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빈웹진: cinéclub

끝과 끝

이래

 

"하늘과 바다. 둘 중 더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요?"

"저는 바다요. 하늘은 우주까지 연결되는 끝 없는 공간인데, 바다는 잠수하면 바닥을 짚을 수 있잖아요. 저는 끝없이 펼쳐진 것보다는 뭐든 끝이 있는 게 좋아요."

"그럼 배우님이 생각하시는 끝에는 뭐가 있나요?"

"영원이요. 이질적이지만 끝은 영원을 뜻한다고 생각해요."

"이유가 뭐죠?"

"끝까지 함께하는 것도, 끝을 맞이하는 것도 결국은 영원으로 묶인 마침표니까요."

 

 

 

__

안녕? 또 왔네.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곁에 다가와 가만히 앉는다. 별다른 말 없이 시선을 맞춘 채로 한참을 멈춰있었다. 고민 가득한 얼굴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으면 주춤 물러난다. 그 움직임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맨날 이럴 거면서 왜 와."

 

투덜거림에도 돌아오는 반응이 없다. 한숨을 푹 쉬고 체념했다. 잠들기 위해 눈을 감으니 그제야 일어서 얼굴을 살핀다. 그 시선에 눈을 다시 번쩍 뜨는데도 놀란 기색이 없다.

 

"진짜 뭐 어쩌자고."

"사과 깎아줄까."

 

머리를 넘겨오며 뜬금없이 묻는다. 매번 반복되는 루틴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그러던지. 대답했다. 생수 몇 병이면 가득 차는 작은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와 사각사각 껍질을 벗겨낸다. 먹기 좋게 자르기까지 해놓고 정작 입에는 넣어주지 않는 게 우스웠다.

 

", 내가 전에 얘기했던 거 있잖아."

 

덮은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꺼낸 말에 팔짱을 끼고 누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다.

 

"영화 얘기하는 거면 그만둬."

"또 그런다. 좀 들어보라니까."

"더 들을 것도 없어."

 

자리를 피하려는 몸을 잡으려 급하게 움직이다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괴로운 얼굴을 하고 다급하게 다가온 형이 입술을 씹으며 화를 낸다.

 

"조심하라고 했지."

 

말문이 뚝뚝 끊기는 게 화를 참는 거 같았다. 어기적어기적거리며 다시 일어나 부딪힌 곳을 주물럭거렸다.

 

"그러게 좀 들어줬으면 됐잖아?"

"성한빈."

"다큐 찍을 거야."

 

일그러진 얼굴이 묘해진다. 이해하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바닥의 먼지가 묻은 옷을 툭툭 털어 정리하며 다시 침대로 가 앉았다. 그 뒤를 따라 형도 다시 앉는다. 것봐, 결국 들어줄 거면서. 매번 실랑이를 벌인다.

 

"영화도 종류가 많잖아. 굳이 연기하지 않아도 돼."

"너 진짜 말 안 듣는다."

"형도 그런데 뭐."

 

냉한 공기가 감돈다. 정적을 메꾸려 괜히 헛기침을 반복했다.

 

"이런 식이면 더는 너 보러 안 와."

"그렇게 해. 안 말려. 어차피 형 마음 편해지자고 오는 거잖아?"

 

울컥. 감정이 올라와 눈을 부릅뜨고 맞받아쳤다. 무표정으로 자리를 뜨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문이 열리기 직전 손등에 꽂힌 바늘을 힘껏 잡아 뽑아낸다. 반동에 함께 떨어져 나간 맥박 장치가 요란한 소리를 낸다.

-

솓구치는 피를 막을 생각도 않고 방치했다. 3, 2, 1초가 흘러가고 병원 사람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가까워질 때, 문을 열고 나가려던 손이 방향을 틀어 고리를 걸어 잠근다. 도착한 병원 사람들이 문을 열기 위해 덜컹거리는 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넓은 등판이 그 모든 걸 등지고서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원망 가득한 눈이 한빈을 향하다 잠겼던 문을 확 열어젖힌다. 병원 사람들이 밀려 들어오기 직전, 들려오는 말에 한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나 좀 그만 죽여."

 

 

__

침대 옆 선반에 놓인 잘 썰린 사과가 방치되어 누런 빛을 띤다. 형이 오지 않은 시간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홀로 보내는 시간이 지루하기만 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뚝뚝 떨어지는 약을 보다가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지금은 음... 6? 모르겠다. 어쨌든 혼자 남겨진 병실입니다."

 

이렇게 찍는 거 맞나? 어떻게 담기고 있는지 확인할 줄을 몰라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걸리적거리는 장치들이 많아서 심각해 보이겠지만 제 얼굴을 보세요. 하나도 안 아파 보이죠? 보이는 것만 그런 게 아니고 진짜 안 아파요. 그냥 좀 과잉보호 당하는 중이라.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끝내고 녹화를 멈췄다. 분주히 움직이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 문 창문을 통해 보였다. 그 바쁜 움직임에 한빈의 병실은 포함되지 않는다. 1년 전 사고 후 잠적한 라이징스타. 이곳에선 그저 병명 없는 장기 입원 환자일 뿐이다. 사고 후유증이 사라진 지도 한참이지만 한빈은 퇴원을 거부한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미련한 형을 위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결국 산책에 나선다. 헐렁한 환자복 사이로 바람이 스쳐 펄럭거렸다. 벤치에 앉아 태양을 향해 손을 접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잠깐씩 가려지는 빛이 꼭 태양을 손에 넣은 것 같아 즐거웠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손에 들어온 게 태양이 아닌 달이 될 때까지 한참을. 밤공기가 서늘해졌을 때쯤 옆자리가 채워진다. 돌아보지 않고 인사했다.

또 왔네.

 

"나 미워?"

"."

"나도."

 

미운 게 형인지 나인지는 말 안 해줄 거야. 알아서 생각해. 중얼중얼 밉게 이어가는 말에도 끄덕거리기만 했다.

 

"춥다. 들어가자."

"조금만 더 있다가."

"여기 한참 있었잖아."

"역시, 다 보고 있을 줄 알았어."

 

억울하다. 나는 형 보고 싶어도 못 봤는데. 코를 찡긋거리며 부러 더 귀엽게 말했다. 한빈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은은한 미소를 띠고 머리칼을 넘겨주는 손이 다정했다.

 

"이제 들어갈래."

"한빈이가 앞장서."

 

형이 먼저 가면 안 돼? 한빈아. 아 알겠어 알겠어. 감시하는 것두 아니고 진짜. 칭얼거리면서도 뚜벅뚜벅 잘 걸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 당연한 듯 침대에 누웠다. 그럼 당연한 듯 따라 들어온 형이 갈변한 사과를 치우고 새로운 사과를 깎아 교체한다.

 

"여기 보고 인사해."

 

사과 깎기에 정신 팔린 틈을 타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순간 움찔하더니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짓는다. 저지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과를 깎아내려 가는 손이 져주겠다는 표현 같았다.

 

"찍히고 있는 건 맞아?"

". 나도 몰라. 띠링 소리 나면 녹화되는 거 아닌가?"

"허술해."

"어어? 나 이거 아직 찍고 있는데? 비꼬는 거 다 찍혔어 지금."

 

픽 소리를 내며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린다. 잘 깎은 사과를 한 쪽에 치워두고 이리저리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한빈을 가만히 바라본다.

 

"제목이 뭐야?"

"?"

"영화 제목 말이야."

"몰라. 성한빈의 인생?"

"모른다면서 말하는 건 뭐야."

 

큭큭 소리 내 웃었다. 한국인 특징이야. 형은 모르지? 두 손으로 덮은 이불은 팡팡 두드렸다. 웃을 땐 옆 사람을 치면서 웃어야 제맛인데, 옆에 앉은 사람이 맞아줄 거 같지 않아서.

 

"영화 다 찍으면 형 이름도 적어줄게."

"어디에?"

"엔딩 크레딧."

"출연자로 적어주게?"

"에이~ 아니지. 스페셜 땡스 투에 적어줄 거야."

 

뭐라고 적어주지. 무뚝뚝한 장하오? 집착 왕 장하오? 골라봐. 됐어. 그럼 내 맘대로 한다? 그러던지. 유치한 대화가 오간다.

 

"근데 형."

"."

"안 가봐도 돼?"

"나 갔으면 좋겠어?"

"아니, 저기 형 기다리는 거 같아서."

 

좀 전부터 병실 밖에 서 있는 등판을 주시하던 중이었다. 병원 사람들 중 한빈이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형이 알겠거니 싶어서. 한빈의 시선을 따라 문밖을 확인한 하오의 얼굴이 가라앉는다.

 

"."

 

? 뭐라고? 아냐, 내일 다시 올게. 알았어. 살짝 웃고 문밖을 나서는 뒷모습이 어쩐지 성이 나 보였다. 쿵 문이 닫히고 밖과 소리가 차단되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리지 않는다. 잠깐 스쳐 지나간 서늘한 눈빛에 숨죽일 뿐이었다.

 

 

얼굴 위로 넘실거리는 햇빛이 뜨거운데 발끝이 시린 느낌에 꼼지락거리며 눈을 떴다. 제대로 닫히지 않은 듯 살짝 열린 문이 보인다. ? 형이야? 불러도 대답이 없다. 고개를 돌려 확인한 사과는 어젯밤 썰어둔 그대로였다. 카메라를 집어 들고 천천히 움직였다. 발끝을 찍으며 걷다가 병원 로비도 괜히 한 번 비춰봤다. 이상하다. 아무도 없네? 밖으로 나가볼까 봐요. 정면을 비추며 걸었다. 밖으로 나가는 문 뒤로 들어오는 빛이 너무 밝아 눈을 찌푸렸다. 아오, 눈부셔. 나중에 영화를 보게 될 사람들의 눈을 위해 카메라 렌즈도 슬쩍 가렸다.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조금씩 앞으로 가는데 귀를 찢을듯한 이명이 스친다.

 

", 왜 이래."

 

밝은 빛에 점멸한 시야, 이명 속에 차단된 소리.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도와주세요! 소리치며 나가는 문을 찾기 위해 애썼다. 더듬거리던 손끝에 문고리가 잡혔다. 열린 문 너머로 기이하게도 바다가 펼쳐진다. 홀린 듯 나가려는 한빈을 누군가 붙잡아 끈다.

그 순간,

 

"성한빈!"

 

허억, ... 숨을 한꺼번에 내쉬었다. 꿈이구나. 괜찮아? ... 그제야 무릎 꿇고 옆에 주저앉아있는 얼굴이 보인다. 답지 않게 땀에 젖은 모습이었다.

 

"..."

", 나 여깄어."

"저 사람, 또 왔네."

 

한빈의 말에 고개를 돌린 하오의 눈이 사납게 변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말릴 틈도 없이 두 사람이 엉킨다. 둔탁한 마찰음은 덤이었다.

 

", 你想死吗"

"!"

"들어가."

","

"들어가 있으라고."

 

단호한 음성에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한쪽 뺨이 붉어져 멱살이 잡힌 남자가 한빈을 돌아보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마주친 순간 소름이 돋을 만큼의 서늘함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덜덜 떨었다. 들어가라는 하오의 외침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해코지 할 것 같아 뛰어 들어가 카메라를 들었다. 다 찍고 있어요. 형한테 무슨 짓 하면 신고할 거야. 그 말을 들은 남자가 몸을 뒤로 젖혀가며 웃는다.

 

"찍는다고? 누굴? , 아니면 나?"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고정하려 애썼다. 그럴수록 남자의 비웃음은 커졌다. 힘으로 남자를 끌어내는 형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는데, 더 자긴 글렀다.

 

 

__

불쾌한 꿈이 이어진다.

병실을 나서기만 하면 다른 차원으로 통하듯이 어느 날엔 산, 어느 날엔 바다. 어느 날은 텅 빈 곳이기도 했다. 어디선가 들어오는 빛을 따라 이끌리듯 걸으면 귀를 찢을듯한 이명이 들려오고, 한참을 괴로워하다 보면 헐떡이며 잠에서 깼다. 일주일이다. 형이 찾아오지 않은 지. 그 기간 내내 꿈속에 갇혀 살았다. 형을 찾아온 남자의 목소리가 이명 속에 섞여 들린다. 7번을 꽉 채워 꿈을 꾸던 날에 깨달았다. 그 사람, 나를 찾아왔구나.

 

 

"한빈아."

 

일주일만이다. 매일같이 반기던 인사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봤다. 늘 앉는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는다. 옆으로 몸을 비켜 자리를 만들고 침대 위를 툭툭 쳤다. 조금 망설이나 싶더니 올라와 앉는다. 밥 먹을 때 쓰는 책상을 끌어 올려 거치대를 만들고 카메라를 켜 고정했다.

 

"지금 찍게?"

". 근데 그냥 틀어둘 거야. 신경 쓰지 말고 얘기하자."

"?"

"들고 다니면서 찍으니까 그냥 브이로그 같더라고. 자연스럽게 담겨야 좋을 거 같아서."

"..."

"오랜만에 처음 만났을 때 얘기할까?"

 

늦게 온 게 눈치가 보이는지 군말 없이 알겠다고 했다. 앉은 몸을 눕혀 완전히 기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 그 분위기를 상기시키려고 눈도 감았다. 이러다 잠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편안했다.

 

"연극 동아리라고 뻔히 적혀있는데 맛집이냐고 찾아온 거 진짜 웃겼는데."

"네가 홍보 포스터에 음식을 잔뜩 그려 넣었잖아. 난 한글 읽을 줄 몰랐단 말이야."

"게다가 연기도 완전 못했어."

"그래서 매니저 했잖아."

 

맞아. 형이 우리 동아리 첫 매니저였어. 그만 웃어. 한 마디를 끝낼 때마다 웃음이 이어진다. 대학 동아리에서 만나 한빈이 배우의 꿈을 이룰 때까지 하오는 매니저를 자처했다. 대학교 동아리를 인연으로 원래 희망하던 진로까지 바꿔가며 한빈의 곁을 지켜준 하오에게 미안한 마음을 내비출 때마다 하오가 해주던 말을 떠올린다. 한빈아, 너를 따라온 건 내 선택이고, 그건 내가 한 선택들 중에 가장 잘한 선택이야. 그 말을 듣고 더이상 미안해하지 않았다. 형의 선택에 후회로 남고 싶지 않아 더 노력하는 걸 택했다. 낯설고 험한 생태계에서 의지할 곳이 서로뿐이던 둘이 의지를 넘어 사랑까지 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를 가든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았는데 그치?"

". 넌 내가 없으면 아무 데도 못 갔으니까."

 

나도 면허 있거든? 넌 조수석이 어울린다니까 한빈아. 또다시 티격태격. 그런데도 웃음은 잃지 않는다. 한참을 웃다가 고요해진 틈에 품을 빠져나와 마주 보고 앉았다. 어리둥절한 눈이 귀여워 웃었다. 너른 가슴팍에 무너지듯 기댔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다정하다.

 

"일주일 동안 많이 바빴어?"

"미안."

 

머리 위에 올려진 손을 붙잡아 내렸다. 좁은 거리에서 시선을 맞춘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가까운 거리 탓에 하오의 앞머리도 흔들거렸다. 떨리지 않게 목에 힘을 주고 형. 하고 부른다.

 

"장 매니저."

"왜 불러."

 

오랜만인 호칭에 픽 하고 웃는 형을 따라 웃지 못했다.

 

"난 형 없으면 아무 데도 못 가. 형도 알잖아."

"..."

"이제 그만 나도 데려가."

 

형이 할 일을 해야지. 순식간에 가라앉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하오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애써 매달려 봤지만 금세 옆으로 밀려난다.

 

"갈게."

", 제발."

"성한빈!"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턱 끝에 매달릴 틈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잔뜩 화난 표정을 짓고 흘리는 눈물에 어떤 감정이 담겼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형 이거 근무 태만이야."

"관둘게 그럼."

"저승사자도 마음대로 관두고 그런 게 돼?"

 

망자를 방치하는 저승사자가 세상에 어딨어. 어떻게든 분위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에는 한빈도 따라 울기 시작한다. 이 상황이 버거운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하오가 성큼 멀어져 문을 막고 선다.

 

"절대 안 돼. 아무 데도 못 가 너."

 

계속 찾아오는 그 남자도 저승사자 맞지. 내가 형 말고 그 사람 따라가길 원해? 한마디에 하오의 눈이 파란 불꽃처럼 번쩍인다. 거기까지 해. 목소리도 메아리치며 울린다. , 말을 더 꺼내기도 전에 선수 친다. 그만, 잠들어. 한 마디에 순식간에 눈이 감긴다. 의지와 상관없이 잠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본 형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엉망이었다.

 

 

꿈을 꿨다. 우리가 온전했던 마지막 순간이 재연된 듯했다. 기분전환을 위해 빌렸던 오픈카, 눈 앞에 펼쳐진 바다. 손을 뻗어 바람의 저항을 그대로 느꼈다. 예기치 못하게 쏟아지던 비에도 웃으며 함께 젖어 들었다. 빗소리에 묻힌 노랫소리는 목소리로 채우고, 먹구름에 가린 햇빛을 대신해 웃음으로 주변을 밝히며. 청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핸들이 꺾인 건 한순간이었다. 청춘을 싣고 달리던 차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웅웅 거리는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는 물속에서 겨우 의식을 차렸지만 안전벨트에 묶여 꼼짝할 수 없었다. 천천히 더 깊게 가라앉는 차 안에서 고요히 죽어가던 순간, 달칵 소리와 함께 몸이 떠오른다. 남은 힘을 끌어모아 한빈의 벨트를 풀어낸 하오의 손이 힘을 잃어 붕 떴다. 손을 잡기 위해 바둥거려보지만 발길질할수록 몸은 떠오를 뿐이다. 천천히 더 천천히. 깊은 아래로 멀어진다. 흘린 눈물이 물을 불어나게 한다고 착각할 만큼 울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차라리 따라 가라앉고 싶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몸을 분리해서라도.

멀리

더 멀리

끝과 끝으로 떨어진 끝에 시야가 점멸한다.

 

허억, 다시 병원이다. 처음 눈 떴던 그날과 같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땀과 눈물로 얼룩져 엉망이다. 밖은 해가 떠 밝은데 여전히 물속에 갇힌 듯 시야가 뿌옇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찾았다. 당장 얼굴을 보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아서. 녹화된 화면을 쥐 잡듯이 뒤진다. 촬영된 화면 속 하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__

흠뻑 젖어있던 몸이 다 마르고 한참 지났을 때, 다시 형을 만났다. 머리맡에 앉아 머리를 넘기는 형을 발견하고 꿈으로 착각해 가지 말라고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처음엔 영혼을 본다고 생각했다. 밤이 되면 찾아오는 모습과 몸이 안 좋아질 때면 급해 보이는 발걸음을 보고서 어느 순간 확신했다. 저승사자구나. 저승사자는 살면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더니 그래서 형의 얼굴을 하고 왔구나. 형이 너무 그리워서, 빨리 따라가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1년을 채우도록 곁을 지키기만 하다가 딱 걸린 거다. 내가 사랑하는 얼굴을 한 저승사자가 아니라 그냥 형이구나.

정성스레 깎은 사과도 먹여주지 못하고,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몸 하나 받쳐주지 못하면서 미련하게 곁을 지키는 바보 같은 저승사자. 이승에 남은 미련이라고는 나 하나인 남자. 웃을 일이 아닌데도 미소가 그려진다. 실성한 것 같기도 했다.

 

"형은 어딨어요?"

 

좀 전부터 문밖에 서 있다는 걸 알았다. 벌써 세 번째 보는 낯선 남자가 서서히 들어와 한빈의 앞에 섰다. 눈길도 주지 않고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 작동시켰다. 또 찍어서 증거 남기게? 남자가 비아냥거린다. 아뇨, 이게 마지막 순간일까 봐 기록하려고요.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그리곤 드디어 시선을 맞춘다. 내가 사랑하는 얼굴이 아니네. 그냥 무섭게 생긴 저승사자잖아. 남자가 기가 찬다는 웃는다.

 

"못 본 새 많이 덤덤해졌네."

"몰랐던 것도 아니니까요."

"뻔뻔하기까지."

"이제 저 데려가시게요?"

 

이거 안 보여? 네 형이 내 얼굴을 다 아작내놓고는 부탁을 하나 했거든. 안 믿기지? 나도 안 믿겨. 찾아오지 말라고 쌍욕이며 폭력이며 다 퍼붓더니 너 데려가지 말래. 그래도 돼요? 안되지. 넌 이미 때를 많이 넘긴 망자거든. 그럼... 걱정 마 지금은 아니야. 널 인도하는 건 무조건 장하오가 될 거야. 난 그냥 독촉하는 사채업자 뭐 그런 느낌인 거고.

 

"형이 절 데려갈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럼 어떡하시게요."

"네가 설득해야지."

 

뭐 이래...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 병실 안에 정상인 것이 없다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저승사자만 둘, 저승 문턱에 서 간 보는 인간 하나. 기가 허한 사람이라면 진작에 병이 났을 테다.

 

"장하오가 왜 저승사자가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러네. 장하오라는 것에만 집중해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듣고 보니 궁금하긴 했다. 죽은 지 얼마 됐다고 저승사자나 되는 역할을 받은 건지.

 

"신이 장난을 좀 쳤어."

"장난?"

"너를 좀 보게 해달라는 장하오 붙잡고 저승사자로 만든 거야."

 

잔인하지? 신이 뭐 그래요. 어떻게 그런 거로 장난질을 해.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괜히 눈앞에 선 남자를 노려봤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 선택은 장하오가 한 거니까."

"..."

"이승을 떠도는 악귀들이 왜 문제가 되는지 알지?"

 

미련, 원한. 그런 같잖은 감정에 묶여서 피해를 주고 다니니까. 따지자면 장하오도 악귀와 다를 게 없어. 발끈해 일어나는 한빈의 어깨를 말도 안 되는 악력으로 잡아 누른다. 고통 섞인 신음을 내는 한빈에게 계속해 말을 잇는다.

 

"넌 장하오의 가장 큰 미련이자 원한이야. 네가 산자로 남아있는 이상 장하오는 영원히 이승을 떠돌겠지."

"이거, 놔요."

"경고하는 거야. 눈앞에서 서로의 소멸이 보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해."

 

어느 순간 뾰족하게 나온 손톱으로 한빈의 목 언저리를 파고든다. 흠집이 난 자리에 피가 고여 흐른다. 신음을 참느라 꽉 깨문 입술도 피가 샌다. 목이 졸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주변의 모든 흐름이 멈춘다.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던 약물도, 목을 타고 흐르던 피도.

 

"손대지 말랬지."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물에 빠져 젖은 꼴을 하고 온몸에 시퍼런 불이 붙은 이질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제야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사실은 처음부터 느끼던 두려움이 형을 보고서야 드러난다. 내 가장 큰 두려움은 형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화내지 마. 경고만 하는 거야."

", 떼라고."

 

순식간에 날아들어 충돌했다. 벽에 처박히기 직전 남자는 사라졌다. 흥분한 장하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들썩이는 어깨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몸을 적신 물기가 한빈에게도 스며들었다.

 

"왜 이렇게 젖었어."

"한빈아."

"춥겠다."

 

한빈아, 나는 못 해. 흐르듯 주저앉는다. 한빈도 덩달아 함께 주저앉았다. 왜 이렇게 떨어 형. 머리칼을 타고 떨어지는 물이 바닥에 고여 웅덩이를 만든다. 앉은 자리를 천천히 다 적셨다.

 

"난 몇 번이고 잠겨 죽어도 돼."

"..."

"너를 죽게 하는 선택지는 나한테 없어."

 

, 그냥 이대로 소멸할까. 이렇게 아파서야. 어떻게 살 수 있냐고. 다 젖은 머리를 털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어디서부터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도 제대로 정할 수 없음에 괴로워해야 했다. 그날 그 물속에서 우린 함께 가라앉았어야 했나.

 

 

카메라를 재생시킨다. 움츠려 잠든 모습을 담으려고 해봐도 텅 빈 침대만 녹화된다. 이래서는 영화를 만들 수 없겠는데. 괜히 입 안을 우물거렸다.

 

"한빈아..."

 

? 깨어난 하오의 부름에 성큼 다가섰다. 옆에 누워. 잠깐만 나 이거 좀 고정하고. 카메라? . 아직도 포기 못 했어? . 장르를 바꿔서라도 찍을 거야. 다큐 안 찍게? 공포로 바꿔야겠어. 나중에 찍은 거 보면 나만 허공 보고 말하고 있을걸. 킥킥 웃음소리가 섞인다.

 

"여행 갈래?"

"어디 가고 싶은데."

"바다."

 

가자, ? 칭얼거렸다. 한동안 고민하는 듯하더니 작게 허락이 떨어진다. 의미 없이 꽂아 둔 바늘을 천천히 뽑아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손등 위 작게 생긴 구멍에도 마음이 쓰이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괜찮아. 안심시키듯 말했다. 카메라도 챙기고, 옷도 멀끔히 갈아입었다. 한빈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하며 따라나섰다. 병실 문은 활짝 열어뒀다. 떠난 것을 광고라도 하듯이.

 

 

노을이 지기 직전의 하늘은 채도 낮은 푸른빛을 내고 바닷물은 그늘져 색이 짙었다. 파도가 지나가 젖은 모래를 밟고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은 왜 죽으면 하늘나라로 간다고 할까?"

 

바닥에 떨어진 조개 하나를 주워 하늘에 비춰보다가 물었다. 글쎄. 성의 없는 대답에 고개를 휙 돌리니 카메라를 들고 있는 형이 보인다. 뭐야, 언제부터 찍고 있었어? 조개 주울 때부터. 카메라 렌즈에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잠시 주춤하더니 웃으며 아예 줌인까지 해버리는 모습에 덩달아 웃었다.

 

"잘 나와?"

"완전."

"거짓말할래?"

 

초점을 잡는 손을 콱 깨물었다. 입 벌리며 아픈 척은 다 하면서 물린 손은 빼지 않는다. 자국이 선명한 손을 끌어와 잡고 달렸다. 어어,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달리다 카메라를 떨어뜨린다. 질퍽한 모래에 꽂힌 카메라 앵글이 당황한 둘의 모습을 담는다.

 

"갑자기 달리면 어떡해에."

"나름 감성 있고 좋은데? 이대로 두자."

 

카메라는 그대로 두고 잘 나오는 위치를 잡아 나란히 앉았다. 어느새 밤이다. 주변을 걷던 사람들도 사라지고, 시원치 않게 깜빡이던 가로등도 빛을 다해 꺼졌다. 그 덕에 달과 별이 선명했다.

 

"왜 하늘로 간다고 하는지 알겠네."

 

매일 볼 수 있고, 어디서든 볼 수 있고, 예쁘고. 손가락을 펼치며 이유를 설명했다.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옆에선 중국식 숫자세기라며 기특해한다. 찌릿 노려보자 알겠다며 달래듯 손을 잡아 왔다.

 

"아쉽다."

"뭐가?"

"우리 얘기, 영화로 찍고 싶어서 각본도 쓰고, 감독님도 섭외하면서 노력 많이 했는데."

"하면 되지."

"꼭 내가 연기하고 싶었단 말이야."

"나랑 찍을 것도 아니면서."

 

그 소리에 픽 웃었다. 그래도 나름 로맨스 영화인데 형이 연기한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웃기겠어. 툴툴거리면서도 아니라는 말은 안 하는 게 한빈을 더 웃게 만들었다.

 

"영화로 만들어주세요."

"뭐 하는 거야?"

"이런 말 해두면 찍힌 거 보고 들어주지 않을까?"

"그럴듯하네."

 

한참을 떠들고 나면 정적이 생긴다. 모래 묻은 손을 맞잡고 말없이 주물거렸다. 목에 남은 상처가 파도가 모래를 적시는 타이밍에 맞춰 아려왔다. 이제 떄가 됐다고 눈치라도 주듯이. 하늘과 바다를 번갈아 한 번씩 눈에 담았다. 분명 더 반짝이는 것은 하늘인데도 가득한 미련이 바다로 향한다. 내가 형의 미련이라면 내 미련은 뭘까. 아마 그때 그 바다가 아닐까. 그게 아니면 끝내 놓쳐버린 손이려나.

 

"나는 하늘로 가기 싫어."

"..."

"바다로 데려가 줘."

 

어깨에 기대 눈을 맞췄다. 시선을 피하듯 허공을 보다가 손등을 두드리자 마지못해 바라본다. 젖은 눈에 별이 가득했다. 버티지 못하고 떨어지는 눈물마저 별똥별 같았다. 난 이거면 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같은 거 못하면 어때. 바다 끝에는 형이 있을 텐데.

 

"다행이다."

 

끝이라는 부정적인 단어에 형이 있어서, 영원이라고 바꿔 말 할 수 있어. 우린 영원이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손등에 이마를 묻었다.

 

"사랑해."

 

카메라 앵글 속 한빈의 모습이 흐려진다. 날이 밝은 뒤 밝아진 하늘과 맞닿은 바다만 가득 담긴다. 끝으로, 영원으로.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진 둘의 모습을 담은 카메라만 남는다.

 

 

 

 

 

 

달칵-

, 됐다.

꽤 오래 쓴 다이어리를 썰어둔 사과 밑에 감춰뒀어요. 형이랑 찍은 사진도요. 아마 깎아놓는 사람이 없어 상했을 테니 가장 먼저 발견하겠죠? 그러라고 그냥 뒀어요. 도움이 될 거예요. 아 참, 정말 영화로 제작된다면 꼭 스페셜 땡스 투 적어주셔야 해요. 영상 어딘가에 제가 말한 적 있을 거예요.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부디 제 소원이 이뤄지길.

그럼 안녕.

 

 

Special thanks to

- 집착 왕 장하오.

- 照亮彼此的你和我

 

성한빈씨의 병실 침대 밑, 숨겨진 쪽지에 있던 장하오 씨의 요청 문구로 대체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미련을 두고 갑니다.

어느 끝에 남을 우리가 여전히 함께일 수 있도록.

 

照亮彼此的你和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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