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iminal
오늘
*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영화를 안 보셨더라도 스토리 이해에는 무리가 없습니다만 소재 특성상 폭력이나 살인과 같은 범죄행위가 자주 언급되는 점 미리 알려드립니다.
* 본 소설에 등장하는 기술과 시스템은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으며 기관과 지명 또한 모두 창작된 것임을 밝힙니다.
하루 중 가장 분주한 시간, 오후 두 시. 이 간단한 사실은 죽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경감님. 3번 취조실에 용의자 도착해 있습니다."
"응. 고마워."
건네지는 서류철을 한 손으로 받아 들었다. 다른 손에 들린 머그컵엔 짙은 갈색의 액체가 가득 차있다. 톡 치면 넘칠 만큼. 장하오는 급한 와중에도 잠시 멈춰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앗뜨. 인상을 찌푸림과 동시에 옆에 선 한유진이 재촉을 해댔다.
"여유 부리실 시간 없습니다. 지금 10분이나 늦으셨다고요. 커피는 들어가서 드십시오."
"미안, 미안. 내가 낮에 깨어있는 게 아직 어색해. 이거 안 먹으면 들어가서 졸아."
"그건 경감님 개인사정이죠. 사과는 취조실 가서 하시구요. 자꾸 이렇게 늦으시면 우리 이미지 안 좋아집니다. 또 좌천당하고 싶으세요?"
"...얘는 말을 해도 꼭..."
장하오가 한유진을 흘겨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파랗게 어린 녀석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눈빛으로 압박을 해온다. 빨리 들어가시라고요. 예? 상당히 싹바가지 없어 보이는 눈을 마주하던 장하오가 이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알아서 잘 걸어갈 수 있는데. 한유진은 뭐가 못 미더운지 잰걸음으로 졸졸졸 뒤를 따른다.
"3번 취조실?"
"네. 3번. 아니! 거긴 2번이잖아요."
"아, 내 정신 좀 봐. 쏘리."
"미치겠네."
한유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마를 덮은 앞머리가 입김에 훅 올라갔다 떨어진다. 2번 취조실 문을 잘못 열 뻔한 장하오는 머쓱한 얼굴로 웃어보이고서 옆방 문고리를 잡았다. 취조실 3. 적힌 숫자를 똑똑히 확인한 그가 잡은 문고리를 돌렸다. 나 들어간다. 나중에 봐. 가벼운 인사에 한유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까지 확인한 장하오가 그제야 취조실 안으로 들어섰다. 손목시계는 약속된 시간으로부터 정확히 12분 하고도 5초 정도 늦은 시간을 보이고 있었다. 좀 늦긴 했네. 시간이 초단위로 쉴 새 없이 흐르는 것을 바라본 뒤 시계에서 시선을 뗐다.
복도보다 살짝 어두운 톤의 조명이 켜진 취조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있는 것은 적당한 크기의 테이블과 의자 두 개, 벽에 걸린 디지털 시계, 그리고 천장 구석의 cctv 뿐이다.
인기척에 이미 도착해 앉아있던 이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장하오는 양손 가득 들고 있던 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뒀다. 아마도 이 공간에 함께 있는 이의 신상정보가 들어있을 자료, 그리고 아까보단 내용물이 조금 줄어든 뜨거운 머그컵.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사과는 어렵지 않다. 돈이 드는 것도, 시간이 드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사과가 만능은 아니긴 하지만.
"괜찮아요. 근데 혹시 그 한 마디가 끝인가요? 낭비한 제 시간은요? 국가에서 따로 보상해주나요?"
허둥지둥 자리에 앉으려던 장하오가 그 말에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급히 들어오느라 얼굴도 확인하지 못 했던 용의자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색한 기류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꽤 앳되다. 용의자 감시과로 좌천된 이후 약 두 달 동안 봐온 시커먼 아저씨들과는 다른 종류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소년 같은 부드러운 외모가 풍기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똘망똘망한 눈동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직감하게 만들고 있었다.
"일단 앉으세요. 저 바빠요. 시험기간이라."
"아, 네네. 미안합니다."
시험기간. 학생인가. 장하오는 멋쩍은 듯 사과를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분명 취조를 하는 입장인데 꼭 상황이 뒤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2분 정도 늦은 게 꼭 엄청난 죄라도 되는 것 마냥.
서류철의 표지를 펼쳤다. 원래는 한유진이 건네준 이 자료도 미리 도착해서 읽고 있는 게 맞는데. 바뀌어버린 패턴 때문에 장하오는 낮에 영 힘을 못 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검거과에서 지낸 5년 동안은 대개 밤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검거하러 다녔으니까. 몇 년간 바뀐 채 지낸 낮밤이 하루아침에 돌아오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하루아침이라기엔 어느새 두 달 째긴 했지만.
이름 : 성한빈.
나이 : 만 24세.
직업 : 교육대학교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어 올해 3월부터 근무 중.
특이사항 : 여동생이 13년 전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 다른 형제는 없으며 부모와 따로 살고 있음.
아마도 한유진이 요약해 두었을 내용이 적힌 포스트잇. 장하오는 분홍색의 작은 종이를 떼어내 글자를 꼼꼼히 읽었다. 포스트잇이 붙어있던 자리에는 좀 더 상세한 신상정보가 적힌 자료가 있다. 멀끔하게 찍힌 증명사진 속 얼굴이 싱긋 웃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쁜 짓이라곤 해본 적도, 해볼 일도 없을 것만 같은 무해하고 상쾌한 얼굴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꽤 잘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음, 그러니까...
"시험기간이라는 게... 본인의 시험은 아니시구나."
"네. 왜요?"
"그냥요. 어려보이셔서."
장하오가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하고서 서류철을 덮었다. 요약된 내용을 봤으니 서류는 더 뒤져볼 것도 없었다. 나이도 어리니 대충 학창시절 생활기록부 같은 것 뿐이겠지, 뭐.
그리고 그 신상정보의 주인인 성한빈은 성의없어 보이는 그 태도에 황당한 얼굴을 했다.
"저 그런 말 들으려고 여기 잡혀온 거예요?"
"음... 그건 아니겠죠?"
"어려보인다느니, 초면에 그런 멘트 되게 무례한 건 아시죠? 낮잡아 보지 마세요."
성한빈이 눈을 치켜떴다. 불쾌한 티를 팍팍 내는 눈이었다. 장하오는 쓰읍, 숨을 들이키고서 테이블 위를 토독, 두드렸다. 무작정 결백을 주장하고 보던 다른 이들과는 역시나 다른 태도였다. 생기가 없던 동공에 흥미로움이 번진다. 입꼬리엔 옅은 미소가 걸렸다.
"왜 이렇게 까칠하실까... 여기 소개팅 아니에요. 초면이고 뭐고 할 게 뭐있어. 여기서 구면으로 만나면 성한빈씨는 큰일 나는 거지. 제가 12분 늦은 게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그것 뿐이겠어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화가 안 나는 일이 없었는데요."
"그렇구나. 다 말씀해 보세요."
장하오가 펜을 집어들었다. 딸깍, 기록할 준비가 된 펜을 든 그가 유니폼의 가슴팍에서 손바닥만한 수첩을 꺼냈다. 이거 하나는 좋았다. 기동성을 위해 주머니 같은 건 하나도 없는 쫄쫄이를 입고 다녀야 했던 과거에 비해 감시과의 유니폼은 인간적이었다. 필수품은 유니폼 주머니에 넣어두기만 하면 까먹고 놓고 올 일이 없었으니.
꼭 민원을 접수받는 사람처럼 뭐든 말해보라는 태도였다. 성한빈은 눈앞의 새까만 유니폼에 달린 금속 명찰을 바라봤다. 장하오 경감. 군기가 다 빠져 보인다 했더니 계급이 높아서였나.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낯선 사람 두 명이 다짜고짜 교실로 들어서서는 저를 찾아왔다고 하더라고요. 경감님과 비슷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었어요."
"네. 그랬겠죠. 프리크라임이 성한빈씨를 위험인물로 지목했으니까."
"그러니까 저를 왜요? 아니, 애초에 프리크라임인지 뭔지 그거 믿을만한 거예요?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시민을 이렇게 연행해오는 게 어디 있어요. 우리 반 애들 다 보는 데서. 난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데!"
성한빈이 답답한 듯 짜증을 냈다. 쾅, 뭐가 부딪히는 큰 소리가 난다 했더니 의자와 연결된 수갑을 당겨 나는 소리였다. 그는 손목으로 퍼지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곤 말을 이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범죄자 취급하고 묶어두는 건 또 어느 나라 법이래요? 설명이라도 해주든가. 납득할 이유도 하나 없이 따라오라는 명령만 하더니, 날 여기 가둬놓고 두 시에 당신을 심문할 사람이 올 거래. 근데 벽에 걸린 저 시계가 두 시가 돼도 안 와. 그러다 10분도 더 된 시간에 경감님이 나타났죠. 여유롭게 커피 한 잔 들고. 화가 안 나겠어요? 난 점심도 못 먹었어요."
분노에 찬 성한빈의 말을 가만히 듣던 장하오가 킁, 괜히 코를 훌쩍이며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나 방금 혼난 거 맞지... 초등학교 교사라더니 이해하기 쉽게 따박따박 화를 내는 걸 보곤 할 말이 더욱 더 없어졌다. 듣고 보니 틀린 말도 하나 없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네네, 당신 말이 다 맞아요. 해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우선 무엇보다 그의 마지막 한 마디가 제일 마음에 걸려서, 장하오는 주머니 속 폰을 꺼냈다. 어. 유진아. 3번 취조실에 도시락 좀 두 개 갖다주라. 어. 그냥 니가 보고 괜찮은 걸로. 짧은 통화를 마치고서 다시 주머니에 폰을 쑤셔넣자 동그란 두 눈이 끔뻑끔뻑,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점심 안 드셨어요?"
"네. 같이 먹어요."
사실 밥을 못 먹은 이유는 일어난지 한 시간도 안 되었기 때문이지만 굳이 그 말을 하진 않았다.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게 빈정 상한 저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점심을 안 먹었다는 말에 약간은 미안한 표정이 스치는 얼굴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장하오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두고서 수첩을 덮었다. 이것저것 물어보기 전에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는 게 먼저인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계속 적대적인 태도일 테니.
"우선 사과할게요. 들어와서 계속 사과만 하는 것도 면목 없긴 하지만. 저도 아직 감시과의 이 시스템을 잘 몰라서요. 밥도 안 먹이고 설명도 없이 데려오는 줄은 몰랐네."
눈을 마주했다. 몰랐다는 건 사실이었다. 지금껏 밥을 못 먹었다고 투덜대던 사람은 없었어서. 아님 이 사람의 태도를 보니 데려올 때에 한바탕 하고서 일부러 밥을 안 줬나 싶기도 하고. 뭐 어쨌든, 그건 제 소관은 아니니 죄책감은 없었다. 성한빈 또한 그게 눈앞에 앉은 장하오 경감의 잘못은 아닐 걸 알아 잠자코 있었다. 또렷한 눈빛이 서로를 향했다.
프리크라임. 장하오는 성한빈이 지금 이곳, 범죄예방센터의 용의자 감시과 취조실에 잡혀오게 된 전말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 간단한 시스템은 아니지만 최대한 민간인의 입장에서 알아듣기 쉽게.
"프리크라임이 어떤 건지 대충 들어는 보셨을 거예요. 올해가 프리크라임이 생긴지 10주년이 되는 해예요. 도입까지는 꽤 오래 걸렸죠. 성한빈씨가 태어나실 때 쯤부터 한창 준비를 해왔었다고 알고 있어요."
프리크라임은 간단히 말해 범죄 예방 시스템이다. 데이터의 수집, 관리 및 분석 기술과 인공지능의 발달에 따라 이를 범죄 예방에 활용하고자 한, 좋은 취지로 만들어진 시스템.
"아마 이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메커니즘은 잘 모르실 거예요. 짧게 요약하자면 프리크라임은 지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국민의 사고회로와 행동패턴을 수집하고 분석해왔어요. 그 결과,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특징을 알아내 이젠 범죄를 예측하기에 이르렀죠."
프리크라임에 따르면, 범죄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일시, 장소 및 범행대상 등 모든 것을 계획한 계획 범죄와, 순간의 충동으로 저지른 우발적 범죄. 전자의 예측은 아주 쉬웠다.
"프리크라임은 누군가의 '계획 범죄'를 감지한 순간 이 센터 내에 위치한 대형 스크린에 다섯 가지 정보를 띄워요. 범죄를 저지르게 될 가해자, 당하게 될 피해자. 그리고 정확한 일시와 장소. 마지막으로 범행 방법. 이 정보는 가해자의 머릿속에서 확정된 계획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절대 틀리지 않아요. 예언이나 마찬가지죠."
"잠깐, 경감님. 궁금한 게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가만히 듣던 성한빈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 좁아진 미간엔 의구심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경감님 말씀은, 국가가 국민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요? 사고회로와 행동패턴을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그 말 아니에요? 지금 제가 잡혀온 걸 보면 저 또한 감시 당하고 있었다는 거잖아요."
"정확히 이해하셨어요. 국민들은 감시 당하고 있어요."
"....."
성한빈의 눈이 황당함을 담았다. 그런 소리를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하냐는 듯. 당당한 장하오의 태도에 말문이 막혀 벌어진 입에선 대꾸도 안 나왔다.
어쩐지 만만해 보이던 장하오 경감이 한순간 적처럼 느껴졌다. 새까만 동공을 통해 보이는 여유 같은 것의 근원이 무엇인지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엔 이제 감정이랄 것이 읽히지도 않았다. 성한빈은 갑작스레 두려움을 느꼈다.
"눈치껏 알아채셨겠지만 데이터의 수집 방법에 대해선 기밀이라 알려드릴 수 없고요."
"....."
"우리는 당신이 하는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으니 거짓말 할 생각도 마시고요."
"....."
"뭐, 그렇다고 너무 무서워하실 건 없어요. 수집한 정보는 범죄예방 목적 이외로는 활용되지 않습니다. 절대로요."
장하오가 빙긋 웃었다. 상대를 안심시키려는 목적의 웃음이었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다. 성한빈의 손이 가지런히 모아졌다. 입을 꾹 닫은 그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장하오를 바라봤다.
"아무튼. 성한빈씨는 계획 범죄를 저지를 인물로 지목된 건 아니에요. 만약 그랬다면 이곳에서 저를 만날 게 아니라, 범죄 현장에서 바로 검거해왔겠죠."
장하오가 감시과로 좌천되기 전 몸을 담고 있던 부서, 검거과에서는 프리크라임으로부터 계획 범죄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얻어 강력 범죄를 예방하는 일을 했다. 프리크라임이 제시한 일시에 해당 장소로 찾아가 범죄가 이루어지는 순간을 포착하고, 간발의 차로 가해자를 체포하는 것이다. 이때, 가해자는 범죄를 저지른 현행범으로 간주한다.
계획 범죄를 막는 것은 이처럼 간단했다. 문제는 순간의 충동으로 인해 발생한 우발적 범죄다. 가해자조차 본인이 범죄를 저지를 것을 모르니까. 프리크라임이라고 해서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을 예측할 순 없었다. 그러니 우발적 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그러한 충동이 잠재되어 있는 인물을 위험군으로 분류하여 감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감시과가 하는 일이었다.
"프리크라임이 계획 범죄에 대해선 다섯 가지 정보를 띄운다고 말씀 드렸죠. 반면 누군가의 우발적 범죄를 감지한 프리크라임은 단 두 가지 정보만 스크린에 띄웁니다. 지금으로선 알 수 있는 게 그것 뿐이거든요."
길게 뻗은 장하오의 검지가 성한빈을 가리켰다.
"가해자에 대한 정보."
성한빈이 숨을 죽였다. 자신을 향한 손가락 끝을 빤히 바라보며.
"그리고 범죄의 종류. 성한빈씨의 경우는..."
"....."
"살인이었어요."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억지로 말을 뱉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장하오는, 꼭 그 말을 예상한 사람처럼 그랬다.
"취조실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죠."
"...전 정말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는 비율은 몇 퍼센트일까요?"
장하오가 두 손을 펼쳤다. 손바닥 두 개가 성한빈을 향했다. 곧게 펼쳐진 열 개의 손가락이 보였다. 그러더니, 총을 쏘는 것처럼 엄지와 검지를 남겨두고 오른손의 세 손가락을 접는다.
빵- 장하오는 입으로 소리를 내며 총알을 발사하는 시늉을 했다.
"팔십."
"....."
"지목된 모든 인원 중 한 달 내로 실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비율이죠. 물론 그들은 우리가 늘 집중 감시 중이라 그 중 반 정도는 범행이 일어나기 직전에 막을 순 있어요."
"....."
"어때요. 많은 것 같나요, 적은 것 같나요?"
성한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많은 건지 적은 건지 감도 안 잡혔다. 아무리 저렇게 장난스러운 태도로 말을 해도 장하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직감으로 알았다.
혼란스러운 기분에 한참 굳은 머리를 굴려보던 와중, 취조실의 문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장하오의 대답에 문이 열리고, 대학생 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도시락을 두 개 들고 들어왔다. 정직원이 아니라 그런 건지, 직급이 낮아 그런 건지 장하오처럼 유니폼을 입고 있진 않았다. 사복차림이었다. 성한빈이 도시락을 세팅하는 그의 목에 걸린 것을 빠르게 훑었다. 한유진 인턴.
"밥은 드셔야 하니까 수갑 풀어드려."
가져온 도시락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반찬투정을 하던 장하오가 갑자기 그런 말을 꺼냈다. 두 손이 의자에 묶여 있어 밥을 먹을 수가 없으니 그 말이 당연하긴 한데, 한유진은 머뭇거리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 취조실에서 갑자기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취조가 끝나기 전까지 수갑을 푸는 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감시과 방침입니다. 안전을 위해서요."
"풀어드려. 괜찮아."
"경감님."
"나 두 달 전까지 어디서 일했는지 까먹었어?"
"....."
"험한 꼴 뒤지게 많이 봤으니까 걱정 마. 사람 하나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야. 풀어도 돼."
허세가 아니었다. 검거과에서 장하오가 얼마나 날아다녔는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으니까. 그가 경력에 비해 높은 직급을 달고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한유진은 더 반박하지 못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구석의 cctv를 힐끔거리자 장하오가 귀신같이 그걸 알아채고서 한 마디를 했다. 귀찮게 이거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는 사람 없어. 알잖아. 그걸 듣고서야 꼼지락 꼼지락, 성한빈의 오른팔에 채워진 수갑을 풀어냈다. 그새 붉은 자국이 나있었다.
"혹시 모르니 오른팔만 풀어 드리겠습니다. 그럼 전 나가보겠습니다. 필요하신 거 있으심 전화 주세요."
한유진이 꾸벅 둘에게 인사를 하고서 취조실을 벗어났다. 장하오도 성한빈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봤다.
"답지않게 쫄아있네."
장하오가 헛웃음을 치며 혼잣말을 했다. 제 앞에선 바락바락 대들던 한유진도 잠재적 범죄자는 무서운가 보다 싶었다. 성한빈과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도망치듯 빠져나간 걸 보면.
일단 먹어요. 먹으면서 얘기해요. 장하오가 나무젓가락을 뜯으며 말했다. 그러다 아직 한 손이 묶여있는 성한빈을 보곤 그의 손에 뜯은 젓가락을 쥐여줬다. ...감사합니다. 작은 인사가 돌아왔다. 평범한 도시락을 놓고 두 사람의 젓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경감님."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의외로 성한빈 쪽이었다. 장하오가 고개를 들어 성한빈을 마주봤다. 왜요? 그 물음에 성한빈이 살짝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팔십..."
"....."
"팔십 퍼센트 비율이면, 제가 이십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지목된 모든 인원 중 한 달 안에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비율. 아무래도 그게 꽤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프리크라임이 믿을만한 게 맞긴 하냐고 소리를 빼액 지르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한 성깔 하는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여린 타입인 것 같기도 하다. 장하오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글쎄요."
"....."
"아까 말씀 드리려다 도시락 때문에 끊겼던 게 있는데."
"...뭔데요?"
성한빈이 불안하게 물었다. 장하오는 계속해서 성한빈이라는 사람을 파악해 보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봤다.
"성한빈씨처럼 우발적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위험인물로 지목이 되면, 저희가 계속 감시를 합니다. 그리고 교화를 시도하죠. 범죄자를 검거하는 것보다도 범죄 자체를 막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
"시스템은 그것 또한 알아챌 수 있어요. 교화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
"프리크라임이 지목한 인물을 '위험'에서 '안전'으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 비율이 이십 정도 돼요. 팔십과 이십 사이엔 빈틈이 전혀 없어요."
다시 말해서, 프리크라임의 예측은 틀리지 않는다는 거죠.
절대로.
단호히 덧붙은 말. 성한빈은 젓가락을 꾹 쥔 채 가만히 굳어버렸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성한빈씨가 이십 쪽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예요. 그냥 이렇게 종종 저랑 대화 조금 나누고, 그러다 프리크라임이 당신을 안전한 인물이라고 판단하면 우린 다시 볼 일도 없는 거. 쉽죠?"
장하오가 어깨를 으쓱, 했다. 별 거 아니니까 겁먹지 마요. 위로인지 뭔지 모를 말이 쉽게도 튀어나왔다.
그 말을 곱씹던 성한빈은 한참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별 일이 있기야 하겠어? 결론은 그거였다. 프리크라임이니 뭐니 하는 것의 의견이 어쨌든 간에 자신은 누군가를 해칠 이유가 없다. 살인? 정말 죽었다 깨어나도 그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지금은, 그러한 오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성한빈을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기껏 묻어뒀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려 했다. 동생의 비명소리가 다시 머리를 울려댔다. 성한빈은 눈을 꾹 감고서 천천히 숨을 들이키고 내뱉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 때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쓰던 호흡법이었다.
그리고 장하오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The Criminal
장하오 x 성한빈
꽉 조인 붕대가 낯설었다. 어깨 부근의 팔뚝이 붕대에 짓눌려 갑갑했다. 피가 안 통해 저린 느낌도 들고. 좀 아픈 것도 같고. 무엇보다 불쾌한 기분이 가시지가 않았다. 간만의 부상이라 더 그런 것 같았다.
병실 침대에 벌러덩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봤다. 점심 시간인 탓에 6인실인 병실이 꽤 소란스러웠다. 혼자가 익숙한 장하오에겐 이런 소란이 낯설었다. 그래서 입원해 있는 이틀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딱히 입맛도 돌지 않아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었다. 벽을 향해 몸을 돌려 누우니 등 뒤에서 옆 침대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각. 또 밥 안 먹어? 잘 먹어야 빨리 낫지."
걱정어린 말투였다. 또 그런 걱정을 무시할 만큼 정이 없는 타입은 아니라, 장하오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식사를 위해 상을 펼친 홍 여사가 어서 일어나라며 손짓으로 채근했다. 장하오는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저녁부턴 잘 먹을게요. 지금은 안 먹힐 것 같아서요."
"오늘 아침에도 그랬잖아. 점심 잘 먹겠다면서. 자꾸 미루는 것도 습관이야. 우리 아들놈이랑 똑같네. 총각이 훨씬 잘생기긴 했다만."
"....."
"얼른 일어나서 밥 먹고 산책도 나가고 그래. 다리는 멀쩡하잖어. 옆에서 그렇게 힘이 없으니 나도 덩달아 힘이 빠져."
홍 여사의 애정 어린 잔소리가 이어졌다. 장하오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결국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마침 식사가 들어오는 타이밍이었다.
금방 일어나 상을 편 장하오를 보고 홍 여사가 기쁜 낯을 했다. 잘 생각했다고. 식판을 받아 수저를 드는 모습을 보곤 꼭 제 아들이라도 되는 듯 흐뭇한 얼굴을 한다. 기운 차릴게요. 맛있게 드세요. 덧붙은 말에는 아침에 굶은 것까지 해서 싹싹 긁어먹으라는 미션이 돌아온다. 장하오는 작게 미소를 짓고서 숟가락을 움직였다.
아마도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홍 여사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테다. 흰머리가 희끗 보이기도 했을 거고, 다 큰 아들놈에게 잔소리도 일삼았을 테고.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허리를 다쳤다는 홍 여사처럼 조심성이 없던 어머니도 한 번 쯤은 이렇게 입원을 했을지도 모른다.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생각 때문에 차마 더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약해져서.
원래 홍 여사 또래의 중년 여성을 보면 늘 어머니가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거기다 더해 요즘은 검거과에서 마지막으로 맡았던 임무도 함께 떠올랐다. 감시과로 좌천되게 만든 그 사건 말이다.
검거과에서는 주로 계획 범죄를 막는 일을 했다. 프리크라임을 통해 범죄의 기본 정보는 사전에 모두 알 수 있다. 처음엔 그거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찌됐든 목적은 살인과 같은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고, 일시와 장소, 범행방법만 알아도 숙련된 특공대 인력들이 비극을 막고 가해자를 검거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최근에야 깨닫게 됐다. 두 달 하고도 보름 쯤 전. 그 사건을 겪고 나서.
계획 살인의 가해자로 지목된 것은 5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장소는 자택, 범행 도구는 식칼. 그리고 피해자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투박하다고 생각했다. 계획 살인은 우발적인 것과 달리 치밀하게 짜여지는 편인데, 그래서 식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 오히려 흔하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 일은 아니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문을 부수고 들어간 사건 현장에서 장하오는, 드러난 팔다리에 온통 맞은 흔적이 가득한 가해자를 마주하게 됐다. 광대에 시퍼런 멍이 든 여자의 얼굴이 침입자들을 바라봤다. 삶의 의지라곤 찾아볼 수도 없이 시꺼먼 분노만 가득한 눈이 장하오를 향했다.
우발적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위험 인물은 프리크라임이 말 그대로 '가능성'을 보고 지목한 것이기 때문에 범죄자로 확정 짓진 않는다. 하지만 계획 살인의 경우는 다르다. 계획에 실패하더라도 최소 살인미수인지라 지목된 순간부터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교화 시도 또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누군가를 살해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강하기 때문이다.
당시 마주한 가해자 또한 그랬다. 예고도 없이 쳐들어와 총을 겨누는 특공대를 보고도 식칼을 든 손을 내려놓지 않았다.
18시 52분 23초.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프리크라임 시스템이 예측한 범행 시간. 그 시간을 10초 가량 남겨두고 진입에 성공한 장하오는 가해자와 피해자, 두 사람과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섰다. 함께 나선 팀원들은 상관이 멈춰서자 엉겁결에 함께 멈칫하고 말았다. 1초가 중요한 검거과의 임무에서 장하오는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칼을 몇 번이고 찔러대는 동안 그는 발이 땅에 붙어버린 사람마냥 가만히 멈춰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만 있었다. 뒤늦게 다른 팀원들이 가해자를 체포하고 상황을 수습하는 동안에도 손을 보태지 않고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결국 피해자는 사망했다. 아주 드문 일이었다. 프리크라임 도입 이후 계획 범죄를 막지 못한 것은. 장하오의 첫 실패이기도 했다.
그게 결국 부서 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직 처분을 받을 뻔 했으나 크고작은 부상을 당하는 일이 많은 직업인지라 센터에는 인력이 늘 부족했다. 장하오는 상관에게 된통 깨진 후 감시과로 옮겨졌다. 센터 입사 후 5년만의 일이었다.
묵묵히 밥만 먹다 보니 그릇은 금방 비워졌다. 홍 여사에게 빈 그릇을 보여주고서 칭찬을 받았다. 진심으로 기특해하는 듯한 표정에 괜히 마음이 찡해져 양치질을 핑계로 자리를 떴다. 어머니 생각이 쉬이 사라지질 않았다.
"어, 경감님. 안녕하세요."
말간 얼굴을 한 성한빈을 마주한 건 병실 외부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끝내고 나서던 길에서였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이 시간에?"
당황한 장하오의 눈이 성한빈을 훑었다. 깔끔히 다려진 흰 셔츠와 청바지는 평소 출근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한 손에 들고 있는 묵직한 박스는 누가 봐도 병문안을 온 모양새였다. 주스가 들었는지 박스엔 알록달록한 과일들이 그려져 있다.
"가해자 제압하다 부상 당하셨다고 들어서요."
"...네. 큰 부상은 아니에요. 근데 학교는요?"
"네? 오늘 토요일이에요. 혹시 머리도 다치셨어요?"
성한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아, 그러네. 뒤늦게 요일 감각을 되찾은 장하오가 멋쩍게 웃었다. 그렇다고 머리도 다쳤냐고 묻는 건 뭐야. 비꼬는 건가 했지만 성한빈은 언제나처럼 그런 의도는 없어 보이는 얼굴이다. 진심으로 머리가 다친 건가 싶어 걱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캐릭터였다. 보름 째 프리크라임에서 위험 신호가 없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시과에서는 보통 한 명의 경찰 인력이 둘에서 셋 정도를 담당하여 감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틀 전엔 장하오가 담당하던 다른 우발적 살인 용의자에 대해 프리크라임이 경보를 울렸었다. 곧 용의자가 범죄를 저지른다는 뜻이었다.
이 경우에는 검거과의 비상 출동 인력들이 움직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아무리 본인이 담당하던 용의자라 해도 감시과 소속인 장하오는 출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괜한 책임감 때문이었나. 교화에 실패했단 죄책감 때문이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5년 동안 자연스레 몸에 밴 습관 때문이었나. 그는 호신용으로 보급된 권총 하나만 챙겨 프리크라임이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늦은 밤, 번화가의 술집이었다.
40대 초반의 용의자는 몇 번의 대화 당시엔 꽤 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센터에서 검사를 진행한 자료에 따르면 본인이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 때에 약간 분노 조절이 어려운 듯한 모습을 보이긴 하였으나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건 몸이 멀쩡할 때의 모습이었고, 술이 들어가면 사람이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경보와 함께 범행 장소를 띄웠던 프리크라임이 마침내 피해자 정보를 띄웠다. 범행 도구도. 장하오는 팔에 찬 스마트 워치로 전달된 정보를 확인하고서 재빠르게 술집 문을 열었다. 깨진 술병을 든 용의자가 알바생의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좁은 술집을 가득 메웠다.
사람이 몰린 탓에 총을 쏘지 못 했다. 기존처럼 계획 범죄를 막으러 다닐 때엔 플랜B까지 진작에 세워두고 다니는 터라 상황에 따른 빠른 대처가 가능했지만, 이런 상황은 실패 확률이 컸다. 결국 피해자는 깨진 술병에 머리를 세게 맞았다. 몇 번의 구타가 더 이어지기 전 장하오가 가해자를 제압했다. 그 과정에서 날카로운 유리가 팔을 긁었다. 상처가 꽤 깊었다. 입원을 하는 게 좋겠다는 진단에 따라 지금 여기 이렇게 병원복을 입고 서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외면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 앞에 선 성한빈 또한, 프리크라임이 지목한 인물이라는 것. 그러니 이틀 전 깨진 소주병을 휘두르던 이와 다를 것 없는 처지라는 것. 프리크라임의 경보를 언제든 울릴 수 있는 시한폭탄. 장하오는 그 사실을 순간 깨달았다.
"내일 저 센터 가기로 한 날이잖아요. 근데 오늘 아침에 장하오 경감님이 부상을 당하셔서 담당자를 교체하게 됐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한유진씨한테서."
장하오가 성한빈을 빤히 바라봤다. 시선은 들고 있는 박스로 가 닿았다. 안에 든 유리병으로 저를 내려찍는 상상이 머릿속에 자연스레 펼쳐졌다. 아찔한 기분에 눈을 감았다.
"근데 전... 장하오 경감님이랑 얘기하는 거 좋아서요. 어차피 인수인계도 어려우실 것 같아서, 그냥 입원하신 곳 알려주시면 제가 경감님 찾아뵙겠다고 했어요."
"....."
"어디 안 좋으세요? 아, 제가 환자를 너무 세워놨나요. 병실 어디예요? 602호라고 했던 것 같은데."
성한빈이 안절부절 못 했다.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문지르는 장하오의 컨디션이 제법 안 좋아 보여서였다. 어지럼증을 느끼는 듯 보이기도 했다.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표정도 굳어 보이고, 특유의 장난스러운 말을 던지지도 않길래 이상하다 했더니.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다루는 만큼 아주 부드러운 손길이 장하오의 손목을 붙잡았다. 부축 필요하시면 기대셔도 돼요. 나긋나긋한 음성과 함께 당기는 힘에 몸을 맡겼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드는 것과는 별개로 성한빈의 손은 따뜻했다. 조심스러운 행동에 밴 배려도 나쁘지 않았다. 그 모순적인 감정들이 장하오의 안에서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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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여사는 성한빈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아마도 가져온 오렌지 주스를 건네던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멀끔하게 잘생긴 외모를 가진 청년이 예쁘게 웃으며 주스를 건네주는데 반하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아무리 아들 뻘이라 하더라도.
"여기, 우리 딸 사진. 어때. 이쁘지?"
"와, 진짜 미인이신데요? 어머니 쏙 빼닮으셔서 그런가 봐요. 그런 얘기도 많이 들으셨죠?"
"어이구. 얘 말하는 것 좀 봐."
성한빈은 어른 앞에서도 아주 능숙하게 굴었다. 홍 여사가 기분 좋게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하오는 아예 홍 여사 쪽으로 몸을 돌려 앉은 성한빈의 뒤통수를 보고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 딸 이따 오기로 했거든. 한 네 시 쯤 온댔으니 곧 도착할 거야. 꼭 얼굴 보구 가. 알았지."
"아잇, 또 그러신다. 알았어요, 알았어. 인사는 꼭 드리고 갈게요."
진짜 못 들어주겠네.
장하오가 들고 있던 책을 소리나게 덮었다. 어차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티 나게 시끄러운 소리에 그제야 성한빈이 뒤를 돌았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그렇게 묻는 얼굴이 해맑다. 아주 놀이터가 따로 없었다. 제 병문안을 온 건지, 남의 병실에서 다른 환자들과 친목을 다지러 온 건지. 그것도 주말 이틀 연속으로 이러고 있는 걸 보니 슬슬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하는 거다. 이럴 거면 뭐하러 병원까지 직접 행차하신 건지.
"잠깐 바람 좀 쐬러 나갈 건데. 같이 가요. 어차피 우리 오늘 얘기도 해야 하는 날이잖아."
"어어, 막 돌아다니셔도 되는 거 맞아요?"
"다리 두 개는 멀쩡해요."
장하오가 멀쩡한 팔 하나로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까칠해 보이는 그 모습에 성한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먼저 나서는 그의 뒤를 따랐다. 둘이 산책 나가? 금방 들어와야 돼! 홍 여사의 외침에 성한빈은 눈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장하오는 못 들은 척 병실 문을 열었다.
바깥은 초여름 날씨였다. 어느새 얇은 병원복 하나로도 춥지 않은 날씨가 됐다. 병원도 그렇게 오래 있을 만큼 크게 다친 건 아니니 아마 다음 주 중엔 퇴원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두 사람은 공원처럼 꾸며진 쉼터에 다다라 빈 의자를 찾았다. 다소 후끈하게도 느껴지는 바람이 살살 불어와 머리칼을 흩트렸다.
"날씨 되게 좋다. 그쵸."
성한빈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는 뭔지 모를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만 봐도 기분을 알아채긴 쉬웠다. 아무래도 이젠 자신과의 대화가 무섭거나 꺼려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이제 화는 안 나요?"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를 올려다 보던 성한빈이 고개를 돌렸다. 반짝이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눈이 장하오를 바라봤다.
"화가 왜 나요? 제가 화낸 적 있어요?"
"첫날에. 나 보자마자 화냈잖아요."
"아. 그게 언제적인데. 그땐 점심을 못 먹어서 그랬어요. 그리고 막, 잘못도 없는 사람을 끌고 가니까..."
당시의 기억이 부끄러운지, 성한빈은 말을 얼버무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초면에 예의없게 굴었던 게 두고두고 후회되던 참이었다. 그 모습에 장하오가 작게 웃었다.
"동생 생각은요. 요즘도 많이 해요? 꿈에도 나오고?"
"음, 그건 안 하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경감님이 그랬잖아요. 한참 지난 그 기억도 어찌됐든 지금의 제 상태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그러니까 잊을 거예요.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나는 건 원치 않아서요."
"잘 하고 있네요."
장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한빈은 말을 참 잘 들었다. 프리크라임이 도입되기도 전, 지금은 이십대 중반인 그가 열두 살 초등학생일 때, 연쇄살인범에 의해 동생을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건은 장하오가 성한빈을 담당하게 되며 찾아봤었다. 범인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어린 아이만 골라 죽이던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지금은 수감 중인 상태고.
당시 성한빈은 동생의 살해 현장을 목격했다. 집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부모님은 일을 나가신 상황이었고, 어린 성한빈은 친구네 집에서 놀다 늦게 집에 들어섰었다. 그리고 거실에서 동생의 목을 틀어쥔 낯선 얼굴의 살인범과 눈이 마주친 뒤엔 비명을 지르며 아파트의 복도를 내달렸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됐지만, 동생은 살아 돌아올 수 없었다.
"부모님께 연락은 드렸어요? 이번 주에 어머님 생신이셨다면서요."
"...네. 그냥 짧게 통화했어요. 근데 뭐...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어요. 저도 지금 이 일은 말씀 안 드렸고요."
"그것도 잘 했어요."
가볍게 칭찬을 하듯 말했다. 좋은 일이 아니기도 하고, 성한빈이 처한 상황이 부모님의 입장에선 꽤 충격적일 테니 굳이 말을 하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한빈은 부모님과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동생이 죽임을 당한 그 사건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의 부모님은 어린 딸의 죽음에 아들의 잘못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성한빈의 말에 따르면 그날은 부모님 두 분 다 야근이 예정되어있던 날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딴 길로 새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 동생과 저녁을 먹으라고 했었는데, 유혹에 약했던 성한빈은 강아지를 보러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집으로 돌아갈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다. 평소 부모님 말씀을 의젓하게 잘 듣던 아이였지만 그날은 부모님과의 약속을 어겼었다. 그게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질 줄은 당연히 상상도 못 했고.
죄책감이 사라지는 데엔 꽤 오랜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서도 동생이 죽기 전의 화목했던 가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랬다. 그리고 이게, 늘 밝은 모습을 보이는 성한빈의 유일한 상처였다. 이것 외엔 그에게 특별한 사연이랄 것도 없었다. 그는 정직하고 반듯한 사람이었고, 병실에 나타난 거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해 창 밖으로 보내주는 사람이었다.
장하오는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센터에서 수행했던 심리검사 결과도 정상이었고, 천성이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인데. 어째서 성한빈은 여전히 위험인물인 것인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장하오의 눈빛에 성한빈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얼른 나으세요, 경감님. 혹시라도 제가 위험한 짓 하면 그때도 막아 주셔야죠."
"...할 거예요? 위험한 짓?"
"당연히 아니죠! 그냥 하는 말이잖아요. 저 못 믿으세요?"
"....."
"...하긴. 믿고 말고 하기엔 유대감을 쌓을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죠."
장하오의 눈빛을 본 성한빈이 큭큭 웃었다. 센터가 아닌 외부에서 이러고 있으니 긴장이 더 풀려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저 진짜로 나쁜 짓 안 해요. 믿어주세요... 의자에 놓인 제 손등을 쿡쿡 찌르며 제법 간절하게 하는 말로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분명 살아온 환경은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도, 마음이 참 건강하고 단단하게 잘 자란 것 같았다.
상담이고 교화고 할 것도 없이, 그냥 평범한 대화가 둘 사이에 오고갔다. 병원 밥은 정말 맛이 없다는 이야기로 시작된 대화는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고, 성한빈은 동네에 좋아하는 덮밥집이 있는데 퇴원 후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장하오는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친구나 가족과 나누는 대화 같았다. 성한빈은 자기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장하오는 성한빈이 담임으로 있는 반 아이들이 얼마나 귀여운지에 대해 조잘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또래 친구들 중에는 아직 대학생인 사람들도 많을 텐데, 벌써 사회에서 한 반 만큼의 아이들을 책임지고 있는 그는 책임감 또한 강한 성격이었다. 그 아이들을 두고 허튼 짓을 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근데 다른 가족분들은 병문안 안 오세요? 비밀로 하셨어요?'
어제 그가 물은 말이 문득 떠올랐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딱히 내키지 않아 사실대로 말했었다. 외동인데다 부모님께선 어릴 적 돌아가셔서 가족이 없다고. 키워준 친척이 있긴 하지만 성한빈씨 사정과 비슷하게 조금 서먹한 사이라고도 했다. 그때 그 말을 들은 성한빈의 표정이 기억났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싶어 좀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그의 텐션이 좀 더 높아졌던 것 같다. 일부러 더 말을 걸어왔고, 가족 얘기는 잘 꺼내지 않았다. 옆 침대의 홍 여사에겐 저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네며 살갑게 굴었다. 둘의 사이는 차마 범죄예방센터의 경감과 용의자라고 할 수가 없어 직장 동료라고만 둘러댄 상태였다. 직장 동료가 어떻게 이렇게 사이가 좋아? 홍 여사의 의아한 물음엔 성한빈이 웃으며 답했다. 저한테 잘해주셔서요. 그 대답을 들은 장하오는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언제 잘해줬지... 어쨌든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잠시 딴 생각에 빠져있던 와중,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장하오 경감님? 장하오가 그 소리에 옆의 성한빈을 바라봤지만, 그 부름은 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성한빈의 시선이 장하오의 어깨 너머에 선 두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장하오 경감님. 맞으신가요?"
"네. 맞는데... 누구시죠?"
장하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가온 두 사람은 초면이었고, 부부처럼 보였다. 둘 모두 눈가가 짓무른 것이 꼭 한참 운 사람들 같았다.
남자가 장하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듯한 모양에 장하오가 얼떨결에 손을 맞잡았다.
"며칠 전에 있었던 사건, 피해자 부모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희 아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같은 병원에 계시는 건 알았는데, 경황이 없어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분 증언으론 경감님 덕에 우리 아들이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고 해서요..."
두 사람이 고개를 조아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태도가 익숙지 않은 장하오는 덩달아 안절부절 못 하며 함께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크게 다쳤던 피해자는 오늘 아침에서야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다행히 기억이나 뇌기능에 문제가 있진 않아 시간이 지나면 멀쩡히 회복할 수 있을 거랬다. 장하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마음 한 켠으로 걱정이 되던 일이었다. 약간의 부상은 있었으나 목숨은 살려 다행이었다. 우발적 살인은 막는 것 자체가 성공률이 50% 정도일 만큼 꽤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간 계획 범죄를 담당하던 장하오에겐 실패나 실수가 더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웠던 것 같다. 피해자가 잘못 되기라도 했으면 아마 후유증이 오래 갔을 지도 모르겠다.
부부는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하다 돌아갔다. 장하오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봤고, 성한빈은 그의 뒤에서 세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한빈은 셋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서 가만히 있었다.
"...저, 뭐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장하오가 그제야 몸을 돌렸다. 마주한 성한빈의 표정이 조심스럽다. 장하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요?
무슨 말을 하려 그러는 건지 성한빈은 한참 입을 달싹이기만 했다. 그러다 뱉은 말이 글쎄.
"경감님은요... 살인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세요?"
"...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방금까지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 다 보고 들었으면서.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그렇게 조심스레 꺼내는 게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그리고 직감했다. 이어질 말이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성한빈은 본인이 먼저 말을 꺼내고서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에요.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고, 장하오는 초조한 기분이 들어 추궁하듯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 했냐고. 결국 성한빈은 삼켰던 말을 뱉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13년 전 그 사건과 비슷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살인범의 손에 소중한 사람의 목숨이 붙잡혀 있다면..."
성한빈이 다친 팔뚝에 손을 갖다댔다. 닿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살살 건드리는 손길은 혹여 장하오가 아프기라도 할까 싶어 금방 떨어져 나간다.
"그럼 가만히 있진 않을 것 같다고요. 저는 더이상 열두 살 어린 애가 아니잖아요."
"....."
"어차피 누군가 죽을 운명이라면요, 차라리 제가 죽일래요."
"....."
"그때와 같은 살인범이 우리 반 아이의 목을 조르고 있거나, 경감님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거나, 아무튼, 마음 속으로 아끼는 사람들이 위험해지면요."
"....."
"그냥 제가 범죄자가 되어서라도 살리고 싶어요. 그 사람들."
성한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지나치게 솔직한 그는, 감히 자신을 감시하는 일을 하고 있는 장하오의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해댔다. 듣는 장하오도 당황스러워 입을 다물게 만드는 말이었다.
공격성이라곤 한 번도 내비친 적 없던 성한빈이 스스로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말을 꺼냈다. 장하오로서는 어쩌면 반가운 일이었다. 느끼는 바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방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가운 마음보다도, 눈앞에 보이는 새까만 정수리가 걱정되는 마음이 더 컸다. 드디어 진실을 알게 되어서. 성한빈이 왜 프리크라임에게 선택 받았는지. 그리고 왜 아직도 그가 위험인물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이제 다 알 것 같았다.
13년 전의 그 살인범을 다시 마주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죽이고 싶을 것 같아요? 그 물음에도 고개를 저었던 성한빈이다. 이미 시간은 한참 지났고, 그를 벌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라는 걸 아니까. 하지만 아직 벌어지지 않은 비극에 대해서는 결말을 바꿀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성한빈은 그 기회를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인 거다. 본인이 살인자가 되는 한이 있어도.
"...그래서 무서워요, 경감님. 제가 진짜 사람을 죽이면 어떡해요?"
울먹이는 눈이 장하오를 바라봤다. 지금껏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것을 자각하고 겁에 질린 얼굴이 창백했다.
"며칠 전의 그 술집에 저도 함께 있었으면요, 만약에 그랬으면..."
"괜찮아요. 더 생각하지 마요."
"프리크라임의 예측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면서요... 그럼 저는,"
"그만. 그만해요."
장하오가 멀쩡한 팔로 성한빈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뒤통수를 당겨 안은 그는 떨고 있는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불안해하지 말아요. 그럴 일 없을 거예요. 한 달 채우기 전에 한빈씨는 '안전'으로 바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어서 보내줄 테니까 걱정 마요. 응?
팔자에도 없던 위로를 건넸다. 불안해하는 성한빈을 달래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성한빈과 비슷하게 아주 솔직한 편인 장하오였지만, 지금 만큼은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불길한 확신이 번져갔다.
아무래도 성한빈의 '위험'은 절대 없어지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과연 꺾일 수 있을까. 장하오는 그게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특히나 그게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후회에 의해 만들어진 의지라면 더더욱 확고한 마음일 테다. 잘못이라는 걸 알아도 마음을 고쳐먹긴 힘들 것이다.
두 달 반 전, 계획 살인의 현장에서 끝내 가해자를 막지 못했던 자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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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은 입원 후 딱 일주일 만이었다. 앞으로는 매주 한 번씩 환부를 점검하고 붕대를 갈러 오기만 하면 됐다. 장하오는 든 게 별로 없는 가방을 대충 짊어지고서 마지막으로 침대를 정돈했다. 얼마나 있었다고 그새 적응을 해버려 떠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 성한빈이 가져다 준 주스도 네 병이나 남아 있는데.
"이거, 아드님이랑 따님 오시면 나눠 드세요."
남은 주스는 홍 여사의 차지가 됐다. 홍 여사도 그새 옆 침대의 청년에게 정이 들어버린 것인지 섭섭한 표정을 했다. 퇴원을 하는 것이니 축하해주는 게 맞는데 주스를 받아 들면서도 좋은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좋지? 이제 옆 자리 아줌마 잔소리 안 들어도 되고."
그 말에 장하오가 웃음을 흘렸다.
"종종 그리울 것 같은데요. 덕분에 일주일 안 외롭게 지냈어요."
진심으로 한 소리였지만 홍 여사는 별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안 외로웠겠지. 그 예쁜 총각이 맨날 보러 왔는데. 싹싹하고 이뻐서 사위 한 번 삼아 볼랬더니 우리 딸 온다고 할 때마다 쏙쏙 빼가고. 훼방 놓으니까 좋았어?"
"...제가요?"
"그래.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어떤 직장 동료가 매일 병문안을 오나 했더니. 딴 사람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여. 눈을 가늘게 뜨고서 다 안다는 듯 말을 하는 것에 장하오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본인이 정말 그랬는지 자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마침 그 때, 방금 전의 대화에 등장했던 인물이 병실로 들어섰다. 매일 학교 일이 끝난 뒤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추고 가던 성한빈이 마지막 날까지도 출석도장을 찍었다. 양반은 못 되는구만. 호탕하게 웃은 홍 여사가 제 침대 옆에 선 두 사람을 바라봤다. 장하오가 풀어진 얼굴을 하고서 성한빈을 반겼고, 성한빈은 환자가 이걸 왜 드냐며 장하오가 멘 백팩을 뺏어갔다. 팔 한쪽은 멀쩡하다고 다시 가방을 가져올래도 성한빈은 잽싸게 그 손길을 피했다. 그러고선 붙잡힐세라 오도도 다시 병실을 뛰쳐나간다. 어머니, 쾌차하세요! 밝은 목소리가 넓은 병실에 잔상처럼 남았다.
"뭐 해? 얼른 따라가. 우리 인사는 이만하면 됐어."
홍 여사는 쿨하게 장하오를 보냈다. 병원에서 더 붙잡고 있어서 뭐 하냐고. 얼른 가라는 손인사에 장하오도 꾸벅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머금었다. 감사했습니다. 담백한 끝인사와 함께 짧은 인연은 끝이었다. 아쉬움이 남았으나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며 금방 잊어버릴 것이고.
잠깐 만났다 헤어지는 인연은 아주 많았다. 그 모든 이별에 슬퍼할 이유는 없고,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찌보면 성한빈이 속한 카테고리도 잠깐의 인연이었다.
어쩌면 더 이어져선 안 되는 인연이기도 했다. 장하오는 악몽을 꿨던 날을 떠올렸다. 성한빈의 과거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던 날, 그가 목격했다던 사건 현장이 그대로 꿈에 나왔다. 그리고 성한빈은 그 꿈에서 아주 차가운 손으로 장하오의 목을 졸랐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켁켁거리던 와중에 꿈에서 깼다. 벌떡 일어난 이마에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직업 특성상 밥 먹듯 만나는 게 잠재적 범죄자들인데, 이런 꿈을 꾼 건 처음이었다.
대체 뭐가 그리 두려웠던 것인지. 장하오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성한빈을 상대로 그런 두려움 같은 건 말끔히 사라진 뒤였다.
'그때와 같은 살인범이 우리 반 아이의 목을 조르고 있거나, 경감님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거나, 아무튼, 마음 속으로 아끼는 사람들이 위험해지면요.'
'그냥 제가 범죄자가 되어서라도 살리고 싶어요. 그 사람들.'
장하오는 성한빈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성한빈이 '살리고 싶다'고 말했던 사람들엔 분명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다만, 성한빈의 사고회로에 내재되어 있는 방어기제가 공격적인 행동으로 바뀌어 튀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함하여 성한빈이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안전이 중요했다. 우선은 그것만 신경 쓰면 될 것 같았다. 장하오는 짙은 한숨을 쉬었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성한빈이 물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장하오가 번뜩 고개를 들어 성한빈을 바라봤다. 신호에 걸려 차가 잠시 멈춘 사이, 핸들을 놓은 성한빈이 조수석에 앉은 장하오를 돌아봤다.
"한숨을 자꾸 쉬시길래요."
걱정이 가득 담긴 투였다. 장하오는 '아,' 하며 작은 탄성을 내뱉곤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생각들을 굳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성한빈의 차를 타고서 퇴원을 하면 함께 가기로 했던 덮밥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장하오는 괜히 기분이 다운된 티를 내고 있었나 싶어 먼저 평범한 주제로 말을 꺼냈다. 저녁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지 않아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물으니 엄청 인기가 많은 맛집인데다 예약도 불가한지라 오늘 같은 금요일엔 이 시간에 가야 기다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만 들어도 평소에 성한빈이 얼마나 먹을 것에 진심인지 알 것 같아 웃음이 났다. 하긴, 처음 봤을 때도 밥을 못 먹어서 화가 났댔잖아. 음식이 입에 들어가자마자 순해진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러고 보니 퇴원을 했다는 사실을 센터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부상자는 안전을 위해 모든 임무에서 제외되는데, 지금은 성한빈이 계속 제 발로 저를 찾아오고 있었으니 성한빈과 관련된 일들과 함께 퇴원 사실도 알리는 게 맞았다. 장하오는 센터에 연락을 넣기 위해 폰을 꺼내들었다가, 잠시 그대로 멈춘 채 망설였다.
...굳이 지금 보고할 필요가 있을까.
지난 주말, 성한빈이 울먹이며 했던 말도 아직 센터에는 보고하지 않은 상태였다. 과연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늠이 안 돼서였다. 혹시라도 상황이 악화된다면 그에게 어떤 불이익이 있을 지 모른다. 장하오는 성한빈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센터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비윤리적인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시스템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장하오도 원래는 그 부류에 속해있었으나, 부서를 옮기게 됐던 일에 이어 성한빈과의 만남까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이 시스템에 처음으로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의 뇌보다도 뛰어나다는 인공지능이지만 꾸준히 제기되어오는 문제점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인공지능의 판단에는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더 공정하다는 의견 또한 우세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인 범죄를 두고 이성적인 판단만 하고 있는 이 상황이 과연 옳은가. 사람이 사는 세상을 정답과 오답으로만 가를 수 있는가. 이제와서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고민을 하던 그는 결국 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조금 천천히 해도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여러 검사에서 별 문제도 없었던 성한빈은 그리 심각한 경계 대상이 아니었다. 지목된지는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으나 그래도 일주일이 조금 넘게 남은 시점이었다. 부디 기적적으로 프리크라임에 뜬 성한빈의 상태가 변할 수 있길.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런 기도를 하는 것 뿐이라 장하오는 직무유기를 선택했다. 당장은 성한빈과의 저녁시간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세상은 두 사람의 편이 아니었는지, 음식점에 도착할 즈음 장하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가 올 곳은 정해져 있었다. 또한, 멀쩡한 메신저를 두고 전화를 건다는 것은 곧바로 전달해야 할 아주 급한 일이 있다는 뜻이었고.
"잠깐 전화 좀 받을게요."
"네. 통화 편하게 하세요."
장하오가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는 한유진이었다.
"어. 왜?"
- 경감님! 지금 어디십니까!?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좁은 차에 나란히 앉아 있으니 그 목소리는 당연히 성한빈에게도 들렸다. 성한빈이 당황스러운 눈을 하고 장하오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나 퇴원해서 밖인데. 왜. 무슨 일 있어?"
- 하, 큰일 났습니다. 지금 제가 워치로 뭐 좀 보내드릴 테니까 빠르게 확인하시고, 폰이나 워치 같이 위치추적 가능한 전자기기 다 끄세요. 아셨죠.
"뭐야. 왜 그러는데."
- 설명 드릴 시간 없습니다. 경감님, 전에 제 자취방 한 번 와보셨죠.
"어어... 기억나. 근데 너 이사했다며."
- 이사하기 전 집이요. 거기 아직 안 나가서 비어있거든요? 제가 거기다 필요하실 것 같은 물건 몇 개를 가져다 두겠습니다. 도어락 비밀번호는 제 생일 네 자립니다. 오늘 밤 9시 이후에 들러서 챙기세요.
"어? 너 생일 언젠데."
- 아오, 진짜! 너무 관심 없으신 거 아니에요?
"내가 너한테 관심을 왜..."
장하오가 중얼거렸다. 한유진은 바락바락 화를 내다 말고 이럴 시간이 없다며 생일을 순순히 알려줬다. 0320이에요. 까먹지 마세요. 단단히 이른 그는 이젠 정말 끊어야겠다는 말과 함께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겼다.
- 아시겠지만 프리크라임은 거짓말 안 합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진 모르겠지만 시간 지나기 전에 잡히지 마시고, 아무 짓도 하지 마세요. 잡히면 끝이에요. 제 번호는 외워두셨다가 필요한 거 있으심 연락하세요.
"아니, 유진아."
- 행운을 빕니다, 경감님.
전화는 뚝 끊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전화가 끊긴 폰을 붙잡고 잠시 굳어있는 사이에 한유진이 워치로 보내온 정보가 떴다. 그리고 장하오는 한순간 한유진이 했던 모든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경감님, 무슨 일이에요? 성한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지금 장하오의 눈에는 자신의 이름과 일련번호, 그리고 범행 일시만이 가득 들어찼다. 처음 보는 형태의 알림이었다. 다섯 가지 정보 중 두 가지만 확실하게 뜨는 것은. 꼭 오류라도 난 것처럼.
그리고 화면에 뜬 일시는 바로 내일이었다. 내일 밤 열한 시.
'시간 지나기 전에 잡히지 마시고, 아무 짓도 하지 마세요. 잡히면 끝이에요.'
장하오는 한유진이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이 센터에 몸을 담고 있던 게 몇 년인데.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한빈씨. 차 돌려요. 위치 추적될 만한 거 다 끄고."
현재 위치는 이미 들통났을 것이다. 제가 지금 성한빈과 함께 있다는 사실도 아마 곧 파악될 것이다.
"내일 밤까지 아무 일도 없어야 해요. 일단 근처 ATM기에서 현금 좀 뽑고, 거기서부터 운전은 내가 할게요."
상황을 설명할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성한빈은 당황한 와중에도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떨리는 손이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갓길에 세워뒀던 차가 다시 엑셀을 밟고 나아가기 시작하는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했다.
궁지에 몰린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도로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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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빈과 같은 민간인에겐 알려지지 않은 프리크라임의 비밀. 그건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범죄예방센터에 프리크라임이라는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다. 그 시스템이 범죄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여 예방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사실도. 껍데기는 아주 그럴싸했다. 그 안에 든 알맹이를 숨기기에는 '기밀'이라는 것만큼 그럴듯한 변명도 또 없었다. 국민들은 센터의 시스템에 큰 의문을 품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감사했다. 위험한 순간에 등장해 강력범죄를 저지를 뻔한 범죄자를 체포해가는 특공대원들은 혼란스러운 사건현장에 나타난 히어로나 마찬가지였다.
범죄 없는 안전한 세상.
장하오는 지하철 스크린 도어 위에 쓰인 문구를 바라봤다. 범죄예방센터를 상징하는 캐릭터와 함께 공익광고가 걸려있었다. 강아지를 닮은 캐릭터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들도 좋아할 만큼 귀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장하오에겐 전혀 그렇게 보이지가 않았다. 꼭 모든 걸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저 눈이 공포스럽게 느껴지기만 했다.
임시방편으로 산 모자를 한 번 더 꾹 눌렀다. 역 안의 의류 매장에서 급히 산 것이었다. 눈에 띄지 않게 특별한 무늬도 없는 검은 모자였다. 같은 것이 성한빈의 머리에도 씌워져 있었다. 장하오는 제 옆의 성한빈을 돌아보고 잡은 손을 더 꽉 쥐었다.
"경감님..."
"쉿. 그렇게 부르지 마요."
다급하게 막은 말에 성한빈이 숨을 흡 들이키며 굳었다. 장하오의 지시에 따라 눈을 꽉 감고 있는 그는 어깨에 힘을 바짝 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라고 불러. 이상하게 보이지 마. 존댓말도 쓰지 말고."
장하오의 말 하나하나에 성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들 이쪽의 대화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지하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장하오는 안내방송이 지금 들어오는 열차의 행선지를 말하기 전에 붙잡고 있던 성한빈의 손을 놓고서 그의 두 귀를 막았다. 지금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아무 소리도 듣지 못 하게, 손바닥이 성한빈의 귀를 꾹 눌렀다.
열차의 문이 열렸다. 퇴근 시간대라 열차 안이 붐볐다. 장하오는 다시 성한빈의 손을 잡고 지하철의 끝 칸에 올랐다. 최대한 구석진 곳으로 성한빈을 몰아넣은 장하오가 그를 마주보고 섰다. 성한빈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속눈썹이 파들거리는 게 다 보였다.
"우리는 고속터미널역으로 갈 거야. 목적지만 기억해."
성한빈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향하는 곳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엉뚱한 역이었다. 그리고 성한빈은 세뇌를 당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지하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장하오는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곳곳에 현재 역을 표시하는 전광판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아마 다음 역에 도착하기 전엔 방송도 나오겠지. 현재 위치를 성한빈이 파악하게 둬선 안 됐다.
장하오가 성한빈을 붙잡고 몸을 돌렸다. 제 몸을 한 구석으로 집어넣은 장하오가 다시 성한빈에게 속삭였다.
"눈 떠도 돼. 주변은 절대 둘러보지 말고, 나만 봐."
"...응."
"우린 고속터미널역으로 가고 있는 거야. 가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날 거야."
장하오는 재차 강조한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성한빈의 귀를 막았다. 그리고 성한빈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시야에는 캡모자 아래로 어둡게 그늘이 진 장하오의 얼굴만이 가득 들어왔다.
눈을 감고 있을 때보다 마음이 훨씬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주변의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맥박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눈앞엔 가만히 저를 응시하는 까만 눈동자가 보인다.
현실감이 없었다. 지금 이렇게 이유 모를 도망을 치고 있는 게 옳은 일인지에 대한 확신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올곧은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장하오가 틀린 선택을 했을 것 같진 않았다. 성한빈은 장하오를 믿고 싶었다.
'저도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이 있거든요.'
언젠가의 면담에서 장하오가 꺼냈던 말이다. 세 번째 만남 쯤이었던 것 같다. 늘 만나던 취조실에서.
성한빈은 프리크라임의 지목 이후 다시 여동생이 나오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겨우 묻고 살았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면담에서는 악몽과 불면증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고, 동생 생각을 이젠 그만 하고 싶다며 하소연을 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퀭한 얼굴로.
뭐든 솔직하게 털어놔보라는 말에 그 이야기를 꺼냈었다. 경감님. 1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여전히 저는 그날에 머물러 있어요. 벗어난 줄 알았는데 여전히 제자리예요. 우울하게 그런 말을 꺼낸 뒤에야 괜한 얘기를 했나 후회했지만, 장하오는 그 말을 쓸데없는 한탄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다른 물음을 더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 말을 듣다가, 본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떻게 완전히 벗어나겠어요. 기억을 지워버리지 않는 이상 흉터처럼 남아있는 게 당연하죠. 저도 그래요.'
'...경감님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세요?'
'네.'
장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을 겪은 이후에는 저도 밤에 잠을 잘 못 잤어요. 사실 원래 제가 이 대낮에 깨어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밤에 잠을 못 자다 보니 보통 밤에 일어나는 계획 범죄들 검거하러 다니고 이 시간엔 쪽잠이나 자던 사람이었는데. 뭐, 그 얘긴 성한빈씨한테 할 건 아닌 것 같고.'
근데 사실 그래서 좀 늦었어요. 첫 만남 때. 작게 웃으며 장난처럼 뱉은 말엔 성한빈도 따라 웃었다.
'아무튼, 그 이후부턴 늘 마음 한 구석에 불편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맛있는 밥을 먹을 때도,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을 때도, 친구나 직장 동료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 때도, 어딘가에선 누군가가 위험에 처한 채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중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도 야경이 참 예뻤거든요.'
'.....'
'그래서 마음 편히 행복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장하오의 이야기는 그게 다였다. 그래서 그 소중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언제 그런 일을 겪었는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저 본인이 가진 흉터에 대해 짧게 말해줬을 뿐이었다. 하지만 성한빈은 그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했고, 그게 장하오에게 더 마음을 열게 된 계기가 됐다. 자신이 그를 이해한 것처럼 그 또한 비슷한 경험으로 제게 공감해줄 거라는 생각을 해서. 처음으로 완전히 이해받는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두려움 또한 장하오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던 성한빈은 천천히 장하오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여전히 귀는 꽉 막힌 채, 단단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따뜻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위로하듯 말했다. 그 말이 거짓이 되더라도 지금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이번엔 꼭 지킬 거야. 이제 악몽은 꾸기 싫거든."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귀를 막은 손을 뗄 수 없는 장하오는 성한빈을 마주 안아주는 대신 손가락에 닿은 뒷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지하철의 역 도착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퇴근길 지하철 속 사람들은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쫓기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곳에서 안전함을 느꼈다. 그게 참 아이러니했다.
치밀한 시스템에도 허점은 있는 법. 시스템에 대항하는 자는 그 허점을 이용할 것이고, 시스템을 지키려는 자는 그 허점을 감추기 위해 발악할 것이다. 지금부터는 어떻게든 버텨야만 했다. 그게 정의가 아니라도 상관 없었다. 어차피 저들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도 불의 위에 세워진 허울일 뿐, 이 세상에 완벽한 정의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장하오는 성한빈이 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이제 악몽은 꾸기 싫거든.
• • •
낡은 모텔에 들어섰다. 눈을 감아 앞을 보지 못하는 성한빈을 데리고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장하오의 한 손에는 성한빈의 손이, 다른 손엔 한유진의 예전 자취방에서 가지고 온 가방이 들려 있었다.
성한빈의 차는 공터 어딘가에 두고서 계속 대중교통을 타고 돌아다녔다. 자차는 추적이 너무 쉬웠고, 택시는 수상한 손님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수도 있어서였다. 그렇게 한참을 방황하다 한유진이 말한 저녁 9시에 그가 두고 온 물건을 챙겨 이곳으로 온 것이다. 혹시라도 이 일에 한유진까지 휘말리게 될 수 있으니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도 없었다.
띵-
엘리베이터의 도착음이 들렸다. 장하오는 받은 키에 적힌 번호를 다시금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장하오의 팔을 끌어안다시피 한 성한빈이 그의 발걸음에 맞춰 종종걸음을 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카드키도 아니고 열쇠라니. 요즘 같은 때에 이런 곳이 아직도 있구나 싶었다. 그래도 아마 이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열쇠로 문을 열어야 하는 낡은 모텔. 아마 고속터미널에 내린 두 사람이 시골 어딘가의 모텔에서 하룻밤 투숙을 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제발 그러기를 바랐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몇 시간을 배회했으니 지치는 게 당연했다. 장하오는 성한빈을 침대에 앉혀두고서 작은 창문에 달린 블라인드를 쳤다. 주위를 몇 번이고 둘러본 뒤, 성한빈이 눈을 뜨더라도 이곳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게 만들고서야 냉장고에서 물을 하나 꺼냈다.
"이제 눈 떠도 돼요."
성한빈이 눈을 천천히 떴다. 제 앞에 선 이를 올려다 보니 그는 물을 건네온다. 목 마르죠. 물 마셔요. 성한빈은 뚜껑까지 따 건네지는 물을 받아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았는데, 그나마 살만해졌다. 반쯤 비운 물을 장하오에게 건네니 금세 남은 물도 사라진다. 빈 생수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장하오가 성한빈의 옆에 털썩 앉았다. 오래된 침대에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간은 정적이었다. 현실을 파악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내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다녔던 성한빈은 멍한 기분이었고, 장하오는 불안감에 머리가 복잡했다. 괜히 성한빈을 끌어들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혼자 도망쳤으면 나만 쫓기지 않았을까. 잘못된 판단에 의해 그를 공범으로 만들어버린 게 아닌가. 그런 생각.
한창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있을 때, 손등을 덮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장하오가 침대에 놓인 제 손을 바라봤다. 그 위를 덮은 하얀 손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해도 되려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었다. 장하오가 성한빈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모자 챙에 가려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손을 뻗어 모자를 벗겨냈다. 그러자 마음을 안정시키기도, 불편하게도 만드는 눈동자가 곧게 자신을 마주했다.
숨이 턱 막혔다.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흔들다리 효과라는 게 번뜩 떠올랐다. 그 눈을 보자마자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성한빈을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마 그의 얼굴에 난 생채기가 눈에 띄지 않았다면 정말 행동으로 옮겼을 지도 모르겠다.
"...다쳤네요."
"어디?"
"여기."
장하오가 조심스럽게 성한빈의 뺨을 쓸었다. 아까 지하철에선 못 보던 상처인데. 살짝 긁혀 피가 맺힌 걸 보니 한유진의 자취방에서 나오던 길목 담벼락에 있던 장미넝쿨이 원인인 듯했다. 눈을 뜨고 있던 장하오도 긁힐 뻔 했으니, 눈을 감고 있던 성한빈은 오죽했겠냐고.
"...아파요?"
"별로. 조금 따끔거리긴 한데 괜찮아."
둘만의 공간에서 다시 존댓말로 돌아온 장하오와는 달리 성한빈은 꿋꿋하게 반말을 썼다. 그걸 더 원하는 것 같았다. 장하오는 그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배고프지. 내가 밖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올까?"
힘이 없어 보이는 얼굴을 마주하니 그 물음이 먼저 나왔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성한빈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여기 있어야 하는 거면 싫어."
"...혼자 있기 싫어서?"
"응. 형이랑 같이 있고 싶어."
성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와중에 눈치없이 그 말이 듣기 좋았다. 장하오는 성한빈의 입에서 나온 형이라는 말을 가만히 곱씹다 침대 옆에 놓인 가방을 집어들었다. 급히 오느라 뭐가 들었는지도 확인하지 못했었다. 뭐든 한유진이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겨줬겠지 싶기만 했다. 애초에 한유진은 저를 도울 이유가 없음에도 의리 하나로 위험을 감수해준 것이니까.
가방은 꽤 묵직했다. 장하오는 커다란 보스턴백을 침대 위로 끌어올려 성한빈과 제 사이에 뒀다. 닫힌 지퍼를 열자마자 보이는 컵라면에 장하오가 실소를 터트렸다. 야무지게도 챙겨 넣었네.
"이거 유진씨가 챙겨주신 거지. 진짜 센스 있으시다..."
힘이 없던 성한빈의 눈에 이채가 도는 게 보였다. 이번엔 실소가 아니라 진짜 웃음이 났다. 장하오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컵라면을 꺼냈다. 그것 말고도 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들이 들어있었다. 편의점에서 대충 쓸어넣은 모양새였다. 성한빈은 그새 빵 봉지 하나를 집어들어 뜯었다. 조용한 방에 꼬르륵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보단 식탐이 많은 애로 찍히는 편이 덜 쪽팔릴 것 같아서.
크림빵을 한 입 베어문 성한빈이 드디어 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장하오에게도 내밀었다. 살짝 벌린 입속에 크림빵이 들어와 베어물었다. 계속해서 가방을 뒤지던 손이 안에 든 물건들을 꺼냈다. 별다른 기능이 없는 손목시계, 대포폰으로 보이는 기기와 충전기, 심지어는 단도와 총 한 자루까지 들어있었다. 그 짧은 새 이런 것들을 챙겨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게, 정말 범상치 않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연고와 타이레놀 같은 상비약까지 들어있는 걸 보니 정말 필요한 물건들만 잘 챙겨줬구나, 싶었다. 그리고 가방 바닥에서 마지막으로 주워든 것을 보자마자 장하오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빵을 먹던 성한빈도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이게 뭐야?"
"....."
"...주사기?"
지퍼백에 든 주사기와 작은 병에 담긴 약물. 딱 봐도 수상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마약, 뭐 이런 거 아니겠지? 성한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장하오는 고개를 저었다. 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주사기를 꺼내 약물을 채웠다.
"너한테 주사할 거야."
"...어?"
"이유는 주사하고 나서 설명해 줄게. 오늘 밤은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을 수 있어. 오래 가진 않을 거야. 해 뜰 때 쯤이면 괜찮아질 거야. 그때 여길 벗어나자."
정체 모를 약물을 주사한다는데도 성한빈은 팔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저항하지 않았다. 물론 속으로 의심은 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이 '트루먼 쇼'라는 영화처럼 자신을 속이며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장하오의 저 표정과 말투도 모두 연기인 건 아닌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주사를 피하지 않았던 것은,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 그리고 피스톤이 꾹 눌릴 때에 보게 된 장하오의 눈빛 때문이었다.
욕심이나 죄책감과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 제발 믿어달라는 간절한 눈이었다. 아무리 연기라 하더라도 이정도 했으면 속아주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심 같았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붙잡았던 장하오의 팔을 스르르 놓았다. 무언가가 주입되는 느낌이 생경했다.
주사를 마친 장하오가 동봉되어 있던 알콜스왑으로 주삿바늘이 들어갔던 부위를 꾹 눌렀다.
"점점 어지러워질 거야. 그 전에 씻고 잘 준비 끝내자."
불안한 기분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대체 뭐길래.
장하오는 객실 내에 구비된 세면도구를 뜯었다. 일회용 칫솔에 치약을 짜 성한빈에게 물려준 그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성한빈을 화장실로 밀어넣었다. 쿵- 문이 닫혔다.
"...왜 이렇게 비밀이 많아..."
불만을 담은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넓은 욕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성한빈은 한숨을 푹 쉬고서 칫솔질을 시작했다. 고개만 끄덕이는 것도 한계가 있지. 이젠 좀 알고 싶었다. 장하오가 감추고 있는 게 무엇인지. 왜 제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건지 말이다. 씻고 나가서 이번엔 꼭 따져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도 얼른 씻고 나오라는 장하오의 말을 착실하게 따르는 성한빈이었다.
점점 어지러워질 거라는 예고는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다 뒷목이 빠듯한 느낌과 함께 머리가 핑 돌았다. 그때부턴 어떻게 샤워를 끝냈는지 기억도 드문드문했다. 몸에 묻은 거품을 겨우 씻어내고선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처리한 뒤 속옷만 입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긴 화장실 문을 열어 틈새로 장하오를 불렀다. 혀어엉... 그 기어 들어가는 작은 목소리에도 헐레벌떡 달려온 장하오가 성한빈을 안아 일으켰다.
"넘어졌어? 괜찮아?"
성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넘어졌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인지, 괜찮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인지는 알 수 없었다. 머리카락엔 물기가 흥건했다. 장하오는 새 수건을 꺼내 들고선 몸을 가누지 못하는 성한빈을 데리고 침대로 가 눕혔다. 붕대가 감긴 팔에 힘을 줬더니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그러나 그걸 신경쓸 겨를 또한 없었다.
이대로 안정을 취하게 두는 게 맞지만 그래도 머리는 말려야 할 것 같았다. 고민에 빠져있던 장하오가 상비약이 든 파우치와 드라이기를 가져와선 다시 성한빈을 일으켜 앉혔다. 침대 근처의 콘센트에 코드를 꽂고 그의 뒤에 앉은 장하오는 성한빈을 제게 기대게 한 뒤 우선 수건으로 머리를 살살 닦아줬다. 가슴팍에 닿은 맨몸이 뜨거웠다. 미열이 나는 듯했다.
"머리만 말리고 눕자."
"어지러워.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응. 원래 그래. 약 먹을래? 효과는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단 나을 테니까..."
성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거라면 먹고 싶었다. 성한빈은 장하오가 까주는 타이레놀 두 알을 물과 함께 삼켰다. 이렇게 빨리 어지러워질 줄 알았으면 진작 먹을 걸. 약효가 돌 때까진 이 불쾌한 기분을 이어가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괜히 뒤에 앉은 이가 미워 젖은 머리를 그의 어깨에 문질렀다. 장하오는 그 어리광을 받아주며 안은 몸을 토닥였다. 뺨에 난 생채기에는 연고도 발라줬다. 옷도 입혀야 하는데. 아마도 성한빈이 벗어둔 옷은 저 멀리 화장실에나 있을 것이었다.
일단 머리부터 말려주자 싶어 드라이기를 집어들었다. 약한 바람으로 풍량을 조절하고선 제게 완전히 기대 안긴 성한빈의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누군가의 머리를 말려줘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손길이 서툰 건 당연했다. 겨우 머리 하나 말리는 것인데 한참이 걸렸다.
뜨거운 바람 때문에 안 그래도 뜨끈한 성한빈의 얼굴이 더 푹 익은 물만두가 될 때까지 드라이기를 들고있던 장하오는 머리칼의 물기가 바짝 마른 걸 확인하고서야 드디어 손에 든 걸 내려놨다. 얼마나 오래 그러고 있었던 것인지 타이레놀의 효과가 돌 때 쯤이었다. 조금 정신을 차린 성한빈이 몸을 살짝 떼어내 장하오를 마주봤다.
"형."
"...옷 가져다 줄게."
홍조가 오른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하자 갑자기 고장이 났다. 장하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슬쩍 침대를 빠져나가려 했다. 시선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려는 걸 참느라 애를 썼다. 같은 남자끼리, 비슷한 몸인데 뭐가 그렇게 궁금하다고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그러나 침대를 벗어나기도 전에 팔목이 턱- 붙잡혔다. 성한빈은 일어나려는 장하오를 다시 침대에 앉혔다.
"더워. 옷 안 입어도 돼."
"어... 그럼 샤워가운이라도 가져다 줄게."
"아니. 주사 맞으면 이유 알려준다며. 그것부터 말해줘. 궁금해. 지금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팔목을 잡은 손이 단단했다. 더 미루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갖가지 이유로 미루다 보면 오늘 밤 안에도 못 들을 것 같아서.
장하오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설명이고 뭐고, 결국 본능에 못 이긴 눈이 도르륵 굴러 성한빈의 맨몸을 훑었다. 장하오의 목울대가 울렁이듯 움직였다.
...뭔 남자애 몸이 이렇게 뽀얗냐.
"형. 얼른 말해 달라니까?"
"어? 어... 나 좀 씻, 씻고와서 말해주면 안 될까."
"안 돼. 지금 해줘."
성한빈은 강경했다.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래도 도와주질 않았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정작 벗고 있는 사람은 당당한데 그걸 보고 있는 사람은 미칠 것 같았다. 열일곱 쯤 되는 사춘기 청소년이 된 기분이었다. 덩달아 더워지는 것 같아 에어컨을 틀기 위해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걸 또 도망으로 해석한 성한빈에게 그 손마저 붙잡혀 버렸다. 거기서 멈췄으면 그래도 괜찮았을 텐데.
"말하기 전엔 안 놔줄 거야."
성한빈은 아예 장하오의 위에 올라타기까지 했다. 탄탄한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그가 두 팔로 침대 헤드를 짚어 장하오를 가뒀다. 눈빛에선 강한 의지가 보였다. 이젠 빠져나갈 틈도 없었다. 장하오는 여기서 더 피했다간 성한빈의 신뢰를 모두 잃겠다 싶어 그를 밀어내려던 손을 거뒀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겠지만 지금 이 자세가 참 모텔이라는 장소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엔 붉은 기를 머금은 살색 뿐이고, 색색대는 성한빈의 숨소리는 너무 가까이에서 들렸다. 조명은 어두침침하고, 위에 올라탄 뜨거운 몸은 제법 묵직했다. 이상한 생각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래도.
입술이 바짝 말랐다.
"피할 생각 하지 마. 약속 지켜."
"어, 응... 말해줄 건데, 한빈아. 너무 붙어있,"
"나한테 놓은 주사 뭐였는데. 일단 그것부터 말해. 그리고 우리가 왜 도망치고 있는지도."
"잠깐, 뒤로 조금만..."
"빨리 말..."
빨리 말 안 해?! 그렇게 소리를 빼액 지르려 했는데.
성한빈의 입이 꾹 다물렸다. 사납던 눈빛이 당황스러움을 잔뜩 담고서 제 시선을 피하는 장하오를 빤히 바라봤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얼굴에서 귀가 터질 듯 달아올라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달아오른 건 귀 뿐만이 아닌 듯했다.
그 상태로 잠시 가만히 굳어있었다. 성한빈은 드디어 제가 지금 헐벗은 몸으로 어디에 올라타 있는지를 깨달았다. 어지러운 것도, 띵하던 머리도 한순간 모두 잊어버렸다.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
"....."
"...씻고 와."
"...응."
성한빈이 장하오의 위에서 스르륵 내려왔다. 이불을 걷고 그 속으로 쏙 들어가자 장하오가 말없이 어기적어기적 화장실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성한빈의 얼굴도 장하오의 귀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성한빈은 장하오가 들어간 화장실 문이 닫히는 걸 보고서야 거의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얇은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왜..."
...왜 나한테 서?
아래로 느껴지던 단단한 감각이 선연했다. 화장실에서는 샤워기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왜?
성한빈의 머릿속엔 물음표만 둥둥 떠다녔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암만 자연스러운 몸의 반응으로 언제든 발딱 설 수 있는 것이라 해도, 몸을 붙이고 있는 와중에 그렇게 세워버리면...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건 당연하잖아. 그것도 둘 뿐인 모텔 침대 위에서.
분명 어지럽고 피곤해 잠을 자고 싶었는데. 잠도 다 깨버린 성한빈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방 구석의 옷걸이에 걸린 샤워가운을 꼼꼼하게 둘러입고 나서야 다시 침대로 향해 누웠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의문 투성이였지만, 우선 한 가지는 알게 됐다. 장하오가 왜 그렇게 자신을 챙겨 다녔는지.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솔직한 반응을 직접 보고 느껴버렸으니까.
미친 변태라고 주먹을 날려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정말 이상했다.
성한빈은 엉덩이와 사타구니로 느껴지던 그 감각이 자꾸만 떠오르려는 걸 지우려 애쓰며 침대를 퍽퍽 때렸다. 낡은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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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침대 위에 얌전히 누운 인영을 본 장하오가 발소리를 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다친 팔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씻느라 한참이 걸렸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긴 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성한빈이 잠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약속한 이야기를 오늘 못 해주면 어쩌나. 그렇게 걱정했는데.
"이리 와. 머리 말려줄게. 형 팔 아프잖아."
잠에 든 줄 알았던 성한빈이 스르륵 일어났다. 조용히 움직이던 장하오는 그 말에 쭈뼛쭈뼛 침대로 다가갔다. 그 사이 샤워가운을 챙겨입은 듯 아까처럼 맨몸이 아니었다. 장하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움의 손길을 거절하진 않았다. 안 그래도 팔이 너무 불편하던 참이었다. 장하오는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말려주는 성한빈의 손길을 가만히 받았다. 약을 먹었대도 여전히 컨디션은 안 좋을 텐데,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것인지 그에게선 불평 한 마디 나오질 않았다.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머리가 뽀송하게 마른 뒤엔 드라이기를 정리했다. 고마워. 담백한 감사인사 후 장하오는 방의 불을 끄고 성한빈의 옆에 누웠다. 침대는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보니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뒤엔 그대로 굳어 몸을 뒤척이지도 못 하게 됐다. 고요한 정적이 이어졌다.
"...한빈아. 졸려?"
나긋한 음성이 울렸다.
"아니."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까의 일에 대한 사과를 할까 하다가 말았다. 성한빈이 필사적으로 모른척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변명을 하는 것도 이상해 보이기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장하오는 해주기로 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사 맞았으니까 내일부턴 밖에 다닐 때 눈 안 감아도 돼. 귀도 안 막아도 되고. 어지러운 건 좀 괜찮아?"
장하오가 고개만 살짝 돌려 성한빈을 바라봤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엔 속눈썹이 나풀거리는 게 보였다. 가만히 누워 눈을 깜빡이던 성한빈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대답했다.
"누워있으니까 괜찮아... 방금 그거 무슨 말인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응. 말해줄게. 전부 다."
이제는 정말 어떠한 선을 넘은 뒤였다. 아마 센터에서는 내일 오전 쯤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챌 것이다. 그럼 아무 잘못 없는 성한빈 또한 저와 같은 수준의 벌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 만약 붙잡힌다면 어떻게든 성한빈만은 빼돌려 보겠지만, 최악의 경우엔 그것마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늦기 전에 이 시스템을 둘러싼 모든 진실들을 알려주는 게 맞았다. 그래야 성한빈도 살아남을 길을 고민해볼 테니까.
"인공지능의 판단에는 학습이 중요해. 그리고 그 학습을 위해서는 양질의 데이터 공급이 필요하고. 그래서 프리크라임은 도입되기 한참 전부터 범죄를 예측하기 위한 데이터를 수집해왔어."
프리크라임의 운영이 시작된 것은 10년 쯤 전.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거기서도 또 1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장하오도 아주 어린 아이일 때부터의 이야기였다.
"개개인은 생각하는 방식도, 범죄 패턴도 모두 다르겠지만 분명 어딘가엔 공통점이 있을 거야. 프리크라임은 그 부분을 학습하려 했어. 하지만 언젠가부터 데이터 수집의 한계에 부딪히게 돼."
인터넷에 떠도는 글로도, 개인이 사용하는 전자기기를 해킹해서도 채워지지 않는 빈칸들이 많았다. 그래서 프리크라임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던 범죄예방센터는 비밀리에 별도의 프로젝트를 실시하게 됐다.
"관심이 없었다면 잘 모르겠지만, 범죄예방센터는 예전에 범죄 심리를 연구하던 연구소이자 피해자의 심리 치료를 진행하던 의료센터였어. 그리고 아마 너도 기억할 거야. 어릴 때 센터에 방문한 적이 있었을 걸."
장하오의 말에 성한빈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묻어뒀던 기억 속에서 그 사실을 떠올렸다.
"...맞아. 동생이 죽고 난 뒤에 상담 받으러 갔었어. 어쩌다 가게 됐는 지는 모르겠는데... 부모님이랑 같이 갔어."
"응. 그리고 그때, 뇌 검사를 명목으로 잠시 너를 재우기도 했을 거고."
"...맞아. 기억 나. 산소 호흡기 같은 걸 대고 있었는데 잠에 들었어."
"그때 네 머릿속에 무언가 심어졌을 거야."
"....."
"그리고 내가 아까 놓았던 건, 그 칩의 기능을 망가뜨리는 주사."
"....."
"우리가 아까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 네가 눈을 뜨고 귀를 연 채로 지금 네가 어디 서있는 지를 알고 있었다면, 우린 얼마 못 가 붙잡혔을 거야. 센터는 네 머릿속의 정보를 추출해서 지금 우리가 어디인지 금방 파악했을 테니까."
가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러니까, 프리크라임으로 제 이름이 지목된 것도...
"국민들은 모두 감시당하고 있어. 당시 전국 곳곳에 설치했던 의료센터에서 다양한 이유로 무료 검사를 해줬었거든. 그쯤 돌았던 신종 독감이 뇌 기능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소문이 돌고부턴 센터에 안 가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 덕분에 프리크라임이 완성됐어."
"...말도 안 돼."
"나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이게 진실이야."
성한빈이 누운 채 제 뒤통수를 더듬었다.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장하오에게 물었다.
"그럼 형은, 이걸 다 알고도 그냥 비밀을 지켰던 거야?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따지는 듯한 물음이었다. 성한빈에게 어울리는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장하오는 예상한 반응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 이야기를 할게. 전부 듣고 나를 이해하든, 나에게 실망을 하든 그건 오롯이 네 판단에 달려있으니 용서를 구하진 않을 거야."
털어놓기로 한 이상 맞닥뜨려야 할 갈등이었다. 장하오는 자신이 센터에 들어오게 된 이유와 그 이후에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마도 성한빈과 비슷한 시기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땐가, 5학년 땐가 그랬으니.
그 시절 어린 장하오는 집에 들어가는 게 싫었다. 부모님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게 싫었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향해 폭력을 쓰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걸 말리다 덩달아 두드려 맞은 멍은 항상 몸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당시에도 충분히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불행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더욱 심화되었다. 평소처럼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는 결국 어머니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 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재수 없다'라고 표현했다. 장하오는 옆집에서 전화를 빌려 경찰에 신고했고, 그날은 밖에서 밤을 샜다. 남의 건물 옥상이었던 것 같은데, 그곳에서 내려다 본 야경이 참 예뻤다. 그걸 바라보며 밤새도록 울었다.
그 뒤로는 친척의 손에서 자랐다. 외가 쪽 친척이었다. 마지못해 먹여주고 재워주긴 했으나 예뻐 보일 리가 없었다. 본인들의 가족을 죽인 남자의 아들 쯤으로 봤던 것 같다. 눈칫밥을 먹고 자라던 장하오는 고등학교를 다닐 시절의 어느 날, 어딘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언젠가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몇 번 방문했던 센터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센터는 자신들의 기밀을 유출하지 않을 만한 사람들을 직접 선택해 고용하는 식으로 운영을 해왔다. 당연히 그 선택에는 미리 심어둔 칩이 큰 역할을 했다.
아무튼 장하오는 센터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사람. 그래서 살인이라는 범죄를 극도로 혐오하며, 비극을 막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 이 시스템을 위해 누군가 피해를 입고 희생되는 걸 알더라도 묵인할 수 있을 사람. 그것에 모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당시의 장하오는 정말 그랬기에 센터의 제안을 수락했다. 센터에서 일을 하게 되면 시스템의 감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웠다. 관리자의 신분으로서 프리크라임이 예측한 사태를 제압하다 인명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책임이 돌아가지 않았다.
"이 시스템, 분명히 누군가에겐 비극을 막아주는 좋은 시스템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하지만 이젠 이게 정의라고 생각하진 않아."
장하오가 말했다. 그래서 프리크라임이 나를 지목한 걸지도 모르겠네. 걔도 스스로 위험을 감지한 거지. 원래 우린 프리크라임에 이름이 뜰 일이 없거든. 네가 맞았던 주사로 칩은 이미 무력화시킨 뒤라서. 하지만 반동분자를 색출해내기 위한 작업은 언제고 가동되고 있지.
작년 말,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센터 내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이었다. 떠서는 안 될 이름이 지목된 것이다. 장하오의 입사 동기였다.
장하오는 당시 현장에 나가 있느라 프리크라임이 띄운 그 알림을 보지 못 했다. 복귀했을 때는 모든 일이 끝난 이후였다. 가깝게 지내던 신입 인턴 한유진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이름이 뜨자마자 센터에서 그를 잡아들였다고 했다. 그 이후로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넌 지목 후 한 달 안에 '안전'이 된다면 적어도 촘촘한 감시망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어. 하지만 너와 함께 있는 와중에 내 이름이 뜬 이상 그들은 너도 가만 두진 않을 거야."
내가 널 교화하는 것에 실패하고 네게 '전염'됐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래서 우선 너를 데리고 도망친 거야. 시스템에 일시가 뜬 이상, 예고한 시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만 증명한다면 시스템의 오류로 우리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어. 물론 지금껏 그런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프리크라임의 예측은 틀린 적이 없다. 꼭 예고한 시간에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날진 몰라도 분명 무슨 일이 있긴 할 테다. 그 상황에서 부디 아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길, 지금은 스스로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성한빈에게선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잠에 든 건가 싶어 슬쩍 옆을 쳐다봐도 여전히 깜빡이고 있는 눈이 아직 깨어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장하오는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먼저 말을 꺼내주길 기다렸다. 지금부터는 성한빈이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해줄 것이라 다짐하면서.
"...궁금한 게 있어."
성한빈은 한참만에 말을 꺼냈다. 궁금한 게 있다는 말에 장하오가 그를 향해 돌아 누웠다. 뭔데? 그 물음엔 성한빈도 장하오를 향해 돌아 누웠다. 시선이 맞물렸다.
"형은 오랫동안 검거과에 있었다고 했잖아."
"응. 그랬지."
"현장에서 잡아들인 사람들은, 모두 범죄를 저질렀어? 사람이 그렇게 단순하진 않잖아. 계획했던 게 틀어질 수도 있는 거고, 저지르려는 순간에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잖아."
장하오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은 모든 순간 아주 사소한 일들로도 변해. 물론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
"애초에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죗값을 무는 게 맞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 네 말이 맞아."
이어지는 말을 듣던 장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변한다. 변한 게 자신이라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검거과에 있을 시절, 자신이 잡아들인 사람들은 결과만 놓고 보면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은 사람들이었다. 최대한 예측한 시간에 딱 맞춰 결정적인 순간 검거하게 되지만, 그 남은 몇 초 내에서 가해자가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장담을 할 순 없으니까.
"지금의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어. 선을 넘은 거지."
장하오가 조용히 말했다.
"동의 없이 모두를 감시하고 있는 시스템도 문제지만, 지금은 점점 사람이 수단이 되어버리는 게 더 문제야. 다른 고민 없이 시스템을 맹신하고 있는 것도."
검거과로서 수행했던 마지막 임무에서 장하오가 멈춰서버린 이유.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라서였다.
그녀의 눈에 담긴 원망과 분노가 낯설지 않았다. 제 어머니가 언젠가 한 번이라도 그녀와 같이 그 곪은 마음을 표출했었더라면, 장하오는 그때처럼 멈춰섰을 것이다. 어쩌면 속으로 바래왔던 장면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집어든 식칼로 아버지를 찔러 죽이는 것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검거돼서 잡혀간 사람들은 그럼 어디로 가는 거야? 평범하게 교도소로 가는 건가?"
마침 성한빈이 그 물음을 건네왔다. 민간인들에겐 이런 가해자들이 절차에 따라 합당한 벌을 받게끔 수감된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고, 검거된 이들이 어떤 처분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
프리크라임은 사건의 맥락을 파악할 줄 모른다. 그저 세상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눌 뿐이다.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잠재적 범죄자로.
"검거된 사람들은... 센터 지하에 갇혀."
"...지하? 거기 뭐가 있는데?"
"프리크라임이 더 섬세하고 정확하게 범죄를 예측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데에 쓰여."
"....."
"말 그대로 '쓰이는' 거야. 캡슐 같은 작은 공간에 갇힌 채로 뇌에서 데이터를 추출 당해. 형량이 끝날 때까지."
결국은 순환되는 것이다. 추출된 정보는 또 다른 잠재적 범죄자를 가려내는 데에 쓰인다. 시스템은 발전하겠지만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것은 위험하다. 사람을 위해 만들어낸 시스템이 사람 위에 군림하는 일은 있어선 안 되니까.
"시스템은 더 발전해선 안 돼.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어. 막을 수 있는 범죄는 막되, 거기서 그치는 게 맞아. 더 큰 욕심은 사회에 절대 이롭지 않아. 오늘 하루 동안 도망치면서 내린 결론이야."
장하오는 그렇게 말하고서 성한빈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죄를 고백하듯 덧붙였다.
"이게 복수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어. 내가 하는 일이 곧 정의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고. 하지만 복수를 아무리 반복한대도 돌아가신 내 어머니는 다시 살려낼 수 없고, 정의는 은폐와 희생 위에 세워질 수 없어."
한 우물 안에서는 더 넓은 세상을 알 수 없다. 장하오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우물에서 올려다본 세상은 좁을 수밖에 없었다. 고인 물만 마시다 보면 그 물이 썩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어쩌다 깨닫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성한빈이 그 원인을 제공한 것 같다가도, 실은 그 전부터 무의식 중에 조금씩 생각해온 문제였는지도. 아무튼 어느 순간 변했다는 건 확실했다. 사람은 모든 순간 아주 사소한 일로도 변한다는 성한빈의 말처럼.
해줄 이야기는 이게 끝이었다. 장하오는 성한빈의 눈을 마주한 채 마지막으로 선택권을 넘겼다.
"날이 밝은 뒤에... 나를 신고한다고 해도 괜찮아. 위험을 무릅쓰고 널 데려온 것 또한 내 선택이었으니까."
"....."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점은 알고 있으라고. 이미 내가 널 충분히 위험에 빠뜨린 것 같긴 하지만..."
곧게 뻗은 손가락이 성한빈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마음 먹었으나 부디 그의 선택이 제 것과 같기를 바라는 마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성한빈도 덧붙은 말에서 그걸 느낀 건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약간 어이없는 웃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구구절절 다 말해놓고, 신고해도 괜찮다고? 형 미쳤어?"
성한빈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따졌다. 그 말의 의도를 금방 파악하지 못한 장하오가 의문을 품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럼 결국 원점이잖아. 선택권을 넘길 게 아니라 나한테 도와달라고 해야지. 잘못 굴러가고 있는 이 시스템을 어떻게든 같이 바로잡을 길을 찾아보자고 나를 설득해야지."
"....."
"내가 형을 신고하겠다고 하면 싹싹 빌든 협박을 하든 붙잡아야지. 그 정도 각오도 안 하고 날 데려온 거야? 그렇다면 조금 실망인데."
성한빈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내 목숨이 형 손에 달려있는데, 그렇게 맘대로 하라고 말하는 게 어딨어. 타박하는 목소리에는 괜히 주눅이 들었다. 듣고보니 그것도 맞는 말 같아서.
우물쭈물, 눈치를 보고 있으니 성한빈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벌떡 일어나 앉는다. 그러나 어지럼증을 느낀 건지 으으, 앓는 소리를 내다 다시 침대로 철푸덕 엎어진다. 놀란 장하오가 몸을 일으켜 그의 어깨를 짚고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좋아. 나 결심했어."
저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내려다 보는 장하오는 뒷전으로 미뤄놓고, 성한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형 말대로 일단 내일 밤까지 버텨보자. 어차피 센터도 우릴 공개수배할 권한은 없는 거고, 나도 이제 감시에서 벗어날 테니까 어렵진 않을 거야. 그치."
"...응. 아마도."
"그치만 이 시스템이 더 커지고, 정말 사람 위에 시스템이 존재하게 된다면 언젠가는 프리크라임의 지목만으로도 공개수배가 가능해질 지도 모르지."
"...그것도 맞아."
"나도 형이랑 의견이 같아. 시스템의 긍정적인 면은 인정하지만, 그것만 믿고 가기엔 부정적인 면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해."
입장 정리는 금방 끝이 났다. 장하오는 성한빈이 한 말의 의도를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성한빈은 고개를 푹 숙인 그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인 줄 알아. 평일이었음 도망이고 뭐고 우리 애들 보러 출근했을 거니까."
장난스러운 말이 따라 붙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보려 한 말인 걸 알아 장하오도 옅게 웃었다.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으나 그런 티를 내고 있는 것도 성한빈에게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여러 감정을 담은 눈이 성한빈을 빤히 바라봤다.
"...왜, 왜 그렇게 봐. 잠이나 자. 이제 졸려."
농도 짙은 눈빛엔 면역이 없었다. 성한빈이 당황한 얼굴로 장하오의 어깨를 쭈욱 밀었다. 장하오가 옆자리에 털썩 눕자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얼굴이 홧홧해지는 느낌에 성한빈은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누웠다. 진지한 이야기를 잘만 하다가도 또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니 좀 전의 일이 떠오른 탓이다. 엉덩이에 느껴지던 묵직한 감각 말이다.
"그래. 잘 자, 한빈아."
뜨끈한 손이 뒤통수를 훑고 떨어졌다. 그런 뒤엔 더이상 말이 오가지 않았다. 옆에 장하오가 누워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숨소리만 들렸다. 문제는, 그 소리마저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는 거고.
성한빈은 이불을 꼭 쥔 채로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했다. 자꾸만 떠오르는 어떤 느낌 때문에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어딘가로 피가 몰리려는 걸 꾹꾹 참아내야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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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잠을 잔 둘은 동이 틀 때 쯤 눈을 떴다. 불안한 마음 탓인가, 알람 없이도 눈이 번쩍 떠졌다.
이곳에서 쭉 있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계속 한 곳에 머무르다 보면 cctv를 통해서라도 걸릴 게 뻔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짐을 챙겨 나가던 골목길에서 센터 사람들을 마주칠 뻔 했다. 그들을 먼저 알아본 쪽이 장하오라 다행이었다. 걸음을 멈춘 장하오는 성한빈의 팔목을 붙들고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도망쳤다. 몇 분만 더 늦게 나왔어도 꼼짝없이 잡혀갈 뻔 했다.
둘은 전날처럼 지하철에 올랐다. 가장 안전한 이동수단이었다. 어떤 열차를 탔는지 특정할 수 없다는 점, 어디서든 내리기 쉽다는 점, 그리고 인파에 섞여 자연스럽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른 시간이라 열차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장하오는 성한빈의 손을 꽉 잡고 칸을 따라 이동했다. 꼬리 칸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편히 있을 곳을 찾은 둘은 우선 빈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바닥에 묵직한 가방을 내려둔 장하오가 모텔에서 완전히 충전해둔 휴대폰을 꺼냈다.
한유진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위치를 추적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는 게 좋았다. 꺼져있던 휴대폰 화면에 빛이 들어오며 기본 배경화면이 떴다. 장하오는 메시지 창을 띄우고서 외워뒀던 한유진의 번호를 입력했다.
[유진아, 센터 상황은 어때?] 문자를 입력하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 할 때, 성한빈이 장하오의 팔목을 탁- 붙잡았다.
"형, 전화가 나을 것 같아."
"왜?"
괜히 한유진까지 위험한 상황으로 끌어들이게 될까봐 전화는 피하려 했다. 들키기 쉬우니까. 그러나 성한빈의 의견은 반대였다.
"냉정하게 말하면, 유진씨는 이미 붙잡혔을 수도 있어."
"....."
"그리고 문자는 유진씨 폰을 손에 넣었다면 누구든 보낼 수 있어. 전화로 해.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알아서 거절하겠지."
일리있는 말이었다. 장하오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의 말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기본 통화 연결음이 이어졌다.
한참 연결이 되는데도 한유진이 전화를 받는 소리는 넘어오지 않았다. 안 받아? 응, 안 받는데. 성한빈과 짧은 대화를 주고받고 나서야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를 깨달았다. 오전 6시가 채 되기도 전인 시간. 이 시간에 전화를 하는 것 자체가 수상쩍을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 한 것이다.
생각이 짧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전화를 끊으려던 때. 전화 너머에서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아, 쌤! 저 오늘 일 때문에 아침 피티 못 간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까먹으셨어요?
투덜거리는 말투였다. 목소리는 한유진의 것이 확실했다. 근데 이게 무슨 상황이지... 다짜고짜 피티 쌤을 찾는 목소리에 장하오가 잠시 굳어버린 사이 성한빈이 휴대폰을 채갔다.
"유진씨? 아이, 맞다, 참. 내가 까먹었네에. 요즘 정신이 없어서 이렇게 깜빡깜빡 한다니까. 미안해요."
성한빈이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장하오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는 동안 한유진은 기다렸다는 듯 그 사과에 대화를 이어갔다.
- 저 아무래도 내일 오전까지는 바쁠 것 같아서요. 급하게 외근이 잡혀서. 수업은 미뤄야 할 것 같아요. 스케줄 조정 가능하죠?
"외근? 어디로 가길래 내일 오전까지도 바빠요? 유진씨 운동하기 싫어서 거짓말 하는 거 아니에요?"
- 아! 저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요!? 진짜예요! 쌤 저 무슨 일 하는지 아시잖아요. 어제도 새벽내내 터미널에 잠복해 있었어요. 피곤해 죽겠다고요.
"터미널에? 왜요? 용의자가 지방으로 도망이라도 쳤대요?"
성한빈이 눈을 굴려 장하오를 바라봤다. 우리는 고속터미널로 향할 거라고 제게 세뇌하듯 말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 아니, 그건 아니고. 터미널에 나타날 것 같으니까 대기하라길래 종일 거기 있었는데 결국 안 나타나서 오늘 아침에야 철수했어요. 완전 속았죠. 암튼 대충 cctv로 위치 파악 돼서, 저 오늘은 수도권 쪽으로 이 잡듯이 뒤져야 하니까 운동 못 해요. 내일도 힘들 수 있어요. 가능할 때 연락 드릴게요.
"음, 네. 알았어요. 가능할 때 연락 꼭 줘요. 24시간 잠복해도 멀쩡한 몸으로 만들어 줄테니까."
- 하아... 네. 다음에 봬요.
"네. 유진씨 화이팅!"
성한빈은 영혼이 가득 담긴 응원을 보내고서 전화를 뚝 끊었다. 그리고 장하오를 바라봤다. 다음 행선지는 둘의 머릿속에 똑같이 떠올랐다.
"터미널로 가자."
"그래."
장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잔머리를 굴렸던 건 다행히 통한 듯 싶었다. 속았다는 걸 깨닫고 오늘 아침에 철수했다면 지금 가장 안전한 곳은 터미널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최대한 빨리 지역을 벗어나야 했다. cctv로 추적하기 시작했다면 지금 지하철에 타고 있는 것도 금방 들킬 것이다. 고속버스가 따라잡히는 것도 시간 문제일 테니 아주 먼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도 불가했다.
적당히 시간을 벌 수 있도록 두 시간 이내 거리에 있는 곳으로 가자. 머리를 맞대고 결론을 내린 두 사람이 터미널까지 남은 거리를 가늠했다. 환승 한 번에 20분 정도를 더 가야 했다. 아주 나쁘진 않았다.
"근데 너... 배우 해도 되겠더라."
가만히 앉은 채 노선도를 올려다 보던 장하오가 말했다. 위기 대응 능력도 상당하던데. 센터에선 왜 성한빈을 채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다 금방 깨달았다. 성한빈은 시스템의 불의를 눈 감아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형도 초등학교 선생님 해봐. 매일매일 연극 무대에 서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음... 내 적성은 아닌 것 같아."
"그래 보이긴 해."
성한빈이 큭큭 웃었다. 그 웃음에 장하오의 얼굴에도 덩달아 미소가 번졌다.
새삼 이 상황 속에서도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였다면 잡혀 죽는 상상이나 했겠지만, 성한빈의 옆에 있으니 다시 멀쩡히 일상을 사는 상상이 먼저였다. 주말이 지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학교로 출근해 연극 무대에 서듯 교탁 앞에 서는 성한빈. 그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한 번 쯤은 그 모습을 직접 보고 싶기도 했다.
장하오는 성한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왜 그러냐는 물음 대신 제 머리 위에 함께 기대오는 무게가 느껴졌다. 그 느낌이 좋았다. 쫓기고 있는 상황 덕에 그와 이러고 있을 수 있어 오히려 좋다는 미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당연히 그 마음을 내뱉지는 않은 채 잠시 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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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빨리 출발하는 버스를 여러 개 예매해 하나를 골라 탔다. 목적지는 처음 계획했던 대로 도착 시간까지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리는 신도시인 연주시였다. 둘 모두 연주시에는 연고가 없어 초행길이었다. 한유진이 준 대포폰도 혹시 몰라 꺼놓은 바람에 지도 하나 없이 돌아다녀야 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 너무 여기저기를 쏘다니면 cctv에 찍힐 일도 많으니 가능한 눈을 피해 조용히 움직여야 했다. 두 사람은 연주시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에서 옷을 한 번 갈아입고 택시를 잡아 탔다. 연주시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들키기 전에 최대한 터미널에서는 멀리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우리 오늘 하루는 연인인 척 하자.
성한빈은 그런 제안을 해왔다. 도망 다니는 티를 내는 건 위험했다. 제일 평범하게 보일 수 있는 게 연인이었다. 요즘은 동성 연인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니까. 택시에 오른 성한빈은 특유의 붙임성으로 곧장 택시 기사에게 물었다. 기사님. 저희 아무런 계획도 없이 놀러 왔는데, 혹시 놀러 갈만한 곳 추천해 주실 수 있으세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물은 말에 택시 기사는 몇 군데의 관광 명소를 추천해 줬다. 수목원도 있고, 호수공원도 있고, 조용한 곳을 좋아하면 절도 있고, 요즘처럼 더운 날씨에 놀러 오는 연인들은 놀이공원과 워터파크도 많이 간댔다. 하지만 놀이공원이나 워터파크 같은 경우 오늘 같은 날은 미어터질 테니 추천하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땡큐였다.
"형. 놀이공원 안 가본 지 얼마나 됐어?"
"글쎄... 고등학교 때가 마지막이었나?"
"뭐!? 진짜? 기사님. 놀이공원으로 가주세요."
카르페 디엠. 이런 상황에 쓰라고 있는 말은 아니겠지만 성한빈은 현재를 아주 신나게 즐기는 중이었다. 워터파크도 괜찮은 선택지 같았으나 모텔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장하오와 벗은 몸을 공유하는 건 센터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잡히는 것보다 위험한 일이었다. 처한 상황과는 다른 이유로 9시 뉴스를 장식하게 될 지도 모르니 말이다.
놀이공원은 꽤 멀었다. 택시로 한 시간 가까이 이동하는 동안 또 잠깐 쪽잠을 자고, 도착했다는 말에 비몽사몽 일어나 택시비를 내는 꼴이 정말 대책 없이 여행 온 커플과 다를 바 없었다. 잘 놀다 가라는 택시 기사의 말에 감사 인사를 건넨 둘은 손을 꼭 맞잡고 택시에서 내렸다. 이제 손을 잡고 걷는 것 쯤은 숨 쉬듯 익숙했다.
도착하기 전까진 별 생각이 없었지만, 장하오는 놀이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목적지를 이곳으로 정한 게 아주 괜찮은 선택지였다고 생각했다. 우선 무거운 짐을 물품보관소에 맡길 수도 있었고, 성한빈의 손에 이끌려 교복을 빌려 입은 뒤엔 의도치 않게 변장도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이인짜 맛있다..."
눈치보지 않고 무언가를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정확히는 성한빈이 츄러스를 먹으며 짓는 행복한 표정을 보는 게 좋았다.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욱여넣는 걸 보니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워 함께 산 오렌지주스의 빨대를 물려줬다.
"천천히 먹어. 먹고 싶은 거 오늘 다 사줄게."
"진짜로? 후회하지 마."
형 지갑 다 털 거야. 무서운 표정으로 겁을 주는 것도 귀엽기만 했다. 장하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먹고 싶은 것도 다 먹고, 하고 싶은 것도 다 하자고. 그러면서 말랑한 뺨을 살살 쓰다듬는 행동에는 성한빈이 딱딱하게 굳어 얼음이 됐다. 갑자기 저렇게 멜로 눈깔이 되는 것에는 아직 면역이 없었다. 심지어 장하오는 본인이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아 더더욱 기분이 묘해졌다. 그럴 때마다 성한빈은 놀이기구 대기줄로 장하오를 질질 끌고 갔다. 이상한 기분을 털어버리기 위해.
장하오는 보기와는 다르게 놀이기구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옆에서 제 몫까지 비명을 지르는 장하오 덕분에 성한빈은 숨이 넘어갈 듯 웃었고, 정신이 반쯤 나간 장하오를 더 놀리기 위해 이곳저곳을 쏘다니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렇게 온 힘을 다해 놀아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놀았다.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요 몇 년 새 가장 행복한 날이었던 것 같다고, 두 사람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다.
어느덧 놀이공원도 폐장할 시간이 되었다. 생각보다도 사람이 많다 했더니 오늘이 불꽃축제 날이랬다. 그 사실을 폐장 시간이 다 되어서야 깨달았다. 막 아홉 시를 넘은 시간이었다.
까만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봤다.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그 아름다운 장면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럴 수 없는 두 사람은 나란히 선 채 하늘을 올려다 보기만 했다.
"오늘 하루가 꿈 같아."
펑- 불꽃이 터지는 소리에 성한빈의 목소리가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장하오는 하늘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제 옆의 성한빈을 당겼다. 응? 뭐라고 했어? 고개를 살짝 숙여 귀를 갖다댔으나 성한빈은 입을 꾹 다물고 말을 해주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보니 그의 표정이 긴장한 듯 딱딱하게 굳어 있다. 뭔가 불만이 있나 싶기도 하고,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에 급히 두려움이 몰려오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감이 잡히진 않았다. 특유의 또렷한 눈은 웬일로 읽기가 어려웠다.
"왜 그래. 뭐라고 했어, 아까?"
"...형. 나 좀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은데."
"응?"
장하오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성한빈에게서 나온 말이 의외라. 오늘 하루 동안 사람에 너무 치여서 그런가. 그렇다기엔 지금껏 꽤 잘 즐긴 것 같던데...
"조용한 곳? 힘들어서 그래?"
"아니, 힘든 건 아니고..."
"...그럼? 혹시 주변에서 의심스러운 사람이라도 봤어?"
잔뜩 목소리를 낮춰 물은 말엔 성한빈이 고개를 저었다. 잠깐 멈칫 하며 말을 고르던 그가 장하오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그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그냥... 이 꿈 같은 하루가 끝나기 전에 하고 싶은 건 다 해보고 싶어서."
"...뭘 하고 싶은데?"
"저기 전망대 건물에 영화관이 있대. 아까 보니까 놀이공원은 폐장해도 영화는 심야까지 상영한다더라."
"....."
"나랑 영화보러 갈래?"
성한빈이 그렇게 물으며 장하오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장하오는 반사적으로 제게 안긴 등을 마주안았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달콤한 목소리를 거부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성한빈이 저를 데려가려는 곳이 영화관이 아닌 지옥이래도 고개를 끄덕일 것 같았다.
펑- 펑- 폭죽이 터지는 소리는 바로 옆사람의 목소리도 묻히게 만들 만큼 시끄러웠지만, 신기하게도 귓가의 작은 숨소리가 폭죽 소리보다도 크게 들려왔다. 온 신경이 성한빈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고 떠올렸다. 언젠가 성한빈이 제게 했던 말을.
'그냥 제가 범죄자가 되어서라도 살리고 싶어요. 그 사람들.'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겨버렸다. 혹시나 궁지에 몰린 상황 때문에 감정을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싶기도 했었지만, 착각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가자. 가기 전에 옷 갈아입고, 짐도 챙기자."
적어도 총 하나 쯤은 손 안에 있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쏠 일이 없길 바라는 것과 별개로, 누군가 성한빈을 위협한다면 그에 맞서 싸울 무기는 있어야 하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성한빈은 털 끝 하나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인파를 거슬러 나갔다. 불꽃놀이는 한창이었다. 잡은 손은 이전보다 더 단단했고, 장하오는 몇 걸음에 한 번씩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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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최근에 개봉한 평범한 로맨스 장르 영화였다. 재미는 별로 없는지 입소문을 타진 않아 상영관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불꽃놀이를 하는 시간과 살짝 겹쳐 이 시간대로 예매를 한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영화관의 제일 오른쪽 끝, 맨 뒷자리 두 개. 스크린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는 자리였다.
등골이 오싹하게 저렸다.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의 대사가 들려오고 있었으나 영어라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장하오는 성한빈의 허리를 더 끌어당겼다. 고개를 비틀어 더 깊이 파고들었다. 욕심에 가득 차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입술을 먹어 치웠다. 성한빈은 버거운 숨소리를 애써 죽이며 장하오의 키스를 받아냈다. 제가 먼저 시작한 것임에도 금방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게 억울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더 짜릿했다. 같은 마음이라는 걸 제대로 확인받았으니.
영화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로맨스 영화를 좋아한다는 장하오의 취향에 맞춰 예매만 했을 뿐. 성한빈은 상영관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내 장하오의 옆모습만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을 모른 척 하는데도 한계가 있었고, 할 말이 있냐는 속삭임에 성한빈은 저도 모르게 진심을 뱉었다.
'키스 하고 싶어.'
'...뭐?'
'우리 오늘은 연인이잖아. 영화관에서 키스 좀 할 수도 있지. 안 그래?'
일반적인 연인들도 영화관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입술을 부비지는 않는데. 그 사실 같은 건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성한빈은 장하오의 뒷목을 잡아 당겼다. 말캉한 입술이 맞물렸다. 혀로 입술을 소심하게 깔짝이는 사이 갑자기 장하오가 급히 치고 들어왔다. 이 순간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말이다.
숨을 쉴 틈도 주지 않았다. 허리를 당기던 손은 위로 올라와 성한빈의 뺨을 붙잡았다. 두툼한 혀가 치열을 훑었다. 타액이 질척이며 만들어낸 축축한 소리는 영화에 삽입된 음악 소리에 묻혔다. 엄지가 말랑한 뺨을 쓸었다. 애정이 묻은 손짓에 성한빈이 흐물흐물 녹았다. 이럴수록 더 매달리고 싶어진다는 건 알까. 심장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다시 어젯밤으로 돌아가 입고 있는 옷가지들을 벗어 던지고 장하오의 위에 올라타고 싶었다. 성한빈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물론 장하오도 마찬가지였다.
허벅지 사이로 손을 밀어넣었다. 성한빈이 장하오의 탄탄한 허벅지를 쓸어올리는 사이, 장하오는 성한빈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어젯밤 만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몸을 마음껏 더듬었다. 못 참겠는 기분에 먼저 몸을 물린 쪽은 성한빈이었다. 고개를 홱 뒤로 빼자 풀린 눈을 한 장하오가 좌석 너머로 몸을 더 밀어 넘어왔다.
"왜 피해...?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장하오는 성한빈의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며 슬금슬금 목덜미로 입술을 내렸다. 성한빈은 팔을 허우적거리다 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참지 못한 신음과 함께 심장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뭐가 됐든 나쁜 일이 다 끝나고 안전해졌을 때 하고 싶었다. 성한빈을 향한 마음을 깨닫고도 그걸 내보일 때가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어진 선처럼 존재하는 좌석 사이 손잡이를 먼저 넘어온 건 성한빈이었고, 장하오는 한 번 시작한 이상 멈추고 싶지가 않았다. 코와 입술이 닿는 모든 곳에서 숨을 들이키며 입을 맞췄다. 체향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는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좋았다.
입을 막은 손을 떼어내고 다시 입술을 겹쳤다. 떼어낸 손엔 깍지를 꼈다. 틈 없이 맞물린 손을 꼭 쥐자 화답하듯 다른 팔이 목 뒤로 감기는 게 느껴졌다. 그 순종적인 행동이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 마음 같아선 이대로 성한빈을 안아들어 더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가고 싶었다. 하다못해 화장실이라도. 머리 끝까지 흥분감이 차오른 상태라 과연 어떤 짓을 저지르게 될 진 모르겠지만.
숨 막히는 키스가 한참 이어졌다. 그간 연애를 할 여유 같은 건 없었으니 키스도 이게 처음이었다. 요령도 없이 힘과 본능으로 밀어 붙이는 중이었다. 성한빈도 크게 다르진 않은 듯 먼저 호기롭게 입술을 붙인 것 치곤 꽤 서툴렀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알아채고 깊게 생각할 틈도 없었다. 지금 당장 혀를 섞는 것에 집중하느라. 그리고 다른 생각은 끼어들 필요도 없을 만큼 기분이 아주 좋아서.
숨이 모자라 잠깐씩 떨어졌다. 영화는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중이었다. 로맨스 영화라더니, 스릴러 요소도 가미되어 있는지 주인공이 비명을 지르며 누군가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다. 스크린을 힐끔 바라본 장하오가 붙잡은 성한빈의 뺨에 짧게 입술을 몇 번 내렸다. 그리고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시침과 분침이 어느새 열한 시에 다가와 있었다.
"영화 끝날 때까지 여기 있을래? 아님 잠시 나갈래?"
장하오가 물었다. 영화는 프리크라임이 예측했던 장하오의 범행 시각을 지나 끝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성한빈은 잠깐 고민하다 금방 결정을 내렸다.
"여기 있자. 영화 끝나고 나가도 늦지 않으니까..."
"그래."
"그 전에 조금 가라앉히는 게 좋겠어."
성한빈이 힐끔 아래를 내려다 봤다. 둘 모두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계속 입술을 부비다간 영화가 끝나고도 못 나갈 것 같아 손만 꽉 붙잡은 채 억지로 스크린을 바라보고 앉았다. 역시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그저 달게만 느껴지던 상대의 입술 같은 것만 머릿속에 둥둥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들뜬 기분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그래서 뒤통수에 닿는 차갑고 딱딱한 감각을 느꼈을 때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채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장하오 경감님."
뒤쪽에는 좌석이 없었다. 그리고 성한빈은 이제 더이상 자신을 경감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장하오는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한순간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조용히 따라 나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소란을 일으키시면 쏠 수밖에 없어요. 경감님께서도 잘 아시죠?"
아침에 전화를 통해서도 들었던 목소리다. 반 년 넘게 호흡을 맞춰 왔던 동생 같은 후배. 장하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 돌아본 옆으로는 딱딱하게 굳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성한빈이 보였다. 그의 뒤통수에도 총구가 닿아 있었다. 한유진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더 뻗대는 게 위험했다.
"가자. 괜찮아."
성한빈을 안심시켜 일으켰다. 스크린 속 영화에서는 쫓기던 주인공이 결국 총에 맞고 쓰러졌다. 엔딩이 해피인지 새드인지 정도는 확인하고 고를 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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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단을 따라 계속해서 위로 올랐다. 꾹 잡고 있는 성한빈의 손은 그대로였다. 뒤통수에 닿은 총구도 그대로였다.
처음 붙잡혔을 땐 망했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의아함이 더 컸다.
왜 위로 올라가는 거지? 센터로 붙잡아 가는 게 먼저일 텐데. 그런 의문. 그리고 네 명의 발소리 뿐인 비상계단에서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
계획 범죄의 검거든 우발적 범죄의 비상 출동이든 안전을 위해서는 최소 5인 정도는 투입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위험인물이 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에 한 명씩. 고작 두 명이 따라붙은 상황이었다. 그게 너무 이상했다.
계단이 더이상 나타나지 않을 때까지 올랐다. 옥상에 다다른 것이다. 혹시 헬기라도 가져온 건가. 그랬다면 모든 게 이해가 될 것 같았으나 닫힌 문을 열고 나선 전망대 건물의 옥상에는 헬기 비슷한 것도 없었다. 그저 정원처럼 꾸며진 넓은 공간 뿐. 여름 밤의 바람이 긴장으로 흘러내린 식은땀을 식혔다. 밤 늦은 시간이라 옥상에는 네 사람 외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난간 너머로 보이는 야경은 쓸데없이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야경에 얽힌 나쁜 기억이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장하오는 성한빈을 더 바짝 끌어 당겼다. 동시에 머리에 붙었던 총구가 스르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경감님."
한유진의 목소리에 장하오가 홱 몸을 돌렸다. 반사적으로 성한빈을 제 뒤에 세운 그는 혹여 총구가 성한빈에게로 향할까 경계하며 사나운 눈초리를 했다.
"원하는 게 뭐야."
단순히 잡혀가는 상황이 아니라는 건 이미 눈치 챘다. 장하오가 앞에 선 두 사람을 훑었다. 총구를 제게 겨눈 채 긴장한 듯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한유진. 그 옆에서 비슷하게 총을 들고 있는 사람도 지금 보니 낯이 익었다. 한유진과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인턴이었다. 장하오가 코웃음을 쳤다. 자신을 뭘로 보고 겨우 인턴 나부랭이 둘만 보낸 건가 싶었다. 허리춤에 감춰둔 총을 더듬었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멀쩡히 붙어있는 걸 느끼며 작게 숨을 뱉었다. 여차하면 쏴버리겠다 생각하며.
"원하는 게 뭘까요. 경감님도 아실 텐데요."
한유진의 말에 장하오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프리크라임이 보여준 시간, 23시 6분 57초였어. 그 시간까지 5분도 안 남은 거 알지."
"네. 알죠. 프리크라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도요."
"그리고 지금 여기, 눈이 있다면 보일 거야. 우리 넷 밖에 없다는 거."
"네. 그것도 알고요."
"그래. 난 아무도 죽이지 않을 거야. 너희가 그 총을 내려놓기만 하면."
아무 일 없이 예정된 시간을 넘기기만 한다면 잡아들일 명분 같은 건 없어진다. 그리고 장하오는 앞에 선 이들이 자신과 성한빈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는 이상 그들을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모두 총을 내려놓는다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도 두 인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철컥- 심지어 총을 장전하기까지 한 한유진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장하오는 당황한 얼굴로 물러섰다. 잡고 있는 성한빈의 손이 긴장으로 떨리는 게 느껴졌다.
"경감님. 왜 그러십니까. 다 아시는 분이."
"한유진. 총 내려놔."
"시스템의 예측에는 오류가 있어선 안 돼요."
"가까이 오지 마. 멈춰."
"뭐, 사실 애초에 프리크라임에 경감님의 성함이 뜬 것부터 오류긴 했죠. 그쵸. 우리는 원래 지목도 안 되잖아요. 현장에서 실수로 용의자를 사살하더라도 특별한 불이익이 없고.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죠? 아시잖아요. 모를 리가 없지."
장하오의 이마에 한유진의 총구가 닿았다.
"저희는 오류를 없애러 왔어요."
"....."
"사실 진작에 잡아서 센터에 보냈으면 됐는데, 역시 만만한 분이 아니시더라고요. 벌써 시간이 다 돼버렸어요."
"...유진아."
"선택지를 드릴게요."
이마에 닿은 총구가 스르르 내려갔다. 그리고 한유진은 성한빈을 쥐고 있던 장하오의 오른손을 떼어냈다. 그러고선 제 손에 들려있던 총을 그 손에다 쥐여줬다.
"오류만 없애면 끝나는 거예요. 높으신 분들은 그걸 원하니까."
한유진이 제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3분 남짓 남은 시간. 공허한 눈이 장하오를 향한다.
"그 총을 가지고 프리크라임의 예측을 사실로 만드세요."
장하오가 숨을 죽였다.
"그게 아니라면,"
한유진이 제 옆에서 잔뜩 긴장한 동기를 바라봤다. 그의 총구는 여전히 장하오를 향해 있다.
"저희는 오류를 없애고 돌아갈 겁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곳에 있는 셋 중 누군가를 죽이고 범죄자의 신분으로 잡혀 들어가거나, 프리크라임에 오점을 남기지 않도록 여기서 죽어버리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뜻이었다. 안타깝게도 선택의 시간은 3분 뿐이고.
하, 하하... 장하오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고작 인턴 두 명을 보낸 이유가 명확해졌다. 제 손에 죽어도 센터에 별 타격이 없을 인물들. 둘을 죽이고 도망친다 해도 그때부턴 정말 살인자가 되는 것이므로 공식적인 범죄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럼 공개수배까지 가능해지니 잡히는 건 시간 문제였다. 무엇을 선택하든 배드엔딩 뿐이라는 뜻이었다.
최악이네, 정말.
그 어느 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저를 향해 총구를 빳빳이 들고 있는 인턴도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는 듯 벌써부터 울상을 한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고요한 얼굴로 선택을 기다리는 한유진은 꼭 총에 맞아 죽는 것이 본인이래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모습이었다. 장하오는 상반되는 두 사람 앞에서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려보려 했다.
그러던 중, 조심스러운 손길이 뒤에서 장하오의 허리를 살짝 붙잡았다.
"...형."
성한빈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자마자 장하오는 제 선택에 따른 그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내가 누군가를 죽인다면. 혹은 내가 죽임을 당한다면. 성한빈은 안전할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곧장 떠올랐다. 아니. 절대로 안전할 수 없다. 이 모든 이야기를 보고 들은 이상 공범으로 붙잡혀 처벌을 받거나, 똑같이 위험한 인물로 판단해 없애버리거나.
"이렇게 하자. 둘 다 센터로 돌아가. 가서 내가 성한빈을 죽였다고 해."
시간을 벌 방법은 그 뿐이었다. 우선 센터는 프리크라임의 오류를 덮는 게 우선이니까, 프리크라임이 옳았다는 거짓보고를 하는 방법이라도 써야 했다. 둘 중 죽은 이가 없다면 의심을 살 수밖에 없으니 성한빈을 이용하는 것이고.
"퍽이나 믿겠어요. 그렇게 세기의 사랑을 하는 것처럼 붙어서 도망 다녔는데."
"어차피 성한빈도 위험 인물이었어. 겁에 질린 나머지 나를 죽이려 했다고 쳐. 그래서 내가 성한빈을 죽여버린 거야. 일단 그렇게 해."
"그럼 저희는요. 빈 손으로 돌아갑니까? 성한빈씨를 죽인 경감님을 이곳에 두고?"
한유진이 따지듯 말했다.
"만약 그러려면 저희는 최소한 성한빈씨의 시체를 가져가거나, 경감님을 체포해 가야 해요. 센터를 속이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세요?"
성한빈의 시체. 그 말에 머리가 싸하게 식었다. 동시에 두 인턴들의 스마트 워치에서는 삐빅- 하는 경보음이 들렸다. 장하오는 그게 뭔지 알았다. 수없이 들어봤으니. 예정된 시간까지 정확히 1분이 남았다는 신호였다.
시간에 쫓기는 일은 일상이었다. 사건 현장에서는 늘 한발 늦을까 전전긍긍하며 시계를 곁눈질로 들여다 보곤 했다. 그만큼 익숙한 상황이었으나 지금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를 데려가."
"형!"
"그럼 되잖아. 일단 나를 잡아가. 성한빈은 건드리지 마."
장하오가 한유진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장전이 된 총은 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듯 아래를 향했다. 뒤에 선 성한빈이 옷자락을 붙잡았으나 멈추지 않았다. 다가서는 장하오를 보고 옆에 선 인턴이 벌벌 떨며 그를 따라 총구의 방향을 옮겼다. 불안한 눈동자는 장하오와 제 손목을 왔다갔다 옮겨가며 초 단위로 줄어드는 시간을 확인했다.
시키는 일을 해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시간이 되면 쏴야 하는가, 혹은 장하오 경감의 말대로 그를 센터에 잡아가면 되는 건가. 성한빈이 살아있는 이상 거짓 보고는 걸리고 말 텐데, 불이익을 받진 않을까. 수많은 걱정이 머리를 스쳤다.
방아쇠 위로 손가락이 올랐다. 한유진과 마주보고 선 장하오 경감. 30초도 남지 않은 시간. 이곳으로 향할 때부터 누구 하나는 죽게 되리라는 걸 알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누군가는 죽어야만 했다. 그게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서 그 누군가를 고를 권한은 제게 있는 것 같았다. 장하오는 아무도 죽일 생각이 없어 보이고, 한유진의 총은 장하오에게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아무도 죽지 않는다면 결국 이곳의 모두가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한유진의 말대로 센터를 속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불가능에 가까웠다. 1년 남짓 일해본 결과로 알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이곳에서 반드시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10초, 9초, 8초, 7초... 줄어드는 시간을 확인한 인턴이 고민 끝에 총구의 방향을 돌렸다. 장하오의 뒤쪽으로. 함께 일해온 센터 사람들을 죽이는 것보다 죄책감이 덜할 곳으로. 움직임을 눈치 챈 성한빈이 고개를 돌렸다.
탕-
총성이 울렸다.
잠깐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사색이 된 장하오가 총을 들고 있던 인턴을 바라봤다. 어둠이 내려앉아 잘 보이지 않음에도 총구가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성한빈을 향하고 있던 총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쿠당탕 굴렀다.
"...한빈아!!!"
"아아아아악!!!"
찰나의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하오가 급히 뒤를 돈 것도, 그와 동시에 팔목이 붙잡힌 것도, 뒤이어 들렸던 비명 소리가 성한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허벅지를 붙잡은 채 쓰러지는 인영을 본 것도.
"유진씨. 진짜 미안한데 수습 좀 부탁해요!"
그리고 다급하게 튀어나온 목소리와 함께 자신을 끌고 달리기 시작하는 성한빈. 장하오는 완전히 이해하진 못한 상황에 우선 성한빈이 이끄는 대로 달렸다. 뒤를 돌아보니 한유진이 허탈하게 웃으며 바닥으로 고꾸라진 제 동료를 챙기는 게 보였다. 따라오는 이는 없었다.
"한빈아. 지금 이게 무슨, 너 총은 또 어디서,"
"일단 따라와. 우리 아직 도망 안 끝났어."
올라왔던 계단을 빠르게 달렸다. cctv를 피해다니는 게 그새 습관이 되어 구석구석을 살피며 사각지대를 따라 이동했다. 두고 온 짐을 찾으러 다시 들어선 영화관에서는 두 주인공의 키스신이 스크린 가득 펼쳐지고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해피엔딩을 맞이한 듯 싶었다. 그 모습을 뒤로 하고 영화관을 나섰다.
등잔 밑이 어둡댔다. 성한빈은 전망대 건물과 연결된 호텔로 향하는 통로를 찾았다. 안타깝게도 호텔로 들어서는 문 앞에 달린 cctv는 피할 수 없을 듯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밤 늦은 시간에 몸이 달아 급히 호텔을 찾는 미친 커플이 한둘이겠냐고. cctv가 감시 중인 문 앞에 보란듯이 멈춰선 성한빈이 장하오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에게 속삭였다.
"나 두고 잡혀가서 죽으려고 했어?"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입술을 겹쳤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조금 당황했던 장하오도 금방 입술을 벌려 성한빈을 받아들였다. 우습게도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은 사람처럼 키스했다. 장하오도 제게 매달린 성한빈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안달 나는 기분에 이번엔 장하오가 먼저 성한빈을 떼어내 호텔 안으로 이끌었다. 체크인은 돈만 있으면 금방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도 뻔뻔하게 입을 맞췄다. 금세 키스에 능숙해진 혀가 입안을 가득 휘저었다. 살짝 뜬 눈으로 장하오와 시선이 마주치자 성한빈이 빙긋 웃었다. 장하오도 마찬가지였다.
"총은 언제 훔쳤어."
나무라듯 묻고선 입술을 짧게 물었다 놨다. 허리춤이 휑했다. 숨겨뒀던 총을 언제 빼간 건지.
"그것도 눈치 못 채면 어떡해? 보기보다 허술하시네요, 경감님."
그렇게 말한 성한빈이 장하오의 허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 익숙한 느낌에 알아챘다. 위험할까 싶어 성한빈을 제 뒤에 숨겨둔 사이 허리를 끌어안는 척 하며 슬쩍했다는 걸. 장하오가 헛웃음을 쳤다. 대담함이 특공대원보다도 더한 것 같았다. 총은 쏴본 적도 없을 거면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모텔에서 출발하기 전에 쏘는 방법만 한 번 알려준 게 다였는데.
"그렇다고 어떻게 거기서 총을 쏠 생각을 해... 한빈아."
"그럼 형 잡혀가는 걸 보고만 있어?"
"나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어."
"웃기지 마. 생각 있는 사람이 날 죽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해?"
성한빈이 장하오를 밉지 않게 째려봤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알림음이 들렸다. 장하오의 손에서 카드키를 뺏은 성한빈이 먼저 방을 찾아 나섰다. 뒤따라 내린 장하오가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문을 여는 순간까지 허리를 끌어안고 치대던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성한빈을 밀어넣고서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던져뒀다. 드디어 둘만의 공간으로 들어섰으니 참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벽에 바짝 밀어붙여 입술부터 들이밀고 보는 그 행동은 성한빈에 의해 저지당했지만.
"잠깐. 좀 진정해."
"왜애."
"자꾸 그렇게 내일 없는 사람처럼 굴래?"
장하오의 어깨를 밀어낸 성한빈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시간이 흐르고 있는 손목시계가 성한빈의 손길에 풀어져 간다.
"우리가 쪽쪽거리는 소리까지 녹음되게 하고 싶진 않다고. 이미 늦은 것 같지만."
"...너는 눈치가 너무 빨라."
"나도 처음엔 몰랐어."
풀어낸 손목시계를 장하오에게 건넸다. 손목시계 옆의 버튼을 딸깍, 누르자 삑-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녹음 기능이 꺼지는 소리였다.
"난 유진씨를 믿었을 뿐이야. 그렇게까지 도움을 줘놓고 이제와서 배신을 할 것 같지도 않았고, 센터 사람도 아닌 내가 있는 앞에서 시스템의 허점을 술술 부는 것도 이상했고..."
"...그렇다고 해서 손목시계로 녹음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진 못해. 보통 사람들은."
"형이 몸에 지니고 있는 게 손목시계 뿐이었잖아. 아니야? 혹시 안에 더 숨겨뒀어?"
성한빈이 장난스레 웃으며 장하오의 벨트를 붙잡았다. 장하오는 그 행동에 담긴 뜻을 이해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어 마른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너 같은 애 진짜 살면서 처음 봐."
"나도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야."
형 만나고 좀 이상해진 것 같긴 해.
큭큭 웃은 성한빈이 벨트를 붙잡은 채 장하오를 이끌었다. 낡은 모텔보다 훨씬 푹신한 침대에 올랐다. 신발을 벗어던지고 다시 입을 맞췄다. 능숙하지는 않은 손길이 벨트를 풀어냈다.
"날이 밝으면 자수할 거야. 내가 사람을 쐈다고."
장하오의 티셔츠를 벗겨내며 말했다. 장하오는 벗겨진 제 옷을 바닥에 대충 던져두고 성한빈을 끌어당겼다.
"내가 쏜 걸로 해. 초등학교 선생님이 쏜 것 보단 그게 나을 것 같으니까."
"음... 그건 맞지만, 형은 아무 잘못도 없잖아. 내가 쏜 건데."
"원랜 살인죄였어. 상해죄로 한결 가벼워졌는 걸. 충분히 만족스러워."
허벅지 위로 성한빈을 앉힌 장하오가 그의 옷을 벗겨냈다. 어린 아이가 그러하듯 옷을 빼내기 위해 만세를 하는 꼴이 아주 귀여웠다. 맨몸을 끌어안고서 짧은 입맞춤이 몇 번 오갔다.
"그래. 그럼 내일 같이 시스템이 잘못되고 있다는 걸 세상에 알리자. 형이 예정된 시간에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오류는 증명됐으니까."
성한빈의 그 말에 장하오가 그를 빤히 올려다 봤다.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응."
성한빈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장하오의 뺨을 문질렀다. 마주친 눈에 담긴 감정이 보였다. 아무래도 하루로 예정되어 있던 연인 놀음은 무기한으로 연장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사실 호텔에 들어서기 전에도, 영화관에서 첫키스를 하기 전에도 그런 생각이 진작 들긴 했지만. 어쩐지 장하오의 눈빛은 점점 짙어져 가는 것만 같다.
"네가 총을 쏘지 않았다면 프리크라임의 예측은 맞아 떨어졌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했어."
장하오가 말했다. 성한빈은 그 말을 곱씹다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형이 누군가를 쐈을 거라고?"
"응. 네가 조금만 더 늦었다면 아마 총에 맞은 건 너였을 것 같아서. 그걸 본 내가 제정신이었을 것 같진 않아."
총구가 향하던 방향은 잊을 수가 없다. 처음엔 정말 성한빈이 총에 맞은 줄 알았다. 만약 그게 정말이었고, 성한빈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뒷일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총을 쏜 놈을 잡아 죽였을 거다. 상상만 해도 분노가 치밀었다.
"만약 그랬다면 난 정말 살인을 저질렀을 거야. 꽤 정확한 예측이었어. 선빵을 날린 네가 변수였지만."
"내가 형을 살렸네."
"응. 맞아. 네가 날 살렸어."
장하오가 푸스스 웃으며 성한빈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세상은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기엔 복잡한가 봐."
"당연하지.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이렇게 끌어안고 몸을 맞대게 될 줄 첫 만남 때 예상이나 하셨어요, 경감님?"
성한빈이 장하오를 밀어 눕혔다. 푹신한 침대가 출렁였다. 장하오는 제 위에 올라탄 이를 끌어안고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못 했죠. 한 대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그러니까. 다음부턴 늦지 마. 나 시간 약속에 되게 예민하거든."
"응. 그래. 명심할게."
고개를 끄덕이는 장하오의 얼굴에 달콤한 미소가 걸린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의 미소인지라 혹여 동상이몽은 아닐까 걱정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짧지만은 않은 성한빈의 인생에서 제일 짜릿하고 벅차는 순간이었다.
이틀 동안 벌어진 그 말도 안 되는 일들에 장하오가 함께여서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장하오가 아니었다면 함께 쫓길 일도 없었긴 하겠지만, 뭐 어쨌든 결말이 이런 거라면 나쁘지도 않은 거 아닌가. 그런 철없는 생각을 하며 성한빈이 장하오를 마주 안았다.
The Criminal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