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넷에 모솔 탈출했더니 애인이 로봇인 건에 관하여
이택
int main( )
{
Prologue
Hello, World!
어쩌면 신께서도 인간을 이렇게 창조하신 게 아닐까. 성한빈은 눈을 가늘게 떠 모니터를 빼곡하게 채운 코드들을 살폈다. 스크롤을 내리며 신중히 마지막 검토를 마친 한빈은 만족스러운 듯 뿌듯한 웃음을 짓고는 깊게 심호흡했다. 이어 관절에서 소리가 뚝뚝 나도록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스트레칭하고 얼음이 녹아 싱거워진 아메리카노를 빨아들였다. 긴장감에 가슴팍이 빠르게 뛰었다. ‘그’를 탄생시키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민의 시간을 거쳤던가.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해 낸 창조물에 숨을 불어넣기 위해 마우스를 움직였다. 드디어 자신의 역작이 태동할 시간이었다.
[ ACTIVATE ]
‘그’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저보다 살짝 큰 훤칠한 키에 평범한 흰 실험복마저도 패션으로 만드는 뛰어난 골격. 날카로운 턱선, 도톰한 입술과 높은 코, 꼬리가 날카롭게 빠진 두 눈, 진한 눈썹과 적갈색 머리카락까지. 그의 능력은 미남의 표본이 되는 아름다운 외관은 물론이거니와 기능 면에서는 구태여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는 다른 인공지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명석하고 혁신적이었으며 그 어떤 로봇보다도 혹독한 환경에 대한 적응이 뛰어났다. 거기에 더불어 개인비서로서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터였지만, 주인의 결정에 대한 의견이나 대안을 제시할 만한 추진력과 결단력은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성한빈의 최고의 작품이자 조수가 될 것이 분명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 성한빈은 자신이 속한 세계적인 우주탐사 전문 기업 W1으로부터 TF323에 관한 연구를 위임받았다. 교차하는 불길 모양의 푸른색과 선홍색 고리를 가진 오묘한 자색빛 행성은 발견 초기에 인류가 정착할 수 있는 새로운 골디락스 행성으로 발표되어 세간으로부터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곳에 연구기지가 세워지고 자원추출 플랜트가 건설된 후 성한빈은 최고 연구 책임자로 임명되어, 핵 깊숙한 곳으로부터 추출되는 광물을 분석하고 희소금속과 신원소를 발견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었다.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지자 그의 선임과 동료들은 입을 모아 팀을 꾸릴 것을 권유했다. 성한빈은 이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W1 소속 직원으로 한정하지 않고 모집 대상을 완전한 공란으로 둔 공고문을 만들었다. 새롭게 발견된 유사지구에서, 그 성한빈과 함께할 기회라니. 다양한 분야의 연구원과 학자들은 물론, 영재학교 학생부터 성한빈 자신보다 훨씬 오래 업계에서 활동한 전문가까지, 국적과 나이, 경력을 무관하고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발견과 혁신의 최전선에서 과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머리도 외모도 천재라고 불리는, 아이돌만큼이나 인기가 자자한 대한민국 국적의 잘생긴 남성 우주연구원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한빈의 팀원이 되고자 줄을 섰다.
그러나, 한동안 원서를 검토하고 지원자들을 면접하던 성한빈은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아주 치명적인 한 가지 단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지원자들은 하나같이 소위 머리 좋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진취적이었으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데에 강한 열망이 있었다. 길고 지루한 반복적인 작업이라도 기꺼이 감행할 투철한 의지를 내비쳤고, 그러한 단조로운 작업이 결국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미개척지를 선두로 밟은 것을 의미 있게 여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프로젝트가 요구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에 있어 흠이 존재했다. 성한빈은 그것을 고민 끝에 ‘무조건적인 굳건한 헌신’이라 명명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거대하고 황량한 행성,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몰두해야 하는 프로젝트. 아무리 재사용할 수 있는 로켓 부품이 증가하였다고 한들,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TF323까지 이동하는 데에 소모될 많은 시간과 운용비용을 고려했을 때 임무 완수 이전에 친구나 연인, 가족을 만나기 위해 고향 행성을 방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수십 년이 될지도 모르는 기약 없이 긴 기간 동안 정든 집과 기존의 일터를 떠나있어야 했다. 크루원으로 이름을 올리는 순간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그것이 개인의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지라도 포기해야만 할지도 몰랐다.
지원자들은 모두 프로젝트에 대한 강한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막상 일이 닥쳤을 때는 자신이 외면하고 떠난 것들을 그리워하며 고립감에 힘겨워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성한빈은 돌연 윗선에 팀원 모집 공고를 삭제해달라고 일렀다. …솔직히, 자신도 지원자들과 별반 다른 처지는 아니었다. 사실은 무서웠다. 그러나 일개 팀원으로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될 누군가와 그 프로젝트의 리더가 지니는 책임감의 무게는 판이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W1의 젊은 천재 연구원 성한빈은 ‘난 이게 익숙한 내 일이라 괜찮지만, 다른 사람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와 같은 선한 마음 때문에, 모든 것을 짊어지고 혼자 감내하기로 했다.
…적어도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 봤겠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돌 쪼가리와 자료들을 보며 반드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다짐한 것은 애석하게도 TF323에 도착한 지 겨우 일주일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꼬박 이틀 밤낮을 연구소 부지 내 널브러진 광물 자원들만 조사하는 데에 쓴 한빈은 다음 날 손가락을 까딱할 힘조차 없어 급히 수액을 맞고 하루를 통으로 침대에서 보냈다. 씨이… 나약한 인간의 몸뚱어리 같으니라고. 흑흑. 24시간 내내 연구원의 생체 반응을 감지하는―아니, 어쩌면 연구원이 아득히 먼 타지에서 과로사하는 것만은 방지하는!―연구소의 센서망이 없었더라면, 한빈은 뒤통수에 커다란 혹이 난 채로 깨어났을지도 모른다. …못 깨어났을 수도 있고. 그럼 울며 겨자 먹기로 고마워해야 하나. 엉엉.
강도가 높은 일은 익숙했다. 카페인 음료에 둘러싸인 채 멍한 눈으로 키보드를 친 날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다가 밤도 새고, 키보드에 코피를 흘려 물티슈로 벅벅 닦다가 덜 비운 캔을 그 위에 도로 엎은 날도 꽤 된다. 그렇지만 왜 이번 역경만은 참을 수가 없었냐 하면,
‘나 여기서 늙어 죽는 거 아니야?’
행복한 삶과 안정적인 노후는 중요하니까. 그런 다소 귀여운 걱정.
꽃다운 나이 스물넷. 한빈은 우주를 사랑하는 만큼 인생에서 즐기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고향 행성 지구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 말이다. 봄에 벚꽃놀이하러 간다거나, 겨울에 스키를 타러 간다거나,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서점에 가고, 무한 리필 고깃집에 간다거나 하는 소소한 일상이 그리웠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일이 더 빨리 마무리된다면. 자신을 도울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그러면 조금이나마 빠르게 복귀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자신 혼자서 머물러야 하는 기간을 절반 이하로,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단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한빈은 결심했다. 팀을 결성하기로. 달리 그리워할 생활환경이나 인간관계가 없으며, 지식과 과학의 발전에 대한 것 이외의 욕구마저도 없는, 자신과 마찰 없이 원만히 잘 지낼 수 있는 비서를 찾기로 했다. 그것이 몇 개월 전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
성한빈은 안드로이드가 숨 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비록 금속과 전기로 만들어진 그였지만, (가히 신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한 잘생김만 제외하면) 인간과 외형상의 모습이 같았다. 단순히 맨눈으로는 인간과 구별하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특별한 장치를 쓰지 않고서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처럼 생겼을 뿐, 인간이 아닌 로봇이었다.
그는 한동안 눈을 감은 상태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사람이 깊게 잠들기라도 한 것처럼 평온했다. 한빈은 그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
기다림 끝에 존재가 눈을 슬며시 떴다. 그는 잠시 한빈의 눈을 응시하다가 마치 어두운 곳에 있던 사람이 빛에 적응하려는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한빈은 움직이는 그의 얼굴을 감상하며 ‘와……’ 따위의 감탄사를 읊조렸다.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그 얼굴. 호기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진행 상황을 묻던 선후임들이 늘 불신 가득한 볼멘소리를 던졌지만 한빈이 계속 부정했던, 많은 시간을 들여 완벽하게 성한빈의 이상향에 부합하게 설계한 얼굴. 인간적인 느낌을 더하기 위한 양쪽 귓불의 피어싱, 눈 아래와 뺨 등 얼굴에 별자리처럼 수놓아진 다섯 개의 점까지. 인간이 아니라고는 믿기 힘든, ‘그’.
성한빈은 이상형이 없었고, 여태까지 누군가와 여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 문장을 읽은 독자가 순간 비웃었다면, 나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말하고 싶다. 참으로 안일하고 깜찍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우주비행사가 나오는 고전 영화들처럼… 정말 혹시, 자신이 만들어낸 안드로이드와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그 개체가 이러한 모습이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들고야 말았다.
장하오, 자신의 완벽한 비서가 될 그를.
“어음,” 한빈은 그를 제작하는 동안 늘 해보고 싶었던 그 말, 자신이 한평생 직접 내뱉은 적 없었던 이름과 호칭을 입에 올렸다. “하오 형?”
장하오가 입술을 움직였다. “한빈.”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한빈은 장하오의 프로그램에 자신의 유전학적 정보와 일생 기록을 데이터화하여 각인시켰다. 굳이 자질구레한 설명을 거칠 필요 없이, 그가 프로젝트의 목적과 상세한 임무 내용은 물론 성한빈 자신의 생활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게끔 만들기 위해서였다. 최고의 궁합은 서로에 대한 이해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쌍둥이처럼 완벽한 합을 위하여 성한빈이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장하오의 정신연령을 자신보다 한 살 많게 설정한 데에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맹세컨대! 절대로절대로 이상한 사심은 아니고, 주변에 한국인이라고는 누나나 동생만 있는 나머지 형이라는 호칭을 써볼 일이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연상이 취향이라서가 절대 아니라, 그냥 그래서 그런 거라고. 그렇게 성한빈은 합리화했다.
“안녕, 형!”
피곤함에 찌든 채 통화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마주하고 말하다니. 으아, 이런 거 진짜 너무 오랜만이야. 아잇 근데, 나 목소리 왜 이래? 제가 느끼기에도 어색한 톤 때문에 무척이나 멋쩍었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자신 앞에 서 있는 이 안드로이드는 주인의 반응을 파악하는 기능이 뛰어났기에 이런 사사로운 심리 변화 따위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통성명이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처음이니까 말할게. 우리는―”
“한빈.”
“?!”
장하오가 다가와 성한빈의 양쪽 볼을 감쌌다. 당황한 나머지 눈만 커다랗게 뜬 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이런 접촉을 어째서 한 거지? 시스템상 불가능할 텐데?! 순식간에 좁혀든 거리에 숨이 멈췄다. 당혹스러웠다. 하려던 말은 이미 머릿속을 벗어나 블랙홀에 쏙 빨려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잊혔다. 겨우 몇 센티미터만을 사이에 두고 장하오는 성한빈의 얼굴 구석구석을 천천히 훑었다. 그러다 마치 정교하게 세공된 장치를 살피듯 성한빈의 얼굴을 좌우로 기울이며 엄지로 매만졌다.
한편, 상대방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긴 건 성한빈도 마찬가지였다. 장하오의 얼굴엔 전선이나 금속의 미세한 흔적조차도 없었다. 그가 내뱉는 숨은 자신의 것보다 온도가 미묘하게 낮았을 뿐 인간의 숨결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자신을 마주하고 서 있는 존재의 시작은 단 한 줄의 코드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살아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었다. 이럴 수가, 초현실이라는 단어는 이런 것을 뜻하는 게 분명해……. 그렇게 성한빈이 한창 감상에 빠져있던 때였다. 장하오가 중얼거렸다.
“눈이 예뻐.”
“……뭐라고?”
“한빈 눈.”
장하오는 뒤로 주춤대면서 멀어진 한빈을 끌어당겨 말했다.
“예쁘다고. 한빈 눈에 별이 있어.”
그는 한빈의 촘촘하고 긴 속눈썹을 천천히 쓸었다. 뭐, 뭐야. 왜 이래. 그의 조심스러운 손길에 이끌려 한쪽 눈을 감은 한빈은 장하오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설계한 안드로이드는 이런 충동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내 눈에 별이 있다니. 뭔 이런 뚱딴지같은 소리를. 아니, 별이 뭔지 몰라?! 창밖에 널리고 널린 게 별인데! 저길 봐, 지금도 혜성이 날아가고 있잖아! 대체 왜 그런 플러팅용으로나 쓸 법한 멘트를―
“코도 예뻐. 토끼 같아.”
“뭣, 토끼???”
2차 공격에 당황하여 이내 얼굴에 붉게 홍조가 오른 한빈은 한 손으로 코를 감싸며 다시금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뭔가, 뭔가 잘못됐어! 마치 발사된 로켓에 심각한 결함이 발견된 것처럼 머릿속에서 새빨간 경고창이 점멸하며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여전히 장하오를 앞에 둔 채 당혹감에 눈알을 도르르 굴리던 참이었다. 장하오가 바짝 다가가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입술도…”
“형 저기, 잠, 자자자잠깐만! ZH-725 시스템 셧다운!”
…하, 하마터면 키스 당할 뻔했다…….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걸까? 완벽했던 계획에 거대한 문제가 생겨버렸다. 너무너무, 너무 큰 말도 안 되는 문제가.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한빈은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장하오를 바라보았다. 제 뺨을 향해 손을 뻗으며, 눈을 감은 채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기울이던 조금 전 그의 모습. 으으으… 작게 신음하던 한빈은 이마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성한빈 님, 안면의 일시적인 혈압 상승을 감지했습니다. 적외선 온도감지센서가 탑재된 연구실의 인공지능이 읊었다. 씨, 나도 알거든?! 확 그냥. 흐엉엉.
펼쳐놓았던 두꺼운 전문 서적에 얼굴을 마구 비비며 한빈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정확하게는 정리하려고 노력했으나 지난 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그래왔던 것처럼 또 실패했다. 설마 이런 일로 강제로 종료시키게 될 줄이야… 괜스레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아주 당연하게도) 평온해 보이는 장하오를 힐끔 보며 한빈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 뭐야… 뭔데. 왜 업데이트도 안 먹히는 건데. 이게 말이 돼?! 내 정보를 동기화시켰을 뿐인데 자의식이 생기기라도 한 거냐고. 인공위성이 공중분해 되며 생긴 우주 쓰레기처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리저리 튀었다. 이내 몸을 일으킨 한빈은 한 손으로 아리는 안구 주위를 꾹꾹 눌러 주무르며 키보드를 몇 차례 두드렸다. 그제야 장하오는 말로 표현하기 부끄러운 자세(…)를 벗어나 초기의 정자세로 돌아갔다. 하, 분명 모든 게 완벽했는데 대체 왜……. 진정하려고 그리도 노력했건만 다시 귀 끝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건 원래의 계획에 있지 않았다. 전혀. 성한빈은 장하오를 감성적인 면이 결여되어 사람과의 교류가 필요하지 않으며, 화나 죄책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물론 행복조차 느낄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야 그것이 비서용 안드로이드에겐 당연한 처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뭔가가 심각하게 어긋나버렸다. 한빈은 결함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코드들을 정독하다시피 읽어 내려갔다. 장하오의 정신과 관련한 모든 사항은 자신이 계획했던 것 그대로였다. ……적어도, 자신에게 맞춤화시키기 위해 데이터를 주입했던 극히 사소한 부분을 제외하고 말이다….
“…말도 안 돼.”
마침내 장하오가 자신을 처음 마주했을 때 지은 그 표정을, 괜히 사람 마음을 간지럽히던 그 미소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빈은 새카만 배경 위로 얇은 실처럼 이어지는 알파벳과 숫자, 기호들의 나열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어 안경을 내팽개치고 눈을 벅벅 비볐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덧씌워졌구나…….”
하하. 장난하지 마.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니네.
…….
하, 하하하하! 이제 어쩌지?!
장하오에게 자신의 데이터를 주입함으로써, 그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코드를 무력화시켰다.
그것도, 그저 감정을 느낄 뿐만 아니라 장하오의 모든 감정이 자신에 의해 촉발되는 형태로.
성한빈은 장하오가 자신을 사랑하게끔 프로그래밍해 버린 것이다.
황급하게 어디론가 연락했다.
“여보세요? 누나?”
[ROGER— 아아 뭐야, 한빈이구나. 무슨 일 있어?]
“나 애인 생겼어.”
[그래? 축하해~ 어떤 사람이야?]
“그게…… 사람이 아니야.”
♥ 스물넷에 모솔 탈출했더니 애인이 로봇인 건에 관하여 ♥
- Active Space Mission: Twin Flame 323 -
Commander:
Principal Research Engineer Hanbin Sung of
UxU (Universes United as One Corp.) also known as W1
w. 이택麗澤
0.1
숨을 불어넣어 감정들은 피어나고
성한빈은 죄책감이 그득한 목소리로 이실직고하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들려오는 답이 없자 눈을 치켜떠 소리 파동이 움직일 기미가 도무지 안 보이는 빈 화면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흐엉, 나 아무래도 혼날 것 같지. 그치. 누나 화나면 진짜 무서운데. 망했다. 속으로 쩔쩔매다가 입을 떼려던 참이었다.
“그…….”
[…….]
“누나, 내가 설명을―”
[하나뿐인 사촌 동생이 종일 일만 하나 싶더라니 애인을 만들고 계셨구나. 인류 최초로 지성을 가진 외계 생명체와의 교신에 성공한 거니? 아니면 네가 뭐, 현대의 피그말리온이라서 사람을 빚어냈는데 비너스께서 응답해 주셨니? 대체 무슨 뜻이니 그게. 뭐라고 안 할 테니 자세하게 설명해 보렴.]
“…제가 프로그래밍했던 안드로이드 기억하세요?”
[갑자기 존댓말 쓰는 거 보니까 쫄았나 봐, 한빈 씨. 그래, 네가 아주 사랑해 마지않아 친절하게 이름까지 붙여주며 고심해서 만들던 반려 안드로이드 기억 나.]
“네, 맞아요. 장하오에게 제 데이터를 주입했는데….”
[주입했는데?]
“그건… 그 이유는… 굳이 제 사소한 생활 방식 같은 것들을 일일이 설명해 줄 필요 없이, 저한테 최적화시켜서 곧바로 일 시작하려고—”
[아아. 그러니까, 코드 짜기 귀찮아서 네 정보를 싸그리 복사시켜 넣었는데 작동시키자마자 걔가 너한테 키스하려고 달려들든? 네가 이상형처럼 만들겠다고 중국 관할인 그 어디야, MIN? 일련번호가 뭐였더라. 하여튼, 거기서 새 부품까지 공수해 와서 만든 그 안드로이드가, 널 좋아한대?]
“어떻게 안 거야?! 아니 그보다 반려라니! 딱히 이상형 생각하면서 만든 것도 아니라니까아….”
[이럴 수가, 진짜일 줄이야. 그런데 뭐… 한빈아. 반려가 막 특별한 단어도 아니고 오래 같이 있으면 반려인 거지 뭘 괜히 부끄러워하고 그래? 로맨스 영화는 그렇게 좋아하면서, 더 이상해 보이게. 계속 붙어있어야 하는데 네가 좋아하는 얼굴로 만드는 건 당연하지. 대단하네 빈아. 매뉴얼을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확고한 자의식을 토대로 의지와 욕망을 내비치는 안드로이드라니, 이번이 최초일지도 몰라. 암, 이런 걸 해낼 만한 사람은 몇 없지. 성한빈이 그 비상한 머리로 또 한 건 해냈네. 정말 대단해. 인터뷰 또 해야겠다. 그치.]
“…….”
[흠… 그래. 중요한 시기에 연애하는 데에 단점만 있는 건 아니야. 남성형 안드로이드라…. 작은아버지께서 노하시는 소리가 우리은하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것 같지만, 사람 마음이 뭐 마음대로 되니? 어디 한번 잘 해봐 한빈아. 하하하하!]
“누나,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성한빈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며 울상을 지었다. 농담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누나가 원래 이런 성격인 것도 잘 알지만…. 우우우 누나 너무해, 난 심각한데. 호탕한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화면에 한층 높은 톤의 목소리 파동이 잡혔다. 엄마아, algebra 숙제 다 해써요오! 이런 어눌한 한국어를 사용하는 어린 우주인은 성한빈이 알기로는 딱 한 명뿐이었다.
[엄마, 왜 웃어요?]
[아아, 이안. 한빈이 형 남친 생겼다.]
[아! 그… Is he that android from before?!]
[응. 너도 아는 그 잘생긴 형아.]
“이안아. 형 어떡하면 좋을까?”
[한빈이 형 안녕! 우음, 문제 있는 코드를 바꾸면 되지 않아요? 틀린 것만 다시 짜요!]
“물론 그렇긴 한데……. 코딩이 잘못된 건 아니고, 내 개인 데이터가 프로그램에 침투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어.”
[한빈 씨. 더 자세하게 말해볼래?]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내 데이터를 주입했더니 나를 향한 긍정적인 반응이 심하게 증폭된 것 같아. 그러니까 스킨십을 시도한 거겠지? 아마 부정적인 반응은 최소화되었을 것 같고…. 한 군데가 아니라 프로그램 전체에 퍼지는 중인 것 같아서 고치기가 어렵네. 덧씌워진 부분이 너무 많은데, 기준을 잡기 애매해서 제거하고 다시 학습시키기에도 힘들어 보여…. 이안아, 형이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조금 더 쉽게 설명해 줄까?”
[괜찮아요, no need to! Can’t you update his software, then?]
“형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업데이트하려고 했더니 본인이 거부해. 정말 자아가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Oh.]
할 말을 잃은 먼 친척 조카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빈은 깨물어주고 싶은 귀여움 때문인지 외면하고 싶은 어처구니없는 상황 때문인지 모를 헛웃음을 흘렸다. 제게 남겨진 선택지는 모 아니면 도 둘뿐이었다. 1번, 자신을 향한 비정상적인 애착을 지닌 장하오와 이대로 열심히 짝짜꿍해서 일해본다. 2번,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고려할 사항, 회사에서는 새파랗게 어린 연구원이 일에 전념하기는커녕 초장부터 팀을 꾸리느라 시간을 낭비한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고려할 사항 한 가지 더, 솔직한 심정으로는 장하오의 얼굴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난 사실 지독한 얼빠였던 걸지도. 젠장. 땅이 꺼질 것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장하오 씨가 누굴 닮아서 고집이 있네. 들어보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어.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끼리끼리야 아주?]
“누나. 나 진짜 어떡해애…….”
[어떡하긴 어떡해. 네가 데리고 살아. 중앙정부에는 절대 알리지 말고.]
“…역시 그래야겠지?”
[잘될 거예요! It isn’t against the three laws of robotics, 그냥 한빈이 형을 사랑하는 거니까! 이런 거 책에서만 봤는데 너무 신기해요! 미래에는 로봇이랑 결혼하는 사람도 생길까요?!]
“앗, 이안이 로봇 3원칙도 알아? 그거 엄청 옛날 소설에 나온 건데!”
[당연하지! 영화도 봤어요!]
“아구 그랬어? 안 무서웠어?”
[하나도 안 무서웠어! 거기서 인공지능이—]
[Ian Rodrick MacCowan. Time for bed.]
[네에….]
“에구.”
[한빈이 너도 아쉽겠지만, 깨어난 지 16시간 넘은 어린이는 잘 시간이야.]
자기 전에 로봇 이야기 꺼냈다간 날밤 까야 해. 사촌 누나의 경고에 다음 만남에 실컷 놀아주겠다고 말했더니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오던 아이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화상통화로 연결했을 텐데. 오랜만에 들은 조카의 목소리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다음에 봤을 때는 또 얼마나 무럭무럭 자라있을지 상상에 빠졌다. 이안이 원래 진짜 작았었는데… 사실 지금도 작지만. 제 팔뚝만 했던 아기가 컴퓨팅에 관심을 가지더니 이제는 부모님의 작업을 구경한다는 게 놀라웠다. 대체 언제 그렇게 커서―
[성한빈.]
“으, 응?”
[괜찮을 거야. 주변에 널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너 혼자서 모든 걸 해내려고 하지 마. 난 차라리 잘 되었다고 봐. 계속 걱정했거든….]
“…그랬구나. 그래도 난 너무 혼란스러워…. 계속 저러면 어쩌지?”
[규칙을 만들어. 분명 네 명령이니 따르려고 할 거고, 네가 자신만만해할 만큼 걔가 똑똑하다면 감정도 잘 조절할 수 있겠지, 어쩌면 일시적인 현상일지도 모르고.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니 네가 감당해야 할 일이야. 아예 폐기하는 건 싫잖아?]
“으응, 그건 좀 그렇긴 해….”
한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상심하지 마 한빈아. 네가 그간 해온 것들을 기억해. 네 업적이 몇 개인데 그 실수 같지도 않은 것 가지고 뭘 그래.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아, 혹시 국가항천국 귀에 들어갈 일은 없지? 그럴만한 사안은 아닌 것 같은데.]
“으응, 당연하지. 사기업에서 만든 부품들인걸.”
[다행이다. 한빈이 너도 알겠지만 외부에 알려져봤자 좋을 건 없어 보이거든. 너와 그, 장하오 씨…의 안전을 위해서 말이야. 계약서 썼고, 돈 냈고 물건 받았고. 그럼 아예 끝난 거지? …아, 거기 설마 불법 사업체는 아니지?]
“아, 누나아! 그런 거 아니니까 문제 될 건 없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하하하! 내가 알던 씩씩한 한빈이로 돌아왔네, 보기 좋아.]
“헤헤….”
[다음에 또 연락해.]
“응!”
W1의 현 우주과학탐사부 차장이자 성한빈의 사촌 누나인 혜림은 한빈이 우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사람이다. 한빈은 학창 시절에 그녀의 가족으로서 우주여객선에 탑승할 기회가 생겼고, 끝없이 광활한 우주의 신비를 본 후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리는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평생 아름다운 은하수를 가까운 곳에서 눈에 담고 싶었다. 밤하늘을 환하게 수놓는 별에 도달하고 싶었다. 짧은 우주여행을 끝낸 어린 한빈은 벙찐 채 우주선에서 내리며 반드시 이곳에 다시 오리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한빈은 혜림의 추천장으로 몇 년 뒤 W1 본부 시설에서 생활하며 훈련받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처럼 빛나는 천재’라는 별칭과 함께 정식 연구원이 되어 다양한 임무에 차출되었다.
한빈이 매스컴에 오르며 명성을 떨치게끔 한 프로젝트는 본디 혜림이 이끌던 것이었다. 낙천적인 성격의 그녀는 어느 날 갑작스레 믿음직스러운 후임인 성한빈에게 리더 직책을 맡기고 손을 뗄 것을 선언했다. 물론 성한빈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나, 발랄한 어조로 전하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그녀의 말은 한빈을 포함한 팀원들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했다. 곧이어 그녀의 결혼 소식이 전해지자 W1 내에서 축하의 물결이 이어졌지만 말이다. 혜림은 그녀가 입사 초기부터 함께한 영국인 동료와 결혼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낳았다. 그것이 이안이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친척 조카를 떠올리며 한빈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나 입이 찢어지도록 헤실거리던 것도 잠시였다. 통화 종료 팝업을 닫고 어지럽게 펼쳐놨던 책들을 정리한 성한빈은 책상에 걸터앉아 장하오를 바라보았다.
“하하…….”
장하오……
성한빈의 안드로이드 비서.
그리고, 성한빈을 사랑하는.
로봇의 감정이라. 쇳덩이도 감정을 느끼고 희로애락에 반응할까. 인공지능 감정 프로그램은 중앙정부의 강한 통제 속에서 비공개 베타 테스트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 자신이 얼결에 완성품을 내어버렸다. 문제가 있다면 의도한 게 아니라 순전히 실수였다는 것, 장하오의 모든 감정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 정도. 아주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혜림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장하오의 지능과 임무 완수에 대한 의지는 사랑 때문에 손상될 리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었으니까. 자신이 장하오를 만들며 이루고자 한 목표는 달성하고도 남을 게 분명했다. 단지… 신경 쓸 게 늘었을 뿐.
시선을 다시 빼곡한 화면으로 옮기며 한숨을 내쉰 한빈은 그나마 해볼 만한 조치를 취했다.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만큼은 막고 싶었기에 조심스러웠다. 골머리를 앓은 끝에, 프로그램 수정 시도는 감정과 사랑을 억누르는 코드를 몇 줄 추가하는 데에 그쳤다. 겨우 그걸로 넘쳐흐르는 마음을 막을 수 있겠나 싶었지만, 그 이상으로 건드리기 무서웠다. 백지상태가 되는 것도 끔찍하긴 하지만 혹시나 더 심해질까 봐. 그게 더 두려워서.
“…한빈.”
활성화 버튼을 누른 후 다시 눈을 뜬 장하오가 성한빈을 불렀다.
“아까 왜—”
“형. 우리 규칙을 좀 정하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형이 날 좋아하는 건 알겠어. 근데 알다시피 우린 여기에 연구하러 온 거니까, 일할 때는 감정을 모두 접어두고 일만 해야 해. 알았지? 할 일이 정말 많아.“
“알겠어.”
“알, 알겠, 어?”
예상치 못한 흔쾌하고 명료한 답이었다. 당황한 한빈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한 가지 당부를 덧붙였다.
“그건… 키스도 안 된다는 뜻이야. 내가 불편해.”
“그럼 손잡는 건?”
“손을 왜 잡고 싶어?”
“한빈이랑 붙어 있고 싶어.”
장하오가 손을 앞으로 뻗자 한빈은 화들짝 놀라며 양팔을 등 뒤로 숨겼다.
“형. 이, 이런 건 친한 사람들끼리 하는 거야. 우리는 거리를 유지해야 해.”
“……알았어.”
왠지 불안한데. 한빈은 머뭇거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오가 원래의 목적대로 잘 작동해 주기만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함께 지내는 동안 장하오의 감정이 어떤 변화를 맞이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발악하듯 마지막 시도로 몇 줄의 코드를 추가한 것도 예상했던 대로 소용이 없었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어색했던 한빈은 장하오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고쳐주려고 팔을 들었다. 그러나 작동된 이상 그가 스스로 외관을 가꿀 수 있음을 깨닫고는 곧바로 멈추었다. 스킨십을 피하자고 해놓고 제가 먼저 손대는 꼴이라니. 지난 몇 달간 주기적으로 먼지가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다시 빗겨주기를 반복해 왔더니, 익숙해진 나머지 더는 그를 돌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렸다. 머쓱한 표정을 들킬세라 팔을 거두고 뒤돌아 등을 보였다. 구겨진 실험복의 목깃 위로 붉어진 피부가 보였다.
“좋아, 연구를 시작하자.”
떨리는 목소리를 손뼉 소리로 감추었다.
과연, TF323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0.2
내게 맡겨봐 눈부신 네 마음
걱정이 크나큰 오산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하오에게 자신의 정보를 주입한 것은 분명 예상치 못한 오류를 발생시켰다. 그럼에도 좋은 선택임은 틀림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장하오가 성한빈에게 맞추어 코딩되어서가 아니라, 성한빈을 향한 감정이 생겨났기 때문에 그 효과가 극대화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장하오는 한빈이 연구 및 보고 절차나 장비의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TF323을 비롯한 천체들에 대한 지식을 전해주는 족족 제 것으로 흡수하여 빠른 속도로 연구를 이어갔다. 한빈의 우려와는 달리 장하오와 성한빈의 합은 마치 몇 년을 동고동락한 파트너 사이처럼 잘 맞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W1 본부에서 보내온 미확인 광물 샘플을 분석하고는 행성 깊숙한 곳의 우주자원을 채굴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마냥 순조롭기만 했던 건 아니다. 성한빈은 어린 나이에 W1의 직원으로 발탁된 이후 새로운 문명의 길을 여는 발견을 수차례 목도했다. 그러나 직접 우주로 떠나와 이름 모를 광물을 손에 쥐었을 때의 감상은 사뭇 달랐다. 이제 어쩌지? 그것이 처음 들었던 생각이었다. 헤쳐 나가야 할 길이 너무 막막하여 머리가 아찔했다. 약간 과장해서 다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그래도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거, 내 상상 이상으로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는데. 으어엉. 한빈은 걱정 가득한 말들을 자주 늘어놓았지만 장하오는 이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저 주인의 지시를 따르거나, 주인을 보조하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뿐이었다. 성한빈이 식사할 때나 잘 때도 말이다.
……엄밀하게는 ‘일’ 이상의 것을 했다. 배가 곯기 직전인 줄도 모르고 샘플을 보고 있던 한빈에게 식사 시간임을 알려주며 음식을 대령해 준 것이 장하오였다. 뻑뻑해진 눈을 비비면서도 고집을 부리며 차트를 보고 있던 한빈에게, 인간이 제때 적정시간의 잠을 자지 못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줄줄 열거하던 것도 장하오였다. 한빈은 그럴 때마다 ‘30분 뒤에 깨워줘’라고 말하고는 비척비척 발걸음을 옮겨 간이침대로 쓰러졌지만, 장하오가 자신을 깨웠을 때는 언제나 꼬박 8시간이 지나버린 후였다. 삐걱거리는 작은 침대 위에 몸이 잔뜩 구겨진 채 깨어난 게 아니라, 몸에 맞추어 설계된 인체공학적인 캡슐베드 위에서 턱 끝까지 푹신한 이불이 끌어올려져 있었던 건 덤. 왜 이렇게 늦게 깨웠냐 타박했지만 장하오는 안드로이드 비서로서 주인의 안위가 먼저라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잡아뗐다. 낯선 곳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숙면—정신이 너무 맑고 개운해져서 행복할 정도의—을 취했기에 한빈은 더 대꾸할 말을 찾지는 못했다.
그렇게 깨어난 뒤에는 자신이 사나흘에 걸쳐서 기록한 것보다 훨씬 빼곡하게 데이터를 입력해 둔 장하오의 작업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빈이 (장하오가 따라준) 시원한 물이 담긴 컵을 쥔 채 책상 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면 장하오는 늘 자부심이 가득한 기세등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이 휘어지고 광대가 봉싯 올라간, 누가 봐도 칭찬을 바라는 모양새로. 한빈은 저런 표정을 프로그래밍한 적 없었지만, 사람의 마음은 미소에 약해지기 마련이라 ‘매번 느끼지만 형 진짜 대단하다’와 같은 말들을 그를 향해 쏟아내곤 했다. 굳이 장하오의 기뻐하는 반응을 고칠 생각은 없었다. 보기 좋았으니까.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다행히, 장하오의 감정이 일을 그르친 적은 없었다. 감정을 접어두고 연구만 할 것, 스킨십을 하지 말 것. 장하오는 성한빈이 세운 규칙을 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장하오가 시동이 된 날로부터 한 달 차가 되어가는 동안 한빈의 마음은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비록 장하오의 코딩에 실수는 있었지만, 그리 심각하게 불안해할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전까지 말이다.
장하오는 때때로 작업 도중 한빈은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하거나 기계음을 내곤 했다. 이 역시도 한빈이 추가한 적 없었던 특성이었지만, 굳이 제거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사소한 것 하나 없애겠다고 의논도 없이 종료 명령을 내리는 게 왜인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첫날의 몇 차례에 걸친 수정 시도가 모두 실패하는 꼴을 본 뒤에는 통하지도 않을 귀찮은 짓을 하고 싶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적막한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작은 광물 샘플을 몇 시간씩이나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있던 어느 평범한 날. 한빈은 핀셋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켜려다가, 문득 구석에서 들려오던 장하오의 음성인지, 기계음인지 모를 소리가 아예 멈추어버린 것을 눈치챘다. 고개가 빠질 것처럼 오래 내려다보던 광물 샘플에서 연구실 구석으로 시선을 옮긴 한빈은 놀라서 몸이 굳었다. 장하오가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성한빈은 종종 장하오를 불러 모든 기능이 오류 없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는지, 소프트웨어에 업데이트가 필요한 부분은 없는지 묻고는 했다. 어라, 분명 마지막 점검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혹시 문제가 생긴 걸까. 갑자기 왜 멈춘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거지?
“형? 괜찮아?”
“한빈? 나 멀쩡한데.”
“혹시 필요한 게 있어서 그래?“
“그런 거 아니야아.”
답하는 장하오의 입가에 슬그머니 호선이 그려졌다. 뭐야. 저건 또 무슨 반응인데. 한빈은 자신의 책상을 흘깃 보고는 다시 장하오를 향해 말했다.
“그럼 다행이고…. 깜짝 놀랐잖아.”
“놀라게 해서 미안.”
형이 사과할 것까진 아니었는데. 멋쩍은 마음에 답을 얼버무리다가 저도 모르게 입술이 삐쭉 내밀어졌다. 흥, 별문제도 없으면서 왜 저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거야. 형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한빈이 그를 마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말했다.
“계속 보고 있으려고?”
시선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민망한 건 사실이었다. 지금 자신은 며칠씩이나 씻지도 못한 채―물론 TF323과 지구의 환경과 시간 흐름은 비슷하면서도 다르기에 피부를 통한 신체 노폐물 분비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부스스한 머리칼 아래로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다크서클 그득한 전형적인 연구원의 모습인데 말이다. 하필이면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노란 체크무늬 남방이었다. 뭣 하러 날 보는 건데. 구경난 것도 아니고오오! 괜스레 안경이라도 벗어보려다 콧등에 선명하게 남은 붉은 자국을 발견하고는 도로 썼다. 아무 짓도 안 한 것처럼. 아무튼 태연하게.
“한빈이 일하는 거 보는 게 좋아.” 질문에 대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장하오의 답이 돌아왔다. “재밌거든… 귀엽고…….”
이게 당최 무슨 소리람. 그간 엉뚱한 발언을 하도 많이 들어 면역이 생긴 것인지 이번에는 당혹스럽다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똑같은 짓거리를 몇 주째 하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재밌어. 난 재미 없어! 지루해! 이 초췌한 상태가 귀엽다고 할 건 또 뭐야! 아무래도 장하오의 프로그램에 감정이 이상하게 자리를 잡긴 한 모양이었다. 한빈이 의아함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으으응? 형이랑 나랑 지금 똑같은 거 하잖아.”
장하오가 고개를 몇 차례 가로저었다. 흔들리는 고개를 따라 머리칼이 가볍게 휘날렸다.
“응, 그치만… 난 그냥 한빈이를 보는 게 좋은걸.”
아, 저 넉살은 진짜. 순간 입이 타며 뺨에 열기가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 형은 별게 다 좋다고 해. 일하는 동안 형은 날 얼마나 오래 쳐다보고 있었던 걸까. 설마 잠들어있는 사이에도? 으음, 싫은 건 아니지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던 한빈은 멀찍한 곳에서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장하오에게 말했다. 형, 이리 와 봐, 나 좀 도와줘. 화색이 돈 채 곧바로 몸을 일으킨 장하오는 바퀴 달린 스툴에 앉아 빙그르르 돌며 한빈에게로 다가갔다. 아이 같은 깜찍한 행동에 한빈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하하,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웠어?”
“한빈 따라서 했는데.”
“으응? 내가???”
“응, 한빈이가. 오늘 아침에도―”
“아아아아. 알겠어어어.”
다시는 그런 짓 안 할 거다.
“…일단 이거 봐봐.”
한빈이 내민 물음표 가득한 메모지를 물끄러미 보던 장하오가 입을 뗐다.
“한빈은 엄청 대단한 사람이야.”
“갑자기?”
“아니, 내가 늘 하던 생각. 잘하는데 열심히 하잖아.”
“에이 형. 여기에는 비교할 사람도 없고… 나 계속 돌멩이만 쳐다보고 있잖아.”
“아니야.”
단호한 말투였다. 장하오는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이어갔다.
“나는 성한빈을 알아. 머릿속에 한빈이 있어서, 내 주인이 얼마나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인지 알고 있어. 널 매일 곁에서 지켜보니까 내가 맞지.”
그 말을 들은 한빈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일과가 일로만 채워진 것이나 다름없어서 일 외의 주제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말을 꺼낼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이미 필요한 정보는 각인시킨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장하오는 이미 주입된 정보에 더해, 항상 저의 일을 보조하고 자신을 보살피며 기계학습을 하듯 매일 성한빈에 대해 배워갔을 것이다. 요즘날의 모든 인공지능이 그러는 것처럼, 아주 평범하게.
한빈은 침을 삼키며 현미경의 렌즈에 눈을 박고는 말했다. “고마워 형. …저기 핀셋 좀 줄래?” 당연히 집중력은 제 눈앞의 째깐한 광물 따위가 아니라 옆의 장하오에게로 향하고 있었지만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부탁에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한빈은 다시금 눈도 깜박이지 않고—물론 장하오의 인공 각막은 건조해질 일이 없기에 눈을 깜박일 필요는 없다—자신을 쳐다보는 장하오의 얼굴에 짧게 입김을 불었다. 형을 부르면 될 일이었지만, 마치 퓨즈가 나간 것처럼 넋을 잃은 채 어딘가를 오래 응시하는 사람—’사람’—을 보니 본능적으로 장난기가 발동한 탓이었다. 나중에는 그 행동을 후회하게 되었지만….
장하오는 멍한 상태에서 정신을 차린 양 당황하며 핀셋을 한빈에게 건넨 후, 원래 머물고 있었던 연구실의 구석으로 향했다. 그렇게 장하오는 다시 성한빈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 끈덕진 시선을 애써 무시하던 한빈은 흘러가 버린 시간을 눈대중으로 계산하고선 속에 땀이 흥건해진 장갑을 바꾸어 꼈다. 계획이 어그러지기 직전이었다. 늦었다! 데이터 수집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형이 뭘 하든 나에겐 할 일이 있으니까.
0.3
用尽了 逻辑心机 推理爱情 最难解的谜
온갖 논리적인 방법으로 추리해 봤지만
사랑이 가장 어려운 문제임을 깨달았어
성한빈 팀은 연구에 속도가 붙어 나날이 전진했다. 그러나 공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부탁이 무색하게, 한빈을 숨고 싶어지게 만드는 장하오의 낯뜨거운 발언들도 점점 늘어가기만 했다. 이를테면 낮잠을 자고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 나왔더니 귀엽다고 한다거나. 당황스러움에 귀와 뺨이 온통 빨개져 우왕좌왕하던 그때, 장하오는 입가를 씰룩거리며 빗을 가져가 한빈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또, 피곤한 나머지 잠시 엎드려 쪽잠을 잤더니 얼굴에 잉크가 잔뜩 묻어버려 기겁했을 때, 미온수에 적신 손수건을 가져와 한빈의 얼굴을 닦아준 적도 있다. 나른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며 굳이 손댈 필요 없는 부분까지 스치는 형의 손길이 어쩐지 불온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에이 뭐, 설마 싶어서.
연구소 외부의 천문대 쪽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던 또 다른 날. 주먹밥을 먹고 있던 한빈을 향해 장하오는 “우리 둘이 여기서 나라 만들래?” 따위의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사레가 들려 급하게 물을 마시고 우물거리던 한빈은 장밋빛의 석양에 물든 장하오를 바라보며 답을 망설였다.
“그 말… 어디서부터 틀렸다고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어.”
“괜찮은 생각 아니야?”
“…형. 우리 일 하러 왔잖아.”
“알아. 그렇지만 언젠가 끝날 거잖아?”
…언젠가는 끝나겠지. 성한빈은 굳이 임무 완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현재만 바라보고 싶었다. 먼 미래를 상상하면 머리만 아플 것이 분명했다. 좋아서 시작한 우주 연구지만 출구 없는 미로를 걷는 듯한 느낌은 한빈에게 가끔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을 선사하기도 했다. 프로젝트가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었다. 끝나더라도 얼마나 많은 후속 연구가 이어질지, 그 연구들이 마무리되려면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그렇다면 자신을 돕고 있는 안드로이드 조수가, 장하오가, 과연 그때까지 남아있을까?
“…….”
한빈은 장하오가 자신과의 미래를 계획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비겁할지 몰라도 답을 해줄 수 없다면 피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그는 사람도 아니니까.
결국 한빈은 일을 더 미루어선 안 된다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아침에 본부에서 위성 사진이 몇 장 왔어. 베이스 4호가 찍은 거 말이야. 그거 봐야지.” 더없이 단호한 말투였다. 그리고 장하오는 늘 그랬던 것처럼 웃는 얼굴로, 한빈과 하는 것이 무엇이든 함께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했기 때문에 주인이 하자는 일을 모두 따랐다.
…물론! 장하오는 성한빈의 모든 행동에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말들을 덧붙이길 그만두지 않았다. ‘인간을 난처하게 만드는 말을 피하라’ 따위의 필터링 기능이 코딩되어 있을 리 없었으니—아니, 어쩌면 그냥 그의 의도일 수도 있다—장하오의 발언들은 아주 대담하고 솔직했다. 한빈, 밥 먹을 때 오물거리는 게 햄스터를 닮아서 귀여워. 한빈, 동글동글한 글씨가 귀여워. 한빈아, 방금 영어로 통화한 거야? 발음이 너무 귀여워. 이거 한빈 어릴 때 사진이야? 한빈이는 언제나 귀여웠구나. 한빈 웃을 때 보조개 생기는데 꼭 고양이 수염 같아서 귀여워. 귀여워귀여워귀여워귀여워. 한빈이는 속눈썹도 길고, 코도 동그랗고, 볼은 말랑말랑하고… 얼굴이 오밀조밀 너무 귀여운 것 같아, 우리 한빈이 진짜 너어무 예뻐—
“형.”
“우웅?”
“그런 말 좀 안 하면 안 돼?”
무시하려고 노력을 기울이다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참고 또 참다가 툭 던졌다. 늘 해사하게 웃고 다니는 순한 인상의 얼굴 때문에 귀엽다는 말만큼은 지겹도록 많이 들었지만 스물넷 건장한 남성에게 예쁘다고 하는 건 대체. 귀엽다는 말보다 몇 배는 더 수치스러워서 얼굴이 더 달아오르는 것 같다, 라고는 그 어디에도 말 못 한다! 나 나름 인터뷰하고 기사 올라갔을 때 잘생겼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는데… 나 막 응? 학교 홍보모델도 하고 향수 화보도 찍고 그랬는데…. 생각해보니 장하오가 자신에게 처음 한 말도 예쁘다는 소리였다. 그때는 토끼 같다고 했었지.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개진 것이 느껴져 장하오의 반대 방향을 쳐다보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더니, 저 망할 남자가 피실피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으려는 노력조차 없이 하는 소리가 참으로 기가 막혔다.
“어떤 말?”
어떤 말이냐니!
“한빈 얼굴은 왜 빨개졌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분명 머리에 이상이 생겼을 리는 없을 텐데…. 장하오는 한빈이 무슨 말만 하면 여우처럼 능청스럽게 상황을 피했다. 음흉하기 짝이 없는 게 너구리 같기도 했고. 저거 노린 거지? 진짜 얄미워 죽겠어. 한빈은 부글부글 끓는 속 때문에 그냥 입을 앙다물고 입술을 짓씹기를 선택했다. 제발 좀 작작 해주길 바라면서.
“한빈, 갑자기 열이 나….”
하하, 어김없이 바이오 센서에 걸려버렸다. 아니길 바랐건만.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제 몸이 원망스러웠다. 다가오지 마. 거기 있어. 간절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목구멍을 넘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하오는 수작질을 계속 이어가더니 세상 순진한 표정으로 다가와 솜털이 파르르 떨리는 한빈의 볼을 꼬집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작은 행동 하나까지 어쩜 이리도 얄미운지.
“무슨 일 있어?”
아오!!!!!
“형!”
“함비나아, 내 말 좀 들어봐. 내 감정이 일 방해 안 하면 괜찮다고 했잖아. 그리고 오늘… 내가 한빈보다 일 더 많이 해써.”
“하아, 그게 문제야…….”
이미 모든 것이 들통난 마당에 표정을 숨기고 태연한 척을 하는 건 포기했다. 저 느물거리는 여우를 상대로 말이나 제대로 하면 다행이지. 눈을 감고 명상하듯 숨을 고르던 한빈이 말했다.
“내가 형 때문에 집중이 안 돼.”
“앗. 미아내.”
자꾸 말꼬리를 늘이면서 웃음소리를 흘리는 게 전혀 미안한 눈치가 아니었다. 뺨은 또 다시 눈치도 없이 발그레해지는 것 같았다. 분노가 치솟았다.
“조용히 하고 일이나 해.”
“한빈. 난 아무 말도 안 해써.”
“생각했잖아!”
생각했으면 뭐 어쩔 건데! 나 진짜 왜 이러냐…. 저 자신도 어이가 없어지는 소리임을 알았지만, 장하오가 팩트로 받아치자 궁지에 몰린 것처럼 아무 말이나 내뱉어버렸다. 당장이라도 이불킥을 갈기고 싶은 쪽팔림도 잠시, 한빈은 드높은 상사가 짓던 작위적인 미소가 퍼뜩 떠올랐다. 아, 망했다. 보고서! 스트레스가 급히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러고 실랑이할 시간은 정말 없는데!
“혀엉, 나 그 보고서 오늘까지 써야 해. 이거 더 밀리면 진짜…. 누나 말로는 이미 위에서 만족스러워했다는데 왜 자꾸 그러는지 몰라. 형, 내가 책임자이긴 해도 동시에 그냥 일개 직원이라―”
“알겠어 한빈. 그거 나한테 줘, 너 바쁜 거 아니까 내가 할게. 근데… 나 때문에 떨려?”
떨리냐고? 그걸 꼭 물어봐야 알겠어? 그래, 형 때문에 존나 떨려. 됐냐? 우씨…. 장하오의 말에 한빈은 속으로 아우성치다 그를 째려보고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최근 들어 장하오는 대체 어디서 배워온 것인지 태도가 부쩍 능글맞아졌다. 멜로 영화를 모조리 숨겨버리든가 해야지. 처음 활성화했을 때 내가 한 말을 다 잊은 게 분명—아니, 자신의 음성이라면 모조리 녹음해 메모리에 저장해놓았을 장하오가 저런 말들을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시 의도가 있었다. 하 잠깐만, 좀 화나네? 자신은 장하오에게 계속 휘둘리고 있었다. 으허엉, 이건 좋지 않아아아…….
“한빈.”
대답이 없자 장하오가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한비나~ 한비잉~ 항빙빙빙빙~”
“씁! 형 계속 그러면 비활성화시킬 줄 알아…. 형을 완전 바보로 만들어버릴 거야, 내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진짜 할 수 있어!”
“난 이미 바보야.”
뭔 소리야 그게.
“한빈만 바라보는 바보.”
“미친…….”
늘 속으로 삼키다가 드디어 육성으로 비속어가 나왔다. 장하오를 노려보며 성한빈이 외쳤다. “일이나 해!” 장하오는 찡긋 윙크를 날리고는 둠칫거리며 걸어가더니 이전에 한빈이 정리해 둔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멀리서 종잇장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대만의 유명한 모 로맨스 드라마 OST를 허밍하는 감미로운 음성과 함께…….
몇 주 후, 둘은 우박이 내린 이후로 다시 행성 표면의 광물을 채취하기 위한 탐사를 계획했다. 밝고 화창한 날 한빈과 장하오는 탐사복을 갖춰 입고 보급품과 식량이 가득한 배낭을 멘 채 연구소를 나섰다. TF323의 대기는 인간이 무리 없이 숨을 쉴 수 있는 성분과 비율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완전 무장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한빈은 냉큼 장비들을 챙겼다.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질까 봐 노심초사하는 한빈과 달리 장하오는 몹시도 신이 나 보였다.
샘플을 모으며 높은 언덕에 올라간 둘은 연구소의 주변으로 나 있는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분홍색 하늘 아래 신비로운 보랏빛의 지형들을 눈에 가득 담던 한빈은 자신에게 얼마나 커다란 행운이 찾아온 것인지 실감했다. 장하오와 나란히 선 채 아름다운 광경을 가만히 감상하고 있던 그때, 제 손등에 무언가가 스치는 걸 느꼈다. 곧이어 제 손과 장하오의 손이 얽혔다.
“형… 뭐 하는 거야?”
“한빈 손 잡고 있는데?”
한빈이 복잡한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가 규칙을 정했잖아. 일할 때—”
“우리 지금은 일하는 거 아니잖아. 손도 못 잡아?”
“…….”
“…알겠어. 안 할게.”
장하오가 뾰로통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보았다.
“난 그냥 모든 게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한빈이랑 같이 즐기고 싶을 뿐인데….”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한 그는 흡사 애원하는 듯한 가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한빈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 성한빈에 대한 장하오의 사랑 }은, 장하오가 그렇게 프로그래밍 된 이상 프로젝트보다도 우선시되는 그의 ‘삶’의 원동력이자 이유였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었고, 그 결과 함께 있었던 모든 순간에 장하오는 자신을 사랑했다. 언제나. 단지 자신의 부탁에 의해 그 감정을 표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사랑이란 뭘까? 가족들과 친구들을 살뜰하게 챙기고, 늘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는지, 힘든 일은 없는지 궁금해하는 것? 그들에게 생긴 행복한 일은 축하해주며 슬펐던 일에는 공감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모두 사랑이다.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은 어떠한 형태로든 분명 사랑이다. 한빈은 주변인들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렇다면 자신을 향한 장하오의 마음도 사랑이었다. 결국 그 본질은 같은데. ……혹시 내가, 형에게 너무 모질게 굴은 걸까.
“아니야 형… 손 잡아도 돼.”
“진짜?”
“그런데 미안하지만, 형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어.”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확실하게 선을 긋는 거절. 미안하다는 사과.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래도,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를 밀어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가 슬퍼하지는 않기를 원했기에.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기에.
0.4
I wanna know everything about you
한빈은 연구실 테이블 위에 놓인 기록들을 뒤적이며 데이터를 다른 차트에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요즘은 TF323을 공전하는 여러 위성에서 발견된 광물들, 그중에서도 지구의 원시 광물들과 매우 유사한 것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분명 모성(母星)인 TF323만 연구하라는 임무를 받고 이곳에 착륙한 것 같은데… 아니, 난 애초에 은하천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이지 행성과학은 내 분야가 아닌데! 허엉, 이럴 거면 크루를 좀 제대로 짜 주던가. 어째 갈수록 일거리가 늘어가는 느낌이었다. 원래라면 회의실로 사용되었어야 할 공간의 커다란 테이블에 광물 샘플이 빼곡히 놓여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성한빈은 빡치는 소리만 늘어놓는 상사를 떠올리고는 작게 개—를 소환했다.
“앗. 한빈 욕했다.”
장하오가 들어올 줄 알았더라면 참았을 것이다.
“형… 나 바쁜데. 왜 왔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장하오가 테이블 위 겨우 남은 모서리 공간에 식판을 올렸다.
“한빈 8시간 53분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어. …음, 이제 8시간 54분째.”
“따로 기록을 하고 있는 거야?”
“의식적으로 하는 건 아니야. 자동이지. 한빈이 날 그렇게 만들었는걸.”
그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밥 먹어. 한국인은 밥심이랬어.”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알겠어. 먹을 테니까 가도 돼.”
대답을 툭 던지고선 다시 차트를 보자 장하오는 한빈이 들고 있던 클립보드를 뺏어갔다. 한빈이 앉아 있던 의자도 힘에 이끌려 돌아갔다. 졸지에 장하오의 양팔에 갇힌 꼴이 된 성한빈은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하며 자신을 노려보는 장하오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언가가 몹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성한빈. 넌 좀 쉬어야 해. 9시간 내내 아무것도 안 먹고 32시간 동안이나 안 잤어. 나는 널 보살피는 안드로이드이자 개인비서니까, 내 주인이 스스로 건강을 위협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려줘도 되겠지? 먼저 탄수화물은 두뇌의 주요 에너지원이라 식사를 제때 하지 않으면—”
“형, 형. …나도 굶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아. 그냥 5분만 이따가—”
“한빈. 난 한빈의 비서이기 이전에 한빈을 아껴서 이러는 거야. 걱정되니까 쉬라는 거라고. 내 말의 뜻을 모르겠어?”
불꽃을 튀기며 이어지던 눈싸움은 장하오의 승부수에 끝을 보였다.
“먹어. 한빈이 좋아하는 거 만들었어. 빨리 안 먹으면 다 불어.”
어라? 그러고 보니, 향이…
“칼국수? 아니 뭐야, 칼제비잖아!”
감동한 한빈을 보며 장하오가 뿌듯해했다.
“나 이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한빈이 좋아하는 건 다 알지. 주인에 대한 정보를 아는 건 당연해. 내 안에 한빈의 일부분이 있고, 난 매일 한빈이를 보고 있으니까.”
그 말을 들은 한빈은 흥미롭다는 양 펄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다 아는 게 당연하다고? 진짜? 과연 장하오는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보다도 더, 성한빈이라는 인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까? 자신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주입된 정보 외에 더 알아낸 것은 없을까.
“나 궁금한 게 생겼어. 형이 직접 관찰한 나는 어때?”
“아아. 우선, 한빈이는 커피를 사랑해.”
장하오는 망설임 없이 대답을 시작했다.
“두 잔, 아니, 가끔은 세 잔은 마셔야 일 시작할 수 있어. 원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제일 좋아하는데, 속이 안 좋을 땐 따뜻한 걸 마셔. 내가 분명 과도한 카페인 섭취를 피하라고 했는데 한빈이가 말을 너무 안 들어서 디카페인 원두를 W1에 요청했어, 알아? 예전에 한빈이 제로콜라 없다고 몰래 꿍얼거리는 것도 봤어. 그것도 나중에 올 거야. 그런 것쯤은 이미 여기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없어서 놀랐잖아. 한빈 회사 완전 꽝이야. 여기 한빈 혼자서 왔는데 그 정도 취향 파악도 못 하는 게 말이 돼?”
“…….”
“내가 어느 날 아메리카노를 뜨겁게 만들어서 줬을 때 한빈이 속 쓰린 거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봤지? 원래 주인의 신체 변화는 센서로 감지하지만 난 한빈 표정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어. 한빈이 아프다는 거, 아무리 숨겨도 나는 보여. 그런데 그거 알아? 한빈이 일어날 때 배가 아픈 건 자기 직전에 찬 걸 마셔서 그래. 앞으로는 방을 더 따뜻하게 해줄 테니까 나한테 미리 알려줘.”
장하오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손을 치켜들고는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쌓인 게 많았다는 듯 길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통에 성한빈은 잔뜩 팩트폭력을 당하고 할 말을 잃었다. 오늘 해치운 커피만 해도 몇 잔이었던가. 여섯, 아니, 일곱…. 시야의 구석에 잡힌 반쯤 비운 머그잔을 숨겨버리고 싶었다. 기회를 잡았다는 양 장하오는 펼쳐 들었던 손가락을 하나 접고서는 성한빈에 대한 특이사항을 마저 보고하기 시작했다.
“한빈이는 정리정돈을 정말 열심히 해. 어떨 때는 나보다도 더 철저한 것 같아서 신기할 정도로. 한빈의 책상 왼쪽 구석에는 책이 가지런하게 꽂혀 있고 그 앞에는 늘 서류랑 차트를 차곡차곡 쌓아서 보관하고 있어. 책상 오른쪽에서는 샘플을 패트리 접시에 넣어두고는 라벨기를 사용하는데, 지금까지 특성이 완전히 중복되는 것들을 제외하고 우리가 발견한 230개 광물의 라벨을 모두 살펴봤을 때 한빈이 뽑아서 자른 스티커 라벨의 좌우 여백은 모두 0.8cm로 똑같아서 나도 놀랐―”
“형, 형. 너무 자세한 건 빼고 말해주라아….”
“엉, 알겠어. 한빈이 다리를 꼬고 앉을 땐 항상 오른쪽 다리가 위로 올라가고, 집중하고 있을 땐 손으로 볼펜을 마구 돌리고, 그러다가 꼭 세잎클로버 장식을 만지다가 펜을 분해해서 잉크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곤 해. 이거 말고도 많은데 아무튼 요약하자면 정해둔 규칙은 무의식중에도 잘 따른다는 뜻이야.”
“…관찰력이 좋네, 형.”
“그러엄, 누가 만들었는데.”
장하오가 으스대며 이어갔다. 이번에는 검지 손가락을 접은 뒤였다.
“한빈이는 몸을 엎드린 채로 자.”
“…나 엎드려서 자?! 그럴리가….”
“고양이처럼 엎드려서 자거나 완전 바른 자세. 확인하러 들어오면 자세가 바뀌어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이불을 다시 덮어주거든….”
“그으래애? 그렇구나, 처음 알았어…. 고마워.”
“응. 그리고 한빈은 잘 때 말을 해.”
“나 잠꼬대 안 해!”
한빈이 우기자 장하오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알겠어, 지인짜 아주 가끔 하는 걸로 바꿔줄게. 깊게 잠들었을 땐 조용한데, 한빈 요즘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 같아. 일은 나한테 맡기고 조금만 더 일찍 자.”
“…….”
“한빈이 마지막으로 한 잠꼬대가 칼제비가 먹고 싶다는 것이기도 했어. 난 성한빈의 생각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표정으로 읽을 수 있고, 늘 보고 듣고 있어. 그래서 해봤는데, 어때?”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던 부끄러운 사실들을 남의 입을 통해 들은 마당에 남아있는 이야기들까지 견뎌낼 자신은 없었다. 성한빈은 고개를 도리질하며 손을 휘저었다. 이제 그만, 의 뜻이었다. 형이 갑자기 직접 요리까지 한 이유가 있었구나. 난 대체, 잠결에 무슨 말들을 얼마나 한 거야. 나 진짜 잠꼬대하나? 면을 씹어 넘기며 두려워하기도 잠시, 헉.
“진짜 잘 만들었— 어라, 이거 만들 재료가 없었을 텐데?!”
“아니야 한빈, 틀렸어. 뭐야! 한빈이는 나보다 오래 여기에 있었으면서 아무것도 몰라. 찾아보니 다 있던데, 나 없을 때 밥을 얼마나 안 먹었길래 그런 거야? 아니면 W1에서 이런 기본적인 것도 안 알려준 거야? 진짜 꽝이네. 칼국수 면은 있었는데 수제비 반죽은 내가 했어. 한빈이는 늘 수제비를 추가해서 먹는 걸 좋아했으니까. 누가 하~루종일 나오지도 않고 계속 안에 박혀서 일만 해서 그랬는지 내가 만드는 것도 못 봤나 봐? 장하오 속상해.”
마치 어린아이가 삐친 티를 팍팍 내는 듯한 말이었다.
“하하하, 형! 알겠어, 내가 미안해.”
“미안하기만 해?”
“으응?”
“더 할 말 없어?”
아아, 저도 모르는 사이에 덫에 걸려버렸다. 여기까지 와버린 이상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진 건 아닌가 싶으면서도, 성한빈은 엄청난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난데없는 최애 음식—그것도 맛깔나 보이는 비주얼만큼이나 맛이 정말로 좋은—의 등장에 공적인 사이니 뭐니 운운할만한 정신이 없었다. 생활 애교가 저항 없이 밀려나오는 건 덤. 햄스터 짤을 연상시키는 양손 엄지척과 함께 고양이 수염이 뽈록 튀어나왔다.
“하오 형이 짱이야!”
한빈의 말을 들은 장하오는 순간 놀란 듯 숨을 헉 들이켰다. 양손을 모으며 입가로 가져가는 것이 정말 사람이 아닌가 싶을 만한 반응이었다. …되돌아보면 좀 작위적이있던 것 같기도 하고. 뭐만 하면 그 잘난 얼굴을 무기로 쓰는 게.
“한 번만 더 말해줘.”
“…형이 짱이야?”
“앞에도…….”
“하오 형?”
“……그거 좋아.”
“이게 좋아?”
“응, 좋아! 한빈이 나를 이름으로 불러줄 때.”
“아이 뭐 그런… 그런 거에 의미 부여를 하고 그래.”
“한빈이 그런 귀여운 목소리로 날 부르고 형이라고 해주는 건 날 그냥 비서 이상으로 여긴다는 뜻이야. 자꾸 업무적인 관계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한빈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나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맞지?”
정곡을 찔린 것 같은 느낌에 코끝을 긁적이던 성한빈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 일하기 시작한 첫날부터 서너 달째가 된 지금까지 장하오는 서서히 한빈의 삶에 스며들었다. 혼자 일하는 데에 적응한 한빈이었지만 업무할 때 의견을 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도움을 구할 이가 있다는 사실이 어느새 익숙해지고 좋아져 버렸다. 자신이 식사할 때 그가 맞은편에 앉아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게 좋았고, 가끔 영화를 보며 머리를 식힐 때 소파의 양 좌석이 함께 내려앉는 게 좋았다. 자신이 자러 갈 때면 늘 그가 손을 흔들며 잘 자, 내지는 편안한 밤을 보내길 바란다(晚安)고 말해주는 것이 좋았다. 장하오는 단 하나의 틈도 남기지 않고 성한빈의 일상에 완전히 녹아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던 걸까?’
한빈은 늘 베푸는 것에 익숙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그걸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성한빈의 사랑 방식이었다. 그렇게 여겨왔었다. 정말로 필요했을지도 모르는 것은 저도 모르게 단호하게 부정했다. 다만 그런 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성한빈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해왔으나, 받을 필요는 없다고 저도 모르게 마다했기에.
‘…글쎄?’
그래서 이번에도, 성한빈은 의도치 않게 자신을 속여버리고 말았다.
“……물론, 형은 내 동료이자 친구야. 그리고 훌륭한 개인비서지.”
빈 그릇이 담긴 쟁반을 들며 이어갔다.
“할 일 마저 하자.”
장하오가 발걸음을 옮기던 한빈을 불렀다.
“한빈. 그냥 같이 있어서 좋다고 말해줘. 그거면 돼. 그리고 난 안드로이드일지 몰라도 아는 것도 많고, 이야기 듣는 것도 좋아하고, 무엇보다 한빈이 좋아. 그러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해도 돼. 알겠지? 내가 다 들어줄게. 힘든 일이 있으면 내가 다 막아줄게.”
“알겠어 형. 고마워.”
멈춘 상태로 가만히 바닥을 흘기던 한빈은 뒤돌아선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장하오가 짓고 있을 표정을 상상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저 얼굴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얼굴을 프로그래밍할 때 그리 공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분명 무표정일 땐 날카롭기 그지없는데 지금 돌아보면 저 남자는 분명 애처로운 강아지 같은 모습일 거라고. 저렇게까지 빌어먹게 언변이 뛰어난 남자에게 잘생긴 얼굴마저 준 것은 자신의 실책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0.5
내가 보는 시선 끝엔 항상 네가 있다는 걸 알까, 넌?
“한비인….”
우리 형, 이번에는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이실까. 빔 프로젝터로 추천받은 뮤지컬 영화를 보고 있던 한빈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하오가 슬라이딩 도어 너머로 얼굴만 빼꼼 내민 채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영화는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인물이 자존감을 회복하고 서커스단원들과 극 중 최고의 명곡을 노래하는 장면을 앞둔 상황이었다. 이미 영화에 사로잡힌 상태였던 한빈은 찬사를 많이 받았다는 그 장면을 보기를 무척이나 기대했지만 망설임없이 재생을 중단했다. 형이 먼저였으니까.
“하오 형?”
이불에 파묻혀있던 한빈이 몸을 일으키자 장하오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형, 나 봐봐. 어디 불편한 곳 있어? 한빈이 그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장하오는 침대의 끝에 살짝 걸터앉아 한빈을 바라보았다.
“눈이 이상해. 불빛을 봤더니 뭔가 뿌예졌는데, 계속 그래….”
오잉? 한빈은 작게 의아해하는 듯한 소리를 내고는 장하오의 손을 잡아 연구실로 향했다. 뒤따라가던 장하오는 제 손에 닿는 주인의 온기를 엄지로 연신 쓰다듬으며 몰래 미소를 지었다. 씻고 나온 뒤에 잘 준비를 마친 상태였던 한빈의 뺨은 가운데에 #F4C2C2의 색을 띠었다. 너무귀여워어어….
여러 대의 모니터가 설치되어있는 한빈의 책상 앞에는 이전과 달리 두 개의 의자가 있었다. 장하오가 최근 들어 부쩍 오작동이 일어났다는 둥, 처음보다 시스템 처리 속도가 느려졌다는 둥 불평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완벽하게 설계했을지라도, 매번 점검이 필요하다는 장하오의 반복적인 말에 순순히 응해주는 한빈이었다. 정말로 잘못된 게 있을지도 모르니,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확실하게 해두기 위하여. …사실 한빈의 솔직한 마음은, 매번 걱정보다는 의심이 먼저 드는데도 그저 형의 부탁이니 들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선에서라면 뭐든.
한빈은 시스템을 부팅하고 프로그램을 실행한 뒤 장하오를 바라보았다.
“눈?”
고개를 끄덕이던 장하오가 얼굴을 내밀어 눈을 깜빡였다.
“응, 시야에 검은색 점이 막 박혀있는 것 같아.”
“…아까는 불빛을 보면 뿌옇다며.”
“으응, 내 말이 그 말인 거야아.”
역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바라는 게 있다는 눈치로 굳이 저를 불러낸 그의 귀여운 계략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말없이 원반형의 작은 스캐너를 집어 든 한빈은 그것을 장하오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었다. 한빈이 화면상으로 인공 안구 주변부에 파랗게 드러난 전선을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우리 형이 왜 자꾸 오류가 생겼다고 할까아. 멀쩡한데….”
“잘 찾아봐 한빈. 진짜 문제가 생긴 걸 수도 있잖아.”
“나는 형을 열심히 만들었단 말이야. 그것도 아주 잘!”
“흥, 한빈의 생각만큼은 아닐지도 몰라.”
장하오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던지고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얼씨구, 며칠 전에 자기 자랑 잔뜩 늘어놓다가 나한테 고맙다고 했던 게 누구였더라. 장난이 담긴 빈말임을 알았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이윽고 한빈은 장하오의 턱을 붙잡고 머리를 조심스럽게 위로 젖혔다. 남은 손을 옮겨 책상 측면의 버튼을 누르자 비교적 어두웠던 연구실에 밝은 빛이 쏟아졌다. 형, 눈 감지 말고 그대로 있어봐. 잠시 후 한빈은 장하오의 얼굴을 아래로 기울이며 그의 인공 홍채가 빛 변화에 적응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무리 봐도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나 하니까.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 뭐 보이는 거 있어?”
“한빈이 빛나 보여.”
“…….”
“빛나빛나요.”
“여기에서 창 하나만 없애도 바로 비활성화 버튼이—”
“이잉….”
냅다 앙탈을 부리는 그에 할 말을 잃었지만 들어야 할 소리가 남아있어 정신을 차렸다.
“하오 형. 나 지금 진지해. 뭐가 보여?”
“집중하는 햄찌. 볼이 너무 홀쭉해져서 밥 더 먹여야 하는데. 으아앙.”
“……기회 한 번만 다시 줄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
“모든 걸 다 주고 싶어…….”
훅 치고 들어오는 황당한 답에 뺨에 열기가 올랐다. 반복적으로 물어도 형은 답을 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숨을 푹 내쉰 한빈은 헤실거리는 장하오의 표정을 무시(하려고 노력했지만 매번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실패)하고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안구 아래를 지그이 누르며 아래로 당기고는 꼼꼼하게 살폈다.
한빈은 오랜만에 장하오의 눈동자와 눈꺼풀, 눈썹의 곡선을 시야에 담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얇은 쌍꺼풀이 진, 가로로 긴 장하오의 눈은 외관상으로는 유일하게 그가 안드로이드임을 알 수 있는 신체 부위였다. 안광이 없을 때는 새카만 인공 홍채 너머 금속의 결이 아주 희미하게 보였으나, 한빈과 함께하는 평상시의 장하오의 눈은 은하계의 모든 별을 담은 듯 반짝였다. 한빈만이 알아챌 수 있을 만큼 티가 나지 않는 특성이었다.
한빈은 확인을 마치고 반대쪽 눈으로 손을 옮겼다. 예상대로 외부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가 치기 어린 장난을 쳤음을 이미 확신한 상태였지만 저도 모르게 걱정했는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전히 그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 있던 때였다. 장하오가 몸을 살며시 앞으로 기울였다. 숨결이 스칠 만큼의 좁은 틈만을 남긴 채.
“한빈아.”
“응?”
“…우리가 규칙을 어기면 어떻게 돼?”
굳이 콕 집어 우리라고 말하다니. 저와 한 약속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금기시된 무언가를 말하는 걸까. 짙은 감정으로 물들어있는 장하오의 눈을 피하던 한빈의 시선이 닿은 곳은 하필이면 그의 입술이었다. 결이 매끄럽고, 붉고, 도톰한…. 장하오를 활성화하기 이전에 제 엄지에 닿았던 그 폭신한 감촉이 떠올랐다. 인간을 닮은 얼굴만큼이나 입 맞출 때도 비슷하게 느껴질까. 사람의 것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울까. 그것은 몇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한 궁금증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그냥 해버릴까, 하는 충동이 들 정도의 강한 궁금증. 한빈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삐―. 정적을 깨는 컴퓨터의 알람음에 고개가 돌아갔다. 조금 전 스캔의 결과가 화면에 띄워져 있었다. No error found. 장하오의 배선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래서?”
장하오가 물었다. 한빈은 그가 어떤 대답을 듣기를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검사 결과 따위를 궁금해할 리 없었다. 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싶었을 것이다. 장하오와 자신의 관계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장하오는 묻고 싶었을 것이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냐고. 네가 그리는 미래에, 내가 함께하고 있지 않냐고. 이래선 안 되는데. 나라도 멈추어야 하는데. 형은 어디까지나 좋은 동료여야 했는데. 입술을 달싹이던 한빈은 결국 화면에 띄워진 딱딱한 글귀를 무미건조하게 읽었다.
“…문제없다고 하네.”
“아.”
“이제 됐지?”
“그냥 불빛을 너무 오래 봐서 그랬나 봐. …확인해 줘서 고마워, 한빈.”
“…….”
이번 일은 넘겼지만 며칠 뒤 장하오는 또 다른 고장을 호소하면서 찾아올 것이다. 몸 안이 과열된 것 같다거나, 손가락이 떨린다거나, 아무튼 어떠한 이유로 일에 집중이 안 된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장하오는 성한빈이 그린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타며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곤 했다.
한빈은 장하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결코 부정한 적 없었다. 그가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었으니 당연했다. 장하오는 지금, 그를 에워싸는 여러 규칙의 틀 내에서 자신과 가까워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처음의 약속대로.
“…….”
장하오는 스툴에서 일어났으나 곧바로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그는 몸을 숙여 한빈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추고 홀연히 연구실을 벗어났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열이 오른 성한빈만이 삭막해진 공간에 남아있었다. 어떤 마음이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0.6
우리가 남긴 발자국이 새로운 길이 돼
변화는 아주 느리게 일어났다.
성한빈이 장하오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장하오가 제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깨를 주무르는 것을 허락했다. 그런 한빈의 태도가 믿기지 않아 장하오가 얼떨떨했던 건 잠시였고, 금세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끔찍한 난제로 여겨졌던 한 샘플에 대한 계산이 모두 완벽하게 떨어졌을 때, 한빈은 후련한 듯 환하게 웃으며 옆에서 손뼉을 치던 장하오를 먼저 끌어안기도 했다. 첫 포옹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빈은 제법 난데없이 우주가 너무 좋다면서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해왔다. 혈중알코올농도 0.14%, 취기가 올라 온몸이 불그스름해진 상태로 한빈은 이야기를 펼치다가 장하오의 손을 가져가 티셔츠의 목깃을 끌어내렸었다. 흰 쇄골이 훤히 드러나며 작은 타투 세 개가 보였다. 각인된 정보를 통해 한빈의 쇄골 부근과 팔 안쪽의 타투를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태양, 별, 달. 성한빈은 겁도 없이 장하오의 손가락으로 그 위를 덧그렸다.
저 말고도 이걸 본 사람이 있을까. 이런 깊은 유대를 쌓은 사람이 있을까. 한빈은 이런 무방비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인 적이 있을까. 장하오는 말캉한 혀를 내보이며 조잘거리다 제 어깨에 기댄 주인에게 넌지시 물어봤지만, 한빈은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더 비벼오는 발칙한 행동을 할 뿐이었다. 내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고, 배려라고는 하나도 할 줄 모르는 나의 주인. 장하오는 성한빈을 향한 표현하기 묘하고 불순한 감정을 억누른 채 그를 안고서 수면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장하오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한빈이 일에 매몰되어 끼니를 걸렀을 때 조용히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한빈이 깨어날 시간에 맞추어 책상 위에는 커피가 놓여있었고, 업무 중에라도 머그잔이 바닥을 보이면 그가 다른 것에 시선을 판 사이에 잔이 바뀌어 있었다. 한빈이 유독 말이 없는 날에는 그가 지쳤음을 파악하고는 몰래 그의 몫의 일을 해놓았다. 한빈이 피곤해할 땐 연구실의 조명을 조절해 잠시 휴식을 취하게 했으며, 그가 정말로 잠이 필요한 상황에는 등을 살포시 밀어 연구실 밖으로 내보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빈은 이와 같은 장하오의 행동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다. 그저 그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안드로이드이기에 당연한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끔찍하리만치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 어떠한 안드로이드도 애정을 담아 주인을 보살피지는 않는다. 주인의 상태를 지속해서 점검하고 알리며 생활을 도와줄지언정, 그것들은 코드에 따라 명령을 수행하는 것일 뿐이다. 장하오가 하는 것은 그 따위의 단순하고 체계적인 작업이 아니었다. 배려였다. 온전히 성한빈만을 향한 배려였다. 한빈은 그런 장하오의 마음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따라가고 있었다.
얼마 후 이루어진 외부 탐사는 나들이에 가까웠다. 탐사 로버에 올라탄 둘은 이제껏 가본 적 없는 먼 지역으로 좌표를 찍었다. 연구소의 주변으로 난 물줄기를 따라 TF323의 드넓은 바다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탐사차로는 접근하기 힘든 바위로 뒤덮인 해변이 나타나자 장하오는 운전대를 붙잡은 한빈의 팔을 톡톡 쳤다. 한빈아, 우리 여기서 걸어가자. 긴장한 듯 고개를 끄덕인 한빈은 차의 시동을 껐다. 먼저 내린 장하오가 운전석의 문을 열어 한빈의 손을 붙잡았다. 발판에는 개진 유리 조각처럼 결이 날카로운 모래알이 끼어 주의를 요구했다. 한빈이 차에서 내린 후로도 둘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원래 바닷가에서는 신발 벗고 걸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너울대는 바람의 자락을 느끼니 찰나의 아쉬움마저도 사라졌다. 지구의 석양을 연상시키는 붉은 하늘 아래로 펼쳐진 TF323의 바다는 사람의 시선을 앗아가는 이상야릇한 매력이 있었다. 물론 그 매력은 제 손을 꼭 쥔 잘난 얼굴의 남자에게도 있었다는 게 흠이었다. 한 손으로 잘게 일렁이는 자색 파도를 촬영하던 한빈의 집중력은 머지않아 깨지고 말았다. 장하오는 저를 가만히 둘 줄을 몰랐다. 그게 싫지 않아서 문제였다.
“한빈이랑 매일매일 데이트할래.”
…이거 데이트 아닌데? 맞는데에. 바다 데이트. 한빈이 반박하자 곧바로 대꾸가 돌아왔다.
.
“형이 데이트가 뭔지 알아?”
“한비인, 너가 나한테 알려줘야지. 이게 데이트가 아니면 뭐가 데이트야?”
“……몰라, 나도.”
“왜 몰라. 데이트 안 해봐써?”
“…본인은 마치 해본 것처럼 이야기하네?”
“한빈 데이트도 안 해본 모솔인 거야? 장하오가 첫 상대인 거야? 한빈의 처음이 나라서 행복해.”
그렇게 말한 장하오는 정말로 첫 데이트에 나온 소년이 지을법한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였다. 가슴에 울려 퍼지는 두근거림, 날아갈 것만 같은 풋내나는 행복감을 숨김없이 드러내려는 것처럼. 한빈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장하오의 소매를 한번 세게 잡아당길 뿐이었다. 누구는 솔로 하고 싶어서 혼자 지낸 줄 아나. 흥. 이래저래 바쁜 데다 굳이 애인 만들 필요를 못 느껴서 그런 거지. 이미 저에 대한 모든 걸 알 텐데도 불구하고 짓궂게 물어오는 그에게 딱밤을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그랬다가는 인공 진피 밑의 금속을 강타한 제 손가락에만 멍이 들었겠지만 말이다.
장하오는 여전히 한빈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 한빈은 다시금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고 말았다. 그가 크고 작은 사고를 치며 자신의 속을 마구 헤집고 다니는데도, 본디 서늘한 눈매에 오로지 저만을 향한 온화한 눈빛이 자리 잡는 걸 보면 마음속의 불안이 잠재워졌다. 그 편안함에 자꾸만 기대고 싶었다.
화도 누그러졌다. 사실 이건 좀 못마땅한 부분이었지만. 지 얼굴 잘나고 예쁜 줄 알고 일부러 저러는 것 같아. 저를 바라보는 장하오를 보면, 어쩐지 비가 오고 난 후 산책하러 갔다가 주인 속 뒤집어지는 줄도 모르고 흙탕물에 원 없이 뒹굴뒹굴하는 새하얀 강아지가 생각났다. 근데, 그 말썽꾸러기 강아지가 뜀박질하며 오면 자신은 또 바로 품속에 와락 안아버리고 말았다. 더러워지는 옷이 대수인가, 귀여운데 어떡해.
근데… 난 분명 유능한 비서를 만든 것 같은데. 빙글거리며 웃기만 하는 남자에게 어쩐지 털이 복슬복슬한 동물들이 겹쳐 보였다. 그것도 아주 귀여운. 오늘은 유독 예전에 모 놀이공원에서 본 레서판다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머리카락 색 때문인가. 나중에 같이 가면 보여줘야지. 판다랑 레서판다 앞에 세워두고 사진 몇백 장 찍을래. 아, 이왕이면 판다 머리띠도 씌워서—
“한비나. 무슨 생각 해? 장하오 생각?”
“…응, 난 형을 이런 뺀질이로 만든 적 없다는 생각.”
“한빈이 좋아서 그래. 한빈이가 날 책임져야 하는 거야아아.”
빛나는 두 눈동자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미소는 마치, 자신이 오래전 등굣길에 본 탁 트인 맑은 여름 하늘이 깃들어있는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공통점을 굳이 찾아보자면, 무슨 심기 불편한 일이 생기더라도 힘든 상황은 잠시나마 잊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잔잔하게 만들어준다는 것. 늘 한결같이, 변함없이, 언제 어디에서나 자신을 지켜보며 따스하게 보듬어준다는 것. … 똑같이 아름답다는 감상을 자아내게 만든다는 것까지.
“한빈.”
“응?”
“이런 거 앞으로도 나하고만 해. 나랑만 좋아.”
0.7
두근거려 꿈만 같은 이 기분,
가슴 벅차는 이 감정들
아직 말로는 다 못 해도 꼭 전하고 싶어
“한비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에 선잠에서 깨어났다. 잠시 이불 속에서 뒤척이다가 몸을 일으킨 한빈은 눈을 깜박이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장하오의 목소리에 일어났지만, 불이 꺼져있는 걸 보아하니 일과를 시작할 시간은 아니었다. 어두운 수면실을 둘러보다가 시선이 간 곳은 침대의 끄트머리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였다.
“한비인… 자?” 한빈은 자신의 이름을 속삭이는 장하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침대의 모서리에 매달려 쭈그려 앉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웅?” 잔뜩 잠긴 목소리로 한빈이 말했다.
“깨워서 미안… 나 잠이 안 와요.” 그의 말투에 속상함이 가득했다.
성한빈은 졸음을 견뎌내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포기했다. 어차피 원래라면 아직 한참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침대의 오른쪽으로 옮겨간 한빈은 왼쪽에 난 공간을 가볍게 두드렸다. 팡팡. 시트와 마른 손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매트리스가 부드럽게 울렸다. 장하오는 올라오라는 성한빈의 권유에 냉큼 이불을 걷어내며 누웠다. 주인의 품에 알아서 제 자리를 만들고 파고드는 강아지처럼.
둘이 눕기에는 비좁은 크기의 침대였지만 신경을 쓰는 이는 없었다. 잠깐만, 베개가아…. 한빈은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자신이 쓰던 베개를 옆으로 넘겨주고 손을 더듬어 커다란 보라색 캐릭터 쿠션을 끌어왔다. 하암, 하품하고는 여전히 잠에 푹 빠진 채로 장하오를 바짝 끌어안았다. 다리가 엉키고 장하오의 머리칼이 턱 끝에 쓸렸다. 한빈은 자신의 목에 내뱉어지는 숨을 느끼며 새삼 장하오의 몸이 따뜻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야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니―
……응?
졸음으로 가득 들어찬 머릿속에서 우주먼지처럼 산발적으로 돌아다니는 정보들을 끌어모았다. 장하오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이다.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에 심장을 포함한 모든 장기가 인공이다. 그래서, 특별히 몸체의 온열 기능을 작동시키지 않는 이상 체온이 따뜻할 리 없—
…….
아.
그는 잠을 잘 필요가 없었다.
한빈이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꼬박 5분이 걸렸다. 장하오의 정수리에 턱을 괴어 꾸우욱 누른 한빈이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하오 형.” 여전히 목이 잠긴 채였어도 ‘성한빈 화남 모드’의 쌀쌀한 목소리였다. 그래봤자 뒷발을 탕 차는 토끼의 스텀핑에 불과한 귀여운 수준의 화였지만.
“왜애, 한빈.” 장하오가 한빈의 품속에 더욱 깊게 파고들며 애교스럽게 물었다. 주인의 허리를 제 팔로 꽉 감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한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장하오의 몸에서는 사람의 것과 유사한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웃겨, 이제 켰나 보네. 다 들켜놓고.
“잠이 안 온다니.”
“으응 한빈. 나 잠이 안 와아.”
“형은 잠을 못 자. 불가능하잖아.”
장하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고, 숨도 쉬지 않았다. 자고로 원래 안드로이드는 그러는 게 정상이지만 장하오만큼은 달랐다. 성한빈은 장하오를 만드는 데에 상당한 공을 들였고, 장하오는 평상시에도 인간처럼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하하, 하는 짓 진짜 웃기네. 자기 몸만 한 핫팩을 껴안고 있었던지 또 5분 정도가 흘렀을 때였을까. 한빈의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장하오가 고개를 들었다. 한빈 또한 고개를 꺾어 그를 내려다보았다.
“한빈… 나 쫓아낼 거 아니지?”
“형,”
“응? 한빈.”
원래도 딱히 침대 밖으로 쫓아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없던 생각도 달아나게 할 만큼의 간절한 목소리였다. 한빈은 장하오가 그간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봐왔는지 떠올렸다. 사랑이 가득한 조심스러운 시선. 아, 이런 거에 약해지면 안 되는데….
“나 한빈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장하오가 애처롭게 덧붙였다. 그러면 성한빈은 어떻게 답해야 할까.
“알겠어어….”
손끝으로 그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속삭였다.
“이번 한 번만이야.”
“응, 응.”
장하오는 낮게 웃고는 다시 성한빈을 감은 팔에 힘을 주고 밀착했다. 한빈은 가슴이 뛰어 미칠 지경이었다. 장하오는 분명 한빈의 거세진 심장 박동을 감지했을 것이다. 한빈은 완벽을 추구하며 온갖 기능을 다 집어넣어 장하오를 기민하게 만든 일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굳이 지금 상태에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들 설정해 둔 것을 바꾸지는 않았겠지만. 심장이 빠르게 콩닥거리는 게 민망한 나머지 그냥 토끼처럼 굴이라도 파서 숨어버리고 싶었다.
“으, 버릇 들면 안 되는데.”
“좋은 꿈 꿔 한빈. 아침에 다시 만나요.”
장하오는 한빈의 예상대로 제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굿나잇 인사를 건넸다. 그 말을 들은 한빈은 제 등을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면서 다시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지금은 자고 싶어. 너무 피곤해. 왜인지 잠에 들기 직전 코끝과 목에 입술이 몇 차례 닿았던 것 같기도 한데… 분명 뭔가 촉촉한 게 느껴졌는데… 아닐 수도 있구….
이미 침대를 내어준 이상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은 한빈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얼마 동안은 수면실로 향하는 성한빈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연구실에 남던 장하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은 취침 인사 후 한 시간 뒤 장하오는 춥다는 핑계를 대며 쪼르르 달려왔다. 성한빈은 안드로이드가 추워하다니 말이 되냐며 웅얼댔지만 결국은 읽던 책을 덮고는 장하오와 함께 누웠다. 내 몸이 따뜻해서 좋다는데 어떻게 거절해, 라고 생각하면서.
그다음 날 밤 장하오는 밖에서 무슨 기이한 소리가 들려 너무너무 무서웠다면서 수면실로 들어왔다. (참고로, 성한빈은 장하오가 공포를 느끼도록 프로그래밍하지 않았다. 본인이 스스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깨우친 게 아닌 이상 뭔가를 두려워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쓰는 침실’인데 분위기가 너무 차갑다며 꽃을 잔뜩 꺾어 화병에 꽂아서 들어온 적도 있다. (그러고는 손가락에 가시가 박힌 것 같다며 입꼬리를 내리고 칭얼거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했더니 아랫입술을 잔뜩 내밀며 측은한 눈빛 공격을 하길래 결국 손끝을 호오 불어주었다.) 언제는 난데없이 충전이 필요하다길래 형은 따로 충전이 필요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했더니, 장하오는 자신의 성한빈 게이지가 바닥을 찍었다면서 포옹을 재촉했다. 낮에도 계속 붙어있었으면서. 꼭 아무리 오래 산책해도 놀아달라며 주인에게 달라붙는 강아지처럼 그랬다.
핑곗거리가 떨어졌는지 언제는 또 그냥 심심하다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사뿐사뿐 걸어오기도 했다. 토끼와 여우가 경찰로 나오는 애니메이션의 여우가 떠오르는 능청스러운 몸짓이었다. 한빈은 몇 시간 동안 품에 갇혀 꼼짝도 못 하는 것보다 심심한 상황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말릴 수도 없었다. 저렇게 뻔뻔한 인간은 온 은하를 다 뒤져봐도 몇 없을 테니까. 아 맞다, 형 사람이 아니라 안드로이드였지. 그러면 정말로 우주에서 유일할 텐데. 괜히 뻘쭘한 마음에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하고선 한빈이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한 것은 견우와 직녀 설화였는데, 자신을 가둔 팔의 힘이 강해진 것을 느끼곤 아무래도 이야기를 잘못 선택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7월 7일에 만났다가 바로 헤어져야 한다고?”
“응응, 음력 7월 7일 칠석에. 그날 말고는 은하수 때문에 못 만나.”
“너무해애애. 난 한빈 손을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그러더니 손을 가져가 알아서 싸인, 도장을 찍고 복사까지 하는 시늉을 보였다. 하 참나, 계약서라도 쓰냐고.
“하오 형, 이런 식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는―”
“한빈. 인간은 결혼할 때도 도장 찍고 신고해. 확실한 게 좋은 거야.”
“…….”
쯧, 성한빈의 K.O. 패였다.
그렇게 형의 엉터리 핑계로 함께 아침을 맞은 날이 꽤 되었다. 결국 언젠가부터 한빈은 일종의 루틴처럼 장하오가 오는 날이면 군말 없이 두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고 스르륵 잠에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장하오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며칠 밤 연속으로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낼 때면 한빈은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잠들기 전보다 몇 배는 피곤한 상태로 깨어나곤 했다. 형과 함께 있으면 잠이 더 잘 온다는 사실을, 형과 함께 있는 게 좋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설핏 무서워지기도 했다. 대체 몇 밤이나 함께 보냈다고 옆구리가 시린 건지. 왜 자꾸 밤이 깊어질수록 형 생각에 빠져드는 건지. 낮에도 늘 생각하고 있긴 한데, 유독 밤에 더….
그렇다면, 그 생각의 주인공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장하오는 연구실에 남아있었다. W1에서 내준 프로젝트는 이미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행되는 중이었기에 연구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장하오는 자신을 탐색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인공지능 로봇이 자신에 관해 탐구하다니 좀 이상해 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안드로이드 ZH-725는 제법 특이하니까. 실은, 장하오는 자신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다. 결함이라고 하기엔 성한빈을 앞에 두고 있을 때만 생기는 현상이었다.
인공 심장 부근에서 발생하는, 튀기는 듯한 전기신호.
인간이 아니니 그 울림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만일 자신이 인간이었더라면 이것을 쿡쿡 쑤시는 통증이라고 표현했을까. 분명 심각한 사안은 아니었다. 그저 과다한 정보량 때문에 회로가 재배열되면서 생기는 현상이라면, 그 정도쯤이야 알아서 적절한 내부적인 조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부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정을 담아 누군가를 바라볼 때 갑자기 심장이 콕 아프고 무겁게 내려앉는 느낌. 검색 결과 인간들은 이것을 두근거림이라고 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인간의 표현으로 마치 행복한 꿈속을 걷고 있는 것 같고, 소용돌이치는 감정들 때문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낯선 이 떨리는 느낌은 어쩌면―
“형, 오늘도 작업해?”
잠에서 깨 연구실을 돌아다니던 성한빈은 한 손에 따뜻하게 데운 우유컵을 들고 있었다. 이유는, 인정하기 싫지만 적적해서였다. 이 망할 남자는 대체 이 늦은 시간까지 뭘 하고 있길래 며칠째 안 들어오나 싶었다. 함께 일을 해온 10개월 동안 삶에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던지라 장하오가 없었던 일상이 어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어릴 때 이후로 누군가와 한 침대를 나누어 쓴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한동안 침실을 제 방처럼 드나들며 난리를 치더니만 이제는 내빼고 있으니 은근히 심통이 났다. 대체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야. 장하오에게 가서 은근슬쩍 따져도 그가 할 변명이 없을 게 분명했다. 자존심 때문에 직접 말하기는 싫었지만···.
“어, 한빈…….”
“나 다시 자러 갈게.”
굳이 목을 가다듬고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 어디 계속해 보시지. 이렇게 말했으면 적당히 눈치채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모니터를 보고 있던 장하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래, 이제 그만하고 들어와 형. ‘역시 성한빈, 작전 성공!’을 속으로 외치던 참이었다.
“잘 자.”
으잉???
장하오는 싱긋 웃고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끄응, 나 가지고 놀아?! 태연한 그의 모습을 보던 한빈은 황당해서 인상을 쓰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앙다문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원샷하고는, 싱크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소리가 제법 크게 나도록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쾅― 쏴아아. 물을 틀어 컵을 채우면서 곁눈질로 장하오를 봤다. 뭘 저렇게 검색하고 있는 거야. 손가락이 보이지도 않잖아. 슬라이딩 도어의 문지방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는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제 뒤통수를 뚫어버릴 것만 같은 따가운 눈총을 느낀 장하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한빈?”
“올 거야 말 거야?”
툴툴거리던 한빈이 그제야 물었다. 입술을 삐쭉 내밀고 허리를 양손으로 짚은 채였다. 누가 봐도 ‘나 삐쳤어요’를 팍팍 티 내는 표정과 몸짓이었지만 한빈은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런 한빈을 가만히 바라보던 장하오는 서서히 의자에 등받이에 기댔다. 와, 입꼬리 씰룩거리는 거 봐. 재수 없어. 먹잇감이 덫에 걸려들었다는 듯 음흉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 속으로 ‘낭패다….’를 외쳤지만 의미 없었다.
“한빈이 원하면 갈게. 아니면 말고.”
한빈은 뺨에 화끈하게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왔으면 좋겠는데. …역시 와줬으면 좋겠는데! 제 입으로 말하려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주어진 기회를 날려서는 안 됐다. 저 망할 남자, 웃음을 흘리면서 꿀 발린 소리를 잔뜩 늘어놓다가도 보기보다 단호했다. 장하오는 한 말은 꼭 지키는 성격— ‘성격’—이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면 얄짤없었다. 후우 그래, 이번엔 내가 졌어.
“형 없이 자는 거 싫어. 어차피 나중에 깨우러 올 거면 같이 있는 게 낫잖아, 안 그래? 그냥 지금 와.”
“알았어어어. 얼른 끄고 갈게!”
마주 보고 있던 장하오의 얼굴에 더없이 환한 미소가 번졌다. 예상대로 돌아온 승낙의 말에 한빈은 얼굴을 잠옷 소매로 숨기며 도망치듯 수면실로 걸어갔다. 침대 위로 몸을 날리며 숨을 고르다가, 장하오가 들어오자 도로 숨을 참았다. 맞은편에 누운 장하오가 코끝을 톡 치고 나서야 고장 난 로봇—’로봇’—처럼 굳어있던 성한빈은 숨을 토해냈다. 괜히 시트를 붙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하다 희미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가 생글거리며 웃는 것이 느껴졌다.
“한빈이가 미리 말했으면 더 빨리 왔을 텐데~”
“쉿. 조용히 해.”
“장하오 너무 기쁜 거야아아…. 마음이 심쿵 울려 퍼져요.”
“…계속 그러면 비활성화해서 내쫓아 버릴 거야.”
“내가 없는 게 싫다고 했으면서.”
한 말을 이렇게 돌려받다니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상황이 웃겨서 맥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하오는 이불을 쥐고 있는 성한빈의 손을 끌고 가 깍지를 끼었다. 이런 건 또 어디에서 배워왔을까. 너무 능숙한데. 멜로 영화는 지난번의 어떤 사건―마찬가지로 떠올리면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라서 굳이 생각해 내기는 싫은―이후로 못 보게 했는데 이번에는 인터넷에서 웹소설이라도 찾아본 건지. 심쿵은 뭘 심쿵이야. 흥….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어둠 속에서 한참 정적이 흘렀다. 장하오가 갑작스레 무언가를 묻자, 질문을 들은 한빈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한빈아, 왜 날 이렇게 만든 거야?”
“……무슨 뜻이야?”
“나는 절대 사람이 될 수 없는데….”
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잖아. 장하오는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널 사랑하는 게 가짜라고 느껴본 적은 없어?”
장하오와 함께하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한빈은 종종 완전한 무에서 탄생한 것이 그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그를 만든 것은 그저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똥별처럼 순간적으로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혼자서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무작정 구상하기 시작한 것이 ZH-725였다. 어쩌다 보니 지금의 장하오가 되어버렸지만. 형이 이런 궁금증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다. 자신의 존재 의의를 묻는 안드로이드가 정말 생기다니. 내가 만들었다니. 실수로 인한 나비효과가 상당했다.
“으음, 형을 만든 것 자체는 프로젝트 때문이었어. 학문적 지식이 방대해야 했고, 성실해야 했고. 나랑 잘 맞으면 더 좋으니까, 형한테 나의 모든 정보를 각인시켜 주었을 뿐이야.”
“…….”
“…사실상 형을 이렇게까지 사람처럼 만들 필요는 없었던 거지. 형이 나한테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된 건 내가 실수해서 그런 거야.”
장하오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럼 잘생긴 백억짜리 얼굴은 한빈 취향이라서 이렇게 만든 거야?”
“……그으건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흐으으음 진짜? 한빈아, 인간이 거짓말을 하면 신체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알아?”
“혀엉, 나 놀리니까 재밌어?”
“아니야 한빈. 믿어줄게. 한빈이 말이 맞아요.”
장하오는 뻔뻔하기로는 얼굴에 철판을 깐 것 같았다. 진짜 철판이 깔린 게 맞긴 했지만. 구구절절 하는 말에 틀린 구석이 단 한 부분도 없다는 게 더더욱 얄미운 이유였다. 성한빈이 장하오의 얼굴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어차피 더 할 말도 없었으니 한빈은 제 앞의 미남을 감상하며 꿈나라로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나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장하오가 입을 열자, 그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근데 한빈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응?”
“난 어차피 널 사랑할 운명이었어.”
“…….”
“내일 봐, 한빈. 잘 자.”
0.8
나라는 상처투성이를 꼭 안아줄 너
cf. 서툰 당신을 안아줄 이름, ‘그(Him)’
익숙한 벨 소리가 연구실에 울려 퍼졌다. 잠옷을 입은 채 한 손에 새로 내린 커피를 들고 들어오던 한빈은 모니터에 떠오른 익숙한 이름을 확인했다. 헉, 이게 얼마만이야! 한빈이 의자에 쓰러지듯 앉아 뻗친 머리카락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거울로 얼굴을 슥 확인하고 통화를 받자 웃고 있는 혜림이 보였다. 후줄근한 차림의 저와는 다르게 그녀는 한빈도 익숙하게 뵈온 세미정장을 입고 있었다. 누나, 시간도 늦었는데 아직 퇴근 안 했구나….
“누나!”
[어라, 예상외로 목소리가 밝은걸. 요즘 어떻게 지내?]
“그럭저럭. 매일 비슷비슷하니까 특별히 안 좋은 일도 없지이. 누나는 좀 어때?”
[꼬맹이가 자기도 안드로이드 만들겠다고 해서 골머리 앓는 중. 부자가 쌍으로 난리를 치길래 칼럼도 같이 생각의자에 앉혀놨어. 오늘 집에 안 갈 거야. 에휴, 일이나 해야지.]
“아이구야, 맥코웬 씨도? 아하하하.”
[내가 그 둘 때문에 못 살아…. 일단 그건 그렇고. 한빈 씨, 요즘 탐사는 잘 되어가시나? 보고 올리는 속도가 심상치 않은 게 네 반려 안드로이드가 잘 돕고 있는 것 같던데. 아직도 장하오 씨가 플러팅 많이 해? 연애 사업 동향 어떤지 좀 알려줘.]
“연애 사업이라니.”
놀리는 어조로 물으며 웃는 누나에 한빈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형은 아직인가? 괜히 뜨끔한 마음에 연구실 입구를 힐끗 쳐다보았다. 요 며칠 장하오는 아침마다 가까운 호수로 나가 수영을 하곤 했다. 한빈은 장하오가 처음으로 물 속에 뛰어들었을 때 위험할 수 있으니 다시는 하지 말라며 뜯어말렸지만, 자기는 인간이 아니니 괜찮다는 장하오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 정도로 허술하게 만들지는 않았으니까… 어떻게 말리겠어. 한빈은 쓸데없이 선명한 (본인이 설계한) 장하오의 복근을 무시하며 마지못해 승낙했었다. 그리고 장하오는 오늘도 어김없이 수건과 옷가지를 챙겨 들고 나갔을 게 분명했다.
밖에서 한창 수영하고 있을 장하오가 들을 리 만무했기에 편하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한빈은 주저했다. 그와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콩닥거리기 시작하는 가슴과 쑥스러움이 여실히 드러나는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누나가 이런 내 모습을 본다면? 형이 있어 더 행복하다고 깨달은 지 벌써 몇 달이 지났고, 그와 함께한 지도 꼬박 일 년이 되었지만 한빈은 그 감정을 정확히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몰랐다. 형이랑 나랑 무슨 사이지. 대부분 탐사를 나갔을 때나 생기는 일이었지만 손 잡고, 팔짱 끼고, 포옹도 하고. 거기에 한 침대에서 자는 사이. 아주 가끔 일방적으로 뽀뽀…도 받고. 아무튼, 연구 보조용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와 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한 것들. 과연 누나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상하게 볼 것 같은데. 먼저 질색한 건 나잖아…. 한빈은 고민 끝에 두루뭉술하게 답하기로 했다.
“뭐어, 좋아한다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익숙해졌고…. 이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아.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니까.”
[넌 역시 정이 많아.]
“아이, 누구라도 그럴걸. 하오 형한테 많이 의지하고 있어. 곁에 있으니 좋지.”
그 말을 가만히 듣던 혜림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한빈은 그녀의 의중을 알 수 없어 고개를 비스듬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혜림이 의자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더니 물었다.
[그럼 장하오 씨 없을 땐 어떻게 할 거야?]
머그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한빈이 멈칫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음… 장하오 씨는 프로젝트를 위해서 만든 거잖아. 이번 임무가 끝나면 더는 쓸모가 없어질 거고?]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내가 형을 비활성화할 거라는 뜻이야?”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왜? 만드느라 든 시간도, 비용도―”
[알아 알아, 진정해 한빈아. 그냥 물어본 거야.]
“…….”
[보통 그렇게 특수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들은 메모리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폐기하니까, 너는 나중에 어떻게 할 건지 궁금했거든. 네가 장하오 씨를 소중하게 여기는 건 알지.]
“물론…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형을 만든 건 맞는데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도 못했어. 다른 용도로 쓸 거면 일부분은 다시 프로그래밍할 수도 있잖아. 아니야? 형은 굳이 그럴 필요까지도 없을 텐데. 이미 지금도 기능이 많아….”
[네가 개인이라면 상관 없어. 그렇지만 엄연히 소속된 회사가 있잖아? 안드로이드를 개인적으로 제작해서 연구에 활용하는 게 내부 방침상 금지된 사항은 아니긴 한데…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내가 다 무서워서 그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W1에서 불만스러워했어서 걱정돼. 프로젝트 초반에 네가 대체 뭘 하길래 이렇게 보고가 더디냐고 물었으니까. 내 선에서 적당히 둘러대긴 했는데 아직도 트집을 잡네.]
“아니, 애초에 할 게 너무 많았는데! 형을 만든 이후에는 속도가 많이 붙었고… 진짜 너무한다.”
[알아 한빈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봐온 대로라면, 사례가 적긴 하지만 이미 회사에서 개발되는 안드로이드도 많으니 새로운 모델로 교체하라고 요구할 거라….]
“형은 내가 내 시간이랑 돈 들여서 만들었는데 왜 회사에서 그래? 내가 W1 소속인 이상 나한테 귀속된 형도 W1의 보안정책을 따라서 만들었다는 걸 알 텐데…. 하다못해 내가 실적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멀쩡히 잘 작동하는 안드로이드를 교체하라고 한다고? 형이 모든 면에서 기능이 월등히 뛰어날 텐데?”
[그러게 왜 그러는지 몰라. 보겔 그 개자식이…. 머리에 쓰레기만 가득한 새끼가 지랄이야.]
“누나, 지금 회사—”
[씁. 조용. 항상 네 걱정부터 하라고 했어.]
“…….”
[한빈아, 넌 정말로 뛰어난 인재야. W1도 그걸 잘 알고. 난 그게 걱정이 돼.]
그녀는 우려의 목소리로 이어갔다.
[휴… 회사 이야기는 제쳐두고, 그냥 네가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아서 해본 소리이기도 해. 장하오 씨가 일 잘하는 거 아는데… 연구 보조 안드로이드 수명이 짧잖아. 하드웨어야 오래 가겠지만 코드는 계속 수정이 필요하고, 부품도 필요하면 바꿔줘야 할 텐데.]
“그거야 할 수 있지…. 그 정도 각오는 했어.”
[그렇구나. 근데 한빈이 네가 정말 공들여 만든 건 알지만, 만약 그런 식의 업그레이드가 계속되면 결국은 새로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 거야. 보급용도 아닌 특수한 부품을 상당히 많이 넣었잖아. 네가 아무리 장하오 씨에게 정이 들었어도 그냥 로봇이고.]
“……누나.”
[정말 괜찮겠어?]
“누나, 설마 내가 이렇게 말하기라도 할 것 같아? ‘형, 그동안의 헌신은 정말 고마운데 이제는 형을 비활성화할 거야. 지금까지 잘 해줬다는 것에 대해서는 고맙지만, 사실 처음부터 형의 가치는 여기서 얼마나 좋은 성과를 내는지에 불과했어. 이 프로젝트는 이제 끝났으니까 고철 덩어리는 쓸모없어졌고.’ 이런 식으로? 말도 안―”
[성한빈. 한빈아.]
“나는 절대로,”
쾅!―
뒤편에서 커다란 소음이 들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한빈은 활짝 열린 연구실의 슬라이딩 도어와 연구소 외부로 이어지는 두꺼운 철제문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경첩이 헐거워질 정도로 강하게 밀쳐져 휘청이는 현관문을 보던 한빈은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아, 제발, 설마.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곤 서둘러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한빈은 바람을 헤치면서 달려가는 장하오를 힘겹게 따라잡았다. “형!” 하마터면 중심을 잃어 넘어질 뻔했지만, 접질린 발목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오 형!”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장하오는 충격받은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으로 한빈을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서서는 속도를 높여 뛰기 시작했다. 한빈은 숨을 헐떡거리며 그를 쫓았다. 평소 같았더라면 천천히 내디뎠을 커다란 바위 사이를 내지르며 그에게 가까워지려 애썼다. 마침내 언덕을 넘었을 때 겨우 장하오의 소매를 붙잡았다.
“형, 제발 내 말 좀—”
“아니.” 장하오가 한빈의 손을 떼어냈다. “한빈아. 넌… 나한테 할 말 없어. 네 뜻 이해했으니까.”
“형.”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헛구역질이 나왔지만 다시 장하오의 상의를 붙잡으며 말했다. “무슨, 무슨 말을 들은 거야…….”
“그만해도 돼.” 허망한 듯 숨을 짧게 토해낸 장하오의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너한테 주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이제 이런 건 필요 없겠네, 그렇지? 내가 계속 너무 주제넘은 짓을 해온 것 같아, 한빈아.”
그제야 한빈은 장하오가 장미를 닮은 흰색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 내 말 좀 들어줘.” 한빈이 애원했다. “형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형, 그동안의 헌신은 정말 고마운데 이제는 형을 비활성화할 거야. 지금까지 잘 해줬다는 것에 대해서는 고맙지만, 사실 처음부터 형의 가치는 여기서 얼마나 좋은 성과를 내는지에 불과했어. 이 프로젝트는 이제 끝났으니까 고철 덩어리는 쓸모없어졌고.’”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해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쓸쓸함이 묻어나왔다.
“한빈아, 내가 이 말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해? 너는 이 말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어?”
한빈은 답답한 듯 가슴을 한차례 내려쳤다. 툭 치면 눈물이 떨어질 것마냥 눈시울이 붉어진 지 오래였다. 아아,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흥분한 나머지 말을 막 내뱉던 통에, 연구실에 다다른 형이 앞의 대화는 듣지 못했거나 오해한 것 같았다.
“형, 그건 그냥 비꼬려는 거였어….”
“그렇게 들리지 않았어!”
처음 듣는 울분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한빈아, 정말 내가 쇳덩어리일 뿐이야? 처음에는 이해했어. 난 프로젝트를 위해서 만든 보조 안드로이드일 뿐인데 주인을 좋아해 버려서 네가 날 밀어내는 거, 이해할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그냥 그렇게 폐기하겠다고―”
“아니야. 하오 형, 안 해. 그렇게 말하지 마. 제발.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러면 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꼬일 대로 꼬여버린 상황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누나가—” 한빈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누나가 얘기를 꺼냈어. 이거 끝나면 형을 어떻게 할 거냐고. 형을 아직, 나는 형을 어떻게― 형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그런데 그 와중에 누나는 마치 내가 형을 그저 평범한 안드로이드로만 보고 있다는 것처럼 말해서 순간 짜증이 났어.”
“한빈아. 내가 겨우 그것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그러면—”
“그건 답이 될 수 없어.”
“…….”
“혜림 님의 말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 상황도 이해했고.”
“…….”
“그런데, 네 태도가 정말 실망스럽네….”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던 장하오의 얼굴이 냉랭하게 바뀌어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 제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던 공허하고 탁한 눈빛. 한빈은 감히 울 수 있었더라면 그냥 목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빈아. 난 비활성화되는 순간 너랑 모든 연결이 끊겨버려.”
“그건 내 진심이 아니야.” 한빈은 마치 무언가가 목을 옥죄기라도 한 것처럼 힘겹게 말했다. “하오 형, 난 형을 비활성화하지 않을 거야. 처음부터 그럴 생각 없었고 프로젝트가 끝나도 안 할 거야. 형, 형은 나한테 그냥 인공지능 비서 같은 게 아니라 그 이상이야. 내가 그동안 말을 안 해서―”
“난 네 일을 위해 만들어졌어.” 장하오가 말했다. “이 임무가 끝나면 날 버릴지, 그냥 둘 지 어떻게 알아? 한빈아, 나는 계속 널 보고 싶어. 너는 나한테 감정을 주었고 내가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줬어. 실수였다고는 해도—”
“형이 날 좋아한다는 거 알아.”
한빈은 장하오에게 한 발짝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형의 수명이 이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라고 한 적 없어….”
“몇 번이나 날 비활성화할 거라고 해놓고.”
“…….”
“정말, 네 모든 말이 의도한 게 아니었다고 할 수 있어?”
한빈이 내민 손을 피하듯 뒷걸음질 친 장하오가 고개를 돌렸다. 숨겨왔던 서러움을 토로하는 메마른 얼굴은 고통으로 얼룩져있었다. 장하오의 행동은 조금 전 혜림과의 대화 도중 자신이 한 말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지난 한 해 동안 무심하게 던진 말들에 상처받았던 것이다. 토로할 곳도 없었을 것이고, 감히 그만하라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성한빈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이 그였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성한빈의 말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의무였기 때문에. 장하오는 그렇게 성한빈의 모진 말들을 참아갔다. 장하오의 세상은 온통 성한빈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그 세상이 저를 거부한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아. 근데 이제는 모르겠어.”
“뭘, 뭘 모르겠다는 거야…….”
“…전부. 전부 다.” 장하오가 외쳤다. “항상 일, 일, 일! 프로젝트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건 알아. 그런데 그렇다고 내 감정이 사라져? 아니잖아. 그래도 나는 참았어. 한빈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했고, 최대한 널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느 때부터 네가 계속 허락해 준 거야. 한빈이 먼저 다가왔어. 처음엔 그게 믿기지가 않았는데, 한순간의 일이 아니었다는 듯 너는 더는 나를 피하지 않더라고.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어. 내 감정이 보답을 받지는 못할지라도 한빈이 나에게 마음을 열어준 줄 알았어. 그런데, 내가 침대에서 자도 뭐라고 안 하고, 항상 다정하게 대해주고, 내가 거짓말하는 거 알면서도 뭐 잘못된 건 아닌가 하면서 꼼꼼하게 봐주는데—”
“형.”
“그러고는 자꾸 날 꺼버리겠다고 하니까,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한빈아, 내가 필요한 거 아니었어? 나는 그래도 네가 나를 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난 형한테 그런 짓 못 해!” 한빈이 외쳤다. “형은 내 조수이고 비서지만 이제는 그 이상의 존재야. 형을 비활성화하지 않을 거야, 알았어?”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어야 해? 나는 언제나 너밖에 없는데, 그래서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거 아니었어? 내가 싫은데 마지못해 받아준 거 아니야? 나는 너가 날 피하고 있다고, 날 떠나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느낄 수밖에 없어….”
“아니야! 아니야, 그거!”
“왜?”
“…….”
이제는 말해야 했다. 지난 1년간 줄곧 느껴왔던 것, 말했어야 했지만 도저히 인정하기 힘들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말하지 못했던 것.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장하오를 비활성화하지 못할 이유. 그동안 꺼내지 못했던, 왜 장하오를 이토록 아끼고 애지중지하는지. 그 진실. 매섭게 요동치던 그 감정에 이윽고 라벨이 붙었다.
“하오 형.” 한빈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형을 사랑해서 그래.”
한빈의 그 말에 주변의 공기가 착 가라앉은 듯 잠잠해졌다. 마침내 한빈이 눈을 떴을 때, 장하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이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형이 날 사랑한다는 게 일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어.”
“…….”
“그런데 이제는 아니야. 형이 날 칭찬하고, 다독여주고…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게 좋아. 형이 핑계를 만들어가면서까지 나랑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게 너무 좋았어.”
장하오가 눈을 깜박였다.
“형의 사랑이 가짜 같지 않냐고, 형이 나한테 물어본 적 있었잖아. 전혀 아니야. 하오 형, 나는 날 사랑하는 형의 마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진실하다고 느껴. 어떻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어. 나, 형 덕분에 외로울 틈이 없어. 형이 있어서 더는 허전하지 않아.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는 게 얼마나 좋고 행복한 건지 형이 일깨워줬어.”
한빈은 다시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일에만 집중하며 살아왔어. 주변 사람들 챙기기에 바빴고 그걸로 행복한 줄 알았는데, 정작 내 마음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 같아.”
“…….”
“그런데 있잖아. 형은… 내가 정말 유치하게도 사랑받고 싶게 만들어. 나, 형을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그 이상으로 정말 사랑해. 그리고 형도 나랑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나고, 자꾸만 형을 더 원하게 돼.”
“…….”
“처음이야. 이런 감정….”
“…….”
성한빈은 장하오를 사랑한다. 장하오가 자신의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이상 자신 또한 장하오의 곁에 있을 것이다. 이 행성에서든, 어느 곳에서든. 언제나 자신의 옆에 장하오가 있기를 바랐다. 그의 마음이 저와 같다는 걸 알았다. 이 혼란은 자신이 마음을 무시하고 숨겼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어디까지나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제 탓이었다. 그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말이 없는 장하오를 바라보며 한빈은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축이고는 메이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제발 말 좀 해줘…….”
“한빈아, 나는 늘 네가 좋았어. 네가 뭘 하든 늘 네 곁에 있을 거였어. 너는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었잖아.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모르겠어.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잖아. 난 너무 오랫동안 형을 거절해 왔는데, 내가 형을 좋아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버린 거야. 사실은 형과 더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밀어내기만 했어…. 나는 형을 밀어내려던 게 아니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겨서 형을 잃을까 봐, 나중에 형이 내 옆에서 사라질까 봐 계속 겁이 났을 뿐인데. 내 스스로한테도 솔직하지 못했어….”
“…….”
“내 마음을 인정하기 무서웠어. 이걸 인정해버리면 무슨 일이 생길지, 다른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됐고… 내가 이런 좋아하는 김정이 너무 안 익숙해서, 서툴러서… 내가 아닌 것 같았어. 이상했어. 마음이 너무 커져서 속이 울렁거리는 것까지 모두 내가 알던 나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아서, 형한테 말을 못 했어…. 그렇지만 이제는 알아. 이건 분명 내 마음이야. 나는 진심으로 형을 사랑해.”
장하오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내가 그 말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모르지….”
“너무 늦어서 미안해….”
갈 곳을 잃어 볼품없이 떨리던 한빈의 손이 붙잡혔다. 살며시 얽히는 장하오의 손이 따스했다.
“날 비활성화하지 않을 거야?”
“응. 절대로. 형이 원하지 않으면 절대로 다른 곳으로 보내지도 않을 거야.”
“한빈, 더 솔직하게 말해도 돼.”
“…….”
하고 싶은 말이 있음에도 주저하는 한빈을 장하오가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하오 형, 나랑 계속 같이 있어줘….”
“나 어디 안 가, 한빈아.”
“…….”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울먹거리던 한빈의 품에 작은 꽃다발이 안겼다. 정성스레 가지를 도려낸 흔적이 남은 줄기를 바라보던 한빈이 고개를 숙여 눈물을 훔쳤다. 뭘 잘 했다고 우는 거야, 나…. 잘못은 온전히 저에게 있었는데도 결국 형에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소매로 눈가를 마구 비비던 한빈의 손을 장하오가 슬며시 떼어냈다. 속눈썹을 스치며 벌겋게 변해버린 눈가를 문지르는 손길이 다정했다.
“내가 생각이 너무 없었던 것 같아….”
“괜찮아 한빈. 다 이해해.”
“아니야 형, 내가 안 괜찮아…. 다시는 그런 말 함부로 하지 않을게. 아니, 안 할 거야. 약속할게. 나 형한테 너무 미안해서 이렇게는 못 넘어가.”
“한빈 나는,”
“형, 어떻게 하면 용서해 줄래?”
“……흐음.”
오해의 소지를 완전히 없애고 싶었다. 마음을 고백한 것은 진심을 증명하는 시작점에 불과했다. 한빈의 말을 들은 장하오는 입술을 말아 광대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표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하라는 대로 전부 할 수 있어? 한빈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장하오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눈에는 장난기 어린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뭐지? 왜 저러지? 코를 훌쩍이던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빈이 내 소원 다 이뤄줄 거야?”
“…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흐흥….”
“형, 나 별은 못 따. 그럴 능력은 없어….”
“아니, 아니. 내 별 성한빈 이미 여기 있고. 다른 거 해줘.”
아 잠깐만. ……나 약간 말실수한 것 같은데.
“…뭘 부탁하려는 거야?”
“키스해 줘.”
“…….”
“한빈이가 정말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고 나를 사랑한다면 이 정도쯤은…….”
“…….”
장하오의 얼굴이 어쩐지 수줍은 분홍빛을 띠는 것 같았다. 무슨 용기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는지, 한빈이 얕게 한숨을 내쉬곤 장하오의 손을 잡으며 다가갔다.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었지만 그따위 말로 형과의 일들을 수식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빈은 늘 장하오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선에서는 모두 들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쩐지 지금이라면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더 솔직해져도 된다고 해줘서.
“형……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아니면 내숭 떠는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적극적이던 너구리는 어디로 간 거야?"
"모르겠는데에에."
"…이리 와, 형."
장하오를 더 가까이 잡아끌었다. 부딪힌 몸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빈은 손을 뻗어 바람에 흩날리는 장하오의 머리카락을 정돈하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장하오의 뺨을 어루만졌다. 어쩌면 자신도 이 순간을, 비록 장하오만큼은 아닐지라도 오래 기다려왔을지 모른다. 거리가 좁혀지자 장하오의 숨결이 뺨을 간지럽혔다. 잠시 주저하던 한빈은 두 눈을 감고 장하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사람의 입술이 붉은 것은 인체에서 피부가 가장 얇은 부위라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입술에 닿은 온기와 감촉은 그의 붉은 입술만큼이나, 정말로 그가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생경한 감촉에 소름이 돋아 몸의 여린 솜털이 모두 일어서는 느낌이었다. 귓바퀴가 붉어진 한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입술로 널뛰는 심장박동이 전해질 것만 같았다.
입술이 맞붙어있던 찰나 같은 시간이 지나고 한빈은 뒤로 물러났다. 저도 모르게 호흡을 멈추었던 탓에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질러 버렸다. 장하오를 가동하기 전 그를 제작하던 몇 달간 종종 붓으로 그린 듯한 눈을 내리깐 그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는 했다. 남자답지만 동시에 이목구비가 몹시도 수려한 얼굴, 그 날렵한 코 아래의 꽃잎처럼 붉은 입술을 보며 남몰래 간직했던 생각. 호기심, 욕구. 저도 모르게 떠올리다 얼굴이 화드득 타올라 고개를 흔들고 볼을 꼬집었던 적이 부지기수인데. 어쩐지, 버킷리스트를 달성하기라도 한 것마냥 이유 모를 성취감이 심장의 고동 소리와 얽매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얼굴, 아니, 온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깊은 곳에서 감정의 파도가 마치 뜨거운 용암처럼 울렁거리며 흘러가는 듯했다. 떨림을 참지 못하고 이내 가슴께에서 주먹을 그러쥐었다. 헉, 숨을 짧게 들이쉬고는 제 앞의 남자를 흘긋 쳐다봤다. 분명 비슷한 키에 눈높이도 얼추 맞는데. 늘 저는 장하오를 올려다보고, 장하오는 저를 내려다보곤 했다. 마치 모든 순간의 성한빈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고 싶다는 양. 지금도, 한빈을 살피는 장하오의 눈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한빈.”
“으, 응.”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제 이름을 그리도 다정히 불러줄까.
“나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응…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답하고 싶었지만 답을 선뜻 내뱉지 못했다. 하도 심장이 세차게 뛰어대는 탓이었다.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무서웠지만 이미 형은 감지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가 좋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좋아서 울고 싶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괜스레 코끝이 시큰했다.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를 앞에 두고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고마워서, 미안해서. 좋아서. 너무 사랑해서.
“나도 한빈을 정말 좋아해. 네가 날 좋아하는 것보다 훨씬 더.”
“…….”
“내 사랑이 이겨.”
"응…."
장하오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근데 말이야,”
상냥하게 웃는 그의 눈에 짙은 갈망이 자리 잡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키스는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응? 당황한 한빈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장하오의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감았다. 커다란 손이 한빈의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어 시야 가득 그의 눈동자가 비쳤다. 분명 조금 전까지도 이채가 깃들어 빛나던 눈이 욕망으로 점철되어 밤하늘처럼 새카맣게 변했다.
“흡……!”
열병에 걸린 것처럼 뜨거운 입술이 제 입술 위로 포개졌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아랫입술을 송곳니로 가볍게 깨물더니, 말캉한 혀가 좁은 틈새를 벌리고 들어오며 점막을 훑었다.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장하오의 팔이 한빈의 몸을 더욱 강하게 옭아맸다. 읏, 으응….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느릿한 마찰음과 더없이 외설스러운 소리에 한빈이 몸을 떨었다. 그런 한빈을 눈치챈 장하오의 잇새에선 낮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장하오의 손길이 훑고 간 자리마다 홧홧한 전율이 올라왔다. 어떡해, 나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급박하게 울리는 목의 맥박이 제 살결을 쓰다듬는 그의 손을 애타게 붙잡은 제 손까지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장하오는 잠시 떨어지나 싶더니, 허락해달라는 양 도로 한빈의 연한 입술 안쪽 점막을 쓸며 깊게 침범해 왔다. 한빈의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손길이 점차 영역을 넓혀가더니 귓가의 여린 살을 쓸어내렸다. 전신을 휩쓸던 뭉근한 쾌락이 아지랑이 피듯 일어나 아랫배와 허리가 오싹해졌다, 마치 초신성이 폭발하기 직전과 같은 아슬하고 위태로운 감각이 몰아쳐 눈앞이 어지러웠다.
위험해. 위험하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정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홍조가 잔뜩 오른 채 한빈은 떨리는 손으로 다급하게 장하오의 어깨를 쳤다. 제 손길에 따라 속절없이 반응하고 신음하던 몸의 주인이 급히 신호를 보내자, 장하오는 그를 순순히 놔주었다. 오가던 타액이 실처럼 늘어지다 끊겼다. 길게 이어진 입맞춤에 숨을 몰아쉬던 한빈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렸다. 장하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저 때문에 잔뜩 발그스름해진 채 번들거리는 입술 새로 밭은 숨을 내쉬는, 물기 어린 반짝거리는 눈의 주인이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한빈아. 너는 알까, 내가 얼마나 중독된 것처럼 네게 깊게 빠져있는지. 너는 알까, 내가 얼마나 네 허락을 원했는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순간을 간절하게 기다려 왔는지, 성한빈 너는 알까. 너는 아마도 영영 모를 거야. 내가 무슨 기분인지, 너는 모를 거야. 그럼에도 나는 행복해.
한빈아, 내가 행복감을 느끼고 있어.
오로지 너만이 느끼게 할 수 있는 감정이야.
“……윽, 하아.”
“한빈.”
“하아, 하… 장하오! 숨도 안 차?!”
하하하하, 딸기처럼 새빨개진 귀여운 얼굴로 겨우 내뱉는 말이 그거다. 불만스러워하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어.
“나는 숨 안 차는데?”
“……아.”
제 품에 안긴 채 색색거리는 이의 등을 쓸어주었다. 사실 당장이라도 온갖 생각 회로를 굴리고 있을 주인의 앙다문 귀여운 입술을 다시 머금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당장은 쉴 시간이 필요하겠지.
“있잖아 한빈, 체력을 많이많이 길러야겠어. 난 한빈이랑 아직 하고 싶은 게 너어무 많이 남았거든…. 널 위한 특별한 운동 루틴을 짜줄게. 밥도 꼬박꼬박 잘 먹어야 해.”
“…형. 그 변태 같은 표정 좀 감추고 말하지 그래…….”
“한빈이 날 변태로 프로그래밍 했는거야, 이건 내 의지로 하는 게 아니라고.”
그럼 이건 한빈도 변태라는 거 아니야?
하? 웃겨. 그게 그렇게 된다고?
“형 때문에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가버릴 것 같아.”
“한빈, 안드로메다 은하랑 충돌하려면 아직 40억 년 남은 거야, 가버리는 건 다른 데서 해. 한번 해볼래? 우리 이제 들어가까?”
“…….”
“장하오 지금까지 많이 참아쓰어….”
이미 잔뜩 시달려서 숨쉬기도 힘든데 이 남자는 여우처럼 음흉하고 이상한 헛소리만 해댔다. 진짜 저런 말은 어디에서 배워오는 거냐고. 왜 기억하는 거냐고. 빠져나오지 못할 덫에 갇힌 느낌이었다. 잘못 걸린 것 같아. 엉엉 울어버리고 싶었다. 사실 뿌리칠 생각은 없었지만, 제 허리를 놓아주지 않고 은근슬쩍 바지 안쪽으로 손가락을 넣어 쓰다듬는 손길은 미치도록 야속한 건 사실이었다.
…싫은 건 아니긴 한데. 형이 원하는 반응은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거야. 지지 않을 거야!
“…맞춤법 파괴에 재미 붙인 거야?”
“한빈이가 내 애교에 약한 걸 알아버렸거든.”
“뻔뻔하네.”
“하지만 한빈이는 날 사랑하잖아, 그치?”
“…….”
“왜애, 싫어?”
…싫을 리가 없잖아. 굳건할 줄 알았던 다짐은 겨우 몇 초 만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만다. 장벽을 아무리 높고 견고하게 쌓아 올려도, 장하오는 담을 넘던지 부수던지 해서 안쪽으로 들어올 것이다. 아무리 멀리 도망가려고 노력해도, 장하오는 국부은하를 가로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빛의 속도로 쫓아오겠지. 숨는 의미가 전혀 없는데, 그러면 굳이 피해야 할까.
한빈은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장하오를 끌어안으며 먼저 입을 맞추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장하오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눈을 휘어 접고는 한빈의 뒤통수를 감싸며 응했다. 그의 태도는 실로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함께 일하며 기다리고, 지켜보고, 간절히 원해왔던 일 년의 시간이 담긴 입맞춤이었다. 그리고 성한빈 또한, 자신이 이제껏 느껴온 그 어떤 감정보다도 장하오에 대한 마음이 크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자신이 장하오의 마음에 응할 차례였다. 한없이 다정한 그에게, 오랜 시간 홀로 사랑을 소중히 키워왔을 그에게.
0.9
우리들의 첫 만남 그때부터 알고 있던 거야
서로가 없는 내일이 이제는 없다는 걸
“한빈나아아아….”
한빈은 보고 있던 차트에서 눈을 떼고는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하오는 손에 지도를 말아 쥔 채 의자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 버그 생긴 것 같아. 어쩌지?”
한빈은 한숨을 쉬며 펜을 내려놓았다. “어쩐지 충돌할 것 같더라니….” 책상으로 걸어간 성한빈은 장하오의 코드 중에서 가장 최근에 변경한 내용을 검색했다. 요즘 형의 요청에 따라 많은 것들을 손보고 있었는데, 그중 한 부분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그게 꾀병이 아니라면 말이지. (…장하오에게 여전히 특별한 이상은 없었으나 한빈은 종종 기능을 추가해달라는 그의 부탁을 들어줄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허락해 주지는 않았다. 가령, 언젠가 장하오는 눈으로 레이저를 쏘는 어느 고전 영화의 초능력자 영상을 보여주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저도 하고 싶다고 조른 적이 있었다. 한빈은 고민의 여지도 없이 그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의자를 질질 끌어와 한빈의 옆에 앉은 하오가 말했다.
“그런 거 아닌데. 약간… 몸이.”
“몸이 뭐.”
성한빈은 잠시 멈춰서 이마를 찌푸린 채 장하오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 입이……”
하아, 이 형 또 수작질이네. 한빈이 눈을 감고는 눈꺼풀을 꾹꾹 눌렀다.
“특히 입술이 너무너무 차가워….”
“형.”
“네 앞에서만 자꾸 고장 나는 걸 어떡해애애.”
“…….”
“한빈, 어떻게 해줄 수 없어? 나 추워….”
“……다가와 놓고서 묻는 건 무슨 심보야?”
이미 코끝은 닿았다. 으, 장하오 바보. 귀여워. 너무 귀여워서 짜증 나. 막을 새도 없이 웃음이 나왔다. 더는 이런 식으로 핑계를 대어가며 스킨십을 해올 필요는 없었지만, 장하오는 종종 한빈을 놀리기 위해 장난을 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한빈은 하오의 행동이 낯설어 마구 쑥스러워했던 몇 개월 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혹은 그보다도 오래전, 장하오의 감정이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며 말도 안 되는 규칙을 세웠던 그때를.
그래도 둘은 열심히 달려왔다. 자신들만의 작은 세상에서 임무의 완수는 물론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프로젝트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이제 서류 작업만 남은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혜림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사랑의 힘’이라고 놀렸다. 그녀가 둘의 사이를 어떻게 알았냐 하면, 화상 통화 연결 도중 렉이 걸리는 바람에 그녀는 성한빈의 정수리에 수차례 입 맞추는 장하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혜림은 반질반질해진 제 사촌 동생의 얼굴을 보고는 둘의 사랑을 응원해 주기로 했다. 막바지에 옷을 더 잘 여미는 게 좋겠다는 폭탄 발언을 던짐으로써 통화 연결을 끊으려던 성한빈을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채 절규하게 만든 것은 덤.)
사실상 TF323에 더 남아있을 필요는 없었지만 장하오는 임무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탐사를 이어가길 희망했다. 원래도 연구소 밖의 외부를 모험하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주변의 계곡과 강을 기록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지도를 제작하고 있었다. 한빈과의 추억이 시작된 곳이니만큼 반드시 남겨놔야 한다며.
코를 살며시 비벼오는 장하오가 귀여워 양 볼을 잡고 주욱 늘렸다. 으에에에. 항빙, 이거 말고오오. 알았어, 알았어. 쪽. 쪽쪽. 쪽. 한빈은 하오의 뺨을 감싼 채 그의 이마와 눈, 코, 입술에 차례대로 짧게 버드키스를 남겼다. 누구 애인인데 이렇게 귀엽지이. 짧은 입맞춤이 계속 이어지자 감질났는지 장하오는 잠시 부루퉁한 표정을 짓더니 한빈의 허리에 팔을 감아왔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성한빈의 유일한 사랑. 그리고 계속 까먹나 본데, 나 사람 아니고 로봇이야. 다른 단어를 찾는 게 어때? 흥. 그러다가도 이내 순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달고는 더욱 진하게 키스하며 한빈을 끌어오는 하오였다.
장난이 가득한 키스는 꽤 길게 이어졌다. 입술을 내밀면 갑자기 옆으로 쏙 피하고, 다시 다가오나 싶으면 입이 아니라 코끝에서 쪽 소리가 나고. 혀를 내밀었다가 윗입술만 살짝 핥고는 고개를 돌려버려 뺨을 비빈다거나. ‘우리 오늘부터 1일’을 선언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장하오와 성한빈의 연애는 몽글몽글하고 간지러웠다.
심장 소리가 그대로 전해질 정도로 가슴팍이 바짝 맞닿은 채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장하오는 입꼬리를 잔뜩 올려 웃고서는, 제 허벅지에 앉아 있던 한빈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히히, 한빈 좋아. 나 계속 이러고 있을래. 목을 간지럽히는 머리칼을 느끼며 한빈은 새삼스럽게 말했다.
“하오 형, 사랑해.”
그 말을 들은 장하오는 잠시 굳는 듯하더니, 한빈의 골반을 붙잡고 있던 양손에 힘을 주며 몸을 떼어냈다. 시선은 성한빈의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표정은 천연덕스러운데 어쩐지 눈동자가 탁하다. …이거 약간 위험한 것 같은데.
“한빈, 내 귀가 잘못된 것 같아. 아, 이건 사운드칩 문제가 아니고 음성 처리 시스템인가? 방금 뭐라고 했어? 장하오 못 들은 거야….”
“…….”
이 남자, 어김없이 또. 또! 오늘도 또 이러네. 어째 예상을 빗나가질 않았다.
“야 장하오. 내 말이 말 같지 않지? 진짜로 안 들려? 정말로?”
“응, 진짜 안 들려! 미안해. 다시 말해줘어.”
“들리나 보네.”
“…아.”
“으이그, 못 말려. 자아, 기분 좋으니까 딱 한 번만 다시 말해줄게에. 하오 형, 사랑―으븝.”
촉, 촉. 잘게 입맞춤이 이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 한번 잘못 했다가 대체 몇 시간을 고생했는지. 아주 온몸이 다 물리고 빨리고 깨물려서 성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는데, 어째 장하오는 한빈을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빈은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한 채 누워있었다. 분명 내 체력 아끼려고 장하오 만들었는데. 이제 장하오는 제 기력을 밑바닥까지 모조리 싹싹 긁어 쏙 빨아가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이 아니야, 갈수록 횟수가 늘어…….
한빈이 뻗어있는 와중에도 장하오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이젠 진짜 더 하면 죽는다며 사정사정을 하는 바람에 본격적인 건 끝났지만, 장하오는 그 이후로 몇십 분째 한빈의 몸 곳곳에 흔적을 새겨넣는 중이었다. 성한빈의 몸을 완전히 정복해 버리겠다는 양. 특히 쇄골 부근이 말도 안 되게 얼룩덜룩했다. 장하오는 한빈의 피부를 도화지 삼아서 이빨 자국도 여기저기 내어가며 마구 그림을 남기고 있었다. 형, 난 음식이 아니야. 밥을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되잖아. 으으응 싫어 한빈, 세상에서 한빈이 제일 맛있는 거야. 뭔, 개뿔……. 한빈은 너무 힘들어서 욕설을 필터링할 힘도 없었다.
장하오는 그야말로 체력 괴물이었다. 아니, 체력이 세다는 말을 쓰는 것 자체도 우습다. 어차피 한계가 없다 해도 무방하니까…. 성한빈이 거친 2년간의 우주인 훈련은 행위를 할 때만큼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런 데에 쓰라고 몸을 그렇게 만들어준 줄 알아?! …그것도 왜 이렇게 능숙한 건데? 늘 한순간에 잡아먹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신없이 앓기만 해도 한나절이 지나가 버리는데 이게 맞나 싶고. 혹시 예전에 그렇게 오래 컴퓨터를 붙잡고 검색했던 것이 뭐, 카마수트라라도 되나 싶고. 메모리에 뭐 이상한 영상 있는 거 아니야? 확 까봐?! …그럼 형은 자기가 싫냐고 입꼬리를 축 내리고 올망졸망한 눈으로 바라보겠지. 그건 아니라고 답하면 그때는 자기가 그렇게 좋은 거냐면서 들이대고, 난 또 홀라당 넘어가고. 으 몰라몰라, 힘들어. 한빈의 머릿속은 완전히 ‘과부하’ 상태가 되었다. 곯아떨어졌다간 나중에 잔뜩 시무룩해진 형의 얼굴을 마주해야 할 게 뻔하니, 그냥 ‘에너지 절전 모드’로 가만히 손길을 받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러게, 좀 적당히 하라니까. 힘들어서 나자빠지는 게 내 탓이냐구우….
……아 근데, 오늘따라 유난히 더 집요한데. 입술이 퉁퉁 부어오르도록 빨더니 어째 조금 전부터 다시 목과 어깨를 타고 내려가는 게,
“혀엉, 잠, 깐만, 으응….”
잇새로 다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만든 게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아기였냐고. 어흑. 왜 그렇게 빨아대냐고오오. 그만 좀 하라며 어깨를 밀어내니, 순순히 물러나는가 싶더니 귀를 지분거리며 한빈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춰오기 시작했다. 쪽, 쪼옥. 귓가에서 나는 젖은 소리가 미치도록 적나라해서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러다가 또 된통 당하게 생겼어, 일이 산더미인데!
“나 바쁜, 흣, 할 거 많은, 데에—”
입맞춤 세례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성한빈은 안간힘을 써 장하오의 얼굴을 밀어냈다.
“뽀, 읍, 뽀뽀귀신이야 아주?!”
“가만히 있어 봐. 성한빈 지도 만들 거라서 꼼꼼하게 해야 한다고.”
“형…… 아으, 그만!”
“한빈 어차피 내일 아침까지 의자에 못 앉으니까 일 내가 다 할 거야. 지금은 이거 집중해야 해, 한빈 지도 엄청 비싸게 팔아서 부자 될 거거든.”
“…….”
“음…… 아니야, 역시 나만 가질래. 나만 볼 거야. 한빈 내 거.”
아우우 그래 난 몰라, 다 형 거 해.
“가끔 보면 진짜 바보 같아….”
“한빈나, 내 뇌세포가 몇 개인지 알아?”
“……형한테 뇌세포가 왜 있어?”
“두 개야. 뇌세포 두 개로 생각하니까 바보일 수밖에 업쓰어.”
말이 되는 소릴 해, 장하오는 최첨단 뇌를 탑재한 뇌섹남이라고. 바보는 무슨 바보야, 장난해? 인정해버리면 어떡해. ……아,
“……그거 설마 이진수 말하는 거 아니지? 어쭈, 이제 농담도 잘해?”
“으으웅,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0에 1을 더해서 하나가 됐는거야, 한빈. 그건 성한빈을 뺀 장하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야. 난 한빈만 바라보는 바보라고 했잖아. 난 하루 종일 성한빈만 생각해.”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던 장하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기다란 물체―미끌거리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망측한 무언가—를 집어 들고는 입가로 가져갔다.
“너만 보인단 말이야~ 널 사랑한단 말이야~ 눈을 감아도 너만 보인—”
“아우 진짜! 장하오, 그거 안 내려놔?!”
“사실은 좋으면서어. 내가 본 게 있는데, 한국인은 사랑하면 바보라고 한댔어.”
“…….”
빙고.
“짱하오 똑똑하고 노래도 잘하고 못 하는 거 진짜 하나도 없는데 바보라서 성한빈이 책임져야 하는 거야. 으엉, 킁. 으흐흑. 으아아아아앙. 흐어어어어어어엉.”
응응응알겠어그만울어내가형지켜줄게제발뚝해. 흑, 한빈이 나 지켜줄 거야? 내가 장하오 영원히 지킬게. 콩깍지가 제대로 씐 성한빈은 가냘픈 척을 하는 장하오를 꽉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형은 계속 핑계를 대면서 짓궂게 굴겠지만… 아무렴 뭐. 좋으니 괜찮은 거 아닐까?
“…하오 형, 근데 그 지도라는 거 말이야. 어차피 팔았어도 내가 유일한 고객이었을 텐데. 난 돈이 없어서 줄 수 있는 게 관심과 사랑밖에 없어.”
“…….”
“응?”
“있잖아. 성한빈한테 관심과 사랑을 많이 주는 건 장하오 역할이야. 너는 받기만 해.”
“…….”
“할 말 더 없쓰어? 그럼 나 하던 거 마저 한다?”
“아니, 나 물어볼 거 있어.”
“웅. 잠깐만 참을게.”
“형 나랑 한국 가면 뭐부터 할래?”
“구청 가서 장하오 성한빈 혼인신고 해야지.”
“뭐야아아….”
“내가 네 거라고 세상에 알리는 거야.”
쭉 내민 통통한 입술이 다시 다가왔다.
“그러니까 주인님… 나 해도 돼요?”
“또???”
“도장 마저 찍어야 하는 거야….”
“…형이 언제부터 그렇게 말을 잘 들었다고 허락을 받아?”
“히히.”
“……뭐해? 얼른 안아줘.”
“…사랑해, 한빈.”
나도 사랑해, 내 바보 안드로이드. 사랑해, 하오 형. 사랑해, 장하오.
사랑은 참으로 우연히 오지만 그 완성은 대단히도 필연적이라고 하지 않던가. 우연으로 인해 시작된 관계였지만, 서로가 서로에게만 얽매인 이 사랑의 궤도는 어쩌면 필연적이지 않았을까.
성한빈은 실수로 남자친구가 생겨버렸다.
실수로 인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운명적인 인연이었다.
♥ 스물넷에 모솔 탈출했더니 애인이 로봇인 건에 관하여 ♥
– Active Space Mission: Twin Flame 323 –
// 24愛로 //
w. 이택(@lize_xoxo)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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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녀> 모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