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빈웹진: cinéclub

9번 상영관에는 전설이 있어

장구

 


 

 

 

 

 

성한빈이 자신이 이상해졌다고 느낀 건 약 일주일 전부터였다.

 

"...왜 그렇게 봐?"

 

발표가 끝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을 향해있는 50여쌍의 시선. 그냥 보는 게 아니고 진짜 옥수수 팝콘 터지듯 아주 휘둥그레져서 말이다. 멍하니 물어봐도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 그렇게 보냐니까?"

 

같이 발표를 진행한 성무에게 물었다. 김성무. 이름답게 아주 옛날 모 배우처럼 여심 남심 죽여주는 발표를 할 거라고 찐하게 그린 눈썹이 깜짝 놀라 위로 들린다. 성무가 꿀꺽 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 너... 지금 진짜 중국인처럼 말했어."

"내가?"

 

아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한빈이 피식 웃고 되받아쳤다.

 

"장난해? 당연히 중국어 말하기 발표니까 중국 사람처럼 말해야지. 우리 이거 연습했잖아."

"아니 그 너 연습 때 수준이 아니라..."

"한빈 군은 중국에서 살다 왔다고 했었나?"

 

이젠 교수님도 거든다. 대체 다들 왜 이러는 거지? 한빈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뇨, 저 한국에서만 20년 살았는데요….

 

"바, 발표는 이상입니다."

 

한빈은 급격하게 밀려오는 두통에 대강 대답하고 얼른 자리로 돌아갔다. 터덜터덜 돌아가는 뒷모습에 선생님은 그저 어쩐 일인가 하고 갸우뚱할 뿐이다. 마침내 착석한 한빈은 다음 발표가 시작되고 다다음 발표가 시작될 동안에도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정신병원에 가봐야 하나. 생각보다도 훨씬 심각한 사안이었다 이건.

 

 

* * *

 

 

“그러니까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고. 나는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발표를 시작했을 뿐인데 그냥 정신 차려보니까 발표가 끝나있고 모두가 날 희귀한 심해생물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고!”

“아 알았어 뭘 화를 내고 그러냐…”

“그치? 네가 생각해도 억울하지?”

“뭘 또 억울해 지만 나불대놓고…”

 

한빈은 오전 수업이 끝나고 데이트 가봐야 한다는 성무를 납치해서 학교 식당으로 데려왔다. 그러니까 모두가 놀란 이유는 이거였다. 중국어 기초반에서 두 명 씩 조를 짜서 여행 중국어 말하기 발표를 했는데, 지난주 쪽지 시험 50점 맞고 분명 기본적인 성조조차 아리까리한 수준인 성한빈이 갑자기 눈깔이 시커매지더니 미리 짜놓은 대본 싹 무시하고 현지인 빙의해서 쏼라쏼라 솔로 스피치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성무도 한빈만큼이나 정신적 피해가 커 보였다. 고개를 젓고는 똑바로 들으라는 듯이 삿대질했다.

 

“나 진짜 너 때문에 곤란했어. 우리 대본은 그게 아니었잖아. 아니 그리고 식당 찾아가는 얘기 하자니까 대체 왜 영화 보러 가자는 얘기로 바꾸는데? 무슨 처음 들어보는 중국 어디 남쪽 지방에 대해서 막 자랑도 하고…”

“그만, 그만!!”

 

한빈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무래도 이건 혼자서 앓을 문제가 아닌 듯했다. 그래, 병원 가기 전에 친구한테라도 털어놓자. 주변을 휙 둘러보고 듣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한빈이 비장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이거 너만 알아라. 사실 내가 요즘… 진짜 이상해.”

 

한빈은 최근 자신에게 생긴 정신병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진짜진짜진짜로 너만 알아라. 진짜 믿고 말해주는 거야. 어? 알겠냐고. 엎드려 절받기로 열 번 정도 끄덕임을 얻어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저번에는 씻고 나왔는데 화장실에서 정신 차려보니까 거울이랑 막… 키, 키, 키스하고 있고…”

“아 씨발 거울이랑 키스를 해? 이 새끼 요즘 살 빠진 것 같다고 으스대더만 자기애가 아주 토나오게 넘쳐흐르네?"

“죽고 싶냐? 그리고 그 나현누나 있잖아. 그 내가 귀엽다고 했던… 그 누나가 나 좋아한다고 고백했는데 내가 찼대.”

"뭐!?"

 

다시금 그날의 충격을 떠올린 한빈의 안색이 진흙이 되었다. 성무는 여전히 어리둥절하다.

 

“근데 네가 차놓고 찼대는 뭐야? 남이 한 것 처럼?”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야. 내가 찬 게 아니라고! 내가 미쳤다고 그 누나를 차겠냐? 그냥 정신 차려보니까 고백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계속 친구로 지내자고 톡이 와 있었다고!”

“그것참... 신기하네.”

“응. 그 누나 친구가 나 욕하고 다닌다더라. 내가 엄청 싸가지없고 차갑게 거절했대.”

“......”

“그냥도 아니고 되게 역겹다는, 표정으로…”

 

분명 누나가 만나자고 해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만난 것 까지는 기억난다. 그런데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정신 차려보니 근처 카페에서 느긋하게 밀크티를 빨고 있고 이미 상황은 종료 된 뒤였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기억을 도려내 가버린 듯이 말이다. 한빈이 커다랗게 한숨을 쉬자 성무가 갑자기 어깨를 흠칫했다.

 

“근데 너 대체 뭘 마시고 있는 거냐?”

“이거? 수업 전에 키위 스무디 테이크아웃해서 들고 온 건데.”

“줘 봐.”

 

그러더니 갑자기 한빈이 마시고 있는 스무디를 낚아채 킁킁댄다. 플라스틱 컵에 붙어있는 조그만 라벨지를 확인한 눈이 경악에 물든다.

 

“아 씨발 역겹긴 네가 더 역겨워.”

 

성무가 못 참겠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뭔 한여름에 두리안 스무디를 처먹고 있어!”

 

 

* * *

 

 

“그래서요. 원인이 뭐예요?”

 

신을 믿을 거면 자신을 믿어라!

 

…가 인생 모토였다. 부처님 하나님은 커녕 시험 직전에 미신조차 믿지 않았던 성한빈이 오죽했으면 그렇게 용하다는 선녀 보살을 찾아왔을까. 산넘고 물건너 장장 편도 세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본가 아빠 차키 훔쳐서 몰래 달려왔다. 한빈의 목울대가 긴장에 꿀꺽 넘어갔다. 진한 섀도우를 떡칠한 눈두덩이가 꾹 감겨있다가 번쩍 뜨였다.

 

“귀신이 씌었어.”

“귀신이요?”

“너 최근에 영화관에 간 적이 있었지?”

 

한빈의 입이 쩍 벌어진다. 와 씨 솔직히 반신반의 하면서 온 건데.

 

“네. 한… 한 달 정도 전에요.”

“그래, 보인다, 보여…”

 

무당이 방울 달린 무언가를 마구마구 흔들더니 콩을 막 흩뿌린다. 그냥 뿌리는 것도 아니고 겁나 우악스럽게 뿌려대서 사방팔방으로 튄 콩이 볼따구를 퍽 치고 지나갔다. 아 따가워! 기분 나빠 할 새도 없이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그 극장에… 시계탑이 있었지?”

“오오!”

 

손뼉을 짝 친 한빈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시계탑은 없는데요?”

 

“예, 예전에 있었을 거야! 철거를 했던지 어떤 이유로 붕괴가 됐던지..."

 

황급히 수습하는 모습에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그렇지, 뭐냐 이 돌팔이 무당은. 옛날에 너네 집 뒷마당에 복숭아나무가 있었지-? 와 다를 게 뭐냐고. 김도 빠지고 짜증도 나서 그냥 빨리 굿이나 해달라 할까 하다가 툭 물었다.

 

“근데 저 영화관 간 건 어떻게 아셨어요?”

 

의뢰인의 불신을 깨달은 선녀 무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한빈을 가만히 꼬라보더니 왼쪽 허공을 쳐다본다. 그러니까 한빈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오른쪽.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그 공간을 말이다.

 

“지금 네 옆에서 팝콘을 처먹고 있어.”

“......”

“아주 와그작, 와그작,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이야…”

“......”

“지금 콜라도 한 번 빨았네. 배가 많이 고팠나 봐. 응? 당 없는 제로콜라니까 꺼지라고?”

 

이게 뭐 하자는 거야. 도저히 들어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 굿이나 받고 갈까 했는데 시간이 아까워서 더 엉덩이를 붙이고 있기도 싫었다. 사람들은 진심 이딴 걸 믿는 거야? 오늘 수업도 빠지고 왔는데...

 

"가볼게요. 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가방을 챙겨 꾸벅 인사하고 뒤를 도는데 무당이 별안간 불러세운다.

 

“학생."

"아 뭐요! 돈 낼 거거든요!"

 

무당은 버럭하는 한빈은 아랑곳않고 부채를 촥 펼쳐 얼굴을 가린다. 가리워진 눈빛은 이승의 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근데 그 반지 말이야."

 

한빈이 우뚝 멈춰섰다. 장거리 운전할 때는 거슬려서 반지는 커녕 아무런 악세사리도 하지 않는 편이었다.

 

"학생 거 아니지? 끼워준 지 한 달 됐다는 것 같은데.”

 

이건 진짜 뭔 최후의 개소리일까. 한빈은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엄지만 꾸물꾸물 움직였다. 바짝 깎은 손가락 끝에 정말 무언가 툭 걸렸다.

 

"맞다 거 돈은 내고 가."

“아 씨발..."

 

고개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밑으로 끼기긱 돌아갔다. 진짜 오른쪽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본 한빈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시발 이거 누구 거야.

 

결국 서울에는 밤이 다돼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 * *

 

 

영화관이 원래 음기가 강한 곳이란다. 어둡고, 습하고, 층고 높고, 요즘은 무인 운영하는 곳도 많아져서 사람 수보다 잡귀 수가 더 많단다. 그래서 기가 약한 사람은 쉽게 귀신 들려 온다고.

 

그렇다. 성한빈의 병명은 바로 그거였다.

 

빙의!

 

낯선 반지가 한 달이나 끼워져 있었는데도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무당 말로는 그게 바로 신이 있어서 가능한 현상이고 주인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귀신이 의도적으로 눈을 가린 거라고 했다. 그리고 문제의 귀신은 아무래도 그 반지에 붙어있는 것 같으니 빼는 게 좋을 거란다. 근데 이제 빼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모르는...

 

굿 해달라고 했더니 생각보다 영이 너무 강해서 역풍 맞을까 봐 안된단다. 네? 그러면 전 어떻게 해요? 뭔 놈의 귀신인지도 모르고 그냥 계속 붙이고 살아야 해요? 씨발 나는 잘생기고 착하게 산 죄밖에 없는데… 억울함에 눈물 콧물 다 빼고 울먹이면서 묻는 한빈에게 무당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비장하게 일렀다.

 

아니, 방법은 있다고.

 

 

 

“여길 또 오다니…”

 

일단 무당의 말대로 밤 11시쯤 학교 앞 영화관에 다시 찾아갔다. 한빈은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문득 드는 한기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오늘 너 한 번 더 죽고 나는 사는 거야. 네가 인마 남자라면 정정당당하게 싸우자. 두려움을 떨치려 혼잣말로 중얼대봐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붙은 귀신은 스스로 떨쳐내야 하는 모양이었다. 무당은 귀신이 네게 원한이 아닌 '원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으니 일단 대화를 좀 해 보라고 했다. 방법이랍시고 일러준 내용은 이랬다. 일단 처음 귀신 붙은 곳에 가서 거울이 있는 곳을 찾으란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시간을 틈타 거울 앞에 마주 서서…

 

“칼을, 물라고 했지…?”

 

우선 영화관 남자 화장실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문 닫고 들어가 주머니에서 택배 뜯는 용으로 산 다이소 당근칼을 꺼내 입에 물었다. 왜 가오 없게 당근 칼이냐고? 혹시 귀신이 지 떼낸다고 분노해서 나 찔러도 당근칼이면 살 수 있잖아. 사실 여기도 존재도 모르다가 한 달 전에 시간 붕 떠서 호기심에 처음 와본 거다. 사람들 다 여기랑 버스 타고 10분 거리에 있는 백화점 영화관 가지 지은 지 몇십 년은 되어 보이는 낡아빠진 이 곳에 굳이 안 오니까. 하 생각하니까 더 억울하네...

 

아무튼 이 다음에 소금을 손에 쥐고 거꾸로 셋, 둘, 하나. 세라고 했다. 둘 까지는 거울을 보고, 마지막 하나를 셀 때 눈을 번쩍 뜨라고. 한빈은 가방을 뒤적여 맛소금을 꺼내 손바닥에 탈탈 털었다. 사고 나서야 뭔가 잘못 산 걸 알았지만 맛소금도 소금이니까.

 

으으. 손바닥이 꺼끌하다. 한빈은 치미는 기분나쁨을 참고 눈을 질끈 감았다.

 

,

 

,

 

그리고.

 

“干嘛?”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둔탁한 당근칼이 와장창 떨어졌다. 눈을 번쩍 떠서 본 거울 안에는 귀신이, 귀신이... 새파래진 한빈의 안색에 귀신같은 남자가 외려 얼굴을 찌푸린다. 잠시 그 인간적인 표정의 변화를 살피다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 뭐야, 인간인가. 한빈이 멋쩍게 웃으며 뒤를 돌았다.

 

“아, 하하. 아무도 없었, 아니, 문을 잠갔는데, 분명…”

“활짝 열려 있었는데.”

 

남자는 심드렁하게 대답하더니 옆의 세면대로 가서 손을 씻는다. 한눈에 봐도 수려하게 생긴 외모였다. 의상은 깔끔한 셔츠에 요즘도 이런 거 입는 사람이 있구나 싶은 멜빵바지. 언뜻 옛날 사람 코스프레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늘 뭐 영화관 이벤트 했나?

 

큐티클이 깔끔한 손가락이 떨어지는 물에 뽀득뽀득 얽히고 적셔진다. 한빈이 그 광경을 넋을 놓고 보다가 얼른 소금을 털고 떨어진 당근칼을 주웠다.

 

“소, 손수건 드릴까요?”

“있어. 너 손이나 씻어. 젊은 애가 벌써부터 그런 미신이나 믿고..."

 

아하하. 노인네같은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라 민망함에 손이나 씻고 있는데 옆의 물소리가 뚝 끊긴다. 남자가 깔끔한 하늘색 손수건을 꺼내는가 싶더니 다시 주머니에 고이 집어넣고는 세면대에 물기를 탈탈 턴다. 손수건은 장식이냐. 속으로 투덜대고 있자면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밥은 먹었어?"

"네? 네, 먹었어요."

"요즘 흉악도시 재밌더라. 봤어?"

"네, 진작에 봤죠..."

 

스몰토킹이 어마어마해서 미국인 줄 알았다. 한빈은 대충 대답하면서 소금과 당근칼을 대충 가방에 집어넣었다. 왠지 빨리 집에 가야 할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녕히 계세요. 혼잣말 수준으로 조그맣게 인사한 뒤 얼른 되돌아가 문고리를 잡아당긴 순간.

 

"근데 너, 너무 늦게 온 거 아니야?"

 

이거 왜 안 열려.

 

문은 덜컹덜컹 할 뿐 열릴 기미가 없다. 잠기지도 않았는데 그런다. 있는 힘껏 잡아당겨 보기도 하고 어깨로 몸통박치기를 해봐도 똑같다. 그제야 뒤에서 무언가 스산한 기운을 느꼈다. 보송했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에요? 네, 네. 영화 예매 시간을 착각해서요. 이제 집에."

"아니, 나 찾아온 거. 너무 늦은 거 아니냐고."

"제가요?"

 

남자가 킥킥댄다. 뭔가 이상하다.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는데 남자가 씩 웃으며 이쪽을 보고 있다.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했다. 아니, 잘생겨서가 아니고.

 

“응. 보고 싶었어."

"......"

"기다렸잖아."

 

세면대 앞 거울에 아무것도 비치고 있지 않아서.

 

"성한빈."

 

한빈은 또 기절하고야 말았다. 씨발 귀신 맞잖아.

 

 

* * *

 

 

"그래서 그 게이 귀신이, 자기 소원을 다섯 가지 들어주면 떨어져 주겠다고 했다고?"

 

키위 스무디를 빨고 있는 한빈은 오늘 안색까지 키위색이다. 또 그 게이귀신 놈에게 빙의 당할까 봐 밤에 한숨도 못 잔 탓이었다. 한빈이 우울하게 대답했다.

 

"응... 어떤 신묘한 무당이 와도 못 뗄 거래. 자기 떼고 싶으면 무조건 소원 들어 달라고 떼쓰던데..."

"그게 귀신이랑 한 대화라고? 이 미친 새끼를 봤."

"너 말조심해라. 우리 지금 하는 이 대화도 다 듣고 있을걸?”

"뭐라고? 어떻게?"

"왜냐하면 이 반지 속에 있거든..."

 

성무는 팔에 돋는 소름을 벅벅 문지르고 한빈은 반지 안쪽을 심드렁하게 엄지로 문질렀다. 물론 그놈의 소원은 내가 들어줄 테니까 제발 일단 이 빌어먹을 반지만 제발 빼주면 안 되냐고 엄살도 부려봤다. 그 중국 귀신 놈은 측은했는지 아라쏘... 하곤 손을 가져가서 낑낑 빼는 시늉을 하더니 곧 시무룩한 강아지같은 표정을 지어댔다. 오또케 나도 안 빠지는데에, 반지도 네 손가락이 좋나 봐. 그 와중에도 붙잡은 손 쪼물딱거리는 건 멈추지 않는다. 야 너무 투명해서 속이 다 보인다 아주.

 

“소원... 그거 네가 안 들어주면?”

"안 들어주면?"

 

한빈이 귀신의 말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성한빈 너어 내 소원 안 들어주면...

 

“안 들어주면 캠퍼스에 있는 모든 남자랑 키스시키고 모텔 침대에서 일주일동안 눈 뜨게 할 거라고…”

"영화 한 번 잘못 보고 온 죄로 후장을 털리다니..."

"아직 안 털렸거든!"

 

끔찍한 소리에 한빈이 발끈하면서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집중되는 시선에 성무가 머쓱한 미소를 짓고는 몸을 앞으로 길게 뺐다. 그리고 소곤소곤, 제 친구와 귀신님에게만 들리게.

 

"그래서. 첫 번째 소원은 뭔데."

"......"

"요?"

 

소심하게 덧붙이는 존댓말에 한빈이 다시 귀신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푹 쉬는 한숨에 근심이 가득했다.

 

귀신의 첫 번째 소원은.

 

 

* * *

 


 






 

 

"그러니까 내가 당신이 좋아했던 사람을 어떻게 알고 찾아주냐고요."

 

귀신은 조용한 다그침에는 아랑곳 않고 팝콘만 와그작와그작 씹어먹는다. 눈길은 재생되고 있는 영화에 고정. 스크린 빛에 비치는 옆모습을 하염없이 노려보다가 답답해서 팝콘을 뺏어 들자 그제야 대답을 한다.

 

"근데 뭐, 어차피 지금 못 찾아."

"그럼 대체 전 뭘 하면..."

"한빈이도 좀 먹어."

 

분위기 파악은 못 하고 대신 너도 먹으라며 입에 손수 넣어준다. 더럽지도 않은지 손가락이 훅 들어온다. 혀 닿을까 봐 얼른 입술 말아 넣었더니 귀여워- 하면서 웃는다. 귀신 주제에 썩 잘생긴 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미인계 당하는 기분이라. 제멋대로인 태도에 한숨을 푹 쉬고는 그냥 얌전히 스크린에 눈길을 줬다.

 

오늘도 관객이 없다시피 한 9번 상영관에는 옛날 영화 특집인지 1930년대 흑백 필름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분명 상영 스케줄에서 못 본 것 같은데, 영화는 두 사람이 들어가서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재생을 시작했다. 지금도 사실 무언가에 홀려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일단 귀신과 함께 팝콘을 뜯고 있다는 것부터가 비현실이니 정말 그렇다고 해도 크게 놀라지 않기로 했다.

 

귀신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첫 번째는 영화관 지박령이라 영화관에서만 형체가 나타나고 접촉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모든 귀신에게는 혼이 깃드는 매개체가 되는 물건이 있는데, 이 귀신의 경우에는 그게 반지의 형태였다. 그러니까 케케묵은 영화관 구석탱이에 데굴데굴 굴러다니다가 어쩌다 기가 허해져서 찾아온 성한빈이라는 인간의 손가락에 재수 없게 쏙 들어가서 이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허락도 없이 빙의한 건에 대해서 뭐라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건 일단 "너는 소원 다 들어줄 때 까진 내 거여서 어쩔 수 없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 뿐이었다.

 

두 번째는 정말 성한빈이라는 사람에게 원한이 있는 건 아니라는 점. 그게 제일 중요했다. 무당이 말할 때는 긴가민가 했지만 직접 듣고 나니 무서움이 좀 덜 했다.

 

"보아하니 요즘 분은 아니신 것 같은데... 좋아하는 분은 진작에 돌아가시지 않았을까요?"

"음 팝콘 너어무 맛있어."

"이 자식이..."

 

 

낮은 욕설과 함께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발정난 얼굴 한주먹거리 중국 총각귀신새끼가 하는 건 순 거짓말이고 그냥 지 취향 인간 나타나서 한 번 잡아먹어 보려는 것 뿐이라고. 한빈은 무시하고 영화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옛날 영화 뭔 재미로 보나 싶었지만 확실히 계속 보고 있자니 빠져들긴 했다. 흑백영화 속 주인공은 지금 대혼란 중이었다. 어떤 아주머니가 열차 안에서 주인공에게 살갑게 대해줬는데, 눈을 떠보니 그 아주머니는 사라져있고 주변 사람들은 그런 사람은 모른다고 발뺌 중인 상황이었다. 하긴 저걸 보니 사람이 사라졌는데 찾을 수가 없으면 답답하긴 하겠다.

 

"근데 왜 굳이 영화관에 계신 거예요? 다른 좋은 곳 많잖아요. 어디 스파 귀신, 호텔 귀신도 할 수 있고."

"지박령이 괜히 지박령인 줄 알아? 내 의지가 아니야."

 

귀신이 언짢다는 듯 한빈의 입에 팝콘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마지못해 받아먹으면서 픽 째렸다. 나도 손 있는데...

 

"여기 원래 영화관이 아니었어."

 

귀신의 눈이 세월을 가늠해보듯 먼 허공을 향했다. 조막만한 얼굴에 눈코입이 완벽한 테트리스처럼 꽉꽉 들어차 있다. 하얗고 푸른 빛이 잘 어울리는 사람, 아니, 귀신이었다. 귀신은 귀신인데 자연광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귀신. 한빈은 찌푸려지는 그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냥 정신 차려보니까 여기 있었어. 나는 이 곳에서 벗어나지 못해. 시간 속에 갇혔거든."

"시간 속에 갇혔다고요?"

"근데 그렇게 나쁘지 않아. 영화관은 앉아서 최신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곳이거든. 요즘 바깥세상이 어떤지, 어떤 신식 문물이 유행하는지 영화를 보면 다 알 수 있지. 나도 그런 걸 알아야 다시 만났을 때 얘기가 좀 통하잖아. 운 없이 어두컴컴한 숲 속, 주차장, 폐공장, 이런 데에 갇히는 것 보다야 훨씬 나아."

 

그러면서 쓰고 있던 살짝 뿌옇고 동그란 안경을 빼서 옷에 슥슥 닦는다. 영화 볼 때만 끼는 것 같긴 한데 이제 보니까 조금 금이 가 있다. 엥, 안 불편한가.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긴 한빈이 들은 단어를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신식 문물..."

 

진짜 옛날 사람처럼 말한다.

 

문득 지금까지의 요소로 미루어보아 그가 정말 옛날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멜빵바지에 흑백영화… 대체 언제적 사람이지? 2-40년대 이쯤인가. 영화를 보던 귀신이 한빈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숱이 빽빽한 앞머리를 괜히 손으로 정돈한다. 흠, 이렇게 보니 그는 정말 옛날 사람처럼 보이기도, 언뜻 완벽하게 요즘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 영화관이 지어지고 나서 시간 흘러가는 걸 더 모르게 됐어. 먹는 것도 좀 그래. 버터오징어는 내 취향 아니고, 나쵸랑 팝콘만 지금 몇십 년째야… 토할 것 같아. 그나마 네 몸에 빙의한 뒤로는 맛있는 것 맛볼 수 있어서 좋았어. 곱창 완전 맛있는거야… 아, 나 한국어 완전 늘었지? 영화 보고 독학했어.”

 

귀신은 오랜만에 입이 트인 게 즐거운지 어눌한 한국어로 쫑알쫑알 이야기한다. 본 적이 없으니 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한빈은 본인이 중국어 하는 수준을 생각하면 정말 잘 하는 건 맞다고 생각했다. 아직 별 리액션도 안 했는데 수다쟁이 귀신은 자기 할 말만 계속 나불나불 이어간다.

 

“사실 수십 년 동안 좀 외로웠어. 이거 비밀인데, 여기 잡귀들이랑 친구나 해볼까 했는데 말도 안 통하고 다들 음침해서 좀 기분 나빴거든. 아!!”

“아 깜짝이야, 왜!!”

 

갑자기 악 소리치길래 간 떨어질 뻔했다. 뭔가 했더니 영화 속 총소리에 놀란 거였다. 이 영화 아까 자기 입으로 한 438번은 봤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애초에 놀랄 심장이 있긴 해?

 

“그, 그래서 첫 번째 소원이 뭔데요, 빨리 말 해.”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로 이상한 귀신이네. 한빈은 자기도 모르게 꽉 잡아주고 있던 손을 얼른 패대기쳤다. 어느 새 영화가 아닌 귀신에게 온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동안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듣고 살짝 불쌍해질 뻔했지만 쓸데없는 동정심은 필요 없었다. 얘는 어디까지나 나한테 달라붙은 악귀고 나는 앞날 창창한 산 사람이니까.

 

성한빈의 목표는 하루라도 빨리 이 귀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까 붙잡았던 차가운 손에 냉동고에 넣었다 뺀 것 마냥 냉기가 감돌았다. 찝찝한 기분에 바지에 손을 몰래 슥슥 닦고 부르르 떨었다. 진짜 귀신은 맞구나.

 

 

* * *

 

 

“그래서 첫 번째 소원이 진짜 그거라고? 진짜로?”

“어. 밥 먹기.”

 

바닥에 깔린 아메리카노를 호록 들이키고는 책상 위에 엎어졌다. 성무가 옆에서 그게 뭐냐면서 계속 코웃음을 친다. 야 내가 제일 황당해 인마.

 

귀신의 첫 번째 소원은 분식집 가서 혼밥하고 오라는 거였다. 소원이 진짜 그거였다. 밥 먹고 오라는 거. 물론 식당을 지정해주긴 했지만 믿을 수가 없어서 다섯 번은 더 물어봤다. 진짜 그거면 돼요? 진짜죠? 딴 말 하기 없기예요? 몇 번이고 똑같은 질문을 하는 한빈에게 귀신은 착 달라붙어 팔뚝 안쪽 살을 제 것 마냥 주물럭거리며 무표정으로 끄덕였다. 영화관을 나서고 귀신이 사라진 이후에도 그 감촉은 계속 남아있었다.

 

“무슨 돈가스 2인분 먹으래서 18000원이나 나왔어…”

 

물론 그냥 평화롭게 먹으라고 놔둔 건 아니었다. 먹는 도중에도 망할 빙의는 멈추지 않았다. 주문한 메뉴가 나오고 포크와 나이프를 드는 순간 잠깐 퓨즈가 나갔고 정신을 차려보니 돈가스가 깔끔하게 잘려있었다. 뭐지? 의문 속에서 한참 고기를 씹다가 물을 먹으려 주전자를 들었는데 또 암전이 됐다. 그리고 몇 초 뒤 제정신으로 돌아와 바로 본 건 컵에 깔끔하게 채워진 물이었다. 이러니까 마치...

 

‘둘이 먹는 것 같잖아…’

 

딱히 기분은 나쁘진 않았다. 돈가스 먹으라고 잘라주고 (내 손이지만), 물도 따라주고(이것도 내 손이지만), 언뜻 보면 그냥 귀신 능력 안에서 최대한 챙겨주는 건데 화낼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다. 다만 의미를 모르겠어서 답답할 뿐이지.

 

1인분을 뚝딱하고 남은 1인분을 노려봤다. 또 잘라주려고 나오려나 싶어 한참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변화도 없길래 궁시렁대며 슥슥 칼질을 시작했으나 이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눈 한 번 감았다가 뜨니까 잘라놓은 돈가스가 깔끔하게 비워져 있어서 꽥 소리 지를 뻔했다. 내가 먹은 게 아니다. 귀신이 먹고 간 거지. 그러니까 결국 잘라서 서로 먹여주게 된 셈이었다.

 

하아. 한빈이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짓눌렀다. 주섬주섬 아이패드를 집어넣던 손가락이 가방 밖으로 힘없이 흘러내렸다.

 

"계산 할 때 주인아주머니가 그렇게 맛있었냐고 물어보는 거야."

 

한빈이 하품을 참고 말했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어제저녁은 그나마 눈은 붙였는데 말이다.

 

"억울해서 그냥 어제부터 바빠서 굶어서 그랬다고 해명했는데."

"했는데?"

"내가 엄청 행복하게 웃으면서 혼잣말 하면서 먹었대."

 

잘 먹을게 한빈아, 너무 맛있다아. 소스가 완전 달아.

 

뭐 이런 말을 혼자 했다나. 그러다가 혼자 머리 막 쓰다듬고 돈가스 입에 물고 셀카도 찍고... 믿을 수가 없어서 핸드폰 봤는데 진짜였다. 온갖 귀척하는 표정이 스크롤을 세 번 내려야 할 만큼 도배되어 있길래 식겁해서 삭제했다. 내 얼굴로 셀카는 왜 찍어 찍긴.

 

"그 귀신 목표가 너 정신병자로 만드는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시계를 확인한 한빈이 또 꺼져라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손가락에 꽉 붙어있는 반지를 원망스레 엄지 끝으로 툭툭 튕겼다. 소원 들어주러 가면 대충 목적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더 미궁이었다.

 

근데 그건 진짜 뭐였을까.

 

귀신은 빙의하지 않았을 때, 나오지는 못해도 목소리 전달은 가능해 보였다. 돈가스 먹을 때 계속 맛있냐고, 더 먹으라고 웃는 소리가 머리에서 계속 울렸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진짜로 다정한 목소리라 기분이 좀 그랬다. 그거 근데 나한테 하는 말 맞나? 나한테 하는 말이 맞아도 이상하잖아. 왜 그러는데.

 

또 한빈은 귀신에게 입과 위를 양보하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 접시 옆에 산더미처럼 구겨져 있던 냅킨 더미를 떠올렸다. 그건 깊게 생각하면 정말로 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 그냥 덤벙대다 물컵 엎은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편했다.

 

 

* * *

 

 

다시 만난 귀신은 한빈을 보자마자 돈가스 잘 먹었다며 만족스러운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심지어 빨리 다음 소원이나 알려달라고 보채는 말을 모른 척 하고 제 집을 소개해 주겠다며 영화관 이곳저곳을 끌고 다녔다. 한빈아, 저쪽에 저거 너희 학교지? 여기 통창에 죽치고 앉아있으면 정문 지나는 네 모습을 볼 수 있어. 2년 전부터 우연히 보여서 완전 반가웠어. 근데 너 횡단보도 헤드폰 쓰고 다니지 마, 위험하니까!

 

'미친 놈...'

 

귀여운 얼굴로 스토커 같은 엄청난 발언을 한다. 너 같은 존재가 나한테 붙어있는 게 수십 배는 더 위험하거든요. 그리고 그 말은 나를 2년 동안이나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잖아. 한빈은 문득 돋는 소름을 남몰래 가라앉혀야 했다.

 

결국 그날도, 그다음 날도 두 번째 소원을 들을 수는 없었다. 빨리 말해달라 그러면 최신 영화 공짜로 보여주겠다고 꼬시거나 교양 중국어 과제 도와주겠다는 핑계로 일부러 말을 돌렸다. 귀신과의 시간이 썩 나쁜 건 아니라 한두번은 솔깃해서 넘어가 줬지만 같은 레파토리가 반복되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일상도 때려치고 이 낡아빠진 영화관에 매일같이 출석체크하고 있는데! 댄스학원을 일주일이나 못 간 탓에 굳은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우 찌뿌둥해.

 

귀신이 잔뜩 아깝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며 다음 소원을 말해준 건 며칠 뒤였다.

 

 

* * *

 

 

두 번째 소원은 산책이었다. 그것도 뭔 집 앞도 아니고 남산까지 가서 산책하고 오란다. 덕분에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팔자에도 없는 아침 운동을 했다. 이 한여름에 말이다.

 

"진짜 똥개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온통 땀에 절어 씩씩대며 걸어오는 한빈의 모습에 저 멀리서부터 직원이 흠칫하는게 보인다. 어딨어 이 자식. 얄미운 영혼 나부랭이를 찾으며 상영관 복도를 쏘다니는데 팔이 쑥 잡아당겨졌다.

 

"나랑 하는 산책 데이트 어땠어?"

 

데이트는 개뿔. 한빈이 코웃음치며 오늘의 귀신을 눈으로 훑었다. 항상 똑같은 멜빵에 긴 와이셔츠 차림이지만 영화관 안에 있어서 그런지 더워 보이지는 않았다. 귀신이 발그레 홍조를 띤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대뜸 손등으로 이마와 목덜미의 땀을 훔쳐준다. 하도 자연스럽게 훑고 지나가길래 피할 겨를도 없었다. 뭐야, 더럽지도 않나.

 

"콜라 먹을래?"

 

그러더니 대뜸 콜라 먹을 거냐고 물으며 자신이 먹던 걸 들이밀기까지 한다. 한빈이 식겁하면서 손사래 쳤다. 귀신이랑 먹는 거 공유했다가 뭔 일 날지 어떻게 알아.

 

"그래도 기분 좋았지?"

"아니, 뭐..."

 

한빈이 긍정도 부정도 못하고 입을 실룩였다. 그래, 아침운동은 좋아하는 편이라 좀 상쾌하긴 했다. 이건 잘 때려 맞췄다.

 

공책 하나 들고 가라고 하더니 산책하는 동안 야무지게 사용했나보다. 산책 중간중간 퓨즈가 나가는가 싶더니 끝날 때 쯤에는 한 페이지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멋대로 빙의하는 짓에 이제 짜증은 나지 않았지만 문제는 온통 중국어뿐이라 읽어도 이해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근데 대체 뭘 쓴 거예요? 공책에."

"궁금하면 나중에 번역기 돌려."

 

허, 남의 손 훔쳐서 쓴 주제에 참 뻔뻔하기가 그지없다. 한빈이 떨떠름하게 입을 벌리고 있자 오늘은 나랑 이 영화 보자, 하면서 언제나의 조그만 상영관 안으로 휙 들어간다. 한빈은 그제야 자신이 정말 홀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8번 상영관까지밖에 없는 이 곳에 9번 상영관 같은 게 존재할 리 없으니 말이다.

 

차가운 손에 붙잡혀 관 한가운데로 이끌려 들어왔다. 9번 상영관은 오늘도 두 사람이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화를 재생했다. 오늘은 흑백이 아닌 90년대 컬러 영화였다. 한빈은 어느새 귀신의 손에 들린 팝콘이 허공을 가로질러 오는 걸 보고는 저도 모르게 입을 아 벌려버렸다. 혀에 정확히 안착한 팝콘 두 개를 질겅질겅 씹으며 억울하게 호소했다.

 

“이딴 게 익숙해지다니..."

“그러니까 한빈과 내가 벌써 그만큼 친해졌다는 뜻인 거야. 서로 익숙하니까 이렇게 투닥투닥 댈 수 있는 거야.”

 

뭐래 진짜. 잘난 척 하는 말투에 째려봐도 귀신은 무시하고 자기 팝콘이나 먹는다. 왜 이렇게 얄밉지. 한빈이 몸을 기울여 귀에 대고 또박또박 쏘아붙였다.

 

“우리가 그럴 만큼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투닥투닥같은 귀여운 말로 포장하지 말아주실래요.”

“......”

“그리고 팝콘 묻었어요, 입에.”

 

아까부터 입술에 붙은 부스러기가 거슬렸다. 아무 생각 없이 떼어주는데 귀신이 손가락이 닿자마자 혼자 흠칫한다.

 

"고마워."

 

살풋 웃는 감사 인사에 괜히 얼굴이 뜨거워진다. 명치가 간질간질해서 얼른 다시 영화로 시선을 돌렸다. 어이가 없었다. 지는 나 잘만 주물럭거리면서.

 

오늘의 장르는 로맨스였다. 서점을 운영하는 사장님과 우연히 그 곳에 들른 여자주인공이 엮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타국에서 시작되는 사랑이라니 낭만은 있네. 확실히 컬러라 그런지 몰입이 잘 된다. 한빈이 홀린 듯이 질문했다.

 

"한국에는 왜 온 건지 물어봐도 돼요?”

 

정확히는 왜 그 나이에 한국에서 죽은 거예요?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우린 저런 식으로 만났어, 서점에서."

 

눈길은 영화에 고정한 채 대답인 듯 아닌 듯 애매모호한 말을 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스크린이 아닌 또 어딘가 머나먼 곳을 담는다.

 

“난 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했어. 작가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 상하이에 갔는데, 걔도 그 당시 상하이로 유학을 왔었어.”

“전 애인 말씀이시죠?”

“전 애인 아니야. 우린 헤어진 적 없거든.”

 

귀신은 한빈의 말을 단호하게도 부정했다. 처음 들어보는 차가운 목소리에 살짝 놀라고 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부드러운 톤으로 바뀐다.

 

“걔가 무슨 책을 찾는 것 같았는데, 중국말을 잘 못 하는 거야. 하긴 지금의 너보다야 훨씬 잘하지만…”

 

뭐라고요? 장난스레 킥킥대는 모습에 한빈이 발끈하자 귀신이 농담이라며 손을 저어 보였다.

 

“그래서 책 찾는 걸 같이 도와줬어. 꽤 어려운 서적이라 너 읽을 수 있겠냐고 물어봤는데 너처럼 날 째려보더라고. 모른척 하고 딴 짓 하고 있는데, 나중에 거기에서 눈치 보면서 편지 같은 걸 꺼내더라."

"......"

"밀정 알아? 걔가 그거였어, 비밀 첩보원. 겉은 유학생이었지만 자기가 속해있던 단체한테 몰래 정보나 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이었지. 시기상으로 그땐 너희 나라가 한국이 되기 전이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 제멋대로인 행동에도 한빈은 화를 낼 수 없었다. 괜히 먹먹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슬쩍 곁눈질했지만 귀신은 울고 있지는 않았다. 몽롱한 눈은 그저 꿈을 꾸는 듯 했다.

 

“아무튼 책 꺼내주다가 손이 잠깐 닿았는데, 집에 와서도 그 감촉이 잊혀지질 않는 거야. 대체 이게 뭔가 싶었는데..."

 

원인을 찾으려고 그 서점에 몇 번 더 찾아갔다고 한다. 언제 오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다시 올 지 조차도 모르고, 아마 엮이면 뻔히 피곤해질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귀신은 그때를 회상하듯 자신의 손바닥을 슬쩍 펴 보였다. 한빈이 저도 모르게 재촉했다.

 

“그래서요. 또 마주쳤어요?”

“응."

 

그러면서 씩 웃는다. 떠올리기만 해도 좋은가보다.

 

"마음에 확신을 가진 뒤로는 걔를 더 졸졸 따라다녔어. 처음에는 되게 경계하더라. 조국의 상황이랑 그 애의 입장을 생각하니 이해는 갔어. 하지만 내가 포기할 사람이야? 절대 나쁜 의도로 접근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려고 엄청 애썼어. 접점도 없는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으려 애쓰고, 걔랑 얘기하려고 하루에 여섯 시간은 한국말만 배우고."

"...진짜 사랑했나 보네요."

“그걸 말이라고 해? 아무튼 자존심 다 버리고 겨우 꼬셔놨는데 자기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펑펑 우는 거야. 왜 그렇게 나를 밀어내나 했더니... 그 말에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귀신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결국 이 모든 게 왜 한국에 왔냐는 질문에 대한 기나긴 답변이었다.

 

뭐랄까, 그냥.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낭만적이긴 했지만 절대 유쾌한 서사는 아니었다. 이런 얘기를 담담하게 누군가에게 들려주기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했을까 싶었다. 귀신은 종알종알 이야기를 이어갔다.

 

"가끔 생각해. 그때 내가 그 사람을 따라온 게 잘못인가, 하고. 내 꼴을 보면 알겠지만 오래 만나지 못했어. 그래서 너무 아쉬워."

"......"

"상하이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으면, 운명이 바뀌어서 우린 좀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을까?"

 

집중하고 있지 못했던 영화 속 남녀는 키스에 잠자리까지 했으면서 왜인지 불같이 싸우는 중이었다. 이 사람도 애인과 저렇게 싸웠던 적이 있었을까? 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한빈은 진지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멜빵에, 강아지처럼 부스스한 머리에, 재수 없는 말투까지 다 똑같은데 왜 갑자기 좀 달라보이지.

 

"근데 되게 고마웠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정말?"

"오히려 미안했을 것 같아요. 이렇게나 모든 걸 걸 정도의 열정이라면, 원래 있던 자리에서도 뭘 하든 잘 했을 텐데, 하고."

"......"

"괜히 나 때문에..."

 

죄 없는 인간에게 멋대로 빙의하고 온갖 미친 짓을 일삼는 괴짜 귀신이지만 그래도 살아있을 때에는 꽤나 순정남이었나보다. 디지털 시대에 좀처럼 볼 수 없는 낭만에 엠비티아이 F 성한빈의 과몰입은 점점 커졌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면 이끌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성별을 떠나서 저였어도 사랑했을 것 같아요."

"......”

"무, 물론 내가 당사자는 아니지만."

 

훌쩍. 울컥하는 걸 숨기려고 그냥 먼지 때문에 콧물이 나오는 척 했다. 왜 눈물이 나오고 지랄이야. 돈가스 먹다 이 사람이 흘렸던 눈물이 아직 눈물샘에 남아있었나보다.

 

"넌 감정에 참 솔직하네."

"그거 욕이에요?"

"아하하, 아니, 아니. 이쪽도 좋다고.”

 

대뜸 하는 칭찬은 의미를 알기 어려웠다. 대충 넘겨버린 한빈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제일 후회가 남는 게 있다면 뭐예요? 그 사람한테 못 해줘서 제일 아쉬운 거. 고인에게 제가 뭐 어떻게 해드릴 수 있는 건 없겠지만..."

"못 해줘서 아쉬운 거?"

"그래도 이왕 절절한 사연 듣게 된 거 최선을 다해볼게요."

 

나름 큰 결심하고 한 말인데 귀신은 그저 귀엽다는 듯 볼을 툭 건들기만 했다.

 

"아, 아. 뭐예요."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속눈썹 떨어졌다."

 

귀신의 시선이 속눈썹이 떨어진 눈 밑과 더 아래쪽을 배회한다. 한빈은 다가오는 얼굴과 손가락을 보며 눈을 나른하게 내리깔았다.

 

"눈 떠도 돼."

 

한빈이 어느새 바싹 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유명한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다. 남자주인공이 살고있는 영국에 언제까지 머물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여자주인공은 ‘영원히’라고 대답한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둘은 결혼 후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당신들은 어떤 결말을 맞이했나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을 터였던 질문들이 희미한 연기가 되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빈은 귀신이 때로 보여주는 이 애절한 눈빛의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 당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과 닮아있구나.

 

사연이 조금 슬퍼서 그랬는지 괜히 눈이 뜨거워진다. 들키기 전에 과제 핑계로 얼른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귀신은 공책을 돌려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학교에는 며칠 동안 아예 다른 가방을 들고 다녔다.

 

 

* * *

 

 

영화관에 한 나흘 정도 들르지 않았다. 바빴던 것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발길이 가지 않았다. 대체 세 번째 소원은 뭘까? 보나 마나 돈가스 먹기와 남산 뺑뺑이 돌기처럼 시시한 소원일게 분명했다. 그래서 더 궁금한데 동시에 모르고 싶었다. 더 알고 싶었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몇 십년, 아니, 어쩌면 거의 백 년 만에 말이 통한 인간한테 비는 소원이 그런 시시한 것일 이유가 무엇일지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아니면, 혹시 그냥 외로워서? 순수하게 인간 친구가 가지고 싶어서?

 

스스로 생각해낸 너무나 동화 같은 이유에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귀엽기라도 하잖아.

 

그날은 꿈을 꿨다. 귀신이 영화관이 아니라 밖에 나와 있는 꿈이었다. 야외에서 본 그 사람은 예상대로 시린 햇살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우린 탁 트이고 낯선 어딘가의 공원을 한참을 같이 걸었다. 그리고 아주 많은 대화를 했다. 이쪽의 말에 귀신이 환하게 웃으며 뭐라 쫑알쫑알대는데 음소거 된 것 처럼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듣고 싶은데 들을 수가 없다.

 

아마 그건 며칠동안 영화관에 찾아오지 않은 인간 성한빈에 대한 복수였을 것이다. 지나치게 생생한 그 환상은 꿈이라기보단 귀신이 무의식에 들어와서 자신을 괴롭힌 쪽에 더 가까웠다.

 

꿈 속에서 딱 하나 좋았던 건 빌어먹을 반지가 없다는 거였다. 맨손가락이 오랜만에 허전할 정도로 시원했다. 딱 하나 나빴던 건 마지막에 손등에... 어우. 비명을 지르면서 잠에서 깼다. 엎드려 베고 있던 베개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꿈이라 해도 어지간히도 싫었나보다.

 

 

* * *

 

 

"요즘은 왜 그 귀신 얘기 안 하냐? 저번에 산책 간 뒤로 업데이트 없어?”

 

모처럼 캠퍼스와 떨어진 맛집에서 밥을 먹는데 답지 않게 밥알을 세는 제 친구가 불만스러운가보다. 반질반질한 피부도 떡 벌어진 어깨도 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한빈은 요즘 계속 풀이 죽어있다. 성무의 걱정에 한빈이 맥없이 숨을 뱉었다.

 

"퇴마 다 했으니까 묻지 마라.”

 

성무의 시선이 흘긋 밑을 향한다. 별 장식 없이도 반짝반짝 윤을 내는 악세사리가 여전히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다.

 

"반지 아직도 있는데?"

"어, 그냥 귀찮아서 끼고 살려고. 뭐 나 죽이는 것도 아니고."

"......"

"불만 있냐?"

"아뇨."

 

한빈이 소시지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쏘아붙인다. 성무는 그저 억울하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까칠하실까. 뭐라 반박하고 싶은데 귀신님이 이 대화도 다 듣고 있다고 하니까 쫄려서 그냥 모른 척 하게 된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반지가 뭐냐 반지가, 남사스럽게.

 

예상보다도 더 친구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은 잡귀가 오늘따라 괜스레 더 원망스럽다. 불쌍한 내 친구, 우리 엄마 다니는 교회라도 좀 데려가야 하나. 물론 나도 머리 크고 나서는 한 번도 안 가봤지만…

 

“너무 무거워.”

 

애틋한 마음에 어깨를 툭툭 쳐주던 성무가 상처 가득한 눈으로 외쳤다.

 

“야 내가 요즘 술을 좀 많이 먹고 다니긴 했지만 고작 손바닥 가지고 무겁다니 좀 너무한,”

“아니, 마음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결국 입맛이 다 떨어졌다. 한빈이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도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오로지 그 사람만 그리면서 버틸 수가 있어? 그런 감정이 영화나 드라마나 구전설화의 형태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할 수가 있어? 그건 거의 원혼 수준 아니야? 사실 부모님의 원수인데 너무 미워한 나머지 사랑으로 착각한 거 아닐까?”

“무슨 소리야…”

“나도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영화관이라는 장소가 참 오묘하다. 다수의 사람들과 있는 공간에서 타인은 어느새 사라지고 오로지 나와 스크린만 남는다. 망막에 반사되는 눈부신 빛이, 고막을 울리는 입체적인 소리가 나를 그 시간 만큼은 울고 웃게 만들며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귀신은 그런 존재였다. 기껏해야 환상인 주제에 현실인 나를 자신의 세계에 매료시켰다.

 

오랜 고독의 대가는 낭만이었고 상실과 아픔의 대가는 덤덤함과 유쾌함이었다. 그 꿈을 꾸고 난 뒤 외면하고 있던 공책을 꺼냈다. 왠지 세 번째 소원을 들으러 가기 전에 봐둬야 할 것만 같았다. 요즘은 하도 기술이 좋아져서 그냥 사진만 찍으면 다 번역이 됐다. 공책과 패드를 나란히 놓고 확대해가며 읽었다. 흘림체 탓인지 중간중간 번역이 덜 된 곳도 있길래 처음에는 건성으로 읽다가 점점 빠져들어 하마터면 수업도 놓칠 뻔했다.

 

그러니까 아마 전생에 함께 산책을 즐겨 했나보다. 애인과 닮은 성한빈이라는 사람의 손을 빌려서 애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쓰는 것 같았다. 몸을 빌려주는 거야 이제 상관 없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사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대체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이걸 전해주기를 바라는 건가? 그게 소원이라면 기꺼이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소원을 다 들어주고 귀신은 성불한다고 치자.

 

그러면 그 뒤에 나는?

 

이 뒤숭숭하고 우울하고 근질근질하고 불편하고 갑갑한 이 감정은, 같이 데리고 사라져 주는 거야?

 

- 우리 여기에서 처음 손을 잡았어. 기억해?

 

- 바람에 실리는 풀냄새가 좋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네 웃음소리가 좋았던 거였나 봐. 혼자 하는 산책은 별로 재미가 없네.

 

기분이 나빴다. 영화관에서 나왔는데도 감정은 떨쳐지지 않고 구석의 케케묵은 먼지처럼 쌓여가기만 했다. 솔직히 생각만 해도 이젠 억울할 지경이었다. 왜 하필 나냐고, 왜. 고작 닮았다는 이유로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이렇게 더럽게 엮여야 하냐고. 이제는 정말 툭 건들면 눈물이 나올 것 같은 한빈의 상태에 성무가 테이블을 쾅 치고 일어났다.

 

“여기 에스프레소 끝내주게 맛있는 커피집 있거든? 우아하게 커피 한 잔 때리고 가자.”

 

우울할때는 달달한 카페인이 최고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두 사람은 빠르게 계산을 끝내고 나왔다. 오늘은 좀 덥긴 하지만 날씨 하나는 끝내주게 좋다. 장마라더니 비도 안 오고. 뒤따라 나온 한빈이 즉각적인 광합성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는지 기지개를 켰다. 그래, 언제까지나 이런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다. 재수 없게 걸렸어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길이었다. 곳곳에 있는 옛날풍 찻집과 서점은 한눈에 봐도 세월이 깃들어 있었다. 성무가 말한 커피집을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가방끈이 끌어당겨졌다.

 

“오늘이 7월 7일인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귀신인가 했는데 웬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고 있다. 치아가 거의 빠지고 나이가 아주 많아 보였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한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뇨, 오늘 2일…”

“중국 작가 학생은 잘 만났고?”

 

그 할아버지는 이상한 질문을 했다. 사람을 잘못 본 건가.

 

"네?"

“할아버지! 여기서 뭐 해."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누군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이쪽으로 튀어온다. 친근한 대화를 보아 손자인가 보다. 남자는 여전히 걸음을 떼지 않고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할아버지를 낑낑 잡아끌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희 할아버지가 치매셔서... 아이, 왜 이러실까."

 

손자의 재촉에 노인은 마지못해 발걸음을 돌린다. 휑해진 주변과 성무의 재촉에도 한빈은 한참을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이상한 일만 한가득이다. 이젠 실소도 나오지 않았다.

 

 

* * *

 

 

“책을 하나 찾아 줘."

 

침묵 속에서 나온 첫 마디는 세 번째 소원이었다. 한빈은 이제 귀신이 팝콘을 집기도 전에 입을 벌리는 지경이 됐다.

 

"책이요?"

 

잔뜩 우물대면서 물었다. 오늘은 왜 한꺼번에 네 개나 넣어주냐. 귀신은 통통해진 볼이 귀엽다는 듯 킥킥 웃었다. 오늘따라 유독 느끼한 눈빛이 적응이 안 됐다.

 

“나랑 걔의 단골 서점이 있었어. 내가 한국으로 온 뒤에 우리가 서로에게 편지를 쓰면 거기로 보냈거든. 아무래도 걔 신분이 신분인 만큼 조심하는 차원에서.”

“......”

“중국에서 가져온 책을 그 서점에 하나 뒀어. 제일 안쪽 구석, 맨 윗단 왼켠이야. 딱 우리 키에서 손 뻗으면 닿는 높이. 편지가 도착하면 주인이 그 책 사이에 편지를 끼워주고, 못해도 이틀이나 사흘 이내에는 가서 편지를 가져오곤 했지. 유일하게 우리 관계를 아는 친절한 주인이었는데…”

 

그러니까 서로의 추억이 깃든 물건을 찾아달라는 거였다. 이번 소원은 좀 납득이 갔다. 하긴, 그렇게나 연애편지를 끼워두던 책이면 소중하긴 하겠다. 하지만 문제는.

 

“근데 너무 옛날이잖아요. 시간이 지나서 책 자체가 분실되거나 이미 폐기됐지 않을까요? 보존 상태가 어떤지 알 수도 없고.”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그 책방은 그대로 있는 거 봤거든. 한 3년 전이긴 한데…”

“네? 어디에서요?”

 

귀신이 당연한 듯 입을 열다 멈칫했다. 살구색 입술이 달싹거렸다.

 

“…영화에서.”

 

이해하는데에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한빈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 책방이 있다는 거리가 어떻게 우연처럼 로케 장소로 쓰였나보다. 평소에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요구도 당당하게 하던 귀신이 지금은 유독 조금 시무룩해 보인다.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장소에 헛걸음질 하게 만드는 게 미안한 건가.

 

"그때 나무 냄새 나서 좋다고 했던 책방 맞죠?"

"내가 그랬어?"

"네. 저번에 뭔가 그랬던 것 같은데..."

“......”

"다른 사람인가?"

 

복잡해지는 기분에 그냥 얼버무리고 넘겼다. 음. 그냥, 착각인 것 같다.

 

 

* * *

 

 

위치 대강 듣고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귀신이 알려준 영화 속 장소는 한빈도 언젠가 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여기라고?”

 

불과 며칠 전 김성무랑 밥 먹으러 온 카페거리였다. 한빈의 시선이 핸드폰 속 캡처 사진과 건물 외관을 몇 번이고 바쁘게 오갔다. 간판은 조금 다르지만 분명히 여기가 맞다. 뭐 이런 우연이 다 있지.

 

고즈넉한 책방은 다행히 영업 중인 것처럼 보였다. 안에는 손님이 없는 듯했다. 유리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갔는데 주인도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일단 귀신이 알려준 대로 맨 안쪽으로 들어가 왼켠을 살폈지만 늦어봤자 90년대쯤 출판한 것 같은 칼라 인쇄본들 뿐이었다.

 

“있을 리가 없나…”

 

솔직히 정말 있으리라고 생각은 안 했다. 귀신의 사연이 짠하기도 하고 그간의 의리를 봐서 와 준 거지,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꽂혀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호러였다. 야, 야. 귀신님. 봐요, 아무것도 없는 거 맞지? 아니면 몸 빌려줄 테니까 그쪽이 찾을래요? 반지를 툭툭 건들면서 말을 걸어봤지만 딱히 응답은 없었다.

 

“뭐 찾으시는 책 있으세요?”

 

그러다 갑자기 벽에 걸린 블라인드 사이에서 주인이 불쑥 등장했다. 한빈이 화들짝 놀라 손을 뒤로 숨겼다가 어색하게 다시 책장을 가리켰다.

 

“아, 네! 그, 좀 많이 오래된 책을 찾고 있….”

 

대뜸 대답하던 한빈이 뚝 멈췄다. 어라, 이 사람.

 

“또 뵙네요.”

 

책방 주인이 싱긋 웃었다. 맞다, 그때 그 백 살은 되어 보이던 노인을 데려가려던 손자분. 잠깐 스치듯 본 거긴 했지만 아는 얼굴을 보니 반갑긴 했다. 하하, 그러게요. 우연이네요. 웃는 낯으로 받아주며 돌직구로 물어볼지 고민하다가 그냥 슬쩍 돌아갔다.

 

“여기 되게 유서가 깊은 책방인가 봐요. 옛날 책들이 엄청 많네요.”

“네. 여기 4대째 하는 곳이에요.”

 

한빈이 입을 떡 벌렸다. 4대째요? 생각보다도 더 엄청난 역사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빈은 서론은 때려치우고 급하게 핸드폰을 뒤졌다.

 

"혹시 이 책 아세요?"

 

핸드폰을 뒤져 메모장에 적어둔 중국어 제목을 보여주자 주인이 갸우뚱한다. 하긴, 책이 얼마나 많을 텐데 바로 아는 게 더 이상했다.

 

"중국어 책인가요?"

"아마도요."

“그런 원서는 취급하고 있지 않을 것 같은데… 잠시만요.”

 

찾는 데에는 역시 시간이 걸렸다. 주인이 한빈이 있던 곳도 뒤적여보고, 입구 쪽에도 가보고, 저 반대편에도 가서 열심히 책장을 손으로 훑었다. 매의 눈으로 온 실내를 두어바퀴 돌고 왔으나 결과는,

 

"역시 없는 것 같네요."

 

주인이 미안하다며 고개를 젓는다. 저도 모르게 실망한 표정을 짓는 한빈에 다시 골똘히 고민하더니 작은 탄성을 지른다. 아! 잠시만요. 등 뒤의 블라인드를 걷어내자 이 안쪽에도 책이 한가득이었다. 키만큼이나 켜켜이 쌓인 책들을 한참을 뒤지더니 갑자기 행동이 멎는다.

 

“혹시 이 책 찾으시는 게 맞으실까요? 저희 할아버지 때부터 보관해 오던 거긴 한데…”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정말 손에 무언가를 들고 블라인드를 걷는 주인의 모습에 한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진짜 있다. 누렇게 바래진 표지에 정확히 그 제목이 쓰여 있었다. 夏樱花. 뻗어지는 손 끝이 작게 떨렸다.

 

“근데 이게 사실... 책이 아니라요.”

 

손이 닿는 순간 주인이 어색하게 덧붙였다. 책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책이 아니라고요? 책이잖아요.”

“책의 형태는 맞는데, 안이 백지예요.”

"네?"

 

한빈이 당황했다. 아니, 책이라며 왜 또 백지야. 얼른 받아들어 대충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는데 정말 주인의 말이 맞았다. 이건 책이 아니라 그냥 책이 되기 전 상태의 종이였다. 혼란 속에 마음속으로 캐물었지만 들리는 답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책이라며. 너도 그 오랜 세월을 이런 백지를 찾으려고 보낸 건 아닐 텐데.

 

아니면 혹시 나 놀린 건가?

 

그러면 최악이다. 한빈이 믿기 싫은 기분에 멍해 있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꼼꼼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실없는 놈 같지는 않아보였다. 뭐라도 쓰여있겠지, 한두줄이라도. 그렇게 되뇌며 바쁘게 움직이던 눈이 안도감에 질끈 감겼다. 다행히 첫 페이지에 짧게 무언가 채워져 있었다.

 

 

 

**

 

언젠가 이 곳이 자유로워지고,

 

우리가 진정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날이 오면,

 

우리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어 세상에 하나뿐인 책을 만들고자 합니다.

 

 

 

프롤로그는 내가 시작할게요.

 

에필로그는 당신이 써주세요.

 

**

 

 

 

'너 편지를 너무 길게 써. 한 권으로 안 끝날 것 같아.'

 

한빈이 머리에서 울리는 소리에 투덜거렸다.

 

"길게 쓰면 좋지 뭐. 책 만든다며."

"네?"

"아, 아녜요. 안에 혹시 편지 같은 게 있었나요? 여기 꽂아놨다고 하던데.”

“…편지요?”

“현규야!”

 

블라인드 안에서 이번엔 우렁찬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책방 주인이 한빈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할아버지, 나 여기 손님.”

“현규야!”

“괜찮아요.”

 

어차피 책은 찾았고 시간은 많았다. 편안해진 마음에 얼른 다녀오라는 듯 웃어 보이자 책방 주인이 미안하다며 고개를 까딱해 보인다. 죄송합니다, 금방 올게요. 현규가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과 함께 블라인드 너머로 사라지자 한빈도 그제야 천천히 다시 책을 훑었다. 그들이 채우지 못한 수없이 많은 백지를 넘기고 또 넘겼다. 근데 이걸 찾아도 결국 편지를 찾지 못하면 소용 없잖아. 이쯤되니 좀 궁금하긴 했다. 이 사람들이 대체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은근 별거 없었을 것 같긴 하다. 오늘은 뭐 먹었는데 맛있었다. 어디 다녀왔는데 좋았으니까 다음에 꼭 같이 가자, 만난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보고 싶다. 뭐 그런 류의 말로 채워져 있지 않겠나. 대체 내가 이걸 왜 유추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귀신한테 알려달라고 하면, 알려줄까?

 

문득 그런 생각에 미친 순간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알려고 들면 위험할 것 같았다. 자신을 위해서나 그 귀신을 위해서나 완벽한 타인으로 있어야 하는 자신이 왜 자꾸 그런 도 넘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엮이면 엮일수록 불쾌해지고 갑갑해지고 호기심이 생겼다. 이건 아마 그들의 관계와 서사를 알고 싶다기 보다는...

 

블라인드 안에서는 손자와 할아버지의 대화 소리가 조곤조곤 울렸다. 생각보다 대화가 오래 걸리는 듯했다.

 

그리고 기억은 또 거기서 끊겼다.

 

 

* * *

 

 

“무슨 일 있었어요? 영화관으로는 내 발로 걸어올 수 있거든요?”

 

정신을 차려보니 영화관이었다. 예고야 원래 없었다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뜬금없었다. 책까지 찾아줬는데 뭐가 또 급하다고 빙의까지 해서 영화관으로 데려온 거야. 언제나처럼 팔뚝이 부여잡혀 9번 상영관 안으로 질질 끌려들어 갔다. 대답 없는 귀신의 태도의 불평 가득한 입이 열렸지만 갑자기 꽉 끌어안기는 통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고마워.”

“......”

“책, 진짜 고마워. 몸 또 뺏어서 미안해. 시간이 없어서. 급해서.”

 

오늘의 귀신은 뭔가 좀 달랐다. 그간의 여유롭던 태도와는 다르게 처음 보는 감정적인 모습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귀신치고는 좀 따뜻했다.

 

이 귀신 만나고부터 이상하다, 라는 사고를 자주 하게 된다. 이상하다. 죽은 사람인데 얼음장 같아야 정상 아닌가. 은은한 향기마저 나는 기분에 어깨 위로 혼란스러운 눈만 깜빡이고 있자면 꽉 죄어있던 몸이 해방된다. 귀신이 한빈의 손에 들린 책을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온 마음으로 기쁘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여전히 소름 끼칠 정도로 잘생긴 그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된다. 웃으니까 이제야 진짜 사람 같다. 이 사람의 미소는 굉장히 오묘했다. 익숙한듯 낯설고 낯선듯 익숙했다.

 

사실 귀신에게 모른 척 하고 있는 사실이 몇가지 있다. 태연한 척 팝콘을 핑계로 입에 넣어지는 손가락이 사실은 항상 떨리고 있다는 것, 속눈썹 떼어준다는 핑계로 키스 직전의 거리까지 다가왔던 것, 이름을 부를 때 항상 반사적으로 눈가가 벌겋게 물든다는 것, 영화관 출구에서 배웅하는 그 짧은 순간 더없이 슬픈 얼굴이 된다는 것도.

 

나를 왜? 언제부터?

 

한빈이 목까지 차오른 의문을 꾹 삼켜내고는 내뱉었다.

 

“편지는 못 찾았어.”

“어차피 네 말처럼 세월도 있고 해서 찾는데 시간 좀 걸릴 거야. 사진관 갈 때 가져와.”

“사진관이요?”

“응. 네 번째 소원이야.”

“......”

“사진 찍어 줘. 이 포즈랑 똑같이.”

 

귀신이 가지고 있던 낡은 지갑을 뒤적이더니 손바닥만 한 흑백사진을 꺼냈다. 진짜 무슨, 박물관에서나 볼 것 같은 정말 옛날 흑백 사진. 얼굴이 거의 날아가서 잘 보이지도 않는 그 사진을 한빈이 집어 들고는 유심히 쳐다보았다.

 

기분이, 좀 묘하네.

 

“그것도 또 오래된 사진관이에요? 책방처럼?”

“맞아. 걔랑 나랑 찍었던 곳이야. 사실 그 사진관은 폐업한 지 오래라 최대한 근처로 골라봤어.”

“아니 뭐, 그쪽이 그걸로 괜찮다면 상관은 없지만… 그치만 이건 둘이잖아요. 혼자 찍으라고요?”

“응. 위치도 포즈도 똑같이 해야 해.”

 

낡은 사진 속 두 남자는 다정하게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하나는 눈앞의 귀신이 맞고, 또 한 남자는… 대체 얼마나 쓰다듬은 건지 잉크가 다 날아가 있다. 그래서 잘은 모르겠지만, 눈코입 위치는 닮았네.

 

“오늘이랑 내일은 좀 바쁜데… 모레 가서 찍을게요.”

“......”

“아 왜애. 나한테도 현생이라는 게 있거든요? 잊은 것 같은데 나 대학생이에요. 좋아하는 춤도 지금 거의 한 달을 못 가고 있는데…”

 

시무룩해지는 얼굴에 한빈이 저도 모르게 말꼬리를 늘렸다. 아니 뭐, 귀신 주제에 감정이 풍부한 게 좀 귀엽긴 하잖아. 귀신이 애교 부리듯 얕은 보조개를 만들고 있는 얼굴을 진지하게 쳐다보더니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손을 올려 촉감을 감상하듯 뒷머리를 쓰다듬고 목덜미를 부드럽게 주무른다. 한빈이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맞아. 넌 지금 대학생이고 살아있지. 이렇게.”

“......”

“편할 때 다녀 와. 언제든 기다릴 수 있으니까.”

 

귀신은 한빈의 손을 잡고 언제나처럼 영화관 출구까지 배웅했다. 끝까지 미지근하게 느껴지는 체온에 한빈은 몇 번이고 오히려 자신이 살아있는 게 맞는지 뺨을 꼬집어야 했다. 저 갈게요. 제발 이제 몸 좀 뺏지 말고요.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꽉 잡힌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 신신당부하며 뒤를 돌았으나 귀신의 목소리가 또 발목을 붙잡는다. 낮고, 잔잔하고, 젊고, 깊은 호수 같은 목소리. 이 목소리의 주인은 간혹 가다 어울리지 않게 엉뚱한 말을 하곤 했다.

 

“근데 책에 뭐라고 쓰여있었어?”

 

그런데 이 질문은 엉뚱해도 너무 엉뚱하지 않나. 한빈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요, 다 백지던데! 진짜 나 놀리려던 거 아니에요? 맨 뒷장도 찢어져 있었고."

“응. 맨 뒷장은 내가 그냥 개인소장 하려고 뜯었어. 걔가 되게 예쁜 말을 써줘서 지갑에 넣어두고 매일매일 보려고. 근데 잃어버려서 뭐라고 써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

"......"

"사랑해, 는 아니었는데..."

“장난해요? 그쪽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초능력자도 아니고."

"......"

"아니 왜 또 입술을 그렇게 호빵처럼 쭉 내밀고... 뭐, 그 시절에 중국에서 온 거면 가족이랑도 거의 이별하고 온 걸 거 아니에요. 그럼,”

 

난데없는 시무룩 강아지 공격에 져버렸다. 난 대체 왜 저표정에 약해진거냐. 모르겠다. 난 타인이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예상하는 것 조차 그 사람에게는 실례 같긴 한데.

 

“내가 대신 형의 가족이 되어줄게.”

 

그냥 내가 그 사람이었다면, 막연하게 그랬을 것 같아서.

 

“뭐 이런 내용 아니겠어요? 예쁜 말이라 못 참고 뜯어갈 정도면. 형인지 너인지 모르겠지만.”

“......”

“왜, 왜 그런 이상한 표정으로 봐요. 화내지 마요. 그냥 찍은 거니까…”

“......”

“저 갈게요, 또 봐요.”

 

창백하기만 했던 귀신의 얼굴이 귀까지 새빨개졌다. 설마 감동했나? 반했나? 그런데 왜 울라고 그래. 일그러지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다.

 

이상한 건 귀신 뿐만이 아니었다. 솔직히 귀신과 이렇게나 오랫동안 같이 있는 게 인간의 멘탈에 그렇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진 않을 게 당연했다. 정말로 슬슬 헤어질 때가 된 듯했다. 다행히 소원을 벌써 반은 들어줬다. 네 번째 소원, 그리고 다섯 번째 소원까지. 이제 딱 두 개 남았다. 곧 평범했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기뻐야 하는 게 당연한데 왜 이렇게 찝찝한지 모르겠다.

 

 

* * *

 

 

귀신이 지정해 준 사진관은 그 책방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데 익숙한 뒤통수가 보여서 툭 쳤더니 성무가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뒤로 자빠졌다. 옆에 있는 건 처음 보는 여자분인데 딱 봐도 놀리고 싶은 분위기다. 너 나랑 온 거 내가 걱정되서 온 게 아니고 그냥 데이트 장소 사전답사 온 거였어? 순진한 성무는 억울한 얼굴로 손을 젓기 바빴고 땀을 뻘뻘 흘리며 해명하다가 역으로 묻는다.

 

그, 그러는 너는. 혼자 왔어?

 

 

 

 

“꼭 그렇게 옆을 띄워놓고 찍으셔야 해요?”

 

한빈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사진사는 카메라에 적나라하게 잡히는 그 빈 공간이 참으로 찝찝하다는 표정이었다. 음, 그래도 혼자 찍는 건데 너무 띄워놨나. 어색하게 웃음 지은 한빈이 중간으로 이동하다가 다시 손에 들린 사진을 보고는 원위치했다. 위치도 포즈도 똑같이 찍으라고 했으니까 이게 맞다. 여기에 다시는 올 일 없었고 사진사도 두 번 다시 볼 일 없었고 미친놈 취급 받는 건 잠깐이었다. 까짓거 이제 막판이니 제대로 들어주자 싶었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닮아 있었다. 귀신 옆의 남자와 자신의 얼굴이. 밝은 데에서 사진을 다시 보고 솔직히 까무러칠 뻔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소원은 자신을 그 사람의 대용품 취급 하는 거였다. 나보다는 그 당사자 분이 더 기분이 나쁘겠지만 이쪽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래도 이게 그 잘나신 소원이라니까. 차라리 그냥, 별 생각 없이 찍고 끝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잡생각을 지우고 끄덕였다.

 

“네. 이렇게 찍어주세요.”

“알겠습니다. 턱 살짝만 내려주시구요. 눈은 조금 편하게 뜨셔도 될 것 같아요. 좋아요. 하나, 둘.”

 

- 좀 웃어, . 너무 화난 것 같잖아.

 

또 시작이다. 한빈이 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조용히 좀 해 이 잡귀들아. 속으로 중얼거려봐도 환청은 멎지 않았다.

 

- 하지만 나는 원래 입술이 내려가 있어

-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끌어올려 봐. 나처럼 이렇게.

 

“좋아요, 미소 예쁘네요. 그렇게 다시 한번 찍을게요. 하나, 둘.”

 

- , 좀만 붙어보자. 고개 이쪽으로 조금만 더.

- 나 엄청 붙었는데...

- 공간이 이만큼이나 있는데? 이거 사진 엄청 비싸단 말이야. 한 번 찍는 거 제대로 찍어야지.

 

“고객님, 고개 너무 왼쪽으로 기울어지셨는데요, 조금만 오른쪽으로 다시 기울여볼게요. 눈 감지 마시고요.”

 

빛이 몇 번이고 눈을 가렸다. 강한 햇빛에도 잘만 뜨고 다니던 눈이 오늘따라 자꾸만 시리다. 팡, 팡, 속도 모르고 터지는 플래시에 인상이 자꾸만 찌푸려진다. 그래도 웃어야지. 사진인데 웃어야지. 억지로 올리는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니까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고. 아무래도 이건.

 

- , 손은 안 잡아도 돼. 어차피 가슴에서 잘리는데.

- 그래도.

 

“고객님, 그, 몸이 너무 기울어져서… 조금만 이쪽으로. 왼손에 힘 빼시고요.”

 

내가 착각을 했다.

 

지금까지 착각을 했다. 귀신이 머리에서 말을 거는 게 아니었다. 이건 누군가의 기억이었다. 뇌 내 아주 깊은 서랍 속에 숨겨져있던, 내 것이면 안 될 기억. 원래의 나에게는 없던 기억.

 

귀신 목소리는 알겠고. 그럼 다른 하나는.

 

- 그래도, 우리 첫 가족사진이잖아.

 

“…님.”

“......”

“고객님?”

 

눈 앞에 들이밀어진 티슈를 이제야 발견했다. 서서히 고개를 들자 잔뜩 당황한 표정의 사진사가 서 있다. 뺨을 타고 줄줄 흐르는 손님의 눈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수습할 새도 없이 감정이 고장나 버렸다.

 

분명한 내 목소리다. 그럴 리가 없는데.

 

머리가 지끈거려서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허겁지겁 지갑을 뒤져 지폐 몇 장을 꺼내 들었다.

 

“저, 저 갈게요. 죄송해요. 이걸로 결제해주시고 잔돈은 됐어요.”

“괜찮으세요? 그게 아니고, 원본 받아보실 이메일이랑…"

 

쓰러질 것 같은 느낌에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나왔다. 사진사가 뭐라 뒤에서 소리쳤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누가 심장을 가시박힌 장갑으로 움켜쥐고 마구 쥐어뜯는 것 같았다. 스스로 내는 고동이 귀에 쿵쿵 울렸다.

 

"아, 아..."

 

가슴이 아팠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혼미할 지경이었다. 결국 사진관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못하고 무릎을 짚고 헉헉대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진관을 나와도 목소리는 죽지도 않고 머리에서 맴돌았다. 똑똑히 들으라는 듯이 커진 목소리는 꼭 벌을 주는 것 처럼 다정했다.

 

- 우리의 첫 가족사진이잖아. 한빈이와 나의.

 

"아니야, 아니. 내가 아니라고. 내가, 아닌데."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환청에 식은땀으로 절은 이마를 몇 번이고 쓸어 넘겼다. 손이며 입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러다가 심장이 멈춰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그치만, 성한빈이 말도 없이 죽으면 그 사람은... 아닌데, 이게 아닌데. 이상하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죽든 말든 그 사람이랑...

 

의미도 모르고 울컥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참느라 멍든 입술에 감각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거리 한복판에 주저앉은 한빈을 보고 수군댔다. 괜찮으세요? 이따금 들리는 걱정에도 한빈은 일어나지 못하고 머리카락만 헤집었다.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오는 뇌를 부여잡고 숨을 내쉬기만 바빴다. 잠깐이라도 호흡을 의식하는 걸 멈추면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누군가 어깨를 잡아 흔들어 세울때 까지.

 

"...저기요. 저기요. 정신 차려보세요."

 

정신이 없어 두 개로 겹쳐 보이던 시야가 점점 돌아왔다. 책방 주인 현규 씨다. 아, 맞다. 여기 그 근처였지. 현규는 창백하게 질려있는 한빈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는 걸 확인하고 천천히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깜짝 놀랐어요. 앉아 계시길래... 괜찮으세요? 병원 가실래요?"

"저, 저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영화관. 그 영화관에 가서. 그 귀신 멱살 잡고 물어봐야 해요. 너 대체 누구냐고. 아니, 네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대체 누구냐고. 누구길래 나를 이렇게나 괴롭히고 슬프고 혼란스럽게 하는 거냐고. 아니, 그 전에.

 

너, 이름이 뭐냐고.

 

"저 괜찮아요. 이거 놔 주세요."

“잠시만요, 드릴 게 있어요."

 

한빈을 놓지 못하던 현규는 결국 10초만 기다려달라는 소리를 남기고 책방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멍하니 기다리고 있자 이내 무언가를 들고나오는데, 훼손되지 않도록 투명한 지퍼백에 들어있는 건 한빈이 찾던 물건이었다.

 

"이거, 집에 있더라고요. 할아버지께서 보관하시고 계셨어요."

 

거칠던 한빈의 호흡이 그제야 진정이 됐다. 축축해진 한빈의 손이 현규가 건네주는 물건을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뜯어보지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있는 모습에 현규가 긴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잠깐이라도 괜찮으니까."

 

 

* * *

 

 

 

영화관 건물이 보이는 광장 앞 벤치에 널브러져 앉았다. 한빈의 손에는 아주 오래된 편지 다발이 들려 있었다. 대부분 오랜 시간을 거치며 누렇게 변색됐지만 맨 바깥쪽에는 세월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깨끗한 새 편지가 하나 있었다. 이 편지만 귀신이라도 들린 건가 싶을 정도로.

 

살짝 멍했다. 현규가 해 준 이야기가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 오늘이 77일인가?

- 중국 작가 학생은 잘 만났고?

 

노인이 자신을 아는 척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과,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오랜 기억 속에 지금의 성한빈과 아주 많이 닮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심지어 여기 주변에 살았다고 한다. 그것도 책방 단골이었다고.

 

- 할아버지가 가끔 해주시던 옛날 이야기예요. 손님이랑 똑같이 생긴 단골고객이 있었는데, 옛날에 여기 주변에 살았다나 봐요. 그 당시 할아버지 또래였어서 똑똑히 기억하시는 것 같아요.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아마 느낌상 사귀던 분이랑 책방을 통해서 편지를 주고받았대요.

 

책방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았다던 이야기는 귀신이 해 준 말과도 일치했다. 편지가 도착하면 당시 할아버지가 미개봉 상태로 두 사람이 평소 편지를 주고받던 그 빈 책에 고이 껴놓았는데, 하필 그날은 술기운에 몽롱한 상태로 자신의 우편물로 착각하고 편지를 뜯어봤다고 한다. 깜짝 놀라 오해받을까 봐 그 애인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직접 전해주러 갔는데, 그 사람이 집에 없었단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항상 바르게 웃으며 잘 돌아다니던 청년이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집에 없는 건 역시 이상했다. 문에는 못 보던 발자국이 있었고 우편함도 쓰러져 있어서 편지를 넣어주지도 못했다.

 

할아버지가 무언가를 깨달은 건 그 즈음이었다.

 

수소문해보니 그 사람은 며칠 전에 갑자기 병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병사라니. 연고도 없고, 장례도 어쩐 일인지 굉장히 쉬쉬하면서 치러졌다고 한다. 편지에는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시간이랑 장소가 쓰여있었다. 그래서 그 중국 작가에게 소식도 전할 겸 허겁지겁 직접 돌려주려 갔는데, 결국 전해주지 못 한 것 같았다. 그냥 끔찍한 사고가 있었다고만 하고, 이유는 말을 안 해주신단다.

 

결국 서로의 안부도, 마지막 편지도 전해지지 못한 셈이었다. 기존에 주고받았던 편지 다발은 유품 정리 전에 할아버지가 몰래 따로 가져와 보관했다. 어차피 그대로 놔두면 버려지거나 불타 없어질 테니까. 흔적도 없어지게 놔두기에는 생전 그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예뻤다고 한다. 책방 하면서 평생 그렇게 힘들었던 시기는 없었단다. 그 편지 내용이, 그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이, 자기 마음에 너무 걸린다고.

 

- 그런데 정말 그 책은 어떻게 찾게 되신 거예요? 자식은 없으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손자분이신가?

 

한빈은 벤치에 앉아 오래된 편지 다발부터 뜯었다. 한자도 많이 섞여 있고, 옛날 글씨라 다는 알아보지는 못 했지만 요즘 사람들 말하는 거랑 별 다를 바 없었다.

 

오늘은 부추전 먹었는데 맛있었어.

다음에는 바다에 꼭 같이 가자.

어제 밤하늘이 예뻤는데 같이 보지 못해서 아쉬워.

만난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보고 싶어.

일이 너무 바빠서 시간이 나지 않아. 다음 주에는 볼 수 있을까?

잘 자. 사랑해.

 

뭐 그런 평범한 연인 사이의 말. 전에 이런 내용이겠거니 예상했던 게 그대로 쓰여있길래 조금 놀라웠다. 많이 바빴나보다, 두 사람.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사이라는 게 편지에서 티가 났다. 그리고 결국 전해지지 못한 마지막 편지를 집어 들었을 때, 한 10분 넘게 고민했다. 또 호흡이 가빠오는 것 같아 읽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다 읽은 편지지는 오랜 시간 바깥바람에 나부꼈다. 도로 접히지도 못하고, 편지봉투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저 한빈의 손에 들려서, 한참을.

 

"자기, 저기 영화 보러 갈까?"

"저 영화관 귀신 나오잖아. 몰라?"

 

벤치 앞을 지나가던 커플 중 한 명이 영화관을 가리키며 멈춰선다. 멍하니 앉아있던 한빈이 고개를 들었다.

 

"몰랐어. 무슨 사연 있는 곳이야?"

 

여자가 눈을 초롱초롱 빛낸다. 잡지식이 많아 보이는 남자는 애인을 위해 재밌는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목을 가다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에 원래 시계탑이 있었어. 핸드폰도 없는 그 시절에 유명한 만남의 광장이었거든."

“응.”

"근데 공사를 날림으로 한 건지, 그 시계탑 첨탑부분이 어느 날 이유도 없이 부서져서 떨어진거야. 그 날 강풍이 좀 심했다고는 하는데... 밑에 있던 사람들이 열댓명은 죽었대."

"헐, 말도 안 돼."

"그것도 하필 유동 인구 많은 오후 다섯 시쯤에 말이야. 사건 현장이 하도 처참해서 시신들도 제대로 못 찾았다 그러던데? 그래서 시간 속에 갇힌 귀신들이 나중에 새로 지어진 저 영화관 안을 떠돈다고..."

"......"

"마침 지금 딱 오후 다섯 시네.”

"아, 무섭게 왜 그래!"

 

남자는 짓궂게 시간을 가리키고, 여자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어넘기고, 한빈은 그대로 편지를 떨어뜨렸다.

 

오늘은 7월 7일.

 

시계가 오후 다섯 시를 가리켰다.

 

 

* * *

 

 

항상 제로콜라와 자판기 밀크티 쪽쪽 빨며 영화관 입구까지 털레털레 마중 나와 있는 귀신인데 오늘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통창으로 내리쬐는 햇빛에도 불구하고 음기 가득한 이 곳은 오늘은 유동 인구가 조금 늘어있다. 평소답지 않게 현실이 된 이 곳에 9번 상영관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마지막 소원이 남아있으니 사라진 건 아닐테다. 어디로 가야 하지. 고민하다 화장실을 벌컥 열고 아무도 없는 거울을 노려보았다.

 

"편지 봤어. 나와.”

 

텅 빈 유리 속에는 눈이 팅팅 붓고 지쳐 보이는 한 인간밖에 없다. 나와. 나오라고. 나와 이 귀신 자식아. 한참을 그렇게 협박해대다 결국 포기하고 나오는데 팔이 쑥 끌어당겨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랄 시기는 이제 지났다. 설움을 꾹 참고 마침내 나타난 9번 상영관 안으로 순순히 끌려들어 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한빈이 버럭 외쳤다.

 

“나한테 할 얘기 없어요?”

“쉿. 영화 시작 했다.”

 

귀신이 장난스레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보인다. 아무리 닦아도 뿌옇고 금이 간 안경의 모습이 이제야 심장에 아프도록 박힌다. 길게 찢어진 눈이 그 너머로 찡긋 윙크해 보인다. 한빈은 저 태연함을 이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질질 이끌려 중간자리에 착석할 때 까지 한빈은 귀신에게서 단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너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항상 똑같아. 전이나 지금이나.”

“......”

“보고 싶었어.”

“그래서 그 반지가 이거예요?"

 

따지듯이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빼려고 해도 빠지지 않던, 정말 저주인 줄로만 알았던 그 정체불명의 금속 링. 지금 보니 귀신의 손가락에도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다. 왜 몰랐을까.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나는.

 

“시계탑 밑에서, 7월 7일 오후 다섯 시에 들고 기다리겠다던 반지가 이거냐고요.”

“......”

“불쌍하게, 결국 청혼도 못하고 대답도 못 듣고 죽은 거냐고. 형. 장하오 이 바보야. 조금만, 조금만 빨리 만나자고 하지. 그랬으면…”

 

설마 이름이 불릴 줄은 몰랐나보다. 이름을 듣는 순간 귀신의 형태가 오래된 티비처럼 지직대며 흔들렸다. 장하오라는 이름의 귀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항상 반 정도만 나른하게 떠져 있던 눈이 팝콘처럼 동그랗게 튀어올랐다.

 

“너 나, 기억해?”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성한빈이니까.”

“......”

“성한빈이 어떻게 장하오를 몰라? 기억이 사라져서 내 존재마저 잊어도, 몇 번을 새로 태어나도, 장하오 하나는 기억해야지. 그게 성한빈이지!! 형이 죽어버린 성한빈 언제 다시 올 줄 알고 거의 백 년 동안 등신처럼 기다려온 것 처럼…”

 

이 지겹도록 갑갑한 영화관 안에서, 언제, 어디에서, 누구로 태어날 줄 알고 성불도 못 하고 계속 기다려 온 거다. 이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장하오는, 통창으로 캠퍼스에서 나오는 낯선 대학생들을 보면서, 다시 태어난 성한빈이 부디 저 학교를 다니기를, 부디 이 폐업 직전의 영화관에 호기심으로라도 언젠가 한 번 찾아와 주기를 기약도 없이 기다렸던 거다. 그리고 마침내, 다행스럽게도 성한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찾아온 나를 만났을 때, 되도 않는 소원을 빌게 된 거다. 자기는 이동할 수 있는 동선에 한계가 있으니까, 우리만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우리만이 아는 발자취를 나를 통해 한 번이라도 더 느껴보려고. 기억도 못 하는 나를 통해서.

 

하오는 어쩐지- 하면서 손뼉을 탁 쳤다. 한빈처럼 울지는 않았지만 눈은 새빨갛다.

 

“오늘이 7월 7일이구나."

“......”

“맞아. 난 그날 시계탑 아래에 있었어. 바보같이 네가 죽은 지도 모르고… 근데 이상하다. 신이 내 소원을 안 들어줬네.”

 

하오가 양손에 한빈의 얼굴을 가두고 애틋하게 뺨을 쓸었다. 미지근하게 느껴졌던 체온은 오늘만은 언제나처럼 따뜻하다. 이따금 먼 곳을 보는 것 같던 시선은 지금만은 정확히 제 애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성한빈이랑 한 번만 더 대화하게 해달라고, 1초라도 좋으니 서로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빈 건 맞아. 하지만 네가 날 끝까지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

"미련한 나는 너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또 달라붙겠지만, 결국 아프고 끝나는 건 나만으로 해달라고 빌었는데."

 

장하오는 신에게 되도 않는 소원을 빌었다. 이 모든 걸 겪고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애초에 성한빈이 아닐 텐데 말이다. 한빈이 양 팔을 벌려 꽉 매달렸다. 단 한 순간도 헤어진 적 없는 애인을 가슴이 벅차도록 끌어안았다. 귀신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한 사람이었다. 형의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형의 향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하오가 서럽게 떨리는 등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떨어져, 성한비인.”

“...옷, 예쁘게 입고 있었네."

“너 이러면 늦게라도 다시 청혼해버린다. 귀신이랑 결혼하고 싶어?”

“내가, 내가 그 청혼 지금이라도 받아준다고 하면.”

“......”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조심스러운 물음에 하오가 호탕하게 웃는다. 한빈은 그저 한없이 조마조마하다. 지금 자신에게 기적적으로 흘러들어온 지난 성한빈의 기억이 금방이라도 사라질까 봐. 그 옛날 상해 어딘가의 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수상쩍게 잘생긴 남자.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호감이 느껴졌던 눈빛. 되도 않는 영어와 중국어를 섞어 한 마디라도 더 말을 걸어보려고 애쓰던 귀여운 모습. 안정적인 생활, 신분, 다 버리고 좋아하는 사람 따라 타국까지 와서 나중에 신혼집 살림에 보탤 거라며 인쇄소나 번역 알바자리 구하러 다니던 그 열정. 그 와중에도 자기 전공이라며 틈틈이 멋진 글도 써서 보여주던 남자. 전부 다 소중한 장하오의 모습이었다. 두 번 다시는 잊고 싶지 않았다.

 

“한빈 바보야? 귀신하고 결혼해서 뭐해. 물론 나만큼 멋있는 사람 찾긴 힘들겠지만..."

"......"

"그건 그렇고 이제 내 마지막 소원 들어줘.”

 

스크린은 어느 새 꺼져있다. 이제 어떤 영화가 나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빈에게는 자신이 보고 있는 이 풍경이, 이 상영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스크린이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언제 완전히 꺼질지 모르는. 기분 탓인지 하오 형의 모습이 좀 희미해진 것 같다. 한빈이 불안함을 느끼며 하오의 몸을 더 꽉 껴안았다.

 

“뭔데.”

“네가 날 완전히 잊는 거.”

 

어깨에 뺨을 뭉개고 있다가 놀라서 몸을 뗐다. 평온한 표정은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빈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랄하지 마.”

“한빈아.”

“......”

“너 여기에서 나가는 순간,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질 거야. 무당 찾아간 기억도 사라질 거고, 그 성무라는 친구에게 있는 기억까지 전부.”

"싫어, 싫어. 왜? 나, 나 자주 올게. 매일매일 영화 보러 올게. 여기 근처로 이사 올게. 그럼 되지 않아? 나 형 계속 볼 수 있어. 나, 이 반지도 안 빼고…”

“내가 계속 못 있어."

"......"

"이제 가야 해. 나 소원 다 이뤘잖아. 너랑 마지막으로 밥도 같이 먹고, 너랑 산책도 하고, 소중한 책이랑 편지도 찾았고, 너랑 사진도 찍고…”

 

그게 뭐가 같이 한 거야. 나는 몰랐잖아. 나는 그게 형이랑 같이 하는 건 줄 하나도 몰랐잖아. 바보같이… 억울함에 말도 못 잇고 그저 노려보고만 있자 하오가 입술에 짧게 키스하고 떨어졌다. 아, 이 사람 입술 감촉이 이랬지. 문득 몰아치는 기억에 또 몸을 떨었다. 보복하듯이 다시 입을 맞추자 이번에는 혀가 얽혀든다. 주어진 시간에 걸맞는 아주 짧고 애틋한 키스였다. 하오가 눈물로 범벅된 한빈의 뺨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흐르는 약혼자의 눈물에 같이 울컥하다가 작게 미소지었다.

 

“이 상영관에는 전설이 있거든? 헤어진 커플들도 여기에만 오면 꼭 다시 만나게 된대. 하도 으스스해서 붙어있느라..."

 

농담조로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자 한빈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형은 지금 농담이 나오냐. 예나 지금이나 꼭 틈만 나면 어떻게든 웃겨주려고 했다. 그래, 이것도 다 장하오였다.

 

“뭐야, 그게...”

"그러니까 우린 꼭 다시 만날 거라고."

"......"

“성한빈이 장하오를 어떻게 잊냐고 했지. 나도 아마 그럴 거야. 나도 아마 어딘가에서 너를 또 보게 되면 성한빈의 이름만 기억할 거고, 성한빈만 생각하게 될 거고, 성한빈에게 꼭 다시 반할 거야. 내가 중국에 살아도 언젠가는 한국에 올 거고, 너에게 또 다시 고백할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 그때까지 한빈은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살고 있어. 공부든, 너 좋아하는 춤이든… 지금까진 내가 널 기다렸으니까 이제 네가 날 기다리는 거야.”

“......”

“알았지?”

 

불확실속에서 확신을 준다. 혼란 속에서 안정감을 준다. 의심 속에서 신뢰를 준다. 불안 속에서 희망을 준다. 장하오는 제게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아쉬운 포옹에 한빈이 다 메인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그러니까 꼭 다시 와야 해. 꼭이야."

“응. 나에게 한국은 너니까."

 

희미해지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한빈이 서 있는 이 상영관에서도 반딧불이처럼 빛방울이 피어올랐다. 이제 진짜 장하오가 반투명하게 보인다. 형이 다시 온다고 했으니까 보내 줘야지. 하오 형은 말한 건 지키는 사람이니까. 성한빈답게 씩씩하게 보내줘야지. 하오가 한빈의 머리를 아쉽게 쓰다듬고는 마지막으로 키스했다.

 

좋은 기억으로 버티게 해줘서 고마워.

 

마지막 입모양은 그런 말이었다. 얼굴을 감싼 손의 온기는 형이 사라져도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이별은 순식간이었다. 만남을 위해 기다린 시간을 생각하면 행복의 순간은 잔인할 만큼이나 짧았다. 덩그러니 남겨진 한빈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에 성가시게 걸리적거리던 반지도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정신을 차려보니 영화관 로비다. 꿈이 끝나버렸다. 상실감에 넋을 잃고 서 있다가 급하게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다행히 조그만 종잇조각 하나가 손에 잡혔다. 한빈은 흑백사진을 한참이나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9번 상영관이 있던 자리를 보면서 마음 속으로 말을 걸었다. 형에게도 들릴 정도로 분명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형,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니까 꼭 와줘야 해.

 

시간을 넘어서, 경계를 넘어서, 우주를 건너서라도.

 

 

나 만나러, 꼭.

 

 

 

* * *

 

 

 

 



 

 

 

 

* * *

 

 

 

 

* * *

 

2023.4.27

 

사실 제가 이름 기억하는 게 좀 어려워서그런데 성한빈만 기억했어요.”

 

* * *

 

 

 

 

9번 상영관에는 전설이 있대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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