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빈웹진: cinéclub

창문 너머 시어터

스이카

*트리거 요소가 일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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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앞 문방구에서 콜라 슬러시를 사 먹으며 집에 돌아가던 나이에는 인생에 특별한 행운이 가득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처음 가진 목표를 향해 달음질을 치고, 아슬아슬하게 원하던 대학에 합격해 엄마와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푸른 캠퍼스를 거닐며 청춘을 보내며,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가지고, 이어지는 길목에는 애틋한 사랑들이 가득한 인생.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영화처럼, 뻔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런 삶을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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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할 정도로 뻔한 불운이 연속되면, 그것이 바로 성한빈의 인생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가는 날이 장날’ 같은 문장으로 한빈의 운을 요약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소풍 전날에는 반드시 독감에 걸린다거나, 우산을 깜빡 잊은 날에만 비가 온다거나, 새 신발을 개시하면 개똥을 밟는다거나, 평소에는 숙제 검사를 안 하던 선생님이 한빈이 숙제를 하지 않은 날에만 교과서를 걷는다거나, 내기에서 '승패패'에 걸면 결과는 '패승승'이 나오는 일이다.

 

덕분에 꼬꼬마 한빈의 책가방은 항상 엄마가 챙겨준 각종 행운의 물건으로 묵직했다. 영험한 신사의 부적부터 교황이 다녀간 교회의 십자가, 바다 끝에 있는 절의 염주, 엄마랑 남산 타워에서 구매한 커플 키링….

 

그중에서 숫자로 밀어붙이는 건 네잎클로버였다. 네잎클로버 책갈피부터 네잎클로버 키링, 네잎클로버가 그려진 티셔츠, 양말, 속옷까지 없는 게 없었다. 물론 딱히 효과는 없었지만.

 

신은 한빈에게 불운한 운명을 안겨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그에게 한 가지 특별한 능력을 주었다. 그 이름은 '찌르르'. 어릴 적 엄마가 지어준 이름이라 다소 유치했지만, 남들에게 자랑할 일도 없어서 그냥 두었다.

 

찌르르란 대체 어떤 능력인가.

 

재수 없는 일이 닥칠 때마다 목덜미가 찌르르 울린다.

 

…놀랍게도 그게 끝이다. 어릴 적에는 그 찌르르 저리는 그 능력이 방사능 거미에게 물린 히어로와 비슷한 것 같아서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물론 중학생 때까지의 얘기다. 성인이 된 지금은 그저 망할 불운과 함께 제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져 주길 바랄 뿐이었다.

 

찌르르로 불운을 미리 감지할 수 있다면 방지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랬다면 한빈이 수능 전날 아무것도 없는 계단에서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일은 없었을 테다. 밥 한 숟가락 뜨기도 힘든 팔이 그해 입시를 통째로 말아먹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설마 여기서 더 안 좋은 일이 생기기야 하겠어. 안일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엄마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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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그렇게 뛰어오면 어떡해. 전에도 그렇게 뛰다가 넘어졌잖아. 엄청 큰 골목대장 고양이 위로. 야옹이한테 얼굴 막 긁혔던 거 기억 안 나? 뺨에 고양이 손톱자국을 달고 와서는, 와앙 우는 게 얼마나 귀엽고 안쓰러웠는데.’

 

병실 침대에 앉은 엄마는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하고 수다스러웠다. 그때 사진도 있는데 볼래? 웃음기 가득한 물음에 한빈은 턱을 호두처럼 우그리고서는 죄 없는 입술만 꾹꾹 물었다. 저놈의 골목대장 고양이 이야기는 어째서 7년 내내 한물갈 기세가 보이지를 않는지도 모르겠고, 엄마가 아무렇지 않은 척 너스레를 떠는 것도 싫었다.

 

‘엄마는 지금 그런 게 중요해요? 엄마가 아픈데….’

 

성한빈이랑 어울리면 안 좋은 일에 휩쓸린다더라.

 

유별난 불운을 눈치챈 아이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진 소문 때문에 한빈은 친구라고 할 사람도 손에 꼽았다.

 

진짜로 나랑 놀면 친구들이 다쳐요? 어린 시절의 한빈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때면 엄마는 부드러운 손으로 그 서러움 가득한 뺨을 식혀주곤 했다. 그 얘기가 진짜면, 한빈이랑 같이 사는 엄마는 어떻게 이렇게 튼튼하게? 엄마는 눈이 다 접히도록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엄마의 얼굴 덕분에 한빈은 친구가 없어도 괜찮았다.

 

엄마가 입원했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떠오른 게 그 기억이었다. 가슴 어딘가가 새까맣게 타들어 가듯이 먹먹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순간마다 더 그랬다.

 

'혹시 엄마 아픈 거, 나 때문에…'

 

한빈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웠다. 그렇다고, 너 때문이라고 할까 봐.

 

'한빈아.'

 

엄마의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화가 난 듯 단호했다. 새로 사준 자켓이 우박을 맞아 넝마가 되어 돌아와도, 계단에서 잠든 새끼 고양이를 피하려던 한빈이 데굴데굴 굴러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와도 시종일관 미소를 띠었던 엄마가 그때는 웃지 않았다.

 

‘엄마가 아픈 건 한빈이 때문이 아니야. 아까 의사 선생님이 다녀가셨는데, 가족력이 있는 병이라 어쩔 수 없는 거랬어. 그리고 엄마가 바보같이 병원에 늦게 와서 몸이 좀 안 좋은 거래. 그게 끝이야. 그러니까 엄마가 아픈 건 한빈이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한빈이는 하고 싶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알겠지? 우리 아들….’

 

마디마디 굳은살 박인 손이 눈물을 잔뜩 먹어 새빨갛게 부은 한빈의 뺨을 어루만졌다. 눈이 다 접히도록 활짝 웃는 얼굴이 꼭 울 것만 같아서, 한빈은 엄마의 어깨를 와락 껴안았다.

 

훌쩍 자라난 한빈은 엄마가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 가족력이 있다고 반드시 같은 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매일 오메가3며 비타민D며 몸에 좋은 영양제는 꼭꼭 챙겨 먹는 엄마가 제 몸 아픈 줄도 모르고 병원에 늦게 왔을 리도 없었다. 또래 아이들이 퍼뜨린 짓궂은 소문에 풀죽은 아들을 달래던 때와 다른 게 하나 없는 다정함이었다.

 

어느새 저보다 작아진 엄마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순간, 교복 셔츠 깃 아래로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불쾌한 소름이 끼쳤다. 마치 새까만 옷으로 몸을 휘감은 사신이 목덜미에 서슬 퍼런 낫을 들이미는 듯한 기이한 감각. 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불운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한빈은 깨달았다. 이건 지루할 정도로 뻔한 불운의 연속이었다.

 

엄마가 아픈 건 한빈이 때문이 아니야.’

 

엄마는 이듬해에 돌아가셨다.

 

 

 

 

 

 

 

 

 

 

 

 

창문 너머 시어터

w. 스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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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빈은 일찍이 일을 시작했다.

 

재수에 도전하기에는 또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고, 고등학교는 졸업했는데 손을 벌릴 어른도 없었으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고르고 고른 일거리는 카페 아르바이트였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다. 남들보다 튼튼하게 자란 몸을 자원 삼아 가장 먼저 도전한 일은 벌이가 큰 택배 상하차나 건축 일이었으나, 쌓여 있던 택배와 건축 자재가 자꾸만 머리를 노리고 떨어지는 탓에 금세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무지막지한 불운에도 목숨을 부지하며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무난한 게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돈이 아쉬운 대신에 휴일은 없는 거로 쳤다.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빈은 쓸데없이 상상하고는 했다. 적당히 뻔한 클리셰가 난무하는 상업 영화처럼 인생에도 적당히 뻔한 해피 엔딩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남들만큼만 적당히 운이 나쁘고.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는 날에는 모두가 꿈을 꾸는 새벽에 나가 영화관을 찾았다. 그리고 적당히 인기 있는 영화를 골랐다. 낮의 활기란 찾아볼 수 없이 적막한 상영관, 예상대로 흘러가는 플롯,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주인공.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속에 쌓인 응어리들이 조금씩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새벽 영화관 나들이는 한빈에게 있어 유일한 취미이자 즐거움이며, 현실의 고단함을 잠시 잊게 해주는 도피처였다.

 

물론 영화관에서도 재수 없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다. 팝콘 벼락을 맞거나 계단에서 구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의자에 앉으려다 음료를 쏟고, 또 다른 날은 핸드폰을 떨어뜨려 액정이 깨진 적도 있었다. 한빈은 그런 소소한 불운 속에서도 영화의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며 영화관에 갔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언젠가는, 자신이 바라는 평범한 행복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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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도 고단한 하루였다.

 

보통은 아메리카노 샷을 백 단위로 뽑고, 산더미처럼 쌓인 잔들을 깨끗하게 만들고, 지 인생의 고달픔을 카페의 젊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언성을 높이는 것으로 풀어대는 진상 손님들을 서너 번 상대하면 해가 진다.

 

‘평범한 하루’에 더운 날씨로 인해 쏟아지는 주문을 추가하고, 자기가 중세 왕족이라도 되는 줄 아는 듯 아르바이트생 주제에 90도로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30분 동안 욕을 퍼붓는 할아버지와 프랜차이즈 카페에 와놓고서는 직원이 바뀌어 커피 맛이 변했다며 다 들리게 뒷담을 늘어놓는 아주머니, 설거지를 마친 식기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사소한 불운을 토핑 하면 ‘평소보다도 고단한 하루’ 메뉴가 완성된다. 준비된 미소는 모두 소진되어 볼 안쪽 살이 바르르 경련했다.

 

집으로 돌아온 한빈은 멍하니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다가, 영혼이 빠져나간 몸을 일으켜 영화관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영화를 고르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재수 없는 하루랑 비교가 될 것 같아서 인기 있는 상업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키오스크 화면을 바쁘게 가로지르던 한빈의 눈동자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처음 보는 영화가 하나 있었다. B급 냄새가 나는 제목에, 한빈이 고르면 자리가 딱 하나 줄어드는 인기 없는 영화.

 

바로 <테디 베어 구출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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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그동안은 인기 있는 작품을 골라서 보느라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영화를 본 경험은 없었다. 예매 후 상영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금 가뿐해졌다.

 

영화 시작 전 광고가 한창일 때 관객이 한 명 더 들어왔다. 영화관을 통째로 빌린 듯한 느낌이 사라져서 조금 아쉽긴 했으나 한 명 정도는 괜찮은 것 같았다. 자리도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 캐러멜 팝콘 향이 달콤했고, 새벽 상영관의 고요한 분위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혔다. 나중에는 낯선 영화를 함께하는 다른 관객에게 미약한 친밀감까지 느꼈다. 문득 영화를 보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준비된 광고가 전부 끝나고, 상영관 불이 하나둘 사그라졌다. 남은 것은 적막과 어둠, 그리고 사람 둘이었다.

 

그렇게 낯선 영화를 기다리기를 10분이 지나고, 거기서 또 10분이 흘렀다….

 

그리고 또 10분이 지나도 영화가 시작되지 않았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팝콘이나 많이 맞아봤지. 아예 영화가 나오지 않는 일은 드물었다. 한빈은 어둠에 적응된 눈으로 다른 관객을 살폈다. 아까 들어온 사람은 상영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먼저 자리를 떴는지, 자리에 남아 있는 관객은 저 하나뿐이었다. 어두컴컴한 상영관에 혼자 앉아 있자니 찜찜한 마음에 한빈은 핸드폰 불빛에 의존한 채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직원을 찾아 현재 상황을 알려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매처에 도착하니 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새벽이라 할지라도 보통은 두어 명 정도 직원이 근무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아마 화장실에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빈은 그 자리에서 또 한참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머릿속은 이미 실망과 허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빈은 서둘러 영화관 로비에서 빠져나가던 중에 한 남자와 어깨가 부딪혔다. 충돌의 충격에 거의 넘어질 뻔했다.

 

“죄송합니다….”

 

한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급히 사과했다. 눈물이 핑 돌아서 목소리가 떨리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부딪힌 어깨가 아픈 건 아니었다. 그 감정은 온종일 쌓인 사건들에 대한 압박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작은 불운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폭발한 것이다.

 

“아, 저도….”

 

남자가 무어라 말을 끝마치기 전에 한빈은 자리를 떴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가며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애써 참았다. 마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눈물까지 나오면 정말 최악의 하루가 될 것 같았다.

 

…기대했던 내가 바보지.”

 

정말 운이 더럽게 없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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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빈의 아침은 익숙한 천장 벽지를 마주하며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 언저리에 문방구에서 사 온 6개들이 3천 원짜리 싸구려 야광별이 볼품없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베이지색 벽지. 덜 자란 팔이 천장까지 닿지 않아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서 까치발을 들고 용을 쓰다가, 결국은 한빈 대신 엄마가 하나하나 수놓은 그의 방 천장이었다. 형광은 오래전 수명을 다해 캄캄한 밤에도 빛을 내는 일이 없었다. 떼어내는 것조차 잊고 지냈던 야광별이 뜬금없이 눈에 들어왔다.

 

바깥이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옆 건물 앞에 용달 트럭 몇 대가 서 있었다. 똑같은 조끼를 입은 아저씨들이 바쁘게 짐을 옮기고 있었다. 누군가 이사를 오는 듯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세상인데 관심이 생길 리가 없었다.

 

그렇게 창문을 다시 닫으려던 때였다.

 

“감사합니다아.”

 

꽤 가까이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이야. 옥상에서 말하는 건가. 한빈은 창문 너머로 옆 건물을 확인했다. 한빈의 방에서는 그 집 옥상이 살짝 내려다보였다.

 

저 사람인가?

 

건너편 옥상에 서 있는 남자는 이 동네에서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을 향해 꾸벅꾸벅 인사를 하는 남자는 한빈과 나이가 엇비슷해 보였고, 어딘지 모르게 낯선 분위기가 있었다.

 

얼굴 되게 작네.

 

눈도 크고, 코도 높고, 입술은….

 

푸른 하늘 아래, 바람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남자의 짙은 눈썹이 드러났다. 턱선은 조각한 듯 날렵했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목선은 굴곡이 깊었다. 비율이 좋은 체형은 흰 티에 청바지 차림이 잘 어울리는 데에 한몫했다.

 

키는 나랑 비슷하려나?

 

…잘생겼다.

 

한빈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눈을 뗄 수 없는 이유가 단순히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자의 움직임에는 자신감과 여유가 느껴졌다. 그의 티셔츠에 주름이 생겼다가 다시 펴지는 모양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러기를 한참, 분주하게 움직이며 상자를 정리하던 남자가 문득 한빈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깜짝 놀랐다. 한빈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몸을 움찔 떨었다. 뒤늦게 눈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엔, 숨 쉬는 것조차 잠시 잊은 것 같았다.

 

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한빈을 올려다보던 남자는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붓으로 그린 듯한 눈매 아래로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여유로운 눈빛은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빈은 저도 모르게 창문에서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새빨개진 것을 확인하고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남자와 눈이 마주쳐버린 건 운이 나빠서였을까. 이상하게 목덜미가 계속 저릿했다.

 

며칠 후, 슈퍼 계산대에서 수다를 떠는 동네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나서야 한빈은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장하오.

 

얼마 전 이사 온 중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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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장하오를 궁금해했다. 3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사서 혼자 지내는 남자의 직업은 무엇인지. 어째서 비싸지도 않은 이 동네를 골랐는지. 여자를 데려오지는 않는지. 그가 끌고 다니는 차는 얼마인지. 조용했던 동네가 순식간에 시끄러운 소문으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소문의 주인공은 장하오였다. 중국에서 불법적인 일을 하다가 사람을 죽이고 한국으로 도망쳐왔다거나, 마피아의 여자와 야반도주를 하려다 걸려서 도망쳐왔다거나, 사업이 쫄딱 망해서 도망쳐왔다거나…. 어쨌든 결론은 매번 도망쳤다는 거로 끝났다.

 

여기가 무슨 피난처도 아니고. 자기들 동네에 그렇게 프라이드가 없나. 게다가 장하오는 그렇게 파렴치한 일에 엮일 사람 같지도 않았다.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한빈은 소다 아이스크림을 와작 깨물며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예전에는 잘 가지도 않던 슈퍼의 단골이 되어 있었다.

 

한빈이 보기에 장하오는 그냥 옥상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사 온 지가 한참인데 아직도 옥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뭘 저렇게 많이 가져왔지. 구경을 하고 있으면 장하오는 화분도 가져다 놓고, 평상도 옮겨 놓고, 알전구도 장식하고, 거대한 천막도 설치하고…. 도대체 저런 건 다 어디서 사는 건지. 집 짓는 비버를 보는 것 같아서 은근 재미가 있었다.

 

방에 에어컨이 없으니까. 한빈은 그 핑계로 종종 창문을 열어놓았다. 여름이라 밤공기가 그리 시원하지도 않았다. 장하오는 늘 옥상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가져다 놓은 화분에 토마토도 기르고, 못 알아듣는 말로 전화도 하고, 가끔은 담배를 태우는 모습도 보였다.

 

장하오의 움직임을 무심코 눈으로 좇다가 눈이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면 장하오는 꼭 뺨이 둥글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가끔은 애교살 아래에 주름이 잡히도록 한쪽 눈을 꾹 감기도 했다.

 

설마 저걸 윙크라고 하는 건가? 한빈은 어이가 없어서 책에 고개를 푹 파묻어버렸다.

 

얼굴은 장하오가 키우는 토마토보다 빨갛게 익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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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선선한 저녁이었다.

 

장하오가 평소보다 바빠 보였다. 그는 철로 된 지지대를 세우고 그 위에 새하얗고 커다란 막을 거는 중이었다. 그 모습으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빔프로젝터 스크린을 설치하는 듯 보였다. 그렇지. 루프탑은 영화지. 한빈은 설치를 마친 장하오가 무슨 영화를 고를지 궁금해졌다. 장하오의 취향은 어떨까?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뭘까, 제일 별로였던 영화는 뭘까, 보다가 잠들었던 영화는 뭘까. 날이 갈수록 그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졌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한빈은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건너편 옥상의 장하오가 한빈이 있는 방 창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한빈이 먼저 장하오를 보곤 했는데, 이렇게 반대의 상황이 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눈이 마주친 장하오는 입을 작게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짓더니,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들어 보였다.

 

 

[영화 좋아해?]

 

 

그게 장하오가 보낸 첫 메시지였다.

 

늘 창틀의 다육이 같은 존재로만 취급했지, 장하오 쪽에서 먼저 말을 걸 줄은 꿈에도 몰랐던 한빈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종이가 어딨지, 펜, 빨리!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이 딱이었다. 한빈은 양손을 펼쳐 잠깐 기다려 달라고 신호를 보내고는 서랍장을 빈집털이 강도처럼 뒤졌다. 초등학교 때 쓰던 뽀로로 스케치북이 있었다. 빈 페이지를 펼쳐 네임펜으로 답장을 적었다.

 

[엄청 좋아해요!!!]

 

기쁜 마음을 담아 느낌표까지 세 개나 넣었다. 장하오는 한빈의 스케치북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가리고 한참이나 웃었다.

 

[나도]

 

옆 건물 남자와 취미가 같다는 걸 확인한 한빈은 날아갈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이 대화 방법은 조금 의아했다. 한빈의 창문과 장하오의 옥상은 거리로 따지면 몇 걸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방금 장하오가 큭큭거리고 웃는 소리도 전부 들렸다. 그냥 말을 하면 더 잘 들릴 텐데, 굳이 스케치북에 적어야 하나 싶었다.

 

그냥 물어볼까.

 

[그런데 왜 스케치북?]

 

글씨를 크게 썼더니 말이 짧아졌다. 한빈은 스케치북을 들고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듣는 사람이 많아서]

 

장하오는 자기 귀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는 시늉을 했다. 한빈의 방에서 장하오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건, 다른 집에서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아마 그게 신경 쓰여서 스케치북을 이용한 듯싶었다.

 

그 말은 동시에, 장하오는 자신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소문이란 게 사람을 얼마나 피 말리게 하는 건지, 한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빈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입꼬리가 내려가고,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속눈썹이 촘촘하게 박힌 눈을 짧게 여러 번 깜빡일 때마다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저도 모르게 스케치북을 잡은 손을 꼭 쥐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장하오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왜 웃어요]

 

한빈은 스케치북에 성급하게 적으며 입을 앙다물었다. 장하오는 한빈의 표정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지만, 곧 단정한 글씨로 답장을 적었다.

 

[미안]

[입이 이렇게 ㅅ 모양]

[너무 귀여워서 웃었어]

 

한빈은 장하오의 메시지를 읽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장하오 때문에 한빈의 볼은 여러 번 토마토가 됐지만, 그 감정이 싫지 않았다.

 

[나는 장하오인데]

[이름이 뭐예요?]

 

지금까지 실컷 반말을 쓰다가 자기소개 시간에만 존댓말을 쓰는 장하오가 웃겼다. 한빈은 이미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밝히지는 않고 스케치북에 크게 세 글자를 썼다.

 

[성한빈]

 

성한빈….

 

제 이름을 되뇌는 입술 모양에 눈길이 이끌렸다. 장하오는 그저 이름을 외우고 있는 것뿐인데 한빈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간질거렸다.

 

잠시 후, 새로운 메시지가 돌아왔다.

 

[한빈 영화 같이 볼래?]

 

장하오는 옥상의 빔프로젝터 스크린을 가리키며 스케치북을 흔들었다. 한빈은 순간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고 몇 번이고 그 글씨를 다시 읽었다.

 

장하오랑 영화를 같이 본다고? 지금?

 

갑작스러운 제안이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스케치북의 글씨를 다시 읽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다고 스케치북에 동그라미를 백 개 정도 그려서 장하오에게 당장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까부터 욱신욱신 저리는 목덜미가 신경이 쓰였다.

 

한빈은 한동안 답장을 망설이다가, 네임펜을 들어 천천히 글씨를 썼다.

 

[지금요?]

 

장하오는 한빈의 반응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답장을 썼다.

 

[부담스러우면 거절해도 돼]

 

스케치북에는 그렇게 적어놓고 장하오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흉내를 냈다. 한빈이 부담을 느끼지 않게 일부러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작게 웃은 한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하오와 영화를 같이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재수 없는 운명이 그 시간을 망쳐버릴까 두려웠다.

 

기억 속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현장체험학습으로 놀이동산에 갔다가 놀이 기구가 갑자기 멈춰버린 일, 마지막으로 갔던 영화관에서는 영화가 시작되지 않아 그냥 집으로 돌아왔던 일, 그리고 제가 운이 나빠서 엄마가 아팠던 일까지. 그 모든 기억이 한빈의 심장을 불안감으로 흔들었다.

 

불운은 항상 한빈을 따라다녔고, 중요한 순간마다 불청객처럼 나타났다. 그게 한빈에게는 그저 일상이었다. 불운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단 하루라도 장하오에게 재수 없는 일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영화를 보다가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 장하오가 실망하면 어떻게 하지?

 

창문 너머로 눈을 마주쳐도 웃지 않게 되면 어떡하지?

 

한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장하오는 여전히 한빈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빈의 마음이 무겁게 짓눌리는 순간, 장하오의 얼굴 위로 드리운 자그마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장하오의 손에 들린 스케치북의 페이지가 넘겨졌다.

 

[거기서 봐도 되는데...]

 

그리고 또 다음 장.

 

[YES or NO?]

 

장하오는 스케치북 위로 눈만 빼꼼 내민 채 한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눈꼬리가 살짝 처진 그 모습이 마치 눈치를 보는 강아지처럼 보여서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장하오 역시 용기를 내서 영화를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을 텐데. 고민한 흔적을 보였던 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빈은 그의 말대로 상상해 보았다. 장하오가 옥상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자신은 현재 있는 방에서 영화를 보는 상황을 떠올렸다.

 

각자의 자리에서 영화를 본다면, 한빈이 알전구 전선에 발을 걸려 넘어지면서 빔프로젝터를 박살 내거나, 갑자기 강풍이 불어 스크린이 날아간다거나, 재수 없게 새똥을 맞을 일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요즘 영화관을 못 가서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으니까, 이렇게라도 영화를 보면 기분이 좀 더 나아질 것 같았다….

 

한빈은 어느새 영화를 봐도 되는 이유만 계속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장하오의 옥상에서 내 방까지, 그저 이 정도 거리만.

 

그 정도라면 조금 욕심내도 될까.

 

고민하던 한빈은 조심스럽게 스케치북을 들어 올렸다.

 

 

[좋아요]

 

그리고 장하오가 웃었다.

 

감길 것처럼 접히는 눈매와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불행을 겪어본 적이 없는 듯이 환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한빈은 그때 본 장하오의 미소를 평생 잊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

 

사소한 불운은 어김없이 일어났다.

 

첫 번째, 장하오가 블루투스 이어폰을 연결해 주려고 했는데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두 번째, 그래서 두 사람은 결국 소리 없이 영화를 봐야 했다.

 

자막이 나오는 해외 액션 영화를 골랐다. 장하오는 프로젝터를 켜고, 한빈도 방 안의 창문을 더 활짝 열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살짝 불어와 장하오의 머릿결이 살랑거렸다. 그 때문에 바람의 냄새가 더 달아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얀 스크린이 물들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조용히 영화를 감상했다. 소리가 없어서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 상황은 오히려 색다른 즐거움이 되었다. 긴장감이 넘치는 장면에서는 함께 숨을 들이마시기도 했고, 재미있는 장면에서는 웃음을 흘렸다. 조용히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따금 풀벌레 우는 소리나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울렸다.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를 무렵에는, ‘이애애애옹!’ 길고양이들이 앙칼지게 싸우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기도 했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장하오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적었다.

 

[고양이가 완전 개매너]

 

기습적인 드립에 한빈은 더 크게 웃고 말았다. 그 말장난 덕에 자신감이 생긴 한빈이 ‘이애애옹!’하고 고양이 소리를 따라 냈다. 나름 개인기를 뽐낸 것이었다. 그 놀라운 데시벨에 장하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크게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바닥에 쓰러질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용감하게 질러놓고 약간 쪽팔려 하던 한빈도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한참을 웃었다.

 

한빈은 화면 속 장면에 몰입하면서도, 가끔씩 장하오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장하오 역시 가끔 한빈의 반응을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영화의 긴장감 넘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크게 뜨며 놀랐고, 서로의 반응을 확인하며 조용히 같은 감정을 나눴다.

 

한빈은 문득 블루투스 신호가 잡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폰이 귀를 틀어막았다면 장하오의 집중한 숨소리도 못 듣고, 고양이 소리 때문에 웃는 일도 없었고, 눈을 열 번 정도는 덜 마주쳤을 테니까. 어쩌면 이 소리 없는 옥상 영화관이 두 사람 사이를 더 가까워지게 만든 것 같았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두 사람은 한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제 막 이름을 튼 사이라 따로 할 이야기도 없었고, 영화를 한 편 더 볼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맑은 밤하늘에 별이 떠 있고, 달빛이 옥상으로 쏟아졌다.

 

이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착각을 주는 여름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장하오였다.

 

“한빈.”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한빈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잠시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장하오는 고개를 든 채 창문 너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무언가 기대감 같은 빛이 서려 있었다.

 

저녁 내내 스케치북으로 나눴던 놀이 같은 대화는 아예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둘 사이에 존재하던 벽이 그 한 마디에 모두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작은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한빈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가슴속에서 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하오의 다정한 눈빛이 심장에 파고들었다. 한빈은 그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살짝 몸을 기울였다.

 

장하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음에 또 보고 싶어.”

 

그리고 말했다.

 

“좀 더 가까이에서.”

 

하오의 말은 애매했다. 영화를 보고 싶다는 건지, 아니면 한빈을 보고 싶다는 건지. 그 애매함에 한빈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머릿속은 그의 의도를 알아내려는 생각들로 가득 찼다. 그 찰나의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긴장으로 가득 차오르는 듯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한빈은 결심하듯 작게 속삭였다.

 

…저도요.”

 

성한빈 역시 모호한 답을 건넸다. 장하오가 보고 싶다는 건지, 영화가 보고 싶다는 건지 모를….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

 

나이 차이가 한 살밖에 안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두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오는 한빈이 얼마 더 어릴 거라고 생각했다. 옥상을 힐끔거리던 한빈은 늘 네잎클로버 무늬 잠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빈은 장하오의 나이가 더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타국에 와서 3층짜리 건물에서 혼자 사는 것도 그렇지만,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몇 번 본 영향이 컸다. 두 사람의 첫인상은 그렇게 엇갈렸다.

 

“조금 아쉬워. 알았으면 한빈한테 더 빨리 말 걸었을 거야.”

 

장하오가 일부러 눈을 내리깔고 속상한 티를 내는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한빈은 말랑해 보이는 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벌써 콩깍지가 씌었나.

 

“왜애. 무슨 차이가 있어?”

 

한빈은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슴속에서 작은 두근거림이 일어났다.

 

장하오는 고개를 들어 한빈과 눈을 마주쳤다. 방금 전까지 애교스러웠던 하오의 얼굴은 어느 순간 여유로운 연상의 느낌으로 바뀌었다. 처음 이사 온 날 보여준 미소와 매우 닮은 모습이었다.

 

눈길이 얽히는 순간, 둘 사이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많이 있지. 내가 양심이 안 찔리잖아.”

 

다정한 목소리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더욱 자극했다.

 

한빈이 알기로, 친구가 되는 데는 양심이 필요가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부끄러움을 감추려 했지만, 얼굴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말을 놓은 지도 꽤 됐다. 만으로 치면 두 사람은 짧은 여름 동안 나이가 같았는데, 지금이 그 시기였다. 한빈은 가끔 형 소리를 떼고 장하오를 부르는 장난을 쳤다. 그러면 하오가 살짝 노려보는 게 귀여웠으니까.

 

그렇지만, 사실은 한빈도 형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았다. 그 말을 할 때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이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도 실컷 물어봤다. 두 사람은 종종 옥상에서 영화를 틀어놓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장하오는 한빈이 물어보는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형…. 비행기에서 <상견니> 보다가 울었다고?”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아닌데에? 놀리는 거 아니니까 더 얘기해 줘. 또 무슨 영화 보고 울었어?”

 

…안 알려줄래. 이거 장난하는 목소리야.”

 

요약하자면, 장하오의 영화 취향은 의외로 로맨스였다.

 

하오는 영화뿐만 아니라 한국 드라마도 좋아했는데, 어머니가 한국인이어서 어렸을 적부터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말도 어느 정도 잘하고, 지금도 한국에서 살고 있는 거라고.

 

“부모님은 중국에 계시고, 형 혼자 한국으로 온 거야?”

 

그렇게 물었을 때는….

 

“음…. 원래는 부모님이 은퇴하시고 이 집에 살려고 했어. 어머니가 어렸을 때 이 집에 살았다고 했거든. 그런데 내가 살게 된 거야.”

 

이런 답이 돌아왔다.

 

한빈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중국 부자의 클래스인가. 하오에 대한 소문이 얼마나 뜬금없는 헛소리였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마음속에는 놀라움과 함께 순수한 감탄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약간 위축되는 느낌도 들었다. 하오는 중국에 계신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집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한빈은 부모님을 잃고 홀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상황을 비교하면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한빈은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

 

그 질문을 받았을 때는, 한빈의 심장이 덜컥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리면 하오가 당황스러워할까 봐, 자취를 한다고 둘러댔다. 장하오가 그런 일에 돌연 태도를 바꿀 사람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한빈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렸다. 어차피 언젠가는 들킬 거짓말을 왜 했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후회했다.

 

엄마 얼굴이 생각나서 마음속이 콕콕 쑤셨다.

 

 

 

-

 

[오늘 같이 저녁 먹을래?]

 

스케치북은 아직도 가끔 이용했다. 가끔은 문자를 보내는 것보다 빠르기도 했다. 메시지를 확인한 한빈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두 사람은 저녁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늘어났다. 장소는 기분에 따라 하오의 옥상이 되기도 했고, 한빈의 방이 되기도 했다.

 

성한빈은 요리를 못 했다. 맛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심각하게 운이 없는 탓에 사건 사고가 너무나 잦았다. 시작 전까지는 멀쩡했던 전자레인지가 갑자기 돌아가지 않았던 적도 있었고, 후추를 칠 때는 갑자기 마개가 떨어져 산더미처럼 쏟아지기도 했다. 마침내 부엌 바닥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벽에 칼을 꽂았을 때는 그 다정하셨던 엄마마저 한빈의 주방 출입을 금지했다. 그래서 요리를 못 하고, 동시에 못한다.

 

반면에 하오는 요리를 잘했다. 처음 해보는 요리도 망하는 적이 없었고, 식재료를 고르는 솜씨도 훌륭했다. 달걀 한 판을 아무거나 집어도 산란일이 바로 전날로 찍혀 있고, 수박은 통통 두드리지 않고 아무거나 골라도 속이 잘 익은 게 걸렸다.

 

중식, 일식, 양식, 한식까지 못하는 게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한식은 특히 능숙했다. 한빈은 하오의 한식 솜씨가 한국인인 어머니 덕분일 거라고 추측했다.

 

“형, 어머님이랑 같이 한식 레스토랑 하나 차려야 하는 거 아니야?”

 

한빈이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인 하오의 등을 보며 얘기했다. 아직 요리가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냄새가 좋았다.

 

흔히 하는 칭찬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몇 번씩 이런 밥을 공짜로 먹는 게 미안할 수준이었다. 그런데 어머님이라고 불러도 되는 게 맞나? 친구 사이에도 다 그렇게 부르니까 상관없겠지? 한빈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는 동안 하오에게서 좀처럼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못 들었나 싶었던 한빈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왜?”

 

그때 하오의 얼굴은 살짝 굳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어? 그냥, 한식을 너무 잘하길래. 칭찬이었어….”

 

혹시 나 방금 이상하게 말했어? 미안해.

 

이어지는 한빈의 사과에, 한순간 경직되었던 하오의 표정이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들어섰다.

 

“아냐, 네가 잘못한 거 없어. 예전에 부모님이랑 한식 레스토랑을 했던 적이 있는데, 한빈이 그 얘기를 해서 놀란 거야.”

 

하오는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렸고, 보기 드물게 당황한 듯했다. 이내 한빈의 손목을 하오의 손이 감쌌다.

 

“미안해. 한빈 놀랐지?“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맞닿은 살에서 그의 떨림과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한빈은 눈앞의 남자가 마치 놀이공원에서 부모님 손을 잃어버릴까 봐 꼬옥 붙잡은 아이처럼 느껴졌다.

 

“아니야. 나 같아도 진짜 놀랄 것 같은데?”

 

“그래도….”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한빈이 그의 입장이었더라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 같았다. 무슨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도 아니고. 그렇지만 하오는 좀처럼 속상한 기색을 없애지 못했다.

 

장하오는 불쌍한 척을 할 때 도톰한 아랫입술을 내밀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정말 마음이 아플 때는 입꼬리가 아주 살짝만 내려간다. 바로 지금처럼.

 

“괜찮아. 대신 형이 맛있는 거 해줄 거잖아.”

 

따뜻한 손을 맞잡으며, 한빈은 하오의 기분을 풀어주려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맞아. 그럴 거야.”

 

작게 미소 지은 하오가 조심스럽게 한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솜사탕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잠깐 쉬고 있을래? 준비 다 되면 부르러 갈게.”

 

“여기서 구경해도 돼?”

 

한빈이 멀찍이 떨어진 식탁 옆에 서서 물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요리 중인 하오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칠 것 같지는 않았다.

 

“응. 여기 옆에 와서 봐도 돼.”

 

“아냐. 나 또 넘어지거나 하면 형 다칠까 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하오에게 태생적으로 운이 없는 체질을 털어놓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도 한빈의 사소한 불운은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쩔 수 없이 한빈은 성격이 조금 덤벙대는 편이라는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칼을 쓰는 중에 무슨 재수 없는 일이라도 벌어지면 정말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더 이상 누군가가 자신의 불운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하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 적이 없었지만, 한빈은 그 가능성이 두려웠다. 이 평화로운 일상이 조금만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매일 생각했다.

 

아주 조금만 더.

 

“괜찮아. 나는 운이 아주 좋거든.”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말에 한빈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눈동자는 파도가 들이친 것처럼 일렁였다. 목덜미가 찌르르 울렸다.

 

장하오는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표정은, 어쩐지 조금 씁쓸하게도 보였다.

 

 

 

-

 

하오가 이사 오고 시간이 꽤 지나면서 불쾌한 소문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낯선 외국인이었던 잘생긴 청년이 마주칠 때마다 싹싹하게 인사도 잘하고, 생글생글 웃고 다니니 미워할 사람이 없었다. 홀로 타국살이가 얼마나 힘들겠냐고 밑반찬을 싸서 가져다준 아주머니도 있었다. 하오가 옥상에서 토마토에 물을 주고 있으면 창문 밖을 내다보던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한빈이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장하오를 사랑하게 되었다.

 

 

 

-

 

장하오는 그의 말대로 정말 운이 좋은 편인 것 같았다.

 

한빈이 편의점에 가면 1+1 상품이 재고가 한 개밖에 남지 않아 그냥 다른 걸 사 올 때가 많았는데, 잠시 후에 하오가 같은 편의점에 들르면 마침 물류 택배가 도착해서 재고가 채워졌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온 하오는 한 개를 한빈에게 선물했다.

 

한빈이 우산을 안 들고 온 날에는 비가 오고, 하오가 무거운 3단 우산을 가방에서 빼는 걸 잊은 날에도 비가 왔다. 그런 날마다 하오는 꼭 한빈이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 들러 함께 우산을 썼다. 한빈은 하오의 어깨가 젖어 드는 게 신경이 쓰였다.

 

하오는 자신의 불운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한빈이 옆에 없었다면 하오는 제 몫을 나눌 일도 없고, 우산이 있는데 비에 젖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운명이 나쁜 전염병 같았다.

 

 

 

-

 

함께 하는 늘어날수록 한빈의 불안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저녁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힌 한빈이 에스컬레이터에서 균형을 잃었는데, 하오가 빠르게 반응하여 한빈의 어깨를 붙잡아 안전하게 지탱해 주었다. 그때 한빈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만약 하오도 밀려났다면 두 사람은 모두 굴러떨어질 수도 있었다.

 

또 어느 날에는 한빈이 계단을 내려오다가 바닥의 물기 때문에 넘어질 뻔했다. 그 모습을 목격한 하오가 황급히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둘 다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계단을 다 내려온 뒤에 넘어져서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하오의 손바닥에 작은 상처가 생겼다. 그걸 본 한빈은 매우 놀라 눈물을 흘렸다.

 

그런 일이 자꾸 늘어났다. 하오의 삶에는 없었을 나쁜 일들이 한빈과 함께하면서 점점 더 많아졌다.

 

한빈은 자신이 하오의 곁에 있어도 괜찮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

 

“나 때문에 형한테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아.”

 

“이런 일?”

 

“그냥, 나쁜 일. 재수 없는 일. 저번에도 나 때문에 같이 넘어졌잖아.”

 

“그게 왜 나쁜 일이야? 나한테는 엄청 좋은 일이야. 그래서 한빈이 안 다쳤잖아.”

 

대신 형이 다쳤잖아. 그게 나한테는 엄청 운이 나쁜 일이야.

 

한빈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

 

세상에는 수많은 소문이 있다. 그중에는 가짜도 있고, 진짜도 있다. 장하오에 대한 소문은 가짜고, 성한빈에 대한 소문은 진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나랑 놀면 친구들이 다쳐요?’

 

목덜미가 찌르르 울렸다. 정말 쓸모없는 노력이었다.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질 걸 알면서도 막지도 못하는 쓸데없는 능력. 쓸데없는 나.

 

그 얘기가 진짜면, 한빈이랑 같이 사는 엄마는 어떻게 이렇게 튼튼하게?’

 

한빈은 무력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오가 다치는 모습을 보면서도 도울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장하오에게 더 위험한 일이 생기기 전에 자신이 그의 인생에서 사라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아픈 건 한빈이 때문이 아니야.’

 

또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경험은 인생에 단 한 번조차도 너무 많았다.

 

 

 

-

 

한빈은 하오와 만나는 빈도를 의도적으로 줄이려고 했다.

 

전화나 문자가 오면 바로 연락을 받고 싶을 것 같아서 핸드폰도 일부러 안 봤다. 옥상에서 토마토에 물을 주는 하오를 보면 말을 걸고 싶을 것 같아서 창문도 매일 꼭 닫았다. 추억이 쌓인 스케치북을 보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 다시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하오에게는 그냥 아프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몇 주를 지냈다. 출퇴근을 제외하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바로 옆 건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 전까지는 한빈을 가장 행복하게 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창문 너머로 하오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리운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어느 저녁,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무심코 문을 연 한빈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하오였다. 선이 곧은 손에는 영수증 같은 종이가 들려 있었다.

 

“몸은 괜찮아?”

 

“응….”

 

거짓말이 하나씩 쌓일 때마다 한빈은 하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하오의 눈에는 여전히 걱정과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 시선이 한빈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한빈을 보며 하오가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 영화관에서는 같이 영화 본 적이 없잖아.”

 

손에 들려 있던 종이는 영화 티켓이었다. 요즘 인기가 많은 액션 영화였다. 두 사람이 처음 함께 봤던 영화도 액션 영화였다. 하오의 다정한 성격을 생각하면 분명 우연은 아닐 것이었다.

 

“취소하려면 다시 영화관에 가야 해.”

 

한빈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슬쩍 덧붙였다. 거절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실물 티켓을 들고 온 것이 분명했다. 장하오다운 계략이었다.

 

“그게….”

 

한빈은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때, 하오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가로막았다.

 

“한빈 말고 다른 사람은 싫어.”

 

…….”

 

그러고는 아랫입술을 조금 내밀고 눈매를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은 한빈의 마음을 더욱 흔들리게 만들었다.

 

이대로 멀어지려면 단호하게 장하오를 밀어내야 했다. 나는 못 보러 가니까 다른 사람을 찾거나, 아니면 영화관에 다시 가서 티켓을 취소하라고 해야 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티켓을 든 하오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봐버려서….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

 

영화관은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왔던 기억이 <테디 베어 구출 작전> 때였다. 일부러 발길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로는 하오가 이사를 왔고, 자연스럽게 영화관에 오는 일이 줄어들었다. 혼자 새벽에 영화를 보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오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즐거웠으니까.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하오가 커다란 캐러멜 팝콘 통을 들이밀었다. 그 말이 맞았다. 한빈은 또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을 하는 중이었다. 가장 최근 영화관에서 있었던 일이 영화가 안 나와서 집으로 돌아간 거였으니 더 심했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한빈을 빤히 바라보던 하오가 말랑한 입술 사이로 달콤한 팝콘 세 알을 연속으로 쏙쏙 집어넣었다. 기습 공격에 당한 한빈은 팝콘을 물고 당황했다.

 

“얘기해 주지 않으면 난 알 수가 없어.”

 

볼록하게 올라온 뺨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고, 한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빈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빈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저 역시 항상 하오에 대해서 알고 싶었으니까. 처음에는 바라만 봐도 좋았고, 나중에는 장하오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궁금했다. 하오의 마음이 자신과 같았다는 것을 알고 나니 언제나 여유로워 보이던 눈에 불안감이 읽혔다.

 

용기가 생겼다. 눈앞의 이 남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다. 지금이라면 한빈은 여태껏 숨긴 진실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였다. 머뭇거리는 손가락 틈 사이로 하오의 손이 얽혔다.

 

“형, 나는 사실….”

 

그런데 갑자기 영화관 안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삐―― 삐――

 

화재 경보음이었다. 귀를 찢을 듯한 소리는 영화관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한빈은 그 순간 모든 피가 목덜미에 쏠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영화관 로비에 있던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비상구 쪽으로 뛰어가며 안내를 시작했지만, 경보음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 삐―― 삐――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경보음 속에서 한빈은 자신의 불운을 떠올리며 패닉에 빠져들었다. 또다시 하오를 위험한 상황에 말려들게 했다는 죄책감이 공포와 함께 온몸을 휘감았다.

 

―― 삐―― 삐――

 

한빈은 정신없이 하오의 팔을 잡고 비상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끄럽게 울리는 경보음 외에 다른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물건을 챙기며 비상구로 몰려들었다. 공포와 혼란이 극에 달한 순간, 한빈의 손은 하오의 팔을 더 강하게 잡았다.

 

…빈아!”

 

머릿속은 온통 하오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모든 상황이 한빈의 불안을 증폭시켰고, 눈앞이 새빨갛게 물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경보음은 끝날 줄 모르는 불운처럼 한빈을 따라다녔다. 숨이 점점 가빠지는 그때였다.

 

“성한빈!”

 

시야에 하오가 들어왔다. 그는 양손으로 한빈의 뺨과 목덜미를 감싸고 있었다. 처음 보는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저 때문에 이런 얼굴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다시 욱신 조여 왔다. 한빈의 이마는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 순간, 영화관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화재 경보가 오작동한 것이고, 실제로 화재가 일어난 것은 아니니 안심하고 자리에 앉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1층으로 대피한 사람들이 안내 방송을 듣고 저마다 불만을 내뱉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는 동안 두 사람만 발에 못이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한빈아,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하오는 한빈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달래려 했지만, 한빈이 그 손을 천천히 뿌리쳤다.

 

…안 되겠어. 나는 형이랑 같이 있으면 안 돼.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생길 거야.”

 

한빈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이런 끔찍한 방식으로 진실을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장하오를 원한 죄를 받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하오가 당황한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보았다.

 

“나 형한테 거짓말했어. 계속 넘어지고, 다치고 그러는 것도 그냥 덤벙대서 그런 거 아니야. 나, 사실 운이 엄청 나빠. 형도 옆에서 봤으니까 알지? 나는 하는 일마다 다 안되고, 재수 없는 일이 자꾸만 꼬여….”

 

하오의 말을 끊고 정신없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는 절망감이 가득했다. 횡설수설하며 속에 있는 걸 쏟아내느라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빈아….”

 

“그리고, 나 자취하는 거 아니야. 엄마가 아파서 돌아가셨어. 나 때문에 엄마가 아팠어.”

 

흔들리는 눈에 물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형한테도 나쁜 일이 생길까 봐 너무 무서워. 전에도 그렇고, 오늘도…. 오늘은 진짜 불이 아니었지만, 언제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때는 정말 형이 크게 다칠지도 몰라…. 엄마처럼…. 나 때문에….”

 

한빈은 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생각을 입으로 뱉어내니 그게 전부 사실이 되는 것 같았다. 무서웠다. 가슴이 답답하도록 아팠다. 꼴사납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낼 수가 없었다.

 

하오는 떨리는 등을 쓰다듬으며 한빈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발간 뺨이 눈물로 젖어 드는 걸 확인한 순간에는, 더는 참지 못하고 한빈을 세게 끌어안았다. 한빈은 그 품에 안겨 억지로 삼키던 울음을 터뜨렸다.

 

마주 안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더 슬펐다. 장하오를 욕심낼 수 없었다.

 

“성한빈….”

 

…….”

 

“한빈아….”

 

한빈은 장하오의 어깨에 기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는 눈물 먹은 솜처럼 늘어진 한빈을 품속에서 꺼내, 손가락으로 가엾은 눈물을 훔쳤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뺨도 쓸고, 눈가도 쓸고, 귓가도 쓸었다. 눈물이 길게 맺힌 속눈썹도 어루만졌다.

 

한참을 그렇게 어르고 안았다. 다시는 서러운 생각이 나지 않도록 제가 줄 수 있는 온기를 한빈에게 전부 주었다. 바닥에 닿아 있는 한빈의 손을 끌어 억지로 끌어안게 했다. 잡을 수 있게 했다. 둘 사이에 남은 틈이 없도록 몸을 붙였다.

 

한빈의 떨림이 그쳤을 때, 하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빈아. 나도 너한테 거짓말했어.”

 

한빈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하오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동자는 떨리는 마음을 드러내듯 흔들리고 있어서, 한빈은 조용히 하오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사실은, 그 집 그냥 받은 게 아니야.”

 

 

 

-

 

태어날 때부터 행운이 따르는 게 장하오의 인생이었다. 한국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하오는 부모님의 장점만 물려받아 태어났다.

 

축복받은 인생이었다. 그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될 놈은 된다’였다. 장난감 랜덤 카드를 사면 항상 스페셜이 나왔고, 어쩌다 늦게 일어나는 날에는 선생님도 학교에 지각했다. 성실한 성정 덕에 원래도 공부를 잘했는데, 그해 입시에 운이 터져서 원래 목표하던 학교보다도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하오는 어머니 덕분에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어렸을 적부터 한국 요리를 많이 접해서 성인이 되어서는 어머니와 함께 레스토랑 사업을 진행했다.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이었다. 마침 한류열풍과 맞물려 하오의 레스토랑은 SNS 필수 코스로 자리를 잡았다. 장하오는 운이 좋았으니까. 모두가 그의 가게를 사랑했다.

 

자연스럽게 한국에 관한 하오의 관심이 커졌다. 아버지의 나라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번엔 어머니의 나라를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자라났다. 한국 유학을 결심했을 때, 부모님도 기뻐하셨다. 부모님은 은퇴 후에 어머니가 어릴 적 살던 3층 집에서 노후를 보낼 계획이었다. 두 분은 아들이 한국에서 자리를 잡으면 그 집에서 함께 살 수도 있겠다며 활짝 미소를 지으셨다. 옥상에서 텃밭도 가꾸고, 작은 영화관도 만들자고. 그렇게 단란한 미래를 그리느라 세 가족은 저녁 내내 화목했다.

 

외국에서 레스토랑 사업을 병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오는 부모님께 모든 일을 맡기고 한국으로 떠났다. 물론 레스토랑을 부모님에게 넘긴 후에도 하오의 삶에는 행운이 넘쳤다. 당연한 일이었다. 행운은 누군가에게 주거나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그 행운을 이어받지 못했다. 하오가 경영할 때는 번창했던 사업이, 부모님이 경영을 맡은 후로 매출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고객은 점점 줄어들었다. 경제 불황까지 겹치면서 사업은 파산 위기에 처했고, 부모님은 감당하기 어려운 재정적 압박 속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다.

 

한국에 있었던 하오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부모님은 그 모든 일을 두 분이서만 감당했다. 자랑스러운 아들한테 한몫이라도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려운 재정 속에서도 두 분이 유일하게 지킨 건 한국의 3층 집이었다.

 

마지막 편지에는 하오가 그 집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적혀있었다.

 

우리 아들은 운이 좋으니까,

엄마 아빠처럼은 되지 않을 거야.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장하오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행운과 행복은 같은 말이 아니었다. 평범한 운을 가지고 태어났으면 부모님이 사업을 이어갔을 때도 문제가 없었을 거고, 그랬다면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일도 없었을 거였다.

 

행운은 재난 속에서도 혼자 살아남는 것이었고, 행복은 함께 살아남는 것이었다. 둘은 완전히 다른 단어였다.

 

그래서 결국 장하오는 행복하지 않았다.

 

 

 

-

 

…나도 운이 좋은 게 싫었어. 나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라고 생각했어.”

 

“말도 안 돼. 그게 왜 형 때문이야…. 절대 아니야.”

 

울리려고 들려준 이야기가 아닌데. 기껏 멈춰놓은 한빈의 눈물이 다시 흐를 듯 고였다. 하오가 흐트러진 한빈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며 물었다.

 

“왜 말도 안 돼?”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하오는 한빈의 눈동자 속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내가 운이 좋아서 너도 다칠 수도 있어.”

 

“아니야….”

 

한빈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같이 탔던 차에서 내가 내리자마자 사고가 날 수도 있어.”

 

“그럴 일 없어.”

 

한빈의 목소리는 더 단호해졌다.

 

“나한테 일어나야 할 나쁜 일이 다 한빈한테 갈 수도 있어. 나 때문에. 내가 운이 좋아서.”

 

“나는 그런 거 상관없어…!”

 

한빈이 더욱 강하게 외쳤다. 하오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다. 자신의 말이 하나도 닿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 가슴께가 답답했다.

 

장하오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런 건 전부….

 

“그냥 원래 벌어질 일이 벌어지는 것뿐이야! 형 때문이 아니….”

 

그 순간 한빈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장하오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무엇을 전하고 싶은 건지.

 

“나도 그래. 나도 상관없어.”

 

제 뺨에 한빈의 손을 가져다 대며 하오가 속삭였다.

 

“그런데 너는 왜 나를 밀어내려고 해….“

 

장하오는 아파하고 있었다. 한빈이 밀어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한빈이 나한테 말해준 것처럼, 내 마음도 같아.”

 

그리고 한빈은 처음 보는 그의 약한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네 잘못이 아니야.”

 

장하오는 상처받은 얼굴로 저를 구원했다.

 

“어머니가 아팠던 건 한빈이 때문이 아니야.”

 

끝없는 터널 속에서 출구를 마주한 순간처럼, 한빈의 심장에 따스한 빛이 들이닥쳤다.

 

엄마가 아픈 건 한빈이 때문이 아니야.’

 

병원에서 미소 짓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빈은 그때 엄마의 말을 믿지 못했다. 마음 한편으로는 엄마가 저를 원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끝없는 다정함을 의심했다.

 

하지만 이제야 엄마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내 한빈의 마음을 죄책감으로 짓눌러오던 기억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하오가 아니었으면 아주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을 마음이었다.

 

“아까 한빈이는 무서운데도 내 팔을 꽉 잡았어. 나를 구하려고 했어.”

 

한빈이 먼저 나를 발견했잖아. 이상한 네잎클로버 무늬 잠옷을 입고, 자다가 일어나서 머리가 까치집이 되어서, 그 창문 너머로 나를….

 

그러니까….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이제 너밖에 없어….”

 

그 말에 한빈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운 좋은 거 싫어. 그런 것 때문에 한빈이랑 만날 수 없다면, 나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아.”

 

장하오는 울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눈가는 붉게 물들었고, 한빈이 좋아하던 도톰한 입술이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네가 없으면 나는 행복하지 않아….”

 

떨리는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두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않았다. 한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절박함과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너랑 행복해지는 거야….”

 

한빈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해왔던 걱정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바보 같은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눈물이 방울져 흐르기 시작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해, 하오 형, 내가 미안해….”

 

이번에는 한빈이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장하오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한빈을 마주 안았다.

 

“나도 형이랑 같이 있고 싶어….”

 

그게 성한빈의 진심이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속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줘….”

 

하오의 목소리에도 절실함이 묻어났다. 한빈의 어깨에 고개를 더 깊게 파묻으며 안겼다.

 

“응, 안 갈게. 옆에 있을게….”

 

두 사람은 서로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 어떤 운명이 와도 서로를 떼어낼 수 없도록.

 

 

 

-

 

평범한 하루들이 계속 이어졌다. 가을비가 포근하게 내리는 밤이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두 사람은 옥상 천막 아래에 작은 텐트를 설치했다. 스크린을 가까이 끌어다 놓고 텐트 안에 들어가면 둘만의 세상이 만들어졌다. 늘 그렇듯이 영화에 집중하기도 했고, 중간에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로맨스 영화가 하얀 막 위에 새겨지고 있었다. 빗소리에 사랑을 속삭이는 대사가 작게 섞였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노란 알전구 빛이 주변을 포근하게 감쌌다. 내내 엎드려서 영화를 봤더니 팔꿈치가 아파져서 옆으로 풀썩 누워버렸다.

 

그랬더니 한빈의 프레임이 온통 한 사람으로 가득 찼다. 영화 속 장면이 바뀔 때마다 하오의 피부에 다른 색이 물들었다. 영화에 집중한 얼굴이 그린 듯이 선명했다. 언젠가는 창문 너머로 훔쳐보았던 얼굴이 이제는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었다.

 

둘만의 시간이 너무 편안해서 한빈은 잠에 빠질 것 같았다. 영화의 남은 장면은 뻔한 내용이었다. 전형적인 로맨스 코미디. 서로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깨달은 주인공들이 키스를 하고, 오해를 풀고,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어차피 영화의 결말은 알고 있으니까. 장하오는 옆에 있으니까. 이 완벽한 순간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한빈의 눈꺼풀이 몇 번 깜빡이다가 스르륵 감겼다.

 

“졸려?”

 

조심스럽게 앞머리를 정리해 주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한빈은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응…. 엄청 조금…. 졸려….”

 

조용히 웃으면 하오가 뺨 위를 엄지로 쓸었다. 한빈은 눈을 감은 채 그 손길을 즐겼다. 하오는 스크린에서 눈을 뗀 지 오래였다.

 

손가락이 맞물렸다. 성한빈의 프레임에는 장하오가, 장하오의 프레임에는 성한빈이 가득 찼다.

 

로맨스 영화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하오가 그 화면을 흘끗 확인하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사 온 날 보였던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였다.

 

“이다음 장면, 뭔지 알아?”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제 막 서로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를 깨달았다. 이전에도 본 적이 있는 영화였다. 분명 그다음 장면을 알고 있는데, 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몰라.”

 

따뜻한 불빛이 눈가에서 어룽거렸다. 한빈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형이 알려 줘….”

 

그 말이 어떤 뜻인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서로 다른 프레임이 섞였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지럽혔다. 귓가에는 영화 속 노랫소리와 천막 위를 두드리는 가을비 소리가 맴돌았다.

 

맞붙은 입술은 늘 그렇듯이 부드러웠고, 뺨은 옥상 화분의 토마토만큼 붉었다. 머릿속에서는 달콤한 캐러멜 팝콘이 이리저리 터졌다.

 

영화의 결말은 알고 있었다. 서로가 옆에 있었다. 이 완벽한 순간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이 완벽한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 순간의 몇 초면 충분했다.

 

 

 

-

 

학교 앞 문방구에서 콜라 슬러시를 사 먹으며 집에 돌아가던 나이에는 인생에 특별한 행운이 가득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처음 가진 목표를 향해 달음질을 치고, 아슬아슬하게 원하던 대학에 합격해 엄마와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푸른 캠퍼스를 거닐며 청춘을 보내며,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가지고, 이어지는 길목에는 애틋한 사랑들이 가득한 인생.

 

그런 삶을 꿈꾸었었다.

 

장하오는 행운과 행복이 다른 말이라고 했다.

 

운은 나눌 수 없고, 행복은 나눌 수 있다고, 행운과 불운은 번갈아 가며 우릴 찾아와도 행복은 언제나 우리 옆에 있을 거라고 말했다.

 

포춘 쿠키 속 운세처럼, 그 말은 정말 들어맞았다.

 

생애 처음으로 4등 복권에 당첨되고, 그 당첨금으로 샴페인을 사 오고, 건배 직전에 장하오가 실수로 잔을 엎고, 결국은 편의점에서 만 원에 네 캔 행사하는 맥주를 사 와서 마셔도, 매 순간에 행운과 불운과 애틋한 사랑이 가득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삶을 꿈꾸었다.

 

나란히 낮과 밤을 산책하며, 적당히 행운이 따르고, 적당히 불운하고,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영화처럼, 뻔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런 인생을 살아가기로

 

함께 약속했다.

 

 

 

창문 너머 시어터

Fin.

 

 

 

 

 

 

 

 

 

 

 

 

epilogue. 어느 가을밤

 

-

 

“아, 갑자기 생각난 거 있어.”

 

“뭔데?”

 

“우리 전에 갔던 그 영화관. 옛날에도 이상했어.”

 

“어디? 그 화재경보기?”

 

“응. 거기.”

 

“형이 거길 전에도 가봤다고? 언제?”

 

“응. 한 번. 이사 오기 전에 새벽에 심심해서 갔었어.”

 

“어. 그래서? 뭐가 이상했는데?”

 

“이상한 영화가 있길래 궁금해서 예매했는데.”

 

“으응.”

 

“잠깐 음료수 사러 다녀오니까 영화가 안 나온다고 그냥 환불해 줬어.”

 

…그 영화 제목이 뭔데?”

 

“무슨 테디베어…. 몰라. 이상했어. 그리고 그때 나오다가 어떤 사람이랑 부딪혔는데, 그 사람 엄청 빨리 가서 사과도 못 했어. 그래서 미안했어.”

 

“괜찮아. 그 사람 지금 엄청 행복할 것 같아.”

 

“응? 그래도 다시 안 갈래. 나쁜 영화관인 거 같아. 한빈이랑 둘이서 보는 게 더 좋아.”

 

“맞아. 나쁜 영화관이야. 나도 형이랑 둘이 있는 게 좋아.”

 

“내가 좋아?”

 

“응. 형이 좋아.”

 

“나도 성한빈을 사랑해.”

 

“나도.”

 

“제대로 말해야지이.”

 

“응…. 나도 사랑해….”

 

“나도…. 나도 사랑해.”

 

“형, 이제 들어가자. 추워….”

 

“응. 들어가서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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