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빈웹진: cinéclub

낭만 결말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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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 안녕하세요. 로완 감독님. 오늘 경기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 이대로라면 시즌 우승을 노려볼 수 있겠는데요. 이제 남은 세 경기를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 절대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경기가 모두 끝나고 컵을 들어 올리기 전까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팀은 언제나 우승을 향해 뛰고, 응원해주시는 팬들을 결코 실망하게 하지 않을 겁니다.

- 다른 선수를 영입할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현재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케일럽 선수로 인해 가장 강화가 필요한 포지션은 스트라이커라고 밝혔는데요.

> 긴밀하게 협의 중입니다. 이적시장에서 구단은 최선을 다할 예정입니다.

- 논의 중인 선수의 이름으로 (SUNG)이 거론되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답변을 얻을 수 있을까요?

> 그는 경기의 흐름을 읽을 줄 압니다. 언제나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천재적인 선수입니다. 그럼에도 개인의 성과가 아닌 팀을 우선으로 여기는 아주 헌신적이고요. 하지만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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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할머니와 쪽방촌에서 라면죽 하나 못 끓여 먹고 살던 늦된 열두살짜리. 그게 성한빈이었다.

 

구의원 연탄 봉사활동에 억지로 사진 찍혀 조간신문 일면을 장식한 후 관심이 폭등했다. 열두살 이목구비가 제 미래보다 뚜렷할 리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런 애는 잘 키워서 연예인 시켜야 돼. 여론을 의식한 구의원이 한빈에게 후원금을 보냈다.

 

그 돈으로 중학교 보내놓으니 축구에 폭발적인 재능을 보인 건 우연이었다. 엘리스 코스 하나 밟은 적 없는데 돈 몇 천 처바른 애들보다 잘했다. 배운 적 없는데 발끝이 공에만 닿으면 골대를 향했다. 연고지 없는 시골 팀이 성한빈 하나만으로 전국 대회 우승까지 갔다. 전체 경기 골 스코어가 46. 역대 최대였다.

 

한빈은 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방방 뛰었다. 관중석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펑펑 우는 바람에 애써 주먹을 꽉 쥐고 눈물은 꾹 참았다. 이 사연은 유튜브 콘텐츠로 제작되어 또 다시 한빈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얼굴 천재 축구 유망주. 성한빈의 타이틀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던 해엔 유학길에 올랐다. 외국계 기업 지원이라는데 한빈은 그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한 채였다. 할머니 홀로 두곤 안가겠다고 버티니 할머니가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손자 앞길 막는 노인네는 살아 무엇하냐는 말도 함께였다. 사흘도 못 넘겨 한빈은 두손 두발 다 들었다. 할머니 말대로 할 테니까 제발 밥 좀 먹어. ? 그날 밤은 서로 껴안고 눈물 펑펑 쏟았다. 출국 전까지 정치권 인사부터 협회장까지 죄다 몰려와서는 꽃다발 안겨주고 사진이나 팡팡 찍어댔다. 공항에서는 포토존 앞에 서서 미리 전해 받은 대본이나 읊었다. 멋진 축구선수가 돼서 국민들에게 꼭 보답하겠습니다.

 

독일 유소년 축구팀에 합류해 몇 달을 굴렀다. 동료들과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더듬더듬 영어로 질문하면 독일어로 대답이 돌아왔다.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고, 시차 적응이 더딘 몸은 매일 피곤했다. 한빈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갈 수 없었다. 혼자선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은 끊을 수 없었고, 한국에 간다고 해도 이젠 축구가 아닌 다른 일은 상상할 수도 없어서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공을 차는 것 뿐이다. 에이전트는 매일같이 한빈에게 속삭였다. 네 나라엔 너를 후원하는 사람들로 가득해. 그들은 너를 사랑해. 네가 아주 큰 성과를 거둘 거라고 생각해. 네가 축구의 역사를 바로 쓸 거라고 생각해. 믿을 수 없이 잔혹한 상황 속에서 한빈은 그 말에 현혹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꿈이 오직 축구라고 말이다. 어쩌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 안 통하면 어때? 언젠간 모두가 내게 말을 붙이기 위해 한국어를 연습해야 할 거다. 어린 성한빈은 이를 바득 갈았다.

 

 

 

 

 

 

낭만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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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대한민국 축구 레전드 성한빈, "인천국제공항 입국"

 

[부고] 성한빈(샤인 FC) 조모상

 

[단독] 시즌 중 입국 강행... 성한빈 선수 입국, 구단 측 "심경 이해... 배려 가능했다"

 

[현장포토] 성한빈, 수심 가득한 얼굴

 

[현장포토] 성한빈 입국, 아수라장이 된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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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빈이 한국에 돌아왔다. 그것도 시즌 중에.

 

부친이나 모친도 아닌 조모상으로 한국까지 온 건 꽤 파격적인 행보였다. 한국 입국은 대표팀 관련이 아니면 절대 하지 않는 한빈이기에 더욱 그랬다. 술은 무엇이거니, 친목도모 목적으로도 선수들과 사적 모임을 갖지 않는 걸로 유명하기에 한국 입국 때마다 늘 파파라치의 표적이 됐다. 그 마저도 쉬는 날에는 집에만 처박혀 나오질 않아 한빈의 집 앞에서 진 치는 일을 관둔 지 오래였지만 말이다.

 

공항에 몰린 인파를 가까스로 헤쳐나온 한빈은 정차되어 있던 차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차에 들러붙는 자신의 유니폼이나 플래시 세례를 애써 모른 척 한다. 차를 가로막은 인파 때문에 출발조차 쉽지 않다. 소란이 잠잠해지고 차가 고속도로를 타기 시작했을 때부터 대화가 시작된다.

 

"오느라 고생했어."

한빈은 제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떨군다.

"주원이형,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은 무슨. 지난 달에 봤잖아."

"그래도요."

 

강주원. 한빈이 유럽 리그에 입단한 이후로 계속 한국에서의 활동을 도와주고 있던 매니저다. 한빈에겐 경계를 풀 수 있는 사람 중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주원은 거의 7년 넘게 봐온 한빈의 마음은 아직도 쉽게 읽을 수 없다 생각했다. 윙윙대는 자동차 안의 소음이 작게 노래라도 트니 메워진다. 맥없이 흐르는 침묵을 참지 못한 주원이 먼저 입을 연다.

 

"어떻게 할까. 호텔에 짐부터 풀까?"

"아뇨. 가져온 것도 별로 없어요. 그리고 너무 늦게 왔는데... 빨리 가야죠."

"...야 인마. 너 안 늦었어. 이렇게 온 것만 해도, 아니다 됐다. 눈 좀 붙여. 50분 정도 걸린다."

"감사해요. ."

 

한빈은 눈을 감는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단 한 번도 익숙해진 적 없는 도시의 야경이 번쩍거렸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인데도 올 때마다 새로운 나라 같다. 한빈은 손가락을 접으며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과 외국에서 살았던 시간을 비교해봤다. 한국보다 외국에서 살았던 날들 카운트에 손가락이 더 많이 필요해질 때 즈음 눈을 감는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땐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성인 남성이 상주를 찬 채로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한빈아 너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큰아빠다. 한빈은 머리가 꼿꼿하게 서서 한번을 기울지 않았다. 자신의 등 뒤로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를 몰라서 그랬던 건 아니고. 그냥 좀 어이가 없었다. 익숙한 얼굴을 향해 두 번 절 할 때도 이상하게 눈물이 안 났다. 얇은 비닐 깔린 상에 앉아 육개장 퍼먹을 때, 진드기처럼 따라붙은 이름 모를 친척들이 떠드는 이야기에 체할 것 같아 깨닫는다. 지겨워서 그랬다. 한빈아아무리그래도널거둬주고키워준어른인데어떻게엄마가상속할재산이하나도없을수있니누나는좀빠져있어무슨낯으로애한테돈이야기를해너야말로엄마돈까먹은게몇인데양심이있어야지...머리검은짐승이라지만이건도리가아니지엄마아니너네할머니얼굴보기민망하지도않아?그니까우리가돈때문에이러는건아니고할머니앞으로두려고했던그돈니동생들위해쓸마음은없니한빈아나기억하지?네삼촌이야어렸을때자주봤잖아이정도야너한텐푼돈이지?네가아쉬울게뭐가있다고...어차피너는결혼생각도없을거고...미안하다이건실언이다한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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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성한빈(샤인 FC), 입국

댓글 82

 

시즌 중에? 여러모로 레전드다.

ㄴ 넌 똑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보자.

ㄴ 저 아세요? 왜 반말이신지.

 

성한빈 선수가 개인적인 일로 이런 적 있었나요? 처음인데 너무 비난하지 맙시다.

ㄴ 이제 두 경기 남았습니다. 매 경기가 아쉬운 상황에 문제 아닌가요?

ㄴ 성한빈 없으면 우승컵 못 드는 팀이 더 문제죠.

 

다음 경기 결장 예상도 적다는데 왜 벌써 싸우시는 건지... 카페 수준 왜이러나요ㅋㅋㅋ

ㄴ 컨디션 조절해야죠. 일정대로라면 복귀 후 다음 날 바로 경기인데 장시간 비행 감당 가능할까요?

ㄴ 성한빈 아겜 금메달 딴 해에도 바로 컵 들었는데요?

 

오래 보신 분들이면 다 알겠죠... 할머님이 성한빈 선수에겐 엄마이자 아빠 같은 분이십니다. 홀로 키우셨다고 알고 있어요.

ㄴ 그래도 프로답지 못했습니다.

ㄴ ㅋㅋ씨팔 진짜 인류애 좆되네 ㅋㅋㄷ사리분별이 안됨?

ㄴ 왜 갑자기 욕하시죠?;; 신고하겠습니다.

ㄴ 해~ 미친새끼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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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댓글 봐?"

 

장례식장 옆 흡연구역에 앉아있던 한빈이 고개를 든다. 주원이었다. 익숙하게 담배를 꺼내든 주원이 불을 붙이며 한빈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기자들도 죄다 돌아간 새벽 4시였다. 징글징글한 친척 사촌들만 장례식장 초입부터 발을 디디고 모여있었다. 한빈은 잠시 주원을 올려다보다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긴다.

 

"봐야죠."

"오늘 같은 날은 보지 마라. 좋은 말도 없을 텐데."

"어떻게 좋은 말만 들으면서 살아요."

"너도 참 너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주원이 바닥에 재를 터며 말한다.

 

"할머님이 진즉 정리해두셨더라."

"......"

"유언장 확인했지? 이제 너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그게 전부다. 다른 내용 없어."

"알아요."

"저 사람들 그냥 무시해도 된다는 거야. 걱정하지 마. 한 푼도 안 줘. 못 줘. 네 말대로 남기신 돈은 기부처 알아보고 있다."

"......"

"성한빈. 좀 웃으면서 살자. ?"

"그럴게요."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한빈은 뿌연 연기 사이로 건너편의 있는 얼굴을 바라본다. 조금만 있다 들어와. 저녁 공기는 차서 감기 걸린다. 그런 걱정 섞인 목소리를 듣다 보면 현실감이 불쑥 찾아든다. 대답 대신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면 주원은 어깨를 두어번 두드리더니 멀어진다. 한빈은 다시 혼자가 된다.

 

일정한 소음들 사이에 익숙한 언어가 섞여 있다. 한국이다. 한빈이 그토록 원했던 곳이다. 그럼 원하고 있던 걸 모두 안은 기분이어야 하는데 여러모로 더럽고 끈적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원하던 게 아닌 것처럼.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런 거겠지. 입안이 썼다. 한빈은 한 번도 펴본 적 없는 담배가 생각났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욕구는 뭐 때문일까. 이미 정답을 찾은 채로 한빈은 오랫동안 눈을 감았다 뜬다. 가로등 불빛에 먹혀버린 몇 안 되는 별들이 공중에서 번쩍이다 빛을 잃어간다. 한빈은 피곤함에 절인 머리를 잘게 흔든다. 그때였다.

 

"안녕."

이제는 낯설어진 목소리가 한빈을 흔든다.

 

고개를 든 곳엔 예상치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까만 정장. 축 내려앉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이 공허했다. 한참의 정적이 흐른다. 마주 닿은 시선이 끈질기게 이어지다 상대 쪽에서 먼저 명함을 꺼내 들며 끝이 난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네. 어떻게 할까. 소개부터 다시 해?"

명함을 건네는 바싹 깎은 손톱이 보인다.

"영화 만드는 장하오라고 합니다. 인사가 늦었네요."

 

어찌나 힘을 주고 있는 지 손끝이 울긋불긋했다. 한빈은 그 명함을 받아드는 대신 장하오를 올려다본다.

 

"어떻게 왔어."

"인사를 재미없게 하네."

"누가 반긴다고 여길 와.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어?"

"없던데. 그래서 시시했어. 할머님이 나온 거 알면 예전처럼 소금 뿌리면서 마중 나오실 것 같은데."

 

한빈은 다시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시시콜콜한 감정 낭비나 할 시간은 없으니까. 잠깐의 침묵 끝에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민망하게 멈춰있던 명함을 쥔 손이 천천히 내려간다.

 

"바쁠 텐데 와줘서 고마워."

"......"

"조심히 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 지 장하오는 대답이 없다. 한참 동안 마주했던 시선이 한빈이 고개를 돌리며 끝이 난다.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리는 한빈의 앞을 다급하게 막아선 장하오가 쫓기듯 말한다.

 

"해야 하는 말이 있어."

 

평소같으면 무시하고 지나쳤을 거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멈춰서고 마는 발을 원망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감각 자체가 아득했다. 장하오가 뱉는 말들에 얽히는 느낌이었다. 힘겹게 발을 떼자 따라붙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장하오는 끈질겼다.

 

"출국 전에 잠깐 시간 좀 내줘."

"여기서 뭐 하자는 건데."

"한빈아."

 

그때 장하오가 한빈의 팔목을 잡는다. 한빈은 장하오의 가슴을 세게 밀쳐냈다. 비틀대며 중심을 잡는 장하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자 목덜미가 뻐근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라 버틸 수가 없었다.

 

"내 이름!"

그렇다고 언성을 높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큰소리에 한빈은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는다. 주위를 두리번대며 숨을 고르자 턱 끝이 덜덜 떨렸다. 다행히 이곳까지 따라붙은 기자들은 없는 모양이다. 그제야 다음 말이 터져 나온다.

 

"부르지 마..."

눈가가 붉을 것이다. 한빈은 들키지 않기 위해 손바닥으로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린다. 숨이 벅찼다.

"주변에 기자들 많아. 여기서 이러지 말고 가."

 

한빈은 아랫입술을 감춰 물며 등을 돌린다. 느리게 뗐던 발걸음이 종국엔 달리고 있다. 장하오는 더 이상 한빈을 잡지 않는다. 우두커니 서서 한빈을 바라보고만 있을 거다.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베이스 항공은 여러분의 탑승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께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여행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형도 같이 가는 줄 몰랐어요."

 

좌석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한빈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는 주원을 보자마자 반가움에 화색이 돌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주원이 한빈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의자에 기대 선다.

 

"너 한국 넘어올 때 같이 오려면 가야지. 구단이랑 날짜도 잡아야 되고."

", 저는..."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린 한빈의 팔을 주원이 힘주어 붙잡으며 그런다.

"이번 프리시즌엔 계속 한국에 있는 게 어때?"

 

고민에 잠긴 듯한 한빈의 얼굴에 주원은 마른침을 삼킨다. 어쩌면 이번에야 말로 가능할 지 모른다. 한국에 가는 것을 기피하는 한빈이었다. 시즌 중에는 컨디션 조절, 프리시즌엔 투어 경기 전념, 국가대표로 뛰어야 하는 경기엔 최소한으로 일정을 조율한 후 다시 돌아갔으니까. 표정이 죄다 읽히는 한빈이다. 고민 중이라는 걸 주원이 모를 수가 없다. 조금 더 몰아세운다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긴다.

 

"한빈아."

"고민 중이었어요."

"야 너 나중에 나이 들어봐라. 내 나라만큼 애틋한 게 또 없어."

"...꼰대."

"나 꼰대 맞아. 인마."

 

예능도, 광고도, 화보도 일절 거절하는 한빈에 대한 파트너사의 불만이 컸다. 요즘 같은 시대에 축구선수가 축구만 잘하면 되나? 광고도 찍고 화보도 찍고 해야지. 시달릴 대로 시달린 주원은 안될 걸 알면서도 가장 절실한 한 가지에 또 다시 매달려보는 거다.

 

"그래도 다큐건은 다시 생각해봐."

"......"

"... 감독이 엎은 거 있잖아. 미안. 설명하려면 언급할 필요가 있어서. , 그거... 구단에선 다시 하고 싶어 해. 새 감독들로 두 파트. 에이전시랑 상의해서 팔로업 할 거고 넌 신경 쓸 거 하나 없어."

"저는..."

 

어차피 안 될 싸움이란 걸 알았던 주원은 미안함과 복잡함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는 한빈이 짠했다. 그냥 내가 윗선에 좀 깨지고 말지 뭐. 다행히 이건 또 익숙했다. 그냥 고민 조금만 해보라는 뜻이야. 주원은 얌전히 고개 끄덕이는 한빈의 머리칼을 흩트려 놓는다.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손을 타는 한빈을 보던 주원이 걸음을 옮긴다.

 

"나간다. 내려서 보자."

", 여기 아니에요?"

"돈이 어딨냐? 그래도 구단에서 티켓 제공해줬다."

"저한테 말씀하시지..."

"됐어. 이따 보자."

 

손님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 자리에 앉아 좌석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한빈은 짧게 손을 흔들다 눈을 감았다. 긴 비행 동안 택한 건 역시나 잠이었다. 지금 잠에 못 들면 도착 후 꽤 힘들 거다. 가뜩이나 시차 적응이 더딘 편이니까. 뒤척이며 편한 자세를 고르는데 어떤 자세도 편치 않았다. 이륙하면 이부자리 펴달라 하고 그때 잘까.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니 어수선했던 공항 내부와 달리 활주로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한빈은 장례식장에서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이 이제야 조금씩 생각난다.

 

할머니, 나 다시 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중얼댄 한빈이 창 위로 손을 얹었다. 땅과 멀어져 하늘과 가까워지는 동안 속으로 다음 말을 잇는다. 할머니가 너무 미워서 자주 찾아보지도 못했네. 나 진짜 나쁘지. 그래도 지금껏 약속 잘 지켰으니까 용서해주라. 그리고 미안해. 나 이제 그 약속 못 지킬 수도 있어. 진짜 미안해 할머니. 이건 용서해달라 못하겠다.

 

비행기가 고도에 접어들고 나서야 한빈은 체감한다. 비로소 완벽한 혼자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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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ㄹㅈㄷ성한빈 공항패션 (🔥)

댓글 253

 

얘가 누군데?

ㄴ 혹시 집에 티비 없어?

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 개꼽주네; 남돌 관심 없어요ㅋㅋ

ㄴ ㅅㅂ남돌이래 미치겟다

 

얜 가만보면 옷을 진짜 잘 입는 듯

ㄴ 누가 코디해준거겠지

ㄴ 알못아ㄲㅈ 성한빈 사복맞음

 

우승했으면 ㅠㅠ제발제발ㅈ젭알ㅈㅂ

ㄴ 성한빈 우승 못한 해가 있나?

ㄴ 있음.. 19-20

ㄴ ㅆㅂ말하지마 누가 왜냐고 물어보면 시작된다고

 

왜 못 들었는데?

ㄴ 나와버림

ㄴ 대답해주지마

ㄴ 몰라 못했나보지

ㄴ ㅈㄴ못해서

ㄴ 성한빈 컨디션 난조ㅇㅇ

 

멘탈이 약한가 보네 그럼 이번 우승도 어려운 거 아님?

ㄴ ㅁㅊ아 저주하냐 취소해 우승해야됨

 

검색해보니까 성한빈 들어오고 계속 우승이었는데 저때만 그랬네 왜? 뭔일있었음?

ㄴ 모르는척 맥이는듯

ㄴ ㅋㅋㅋㅋㅋ 걍 게이남친 들켜서 해외언론에 대문짝만하게 박제 되고 헤어져서 그렇다고 광고를 해라 그냥

?

? 미쳤나 댓글 지워

 

위에 답댓 뭐임? 찐임?

ㄴ 겠냐 먹금좀해

ㄴ ㅇㅇ찐

 

팩트임 구글에 검색 ㄱㄱ해봐 남친 중국인이었음

ㄴ 국제연애ㄷㄷㄷ

 

쉴드 애잔함 ㅋㅋ응 증거 아직 돌아다니죠? 조금 있다 펑함

(사진)

ㄴ 펑한다며씨발아..

ㄴ 삭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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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오와는 운명이었다.

 

한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운명이라는 단어 말고는 둘의 관계를 설명할 길이 없었으니까. 어느 길목의 커피숍 앞에서였다. 한빈은 그날 장하오를 처음 만났다.

 

"그렇게 대놓고 있으면 외국인인 티 나요."

 

테이크아웃 컵을 쥐고 있던 남자가 대뜸 한국어로 말을 건다. 아시아 사람인 건 확실한데, 한국인이라기엔 어색한 한국어 발음에 한빈은 의심부터 한다. 꽁꽁 싸맨 모습을 보고도 제 정체를 파악한 거면 자신을 모를 리 없을 거란 확신이 섰다. 음료를 들이키며 허공을 응시하는 장하오는 무료해 보였다. 자신에게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을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착각. 한빈은 경계심이 조금 허물어진 채로 대답한다.

 

"왜 한국어로 말 걸어요? 저 한국 사람 같아요?"

"아니에요?"

"아닌데요."

"알겠어요."

 

이 겨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길래 한국인인 줄. , 알았어요. 이내 영어로 대답하며 이어지는 쾌활한 웃음소리. 한빈은 그제야 아차 싶다. 완전 말려들었다. 제 손에 쥐어진 일회용 종이컵을 내려보다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어내린다. 한참의 침묵. 결국 한빈이 먼저 말을 건다.

 

"근데 이거 아메리카노 아니라 아이스틴데..."

"......"

"복숭아 맛..."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었다. 허리를 잔뜩 접어가며 소리 내 웃던 장하오는 대뜸 역까지 같이 걷자고 했다. 내가 어디로 가려는 줄 알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홀린 듯 따라 걷게 될 뿐이다.

그 사이 나누는 대화가 이상하리만치 잘 통해서, 아직 통성명도 안 한 낯선 외지인과 전화번호까지 교환하게 됐다고.

 

"뭐라고 저장할까요?"

"章昊. 장하오."

"외국인이시구나."

"여기선 그쪽도 외국인인데."

 

저 사실 축구 선수예요. 저 아세요?

성한빈 선수를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과장 없이 담담하게 대답하는 장하오에게 어떤 호감을 느꼈던가. 제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든 상관없을 만큼 한빈은 장하오를 사랑했다. 그건 장하오도 마찬가지였으니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고.

 

 

 

한빈은 장하오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장하오가 담아내는 영상들 까지도 말이다. 채도가 낮은 영상 속에 담기는 흑탄을 집어삼킨 듯한 사람들의 이야기. 사람의 본질을 해체해 민낯 그대로 다시 덕지덕지 붙여놓은 누더기 같은 이야기를 좋아했다. 한빈씨, 내가 처음 유럽에 왔을 때는요. 작은 연극을 했어요. 말이 연극이지 독백으로 이루어진 거리극이었어요. 영어가 서툰 동양인이니 어땠겠어요. 영상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예요.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서라도 들려주려고요. 지나온 길을 설명하는 장하오의 눈이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번쩍인다.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를 향한다. 기어코 영화 몇편을 영화제에 출품하고 나서야 입성할 수 있었던 에든버러에서 느꼈던 황홀경 같은 거. 그 모든 이야기 끝에 장하오는 묻는다.

 

"한빈씨는 그런 경험이 있나요?"

 

그럼 한빈은 끝나버린 제 계절을 받아들이는 꽃잎처럼 흩날리는 마음으로 말한다. 저도 당신과 같아요. 아무에게도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어요. 증명하고 싶었어요. 두 볼은 발갛고 손이 축축하게 젖는다. 남에게 자신을 투영할 수 있을 만큼 똑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니. 입술을 다섯 번쯤 맞대고 몸을 두 번쯤 섞었을 땐 서로의 호칭이 단순해졌다. 그때부터가 연애의 시작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서로의 도시를 오갔다. 세상이 녹음으로 물든 중국에서 여름을 보냈다. 아스팔트에 늘어진 느티나뭇잎이 한빈의 머리카락을 쓸어대며 바람에 나부끼면 장하오는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못했다. 방금 너무 예뻤어. 지금 좋은데. 가만히 있어 봐. 주문이 늘어갈 수록 한빈은 웃을 일이 늘어갔다. 펑펑 내리는 눈은 본 적 없단 장하오의 말이 신경 쓰여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엔 겨우 시간 내어 한국에서 함께 이틀을 보냈다. 강원도로 떠난 둘은 중무장에 가까운 복장을 하고 대관령 산맥을 올랐다. 쉼 없이 돌아가는 풍차 아래에 누워 제 얼굴에 프로펠러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때 장하오가 자신의 삶을 영화로 제작한다면 지금이 결말이어도 좋겠다 했던가. 나는 형만 사는 동안 계속 내 옆에 있어 준다면 결말이 아름답지 않대도 상관 없을 거 같아. 한빈의 말에 단호히 고개를 저은 장하오는 말한다. 아니, 내 결말은 아름다워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있어야 하고. 한빈은 결심과도 같은 그 말을 이뤄주고 싶었다. 확신하며 말한다. 꼭 그럴 거야. 우리의 결말은 아름다워야 하지. , 그렇고 말고.

 

그래서다. 모든 건 그런 욕망에서다.

아름다워야 하니까.

 

우리는 아름다워야 하니까. 언젠가부터 그런 마음이 둘 사이를 헤집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프게 기억되지 않을 만큼 간격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 그럼 누군가 물을지도 모른다. 항상 끝을 보고 사는 거야? 아니. 그런 마음과는 다르다. 우리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우리가 사랑이기 위해서는. 그래, 다른 경우를 예시로 들어보자.

 

꽃값이 천정부지로 솟는 국가에서 꽃 선물을 하루라도 거르면 세상이 멸망하는 것처럼 구는 장하오 부터다. 매일 밤 속삭이는 다정한 말들 때문일 지도 모르고. 불안함 같은 건 한빈의 사전에서 지우개로 벅벅 지워낼 요량인 것처럼 굴던 확신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곁에, 언제나 서로의 곁에, 언제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또 다시, 결국, 그리고 영원처럼.

 

그 모든 말들은 아름답게 기록될 것을 알아서다. 그래서 성한빈은 의심이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을 믿는다.

 

"사랑해."

". 나도 사랑해. 성한빈."

 

오만함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평생을 그 당연한 것이 용인되는 국가에 영원히 발 딛고 살 거라 믿어서 일지.

 

 

 

 

 

 

 

 

 

경기장 밖까지 따라붙는 파파라치를 간과한 건 문제가 맞았다. 보수적인 나라의 조간신문 메인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한 건 한빈의 열애설이었다. 상대는 장하오였다. 촬영 기술의 발달은 몇 키로 밖에서도 제 목덜미에 입술을 맞추고 있는 장하오의 뒷모습을 완벽한 화질로 찍어냈다. 저열한 말들로 꾸며낸 스캔들은 장하오와 성한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둘이 어떤 마음을 나누었는지 관심조차 없는 단 한 줄의 기사는 평안했던 삶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어떠한 대응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결국 끝을 향해 간다. 시작은 한빈의 할머니에게로 부터 온 전화였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난 네가 멀쩡한 여자랑 결혼해서 아이 둘 낳기 전까지는 눈 못 감는다. 네가 약속 안 하면 내일이라도 콱 죽어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 그런 아픈 말들. 장하오의 신상 정보와 대표 작품을 흩뿌리는 저렴한 언론들. 그런 거 전부 감당하기엔 한빈은 조금 어렸다. 그래서 이별이었다.

 

그건 여름의 끝자락에서 였다. 타워 브릿지의 강물이 죄다 얼어붙을 만큼 추웠다면 그때 그런 날씨였지 하고 덮어버릴 수라도 있었을까. 애석하게도 한빈의 코끝이 붉어진 이유는 슬픔을 참기 위함일 뿐이다. 지켜내야 하는 커리어. 안심을 주어야 하는 나의 가족. 단 한 가지만 버리면 얻을 수 있는 예전과 같은 평화가 찾아올 거다. 나는 더 이상 형을 사랑하지 않아. 한 번의 거짓말이면 될 일이었다.

 

"한빈이 지키고 싶은 것 중에 나는 없구나."

 

이별을 앞에 둔 장하오는 어쩐지 담담했다.

슬프다. , 엄청 많이... 한빈의 목도리를 다시 묶어주는 장하오의 담담한 목소리.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 봐 깊이 쓴 캡 모자와 목도리. 마스크. 덥수룩한 가발까지 쓴 자신의 애인이 밉지도 않은 지.

 

"그래도 괜찮아."

"......"

"우린 서로가 아니면 안되니까."

 

한빈에게 그날이 평생 잊지 못할 악몽이 될 거라고 저주하듯. 아름답고도 슬픈 얼굴이었다.

 

 

 

 

 

 

 

 

 

 

차고에 매끄럽게 멈추어 선 차 안. 장시간 비행으로 지친 한빈은 졸음운전을 하지 않은 스스로가 대견할 정도였다. 한빈은 작게 기지개를 켠다. 트레이닝은 내일모레부터 들어갈 거 같으니 내일은 푹 쉬어도 될 테다. 한빈은 차고 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섰다. 냉기가 맴도는 집 안은 어둡고 쓸쓸했다. 몇 년을 거주한 집인데도 언제나 낯선 곳에 표류한 것 같다. 정수기에서 미지근한 물을 따른 한빈이 주방 아일랜드 식탁에 기대어 선다. 통유리 너머 너른 마당과 높은 담장이 보인다. 한빈은 느리게 눈을 감는다.

 

"한빈, 마당에 팬지를 좀 심을까."

"관리하기 귀찮은데..."

"내가 하면 되지."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서.

 

"여기서 뭐 해."

"해가 좋아서. 돗자리 새로 샀는데 어때?"

"너무 화려해. 형이랑 안 어울려."

"그건 그래. 글자가 눈에 안 들어와."

"뭐 읽어?"

 

다정한 웃음소리도 함께다.

 

팔을 괴고 누워있는 장하오의 품에 안기는 장면이 끝없이 스친다. 장하오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책이 잔디 위를 구른다. 한빈, 나 몇 페이지까지 읽었는지 기억 안 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빈을 끌어안고 끝없이 웃는 장하오가 보인다.

 

한빈은 다시 머그잔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외투를 벗으며 드레스룸으로 향한다. 가벼운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은 한빈이 무선이어폰을 집어 든다. 지하 운동실보다는 찬바람을 맞으며 뛰는 러닝이 더 나을 거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현관을 나서자마자 자신이 내렸던 판단을 후회했다.

 

"초인종 누르면 안 나올 거 같아서 무작정 기다리려고 했는데."

"......"

"타이밍이 좋았네. 그치."

 

새까만 코트 안에 브랜드 로고가 크게 박힌 후드티를 입은 장하오다. 유명 패스트푸드점 종이 박스를 흔들어 보이며 장하오가 환하게 웃는다.

 

"오늘은 식단관리 하지 말고, 같이 저녁 식사 좀 해줘."

"......"

"나도 성한빈이랑 같은 비행기 탔는데, 그럼 밥 못 먹은 건 똑같을 거잖아."

"......"

"대답이 없네... 들어가도 돼? 이번에도 대답 없으면 그래도 된다는 말로 알게."

 

정말이지. 끈질기다.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해석한 장하오가 한빈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선다. 한빈은 현관 밖으로 몸을 내밀어 주변을 살핀다. 다행히 붙은 파파라치는 없는 거 같다. 한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장하오를 따라간다. 장하오는 마당 한 쪽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러지 마. 밤이 많이 늦었고,"

"오늘은 목소리도 못 들을 줄 알았는데."

 

고마워. 높게 쳐진 담장을 바라보고 있던 장하오가 고개를 돌려 한빈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온몸이 낱낱이 분해돼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느낌. 한빈은 저도 모르게 장하오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을 황급히 떼어냈다. 장하오는 붉게 달아오른 한빈의 귀를 잠깐 바라보다 여유롭게 말한다.

 

"얼굴 보니까 좋다. 더 잘생겨진 거 같아. 우리 한빈이는."

"장하오."

"왜에. 성한빈."

"나한테... 진짜 왜 이래."

"그야..."

 

한빈은 대답을 고르는 장하오를 가만히 기다렸지만 결국 둘러대기를 포기한 듯하다. 장하오가 한빈의 왼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며 느리게 입꼬리를 올린다.

 

"말 안 해. 너 이미 알고 있잖아."

 

장하오가 한빈의 앞에 한 걸음 더 다가서며 깊게 파인 티셔츠 위로 선명하게 그려진 타투를 바라본다. 한빈의 트레이닝 저지를 목 끝까지 잠그며 장하오는 지퍼를 쥔 손을 끌어당긴다. 한 뼘도 안될 거리로 가까워진 둘의 얼굴 사이로 장하오의 눈이 깨진 유리 전구처럼 빛난다.

 

"한빈아."

 

제발 내 이름 부르지 마. 그렇게 애원했던 게 무색해진다. 한빈은 이겨낼 힘이 없다. 그리워서 견딜 수 없던 목소리로 부르면...

 

"이사라도 가지 그랬어..."

 

장하오에게 닿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는 한빈의 몸이 덜덜 떨린다. 이길 자신이 없다. 결국 장하오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서로가 아니면 안된다는 말.

한빈은 무너지듯 장하오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그간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늘이 오기를 기다렸기에 가능했을 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며 제 허리를 감싸 안는 장하오에게 다급히 입을 맞댄다. 어지러이 얽히던 입술이 이내 한빈의 양 뺨을 부여잡는 장하오의 손에 의해 밀려난다.

 

"대답 대신이야? 마음에 들어."

"......"

"그래도 듣고 싶어. 보고 싶었다고 해."

"보고 싶었어..."

"사랑한다고도."

"사랑해..."

 

그럼 한빈은 홀린 듯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막을 새도 없이 터져 나온 눈물로 얼굴이 엉망일 거다. 그런 한빈의 얼굴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느리게 쓸어내린 장하오가 다시 입을 맞춰온다. 죄책감을 잔뜩 안고 나서야 장하오와 다시 입을 맞출 수 있다니. 끔찍한 전개 앞에서 한빈은 모든 생각을 멈춘다.

장하오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낮춘다. 새까만 장하오의 두 눈엔 한빈이 반사되지 않는다. 한빈은 장하오의 얼굴에 박힌 점을 가만 바라보다 혀를 쭉 내밀어 핥는다. 단맛이 났다.

 

"그날, 무슨 말 하려고 했어?"

"너한테 말 한 번 걸어보려고 수작 부린 거지."

 

한빈은 팔을 뻗어 장하오의 목덜미를 끌어당긴다. 맞닿은 입술을 가르고 한빈은 웅얼거린다. 말할 때마다 축축한 혀가 얽힌다.

 

"나 아직 사랑해?"

 

장하오는 대답 대신 웃음을 터트린다. 차가운 장하오의 손가락이 한빈의 머리카락 사이를 가르고, 움찔대는 한빈의 등허리를 느리게 쓸어내리던 장하오의 손이 내려가 허리를 끌어안는다. 가쁜 숨을 헐떡대며 자꾸만 제 가슴을 밀어내는 한빈에게 가까이 몸을 붙이며 장하오는 대답을 감춘다. 한빈은 장하오의 대답을 멋대로 상상해낸다. 대답은 아마 나와 같을 거라고.

 

나를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어? 나를 얼마나 버텨줄 수 있어? 사랑할 수록 시험하고 싶은 마음은 버텨온 경쟁 속에서 배운 열등 때문인지. 한빈은 계속해서 찍히는 물음표들에 다음을 기약한다. 오늘이 지나면 우리가 다시 연인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때 물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긴 밤 동안 장하오는 어떤 생각인 지 알지 못하고.

 

그러니까 이건...

 

 

 

 

 

 

 

 

 

 

 

 

- 현재 그라운드에 성한빈 선수가 넘어져 있는데요.

 

이건.

 

- 심판이 카드를 꺼내지 않았거든요. 아직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건 부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전부 내 잘못이다.

 

- 의료진이 투입됩니다. ... 상당히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데요. 교체 카드를 준비하는 샤인 입니다.

 

 

 

 

 

성한빈이 부상을 당했다.

 

새 시즌을 시작 후 첫 경기였다. 대체 불가능한 선수. 그런 키워드를 다 떼고 나서도 개인에게도 중요한 시즌이었다. 그러니 이런 일은 있어선 안됐는데.

다음 선발은 어림없었다. 치료를 위해 필요한 시간이 최소 석 달이었다. 그건 시즌 아웃이나 마찬가지고. 유일무이한 한빈의 존재는 포탄 같은 거다. 갖고 있을 땐 든든하지만 오발한다면 시작점부터 초토화되고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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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zzzzz

 

ㅅㅎㅂ 이번 시즌도 빠지는 거 확실한가

감독 인터뷰에서 쓸 생각 없다 못박은 거 같던데

돌아와도 벤치행 보임ㅠ 같포지션 영입도 둘이나 했더만

 

댓글 (721)

 

에바좀싸지마 안그래도 불안한데 마플 ㄴㄴ

ㄴ ㄹㅇ눈치뒤짐

 

ㅎㄹ안됑

 

아니 뭔 오피셜도 없고 국대평가전 명단도 계속 빠지고 이러다 은퇴 뜰까봐 무서움

 

이정도는 예의의 문제 아니냐 근황이라도 알려줘야지

ㄴ 돌빨듯이 지랄말랬지

ㄴ 응알못아 알려주는게 맞아ㅇㅇ모르면 싸물고 있어

 

좆같다 진짜 ㅋㅋㅋㅠ

 

팩트지 ㅋㅋ

ㄴ 나락간 니인생이 팩트겠지..

ㄴ ㅂㄷ대는거보니 그저 애잔

 

멘탈 터져서 제정신아니라는 목격담 진짠지 궁금

ㄴ 비행기에서 공황온썰? 그건 진짜임

ㄴ 와..

 

아 너무 아깝다 폼좋을 때

 

잠도 안자나 또 플타네

 

근데 중국은 갑자기 왜 간거임?

ㄴ 몰라

ㄴ ㅁㄹ

ㄴ 모르면 지나가.. 왜들 시비야

ㄴ 모르면 지나가ㅇㅈㄹ ㅋㅋ이래서 아방떠는 새끼들 혐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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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 처박혀 한빈은 창 너머를 깊게 바라본다. 파리하게 질린 입술이 죄다 갈라져 입을 열면 터져버릴 거다. 전부 지긋지긋하다. 이러다간 정말 미쳐버릴 지도 몰라. 한빈은 끊임없이 끼어드는 말들을 지워내느라 제 머리를 내려쳐야 했다. 그렇게 무릎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몰려드는 꽃바구니와 팬레터들로 시선을 옮긴다. 한빈은 중국어로 쓰인 편지는 분류하여 협탁 한쪽에 차곡차곡 쌓기를 반복했다. 형이 오면 읽어달라고 해야지... 그게 스무 장을 넘기고, 다 읽은 편지가 삼백 이십통을 넘길 때 즈음인가. 한빈은 휴대폰을 들었다. 절망을 가득 끌어안고 차마 답장하지 못한 메시지 위로 눈물을 흘린다. 숨 쉬는 게 버거웠다.

 

재활치료를 시작한 지 두 달 차. 그제야 한빈은 한 문장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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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봤는데

난 이제 네가 아니어도 될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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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오가 나를 버렸다.

 

 

 

 

 

 

 

 

복귀 불가. 한 시즌을 통째로 날려 보내야 한다는 최악의 소식에도 불구하고 장하오의 이름이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현실을 부정해봐도 제대로 엿먹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건 한빈이 통원 치료가 가능해진 후로도, 시즌 끝자락이 돼서야 겨우 트레이닝에 복귀했을 때도다.

 

재활은 성공적이었다. 복귀 가능 진단을 받고도 그라운드에 서지 못한 건 온전히 한빈의 탓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자꾸만 발이 굳었다. 처음으로 주전 경쟁에서 밀린 경기 날엔 라커룸에 앉아 스타디움의 직원이 마무리 청소를 위해 들어왔을 때까지 떠날 수 없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트레이닝 데이에 러닝 워밍업을 하던 한빈은 문득 굳은 듯 멈추어 선다. 자신이 대열을 이탈해도 일정한 속도로 뛰어가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빈은 그대로 트레이닝장을 나섰고, 돌아오지 않았다.

 

계속되는 결장. 구단 측에서는 완벽한 회복이 되지 않은 선수를 위한 결정이라며 보호 차원의 언론플레이를 계속했다. 그러나 성한빈이 주전 경쟁에서 밀려 자존심을 세운다든가, 상을 치르고 나서 정신건강이 온전치 않다든가 하는 수준 낮은 찌라시까진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한 때 전설이던 사람이 쉽게 잊힌다. 한빈의 자리를 메꾸기 위해 임대 왔던 선수의 기록이 좋다고 했던가. 정중앙에 리모컨이 꽂혀 박살이 난 텔레비전은 경기 결과를 알려줄 수 없다. 매일 아침 펴보던 조간신문은 문 앞에 그득히 쌓여 회수되기 일수였다. 그런데도 알고 싶지 않은 소식을 왜 이렇게 꾸역꾸역 들이밀어 질까. 팀의 승리. 그딴 관심 없는 걸 왜 생중계로 전해주는 건지. 심지어 맥주를 사기 위해 찾은 골목 어귀 작은 가게에서도. 가게 주인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 속에서 번쩍이는 제 구단의 로고를 봤을 때 한빈은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승전보를 알리고 있는 팀은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다. 어쩐지 울고 싶기도 하고.

 

나 아직 사랑해?

 

한빈은 그 물음에 놓이는 대답이 없었다는 것을 주량을 넘겨버린 채 거실 카펫 한 가운데 누워 떠올려낸다. 손목으로 눈을 가린 채 아이처럼 소리 내 울었다. , 제대로 성공했어. 복수하는 거 말이야. 근데 내가 이만큼 미웠어? 내가 숨도 못 쉴 만큼 힘들길 바랐어? 진창으로 파묻혀져도 좋을 만큼 미웠어? 정말? 목이 쉬어버려 우는 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을 즈음 한빈은 몸을 일으켜 제 발목을 내려다봤다. 눈두덩이에 고여있던 눈물이 빗물처럼 허벅지 위로 쏟아진다. 속눈썹 끝에 맺혀있던 마지막 눈물방울이 곤두박질칠 때 즈음 한빈은 기어코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다. 거짓말. 네가 나를 포기할 수 있을까. 나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내 최악을 견딜 수 있을까.

 

결국 한빈은 휴대폰을 든다. 수신인은 장하오다. 받든 아니든 상관없다. 이미 벼랑 끝에 선 한빈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당연히 받지 않을 거란 판단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메시지를 남겨두기 위해 해야 할 말을 고르던 한빈은 신호가 두어번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는 장하오 때문에 헛웃음이 터졌다. 한참동안 침묵이 이어진다. 장하오는 말이 없었다.

 

"장하오."

"......"

"나한테 복수가 하고 싶었던 거면..."

"......"

"그럼 성공이야. 축하해."

 

 

하지만 수화기 너머 장하오는 여전히 어떤 말도 없다. 이내 떨리는 숨소리만 낮게 이어질 뿐이다. 온몸의 피가 솟구치는 듯한 기이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는다. 순식간에 격양되는 감정을 진정할 수 없다. 장하오를 똑같이 진창으로 처박고 싶다가도 다시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복수에 성공했으니... 축하 선물을 줄게."

 

그리고 한빈은 그 두 가지를 한 번에 해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창문을 열자 집 앞 골목에 모여있던 파파라치들이 자신을 향해 카메라 렌즈를 치켜드는 게 보인다. 지금 장면은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 생중계 되고 있을 거다. 그거면 충분하다.

 

"형이 원하는 장면을 보여 줄게."

- 성한빈.

 

그제야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하하하하. 이 정도는 되어야 대답 하는구나. 한빈은 발을 허공으로 뻗어 창틀에 앉는다. 새된 비명소리가 곳곳에서 쏟아진다.

 

- 그만해.

", 아직 대답 안 했어."

- 너 이러는 거 하나도...

"대답이 먼저야."

 

우리는 얕은 사랑이었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지만 말이다. 구차해도 깊게 사랑하고 싶어 자꾸만 낭만을 부여했다. 얕은 물가 서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자신을 구원해줄 사람은 오직 장하오 뿐인 것처럼.

눈이 오던 한국. 꽉 막힌 고속도로를 피해 국도를 달리던 그날. 한빈은 조수석에 앉아 제 오른손을 잡고 있던 장하오의 동그란 머리를 떠올린다.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던 장하오... 노래 가사 군데군데 한빈의 이름을 끼워 넣어 개사하던 장하오가 그런다. 사랑해. 사랑해 성한빈. 그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듣고 싶었다.

 

- 성한빈 제발!

"그러니까 대답하라고!"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한빈은 웃는다. 장하오. 날 사랑하잖아. 내 추락을 바라면서도 추락한채 피 흘리는 내게 입을 맞추고 싶잖아.

 

한빈은 인파를 헤집으며 달려오는 장하오를 가만히 바라본다. 한빈을 향하고 있던 카메라 렌즈가 자신을 향해 돌아가고 있는 건 상관없는 듯 완전히 돌아버린 눈이다. 장하오는 대문이 부서질 만큼 세게 내려친다. 멍들 텐데... 그럼 손 아플 텐데.

손에 힘이 풀리고 들고 있던 휴대폰이 창틀 밖으로 낙하한다. 한빈은 미친 사람처럼 웃음이 샜다. , 알고 있지? 나 죽지 않을 거야. 우리의 결말은 아름다워야 하니까. 그러니 이건 우리가 결말을 정해놓은 채 처음부터 다시 쓰는 이야기야.

 

 

 

S#1. 창문

맨발로 창틀에 올라서는 한빈.

흩날리는 흰 커튼 사이로 한빈의 몸이 꺾인 나뭇가지처럼 흔들린다.

그 아래, 찢어진 주먹으로 대문을 내려치며 목놓아 우는 하오.

 

장하오           성한빈... 내가 잘못 했어.

                     , 네가 아니면...

 

한빈, 눈물에 젖은 얼굴을 잔뜩 구겨 웃는데 처연하고 아름답다.

대문을 내려치는 소리는 점차 잦아들고.

하오, 몸을 웅크려 엉엉 소리 내 운다.

 

성한빈(V.O)   장하오.

                     이딴 싸구려들이 우리 이야기를 담는 게 싫다면

                     확신처럼 돌아와.

                     나는 모든 걸 잃었고

                     되찾을 수 있는 건 이제 너 하나 뿐이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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