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 Chaos, Love
이자몽
Space, Chaos, Love 패신저스 (2017)
THE STARSHIP AVALON
우주 수송선 '아발론' 호
DESTINATION
THE COLONY WORLD OF HOMESTEAD ll
목적지
식민 행성 '터전 ll'
STATUS: AUTOPILOT
항법 모드: 자동 주행
COMMAND RING
CREW HIBERNATION QUARTERS
통제 센터
승무원 동면실
CREW: 258
승무원: 258명
PASSENGERS: 5,000
승객: 5,000명
725번 동면기
章昊, Zhāng Hào, 장하오
냉동 수면 상태로 항해를 이어가던 중, 에너지 실드에 의지한 채 운석 지대를 돌파하다가 아발론 호와 거대 운석이 충돌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꿈에도 모른 채, 동면 중인 장하오를 두고 고장 난 동면기는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곧 체액 순환 주사가 그의 팔을 찌르자, 그는 마치 새로 태어난 듯 가슴을 위아래로 들썩이며 큰 숨을 들이마시었고. 심박 안정화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정신이 제대로 들기도 전에, 제 눈앞을 가득 채우는 큰 화면 속 홀로그램 승무원에게 동면에서 깨어난 걸 환영한다는 인사와 함께 컨디션 체크를 받았다.
승무원은 혼란스러운 건 지극히 정상이라며, 정신을 차려보려 애쓰는 장하오를 다정한 말로 다독였다. 뭐, 프로그래밍 된 다독임보다는 동면 상태로 120년을 있어서 그럴 거라는 말이 그의 정신을 깨우는 데에 더 효과적이었지만 말이다.
120년이라니... 장하오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여기가 어디냐고 다급하게 외쳐 물어봤지만, 짜인 프로그램대로 대답하게 되어있는 승무원에게 돌아온 답변은. 본인이 홈스테드 사의 특급 수송선인 아발론 호의 승객이란 것과, 얼마 뒤면 새 보금자리인 식민 행성 터전 ll 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것. 그게 현재 본인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전부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좋은 소식도 있다는 사실. 식민 행성에 도착하기 전, 4개월 동안은 끝내주는 럭셔리 여행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알게 모르게 손목에 채워진 ID 팔찌는 다양한 음식을 즐길 때와, 재밌게 놀 때 사용할 수 있다고 했고. 그 외에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는데 이 모든 걸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다고 했다. 좋은 소식을 듣고 나서야 옅은 미소를 띠는 장하오였다. 그는 그렇게 승무원이 안내해 주는 객실로 향했다.
객실은 아주 크진 않지만 혼자서 지내기엔 적당한 크기였다. 7평 정도 되어 보였다. 4개월 동안 이 방에서 지내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식민 행성에서 필요할 지식들도 배우게 될 거라는데 장하오에게 배정된 파트는 음악교육학과 기술 엔지니어링이었다. 아발론 호에 탑승하기 전 자신이 해오던 것과 식민 행성에서 필요한 것을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았던 간절한 마음이 닿았나 싶은 배정 결과라 장하오는 만족스럽단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댔다.
그는 깔끔하게 샤워를 마치고, 준비되어 있던 옷들 중에 제일 괜찮아 보이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검은색 긴 팔 셔츠에, 흰 바지. 거기다 신발까지 구두로 바꿔 신기 완료. 순간, 그래봐야 우주선 안이고 처음인데 너무 멋 부렸나 싶어 거울 속 제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장하오는 아무리 그래도 첫인상이 중요하지~ 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마저 매만졌다. 그렇게 객실 밖으로 나섰다.
***
객실 밖으로 나온 그는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중앙 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한 쪽에 있는 AI 로봇을 발견하고. 그것 에게 대놓고 뭐부터 해야 하냐 물었다. 로봇이 말하길 첫날은 이주자 교육을 위한 교육실에 먼저 가야 한다고 하길래 장하오는 곧장 교육실에 갔다. 그곳에 저 말곤 아무도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들었지만 일단 빈자리 아무 곳에나 앉아 큰 화면 속 홀로그램 승무원이 해주는 승객 용 교육 프로그램을 듣기 시작했다. 가만히 듣다 보니 역시 이상하다는 생각에 승무원에게 다들 어디 있냐고, 왜 안 오는 거냐고 물었는데. 이 뭣 같은 프로그램 속 승무원은 아발론 호의 승객이 몇 명인지, 승무원이 몇 명인지만 반복해 대답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대체 뭐지? 모든 상황이 납득 안되게 흘러가는 거 같다고 생각하던 장하오는 설마 혼자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고. 뼛속까지 소름 돋는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거구나 싶을 정도로 전신에 소름 돋은 상태로 교육실을 뛰쳐나와 우주선 내부를 미친놈처럼 뛰어다녔다. 당장이라도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싶어서.
그는 두 발로 갈 수 있는 곳이란 곳은 전부 다 돌아다녔다. 없다, 없었다. 사람 형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심장이 쿵쾅대다 못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상태가 된 장하오는 아까 중앙 홀에 나오자마자 이용했던 무엇이든 알려줄 것만 같은 AI 로봇이 떠올라 덜덜 떨리는 두 손과 두 다리를 힘겹게 이끌며 그곳으로 향했다.
질문해 봐야 소용없을 거라는 직감이 왔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람이 있을만한 곳을 물었다. 곧바로 AI 로봇이 알려준 곳을 가봤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AI 로봇에게 다시 한번 애원하듯 물었다. 선장, 승무원, 승객, 아무나 진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만나게 해달라고. 애석하게도 AI 로봇은 선장이 승객을 직접 만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안되는 게 어디 있어!? 혼자 외롭게 살다 늙어 죽게 생겼는데! 식당을 가도 문제가 있으면 사장님이 나온다고!”
장하오가 안되는 게 어디 있냐며 화내다시피 말하니까, 그제서야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AI 로봇이 드디어 선장의 위치를 말했다. 위치를 알면 뭐 하나~ 알려준 위치대로 가봤더니 관계자만 들어갈 수 있는 일반 승객 제한 구역이었다. 장하오는 이게 지금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당장 로봇을 부숴버리고픈 충동이 들어 참느라 혼났지만 얘라도 있어야 뭘 물어보기라도 하지 싶어서 분노를 더 꾹 참았다. 결국 얘도 입력된 대로 출력할 수밖에 없는 AI 로봇일 테니까.
그는 가만히 서서 자신에게 처해진 현실을 부정하다, AI 로봇이 알려준 앞으로 남은 운행 일자 등을 알 수 있다는 천문대로 향했다. 천문대가 말하길, 약 90년 뒤에 도착한다는데... 출발한 지는 30년이 됐다고 했다. 왜 인지 과거에 한국인 친구에게 배웠던 단어가 장하오의 머릿속에 팟 하고 떠올랐다. 좆.됐.다. 이보다 현재 상황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던 건지, 미처 생각을 못한 건지, 아니면 아발론 호에 탑승하기 직전까지 한국에서 살다 와서 저도 모르게 그런 건지. 그는 그 어떤 단어보다 먼저, 본능처럼 떠오른 단어가 ‘좆 됐다.’ 라는 것에 스스로도 살짝 놀라 움찔했다.
일찍 깨어나도 한~참 일찍 깨어났다. 그는 일단 지구에 있는 홈스테드 기업에 이 사실을 하루라도 빨리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AI 로봇을 통해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런데, 행성 간 메시지를 광 레이저로 전송해도 지구까지 19년이 걸리고. 빨라야 55년 뒤에 회신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기 시작했다. 돈은 돈 대로 날리고... 정말 최종적으로 좆 된 것이다.
터덜터덜 힘없이 중앙홀을 걷는데, 웬 바에 바텐더가 서 있어서 사람인가 싶은 맘에 부푼 기대를 안고 가까이 다가가보니. 바텐더는 아쉽게도 안드로이드였다. 하체가 아주 튼튼한 쇳덩어리 그 자체라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안드로이드가 말하길 자신의 이름은 잭이라고 했다. 멀끔한 정장 차림에 백발의 할아버지 안드로이드. 장하오는 잭을 자주 찾아오게 될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뭔가 할아버지 생각도 나고 좋았다.
***
그는 며칠간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다시 잠들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해봤다. 다시 동면기에 들어가 누워도 보고, 승무원 동면실을 찾아가 두꺼운 문을 부숴보려고 망치질, 드릴질도 해보고, 애꿎은 AI 로봇에게 화풀이도 해보고. 하지만 그 모든 행동들이 전부, 싹 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는 화도 나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 늙어 죽게 생긴 마당에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진 것이다. 그래도 너무 외로울 때면 잭을 찾아가 위스키나 한잔 달라고 해 마시며 하소연했는데 하루는 잭이 말했다.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 때문에, 억울하고, 정신없고, 힘들겠지만. 그 일을 당장 해결할 수 없다면 잠시 외면해보자고. 당장이라도 지쳐 쓰러져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든 전력으로 해결해보려고 애써봐야 더 다칠 뿐이라고. 일단 우주선 내에 있는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며 지내다 보면 좋은 생각이 나거나,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테니 그렇게 하는 건 어떠냐는 그럴듯한 조언도 했다. 어쩌면 그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이었다. 할아버지 나이대의 안드로이드라 그런 가? 연륜에서 오는 지혜가 느껴져 그런 것도 프로그래밍이 되나 신기하단 생각을 한 장하오였다.
장하오는 잭이 말한대로 행동해보기로 했다. 아발론 호의 객실 중 가장 좋은 객실 문을 열어낸 다음 넓은 침대에서 잠도 푹 자고, 우주선 내 이런저런 시설들도 자유롭게 이용하고, 게임도 하고, 영화도 보고, 맛있는 식당들도 가보고. 그렇게 막무가내로 몇 달을 지내보았다. 그럼에도 자신을 괴롭혀오는 외로움과 절망감만큼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 가기만해서 자주 괴로움을 느껴야 했다.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았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다는 건 누군가에겐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잭의 말이 맞았다. 그럴만한 힘이 없는데 전력으로 애써봐야 더 다치기만 한다. 어떻게 든,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간절히 죽고 싶다는 해선 안되는 생각만 들었다. 다시 생각해도 슬픈 일이지만, 사실 그는 한번 진짜 죽으려는 결심을 하고 우주 유영 체험을 나가 목숨줄을 끊어 자살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줄이 쉽게 안 끊어져서 실패하고 돌아왔다. 죽는 것 하나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라니 실패하고 돌아오자마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며 한참을 비참해했다. 자살 시도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장하오는 실성한 사람처럼 돌아다니다, 승객 동면실에서 우연히. 정말 우연히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성한빈, 대한민국 서울에서 온 댄서였다. 흰 피부와 긴 속눈썹이 인상적인 예쁘게 생긴 사람. 장하오는 바로 알았다, 처음 그를 본 순간부터 자긴 완전히 반해버렸다는 걸. 과거,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고 살아왔던 본인이지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감정을 느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AI 로봇에게 달려가 성한빈에 대해 물으니, 로봇이 승객 프로필을 검색해서 성한빈에 대해 보여주었다.
613번 승객 성한빈. 그는 과거에 능력 있는 유명 댄서이자 안무가였다. 첨부되어 있는 파일 속, 자신감 넘치다 못해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자기소개 영상 속 모습과. 댄서, 안무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영상들을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아발론 호에 탑승하게 된 이유도 말해주었는데, 자신은 차 사고로 허리 부상을 입어 눈물나는 재활치료를 통해 일상생활은 가능 해졌지만. 다치기 전처럼 춤을 출 수는 없는 상태가 되어 활동을 쉬게 되면서 깊은 우울증에 빠졌었고, 그러다가 지인을 통해 아발론 호 프로젝트를 알게 되어 미래엔 분명 자신의 허리를 고칠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춤을 출 수 없는 상태로 계속 살아가 봐야 의미가 없을 거 같다는 판단 하에. 아발론 호에 탑승하게 됐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음침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장하오는 다시 또 몇 달간 그의 영상들을 무수히 돌려봤다. 춤을 따라 출 수 있을 만큼, 자기소개 영상을 보며 다음 멘트를 먼저 내뱉을 수 있을 만큼. 성한빈은 보면 볼수록, 알아갈수록 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장하오는 직접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가기 시작했다. 잭에게도 고민을 털어놨다, 운명을 만난 것 같 같은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몇 달을 고민했다고.
***
옳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았다, 다시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깨우고 싶었다. 장하오는 기어이 도서관에서 얻어낸 동면기 매뉴얼을 보고 성한빈을 긴 잠에서 깨운 뒤 객실로 도망쳤다. 그러고는 미친, 내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하며 횡설수설하더니.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중앙 홀로 걸어 나갔다.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 순간이었다. 그는 동면기에서 깨어나 비몽사몽한 성한빈과 마주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려 하는 제 자신이 역겹다고 생각한 장하오지만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아무렇지 않게 성한빈을 대했다.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하기엔 너무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한국 사람...?"
"아, 한국 사람은 아닌데 한국말 어느정도 할 줄 알아요. 장하오입니다."
"성한빈입니다. 뭐하시는 분 이세요? 그쪽이랑 저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한 명도 안 보이는 거 같은데... 혹시 누구 더 보셨어요? 승무원도 안보이고.”
"승객입니다."
"승무원들은 한 달 먼저 깨어나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우리 둘 뿐이죠? 이상하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잠 들어있어요, 여기 나 혼자 있었어요."
"네??? 왜… 어쩌다?"
역시 성한빈도 자신에게 처해진 현실을 쉽사리 받아들이진 못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믿지 않고 싶어 했다. 둘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도, 목적지에 89년 뒤에 도착한다는 것도, 다시 동면기에 들어가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도. 그는 혼잣말로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부정하며 비틀거리다 본인 객실로 돌아가더니 긴 시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장하오 또한 객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제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버린 것 같다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몸살 걸린 듯 앓아 누운 것이다. 둘이 다시 마주하게 된 건 성한빈이 깨어난 지 2주 정도 지났을 때 즈음이었다.
성한빈은 객실에 처박혀 대체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절망하기를 수십 번, 목 놓아 울기를 수백 번 하고 나서야 조금 제정신이 들었다. 정신을 좀 차리고 깨어난 첫날 만났던 남자를 문득 떠올렸다. 장하오라고 했나? 그 남자 말로는 저보다 1년이나 먼저 깨어나 있었다는데, 그동안 무슨 수로 버틴 걸까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자긴 깨어났을 때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복합적으로 들어 기분이 묘해진 성한빈이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나 봐야겠다 싶어 오랜만에 객실 밖을 나섰다.
장하오... 그 이름이 혀끝에 맴돌았다. 중앙 홀로 나와 걷다 보니 웬 바가 있었고, 그곳에 장하오로 추정되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성한빈은 사람이라 곤 두 명이 전부라고 장하오가 그랬으니까,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바텐더는 사람이 아닌가 보다 추측하며 그들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바텐더와 먼저 눈이 마주친 성한빈은 왼손으로 쉿 하며, 오른손으로 장하오의 등을 톡톡 쳐 불렀다.
"저기..."
"어! 성한빈, 맞죠?"
"네, 하하...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장하오 옆에 앉았다. 술도, 장하오가 마시고 있는 것과 같은 걸로 한잔 달라고 부탁했다. 바텐더는 자신을 잭이라고 소개했다. 성한빈은 안드로이드도 이름이 있구나? 잭... 잭 다니엘에서 따온 잭인가? 별 의미 없는 추측을 해가며 술잔을 받아 들었다. 몇 모금 마시고 나니, 잔뜩 긴장해있던 성한빈의 몸과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
"저보다 한 살 많네요...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럼 뭐라고 불러줄까요?"
"뭐... 한빈? 한빈아?"
"한빈이라고 부를게 그럼. 나도 너가 편한 대로 불러줘."
둘은 서로의 나이를 듣고, 호칭 정리까지 마친 뒤. 각자의 아주 어릴 적 얘기부터, 아발론 호에 어쩌다 탑승하게 되었는 지까지 길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예상보다 가치관이나 대화 주제가 잘 맞아서 수다가 끊이지 않을 수 있었다. 한빈은 적당히 마신다고 마셨는데 너무 오랜만에 마신 술이라 그런지 대화의 막판에 반쯤 졸았다. 하오는 그런 한빈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나섰다. 한빈은 대답할 새도 없이 그에게 번쩍 들렸다, 것도 공주님 안기 자세로.
"내려... 내려줘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말 편하게 한다며~"
"내려줘, 하오형."
"그럼, 볼 뽀뽀 한 번만 해줘."
하오는 둘 다 술도 먹었겠다, 술기운을 빌려 사심 섞인 농담을 던졌다. 한빈이 뭐라고 대답할까 내심 궁금해하면서도 괜히 말했나 싶어 농담이었다고 말하려 했는데, 한빈의 얼굴이 제 얼굴 쪽으로 훅 가까이 올라오더니 볼에… 정말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랐다, 진짜 해줄 줄은 몰랐는데. 볼에 입술이 닿는 순간 촉촉한 감촉이 그대로 느껴져 부끄러워진 하오는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간질간질함에 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바람에 한빈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괜히 딴청 피우는 척 고개를 돌려 먼 곳을 쳐다보기도 했다.
"얼굴이 아주 불타오르네 형?"
"..."
"왜? 이거 아니야, 형이 원한 거?"
"......"
"뭘 모르네 이 형~ 더한 것도 할 수 있는데, 나."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 일단 지금은 너무 피곤해, 좀 잘래. 안 내려줄 거면 얼른 방에 데려다 줘!"
한빈은 하오의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으며 말했다. 하오는 그를 객실까지 데려다 주며, 이 친구 예상은 했지만 보통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실망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오히려 좋다고 대답할 예정인 하오는. 한빈을 침대에 곱게 눕혀주고 자기 객실로 돌아와 오지 않는 잠에 들기 위해 한참을 뒤척였다. 그가 자신을 깨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날,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진심으로 바라건 대 오늘처럼 만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하오는 여기서 뭘 하며 지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며 침울해하는 한빈을 데리고 혼자 주야장천 다니던 이곳저곳을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같이 운동도 하고, 춤도 추고, 춤 대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혼자서만 하던 것들을 둘이서 하니까 확실히 더 재밌었다. 활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는 행복해하다가 종종 한빈 없이 보내온 날들이 떠오르면, 살짝 눈물이 나올 거 같았던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눈에 힘주어 참고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즐겼다. 우주선에서의 생활을 즐기는 하오를 볼 때마다 한빈은, 만약 자기가 혼자 깨어났더라면. 절대로 하오처럼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둘이 함께 임에 여러 번 안도했다.
한빈은 그가 이끄는 대로 우주선 내를 활보하며 즐기는 게 싫지 않았다. 과거, 댄서이자 안무가로 살았을 때는 일이 있을 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하루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매일 다른 안무를 외우고,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주위 사람들이 말하길 너 정도면 혹사라고 할 정도로 과하게 일했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소용없게 되었을 때 더 크게 좌절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평생 춤을 제대로 못 춘다는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기에, 그가 아발론 호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날아갈 듯이 기뻐했던 건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친구나 가족들이 그가 아발론 호에 탑승하겠다고 하는 걸 적극적으로 반대할 수 없었던 것도 그가 사고 이후 너무 오랜만에 희망찬 미래를 상상하며 행복해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행성에 정말 가고 싶었는데...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는데. 한빈은 무의식 중에 계속 그런 생각을 하는지, 다시 동면기 속에 들어가 동면에 빠지는 꿈을 여러 번 꿨다. 악몽 같은 꿈에서 깰 때마다 진짜 다시 잠에 들 방법이 없는 걸까 애꿎은 이불만 쥐고 흔들어 댔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안타까운 진실이 무기력함만 배가시켰다. 그렇게 홀로 몸부림치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날이면 늘 수영장을 찾았다. 우주에서 수영이라니 뭔가 낭만적이기도하고, 허리에 무리도 안가서 더할 나위 없었다.
한빈은 물속에 들어가 동그랗고 커다란 창밖으로 보이는 새까맣고 끝없는 우주를 바라보다, 유유히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다 보면. 신기하게도 기분이 한결 나아져서 수영장을 좋아했다. 잡념을 떨쳐버리는데 수영장 끝에서 끝까지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기도 했고. 하오는 이런 한빈을 가끔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걸어볼까 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둘은 둘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각자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오의 식사 데이트 제안에 서로 가지고 있는 옷 중 제일 멋있는 옷을 골라 입고. 한빈이 제일 좋아하는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하오는 웨이터 로봇에게 음식도, 술도 가장 좋은 걸로 만 내어달라며 넉살 좋게 웃었다.
"형, 오늘 멋있게 입었네~ 누구 보여주려고!"
"너 때문이야~"
"이럴 때는 너 때문이 아니라, 너 보여주려고 멋있게 입었다고 하는 거야~"
"너 보여주려고 입었어! 한빈도 예쁘다."
완벽했던 식사 시간이 끝나고, 배를 문지르며 몹시 배불러 하는 한빈을 하오가 우주 유영 체험관으로 데리고 가며 말했다.
"한빈나, 나 믿지?"
한빈이 뭘 하려고 그러나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우주복으로 갈아입은 뒤, 몇 번의 절차를 거쳐 우주선 바깥으로 향했다. 손을 꼭 잡고 걸어 나가, 맞잡은 두 손을 절대 놓지 않은 채 여전히 믿기 힘들만큼 경이로운 광경을 바라보며 우주를 유영하는데. 둘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둘은 우주선 내부로 돌아오자마자, 누가 먼저 달려들었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달려들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우주복을 벗기 전이라 서로 가까이 닿을 수가 없는데도 어떻게 든 키스하겠다고 잡아당기는 꼴이 웃겼다. 결국 힘겹게 입을 맞추다 말고 둘 다 우주복을 벗더니 한빈의 객실로 향했다. 그 뒤론 평생 기억에 남을만한 일들이 그 곳에서 벌어졌다고만 말해두겠다.
처음이 어렵지, 한번 한 이후론 참아왔던 욕망을 분출하듯 눈이 맞을 때마다 뜨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사귀자는 형식적인 말과 그래라는 대답은 안 했지만 둘은 서로를 연인 관계라고 정의 내렸다. 세상의 마지막 두 남자 커플이라니... 흥미롭지 않나? 누가 글로 좀 써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한빈이었다.
원래 계획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둘이지만, 둘 다 살면서 이정도로 외롭지 않았던 적은 처음인 것 같다고 느꼈다. 한빈과 하오는 함께 라면 무엇이 든 해낼 수 있을 거 같다는 말을 서로에게 자주했다. 하오의 비밀이 계속 유지되었다면 이 예쁜 관계가 수면 아래에서 좀 더 오래 이어졌을 텐데, 진실을 애써 숨기려 할수록 그 진실은 수면위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낳는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
불행은 늘 자연스레 다가와 갑자기 덮쳐온다. 이번 불행은 한빈의 생일날, 바에서 프러포즈하려던 하오에게 마치 예정되어 있던 일처럼 자연스레. 하지만 갑작스럽 게 불쑥 덮쳐왔다. 예전에 잭에게 생각없이 다 말했던 게 문제였을까? 아니다, 애초에 한빈을 깨우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잭이 하오가 반지를 준비하러 간 사이, 꽁꽁 숨겨왔던 비밀을 한빈에게 전부 다 말해버렸다. 1년 전 이날이 기억나는데, 하오가 당신을 만나는 걸 무척 고대했다고. 한빈이 대체 어떻게 고대할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 잭은 하오가 한빈을 깨울지 말지 몇 달 동안 고민했었다는 것과 그 결정이 인생에서 제일 힘든 결정이었다고 말했단 것까지 다 말해버렸다. 그때, 하오가 돌아왔다.
"응? 뭔 일 있었어? 왜 그렇게 쳐다봐?"
"형이 나 동면기에서 깨웠어?"
"...아니, 그래. 맞아. 내가 깨웠어."
"진짜야?! 형이 왜…"
"그러니까 그게, 나도 안 그러려고 했는데! 하…"
"왜, 왜 그랬어? 나한테 가까이 오지마 형. 우욱, 울렁거려."
"한빈, 제발... 내가 다 설명해 줄게. 어? 제발."
"오지마! 따라오지 마 절대. 단 한 발자국도."
진짜라고? 형이 진짜 날 깨웠다고? 차라리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지 라고 생각한 한빈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기분 나쁜 소름이 끼치다 못해, 토할 것 같이 속이 울렁거려서 죽을 뻔했다. 그러다 어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바에서 뛰쳐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객실로 가, 직접 말한 것도 아니고 전해 듣게 만들었다는 배신감에, 본인을 깨운 게 하오였다는 사실까지 더해져. 참아지지 않는 분노에 휩싸인 한빈은 그대로 몸을 떨며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들을 던져댔다. 그는 정말 한순간 모든 걸 잃어버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춤을 못 추게 되었을 때만큼 심장이 산산조각 찢겨지는 듯한 고통이 동반됐다. 괴로운 날들이 계속됐다. 너무 마음이 아프지만, 하오를 바라보는 한빈의 시선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하오는 속상하게도 웃음을 잃어버린 한빈과 홀에서 마주칠 때마다, 대화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에, 투명 인간이 된 기분이 들 정도로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한빈이 야속해도 계속해서 시도했던 것 같다. 하오는 그러기를 며칠째, 참다 참다 서로 간에 대화는 안되니까 들어주기 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한빈이 수영을 하고 있을 때 방송실에 가 우주선 전체에 들리게 방송했다.
[한빈나, 나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거 알아. 근데 제발 듣기만 해줘... 부탁이야. 나 진짜 오랫동안 너무 외로웠어. 제 정신 아니었어… 그러다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기 시작해서, 죽으려고 했는데 그날 너를 봤어. 네가 날 구원해준 거야.]
[한빈이 네가 당당히 너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 행복하게 춤을 추는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너의 모든 걸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게 됐어.]
[반짝반짝 빛이 나는 너를 볼 때면, 지옥 같았던 현실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곤 했으니까. 혼자 깨어난 다음 처음으로 내게 살아갈 이유가 생긴 거야. 너를 깨우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넌 내가 너무 싫지…? 하지만 난 널 잃고 싶지 않아... 진심이야.]
"...닥쳐. 제발 그냥 닥쳐 좀! 그 입 다물어! 형이 뭐라고 말하든 나한 텐 그냥 다 변명 같아. 안 듣고 싶어. 날 깨운 이유? 그딴 거 하나도 관심 없어… 장하오. 하오 형. 네가 내 인생을 빼앗아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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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해주십시오 제어 센터가 재부팅 중입니다
하오가 방송을 마치고 객실로 돌아가 멍하니 누워있는데, 객실 내 홀로그램 화면과 전등이 싹 다 꺼졌다 켜졌다 했다. 전에도 몇 번 노이즈와 소음이 생겼던 적은 있었지만 자동 경고 방송까지 나오면서 꺼졌다 켜지다 하는 건 처음이었다. 화면에 새빨간 경고 문구가 떴다.
Error: 진단 시스템 오류???
.
.
Error: 중대 결함 발생???
이 문구들을 마지막으로 아예 화면이 꺼졌다. 당황해서 밖으로 나와보니 다른 기계들도 하나, 둘씩 고장 나고 있었다는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식당에 있는 로봇부터, 조식 자판기, 엘리베이터, 중앙 홀의 AI 로봇까지. 그냥 그런 가 보다 했던 것들이 어딘가 살짝 맛이 가서 그런 것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심각한 표정으로 걱정하던 그때, 놀라다 못해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의 한빈이 머리가 땀에 젖은 건지, 씻다 말고 나온 건지, 수영하다 나온 건지 잔뜩 축축한 모습으로 가운만 걸친 채 하오 쪽을 향해 달려왔다. 뭐지? 표정이 많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픈가? 싶었던 하오는 자기도 덩달아 놀라서 괜찮냐 물어보려고 입을 뗐는데. 물어볼 틈도 없이 한빈이 제 품으로 안겨와 가만히 등을 두드려줄 수밖에 없었다. 느낌상 사과를 받아주러 온건 아닌 거 같은데, 몸을 너무 떨고 있어서 열이라도 나나 걱정이 된 하오가 머리도 짚어봤지만 열은 없었다.
“어디 가지마…”
“가지마? 나 여기 있어. 아파?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괜찮으니까 말해봐.”
“나 사람을 봤어.”
“뭐? 사람? 어디서?!”
“근데, 죽은 것 같아…”
“죽었다고…?”
사람을 봤다는 곳은 다름 아닌 수영장 옆 사우나 안이었다. 한빈은 그동안 본인 객실 내 욕실에 미니 사우나 기능이 있어서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우나 시설은 이용하지 않았었는데. 수영이 끝나고 공용 사우나는 얼마나 잘 되어있나 구경이나 해볼까 해서 들어갔다가 본 것이었다. 문이 열리는 곳 오른쪽 벽면에 있었다. 함께 그 곳으로 가 사체의 상태를 확인해보니, 육안으로 봤을 땐 겉모습이 깨끗하고 죽은 지도 얼마 안 되어 보였다. 놀라운 점 또 하나, 한빈은 놀라서 뛰쳐나오느라 미처 제대로 못 본 것 같지만 사체는 사우나 복장이 아닌 승무원 복장을 하고 있었다.
승무원 명찰을 보니 조 라는 남자 승무원이었다. 왜 사우나에서 발견된 걸까 유추해보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또한 오류 때문에 동면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사우나를 간 걸까… 애초에 깨어났을 때부터 몸 상태가 안 좋았는데, 우주선 내를 돌아보다 쓰러진 게 아닐까 라는 추측만 해볼 뿐이었다. 우선 간단히 묵념을 하고, 죄송하단 말을 연발하며 조의 승무원 복을 뒤졌다. 왼쪽 바지 주머니에선 승무원 카드가 나왔고, 오른쪽 주머니에선 꾸깃꾸깃한 종이 뭉치가 나왔다. 구겨진 종이 뭉치를 펼쳐보니 우주선 내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경우 실시해야 하는 행동들이 예시와 함께 번호순으로 빼곡히 적혀져 있었다. 아마 조가 깨어나자마자 상황 파악을 한 후, 제한 구역에 들어가서 가져온 게 아닐까 싶은 엄청난 정보였다.
일단 우주선 자체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 하오는, 조의 승무원 카드를 들고 제한 구역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조를 한 쪽에 곱게 눕혀 놓고 한빈에게도 같이 가겠냐고 물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며 혼자 어디 가지 말라고 또 한 소리 들었다. 둘은 문제를 직접 알아보기 위해 제한 구역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조의 카드로 제한 구역에 들어가 여기 저기 뒤져보니, 메인 컴퓨터에 승무원이 접근할 수 있는 자료 만으로도 꽤 많은 걸 알 수 있었는데. 아발론 호에는 각층 데크에 설비함이 16개씩 있으며, 이 설비함 들에 선체 진단 자료가 들어있는 스마트 패드를 넣으면. 비상시 날아간 선체 데이터들을 수동으로 연동할 수 있다고 나와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다른 문제들을 수리하기 위해서도 날아가기 전 상태의 온전한 데이터들이 필요했다. 하오는 복구부터 해야 뭘 해도 하겠구나 싶어 한빈과 각자 구역을 나누어 연동시키고 돌아오기로 했다.
연동을 무사히 끝마치고 돌아온 둘은, 메인 컴퓨터로 우주선 고장 과정을 쭉 리스트 업 해 확인해봤다. 잘은 모르지만 연쇄적으로 오류가 일어난 것 같아 보였다. 2년 전에 운석 충돌로 우주선 전력에 과부하가 발생하며, 단 몇시간 만에 17개의 시스템이 나갔고. 그때 하오의 동면기도 고장이 난 것 같았다. 하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한번 한빈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한빈은 말없이 하오의 손을 꽉 잡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둘은 우선 데이터 연동시키려고 각층을 오르내리느라 몸이 너무 힘드니까 한 두시간 정도 쉬다가 다시 보기로 하고, 하오는 객실에서. 한빈은 다시 수영장에서 아까처럼 수영하진 않고 유유히 떠다니며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던 중 또 우주선 내 모든 불이 꺼졌다. 전원 자체가 꺼져버린 듯했다, 곧 중력 소실이 이어졌다. 하오의 몸이 공중에 붕 떠 벽에 부딪혔을 때, 한빈이 수영하고 있던 물 또한 공중에 거대 물방울을 형성하며 둥둥 떴다. 그렇다면 그 수영장 안에 있던 한빈은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물속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한빈은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 온 힘을 다해 허우적거렸는데, 숨이 안 남아 죽을 것 같을 때쯤. 정말 다행히도 전원이 다시 들어왔다. 그 틈을 타 하오와 한빈은 서로를 찾았다. 둘은 다시 제한구역으로 돌아가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까 전에 복구한 데이터들로 위기 분석을 해 보니, 뭔 놈의 분석 결과가 정확한 원인을 찾아서 고치지 못하면 둘은 물론이고 잠들어 있는 다른 승무원들과, 승객들까지 죽게 생긴 결과였다. 하오는 진짜 온 우주가 우릴 상대로 장난치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어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우주선을 고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게 당장 피부로 느껴질 만큼 급박한 순간들이 연속으로 벌어지고 있다 보니, 조의 카드로 선체 이상을 고칠 대체 부품들과 매뉴얼들을 챙겨 엔진실로 향했다. 하오가 엔진실에서 문제가 있어 보이는 부품들의 교체를 서둘러 마치고, 최종 연결을 위해 손잡이를 내렸는데 경고음을 동반한 자동 경고방송이 계속해서 울려 댔다. 골이 아플 정도로 울려대서 한빈이 메인 컴퓨터로 가 다시 확인해 보니, 원자로가 들어있는 곳의 문이 닫혀 있어 온도가 식지 않아서 그런 거였다. 직접 나가서 닫힌 문을 열어야만 했다. 하오는 엔진실로 돌아온 한빈에게 본인이 직접 나가서 열겠다며 뒤를 맡겼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다 괜찮을 거야. 나 이런 거 잘해~ 한빈."
"꼭 무사히 돌아와야 돼 형, 나 형 없으면 안 돼."
하오는 빠르게 우주복으로 갈아 입고, 절차를 거쳐 우주로 나간 다음 닫힌 문을 열기 위해 미친듯이 문 열기를 시도했다. 중력이 없는 우주이다 보니 여는 과정이 정말 쉽지 않았다. 한빈도 하오의 무전을 통해 타이밍 맞춰 손잡이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문이 자꾸만 닫혀서, 하오가 그 앞을 떠날 수 없게 됐다. 잠깐이라도 문이 열려 있도록 잡고 있어야 했다. 엄청나게 위험한 시도지만 일단 손잡이를 꼭 내려야 하기에 이 방법밖에 없었다. 하오가 다 괜찮을 거라고 한빈을 설득시켰지만, 하오의 목소리 떨림을 느낀 한빈이 형 죽는 꼴 볼 바엔 그냥 같이 죽겠다며 못하겠다고 연신 외쳐 댔다. 그럼에도 하오는, 우리가 포기하면 우주선이 폭발해버릴 텐데 그걸 그냥 두고 볼 순 없다며 5000명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우리가 쥐고 있으니 어떻게 든 꼭 해내야만 한다고 끈질기게 굴었다.
"한빈나! 당겨!!! 지금 당겨야 돼!!!"
환기 성공
재부팅 과정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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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오는 살다 살다 처음 느껴보는 말도 안 되는 열기에 우주복이 다 녹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물론 운 좋게 우주복이 녹지는 않았지만, 헬멧 전면부분에 기스가 살벌하게 남고. 뒤로 발사되듯 밀려나면서 우주선과 연결되어 있던 목숨줄이 끊어졌다. 그때 무전에서 하오를 부르는 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오는 듣자마자 생각했다, 성한빈. 역시 내 구원자.
"후, 한빈… 줄이 끊어졌어,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못 돌아갈 거 같아."
"뭐? 이 형이 뭐라고 하는 거야! 미쳤어?! 내가 데리러 갈게! 조금만 기다려, 형. 얼른 갈게."
산소 레벨 위험수치 우주선으로 즉시 복귀하세요
우주복 내 산소가 부족해지면서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진 하오는, 데리러 온다는 한빈의 말을 끝으로 정신을 거의 잃어갔다.
"우리도 90년 후에 무사히 깨어나, 운명처럼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다급하게 우주복을 챙겨 입고 바깥으로 나온 한빈은 천만다행히 단숨에 하오를 찾아냈다.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아서 그가 있는 위치를 조준한 다음 거의 날아갔다. 그리고 한 번에 잡았다. 문제는 하오가 숨을 안 쉬는 거 같아 보였다. 힘겹게 우주선 내로 하오를 데려온 한빈은 그를 데리고 곧장 의료실로 향해 진단 및 치료 기계에 눕혔다. 그런데 이 망할 놈의 기계가 자꾸 하오 죽었다는 말만 반복했다. 죽긴 누가 죽어, 아직 안 죽었다고. 한빈은 울먹거리며 소리쳤다.
"그럼 소생시켜, 다시 살려내. 죽긴 왜 죽어? 형이 왜 죽냐고. 흐으… 흑."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기계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보니, 승무원 권한으로는 더 높은 퀄리티의 처치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빈은 얼른 챙겨두었던 조의 승무원 카드와, 카드 뒷면에 새겨져 있는 ID 번호를 빌려 할 수 있는 모든 처치를 동원했다. 복합적인 처치를 권하지 않는다는 안내 멘트가 나오긴 했지만 그런 안내 멘트 따위는 한빈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람 죽게 생겼는데 그런 거나 따질 때가 아니었다. 처치 란 처치는 다 했다. 그런 다음 한빈이 할 수 있는 건 간절한 기도뿐이었다. 그저 두 손 모아 기도하며 형이 깨어나기 만을 기다렸다. 눈을 떴다. 한빈의 하오형이 기적처럼 눈을 떴다. 한빈은 울컥해하며 기계가 빨리 열리길 기다렸고, 둘은 기계가 열리자마자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하오는 자신에게서 빠져나갔던 온기가 한번에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또, 따듯하다고 생각했다. 입 맞추는 내내 한빈의 눈은 눈물 범벅이 되어 버렸다.
둘은 하루 정도 휴식을 취하고, 조의 장례를 간단히 치러주었다. 조의 장례가 끝난 뒤 하오가 한빈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의료실로 데려갔다. 로봇 의사 명령 모드에 들어가면 보존 및 중지라는 기능이 있는데, 그걸 사용하면 모든 생체 활동을 정지시켜 치료 기계를 동면기 삼아 잠들 수 있다고 했다. 근데 하나뿐이지 않냐는 한빈의 말에 하오는 당연히 네가 들어가서 잠들어야 한다고 하더니, 새로운 행성에서 깨어나도 자길 잊지만 말아달라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원래 혼자였으니까 혼자여도 괜찮다는데, 외로움 엄청 타는 인간이 퍽이나 괜찮겠다~ 하는 생각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괜히 인상이 써졌다. 거기서 다시 네 꿈을 펼치며 사는 게 자기 행복일 거라고 말하는 하오를 한빈은 도저히 두고 갈 수가 없었다.
“형 때문에, 형이 없는 세상을 상상도 할 수 없어졌는데. 내 전부가 되어놓고 어디 혼자 살려고! 나 발견해줘서 고마워, 형."
"사랑해, 한빈아."
"내가 더 사랑해 형. 많이 사랑해."
"아니야~ 내가 더 더 더, 많이 많이 많이 사랑해! 흐하하."
말로 다 표현 못 할 혼란함 속에서도 둘은 결국 서로를 선택했고, 그 선택에 더 이상의 후회는 없었다. 88년 뒤 그들이 함께 만들어 놓을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깨어날 다른 승객들의 반응이 좀 궁금하긴 하지만, 모쪼록 아발론 호에 탑승한 모두가 새로운 터전에서 각자의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길 바라며 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