됐다.

 

어허, 죄 없는 백성을 건드리고 있다니.”

……장하오.”

참으로, ‘요괴답구나.”

 

양반은 못 되네. 이제 일을 막 마치고 온 것 같았다. 장하오를 보자마자 한빈은 안도감이 들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거나 도술로 요괴를 퇴치하려면 장하오의 곁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장하오, 요괴, . 장하오에게 가려면 요괴를 지나쳐야 했다. 요괴는 이미 장하오에게 신경이 쏠린 듯했다.

장하오가 한빈에게 신호했다. 말이 신호지, 그냥 도망가라는 손짓이었다. 나 도망가면 그쪽은 어쩔 건데. 한빈은 주변을 살폈다. 요괴를 유인할 만한 게 필요했다.

사각 원기둥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손에 들 수 있을 만큼의 무게였으나 적어도 심기는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요괴가 달리기 시작했다. 무서운 속도다. 장하오 역시 반대편으로 달리는 듯했다. 멍청이 도사, 도망치는 건 거의 탑 급이네. 한빈이 표지판을 들고 요괴 뒤를 따라 달렸다. 이미 거리가 멀어진 뒤라 따라잡기는 버거웠다.

!

 

…….”

 

명중. 저 요괴 대가리 속은 비어 있나, 텅 소리가 나네. 요괴가 멈췄다. 제 몸의 덩치 탓인지 멈춘 뒤에도 한참을 앞으로 밀렸다. 한빈이 손뼉을 두 번 쳤다. 장하오는 갑작스러운 한빈의 행동에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 , 거기 있어. 도사님이 움직이면 계획 틀어져. 요괴가 고개를 돌려 한빈을 쳐다봤다. 그와 동시에 한빈이 뒤를 돌아 달렸다. 요괴는 기괴한 목소리로 포효하며 한빈을 쫓았다.

요괴가 한빈을 쫓는다. 저 속도면 따라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장하오가 한빈을 쫓는 요괴를 쫓았다. 부적만 있었어도, 부적만 있었어도.

 

부적을 쓰는 우도방이 아직도?’

네가 최고의 도사가 될 수 있을 줄 아는 것이냐.’

 

홍산 도사의 가르침 대로 마음을 진작 비웠었더라면, 마음을 비우고 부적 없이 도술을 부릴 수 있었더라면. 장하오는 이를 으득 갈았다. 차라리 도술을 못 썼더라면. 도술을 쓰는 데 한빈을 끌어들이지 않았었더라면. 한빈에게 접근을 하는 게 아니었어. 아니, 애초에 성생에게 접근한 게 문제였나. 다리가 후들거렸다. 최대한으로 달리고 있는데 다리가 말을 듣질 않는다. 장하오는 바닥을 보고 벅찬 숨을 고르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빈이 제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다시 돌아오고 있는 거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장하오는 한빈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빈의 계획은 단순했다. 요괴를 제 쪽으로 유인한 다음에, 갑작스레 유턴해서 요괴를 따돌리고 장하오에게로 가는 것. 표지판으로 요괴의 대가리를 맞추었을 때 한참을 앞으로 밀려서 멈추는 것을 보고 성공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달리다가, 따라 잡히기 직전 몸을 돌렸다. 단 삼 초만 더 있었다면 몸통 박치기를 할 뻔했다. 몸을 숙여 손으로 땅을 짚었다. 어느 정도 관성의 힘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달려나갔다. 그에 비해 요괴는 저 멀리까지 밀려갔다. 이제 요괴가 다시 제게 오기 전까지 장하오와 입술을 맞추기만 하면 된다. 와중에 제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장하오를 보면서 안도감이 들었다. 요괴를 마주했을 때의 두려움과 긴장감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지고 없었다. 장하오가 나타나고 나서부터 그랬던 것 같다.

장하오가 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져 간다. 한빈이 두 팔을 벌렸다. 장하오의 손을 지나쳐 곧장 장하오의 목을 감싸 안았다. 아니, 감싸 안기 전에 입술부터 맞댔다.

이번엔 관성의 힘을 막지 못했다. 장하오는 그대로 한빈을 안고 뒤로 넘어지며 첫 획을 그었다.

 

 

 

 

 

 

 

많이 아프오?”

, 조금……. !”

아프면 말하시오.”

아파, 아파요. ……!”

참으시오.”

 

아프면 말하라며. 죽을 맛이었다. 상처 소독은 혼자 많이 해 봤던 것이라 제 전문이라더니, 그냥 냅다 들이붓는 정도였다. 그러곤 붕대로 감는데 너무 세게 감아 상처가 더 벌어지는 기분이었다. 아프다고! 냅다 소리 질렀더니 하하, 실없는 웃음을 또 뱉어낸다. 입술은 다 터져서 뭐가 그리 좋다고 웃는 건지.

 

도사님, 입술 안 아파요?”

아프지.”

……미안해요.”

내 이리 격렬한 입맞춤은 또 처음이었소.”

 

치아 안 부러진 게 다행이지. 능청스레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 게 괜히 얄미웠다. 아니, 마음이 급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그래도 저 아니었으면 도사님 죽을 목숨이었어요. 뾰로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대가 내 생명의 은인이오. 느끼한 말투에 한빈이 진저리를 친다. 하하. 이번엔 웃다가 입술의 상처가 벌어졌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나도 발라 주시오.”

연고 줘 봐요.”

 

면봉은 없는데. 별수 없이 한빈은 제 약지 손가락에 연고를 짜냈다. 그러곤 장하오의 입술 상처에 대고 톡톡 두들겼다. 따가워요? 제 물음에 장하오가 고개를 젓는다. 이번엔 살살 문질렀다. 미끄럽게 닿는 표면에 괜스레 침을 꿀꺽 삼켰다. 손가락에 장하오의 아랫입술이 자꾸만 닿았다.

 

……됐어요.”

끝이오?”

 

, 칼에 찔린 상처도 아닌데 이 정도로 끝나죠. 한빈은 제 팔에 감긴 붕대를 여러 번 매만지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침대에 올라갔다. 정자세로 누우니 붕대 감은 팔이 거슬려 다친 팔의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장하오도 불을 끄고 한빈을 따라 침대에 누웠다. 침묵이 이어졌다. 요괴를 퇴치하고 집에 돌아오니 잘 시간을 훌쩍 넘긴 탓에 잠이 쏟아질 만도 한데, 한빈은 잠들 수 없었다.

요괴 퇴치라는 게, 워낙 현실 세계에 있을 만한 일은 아니니까 정확한 난이도를 예상할 수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처음엔 쉬운 일은 아니겠거니, 위험할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그 정도로 생각하다가 장하오와 함께 지내면서 조금 안일해졌었다. 정말 장하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죽은 목숨이었을지도 모른다. 목 뒤로 올라오는 소름에 한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볼을 감싸는 손길이 느껴진다.

 

……춥소?”

 

볼을 지나 목덜미를 만지는 손길에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불 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니 평소보다 가까이 다가와 있다.

처음 입을 맞추고 나서 새벽, 그때 이후로 안긴 적이 없다. 입은 수도 없이 맞추었으나 따듯한 품을 다시 느낀 적이 없었다. 안기고 싶어……. 한빈은 장하오의 가슴팍을 빤히 보다 용기 내 얼굴을 들이밀었다. 장하오가 기다렸다는 듯이 제 목 아래로 팔을 끼운다. 다른 팔론 등이 아닌 허리를 토닥인다. 다친 팔을 건드리진 않을까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몇 분을 넘게 조용히 있었다. 장하오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조금은 가빠진 제 숨을 갈무리하려 애쓰며. 품에 안기니 또다시 그때의 감정이 휘몰아친다. 슬프다. 사무치는 슬픔에 잠식되지 않으려 고개를 흔들었다. 은은한 바디로션 향이 코끝에 맴돈다. 한빈은 고개를 들어 장하오의 얼굴을 보고자 했다.

 

…….”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마주친 눈을 애써 피하진 않았다. 곧이어 장하오가 한빈의 뒤통수를 받쳐 감쌌다. 몸을 살짝 떨어뜨린 한빈은 장하오의 옷자락을 감싸 쥐었다.

 

바다 보고 싶소?”

 

이 눈빛…….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입을 맞추면 제대로 마주하지 못할 것 같았다. 최대한 눈에 담고 가슴에 안고 싶었다. 어두운 공간 덕에 더욱 깊은 감정이 묻어나는 느낌이었다. 그 사람을 보고 있는 거겠지. 알고 있음에도 피하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런 한빈의 마음이 무색하게도 장하오가 먼저 다가왔다. 입술이 닿음과 동시에 한빈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 ……. 눕기 전 장하오의 입술에 발랐던 연고에서 쓴맛이 났다. 비릿한 피 맛도 나는 것 같고. , , 조용한 공간에 마찰음만 울려 퍼졌다. 뱃속이 간지러웠다. 몸이라도 떼어내려 하니 장하오가 다시 붙여 온다. 버거웠다. 정말, 평소보다 버거웠다.

입술을 뗄 생각이 없는 건가. 졸지에 한빈이 눕고, 장하오가 그 위에 올라타 키스를 하는 꼴이었다. 한빈은 장하오의 어깨를 잡고 그저 받아내는 데 열중했다. 귓가에선 새들이 지저귄다. 계곡물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풀 냄새가 난다. 바다를 거부하니 산을 보여 준 거구나. 일차원적인 사고에 웃음이 났다.

그런데 진짜 언제까지. 벌어진 다리를 어쩔 줄을 몰랐다. 닿은 몸 구석구석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하도 아랫입술을 빨아대서 느낌이 덜했다. 부었나. 감각이 무뎌지니 달아오른 다른 곳이 빨리는 기분이었다. 얕게 앓았다. 제 목소리를 들은 장하오가 입술을 살짝 떼더니 다시 맞춘다. 온몸이 예민했다. 입술의 감각이 다시 살아났다. 몸을 움츠렸다. 그럴수록 장하오에게 밀착됐다.

제 입안을 문질러대는 혀 때문에, 맞닿은 몸 때문에, 장하오라는 존재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부적을 그릴 생각도 없는 건지 한빈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 잠깐만. 다급히 장하오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입술이 떨어진다.

 

산이 싫소?”

 

바다였으면 좋겠소? 말만 하시오. 그러곤 다시 입 맞춘다. 말만 하라며. 대답도 못 하게. 아니, 거기 너무 이상한데. 제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더듬으니 야릇한 감각이 올랐다. 입술을 벌려 숨을 뱉었다. 그 사이 장하오가 혀를 들이밀어 문제였다.

 

……!”

 

상처가 눌렸다. 바늘에 찔린 것처럼 찰나에 온 고통에 한빈은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장하오를 밀었다. 괜찮소? 그제야 입술을 떼고 제 눈을 바라본다.

, 감정에 잠식될 것 같다. 평생을 그리워한 사람을 마주하면 이런 기분일 것만 같았다. 한빈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장하오의 눈빛을 눈에 담았다. 상처가 아렸다. 도술로 상처를 아물게 하진 못하는 걸까.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도술로 상처를 낫게 할 순 없어요?”

 

순간 장하오의 눈빛이 흔들렸다.

잠길 만큼 넘쳐 흐르던 감정이 서서히 사그라진다. 눈빛이 흐려진다. 장하오의 동공이 떨렸다. 말실수한 건가. 한빈은 장하오의 표정을 계속해서 살폈다.

 

도술로 사람을 고칠 순 없습니까?’

 

그제야 장하오의 머릿속에 한 사람과의 기억이 스친다.

 

도술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방금까지 정신없이 한빈에게 달려들었는데, 몸이 고장 난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한빈의 눈만 번갈아 보며 숨을 내쉬었다. 도술은……. 다시 한 번 뱉어 봐도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 지금 뭐 한 거지. 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성한빈과 입 맞추었잖아. ? 도술을 쓰기 위해? 도술을 쓰기 위함이라 하기엔 너무 오랫동안 입술을 탐했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니, 그렇다 할 이유가 없었다. 입 맞추고 싶었다. 성한빈과 닿고 싶었다. 그래서 입을 맞추었고, 몸을 더듬었고, 한빈을 안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그러는 동안 장하오는 성생을 단 한 순간에도 떠올리지 못했다. 생각나지 않았다. 한빈만을 보며, 한빈만을 탐했다. 괜찮아요? 한빈의 목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누워 한빈을 끌어안았다. 순순히 안기는 한빈의 모습에 장하오는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시끄러운 와중에 한빈의 숨소리는 귀에 담으려 애썼다. 복잡했다. 성생을 향한 마음이라 확신했던 것이 무너져 내렸다.

 

 

 

* * *

 

 

 

도술로 사람을 고칠 순 없습니까?”

 

장하오의 팔을 베고 누워 있던 성생이 겨우 뱉어낸 말이었다. 길게 늘여진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던 장하오가 반문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오. 성생이 왜 이런 말을 꺼낸 건진 잘 알고 있다. 이전 성생을 처음 봤을 때 들었던 말이 있었기에. 아비 혹은 어미가 몸이 편찮아 의원들과 도사들에게 자문을 구하러 다녔다고. 성생은 한참을 말없이 장하오의 품에 안겨만 있었다.

 

고칠 수 있으리라 믿어요.”

 

그러고는 꾹꾹, 또다시 이를 악문다. 어허. 장하오의 손가락이 성생의 입술께에 닿았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성생이 몸을 돌렸다. 등을 보이고 눕자 장하오가 제 가슴팍을 바짝 붙인다. 품에 성생을 가둔 꼴이 됐다.

 

도술은 요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인데.”

 

성생의 숨소리가 찰나에 멈추었다.

 

명운을 건드릴 순 없지 않겠소.”

스승님께선 가능하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자가 망나니라는 것이지.”

망나니는 도사님이시지 않습니까.”

 

품속에서 벗어난 성생이 자리에 앉아 장하오를 노려본다. 저 역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아 그제야 눈높이 좀 맞추었건만 그땐 또 아예 일어서버린다. 가십시오. 옆에 두었던 갓을 장하오에게로 던졌다.

 

성생.”

망나니, 엉터리 도사는 도사님이십니다.”

이리 오시오.”

스승님께선 제 아비를 고쳐 주신다 하셨습니다.”

일단 앉아서 얘기를,”

얼른 나가십시오!”

 

!

성생의 마지막 외침은 절규에 가까웠다. 열린 문틈으론 천영과 신선들, 그리고 성생과 함께 도사의 길을 배우고 있는 천영의 제자 두 명이 서 있었다. 제자 둘은 바로 장하오에게로 향했다. 성생은 이를 아득 물었다. 저도 모르게 든 팔은 무엇 하나 막지 못한 채 허공만 휘저을 뿐이었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뒤통수를 강타하는 둔탁한 물체에 장하오는 앞으로 고꾸라졌고,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는 게 유일하게 장하오가 할 수 있는 거였다. 원래라면 부적 주머니가 채워져 있어야 할 곳인데, 지금은 성생의 침구 밑에 깔려 있으니 잡히는 게 없을 리 없었다.

.

고작 그 감정 하나 때문에 돌아간 먼 길이 막힌 길이었음을, 모든 것이 망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장하오는 그제야 알아채고 만다.

 

 

 

* * *

 

 

 

눈을 떴다. 식은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얼굴에 뒤덮여 있다. 손발 묶인 것 없이 푹신한 침대에 편히 누워 있다. 깨질 듯한 머리의 통증도, 정인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게 했던 피도 지금은 없다. 반드시 뛰어넘어야 하는 천영도, 최고의 도사가 되는 데 필요한 검과 거울도 지금은 없다.

그리고 그대도 없다.

장하오는 고개를 돌려 한빈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아닌 건 알고 있다. 신선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 오백 년을 살 수 있을 리 없다. 반듯한 자세로, 마치 죽은 듯이 조용히 잠을 자는 것조차 성생 같지만, 당연히 아닌 건 알고 있다. 닿을 때 부적을 그려 도술을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무리 한빈이 성생의 환생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성한빈은 성생이 아니다. 그럼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은 누구를 향한 감정인 걸까.

우응.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잠에서 깬 한빈이 떠지지 않는 눈을 부러 치켜뜨며 장하오를 바라봤다. 뭐 해요? 잠길 대로 잠겨 몇 갈래로 갈라지는 목소리가 장하오의 귀에 박혔다. 몸을 돌려 한빈의 가슴팍에 턱을 대고 누웠다. 마주한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 한빈이 손을 들어 장하오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식은땀 탓에 젖어 있었다.

 

또 꿈꿨네.”

 

그 사람 꿈? 한빈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짓말. 맞으면서. 이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잘 자야 하는데.”

…….”

그건 악몽도 아니라서 악몽 꾸지 말라는 말도 안 통할 것 아니에요.”

 

그 사람이 나오는데 그게 어떻게 악몽이야. 그렇죠? 한빈은 장하오의 머리를 쓰다듬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도 안 꿨으면 좋겠다. 그냥 푹 잤으면 좋겠다. 한빈은 입을 꾹 닫았다. 말해 봤자 돌아오는 건 침묵일 것 같아서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장하오의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던 그 순간을 자꾸만 되풀이하여 보여 주고 있었다. 그 꿈만 꾸면 숨을 헐떡이고 식은땀이 흐르는 게, 분명 악몽이 맞았다.

하지만 성생을 그 악몽에서밖에 볼 수 없어서. 장하오는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막혀 와도 좋았다. 사랑 뒤 끔찍한 배후를 알게 되어 배신감을 느꼈음에도, 처절한 표정으로 제게 이해를 바라는 말을 뱉어내는 성생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성생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 연모하던, 연모하고 있는 정인을 볼 수 있어서 죽도록 힘들어도 죽을 만큼 좋았다. 그러므로 이 악몽은 장하오에게 있어서 악몽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키스하면서도 내가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게 맞나 싶었다. 좀 있으면 난 족자에 갇힐 테고, 성생은 천영 손에 죽을 텐데. 그렇게 성생을 놓치고 족자에 갇히기 직전 꿈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지금처럼 한빈을 보는 순간, 느껴 보지 못한 복잡한 감정이 온몸 모든 신경에 퍼진다.

한빈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저 역시 한빈을 향한 감정이 단순히 정의할 수 있는 감정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빈이 성생을 닮아서 마음이 동하는 걸까. 이거 하나만 몰랐다. 알 수 없는 제 감정에 꽤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런 상태가 짧지 않게 지속되다 다시금 꿈속에서 성생을 마주하는 순간,

 

도사님을 연모합니다…….’

 

제발 나를 놓고, 주저 없이 나를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으면 했다.

꿈속에 있을 땐 이게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저 다시 오백 년 전 그때가 되풀이될 뿐이다. 그럼에도 감정은 현재의 감정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처절하게 우는 성생을 보며, 연모의 감정보다 동정의 감정이 더 크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악몽이라…….”

 

악몽이 맞다. 더는 이 꿈을 꾸고 싶지 않았다.

성생을 미워하게 된 건 아니다. 성생이 싫어진 게 아니다. 다른 이를 품음으로써 차지하던 공간이 작아진 것뿐이다. 그 다른 이가 차지한 마음이 너무 커져서 성생을 기억하고 그릴 만큼의 여력이 되지 않은 것뿐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다시금 성생을 만났을 때, 변화된 마음은 오롯이 미안한 감정으로 남아 장하오를 괴롭혔다. 장하오가 원한 게 아니었다. 장하오에겐 여전히 성생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왜…….

한빈은 언제 다시 잠든 건지 반복적인 숨소리만 뱉어내고 있었다. 긴 속눈썹과 코 밑의 점, 얇고 붉은 입술까지 성생과 다를 게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사실조차 장하오를 괴롭혔다.

그리고 또다시 그 꿈을 꾼 날, 장하오는 성생을 보며 한빈을 떠올렸다.

 

 

 

 

 

 

 

장하오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무언가 간절한 사람들의 돈을 뜯는 건 나쁘다는 한빈의 말 때문이었다. 그 대신 다른 일을 신선이 추천해 주기로 했다. 한빈은 장하오의 가짜 신분증을 보며 감탄했다. 가짜 신분증 상으론 저보다 딱 한 살 많았다. 족자에 다시 갇히거나 할 일이 없으면 이대로 같이 늙어가겠지. 한빈은 괜스레 가슴이 저려왔다. 첫 만남은 그렇게 거지 같았는데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참 묘했다.

일을 그만두기 전 마지막 일이었다. 장하오는 볼캡을 눌러 썼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차분해진 분위기다. 예전엔 먼저 장난도 치고 티격태격 말다툼도 했었는데. 혹시 장하오를 향한 제 마음에 부담을 느끼는 걸까. 한빈이 장하오에게 다가섰다. 신발을 다 신은 장하오가 허리를 세워 한빈과 눈을 맞추었다. 평소와 다른 오묘한 텐션을 느끼곤 턱에 힘이 들어갔다.

 

몇 시에 와요?”

자정 전엔 올 것 같소.”

퇴근 괜히 빨리했네.”

하하.”

 

그래도 내일 주말이니까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손을 흔들어 보이자 장하오의 시선 끝이 손을 향한다. 그러곤 다시 한빈의 얼굴.

 

……신선에게 연락이 왔소.”

무슨 연락이요?”

요괴의 수는 총 일곱. 지금까지 그대와 내가 잡은 요괴 수가 총 여섯이었지. 이제 하나 남았다고.”

…….”

여섯이 맞다더군. 족자 수를 잘못 세었다고.”

…….”

이제 그대가 나를 돕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오.”

……나가라는 말이죠?”

그리 말하면 섭섭한데.”

근데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지금 누가 섭섭한 상황인데. 눈이 보이지 않는다. 저 볼캡을 벗겨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와중에 장하오가 한빈을 끌어안는다. 맞닿는 몸 덕에 편안해진다. 잠시지만 눈을 감았다. 장하오와 손을 잡을 때, 안고 있을 때, 키스할 때. 평온함을 느낀다. 복잡한 생각들이 한순간에 정리되는 기분이다.

그건 장하오도 마찬가지였다.

 

다녀와서 다시 얘기하는 걸로 하지.”

기다릴게요.”

 

한빈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젠 한빈의 얼굴을 봐도 성생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끌어안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건가. 아니, 더는 정리되면 안 된다.

내가 그대를 어찌 잊겠는가. 장하오는 애써 성생을 기억했다.

 

 

 

 

장하오가 나가고 한빈은 짐 정리를 시작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현관은 신선 돈으로 고쳤고, 이젠 요괴도 없으니 여기 더는 있을 이유가 없었다. 캐리어 꺼낼 것 없이 짐은 거의 없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신선이었다. 이전에 장하오가 알려 준 번호를 저장해 뒀었는데, 장하오가 아닌 제게 전화가 온 건 처음이라 화면에 뜬 이름에 의문이 들었다. ? 그렇다고 무시할 정도로 뭐가 있었던 건 또 아니었으니 몇 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 할 얘기가 있다고 잠시 오라는 말에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전화로 말씀 주시죠.”

전화로 하긴 힘들어. , 장하오 이야기야. 주소는 내가 문자로 넣어 줄게.

 

급하니까 지금 바로 와. 신선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마자 통화는 종료됐다. 어이가 없어서. 한빈도 장하오와 지내면서 들은 게 있으니 신선을 좋게 대하진 못했다. 어쨌거나 장하오를 가둔 장본인이니까. 장하오 옆에 있는 것도 뻔뻔하다고 여겼다. 가지 말까. 텅 빈 집을 한 번 둘러보았다. 장하오가 올 때까지 여기에 혼자 있으면 불쾌한 감정의 늪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혹시 몰라 운동화 끈을 질끈 묶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중년의 남성 한 분이 앉아 있었다. 신선이라 해서 흰 수염 치렁치렁한 분일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옆집 사는 아저씨 느낌이었다.

신선은 한빈을 보고 몇 초 동안을 가만히 있다가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 한빈의 앞으로 다가갔다.

 

한빈 군, 반가워.”

…….”

똑같네, 똑같아…….”

 

왜 성생이라고 했는지 알겠어. 왜 그런 목소리로 성생을 찾았다고……. 감탄만 연발하는 신선 앞에서 한빈의 기분은 더더욱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 일단 앉지.”

아니요. 금방 가야 해서요.”

뭐 그리 급해. 일단 앉아.”

 

한빈은 마지못해 테이블 앞 소파에 앉았다. 신선 역시 맞은편에 앉으면서도 여전히 한빈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성생의 초상화가 있었으면 한빈 군 보여 주는 건데. 정말 똑같아. 굳이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라 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신선이 아차 싶은 표정과 함께 일어나더니 자리 옆 상자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족자였다. 한빈의 앞에 앉아 족자를 펴냈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한빈은 발끝부터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게 어떤 족자인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았다.

 

오백 년 동안 장하오가 갇혀 있었던 족자야.”

……이걸 저한테 왜 보여 주시죠.”

둘이 몇 개월 붙어 있으면서 정도 붙고 했을 텐데. 한빈 군, 장하오 쉽게 믿으면 안 돼.”

…….”

불쌍한 것들 등쳐먹고 돈 뜯어낸 게 걔야.”

 

나는 하지 말자고 말렸어어! 혀가 길다. 한빈은 테이블 밑으로 말아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장하오의 일에 신선이 전반적으로 관여되어 있다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장하오와 함께 지내다 보면 알 수밖에 없었다. 신선은 한빈의 표정을 살피더니 이 정돈 예상한 듯 혀를 한 번 찼다.

 

감히 넘겨짚긴 좀 그렇지만…….”

…….”

생각보다 깊은 것 같아, 둘이.”

……저 가 볼게요.”

장하오가 자네 이야기를 많이 꺼내. 그리고 뭔가 좀 달라졌어. 자네한테 마음이 동한다는 거야.”

…….”

그런데 장하오는 자네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그랬거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최면에 걸리는 것만 같았다.

 

첫눈에 반한다는 거, 있을 수 있지. 그런데 장하오는 그럴 놈이 아니야.”

…….”

오백 년 전에도 한 사람만 사랑했고, 오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이만 연모하고 있어.”

…….”

장하오는 한빈 군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건 알고 있지?

한빈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단 한 번도 사랑을 얘기한 적이 없었다. 저 또한 그랬다. 애초에 안 좋게 만나서 요괴 퇴치 목적으로 같이 사는 건데, 좋아해 사랑해 이딴 말 지껄이며 연애나 할 판국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빈은 제 마음 한번 말하지 못했다. 장하오의 마음을 물어본 적도 없었다.

한빈도 알고 있었다. 그냥 스승이 아니라는 거. 생각보다 그 마음의 깊이는 감히 재단해 볼 정도로 얕지 않다는 거. 처음 봤을 때부터 눈빛에 보였다. 볼캡에 가려져 정확히 보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 눈빛은 나를 향하고 있던 게 아니었으니까 내게 보일 리 없었다.

그래서 물어보지 않았다. 묻기 두려웠다. 정말로 내가 아닌 그 사람을 떠올렸던 걸까 봐. 내가 아닌 그 사람을 떠올리며 나와 함께했던 걸까 봐. 내가 평생 그 사람의 대체품으로서만 장하오 옆에 붙어 있게 될까 봐. 그건 너무 비참했다. 장하오에게만큼은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왜 이 사람한테 상처를 받아야 하는 거지. 내가 왜 장하오도 아닌 제삼자의 말에 감정이 송두리째 휘둘려야 하는 거지. 어금니를 콱 물곤 생각을 정리했다. 갑자기 연고도 없는 저를 불러 뜬금없이 장하오와의 관계를 와해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신선과 다시 눈을 맞추었다. 그새 충혈된 건지 한빈의 눈동자는 벌게져 있었다.

 

……혹시 몰랐나? 상처가 됐다면 미안한데, 그래도 미리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잖아.”

 

신선의 표정이 한껏 가벼워졌다. 한빈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쾌함을 애써 삼켰다.

 

……있지, 이제 요괴가 다 사라졌어. 장하오와 자네 덕이야.”

…….”

이제 장하오는 뭘 할 수 있을까?”

…….”

이제 더는 목적도 없는데, 뭘 하기나 할까?”

 

요괴 없는 이 세상에 도술을 부리는 도사가 더 이상 필요나 할까?

신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신선이 먼저 눈길을 돌렸다. 이 세상에 도술을 부리는 도사가 필요나 하겠느냐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사라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선이 장하오랑 연락하는 걸 내가 봤는데. 치가 떨릴 정도로 적대적인 신선의 태도가 점점 이해가 안 갔다. 한빈의 표정이 침착해질수록 신선의 손이 떨렸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신선의 휴대폰 화면이 켜진다. 한자다. 사람의 이름을 왜 한자로 저장해 둔 거지. 한빈의 시선이 휴대폰 화면에 닿은 것을 인지한 건지 신선이 급히 휴대폰을 제 잠바 주머니에 넣었다. 까딱, 눈썹을 들썩였다. 동시에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봤다. 열 시가 넘었다. 장하오가 오려면 두 시간 남짓 남은 건데, 그 전에 얼른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다.

그런데, 장하오는 지금 누구와 있는 거지?

전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분명 굿을 나갈 땐 신선과 동행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신선은 제 앞에 앉아 있으며, 초면이다. 장하오를 처음 봤을 때, 그러니까 장하오가 제집에서 굿을 했을 때 제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오지 않았다.

하나가 아니다. 신선이 한 명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럼 다른 신선이 장하오와 있을 테고, 이 사람은 왜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걸까.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불안감에 치가 떨렸다. 억지로 정신을 부여잡으려니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그러게요. 뭘 할 수나 있을까요?”

…….”

깊은 사이로 발전하려던 건 맞아요. 도술 쓰는 게 워낙 신기해서, 그걸로 나중에 사업이나 하나 하면 좋을 것 같더라고요.”

, 사업 아이템으론 나쁘지 않지.”

 

당장 저 신선이란 작자의 목을 잡아 비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영 바보 같아서요. 옛사람한테 집착하는 것도 이젠 꼴 보기 싫고.”

 

이 사람은 장하오에게 왜 이리 잔인하게 구는 걸까. 한빈은 그렇게 생각하며 잔인한 말을 잘도 내뱉었다.

 

……다시 족자에 가둬버리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요.”

내 말이 그 말이야!”

 

그 말을 시작으로 신선의 계획은 손쉽게 들을 수 있었다. 도술을 부리는 도사, 그것도 장하오 같은 망나니 도사는 이 세상에 풀어 둘 수 없다는 것이 신선이 오백 년 전부터 가져온 생각이었다. 오백 년 전, 그렇게 날뛰고 다니던 망나니 도사를 가뒀다가 요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풀어 준 것이고, 그 요괴들을 다 퇴치했으니 다시 가둬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기에 언제 제게 보복을 할 줄 모른다고, 오백 년 전 본인을 가둔 저를 언제 소리 소문 없이 뭉개버릴지 모른다고 침까지 튀겨가며 열변을 토하는 신선을 보며 한빈은 토악질을 할 뻔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이렇게 장황하게 하다니. 되지도 않는 거짓말 한두 마디에 제 속셈을 다 드러내는 것부터가 멍청한 놈이구나 싶었다.

 

이런 말 하긴 좀 미안한데, 나는 한빈 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모르고 좀 묶어 두려 했거든.”

……저를요?”

. , 굳이 안 불렀어도 됐을 것 같긴 하지만. 한빈 군이 장하오의 집에서 나오면 봉인하려고 했지.”

 

그러니까, 여태껏 나를 붙잡고 이간질을 해댄 이유가 다시 장하오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장하오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생각은 짧은 주제에 행동력은 무서울 정도다. 열 시가 넘은 시간. 울리지 않는 휴대폰. 그리고 테이블 한쪽으로 치워져 있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족자. 이걸 다시 꺼내 놓은 이유가 있겠지. 이런 족자를, 그것도 무언가를 봉인할 족자를 요즘 시대에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고로, 장하오는 아직 무사하다. 이 신선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아직은 무사할 것이다. 무사해야만 한다. 아무리 생각이 짧다 한들 사람을 죽이진 않겠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아니야, 원래 바보가 제일 용감하다던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손가락 사이로 느껴졌다. 신선은 가만히 한빈의 행동을 지켜봤다. . 으으. 한빈의 신음에 신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아파? 한빈 군, 왜 그래.

 

망했어요……. 그런 계획이 있었으면 저한테 먼저 공유를 해 주셨어야죠!”

 

하찮은 연기력이라도 구사해야만 도사님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겠어. 한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두운 공간에 성생과 함께 있었다. 손목은 결박된 상태였고 짚더미에 기대 앉혀져 있었다. 피인지 뭔지 모를 액체 탓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가 않았다. 쿨럭. 목이 말라 뱉어낸 기침에 성생이 고개를 돌렸다. 장하오 앞에 무릎 꿇어앉았다.

 

……도사님.”

……부적을 가져다주시오.”

 

성생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어서.”

일장춘몽이라고 하지요.”

…….”

덧없는 이 인생, 정인과 함께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다 명이 다하여 죽으면 그만인 것을.”

…….”

그걸 알고 있음에도 놓기가 힘듭니다…….”

 

저희 아버지 참 불쌍하십니다. 제 스승님께선 제 아비를 불쌍히 여겨 꼭 고쳐 주신다 하셨어요. 이건 그것의 대가입니다. 제가 도사님을 이용했어요. 도사님의 마음을 이용했어요. 제가 도사님을……. 울음을 터뜨린 성생이 장하오의 앞에서 두서없이 말을 내뱉었다. 끔뻑, 끔뻑. 피 때문에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정인의 모습을 눈에 선명히 담을 수 없다는 게 참 한스러웠다.

 

천영을 믿지 마시오.”

도사님을 연모합니다…….”

……부적을 가져다주시오.”

어쩌면 도사님보다 더…….”

 

입술이 맞닿았다. 장하오의 볼을 부여잡은 성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성생의 눈물이 볼에 닿았다. 꼭 제 것처럼 제 볼을 타고 흘렀다. 손목이 묶여 있어 닦아 줄 수가 없었다. 장하오는 눈을 떠 성생의 속눈썹을 응시했다. 첫 입맞춤 때와 같이 눈꺼풀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물자 피가 새었다. 비릿한 맛에 눈썹을 찡그렸다. 눈을 감은 채 다시금 수면 밑으로 잠겨 본다. 검지를 천천히 세웠다. 첫 획을 그었다.

 

정인과 함께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다 명을 다하여 죽으면 그만인 것을.’

 

두 번째 획을 그었다.

 

저희 아버지 참 불쌍하십니다.’

 

세 번째 획, 네 번째 획…….

 

도사님을 연모합니다…….’

 

마지막 획을 긋고 손가락을 조용히 튕겼다. 손목을 굳게 묶어 둔 밧줄이 바스러졌다. 팔을 들어 성생을 끌어안았다. 울음소리가 짙어질수록 혀가 섞이는 소리가 더욱 질척이게 귓가를 울렸다. 더는 부적을 그리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성생의 팔이 제 어깨를 부여잡았다. 밀었다가, 결국엔 세게 때린다. 도사님, 제발.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신선 두 명이 족자를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성생이 장하오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검지 위에 제 검지를 겹친 채 앞뒤로 흔들어댔다. “왜 묶어 두지 않았느냐!” “아니, 분명히 묶어 두었는데.” 천영과 그 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술을 뗀 성생이 장하오에게 소리친다.

 

도사님, 뭐 하고 계십니까!”

 

어서 도술을 부리셔서 도망치십시오! 제 뒤에 천영이 있는 걸 알고 있음에도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질렀다. 천영이 빠르게 다가와 성생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그대의 말대로 일장춘몽이라면, 내 노력하여 최고의 도사가 되는 것보다 정인의 남은 생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게 더 행복하지 않겠소. 그런데 그대가 그리하면 천영이 그대를 가만두지 않을 것 아닌가…….

바보 스승 같으니. 더는 말할 기력도, 버틸 기력도 없었다. 눈앞엔 신선 두 명과 손에 들려 있는 족자. 신선들이 입을 모아 주문 같은 해괴한 문장들을 외었다. 성생이 끝내 기절한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정인의 모습은 썩 보기 좋진 못했다.

 

 

 

* * *

 

 

 

또 그 꿈이다. 장하오는 눈시울이 잔뜩 붉어진 채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광대 옆이 시큰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리려니 그것도 되지 않았다. 손목이 아팠다. 등 뒤로 모인 양 손목은 청테이프로 칭칭 감겨 있었다. 오백 년이 흘렀는데 너희 수법은 달라지지를 않는구나. 장하오는 헛웃음을 쳤다. 주변을 둘러보니 대머리 신선 댁 창고인 듯하다. 굿은 개뿔. 만나자마자 둔탁한 무언가에 맞아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수법이 달라지질 않아……. 그 변함없는 수법에 또 넘어간 저 역시 참 한심하다 느꼈다.

몇 시인지 알 수도 없었다.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돌아간다 하였는데. 와중에 한빈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성생, 성생. 성생을 떠올리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다. 변치 않겠다 하였는데, 내 그 말을 지키지 못한 듯싶소. 마지막 순간이 와서야 인정하고 만다.

성한빈을 사랑하는구나. 성생의 환생이어서가 아니라, 성생과 닮아서가 아니라, 성한빈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된 거로구나. 불쾌한 액체가 볼에 흘렀다. 그때와 다를 게 없었다. 딱 하나 다른 게 있다면, 곁에 성생이 없다. 제 정인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성한빈이 없다. 이번엔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도 못 보게 하는구나. 잔인한 대머리 놈 같으니. 어차피 눈에 담을 사람도 없는데 굳이 눈을 뜨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장하오는 두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한빈을 그렸다.

성생, 그대의 말대로 정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다 명을 다하여 죽으면 그만인 것을. 마음에 다른 이를 품은 까닭인지, 끝내 그런 삶은 내겐 주어지지 않나 보오. 밖에서 타이어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장하오는 다시금 눈을 떴다. 발소리인가. 마지막임을 체감한다.

마음을 온전히 자각하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만약 성한빈이 성생과 닮지 않았다면. 성생의 환생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난 성한빈을 마음에 품었을까. 성한빈을 한평생 그리워할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까. 지금처럼 성한빈을 사랑했을까…….

끼익

 

사랑이라…….”

……도사님.”

 

신선과 동행한 상황이었다. 한빈의 손엔 족자가 들려 있었다. 한빈이 신선의 귀에 무언가 속삭이더니 족자를 건네주었다. 신선은 족자를 건네받곤 어딘가로 향했다. 이곳엔 장하오와 한빈만이 남았다. 문을 닫고 불 스위치를 찾아 손을 더듬었다. 뭐가 그리 급한 건지 몇 번 더듬다 말고는 휴대폰 플래시를 켠다. 장하오를 비추니 눈부신지 인상을 찌푸린다.

신선과 함께, 족자를 들고 이곳에 왔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걸까. 다 알고도 신선과 함께 이곳으로 온 걸까. 저자들과 같은 생각인 걸까. 플래시 너머 한빈의 표정을 살폈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전에 한빈이 먼저 장하오에게로 다가와 앞에 쭈그려 앉았다. 플래시 켠 휴대폰은 옆에 뒤집어 놓았다. 옷소매를 길게 늘이곤 장하오의 이마께에 가져다 댔다. 그대로 닦이는 피에 한빈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신선을 속이는 건 아주 쉬웠다. 신선은 장하오가 어떤 방법으로 도술을 부릴 수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으니. 그저 한빈의 도움을 받아 도술을 쓸 수 있는 것이라고만 알고 있는 신선은, 장하오와 한빈을 일단 떨어뜨리는 게 목표였다. 한빈은 그걸 이용했다. 네가 기껏 생각해서 세운 목표는 너의 계획을 망칠 것이라고.

 

도사님은 제가 그린 부적으로 도술을 쓸 수 있어요. 지금 도사님은 그 부적을 이미 여러 장 가지고 있는 상태고요.’

?’

만약 기절시키셨다거나 재웠다면, 도사님이 깨기 전에 제가 다시 가져올게요. 도사님은 제겐 경계심이 없으시니 만일 일어나셨다 한들 도술을 부리지 않는 이상 제가 뺏어오는 건 쉬울 거예요.’

 

이 말에 의심 하나 없이 저를 장하오가 있는 곳으로 데려올 줄이야. 만일 장하오가 일어나 있지 않았더라면, 신선이 장하오의 몸을 수색해 부적을 찾았을 것이다. 그럼 한빈의 거짓말과 계획은 금방 탄로 났을 테지만, 장하오는 한빈의 바람대로 이미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제가 부적을 가져올게요. 신선에게 속삭이자 알았다며 족자만 건네받고 자리를 피해 줬다. 도술로 사람을 죽이고, 죽인 사실을 은폐하는 방법은 없는 걸까? 신선의 뒷모습을 보며 잠깐 생각하다 이내 제정신으로 돌아온 한빈이 장하오에게 다가간 것이었다.

 

아파요?”

아니.”

도사님.”

.”

신선이랑 이야기하고 왔어요.”

…….”

그러시더라고요. 도사님은 제가 아닌 오백 년 전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라고.”

 

장하오는 말없이 한빈의 눈만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느껴져 부러 장하오의 이마만을 응시했다.

 

그런데 저도 알아요. 그러니 매번 그 꿈을 꾸시는 거지.”

한빈.”

애초에 전 도사님 마음 얻을 생각도 없었어요.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 치부한 적도 없었는데.”

…….”

제 마음을 말한 적도 없고.”

 

그제야 한빈이 장하오와 눈을 맞춘다. 옆에 뒤집어져 있는 휴대폰에서 새어나오는 플래시 불빛에만 의존해 서로 바라보았다. 이 눈빛, 그때 그 눈빛이다. 잠에서 깬 저를 성생이라 칭하며 안아 주었을 때. 이 눈빛을 평생 받아 온 그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할 정도로 애틋한 눈빛. 받기만 해도 눈물 날 만큼 벅차던 그 눈빛. 그런데 생소하지가 않다. 그땐 낯설었는데, 지금은 마치 저 역시 꽤 오랜 시간 동안 이 눈과 마주했던 것처럼 편안하고 다정하다.

언제부터였을까. 장하오가 그 사람이 아닌, 나를 이렇게 바라보기 시작했던 건.

 

……어릴 적에, 저희 할아버지께서 자주 말씀하신 게 있어요.”

 

一場春夢

인생은 어차피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는구나.

 

깨고 나면 아무것도 잡혀 있지 않을 덧없는 인생인데, 내가 이렇게까지 아득바득 살아야 하나.”

…….”

그래도 아득바득 살았어요. 그러지 않으면 못 살아남아서. 제 꿈이, 제 인생이 그렇더라고요. 아득바득 살지 않으면 괴롭게 만들더라고.”

…….”

괴로운 이 꿈에서 벗어날 방법은 죽음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죽을 순 없잖아요.”

 

장하오의 발목에 칭칭 감겨 있는 청테이프를 매만졌다. 우악스럽게도 붙여 놨구나. 혹시 몰라 신선의 사무실에서 가져온 커터 칼을 주머니 안에서 꺼내 들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건 내 인생인데, 내 꿈인데. 어차피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이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지 않을까.”

…….”

이 인생을 내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청테이프를 뜯어냈다. 곧이어 장하오의 등 쪽으로 팔목에 감겨 있던 청테이프 역시 뜯어냈다. 그 와중에도 장하오는 말없이 한빈만 바라보고 있었다. 청테이프를 둥글게 뭉쳐 던진 한빈이 다시 장하오와 눈을 맞추었다. 언제부터인지 한빈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각몽이라고 하죠.”

…….”

흘러가는 대로, 아득바득 살아남기만 하진 않으려고요. 전 제 꿈의 시나리오를 다시 써낼 거예요.”

…….”

그리고, 제가 쓸 시나리오는 도사님이 있어야만 완성돼요. 그러니까 전 앞으로도 도사님이 필요해요.”

 

. 장하오의 한숨이 터졌다. 한빈이 장하오의 손을 잡았다. 힘없이 잡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내 단단히 맞잡는다.

 

……도사님, 저는.”

…….”

도사님을 사랑해요.”

도사님을 연모합니다…….’

 

아주 오랜만에, 한빈을 보며 성생을 떠올렸다. 그러나 장하오는 안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저가 성생을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 지독하게도 그리던 옛 정인을 보내는 순간이라는 것을.

장하오의 꿈은 연신 성생을 불러냈다. 항상 마지막 그 순간만을 꾸었다. 성생에게 배신당하는 그 순간. 성생에 의해 인생이 바뀌었던 그 순간.

악몽이라 칭하면서도 놓지 못했다. 미안함뿐이 남지 않은 그 감정을 사랑이라 말하며 성생을 놓지 못했다. 그 탓에 성생은 끈질기게도, 여전히 장하오의 꿈에 나타났다. 성생을 놓지 못하는 장하오의 마음 때문에. 미워하고 싶어서. 다른 이를 품은 죄책감을 덜고 싶어서. 그럼에도 잊고 싶지 않아서.

이젠 그 자도, 편해질 때가 됐잖아. 죽어서까지 정인을 배신한 죄책감에, 이젠 시달리지 않을 때도 됐잖아. 눈물이 났다. 이별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 이별이다. 한빈은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장하오를 꼭 안아 준다.

제 앞엔, 앞으로의 미래에 제가 필요하다며 사랑을 고백하는, 내 지금의 정인이 있다.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내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위험까지 무릅쓰고 제 목숨을 구하러 온 사랑이 눈앞에 있다. 내 미련함 탓에 이 아이에게도 상처를 주었구나. 장하오는 한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 역시 그대를 사랑하고 있소.”

 

등을 토닥이던 한빈의 손길이 멈추었다.

 

다른 이를 떠올리며 말하는 게 아니오.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뿐이오.”

…….”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이 의심스럽다 한들, 내 어찌 할 말이 있겠는가.”

…….”

……허나, 나 또한 그대가 필요하오.”

 

그러니 내 옆에 있어 주시오.

한빈은 이제야 깨달았다. 왜 그리 그 눈빛이 다정한 거였는지. 무서울 만큼 낯설지 않고, 익숙하고 편안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한빈은 울음을 터뜨렸다.

버티고는 있었으나 신선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한빈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터무니없는 말들이 아닌, 진짜 그 다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기에. 그 사람이 장하오에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은 문드러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장하오가 나를 사랑한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대. 벅찬 감정을 쉽사리 진정시킬 수 없었다. 장하오를 끌어안고 숨을 헐떡였다. 한빈을 진정시킬 수 있는 건 장하오밖에 없었다.

 

……한빈, 울지 마시오.”

 

연인의 눈물을 그치게 하는 데엔 꽃이 최고랬는데. 장하오가 한빈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는 순간, 밖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 방심했다. 한빈의 동공이 흔들렸다. 애써 울음을 삼키고 뭉개진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신선들이 왔나 봐요.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어……. 도술 쓸 수 있어요? 기력 돼요?”

 

물어 놓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냅다 입술을 박아버린다. 웃음이 나왔다. 울다가 웃으면 밑에 털 난다는 말이 있는데, 이를 어쩐담. 한 손으론 한빈의 목 뒤를 받치고 다른 손으론 한빈의 손을 맞잡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서인지 온몸에 입술이 닿는 기분이다. 한빈은 장하오의 가슴팍을 살짝 치며 재촉했다. 그러면서도 장하오의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장하오는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었다. 그리곤 맞잡은 손의 검지를 들어 보였다. 천천히 첫 획을 그었다.

따악, 손가락 부딪히는 소리까지 들렸는데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한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술을 떼어냈다. 어떡해? , 왜 안 돼요? 번들번들한 입술로 쫑알쫑알 얘기하는 게 사랑스러웠다. 장하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에 들린 무언가를 건넸다.

 

눈물을 그치게 하는 데엔 꽃이 최고라서.”

……지금이 이럴 때예요?”

하하.”

 

하하는 개뿔. 한시가 급한 와중에 장난이나 치고 있는 게 어이가 없었다. 머리엔 미처 닦지 못한 피딱지가 범벅인데, 그 와중에 좋다고 웃고 있으니. 어이가 없는 와중에도 한빈은 장하오를 따라 웃었다.

 

한빈 군!”

 

덜그럭 소리와 함께 창고 문이 흔들린다. 한빈이 문을 잠가 놔서 다행이었다. , 빨리! 한빈이 입술을 내밀었다. 장하오의 입술에 비비려는 순간 장하오가 손바닥으로 밀어낸다. ? 뭐 해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의아한 한빈의 표정을 애써 무시한 채 장하오가 한빈의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 깍지를 끼웠다.

 

……사실 아직 말을 하지 못한 게 있소.”

, 왜요. 괜히 긴장되게. 나가서 해요.”

놀라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불안하게 왜요.”

 

우는 소리를 냈다. 문을 흔드는 소리는 점차 거세졌다. 한 신선의 창고니 키는 금방 구할 테고, 붙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절대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알았어요. 화 안 내요. 놀라지도 않을게요. 빨리, !”

 

그제야 장하오가 다시 미소 짓는다. 반대쪽 손의 검지를 들어 천천히 움직였다. 자동으로 한빈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획을 날리듯 여러 번 움직이더니 딱, 장하오 뒤로 또 장하오, , 또 장하오.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무한 생성되는 장하오에 한빈은 할 말을 잃고 만다.

그러니까…….

 

지금 도술을 부린 거라고?”

구태여 입술이 닿지 않아도, 몸이 닿으니 마음이 함께 동하더군.”

…….”

어허, 분명 나와 약속했소.”

 

어서 안기시오. 두 팔 벌려 손짓하는 장하오에 한빈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그러니까, 아니, 이게 뭐야. 나는 장하오가 요괴한테 쫓길 때 그거 구한답시고 몸까지 날려 입술을 비볐는데! 처음 요괴들한테 쫓길 때 지들끼리 발이 꼬여 넘어진 것도 그러면, , , 할 말은 많은데 입이 얼어붙어 움직이지가 않는다. 문장을 다 뱉어내기엔 시간도 없었다. 그러니까, 장하오 이 새끼 완전 망나니 도사가 아니라,

 

이 변태 도사 같으니……!”

 

한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도술로 만들어낸 장하오의 분신들이 곧장 신선들에게로 달려갔다. 어서 안기래도. 한빈의 대답을 들을 틈도 없었다. 장하오는 한빈의 허리와 무릎 아래를 잡고 안아 들었다.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분신들의 사이로 달렸다. 자연스레 장하오의 목에 팔을 감은 한빈이 연신 소리쳤다. 변태 도사 같으니. 이런 변태 망나니 짭 무당 같으니. 상기된 얼굴은 잔뜩 빨개졌다. 어어, 저것들 빠져나간다! 장하오 분신들과의 몸싸움에 정신 못 차리던 신선 하나가 외쳤다. 장하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며 한빈을 바라보았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엔 소리 내어 웃다가 말을 꺼냈다.

 

그래도 입술이 닿으면 도술 효력이 더 높아지는 건 사실이오.”

 

이 말 또한 진위 여부를 판단하긴 썩 어려우나,

 

그러니 입 맞추어 주시오.”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데 안 할 이유는 없지.

끌어안은 목을 당겨 입을 맞추었다. 고개를 틀어 더 진하게 맞대오는 장하오가 마음에 들어 조용히 미소 짓다가, , , 난데없이 쏟아지는 버드 키스에 소리 내어 웃어버리고 만다. ,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몸이 하늘로 붕 뜬다. 신선들의 목소리가 멀어져 들리지 않을 때쯤, 장하오는 한빈에게 속삭였다.

 

내 곁에 있어 주시오.”

…….”

이 꿈에서 깰 때까지.”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울음이 터질 뻔한 것을 꾹 눌러 참았다. 행복하다. 살고 싶다. 이 꿈에서 평생 깨고 싶지 않다.

앞으로 우리가 악몽을 꿀 일은 없을 거야. 이젠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꾸고 싶은 대로만 꿀 테니까.

 

사랑해요, 도사님.”

 

이제부터 꾸게 될 꿈은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꿈으로 기억될 테니까.

 

 



 



 

 

 

 

 

自覺夢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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