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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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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오는 도시의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안다.

 

복작스러운데, 또 공허하다. 타지에서 느끼는 이방인의 감상은 오랜만이었다. 시간은 언제든 있어 줄 것처럼 자비롭다가도 가차 없이 달아나버린다. 제겐 유달리도 늘 모질곤 해서 언제나 낯섦을 해결해줄 만큼은 주어지지 않았다. 장하오는 도쿄의 화려한 불야성을 응시하다 문득 유리창에 비치는 제 얼굴을 마주했다.

 

'착하게 생겼어.'

누군가의 말이 떠올라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웃었다. 너는 지금의 나를 보아도 그런 말을 해줄까.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늘어진 빌딩의 창들이 나를 쳐다보는 듯한 기분에 압도된다. 움직이던 차가 속도를 줄였다. 到着しました. 택시 기사의 음성과 함께 다시금 현실과 마주한다. 시답잖은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チェックインできました。 安らかな夜をお過ごしください。

평온한 밤이 되라는 말이 무색하게 일이 쓰나미처럼 몰아친다.

 

장 감독님, 이번 광고촬영 현장에서 통역을 도와주실 아야카 상입니다. 호텔 데스크에서 시작된 통성명은 로비까지 이어졌다. 이쪽은 도쿄 본사의 마케팅 총괄 팀장 타츠야 상입니다. 대리 정도로 직급이 유추되는 광고회사 직원은 분주했다. 제 나라, 제 언어가 아닌 상황 속에서 여기저기 눈치 보느라 허둥지둥. 장하오는 이 한국인 여성을 돕고 싶었다. 꼭 저와 닮아 보여서. 저를 향해 내민 명함들을 하나씩 수거하며 문장을 반복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장하오 감독입니다. 함께 일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방인의 입에서 나온 모국어는 분위기를 환기하는데 제격이다. 장하오는 비행시간을 쪼개 문장을 외웠다. 발음이 좋을 수록 호감도는 상승한다. 일본어를 정말 잘 하시네요. 타츠야 상은 호탕하게 웃으며 스몰 토크를 건넸다. 정말이네요. 아야카 상은 옆자리에 선 타츠야 상의 팔을 두드리며 공감했다. 삽시간에 풀어진 공기에 한국인 여성은 한숨을 돌렸다. 대화는 길어졌다. 장하오는 여전히 착한 얼굴로 화답했다.

 

이틀 뒤 촬영장에서 뵙겠습니다. 대화의 종결은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자리를 옮겨 '산토리 타임'을 가지자는 타츠야 상의 말에는 한껏 아쉬운 표정으로 일이 많다 답했다. 야아카 상은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불편한 정장을 껴입고서도 아쉽다는 말을 했다. 모두가 거짓말은 아니었다. 타츠야 상은 한국에서 온 일본말을 하는 중국인 신예 감독에게 흥미가 생겼으며 아야카 상은 초과근무를 위로해 줄 히비키 한 잔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장하오는 피곤했다. 피로감은 모든 것을 일로 만들었다.

 

 

 

 

 

숫자가 바뀌는 패널에 시선을 둔 채 차례를 기다렸다. 승강기는 시간이 무색하게도 잠들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졌다. 108제곱피트 공간의 답답함은 배가 됐다. 적응할 시차는 없으나 오늘도 쉽게 잠이 들 것 같지 않았다. 어느샌가 찾아온 불면은 일상이 되었다. 머리만 대면 기절 잠을 자던 때도 있었는데. 실없는 생각이 어김없이 이어졌다.

 

드디어 차례가 왔다.

 

엘리베이터와는 달리 복도는 한적했다. 저층은 아니지만 꼭대기보다는 낮은. 애매한 층수는 사람들의 기호에서 밀려났다. 장하오는 비교적 왕래가 적은 조용한 공간을 좋아했다. 누군가의 습관이 옮겨온 탓이다. 복도 끝에서 들리는 도어락 소리가 평화를 깼다. 호텔에서 타인을 마주하는 것은 썩 유쾌하진 않은 일이기에 장하오는 걸음을 빨리했다.

 

타이밍은 엇나갔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빠른 보폭으로 걷던 속도가 느려졌다. 머리가 하얘졌다. 마치 제 기능을 잃은 것처럼.

 

 

 

성한빈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나쁘게 생긴 남자와 함께.

 

 

 

 

 

 

 

 

 

 

Not for Sale

장하오 성한빈

 

 

 

 

 

 

 

 

 

 

성한빈에게서는 값비싼 우디향이 났다. 스치는 짧은 순간에 생각했다. 역시나 성한빈에게는 싸구려 비누 냄새보다 저 냄새가 훨씬 잘 어울린다. 장하오는 몇 번의 실패 끝에 룸 키를 꽂고선 곧장 화장실로 가 손을 씻었다. 가열찬 물줄기에도 깨끗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아예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심장이 갑갑했다. 정수리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그제야 뇌가 제 기능을 한다.

 

나를 봤나?

 

장하오는 5분 전의 1초를 회상했다. 분명 시선이 맞닿았다. 성한빈이 먼저 눈길을 거두는 것까지 확인했다. 다시금 곧 전의 상황이 떠오르자 숨에 받쳐 폐까지 물이 차는 기분이 들었다. 가빠진 숨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샤워기를 껐다. 기대에 찬 제 모습이 역했다.

 

"하하..."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뭘 기대하는 건지.

 

 

 

 

 

장 감독! 형, 안에 있어? 한 피디의 목소리다. 장하오는 내뱉는 한숨으로 호흡을 안정시켰다. 느린 발걸음으로 샤워부스를 벗어나 호텔 가운을 걸쳤다. 수건을 빼 들어 얼굴의 물기를 아무렇게나 닦으며 잡생각들도 다 닦아내어 지길 바랐다.

 

또 다시 방문이 쿵쿵. 얼굴을 닦던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문을 열었다.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 한동은은 한껏 상기된 얼굴을 한 채 구슬땀을 삐질삐질 매달고 있었다.

 

"너는 참을성이 없어. 장비 빠진 거는 없고? 로비에 맡겨 두면 된다 던데."

"봤어?"

 

동문서답도 적당히 해야. 무작정 물어오는 말에 건성으로 답했다.

 

"."

"봤네!"

"안 봤어."

"뭔 지 말 안 했는데."

"어. 근데 안 봤어."

 

장하오는 신발을 벗어 던지고 멋대로 영역을 침범한 후배를 아니꼬운 표정으로 구경했다. 제 말은 귓등으로 흘리는 지. 듣지도 않을 거면 왜 물어. 한동은은 홀린 듯 통창 앞에 섰다. 와... 우리 형 진짜 성공했나 봐. 그리고선 도쿄의 야경을 한 눈에 담으며 연신 감복한 소리를 해댔다.

 

이런 방을 잡아줬단 말이야? 얼마나 하려나. 장하오 많이 컸다 진짜. 여전히 혼잣말을 해댔다. 한참 곳곳을 배회하던 한동은은 단말마의 감탄과 함께 침대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윽. 저게 미쳤나.

 

"야이씨. 더럽게."

"나 여기서 잘래. 장 형은 저어기 밑에 보이는 호텔로 가면 돼. 거기 가면 애들도 있으니까 남자들끼리 알지? 사나이의 밤을 보내 봐. 난 여기서 호사 좀 누리려니까."

 

한동은은 침대 위에서 꼼짝하지 않을 기세였다. 아 왜! 형 어차피 잠도 못 잘 거잖아! 가서 놀아!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내뱉는 동안 팔을 잡아 당겨도, 발을 들어 허벅지를 살살 밀어도 움직일 기미는 없었다. 그렇게 나오겠단 거지.

 

"한동은."

"...불안하게 이름을 불러."

 

장하오는 한동은을 대하는 필승법을 안다.

 

"...미안. 나 아직 너희를 이 호텔에 재울 능력 없어."

"...어이 장 형. 왜 그런 말을 해. 표정 안 바꿔?"

 

마지막으로,

 

"역시 나랑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아니나 다를까. 형 여기서 태어난 사람 같아! 우리 장 감독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당연히 이런 데서 자야지! 그리고 우리 숙소 나름 좋아. 쪼들리는 제작비 탈탈 턴 것치고 가성비 미쳤어. 한동은은 어느새 한 몸이 됐던 침대에서 일어나 소리를 꽥 질러댔다.

 

한 사람의 밑바닥까지 본 유일한 사람은 그 사람의 주눅 든 모습에 약하기 마련이다. 으레 선을 넘나드는 장난을 치다가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곧바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리고 약아빠진 장하오는 이것을 제대로 써먹을 줄 안다. 예상대로 한동은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장하오는 대번 표정을 바꿔 끼웠다. 주먹 쥔 손으로 코와 입을 막은 채 웃음을 참는 장하오와 눈이 마주치자 한동은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머리를 헤집어댔다.

 

"! 그런 장난 좀 치지 말라고. 사람 쫄리게."

"고용주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이럴 때만 또. 됐고. 술이나 마시러 가자. 애들도 짐 다 풀었어."

 

혹시 내 얼굴이 술이 생각나는 얼굴인가. 장하오는 여태 실룩대는 한동은의 눈썹을 보며 생각했다. 왜 죄다 저를 보면 술을 찾는 지. 오늘만 해도 두 번째 제안이었다. 냉수마찰로도 해결되지 않은 갑갑함에 맥주 한 잔이 간절하긴 했다. 여러모로 복잡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으로는. 오늘을 후회할 것이 틀림없다.

 

"안 가. 너희끼리 가."

"한빈이 형 얼굴에 살 많이 내렸더라. 분위기도 바뀌고."

"어. 그렇더라."

"옆에 남자도 봄? 개 잘생김."

 

다만 한동은 역시 장하오를 대하는 필승법을 안다.

 

"...하. 카드 줄게 꺼져."

"땡큐. 역시 장 형은 한국말을 너무 잘 알아들어. 진짜 안 가?"

"어 안 가. 빨리 꺼져. 조금만 써라."

 

방에 처박혀서 울지 말고. 마음 바뀌면 전화 해. 손에 장하오의 카드를 꼭 쥐고서도 끝까지 헛소리나 해대는 한동은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다. 어딜 봐서 서른이 넘은 사내들의 대화일까. 한동은과 있으면 십년 전 그때의 스물한 살 장하오가 된다. 십여년을 한국에 살았는데, 한국말을 잘 알아듣는다는 칭찬을 한다. 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동은이 한바탕 휘젓고 간 호텔 방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잡음 하나 없는 적막 속 기계의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멈출 기미 없이 뇌 속까지 파고든다. 귀울림인가 싶어 손을 가져다 댔다. 손끝으로는 여태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그러고 보니 머리도 못 말렸구나. 서랍을 뒤적여 드라이기를 찾아내 코드를 꽂았다. 드라이기 바람으로 머리를 털어 말리다 문득 거울을 응시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잘생기긴, 개뿔. 내가 낫지.

 

성능 좋은 드라이기 바람 탓인 지, 타들어 가는 귀 끝이 아려왔다.

 

 

 

 

 

***

 

 

 

 

 

"잘생기긴, 개뿔."

 

발등을 덮을 정도로 눈이 쌓인 겨울날이었다. 정문 앞 주점은 예대생들의 둘도 없는 아지트였다. 그날은 성한빈이 삼천 원짜리 안주 하나로 소주를 3병이나 딴 날이기도 했다. 코가 삐뚤어지게 취한 성한빈은 한동은을 붙잡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 오징어 입같이 생긴 게 진짜로 잘생겼냐?"

"한빈이 형, 인정할 건 하자. 박정후 얼굴은 잘생겼잖아."

"...이씽."

"근데 형이 더 잘생겼어. 친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치!"

 

성한빈은 입바른 소리에 잘도 기분이 풀렸다가도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드라마 하나 찍었다고 당연히 큰 배역 주는 게 말이 돼? 그거 따내려고 얼마나 교수님한테 잘했는데. 난 한 번도 대출 맡긴 적도 없어. 근데 걘 학교도 잘 안 나온다고. 자기편이 생겨 신이 난 성한빈은 다시금 조잘거렸다. 전공 수업에서 배역 하나 뺏긴 게 그다지도 억울할까. 장하오는 짝을 잃은 젓가락으로 안주를 뒤적이는 성한빈의 손을 저지할 뿐이었다. 한빈, 이거 그만.

 

"그러고 보니 형은 내가 속상하다는 데 왜 아무 말이 없어?"

 

내가 이런 말 너네 아니면 누구한테 하겠냐구우. 화살이 방향을 틀어 옆자리의 장하오에게 날아왔다. 물을 마시다 말고 사레들린 기침이 쏟아졌다. 스물둘 장하오는 뭐든 어설펐다. 잘 삐지고 잘 푸는 성한빈을 다루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웠다. 무엇보다 서투른 언어가 장벽이었다. 감정을 온전히 전달하기엔 막 트인 귀로 상황이나 겨우 이해할 수준이었다. 장하오는 엉망으로 물이 튄 안경을 닦으며 말했다.

 

"한빈 그 배역이랑 안 어울려."

"?"

 

오해를 사기 십상 좋았다. 성한빈의 말이 짧아지면 기분이 상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신이 오답을 말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눈치는 키워두어 다행이었다. 여전히 꾹 다문 채 가자미 눈을 뜬 성한빈을 향해 손사래까지 치며 부인했다. 그리고선 손도 안 댄 젓가락 한 쌍을 얄쌍한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한빈 일단 먹으면서 들어. 할 말을 정리 중이야. 착한 성한빈은 새 젓가락으로 몇 안 남은 땅콩을 집어먹으며 장하오의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니까 한빈은 너무.."

"너무?"

"... 빛나. 반짝반짝. 그래서 그 역할 안 어울려."

 

쌍심지를 켜던 눈이 사르르 접힌다. 내가 그 배역을 하기에 너무 잘생겼단 거지?

 

"박정후처럼 적당히 평범하게 생겨야 됐는데."

"...맞아. 그 뜻이야."

"아이, 우리 형. 한국인 다 됐네. 귀여워."

 

한국살이 1년 차에도 장하오는 한국인 다 됐다는 말을 들었다. 성한빈은 손에 쥔 젓가락을 테이블 위로 탁 소리 나게 놓았다. 그리고는 장하오를 양팔에 가두고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살을 비벼댔다. 아, 너무 멍청하게 생겼어. 착해 우리 형. 마찰 때문인지 취기로 붉어진 뺨이 더 빨개졌다. 한빈나, 기분 풀렸어? 고양이처럼 구는 성한빈의 장단에 맞추어 목뒤를 긁어주었다. 성한빈은 기분이 좋은 지 몸을 더 맞붙여왔다.

 

맞은 편에 앉은 한동은이 토악질을 해대든 말든 둘 밖에 없는 듯 행동했다. 더 이상의 인내는 어려웠던 한동은은 두 사람의 극악무도한 행위를 게시판에 폭로하겠다며 한참을 협박했다. 세 사람의 대화 소리로 왁자지껄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그러다 한동은은 대뜸 장하오에게 물었다.

 

"그럼 하오 형. 형은 영화 찍으면 한빈이 형 주연시켜줄 거야?"

"당연하지. 한빈이 내 인생의 주인공이야."

 

반은 맞고 반은 거짓이었다. 지금의 장하오가 그려낸 작품은 성한빈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다지도 싫어하는 박정후가 더 어울릴 지도. 하지만 알 리가 없는 성한빈의 기분만 좋아질 수 있다면. 돈도 안 드는 말뿐일지라도, 이렇게 눈과 코가 빨개진 채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이런 거짓말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한동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대체 사랑이 뭐라고 다들 평생 안 변할 것처럼 구는 지 모르겠어."

"난 안 변해. 평생."

 

감히 평생을 다짐했다. 진심을 다해 성한빈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또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볼 수 있을 때. 제 영화처럼 어두침침한 프레임에 성한빈을 가두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천오백 원 소주를 세 병이나 깐 대가로 당장 내일의 담뱃값을 줄일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 언젠가는.

 

장하오는 누구보다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신념도 바꾸게 되는 것. 그것이 스물둘 장하오의 사랑 방식이었다.

 

 

 

 

 

***

 

 

 

 

 

"한빈. 우리 헤어져야 해."

 

고하는 쪽이 눈물범벅이다. 당당히 맹세한 평생은 그 값어치의 대가를 치르게 했다. 연애 기간 2년을 다 채워갈 쯤 성한빈이 군대에 가게 됐다. 부대 앞 순댓국 집은 우렁찬 울음소리로 한 가득 메워졌다. 밑반찬을 놓아주던 아주머니가 듣다못해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놓아주었다. 너는 고추 떼야겠다는 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건 안 돼요. 콧물을 먹어가면서도 할 말은 했다. 괴상망측한 장하오의 행동에 질린 듯한 표정을 짓던 아주머니는 쯧쯔 거리며 자리를 떴다. 정작 당사자인 성한빈은 덤덤한 반응이었다. 어디 한번 계속해봐. 하는 표정으로 깍두기나 집어 들면서.

 

"나 곧 감옥에 가."

"그래. 이번엔 청송? 안양? 어디로 가는데."

"이번엔 정말이야. 저 철창을 넘을 거거든. 나 중국 사람이잖아. 총 맞거나 감옥 가거나 둘 중 하나인 거야. 운 좋으면 감옥에 갈 거야. 한빈 크게 될 사람이잖아. 귀신이나 범죄자랑 사귈 수 없어. 근데 나 죽으면 성한빈 울어. 팡팡."

"형, 순대 다 불어. 먹고 얘기하자."

"...."

 

대개 스물 셋이 그렇듯, 장하오에게도 연인과 떨어져서 단 1초도 살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두 사람이 다시 뜨거운 뚝배기에 고개를 박고 숟가락질을 하는 데까지는 꽤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기어코 성한빈은 이 해프닝도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짬밥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성한빈은 장하오의 눈물에 약했다. 지금도 결국 저 웬수 같은 모습의 장하오의 등을 토닥이며 둘둘 만 휴지를 건네주고 있지 않은가. 외딴 나라, 기댈 게 저 하나뿐인 제 사랑이 불쌍해서 더 이상의 벌을 줄 수가 없게 됐다.

 

"근데 너 탔어. 한빈아... 까매. 내 성한빈 아니야."

 

순댓국 먹다 등짝맞을 소리만 안 한다면 말이다.

 

 

 

 

 

까까머리가 채 길러지지 않고 제대를 했을 무렵 장하오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복학만 하면 우리 사이 더 이상의 불행은 끝 행복 시작이라 여겼다. 정작 학교로 돌아오니 두 학년 차이는 마주칠 일도 드물었으며 그 흔한 교양 수업하나 겹치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 성한빈이 바빴다. 술자리며 촬영장이며 쉴 새 없이 불러대는 통에 정신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 해 말, 성한빈은 장하오의 작품을 처음 감상하게 됐다.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지도 2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미니시리즈 종방연 뒤풀이에서 잔뜩 취했던 날. 어떻게든 감독의 눈에 띄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었다. 거기까지가 기억 끝.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일어 눈을 떠보니 친구네 자취방이었다. 뒤늦게 확인한 핸드폰은 새벽 내 장하오에게 온 메시지로 한 가득했다.

 

[성한빈 까먹은 거 없어?]

[ㅡㅡ]

[그거 장하오야]

[성한빈 안 착해. 연기하는 거야]

[사람들 다 속는 중. 연기 천재]

 

부재중 전화 1

 

[너 미워]

 

내내 숙취로 아팠던 머리가 더 아파졌다. 군화 거꾸로 신은 것도 아니고…. 지난 날의 행보가 스쳐 갔다. 오래 기다리게 해놓고 또 기다리게 하네 나는. 그 새벽, 장하오가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첫차 시간조차 기다리지 못하고 장하오의 자취방으로 달려갔다. 그 새벽 공기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은근히 이런 이벤트를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제대하고서 한 번을 안 해줬다. 좋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면서도 왜 연락도 없이 왔냐며 부랴부랴 머리에 물 칠 해대는 장하오를 보는 재미도 있었는데.

 

너무도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머리는 까치집이 진 채 책상 위로 곯아떨어진 장하오가 보였다. 마른 얼굴에는 살이 더 내려 있었다. 속상한 마음에 얼굴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장하오는 막 잠에 들었는 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굴러다니는 생수통들이 눈에 밟혔다. 끼니도 거른 채 밤을 새워 작업을 한 듯했다. 미약한 빛을 뿜어내는 노트북 주변으로 수많은 종이 뭉치가 보였다. 중국어로 휘갈겨진 글자들 사이 정갈한 글씨체로 쓰인 한국어가 눈에 띄었다. [성한빈 나빠.] 찍힌 온점은 잉크가 유독 진했다.

 

곧 꺼질 듯이 점멸하는 노트북에 충전선을 연결했다. 빛이 커지고 화면에는 잘게 쪼개진 네모 박스들이 나타났다. 눈앞으로 장하오가 바라보는 세상이 펼쳐졌다.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연결된 이어폰을 들어 귀에 꽂았다. 중국어 자막으로만 구성된 25분 길이의 영상은 고요했다.

 

영상은 주인공의 시점으로 진행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치고, 부딪히고, 엮인다. 와중에도 중심인물은 대사 한 마디 내뱉지 않는다. 주인공이면서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이다. 그저 속으로 독백한다. 그러다 인물은 우연히 빛을 만난다. 여기서부터 독백이 사라졌다. 꼭 빛과 대화하는 듯한 인물의 입 모양만 보일 뿐이다.

 

빛을 따라 여행하는 인물의 세상이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된다. 인물은 정말이지 행복해 보였다. 그러다 낮이 밤으로 바뀐다. 사라져가는 빛을 잡기 위해 인물은 주먹을 꼭 쥔다. 빛이 일렁였다. 인물은 손에 담긴 빛을 바라보다 달을 향해 손을 펼친다. 곧 달빛에 흡수되어 하나가 된다. 주변의 별들이 더 반짝였다. 해가 뜨고 아침이 찾아온다. 다시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이 보이고 화면은 컬러에서 흑백으로 전환됐다.

 

엔딩 크레딧 위 Zhang 이라는 이름이 떠오름과 동시에 참았던 숨을 탁 뱉어냈다. 울컥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행복해 보이던 인물은 어느 순간 너무나도 외로워 보였다. 눈물샘이 고장난 게 틀림 없다. 입술을 짓씹으며 참아봤지만 제멋대로 나오는 호흡은 조절되지 않았다. 그제야 장하오는 눈을 떴다. 눈앞의 존재에 입꼬리를 올렸다가도 금세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는 곧장 빈틈없이 안아왔다. 마치 인물이 빛을 잡기 위해 손을 꽉 쥐었던 것처럼.

 

 

 

 

 

***

 

 

 

 

 

[현장포토] "라이징스타"... 성한빈, 인형 같은 미소

 

특유의 사근사근한 미소가 돋보였다. 한편, 지난 13일 개봉한 '하프 어 하트'는 우연처럼 첫사랑을 만난 주인공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극 중 성한빈은 첫사랑 상대의 아역으로 등장하여···.

 

 

 

장대비에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은 이 차와 우리를 동시에 뜻한다. 안은 터질 듯이 습하고 밖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온갖 눅눅함이 공간을 메운다. 언젠가 전 재산을 털어 장만한 이 애물단지는 장마만 시작되면 제 기능을 잃었다. 시동과 함께 가동한 에어컨은 소리만 요란할 뿐 바람도 영 시원찮다. 딱 1년만 타고 돈 벌어서 바꾸려 했는데 자그마치 3년이다.

 

연신 비가 쏟아지는 형국에 유리창으로는 온 세상이 흐릿했다. 밖에서도 안이 보이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 일 테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감사한 일이라 여겨야 하나.

 

"하으... 글러브박스에 없으면, 아, 멈추지 말고... 거기 옆에, 흐읏, 없어?"

 

성한빈은 몇 달 만에 제 아래에 닿는 손길에 콘돔의 행방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좁아터진 공간에서 상대의 허벅지 위로 올라타 목에 코를 박고 빨아댔다. 동시에 지금쯤 제 뒤를 가르고 있어야 할 손이 예상한 타이밍을 엇나가자 흥분이 가라앉는 중이기도 했다. 평소라면 진작 팽 놓았을테지만 오늘은 좀 꼴린다고. 답답한 마음에 상대의 얼굴 옆에 위치한 유난히 큰 귀를 씹어댔다. 빨리 찾아. 목을 둘렀던 팔을 내려 스스로 앞을 문질렀다. 몸을 들썩이며 겨우 텐션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그 순간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촬영 장비들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하 진짜, 야 장하오.

 

"진작에 정리하랬지."

"알겠어 알겠어. 미안해."

"됐어. 안 할래."

 

갑자기 끼얹어진 찬물에 끓던 마음도 진화된다. 원인 제공은 저쪽이니 가스 밸브까지 잠가버리는 극단적 행위는 제 탓을 하고 싶지 않다. 성한빈 눈 밑에 흰자 보여. 나 쫄아쏘. 왜 이렇게 무서워. 장하오는 실실 쪼개며 저딴 말이나 뱉어댔다. 짜증 나. 불만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흘겨봤다. 조수석 위로 겹쳐있던 몸을 일으켜 운전석으로 옮겨갔다. 낮은 천장에 머리를 박지 않으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콘솔 박스를 넘다 가죽이 벗겨진 핸들에 엉덩이를 박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차 부서지는 소리가 나냐. 마모된 가죽에 연한 살이 쓸리면서 아려왔다.

 

장하오는 이제 아예 배를 잡고 웃고 있다. 아하하, 성덩이 괜찮아? 아무래도 콘돔 사 와야겠어. 너 엉덩이 커서 내 자지 섰어. 끊긴 웃음이 섞여들리자 쪽팔림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순간 얼굴에 한껏 열이 올랐다. 그때까지도 갈팡질팡 질질 새던 마음이 한 순간에 소멸했다. 언젠간 저 숱 많은 머리카락을 다 뜯어버릴 거라는 생각은 무조건반사다.

 

"이제 형이랑 안 해."

"왜에. 내가 콘돔 사올 게.”

"그래서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왜에. 아줌마 보기 민망해서? 박 여사님 에어로빅하러 갔어. 지금 시간은 청일이가 카운터."

 

형 같으면 그 말 듣고 서겠어? 핑크 쫄쫄이를 입고 에어로빅 스텝을 밟는 청일슈퍼 박 여사가 온 머리를 휘젓고 다녔다. '잘생긴 총각 힘도 좋나 보네?' 음흉한 음성은 덤이다. 장하오의 작업실이 성원프라자에 들어서면서부터 못 박히게 들은 청일슈퍼 아줌마의 농에는 이골이 났다. 반경 500m 내외로 여자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웬 2m 좀 안 되는 거대한 남자 둘만 붙어 다니는 꼴을 보였더니 언젠가는 그런 얘기도 엿듣게 됐다. '청일아, 쟤네 가인가 게인가 그거가. 와 맨날 둘만 띨롱 붙어와가꼬 엄한 거 사가노.' '엄마 쫌! 조용히 해라. 들린다.' 상경한 지 5년이 됐는데도 고치지 못한 경상도 모자의 사투리 억양이 귓가를 맴돈다.

 

"아니, 하. 조용히 해. 평생 안 하고 싶어지니까."

"나는 지금 하고 싶은데."

"집중 못한 게 누군데."

 

하고 싶다고 할 땐 언제고 움직임 하나 없이 잠잠하다. 또 이런 반응엔 덮어뒀던 일말의 심술이 돋아난다.

 

"안 하고 싶었네."

"성한빈 뭐야아. 좋으면서 튕겼쏘."

"이젠 나랑 하는 것도 싫은가 봐."

"맞아. 싫어"

".. ?"

"라고 하면 좋겠어? 아닌 거 알면서."

 

두꺼운 엄지와 검지로 팔 밑을 꼬집어오는 손을 탁 소리 나게 뿌리쳤다. 어…. 이렇게 세게 칠 생각은 없었는데. 탁 소리는 슬레이트 소리처럼 컷을 바꾼다. 언제 불탔냐는 듯 냉랭한 공기만 남았다. 운전석 레버를 당겨 시트를 젖혔다. 이제 한 번 하는 것도 어렵네 우리, 하는 생각을 하면서. 컵홀더에 꽂아둔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물며 바지춤을 정리했다. 불을 붙이진 않았고 질겅질겅 씹기만 했다.

 

졸업을 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보조로 출연했던 유명 감독의 드라마에서 운 좋게 감독의 눈에 띄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단역에서부터 이제는 신작의 주연급까지 맡게 됐다. 언제라도 부르면 달려가는 것이 성공하는 배우의 자세라 했던가. 긴장을 늦추지 못한 채 몇 달을 살았다. 자연스레 장하오와 시간을 보내는 날이 줄었다. 우리 진짜 오랜만에 얼굴 봤는데. 속도 모르는 제 연인은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정산금이 들어오면 이 거지 같은 중고차도 바꿔줄 계획이었는데. 심사가 뒤틀렸다.

 

엄지에 온통 까만 칠이 칠해질 때까지 300원짜리 라이터 휠만 돌려대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빼내려 창문을 내리자 빗물이 조금씩 들쳤다. 어스름한 여름 저녁은 가로등이 켜지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창 밖으로는 빨간 배경에 노란 글씨 간판들이 성원프라자 외벽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그 중 유일하게 네온사인으로 반짝이는 장하오의 작업실 로고가 보였다. 핑크색이라니 취향 한 번.

 

조수석 문이 덜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옆을 돌아보자 우산을 펼치는 장하오가 보인다. 진짜 콘돔이라도 사러 가나. 말없이 장하오의 행동을 지켜봤다. 장하오는 보닛 앞을 돌아 운전석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열린 창문 틈새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하냐?”

"한빈. 나두 한 입만."

 

장하오는 일 년 전 신체 일부처럼 달고 살던 담배를 끊었다. 작심삼일이라 여겼으나 끈질기게도 참았다. 너 못 끊을 줄 알았어. 잔소리와 함께 손가락에 끼운 담배를 들이밀자 깊게 빨아들인다. 부스스 웃는 입가로 담배 연기가 빠져 나왔다.

 

"가자."

 

장하오의 말과 동시에 가로등이 켜지고 어둡던 골목이 밝혀졌다. 등 뒤로 밝혀진 빛의 역광으로 장하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필터 직전까지 모조리 빨아버린 꽁초를 털었다. 차 문을 열고 우산 밑으로 몸을 욱여넣자 자연스레 팔이 제 어깨를 감싸왔다.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개발새발 악필로 쓰인 문구가 보였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손에 든 꽁초를 미련 없이 내던졌다.

 

 

 

 

 

장하오는 여전히 영화를 만든다. 자기 영화는 아니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을 올랐다. 작업실로 들어서자 짜장면 비닐을 벗기고 있는 한동은과 정그림이 보였다. 한동은은 짜장면 한 젓가락을 들어 올리다 말고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이제 연예인이다 이거야?"

"한동은이. 좀 씻어라. 냄새 심하다."

 

한동은의 목에 헤드록을 걸며 장난을 치자 맞은 편에 앉아 단무지를 뜯던 정그림이 말을 걸어왔다. 오빠 가기 전에 사인 몇 장만. 애들한테 친분 있다고 자랑했걸랑. 높게 질끈 묶은 머리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게 불편한 지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 올리고선 음식을 밀어 넣는 중이다. 오랜만에 뭉친 세 사람의 목소리로 작업실은 떠들썩했다.

 

한 장당 천 원.”

나 통장에 만 원 밖에 없는데?”

에이, 기분이다. 지인할인 해 준다.”

앗싸.”

 

실없는 대화 내 드는 꿉꿉함에 시선을 내리자 입고 있는 셔츠가 빗물로 엉망이다. 남는 옷 없어? 이곳에서 살다시피 하는 인간들인데 없을 리가. 한동은은 손을 뻗어 행거를 가리켰다. 언제 세탁한 지도 모를 옷가지들 사이 단 하나 깔끔해 보이는 반팔 티를 집어 들었다. 코를 갖다 대자 역시나 장하오의 냄새가 났다. 젖은 셔츠를 벗고 옷걸이에 걸린 옷을 꿰어 입었다. 비누 냄새. 온 몸에서 장하오 냄새가 났다.

 

좀 비켜보지? 엉덩이로 한동은을 밀쳐내며 자리를 만들었다. 아 형 쏟을 뻔 했잖아요! 한동은이 그러거나 말거나 딱딱하게 굳어 과자 같은 탕수육을 손으로 집어 우적우적 씹어 댔다.

 

"한빈."

"."

"내 옷 입지 마."

 

킥킥거리며 웃고 떠들던 세 사람이 일순 조용해졌다. 뭐라는 거야.

 

"늘어나."

 

어이가 없어 반응도 못하자 주변에서 오히려 성화다.

 

"장 형, 왜 그래."

"맞아. 오빠 왜 그래요. 한빈이 오빠 지금 뼈밖에 없구만."

 

괜히 반가우면서 그래. 맞아 형 보고 싶다고 난리 칠 땐 언제고. 괜히 그러네 진짜. 두 사람은 성한빈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미 제대로 돌아버렸단 게 문제였지만. 차 안의 일로 덜 풀린 기분이 다시금 올라왔다. 얼굴이 곧 터지기 직전이었다. 대꾸 없는 한빈을 향해 한숨을 내쉰 장하오는 이내 작업실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너 오늘 왜 그러냐며 따질 심상으로 장하오를 따라 나가려던 찰나 한동은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한빈이 형.."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온 이목구비를 아래로 늘어뜨린 얼굴이다. 입가엔 소스를 잔뜩 묻힌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성한빈은 최악이다. 아니, 날 이렇게 만드는 장하오가 최악 인간이다. 한동은에게 자초지종을 듣고서 화는 더 돋워졌다. 이번에도 장하오의 영화는 투자 받는 것에 실패했다. 그게 뭐. 그걸 왜 나랑 엮는데. 계단을 밟는 발에 힘을 실었다. 일 층에 다다르니 청일슈퍼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궁상을 피우고 있는 장하오가 보였다.

 

"형은 나를 뭘로 보는 거야?"

"한빈아."

 

비는 그쳤지만 주변은 온통 물바다였다. 더러운 거 누구보다 싫어하면서. 바지 끝단이 젖는 데도 아랑곳 않는 모습이었다. 벗으라니까. 그 꼴을 하고도 저 따위의 말이나 해대는 장하오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뭐가 됐든 제일 먼저 나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여기 아직 사람 많아. 이따 얘기해."

"연예인도 사람이야. 말싸움 좀 하면 안 돼?"

"성한빈."

"내가 만만해서 그러지? 난데없이 왜 화풀이야?"

"그런 거 아니야."

"한 번이라도 내가. 어? 형 일 가지고 뭐라한 적 있어?"

"..."

"형은 왜. 왜 매번 나만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스스로의 화에 못 이겨 결국 분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너 진짜 최악이야. 장하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움찔거리다 가도 주변을 살피며 엉망으로 머리를 쓸어 올릴 뿐이다. 장하오의 모든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울잖아. 안아줘야지 뭐 하는 거야.

 

나는 그대로인데 모든 것이 다 변한 것만 같았다. 왜 장하오는 늘 기대오지 않는 건지. 왜 3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어야 하는 건지. 기쁜 날에 축하 받긴 커녕 속상한 일들만 연속해서 일어나는 상황이 서러웠다. 먼저 손을 뻗지 않는 장하오의 허리를 무작정 껴안았다. 우리 언제 이렇게 멀어진 거야? 형이 나한테 어떻게 이래.

 

"이럴까 봐 말 안 한 거야."

"?"

"너 나 때문에 다 잃어도 괜찮아?"

"..."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소중하게 다뤄야지."

"..."

"나랑 있으면 넌 앞뒤 없이 겁이 없어."

 

마주 안아오는 팔이 없다. 장하오는 제 허리에 감긴 팔을 떼어낼 뿐이었다.

 

 

 

 

 

***

 

 

 

 

 

종이 뭉텅이가 얼굴 위로 날아왔다. 종이가 아니라 사진이네. 사진 속 얼굴은 누가 봐도 사랑을 하는 얼굴로 매달려 눈물을 찍어내고 있다. 며칠 전 그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마 보내지 않은 사진 속에는 더한 것도 찍혀 있을테지. 억울해.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하하…. 호모 새끼였네 이거."

 

소속사 사장은 미친 듯이 화를 내다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는다. 사장은 호랑이 새끼를 거뒀다며 책상을 뒤엎고 호통을 쳤다. 옆에 선 매니저에게도 배우 하나 관리 못한다며 불호령이 떨어졌다. 장하오 말을 들을 걸. 늦은 후회가 들었다.

 

기사화는 회사 차원에서 기를 쓰고 막았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밤을 빼앗았다. 그럼에도 소문은 크기를 부풀려 전파를 타고 퍼졌다. 실시간 트렌드에는 곧 스크린에 걸릴 영화보다도 제 이름이 먼저 떴다.

 

늘 집이 아니면 촬영장만 빙빙 돌았다. 모르고 살았는데. 그제야 유명세라는 것이 실감 났다. 곧 소속사는 말도 안 되는 루머이며 강경 대응을 하겠다는 뻔한 헤드라인의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파파라치 기자에겐 얼마나 쥐여줬을 지 모르지만 더 이상의 사진은 오지 않았다. 개인 계정에는 대필 받은 입장문도 써 올렸다. 사진 속 남자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형입니다. 말도 안 되게 부풀려진 이 상황이 저 또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온통 거짓이었다.

 

이 사건은 연예계 음주운전 소식이 연달아 터지며 단순 해프닝으로 무마됐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은 듯했다. 사건이 일단락될 때까지는 장장 삼 주가 걸렸다. 그 사이 장하오에게서의 연락은 없었다.

 

겨우 외출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장하오를 찾아갔다. 모자를 눌러쓰고 찾아간 성원프라자에는 혼자 빛을 내던 네온사인 간판이 사라졌다. 온기 하나 남아있지 않은 사무실엔 가라앉은 먼지만이 휘날렸다. 상가를 빠져 나오다 손님들이 아무렇게나 버린 맥주 캔을 정리하던 청일슈퍼 아줌마와 마주했다. 그 총각 맞제? 박 여사는 아는 체를 해왔다.

 

"...여기 있던 사람들이요."

"아 갸들? 이미 임대 놓고 갔지! 사람들 카메라 들고 찾아오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짜노. 몰랐나 보네. 안쓰러워 하는 아줌마의 표정이 보였다. 점점 머리가 멍해지다 곧장 정신이 또렷해졌다.

 

"저 짝에 차는 있든데. 총각이랑 붙어 다니던 3층 총각 차 아니가."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꾸벅 인사를 했다. 나는 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꾸며내고 있었다. 며칠 전 제가 주차한 그 자리에 있었다. 버려진 걸 증명하듯 빗물이 말라붙은 자국이 그대로였다.

 

"…."

 

뒤 주머니 속 깊게 찔러 둔 보조키를 꺼냈다. 차 문을 열자 그때의 습한 공기가 온 폐부로 느껴졌다. 시선을 돌려 뒷좌석을 바라봤다. 마구 쌓여 있던 장하오의 흔적들이 하나도 없다. 헛웃음이 나왔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핸드폰을 들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통화연결음이 길어졌다. 아니, 사실은 이런 상황이 일어날 것을 예감했던 것도 같다. 애써 미뤄둔 일이 여지없이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쓰레기 버리지 말라는 말 들을 걸. 내가 꽁초를 아무렇게나 버려서 벌 받는 거야. 멍한 눈으로 앞 유리창을 응시했다. 말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무엇이든 탓했다. 연결음이 멈추고 이내 장하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응.

"어디야?"

- 한빈아.

 

떨려오는 손을 나머지 손으로 붙잡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내가 가장 잘 하는 거니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이것 밖에 없었다.

 

"응? 어디야 형."

- 우리 그만하자.

 

우리의 지난 시간 속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니 알 수 있었다. 이것 또한 그 중 하나일 뿐이다. 곧 지나갈 것이다. 우린 이번에도 극복해낼 거고….

 

"아니야. 형. 일단 우리 보자. 만나서 얘기해."

- 잘 들어 한빈.

"씨발 장하오! 아. 미안해... 내가 지금 너무 흥분했나 봐.”

- 한빈아.

형, 형. 아직 영화도 못 찍었잖아. 기억나? 막 나 주연 시켜준다고... 아. 혹시 내가 올린 글 때문에 그래? 기분 나빴지. 내가 쓴 거 아니야 그거,"

 

말에 두서가 없었다. 모든 말을 생각과 동시에 뱉어냈다. 화를 내다가. 추억에 매달리다가. 빌다가.

 

- 한빈아. 들어.

"너 이제 나 안 사랑하지. 야 이 나쁜 새끼야. 어? 그래서 저번부터 계속,"

 

종국엔 핸들을 쾅쾅 쳐대며 울부짖었다.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 할 말들을 중얼거렸다. 튀어나오는 말들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 불행도 옮아.

 

하지만. 이어지는 장하오의 말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됐다.

 

"...?"

- 나는 불행해 한빈아.

 

굳게 붙잡은 손이 떨어졌다. 우리의 미래엔 당연하게도 서로가 있다.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당연한 사실이 부정된 기분이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우주가 붕괴한다. 헤어진다고 이 지구가 멸망하는 하는 것도 아닌데.

 

아니, 사실은 내 지구가 너여서….

 

"...나는?"

- ...

"그럼 나는 어떡해?"

 

우리의 지난 시간 속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니 알 수 있었다. 이 이별은.

 

- 너는 행복해 한빈아.

 

 

 

 

 

***

 

 

 

 

 

[장 감독님, 출장 중에 죄송해요.]

[돌아오시는 날짜 알려주세요. HC그룹 건 스케줄을 잡아야 해서요.]

 

늦은 밤 도착한 메시지는 자꾸만 되돌아가려는 저를 붙잡았다. 또 나무라는 듯 계속 울려댔다.

 

불 꺼진 방, 통창으로 바라본 도쿄의 여름 밤은 온통 빨갛고 파랬다. 발광하는 맞은편 건물의 네온사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곧 눈이 아릿해졌다. 뭐가 저렇게 밝아. 암막 커튼을 뚫고도 들어올 것만 같은 불빛이었다. 제 감정과는 상반된 화려함에 질시가 이글거리는 눈총을 보낸 것도 맞다. 뻑뻑한 눈을 손등으로 문대며 그제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을 인지했다. [주말 전까지 갈게요] 모호한 답장을 남긴 후 침대 위로 핸드폰을 내던졌다. 이 적막을 깰 소음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티비. 티비를 켜야 돼.

 

리모컨을 손에 쥐고서 채널을 돌려댔다. 티비에는 얼마 전 온에어된 광고가 나오기도 했으며 드라마 주인공들의 애절한 키스신이 재생되기도 했다. 자막 하나 없는 프로그램들은 그저 연속되는 소음 덩어리였다. 그걸 바란 것이었으니 의미 없이 흘러가는 화면을 감상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가 생각났다. 아니, 아니. 이런 생각을 멈춰야 했다. 최대한 누구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확률을 찾아 헤매다 외국 영화 채널에 멈췄다.

 

"...."

 

언젠가 성한빈이 그렇게도 싫어했던 박정후의 할리우드 데뷔작이 나왔다. 그것도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걸려있는 클로즈업 샷으로. 결국 감정을 짓씹지 못했다. 정말이지 온갖 성한빈이 저를 쫓아왔다.

 

전원 버튼을 눌러 티비를 껐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잠이 들길 무작정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럴수록 의식은 또렷해졌다. 몸을 일으켜 의자에 걸어둔 재킷을 들었다.

 

 

 

 

 

"되는 게 없네."

 

걸음은 호텔 라운지 바를 향했다. 사치 부린 고독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승강기 앞에서 한동은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재킷을 몇 번이고 뒤적였다. 그리고 나서야 침대 위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을 핸드폰이 떠올랐다. 답지 않게 충동적인 행동이 초래한 결과였다.

 

"…."

 

황당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입 밖으로는 짜증 섞인 한숨이 튀어나왔다. 당장 룸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기에 별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바 테이블의 맨 구석자리에 앉았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이 공간에 있기엔 초라한 행색이었으니까. 말을 걸어오는 바텐더에게 손짓을 섞은 짧은 일본말로 답했다.

 

"나마 비이루. 쿠다사이."

 

바텐더는 일본어로 뭔가를 더 물어왔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속되자 뇌가 굳은 기분이었다. 답하지 못하고 얼타는 표정을 지었다. 옅게 미소 짓던 바텐더는 더 이상의 질문 없이 곧 넘쳐흐를 듯한 생맥주를 가져다 주었다. 뿌옇게 김 서린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코끝까지 전해지는 차가운 탄산의 알싸함에 머리가 핑 돌았다. One more drink? 짐짓 놀란 표정을 짓던 바텐더가 물어왔다. 아, 영어를 쓰면 되는구나.

 

 

 

'형 같은 사람은 도수가 아니라, 양에 취한다니까. 술도 못하는 게.'

 

급히 들이킨 한 잔에 어김없이 알딸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의 핀잔 소리가 떠올라 막 두 번째 잔을 들어 지워버리려던 찰나였다. 제 앞으로 온더락 잔 하나가 올려졌다. 자신을 향해 잔을 미는 손을 바라봤다. 마디가 불거진 하얗고 마른 손. 손의 주인을 알 듯했다. 아니, 확신했기에 돌아볼 자신이 없었다.

 

"낯설다. 우리가 같이 이런 데 있는 거."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 소리에 묻혀 답하지 못했다. 쿵쿵쿵. 더 가까웠더라면 들렸을 크기였다.

 

"잘 지냈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한 좌석을 건너 앉은 성한빈이 보였다. 성한빈의 시선은 내게 건넨 것과 똑같은 위스키 잔에 고정된 채다. 시선을 따라가니 미약하게 떨어대는 손이 보였다. 행동과는 달리 아무렇지 않은 말투가 퍽 배우다웠다. 동등한 노력이 필요해 보였다. 그게 성한빈을 위한 일인 것 같았으니. 저 또한 자연스럽기 위해 애썼다.

 

"...그냥. 사는 거에 집중하고 있어."

"...도통한 소리를 하네."

"..."

"아저씨같이."

 

웃기는 소리를 하면서도 웃지 않는다. 웃음을 잃어버린 성한빈은 꼭 다른 사람 같다. 다시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연기라는 거 정말 어렵네. 대답이 늦어지자 성한빈은 말을 덧붙여왔다.

 

"영화는 이제 안 해?"

"...광고 찍어, 나."

"그건 알아. 꽤 유명하더라. 그래서 생각했지. 그렇게 다 팔아대더니 정말 잘 어울리네."

 

꼭 원망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무도 사지 않는 저를 팔기 위해 버둥거린 지난 날을 떠올렸다. 처음엔 자존심을 팔았고 그 다음엔 꿈을 팔았다.

 

제가 뱉은 말엔 일말의 거짓도 없다. 성한빈과의 이별 이후로 정말 사는 것에 집중했다. 사랑하는 것들을 죄다 팔아버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어, 사는 것에 집착했다. 그러지 않으면 꼭 살고 싶지 않아질 것만 같아서.

 

근데 한빈아 난 아무것도 팔고 싶지 않았어. 그치만 내가 너를. 원망이 원망으로 덮어지려 했다. 결국 생각은 꺼내지 못한 채 삼켜졌다. 결국 내가 마지막으로 판 건 성한빈이 맞으니까. 그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너는. 쉬고 있어?"

 

헤어진 지 1년 채 되지 않아 성한빈이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기를 쓰고 찾아보지는 않았다. 안 보고 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스치듯이라도 보게 되면 꼭 오늘처럼 온종일 저를 따라다닐 테니까.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는 성한빈이 웃었다.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에 눈물까지 매달며 웃는다. 생각이 바뀐다. 웃고 있어도 지금의 성한빈은 성한빈이 아니다. 왜... 왜. 갈무리하지 못한 문장만 입가에 맴돌았다.

 

"하하. 형. 나 엄청 열심히 일하고 있어. 저번 주에도 슛 들어갔는데... 단역이긴 해도."

"...한빈."

"나만 원한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 이제 날 주연으로 써주겠다는 사람은 없어."

"..."

"나도 형처럼 다 포기 했어야 했나. 바보같이 못 놓고 이러고 있네."

"한빈아."

 

성한빈은 반짝거리기만 해야 했다.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어야만 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반짝거리는 그 애를 알아야 했다. 그렇기에 그 말 만큼은 절대 저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다. 모든 말이 나를 과녁 한 가운데 몰아넣어 명중시켰다. 계속해서 찌르고, 찍히고, 박혔다.

 

"장하오. 잘 어울린다."

 

스스로도 부정하는 사실을 뇌 속에 박아 넣는다. 이 모든 것과 나는 어울리지 않는다.

 

"행복해 계속."

 

언젠가 뱉은 말들을 돌려받았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너도. 내가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웅웅대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 라운지 바를 가득 채우는 재즈 가수의 노랫소리. 둘 사이의 대화는 더 이상 오가지 않았다. 불시에 찾아온 죄책감과 부채감의 무게는 지독스럽게도 스스로를 짓눌렀다. 모든 예상과 확률이 엇나가고 있었다.

 

테이블이 여러 번 진동했다. 화면이 얼굴을 비춤과 동시에 성한빈의 얼굴에는 그늘이 졌다. 진동은 곧 멈췄다. 이내 테이블이 또 다시 울렸다. 핸드폰을 들어 발신인을 확인한 성한빈은 일어날 채비를 했다.

 

"..."

"...갈게."

 

가보겠단 말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면 뭐가 됐든 지 쏟아낼 것만 같았다. 내가 붕괴되는 시간 동안 성한빈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 들리지도 않을 거리가 되어서야 뇌가 작동한다. 건네지 못 할 말들을 성한빈이 건넨 술과 함께 삼켰다.

 

독주다. 독해도 너무 독했다. 그보다 성한빈 생각이 독할 만치 났다. 성한빈. 성한빈. 온 머릿속이 성한빈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다시금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듣지 못한 핑계거리가 됐다. 등 뒤에서부터 뻗어진 손이 식어 빠진 제 앞의 맥주를 잡아든다. 목 넘김 소리가 울렸다.

 

성한빈이 영화라면, 저는 어차피 들어낼 컷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삼켜내고, 또 참고.

 

"형. 잊었나 본데 도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양에 취하는 거라니까."

참다가.

 

"한빈아."

열대야 때문이야.

 

"내일 우리. 볼까."

충동심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불쑥 튀어나오는 말과 내일이면 후회할 미친 행동은 모두 다 열대야 때문이라고.

 

 

삼켜지지 못한 말을 기어코 뱉어냈다. 그러니까 나는 성한빈이 너무.

보고 싶었다.

 

 

 

 

 

***

 

 

 

 

 

도쿄 행 비행기 안에서 무던히도 생각했다. 이 상황을 수도 없이 상상하며 너를 만나게 되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너의 마지막 사랑은 아니어도 좋지만, 아니어야만 하지만. 적어도 사랑조차 아니었을까 봐. 그 생각엔 숨이 턱 막혀오기도 했다.

 

낯선 여행지가 주는 알 수 없는 용기가 있다. 꿈과 환상에 빠지기도 하며, 실제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간과한 점이 있다. 나는 여행 같은 걸 온 게 아니다.

 

 

성한빈은 입술을 파들 거리다, 뭔가를 말하려고 움찔거리다, 이내 미소 지었다. 내일은 안 될 것 같아.

 

"언젠가는 보지 않을까?"

"..."

"또 보겠지."

 

그리고서 돌아섰다. 지난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린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우린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 보지 못할 텐데.

 

마지막으로 본 것은 뒷모습이었다. 짧게 자른 뒷머리 아래로 보이는 목이 새빨갰다. 지난 밤을 회상하다 볼에 닿는 냉기에 눈을 떴다. 한 손으론 머리를 부여잡고 아이스 커피를 건네는 한동은이 있었다.

 

"저기요. 감독님. 현장 확인 다 하셨으면 허송세월 보내지 말고 가시죠? 숙취 때문에 일하기 빡세네요."

"문자 3번 날라 오더라."

"카드 알림을 켜 놓냐? 돈도 많이 버는 양반이."

"영원한 게 어디 있어. 아껴 써 뭐든."

 

장비 체크는. 다 했어? 잔소리를 이어가자 차렷 자세로 경례 포즈를 취한 한동은이 답했다. 넵. 감독님. 이상 없습니닷! 어물쩍 넘어가려는 계략이 눈에 선했다. 봐준다 내가.

 

"혹시 몰라. 애들 시켜서 모니터 연결 잘 되는지 확인해줘."

"."

"의자도 넉넉하게 빼 두고. 타임테이블 수정한 건 공유했지? 대행사 사람들은 어디 있어."

"."

"...듣고 있는 거냐."

 

이마에 딱밤을 놓자 한동은은 빽 소리를 질렀다. 이쪽으로 이목이 쏠렸다. 이내 촬영장 구석에서 아랫사람을 붙잡고 불평을 늘어놓던 사람 하나가 인상을 찌푸린 채 다가왔다.

 

"장 감독님?"

이 새끼는.

 

"남우원입니다. 이번 건 화보촬영 작가요."

그 새끼다. 성한빈 옆에 있던. 못되게 생긴 새끼.

 

우린 어떻게든 마주칠 수 있겠구나. 원치 않는 방향으로도 말이야. 이 바닥은 이렇게나 좁으니까. 성한빈의 말들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험한 말이 나왔다. 동선을 이렇게 짜면 어떡합니까? 하루 안에 화보도 찍어야 하는데. 스케줄이 안 나오잖아요. 상대 또한 피차일반인 듯했다. 틈새를 주지 않는 화법에 쏘아대는 하소연을 잠자코 들어야 했다. 그럼 일찍 오셔서 말씀 하시지 그랬어요. 이미 정리 다 끝났는데. 감정 섞인 말들이 오가자 옆에선 한동은은 말리듯 어깨를 툭 쳐왔다.

 

기 빨리는 신경전이 계속되자 한동은이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술병으로 피곤하다더니 열심이었다. 대화 내내 남자는 손에 든 전자담배를 인공호흡기처럼 빨아댔다. 이 공간이 제집 안방이라도 되는 양 이기적인 태도였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동선과 타임테이블이 수정됐다. 남자는 유리한 타협을 끝내고도 성에 차지 않는 지 촬영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욕지거리를 내뱉는 모습을 보였다.

 

"저딴 걸. 하…."

 

애꿎은 티셔츠를 펄럭거리며 답답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숨이 멈추지 않았다. 장 형, 답지 않게 왜 그럴까? 가라앉은 기분을 느꼈는지 한동은이 말을 걸어왔다.

 

"넌 저게 잘생겼냐 진짜."

"아 잠시만, 데자뷰."

"묻잖아."

"아 몰라. 초딩이냐? 나이 서른이 넘어서 그딴 걸 물어."

 

내일 동 트기도 전에 나와야 해. 이제 진짜 퇴근 좀 합시다! 팔을 잡아 당기는 한동은에게 이끌려 촬영장을 빠져 나왔다. 기름기 줄줄 흐르는 피부에 온 몸을 명품로고로 도배해 놓은 옷차림까지. 고개를 내려 제 몰골을 훑었다. 무릎이 늘어난 트레이닝 바지에 티 쪼가리 하나. 꼭 지금의 저와는 정반대의 차림이었다. 좀 더 신경 쓰고 올 걸 그랬나. 괜스레 드는 패배감에 목뒤를 쓸었다.

 

.”

 

그러다 헛웃음이 나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유치했다. 옷 가지고 무슨. 별게 다 눈에 거슬리지 싶었다. 장 형! 빨리 와! 어느새 저만치 앞서 걸어간 한동은이 팔을 휘적거리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

 

 

 

 

 

어제의 발언을 철회한다. 저 새끼는 못되게 생긴 게 아니라.

 

"어때? 볼만하지."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 새끼다.

 

백 여명의 스텝들과 관계자가 모인 광고 촬영은 정신 없이 흘러갔다. 그럼에도 딜레이를 면치 못했다. 벌써 열 두 시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촬영에 관계자들은 날카로워져 갔다. 호감을 내비치던 타츠야 상도 언성을 높였다.

 

대체 리허설은 왜 한 건가요? 옆에 선 광고 모델 역시 메이크업을 수정하다 말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사방에서 불만이 날아왔다. すいません. 이외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야카 상 역시 제가 열 마디의 사과를 내비쳐도 한 마디로 압축시켜 전할 뿐이었다. 겨우 허물었던 장벽이 다시금 쌓여가며 고립되고 있었다.

 

이 사태를 만들어낸 장본인은 희희낙락 광고모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거리낌 없는 스킨십이 둘 사이의 거리를 가늠케 했다. 화보촬영 시간이 길어지며 뒤 영상 촬영에도 영향을 미쳤다. 분통이 터지는 마음은 얼음을 가득 채운 커피로 달랬다. 저 새끼 생긴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한동은은 오버차지까지 감내해야 할 상황에 놓이자 미간을 찌푸리며 씹어댔다. 언제는 잘생겼다더니. 내 말에는 질렸다는 표정을 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장 감독님. 오늘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

 

미안해서 어떡하나. 대신 제가 여기 살게요. 남우원은 술잔을 든 채 사과인지 뭔 지 모를 말을 꺼냈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말투였다. 아, 네. 짧은 대답 후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성한빈이 제게 줬던 술과 같은 맛이 났다. 남우원은 수려한 발음으로 웨이터에게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모든 게 너무나, 불편함의 연속이었다. 목을 옥죄는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냈다. 옥죄는 듯한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촬영이 마무리된 직후 남우원은 뒤풀이를 제안했다. 당연히 그 남자에겐 일분 일초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타깃은 한동은으로 바뀌었다. 거절 못하는 성격의 한동은은 곤란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업계에서 꽤 입김이 센 감독이라 했던가. 제가 없는 자리에서 어떤 취급을 받을 지 불 보듯 뻔했다.

 

 

 

15cm 하이힐 소리가 터질 듯한 스피커의 리듬에 맞춰 움직인다. 날아다니는 형형색색의 전단이 가부키초의 아스팔트 위를 덮었다. 열댓 명 남짓한 인원들이 이곳에 모였다. 호스티스들은 구면인 듯 붙어왔다. 남우원은 양 옆에 탈색머리 종업원을 끼고 앉았다. 맞닿아오는 시선에 느리게 눈을 감떴다. 저 남자의 모든 행동이 입체감 하나 없이 진부했다.

 

"장 감독님 취향은 누구? 옆에 아가씨 스타일은 아닌 것 같고. 혹시 얘? 바꿔줄까요?"

"됐습니다."

"특별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드시는가 보네. 왜지?"

"이런 취미는 없습니다.”

"하하, 빼지 마시고요."

 

자의와는 상관없이 술자리의 시간은 흘러갔다. 무리는 추잡한 대화를 이어갔고 후배들은 이미 도수가 높은 알코올에 무너졌다. 이 더러운 자리가 막이 내리기 만을 바랐다. 패권을 쥔 남우원은 지치지도 않는 지 옆자리 종업원과 불쾌한 행위를 이어갔다. 이가 바득 갈렸다. 개입하지 않겠단 다짐이 자꾸만 무너지려 했다.

 

"장 감독. 나 알았어."

또 어떤 개소리를 하려고.

 

"취향이 여자가 아니구나?"

남자는 손바닥과 주먹을 맞부딪히며 물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 낯짝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냐, 나는 그 마음 이해해. 나는 안 가리고 다 먹어.”

 

으하하. 얼굴이 벌개진 꼴을 하고 더러운 웃음소리를 뱉는다. 열이 오르는 느낌에 소매를 걷었다. 어디론가 전화 전화를 걸던 남자는 얼마 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내고서 새끼손가락을 까딱이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내 이거. 점점 한계치에 다다랐다. 이내 핸드폰을 뒤적여 대다 사진 하나를 눈앞으로 들이민다. 어때? 볼만하지. 나름 유명한 배우였는데. 얘 알아? 구경 시켜 줄게. 사진 속에는 잠이 든 성한빈의 얼굴이 있었다.

 

"오, 장 감독도 표정이 있네."

“….”

"마음에 들어? 한 번 빌려줄까?"

 

넌 안 되겠다. 여전히 웃고 있는 낯짝에 주먹을 꽂았다. 진정하지 못한 주먹이 덜덜 떨려왔다. 찢어진 뼈마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장 형! 왜 그러는데!"

"나와 이 새끼야."

 

취했어? 싸움도 못하면서 왜 사람을 패! 둔탁한 소리와 고성이 울려 퍼졌다. 삽시간에 공간은 엉망이 됐다. 당황한 표정의 한동은과 몇 명이 저를 붙들었다. 그 남자의 무리는 이런 광경이 새롭지는 않아 보였다. 익숙한 듯 배를 잡고 낄낄거리는 이들에게 기이함을 느꼈다.

 

"."

 

튀어나오는 모국어를 막을 수 없다. 하하하. 그 남자는 반격은 커녕 터진 입가를 손으로 쓸며 피가 잔뜩 낀 이를 내비쳤다. 뭐에 취한 건지. 더 이상은 엮이고 싶지 않다. 형! 이러고 가면 어떡해! 계단 밑 한동은의 외침을 뒤로 한 그곳을 빠져 나왔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숨이 턱 막히는 여름 밤공기가 느껴졌다. 정신 없는 소음과 함께 전화벨소리가 섞여 들렸다. 버튼을 길게 눌러 전원을 완전히 껐다. 끊은 담배가 절실했다.

 

맞은 편 로손에서 이름도 모를 담배를 사 들고 불을 붙였다. 타닥타닥. 끝이 타들어 가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3년만에 들이마신 매캐한 연기에 입이 마르고 속이 쓰렸다. 콜록거리는 기침과 함께 생리적인 눈물이 맺힌 눈가를 닦았다.

 

이내 편의점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춰섰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다.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옭아매고 괴롭혀왔다. 무의식적인 행동은 막을 수가 없다. 나를 가로질러 가는 손목을 붙잡았다.

 

"."

가지마.”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 순간 너무도 간절했다. 소란스럽게 타오르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이거 놓으라고! 길거리의 사람들은 낯선 언어로 언성을 높이는 두 사람을 빠르게 지나쳤다. 손목을 비틀어 빠져나가려는 성한빈을 돌려세웠다.

 

"성한빈!"

"형이 무슨 상관인데!"

"가지 말라고 하잖아!"

 

벌개진 눈을 마주했다. 아직 지혈되지 않은 뼈마디의 피가 성한빈의 손목에 묻어났다. 버둥거리며 벗어나려는 성한빈을 힘을 주어 억지로 붙들었다. 가만히 있어.

 

"상관없잖아. 이거 놓으라고!"

"너, 너…. 내가 이러라고, 너를,"

 

화가 치밀었다. 나는 너에게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내 자신일까. 답을 알면서도 너를 향한 모진 말들을 멈추지 못하고 쏟아냈다.

 

"왜 이렇게 함부로 굴어."

"...?"

뭘 하고 다녀야 저딴 새끼를 만나는 거냐고. 대체. 저 새끼가 뭐라고 하고 다니는 줄은 알아?”

그래. 나 이런 애야.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더럽고,”

그만 안 해?”

"형이 말하고 싶은 게 뭐야. 대체 내가 뭔데!"

 

너 어디까지 나를. 지옥에 처박히는 기분이 든다. 그 순간 반항하던 성한빈의 손목에 힘이 빠진다. 손아귀에서 시끄럽게 울려 대던 핸드폰이 아스팔트 바닥위로 떨어진다. 동시에 머릿속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성한빈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내가 뭔데.”

 

긴 속눈썹 아래로 눈물이 차올랐다. 형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나라고, 이렇게 살고 싶은 줄 알아? 성한빈은 주먹을 들어 제 가슴팍을 쳐댔다. 심장이 푹푹 쑤셔졌다. 어떻게든 살아보려는데. 왜 그걸 방해해! 형이, 뭔데...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나, 나 너무 무서워... 나한테 남은 게 이제 이거 밖에 없는데. 더 이상 연기도 못하게 되면 나는,”

"...한빈아."

"형 너는, 버리기만 해봐서 모르나 본데.”

“...”

“...난 이제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아.”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는 성한빈을 부서질 듯이 끌어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한빈아. 잘못했어 내가. 무너지는 성한빈의 귓가에 용서를 빌었다. 이미 벌어진 상처를 긁어댔다.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한참이 지나서야 성한빈의 어깨 떨림이 점차 멎어갔다. 여전히 성한빈은 내게 안긴 채 움직이질 않는다. 나 역시 성한빈의 등을 토닥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축축이 젖은 셔츠 위로는 도쿄의 더운 바람이 불었다.

 

 

 

 

 

***

 

 

 

 

 

언젠가 우리는 여름날의 도쿄를 걸었다. 정말 뭣도 없던 때였다. 성한빈의 입대를 며칠 앞두고 단기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그리고는 그 푼돈으로 기념일 기분을 냈다. 우리가 수중에 가진 돈은 셀 수 있을 정도여서 우리는 옆 나라 수도에 와서도 낡은 료칸을 찾아다녔다. 그래도 서로가 있기에 괜찮았다. 핸드폰 카메라로 수많은 성한빈을 담았다. 뷰파인더 속 성한빈을 따라 웃음이 났다.

 

꼭 지금처럼 길 한 복판에서 말싸움이 붙었다. 우리는 시내에서 사십 분 가량 벗어난 작은 바닷가마을에 갔다. 일본의 교통은 어렵고 복잡했다. 그래서 화가 났나.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 서투른 한국말이 불씨가 되었겠지. 성한빈이 빠르게 쏘아 붙이는 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단히 화가 나 보이는 성한빈의 얼굴 위로 눈부신 햇빛이 쏟아졌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더 길길이 날뛰는 성한빈의 이마 위로 손을 들어 차양막을 만들었다. 성한빈은 우물거리던 입을 멈추고 그때도 지금처럼 제게 안겨 왔다. 수평선을 넘실대는 석양이 우릴 비췄다. 꼭, 우리가 어떤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여름날의 도쿄를 다시 걷고 있다.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헤어진 적 없었던 사람들처럼.

 

 

 

"아 그때 그 숙소 진짜 귀신 나올 것 같았어."

 

안 그래도 일본에 귀신이 많다잖아. 금방이라도 내 등을 두드리면서 인사할 것 같은데 형은 무지하게 코를 고는 거야. 그때 진짜 화병 나서 죽는 줄. 내가 그 얘기 하는데 형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카메라로 그걸 또 찍고 앉았어. 그러니까 화가 나 안나.

 

지금의 성한빈은 그때와 다르지 않다. 한 손에 나눠 든 아이스크림을 죽죽 빨면서 조잘조잘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열대야의 습한 기운에 성한빈의 손가락 위로 아이스크림 녹은 물이 뚝뚝 흘렀다. 저도 모르게 흘러내린 것을 손가락으로 훔쳐 닦아냈다. 성한빈은 일순간 멍해진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런 거."

"이런 거?"

"대꾸도 안 하다가 나만 보고 있었던 것처럼 굴잖아 형은."

 

우리는 그 많은 시간들을 함께하고도 여전히 서로를 몰랐다.

 

"힘도 내가 훨씬 세고 갑빠도 내가 더 크잖아! 근데 무거운 거는 죄다 자기가 들려고 하고."

"내가?"

"그래. 형이 나 버릇 잘못 들였어."

"그게 당연한 거야."

"?"

"사랑하니까."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성한빈의 고개가 휙 돌아간다. 어, 성한빈이다. 가챠샵에 덕지덕지 붙은 포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선 끝엔 폭력배 모양을 한 고양이가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야! 장하오! 죽을래? 뒤따라 달려오는 성한빈을 피해 가게 안으로 숨었다.

 

 

 

"나 사실 그때 이거 너무너무 하고 싶었는데."

"말 하지 그랬어."

 

이런 거에 낭비할 돈이 없었잖아. 주머니에 꾸깃꾸깃한 지폐 몇 개랑 동전만 달랑 거리는데 어떻게 말해. 와! 됐다! 허리를 숙여 인형을 뽑아낸 성한빈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 걱정 없이 웃고 있는 성한빈의 표정은 정말이지. 그 흔한 캐릭터를 품에 안은 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하하하. 인형과 똑같은 포즈를 취하는 성한빈을 보며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거리를 배회하다 간판 없는 이자카야에 들어섰다. 치지직. 음식 굽는 소리가 입맛을 자극하는 지 성한빈은 군침을 삼켜댔다. 얼마 먹지도 못하면서. 눈앞에 놓인 맥주를 벌컥 들이키는 성한빈을 따라 잔을 들자 제 손을 저지한다.

 

"누가 업고 가라고. 이 더운 날에."

"이제 이걸로는 안 취해."

"형 이미 먹고 왔잖아. 술 냄새 나."

 

아. 그랬지. 여전히 나는 성한빈을 통해 현실을 잊는다. 앞뒤 없이. 그러다 다시금 떠오르는 그 낯짝에 목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만."

"..."

"형.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우리."

 

우리. 참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 그렇게 당연한 우리였는데 몇 년 새 어색해져 낯이 간지러웠다. 그래, 그러자. 오늘은. 두 유리잔이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가 났다. 헉. 깨지는 줄.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리다 이내 사르르 웃는다.

 

"좋다."

"뭐가?"

"...그냥. 다."

"그냥 이라는 말은 너무 무의미해. 이유라도 붙여 봐."

 

우리 사이에 이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늘 당연했으니까. 무의미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감정에 이유를 붙인다면 역시.

 

"한빈이 웃어서 좋아."

그래. 역시 성한빈 선생님이 최고지? 성한빈이 대답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부서질 듯 해맑은 미소였다.

 

 

야끼토리와 함께 한 잔, 두 잔. 빈 잔의 개수가 늘어가자 성한빈은 나의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왜 영화 관뒀어? 형 되게 재능 있다고 다들 그랬잖아. 빈 꼬치를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지만 끄적대는 발끝으로 성한빈의 감정을 느낀다.

 

"더 이상 만들고 싶은 게 없어서."

"?"

"좋은 결말이 생각이 안 나더라고."

 

빈 꼬치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저지하며 새 꼬치를 성한빈의 앞에 가져다 주었다. 그렇구나. 짧은 대답 끝 정적이 일다 다시금 말을 덧붙여온다.

 

"보고 싶었는데."

"...나도."

"...응. 아쉽네."

 

그리고 돈도 벌어야 했고. 덕분에 뽑았잖아? 턱 끝으로 인형을 가리켰다. 조금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려 장난을 섞어 말했다. 동시에 누군가 테이블로 다가와 말을 붙여왔다. 혹시, 성한빈 맞아요? 아, 도쿄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많지. 오래전 습관처럼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성한빈은 당황한 기색 없이 웃으며 답했다.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팬이에요! 저 드라마 진짜 잘 봤어요!"

"아이 감사합니다아."

 

양손을 모아 인사를 하는 성한빈은 행복해 보였다. 사진을 청하는 상대에게 일행이 있어 곤란하다는 말을 한 성한빈은 묻지도 않은 사인을 해주겠다며 나섰다. 우와, 와. 가게 주인에게 노트와 펜을 빌려 사인을 하는 내내 감탄사가 들렸다. 하지만 여행객들이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없었다. 꼭 그 언젠가의 트라우마가 떠올랐다.

 

"..."

"...갈까?"

"...그래."

 

입구 쪽에 앉아 마지막까지 아는 척을 하는 사람들에게 성한빈은 끊임없이 웃어주었다. 아, 내 인형. 성한빈이 자리로 돌아간 짧은 틈 사이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꼴에 연예인이라고 사진 안 찍어주는 거 봐. 저러니까 망하지. 하필이면 성한빈이 다가오는 타이밍과 맞아떨어졌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제 쪽으로 다가온다. 울컥하는 마음이 일어 여행객들을 향해 다가서자 성한빈은 고개를 저으며 막아섰다. 성한빈은 아까와 다름 없는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애꿎은 옷만 말아 쥘 뿐이었다.

 

정말이지 사람이 싫었다.

 

 

 

 

기분이 날씨라면 분명 흐림일 것이다. 겨우 메워진 구멍을 또 누군가가 다시 헤집은 듯했다. 새벽녘의 호텔은 고요했다. 요란한 것은 마음 뿐이었다. 이틀 전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 달라진 건 성한빈이 마주 걷고 있다는 것. 발걸음 속도가 느려진 이유 또한. 하지만 시간은 이럴 때만 다시 등을 돌린다.

 

"...잘 가."

"잘 자, 형."

"..."

"풉, 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어."

 

내 표정이 그랬나.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 성한빈이 아직도 옆에 있다는 게 마음을 증폭시켰다.

 

"자고 갈까?"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냥…. 아쉬우니까. 분명 내 귀는 빨갛다 못해 아파 보이기까지 하겠지. 애새끼 같잖아. 급하게 문을 열다 발을 찧을 뻔했다. 혹시라도 또 멍청한 짓을 한 게 티나 갈까 걱정하던 찰나 성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먼저 씻을 게.

 

"왜, 왜 씻어?"

"형은 찝찝하지도 않아? 지금 내 얼굴을 봐."

 

더위에 유독 약한 성한빈이었다. 땀범벅이 된 이마에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들러붙어 있었다. 아저씨 다 된 줄 알았더니 사춘기 고딩이네. 성한빈은 능글맞은 말을 뱉고서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들릴 때까지 자리에서 꼼짝 할 수 없었다.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깊은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몇 년을 함께 살을 부대끼며 살았는데. 우리의 공백은 나를 다시금 멍청한 바보로 만들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침대 위 두 인영이 나란히 놓였다. 불 꺼진 방 안으로는 때때로 외부의 빛이 새어 들어올 뿐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저 불빛과 싸워 댔으나 지금은 이마저 마음을 증폭시키는 미장센이 된다. 언제 성한빈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성한빈 때문에 불안에 시달리고 성한빈 때문에 안정을 찾는다. 내 모든 우주가 성한빈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는 듯했다.

 

"형 고정문 알지."

"응. 알지."

"고정문 옆에는 항상 친절하게 당기시오, 미시오 알려주는 다른 문이 있어. 그런데도 사람들은 고정문이라고 쓰여 있는 쪽을 밀어 댄다?"

"..."

"그러면서 막 짜증 내고 화를 내. 자기가 안 되는 걸 억지로 한 거면서."

"...한빈아. 나는,"

"그런데 있지. 아주 가끔. 되는 때가 또 있어. 그러니까 그게 안 고쳐지는 거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내가 그러고 있어. 열리는 곳도 있겠지, 하면서."

“...”

그러니까 오늘 내가 했던 말들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단 희망이 들어. 예상은 빗나갔고 성한빈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한빈은 언제나 그랬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습관적으로 가면을 쓰곤 했다. 그리고서 가끔씩 오늘처럼 무너졌다.

 

"한빈아."

"...."

"본심을 말해."

 

뒤척이며 고개 방향을 돌렸다. 눈앞의 성한빈은 천장을 응시한 채 말을 이어갔다. 형은 속일 수가 없네 정말.

 

"슬퍼 봐야 인생의 좋은 순간을 알 수 있다잖아."

"..."

"좋은 순간이 내 인생에 다시 있을까?"

"있어. 분명히."

 

하하, 분명한 게 어딨어. 성한빈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형이 잘 돼서 다행이야. 진심이었어. 나는 형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사실 우리 불행의 원인은 나였을 지도 모르겠어. 이어지는 말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가느다란 팔로 얼굴을 가린 성한빈이 보였다.

 

"형. 정말 불행은 옮아?"

"...한빈아."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

"이젠 정말 모르겠어."

 

그 언젠가 비겁하게 도망치며 뱉은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온다.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일을 하는 너였다. 그런 너에게 했던 무책임한 말들의 무게를 이제야 깨닫는다. 너를 위해 했던 말이 저주처럼 남아 너를 옭아매고 있었구나. 내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 뱉은 못난 말들이 너를 이다지도.

 

그때의 나에게 니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어디를 가도 내가 머물 곳이 아닌 거 같았다. 너를 만나고 나서야 숨통이 트이고 살아간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 욕심이 생겨 더 반짝거릴 수 있는 너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매일같이 너를 잃을 까봐 불안에 떨면서 내가 만든 지옥 속에 살았다.

 

그러다 너를 완전히 잃고 나서야 알게 됐다. 한 순간도 나는 지옥이었던 적이 없었다. 나는... 나는 행복했다. 그때의 나는 너무 못났고, 어렸다.

 

십여년이 흘러 모국어만큼 자연스러운 언어임에도. 나는 결국 이 감정들을 너에게 전할 문장조차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저 손에 잡히는 너의 앙상한 발목과 종아리만 쓸어 대는 수 밖에. 말하지 않아도 부디 닿길 바라는 오만한 마음을 가진 채로.

 

"한빈아, 나는."

 

불행이 옮을까 걱정되어 너에게 손도 대지 못했던 지난 날의 나를 백 번이고 질책하면서. 한 번 더 안아줄 걸. 한 번 더 사랑한다고 말할 걸. 불가능한 현실에 닿아서야 늦은 후회가 몰아친다.

 

"니가 나에게 줬던 모든 기회들에 감사해."

 

언젠가 내가 살아갈 이유가 되어 준 것도,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준 것도. 내 꿈이 되어주었던 것도, 덕분에 사랑을 알게 된 것도.

 

사실은 나, 나...

나도 겁이 많은데...

니 앞에서 모든 두려움은 무용이 되어버려.

 

손 끝에 닿은 살결은 데일 듯이 뜨거웠다. 고장 난 듯 떨어대는 망가진 손 위로 네 손이 얹어진다.

 

 

"."

"..."

"나 한 번만 안아줄래?"

 

우리는 지금 서로의 추운 마음을 안아줘야 했다.

 

 

 

 

 

***





 




 

 

 

부대끼는 도시 속에서도 사무치는 외로움은 늘 존재한다. 우리는 각자의 외로움으로 서로를 덮고 몸을 데웠다. 아침이 올 때까지 껴안고 대화를 나눈 그 새벽 성한빈이 말했다.

 

"형.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되면 말이야."

"."

"다시 외로워지면 어쩌지."

 

낯선 곳, 불확실한 미래로 비롯된 소외감과 외로움의 끝은 알 수 없다.

"기다려 줄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외로움의 끝이 보일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가 외롭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천천히 와. 혹시나 중간에 지치면 오지 않아도 돼. 성한빈의 등허리를 쓸어 내리며 말했다.

 

그동안 나는 우리의 지난 날들을 다시 보고, 그때의 너를 생각하고, 또 사랑할 거야. 니가 올 때까지 플레이백 하겠다는 뜻이야. 우리의 영화가 무사히 다시 시작할 때까지.

 

그렇게 네가 내게 와준다면. 감히 다시 한번 평생을 약속할게.

내 모든 걸 파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널 팔지 않을 거야.

 

 

 

 

 

 

 

겨울의 10차선 도로는 혼란스럽다. 끝없이 빵빵대는 클락션의 향연이다. 저저, 그렇게 빨리 가고 싶으면 더 일찍 나오던가. 인내심 레벨이 평균을 웃도는 한동은은 조수석에 앉아 열심히도 열을 냈다. 뭘 그렇게 화를 내.

 

"추워 죽겠는데 열 내면 이득이지."

"그건 또 맞네."

"근데 보통 6시면 밝아지는 거 아니었어?"

"그러게. 다들 일출을 보고 사네."

 

해가 진 후의 저녁인지 해가 뜨기 전의 새벽인지. 시간을 도통 가늠할 수 없다. 어어 불 바뀐다. 한동은의 목소리와 함께 흰색 SUV가 정지선에 멈추어 섰다. 장하오는 핸들을 잡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나지막이 흐르던 음악을 끊어내고 전화벨이 울렸다.

 

 

- 장 감독님, 피디님! 어디쯤 오셨어요?

지금 테헤란로에요.”

- 빨리 오셔야겠는데요.

눈길이라 차가 막혀서요. 30분 남았다고 뜨네요. 늦지 않게 갈게요.”

 

 

내내 귀를 막고 있던 한동은은 통화가 종료되자 푸념하듯 넋두리를 내뱉었다.

 

"어후. 한국인 아니랄까 봐 빨리빨리 엄청 쪼으네. 그치 않아?"

"몰라. 인마."

 

아 맞다. 형 한국인 아니지. 장하오는 한껏 들뜬 채 말장난을 치는 한동은을 못 살겠단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래서. 소감이 어떻습니까."

"뭐가 또."

"곧 디데이 아닙니까!"

 

학수고대하던 그 광고촬영이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마이크를 쥐고 기자 시늉을 하는 한동은의 모습에 별안간 웃음이 터졌다. 길어지는 신호 대기에 창틀에 손을 괴고 머리를 기댔다.

 

"해 뜬다, 형!"

 

매일 뜨는 해가 뭐라고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밀며 동영상을 찍는 한동은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유리창 너머를 응시하다 성한빈과 눈을 마주한다.

 

높은 빌딩의 꼭대기로 해가 떠오른다.

커다란 전광판들 속 성한빈이 눈부시게 웃고 있다.

 

 

 

장하오는 도시의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안다. 그리고 장하오는 외로움을 밝히는 빛을 안다.

 

이 도시에 빛이 없다면 회색 빌딩이 늘어진 이곳은 외로운 영혼들의 무덤일 뿐이겠지. 도시 속 외로움과 고군분투하며 애쓴 지난 날의 시간을 돌아본다. 어쩌면 지금도 열렬히 싸우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언젠가 다시 외로움이 찾아와도 이제는 이겨낼 수 있다. 나를 비춰주는 빛나는 사람이 있으니까. 너와의 약속을 이번에는 지켜야 하니까.

 

사랑만으론 해결할 수 없다던, 외로움으로 뒤범벅된 과거의 우리에게 사랑만으로 답한다. 우리가 서로를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내 시간 속에 네가 있어 다행이라고.

 

 

빨간 불이 초록 불로 바뀐다. 스치는 모든 길에 성한빈이 있다.

정말이지 온갖 성한빈이 나를 따라온다.

 

 

 

 

 

-Not for sale, fin

이름처럼 영원히 빛나길 바라며. by Z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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