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빛방백
칠공일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작품,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0.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이 지경은 아니었을 것이란 말이다.
어느 추운 2월의 밤, 제작사 ‘오퍼아트’의 젊은 대표 지영 씨는 작고 초라한 사무실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며 팜플렛을 뒤적거렸다. 진짜, 진실로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이 지랄까지는 안 났을 텐데. 회사 경영에서 부정적인 생각만큼 쥐약인 것은 없지만 자신만 믿고 온 후배가 이직해버린 날만큼은 이곳을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천여 석이 넘어가는 대극장에는 발도 못 들이지만, 그래도 한국 연극계의 메카 대학로에서 연극과 뮤지컬을 올리던 제작사 오퍼아트. 퀴어베이팅, 노림수로 꽉 찬 자극적인 연출과 잘난 배우들로 작품을 올려대며 떼돈 벌던 시절도 있었다. 그것도 대머리 대표 새끼의 성범죄 및 횡령을 규탄하는 ‘덕후’들의 보이콧과 함께 옛말이 됐지만.
가라앉을 게 뻔한 곳에 여자 올려두고 침몰하길 지켜보는 게 취미인지, 하여간 대머리 깜빵행 이후 막중한 책임을 안고 아주 얼결에 대표 자리에 올라간 지영 씨는 좆된 회사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제 더는 대머리의 오퍼아트와 지영 씨의 오퍼아트는 같은 제작사였다고도 보기 어려울 만큼 말이다.
어려워진 경영으로 작품 판권을 팔아버리고, 학공 수준으로 돌아가 대본을 가리지도 않고 극을 받는 바람에 배우들은 오퍼아트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보이콧 당했고 대본, 연출 수준이 처참한 제작사에 문을 두드리는 이라곤 좋게 말하면 새싹, 나쁘게 말하면 발성도 잡히지 않은 애송이들뿐이었다. 그래도 지영 씨는 어떻게든 해볼 자신이 있었다. 정말 좋은 여성서사극을 많이 올려서 더 이상 그 범죄자 대머리 새끼랑 연관 없는 제작사로 다시 키워야지, 그리고 제작사 이름도 바꿔야지, 분명 그랬다.
근데 여기서 코로나가 왜 터지냐고!
공연 업계가 다 같이 좆됐어도 회복하는 제작사들은 차고 넘쳤지만 오퍼아트는 예외였다.
지영 씨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작품 두 개의 팜플렛을 빤히 내려 보았다. 하나는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삼은 ‘뮤지컬 입생로랑’인데 얼마 전 다른 제작사에 판권을 넘겼다. 대본이 너무 깜빵 간 대머리가 좋아할 법한 극이라서, 근데 문제는 이거 팔아서 준비한 극의 대본도 만만찮다는 거지.
[오늘의 위성]
문화체육부에서 문화예술인 양성 및 대중예술 확충 차원으로 대학로에 반년 정도 극 올리는 것을 지원해주는 사업에 오퍼아트의 연극 [오늘의 위성]이 선정됐다. 정말 진지하게 말하자면 대본이 하도 구려서 선정될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문체부에 SF 덕후라도 있는 모양인지, 하여튼.
그래서 ‘오늘의 위성’이 무슨 극이냐, 아무도 대본을 넣지 않는 오퍼아트에 들어온 좆구린 대본이었다. 혼자 사는 사회부적응의 여성 과학자 ‘혜진’의 옥탑방에 불시착한 ‘외계인’의 기묘한 동거 이야기. 충분히 재밌게 풀어낼 수 있는 소재였지만 90분의 러닝타임 중 50분은 외계인 논문을 보는 듯한 ‘해설자’의 독백으로 꽉꽉 차 있었다. 사실 ‘혜진’이가 쓴 외계인 탐구일지가 아닐까? 이딴 게 연극 대본?
설상가상으로 로맨스라고 부르기도 뭐한 외계인과 혜진의 엔딩은 새드였다. 외계인 새끼가 혜진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달라고 부탁한 주제에 지 혼자 말없이 튀어버렸거든……. 심지어 외계인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늦게나마 알아낸 혜진이가 복수를 다짐하며 우는 게 엔딩이거든…….
이딴 게 문체부 지원 연극?
그래, 스토리는 둘째 치고. 지영 씨는 피곤한 얼굴로 마우스를 달칵이며 인터파크 예매창을 열었다. 주인공 ‘혜진’ 역의 배우 ‘하민영’은 중앙대 연영과 출신으로 대학로에서 10년을 활동했고, 가장 많은 대사량을 가진 ‘해설자’역의 배우 장윤철은 독립영화로 이름 좀 날리던 한예종 연극원 출신이니까. 이런 대단한 배우들이 오퍼아트에, 그것도 말 같지도 않은 대본을 보고도 온 건 오직 문체부 지원 연극이라는 타이틀 때문이었다.
그럼 주인공은?
[외계인 역 ‘성한빈’]
사실 외계인 역에 몰린 지원자도 좀 있었지만 이 배우는 지영 씨가 넣은 배우였다. 얼마 전에 판권을 넘긴 ‘뮤지컬 입생로랑’의 조연을 맡을 배우였는데 너무 열심히 해서……. 거기다가 노래도 오퍼아트에 문 두드리는 애들치고는 꽤 부르는 편이었고……. 너무 열심히 했는데 무산되었다는 얘기 듣고 눈물 뚝뚝 흘리는 게 안타까워서 우선 문체부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도 못 했던 ‘오늘의 위성’에 꽂아 넣었던 건데…….
[q***** : 아니 씨발 진짜 논문임? 애초에 이게 연극의 형식이 맞긴 함? 에효 그래도 그래 연극의 형식에 정해진 것은 없지만 외계인 새끼 습성 특성을 대체 왜 입으로 하나하나 보고해주시긔? 윤철 배우 연기에 영혼 없어진 지는 꽤 됐지만 그래도 한예종 어디 안 간다고 연기는 또 ㅅㅌㅊ여서 더 킹받았음 장윤철 목소리로 외계인 습성일지 듣는 게 연극이냐 씨발!!!
이걸 내가 3만원 주고 보다니 씨발
아니 쓰다보니 또 열받네 내가 욕을 안 할 수가 없잖아
그리고 제일 좆같은 건 주연 남배 연기였음 아니 하민영 배우도 장윤철 배우도 연기 좀 쳐서 더 돋보였음 잘생기긴 했는데 아니 연기 왤케 못함? 진짜 보면서 헛웃음 나옴 왹져가 아무리 감정 못 느낀다고 해도 그렇지 진짜 장난 하냐?]
“…….”
[s***** : 성한빈? 얘 연기 존나 못하는데 오퍼아트 이게 맞습니까?]
솔직히 성한빈이 저렇게까지 연기를 못할 줄은 몰랐던 게, 지영 씨의 실수.
지영 씨는 착잡한 마음으로 예매창을 끄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빈 씨…….
노래 꽤 부르길래 연기도 좀 하는 줄 알았죠…….
1.
느릿하게 눈발이 흩날리는 2월 중순의 정오. ‘오늘의 위성’ 주인공 ‘외계인’ 역의 한빈은 좁고 낡은 분장실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무도 없는 분장실 구석에 잘 개어놓은 롱패딩과 흰 티, 연청바지. 한빈은 눈을 끔뻑이며 너덜너덜한 자신의 대본을 내려 본다. 연기라도 못하니 대본 분석이라도 제대로 해서 모든 연기를 계산 하에 해내고야 말겠다는 깊은 의지의 흔적이었다.
성한빈은 누구인가?
한빈은 중학교 2학년 때 <지킬앤하이드>를 관람한 이후 배우의 꿈을 꾸던 청년이다. 연기를 배우며 성한빈은 뮤지컬이든, 연극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오직 ‘연기’만이 그가 지향하는 최고의 이상향이라고 굳게 믿어오곤 했다. 텍스트마저 파먹을 만큼 분석해낸 연기는 누군가의 삶을 표방하고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기도 하니까. 마치 그날 보았던 ‘결혼식 장면’에서, 순간 하이드에서 지킬로 돌아오던 그 배우의 연기를 보고 한빈이 받았던 충격처럼…….
하여간 그 운명적인 관극 이후 기적 같은 몸무게 감량은 6개월 후. 예고 진학은 1년 후. 한예종 연극원이나 중앙대 연영과를 그리며 ‘난 어떨 거라고 생각하세요?’ 같은 대사를 외우던 건 2년 후. 그리고 대체 연기 입시를 준비하며 무용 수업은 왜 하는지 이해 못하며 다리를 찢었던 건 3년 후. 연기학원에서 연기를 신들린 듯해야지 춤을 신들린 듯 추면 어떡하냐며 꼽먹고 울던 건 4년 후. 그리고 진짜로, 늘 줄 알았던 연기가 끝까지 안 늘어서 순전 무용 특기로 예비 받고 지잡대 추추합한 것이 5년 후의 일.
그리고 10년 후, 군대 가고 대학 졸업하고 분장실에 앉아있는, [오늘의 위성]의 인터파크 기대평을 가장한 불호 후기의 지분 8할을 자랑하는, 배우 성한빈.
그렇다. 배우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연기를 못하는 배우. 10년을 죽어라 대본 분석을 하고 연기를 분석하고 또 분석하고 연구하면 될 줄 알았다. 첫 학원에서 그의 표정 연기를 보던 선생님이 그러지 않았는가. 성한빈 너는 연기를 딱 봐도 못하고 답이 없으니까 그냥 열심히 연구하렴. 그럼 어떻게든 되겠지. 씨발,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요. 멍하니 파랗고 붉은 볼펜 자국들을 내려 보던 스물다섯의 한빈은 억울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썩 나쁜 감각이 아니지만 그의 경우는 말이 좀 달랐다. 왜냐면 성한빈은 지잡이어도 어쨌든 연영과 출신이고, 그의 직업은 배우니까!
분장실 문이 덜컥 열리고 ‘혜진’ 역의 하민영이 들어왔다. 한빈은 그를 민영 누나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민영은 성한빈을 썩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딘가 잔뜩 예민하고 늘 신경질적인 성격을 가진, 자신보다 거의 열 살은 더 많은 선배가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민영이 목을 푸는 소리를 들으며 한빈은 멍하니 생각했다.
오퍼아트 대표님이 잘 부른다고 인정해주신 노래, 그래, 원래 오퍼아트 극은 뮤지컬을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어쩌다가 일이 꼬여서 이 연극으로 오게 되었지. 일감 없어서 당장 다시 상하차 뛰게 생긴 상황에서 무대에 설 수 있음은 언제나 감사하지만, 한빈은 그나마 가진 능력치 중 상대적으로 낫다고 할 수 있는 노래마저 부르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노래? 일반인 중에서는 당연히 잘하고, 아이돌 연습생 중에서도 잘하는 편이었다. 타고난 음색이 있고 타고난 음역대가 높았다. 그런데 뮤지컬을 하기에는 성량이 너무 작았다. 성대가 제대로 열리지 않는 편인지라 벨팅은 어림도 없었고, 공명도 제대로 안 되기 일쑤여서 학원에서 음색 믿고 생목으로 부를 거면 연습생이나 하라고 꼽이나 먹었었지……. 한빈은 분장실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음계를 들으며 시무룩하게 손만 꼼지락댔다. 8년 넘게 이어지던 피나는 노력 끝에 이젠 나름 강한 진성을 뽑아낼 수도 있고 오퍼아트 대표님도 인정하셨지만 성한빈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민영 누나 같은 성량이 내 몸에서 나오려면 다시 태어나야 해, 대극장은 어림도 없다…….
그럼 또 성한빈은 고민에 빠지는 것이다. 와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장윤철ㅡ이하 윤철이 형도 분장실로 들어왔다. 민영 누나는 대학로에 있기엔 노래를 너무 잘 부르고, 윤철이 형은 대체 왜 여기서 오늘의 위성 같은 극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갈 만큼 연기를 잘하는데 나는 뭐지? 지금은 신인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둘러댈 수라도 있지만 연차가 찬다면, 민영 누나의 나이가 되어도 연기가 여전하다면?
군대 가기 전에 아이돌 기획사 문 두드려서 데뷔한 동기 승우가 승리자였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데 연기를 못한다니. 아이돌 할 거라던 놈을 비웃지 말고 같이 오디션장 구경이나 가볼 걸…….
“연극인데 뭐 그렇게까지 목을 푸냐.”
“루틴이거든, 오빠는 신경 꺼. 쟤처럼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잖아.”
“……저 한 시간 전부터 와 있었는데요.”
“영아, 후배한테 꼰대짓 하지 마.”
그렇지만 동기들은 하나둘 연기의 꿈을 접고 다른 일을 알아보고 있다.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은 보잘것없는 역할의 오디션에도 대여섯이 모여들어 도저히 설 곳도 없다는 한탄을 하곤 한다. 영화 드라마 시장은 점점 어려워져만 가고, 연극도 점점 줄어만 가고, 연기를 그만 두고 자리 잡은 선배들은 돈을 벌어서 좋다만 자꾸 제게 쏟아지던 조명이 그립다고 중얼거리곤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런 상황에서, 무려 대학로에서, 그것도 문체부가 지원하는 연극에서 반년 동안 주연을 맡아 무대를 설 수 있는데…….
복에 겨운 고민인가?
“나와, 마이크 테스트 해야지.”
“네, 네네, 형님.”
시무룩하게 앉아있던 성한빈은 윤철의 손짓에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래, 성실하게 하는 거야, 무대에 설 수 있는 모든 기회에 감사하며, 지금껏 그래왔듯. 연기의 모든 순간을 전부 계산하고 분석해서 내가 통제하는 거야. 그러면 돼.
캄캄하고 좁은 백스테이지에서 잘 따라오라며 손을 휘적이는 윤철의 손에 걸린 반지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2.
연극과 뮤지컬을 볼 때는 지켜야 하는 에티켓.
첫째, 몸을 수그려서 뒷사람 시야 방해하지 말기. 둘째, 핸드폰 반드시 무음, 혹은 전원을 꺼두기. 셋째, 떠들지 말기…….
그런데 공연 내내 떠드는 저 남자는 대체 뭘까?
성한빈은 윤철이 형의 ‘해설자’ 대사를 들으며 ‘뭔 소리야’, ‘이건 또 뭐야’ 같은 반응을 육성으로 내뱉는 관객의 시선을 피해 눈을 질끈 감았다. 미친놈인가? 공연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나는데, 한편으로는 장윤철의 ‘하나도 안 궁금한 외계인 습성 설명을 가장한 논문’ 파트에서 졸지 않고 리액션을 해준다는 것 자체가 신선해서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물론 아주 작은 소극장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한겨울임에도 땀이 흘러내릴 만큼 내리쬐는 조명을 받고 있으면 관객들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숙면 중인 세 쌍의 커플. ‘이게 뭔 극이야 씨발’ 표정으로 자신을 야려보는, 아마도 연극 덕후가 분명한 삼십대 여성. 손에 필기구와 메모장을 쥔 채 정신을 잡아보려 노력하지만 딱따구리가 되어버린, 기자로 추정되는 중년 남성. 그리고 1열 중앙에 앉아서 자신을 응시하는 미친 관크의 주인공. 제 또래로 추정되는 미남.
처음에는 배우인 줄 알았는데 배우라기에는 연극을 처음 보는 사람도 이런 충격적인 관극 매너를 보이지는 않을 테니 기각. 그렇다면 아이돌 연습생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아이돌? 그렇지만 아이돌이면 이런 행실을 보였다가는…….
‘집, 중, 안, 해?’
민영이 입을 뻐끔거리는 순간 성한빈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물싸대기를 맞은 듯한 기분에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르자 민영의 표정이 더욱 더 싸늘해졌다. 아, 이런. 한빈은 우울한 기분으로 꾸역꾸역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 난 우주에서 왔어.
“허!”
- 외계인이라는 소리지.
“허허!”
- 아주 멀리서 왔어.
“하하하!”
진짜 이건 아니지.
민영 누나, 솔직히 집중 깨져도 인정해주셔야 하는 거 아녜요?
하지만 어셔도 숙면 중인 이 노답 연극. 그 관객은 90분 내내 그랬다. 성한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모두가 잠에 빠져있지만 끝까지 자지 않은 상태로 연극을 지켜보았다. ‘혜진’이 ‘외계인’을 사랑했음을 나타내는 부분에서도, 말없이 외계인이 뛰쳐나간 뒤 머잖아 외계인이 고향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부분에서도.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외계인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하는 부분에서도……. 그는 당최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호탕한 웃음을 남기곤 했다.
“무서운데요, 저 사람.”
“공연하다 보면 전혀 그런 맥락이 아닌데 웃는 사람들 많아.”
“실패한 연기지,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너랑 네가 그 사람한테 설득 못 한 거니까.”
평소와 다르게 비아냥대지 않은 하민영이 먼저 분장실에 들어갔다. 괜히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한빈은 스텝들이 보고 있는 TV 앞에 멈춰선 민영에게 ‘저거 CF 성준영 아니냐, 누나도 혹시 넷플릭스 지옥탈출소나타 보시냐’같은 이야기나 하다가 분위기를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 뻘쭘해진 탓에 성준영의 새로 사귄 다섯 살 연하의 여배우 얘기를 꺼냈다가 분위기를 아예 북극으로 만들어버렸다. 아, 망할. 뭐 이렇게 일이 안 풀린담?
하여간 그날은 그것 말고도 운수가 영 아니었다. 싸늘해진 분장실을 뒤로 하고 백스테이지 뒤에서 오늘 관크 어쩌고 하는 스텝들의 말에 기웃거리다가, 괜히 퇴근하는 길에 수고하셨다고 인사하려고 알짱대다가…….
“근데 한빈 배우는 진짜 연기가 안 느네.”
“놀랍게도 그거 런 때보다 나아진 거임.”
같은 말이나 듣고 괜히, 얼굴이나 터질 만큼 붉어지질 않나.
그러나 어쩌겠는가? 성한빈도 아는 사실이었다. 연기가 더럽게 안 는다는 거, 연기를 못하는 거. 그거 다 사실인데 뭐 어쩔 거야. 이렇게 수치스러워한다고 실력이나 느나? 그런 이유로 실력이 늘었으면 나 충무로 명예의 전당에 있을 듯…….
성한빈은 발을 질질 끌며 50석 규모의 소극장을 털레털레 빠져나왔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것만 같은 작은 골목 귀퉁이의 극장. 한빈은 멍하니 한때의 꿈을 생각하며 슬퍼다가 새침하게 흐린 하늘을 올려보았다. 해도 구름도 보이지 않은 아주 밝은 회색의 하늘. 분명 어두컴컴한 날씨도 아닌데 왜 저렇게 하늘이 공허해 보이는지, 어쩌면 하얀색에 가까운 잿빛이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성한빈은 눈을 꾹꾹 짓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햇빛 한 줌 없는데도 왜 눈이 시큰거리는지. 아닌가, 너무 흐린 날씨 탓인가?
“……이봐.”
화끈거리는 눈가를 찬바람이 가라앉혀주길 바라며 하늘을 올려보고 있을까, 자신을 부르는 듯한 작은 목소리에 성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극장 옆으로 난 작은 골목, 건물 사이사이에 다닥다닥 지어진 극장들 사이로 난 좁고 어두운 골목. 그 앞, 채 켜지지도 않은 가로등에 아까 미친 관크를 일으켰던 남자가 비스듬히 서 있었다.
3.
미친놈은 한 가지만 하지 않는다.
연기학원을 다니던 시절, 대본 숙지가 덜 되었다는 말에 이틀 동안 희곡 다섯 편을 통암기 해왔던 형이 한예종 자퇴 후 쇼미더머니에 나갔을 때 학원 선생님이 하셨던 말이다. 성한빈은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다가, 왜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는지 고민하다가, 무슨 표정인지 도저히 가늠도 가지 않는 남자의 낯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표정이 없었다.
“안녕, 한번아.”
“……성, 한, 빈이에요.”
“그래 한번, 아니 한빈아.”
“왜 반말……. 혹시 저 아세요?”
“응.”
“어, 저는 그쪽 잘 모르는데, 혹시 어떻게…….”
“방금 ‘오늘의 위성’을 봤거든. 2시 공연, 현장예매 할인받아서 만 오천 원에 봤어.”
침묵은 길었고 순간 물꼬를 튼 대화라는 게 저랬다. 어딘가 어눌한 억양과 이어지는 그럴 듯한 개소리. 한빈은 잠시 더듬거리다가 겨우 말했다. 예?
……미친놈인가?
“부탁이 있어서 왔어.”
“잠시만, 그럼 그냥 아예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지금까진 단도직입적이지 않았나요?”
“난 우주에서 왔어.”
성한빈은 멍하니 ‘오늘의 위성’ 속 자신의 대사를 따라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까 저 남자가 실컷 비웃던 대사였다. 이 새끼 뭐지? 한빈은 공연을 끝내주는 관크로 조져놓은 남자의 면상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진짜 뭐지?
“외계……인이라는 소리지.”
- 외계인이라는 소리지.
스토커?
“하여간 아주 멀리서 왔다는 거야.”
- 아주 멀리서 왔어.
잠시만, 내 주제에 무슨 스토커?
네이버에 이름 쳐도 나오는 건 승리수학학원 내신 6.3, 수능에서 한 문제 틀린 기적의 정시파이터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23학번 합격생 성한빈 군의 학원 인터뷰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내 팬?
“연극이랑 연기 너무 잘 봤스어…….”
왜 내 팬이 있지.
내 팬이란 게 존재할 수 있긴 한 거야?
성한빈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별안간 중력을 잃고 떠다니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직전까지 슬슬 뻗쳐오르던 열과 의문은 전부 가시고 순간 중력을 잃는 것이다. 손끝이 저릿한 비현실감에 한빈은 멍청하게 눈만 끔뻑였다.
팬? 나한테 팬이 있다고? 얼굴이 벌게진 한빈은 배가 간질거리는 느낌에 몸을 움찔거렸다. 진짜로? 내 팬이야?
“이름이 뭐예요?”
누군가의 팬이었던 적은 있지만 팬이 생겨본 것은 또 처음이라서, 한빈은 가방을 뒤적여 볼펜을 찾았다. ‘연기는 최악이었지만 님의 얼굴은 끝내줬어요’ 같은 말들은 보통 인스타 DM으로나 받을 수 있는 말이었는데. 그러니까 활동을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도 않았고, 또 변변찮은 팬이 있을 만큼 실력이 좋지도 못한 성한빈은 이런 관심이 달가웠을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제 또래의 남자 팬이라니?
한빈은 바보가 아니었다. 어쩌면 저 무표정한 낯으로 거는 지독한 장난일 수도 있고, 거기다가 저 남자는 그의 공연을 망쳐놓기도 했지만. 성한빈은 그래도 모두가 입 모아 별로라고 말하는 자신의 공연을 끝까지 봐줬다는 사실에 쓸데없이 심장이 찌르르 떨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스텝들이 보면 습관성 관크를 저지른 관객이 한 말을 믿냐고 할 것 같긴 한데, 이런 작은 말에도 쿵쿵 뛰는, 무대를 향한 제 진심이 이젠 좀 우습기까지 한데.
퇴근길에 누군가 자신을 붙잡는 것도 처음이고, 팬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마주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10년 동안 외길 연기 인생을 걸어오며 그에게 연기 잘한다고 말해준 사람도 저 남자가 처음이었다. 씨발…….
일순간 눈앞으로 ‘하이드’ 분장을 한 배우의 모습이 스친다. 입시 시절부터 수백 번을 돌아다닌 오디션장, 낡은 연습실, 앙상블 데뷔날의 분장실, ‘오늘의 위성’ 첫공 전날 마지막 런스루가 차례로 스친다. 뭐야, 이거 주마등이야? 눈이 별안간 시큰거렸다. 괜히 울 것 같다.
“장하오야.”
그런데 그 울 것 같은 기분이 싹 가신 건,
“방금 지었어.”
“예?”
음, 아무래도 저 남자가 한 가지만 하는 미친놈이 아니라서.
성한빈은 눈물이 쏙 들어간 상태에서 펜을 꺼내다가 어정쩡하게 굳어버렸다.
뭐라구요? 그러자 자칭 ‘장하오’가, 공연장 건물 외벽에 붙어있던 ‘오늘의 위성’ 캐스팅보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까딱인다. 가장 맨 위에 걸려 있는 자신의 사진, 그리고 그 밑으로 장윤철, 하민영, 그리고 연극 제목 ‘오늘의 위성’. 갑자기 캐스팅 보드는 왜? 돌아보자 자칭 ‘장하오’가 어깨를 으쓱인다.
“장윤철의 장, 하민영의 하, 오늘의 위성의 오.”
“……미쳤네.”
“미쳤지?”
“진짜, 어, 제정신이 아니신 것 같아요.”
“장하오, 장하오, 음. 새로운 이름으로 아주 괜찮은 거야.”
“저기요, 진짜 뭐하시는 거예요?”
“…….”
“저 붙들고 왜 이런 말을 하시는 건데요?”
남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자칭 외계인, 장하오라는 미친놈과 외계인 역의 배우 성한빈 사이로 2월 중순의 칼바람이 휑하니 맴돌았다. 바람 소리가 어찌나 크고 소란스러운지. 사나운 바람에 결국 골목길 옆에 누군가 쌓아둔 재활용 쓰레기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쓰러지고 나서야, 그만큼의 긴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장하오’는 입을 연다.
“내가 영화를 만들 거야.”
“…….”
“네가 주연을 맡아줬으면 좋겠어.”
“…….”
“나는 외계인이고, 너는 외계인 역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새카만 눈이 날아와 정확히 그에게로 꽂혔다.
4.
그렇다.
그래.
성한빈은 ‘2시 낮공을 관크로 조진 남자’, ‘자칭 외계인’, ‘자칭 성한빈 팬’, ‘자칭 장하오’라는 신원불명 남성의 개뜬금 없는 영화 출연 제의에 바로 화답했다.
왜냐고?
“할게요.”
당장 15분짜리 단편 영화 주연도 대여섯이 오디션을 보는 마당인데?
“무조건 할게요.”
지금 매체 어려운데? 코로나 이후로 사정이 계속 복잡해지고 있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나 같은 노답 연기자한테 영화 출연의 기회가 올 것 같긴 해? 학연도 지연도 실력도 없는 나 같은 배우한테?
“30초 나와도 할게요.”
“아니, 30초 말고 주연으로. 좀 길 것 같아, 한 1시간 정도 영화로 생각하고 있는,”
“감사합니다 감독님,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미친놈의 호칭은 바로 감독님으로 바뀌었다. 진짜요, 감독님 저 30초짜리 cf에서 주연 여배우에게 캔 주워주는 ‘남자1’이어도 상관없어요. 저 진짜 1분짜리 단역 역할의 오디션도 계속 보고 그랬는데 늘 탈락했어요.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감독님이 자기를 외계인이라고 칭하는 신원불명의 미친놈이어도 사기만 아니면 돼요. 사기 아니죠?
누군가에게 출연 제의를, 그것도 영화 출연 제의는 처음 받아본 지라 잔뜩 흥분한 성한빈은 ‘장하오’가 지금 그 누구보다도 사기꾼 같다는 사실은 새카맣게 잊어버린 채 연신 허리를 꾸벅거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한빈은 민영이 연기 대상 받았냐고 비웃었을 것이 뻔할 만큼 굽실거렸다.
“혹시 영화과 학생이신가요?”
“아닌데.”
“아하, 그럼 혹시 포트폴리오 같은 거라도,”
“없어.”
“아하, 첫 영화세요?”
“그런 셈이지.”
“진짜 죄송한데 왜 만드시려는 거예요?”
문뜩 뱉어놓고 보니 입이 방정이다. 아, 녹음할걸. 성한빈은 계약서도 쓰지 않은 채 흥분해서 내뱉은 자신의 말에 후회하며 입을 아주 슬며시 가렸다. 근데 그 말에 답한다는 ‘장하오’의 말이라는 게.
“영화로 전할 편지가 있어.”
그리하여 ‘장하오’는 성한빈이 머릿속에서 다음과 같이 명명된다. ‘2시 낮공 미친 관크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요, ‘장 감독님’이라는 정의 밑에 사족이 달린다.
‘정신세계 독특함’
“나는 영화로 오해를 풀어야 해.”
……‘그냥 좀 많이 독특함’
스스로를 외계인이라고 칭하는 이상한 사람. 성한빈은 어딘가 좀 훼까닥 한 것 같은 젊은 예술가를 빤히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진지한 눈으로 영화로써 전할 말이 있다는 모습에 한빈은 각본이든 대본이든 메시지를 던질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예술가라는 연기학원 선생님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이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자 직접 영화를 만들려는 이 실천력. 괴짜 같은 모습과 어눌한 어투.
“…….”
아! 장 감독님은 중국에서 온 미친 예술가구나!
장하오가 떠들든 말든, 이미 흥분으로 정상적인 사고 회로가 마비된 성한빈은 반짝이는 눈으로 결론을 내렸다. 원래 그, 학공 같은 거 보러 다니다 보면 대본 쓰면서 자아 정체성을 우주로 확장하는 작가들이 있곤 했다. 뭐, 그런 거지. ‘우리는 모두 타인의 세계에 대해 무지하며, 서로에 대한 외계인이나 다름없다. 모두는 서로의 외계인이다.’ 그래, 생각하면 성한빈도 저런 내용을 담은 대본을 읽어봤던 것 같기도 하다. 장하오가 말했던 ‘외계인’이라는 것도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됐다.
중국은 저런 심오한 예술을 담기에는 너무 빡빡하다. 애초에 제재를 먹겠지. 그래서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 온 거야. 극장에서 그랬던 것도 외국인이라서 국내의 문화 에티켓을 잘 알지 못했던 것이고. 장하오 드립도 그냥 드립이었는데 혼자 진지해서 실패한 드립이었겠군? 하긴, 워낙 표정 변화가 없어서……. 문화맥락이 다르면 그럴 수 있지, 암암! 어휘가 유창하면서도 말투가 어눌한 거 생각하면 그냥 자기 세계가 매우 독특하고 이상한 미친 중국인 예술가인 듯…….
참고로 장하오에게는 아무것도 안 물어봤다. 전부 흥분한 성한빈 스스로 자의적으로 판단한 내용이다.
하여간 성한빈은 그렇게 ‘장하오’에 대한 오해가 전부 풀렸다고 제멋대로 생각하며 후련하게 말했다. 아이, 참, 사실대로 말씀하시지 말도 되게 심오하게 하시네. 한빈은 제 핸드폰을 가져가 연락처를 남기는 장하오를 보며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날이 서 있던 말투는 해제된 지 오래다.
“아이, 감사해요, 감독님. 일정 더 확정되시면 연락 주세요!”
“응.”
“타지에서 고생하시네요.”
웃으며 성한빈이 건넨 악수를 가만히 바라보던 장하오는 처음으로 눈썹을 까딱이다가, 그의 손가락을 조금 부담스러울 만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 팔짱을 꼈다. 악수할 마음이 없다는 의사에 한빈은 조금 뻘쭘해진 채 손을 거뒀다.
“…….”
무표정한 낯은 여전했다.
길어지는 침묵, 가만히 한빈의 눈을 바라보던 장하오는 별안간 ‘그럼 잘 들어가라’는 말과 함께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아, 뭐, 타지에서 고생 중이긴 하지, 내가. 한빈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흐린 하늘 아래에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장하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제 뺨을 한 대 쳐봤다.
“아프네?”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5시도 안됐는데 저편에서 밝은 잿빛 하늘을 뚫고 불그스름한 노을빛이 비쳤다. 귀를 에는 듯한 바람이 불고, 예매 하셨냐는 삐끼들 목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성한빈은 한 시간짜리 독립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
그래, 영화!
성한빈 영화 출연!
5.
“영화?”
장하오를 만나고 연락처를 교환한지 어언 일주일, 분장실 의자에 커다란 몸을 꾸겨 앉은 윤철이 젓가락으로 땡초 김밥을 먹으며 말했다. 돌아보지도 않고 묻는 목소리에 한빈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이는 범사와 달리 뭔가 흥미로워하는 듯한 목소리 같아서 그랬는지, 하여간.
윤철이 잠시 음, 하고 김밥을 삼키는 사이에 저편에서 민영이 말했다.
“너는 영화가 문제가 아니라 표정 연습부터 해. 눈물도 제대로 못 흘리잖아.”
날카로운 말에 성한빈은 찔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평소처럼 기운 없는 목소리지만 어딘가 악의가 느껴져 더욱 가슴께가 시려왔다. 한빈이 기가 팍 죽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자 은박지 사이로 김밥을 뒤적거리던 윤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윤철의 손가락에 걸린 반지와 은박지가 부딪히는 소리가 이상하게 소름 끼쳤다.
“영아, 너 그거 꼰대짓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후배들 연기에 말 얹지 말라니까.”
윤철은 모든 것을 평이한 어조로 말한다. 설령 그게 싸움이 날 법한 내용을 담고 있더라고 해도. 점심 메뉴 말하듯 단조롭고 고저 없는 목소리에 답지 않게 인상을 찌푸리던 민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너도 이제 그만해라, 귀에 딱 꽂히는 발성의 중저음. 성한빈은 눈치를 보다가 또 윤철의 발성을 부러워하며 쥐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30대 초반과 30대 후반과 20대 중반 성한빈. 특히 윤철 형은 열네 살 차이 나는 어려운 선배……. 여기서 성한빈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괜히 민영의 눈치를 보던 한빈이 조용히 입술을 우물거렸다. 저도 제가 못하는 거 너무 잘 알아요. 너무 잘 알아서 슬퍼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용기 같은 것은 아무래도 없다. 또 코가 시큰거리고 얼굴이 뜨거운데 윤철이 은박지를 구겼다. 이대로 자신의 연기 지적을 할 것 같았는데, 윤철은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무심히 묻는다.
“촬영은?”
“저, 전달 못 받았어요, 그냥 영화 나와 줄 수 있냐고 묻기만 해서요. 나중에 연락한다고 했어요.”
윤철이 왼손에 낀 반지가 눅눅한 분장실의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한때 저 손이 독립영화제 gv에서 마이크를 잡고 질의응답도 했었더랬지. 비록 지금은 무슨 일인지 영화 출연도 다 마다하시고 연극 중에서도 ‘오늘의 위성’같은 극이나 전전하시긴 하지만……. 그래도 한빈에게는 gv를 한다는 것 자체가 꿈같은 일이었다. 민영이 자신의 연기에 대해 지적할 때마다 윤철은 아예 후배 연기에 말을 얹지 말라고 말하지만 한빈은 가끔, 그가 자신의 연기에 대해 조언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느끼곤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많이 궁금해서 목끝에서도 간질거린다.
연기 어떻게 하면 늘어요? 형 제발요.
“일주일 째 연락이 없다며.”
“네에, 아직 연락은 없어요.”
“좀 더 기다리던가.”
“넵.”
“그리고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사람 진심 가지고 장난치는 애들이야 이 바닥에는 널렸거든.”
“…….”
“세상에서 가장 가지고 놀기 쉬운 게 간절한 마음이야. 무언가를 향한 간절한 마음은 자꾸 이성을 가리고 정신을 흐리게 만드니까, 간절하게 무언가를 욕망하는 사람만큼 쉬운 상대도 없지.”
“…….”
“예술도 사랑도 다 똑같아.”
그럼 다시 장하오라는 인물 밑으로 스멀스멀 새겨지는 ‘2시 낮공을 조진 미친 관크남’. 그날 너무 흥분해서 잘 인지를 못했었는데 돌이켜보면 ‘장하오’는 좀 많이 이상한 인물이긴 했다. 처음 만나서 다짜고짜 했던 말도 그렇고, 윤철의 말대로 사기꾼일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단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 너무 저자세로 나온 것 같기도 한데…….
성한빈은 자신이 너무 굽실거렸나 재고하며 울상을 짓다가, 그러다가 피크닉을 전부 다 마시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윤철을 다급히 붙잡았다.
“근데요 형님.”
“어.”
“혹시…… 연기는 어떻게 하면 늘까요?”
용기를 가지고 물어봤지만 생각 모를 새카만 눈만이 성한빈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 ‘장하오’도 딱 저런 눈이었는데. 윤철은 잠시 반지를 몇 번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건 윤철이 생각에 잠겼을 때 하는 습관이다. 이내 그는 맥아리 없이 픽 웃고는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는 발성 연습부터 다시 해라. 농담인지 조언인지 분간하지 못하던 한빈은 괜히 아, 아, 하며 목을 풀다가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내려 보았다.
한 달에 딱 오만 원 벌며 시작한 배우. 연영과 졸업 이후 맞닥뜨린 현실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화려한 전광판과 레드카펫과 수십 대의 카메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만 성한빈이, 돈도 못 벌고 실력도 없는 성한빈이 무대를 사랑하는 이유는 불안한 제 자아를 어딘가 맡기고 통제하는 것이 좋아서. 세상을 구축하고 그것을 온전히 통제하는 것이 좋아서. 실력이 없는 것이 가장 뼈아프고 수치스럽지만 그럼에도 관객과 상생하고 소통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커다란 특권이었다. 잘 해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없이 우스워질 만큼 말이다.
한빈은 재미없고 딱딱한 대사를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영혼 없이 읊는 윤철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무언가를 간절하게 바라던 적이 있었나? 간절하게 욕망하던 적 따위는 없었는데. 그저 좋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슬프지만 아닌 것이고. 제게 기회가 오면 감사한 것이고.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고. 그런 것도 사람들 눈에는 간절해 보일까? 그런 것도 욕망인가?
사인에 맞춰 동선 테이프를 따라 무대 위로 올라가면 더울 만큼 강한 불빛 아래로 뜨문뜨문 숙면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날 그때처럼 앞자리에는 강한 불빛 아래로 창백하고 표정 없는 낯이 환영처럼 앉아있을 뿐이다.
“…….”
너무 흐린 인상으로 앉아있어서 순간 환영으로 착각할 만큼 비현실적이었지만, 재차 확인하니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헛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진짜 장하오. 일주일 째 아무 연락이 없던 장하오 감독.
뚫어져라 1열 중앙을 바라보다가 그것이 헛것이 아님을 인지한 성한빈은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 분명 연락이 없었는데! 혹시나 사기꾼이었을까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영화 출연이 사기가 아니었다는 안도 때문인지, 한빈은 자꾸 들뜬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러다가 민영 누나가 진짜 살벌하게 노려봐서 다시 평정을 되찾았지만…….
- 네 이름은 진짜 말 안 해줄 건가?
- 없으니까, 의미는 없어.
- 너는 모든 게 의미가 없니?
- ‘우리’는 모든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 책이니 영화니 잘만 찾아보는 주제에.
‘오늘의 위성’은 온전히 ‘혜진’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성한빈이 맡은 외계인의 심리는 어디에도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으며 오직 대사로만 추측할 수 있다. 그리하여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표정의 변화도 없는 그 외계인을, 해설자의 대사에 따르면 그게 그가 온 행성의 특성이라던 그 외계인은 어쩌면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성한빈은 ‘외계인’을 사랑한다.
배우라면 자신의 캐릭터를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
대사는 유독 입안의 혀처럼 느릿하고 뭉근하게 흘러나왔다. 동시에 조금은 자연스럽다. 한빈은 마치 잔잔하게 일렁이는 바다에 몸을 맡긴 듯 편안하게 연기하다가, 그러다가 자신이 무대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정신을 붙잡았다. 분석한대로 통제한다.
그날 공연은 평소보다 덜 못했고, 민영이 외계인의 흔적을 더듬으며 하늘을 올려볼 때 분노하는 게 아니라 별안간 울어버린 점이 다르면 달랐겠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아니나 다를까 졸다가 깨어나서 이게 뭐냐는 눈으로 떨떠름하게 박수치는 사람들이 야속하고 수치스러웠지만, 그것 또한 자신의 문제이므로 한빈은 부끄러운 속을 애써 달래며 웃었다. 다만 장하오만은, 당최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무대 세트를 둘러보다가, 한참 성한빈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뒤늦게 박수칠 뿐이었다.
6.
“처음 봤을 때는 몰랐는데, 너 눈이 엄청 반짝거리네.”
쌩쌩 부는 2월의 칼바람에 장하오 감독의 목소리가 스몄다. 별안간 들려오는 뜬금없는 발언에 핫초코를 마시던 성한빈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장 감독을 응시한다. 공연 끝나고 뭐 좀 사주겠다며 핫초코를 쥐어 줘 놓고 이건 또 무슨 말이람, 얼굴이 확 뜨거워지는 게 느껴지는데 장하오가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얼굴은 왜 그렇게 빨개진 거야?”
“예, 예?”
“얼굴에서 피가 나는 거야?”
“이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당황해서 그런 거예요.”
“사람들은 당황하면 다 너처럼 얼굴이 그렇게 빨개져? 너 진짜 빨개.”
“아뇨, 그냥 제가 홍조가 심한 거예요.”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에도 장하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하다.
“홍조?”
“네에, 이렇게 얼굴에 불그스름하게 도는 게 홍조예요.”
그렇구나. 장하오가 어눌하게 말을 뭉개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조……. 그래 중국인이면 뜻을 모를 수도.
공연이 끝나고 난 후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있고, 화요일 평일 주말인 데다가 눈까지 펑펑 내려서 오가는 사람도 없는 공원 벤치. 장하오는 도저히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엉뚱한 질문을 해놓고는 한참을 침묵했다. 소복하게 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어지는 침묵. 한빈이 장 감독의 눈치를 보며 벌겋게 언 손가락을 매만지고 있는데, 그가 또 맥락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어디 살아?”
왜 묻는 거지?
“……일단 혜화는 아니구요, 여기 집값이 좀 비싼 게 아니라.”
“…….”
“어, 관악구 쪽 옥탑방에서 살아요. 투룸인데다가 옥탑방이라 좋다고 계약했는데 글쎄 워낙 경사진 곳에 있어서 오늘 같이 눈 오는 날이면 실족사 하기 좋아요. 제가 몇 달 전에 거기 올라가다가 넘어져서 새끼손가락이 부러졌거든요? 하하, 근데 다치면 안 되겠더라고요. 너무 불편했어요.”
분위기가 어색하니 말만 길어졌다. 왜 묻는 건지 의아한 것과 별개로 입은 마음대로 자유분방하게 눈치도 없이 나불댄다. 장하오의 표정은 역시나, 아까와 별 다를 바 없이 무감각해 보였다. 아니 너무 어색한데 뭐라고 말 좀 해주지, 어딘가 싸늘한 분위기에 성한빈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안으로 먹혀버리고 말았다.
장하오는 웅얼대다가 입을 아예 닫아버린 한빈을 새카만 눈으로 응시했다. 시원하게 트인 눈이 대체 왜 무섭냐고. 대체 왜 마주보면 숨이 잘 안 쉬어지냐고.
“그래서 사는 곳이 옥탑방, 아, 혜진이처럼?”
갑자기 튀어나온 ‘오늘의 위성’의 ‘혜진’. 너무나 익숙하고 친숙한 대본 속 이름에 꽤 오랫동안 긴장에 멎어있던 숨이 동시에 터져 나오고, 온몸에 빳빳하게 돋아있던 긴장이 일제히 풀리며 몸이 늘어진다. 성한빈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꼭 혜진이처럼요. 한빈은 흐물흐물해진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며 심장을 겨우 쓸어내렸다. 그런데 그것도 잠깐이지.
또 찾아온 지옥 같은 침묵.
아, 성한빈은 이제 소복하게 쌓이는 눈이 야속하기만 했다. 장 감독은 진짜 이상한 사람 같아. 하지만 보통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다 저 모양이라고 하긴 했어. 윤철이 형도 지난번에 넌저시 감독 중에 이상한 사람들 많다고 했잖아. 한빈은 스스로를 애써 달래보다가 문뜩 생각한다. 아니, 근데 영화 촬영 이야기 하려고 불러낸 거 아니었어? 대체 홍조니 옥탑방이니 하는 얘기는 왜 나온 걸까?
성한빈은 미약한 불만에 대뜸 물었다.
“근데요, 시놉시스가 있나요?”
“그게 뭐야.”
“예? 대본이요…….”
“아, 없어.”
“네?”
차라리 물어보지 말 걸 그랬나?
성한빈은 어딘가 속이 불편해지는 듯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간절한 마음 이용해 보려는 사람은 널렸다던 윤철이 형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리길래, 한빈은 애써 고개를 저으며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노력했다. 음, 그래, 장 감독은 홍상수 스타일이구나. 그렇게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새카만 눈을 응시하면 이상하게 납득이 가는 것이다. 그래, 장하오는 중국의 홍상수……
아니! 이건 아니지!
“아니, 대, 대략적인 내용도 없나요?”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건 네가 외계인으로 나오는 거야.”
외계인? 한빈은 갸웃대다가 물었다. 혹시 지금 이 연극 표절은 아니죠? 이런, 이번에도 입이 방정이었다. 쓸데없이 그 말은 또 왜 나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만 장하오는 또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표절이고 뭐고 할 만한 대본도 아니잖아.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는 어눌한 목소리에, 또 자신을 정확하게 응시하는 새카만 눈동자에 성한빈은 또다시 납득했다.
그래, ‘오늘의 위성’의 대본이 그 정도 아니라는 건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건 소재만 외계인이지 그냥 이상한 치정? 근데 치정이라기엔 너무 잔잔하고, 그냥 이과적인 전원일기 같긴 하다. 굳이 따지자면 탐구 보고 일지?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귀가 벌게지는데 장하오는 멀쩡했다. 이 사람은 이 바람에 귀도 안 벌게지네? 한빈이 신기한 눈으로 장하오를 훑어보는데 그가 문뜩 이쪽을 돌아보았다. 기분 나빠 보이지도, 기뻐보이지도, 슬퍼보이지도 않는 무감각한 표정…….
“맡고 있는 캐릭터 어때?”
“외계인이요?”
“그래, 네가 연기하는.”
성한빈은 눈을 끔뻑였다. 차가운 바람이 마로니에 공원을 관통하며 앙상한 가지들을 죄 흔들어두는데…….
“음, 그 친구는 냉철하죠.”
“…….”
“기본적으로 냉정한 성격이에요. 그, 외계종족의 특성이라는 것에서 기인한 것 같기도 해요. 감정 표현이 없고 오직 이성적이고 효율만 쫓는다는 그 종족 특성이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다른 종족네 집에서 얹혀 산 것만 봐도 그냥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느라 다른 건 고려도 안하는 게 보이잖아요.”
“…….”
“근데 제가 봤을 때 그 외계인은 자기 종족 사이에서 못 어울렸을 것 같기도 해요.”
“뭐?”
“그냥요, 대본 읽고 분석하다가 느낀 건데요, 해설자 독백에 나오는 종족 특성이랑 그 외계인이랑 좀 모순되는 부분이 있어요. 저의 외계인은, 그러니까 이성적인 것 밑에 쓸데없이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기질이 있어요. 자기도 아는지 모르는지, 하여간 그래서 사람 마음을 헷갈리게 만들거든요. 혜진이가 그래서 얘를 좋아하게 된 것 같고요.”
그러니까 이건 성한빈이 하는 연기의 방식이다.
표정도 제대로 못 쓰고 어딘가 어색하기만 한 성한빈이 대본을 붙들고 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분석. 오직 텍스트를 파헤치고 분해하고 조립하고 다시 분석해서 통제하는 일. 대본을 잡아먹을 기세로 달달 외우고 텍스트를 파먹다시피 하며 캐릭터를 분석하고, 그렇게 자신이 맡은 인물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통제하고 기어코 사랑하게 되는 일.
거꾸로 말하자면 연극 ‘오늘의 위성’의 ‘외계인’이라는 캐릭터는 이 세상에서 성한빈이 가장 잘 아는 셈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보다 더.
이건 어떤 시험일까? 영화를 준비하며 배우에게 건네는 시험, 혹은 일종의 오디션? 성한빈은 생각에 잠긴 장 감독의 옆모습을 흘겨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낯이지만 동시에 어딘가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내 그는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빈을 돌아본다. 제 앞에 선, ‘무표정이 아닌 장하오’는 그게 처음이었다.
“헷갈리게 한다고?”
“어, 그러니까 혜진이는 쉽게 말하면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충동적이고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가족도 없고, 아마 살아오면서 많이 외로웠을 거예요. 그런데 외계인 같은 존재가 눈앞에 뚝 떨어져서 친분을 쌓는다면 금방 좋아하게 되겠죠.”
“아.”
“그런 대사가 있잖아요, ‘떠날 때는 말을 해줘. 아무 말 없이 혼자 남겨지는 건 잔인한 일이야’. 그게 혜진이를 나타내는 대사가 아닐까요? 저는 연기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했어요.”
장하오는 진심으로 고민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 생각보다 연극을 잘 봤나 본데? 성한빈은 이 총체적 난국의 연극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봐주는 사람이 처음인지라 그저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마치 본 공연 이후 ‘관객과의 대화’라든지, 아니면 ‘GV’를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물론 성한빈은 그런 걸 해본 적도, 해볼 기회도 없었다. 오디션 가서 그에게 질문을 해주는 관계자가 있긴 했나? 키자니아에서 배우 체험이라도 한 꼬마처럼 들뜬 한빈은 장하오가 더 많은 질문을 해주길 기대하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게 설령 감독으로써 배우에게 묻는 매우 형식적인 질문일지라도 좋았을 것이다.
“그 외계인이 잘못한 걸까?”
오랜 시간의 침묵 끝에 장하오가 물어본 건 그게 다였다.
“……이 극에서 딱히 잘못한 인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
“그냥 서로가 바라보던 이상향이 달랐던 거죠. 외계인이 왜 떠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외계인은 집에 가고 싶었고 혜진은 사랑을 원했으니까요.”
“엔딩 이후에 혜진이가 외계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 것 같아?”
“근데 혜진이가 뭐, 마음에 묻어두고 살 성정은 아닌 것 같고요. 솔직히 제가 생각하는 ‘혜진’이는 외계인을 증오하며 어떻게든 떠벌리고 다니고 싶어 했을 것 같은데, 막상 오늘 민영 누나 노선을 보니까 그냥 슬퍼했을 것 같기도 하고…….”
에휴, 장하오가 커다란 한숨과 함께 머리칼을 벅벅 털었다. 그러더니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대체 제 답을 듣고 왜 저런 반응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착잡해 보이는 얼굴은 신기했다. 그냥 표정이 없는 사람 같았는데 이제 보니 아닌가?
성한빈은 어색함 속에서 손만 습관적으로 꿈지럭거리며 마로니에 공원에 말없이 휘날리는 눈발을 응시했다. 뭔가 엔딩 속 혜진이가 살던 옥탑방에서 외계인의 흔적을 더듬으며 올려본 하늘같기도 하고, 아닌가, 눈은 안 내렸던 것 같은데.
‘오늘의 위성’을 생각하던 성한빈은 목을 더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흐리고 음울하고 바람만 휑휑 부는 소리가 들리고…….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마로니에 공원 옆을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벤치에 같이 앉아있는 장하오는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존재처럼 분리되어 있었다.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저 표정이 한 몫 하는 것 같고. 한빈은 장 감독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그가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할까 기대했다. ‘오늘의 위성’에 대해 또 질문해줬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긴긴 침묵 끝에, 끝없이 가라앉을 기세로 이어지던 그 기나긴 상념 끝에, 장하오는 문뜩 무언가 결심했다는 낯으로 들고 온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카메라를 하나 꺼내며 성한빈을 돌아본다.
“이거, 영화 찍을 카메라야.”
“오!”
“이거 사느라고 나 이제 갈 곳이 없어.”
“……네?”
“나 한빈네 집에서 머물러도 돼? 투룸이라며.”
머리 위로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장하오가 아주 부드럽고 조용하고 뻔뻔하게 물었다. 그 질문은 한빈이 장하오의 대화에서 기대하던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고, 동시에 장하오가 던지던 엉뚱하고 맥락 없던 모든 질문 중 가장 황당했고, 그러는 동시에 아주 평온했다. 꼭 아무렇지도 않게 민영 누나 속을 긁는 윤철이 형의 평화로운 어조처럼…….
아니, 그런데 잠시만, 뭐? 멍하니 생각하던 성한빈이 황당함에 고개를 돌리자 트여있는 새카만 눈동자도 그를 같이 응시했다. 그런데 그 눈을 보고 있으니 그 어처구니없는 말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또 당연하게만 느껴져서, 감독이 주연 배우 집에서 같이 살고 싶다는 개소리가 꼭 너무 당연한 일처럼 느껴져서, 성한빈은 그 눈을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얼결에 묻는다.
“예?”
7.
“……저 혹시 출연료 못 받나요?”
“아니, 나 돈 있어.”
“근데? 왜? 갈 곳이? 없으시죠?”
음,
“혹시 불체자는 아니시죠?”
“뭐?”
“불법체류자요…….”
“체류를 하고 있긴 한데 불법……은 아닐 걸?”
아무튼,
“영화 배경이 옥탑방이거든.”
“제가 외계인 역이고 배경이 옥탑방이라구요? 차라리 오늘의 위성 프리시퀀스 영화를 만든다고 말씀하시죠?”
“아……. 그냥 자전 영화야. 자전적인 경험.”
그래서,
“그렇게 길게 머물지 않을 거야. 월세를 반으로 해서 줄게. 나 일하거든. 그리고 너한테 줄 출연료도 있어.”
“……그래요?”
“다 정리하고 있어서 그래, 어차피 난 영화 만들고 나서 떠날 거라.”
“떠나요? 어디로요?”
“어디긴, 고향이지. 지금 당장 갈 곳이 없……는 것도 맞긴 한데 그냥 미리 정리해두는 거라구. 지긋지긋한 체류도 이젠 끝이야.”
그러한 사정으로…….
장 감독은 성한빈의 집에 한 달째 얹혀살고 있다.
8.
얼결에 시작한 중국인 감독과의 동거가 그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 것은, 첫날 장하오 감독이 탁자에 올려둔 돈봉투 때문이었다.
자취할 때 들어가는 비용의 절반을 누군가 대주기 시작하자 성한빈은 생계유지를 위해 틈틈이 나가야 했던 부업들을 일정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출연료까지 받으면, 그래. 재정상황이 꽤나 괜찮아진다. 거기다가 원래 창고로 사용하던 좁은 방을 내어주면 공간분리도 되고, 영화 출연이 사기인지 전전긍긍하는 것도 지쳤는데 집에 들어가면 바닥에 엎어져서 대본 쓰고 있는 장하오 감독이 바로 보이고, 하여간 얼렁뚱땅 동거가 그렇게 나쁘기만 하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오히려 성한빈의 입장에서는 나름 이득이었다.
“형, 엎드려서 글 쓰면 허리 나빠져.”
“나빠져도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척추 수술은 돈 진짜 많이 깨진다니까.”
입주 한 달째, 성한빈은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며 자신의 입시용 희곡과 ‘오늘의 위성’ 대본을 뒤적거리는 장하오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름 말 놓은 사이가 된 장하오 감독. 종이에 글을 끼적이는 손은 그게 정석이 아니라고 몇 번을 지적했지만 여전히 지맘대로 연필을 잡고 있다. 잡고 있는 꼴을 보면 꼭 글 처음 써보는 초등학교 1학년 같단 말이지.
어, 순간 환기 때문에 열어둔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에 장하오가 열심히 글을 쓰던 종이가 몇 장 날아갔다. 저편으로 날아가려는 종이를 잡으려는 손은 얇고 길고 창백하다. 얇고 길고 창백하고, 얇고 길고…….
성한빈은 빤히 그 손가락을 쳐다본다.
염색이라도 했는지 제 것보다 색소가 옅은 머리카락은 불어오는 바람 탓에 이따금 흔들렸다. 이마부터 코끝까지 떨어지는 선은 그린 것처럼 선명하고, 도톰한 입술은 새삼 잘생겼다. 차라리 배우를 했으면 돈이라도 잘 벌었을 텐데. 성한빈은 얼마 전 언덕 밑에 있는 CU에 갔다가 마주한 ‘알바생 장하오’를 생각하며 키득였다. 월세 낼 돈을 대체 어디서 벌어오나 했더니 CU였다. 제가 내민 초코바의 바코드를 찍으며 눈치를 보던 얼굴을 생각하던 한빈은 숨을 크게 내쉬며 다시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에 시선을 둔다.
“…….”
저 각본으로 만든 영화가 잘 될 확률 같은 것은 없겠지, 아무래도. 형도 그러려고 만드는 영화가 아니니까.
그래도 출연료라도 받는 게 어디야. 성한빈은 자신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계속 되뇌며 연필을 쥔 손목뼈를 가만히 응시했다. 툭 불거졌고, 마디가 붉다. 그러다가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은 자신을 응시하는 아주 새카만 눈동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왜?”
장하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몇 번 젓다가 힘겹게 묻는다.
“왜, 자꾸, 내 손을, 봐?”
“그냥?”
“그냥이 어디 있어…….”
“손 좀 보는 게 뭐 어때서. 형 대본 쓰고 있는 게 신기해서 보는 거야.”
“너도 그렇고 여기 사람들 다 이상해.”
뭐야.
성한빈이 키득대자 장하오가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한 달 동안 한빈이 본 장하오는 다 이런 식이었다. 말끝마다 여기 사람들 이상하다고 하는 데 실은 자신이 제일 이상한 거. 이상한 곳에서 기뻐하고 기분 나빠하고, 하는 질문이라곤 죄 엉뚱하고, 아무튼 그렇다.
“장하오, 삐졌어?”
“삐진다는 게 뭐지?”
“참나, 삐졌네.”
“뭐가 삐졌다는 거야아.”
“죄송합니다, 장 감독님. 저 자르지 말아주세요.”
“너 저리 가.”
나만 장하오랑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거야? 성한빈은 투덜대며 아예 등을 돌려버린 장하오의 뒷모습을 보며 푸하하 소리 내 웃었다. 처음에는 그냥 미친놈 같았는데 출퇴근을 제외하고 매일같이 붙어있으니까 하는 행동들이 다 엉뚱해 보였다. 그래서 웃긴데, 장하오 진짜 웃긴데. 웃으면 장하오가 꼭 그렇게 말한다.
“네가 웃는 거 적응 안 돼.”
“웃는 사람 처음 봐?”
“응.”
“장하오 또 시작이다.”
“진짜야, 우리 고향에서 웃는 건 음흉한 짓이야.”
매번 저 말을 붙이는 거 보면 러시아 사람 같은데.
“뭐 그런 게 다 있어.”
“진짜야. 네가 알고 있는 게 전부는 아니라니까.”
“……그거 내 대사 아니야? 외계인?”
“내 대사야.”
“‘오늘의 위성’ 배우는 나잖아?”
“……됐어. 암튼 내가 살던 곳은 그랬어.”
몰라, 연해주 사람인가보지.
그리하여 한 달 간의 장하오 관찰 결과. 장하오는 연해주 사람이다. 젓가락질 못하고 포크만 쓰는데 자꾸 전 동거인이랑 자신을 비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전 동거인이 여자친구 같아서 물어보면 아니라고 툴툴댄다. 연필 제대로 안 잡는다. 카메라 한 번도 안 켜고 대본만 열심히 써댄다. 그런데 그러는 도중에 성한빈의 입시시절 희곡 자료들을 정말 좋아해서 몇 시간 동안 읽고 또 읽는다.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해서 넷플릭스도 끊어줬다. 연극 보는 거 좋아해서 성한빈이 대학로로 공연하러 가면 쫄래쫄래 4호선 같이 타고 가서 다른 연극 보러간다…….
“왜 자꾸 웃어?”
“몰라.”
“왜 몰라?”
“아마 곧 봄이라서? 날 풀릴 일만 남았잖아. 그럼 꽃도 필 테고.”
“아까는 왜 웃는지 모른다며?”
“아, 장하오 또 이래.”
“아까는 형이라면서.”
“미안합니다, 하오 형.”
마지막으로, 말이 진짜 많다.
대화할 때마다 침묵 지옥에 빠지길래 과묵하고 냉철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웬걸, 무슨 시장 아저씨도 아니고…….
“여기는 꽃이 언제 펴?”
“조만간 필 걸, 근데 지구온난화 때문에 더 빨리 필 수도 있고.”
“지구온난화?”
“여기가 더워진다고. 그니까 대본 빨리 완성하는 게 좋을 걸, 다른 건 몰라도 여기 여름 되면 통풍도 안 되고 빛도 그대로 들어와. 그냥 집 전체가 달궈져서 형 못 견딜 게 뻔해.”
장하오는 그 말에 반쯤 널브러진 대본들을 한데로 모으며 중얼거렸다. 어, 안 그래도 거의 다 완성됐거든. 진짜 빨리 됐다. 이거 슈퍼소닉인 거야. 어디서 배운 건지 모를 말도 같이 덧붙인다.
한 달 정도면 빨리 완성된 건가? 성한빈은 갸웃거렸다. 한 시간짜리 영화 대본을? 빠른 완성은 절대 아닌 것 같은데. 한 달 동안 형이 한 건 대본 쓰기가 아니라 나랑 놀기, 나랑 세상에서 제일 빠르게 친해지기, 나랑 밖에서 삼겹살 구워 먹기, 나랑 시답잖은 노가리 까기, 나랑 같이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탈출소나타’ 보기, 나랑 출퇴근 같이 하며 주 6회 대학로 가기, 나랑 같이 희극 대본 읽기 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만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것 같은 장 감독이 뿌듯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는 것을 발견한 한빈은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9.
어딘가 노란 꽃들이 피는 3월 중순.
“……아, 그냥 자격증 따?”
원캐스트로 진행되는 연극을 한 달씩이나 했는데도 연기가 안 느는 것은 역시나 재능의 영역인 건가?
성한빈은 분장실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며 낙담했다. 딱딱한 제 표정을 보고 있으면 한숨만 나올 뿐이다. 나 진짜 민영 누나가 나 왜 싫어하는 지 알 것 같아…… 나 같아도 무려 문체부 지원 연극에 제작사 대표가 꽂아 넣은 낙하산 배우 연기가 이 꼴이면 성심성의껏 싫어할 듯…….
실은 인터파크 관람객 후기 중 그의 연기를 지적하는 글이 너무나 많아서 의기소침해져 있던 것이었는데, 거울을 보며 표정을 연습해 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더 충격적이라고 해야 하나. 눈썹 각도, 볼 근육 움직임까지 조정하고 통제하며 표정을 지어보지만 그저 딱딱하기만 했다. 실화냐, 이 표정이 무대 위에서는 더 딱딱해진다는 거잖아? 아무리 외계인이 감정을 못 느끼는 설정이어도 이런 암담한 연기로는 답이 없었다.
그러면 또 카메라 앞에서는 이 얼굴이 얼마나 더 딱딱해질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 한 시간 동안, 그것도 영원히 박제될 영화에서 이딴 노답 연기력을 선보인다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듯. 성한빈은 울기 직전의 얼굴로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신 차리자, 손바닥으로 조용히 뺨을 툭툭 친 한빈은 감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혜진의 외계인 논문 연구를 비웃는 외계인’의 냉혈한 낯을 따라해 보았다.
“입꼬리 들어 올린다고 다 비웃는 거냐?”
뒤에서 민영 누나가 이죽거리는 소리가 났다. 비웃음의 정석 같은 목소리, 성한빈은 이때다 싶어 민영의 목소리를 따라하며 진지하게 연습해 보았지만 어딘가 간사한 내시 같은 느낌만 났다.
“……노력이 가상해서 이젠 시비도 못 걸겠네.”
민영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영아, 내가 후배들 연기에 말 얹지 말라고 여든 번째 말하고 있다. 너는 걔 소식만 들리면 어째 쟤 붙들고 시비 털더라. 그쯤 되면 그냥,”
“에휴, 오빠, 미안한데 걔 소식 들릴 때만 시비 터는 거면 나 매일매일 시비 털어야 해.”
“놀랍게도 너 매일매일 쟤한테 시비 털고 있어.”
“…….”
거울 속 자신의 표정을 보며 상상과 현실의 괴리에 고통 받던 성한빈은 별안간 장윤철과 하민영이 싸우든 말든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대체 뭐가 문제야? 분명 계산은 완벽했다고! 완벽하게 내 통제 속에서 내 근육을 움직여서 지은 표정인데 왜 어색하냐고!
그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장하오. 한 달 동안 열심히 쓰던 대본을, 그것도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토대로 만든 대본을 이딴 연기력으로 소화해야 한다는 사실에 성한빈은 속이 쓰렸다. 형, 진짜 미안……. 지금도 열심히 대본 쓰고 있을 텐데. 한빈은 장하오의 새카만 눈동자를 생각하다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한빈]
[완성했어]
그런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지.
성한빈은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진동의 발신인을, 그 내용을 확인하고 입을 쩍 벌렸다.
[대본!!!]
“우아아아아악!!!”
쿠당탕, 쾅쾅쾅.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흥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영화 촬영’이라는 꿈이 현실로 이뤄질 것이라는 확신 때문일 지도 모른다. 거기서 오는 감탄과 벅참 한 스푼. 그리고 한 달 동안 바닥에서 대본 쓰던 장하오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대본이 완성되기만을 기다리며 느꼈던 끈끈한 동지애와 애정 두 스푼. 마지막으로 이딴 연기력으로 당장 영화 촬영을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오는 공포와 경악 다섯 스푼.
“……오빠, 쟤 왜 저래?”
성한빈은 저 멀리서 떨떠름하게 들려오는 민영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앉아있던 플라스틱 의자는 뒤로 넘어간 지 오래요, 테이블에 올려놓은 텀블러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해 요란한 소리를 내 분장실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빈은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낸들 아니, 영아, 그냥 가만히 있어라. 연습하느라 힘든가 보지.”
“아니, 그니까 애초에 입시하고 학교에서 연습해야 할 걸 왜 여기서 하냐고. 애초에 여기서 연습해야 할 수준인데 영화는 왜 찍는 거고?”
“쟤보다 실력 안 되고 간절하지도 않는데 작품 턱턱 물어가는 애들도 많아. 지랄 그만하고 쟤한테 시비 그만 털어.”
“아니,”
“그리고 네가 그래봐야 성한빈은 성준영을 좆도 안 닮았어.”
“씨발, 거기서 성준영이 왜 나와!!!”
장하오 감독이 써준 각본이 나왔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야기는 초대박 넷플릭스 대작 지옥탈출소나타의 주연 성준영 이야기로 흘러갔다. 하오 형이 그거 되게 좋아했는데. 한빈은 멍하니 민영 누나의 개 큰 샤우팅을 들으며 생각했다. 난방비 아끼려고 자신은 오들오들 떨고 장하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밤 말이다. 그래, 귀 하나 벌게지지 않던 장하오도 나보고 거기 나오는 주연 성준영 닮았다고 했는데.
“뻔하지, 영이 너 성준영이 넷플 신작 새로 합류한다는 기사 보고 또 지랄병 도진 거잖아. 성한빈은 성준영처럼 연기를 잘하지도 않고, 걔보다 키도 좀 작고, 공통점이라고는 같은 성씨…….”
“아오! 뺀질뺀질 눈웃음치는 거 똑같거든!!! 재수 없게 바르게 생긴 것도 똑같아!”
“성준영은 더 부담스럽게 생겼어, 좀 느끼하고, 애초에 쟤랑 비슷한 거 없다니까.”
“13년 만난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알 게 뭐야!!!”
성한빈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었다. 대체 저 짧게 오가는 샤우팅 사이로 뼈가 몇 개나 발골 됐는지 셀 수도 없었다. 진짜 선배님들 너무들 하시네요…….
그래, 민영 누나가 날 싫어하는 이유가 이거였구나. 난 또 내가 연기를 너무 못해서 민폐라 싫어하시는 줄…….
“하여튼 연기 못하는 것도, 성준영 그 씨발새끼 닮은 것도 짜증나 죽겠어!”
……씨발!
민영 누나가 분에 못 이겨 분장실을 나가자 분장실 문을 쳐다보던 장윤철이 아주 조용히 말했다.
“너 영이 앞에서 웃지 마라, 내가 봐도 좀 닮았어.”
“……넵.”
이거 맞아?
“그래, 그래서, 너는 또 왜 그러고 일어나 있어?”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성한빈은 속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저 영화 찍는다고 했었잖아요. 장하오 감독 각본이 다 완성 됐대요. 그 말에 윤철이 한빈을 돌아보았다.
“아, 그거 사기 아니래?”
진짜 너무하세요.
“하하…….”
“너희 집에 얹혀산다고 했을 때도 사기 같긴 했는데.”
성한빈은 조용히 핸드폰을 내밀었다. 장하오와의 카톡을 훑어보던 윤철이 픽 웃었다.
“너 감독이랑 말 놨냐?”
“넵. 아무래도 같이 살다 보니까 말 놓고 형형 하게 되더라고요.”
“너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
“아뇨, 저랑 한 살 차이라고 하던데요.”
“감독 입봉작인가 보네.”
윤철이 한 손으로 핸드폰을 건넸다. 한빈은 어딘가 미안해 보이는 낯을 한 윤철을 이리저리 살핀다. 항상 민영 누나가 연기로 뭐라고 하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신단 말이지, 난 조언을 듣고 싶은데. 성한빈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불쑥 물었다.
“그래서 그런데 형님, 곧 촬영 들어갈 것 같아서 여쭤보는 건데요.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연기해야 자연스럽나요?”
“뭐 그런 질문을 다 하냐.”
성한빈은 얼굴을 붉혔다. 그치만 독립영화도 많이 찍어보셨고 GV도 해보셨고 찍으신 독립영화가 무려 상영관에서도 걸렸잖아요. 그, 그리고 무대 연기랑 영화 연기는 아무래도 좀 다르고, 어, 그래서…….
진심은 찌질해진다는데 성한빈은 찌질하다 못해 구차한 제 목소리에 얼굴을 붉혔다. 윤철은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커피를 홀짝인다.
“너 첫사랑 있냐?”
“예? 아뇨…….”
“친한 사람 장례식은 가본 적 있어?”
“어, 아직까지는 없는데요…….”
“마음 줬던 누군가와 헤어진 적은 있어?”
“어, 없어요.”
“뭔가를 맹목적으로 좋아한 적은?”
“어, 여, 연기?”
“뭔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설렜던 적은?”
“영화 출연?”
스스로가 생각해도 할 말이 없는 답변들이었다. 윤철은 이에 뜸을 들이다 말했다. 음, 네가 왜 연기 못하는지 알겠다. 컥, 심장 어드메를 찔린 것 같은 기분에 한빈은 이제 찔끔할 여력도 없었다. 오늘 대체 팩트로 몇 번이나 두드려 맞는 건지……. 너는 표정 연기도 연기인데 뭐가 담아낼 만한 경험 같은 게 없어. 커피를 내려놓는 윤철에 한빈의 시선도 절로 그의 반지로 향한다.
“연기하면서 상상하나?”
“아, 대본을 보고 철저한 분석을…….”
“분석도 좋지, 그래서 상상해?”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네요.”
“감독이 대본 주면 분석하면서 구체적으로 모든 걸 다 상상해봐.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도 상상을 멈추지 마. 그럼 적어도 못 봐줄 연기는 아닐 테니까.”
그건 윤철이 처음으로 해주는 제대로 된 조언이었다. 또한 그가 거의 10년을 붙들고 있던 연기학원 선생님의 조언을 뒤엎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윤철의 말을 듣는 게 낫겠지, 그 방법은 10년을 해도 통하지 않았으니까.
한예종 연극원 출신의 값진 조언을 듣는 가운데 분장팀 스텝이 의자는 왜 또 뒤집어져 있냐고 중얼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10.
“너 연기 늘었다?”
“엥?”
“왜 갑자기 늘었지.”
덜컹거리는 4호선.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던 장하오가 중얼거렸다. 윤철의 조언에 충실하게, 자신의 상상 속 외계인에 스스로를 맡긴 무대를 장하오가 봤다. 그리고 퇴근하는 성한빈을 따라 집으로 같이 가는 하오 형의 손에는 두툼한 대본이 들려 있었다.
이거 한빈 집 근처 피씨방에서 뽑았어. 성한빈은 장하오가 주는 두툼한 대본을 받아들었다. 정말 헝그리 정신의 감독이군. 빳빳한 A4 용지에 잔뜩 인쇄된 텍스트는 보통의 제작사에서 주는 대본과 거리가 멀어서 귀엽기까지 했다.
‘상상 속에서만 완벽한 실존’
“오…….”
가장 앞 장에 새겨진 제목은 꽤 그럴 듯했다. 꽤나 독립 영화 같은, 있어 보이는 제목에 한빈은 감탄하며 하오 형을 돌아보았다. 그는 꽤 기분이 좋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그리고 도착한 역사 내 의자에서도 또 한참…….
“형, 얘 너무 불쌍하다.”
고요한 역사 내의 의자, 대본을 덮는 순간 그 말이 튀어나왔다. 앉아있는 성한빈 앞에 서 있는 장하오. 한빈은 역사 천장의 불빛을 등진 채 서 있는 장하오의 표정을 가늠하며 그를 올려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아닌가, 두 번째인가. 하여간 언젠가 그가 말했던 ‘자전적인 경험’이라는 말이 귀에서 빠지질 않았다.
그러니까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처럼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 각본이라기보다는 연극 대본과 더 유사한, 아니, 정말 실존하는 누군가의 인터뷰를 옮겨 놓은 기사 같은…….
방대한 분량의 텍스트는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이 자신의 행성에서 살 때 있었던 일을 다루고 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떠돌이 생활을 하며,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모두에게 강요받는 삶을 살아온 가엾은 존재. 부모도 친구도 없고 어딜 가든 버림받기만 하던 외계인이 지구에 떨어졌지만, 자신의 행성에 돌아가도 행복을 보장받지 못할 이가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내용.
가엾잖아. 너무 가여워서 한빈은 자꾸 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장하오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면 더.
아마도 전부 비유적인 이야기겠지. 외계인이니 뭐니 하는 자세하고 세부적인 설정 전부 다. 그래도 어떻게 이래. 한빈은 측은한 눈으로 장하오를 흘겨보다가 결국 울상을 지었다.
“아……. 이거 어떡하지.”
그런데 문제는 대본.
만약 이 대본을 장하오와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보았다면 영화 출연이 사기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뭐, ‘오늘의 위성’같은 극이나 하는 입장에서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장하오가 써 온 게 완성도가 그렇게 높은 대본은 아니란 말이지, 그것도 사기라는 생각이 들 만큼. 마치 대표님이 건네었던 ‘오늘의 위성’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의 기분과 다를 게 없었다.
그렇지만 같이 살면서 장하오와 꽤 친밀해지기도 했고, 가끔 연극 대본이나 대본 집필을 할 대 아이처럼 신나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어서 굳이 초를 치고 싶지도 않고…….
성한빈은 조금 너그러워진 상태로 고민했다. 일단 대본을 영화에 알맞게 고치려면 어느 정도 수정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한빈은 밤낮으로 틈만 나면 대본을 들여다보며 계속 무언가를 끼적였다. 크레딧에 배우 뿐 아니라 공동 제작으로 이름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열심히 했다. 얼마나 정신이 팔려 있었으면 민영에게 연기는 늘었는데 집중력은 뒤졌다며 매일 같이 한소리를 듣는 게 일상이 될 만큼. 별로 좋은 변화는 아닌 게 분명하지만.
“……잘 안 눌리네.”
장하오가 묵혀둔 카메라를 꺼낸 것은 4월 말의 일이었다.
원래 대본대로 우선 촬영해보고 수정을 해보자는 말대로 카메라는 한빈의 옥탑방 앞에 놓인 큰 평상 옆에 세팅되었다. 대충 쿠팡에서 시킨 하찮은 조명과 하찮은 마이크. 진짜 초저예산 영화인 것이 실감 난다고 해야 하나. 한빈은 그 하찮은 것들에 짜게 식다가도 조용히 그것들을 세팅하는 장하오의 하얀 손가락을 보고는 한숨만 내쉬었다. 그래, 이렇게 개고생하고 완성되면 진짜 감회가 새롭긴 하겠다…….
“형 진짜 크레딧에 내 이름 공동 제작으로 올려야 해.”
“알았어…….”
거진 한 시간 동안 계속되는 독백쯤이야 연기 못하는 거 텍스트 삼키는 걸로 때우던 성한빈의 암기 속도 덕에 문제는 없었다. 대본 숙지는 진작 끝난 채 그냥 시범용으로 하는 원테이크 한 시간짜리 촬영.
장하오는 ‘레디, 액션’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한참 한빈의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대본 속 ‘외계인’이 된 성한빈은 ‘하오 형’의 자전적인 이야기의 비유가 분명할 어느 텍스트를 속으로 뭉뚱그려 상상과 상상을 이어갔다. 그리고 꼭 대화하듯, 저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장하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듯 연기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성한빈은 그 밤에, 그러니까 풀벌레 소리가 이따금 들리고 자동차가 아스팔트를 밟으며 미끄러지는 소리가 나는 그 밤에, ‘외계인이자 장하오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읊으며, 그 대사와 대사 사이의 정적 속에서 문뜩 ‘오늘의 위성’ 속 외계인을 생각했다. 성한빈이 두 달 넘게 연기하고 있는 그 ‘외계인’에게는 제대로 붙여진 설정 같은 것도 없는데, 장하오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그 외계인은 엄연히 다른 인물임에도. 연기하는 한빈은 이상하게 둘이 같은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장하오가 외계인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장하오를 대신하는 그 ‘외계인’이 겪어온 일들을 ‘오늘의 위성’의 외계인도 겪어 온 채로 ‘혜진’의 앞에 떨어졌을 것 같다고. 장하오가 들으면 너는 내가 감정도 못 느끼는 외계인 같냐며 하하 웃을 것 같은 생각이다. 그렇지만 성한빈은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은은한 조명과 바람 소리.
어쩌면 이름도 없는 외계인이라는 점에서 비슷할 수도 있고, 어쩌면 대본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그 둘을 전부 사랑해 버려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제 것처럼 흘러나오는 대사들. 카메라에서 반짝이는 붉은 빛. 성한빈은 시선을 저편에 두고 서울의 밤하늘을 올려보다가, 정적을 길게 끌다가, 조금 목 메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시간 동안 이어지던 독백의 마지막 대사였다.
- 그러니까 이건 내 이야기야. 나는 고발의 대상이 아니거든. 네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들려주는 거야. 여긴 푸르고 아름답지만 나는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찾지 않는 곳을 그리워하고…….
영원히 혼자 두고 떠나려는 건 아니었어.
그러니 나를 다시 돌려 보내주면 안 될까?
마지막 대사 이후에도 장하오는 컷을 하지 않고 가만히 카메라 화면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길쭉하고 하얀 손을 한참 머뭇거리고, 달싹거리다가 조용히 촬영 종료 버튼을 누르고 성한빈을 바라보았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영화 찍는 것에 현실 감각이 없어서? 하긴 나도 하오 형도 둘 다 처음 도전하는 거긴 해. 천천히 밑으로 떨어지는 장하오의 고개에 한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못 찍혔나, 한 시간짜리 원테이크인데 다시 찍을 생각에 힘들어서? 아니면 내 연기가 기대 이하여서? 그래도 성한빈은 장하오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 활짝 웃었다. 혀엉, 어땠어. 평상에 반쯤 늘어져서 물으니 그가 작게 답한다.
“……네 목소리가 좋아.”
“대사 톤 좋다는 말은 또 처음 들어보네.”
성한빈은 기분 좋게 웃으며 평상을 탁탁 쳤다. 자, 장하오 감독님. 계속 서 계셔서 다리 아프셨죠? 와서 하늘이나 봅시다. 좀 눕자고.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장하오가 카메라를 소중히 품에 안으며 평상으로 걸어왔다. 정말 다리가 아픈 모양인지 자꾸 어기적거리는 모양새에 한빈은 웃음을 참으며 쿡쿡댔다.
장하오가 그 옆에 앉는 순간 성한빈은 그대로 평상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아아……. 이거 목 아프네. 중얼거려도 돌아오는 말은 없다. 힐끔 올려본 장하오는 멍하니 하늘만 올려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해. 성한빈은 쫙 벌렸던 팔을 배에 가져다대며 생각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혹은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이는 장하오. 성한빈은 자신이 연기하는 ‘외계인’이 그의 페르소나임을 뻔히 알면서도 툭 말을 내던진다.
“……걔 불쌍해.”
“누가.”
“외계인.”
“…….”
“다시 돌아가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근데 이해해.”
“……이해?”
“외계인 말이야. 자꾸 돌아가고 싶어 하는데, 그 마음이야 이해가 가지. 나를 반기지 않는 곳이어도 돌아가고 싶을 수 있잖아. 영원히 어느 한 쪽에 속하지도 못할 게 뻔해 보여도.”
성한빈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런데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그리 시원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공기 오염 너무 심한데. 형 고향도 이래? 나지막히 물으면 시야에 보이지 않는 장하오의 목소리가 아주 느릿하게 흘러나온다. 응, 여기보다 더 심해. 한빈은 잘 보이지도 않는 별들을 헤아리려다가 그저 새카맣기만 한 하늘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중국이면 여기보다 더 심하겠지. 흠, 근데 연해주도 미세먼지가 심한가?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코로 들어오는 듯한 미세먼지를 탓하면서 투덜댔다. 좀 일어난다고 뭐가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성한빈이 일어난 김에 장하오 옆으로 가서 걸터앉았다. 그는 한빈을 돌아보지 않았다.
“……걔를 왜 이해해?”
“배우는 원래 자기가 연기하는 인물을 이해하고 파악할 필요가 있어. 필요하면 사랑하게 되고 아끼게 되는 거지.”
“아껴?”
“누구, 외계인?”
“응.”
“그건 아낀다는 말보다 사랑한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지.”
“내 얘기잖아.”
“그래도 사랑할 수 있잖아.”
“그게 뭐야…….”
장하오는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다시 물었다.
“‘오늘의 위성’은?”
“거기 나오는 외계인? 걔도 사랑해.”
“그치만 연극에서는 나쁜 애로 나오잖아.”
“그때 말하지 않았나? 나는 나쁜 애라고 생각 안 해.”
“…….”
“그리고 좀 웃긴 얘기일 수도 있는데 나는 그 둘이 되게 비슷하다고 생각해. 형이 쓴 이야기랑 그 외계인이랑.”
“……허.”
“둘 다 이해가 간다는 것도 그런 맥락일 거야…….”
장하오는 기어코 답하지 않았다.
그 밤은 연극 ‘오늘의 위성’을 가끔씩만 보러 오던 장하오가 닷새 연속으로 성한빈을 보러 왔던 밤이었다. 또 그 밤 장하오는 유독 밤하늘 구석의 어딘가를 아주 강렬하고, 또 알 수 없는 눈으로 올려보곤 했다. 그 밤 그 옥탑방의 조잡한 조명은 성한빈에게로만 쏟아져 그 얼굴이 반짝이다가도 환상처럼 아른거리는 밤이었고, 그 밤 장하오는 이상하게도 몇 번씩이나 흔들리는 눈을 하곤 했었다.
무엇이 되었건 성한빈의 말이 끝나자 한참이고 손가락만 움찔거리던 장하오가, 손끝이 닿는 것을 싫어하고 첫날 악수조차 하지 않으려던 장하오가 어딘가 떨리는 한숨 끝에 한빈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그 악수가 무슨 의미인지 성한빈은 알지도 못했지만, 그저 친분의 표시로 받아들이고 어색하게 웃었다. 원래 엉뚱하고 이상한 짓 많이 하는 형이니까, 그래, 내 말이 고마운 거겠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다만 별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만 빤히 올려보는 장하오의 손바닥은 기분이 이상해질 만큼 뜨거웠다.
그러니까,
어…….
가슴이 울렁울렁…….
11.
5월, 월요일. 오전 11시의 마로니에 공원은 이다지도 적막했다.
수정한 대본은 다음과 같다. 원테이크로 찍었던 영상의 음성을 따로 추출해두고 어울리는 장면을 찍어 편집하기로. 그리하여 불시착한 외계인이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설명하는 장면에 삽입할 지구 풍경을 촬영하기 위해 둘은 또, 대학로에 도착했다.
지구 풍경 설명하겠다고 마로니에 공원이라니, 실화냐?
카메라를 든 장하오는 민망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카메라 테스트를 시작했다. 작은 카메라를 눈에 가까이 붙인 그는 카메라로 세상을 보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돌아다녔다. 안 불편한가? 저러면 어지러울 텐데. 성한빈은 다리를 휘적거리는 장하오를 보며 작게 웃었다. 정신 사납게 배회하던 발걸음은 정확히 성한빈의 방향에서 멎는다.
“…….”
저 멀리 자신에게 고정된 카메라.
“왜, 너무 잘생겼어?”
쏟아지는 햇빛에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성한빈은 활짝 웃었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선선한 바람에 어느새 풍성하게 자라난 푸른 나뭇잎이 저들끼리 부딪히며 비가 쏟아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한빈은 답지 않게 강하게 몰아치는 바람에 실눈을 뜨며 붕붕 뜨는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짙은 녹색보다는 형광 빛을 띠는 나뭇잎. 제법 외계인 같은 색이라 한빈은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카메라에는 잘 담길 것 같은데?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긴 해도 햇빛이 강해서 나뭇잎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형, 어떻게 나와? 묵묵부답. 아, 어떻게 나오냐고! 그럼에도 묵묵부답. 큰 목소리로 카메라에 어떻게 나오냐고 물어봐도 그게 안경이라도 되는 양 절대 눈에서 떼지 않는 장하오에 성한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형 필요 없어. 꿍얼거리며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거울 속 한빈의 얼굴 위에는 나무 사이로 스며든 빛이 꼭 수채화처럼 듬성듬성 번져 있었다. 혼란에 빠져 달리는 씬이다만 지금 촬영하면 진짜 영화 같겠는데? 물론 지금 촬영하는 것은 영화가 맞다.
“형, 지금 찍자!”
“…….”
“아, 내 말 안 듣고 대체 뭘 보는 건데? 지금 달리면 딱이라고!”
“…….”
“형도 달리면서 나 따라와! 나 여기 크게 한 바퀴 뛸 테니까!”
녹화는 알아서 해! 고함과 함께 장하오의 옆으로 간 성한빈은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옆모습을 찍으려고 장하오가 같이 달리긴 하는데……. 어, 저거 손 떨림 방지 기능 있나?
몰라, 망했네.
한빈은 속으로 헛웃음을 치며 일단 달렸다. 반쯤 달렸을까 공원 전체를 내리쬐던 햇빛이 구름 사이로 확 들어갔다. 덕분에 눈은 좀 덜 아팠는데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위아래로 솟구치는 카메라가 너무 잘 보여서 괴로웠다. 아, 다시 뛰어야 해? 한빈은 괴로운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연기하는 외계인으로써는 외계행성 불시착에 괴로워하는 장면이지만, 배우 성한빈으로써는 달리는 연기를 또 해야 한다는 절망이다. 다만 하늘은 예상외로 흐리다.
“음?”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가 앞에 있는 나무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쾅, 넘어진다. 집중하지 못한 것이 그대로 드러나서 민망하긴 했지만, 그래, 엄연한 실수지만, 진짜 기가 막힌데? 성한빈은 나뒹굴며 피가 줄줄 나는 코를 손으로 감싸고는 속으로 웃었다. 야, 외계인이 진짜 만약 불시착하면 이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겠는데? 대박!
“……한빈!”
성한빈은 열연을 펼쳤다. 외계인이라면 어떻게 할까 제한을 두지 않고 상상하고, 그 상상한 흐름에 자신을 태운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코피를 닦으며 바닥을 더듬다가 흙을 기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그리고 번뜩 하늘을 바라보며 당황한 눈으로 제가 있어야 할 우주를 찾는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에는 이상하게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흐린 하늘이 보인다.
아니, 아까 전까지만 해도 아주 쾌청했잖아? 갑자기 이런 게 어디 있담.
아마도 5월의 소나기일 것이다. 성한빈은 나뒹굴다가 몸을 웅크린 채 하늘을 올려보는 제 뺨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그러다가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 연기를 그만 뒀다. 됐어, 형, 여기까지.
“찍었지?”
“…….”
웅크린 자신을 내려 보며 카메라를 눈에 갖다 댄 장하오. 찍었냐는 말에 한참 동안 침묵하던 장하오는 천천히 녹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래, 그럼 됐어.
“어디든 들어가자, 소나기가 올 것 같아.”
“……너 피는.”
“목소리가 왜 이렇게 벅차있어, 그거 달린 게 그렇게 힘들어?”
숨이 가득한, 잔뜩 지치고 끓어있는 목소리를 놀리면서도, 정작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도 지쳐있었다. 한빈은 꽤 세게 부딪혔는지 계속 턱 밑으로 흐르는 피에 이상함을 느끼며 닦아내다가 그것이 코피가 아니라 부딪히는 순간 혀를 씹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겁했다. 아, 미친, 나 혀 씹었다.
점점 굵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그대로 후두둑 떨어졌다. 본격적으로 내리는 소나기에 한빈이 당황한 채 장하오를 올려본다. 오늘 촬영을 못하게 된 것은 둘째 치고, 카메라 젖으면 고장 나는 거 아냐?
“형, 들어가자, 카메라 얼른 넣어놔.”
“……너 피 나.”
“아니, 형, 그게 문제가 아니라,”
“기다려.”
그러더니 장하오는 성한빈에게 카메라를 던져두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니, 카메라를 배우에게 맡겨두고 튀는 감독이 어디 있어? 한빈은 황당한 얼굴로 빗물을 맞고 있는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잠시만, 이렇게 되면 카메라를 온몸 방어하는 수밖에 없잖아? 한빈은 큰 몸을 꾸깃꾸깃 접으며 카메라로 쏟아질 비를 머리로 맞았다. 축축하네.
찍은 10분 여 길이의 영상을 돌려봤다. 정말 다행히, 카메라가 그렇게 흔들렸는데도 제법 ‘영화’ 태가 났다. 손에 자체 떨림 방지 기능이 있나? 그렇게 솟구쳤는데 화면에서는 별로 티가 안 나네. 한빈은 신기하다고 웃으며 햇빛을 받으며 뛰는 자신을 모니터링 했다.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계속 닦아내면서.
근데 나 생각보다 진짜 잘생기게 나왔는데?
듬성듬성 난 햇빛을 받으며 뛰는 모습이 제법 청춘영화 같았다. 거기다가 혼란에 빠진 채 하늘을 올려보는 장면, 그리고 그대로 나무에 부딪히는 장면, 얼굴을 타고 흐르는 피까지 모두 예술처럼 나왔다. 카메라 무빙 미쳤는데? 성한빈은 아직도 얼얼한 코와 턱을 부여잡고는 연신 감탄했다. 거기다가 화면 속 저 표정 연기, 아무리 생각해도 윤철에게 밥을 사야한다는 결론 밖에 나질 않았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민영 누나가 되게 늘었다고 아닌 척 칭찬하고 가주셨단 말이지. 한빈은 이제야 빛을 발하는 제 노력의 산물을 두 눈으로 지켜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미쳤다. 연기 찢었다. 이건 인생 연기다. 민영 누나가 봐도 박수치실 듯.
“성ㅡ한ㅡ빈!”
한참 영상을 돌려보고 있을까, 저 멀리서 장하오가 비를 잔뜩 맞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한빈은 카메라를 제 옷에 넣었으나 비를 막기에는 택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탄식했다. 이런 미친…….
“들어가, 거기 화장실로 들어가.”
장하오가 그를 붙들고 상가 화장실로 이끌었다. 비좁고 냄새나. 한빈은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그대로 세면대를 붙잡고 입 안 가득 찬 피를 뱉었다. 혀 씹으면 이렇게 피가 많이 나는구나. 한빈이 거울을 보며 코 아래로 피범벅이 된 자신의 얼굴을 살피며 꼴이 꼭 특수 분장을 한 것만 같다고 생각하는데, 당황한 장하오가 그의 어깨를 잡아 채 자신을 보도록 몸을 돌렸다.
“야, 약국에 갔어.”
“…….”
“너, 피, 피 나서…….”
그리고 비닐봉지에서 꺼낸다는 게 붕대.
성한빈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붕대를 겨우겨우 푸는 장하오를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쫓았다. 뭐야? 이건 외국인의 문제가 아니잖아? 어디다가 감겠다고? 저 붕대를 내 코에 쑤셔 박겠다고? 아니면 내 혀에 붕대를 감겠다고?
다만 촬영으로 인한 흥분과 부딪힌 통증이 서서히 가시자, 혀가 쓰라려서 도저히 발음을 할 수가 없었다.
“붕대느 왜 사 거야? 아 미치 얘느 또 바르이 안대…….”
“뭐? 발음이 안 된다고?”
“내이 무대 서야 하느데…….”
봐봐, 장하오의 손가락이 성한빈의 입술에 닿았다. 하얗고 기다란 손이 스스럼없이 그의 혀를 살핀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좁아터진 상가 화장실, 더럽고 냄새나고 동시에 장하오 냄새도 나는 미친 화장실.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씹었던 부위가 그제야 아려왔다. 혀를 내밀고 있는 상황도 황당한데 자꾸만 입술에 닿는 손에 뭔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빈은 어디를 씹혔는지 확인하느라 집중하고 있는 새카만 눈동자를 보다가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한다.
“왜 자꾸 입수으 마져…….”
“너는 손도 아무렇지 않게 만지면서 입술 가지고 뭘 그래.”
“그거 또 무스 개소리야…….”
“입술 만지는 게 뭐 어때서.”
당연히 입술 만지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성한빈은 시뻘게진 얼굴로 쩔쩔매며 장하오의 손을 쳐내려 했다. 다만 손끝이 닿는 순간 장하오가 움찔댄다. 진짜 이상한 형이야. 그렇게 생각하는데 별안간 제 손을 꽉 움켜쥔다. 꼭 원테이크를 찍었던 그 밤 그랬던 것처럼.
그제야 한 쪽 손을 붙들린 채 붕대로 지혈당하는 성한빈은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는다. 손이 왜 이렇게 뜨겁지?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뜨겁다. 한빈은 어딘가 깊게 일렁이는 눈동자를 올려보며 의아함에 빠졌다. 이 지구상에서 애초에 타인의 입술을 만지는 게 아무렇지 않은 국가가 있긴 해? 연해주에서는 손 만지는 게 더 실례인가?
……근데 손 만지는 게 실례면 하오 형은 왜 내 손을 저렇게 꽉 쥐고 있는데?
한빈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혀, 여해주 추시 아니야?”
“여해주가 어디야.”
“연, 여, 아, 러시아에 있느…….”
“러시아가 어딘데.”
그래, 연해주가 아니라 중국 사람인가?
“……어디서 와써?”
“첫날부터 말했잖아.”
“뭐?”
“우주에서 왔다고.”
어눌한 목소리를 한 장하오가 새카만 눈동자로 성한빈을 응시하며 말했다. 한빈은 혼란스럽다.
그냥 장하오가 모든 말을 다 그럴 듯하게 말하는 걸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의심의 여지가 없는 헛소리건만, 한빈은 잡은 제 손에 아예 깍지까지 껴오는 가늘고 얇고 창백한 손가락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니, 그래, 연해주든 중국이든 장하오의 고향이 어디든지, 일단 거기서는 손을 만지는 게 실례가 아닌 것 같아. 실례라기보다는…….
“…….”
실례라기보다는…….
비가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장하오는 천천히 깍지를 풀더니 혀를 지혈하던 붕대를 떼 쓰레기통에 버렸다. 병원에 가야할 것 같은데, 그거.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화장실에 웅웅 울렸다. 촬영은 나중에 하고…… 니긋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한빈은 실눈을 뜬 채 장하오를 바라본다.
어디서 왔지?
“집에, 집에 갈까?”
아니면, 첫날 그랬던 것처럼 이것도 형이 늘상 하는 지독한 장난 중 하나인지.
“우산도 없으니까……. 기다리면 내가 사올게.”
아니면 처음부터 장난은 없었는지.
“기다려.”
애초에 영화는 대체 왜 찍으려 하는 거야?
성한빈은 어떤 근본적인 물음에 빠진 채 먼저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는 장하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지? 다만 가지고 있는 어떤 물음도 해소된 것은 없었으며, 더욱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12.
“너 꼬라지가 왜 그래?”
추적추적 비 내리는 소리,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카페 창문을 흘겨보던 성한빈은 몸을 얕게 떨었다. 꼬, 꼬라지요? 하하하. 제 몰골을 알 리 없는 한빈이 어색하게 웃자 바로 그 앞에 앉은 윤철이 무감하게 말했다. 너는 비를 그렇게 맞았으면 집에 가서 씻어야 감기 안 걸리지. 여상하게 흐르는 말투는 조용하고 평화롭고, 그래서 성한빈은 도리어 기분이 이상해졌다. 무슨 말이라도 던져야 할 것 같은 압박, 혹은 아직까지도 좀 멍한 정신. 문뜩 어수선한 카페에서 몸이 서서히 유리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래서 무슨 얘기하려고, 내일 공연 못한다고?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손에는 윤철이 입고 온 가디건에 들려있었다. 아이보리색의 두터운 가디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는 사양 않고 그것을 넙죽 받아 입었다. 감사합니다, 입안으로 삼켜지듯 작은 목소리, 가디건은 제법 두툼했고 몸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비오는 오후 4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한빈은 튀었다.
그래, 장하오가 분명 기다리라고 말하긴 했지만 제대로 기다릴 수가 없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과연 얌전히 기다릴 수 있었을까? 몇 달을 달달 외워 온 외계인의 대사가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네가 알고 있는 게 전부는 아니야. 우주는 넓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 대사는, 언제나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구현되던 그 대사는 이제 장하오의 것으로 들려왔다. 물론 그가 외계인이라고 진지하게 확신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우습기까지 한 전제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한빈은 손을 뒤집어 하얗게 질린 제 손바닥을 구태여 내려 본다. 맞잡아 오던 손, 불에 데인 듯 뜨거운 기분…….
침묵이 길어지자 윤철이 제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누르며 조금 피곤한 어투로 물었다.
“말을 해, 나는 또 왜 부른 건데.”
“.......”
“공연 취소 얘기는 윤 대표님한테 전화해야 하는 문제고, 너 그거 모르는 애도 아니잖아.”
그치, 한빈도 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혀의 붓기도 금세 가라앉았다. 공연을 못할 정도는 절대 아니다. 발음이 조금 부정확하긴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또 괜찮아지겠지. 성한빈은 무표정한 낯의 윤철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윤철의 시선에서도, 김이 피어오르는 아메리카노 속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제 손을 놓지 않을 기세로 잡아오던 장하오의 눈이 보였다. 그쯤 머릿속을 헤집고 또 헤집고 그렇게 맴돌다 못해 아예 눌러 앉아버린 것은 단 하나의 질문.
같이 사는 감독이 씨발 외계인인 것 같은데요, 형님, 어떡하죠?
아니야, 외계인은 무슨 외계인이야. 외계인이 여기 왜 있어. 그런 얘기를 하면 형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냐. 미쳤냐? 비 오는 날, 그것도 공연 없는 월요일에, 사람 불러 놓고 다짜고짜? 한빈은 문뜩 정신이 번뜩 드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미친 듯이 내젓는다.
성한빈이 장윤철을 대체 왜 불렀냐고? 기다리라던 장하오를 피해서 낙산공원까지 튀었던 성한빈은 몇 시간을 거기에 짱박혀 있다가 당장의 혼란스러움을 누군가와 나눠야 기어이 해결될 것만 같은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었다. 그러니까 혼란이 만들어낸 일종의 이성 마비랄까. 하여간 한빈은 근질거리는 입을 부여잡고 연락처를 뒤졌다. 다만 그의 지인 중 혼란의 원인인 ‘외계인’ 어쩌구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 사람은 ‘오늘의 위성’ 팀 밖에 없었고, 스텝들은 그다지 친하지 않았으며 민영 누나는 애초에 그의 영화 촬영에 매우 회의적인 입장이었으므로 선택지는 한 곳이었다. 그래, 윤철에게 제발 만나주실 수 있냐고 반쯤 울며 연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꾸 이성을 무시하고 펑펑 튀어나오는 말도 안 되는 공상 과학적 전제들을 ‘뭔 헛소리야’ 정도로 일축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만나자고 한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조금 되돌아온 이성을 장착하고 바라본 그 ‘상대’가 열네 살 차이 나는 형님, 그것도 연극 선배라는 사실을 깨닫자 조금 아연해진 것이다. 아, 이건 좀 아닌 듯. 이건 좀 무리인 듯. 성한빈은 그제야 자신이 윤철을 부른 것은 엄청난 충동이 불러온 실수임을 깨닫고 입만 벙긋거렸다.
“진짜 얘기 안할 거냐?”
“아, 아, 아니에요.”
“.......”
“다른 게 아니라 오늘 영화 촬영해 보니까 감사해서요. 저 연기 좀 는 것 같은 게 느껴져서…….”
어쭙잖은 변명과 함께 성한빈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는 대체 윤철 형님을 왜 부른 것일까?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에서 두툼한 윤철의 가디건을 입고 있노라면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다면 비이성적이었던 삼십 분 전의 통화가 도저히 이해가지 않는 것이다. 나 미쳤었나? 내가 왜 그랬지? 그럼 자연히 따라오는 것은 장하오의 새카만 눈동자. 아악, 한빈은 눈을 번쩍 뜨며 겨우 숨을 내쉬었다.
성한빈을 덮쳐오는 진한 현타와는 별개로, 윤철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그렇게 느껴지는 거면 딱히 잘하는 거 아닌데.”
늘 느끼지만 오늘의 위성 팀은 전부 팩트로 사람 두들겨 패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오늘도 스무스하게 심장 어드메를 푹 찌르는 사실적시에 성한빈은 해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잘한다는 착각 전부 저의 만용이었지요. 사람들이 자꾸 잘한다 엄청 늘었다, 장하오가 자꾸 희곡 읽는 제 목소리 최고다 하고 추켜세워줘서 쇤네가 제정신이 아니었나봅니다…….
“조언 듣고 연기 방향 고친 건 잘했어. 분석은 대본 읽고 빌딩시킬 때 열심히 해야지 표정을 근육 단위로 분석하고 있었으면 어떡하냐. 네가 연기를 못했던 건 그냥 네가 통제광이어서 그래. 상상의 영역 정도로 남겨두고 유연하게 접근하니 그간 쌓았던 분석이랑 맞물리며 나름 봐줄만 하게 변한 거고…….”
“넵.”
“근데 너 이 얘기하려고 나 부른 건 아니지 않냐?”
귀신같네.
성한빈은 얼결에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윤철이 ‘어디 들어나 보자’하는 눈으로 허리를 조금 젖히자, 한빈은 그제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로구나 생각하며 겨우 묻는다.
“‘오늘의 위성’의 외계인이 진짜 있을까요?”
“너 진짜 골 때린다.”
“…….”
“감독이랑 싸웠냐?”
유자차를 휘휘 젓던 윤철이 늘 그랬듯 단조로운 어조로 물었다. 감독이랑 문제 생겨서 나 부른 거 아니야? 나 살다 살다 카메라 들고 튄 배우는 또 처음이네, 그래. 감독 카메라는 네가 대체 왜 들고 있는 건데? 펑크 내고 온 건 아닌 것 같고……. 성한빈은 그 말에 용케 뽀송한 장하오의 카메라를 흘겨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몇 번의 마른세수를 할수록 용기는 줄어들고, 줄어들고, 또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쪼그라들어 아주 작은 모양이 되었다가,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별안간 비대해진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치솟은 것도 그쯤이다.
뭐, 까짓것, 윤철 형님은 개소리 같으면 개소리라고 말씀해주시겠지.
“싸운 건 아니고 제가 피해서 도망쳤어요.”
“왜, 뭐,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게 무서워?”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감독이 외계인 같아요. 진짜 외계인이요.”
유자차를 휘젓던 손의 움직임이 멎었다.
“……확실히 골 때리네.”
“그쵸? 어떻게 감독이 외계인?”
“아니, 너 말이야. 너. 아주 골 때린다고.”
“…….”
“네가 제일 외계인 같다.”
적막이 찾아오자 성한빈은 당황함에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뇨, 형님, 들어 보세요. 그, 직접 쓴 대본에 나오는 애가 ‘외계인’인데 묘하게 오늘의 위성에 나오는 제 캐릭터 같거든요. 공통된 건 없는데 그냥 직감적으로요, 아시죠? 그, 약간 직감적으로. 예에.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저는 그 감독이 중국인인줄 알았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연해주로 확신했는데, 여, 연해주가 아니라 프리모리예 지방이라고요? 쩝, 아무튼요. 어투가 조금 어눌해서요. 그리고 본인 입으로도 자기가 우주에서 왔다고, 아, 영화 찍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이상하다고요? 아하, 넵. 그, 근데 문화 같은? 암튼 하는 짓거리가 좀 이상해요. 얼마 전에 손을, 아, 이거 말하기도 좀 그렇네. 암튼 손을 잡았는데…….
“손을 왜 잡아?”
“예?”
“너 그 외계인 감독 좋아하냐?”
“그건 아닌데요.”
“그 외계인 감독이 너 좋아하냐?”
성한빈은 눈을 끔뻑거렸다. 게이냐는 소리잖아?
윤철은 남자더러 남자를 좋아하냐는 질문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듯 태연했다. 아니다, 아마 그 특유의 무료한 말투 때문이겠지. 그러나 문뜩 남자가 나를 왜 좋아하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손잡는 게 뭔가 이상하고 또 이상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말이다. 맞잡았던 손이 좀 수상했던 것을 제외하면 윤철이 묻는 ‘그런’ 낌새는 없었다. 평소처럼 그냥 같이 웃고 떠들고 밖에서 고기 구워 먹고 희곡 가지고 연극하는 척 대본 읽기 따위뿐이었다고. 애초에 툭하면 비교하는 전 동거인은 여자였다니까, 그러니까 장하오는 게이가 아니고 평소랑 같았다고.
“……솔직히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맞잡았던 손은 대체 무엇인가.
성한빈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듯, 미궁 속으로 빠진 이 기묘한 사건을 되짚어보며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그래, 네 말대로 너무너무 상세해서 수상한 연극 ‘오늘의 위성’ 속 외계인이면 네가 이런 오해를 하는 게 말이나 되냐?”
“어…….”
“거기 그, 대충 그 긴 파트 정리해서 말하면 걔네가 사는 곳은 디스토피아지, 거기서 사는 종족들은 감정도 없고 문학도 예술도 없고, 지독하게 효율 중심적이고. 안 그래?”
“그쵸.”
“근데 그런 곳에서 여기로 불시착한 외계인이 감독은 무슨, 감독이 웬 말이야, 그것도 영화감독이라니.”
“혜진이가 드라마는 곧잘 본다고 말하던 대사도 있었잖아요.”
“드라마 곧잘 보는 거랑 거기 나오고 싶다, 혹은 이런 거 나도 찍고 만들어보고 싶다 생각하는 거랑 같냐?”
“저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네가 대학로 와서 이러고 있는 거고.”
“아하.”
장하오는 외계인이 아니구나.
윤철이 혀를 차며 유자차를 호로록 마셨다. 성한빈은 묘하게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설설 흔들다가 중얼거린다. 그래, 외계인이 아니구나. 외계인일리 없지. 그런데 자꾸 손바닥이 뜨거웠다. 화끈거려서 기분이 울렁거렸다. 통째로 우주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13.
윤철과의 대화는 그 뒤로도 이어졌다. 거창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냥 시시콜콜한 연기 이야기였다. 윤철의 독립영화 GV 경험담, 지금까지 올랐던 무대 중 가장 큰 규모의 극장, 인생에서 가장 기억 남는 공연, 대본, 한예종 입시 이야기와 한예종 캠퍼스라이프 이야기에 그의 군 생활 축구썰까지 듣다보니 밖은 컴컴한 밤이었다.
성한빈은 밤늦게 윤철이 끌고 나온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다른 건 아니고 비가 멈추지 않는 밖에도 한빈이 우산을 챙겨오지 않아서. 비는 밤까지도 추적추적 내렸고, 한빈의 집에 도착할 쯤에는 거의 멎어있었다. 하여간 노란 가로등 아래서 들어가라며 등을 떠미는 윤철에 실없이 웃으며 떠밀리던 한빈은 문뜩 불이 꺼져있는 옥탑방을 확인하고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은, 손바닥이 갑자기 간지러운 것은…….
“…….”
문뜩 윤철이 우두커니 서 있는 성한빈을 불렀다.
“나 혹시 화장실 좀 써도 되나?”
생각해 보니 카페에서 계속 이야기가 이어지느라 음료를 몇 잔 더 시킨 탓이다. 한빈은 멍청하게 고개를 돌려 윤철을 보았다. 유부남인데 늦게 들어가도 되는 거야? 그 손에 걸린 반지를 보자 절로 눈치가 보였다.
“왜, 안 돼?”
“아뇨, 부인 분한테 안 혼나세요?”
“부인?”
“네…….”
“나한테 부인이 왜 있냐. 그래서 화장실 좀 쓴다니까.”
“어어, 결혼 안 하셨어요?”
윤철이 먼저 앞질러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성한빈은 당황해 어버버거리며 앞서 올라가는 윤철을 뒤따라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윤철은 낡고 비좁은 통로를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며 계단을 계속 올랐다. 어스름한 주홍색 불빛이 사방에 드리우고, 비 내린 뒤 축축한 공기 냄새와 죽지도 않았는지 풀벌레가 울어대는 소리만 가득했다.
캄캄한 옥탑방에 올라선 윤철은 물기 가득한 평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하늘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여기서는 별 잘 보이겠다. 윤철의 말에 한빈은 그 평상을 또 하염없이 응시했다. 그럼 저기 앉아 있다가 장하오가 별안간 손을 잡던 촬영 날로 돌아가는 것이다. 손바닥이 간지럽다 못해 이젠 따끔거렸다. 아, 세상에. 한빈은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대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다가 어느새 옥탑방 문 앞에 선 윤철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달려간다. 다른 건 아니고, 혹시라도 이 꺼진 옥탑방 안에 장하오가 있다면? 그가 자신에게 뭐라 말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장하오가 없다면?
한빈은 이제 화장실에서 도망쳤던 자신을 반쯤 원망하며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벌벌 떨리는 손이 손잡이에서 연신 미끄러졌다.
“안에 외계인 있냐?”
“외계인이라뇨, 아니라니까요.”
“네가 외계인이라며.”
긴장한 내색을 또 귀신같이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성한빈에게는 관심도 없는 건지, 윤철은 한빈이 부들부들 떨거나 말거나 산통을 깨며 작게 물었다. 본인이 분명 외계인이 아니라고 해놓고 이건 또 뭐란 말인가?
아, 형! 계속 외계인을 운운하는 윤철에 성한빈은 결국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동시에 새 여러 마리가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저 하늘로 훨훨 날아간다. 목청도 크네, 부럽다. 단조롭고 영혼 없는 윤철의 어투에 성한빈은 이제 한숨만 푹푹 났다. 그래서 안에 있냐고, 없냐고. 윤철이 피식대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속삭이는데 일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한빈, 하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닐 테지.
쾅, 문을 박차며 현관으로 나온 장하오가 멈칫거리는 것은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잠깐의 정적. 삐끗, 하고 굳은 몸이 서서히 성한빈 쪽으로 틀어진다. 동시에 노란 현관 등을 받은 한쪽 얼굴 옆으로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리우는데, 성한빈은 그 꼴을 보며 넋을 놓은 사람처럼 서 있다가 눈만 끔뻑였다.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고 감히 숨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풀벌레가 작게 울고 바람이 또 휑휑 불었다.
바람이 한 번 강하게 불자 제 것보다 옅고 밝은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성한빈은 손바닥이 갑자기 화끈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 순간이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 그 얇고 색소 옅은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눈에 들어오던 순간, 손바닥이 따끔거리기 시작하는 순간, 풀벌레 소리가 잠잠해지는 바로 그 순간……. 한빈은 뭔가 알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를 인정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은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딘가 저 깊은 곳에서는 그 자신조차 모르겠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것이 느껴지지만 여전히 그것이 무엇인지는 당최 알 길이 없다.
장하오의 얼굴 전체에 드리운 노랗고 주홍색의 빛은 지독하게도 잘 어울렸다. 다만 화장실에서 선명하게 자신을 관통하던 새카만 눈과 마주치자 성한빈은 머리가 하얗게 질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잠잠하고 조용한 시선은 정확하게 성한빈에게 고정되었다. 흔들리지는 않았다.
“…….”
그러더니 그 시선은 윤철에게로,
“…….”
느릿하게 다시 성한빈으로,
“…….”
다시 윤철에게로…….
“서른아홉, 장윤철.”
“…….”
“성한빈이랑 같이 연극하는 형. 매번 보러 오시는데 제 얼굴은 아시죠.”
“……‘형’?”
“형처럼 안 보이면 저야 좋고.”
윤철의 마지막 말에 적막이 이어졌다. 늘 무감하고 덤덤한 그가 하는 말이라고는 상상도 가지 않는 멘트에 성한빈은 황당한 낯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런 말은 대체 왜 하시는지? 붕어처럼 뻐끔거리면 윤철은 어깨를 으쓱인다. 장하오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하오 형, 윤철이 형인데.”
“…….”
“그,”
“됐다, 한빈아. 화장실 쓸 필요는 없겠다.”
“네?”
“……‘한빈’?”
“얘가 성한빈인데 그럼 뭐라고 부를까.”
윤철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성한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상황이 그저 몹시 당황스러워 안절부절 못하는데 윤철이 또 굳이 말했다. 간다, 자기 전에 씻어라, 너 감기 걸리면 다 같이 손해니까. 그리고 가디건은 너 가져. 이런 말들은 분명 차에서 내리기 전에도 하셨는데. 한빈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착실히 답했다. 네에, 들어가세요 형님. 그러자 윤철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오냐, 내일 보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놓은 그가 꼭 연극의 등장인물처럼 털레털레 퇴장하자 장하오와 성한빈만이 남은 좁은 옥탑방의 옥상에는 침묵이 도래했다.
한참, 윤철의 차가 시동이 걸리고 이 동네를 빠져나간 지도 오래. 장하오가 서 있는 현관의 등이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길 반복했을까, 문뜩 어딘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어쩌면 조금은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장하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어, 어어, 그게 말이야, 형.”
“알 것 같아.”
“뭐, 뭘?”
비냄새는 아직 남아있었다. 녹빛 옥상 바닥에는 물기가 가득했고 남아있는 축축한 공기에 풀벌레만 계속 운다. 바람이 좀 쌀쌀한데 장하오가 서 있는 현관의 등까지 다시 나가버리자 남은 것은 오직 어둠뿐이다. 제 앞에 서 있는 희미한 인영, 저 하늘에 뜬 미약한 달빛이 그런 것까지 죄 비춰줄 리는 없는데. 장하오의 새카만 눈동자가 이리도 선명하게 그를 꿰뚫는 것은 왜일까.
“혼자 남는 건 슬픈 일이야.”
“…….”
“슬프지 않게 해줄래.”
“……응?”
“떠날 때는 말을 해줘, 아무 말 없이 혼자 남겨지는 건 잔인한 일이야.”
그것은 분명 ‘혜진'의 대사였다.
성한빈은 멍청하게 서 있었다. 누군가 그곳에 영원히 자신을 세워두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단 한 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대로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어느 밤에, 장하오의 앞에서, 풀벌레 소리들과 함께, 이 녹빛 옥상에.
장하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서성이다가 뒤를 돌자 그제야 현관등이 돌아왔다. 너 그러다가 감기 걸린다, 그대로 공기에 깔려 바스라질 것 같은 작은 목소리. 웅얼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간 장하오는 거실의 불을 켜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털레털레 걷는 발소리 끝에 그 문이 쾅, 하고 닫히는 순간 성한빈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숨넘어갈 듯 큰 숨소리에 한빈은 비틀거리며 현관 옆 벽을 붙든다. 한 가지 의문이 저 달처럼 반짝였다.
나 숨을 참고 있었나.
왜?
숨을 겨우겨우 몰아쉬며 창백하게 질린 손가락으로 벽을 더듬어 봐도 답을 찾을 순 없었다. 새카만 눈동자, 그 눈동자. 맞잡던 뜨거운 손과 아무렇지 않게 제 입술에 닿던 손가락. 그 앞에서 입을 벌리고 있던 자신의 모습. 성한빈은 지난 몇 개의 기억들을 헤집다가 비틀거렸다.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한 것은 그때였다.
[너 좋아하네.]
[아까 그렇게 째려보던데 뚫리는 줄 알았다.]
윤철의 문자를 확인한 성한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현관등이 몇 차례 다시 꺼지고 켜질 때까지, 다리가 아파오다가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그러다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몇 개의 단어를 지우고 또 지우며 그는 눈만 끔뻑였다. 그래, 현실이 이대로 영영 멀어지는 기분이다. 손바닥의 뜨거움, 자꾸만 참아지는 숨 따위가 대체 뭐라고.
그래요, 형. 장 감독이 나를 좋아한다고.
[설마요]
그건 그냥 페르소나로서의 관심일 걸요.
장하오가 외계인이 아닌 것 처럼요…….
14.
[u*****: 2월에 계자랑 아는 사이라 첫공 보러 갔다가 남배 연기에 쌍욕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오늘 보니까 왜 늘었냐? 너무너무너무 잘해서 놀람……. 이래서 공연은 원캐스트로 해야 하나 봐. 노답 극본인데도 합 잘 맞고 연기만 따지고 보면 너무 좋음. 첫공보다 충격이 더 쎄다…… 성한빈 배우 다른 극에서도 기대할게요…… 잘생긴 청년 최고]
장하오는 더 이상 ‘오늘의 위성’을 보러오지 않았다.
별개로 4월까지만 해도 그대로 쳐망할 것 같던 ‘오늘의 위성’은 관객이 늘어만 가고 있었다. 다른 건 아니고 장윤철의 외계인 논문파트가 X에서 모 유저의 불호 트윗에 언급되었기 때문인데, 그 유저 특유의 신랄한 비판이 화제가 되며 일간에서 ‘어떻게 대학로 연극에서 논문 필리버스터가’와 같은 소소한 바이럴이 일었다. 정말 거대한 바이럴이 일어난 것은 머잖아 촬영 가능한 커튼콜에서 조용히 대포를 들고 온 익명의 찍덕에 의해 박제된 외계인 성한빈의 얼굴이었으니, 트윗이 올라가고 이튿날 객석이 매진되는 기염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회전문 관객으로 이어진 것이 지금 6월 말의 일. 막공까지 약 한 달 하고도 반 전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6월 말의 또 습하고 또 퀴퀴한 분장실, 성한빈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제작사를 통해 전달받은 편지들을 조용히 정리하고 있었다. 총 다섯 명이 보낸 편지였는데 너무 감동적이어서 몇몇 부분은 직접 핸드폰으로 찍기도 했다. 몇 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는 부분들은 갤러리에 모아 정리해뒀다. 그런데 갤러리를 정리하며 그걸 들여다보고 있으면 바쁘게 보내온 이번 년도의 기록들이 보이는 것이다. 장하오와 함께한 모든 것들은 전부 그런 기록에 속했다. 장하오의 손가락이 조금 삐져나와 찍힌 대본 사진마저 성한빈의 눈길을 오랫동안 붙들곤 하니까.
장하오는 화가 난 것일까?
화가 났다면 도대체 무엇에, 내가 아직 사과하지 않은 것에?
아니면…….
“영화는 안 찍어?”
윤철이 문뜩 물었다. 성한빈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얼빠진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요즘 아무래도 바빠서요.”
“대본 들어왔다며?”
“네엡.”
“대본 같은 건 막공 하고 나서 찾아봐.”
윤철의 말에 민영이 말을 덧붙였다. 유튜브에 올라간 우리 셋 라이브 영상 오늘 8천 회 찍었다. 그 말에 윤철이 짧고 여상하게 답한다. 나랑 영이는 아무리 나대도 천 회다. 역시 얼굴의 힘. 성한빈은 편지를 정리하는 손끝까지 열이 번지는 기분에 몸서리치며 윤철의 말을 부정하다가 민영에게 한 대 맞았다. 댓글에 전부 자기 얘기뿐이라나.
[아이돌 기획사에 있어야 하는 얼굴이 대체 왜 대학로에?]
└너무 잘생겼어요 한빈 배우
└어디 가지 마세요 제발요
그래도 내심 궁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성한빈은 화장실로 몸을 피신해 꽤 많이 달린 실시간 댓글들을 처음부터 하나씩 읽어보았다.
[얘 연기 ㅈㄴ 못했었는데]
└4월부터 폼 서서히 붙더니 요즘 신들림
└8월 15일까지 올라오는 오늘의 위성 지금 보러오세요 저 얼굴이 개노답 골 때리는 감정거세 고지능 싸패 외계인 말아준다
└저 사실 각성 이후만 봤어서 연기 못하는 성배우 상상이 안 가요
└좀 많이 못하긴 했어요 어제 낮공 생각하면 전생 같을 지경
└근데 잘생겨서 얼굴 구경만 해도 재밌을 것 같은데
└아냐 그건 아냐
└그땐 얼굴도 차마 그 연기를 쉴드 치지 못했음
└진짜 너무 못해서 얼굴만 봐도 화가 났었어
└씨발… 한빈 배우 눈 감아
“…….”
진짜 너무하네.
한빈은 짜게 식은 얼굴로 2월의 자신을 상상해보다가 말았다. 너무하지만 솔직히 인정합니다.
[아ㅋㅋㅋ 썸네일 성준영인줄 알고 들어옴!]
└성준영 22
└성준영 3333 근데 아이돌 버전인
└하필 성준영이랑 닮아서 ㅋㅋ 다시 돌아온 줄 알았어요 준빵…
└준빵 무대로 돌아올 일 없겠지ㅠ
└근데 한빈 배우 ㄹㅇ 준빵이랑 혈연관계 아님? 남동생 같다
한참 내려도 꽤 많은 댓글에서 ‘성준영’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성한빈은 댓글을 읽다말고 화면을 꺼보았다. 꺼진 화면 속에 비춰진 얼굴이 딱히 성준영 같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그러다 보면 민영 누나가 개 큰 고함을 지르던 날이 생각나서 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이다. 누나는 아직도 나를 싫어하시나? 내가 진짜 성준영 닮았나?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또 정신은 장하오와 함께 ‘지옥탈출소나타’를 보던 날로 돌아가 있다. 아, 또 장하오. 한빈은 마른세수를 하며 다시 화면을 켰다.
장하오 생각 그만할 거야, 이제…….
[근데 저거 각본은 되게 현실적임]
└보면서 너무 자세해서ㅋㅋㅋㅋㅋ 외계인이 실존하는 줄
└아 이거 ㄹㅇ 근데 좋은 뜻은 아니야
└저 못사인데 왜 좋은 뜻이 아닌가요
└약간 음습한 관찰 일지 같아요
└음습한 관찰 일지222 외계인 옆에서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빠짐없이 써놓은 것 같음 좀 소름끼칠 정도로
└진짜 극중 그 사회성 뒤진 크리피 매드 사이언티스트 혜진이가 썼을 것 같음 작가… 글은 못 쓰지만 캐빌딩은 진짜 잘하는 듯
└그래 작가가 애초에 글 잘 쓰는 사람은 아니야 근데 외계인 설정이 너무 실존하는 것 같아서 캐빌딩만 잘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22 그리고 혜진이 시점에서 보이는 외계인이 너무 매력적으로 보여서 캐뽕빨물 같은데 각본 방식은 진짜 과학자 같아서 기분 이상한…
└ㄹㅇ 이과감성 미쳤음 좋은 뜻은 아니야 논문체로 쓴 소설 보는 듯한
└어쩐지 성한테 감겨서 돈다 쳐도 진짜 극한으로 회전 도는 애들 다 공대생이더라
└이거 누가 썼어요?
└찾아보니 극본은 백혜진인데
└백혜진ㅋㅋ 아 필명인가? 개웃기다 진짜 극한의 컨셉 인정함
└근데 나 이거 진심으로 보고 엔딩에서 혜진이 보면서 울어주기까지 하는 애들이 신기함
└대학로에 이과극이 없다가 튀어나오니까 미쳐 도는 거야
└그러기엔 처음에 ㄹㅇ 좆망했었잖아요
└그건 성이 처음에 너무 말아먹어서
└한빈배우 제발 읽지 마세요
└비계에서 얘기하라고 미친 새끼들아 뭐하냐
성한빈은 부처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 밑으로 열린 콜로세움의 장을 무시했다.
[나 오월에 성한빈 배우가 영화 촬영하는 거 봤음]
└ㄹㅇ?
└어디서?
└헐 영화 찍는 성 ㅁㅊㅁㅊ
└마로니에 공원… 감독이 뒤지게 잘생겼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꽤 많이 달린 댓글들을 슥슥 넘겨보던 성한빈의 손가락이 문뜩 멈췄다. 밖에서 찍은 촬영본이라곤 비 맞으며 뛰었던 그날 밖에 없었다. 짧은 문장 하나에 장하오 생각 안 하겠다고 되뇌던 다짐이 전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성한빈은 다시 자신을 내려 보며 입 안에 하얗고 긴 손가락을 넣어 상처를 확인하던 장하오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
└저예산 영화 같았음ㅋㅋ 촬영하시는데 둘이 웃고 막 엄청 친해 보이더라
이젠 친하다고도 할 수가 없어서.
그렇잖아. 성한빈은 희미한 화장실의 조명을 받으며 생각했다.
그날, 비오는 날 이것처럼 희미하던 그 화장실에서 도망친 이후로, 그 옥탑방에서 숨을 영원히 쉬지 않을 것처럼 멈췄던 그 순간 이후로 그는 쭉 그래왔다. 대화는 줄고 잔뜩 어색해질 뿐이지, 그 전까지만 해도 성한빈은 장하오가 머잖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비록 그가 고향에 간다고 한다고 할지언정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믿었다. 왜냐면 그의 친구들 중에서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친해진 사람은 없었단 말이다. 매일 같이 웃고 떠들고 평상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별을 구경하고, 같이 넷플릭스를 몰아보고 희곡을 읽으며, 그는 눈을 반짝이고 자신은 깔깔대던 게 그 증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성한빈은 그가 더는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 사실과, 암묵적으로 중단된 촬영과, 자신이 그날 말없이 가버린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제 얹혀 산 뒤로 장하오가 꼬박꼬박 탁자에 놓아두던 돈 봉투마저도 없어진다면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카메라 테스트랍시고 이것저것 찍어대느라 서로 웃기 바빴던 날이라던가, 대본을 수정하며 같이 떠들던 시간이 아득했다. 이게 진짜 형 이야기냐며 묻기보다는 침묵을 택했던 밤들도 이젠 전부 손에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혜진의 대사처럼, 장하오가 다시 읊어줬던 것처럼, 아무런 말없이 혼자 남겨지는 것은 꽤 슬프고 잔인한 일이었다. 그래서 성한빈은 조금 울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서 울었다. 윤철이 그를 찾을 때까지 벽에 기대어 눈물을 벅벅 닦아냈다.
“…….”
공연을 하면서도, 대사를 읊으면서도…….
더 이상 뜨문뜨문 앉아 있지 않는 얼굴들, 공간을 가득 채운 얼굴들. 무언가를 느끼는 얼굴들 사이에서 텅 빈 공허를 보고 장하오를 보는 자신은 배우가 맞긴 한 건지. 성한빈은 커튼콜에서 조명을 받고 인사하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더는 이렇게 말없이 지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더울 정도로 내리쬐던 조명이 순식간에 꺼지며 암전되던 순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과를 해야겠다고. 말이라도 걸겠다고.
퇴근하는 길,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장하오를 만나러 가는 성한빈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극장가는 골목길 옆에 선 열댓 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부 웅성거리며 서 있다가 한빈이 등장하는 순간 환호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그에게 그보다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배우님 팬카페 생기셨어요. 잠깐 정적. 네, 넵? 얼빵하게 돌아온 그 답이 시작이었다. 일명 ‘퇴근길’은 2시간 동안 이어졌다.
장하오가 묻던 질문ㅡ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연기하는지ㅡ을 비슷하게 물으며 오늘은 어땠는지 어제는 어땠는지 묻는 팬들은 이제 진짜 가봐야 한다고 애원하는 성한빈의 목소리에 서운한 티를 내며 해산했다. 쩔쩔매는 게 귀엽다는 말을 육성으로 듣자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성한빈은 벌게진 얼굴로 감사하다며 열댓 명의 팬들이 전달해준 편지와 선물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선물은 또 왜 이렇게 많고 버거운지.
아니, 감사하긴 한데……. 열댓 명의 선물이 양손으로도 들기 부족한 게 말이나 되나?
한빈은 이 선물을 어떻게 집까지 들고 갈지 고민하며 그 골목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조금 후덥지근한 바람에 기가 빨려서 미약하게 헐떡이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하하, 아직 안 가셨나. 2시간을 시달린 성한빈이 조금 지친 얼굴로 돌아보면 그날 차가운 바람이 불던 날 그랬던 것처럼, 아직 켜지지 않은 가로등에 장하오가, 팬이라고 어눌하게 말하던 그날처럼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었다.
15.
“줘.”
“응?”
“들어줄게.”
“아아, 그……. 고마워, 형.”
말이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둘 사이에는 정적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란히 걷는 둘은 그 선물들을 바깥 손으로 잡고는 계속 말없이 걸었다. 이따금 안쪽 손이 부딪히거나 서로 스치는 일이 있었다. 아주 은근하게 스치는 일이 분명 있었다.
그러다가 장하오가 또 그 뜨거운 손으로 성한빈의 손을 움켜잡은 것은, 언덕을 오르던 때의 일.
가끔 환상통처럼 손바닥에서 기억처럼 뜨겁게 달궈지던 온도. 마주 잡은 장하오의 손은 기억하던 그 온도보다 더 뜨거웠다. 불시에 손바닥이 닿은 한빈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번뜩 몸을 떨다가 벌게진 얼굴로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원래는 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었는데.
“형.”
“응?”
“무슨 의미야?”
형 고향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의미 아니지, 그런 말은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용기가 나지 않았던 탓이다. 그럼에도 장하오는 답이 없었다.
옥탑방으로 향하는 언덕, 후덥지근하게 떨어지는 해가 이제 진짜 지려는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저 편으로 꺼지기 전의 햇빛은 가장 강렬하다. 눈이 멀 것 같은 빛을 이기며 언덕을 오르다보면 그것이 저 밑으로 꺼져 빛이 사라지며 세상은 다시 선명하고, 그러다가 또 빛이 쏟아져 세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장하오가 잡는 손은 꼭 그런 것과 닮아 있었다. 닿는 순간 세상이 보이지 않다가 멀어지는 순간 이렇게. 선명하고 차갑게 모든 것이 돌아온다.
강한 빛이 일렁이는데…….
“형, 영화는 왜 찍는 거야?”
“…….”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었어? 그게 누군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
근 한 달 간 너무나 궁금했던 것들이다. 몇 번 그에게 묻는 상상을 해봤던 대사들은 전부 매끄럽지 않고 한심한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구차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다. 진심은 언제나 구차하고, 성한빈의 진심은 구차함을 넘어서 찌질한 축에 속하는 법이니까.
염소처럼 흔들리는 목소리에 옥탑방 계단을 앞서 오르던 장하오가 멈춰 섰다. 그는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 하늘을 더듬거리며 살피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계단의 끝에서 서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으로 주홍색 빛이 아스라이 번져갔다. 돌아보지도 않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짓눌리는 기분을 받아본 적이 있나, 성한빈은 계단을 세 칸 더 앞 서 올라간 장하오를 올려 보며 실눈을 떴다. 장하오는 단 한 번을 그를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원래는 알았는데.”
“…….”
“나, 나 이제는 모르겠어.”
“다 찍고 고향으로 간다며.”
“그것도 모르겠어.”
애초에 나한테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길을 잃은 것 같고 좋지 못해.
어눌한 말투, 성한빈은 꼿꼿하게 서 있는 장하오를 올려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뜩 목구멍에서 어떤 말이 슬그머니 미끄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한빈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아주 고요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저 목구멍부터 기어 올라와 혓바닥으로 미끄러지더니 입술에 툭 걸쳐졌다. 맺힌 말이 기어코 떨어진 것은, 장하오의 뒤로 번지던 강한 노을빛이 순식간에 사그라진 뒤였다.
“형, 나 좀 안아줄래.”
그렇게 묻는 것은 장하오가 정말 세상에 혼자 남겨진 존재처럼 서 있어서.
성큼, 성큼, 계단을 오르며 팔을 벌리는데 돌아선 장하오가 별안간 유성처럼 그의 품으로 고꾸라졌다. 기절하듯, 쓰러지듯 안기는 품에 괜찮냐고 식겁하며 묻는데 그가 목덜미에 얼굴만 파묻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이는 움직임은 아주 연약하고, 순종적이다.
“…….”
처음으로 안긴 품의 인상은 성마르다. 혹은 나와 같은 향이 난다. 혹은 체온이 생각보다 높다. 목이 축축한 땀에 젖어있다. 그러니까 장하오는 외계인이 아니다. 오늘의 위성 속 외계인은 인간보다 낮은 온도를 가졌으니까. 장하오는 외계인이 아니다. 오늘의 위성 속 외계인은 절대 표정을 짓는 일이 없었으니까. 어딘가 울 것처럼, 아이처럼 입술을 자꾸 움찔거리다가 감쳐무는 이 서러운 온도가 외계인일리 없다.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리 생각하는데 장하오가 기어코 물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의 질문은 조금씩 맥락과 맞지 않다.
“내가 싫어?”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좋아?”
“그럼.”
“좋다는 건 무슨 의미야?”
“싫은 게 뭔지는 알고?”
“불쾌한 거.”
“그렇구나.”
장하오는 어딘가 숨 쉬는 것이 불편한 사람처럼 헐떡였다. 부둥켜안은 몸에서 심장 박동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헐떡대면 들릴 만도 한데, 바람만 휑하고 부는 이 계단에 들리는 것은 성한빈의 일정한 심장소리 뿐이었다.
“여기서, 너한테, 아니, 그래, 그러니까 좋은 건 뭐야?”
“……하면 즐겁고 웃음 나오는 뭐 그런 것들.”
“그게 진짜 좋은 거야?”
“사람마다 기준은 다 다르지.”
“왜 기준이 다 다른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 정신, 취향이 전부 다르니까. '좋음'은 그런 것에 의해 결정되거든.”
“결혼하고 싶은 것도 좋은 거야?”
“좋아하니까 결혼하고 싶어 하지, 보통.”
“그렇지만 네가 가진 희곡 중 좋아한다는 말로 청혼하는 사람은 없어. 뭐가 다른데…….”
가끔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다가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곤 했다. 그 간극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우며, 그가 묻는 것들이라곤 죄 당연한 것들이라 날 놀리는 거냐며 화라도 내고 싶지만, 이렇게 길게 대화하는 것이 ‘그날’ 이후 얼마만인가. 성한빈은 끌어안은 몸에서 조금 물러서 그를 바라보았다. 벌건 입술이 밑으로 하염없이 삐죽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피식 났다.
웃으면 화낼 것 같은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왜 그런 표정을 짓냐고 짜증을 낼 것 같은데, 피식 웃다가 한참 소리 없이 웃으면 장하오는 고개를 번뜩 들어 그 낯을 확인한다.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여간 슬픈 게 아닌 듯싶었다.
아마도 성한빈의 입시시절 희곡들을 들춰보다가 이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색하게 지내는 동안 장하오가 하는 것이라고는 영화 보기, 드라마 보기, ‘성한빈’ 이름 정자가 쓰인 그의 희곡 읽기 따위였으니까. 그는 이상하고 엉뚱한 사람이니까, 사랑이라도 궁금한가 봐. 한빈은 그를 달래듯 끌어안으며 조용히 말해줬다. 그가 아는 답은 그런 것이다.
“나 예고 준비할 때 친하게 지내던 여자애가 날 좋아한다고 고백하면서 그런 말을 하던데.”
“…….”
“‘한빈아, 지구가 멸망해 탈출하는 우주선에 올라탈 때 내 자리 옆에 태우고 싶은 건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자리마저 기꺼이 내어주고 싶은 건 사랑하는 사람이래.’”
“…….”
“걔가 나보고 옆에 타라고 그랬었거든. 근데 그게 제일 맞는 비교 아닐까? 좋아한다는 말은 조금 더 가볍지.”
왜, 형 우주선 옆자리에 나를 태우고 싶어?
성한빈은 품에서 장하오를 다시 떼어낸 채 그와 얼굴을 마주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꼭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장하오의 흔들리는 눈이 멈춘 것도 그쯤이었다.
“응.”
“그래. 나도 형이 좋아, 형이랑 영화 찍는 거 말고도 같이 함께 지내는 것도 좋아. 형이 고향으로 안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날도 있었어. 그날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근데 내 우주선 1인석인데…….”
“어?”
음.
성한빈은 자신의 진중한 사과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말을 끊으며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장하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새 '내 자가 우주선은 1인석' 같은 소리나 해대는 장하오에 어처구니없게도 안심부터 들었던 것은, 그 실없고 하찮은 말들이야말로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동거 기간 중 성한빈이 알고 있던 ‘장하오'였기 때문이다.
“우주선을 꼭 타야 해? 나 타기 싫어.”
“싫으면 타지 마.”
엉뚱한 말을 계속 늘여놓던 장하오는 비틀거리다가 다시 성한빈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겼다. 몸은 불덩이같이 뜨거웠다.
“감기 걸렸어?”
“난 그런 거 안 걸려.”
“감기 안 걸리는 인간이 어디 있어, 참 나.”
“…….”
“형 지금 열 나.”
“나도 알아.”
“안 아파?”
“머리가 녹을 것 같아.”
“언제부터 그랬어? 병원 가야지.”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성한빈은 어딘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은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부터 그랬냐고? 이거 꽤 됐어. 나긋나긋하고 어눌한 목소리에 한빈은 아연해졌다.
“뭐?”
“정말이야, 별 건 아니고 좀 쉬면 나아.”
“병원 끌고 갈 거야.”
“나 불체자야.”
“불체자 아니라며.”
“오늘부터 불체자 하기로 했어.”
“웃기지 말고.”
이후로도 어떤 말들이 작게 이어졌다. 그렇지만 그것은 장하오 특유의 어눌한 한국어가 아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나긋하고 다정한 투의 언어였다. 성한빈은 막연히 그것이 러시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그건 러시아일 것이다. 성한빈이 마음먹으면 배울 수 있는 세상의 언어일 테지. 속삭이듯 이어지다가 고른 숨소리로 변하는 그 다정한 언어를 곱씹으며, 한빈은 러시아어라도 배울까 고민했다. 그러면서 하염없이 장하오의 등을 쓸어 내렸다. 불체자여도 대신 숨겨주고 싶었고, 당장이라도 러시아어 책을 사고 싶었다. 한빈은 그게, 그 마음이 참 우습고 이상해서, 또 이해도 가지 않는데 그냥 우스워서 한참을 서 있었다.
친구에게 뭐 이렇게 까지 하나, 그렇지만 장하오는 소중한 친구였다. 해가 질 때까지 그런 생각을 했다. 장하오는 소중한 친구라고.
맞잡아 오던 뜨거운 손바닥은, 입을 헤집던 하얀 손가락은 아무래도 잊는 편이 나을 것이다.
17.
영화 촬영이 재개되는 줄 알았는데, 성한빈은 장하오가 건넨 카메라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촬영 안 해?”
“의미가 없어졌어.”
“…….”
“출연료는 꼭 챙겨줄게, 미안.”
“내가 지금 출연료 받자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
사실 영화 촬영하겠다고 덤볐던 것 전부 커리어와 출연료 때문이었으면서, 성한빈은 그 말을 뱉어놓고도 고작 몇 개월 전의 자신과 상반되는 논리에 헛웃음을 지었다. 분명 그때의 한빈이었다면 지금 이 상황을 보고는 장하오는 사기꾼이라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겠지만, 지금은 왜 그런 것보다 슬퍼 보이는 저 새카만 눈이 더 신경 쓰이는 지 알 길이 없었다.
“편지를 보낼 사람이 없어진 거야?”
“보낼 이유가 없어졌어.”
“왜 보내려고 했는데?”
“집에 가고 싶었으니까.”
“지금은 집에 가기 싫어?”
“……헷갈려서.”
뒤늦은 사춘기, 뭐 그런 건가? 한빈은 카메라를 이리저리 조작하며 여상하게 생각했다. 평상에 대자로 드러누워 하늘을 찍고 있으면 뭉게구름이 가득한 여름 하늘이 예쁘게 카메라에 담겼다.
“네가 말한 지구 온난화가 이런 거야?”
“‘이런 게’ 뭔데.”
“더워.”
통풍이 제대로 안 되는 옥탑방에 갇혀 있던 둘은 차라리 밖으로 나오는 쪽을 선택했다. 여름 하늘을 계속 찍으며 예쁘다는 말이나 남발하던 성한빈은, 그대로 몸을 모로 누워 평상에 대자로 드러누워 있던 장하오의 옆모습을 찍었다. 카메라가 평상에 수직으로 닿으며 영 구도가 별로였다. 아무래도 전문적이지 않아서 그런가, 하오 형은 잘만 찍던데. 입술을 삐죽거리며 카메라의 초점을 열심히 잡아보던 그때, 장하오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킨다.
“저거 너무 뜨거워.”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진다니까.”
“그래?”
“엉, 양산이라도 가져다줄까? 저거 너무 오래 쬐고 있으면 열사병으로 쓰러져.”
평상까지 끌어온 선풍기가 탈탈탈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도 돌아갔다. 이거 시원하긴 한데 너무 시끄러워. 볼멘 목소리에 성한빈은 당당하게 답했다. 어쩔 수 없어, 나 저거 갈 돈도 없는 거지야. 입에 겨우 풀칠하며 산다고. 그 말에 장하오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양산은 됐다고 웅얼댔다. 그러더니 성한빈이 한번 훑으려고 가지고 나온 너덜너덜한 ‘오늘의 위성’ 대본을 얼굴에 그대로 올려두는 게 아닌가. 눈 안 아파서 좋다, 흐물흐물한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그거 너무 꾹 누르면 얼굴에 볼펜 자국 묻는다.”
“코가 너무 높아서 어차피 잘 안 닿아.”
“그래, 장하오 얼굴 백억이다, 됐냐.”
“팔아서 그 돈으로 선풍기 하나 사줄게…….”
맴맴…….
매미가 들끓듯이 우는 소리가 옥상에 가득했다. 그대로 내리쬐는 햇빛에 달궈진 옥상이 옥탑방보다 시원하다니,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한빈은 천천히 장하오가 누운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따금 바람에 펄럭이는 대본 몇 장, 그러다가 느릿하게 다시 내려앉는 종이의 움직임. 성한빈은 ‘오늘의 위성’ 대본을 얼굴 위에 눌러놓고 미동도 하지 않는 장하오의 미약한 숨소리에 귀 기울였다. 색색, 배는 오르내리지도 않는데 어떻게 숨을 쉬는 건지 일정한 숨소리만 들렸다. 평상에 닿은 관자놀이가 아파질 때쯤 한빈은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이따금 하얀 구름이 무리 지어 떠다니는 것을 지켜보고, 구름에 하늘이 잠깐 가려졌다가 다시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형 그럼 이제 뭐하게? 눈이 시릴 만큼 푸르고 드넓은 여름 하늘에서 시선을 뗀 성한빈이 장하오가 있는 방향으로 아예 모로 누우며 한 질문이었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장하오는 얼굴을 덮었던 ‘오늘의 위성’ 대본을 평상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대본이 누르고 있었던 옅은 색소의 머리카락은 공기가 통하지 않았는지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고물 선풍기 바람에 붕, 꿈처럼 머리카락이 느릿하게 떴다가, 내려갔다가, 그러다가 이리저리 휘날리는데…….
“모르겠어.”
“…….”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삶은 항상 정해져 있는데.”
삶이 항상 정해져 있다는 말은 제법 귀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렸다. 아마 그가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난하고 젊은 배우여서 그런지, 그러는 와중에도 항상 정해지지 않은 모든 것들에 삶을 걸고 있어서 그런지. 쥐뿔도 없고 심지어 장하오보다 어린 주제에, 성한빈은 어떤 말이 홀린 듯이 뛰쳐나가는 것을 느꼈다.
“난 매번 모르겠던데.”
“그럴 수가 있어?”
“그냥, 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통장 보면 한 달에 기껏 십만 원, 이렇게 찍히면 내가 틀렸나, 하는 회의감이 들고 그렇지.”
“……그걸로는 못 살잖아.”
“그래서 안 해본 알바가 없지.”
“너는 연기하는 걸 왜 그렇게 좋아해?”
성한빈은 눈을 끔뻑였다.
“마냥 좋아하지만은 않아.”
“…….”
“후회할 때가 더 많지, 아니면 나는 왜 이렇게 못하나 슬퍼하다보면 그게 미워질 때도 있고. 괴롭기도 하고.”
“그거 진짜…… 이상하네.”
장하오가 천천히 눈을 내렸다. 새카만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영 이상했다. 그렇잖아, 그건 싫어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동시에 그런 걸 느껴. 이상해. 성한빈은 다만 그것이 사랑이라고 답하려다가, 장하오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오는 게 신경 쓰여서 입을 다물었다.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까지 다 사랑해서 그런 건데. 그러지 않으면 그냥 좋아하는 취미 수준으로 끝났겠지, 불투명한 미래에 삶을 거는 일도 없었을 거고, 아니다 싶었으면 바로 아이돌 기획사로 갔을 테다. 제아무리 아이돌로 데뷔한 제 동기 승우를 부러워해도 성한빈은 은연중에 알았다. 같이 가보자는 놈의 말을 비웃었던 건 연기를 향한 제 마음이 더 커서였으니까. 둘은 양립할 수 없다.
꿈이 뭐라고.
“됐어, 형. 앞으로 뭐할지나 생각해둬.”
“…….”
“다른 영화 찍고 싶으면 언제든지 불러도 되고, 형 영화면 출연료 없이……는 안 될 것 같고, 나랑 살아봐서 알잖아, 그, 내가 돈이 좀 많이 궁해서. 음, 그래도 그, 영화 엎었다고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동기들한테 물어보니까 영화 개봉 엎어지고 촬영 엎어지고 그런 게 워낙 흔한 일이라고 하더라. 나도 경험 하나 얻었다고 생각해야지, 뭐.”
“…….”
“그리고 감독님 마음이 바뀌셨다는데, 그것도 자전적인 경험으로 만든 영화가, 응? 내가 거기다가 무슨 말을 달겠어. 그러니까 그렇게 쳐져있지 않아도 돼. 그냥 출연료는 다음 달 월세랑 같이 주고…….”
“한빈아.”
가라앉아있는 목소리에 성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 나가려고.”
“…….”
“더는 얹혀살지 않겠다는 말이야.”
쏴아아아,
일순간 어디선가 아주 큰 바람이 불었다. 매미 소리가 뚝 그쳐서 세상이 고요한데, 장하오의 말은 모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어딘가 어눌했던 어투도 이젠 제법 자연스러우면서, 그 목소리와 내용은 꼭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동안 고마웠어, 진심이야.”
“…….”
“보여줬던 영화, 각본, 네 연기와 연극, 구워준 고기, 같이 하건 낭독, 설명해 주던 작품들, 그리고 그냥…….”
“…….”
“그날 안아줬던 거, 전부.”
맴, 맴, 맴…….
매미가 다시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성한빈은 새카만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매미는 아주 길고 또 길게 울었고, 한빈은 그 길고 귀 따가운 울음이 한바탕 지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떠난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장하오는 정말 갑작스럽고 충동적인 사람이다. 제멋대로 올 때도 갈 때도 갑작스럽다.
물음은 겨우, 아주 겨우 입에서 떨어지고,
“왜?”
“…….”
“집이 너무 더워서 그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거지인 걸 어떡해…….”
성한빈의 진심은 언제나처럼 구차한 것을 넘어서 찌질하기까지 하다.
“그런 게 아니야.”
“…….”
“진짜야.”
“고향으로 가는 거야?”
“…….”
“형 고향은 어디인데?”
“…….”
“가도 우리 다시 볼 수 있는 거지?”
마지막 말은 도대체 왜 붙였는지.
장하오가 외계인도 아닌데.
다만 장하오는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연해주라고 했었나. 새파란 하늘 아래로 그는 또 한 번 다른 세상의 것처럼 보였다. 평상 위,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다른 방향으로 엎어져 있는 둘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고, 매미가 울고, 바람이 휑 불었다. 그래, 한빈아. 내 고향은 연해주인 걸로 하자. 언젠가 우주에서 왔다던 여상한 목소리와 달리 그 말은, 조금은 떨렸던 그 말은 눅눅하고 습한 여름 공기 사이에 눌어붙은 채 허공을 유영하다가 그대로 흩어졌다.
18.
갔다.
“…….”
장하오는 정말로 가버렸다.
적어도 남은 달까지는 채우고 나갈 줄 알았는데, 다음날 장하오는 없었다. 탁자에 있는 꽤 많은 액수의 출연료가 끝이었다. 그의 번호도, 몇 개월 간 살았던 흔적도 전부 사라져 있었다.
성한빈은 미친 사람처럼 옥탑방을 뒤지고, 햇빛이 쨍쨍한 그 언덕을 달리며 장하오의 이름을 불렀다. 부르다 죽을 사람처럼 부르다가, 숨이 자꾸만 막혀서 마른세수를 하니 묻어나는 것은 전부 눈물뿐이다. 옥탑방 계단을 오르다가 지쳐 주저앉은 그는 장하오를 원망했다. 말이라도 해주던가, 갈 때는 말해 달라고 했었잖아, 혼자 남겨지는 거 무섭다며. 그렇지만 성한빈을 정말 슬프게 만들던 것은 장하오가 그에게 말을 해줬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성한빈의 눈을 아주 똑바로 쳐다보고.
“윤철 오빠한테 들었어.”
“예?”
“헤어졌다며?”
“네?”
분장실, 이젠 에어컨까지 막 틀어놔서 더욱 퀴퀴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히는데.
문뜩 들려오는 말에 성한빈은 하도 많이 봐서 이제 걸레조각이 된 듯한 대본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민영을 돌아보았다. 요 며칠 집중 안 하냐며 갈구던 말투는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다. 한빈은 이상함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헤어졌다고요?”
“아니야?”
“제가요?”
“첫째, 피골이 상접. 둘째, 하루 종일 핸드폰 들여 보며 뭘 계속 초조하게 확인함. 셋째, 자꾸 집중 못함. 넷째, 마지막 씬 끝나고 커튼콜마다 자꾸 추하게 눈물 질질 흘림…… 더 말해줘?”
“아뇨, 괜찮아요.”
한빈은 고개를 푹 숙이며 다시 탁자에 올려둔 대본을 주웠다. 지난 이주 간 자신의 상태를 말로 직접 들으니 얼굴이 벌게질 지경이었다. 물론 윤철이 무어라 민영에게 말했을 지는 대충 예상 갔다. 또, 맨날 먹는 땡초김밥을 우물거리면서 여상한 말투로 그러셨겠지. 야, 한빈이 그만 갈궈라, 걔 헤어졌어. 그러면서 장하오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넌저시했을 것이다. 윤철은 이상하게도 다 알고 있었다. 한빈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하면 코웃음을 치고, 와중에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게 이상하다고 말한다면 또 눈썹을 들어 올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겠지.
넌 얼굴에 다 티가 나서, 그리고 이 세상 사랑 이야기는 다 뻔하고 진부하지, 뭐.
“……진짜 얼굴이 죽상이네.”
“사귀는 사이 아니었어요.”
“그래, 부정하는 그 마음 이해한다.”
“아…… 진짜.”
어딘가 부드러워진 민영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한빈은 죽을 맛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좀 허한 거예요. 사귀는 사이 아니었어요. 둘 다 남자였다구요. 그럼 민영은 윤철과 똑같이 코웃음을 쳤다. 다만 좀 과격하게.
지랄, 둘이 아주 사랑을 하는데 뭐래.
“누님, 진짜 아녜요. 애초에 누님은 장하오 모르잖아요.”
“알긴 알지.”
“왜 아시죠?”
“그야, 씨발 맨날 1열 중앙에서 너만 쳐보고 있던 잘생긴 남자를 어떻게 모르니. 애초에 미남은 멸종 위기라서 모를 수가 없어요, 그리고 한 번 보고 잊을 만한 얼굴이 아니더만. 그 얼굴로 맨날 왔었던 관객인데 내가 왜 몰라, 스텝들도 그 새끼는 바로 알아.”
진짜 이거 끝나고 ‘최다 회전문 관객’ 이런 거 뽑으면 무조건 그 남자야, 알아? 와다다 쏟아지는 민영의 앙칼진 목소리에 성한빈은 움츠러들었다. 입술을 삐죽이는 한빈을 본 민영은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조금 누그러진 듯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막공 거의 한 달 남기고 이별이라니.”
“……에휴, 아니다, 됐어요. 그냥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됐어, 차라리 잘 됐지.”
민영이 한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성한빈은 의자에 반쯤 걸터앉은 자신을 내려 보는 눈에서, 무대든 백스테이지든 항상 날 서 있던 그 눈에 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13년을 만났다며, 한빈은 문뜩 자신과 닮은 한 배우를 떠올렸다. 나를 보며 성준영을 보시는 걸까? 시선을 슬슬 피하면 민영이 웃는다.
“왜 피하고 지랄이야. 뭐 사고 쳤니?”
……됐다, 진짜.
“아뇨, 그냥 지난번에 하신 말씀이 떠올라서요.”
“아.”
“그…….”
“이제 보니까 안 닮았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눈이 묘하게 아프다.
“잘됐어.”
“…….”
“연기 늘 거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서른 먹고 이런 본격적인 이별이 처음이라 괜찮아지는데 까지 1년은 족히 걸렸어. 너는 어리고, 얼마 되지 않은 인연이니까 금방 털겠지.”
“……그, 자꾸 착각하시는 거 같은데,”
“그래, 모름지기 이별의 첫 단계는 보통 부정이란다.”
“……됐어요.”
민영이 푸스스 웃었다. 그건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이별을 너무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마. 누군가의 연기는 곧 누군가를 투영함으로써 자아를 반영하는 법이고, 그 자아는 경험으로 축적되는 거니까.”
윤철과 민영이 성한빈을 걱정해 하는 말들 전부 장하오와 그의 관계를 착각해 하는 것들인데, 대충 걸러 들으려던 성한빈은 이상하게 민영이 마지막으로 건넨 말을 듣고 몸이 굳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민영의 목소리는 그대로 귀로 들어와 절대로 빠지지 않을 것처럼 박혔다.
이별로 연기가 는다고?
눈앞이 일렁거렸다. 어떤 경험은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을 늘려준다는 말도, 그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하오의 얼굴도 전부 가시질 않았다. 영원히 남아 머물 것처럼 그를 괴롭혔다. 기억들은 상당히 연쇄적인지라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불러왔다. 요컨대 우리 같이 미친 듯이 뛰었던 오월, 빗속에서 크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 목소리, 제 입으로 들어오던 하얀 손가락과 숨이 자꾸만 무의식적으로 멎던 순간들. 하릴없이 누워있던 평상과 그 위의 밤하늘, 머리 위로 지나가는 바람과 시답잖은 이야기, 혹은 너털웃음. 그러니까 어떤 ‘경험’.
민영의 말이 저주처럼 들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연기가 자신을 투영한다는 말은, 자아가 반영된다는 말은, 살아온 인생과 경험은 ‘자신’이 되고 연기가 된다는 말은 곧 그가 무대에서 존재하는 모든 순간에, 배우로써 살아 움직이는 모든 순간에 ‘장하오’가 녹아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이런 서러운 순간에서조차 그를 떠올리게 되고, 그와의 모든 기억이 성한빈 그 자신이 되어버리고, 그러면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민영과 윤철도, 모두 이런 기억과 마음을 가지고 무대에 서는 것일까?
“그리고 내가 봤을 때 뭘 계속 착각하는 건 너인 것 같아.”
“네?”
“그거 사랑이야.”
“……아뇨, 그,”
“사랑 맞다니까. 보니까 영혼이 아주 통째로 흔들리고 있는데, 뭐래.”
“…….”
“잘 생각해봐. 잡을 수 있으면 잡으라는 말이야, 찾아가라고. 뭐 때문에 헤어졌는지는 몰라도.”
민영이 한빈의 어깨를 툭툭 치며 분장실을 빠져나갔다. 성한빈은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분장실에서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날씨가 흐리다. 아무도 없는 분장실에서 적막이 흐르는데, 한빈은 멍청하게 눈만 끔뻑였다. 목이 졸린 듯한 말은 한참 뒤에야 튀어나온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데.
반사적으로 고개가 하늘을 향해 들렸다. 하늘이 연해주일리는 없는데, 성한빈은 문뜩 그 전부터 자신은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연기도 지금보다 훨씬 못하고, 선배들과 스텝들은 자신을 싫어하며 후기에는 항상 제 욕, 제대로 가질 수도 없는 일자리와 다른 아르바이트로 겨우 이어가던 생계.
그래, 그때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었나. 같이 아무 걱정 없이 웃고 떠들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었나. 장하오는 성한빈에게 그런 ‘사람’으로 명명되었었나. 저처럼 꿈 때문에 한참이고 방황하는 '사람'이 또 존재한다는 확신이 필요했는지, 설령 나를 떠나 고향으로 가더라도 원한다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는지. 그래서, 그걸 기어코 깨는 게 무서웠나…….
“…….”
연해주도 엄청 넓잖아요.
저 하늘만 봐도 저렇게 넓은데, 저는 그럼 못 찾죠.
답을 줄 민영은 없고, 오직 성한빈만 있었다. 흐린 하늘을 계속 올려 보던 성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름을 지나는 길고 이른 장마가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의 일이었다.
19.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장하오는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던 어느 밤에 나타났다.
“…….”
아니다. 저것을 ‘나타났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요일 저녁, 퇴근하고 돌아온 성한빈은 제 옥탑방 옆으로 난 좁고 어두운 골목길에 엎어진 형체를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한 달? 아마도 한 달일 것이다. 한 달 만에 보는 게 저런 모습이다. 투명 우산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 한빈은 하얗게 질린 제 손가락을 몇 번 꼼지락거리다가 겨우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떤 형체. 굵은 빗줄기가 튀기듯 선명한 모양을 내며 그의 위로 쏟아지고, 어둠 속에서 새카만 옷을 입고 잔뜩 움츠린 몸은 미동도 없었다. 다만 그 몸을 보고도 그것이 장하오라고 확신한 것은, 빗물에 푹 젖은 머리카락이 장하오 특유의 옅은 색을 띄고 있어서.
“……형.”
“…….”
“장하오, 뭐 하는 거야.”
장하오,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빈은 창백하게 질린 손이 벌벌 떨며 장하오를 흔들었다. 짚어본 맥이 아예 뛰고 있지 않아서 그런가, 심장 소리가 느껴지지 않자 한빈은 덜컥 두려워졌다. 그는 다급하게 장하오를 깨웠다. 우산도 내던져 놓고 그를 흔들었다. 우산 없이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물은 따갑기까지 해서, 장하오는 대체 얼마 동안 여기 쓰러져 있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아서. 원래 정상 체온보다도 더 뜨거운 온도를 가지고 있던 몸은 차갑고 싸늘해서…….
왜 항상 비현실적인가. 성한빈은 축축 쳐지는 그의 팔과 몸을 똑바로 세우면서 장하오의 이름을 외쳤다. 쏟아지는 폭우가 목소리까지도 전부 집어삼키고 있었다. 뺨을 두어 번 치고, 정신 차리라고 몸을 흔들고, 그러다가 정말 죽은 건 아닌가 싶어 덜컥 두려워져 핸드폰을 찾는데 제 품에 기대어 있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러더니 연신 기침을 해대기 시작한다.
성한빈은 다급하게 우산을 들어 장하오가 비를 맞지 않게 했다. 투명한 우산 위로 가로등 빛이 그대로 쏟아졌다. 정신이 돌아온 건지, 장하오는 주저앉아 고개를 떨어뜨린 채 심한 기침을 했다. 한빈은 아스팔트를 짚고 있는, 하얗게 질린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괜찮냐고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장하오가 다급하게, 아주 재빠르게 그걸 쳐내지만 않았다면 분명 또 물었을 것이다.
“…….”
탁, 내쳐진 손이 허공에 머문다. 이해할 수 없다. 한참이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기필코 인지하는 순간, 눈가가 뜨끈해졌다. 목이 따갑다.
“……괜찮아?”
자존심도 없는지, 긴 침묵 끝에 겨우 묻는 목소리가 미친 듯이 떨렸다. 장하오는 성한빈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더듬거리며 자리를 뜨려 했다. 그걸 보고 있자면 감각이 멀어진다. 꼭 어항에 갇힌 물고기처럼 제 모든 감각이 아득해지는 것이다. 빗소리도, 제 발로 스미는 불쾌한 빗물의 느낌도, 제 심장 소리도.
지구를 집어삼킬 듯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성한빈은 마르고 창백한 낯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쳐진 손도 빙그레 웃던 낯도 전부 꿈처럼 멀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대체 왜 여기 있는지, 어디 아픈 건지,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그렇지만 그 질문들 사이에서 설움이 머리를 번뜩 들었다.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르자 멀어졌던 세상이 다시 가까워졌다. 느리게 감아놓은 세상이 빠르게 제 속도를 찾아가고, 귀가 터질 듯한 빗소리가 들리고, 하수도로 물이 미친 듯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뺨에 조금은 차가운 빗물이 후두둑 묻는 게 느껴지는데.
“이제 내가 싫어?”
설움이 어쩌자고 먼저 튀어나온다. 다만 그렇게 말하니 모든 게 다 서러워지는 것이다. 장하오가 없던 한 달도, 그 한 달 동안 제가 연기했던 ‘외계인’도, 제 위로 펼쳐진 막연한 여름 하늘도, 하도 매만져서 모퉁이가 닳은, 출연료가 담긴 봉투도 전부. 장하오가 쳐낸 손이 괜히 아팠다.
우리 그렇게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니었잖아, 분명 어디론가 간다고 하지 않았냐고. 우리 같이 지내는 동안 제법 즐거웠지 않았던 거냐고. 내 인생에서는 가장 즐거운 날들이었는데, 비록 완성되지 못한 영화여도 그것조차 좋았는데.
장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한빈은 그 작고 느릿한 움직임에 심장 어딘가 큰 부분이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 동안 비가 떨어지는 소리만 났다. 한빈은 무엇이 잘못 되었나, 어디서부터 그래왔나 기억을 계속 더듬었다. 갑자기 바뀐 태도에 장하오의 태도에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그래, 아무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을 보니 아무것도 묻지 말고 보내줘야 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뺨에 닿는 차가운 빗물 사이로 너무 뜨거운 무언가가 닿더니 그대로 턱 끝까지 흘렀다. 그 뜨거움에 눈앞이 흐려지는데, 장하오의 얇은 옷으로 파고드는 거센 빗줄기는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올라가자.”
“…….”
“감기 걸린다니까, 올라가서 씻어.”
“난 그런 거 안 걸려.”
“그럼 옷이라도 갈아입어. 내거 줄게. 그리고 가든지…….”
“…….”
“그냥 가버리든지, 해.”
벌벌 떨리는 목소리에 장하오는 몸을 일으켰다.
성한빈은 멍하니 먼저 올라가는 장하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뺨 타고 흐르는 것 반이 빗물이고 반이 눈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하오에게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불이 안 켜져.”
“정전이야, 비 많이 오면 그래.”
문을 닫자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며 내는 소음이 먹먹하게 멀어졌다. 다만 남은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이다. 성한빈은 조용히 어둠을 응시하며 눈이 적응되길 기다렸다. 어차피 금방 있으면 돌아올 거야. 어두운 거 무서워 해? 한빈은 괜히 켜지지도 않는 불을 켜놓고는 물었다. 애써 우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코가 먹먹한 목소리를 숨긴 질문에는 딱히 그렇지는 않다는 답이 돌아온다.
성한빈은 잔뜩 비에 젖은 제 옷을 벗었다. 반팔 한 장을 망설임 없이 벗을 수 있던 것은 정전으로 이 공간 전부 어둠이라서. 한빈은 비틀거리며 반팔을 바닥에 던졌다. 얼마나 빗물에 젖었는지 철퍽, 하는 소리가 났다. 눅눅하고 습한 집안, 한빈은 옷장을 찾아 더듬거리며 벽을 짚었다. 이번 정전은 얼마나 오래갈지, 그래도 금방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손에 잡히는 반팔을 대충 입은 한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옷 벗어, 옷 줄게. 작게 중얼거리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왜 거기 있던 거야.”
“…….”
“그럴 때는 병원을 가야지, 여기 왜 있냐고.”
“…….”
“나 싫다며.”
마지막 말은 물기에 젖어 엉망으로 흐려졌다. 싫다면서 간다는 말을 할 때 고맙다는 말은 대체 왜 했는가. 서러움이 한빈을 덮쳤다.
“……내가 왜 싫은데?”
박자를 놓치고 뒤늦게 튀어나온 말은 또 지독하게 찌질하다. 한빈은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자꾸 뺨을 타고 뜨거운 무언가가 줄줄 흐르는 것을 느꼈다. 형, 나 진짜 이해가 안 가서 그래. 우리 좋았잖아, 그래서 나보고 우리 같이 영화 찍자고 한 거 아니야? 형은 나랑 같이 있는 게 안 즐거웠어? 그럼 나한테 고맙다는 말은 왜 한 거야?
말은 '쏟아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온통 설움 투성인, 숨 한 번 쉬지 않고 쏟아낸 말이 끝나자 어둠 속에서는 숨을 헛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집, 정적과 정전, 빗물.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직 형체가 있을 뿐이다. 자신과 닮은 어떤 어스름한 인영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저 닮은 어떤 존재가. 서로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어이 입을 연다.
“……불쾌했어.”
“내가? 대체 어디가?”
“나오기 전에, 그쯤부터 너랑 있으면 자꾸 어지러워서 토할 것만 같았어.”
“뭐?”
“너랑 같이 있는 거 좋았어, 그런데 네가 좋다고 마, 말하기엔, 이렇게 비효율적일 순 없잖아. 이렇게 너한테 모든 신경이 갈 리가 없잖아. 그건 좋은 게 아니라 불쾌한 거라고…….”
어딘가 질질 늘어지는 말. 정전.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빗소리.
성한빈은 어둠을 직시했다. 저 어둠 속에 서 있는 장하오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한빈은 거센 빗소리에도 묻힐 만큼 작고 떨리는 목소리에 자꾸 심장이 일렁인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전부 토해낼 지도 모른다. 메스꺼움인지, 부글부글 끓다가 쏟아져 내리는 어떤 깊은 감정의 양인지 알 수는 없다.
그와 자신이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디 한둘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키도 비슷했고, 영화와 연극을 좋아한다는 것도 비슷했고, 고기를 좋아한다는 것도 그랬다. 뽑자면 비슷한 것이야 많았다. 급속도로 친해진 것들은 전부 닮은 점들이 많아서 그렇다고 믿었다. 성한빈은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 우두커니 서 생각했다. 저 앞에 있는 이가 무슨 표정인지 보이는 것은 없다. 어둠 속에서 그가 내뱉는 말들은 성한빈과 너무 다른 것이다. 성한빈의 생각과는 아득하게도 멀며, 그의 세상과 전혀 다르며, 그와는 맞지 않았다. 그러니까 문뜩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야 말로 그를 제대로 보는 것 같다고, 장하오를, 그 진짜 모습을.
‘네가 알고 있는 게 전부는 아니야. 우주는 넓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오늘의 위성, 성한빈은 반 년 가까이 함께하고 있는, 가끔 밉고 가끔 귀엽고 언제나 사랑해 마다않는 제 캐릭터를 생각하며 속으로 조용히 어떤 대사를 읊었다. 알고 있는 게 전부는 아니고, 우주는 어떤 방식으로든 네 생각보다 넓을 것이다. 그래, 그건 ‘외계인’의 말버릇 같은 대사였다. 제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목소리는 상상도 가지 않았는데, 한빈은 그것이 천천히 어눌한 어투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설설 끄덕였다. 이것은 성한빈이 아니라고 우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기다렸던 장하오의 말은 곧장 이어진다.
“내 고향에서는 누군가의 생각이 담긴 글을 읽는 건 천박해. 왜냐면 그런 것들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감정은 이성을 방해하므로 문명의 발달을 저해시키니까…….”
“……그래.”
“내 고향에서, 우리는 모두 약물을 처방 받아, 맞으면 그래, 아무것도 안 느껴져. 그 상태로 일을 한다는 것은 아주 효율적이야. 왜냐면 고통도 슬픔도 즐거움도 없으니까.”
“…….”
“혜진도 몰랐을 거야, 그래, 이곳으로 떨어진 뒤부터 나는, 나는 가지고 있던 약물을 다 써버렸어. 혜진을 떠나기 직전 비상 상비약까지 전부 사라졌다는 걸 알아버렸거든. 약을 안 먹으니까 열이 오르고, 감각이 예민해지고, 그 상태로 고향에 돌아가 봤자 뻔해, 내 취급은 정말로 뻔했다고.”
성한빈은 묵묵히 서 있었다. 정전으로 캄캄한 집안은 꼭 무대 뒤 백스테이지 같다. 한빈은 그곳에 서서 제 무대를 생각했다. ‘오늘의 위성’ 무대 위에 서 있는 ‘외계인’의 모습은 그 자신이 아니라 장하오로 변해간다.
“그런데 나는 고향으로 가야 했고, 그런데 내 취급을 생각하니 갑자기 무서운 거야.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는데, 무서워서 뛰쳐나갔어. 무섭다는 것을 처음 느끼는 순간, 그게 진짜 무서웠어. 뭔가가 두려웠던 적은 없어, 우주를 떠돌 때에도, 불시착한 순간에도,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고.”
“형, 울어?”
“이게 우는 거야? 눈가가 너무 뜨거워.”
두서없이 쏟아지는 말들은 간단했다. 극본은 장하오의 이야기, 제가 사랑했던 극의 인물도 전부 장하오, 영화를 만들려던 것은 정말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이딴 짓을 벌일 만큼 화가 잔뜩 난 혜진에게 해명을 하기 위해서. 또 용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혜진이 대본에 애초에 그가 고향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냈다고 적어 놓았으니까. 오직 그러려고 시작한 영화.
영화를 접었다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있지, 가끔 네 목소리를 들으면 정신이 아득해.”
“…….”
“가끔 네 숨소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랗게 들려.”
“…….”
“언제나 수많은 지구인들 사이에서도 너를 한눈에 알아봐, 얼마나 많은 군중에 있더라도…….”
“…….”
“처음에는 그냥 마냥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이건, 좋은 게 아니라 나에게 불쾌한 감각인 거고, 불쾌한 건 싫은 거잖아. 그런데 싫다고 말하면 아파. 그러니까 난 네가 싫은 거야…….”
안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렇게 느끼는 주제에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 무슨 마음인지 알고 있다.
"그러니까 네가 싫어, 나는......."
헐떡이며 얼굴을 벅벅 닦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 몸짓이 보였다. 성한빈은 본능적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옷만 갈아입히고 보내겠다고, 아니, 그렇다면 꽤 오래 후회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비틀거리는 몸이 계속 앞으로 나아다가 누군가와 부딪히는 순간, 성한빈은 그 몸을 더듬거리며 붙잡고는 다급하게 입을 맞췄다.
장하오의 것은 차갑고, 물기가 젖어있었으며, 경직되었지만 닿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 정확하게 사랑하고 있다. 빠짐없이 맞물리는 입술처럼 정확하게, 똑바르게, 성실하게 사랑하고 있었다. 그건 사랑이다. 한빈은 머리가 하얗게 질린 상태로 입술을 떼어내며 그를 끌어안았다. 축축한 물기가 그의 턱에 닿는다. 장하오가 벌벌 떨다가 제 손을 꽉 잡아왔다. 영영 놓지 않을 것처럼, 뜨거운 손바닥을 마주 잡으면서. 장하오는 한 번도 그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한빈은 그게 무엇인지 정말 알 것 같았다.
“형, 그건 불쾌한 게 아니라 낯선 거야.”
“…….”
“속절없이 흔들리는 거, 좋아하다 못해 사랑한다는 감정을 느끼는 거, 그게 낯선 거라고.”
비가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전등에 지잉, 하는 소음이 들렸다. 냉장고에도 동시에 소음이 돌아온다.
“너,”
“그거 사랑이야.”
“…….”
“지구에서는 그걸 사랑이라고 불러.”
화장실 불이 탁, 들어오며 장하오의 얼굴에 빛이 드리우는 순간 성한빈은 웃었다.
8월 15일, ‘오늘의 위성’은 전석 매진으로 마무리되었다.
조명, 노래, 오케스트라, 연기, 그리고 아마도 객석을 바라보면 1열에서 언제나 처럼 흐릿하게 앉아있을 낯. 한빈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대본으로 다시 부채질을 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