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풍장풍러브(長風章風愛)
십일월
본 글은 영화 「의천도룡기」의 무협 세계관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일식 얘기로 떠들썩하던 날이었어요.”
“일식?”
“네. 개기일식이요. 태양과 달이 만나는 날 있잖아요. 그날이 그랬어요. 하늘이 정말 순식간에 캄캄해지더라구요. 길 위의 사람들은 다들 거기에 정신이 팔렸어요. 저도 그랬고, 아마 상대방도 그랬던 것 같아요. 마지막 기억은 인도를 덮친 트럭의 노란 불빛이었어요. 한낮인데도 라이트가 켜져 있었죠.”
“투록이란게 뭐지?”
“트럭이요? 음...뭐라고 해야 할까. 아, 철로 만든 마차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철이라... 그런 걸 끌려면 말이 족히 여섯 필은 필요하겠어.”
“네, 엄청 무거워요. 그런데 그건 말이 끄는 게 아니라 기름을 넣으면 스스로 움직이는 거예요.”
“기름을 먹는 철마라니. 빙빙은 가끔 이상한 소릴 하는군.”
“제가 있던 곳에선 모두가 그걸 탔어요. 여기와는 많이 다르죠. 그러니 처음 왔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가나요? 아니, 눈을 뜨니 전혀 다른 세상이잖아요. 처음엔 영화 촬영장인 줄 알았어요. 무협영화 같은 거요. 행색도 이상하고, 다들 막 날아다니면서 싸우고.”
“술법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갑자기 날려 왔단 말인가.”
“네. 꼼짝없이 트럭에 치였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니 이미 무당의 경내 안이었어요. 그때 사부님을 처음 만났죠.”
“하필.”
“하하. 싫은가요? 음... 촬영이 아니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어요. 줄도 달리지 않았는데 사람이 막 꺾여서 날아가잖아요. 제가 눈을 뜬 곳은 사람들이 몰린 앞뜰과는 거리가 있어 일단 바위 뒤에 숨어있었어요. 숨을 죽이고 살폈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진 잘 몰랐지만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건 알았어요. 양측에서 한명씩 나와 맨손으로 겨루고 있었는데 검은 옷을 입은 무리 중 한 사람이 남몰래 단도를 꺼내는 걸 봤거든요. 한데 엉겨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이 가까이 오면 언제라도 상대편을 찌를 준비를 하는 것 같았어요. 그때 제 눈엔 사부님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으니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튀어 나갔어요. 조심하라고 소릴 쳤죠. 순간이었어요. 사부님을 찌르려던 칼이 방향을 틀어 저에게 날아오고, 사부께서 그를 뽑아내 두 다리를 부러트린 건.”
“무당의 늙은이가 노망이 났군. 살기 하나 못 살피다니.”
“사부님을 욕하지 말아요. 어쩌면 제가 끼어들지 않았어도 사부님은 잘 해결 하셨을 지도 모르죠. 아니 아마 확실히 그럴 거예요. 그리고 그때 사부님이 저를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정말요. 독이 묻은 단도... 천운강 구가의 고독은 악랄하고도 오묘해서 칼에 찔린 저는 일각도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온몸이 시퍼렇게 변했어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반 시진 만에 해독을 했을 거야. 아니 애초에 그대에겐 생채기 하나......”
“...네에. 여튼, 그랬어요. 절 앉히곤 진기를 불어넣어 온몸에 공력을 돌려 주셨죠. 천종혈부터 기해열까지. 기경팔맥이 사부님의 내력으로 대주천을 하는 동안 길을 텄어요. 시커먼 선지피를 왈칵 쏟아내고 나서는 커다란 항아리에 물을 받게 해 거기 들어가 있었어요. 견정혈에 내력을 불어 넣어주자 밀려 나간 독으로 물이 점차 검게 변했죠. 아, 이건 정말 신기한 일인데 그러는 사이 어느 순간 말을 알아듣게 되었어요. 내공을 전해 받아서였을까요? 안 신기해요? 저, 중국어는 하나도 몰랐거든요.”
“그런데 빙빙. 중국…. 이라는 게. 영화는 뭐고 촬영은 또 뭔지.”
“어... 그런 게 있다고 쳐요 그냥. 설명해주기 귀찮은 게 아니라요. 자꾸 물어보면 얘기를 이어갈 수가 없잖아요. 음... 그러면 질문은 나중에 해요. 궁금한 것 마음속에 다 모아두었다가.”
“뭐든 답을 줄 건가.”
“그럼요. 이제 그만 됐다고 할 때까지 설명해 줄게요.”
“좋아. 그래서 독은 모두 몰아내었어?”
“네. 이레 밤낮을 쉬지 않고 내력을 불어넣어 주셨어요. 마지막 한 방울의 독이 모두 빠져나갈 때 까지요. 그리고 그렇게 제 몸에 사부님의 내공이 남게 되었어요. 사형께선 범인은 일평생 정진해도 달하지 못할 정순한 공력을 받은 거라 하셨어요. 물론 사부님께는 우물에서 한 양동이의 물을 퍼 올린 정도겠지만요. 그렇게 사부님의 여섯 번째 제자가 되었어요. 이미 무당 오호의 명성이 온 강호에 드높았는데 난데없이 혹이 하나 붙어버린 셈이지요. 얼떨결에 내공을 받았다지만 전 무예라곤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더군다나 사람들의 시선에 전 약관이 다 된 나이에 말은 할 수 있어도 글은 읽을 줄 모르는 무지랭이나 다름없었죠.”
“고생을 많이 했겠군.”
“조금요. 적응해나가는 것도, 수련도 힘들었고. 원래 있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있을까 두렵기도 했어요. 가족들과 친구들 생각에 슬프기도 했구요... 그런데 장대협은 제가 하는 말을 믿나요? 그러니까 제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든지 하는 것 말이에요.”
“나는 빙빙이 하는 말이라면 쇠 마차가 하늘을 난다고 해도 믿지.”
“어. 어떻게 알았어요? 진짜 날아요.”
“뭐어? 이거야 원. 지금 내가 당신의 세상을 모른다고 농을 하는 게야.”
“장난치는 게 아닌데. 비행기라고, 철로 만든 거대한 새 같은 것이 있어요. 장공, 이제 보니 믿는다는 건 순 빈말이었군요.”
“티가 좀 났어? 거짓말엔 통 재능이 없어 말이지.”
“그럼 이만 내려 주시겠어요?”
“아니야. 이거야 말로 거짓일세. 난 아우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믿어. 그러니 계속 얘기해줘. 빙빙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아.”
“그 뒤론 뭐... 무예를 익히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 하소연 같은 것 뿐이에요. 저 나름 몸 쓰는 건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정말 힘들었어요. 밤이고 낮이고 수련만 했어요. 연습생 시절보다 더 열심히. 연습생 때도 매일 생각했거든요. 아, 이것보다 더 열심히 할 순 없다. 죽을 만큼 열심히 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다 생각할 정도로요. 그런데 저 그것보다 더 할 수 있었더라고요.”
“그리 말하는 것 치곤 초식 하나를 알려주면 금세 둘을 깨치던걸.”
“그냥 안무 따는 것처럼, 흉내만 곧잘 낼 뿐이에요.”
“한빈은 원래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했지.”
“네. 이곳의 악사나 무희와는 조금 다르지만요.”
“춤추는 것처럼 무예를 익혔다 한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빙빙은 재능이 있어.”
“에이. 비행기 태우지 말아요... 아, 장대협을 처음 만났을 때가 여기 온 지 일 년이 갓 지났을 즘이었어요. 무영정에서 술을 마신 날요. 수리를 맡겨둔 검을 찾아오던 길이었거든요.”
“술을 마신 날?”
“기억 안 나요? 장공이 그랬잖아요. 괜히 지나가는 절 보곤 ‘죽상을 한 도련님을 보니 술맛이 달아나는군.’ 이렇게 목소리 깔고 시비 걸면서.”
“당연히 기억하지. 하지만 우리가 처음 만난 건 그날이 아니야.”
“이전에 우리가 만난 적이 있어요?”
“처음은 그보다 더 전에... 포구의 회양루 였지. 그대는 고기만두를 사다가 떠돌이 개에게 먹이고 있었어.”
“...그런 일이 있었던가요.”
“그럼.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빙빙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
“전 들어도 기억에 없는 걸 보면 그날 우리 대화를 하진 않았죠?”
“나만 멀찍이서 빙빙을 지켜봤지.”
“왜... 아. 제가 이상해 보였겠군요.”
“맞아. 도성 안팎으로 굶어 죽는 걸인도 넘쳐나는 난세에 누가 들개의 먹이를 챙겨주겠나. 그게 너무 이상하고... 이상하게 예뻐 보여서. 그래서 한참 봤지.”
“...예쁘다니. 저한테 어울리는 말은 아니네요.”
“아. 명문정파 성육협의 명성에는 누가 되는 말이겠구려.”
“그건 놀리는 거구요.”
“하하. 그래서 그대를 다시 만났을 땐 말을 걸 수밖에 없었지. 옷깃이라도 스쳐야 인연이 닿을게 아닌가.”
“그런 것 치곤 방법이 좋지 않았어요.”
“그랬나.”
“그럼요. 대뜸 시비를 걸곤 술 대결을 하자 했잖아요.”
“무영정의 백주가 아주 유명하거든. 꼭 맛보여 주고 싶었지.”
“그래서 그렇게 신경을 긁으셨다?”
“응. 그대도 알다시피 내 워낙 성격이 개차반이라. 하지만 정작 내 코를 납작하게 눌러준 건 빙빙이었잖아.”
“맞아요. 장공은 그날 고주망태가 되었죠.”
“어찌 그리 술을 잘 마시는 거야.”
“이제 와서 말인데 사실 이곳의 술은 원래 세상의 것 보다 도수가 훨씬 낮아서요. 그냥 음료수 같달까? 그런데 알고서 대결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어요. 그날 장공 때문에 처음 여기 술을 마셔본 거였거든요.”
“무영의 백주가 음료라니... 대체 어떤 독주를 마셔온 거야?”
“술만 잘 마시면 뭘 하나요. 취객에게 납치나 당하는 걸.”
“납치라니.”
“납치예요. 비틀대며 몸도 제대로 못 가누던 사람이 갑자기 날 둘러메곤 나무 위로 올라갔잖아요.”
“음주를 했으면 풍류를 즐겨야지.”
“그래서 달구경을 시켜주려 데려가셨단 말인가요.”
“빙빙은 느티나무 위에서 보았던 만월이 맘에 들지 않았어?”
“물론 예뻤죠. 예뻤어요. 다리가 떨려서 그렇지... 그러는 장공은 달은 안 보고 계속 날 보고 있었잖아요.”
“그래. 올라가 보니 달보다 아름다운 게 옆에 있지 뭔가. 거기에 대니 내가 자랑하려던 게 초라해지고 말았어.”
“또, 또. 전 그런 말보단... 차라리 멋지다는 말이 어울리죠.”
“음? 빙빙이 아니라, 그대 목에 걸려있던 영옥경이 아름답다 한 것이었는데.”
“하... 뭐라고요?”
“그런 상품의 비취는 참으로 드물거든. 은은하게 도는 푸른빛이 참 예뻤지.”
“...옥으로 꿀밤이나 때려줄 걸 그랬네요.”
“빙빙이 때린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래서 절 따라다니셨어요? 영옥경이 탐 나서.”
“그런걸 뜯어가 줍소 대놓고 목에 걸고 다니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를 혼자 내버려 두기가 뭣 하더군. 이래봬도 강호의 제일가는 악인이 아니겠나. 빙빙에게서 뭔가를 빼앗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여야만 하지 않겠어?”
“그거... 사실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목에 걸고 있었던 거예요. 황당하죠? 그 무렵은 정말 어설프긴 했어요.”
“난 빙빙이 계속 어설프길 바랐는데.”
“장공 덕분에 빨리 벗어났죠.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하긴 했지만.”
“그랬나.”
“소정방의 표국에 영옥을 건네주러 가는 게 제가 이곳에 와서 처음 받은 임무였거든요. 그런데 장공이 자꾸만 졸졸 쫓아오잖아요. 처음엔 어찌나 경계가 됐던지. 정체는 모르겠지. 시시한 농담 따먹기나 하다 잠시 잠깐 방심하면 손이나 만지작거리고.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과찬인데.”
“사실은. 정말 사실은 나중에 가선 많이 의지 했어요. 그때 장호가 같이 가지 않았다면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지도 모르죠.”
”그대의 사질은 나보다 조금 더 악한 종자더군.”
“고약한 장난질을 좀 쳐놨었죠... 자기보다 나이도 실력도 아래인 사숙이 얼마나 싫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해요. 그래도 덕분에 장공과 함께 강호를 유람하지 않았겠어요.”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고마운 걸로 쳐요 우리. 난 정말 고맙거든요. 나중엔 즐거워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봄이 오면 또 뱃놀이를 갈까. 흐르는 꽃잎에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좋아요. 가만히 떠올려 보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정말 좋았어요. 곤륜의 꼭대기, 봉우리마다 걸린 구름부터 청해의 수평선까지. 내가 많이 아팠을 때 장공이 가져왔던 제비집 죽은 아직 가끔 입안에 맛이 맴돌아요. 복주행성에선 사부님께 드리겠다고 원나라 재상 옷토고르의 진상품 마차에서 백년설삼을 훔치기도 하고. 임안 우가촌에선 물 위를 뛰는 법을 알려 주겠다 해놓곤 둘 다 강물에 빠져 모닥불에 옷을 말리기도 했죠. 전 역시 경공에는 재주가 없나 봐요.”
“힘들었었나.”
“아, 싫다는 말이 아녜요. 재미있었어요. 정말요. 그때 장공이 잡아 온 물고기를 구워 먹었던 게 정말 맛있었는데. 요즘 계속 그때가 생각이 나요. 참 좋았었구나, 하고. 장대협이 없었다면 그렇게 재미있는 일들은 평생 해보지 못했을 거예요.”
“난 더 많은 것들을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움만 남을 따름인데... 빙빙은 나와의 시간을 그리 좋게 기억해주는군.”
“이따금 말없이 사라지긴 했지만 내가 필요할 땐 언제나 뒤에 와있었잖아요. 섭섭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뭐랄까. 어울린다고 느꼈어요. 바람처럼 자유로운 사내다. 그리 생각했어요.”
“바람이라... 바람은 머물 곳을 찾아간다지.”
“장대협은 머물 곳을 찾으셨나요.”
“그럼. 돌아가는 길은 언제든 빙빙 이었는걸.”
“그건 참... 듣기 좋은 말이네요.”
“듣기에만 좋은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네. 머물 곳 없이는 그저 떠돌 뿐 인거야. 자유로운게 아니고.”
“후후, 네에...”
”......”
“......”
“빙빙.”
“......”
"한빈?”
“...아. 미안해요. 깜박 졸았나 봐요.”
“아아. 그저 불러본 거야. 빙빙은 아무것도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사람들이 장대협의 이런 모습을 좀 봐야 할 텐데요. 사대호법을 거느린 명교의 교주가 이렇게 무른 사람인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내가 이러는 건 오직 빙빙 앞에서 뿐이야.”
“세상은 당신을 악인이라 하지만 정말 속이 더 독하고 못된 건 나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
“장대협은 제가 공동이로 그 늙은이들을 혼내 주던 걸 잊으셨나요.”
“아아. 빙빙이 공동파 영감의 볼기짝을 걷어찰 땐 나도 조금 놀랐지. 손속에 정이 조금도 없더군.”
“그들은 너무 많은 악행을 저질렀어요. 난 그런 걸 참을 수 없었어요.”
“맞아. 빙빙은 대쪽 같은 구석이 있지. 난 그대의 그런 면을 좋아한다네.”
“...장공이 늘 그리 말하니 버릇이 나빠지겠어요. 아니. 사실 난 이리 말할 자격도 없죠.”
“빙빙.”
“...많이 실망했나요? 여섯 문파가 명교의 광명정에 들이닥쳤던 그 날. 앞에 선 날 보았을 때.”
“아니. 걱정했고. 미안했어. 얼마나 고초를 겪었을지. 내가 생각이 짧았어. 내가 당신에게 무예를 가르쳐선 안됐던 건데.”
“장대협은 그저 날 지키는 법을 알려주려 그랬던걸요. 본파에 들어가선 장공이 알려준 초식을 쓰면 안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는데... 그날, 우리가 위호에서 헤어진 날 말이에요. 전 그길로 무당산으로 돌아갔어요. 사형께선 오랜만에 만난 제게 얼마나 정진을 했나 보자시곤 둘째 사형의 맏이인 백강과 대련을 시켰어요. 처음엔 내력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초식만을 겨루던 것이었는데, 어쩐지 경합을 벌일수록 백강이 살수를 펼치더군요. 사형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어 더 그랬겠죠. 잔뜩 흥분한 백강이 권법만 겨루기로 한 대련에 검을 빼 들었어요. 저를 진짜 죽이고 싶어 그랬다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 치가 한빈을 소정방에 보냈던 작자인가.”
“하하. 말하지 않을 거예요. 여튼 전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고, 칼끝이 눈을 향하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신이 알려준 만천화우로 돌멩이를 던졌어요. 우박처럼 뿌려진 자갈들이 백강의 혈도를 찍어 그를 제압했죠. 아차 싶긴 했지만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줄은 몰랐어요. 그길로 전 사부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모든 걸 이실직고하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라도 거짓을 고할 것을. 미련하게... 미련하기 짝이 없는 성한빈.”
“그러지 말아. 내가 빙빙의 곧은 성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사부와 사형들께선 불같이 화를 내셨어요. 사파의 무공을 배워와 무당의 명성에 흠집을 냈다며 절 파문 하겠다고도 하셨죠. 그리곤 무림의 난잡한 일에 좀체 어울리지 않던 무당도 명교 토벌에 합세하겠다고 선포하셨어요.”
“...빙빙도 그렇게 생각해? 명교는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존재라고.“
”아뇨...적어도 장공 곁에서 제가 봤던 명교의 교도들은. 호법과 오행기는 모두 충직하고 강인한 호걸들이었어요. 말투나 행동이 조금 거칠어 보일 수는 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인걸요. 그런 이들을 일방적으로 몰아세워 토벌을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파문만은 거두어달라 간청했어요. 그 사이에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냥 내게로 오지 그랬어.”
“그럴걸 그랬어요. 그땐 그게 참 어려웠어요. 지금 와서 보면 별것도 아닌걸... 머리속엔 그저 싸움을 막아야만 한다는 생각 뿐이라. 사람들은 당신을 가리켜 마교를 이끄는 간악한 악인이라 폄하했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가 본 장대협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의리 있고. 약한 자를 위하는 의협인데.”
“나를 그리 말해주는 이는 세상에 그대 뿐이야.”
“세상이 당신을 몰라 그래요. 당신을 알려고 하지 않아서... 장대협. 왜 모두를 데리고 떠나지 않았나요. 서신이 도착하지 않았던가요.”
“어떤 일들은... 어떤 대의는 목숨보다 중하기도 하지.”
“저 한사람으론 여섯 정파가 결의하는 걸 막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바늘구멍 같은 희망에 걸어 보기로 했죠. 광명정에서 당신을 만나 사람들 앞에서 해명을 한다면. 명교가 항간의 소문이나 모함처럼 그런 삿된 일을 하는 무리가 아니라는 걸 설명한다면 혹시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이요.”
“빙빙이 정말 많이 애쓴 것 알아.”
“어쩌면... 그래요. 정파라 불리는 자들이 사파로 칭해지는 이들보다 더 악할지도 모르겠어요. ‘정’과 ‘사’는. 사람의 인품은. 대의는. 무를 자르듯 그렇게 뚝딱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더군요. 명교에 정도가 있는지, 아니면 사술을 펼치는 마교였던 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던 거예요. 구마사멸은 구실이고 사람들의 본심은 명교의 보물인 성화령. 그 속에 감춰진 무공비급을 탈취하는 거였죠.”
“빙빙...”
“당신의 무공이 강대하고 심오한 탓에 여섯 문파가 뛰어들었는데도 제압이 쉽지 않자 사형들이 저를 불렀어요. 마음을 바꿨다고. 더 이상 무고한 사람이 죽어 나가는 피해는 막자며. 당신과 대화를 해서 오해를 풀 테니 다리를 놓아 달라고 했죠.”
“한빈. 괴로운 일은 잊어도 돼.”
“이 빚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요. 내가 장공에게 어떤 말로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 알면서 따라간 것이야. 독을 먹이던 급습을 하던. 살아서 돌아가긴 어렵다는 거. 그거 알면서 내가 빙빙을 따라간 거야.”
“어째서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빙빙이 위험 할 것 같아서. 내겐 어떤 대의보다 중한 게 성한빈이라 어쩔 수 없었어.”
“사형들이 그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어요. 어떻게 내 손으로 당신에게... 그것도 천운강의 고독, 그 지독한 것을. 어떻게.”
마음이 무너지는 고통에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한빈이 고개를 들어 멀리, 이제는 보이지 않는 절강의 한낮에 의식을 던지며 지난밤을 회상했다.
강호에 신망이 두터웠던 무당파의 다섯 제자가 나서서 육대문파와 긴밀한 대화를 나누었고, 곧 피로 얼룩진 전투가 일단락되었다. 이미 부상자와 사망자가 양측 모두 수십이었으나, 여기에서라도 멈출 수 있다면 조금의 희망이라도 있지 않을까 한빈은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화로 잘 풀어볼 것이니 장교주와의 다리를 놔달라던 사형의 부탁에 한빈은 기꺼운 마음으로 응했다.
다음을 기약하며 무당산에 돌아온 후 한빈은 장호를 다시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수없이 고민 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용서를 구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뜬눈으로 꼬박 사흘 밤을 새고 약속했던 객잔에서 장호를 기다리며 한빈은 결심했다. 이 일이 끝나면 문파를 나오겠다고. 그리고 장호에게 나와 함께 떠나자, 그리 말해야겠다고. 먼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분위기가 누그러졌을 때 들어오겠단 사형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빈이 손바닥에 배어 나오는 땀을 무릎에 닦았다.
곧 푸른 옷을 입은 장호가 들어와 자리에 앉자 객잔의 시동이 찻상을 차려주었다. 조심히 문이 닫히고, 둘 사이 한 번도 끼어든 적 없었던 적막이 자리를 채웠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장호가 먼저 말을 건넸다.
“며칠 사이에 왜 이리 야위었어.”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목소리에 한빈이 손등으로 볼을 꾹꾹 누르며 그런가요. 하고 답했다. 긴장이 풀린 한빈이 향긋한 차를 장호의 잔에 따랐다. 어쩐지 가만히 찻잔을 내려다 보고 있는 장호에게 자신의 잔도 채운 한빈이 미소를 지으며 한 모금 권했다.
“빙빙이 웃는 걸 보니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한빈이 웃는 모습을 눈에 새기듯 찬찬히 바라보던 장호가 일부러 시선을 끌려는 것처럼 당당한 기세로 말했다. 그리곤 앞에 놓인 뜨거운 차를 들어 망설임 없이 한입에 털어 넣었다. 평소답지 않은 장호의 행동에 당황한 한빈이 잔을 들려던 모습 그대로 얼어붙고, 그런 한빈을 보며 물기 어린 미소를 짓던 장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져갔다.
굳게 다문 장호의 입술 사이로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붉게 물든 눈으로 한빈의 손에 들린 찻잔을 매섭게 쳐내고 상을 뒤엎었다. 기어코 붉은 선혈을 왈칵 토해냈을 때, 방안의 소란에 숨어있던 무당의 제자들과 육대 문파의 장문인들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 물기에 이지러진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리는 것을 마주 했을 때.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는 자신을 보곤 안심한 듯 ‘역시 당신은 몰랐군.’ 하고 말했을 때. 한빈의 안에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장호를 구석에 몰고 그 앞을 막아선 한빈이 자신들을 포위한 수십의 고수와 대척했다. 독이었다. 무색 무미 무취의 이런 고독은 천운강 구가의 것 밖에는 없었다. 살갑게 지내진 못했어도 맘속으로 존경하고 따랐던 제 사형들이 이런 악랄한 짓을 계획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한빈은 언젠가 사부가 제게 그러했듯 등 뒤로 잡은 장호의 손목에 내력을 쏟아 부으며 한편으로는 사형들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목 놓아 외쳤다.
“마교의 사술에 제자들의 목숨이 위협되니 대의를 위해서라면 방편을 조금 쓴다 해서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화산의 장문인이 소리쳤다. 간악한 방법으로 죄 없는 이의 목숨을 취하고도 어찌 명문정파라 할 수 있겠느냐고 한빈이 대거리를 했다. 등 뒤에 쓰러진 장호가 쏟아내는 피가 바닥을 물들여 한빈의 앞까지 흘렀다. 온몸의 피를 뽑아 독을 밀어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그 생각을 알아챈 듯 소림의 방장이 신영을 날렸다. 용조수의 매서운 기세가 한빈을 잡아채 떼어내려 했다. 이제 무학의 걸음마를 뗀 한빈의 무공과 소림 방장의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간극이 있었으나 여기서 물러 날 수는 없었다. 그나마 한빈이 무당의 제자인 신분이었기에 소림 방장인 원공대사는 목숨을 빼앗으려는 살수는 펼치지 않았고, 그 덕에 한빈은 한쪽 팔로나마 장호를 지켜내며 왼손으로는 제 모든 내력을 그러모아 장호에게 넘겨주었다.
본디 호흡과 운기조식으로 오랜 세월을 들여 내공 연마를 하는 정파와, 외공으로 신체를 강건하게 만들어 거꾸로 혈도를 뚫으며 쌓이는 사파의 내공은 그 본질부터가 달라 서로 주고 받을 수 없을뿐더러, 때로는 상대에게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내상을 입힐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도가의 경지에 오른 무당파 장문인의 정순한 내공은 극단에 서 있는 장호에게도 무리 없이 섞여들어 갔다.
조금만, 조금만 더. 배수의 진을 친다는 각오로 한빈이 장호에게 더 붙어서고. 무당의 직계 제자를 쉬이 해할 수도 없는 각 파의 고수들이 두 사람의 주위를 빙빙 돌며 허초를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네 놈이 기어코 사교에 홀려 무당의 무공을 빼돌리는 구나!”
한빈의 둘째 사형 백운이 무당의 신묘한 경공 중 하나인 제운종으로 몸을 날리며 팔을 뻗었다. 강기를 두른 장이 한빈의 왼손을 노리며 날아들고, 잠시라도 손을 뗄 수 없었던 한빈이 장호를 감싸 안으며 등을 돌렸다. 면장이 한빈의 어깨를 강타하고, 펑 소리와 벽에 처박힌 한빈이 바닥을 기었다. 그 와중에도 질기게 장호의 손목을 놓지 않은 왼손은 면장의 여파로 덜덜 떨면서도 내력을 불어 넣었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겨우 비척이며 몸을 가누기 시작한 장호가 숨을 몰아쉬며 한빈의 손을 떼어냈다. 걱정스레 자신을 올려다보는 한빈의 멱살을 잡아 무당의 제자들이 있는 쪽으로 집어던진 장호가 소매로 코피를 닦으며 말했다.
“도덕군자 애송이는 그만 데려가시오.”
다 죽어가는 사람이 던진 게 맞는지 날아오는 한빈을 받아낸 백강이 발을 끌며 석자 정도 밀려났다. 당황한 한빈의 눈을 못 본 채 하며 장호가 내공을 실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에서야 후배가 명문정파의 호걸들께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외다. 객잔의 찻잎이 영 형편없는 까닭에 내 비록 몰골이 추레하나 강호의 의협들께선 이해해 주시리라 믿소.”
허리를 바로 세운 장호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각 문파의 고수들은 당당하고 정중한 태도가 도리어 자신들을 비꼰다는 것을 알았으나 떳떳치 못한 일에 가담한 죄가 있어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얼굴만 붉혔다. 그 와중에도 무당의 제자들은 한 방울로 말을 죽이는 맹독을 한잔이나 들이마시고서도 꼿꼿이 서 있는 장호를 보며 남몰래 혀를 내둘렀다.
“이 자리에 명교 교주 장호의 목을 내놓으니 필요한 선배가 있다면 얼마든 거둬가시오. 그리고 의미 없는 살생은 이만 끝내기로 하지요. 그래도 명색이 교주인데 이놈 목에 그 정도 값은 쳐주시지 않겠소.”
“네 이놈. 성화령은 어디 있느냐!”
화산파의 장로가 참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냈다. 담담하고 진중한 표정으로 말 하던 장호가 싸늘한 눈빛으로 소리친 장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돌연 미친 사람처럼 방안을 울릴 정도로 웃어댔다.
“어찌 성화령을 찾으시오. 성화령은 명교의 교주에게만 내려오는 보물인데. 아, 혹 이 후배의 자리가 탐나셨던 것이오? 하하하. 명문정파의 의협들이 어떻게 본교의 교주가 될 수 있겠소. 허나 그리 원하신다면 모든 일엔 절차가 있는 법. 본디 교도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의식을 치러야 하나, 금일은 교주의 권한으로 특별히 허락하니, 본 교단에 귀의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이리 와 내 앞에 무릎을 꿇으시면 되겠소.”
“네놈이 말장난을 하는구나!”
“나를 죽이시오. 나를 죽이고 좌사와 우사. 네 호법. 다섯 오행기도 죽이시오. 기백의 교도들과 그 식솔까지 모두 찾아내 멸하시오. 그런다 한들 그대들이 비급의 그림자라도 볼 수 있을까. 그 누가 성화령의 타오르는 불꽃을 꺼트릴 수 있단 말이냐.”
장호가 방안의 인사들을 한 명 한 명 눈에 담으며 둘러보았다. 깊은 증오와 원한이 가득한 눈빛에 시선이 마주친 이들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결행을 주도한 무당의 백운이 문답 무용. 공중제비를 돌며 장호에게로 날아들었다. 언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걸 이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판단이었다.
“내 장교주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소만, 두 문파 간의 악연은 이쯤 정리하는 것이 좋겠소.”
그리고는 공력을 끌어올려 무당의 절기 십단금의 전초를 준비했다.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에 거짓은 없었던 장호가 마지막으로 한빈을 눈에 담은 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모든 일은 순간이었다.
저항하지 않는 장호를 보고 한빈이 절규하며 둘 사이로 뛰어들었다. 방심하다 한빈을 놓친 백강이 바로 뒤따르며 비장을 날렸다. 태사부의 공력을 아무 노력 없이 이어받은 한빈이 내내 눈엣가시라 결행 전 소란을 틈 타 제거해 버리기로 남몰래 마음 먹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듣는 애달픈 울음에 눈을 뜬 장호가 한빈을 공격하려 하는 백강에게 장을 뻗어 물리치는 사이 한빈이 목덜미를 끌어안아 그의 몸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궁신탄영으로 쏘아진 둘째 사형 백운의 십단금이 장호를 가린 한빈을 가격했다. 한빈이 공중으로 퉁겨져 날아가고, 미처 지키지 못한 장호가 짐승 같은 노성을 내지르며 온몸의 공력을 폭발시켰다. 광풍이 일어나며 장호가 쏟아냈던 독이 섞인 피가 방울방울 떠올라 산탄처럼 쏟아졌다. 핏방울은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입에. 의복과 살갗을 파고들었다. 극약에 중독된 이들이 잇따라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피바람이 몰아친 방안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너무나도 큰 힘을 쏟아낸 탓에 까무러치듯 중심을 잃었던 장호가 손바닥으로 땅을 짚으며 떨어지는 한빈을 향해 뛰어갔다. 십단금을 온몸으로 받아낸 탓에 뼈가 드러날 정도로 늑골이 으스러진 한빈을 몸을 굴러 받아낸 장호가 마지막 기운을 짜냈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한 사이 하나 뿐인 출입구를 뚫고 몸을 날렸다. 언젠가 한빈이 부러워하던 상승 경공인 허공 답보로 공중을 밟았으나, 맥진한 상태로는 채 두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실족했다.
머리가 땅을 향해 떨어지는 와중에도 발을 차 방향을 튼 장호가 손을 뻗어 객잔의 난간을 부수며 속도를 늦췄다. 다섯 개 층을 추락하고서야 한빈을 감싸며 몸을 둥글게 만 장호가 마구간의 나무 지붕 위로 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리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일어나 피투성이가 된 채 말 등 위에 올라탔다.
아래를 지키던 호위들이 두 사람을 공격했으나 다치고 남루해졌다 한들 한낱 속가 제자의 무공은 장호에게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장호가 말의 갈기를 뜯어 내공을 담아 암기처럼 날리자 문하생들이 얼굴을 감싸 쥐며 바닥을 굴렀다. 가까스로 포위를 뚫고 달아난 두 사람은 멈추지 않고 말을 달려 서쪽으로 향했다.
살을 에는 추위가 야속했으나 눈이 두 사람의 자취를 덮어주었다. 목적지도 정해두지 않은 채 그저 아무도 둘을 찾지 않는 곳으로. 절강을 벗어나 심산을 넘어 소리 없이 온통 새하얗게 변모한 설원을 가르며 세상에게서 달아났다.
혈도를 짚어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몸을 마비시키곤 한빈이 그랬던 것처럼 온 몸에 진기를 돌려주면서, 정신을 놓지 않게 계속 말을 걸었다. 달이 뜨고, 다시 해가 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하루 밤낮을 쉬지 않고 전력으로 내달린 말이 결국 무릎을 꺾으며 쓰러졌다. 모든 기력을 다해가던 두 사람이 말과 함께 눈밭에 나동그라졌다. 이미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말은 여기에서 운명을 다한 듯했다.
비척이며 기어가듯 일어나 한빈을 안아 올린 장호가 주위를 둘러보다 커다란 바위그늘 아래 눈이 쌓이지 않은 곳으로 향했다. 적당한 바위에 한빈을 기대 앉혀두곤 한손으론 공력을 불어넣어 주면서 다른 손으론 눈을 한덩이 집어 자신의 얼굴에 문질렀다. 소매로 벅벅 닦으며 피 칠갑을 지워낸 장호가 한빈을 살폈다. 말에서 떨어지며 충격을 받은 탓에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깨끗한 눈을 가져와 한빈의 입술 위에 조금씩 올려주었다. 눈이 녹으며 메마른 입을 축여주자 잠시 기절했었던 한빈이 눈을 떴다. 떨리는 속눈썹 아래. 까만 눈동자에는 여느 때와 같이 맑은 빛이 서려 있었으나 숨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일렁였다.
“장호.”
“정신이 들어?”
“네. 저는 괜찮아요.”
부러진 늑골이 장기를 찌르고 있는 탓에 기침도 하지 못하고 색색 대는 숨을 몰아쉰 한빈이 떨리는 손으로 장호의 팔을 잡았다. 장호 또한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게 놀라울 정도로 만신창이인 몸이었다. 이미 아까부터 바닥난 공력은 끊어질 듯 가는 실처럼 넘어올 뿐이었다. 장호가 넣어주는 진기가 사라져가자 고통이 발끝에서부터 해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다만 내색을 하지 않으려 숨을 고르던 한빈이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니 이제는 기운을 거둬요. 할 만큼 했어요.”
“빙빙. 질문은 다 대답해주기로 했잖아. 난 아직 하나도 묻지 못했어.”
한빈이 눈을 감는 게 두려웠던 탓에 장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급히 말을 붙였다. 지친 한빈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눈앞의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룻밤 사이 머리가 다 하얗게 세었네요.”
난리통에 늘 단정히 틀어 올렸던 장호의 머리가 풀어져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내력의 바닥, 그 아래 수명을 깎아서까지 기운을 쓰고 있는 탓인지. 혹은 지극한 슬픔과 노여움 탓인지. 흑단처럼 검던 머리가 하루 만에 은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가.”
“장대협은 백발이어도 여전히 멋있군요.”
신기한 것들 보듯 눈을 반짝인 한빈이 장호의 머리칼을 가져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치게 해서 미안해.”
한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뛰어든걸요. 저야말로 미안해요. 미안해요 모든게.”
장호가 조용히 물었다.
“날 만난 걸 후회하지 않아?”
모든 마음의 준비를 다 마치고 갔다 생각했지만 둘 사이는 일방향으로 흐르는 관계라 생각했던 장호였기에, 한빈이 자신을 대신해 목숨을 내놓고 뛰어든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단장지애의 고통을 느끼며 묻는 장호의 말에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한빈이 대답했다.
“그러게요. 어쩌다 나는. 어떤 우연으로 당신을 만나서.”
“우연이 아니야. 내 탓으로. 모두 내 손으로 이어 붙여서. 내가 빙빙의 인생에 끼어들었어.”
“그래요 인연... 아니 운명이었나 봐요. 그래서 이렇게...”
하려던 말을 멈춘 한빈이 장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내가 죽으면 복수를 할 건가요?”
“빙빙은 죽지 않아. 그런 말 하지 말아.”
입술을 다문 채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은 한빈이 다시 말했다.
“복수 할 건가요?”
재차 묻는 한빈의 목소리에 잠시 그가 없는 세상으로 끌려들어 간 듯 장호의 눈이 먼 곳을 바라보며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놈들, 그 문파, 식솔, 하인의 기르는 개새끼까지. 모두 내 손으로,”
“정말 악당 같은 말이네요.”
기어코 죽이겠다는 말이 나오기 전 말을 끊은 한빈이 희게 웃었다. 그 미소에 돌아온 장호의 이성이 흠칫 놀라며 너무 세게 움켜쥐었던 손을 놓아주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금방 따라갈게.”
“그러지 말아요. 복수도 말고, 너무 이르게 따라오지도 말아요.”
눈보라가 몰아치는 평원, 바위그늘 아래 앉은 한빈이 가만히 눈을 감고 말했다.
“날 더러 그대가 없는 지옥을 살아내란 말인가.”
“네.”
“어찌 그리 매정하게 굴어.”
한여름 나무 그늘 아래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미소를 지으면서.
“사랑하니까요.”
“......”
눈밭에 내어놓은 듯 서늘해진 가슴에 한빈의 마음이 돌덩이처럼 내려앉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린 장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어버리고, 한빈은 어쩐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난 아마 죽으면 천국에 갈 거야. 이것만은 자신할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 괜히 엇갈리지 말아요. 천천히 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한빈의 말이 장호를 아프게 찔렀다. 한빈이 말하는 천국이 장호에게는 너무나도 먼 이야기라서.
“......날 사랑했어?”
자신을 남겨두고 떠날 준비를 하는 한빈이 미워서.
“오늘도 사랑해요.”
“......”
“사랑해요. 장호.”
그럼에도 너무나 사랑해서. 턱이 덜덜 떨려서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돌린 장호가 한참 마음을 추스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고약한 사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내뱉고 보니 쓸쓸했다.
“저 독하다고 했었죠?”
“빙빙은 허튼말을 하는 법이 없군.”
한빈이 소리 없이 웃다 장호의 볼에 손을 얹었다.
“이름을 좀 더 빨리 불러 볼 걸 그랬어요.”
한빈이 장호의 얼굴을 조심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음이 들키는 게 겁나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다시 만나면... 그땐 조금 더 솔직해져 볼게요.”
볼에 닿는 한빈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역시 별 다를 바 없는 손으로 한빈의 손을 움켜쥔 장호가 손바닥에 입술을 묻으며 숨을 모아 조금이라도 녹여주려 주물렀다.
“이제는 조금 춥네요... 안아 줄래요?”
바위에 기대있던 한빈을 품에 끌어안은 장호가 머리칼을 쓰다듬다 나지막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언젠가 호수에 부서지는 달빛을 보며 한빈이 불러주었던 노래였다.
“기억하고 있었군요.”
“그대 세상의 말이라 가사는 외우지 못했어. 만약... 우리에게도 다음이 있다면 그땐 나도 빙빙의 언어로 말하면 좋겠어. 당신을 더 이해하고 싶어.”
“그것도 좋네요.”
살풋 웃은 한빈이 고개를 틀어 장호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이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요...”
“밤이 되어 그래. 나 여기 있어.”
“거짓말쟁이. 지금은 한낮이잖아요.”
한빈의 뒤통수를 받쳐 무릎에 누인 장호가 도포를 벗어 몸을 덮어주었다. 초점이 흐려진 한빈의 눈이 가만히 뿌연 인영을 살피다 손을 들어 얼굴을 찬찬히 더듬었다.
“울고 있군요.”
“아니. 눈이 녹아 그러지.”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늘 행복 하라고는 못하겠지만...”
“응. 그럴게.”
두 세 줄기 길을 내며 볼을 가로지르는 눈물을 소리 없이 삼키고 장호가 의연히 말했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한빈이 가만히 속삭였다.
“내내 안녕히...”
장호. 멀리서 불어온 나의 바람.
마지막 힘을 다해 지은 미소가 풀어지고. 한빈의 목소리가 눈발에 섞여 날렸다. 평온히 눈을 감은 한빈을 끌어안은 장호가 어깨를 떨었다.
긴 꿈을 꿨다.
눈을 뜨니 주위가 소란했다. 뒤늦게 찌르는 듯한 고통이 따라왔다.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혼비백산 하여 간호사를 호출한 어머니도 한달음에 뛰어와 한빈의 손을 잡고 울었다.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곤 많이 아프냐고 물었다. 일어나줘서 고맙다고도 말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현실에 꿈의 여운이 쓸려 내려갔다. 그런가. 경황이 없었지만 정말 많이 아팠기에 한빈은 그런가 보다 했다.
창 밖은 이미 봄이었다. 교통사고는 한빈을 석 달 간 잠들어 있게 했다. 깨끗하게 맞춰진 다리 골절은 재활을 꾸준히 하면 부러지기 전보다 더 튼튼해 질 거라 했지만 시간과 품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깁스를 한 채로 오랜만에 연습실 도장을 찍은 날 실장에게 불려갔다. 많은 아이들이 울기도, 허탈한 표정으로 나오기도 하던 방이었다. 병원에 있던 사이 소속사의 데뷔조는 추려졌으니 지금의 회사와 함께 가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완곡히 표현했지만 냉랭했다. 고작 스물 언저리에 사회가 베풀 수 있는 관용이란 그런 것이었다. 마음이 크게 휘청인 탓에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빈을 좋게 보던 디렉터가 새로 옮긴 레이블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깊이 바라는 일은 끊어질 듯 이어져서 사람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한빈은 그걸 실낱같은 행운이자 잡아야 할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회사에 들어갔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왔다던 디렉터에게 재능이 있으니 데려온 거라 격려를 받았지만 한빈의 구멍은 채워지지 않았다. 뭔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 이유 없는 조바심. 한빈은 그것이 손에 닿지 않는 자신의 꿈이라 생각했다. 불안이 밀려올 때면 더욱 연습에 몰두했다. 녹초가 되어 기절하듯 누우면 잠시라도 알 수 없는 초조함에서 달아날 수 있었다.
잠에서 깨면 눈물을 닦아야 할 때가 많았지만 이유는 알지 못했다. 꿈에서 누군가를 보았던 것 같은데 금방 깼을 때는 생각이 날 듯도 하더니 어쩐지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흩어져만 갔다.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분명 아는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주변 사람들 중엔 그런 느낌을 가진 이가 없었다. 그저 데뷔한 사람들이 미디어에서 말하곤 하는 연습생 시절의 불안이 자신에게는 이렇게 나타나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서바이벌 오디션 참가자 모집 공고를 봤을 때 한빈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어떻게 해도 이것보다 더 할 수는 없겠다 싶을 만큼 모든 걸 쏟아부었다. 자신에게 이 정도의 연료가 더 남아 있었나 스스로 신기할 정도였다. 3차 심사까지 통과한 후 사전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온 날 밤 한빈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긴장이 심장을 잡고 버티듯 밤새 그를 쥐고 흔들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고 촬영장에 가 앉았다. 많은 연습생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백여 명 중엔 저런 이가 연예인을 하는구나 싶은 사람도 있었고, 아는 얼굴들도 더러 있었다. 눈인사를 하고 가까이 앉은 지인들과는 그 동안의 근황을 묻는 사이 촬영이 시작 되었다.
그토록 바라왔던 일에 한 걸음 다가갔기 때문일까. 지나치게 가슴이 조였다. 긴 시간 동안의 녹화에 지쳐 모두가 처음의 서슬 퍼런 긴장이 풀려갈 때도 한빈 만은 계속 바짝 굳어있었다. 이상하리만치의 긴장. 워낙 무대체질인 탓에 이정도로 떨리는 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 할 때 쯤 그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장하오입니다.
긴장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고 인사했을 때. 한빈의 심장이 쿵, 발아래로 나동그라졌다. 질문을 이해하려 눈을 크게 뜨고 경청하다 자꾸만 마르는 입술을 말아 무는 걸 볼 땐 어쩐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서툰 한국어로 중국에서 왔다고 소개한 그가 바이올린에 활을 미끄러트릴 땐 바람이 불었다. 꽉 막힌 세트장 한가운데서 그럴 리가 없건만 한빈은 엷은 바람이 볼에 와 닿는 것을 피부로 똑똑히 느꼈다.
큰 박수와 함께 칭찬을 받고선 싱긋 웃는 얼굴이. 반쯤 접힌 눈이 마침내 한빈을 향했을 때. 그 찰나의 마주침에 내내 죄어오던 심장이 온 힘을 다해 박동했다.
도무지 모를 수 없게. 기어코 알 수밖에 없게.
안녕.
그에게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시간을 접고 싶은 마음을 담아 기도하듯 되뇌었다.
안녕.
안녕.
안녕. 장호.
매일 안녕을 묻는 사이가 될 거야. 우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