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 step
정애
중국 푸젠 출신의 일개 소시민 장하오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한국 땅 넘어와 배우가 된 건 오롯이 사랑 하나 때문이었다. 아 그러니까 그 죽일 놈의 사랑, 사랑, 사랑. 그것도 그 대단타는 남자의 첫사랑. 헤드라인만 보면 존나 세기의 로맨티스트 같다지만 실상은 그닥 대단치도 못했다. 사실 너무 단순해서 어따 대고 말도 못할 지경인 게 더 맞겠다.
장하오의 첫사랑은 그 찬란하다던 십대 다 꺾여가는 열여덟에 아주 느즈막히 찾아왔더랬다. 얼굴짱 인기짱 갓반인으로 푸젠 일대를 주름 잡다 시피 하던 장하오의 주변엔 늘상 저 좋다는 사람들만 넘쳐 났었다. 관심 달라, 사랑 달라 애걸복걸하며 애정을 들이 붓는 통에 되려 그에 질려 연애감정 따위 개나 줬었다. 배때기는 처불렀고 결핍 그딴 건 남의 일이었다. 만인의 설익은 첫사랑 장하오. 모두가 가슴 속에 장하오 하나쯤은 품고 살던 호 시절. 장하오가 유행처럼 번지던 그 때에 유일하게 그를 식은 밥 취급하던 여자애가 하나 있었었다. 아니 식은 밥 취급이라도 당하면 다행이었지 이건 뭐. 투명인간도 이것보단 더 관심 받을 듯. 같은 반 학우였던 그 아이는 장하오에게 일절 무관심했다. 다들 제 눈에 한 번 나보려고 갖은 애를 쓰던 와중에 유독 그 아이만 시큰둥했다. 장하오는 그게 꽤 거슬렸던 것 같다. 손톱의 거스러미마냥. 그래서 부러 접근했었다. 제가 먼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사실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그토록 능동적으로 움직였던 건.
유려한 얼굴만큼이나 처세술도 유려했던 장하오는 친절한 양의 탈을 뒤집어썼다. 우선 친구부터 차근차근. 시기적절한 스텝 바이 스텝으로 그 애의 친구 자리를 자처하며 점차 거리를 좁혀갔다. 그 시간은 오래지 않았다. 같이 점심을 먹고, 공부 하고, 하교까지 함께 했다. 하루의 절반을 몇 번쯤 투자하고 나니 어느덧 절친한 남사친 쯤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관계가 발전되고 보니 안 보이던 게 보였다. 장하오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왜 그 애가 제게 무심했었는지를. 알고 보니 아이는 k-컬처 덕후였다. 것도 아주 징글징글한. 특히나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환장하게 좋아했는데 그래서인지 현빈이 첫사랑이고 박보검이 끝사랑이고 그랬다. 근데 이제 찐사는 또 따로 있는. 서강준차은우송강 여타 블라블라. 찐사는 그때그때 작품마다 매번 바뀌었고 그게 원흉이어서인지 아이는 현실 남자를 이성으로 취급도 안했다. 아니 내 사랑의 라이벌이 배우라니요. 것도 같은 땅 밟고 있지도 않는 머나먼 타국의. 이 뭔 오타쿠도 울고 갈 시련이란 말인가.
자고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음에 남자는 첫사랑을 무덤까지 끌고 간다는데 장하오는 그딴 애틋한 상황 감히 꿈도 못 꿨다. 그냥 뒷골만 막 땡겼다. 그러다 열이 뻗쳤다. 괴상한 오기가 생겼다. 열여덟 사내아이는 처음 앓던 사랑을 현명히 해나갈 수가 없다. 단순 무식 마캥이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내 사랑을 막는 건 내 손으로 깨 부시고 말아. 저를 마음에 담지 않겠다면 제가 기어코 끼워 맞춰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굴곡 없던 인생을 새로이 고쳐 쓰고 어거지로 깎아내서라도.
그래서 배우가 되었다. 수석으로 입학했던 사범대학을 스무 살 반 학기 만에 휴학 때리고선 그 길로 한국 땅을 밟았다. 사람 눈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매끈한 면상은 한국에서도 잘 먹혔다. 그 흔하지만 어렵다던 길캐로 대형 기획사에 들어가 연기부터 속성으로 배웠다. 소속사에서 가장 우려했던 건 사실 언어였는데 타고난 브레인 장하오에게 그쯤은 문제도 안됐다. 이미 열아홉 무렵에 한국말은 다 뗐다. 다름 아닌 한국 드라마로. 그때쯤엔 전국 팔도 사투리 쌉가능한데다 잠꼬대도 한국말로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혐중 사상이 은은히 판을 치던 한국에서 장하오는 나름 탄탄대로를 걸었다. 배우가 되고서 맨 처음 맡았던 역은 여주인공을 짝사랑한 이웃집 훈남 대딩이었는데 그게 저랑 찰떡으로 잘 맞아 떨어져서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찍혔다. 이후로는 별의 별 거 재지 않고 다 해봤다. 재벌 집 개망나니, 부패한 판검사, 삼합회 뽕쟁이, 개천에서 용 난 의사. 하다하다 작년엔 오컬트 물 ‘묘파’의 박수무당 역으로 캐스팅되어 작두 타고 살풀이까지 했다. 그거 배우느라고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아직도 작두에 올라탄 것만 생각하면 오금이 다 저릴 지경이라니까. 그 생고생을 알아주기라도 했던 건지 작품이 그야 말로 빵 떴다. 개봉 열흘 만에 천만관객을 돌파한 것도 모자라 말 그대로 접신한 듯한 장하오의 연기력에 대중들은 찬사를 보냈다. 그렇게 장하오는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단기간에 제법 다양한 필모를 쌓아 올렸다. 이 정도 이력은 한국 배우들조차도 아마 드물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영화계에 특이점이 온거나 매한가지였다. 온갖 기라성 같은 배우들을 죄 제쳐두고서 웬 중국 어드메 출신 듣보가 떡하니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았으니. 이 같은 현실에 꼰대들은 망조랬고 엠지들은... 걍 그딴 거 다 모르겠고 잘 생기면 장땡이랬다.
이러든 저러든 대한민국은 지금 장하오 열풍이 맞았다. 그런 그의 후속작에 대중들의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열일 행보를 이어가던 장하오는 이번엔 좀 멋있는 배역을 맡고 싶어졌다. 살 떨리는 장르물 말고 청량한 청춘물 같은 거. 그래서 수십 개의 시나리오들 중 골라잡은 게 ‘드림 업!’ 이었다. 아이돌을 꿈꾸던 한 남자의 열정 넘치는 여정을 담은 성장물 이라기에 고민 하나 없이 컨택 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일 간지나 보였거든. 이제 그만 박수무당 이미지 탈피하고 싶었던 장하오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소속사에 통보했었다. 나 무조건 이거 할 거라고.
시나리오 걸러내는 눈이 제법 출중한 장하오를 어지간히도 믿고 있던 소속사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래, 어디 니 뜻대로 해봐라 그랬다. 대신에 주인공이 아이돌 지망생이니 그에 걸맞게끔 만반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겠다고 첨언했다. 이에 처음엔 기함을 하며 따지고 들었었다. 백 억 짜리 얼굴 말고 대체 무슨 놈의 준비를 또 해야 하느냐고. 그러자 되려 냉정한 물음이 다시금 되돌아왔다. 그 근본 없는 춤사위로 아이돌이 가당키나 하겠느냐고.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이라 입을 꾹 여물 수밖에. 그런 그에게 박대표는 아주 명쾌한 해답을 내어 주었다. 춤추는 애 하나 붙여줄 테니까 가서 기본 스텝이라도 배우고 와, 너 배우는 거 하난 잘하잖니. 장하오는 군소리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암만 박수무당의 칼춤보다야 근본 있는 춤사위가 훨씬 더 유익한 바이기에. 영화 크랭크인을 넉 달 앞둔 시점에서야 벼락치기로 댄스 트레이닝을 받게 된다. 댄스의 디귿자도 모르던 정직한 몸뚱이로.
Fever step
매니지먼트 실장님이 잡아 온 첫 트레이닝 스케줄은 깨나 이르던 오전 시간대였다. 것도 겨우 잡은 거라 지각할 생각일랑 하지도 말라는 엄포에 로드 매니저는 동 트고부터 장하오의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와 대박. 자다 깬 장하오는 퉁퉁 부어 절반도 채 못 뜬 눈으로 꾸역꾸역 불려 나왔다.
“아니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이게 뭐야, 진짜아. 나 아침도 못 챙겨먹고 나왔으어...”
꾸물꾸물 밴 위로 올라타며 툴툴대는 목소리에 여전히 잠기운이 한가득 묻어났다. 댓발 튀어나온 입에 계란 샌드위치를 욱여 넣어준 로드 매니저가 냉큼 차를 출발시켰다. 언제 삐죽거렸냐는 듯 장하오가 입 속의 빵을 곧장 우물우물 씹었다. 우움~ 여기 맛 갠찮네에. 감탄사는 덤이었다. 하여간에 먹을 거만 물려주면 개나 소나 따라갈 놈이라니까. 매니저가 혀를 쯧 차며 딸바주스도 마저 입에 물려준다. 빨대로 한참이나 주스를 쪽쪽 빨아 재끼던 장하오는 그제서야 붓기 빠진 또랑한 얼굴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형, 나 근데 이거 가능할까?”
“엉? 뭐가?”
“이거, 춤 말이야. 이게 벼락치기 한다고 되는 영역인가. 나 너무 걱정돼서 어제부터 입맛이 뚝 떨어졌잖아.”
“아~ 입맛이 없어서 샌드위치 두 개를 순삭했구나.”
“형 나 몰라? 평소 같았음 이거 두 개는 더 먹었으어.”
어 그건 인정. 그러고 보니 미세하게 다른 것 같기도 하고. 뭐든 뚝딱 해낼 것처럼만 보였는데 너도 사람은 사람이구나 싶다. 매니저는 옆 눈으로 장하오를 흘긋 살폈다. 평소보다 유독 근심을 지고 있는 듯한 얼굴이 보였다. 시작도 전에 이러면 곤란한데.
“하오야, 실장님이 그러던데 그 사람 진짜 유명한 댄서팀 멤버래. 그 사람 레슨 때 수강생들만 한바가지 라더라고.”
“...왜 우리 장하오 기를 죽이고 그래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사람이 굳이 자기 시간 빼가면서 널 가르치겠다는데 좋은 기회다 생각하고 열심히 배워보라는 거지. 그리고 기가 죽긴 왜 죽냐? 니가 그 사람보다 모자란 게 뭐 있어서. 솔직히 국적만 아니었음 니가 대한민국 다 씹어 먹고도 남았을걸?”
뭔 개뼉다구 같은 소릴 위로랍시고 구구절절 읊고 있다. 저 형은 다 괜찮은데 한 번씩 저 주둥아리가 문제야. 따지려면 얼마든지 따질 수도 있었겠지만 똑같은 족속은 되기 싫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시피 했다. 대꾸 한 번을 안했는데 쌉소리는 약속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저럴 때마다 매니저 갈아 치우고 싶단 생각만 수십 번을 한다. 그럼에도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한 건 저 웬수 같은 인간이 한 집안의 가장이라서다. 이제 막 젖 떼고 아장아장 걷는 핏덩이를 책임지고 있는.
형 몇 층이랬지? 3층.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이때다 싶어 말부터 끊어내고서 승강기를 호출했다. 1층에 있던 승강기가 서서히 내려와 멈추고는 양문이 느린 속도로 벌어져 열렸다. 동시에 헉 소리가 저절로 터졌다. 승강기 벽면을 덕지덕지 뒤덮은 그래피티 아트 탓에. 누가 댄스 스튜디오 아니랄까봐 초장부터 아주 힙하다. 아니 힙하다 못해 난해하고 불량하기까지. 그 스껄한 기세에 벌써부터 기가 쪽쪽 빨린 장하오는 눈알 도르륵 굴려가며 매니저에게 괜한 소리나 한 번 해본다. 혀엉 나 벌써 집에 가고 싶어. 어 나돈데. 그닥 도움 되는 답변이 돌아오지를 않아서 애꿎은 닫힘 버튼만 도도도도 연타했다. 아니 이건 왤케 안닫혀어. 하오야 그렇게 해서 문짝이 부서지겠냐. 부시고 형 월급에서 까면 되는 거지? 되겠냐? 하여간에 있는 것들이 더 한다니까. 실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며 긴장을 덜어내는 와중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느릿느릿 닫히던 문 틈새를 가르고서 희멀한 손날이 대뜸 불쑥, 튀어 들어왔다.
응?
기괴한 타이밍에 안 그래도 기력이 쇠하던 장하오는 끝끝내 기절초풍을 하고야 만다. 으엌! 식겁해서 괴상한 비명까지 내질러가며. 목청 하난 존나 우렁찬 관계로 서둘러 양쪽 귓구멍 콱 틀어막은 매니저가 휘청 뒷걸음질을 친다. 아 형 어디가? 나 안지켜? 더는 못 튀게 매니저 옷깃 꽉 부여잡은 채로 장하오는 부르르 떨었다. 냉장고 문짝만한 주제에. 여차하면 야매 굿이라도 해야 하나 그딴 하찮은 생각이나 하면서. 덜컹 소리와 함께 닫히던 문이 제법 빠른 속도로 다시금 열렸다. 험한 것이라도 튀어 나올 새라 잔뜩 얼어붙은 두 쫄보들 마음도 몰라주고서. 다행히도 열린 문 앞엔 험한 것 대신에 웬 남자가 팔 한쪽을 빼꼼 내뻗은 채로 서 있었다. 놀란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뽀용뽀용하게. 아 이거 다른 의미로 좀 험한 것 같은데. 장하오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아잇,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남자는 씩씩한 사과와 함께 승강기 안으로 훌떡 올라탔다. 동시에 두 눈이 딱 마주쳤다. 엄한 생각 중이던 장하오는 지레 찔려서 빳빳하게 굳어졌다. 반면 남자는 친절에 인이 박힌 사람처럼 생글 생글 눈 접어가며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싹싹한 인사말은 덤이었고. 뭐야 내 팬인가.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얼레벌레 맞인사한 장하오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에도 남자는 끊임없이 개죽이처럼 방싯방싯 웃기만 했다. 배알 없는 사람마냥. 그래서 장하오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내 팬 맞네. 저렇게 웃는 거 보니까. 그래 그럼 어디 싸인 이라도 좀 해줄까. 당신은 잘생겼으니까 내 특별히 대문짝만하게 써줄게. 가로 세로 빽빽하게 채워서. 그러니까 얼른 종이와 펜 좀 주겠어? 뭐 준비가 정 안 된 거라면 당신 그 너른 등판도 상관없는데 난. 아니 사실 그게 더 좋은 것도 같고.
의식의 흐름을 타고서 생각이 제멋대로 가지를 친다. 아 근데 이건 저 남자가 먼저 빌미를 준거 맞잖아. 애꿎은 남자 탓을 하며 위아래로 눈을 둥글렸다. 꼭 늦바람 난 변태새끼처럼 체크 남방 안에 꼭꼭 감추어진 남자의 몸을 저도 모르게 훑고 있었다. 태가 예쁘게 빠진 몸이어서일까.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닌데. 애인이 궁한 것도 아니면서 왜 애먼 외간 남자를 반찬 삼고 싶어 유난이냐고 글쎄. 존나 심란해지게. 작은 머릿속이 전쟁통처럼 얽히고설켰다. 그러느라 승강기가 목적지에 다다른 줄도 미처 몰랐다. 매니저가 제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승강기는 3층에 멈춰 서있는 채였다.
안내려? 묻는 매니저의 말에 어어내려야지 얼레벌레 대답하곤 발을 떼는데 어째 제 뒤를 따라붙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니 이걸 쫓아온다고? 장하오는 황망한 얼굴로 뒤를 돌아다봤다. 대체 어디까지 따라올 셈인 건지 따져 묻기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저기요. 호기롭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남자의 무해한 시선이 저를 빼끔하니 올려다본다. 어쭈 끝까지 예쁜 척을 하네 저게. 눈높이도 비슷한 주제에 자꾸만 올려다보는 시선의 흐름이 깨나 익숙하다. 그게 어쩐지 좀 떨떠름하고 거슬렸다. 닳고 닳은 인간관계를 방증하는 것 같아서. 그러면서도 반들하게 윤기가 도는 두 눈에 말문이 꽉 막혔다. 잘 떼어지지 않는 입을 뻐금뻐금 하고 있자니 남자 쪽에서 뒤이어 물꼬를 튼다. 배우님,
“생각보다 엄청 일찍 오셨네요?”
“에?”
“그런 준비 자세 완전 좋은 데요!”
제 눈앞으로 펜과 종이 대신에 쌍따봉을 훅훅 들이민다. 후한 칭찬을 남발하는 게 꼭 어린 아이에게 칭찬 스티커 떼다 붙여주는 유치원쌤 같은 모양새다. 아아... . 장하오는 뒤늦게야 상황 파악을 하고선 진땀을 쭈룩 뺀다. 너였구나, 8반 이쁜이, 아니 그 명성 자자하다던 댄스 트레이너가. 좀, 당황스럽네. 그렇다고 그걸 쉽게 티내는 건 가오 떨어져서 싫어. 장하오는 궁극의 생활 연기로 당황한 낯빛 싹 지워 내고선 꾸벅 허리 굽혀 인사 했다. 안녕하세요, 한빈선생님. 제법 싹수 있는 제자인 척 한시바삐 태세전환을 하니 성한빈이 예의 그 사르르 녹는 듯 한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미처 못다 한 말을 이어 붙였다.
“앞으로도 늦지 않게 와주실 거죠?”
묻는 말끝이 애교와 깡다구로 한데 어우러졌다. 이건 즉슨 지각하면 죽는단 의미가 숨어 있는 거다. 연예계 짬밥 한두 해 먹어본 게 아닌 장하오는 눈치만 해도 이미 오백단이었다. 저렇게 사람 좋아 보이는 애들이 더 독하더라고. 제 원리원칙에서 비껴나면 웃는 얼굴로 가슴에 비수를 꽂더란 말이지. 물론 저야 제 스승의 눈 밖에 나고 싶은 생각일랑 추호도 없지만 서도. 착실한 학생이 되겠단 뜻으로다가 착한 눈빛 장착한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에 만족한 듯한 한빈이 손뼉을 짤짤 치며 저를 클래스룸 안으로 이끌었다. 밤새 갇혀 있던 잘은 먼지들이 연습실 허공을 나폴 나폴 부유했다. 켈록. 무의식적으로 헛기침을 밭았다. 억, 잠시만요. 성한빈은 벽면에 부착된 컨트롤러로 조명을 밝히고 공기 청정기와 시스템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널찍한 연습실 한 쪽 구석에 덩그마니 서있던 장하오는 굵은 겉눈썹을 치켜세웠다. 아직 4월 초입인데. 도대체 저를 얼마나 굴릴 작정으로 에어컨부터 가동시킨 건지 모를 일이었다. 괜한 긴장감에 손바닥 안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헐렁한 바짓단에 식은땀을 꿈질 꿈질 문질러 닦으며 한빈을 곁눈질했다. 큰 눈이 댕글 돌아 새초롬한 눈꼬리와 마주치자 어쩐지 식은땀이 더 흥건해졌다. 매끄름한 미형의 이목구비를 자꾸만 의식하게 된다. 그러면 이 어색한 시공간의 흐름마저 더 오그라드는 것 같다. 그렇게 마가 뜬 분위기가 싫어 통성명이라도 해야 하나 잠시간 고민에 빠졌다. 그래봐야 이미 얼굴이 명함인지라 별 영양가도 없을 듯싶어 머뭇대고만 있으니 역시나 성한빈이 먼저 능숙하게 아이스 브레이커를 자처한다.
“저 처음에 장난 전화인 줄 알았잖아요, 배우님 쪽에서 춤 배우고 싶다고 컨택 왔을 때요.”
봐, 별 영양가 없는 게 맞다니까.
“근데 이렇게 배우님 실물을 영접할 줄은 몰랐네요? 직업상 가수분들은 되게 많이 봤는데 배우 실물은 또 처음이라서,”
“어떤데요.”
“네?”
“내 실물이요.”
“으음?”
“별로인가, 화면보다?”
“그냥,”
“그냥?”
“신기해요.”
“...신기?”
“어떻게 그 작은 얼굴에 눈코입이 다 들어가요? 글구 스크린에선 별로 안 커보였는데 생각보다 키도 크시구, 비율도 좋으시구, 완전 실물깡패인 듯? 와, 우리 배우님이 연예계를 다 뒤집어 놓으셨다!”
무슨 팬카페 댓글 읽는 줄, 이렇게 장호잇(장하오의 팬클럽명이다)급의 호들갑까진 바란 게 아니었는데. 그저 저 남자의 입을 통해 입 바른 칭찬이나마 듣고픈 작은 충동이었을 뿐. 오글거리는 극찬에 몸 둘 바를 몰라 얼굴이 붉어 오르자 성한빈이 빙글빙글 개구지게 웃으며 되물었다.
“어떻게, 만족할 만한 답이 되셨을까요~?”
“... .”
사람을 막 이렇게 들었다 놨다 가지고 놀아. 심통난 장하오의 아랫입술이 삐죽이 늘어졌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어 약간의 현타가 온다. 춤 배우러 왔으면 얌전히 춤이나 배울 것이지 같잖은 수작질 비슷한 걸 하려 들다 된통 망하기나 하고. 가오 떨어지게. 물론 상대는 아무런 사심조차 없는 눈치이지만. 그게 좀 쫀심 상해서 불친절하게 뇌까렸다.
“...수업 안해요?”
너만 사심 없냐 나도 사심 없다. 진심으로. 요만큼도. 장하오는 혼자 토라져선 등을 팩 하니 돌려 세워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행여나 성한빈이 이런 저의 모습을 보고선 연예인병 이랍시고 동네방네 나불거릴까봐 약간 우려가 됐지만. 뭐 어때. 어차피 우리 장호잇이 다 이겨! 때에 맞지도 않게 유치한 감정으로 롤코를 탔다. 그러든 말든 성한빈은 히히캣처럼 웃으며 속 편한 대답이나 내놓았다. 우리 이제 수업 해볼까요~. 나긋한 말투가 다시금 거슬렸다. 또 또 나만 과몰입 했지 또. 장하오가 심통스레 네- 하고 대꾸했다. 성한빈의 물음은 곧바로 이어졌다.
“근데 배우님, 춤 배워본 적 있으세요? 아니면 어렸을 때 춤 좀 췄다던지,”
“아니요. 나 어렸을 때 공부만 했어요. 커서는 연기만 했고. 춤은 유치원 재롱잔치 이후로 춰본 적 없어요.”
축약하자면 음주가무엔 일가견이 없단 소리.
“그건 춤이 아니라 율동이죠.”
“나는 그것도 어려웠어요.”
“아, 진짜요? 영화에서 살풀이굿 하는 거 보니까 영 뚝딱이는 아닌 것 같았는데.”
“그걸, 봤어요?”
“그걸 안 봐요, 그럼? 나는 영화보고 집에 와서 그 장면만 쇼츠로 백번도 넘게 봤어요. 진짜 연기 대박이어가지구.”
처져있던 어깨가 다시금 으쓱 치켜 올랐다. 분명 이 남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테지만. 묘하게도 베베 꼬여 있던 기분이 스리슬쩍 풀리는 와중이었다. 마치 입 안에 든 혀처럼 어르고 달래는 게 익숙한 남자였다. 사람 다루는 스킬이 보통은 넘는 게 분명했다. 뭐가 이래. 농락당하는 기분이야.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홀라당 넘어가겠잖아. 장하오는 허물어지려는 안면근육에 힘을 빡 줬다. 흐리멍텅한 인상이 삽시간에 또렷하고 서늘하게 변한다. 혹자들이 환장해 마지않는 비범한 미모, 범상 찮은 눈빛. 그 눈으로 강렬한 레이저까지 막 쏴댔다. 화보 촬영 때만큼이나 열과 성을 다 해본다. 내가 제일 쎄. 내가 얼굴짱 실력짱 장하오라고. 정신승리를 하며 남자를 짓누를 듯 내려다본다. 허나 그것도 잠시,
냉랭한 눈길은 금세 위태롭게 흔들리고 만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성한빈이 걸치고 있던 체크 남방을 훌러덩 벗어 재끼는 바람에. 검은색 망고 나시와 그 사이로 뽀얀 팔뚝이 덜렁 드러나자 장하오는 평정심을 잃었다. 까맣게 벌어진 동공이 물떡같은 팔모가지와 그 안쪽의 레터링 타투를 샅샅이 훑는다. 아니 무슨 남자 살성이 저리 몰캉해 보일까. 마른침이 꼴딱 넘어간다. 집요한 시선이 팔뚝 안쪽 여린 살을 악착같이 따라 붙는다. 그걸 알아차린 한빈이 제 타투를 조물조물 주물덕대며 말했다. 이거요? 예전에 한참 힘들 때 한 거예요, 안 흔들리려구. 딱히 그 사연이 궁금해서 훔쳐본 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오해를 한 모양인지 수더분하게 타투의 연유를 설명하고 들었다. 아 네. 지레 찔려서 냉큼 대답했지만 실은 꺼림칙했다. 제 음탕한 속내라도 알게 되면 기함하겠다 싶어서.
이후로 첫 수업은 삐걱삐걱 흘러갔다. 말 그대로 삐걱삐걱. 관절은 애시 당초 삐그덕거렸고, 뽀얀 겨드랑이와 시선이 맞을 때마다 눈알이 삐걱삐걱 부자연스레 헛돌았다. 특히나 한빈이 자세를 다듬어 주려 몸 이곳저곳을 거침없이 만져댈 땐 삐걱이다 못해 와르르 부서질 것 같았고. 생초짜들 맞춤 솔루션인 아이솔레이션을 배우는 주제에 세상 온갖 춤 저가 다 춘 마냥 숨을 헛헛 몰아쉬었다. 한빈은 그런 저에게 조심스레 물어왔다.
“혹시 흡연하세요?”
꼴초냐고 묻고 싶은 걸 돌려 말한 것 같길래 장하오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솔직하자면 흡연을 아주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횟수가 잦지 않았을 뿐. 담배는 이따금씩만 태웠다. 두 세장짜리 대사 빽빽한 장면을 원테이크로 촬영할 때나, 가볍게 만난 애인들이 공개연애를 하자고 조를 때에. 그러니 거의 피우지 않는 거나 진배없었다. 비록 성한빈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저를 올려다봤지만. 진짜 거의 안피워요, 일년에 세네개피 피울까 말까. 무심결에 말하고 보니 왜 변명 같은 걸 구구절절 하고 있나 싶어 뒤늦게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문다. 헤비스모커든 아니든 폐병이 나든 말든 성한빈이랑은 아무 상관도 없을 일을. 오, 관리 열심히 하시나 봐요. 성한빈 역시도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인지 실없는 소리나 하며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댔다. 억 벌써 시간이... . 다 들리도록 혼잣말을 하기에 덩달아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금세 두 시간이 경과해 있었다. 어쩐지 도가니가 빠질 것 같더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네. 살려주세요.”
“으으응? 벌써부터 이러면 곤란한데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했는데?”
“그냥 출연 고사할까 봐요.”
맘에도 없는 말을 지껄여 본다. 그러니까 장난식의 엄살 비슷한 거. 관둘 생각 같은 거 곧 죽어도 없단 소리다. 기실 장하오는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만 속이 풀렸다. 그게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흥해도 망해도 다 제 것이고 제가 품어야만 했다. 장하오 타고난 성정 자체가 그랬다. 그걸 알 리 없는 성한빈은 행여나 그가 때려 칠까 싶어 다급히 긍정 회로를 굴려준다.
“배우님이 아직 경험이 없어서 어려운 것뿐이지 사실 배우님 체격 조건도 너무 좋고 예체능 쪽으로 센스도 있는 편이라 금방 늘 거 같은데. 그냥 저 믿고 따라와 주심 안돼요?”
“책임져요, 그 말? 나 이번 작품 실패하기 싫은데.”
“아, 당연하죠! 대신에 앞으로 제 말 잘 들어 주셔야 해요. 자, 약속.”
눈앞으로 새끼손가락이 들이밀어진다. 뭐, 뭔데. 애들 장난처럼 고리라도 걸고 꼭꼭 약속하잖거야, 뭐야. 낯 근지러워진 장하오가 머뭇대며 서있기만 하자 선뜻 손을 끌어간 성한빈이 애써 손가락들을 꾸역꾸역 접어선 고리를 걸고 엄지로 도장을 꾹꾹 찍어 누른다. 남자치고 손의 감촉이 나쁘지 않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건 외려, 너무 좋잖아. 야들말랑촉촉한게 꼭 물복숭아 같아. 손마디마디가 복숭아 색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잡힌 손을 빼지 않은 채로 꾹 힘주어 쥐었다. 그걸 일종의 계약 체결쯤으로 여긴 성한빈은 손을 맞잡아 흔들며 신이 나선 말했다.
“공부는 예습복습이 제일 중요한 거 아시죠? 오늘 배웠던 거 꼭! 연습 많이 해보셔야 돼요. 다음 시간에 검사할거예요, 진짜루.”
오케이? 신신당부하는 말에 장하오는 넋을 놓은 것처럼 고개만 끄덕끄덕.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수습 못할 간지러운 감정에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두 번째 트레이닝은 정확히 닷새 후에 이루어졌다. 무슨 5일장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 마냥 시간이 더디게 가더라고. 그동안 장하오는 대본을 외우고 틈틈이 춤 연습을 했다. 딱히 춤이랄 것도 없어 뵈는 몸짓이었으나 성한빈이 내준 숙제니까, 약속 했으니까. 무튼 노력은 하고 봤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채론 당당할 수가 없다. 잔머리를 쓰고 요령을 부리는 것은 저와 맞지 않았고. 그러니 항상 정공법이다. 떳떳함에서 오는 자신감은 사람을 커다랗게 키운다. 그건 돈으로도, 지위로도 얻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오롯이 땀으로만 일궈낼 수 있는 결실. 장하오는 매사 그걸 좇으며 치열하게 살았다. 이만큼 하찮은 시작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형, 이거 봐봐.”
저를 태우러 온 밴에 올라타자마자 매니저를 앞에 두고선 목을 이쪽저쪽 늘여 빼기 시작했다. 표정은 엄청 근엄진지한데 모양새는 멋대가리가 하나도 없어서 매니저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린다. 어떻게 이걸 예쁘게 포장해야 하나 싶어서.
“형 이게 아이솔레이션이라는 건데 어때 보여? 얼굴이랑 어깨랑 따로 노는 거 같아?”
“어어..., 꼭 맷돌같다야.”
“뭐? 아니 그게 뭔소리야아.”
“두 시간 동안 그거 배운 거야? 맷돌춤? 근데 너 그 핑크색 바지 뭔데. 머리에 왁스는 또 왜 바르고.”
“아, 왜, 뭐. 나 연예인이잖아.”
“너 첫 수업 때 무릎 늘어난 추리닝 바지 입었던 건 기억나니?”
“연예인이 너무 사치스러워 보여도 사람들이 욕 해. 상대적 박탈감 느껴진다고.”
“...하오야, 아니지?”
“아, 뭐가요.”
“너 그렇게 경솔한 사람 아니잖아. 에이, 설마, 겨우 한 번 본 사람인데. 그치?”
7년을 함께한 매니저는 저의 성적 취향을 알았다.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도 가능하다는 거. 무려 여자애 하나 때문에 제 미래까지 새로 고쳐 쓴 주제에 첫 연애는 같은 거 달린 남자랑 먼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가능하냐 싶지만 장하오는 그게 됐다. 이분법적 사고만으로 연애를 한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된다 여겼다. 능숙하게 절제가 된다면 그게 사랑일 리가. 그저 눈이 가고 마음이 가는 상대가 남자 사람이었을 뿐 거창하게 동성애자라 못 박고 싶지도, 이성애자라 단정 짓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그 첫 연애의 끝이 좋진 못해서 그 이후론 좀 미적지근한 연애만 하게 됐다. 곁은 내줄지언정 제 속은 다 내어주지 않는 흔한 속물로 남았다. 망한 첫 연애의 후유증이다. 상대는 당시 같은 소속사에 몸담고 있던 연습생이었는데 함께 연습생 생활하며 개고생 할 때 정이 붙어 사귀게 된 케이스였다. 그는 같이 못나가고 별 볼일 없을 땐 세상 애틋하게 붙어먹더니만 제가 먼저 데뷔를 하게 되자 장하오부터 가장 먼저 버렸다. 가차 없이 팽 당한 장하오는 제 남은 생에 연애는 있을지언정 다시는 뜨겁지도, 간절하지도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적당히 아끼고 적당히 소홀하며 내 잇속은 꼭 꼭 챙기고 보는. 비록 먼저 데뷔했던 구남친은 쫄딱 망해 사이다 결말을 맞았다지만 장하오에게 있어 첫 연애의 실패는 앙금처럼 남았다.
“왜 대답을 안 해? 불안하게? 너 진짜야?”
“아, 그런 거 아니야.”
“아닌데 왜 겉멋을 부리고 나와? 누가 봐도 잘 보일라고 꾸민 거 맞고만.”
“아니 그 쪽에 여러 사람 왔다 갔다 하니까 후줄근하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래. 알아서 코르셋 조이고 나왔는데 칭찬은 못해줄망정 왜 들들 볶아, 사람을?”
억울한 척 개정색을 빨았다. 강한 부정은 외려 긍정이랬는데, 너무 불쾌한 티를 내기에 매니저의 기세가 한 풀 꺾인다.
“아니 너 알아서 잘 한다는 거 나도 알지 아는데, 괜히 남들한테 오해 살까봐 그러지. 그때 보니까 그, 한빈씨도 아무한테나 친절하고 눈웃음 살살 치는 게 오해 사기 딱 좋겠더만.”
“친절한 게 나쁜 건 아닐 텐데?”
“괜히 말 안 나오게 서로 조심 좀 하자는 거지. 둘 다 공인이잖아.”
“알아서 잘 할게. 근데, 한빈쌤이 형한테도 친절하게 웃어 주고 그랬어?”
“뭐 임마?”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
“야이씨!”
“아, 농담한 거야. 정색하기는.”
“노옹담?”
운전대를 틀어잡은 채로 부들거리는 매니저의 행색에 웃음이 거리낌 없이 터졌다. 단순무식해서 이따금씩 놀려 먹기 딱 좋단 말이지. 장하오는 배를 잡은 채로 한참을 웃다간 매니저의 어깨를 도닥거리며 말했다.
“혀엉,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마. 내가 지금 연애 할 때가 아니잖아.”
“알기는 아냐?”
“그니까 괜히 대표님한테 가서 이상한 소리 흘리지 말고.”
“나 입단속 시키고 뒤에서 뭔 짓 할려고.”
“아, 진짜, 쪼옴.”
“알았어, 알았어.”
“그리고 나 아무나 안 만나. 그 사람 내 취향 아니야.”
아 이 말은 좀 아닌가. 딱히 취향 정해놓고 만나는 것도 아니면서. 의심의 눈초리에서 벗어나려 나름 강단있게 쏘아 붙였다. 솔직히 오바쌈바한 거 맞다. 지레 찔려서. 속이 뜨끔해서. 이따금씩 떠오르던 사근사근한 얼굴과 깨발랄한 목소리에 몇 번을 곤혹스러웠는지 모른다고. 현실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단 생각은 기실 매니저보다 저가 더 많이 했다. 그러니 이건 저 스스로를 향한 우격다짐이었다. 정신 바짝 안 차리면 어디로든 마음은 흘러가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랬지. 분명 그리 맘 먹었었는데..., 왜 얼굴 마주 보자마자 안절부절 똥줄이 타고 매니저의 눈치부터 보게 되는 걸까. 배우님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아유 착해. 생글생글 웃으며 저를 살갑게 맞아 주는 성한빈을 보자 덩달아 입꼬리가 치솟는다. 그걸 들키기 싫어 황급히 아랫입술을 말아 물어 봐도 동글게 올라붙는 광대까진 숨기기가 어려웠다. 아니 솔직한 말로다가 제가 무슨 사회성 바닥난 사람도 아니고 웃는 얼굴 마주 대하면 예의상 웃어 주는 게 맞는 거지.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순 없지 않더냐고. 장하오는 나름 떳떳한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매니저의 아니꼬운 눈초리에 지은 죄도 없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뭐가 켕기긴 켕겨서. 솔직히 그게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근데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더라고. 장하오는 우선 저 cctv같은 눈깔부터 치우고 보잔 생각에 급한 대로 내쫓을 궁리를 한다.
“형 커피 좀 사다줘.”
“갑자기?”
“아침에 커피 못 마시고 나와서 카페인 땡겨, 한빈쌤은 뭐 마실래요?”
“저 시나몬 라떼요! 여기 건물 1층에 디저트 카페 있는데 거기로 가세요. 완전 커피 맛집이거든요.”
여기서 왕복 50여분 거리의 별다방으로 보내버려야겠다는 장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저렇게 눈 반짝이면서 좋아하는데 꿋꿋이 스벅 고집하는 것도 못할 짓 같아서. 매니저는 떨떠름한 얼굴로 힙색을 메고서는 능그적거리며 클래스룸을 빠져나갔다. 그 굼뜬 엉덩짝을 발로 까버릴까 하다가 꾹 참고 외면해 본다. 아무래도 인성 쓰레기 이미지는 하등 도움이 안 될테니까.
트레이닝은 곧장 시작되었다. 커피를 핑계 삼아 농땡이를 피울 법도 한데 그런게 일절 없었다. 성한빈은 퍽 성실한 편이었다. 잔머리를 굴리지도,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았다. 것 봐. 역시 호락호락 하지 않다니까. 그렇다고 그게 싫은거냐 하면 외려 극호감인 부분이라 더 곤란해지고. 게다가 루틴처럼 겉옷 훌러덩 벗어 제치자마자 드러나는 망고 나시 차림에 다시금 심란해지기까지.
“저기,”
“넵.”
“그으, 나시, 그것 좀 안 입으면 안돼요?”
“에? 왜요?”
“어, 추워 보여서?”
“저 몸에 열 되게 많아요.”
“저런... 야해라.”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데 혹시 그거 알아요? 더위 타는 사람이랑 추위 타는 사람이랑 만나면 잘 산대요.”
“에이, 꼭 그렇지도 않아요.”
“만나봤어요, 추위 타는 사람?”
“아직이요?”
“한 번 만나 봐요.”
“어떻게 알아 보구 만나요?”
어떻게 알아보긴. 사이좋게 두 손 꼬옥 맞잡아 쥐었을 때 딱 좋아 죽겠으면 그게 아다리 맞는 거지. 장하오는 순진하게 두 눈을 빛내며 저를 올려다보는 성한빈의 손을 답싹 쥐어 잡으려던 참이었다. 그때 마침 닫혀 있던 문이 덜컥 열리고 매니저가 허겁지겁 들어오지 않았었더라면, 장하오는 유독 가늘은 성한빈의 손목부터 기어이 꾹 잡아 쥐었을 게 분명했다. 꼭 손금 봐준다며 같잖은 수작 거는 개저씨처럼. 자 여기 커피. 매니저는 커피 두 잔을 캐리어에 끼울 새도 없이 덜렁덜렁 들고 와선 저와 성한빈의 손 안에 야무지게도 쥐어 주었다. 그 약삭 빠른 꼬라지에 장하오는 헛숨을 짧게 터뜨렸다. 골 때리네 이 아저씨 진짜. 어디 한 번 해보자는 거야 뭐야.
“형.”
“왜 또.”
“아까 보니까 세차할 때 된 것 같더라. 뒷좌석도 엉망이고, 트렁크도 발 디딜 데 없고.”
“트렁크는 원래 발 디디는 공간이 아닌데?”
쓸데없이 논리정연하고 지랄. 암만 그래 봐라. 오기 쓰는데 버틸 재간 있나.
“공기가 탁한가봐. 차 탈 때마다 목도 아프고 눈도 침침해.”
“... .”
“형 자주 가는 손세차장 거기 내부 세차 잘 해주던데.”
소속 연예인의 컨디션에 좋지 않다는데 한낱 로드 매니저가 재량껏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 월권 행사할 마음이야 추호도 없었다지만 지금의 장하오는 오기가 충만했다. 기를 쓰고 방해하려 드니 어린 애 같은 반발심만 더 생겼다. 이번에도 매니저는 어금니 깍 깨물며 잠시간 저를 노려보더니 열어젖히고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금 꾸물적대며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왜 훼방을 못 놔서 안달인 건지 모를 일이다. 제가 뭘 어쨌기에. 뭐라도 해봤으면 덜 억울했겠다 싶다. 이러니까 더, 더 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게 수작이든 순정이든 간에.
트레이닝 룸은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또 다시 단 둘만 남겨졌다. 명백히 뻔한 의도였다. 장하오는 티가 날까 지레 찔려 성한빈의 눈치를 슬금 보다 손 안의 커피를 한 모금 쪼롭 빨았다. 오. 향이 썩 괜찮아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걸 본 성한빈이 신이 나선 빵긋 대며 제게 물어 왔다. 그쵸 맛있죠. 장하오는 그 쾌청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무한정 끄덕거렸다. 사실 커피가 멋있고 선생님 얼굴이 너무 맛있어용❤ 속으로 이딴 감상이나 마구 날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허튼 생각은 오래 가질 못했다. 제 몫의 커피를 호로록 마셔 재낀 성한빈이 쉴 새도 없이 장하오를 마구 굴렸기 때문이다. 기본 스텝이 들어간 두 가지 동작을 알려준 성한빈은 그걸 내내, 주구장창 시켰다. 규칙적으로 쪼개어진 비트에 맞추어 같은 기본 동작을 반복하길 수어차례. 장하오는 이 세상 모든 공돌이들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이르른다. 사람이 계속해서 단순 작업만을 반복하다보면 미쳐 돌아버리고 만다는 그 만고의 진리를.
“이,이거 언제까지 해요? 이제 넘어가도 될 거 같은데?”
울상을 해선 물었다. 와중에도 비트에 맞춰진 몸이 기계적으로 스텝을 밟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도 성한빈은 단호하게 꾸짖었다.
“걸음마도 못 뗐으면서 왜 뛰기부터 하려고 그래요?”
자, 앞으로 스무 번 더 추가! 기어코 날벼락이 떨어졌다. 가오고 뭐고 다 모르겠고 앓는 소리가 막 터졌다.
“으아, 너무 하잖아아.”
“아잇, 동작 흐트러졌잖아요. 팔 쭉 뻗고 손 끝 반듯하게!”
다시 다시 원! 투! 쿵쿵짝! 성한빈은 신명나게 박자를 쪼개며 제 동작 하나 하나를 매의 눈으로 짚어 내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걸 보니 왜 그가 요즘 5세대 아이돌 사이에서 제일 유명한 코레오그래퍼인지 알 것도 같았다. 처음엔 얼굴로 유명해졌나 넘겨 집기도 했지만 그런 부류가 전혀 아니었음에 장하오는 여러모로 막막해졌다. 얄짤이 없네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빈틈도 없고. 애초에 곱게 생기지를 말던가. 새색시마냥 나긋하게 굴지나 말던가. 것도 아님 곰살맞게 친절하지라도 말던가.
장하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만으로 뚱한 얼굴을 해서는 추가된 스텝을 억척스레 스무번 다 채우고야 만다. 독하기로는 저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왕지사 시작한 거 중도 포기 그딴 거 생각도 하기 싫었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하는 건 용납 못한다. 탑은 찍을지언정 바닥은 찍지 말자고. 죽겠다며 엄살 피울 땐 언제고 독기 충만한 몸짓으로 제게 주어진 임무를 끝끝내 해내고 있었다.
무릎이 와들와들 떨리고 가파른 숨이 가슴을 들싹여댔다. 허나 장하오는 버티고 선 채로 성한빈을 바라보았다. 더 해야 할 게 남았냐는 듯이. 그 산독기를 성한빈이 모를 리가 없다. 서둘러 음악을 멈춘 그는 재빨리 제게로 뛰어와선 팔이며 어깻죽지를 쪼물쪼물 주물러 주었다. 배우님 이러다 아이돌 하시겠는데요? 듣기 좋은 언사는 덤이었고 혹독한 채찍 후의 달짝지근한 당근은 또 다시 장하오를 망각하게 한다. 좀 얄짤 없으면 어때, 손끝이 이렇게나 말랑한걸. 빈틈이 없는 것쯤이야 내가 찢어 벌려서라도 만들어 내면 그만이고. 장하오는 눈앞의 남자로 인해 감정이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 한다. 대단한 사탕발림을 하는 것도 아니건만 말본새와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가능과 불가능을 어림 잰다. 갈급한 관계라면야 이제는 딱 질색인데, 시작도 전부터 허덕이고 있는 꼴이라니. 암만 생각해 봐도 성한빈을 제 선 안에 들이는 건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탄탄히 쌓아두었던 틀을 제 스스로 깨부시고 싶단 충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 감히 저 남자를 적당히만 예뻐한다는 건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아서.
“끝나고 점심, 같이 할래요?”
물음은 뇌를 거치지도 않고 내뱉어졌다. 흔한 비즈니스, 그딴 슴슴한 사이 말고 좀 더 사적인 영역에 그를 넣어 두고 싶은 욕심의 발현이었다. 물론 급발진 하긴 했다. 이에 성한빈은 상황 파악을 못하고서 땡그랗게 놀란 얼굴을 한다.
“네? 저랑요? 오늘요? 왜요?”
진심으로 의아하단 식이다. 부러 상처를 주기 위한 반응은 아니었다. 단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었던 듯 싶은데, 장하오는 어쩐지 좀 생채기가 났다. 자존심이 긁혔다. 같이 일하는 사이에 밥 한 번 먹을 수도 있지 무슨 대단한 이유라도 있어야 겸상할 수 있나? 물론 저야 의도가 다분한 건 맞다지만. 성한빈이 그걸 알아서 이렇게 선 긋는 건 아닐 텐데도 기분이 언짢아졌다. 장하오의 입꼬리가 여보란듯 쭈룩 내려앉았다. 그걸 본 성한빈이 뒤늦게야 쿠션어 빵빵한 멘트를 날렸다.
“아아, 저도 배우님이랑 너무 너무 먹고 싶긴 하죠!”
“거짓말.”
“저 거짓말 못하거든요?”
사실 저 말도 다 거짓말 같아. 불퉁하게 튀어 나온 입술을 삐죽거렸다.
“으응? 안 믿네? 진짠데.”
“그럼 같이 밥 먹어요.”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곧바로 다음 수업도 있고, 요즘 식단 조절 중이라 샐러드 먹고 있거든요.”
“식단 조절은 왜요?”
“방송 스케줄 잡힌 게 있어서 급하게 관리중이에요. 카메라에 너무 부하게 나와서요. 지금 일주일째 닭가슴살 샐러드만 먹고 있는데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어떡하지. 내가 원래 얼굴이 좀 큰가? 가슴도 너무 큰 거 같구 엉덩이도 막 이따만하게,”
“아니에요. 그런 거 안 해도 예뻐.”
가슴도 엉덩이도 딱 잡기 좋게 생겨 먹었는데 본인만 모르네. 대놓고 알려주고 싶지만 입 밖으로 냈다간 몰매 맞기 십상이라 적당한 선에서 멈추기로 한다. 아유, 배우님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성한빈은 양 손을 버둥거리며 손사래를 쳤다. 낯 부끄러운지 발긋하게 달아오른 두 뺨이 갓난쟁이 볼기짝마냥 부들해 보였다. 딱 한 번만 쓸어 보고 싶을 정도로. 곤란한 망상의 연속이다. 이러다가 사고 한 번 크게 칠 것 같단 말이지. 옴짝달싹 못하게 손발이라도 묶어 달라 그럴까. 별 해괴망측한 생각이 다 든다. 그렇게 달달 끓고 있는 제 속도 모르고서 성한빈은 듣기 좋은 말로 저를 살살 달랜다.
“촬영 끝나면 같이 밥 먹어요. 배우님 쩰 먹고 싶은 걸로. 제가 쏠게요!”
“내가 먹고 싶은 게 뭔지 알고.”
“뭐든 괜찮아요. 저 가리는 거 없거든요.”
“뭐든?”
“네!”
“...안 될 것 같은데.”
“뭔데요? 막 엄청 비싼가? 배우님 입이 되게 고급이신가 봐요.”
“내 입이 좀 고급이긴 한데.”
당장에 먹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라서. 장하오는 성한빈을 위아래로 느리게 훑으며 입맛을 쩍 다셨다. 꽤 노골적인 시선이었으나 그 의도를 성한빈이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백치같이 순진한 눈으로 반짝 반짝 안광 빛내가며 저의 음식 취향 따위나 밝혀내려 애쓰는 모습에 힘이 쭉 빠진다. 모르는 거야, 아님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이런 애를 상대로 무슨 엄한 플러팅을 하겠다고. 문득 허무해진 장하오는 정공법을 쓰기로 한다. 은은하게 불 지펴 살살 구슬려 먹으려다간 제가 먼저 숨넘어갈 것 같아서 안 되겠다.
“번호 줘요, 그럼.”
“네?”
“한빈쌤 번호요. 말로만 때우면 안 되니까.”
“어우, 무슨 빚쟁이처럼.”
툴툴거리면서도 들이 밀어진 휴대폰을 가져가 번호 열한자리를 꼼꼼히도 꾹꾹 누른다. 사소한 것조차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성한빈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여간에 매사에 열성이었다. 그 대상이 제가 된다면 어떨까 문득 상상한다. 이것저것 다 내버려 두고서 오롯이 저에게만 열성이고 유난인 성한빈이라면. 가정만으로도 눈앞이 아득하게 흔들렸다. 이것은 깨기 싫은 단꿈이자, 깨고 싶은 작금의 관계이다. 이렇게 시덥잖은 사이로 남을 수 없는 까닭. 장하오는 무더운 성한빈을 점점 더 놓치기가 싫어지고 있었다. 그 열기에 시나브로 잠식되더라도. 그러니까 잘 봐. 내가 어떤 식으로 벽을 허물어 깨부수고 들어가는지. 난 어떻게든 그의 가장 깊숙한 곳에 귀속되고 말테니까.
장하오의 미적지근한 마음은 간만에 불이 붙었다. 그렇지만 불도저마냥 무작정 밀고 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저도 사회적 체면이란 게 있었으니. 그래서 자꾸만 음침한 짓거리를 일삼고 있었다. 모르는 척, 약한 척, 가련한 척. 트레이닝을 받을 때마다 무던히도 엄살을 부렸다. 사실 못 따라갈 정도는 아니었는데 괜히 죽을동 살동 굴었다. 그러면 성한빈은 수업 시간을 오버해서라도 저를 더 붙들고 가르치려 들었다. 무튼 함께 있는 게 좋았으니 장하오는 부러 더 뚝딱이 행세를 했다. 그러다 한번은 스텝이 꼬여 발목을 삐끗한 적도 있었다. 솔직히 잠깐 아프다 말았었는데 성한빈이 하도 걱정을 사서하고선 발목을 어루만져 주길래 내내 절뚝대며 불쌍하게 굴기도 했다. 겪어본 바로 성한빈은 약자들에겐 한없이 약한 편이었다. 그 측은지심을 장하오는 십분 이용했다. 너무 졸렬한가 싶었지만 뭐면 어때. 저를 향해 꽃처럼 웃는 그를 볼 때면 그딴 치졸한 양심 따윈 어느새 다 갖다 버렸다.
그렇게 한 달이 꼬박 지났다. 그러는 동안 일곱 번의 트레이닝을 함께 했고 그렇게 염원하던 식사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는 채였다. 우선 둘 다 너무 바쁜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딱히 단둘이 만날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성한빈이 먼저 애프터 신청을 해왔다.
[ 배우님, 저 촬영분 다 끝났어요. 같이 저녁 먹어요! 시간이랑 장소 알려주시면 제가 최대한 맞출게요:) ]
화보 촬영 차 근교에 나와 있던 장하오는 잠시 휴식 시간에 그 메시지를 보고서는 꺅 고성부터 내질렀다. 형,형 성한빈한테 연락 왔으어. 매니저의 팔뚝을 찰딱찰딱 두드리며 유난을 피우자 매니저는 제 면전에다 대고 아예 극혐하는 표정을 지었다. 야 장하오. 이젠 숨기려는 노력조차 안하냐? 그런 걸 왜 해, 내가 무슨 죄 졌어? 떳떳하게 대들고는 있었지만 사실은, 기 쓰고 숨겨 봤자 족족 다 들키니까 그냥 포기한 거다. 쪽팔리느냐 하면 딱히 그런 건 아니었고 솔직히 짜증은 좀 났다. 저 인간도 결혼해서 자기 피붙이 낳고 잘만 사는데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건데. 빡세게 메이크업 덧입혀진 행색은 모자람이라곤 일도 없어서 더 속이 문드러진다. 그래도 인내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성한빈과 알콩달콩 커퀴가 될 날 만을 꿈꾸며 호기롭게 맛집 검색을 시작했다. 근데, 어딜 가야할지 좀체 감이 안 잡힌다.
“형, 형, 한빈쌤은 뭐 좋아할까. 요즘 핫한 거 뭐 있지? 오마카세? 코스요리?”
“라떼는 스테끼 썰면 기냥 끝장났었는데,”
“형한테 물은 내가 똥멍청이지.”
“야. 근데 밥만 먹을거지?”
“그게 뭔 소리야. 완전 변태네, 이 형.”
“아니, 아까 좀 신경 쓰이는 얘기를 들어가지고.”
“뭐를.”
“성한빈 말이야.”
“한빈쌤이 왜.”
“...애인 있다던데?”
“뭐? 누가 그래?”
“아까 너 촬영하고 있을 때 은지가 그랬어. 성한빈 여친 있다고.”
때마침 코디네이터 홍은지가 마지막 협찬 의상을 바리바리 싸들고선 대기실로 들어선다. 장하오는 다짜고짜 홍은지의 앞을 가로 막으려 캐물었다. 야 은지야,
“아까 성한빈 얘기 그거 뭐야?”
“네?”
“성한빈 여친 그거 뭔데. 왜 막 루머 생성하고 그래, 너는?”
“웬 루머? 루머 아니고 진짜예요. 예전에 기사도 여기 저기 났었는데?”
“거짓말 하지 마.”
“내가 오빠한테 뭐 하러 거짓말을 해요? 이것 봐, 진짜라니까?”
기가 찬 홍은지가 휴대폰을 꺼내 포털 사이트에 성한빈의 활동명인 Vin을 검색해선 제 눈앞에 들이밀었다. Vin 아래로 ‘성한빈’, ‘성한빈 로즈’, ‘댄서 로즈’, ‘로즈 빈’, ‘빈 로즈 릴스’, ‘빈 로즈 커플댄스’ 따위의 연관 검색어가 연달아 나열되어 있었다. 아니 이게 뭔... . 장하오의 말문이 턱 하니 막혔다. 거따 대고 홍은지는 불필요한 설명까지 덧붙인다. 같은 댄스팀 크룬데 사귄 지 벌써 2년도 넘었을 거라고. 그러면서 무슨 쇼츠 영상을 보여 주는데 성한빈과 웬 핑크색 머리 여자가 앞뒤로 서서 누가 봐도 커플 같은 춤사위로 흐느작대고 있었다. 아 잠시만. 못 보겠잖아. 장하오는 눈살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훽 하니 내던졌다. 식겁한 홍은지가 공중 부양한 휴대폰을 향해 헐레벌떡 두 손을 뻗었다. 악 장하오 진짜! 왜 남의 폰을 함부로 던지고 그러는데! 간발의 차이로 휴대폰을 놓친 홍은지는 액정이 아작 난 걸 붙든 채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평소 같았음 더 좋은 걸로 하나 사주겠다며 월급 앤 나 플러스 알파를 떡하니 내놓았을 테지만, 지금의 장하오는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레 뚜까 맞은 사실적시 몽둥이에 눈앞은 꺼지고 희망은 와장창 부서진다. 아프다. 암담하다. 시작도 없이 맞이하게 된 배드 엔딩에 한 없이 참담해진다. 암만 그렇대도 남의 입에 든 사탕을 뺏어 무는 취미는 없다. 잠시나마 꿈 꿨던 성한빈과의 미래를 제 발로 산산조각 깨부신다. 와르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로 빚어 놓았던 제 세상이.
좆같은 실연을 당해도 시간은 흐른다. 그것도 완전 빠르게 잘만 흐른다. 야속하게도. 장하오는 성한빈을 보는 게 껄끄러워졌다. 비록 혼자만의 실연이었다지만 큰 맘 먹고 성한빈을 제 안에 들였던 탓에 그만큼 후폭풍은 더 거셌다. 저녁 약속은 매니저를 통해 거절 의사를 전달시켰고 잡혀 있던 수업 일정은 스케줄을 핑계 삼아 최대한 미뤄 놓았었다. 그래 봤자 꼴랑 일주일일 뿐이었고 그 유예기간은 거침없이 흘러 마침내야 당일 아침 해가 밝아 오고 있었다.
아 가기 싫어. 장하오는 눈 뜨자마자 그딴 생각부터 했다. 추레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볼캡을 깊게 눌러쓴 채로 집을 나서는 얼굴이 도살장 끌려가는 소보다 더 죽상이었다. 푸석하고 착잡해진 몰골로 벤에 올라타니 매니저가 아침은 먹었느냐 물어 온다. 기운 없이 고개를 내젓는데 별안간 입 안으로 따끈한 베이글이 쑥 밀려들어온다. 뉴욕베이글 가서 사온거야, 먹어봐. 매니저는 무심하게 뇌까렸지만 무려 웨이팅만 기본 한 시간 반이라던 유명 맛집의 베이글이었다. 장하오는 그의 성의를 봐서라도 빵 한 쪽을 꾹 씹어 보려 했다. 근데 생각만큼 잘 안 먹혔다. 분명 허기는 지는데 무슨 맛인지 느낄 수가 없었다. 목구멍이 턱턱 막히는 기분에 퉤 뱉어낸 베이글을 고대로 종이봉투에 처박는다. 그 꼴을 보고서는 매니저가 스리슬쩍 묻는다.
“너 괜찮냐?”
“그럼 괜찮지, 내가 뭐 울기라도 했을까봐?”
“어엉. 그래보이는데.”
“...알면 그냥 묻지를 마.”
두툼한 눈두덩이를 손등으로 북북 문질렀다. 대성통곡까진 아니고 걍 눈물 좀 찔찔 났을 뿐인데 눈탱이가 띵띵 불어 터졌다. 아니 누가 보면 내가 성한빈한테 목숨이라도 내건 줄. 개 큰 오해 받긴 싫은데 매니저는 이미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해서는 상황을 수습해 보려 머리를 굴렸다. 하오야,
“너 너무 힘들면 그냥 다른 사람으로 바꿔달라 하자.”
“... .”
“어차피 성한빈은 너무 바빠서 너랑 스케줄 맞추기도 힘들고, 너도 이제 어느 정도는 하니까 굳이 그 사람 아니더라도 괜찮을 듯싶은데.”
어때 니 생각은? 묻는 말에 아무런 대답이 안 나왔다. 분명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거기에 영 영 못 본다는 선택지는 없었던 모양인지 당장에 목이 메었다. 자식새끼 강제로 떼어 놓는 빌런 보듯 매니저를 흘겨보자 당장에 그의 기세가 한 풀 꺾인다.
“야, 알겠으니까 표정 좀 풀어.”
“안 바꿔. 그니까 괜히 실장님한테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안 바꾸는 게 아니고 못 바꾸는 거겠지.”
“그만 좀 찌를래?”
“그럼 앞으로 어쩌게?”
“...이러다 말겠지. 어차피 두 달도 안 남았는데 뭐.”
죽고 못 살던 옛 연인도 결국엔 없는 것처럼 잊혀졌다. 흘러가는 시간 앞엔 암만 짙었던 감정도 죄 무용지물이더라. 얽히고 맺여 졌던 인연들도 이렇게 잊히는 마당에 하물며 고작 세 달짜리 흐릿한 연 따위에 그보다 더한 힘이 있을 리가 없다. 그나마 얼기설기 성겼던 관계마저 두 달 후면 다 끝이 날 테니. 결국 시간이 무덤이 될 거라고. 가는 시간 속에 묻어 두다 보면 서서히 낡아 흩어질 허접한 감정일 뿐이라고. 장하오는 단단히 자위하며 조금씩 마음을 덜어내고 있었다. 물론 그런 마인드 컨트롤도 성한빈 얼굴 마주 보자마자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았지만. 제 판단 미스였을까. 아직은 너무 일렀나. 매니저 말대로 아예 보지 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생그르르 웃고 있는 성한빈 얼굴 보자마자 달아나고 싶어지는 걸 보면.
오셨어요? 근데 오 분 지각이에요! 벌금 오백원! 친근하게 걸어오는 그의 장난에도 맞받아줄 여력이 안 생겼다.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고 매니저의 바지 뒷주머니를 뒤져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성한빈에게 건네어 줄 뿐. 다음에 또 지각하면 거기서 까요. 퉁명스레 대거리 하고서 대충 몸을 풀었다. 성한빈은 지폐를 매니저에게 되돌려 주고선 입술을 빼죽거리며 말했다. 그냥 미안하단 말 한마디면 되지 웬 돈이에요, 사람 섭섭해지게. 팔다리를 죽죽 늘려가며 스트레칭 중이던 장하오는 그대로 굳어졌다. 섭섭? 그건 다름 아닌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성한빈 니가 뭘 알아. 맘 같아선 따져 묻고 싶었다. 지금 누가 더 섭섭해 해야 하는지 모르느냐고. 물론 성한빈이 알 턱은 없었다. 알아야 할 의무도 없었다. 당연히 그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다. 죄라면 다 저에게 있다. 함부로 마음 주고 거하게 삽질한 죄. 그럼에도 어깨 붙들어 짤짤 흔들며 따져 묻고 싶기도 했다. 왜 나랑 같은 마음일 수 없는 거냐고. 이런 맥락 없는 마음이 든다는 게 말이 되나. 암만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참아볼 참이다. 그렇게까지 미친놈은 아니니까. 아직까진. 근데 저 햇살 수인 같은 얼굴을 볼 때면 자꾸만 울고불고 따지고 싶어져서. 장하오는 내내 성한빈을 외면했다. 잦은 눈맞춤 대신에 연습실 바닥만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수업을 따라가려니 진도는 당연히 더뎠다. 소통은 꽉 막혔고 어쩐지 기운도 안 났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그 눈이 보고 싶어져서. 그렇게 하잘 데 없이 두 시간이 지나갔다. 장하오는 기력 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의 곁으로 성한빈이 바투 다가와선 걱정스레 묻는다.
“혹시 어디 아파요?”
동시에 저의 젖은 이마께로 성한빈의 손바닥이 조심조심 내려앉는다. 그 간지러운 온기에 차마 피하지도 못하고서 몸을 굳혔다. 아니 사실은, 그대로 녹았다. 꼼짝 없이. 볕 아래 놓여진 눈사람처럼 녹진하게. 억지로 뭉쳐 두었던 원망 덩어리가 허무하게 허물어진다. 원래 애정과 미움은 한 끗 차이. 한 겹을 벗은 마음은 터진 둑처럼 더욱 더 원초적인 걸 갈구했다. 차라리 잡초였으면 한다고. 너의 빛 한 자락이라도 머금어 자랄 수 있게. 이렇게 녹아 사그라질 삿된 존재가 아니라. 이마 위로 얹어진 성한빈의 손등을 겹쳐 잡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아파요. 풀 죽어 대꾸했더니 덩달아 고개를 주억거린 성한빈이 측은한 표정으로 오은영 스킬을 쓴다. 어쩐지..., 역시 그랬구나, 왜 말 안했어요, 힘들었겠다. 노곤하고 다정한 공감의 말에 좋으면서도 한 편으론 억울해졌다. 저게 내께 아니라는 이 현실이. 장하오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겹쳐 쥔 성한빈의 손을 조금 더 억세게 그러쥐었다. 그러자 성한빈이 걱정을 주렁주렁 매단 채로 급하게 물어왔다.
“아파요? 병원 갈까요? 매니저 불러올게요.”
“됐어요. 병원 못 가.”
“어디가 아픈 건데요, 응?”
“마음이요.”
“네?;”
“실연당했어요, 나.”
“아아... .”
성한빈의 입이 꾹 다물렸다. 이걸 어찌 위로해 주나 고민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하긴, 이 병신 같은 실연 타령에 적당히 대꾸해 줄 만한 인간이 세상에 몇이나 있으려나. 근데 성한빈은 그걸 했다. 정말로.
“누가 감히 우리 배우님 같은 분한테 그랬을까.”
“... .”
“그 사람 되게 보는 눈이 없나 봐요.”
“그건 맞아요.”
“에구, 너무 상심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제 어깨를 토닥이며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 주려 애쓰는 성한빈은 여전히 어여쁘다. 생긴 것만큼이나 심성도 고운 이를 남의 손에 태우고 싶지 않은 건 응당 당연한 순리이다. 내 양심에 털이 난 게 아니라, 그냥 정해진 수순 같은 거. 그러나 빼앗아 올 생각은 없었다. 나야 개쓰레기가 된대도 상관없었지만 성한빈마저 폐급으로 끌어내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는 그저 지금처럼 고고하고 정직한 사랑을 했으면 한다. 그게 그에겐 더 어울렸다. 허나 장하오는 이미 글러 먹었다. 초장부터 굶주림에 허덕이던 애정은 한낱 관심 한덩이라도 주워 삼키려 음습한 짓거리를 일삼는다. 모든 걸 다 가졌지만 허기지고 가엾은 사람. 그 결핍을 성한빈에게 어필한다. 내 욕심 한 자락이라도 채워보려 이딴 구질구질한 생쇼를 해가면서. 가만 가만 도닥여 주는 성한빈의 뜨끈한 품을 자연스레 끌어당겨 안으며 처연하게 읊조렸다.
오늘 내 술친구 해줄래요?
푹 젖은 목소리에 성한빈은 연신 그러하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리고만 있었다. 이것 봐, 한 치도 어긋나질 않잖아. 넌 너무 착하고 난 너무 약았다는 게. 그래서 유약해진 너의 바운더리를 이용하는 것쯤은 별 거 아닌 게 되어 버렸어. 나는.
바로 그날 밤, 스케줄을 모두 끝마친 성한빈이 장하오의 오피스텔로 직접 찾아왔다. 남들 눈에 오르내리지 않고 편하게 만날 만한 곳을 찾기란 아무래도 쉽지 않아서. 장하오가 먼저 성한빈을 제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 말을 전했다.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폐쇄적인 공간은 암만 해도 집만 한 게 없으니 성한빈은 그에 흔쾌히 응했다. 샴페인과 과일 따위를 양손 가득 사들고선 집 안으로 총총 들어서는 그에게서 은은한 우디향이 나렸다. 그래도 남의 집 온다고 때 빼고 광이라도 낸 건지 브이넥 티셔츠에 청자켓을 둘러 입고 왔다. 그게 못내 사랑스러워서 몇 번이고 안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되겠지. 응 안 돼. 장하오는 죄 없는 허벅지만 수차례 쥐뜯었다. 제 속사정도 모르는 성한빈은 거실 곳곳을 휘둘러보며 집구경이나 열성적으로 했다. 와, 집 깨끗하고 좋은데요? 오! 흑룡영화제 트로피! 저 이거 실물 처음 봐요! 완전 신기해. 거실 한 켠 장식장에 진열되어 있는 트로피들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기에 걔 중에 대상 트로피를 꺼내어 품 안에 들려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서 진땀을 뺀다.
“어, 이,이거 떠,떨어지면 어떡해요?”
“물어내야지.”
부러 겁을 줬다. 사실 망가뜨리든 말든 성한빈이라면 다 괜찮았는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서다. 트로피 따위야 몇 번이고 다시 따내면 그만이지만 제 영역 안의 성한빈은 언제 또 볼 수 있을는지 모를 일이기에.
“불안한데 그냥 눈으로만 보면 안돼요?”
“왜요. 기념으로 사진 한 장 남겨요.”
“아니요! 그냥 보기만 할래요.”
그다지 묵직하지도 않는 걸 두 손으로 떠받들고서 발을 동동 굴리는 모습에 그만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껴안아 버렸다. 물론 곧장 놓아 주기는 했지만. 성한빈의 신경은 온통 트로피로 가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는데 저만 괜히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귓등이 벌겋게 타고 있던 장하오에게 트로피를 조심조심 떠넘긴 성한빈은 저가 먼저 와인과 치즈가 세팅되어 있는 바 테이블로 총총 걸어가선 착석했다. 그러고는 손끝을 살랑살랑. 배우님도 빨리 오세요. 부르는 손짓에 오더 내려 받은 기계처럼 빠릿빠릿 성한빈의 옆으로 가 앉았다.
“와인 좋아해요?”
“네, 저 안 가리고 다 마셔요.”
“나는 요즘 막걸리 좋아해요.”
“헐, 배우님 한국사람 다 됐네요. 신기하다, 막 고량주 같은 거만 마실 거 같은데.”
“술 한국 와서 처음 마셨어요. 술자리 예절도 대표님한테 배웠고.”
그래서 봐봐요. 코르크 마개 돌려 딴 와인 병을 소주병 쥐듯이 부여잡았다. 한 손으론 병 몸뚱이를, 나머지 한 손으론 병 쥔 손을 점잖게 받들어 성한빈의 와인 잔에 쪼로록 따라 주었다. 그걸 본 한빈이 까르륵 웃어 넘겼다.
“어뜩해. 배우님 귀화 하셔야겠다.”
“그건 좀.”
“아, 왜요.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사람 같은데.”
“외로워요, 여기.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외로워요?”
“사랑해줄 애인도... 없고.”
“에이, 애인은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거죠. 그게 뭐 별거라고!”
“한빈쌤은 있잖아요.”
“그, 그거는 그렇기는 한데에... .”
가볍게 위로해 주던 말끝이 점점 흐려지더니 다짜고짜 와인 잔을 챙 부딪친다. 에잇, 마셔요 마셔! 첫 한 잔을 호쾌하게 원 샷 때리고선 치즈 한 쪽을 낼름 씹어 삼킨다. 진짜 분위기라곤 쥐뿔도 없다. 아무리 헤테로라지만 너무 한 거 아니냐. 맘 상한 장하오는 덩달아 저도 와인을 때려 부었다. 그 모습을 성한빈은 아주 크게 곡해했다. 실연의 아픔이 커서 술로 잊어 보려 이러는구나 여겼다. 그러니 장하오의 축 처진 어깨가 측은해 보이고 발갛게 오른 눈 밑이 처연해 보였다. 그래서 그냥 군말 없이 술친구나 돼줬다. 빈 잔에 열심히 술을 따라 주고 그게 차면 또 그가 마시는 만큼 함께 마셨다. 평소보다 속도가 빨라서 금세 얼굴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손바닥으로 뺨을 차닥차닥 두드리며 술기운을 내쫓는데 장하오가 그 손을 가만히 잡아 쥐었다.
“그만 때려요, 아프겠다.”
“으으, 어지러워요.”
“보기도 아까운 걸 왜 자꾸,”
“네?”
“네?”
느른하게 풀려 있던 장하오의 눈이 희동그레 커졌다. 머릿속으로만 빙글빙글 돌던 게 입 밖으로 숨 쉬듯이 흘러나오고야 말았다. 제 손 안에서 꼼질대던 성한빈의 손이 쏙 빠져 나간다. 장하오는 초조해졌다. 성한빈이 제 뺨을 올려붙이고선 곧이라도 달아날 것만 같다. 그건 안 된다. 어떻게 끄집어 온 기회인데. 그래서 끝끝내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을 제 입으로 토해내기로 한다. 절대로 들먹이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여자 친구랑은, 어떻게 만났어요?”
입 밖으로 꺼내고 보니 생각보다 더 아프네. 이건 진짜 자해나 다름없다. 내가 내 발등을 찍고 있다. 그렇대도 한결 풀어진 성한빈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열댓번은 더 찍어야 될 듯하다. 앞날이 깜깜하다. 성한빈은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냥 뭐어..., 혜윤이랑은, 아 혜윤이는 로즈 본명이에요.”
“예쁘네요, 이름.”
솔직히 내 알바는 아니었으나 성의껏 대꾸는 해줬다. 근데 진짜 알고 싶지 않은 티엠아이다.
“혜윤이가 원래 있던 크루가 있었는데 거기 리더가 혼전임신하면서 팀이 갑자기 해체됐거든요. 그래서 우리 크루에 합류했고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어요. 진짜 별거 아닌데 다들 꼭 물어보더라. 벌써 3년찬데 아직도 그래. 그냥 이마에 써붙이고 다닐까 봐요.”
“오래 만났네요.”
“햇수로 3년차긴 한데 자주 못 봐서 그런지 솔직히 잘 실감 안나요. 재작년에 혜윤이 뉴욕으로 유학 가고 롱디 되고 부턴 한 서너번 봤나? 제가 가서 몇 번 보고 오고 그랬었는데 나중엔 혜윤이가 오지 말라더라고요, 바쁘니까. 그래서 그때 이후론 그냥 연락만 주고받고 얼굴 못 본지는 9개월도 넘었어요.”
성한빈은 심란한 몰골로 남은 와인을 꼴딱꼴딱 마셔 넘기고서는 몇 번쯤을 더 자작까지 했다. 그러는 동안 장하오는 별다른 대꾸 없이 큐브 치즈의 은박 포장을 벗겨 한빈의 앞 접시에 여러개 놓아 주었다. 그걸 술과 함께 야금야금 먹다보니 어느덧 와인 한 병이 바닥을 보였다. 괜찮아요? 묻자 성한빈은 이마를 꾹 짚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아니요, 안괜찮은 것 같아요... .
“그으, 처음엔요, 같이 가자구 했었어요, 혜윤이가요.”
“유학을요?”
“네에. 뉴욕에 엄청 유명한 댄스스쿨 있거든요. 혜윤이가 거길 같이 갔으면 했었어요. 근데 저는 갈 만한 상황이 안됐어요. 제 여동생이 그때 열여섯 살이었거든요. 걔만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내가 가장인데. 어떻게 나 좋자고 내 식구를 버려요. 그것도 애기때부터 내가 업어 키운 애를. 근데 혜윤이는 그게 섭섭했나 봐요. 동생 때문에 못 간다고 했더니 처음엔 막 화를 내더라구요. 근데 거기에 나도 발끈했어요. 내 사정 다 아니까 이해해줄 줄 알았거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혜윤이는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사고로 부모님 갑자기 돌아가신 것도 알고 그 일 때문에 아이돌 연습생 관두고 여동생 뒷바라지 할려고 댄스팀 들어간 것까지 다 알고 있었으니까. 무조건 이해할 줄 알았던 거죠. 그렇게 뉴욕 가기 직전까지 투닥 거렸어요. 그러다 막판에 화해하기는 했지만... .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미국에서 한번도 안 나오는 걸 보면 아직도 제가 미운가 봐요.”
생각만큼 돈독한 사이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생각보다 헐겁게 벌어져 버렸다는 것도. 여자가 너무 어리다는 생각을 한다. 감히 성한빈을 담을 그릇이 되지 않는다고. 나라면 누구보다 더 너르고 깊게 품어줄 텐데. 꿈 대신 돈을 쫓아야만 했던 치열한 삶을. 여자가 그 자격을 버렸다면 기꺼이 제가 주워 가져야겠다.
“아아..., 나 막 왜 배우님한테 이런 얘기 다 하고 있지? 웃기다. 그쵸.”
“안아 줘도 돼요?”
“... .”
“안아 주고 싶어요.”
그 흔한 동정심 따위가 아니었다. 차라리 가여운 거라면 나았을지도 몰랐다. 단순히 끌렸던 감정은 그의 고해성사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가벼운 마음 따위론 무거운 그의 삶을 동경할 수 없다. 그를 경애한다. 상실을 짊어진 일생을 극진히 공경한다. 그 빈곤을 제가 기꺼이 채워주고만 싶다. 홀연히 떠나간 그의 핏줄을 대신할 순 없더라도. 언제든 쉬어갈 그늘이, 살아갈 숨이, 버텨낼 용기가 되어 주겠다고. 나만은 언제고. 떠나가지 않고서 언제나 그 자리에서 진득이 너만. 장하오는 제 품으로 순순히 안겨오는 한빈의 굽은 등을 가만가만 도닥이며 위로를 건넸다. 고생 많았다고. 잘 견뎌내 주어 고맙다고. 그에 응하듯 성한빈이 양 팔을 뻗어 장하오의 허리께를 살풋 끌어 안아 왔다. 바투 가까워진 얼굴이 곧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울멍울멍하다. 엄지손가락 끝으로 눈가를 쓸어내리며, 울지 마요- 다독였다. 그러면 성한빈은 코를 훌찌럭 들이키다 배시시 웃었다.
“안 울어요.”
“에이.”
“살면서 동생 때문에 울어본 적 한 번도 없어요. 울면 꼭 후회하는 거 같잖아요. 나는 후회 안 해요. 동생 하나 바라보고 사는 거. 내가 희생했다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성한빈 씩씩하네.”
“푸핫.”
짧게 웃음을 터뜨린 성한빈의 단 숨이 목줄기 한 켠을 간지럽혔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감에 제 허리께에 놓인 성한빈의 팔이 슬며시 느슨해지며 주춤 몸을 뒤로 물린다. 그런 그의 어깨를 반사적으로 끌어 잡았다. 제 품 안에서 잠시나마 울고 웃던 그를 놓치기가 싫어졌다. 차마 놓아줄 수 없었다. 희생이 아닌 희망으로 빚어낸 아이를 보며 산다는 그를. 굳건한 생의 이면에 어린잎처럼 여리고 덜 여문 자아가 움터있다. 그걸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피워내고 싶다고. 허울뿐인 너의 애인이 아니라, 너의 가까이에서 더운 숨을 엉켜내고 있는 내가.
그와 거리낌 없이 닿아 있으니 허튼 욕심이 무턱대고 자라난다. 장하오는 충동적으로 성한빈의 턱 끝을 느리게 끌어 올렸다. 어긋나 있던 시선이 적나라하게 마주치며 축축한 두 눈이 달그락 흔들렸다. 그게 허락의 뜻은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안다. 그럼에도 욕심을 덧입은 이성은 갈급함을 참지 못하고서 그의 입술을 베어 물게 만들었다. 읍. 먹힌 소리와 함께 뒤로 내빼려는 성한빈의 뒷머리를 움켜쥐고서 닫혀 있던 입술새를 채신머리없이 씹어 빨았다. 쥐어 잡고 있던 그의 턱 끝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빨고 있던 입술을 뒤물렸다. 낭패와 모멸감으로 새빨갛게 달궈진 성한빈의 얼굴이 보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뒤늦게야 깨닫는다. 되돌릴 수 없는 사고를 쳐버렸다고. 육욕에 눈 먼 미친 새끼처럼. 사리 분별 못하고서.
“미안해요.”
수습해보려 불쑥 사과를 건넸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답 대신에 얼빠진 목소리만이 되돌아왔다.
“어... 지금 이게 무슨...”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걸 보니 멘탈이 갈린 듯 했다. 무모하게 입을 맞췄음에도 그 혼돈한 얼굴에 장하오는 상처를 받는다. 천하의 후레자식이 된 듯 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다. 일말의 가능성을 찾을 수도 없다. 고개를 떨구고선 등허리를 잘게 떠는 모양새에 덩달아 좌절한다. 감당하기 힘든 건가. 아니 아주 감당하기 싫은 건가. 그렇다면 애써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장하오는 키워 놓은 마음을 꾹꾹 구겨 제 발치로 떨구어 버렸다. 그냥. 그냥 나만 양아치 새끼가 되는 게 나았다. 니 마음의 짐을 덜 수만 있다면.
“한빈쌤.”
말끝이 떨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저 연기를 할 뿐이라고. 제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이면서.
“많이 놀랐어요? 미안해서 어떡하지. 내 술버릇이 좀 고약해서.”
단지 이건 내 빌어 먹을 술버릇일 뿐이라고. 그러니 아무런 의미도 찾으려 하지 말고 말끔히 잊으라고. 다만 나는 지옥불에 지져진 듯 죽기보다 괴롭겠지만 너만은 평온한 밤이 되기만을 바란다고.
“형 나는 진짜 미친놈이야.”
“왜. 너 성한빈한테 무슨 사고 쳤어?”
“왜 아묻따 성한빈인건데?”
“너 요즘 눈 돌아 있는 게 성한빈 말고 또 있어?”
날 너무 잘 알아서 죽어줘야겠어. 근데 그 전에 나부터 먼저 죽여주라. 나는 진짜 죽어 마땅한 병신이거든. 장하오는 몰려드는 자책감에 머리채를 쥐뜯었다. 저 혼자 꼴려 입술 꼴아 박았던 그날 밤, 성한빈은 홀연히 떠났다. 술버릇,이라고요? 되묻는 말에 마지못해 그렇다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성한빈의 얼굴이 뾰족하게 일그러졌으나 다만 그 뿐. 더 이상 가타부타 따지지 않던 그는 쌩하니 자리를 박차고서 나가 버렸다. 그게 너무 신경 쓰여 몇 번 쯤 성한빈에게 안부 연락을 넣어보기도 했었지만 시금털털한 단답들만 다박다박 돌아오더라. 예. 아니요. 바빠요. 뭐 이딴 식의. 이럴 거면 차라리 답을 하질 말던가. 기분이 한없이 깔아졌다. 감히 삔또 상할 주제가 안 된다는 거 잘 알면서도 그랬다.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맞닥뜨리게 된 트레이닝 시간은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괜히 매니저나 붙들고서 찡찡 죽는 소리를 내던 장하오는 닫혀진 연습실 문 앞에서 똥 마려운 개새끼마냥 서성거리고만 있었다. 매니저는 그런 장하오의 어깨를 잡아 짤짤 흔들어댔다.
“하오야, 너 진짜 왜 이러냐. 너 이렇게 찌질한 남자 아니었잖아. 백억 장하오 다 어디 갔어.”
“몰라 나도오. 걍 형이 들어가서 나 오늘 아프다고 말해주면 안 돼?”
“야, 나 거짓말 좀 작작 시켜.”
“거짓말 아니야. 나 진짜 아프다고.”
“어디가 아픈데? 마음, 그 딴 개소리하면 죽인다 진짜.”
“흥.”
맞는데. 상사병. 장하오 매니저 5년 쯤 되니 눈치가 어지간하다. 이제 하산하도록. 쯧쯧 혀를 내친 매니저가 다짜고짜 연습실 문을 열어젖히곤 그 안으로 장하오를 훌떡 밀어 넣었다. 아니, 형, 자깐만. 당황해서 뒷 달음질치는 등 뒤로 열린 문이 가차 없이 콱 닫힌다. 하 저 나쁜 새끼.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장하오는 푸지게 욕을 하며 눈을 질끔 감았다. 그런다고 해서 외면해지는 현실도 아니거늘. 짧은 심호흡과 함께 느릿하게 뜬 눈 앞으로 조그려 앉아 신발끈 동여매고 있는 성한빈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반사적으로 인사말을 던졌다가 안녕 못하단 소리나 들을까봐서 잠깐 겁을 집어 먹었지만 성한빈은 그냥 평이하게 제 인사를 받아쳤다. 네, 오셨어요. 말랑거리지도 그렇다고 버석하지도 않을 만큼의 그저 그런 목소리. 안심을 해야 할지 불안해해야 할지 아리 까리 해지는. 그렇게 찜찜한 상태로 트레이닝은 굴러갔다. 하해와 같은 가르침으로 이젠 얼추 율동 티를 벗어나 그럴 듯한 동작들을 구사하게 되었건만 예전처럼 기운 북돋우는 칭찬은 온데간데없고. 막힘없이 착착 진행되는 걸 보자니 맡은 바 임무를 서둘러 끝내고 싶어 하는 눈치인거라. 사무적 태도에 섭섭하다 그럼 또 그 뾰족한 표정으로 날 할퀴려나. 장하오는 또 쩔 수 없이 야속한 마음에 입 꼬리가 축 처졌다. 잔뜩 기 죽어 돌돌 말린 개 꼬랑지처럼. 그걸 몸이 축 나 힘든 거라고 오해한 모양인지 성한빈은 십 분의 쉬는 시간을 툭 던져주고선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서둘러 그 손목을 낚아채며 물었다.
“어디가요?”
“잠깐 사무실.”
“바빠요?”
대답 없이 어깨만 한 번 들싹이는 걸 보니 그닥 바쁜 건 없는 눈치였는데. 어디 가지 말고 나랑 놀아 달랬더니 그건 또 싫다고 뻗댄다. 암만 봐도 심통 난 게 분명해서 그걸 풀어주겠답시고 별의 별 회유책을 다 꺼내든다. 커피 마실래요? 한빈쌤 좋아하는 시나몬라떼. 도리도리. 아님 요거트 시켜줄까요? 토핑 왕창 때려 넣어서. 도리도리. 그냥 끝나고 같이 밥 먹어요, 청담동에 괜찮은 한정식집 있는데. 도리도리도리. 애처럼 마냥 도리질만 연거푸 하는 꼬라지에 가슴 한구석이 퍽퍽해진다. 상대가 딴 사람이었음 애진작에 니 좆대로 하라며 때려칠 타이밍이었다. 애인도 뭣도 아닌 이를 상대로 기분 한 번 풀어주겠다며 애걸복걸하고 있는 제 꼬라지가 우스워 죽겠는데 하나도 안 웃겼다. 절로 쏟아지는 한숨을 꾹꾹 눌러 삼키며 입술을 짓씹다가 열 오른 시선 끝으로 성한빈의 풀린 운동화 끈이 보였다. 에고 다칠라. 다른 생각할 틈도 없이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어 앉아 늘어진 끈 한 쌍을 붙들어 쥐었다. 성한빈이 주춤 대며 다리를 뒤로 물리려 하길래 부러 힘주어 쥐어 잡고는 양쪽 끈을 팽팽히 단도리했다. 붙잡힌 채 이도 저도 못하던 성한빈이 한숨을 깊게도 푸욱 내리 쉬었다. 그리고는 내내 꽁깃꽁깃 숨겨두었던 말을 내동댕이치듯 내뱉었다. 거리낌도 하나 없이.
“배우님은,”
“네.”
“이런 게 다 아무렇지도 않나 봐요.”
다 버릇이고 장난이라서 그런가. 끈을 휘감아 매듭 짓던 손이 멈칫한다. 꿇어앉은 채로 고개만 꺾어 성한빈을 올려다본다. 어느덧 울그락붉으락 덧칠해진 얼굴. 왜. 왜 그런 아픈 얼굴을 할까. 이런 모습 보기 싫어서 내가 뭘 갖다 버렸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신발끈 묶는 건데 이게 뭐라고.”
“...진짜 재수 없는 거 알아요?”
“내가요?”
“네. 그쪽이요.”
“왜 이렇게 화가 난 건데요.”
제 물음에 성한빈은 연신 씨근덕거렸다. 꼭 짝사랑 상대에게 희롱 당한 계집 마냥 길길이 날뛰고 노여워하는 모양새라 오히려 제 쪽에서 더 의아할 판이었다.
“배우님이 그렇게까지 예의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예의? 그렇게까지 예의 따질 일인가. 한빈쌤은 친구한테 뽀뽀 받아본 적 없어요? 남자애들한테 예쁨 많이 받고 자랐을 것 같은데.”
“있어요.”
“그 친구들한테도 이렇게 일일이 다 화냈어요?”
“아니요. 그냥 한 대 패주고 말았는데요.”
“그럼 나도 한 대 패주고 말든가. 그게 싫으면 어디 분 풀릴 때까지 실컷 패보든가.”
나는 상관없는데. 꿇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성한빈의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반듯한 코뼈라도 어디 한 번 부러뜨려보단 의도였다. 기꺼이 맞아줄 의향이 있었다. 이렇게라도 그의 기분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그러나 성한빈은 그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기만 할 뿐 꼼짝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억울해 미치겠다는 얼굴만은 여전했다. 아주 한참 전부터. 대체 왜. 뭘 더 바라서.
“사과도 하고 무릎도 꿇었는데 아직도 부족해요?”
“배우님은 뭐든 다 장난식이에요?”
“장난이 아니면,”
“... .”
“뭐가 달라지나?”
“무슨,”
“그럼 나한테 와주나? 그것도 아니면서 왜 내 진심을 못 들어 안달이지? 들어 봐야 당신한테 좋을 것도 없을 텐데.”
“... .”
“상관없어요? 들어도?”
“무,뭐를요?”
“갑자기 모르는 척?”
“그게 아니라,”
“좋아해요.”
히끅. 갑작스러운 직구에 성한빈이 헛숨을 들이켰다. 별스럽게 놀라는 척은. 솔직히 이거 듣고 싶어서 실컷 떠봤던 것 같은데. 약간 괘씸한 마음이 든다. 꼭 이렇게 확인 사살하고 우리 관계를 완전히 박살내야만 속이 시원할 성 싶더냐. 그렇다면 어차피 파토난 거 여보란 듯 이실직고하련다.
“내가 당신 좋아해서 더러운 수작 부리고 아닌 척 연기했어요. 미안해요. 너무 좋아서 주체가 안됐어. 사람이 사랑에 미치면 잠깐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배우님.”
“앞으로 불편해질 거 알아요. 남은 수업은 다른 사람한테 넘겨도 상관없어요. 한빈쌤이 부담 가질 필요 전혀 없다는 뜻이에요. 이건 당신 책임 밖의 일이고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니까.”
그동안 고마웠어요. 마지막 인사까지 서둘러 끝마치고서 도망치듯 등을 돌리자마자 손목이 덜컥 붙잡혔다. 잠,잠깐만요. 다급한 손아귀의 힘에 멈칫한다. 뒤도 안보고 달아나려던 몹쓸 계획이 허무하게 무산된다. 돌린 등을 되돌려 성한빈을 돌아다본다. 당혹감에 쩌들어 새빨개진 낯빛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입술을 옴찔옴찔한다. 이 와중에도 그게 퍽이나 사랑스러우니 장하오는 현재 답도 없고 약도 없는 상사병 말기 환자였다. 괜히 돌아 봤다. 후회가 막급하다. 그냥 지금이라도 잡힌 손목 탈탈 털어내고서 자리를 박차고 싶다. 근데 못 그랬지. 늘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앞으로도 그럴려나. 그 대상이 성한빈이라면? 그건 좀 곤란한데. 장하오는 참담한 얼굴을 해서는 잡힌 손목을 약하게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들어줄 심산이었다.
“더 할 말 있어요?”
“다른 사람한테 배우님 안 넘겨요.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저는 끝까지 주어진 제 업무 책임질 거예요.”
“괜찮겠어요?”
“괜찮고 말고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안괜찮대도?”
“그건... .”
“내가,”
더 이상 당신 보고 싶지 않대도? 목이 한 번 메였다가 간신히 말끝을 맺었다. 성한빈을 조금 더 볼 수 있을 만한 기회였지만 그러기 싫어졌다. 제 발로 뻥 걷어찰 수 있다면 그러고만 싶었다. 본업에 충실한 성한빈의 모습은 늘상 저를 혹하게 만들었지만 지금만큼은 그게 좀 미웠다. 이럴 때 마저 공사 구분 철저한 그가 원망스럽다. 더 나아가 지긋지긋하다. 다신 못 보더라도 상처 하나 쯤은 주고 싶어졌다. 나까짓거로 당신이 아파할 지는 장담 못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착하니까.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은 저 때문에 가슴에 찬기가 스미기를 바라면서.
“왜..., 왜 그런 말을 해요?”
물론 이런 반응은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성한빈은 당황한 듯한 몰골로 부여잡고 있던 장하오의 손목을 조금 더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런 성한빈의 손 안으로 식은땀이 흥건했다. 혹시나 무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를 마주 보는 게 그에겐 고역일 수 있다. 어쩌면 내 쪽에서 먼저 더 단호하게 끊어내 주는 걸 바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딴 양아치 역할이야 못해줄 것도 없다지만. 마지막 선물쯤으로 여기고 기꺼이 해준다 내가. 막 그런 마음을 먹었던 참이었다.
꽉 다물려 닫혀 있던 연습실 문이 벌커덕 열리던 건 마침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열린 문 새로 바퀴 달린 캐리어 달달달 끄집고서 들어선 건 다름 아닌 핑크색 긴 생머리 그녀. 상상조차도 싫은 성한빈의 어린 연인. 갑자기 저 여자가 여긴 왜. 미처 의아해 할 겨를도 없이 성한빈의 손이 제 잡은 손목을 팩 하니 놓는다. 그게 꼭 벼랑 끝으로 떠미는 손길 같아서 한없이 아뜩해진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맨바닥에 꼴아 박혀 산산조각이 난다. 그의 인생에서 오래토록 주연이길 바랐던 제 허황된 꿈이. 그 꿈에서 깨어나면 현실은 지극히 또렷해진다. 너무도 쉽게 버려졌다는 선명한 자각. 나는 그저 이 이야기의 맥거핀일 뿐이었음을. 그러니 아파할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저 열린 문으로 고요히 퇴장해 주는 게 제 마지막 임무였음에.
이런 끝을 바란 적은 없었다. 이렇게 뒤 끝 매캐하고 더러운 끝맺음은. 여지껏 제가 맡았던 기막힌 시나리오 그 어디에서도 이딴 식의 엔딩은 없었다고. 왜 항상 현실은 영화보다 더 잔혹할까. 누구도 장하오에게 아파할 자격을 주진 않았지만 장하오는 아팠다. 그것도 뒤지게 아팠다. 참아 보려 했는데 잘 안됐다. 울분이 울컥울컥 몇 번이고 치솟았다. 찔찔 울다가 가슴 치며 화도 냈다가 그것마저 답답해지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술을 들이 부었다. 그렇게 술에 쩌들면 자꾸만 또 착각을 했다. 이 들끓는 마음은 애초부터 주인이 없는 게 맞는데 꼭 돌봐줄 주인이 있는 양 찾아 헤맸다. 간절히 목을 빼고 기다렸다. 그러다 못견뎌내고서 휴대폰을 뒤졌다. 당장이라도 훼방을 놓고 죄 찢어 발겨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내가 안 되는 거라면 다른 누구도 안 돼. 못된 심보가 들쑥날쑥 솟았다. 그러다가도 정신이 화뜩 들었다. 내가 뭔데 널 망쳐. 이제야 곱고 잔잔하게 빛을 내는 너인데. 감히 나까짓 풍파에 휩쓸려 못 쓰게 만들어 뭐하게. 그래봤자 나한텐 어차피 안 올 사람을. 미련이고 욕심이고 부질없으니 더 이상은 어리석게 떼쓰지 말자. 장하오는 겨우 다잡은 마음가짐으로 성한빈의 연락처를 과감히 삭제시켰다. 그러면서 또 찔금찔금 울었다. 그의 세계에 속하지 못한다는 게 이제야 죄 다 실감이 나서. 숱하게 비워지고 채워지는 연락처 목록일 뿐인데. 꼴랑 열한자리 숫자, 그거 하나 비워냈다고 마음에 더 큰 구멍이 나서.
숭덩 베어 나간 빈자리는 공허했다. 무엇으로든 메꾸지 않으면 제 근간마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장하오는 막연히 대외 활동부터 늘렸다. 바쁘다며 미뤄왔던 술 약속들을 하루걸러 하루 해치웠다. 무리에 한데 뒤섞여 부어라 마셔라 술독에 빠졌다. 그러다 보면 신경줄이 느슨해져 잠시나마 잊혀 지고는 했다. 그의 여자라던가 실연이라든가 그딴 저급한 현실이라면 모조리 싹 다. 허나 그건 찰나의 망각이었다. 고주망태가 되어 집 안으로 들어선 매 순간마다 모든 게 무너져 내렸으니 말이다. 이 망할 집구석에 성한빈을 괜히 들였던 바람에. 집 안 구석구석 그의 발 디뎌지고 손닿았던 흔적이 미처 걸러내지 못한 찌꺼기처럼 남아 저를 진저리나게 더럽혀댔다. 사무치는 외로움으로 덕지덕지 낭자하게. 그 흔적을 물리적으로 지워낼 마땅한 방도가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마지막 발악을 해보겠답시고 의미 없는 짓거리를 자행했다. 지울 수 없다면 도통 찾을 수도 없게 덮어버리면 되는 일 아니겠냐고. 그래서 그 때부턴 밖으로 나돌지 않고 집 안으로 사람들을 불러 들였다. 그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는 얼마지 않아 깨달았지만.
“야이씨 장하오 너!”
예고도 없이 집 안으로 쳐들어온 매니저가 침대에 널브러진 장하오의 등짝을 사정없이 갈궜을 때에, 바로 그 때에 말이다. 엊그제 벌인 술파티로 여즉 골골대던 장하오는 매니저의 매운 손 맛 탓에 화들짝 정신머리가 돌아왔다.
“아! 왜 때려? 우리 엄마한테도 안 맞고 자란 귀하신 옥체를?”
“야, 말 안 듣는 애들은 몽둥이가 약이거든?”
“형 돈 많아? 내 깽값 물어줄 자신 있음 계속 쳐보시등가.”
“그럼 내가 못 때릴 줄 알고?”
여보란 듯 아까 때린 등짝을 연거푸 내친다. 찰싹. 아! 찰싹. 아! 찰싹. 아! 왜 그러는데! 이유도 모르고서 후들겨 맞자니 좀 억울해서 소리를 빽 하니 질렀다. 그에 질세라 매니저의 걸은 욕지기가 귓전에 때려 박힌다.
“야 이 망할 놈의 새끼야!”
“아, 소리 지르지 마. 안 그래도 지금 머리 깨질 것 같다고.”
“너 이 새끼, 술 먹고 사고라도 쳤냐?”
“무슨 사고. 덕통 사고? 그게 또 내 특기긴 하지.”
“개소리 고만 하고 솔직히 불어. 이미 다 알고 왔으니까.”
“아니, 그니까, 뭐를.”
“너 고아람이랑 무슨 사이야?”
“고아람? 아람이가 뭐.”
“진짜 사겨? 오빠 동생 사이라고 그~렇게 강조하더니만 다 연막이었냐? 하긴 남녀 사이에 오빠 동생 그딴 거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응?”
“왜 이러는데, 갑자기.”
유도심문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에 벙찐 장하오는 느릿느릿 등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런 그의 눈앞으로 휴대폰 액정 화면이 대뜸 들이밀어진다.
“얌마, 너 고아람이랑 스캔들 터졌다고.”
“어?”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동료에서 연인으로. 장하오 하트 고아람. 비밀스러운 집 데이트 현장 포착.”
대문짝만한 헤드라인을 또박 또박 읽고 있는 매니저의 휴대폰을 헐레벌떡 뺏어 들었다. 자극적인 머리말 아래로 흐릿한 화질의 사진 두어장이 떡 하니 박혀 있다. 제 집 지하 주차장을 가로 질러 걷고 있는 노메이크업 상태의 고아람이라니. 미친 이거 누가 봐도 대스패치 감성이잖아.
“애 왜 너네 집 들락날락 거리는 건데?”
“아니 이거 아니야.”
“고아람 아니라고?”
“아니 고아람 맞는데 이거 아니야.”
“맞는데 아니라고? 뭔 소리야. 알아 듣게 얘기 안 해?”
“그냥 집에 친구들 불러서 논거야. 얘 말고도 여럿이 같이 있었어. 승원이랑 준영이랑 재우형님.”
재우 형이 고아람 소개시켜 달라길래 집으로 불러서 그냥 같이 술 마시고 논거야. 근데 이걸 팩트 체크도 없이 기사를 막 내버리네. 회사에 연락해서 정정 기사 내라고 해. 단호하게 못 박으니 매니저가 그제서야 가슴을 크게 쓸어내린다.
“그치? 역시 아닌 거지? 니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나는.”
“아니던데. 누구보다 믿는 것 같던데.”
“야, 내가 너 성한빈 좋아하는 거 뻔히 다 아는데 임마.”
“형.”
“아, 미안.”
입을 헙 다문 매니저가 저의 눈치를 슬그머니 살핀다. 흐리멍덩했던 눈매가 성한빈 얘기에 서늘한 날이 바짝 선다. 매니저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쪼르륵 내렸다. 존나 살벌했다. 숨 막혀서 더는 못 버티겠다. 나 나가서 회사에 보고 좀 하고 올게. 도망치듯 후다닥 침실을 떠났다. 어휴 지릴 뻔. 아주 성한빈 얘기만 나왔다 하면 망나니 칼춤 추듯 사람이 미쳐 돈단 말이지. 얼마나 씨게 차인거야, 저 새끼. 지가 뭐가 아쉬워서 저러냐고 대체.
매니저도 나름 열불이 났다. 어쩌다 보니 제 소속 배우의 애정전선에 낑겨서는 곤혹스러운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장하오 편을 들고 싶은 게 사실. 성한빈 저깟게 뭔데 감히 장하오를 차. 넙죽 받아줘도 모자를 판에. 물론 진짜 받아줬어도 큰일이긴 한데 무튼. 덕분에 모든 게 다 어그러진 것 같다. 다섯 번 남짓한 수업 스케줄을 장하오가 더는 못 하겠다 선언하는 바람에 그 뒷수습도 결국 다 제가 했다. 성한빈에게 전화 걸어 가타부타 설명 없이 트레이닝 중단 의사부터 밝혔다. 성한빈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한참을 침묵했다. 그 상황이 불편해진 매니저는 이만 끊겠다고 선을 그었고 그제야 성한빈 쪽에서 어렵사리 말문이 터졌다. 끽해봐야 장하오 안부나 묻는 게 전부였으면서.
배우님 잘 지내시죠...? 물어 오는 말에 매니저는 부러 더 오버해서 답했었다. 너무 너무 바쁘게 잘 지내고 있다고. 그 즈음의 장하오는 술독에 빠져 하루가 멀다 하고 성한빈을 부르짖었었지만 굳이 그딴 얘기해서 뭐할까 싶었다. 그런다고 한국 온 지 여친 내다 버리고서 장하오한테 갈 파렴치한 인물도 아니었기에. 그렇다면 차라리 잘된 것도 같았다. 어차피 안 될 거라면 이거야말로 장하오에겐 극약 처방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이야 지독하게 쓴 약이라지만 앓고 나면 결국은 개운하게 털고 일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래 그거라면 됐다. 덩달아 개운해진 매니저는 말끔한 목소리로 그동안 감사 했습니다 마지막 인사말을 전했다. 반면에 대답하는 성한빈의 목소리엔 기운이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네 저도 감사했다고... 촬영하다 어려운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라고... 배우님께 전해주세요... . 물론 아무런 말도 전해주진 않을 거지만 예의상 알겠다 답하고는 인정사정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말끝을 줄줄 늘리는 게 꼭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 것 같았지만 그거 뭐 어쩌라고. 장하오는 너 때문에 술만 퍼마시다 위장에 빵꾸가 났는데. 거기에 장하오 말을 빌리자면은, 지 가슴엔 그보다 더 큰 빵꾸가 났대잖냐.
아 진짜 생각할수록 염병이다. 매니저는 혀를 끌끌 차며 익숙하게 꿀물을 탔다. 컵 바닥에 눅진하게 눌러 붙은 꿀을 티스푼으로 휘적휘적 내저으며 기획실 김 실장에게 연락부터 넣었다. 네 김 실장님 방금 물어 봤는데요 얘네 그런 사이 아니래요. 집에 같이 있었던 건 맞는데 딴사람들도 있었대요. 그 범죄의 밤 같이 찍었던 배우들 있잖아요. 다 같이 모여서 술 한 잔 했다나봐요. 네. 네. 주의 시킬게요. 네. 알겠습니다. 할 말을 쉼 없이 읊고 나니 소속 배우 관리 좀 잘하란 면박을 준다. 드럽고 치사해서 때려 치고 싶지만 이 나이 먹고 받아주는 곳도 더는 없으니 꼬박 꼬박 머리 조아려 가며 바위 맞추는 수밖에 없다.
근데 전화를 끊고 보니 문득 억울해진다. 내가 뭘 잘못 했다고. 여지껏 장하오가 워낙에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통에 사고 한 번 친 적은 없지만. 나도 나름 장하오 똥고집 받아 주느라 얼마나 쌔가 빠졌었는데. 어디 그 뿐이랴. 이젠 남자한테 삽질하다 차인 것까지 눈치껏 돌봐줘야 한다고. 아 화딱지 나. 이게 다 결국엔 성한빈 때문이다. 책임져 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눈웃음은 살살 치고 웃통을 훌러덩 훌러덩 벗어 재껴서는 사나이 가슴에 불을 지피느냐고. 모든 잘잘못을 애꿎은 성한빈에게로 돌렸다. 이미 다 끝난 일이라지만 자꾸만 그를 끌어다 놓는 건 장하오가 여전히 아무것도 끝맺지 못해서이다. 장하오의 눈 안에서 여즉 들끓는 열망이나 미련 따위를 볼 때면 저 또한 막막해졌다. 혹여 평생을 저러고 살까 싶어서. 설마 설마 하면서도 장하오의 방황하는 모습은 난생 처음이라 더욱이 우려가 됐다. 그냥 이 김에 차라리 성한빈이 결혼이라도 해버렸음 하고 바랄 정도로. 아주 동네방네 떠들썩하게 장가 들어서 장하오가 감히 엄두도 못 내게 되면 더 좋고. 그래서 근래엔 틈날 때마다 연예계 뉴스를 뒤져 보는 게 하루 일과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휘청대는 장하오의 일상이 어느덧 저에게도 번져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런 건 딱 질색인데 진짜. 누구보다 가늘고 길게 버티고 싶었던 매니저의 꿈은 오늘도 한 뼘 한 뼘 멀어져 가고만 있었다.
스캔들 정정 기사는 정오가 되자마자 빠르게 올라갔다. 그냥 친한 동료 사이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땅땅 못을 박았다. 어차피 믿을 사람은 믿고 말 사람은 마는 거라 당분간은 어떤 식으로든 대중들 입방아에 신나게 오르내릴 것이었다. 댓글창은 엉망으로 얼룩졌고 기획사로는 문의 전화만 수십 통이 쏟아졌다. 빡친 박 대표는 장하오에게 근신 처분을 내렸다. 영화 촬영 전까지 얌전히 집에 처박혀 있으라며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조신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토 안 달고 착하게 굴면 대표님은 얼마지 않아 금세 화를 푸는 타입이라 다루기가 대체로 쉬웠다. 그래서 전번에 재계약도 한 거지만. 재계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스캔들이 터진 건 좀 유감이라 당분간 대표님 말 잘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히키코모리마냥 집 안에만 콕 박혀 있으니 하루하루가 한산하게 흘러갔다. 이따금씩 저를 감시하려 들렀다 가는 매니저라든지, 열애설의 진위를 물으려 연락을 걸어오는 동료 연예인들만 뺀다면은 더 없이 무탈하게 지나가는 하루. 장하오는 그 하루의 대부분을 대본 암기에 썼다. 대사야 이미 습득하고도 남았다지만 그것 말곤 딱히 집중할 게 없어서 그랬다. 멍 때리고 있어 봐야 아픈 기억들만 쏟아질 게 뻔해서 뭐든 해야만 했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대본을 파고파고 또 파다 보면 어느덧 해가 꼴딱 넘어갔다. 그러면 단백질 쉐이크 한 잔으로 저녁을 대충 떼우고선 오피스텔 단지 안의 헬스장을 이용했다. 무중력 트레드밀을 무지막지하게 뛰었다. 볼이 헬쓱하게 패였다. 안 그래도 날 선 턱 언저리가 더 샤프하게 깎여 내렸다. 역시 맘고생 다이어트만한 게 없네. 비록 대차게 까였지만 미친 미모를 득템했다. 이게 득인지 실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입 안이 쓰디 쓴 걸 보면 여전히 성한빈보다 유의미한 게 없단 건 잘 알겠다. 깨닫고 싶지 않았던 현실에 다시금 속이 바싹 탄다. 습관처럼 술이라도 들이 붓고 싶었지만 더 이상의 궁상 짓은 하등 쓸모가 없기에 깡생수나 콸콸 들이켰다.
얼만큼의 시간을 더 낭비해야만 초연해질 수 있을는지 감이 안 온다. 티끌만큼의 희망이라면야 이제 영화 크랭크인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 딱 그거 하나였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삐 살자고. 혹독하게 뛰고 뒹굴고 구르다 보면 열병은 사그라들 것이라고. 내 짓무른 사랑은 시간의 힘을 버텨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자기 암시를 굳건히 내걸며 벤치 프레스 위로 덜렁 누웠다. 아무래도 힘을 덜 써서 자꾸 허튼 생각이 드나 보다 싶어서. 아무것도 끌어다 쓰지 못할 정도로 체력을 아주 바닥내 버리면 좀 더 낫지 않을까 해서.
묵직한 바벨 봉을 꽉 붙들어 쥐었다. 흡 하는 소리와 함께 복부에 땅땅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때 마침 머리맡에 얹어 두었던 휴대폰이 웅웅 진동했다. 들어 올리려던 바벨을 제자리에 걸어 두고선 팔을 내뻗었다. 처음엔 그저 매니저가 저를 찾는 전화인 줄로만 알았다. 말도 없이 집을 비울 때면 어딜 가서 무얼 하는 거냐 꼬치꼬치 캐 묻고는 했으니까. 동선이야 늘상 불 보듯 뻔한 거 다 알면서도 꼭 그런단 말이지. 무슨 어설픈 스토커마냥. 장하오는 무심결에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터치하고선 뒤늦게야 액정 위로 떠오른 번호를 확인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저장된 매니저의 번호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낯선 번호인 것도 아니었고. 다만 생각지도 못한 번호의 등장에 눈앞이 샛노랗게 바래졌을 뿐.
성한빈. 성한빈이다. 분명 싹 다 지운 번호인데 왜 이렇게 막막할까. 또 먹먹할까. 다 버렸던 게 맞긴 했던가. 여전히 소실되지 못한 애정은 그의 연락 한 번에도 단박에 몸집을 키운다. 비대해진 연정에 짓눌린다.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토해내고 싶었다. 그리웠다고. 너무나 그리워서 사실은 나 당신 손에 죽을까 하고 몇 번이나 집 밖을 뛰쳐나갔었노라고.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여보세요? 그 한 마디에, 잊어야 한다는 사명감조차 결국엔 또 다시, 죄다 잊어버리고 말 것 같다고.
뭐라도,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콱 막혀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고요한 통화음 사이로 성한빈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여보세요? 배우님? 그제야 전화가 끊길까 싶어 마른침 삼켜가며 간신히 한마디 내어 뱉었다. 여보세요... 말끝이 잦아든다.
[배우님 저예요.]
“...네.”
[누군지 까먹은 건 아니죠?]
“까먹고는 싶죠.”
그게 죽을만치 힘든 사람한테 참 쉽게도 말하는 성한빈. 여전하네. 서운함이 밀려든다. 그리운 감정은 금세 매몰되고 미운 털이 자라나 박힌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성한빈을 상대론 여전히 휘청인다. 단순한 연락 하나가 장하오의 지척을 뒤흔든다. 흐르는 시간이 무색하게도 변함없이 휩쓸린다. 퍽도 찌질이같다. 그걸 성한빈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무슨 자존심인가 싶지만 구차해지기 싫었다. 너무도 확고하게 버려졌기 때문에 미련 한 자락 들이 밀 염치조차 없다.
장하오는 감정을 짓누르며 무심한 어조로 뇌까렸다. 무슨 일이에요. 고저 없는 목소리에 성한빈이 곧장 섭섭한 기색을 내비친다. 아 너무해요오. 대놓고 투정이 한 가득이다. 텐션이 예삿일이 아니길래 그제야 의아해진다. 무슨 연유로, 왜 갑자기, 먼저 연락을 했을까. 아쉬운 거 하나 없는 사람이 대체 왜? 내 온전치 못한 속까지 죄 헤집어 놓으려고? 그렇다고 하기엔 성한빈이 좀 이상하긴 했다. 진짜 너무해요, 너무해, 나쁜 사라암... 그딴 소리나 수화구 너머로 줄줄 흘려대고 있었으니. 왜 이럴까 진짜. 찌질한 것도 설마 전염이 되나. 장하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문득, 성한빈의 모습이 꼭 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술독에 빠져 하루하루를 흥청망청 버려야만 견뎌낼 수 있었던 요 근래의 저처럼. 그래서 물을 수 있는 거라곤 딱 한 가지뿐이었다.
“혹시 술 마셨어요?”
[네. 마셨어요. 왜요.]
“시비 걸려고 전화했나 보네.”
[아니요. 그건 아닌데요,]
“투정은 애인한테 가서 부려요. 아무래도 전화 잘 못 건 것 같은데.”
[잘 못 안 걸었거든요? 왜 배우님 맘대로 넘겨짚고 그래요?]
“그럼 뭐. 아직도 할 말이 남았어요, 우리 사이에?”
[왜, 왜 그렇게 싸가지 없이 말해요, 자꾸?]
“나 원래 이래요. 그동안 내숭 떤거고. 이젠 그럴 필요 없어진거고.”
[왜요? 왜 없어요? 새로 만든 애인이 그러지 말래요?]
“애인?”
[배우님 금사빠죠? 그쵸?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바로 갈아탈 수 있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성한빈이 씩씩거린다. 보아하니 고아람과의 열애설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모양인데. 믿고 말고야 자유라지만 왜 화를 내지. 여친 등장하자마자 붙잡고 있던 내 손 내팽개칠 땐 언제고. 그 순간부터 이미 당신은 나에게 그럴 자격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는데. 왜 이제 와서야 물고 빨던 사탕 뺏긴 아이처럼 떼를 쓰고 분풀이를 하려 들어. 이러다 희망에 부풀어 눈에 뵈는 거 없어지면 또 나만 떠밀 거면서. 맨바닥에 아무렇게나 꼴아 박혀 회생도 못하도록. 이젠 안속아. 그러니 니 자리로 돌아가.
“왜 못 그래요. 보통은 다들 그렇게 살아요. 사람 마음처럼 간사한 게 어디 있다고.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게 사람 마음인데, 나라고 뭐 다를까. 같잖은 수작이나 부리다 뻥 차인 당신한테까지 내가 의리 지킬 필요는 없잖아요.”
[배우님은 사랑이 장난이에요? 막 다 쉬워요?]
“그랬나 보죠.”
한때는 그랬다. 가벼운 장난까진 아니었대도 적당히 발 담궜다 처치 곤란해지면 언제든지 발을 뺐다. 미적지근한 온도의 감정은 늘상 적정선을 넘지 않았다. 난다 긴다는 사람 여럿을 만났었지만 그 누구도 침범하도록 두지를 않았다. 구태여 내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성한빈은 달랐다. 자꾸만 감정을 까뒤집게 만들었다. 드러난 속살은 바짝바짝 메말랐다. 성한빈이 턱 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스스로 길을 내고 그 곳으로 성한빈을 들여 최초의 발자국을 찍게 만들었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범람했다. 그러다 수몰할 지경이 되도록 방관했다. 잠겨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게 성한빈이라면 뭐든 괜찮았다. 맹목적이고 아둔했다. 버거웠다. 결코 가볍지도 쉽지도 않았다. 이런 게 사랑이 아닐 리가 없다. 모르지 않았다. 다만 애석하게도 성한빈에겐 꺼내 보일 수 없는 마음이 되었을 뿐.
[좀 진지할 순 없어요?]
“싫어요. 그건 너무 아프거든. 성한빈씨나 그 위대한 사랑 지키면서 잘 살아요.”
[잠깐만요.]
“이만 끊을게요.”
[끊지 마요.]
“또 왜.”
[그러니까 배우님 말은..., 그 열애설이 지금 다 사실이라는 거예요? 맞아요?]
“... .”
[아니라며? 다 아니라면서? 오빠 동생 사이라더니 그것도 다 구라예요?]
“...우리가 이걸로 입씨름해야 할 이유가 있어요?”
[이,있다면요?]
“있다고?”
[먼저 대답해.]
사겨요? 다그치는 말끝이 예민하고 날카롭다. 그게 좀 낯설어서 입을 다물고만 있었더니 성한빈은 다시금 대답을 종용한다. 사귀느냐고! 바람 난 애인 잡도리하듯 저를 몰아붙인다. 그게 불쾌했었어야 맞는 건데 장하오는 배알도 없이 심장이 저만치 내려앉았다. 이미 바닥나고 없다 여겼던 희망이 불씨를 타닥 일으키며 되살아났다. 맘 같아선 당장에라도 다 까발리고 싶기야 했다. 애인이고 자시고 그딴 거 다 모르겠고 내 맘속에 너 있다고. 아직까지 병신처럼 너만 가득하다고.
근데 호락호락 대답할 수 없었던 건 빌어먹을 현실 때문이다. 아니라고 해봤자 아무 소용없으니까. 당장 내 곁으론 못 올 사람이니까. 어차피 너의 엔딩은 내가 아닌 다른 이니까. 그러니 성한빈이 술김에 베푸는 희망고문 따위에 목 매달고 싶지 않았다. 실패한 사랑 앞에 장하오는 겁쟁이가 되었다. 대범함이란 온데 간데 없고 어떤 방어 태세를 갖춰야만 할지 가늠해 보고만 있다. 새 애인이 생겼다고 속일까, 우린 이제 아무 상관없는 사이이니 그냥 내 연애사에 신경 끄라고 내지를까,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전화를 확 끊고 차단이나 박아버릴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다소 극단적이었다. 근데 이딴 거 말고 딱히 다른 방도도 없었다. 그럼에도 썩 내키지를 않아 입술이나 짓씹고 있으면 성한빈은 저를 다시금 다그쳤다.
[왜 대답 안 해요. 맞다 아니다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아니면 나한텐 인제 대답할 가치도 없어요?]
“그래 보이나, 내가.”
[다 알아요. 나 밉잖아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저번에 그랬었잖아요.]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질투에 눈이 돌았고 태연자약한 성한빈이 미워서 감히 먼저 마지막을 입에 담았었다. 다 끝내는 마당에 상처 하나라도 주고 싶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단 말을 꾸역꾸역 내뱉었다. 그렇지만 장담하진 않았었다. 성한빈이 그 말을 마음에 담아 두었을 거라곤. 그저 나 아픈 것만 급급해서 되는 대로 휘두른 막말이었기에. 그야 한번쯤은 성한빈도 아팠으면 싶긴 했지만 그래 봤자 찰나일 줄 알았다. 내가 준 상처로 쓰라리다 곪아갈 성한빈이란 어쩐지 상상이 잘 안가서. 만약 그런 거라면 이젠 그만 아팠으면 한다. 역시나 그가 아픈 건 별로였다. 마음 같아선 드러난 상처에 약을 덧발라주고 새살 돋게 도닥여 주고도 싶었지만 그건 내 몫이 아니니까. 그저 가벼운 말로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것 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한빈씨,
“내가 한 말들은 그냥 마음에 담아 두지 마요. 그땐 내가 잠깐 미쳤어서,”
[어떻게 안담아 둬요? 이미 가슴에 대못 쾅쾅 박혔어요, 나는.]
“아이고.”
[배우님.]
“네.”
[배우님은... 아직도 내가 보기 싫어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요.]
“보기 싫은 게 아니라 보기 힘든 거지, 내가 한빈씨를.”
[힘들어요? 그래도, 그래도오..., 못 보는 게 더 힘들지 않아요? 나는 그렇던데. 나는 보고 싶은 거 참는 게 더 힘들었는데. 미국에 있는 혜윤이 못 보는 것 보다 배우님 못 보는 게 더 힘들어서 잠도 잘 못잤었는데. 그래서, 떳떳하고 싶어서 이젠 다 정리까지 했는데.]
이상하다. 이거 꿈인가. 아니 감히 꿈에서조차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말들을 성한빈이 자꾸만 쏟아낸다. 장하오는 제 허벅다리를 꾸득 꼬집어 봤다. 아. 아픈건가? 잘 모르겠다. 성한빈이 가감 없이 휘두른 취중 고백에 흠씬 두들겨 맞아 어찔어찔. 정신이 혼미하다. 그런 저를 상대로 성한빈은 마지막 직격타를 꽂아 넣는다. 잠시간 머뭇댔지만 아주 명확하게 진심을 담은 말로써.
[아직 내가 싫은 게 아니라면... 그러면... 그냥 지금 나한테 와주면 안돼요?]
“아... .”
[안되나? 배우님은 이제 영 나는 아니에요? 왜요? 고아람씨 때문에요? 근데 나는 상관없는데. 이번엔 내가 기다리면 되니깐요. 아니 솔직히 완전 상관없다는 건 아니긴 한데요. 그래도 좀, 조금만 나한테 빨리 와주면 그러면 나는 정말로 다 괜찮을 것 같은데... .]
종국엔 장하오를 끝끝내 함락시키고야 만다. 온 마음을 담은 고백에 애써 쌓은 담이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린다. 거기엔 너덜너덜 찢겨진 제가 있다. 애써 뒷달음질 치고 맨땅에 곤두박여도 늘상 되돌아가고야 마는 미련한 장하오가. 그에게 성한빈은 마치 관성과도 같아서 쉽사리 거스를 수가 없다. 그래. 인정한다. 나는 영영 너한테 목 매달 놈 밖에 안 되는 거라고. 순응을 하고 나면 금세 애가 닳는다. 앉은 자리에서 몸을 삽시간에 일으킨다. 목 끝까지 치고 오르는 사랑을 더 이상은 삼켜낼 수 없어 토해내듯 게운다.
“성한빈. 한빈씨. 한빈아아.”
이름 그 자체만으로도 애끓는 사랑임을 절절히 깨닫는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그제야 흐느끼는 소리가 낮게 깔린다. ...운다. 언제나 꿋꿋하던 성한빈이. 참담한 가족사 앞에서도 강단 있게 넘기고는 했던 그를. 장하오는 저로 하여금 성한빈을 끝끝내 울리고야 말았음에 서글프다가도 기꺼워진다. 마음이 쉽게도 전복된다. 너무나 값싸고 헤펐다. 성한빈에게 만큼은. 언제나 늘 그랬듯이. 불가항력으로 무조건의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다. 울지 마요, 내가 그리로 갈게. 어르고 달래며 소지품을 아무렇게나 챙겨 들었다. 마음이 시급했다. 거기다 대고서 성한빈은 애처럼 울며 저를 보챈다. 빨리 와아... . 울음기 섞여 푹 젖어든 목소리에 그나마 있던 인내심마저 내다 버린 채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니가 있는 그곳까지. 타는 열정으로 쉼 없이. 거기가 어디든 주저 없이. 기어이 나는 너의 곁으로.
#Epilogue
쌍천만 배우 흥행의 아이콘 장하오, 2년 연속 흑룡상을 품 안에
[컬처뉴스=황희민 기자] 배우 장하오가 올해도 어김없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지난 2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C홀에서 제 47회 흑룡영화상 시상식이 열렸다. 배우 김희수와 유현민의 사회로 영화인의 축제가 화려하게 개최되었다.
이 날 장하오는 임강후, 윤하진, 송준호, 허 민 등을 제치고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차지했다.
장하오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렇게 상을 받게 되어 감개가 무량하다”는 말로 첫 운을 띄웠다. 이어 “드림 업!을 함께 만들어 주신 오태규 감독님과 서해진 작가님, 폭염에 너무 고생들 많으셨던 스태프분들, 그리고 우리 배우님들... 이 상은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든 뜻 깊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 회식은 제가 쏠게요.”라며 여유롭게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또한 그는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언제나 멀리서나마 응원해 주시고 성원해 주시는 우리 가족들과 장호잇 여러분들, 너무너무 고마워요. 보답하기 위해 앞으로도 쉬지 않고 열연하는 배우가 될게요. 지켜봐 주세요.”라며 고마운 마음과 굳은 각오도 함께 전했다.
그런 그는 잠시 트로피를 내려다보다가 뜻밖의 수상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빙빙... 이 상 꼭 너한테 안겨 주겠다고 약속했었지. 너가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의 나 또한 없었을 거야. 우리 항상 농담처럼 반쪽반쪽 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니가 내 삶의 반이 맞는 것 같아. 그런 확신이 들어. 내 일부가 되어줘서 고마워. 유일한 이유로 남아줘서 고마워. 너 때문에 나는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그러니까 지금처럼 항상 내 곁에서 밝게만 빛나줘. 너무 애쓰지 말고 아프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너가 지닌 무거운 짐은 내가 기꺼이 함께 질께. 우리 그렇게 늘 같이 있자. 사랑해 빙빙. 이따 봐.”
매번 화제를 몰고 다니는 장하오의 명성에 걸맞게 이번 수상 소감 역시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누리꾼들은 ‘장하오 갑자기 급발진 뭐임?’, ‘빙빙? 그냥 장하오네 개 이름이라고 해줘’. ‘이런 식으로 공개연애하기 있기 없기’, ‘무슨 제2의 이종석마이유인 줄’, ‘나 오늘부터 빙빙으로 개명하려고’ 등의 놀란 반응들로 끊임없이 설전을 이어가는 중이다.
한편 영화 드림 업!은 남우주연상 외에도 여우조연상, 음악상, 최다관객상 등 총 4개 부문에서 수상을 하는 기염을 토하며 올해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시사되고 있다.
황희민 기자 nbzzang@c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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