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아워
쿄이
뻐꾸기시계가 고장 났다 . 한빈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에 있었던 뻐꾸기시계는 친할머니의 유품이었다 . 몇 번의 이사 끝에 세월의 흔적을 맞이한 뻐꾸기시계는 한빈이 고등학교를 입학할 무렵부터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 12 시 정각이 되면 어김없이 뻐꾹뻐꾹 울던 시계는 새벽 두 시가 되면 울기 시작하였고 , 괜히 손을 댔다가 시계가 더 고장이 날 것이 두려웠던 아버지는 시계를 고치지 않은 채 그대로 몇 년을 두었다 . 모두가 잠든 시간에 우는 뻐꾸기시계에 대한 미운 마음도 불만도 없었다 . 덕분에 새벽 두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새벽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뻐꾸기시계가 고장 난 그때부터 고등학교를 들어가며 부모님이 입학 선물로 사 주신 은색 라디오카세트로 라디오를 듣는 게 버릇이 되었다 .
장마가 다 지나간 계절임에도 까만 하늘에 무참히 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 뻐꾸기 우는 소리에 일어난 한빈은 열린 창문을 보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예고도 없는 비였다 . 일기예보에서 비가 내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 제멋대로 내린 비는 미처 닫지 못한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 . 빗물이 창틀 사이를 파고드는 소리가 들리자 한빈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에 손을 대었다 . 까만 하늘은 무심하게도 천둥을 쳤다 . 깜빡거리는 빛과 온몸을 억누르는 소리에 놀란 두 눈을 질끈 감고서 몸을 움찔거렸다 . 신호탄이라도 된 듯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멈출 줄을 몰랐다 . 괜한 오싹함에 한빈은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 살갗을 드리우는 무서움에 재빨리 은색 라디오카세트의 전원을 켰다 . 은색 라디오카세트에서는 홍은철의 영화음악이 진행되고 있었다 . 비 때문에 전파가 잘 통하지 않았던 탓인지 라디오카세트는 소리가 끊겼다 연결되었다를 반복했다 . 스피커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던 라디오카세트는 안테나 방향을 바꾸고 나서야 자리를 잡아 디제이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
‘... 꼭 잃어버린 계절을 찾은 듯한 기분이죠 . 장마철처럼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으니 하늘이 개고 나면 다시 한번 여름이 찾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 첫 곡으로 한석규의 8 월의 크리스마스 , 들려드리겠습니다 .‘
노래의 전주가 나오기도 전에 전파를 잃은 라디오는 소리가 툭 끊겨버렸다 . 라디오가 고장이 난 건가 싶어 손바닥으로 라디오카세트의 옆구리를 툭툭 쳤지만 좀처럼 전파를 찾지를 못하고서 치지직 소리를 냈다 . 나중에는 노이즈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연결이 끊겼다 . 라디오 소리가 채우던 방안은 고요했다 . 빗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숨 쉬는 것이 어색할 정도였다 . 라디오카세트를 아무리 건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 결국 , 포기한 한빈은 라디오카세트의 전원을 껐다 . 잠이 전부 달아나버렸지만 침대에 누워야만 했다 . 라디오가 없는 새벽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한빈이 코드 선을 뽑고서 마루바닥에서 한 발자국 떼자 문밖으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 누군가가 올 일이 없는 새벽이었다 .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지만 , 두 번째 초인종이 울렸을 때는 의심을 할 수 없었다 .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한빈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거실에 있던 인터폰에 불빛이 켜져 있었다 . 한빈보다 먼저 나온 부모님은 인터폰 속 얼굴을 보고서 몸이 얼어붙었다 . 까만 밤 인터폰 속 파란색 불빛이 거실을 밝힌 것은 한참 동안의 일이었다 . 그리고 다시 초인종 소리가 들렸을 때 ,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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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태양을 한 번 돌면 일 년 .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돌면 약 한 달 . 부모님이 한빈에게 허락을 구한 시간이었다 . 스무살을 일 년가량 남겨둔 1999 년이었다 . 21 세기가 도래하기도 전에 서울에 아파트 몇 채를 가지고 있을 만큼 잘 되던 아버지의 건설 사업은 외환 위기를 맞이하면서 부도가 났고 , 아파트를 헐값에 팔아 빚 갚는 일에 탕진해야만 했다 . 더는 서울에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부모님은 한빈에게 말했다 . 딱 일 년 하고도 한 달이라고 . 네가 대학교 입학할 때엔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 보겠다고 . 부모님은 울먹이며 말했다 . 작아지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니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따질 수도 없었다 . 한빈이 선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 그렇게 상자 가득 자신의 옷을 담으며 열아홉 인생에서 평생 정을 붙이고 살던 서울을 벗어나야만 했다 .
짐을 가득 실은 파란색 용달차는 동서남북 어느 쪽인지 모르는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집안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 고층 건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논밭 위로 소복이 쌓인 눈은 곧 3 월이 다가온다는 것도 잊게 하였다 . 꼭 크리스마스가 다시 다가온 것만 같았다 . 한빈은 창문 밖으로 손을 뻗으며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바람을 맞이하며 생각했다 . 지구가 태양을 한 번 돌아도 , 달이 지구를 한 바퀴를 더 돌아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 이름 모를 마을에 도착했다 . 지어진 지 오래되어 보이는 주택 앞에 선 트럭은 요란하던 시동 소리를 줄였다 . 빨간 지붕이 인상적인 집이었다 . 차에서 내려 집 안에 들어섰다 . 집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탓인지 사람 냄새 하나 나질 않았다 . 주인 잃은 오래된 장식장도 있었다 . 사람이 살았던 것 같은 따스한 온기는 없었지만 집안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 한빈은 트럭에 있던 짐을 나르던 아버지를 붙잡고서 물었다 . 아빠 , 여기가 어디야 ? 단순히 지역명을 묻는 말이었는데 아버지는 짧은 고민을 하고서 한빈에게 대답했다 . 친할머니 집 .
그제야 두 발로 딛고 있던 그 지역이 할머니 산소 근처라는 걸 깨달았다 .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집을 팔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던 , 가족들조차 아무도 발을 들어서게 하지 못하고 아버지 홀로 오고 가던 안식처였다 . 태어나면서 할머니 집은 구경 한 번 하지 못했는데 , 상황은 아버지 홀로 아픔을 식히던 공간에 초대하고 만 것이었다 . 아버지는 조용히 들고 온 뻐꾸기시계를 벽에 거셨다 . 말주변이 없어 아버지에게 위로를 덧붙이지 못했다 .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 짐을 옮겼다 . 낡은 나뭇결을 따라 남겨진 세월의 흔적은 한빈이 들고 온 짐에 의해서 가려졌다 .
짐을 정리하며 한빈의 방에 가장 먼저 두었던 것은 풀어야 할 문제집도 아닌 차마 팔지 못한 라디오카세트였다 . 책상 위로 라디오카세트를 올려 두고서 쌓인 먼지를 물티슈로 닦았다 . 누구 한 명 한빈에게 닦으라 말하지 않았는데 라디오카세트에 닿은 물기가 언제 마를지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로 닦았다 . 겪어 왔던 것과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전혀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살아야 한다는 현실은 한빈의 손가락이 물티슈에 젖어 주름지도록 만들었다 . 그러다 문득 든 울컥한 감정에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지 않았다 . 딱 죽지 않을 만큼만 힘들었다 . 그래서 죽지 않았다 .
3 월이 되기 전까지는 방에서 갇혀 지냈다 . 부모님께는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며 밖에 나가지 않았지만 , 사실은 동네에 적응하기 싫었다 . 친할머니 얼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마당에 친할머니가 살았던 동네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 문을 열고 나가 조금만 걸어도 보이는 논이 싫었고 , 서울에서 와서 그런지 얼굴이 뽀얗다며 칭찬하는 동네 사람들 말도 듣기 싫었다 . 결국 한빈이 선택한 것은 집이었다 . 부모님은 한빈이 공부하는 줄 알고 뒷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시며 조용히 방문을 닫아주셨지만 , 한빈은 이사 온 뒤로 한 문제도 제대로 풀지 못하였다 . 연필을 쥐고서 스무 번째 동그라미를 그렸을 때 생각했다 . 한빈은 이 동네가 싫었다 . 벗어나야만 했다 . 한빈의 안식처를 찾아야 했다 .
팔자에도 없는 전학은 유쾌하지 않았다 . 어차피 일 년이 지나면 대학에 입학하니 조금만 참자고 생각했지만 , 앞으로의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 자신의 시간만이 거꾸로 달리는 것만 같았다 . 학교는 걸어서 30 분이 넘게 걸렸으며 버스조차 없어 두 발로 걸어가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 안 그래도 늦게 일어나서 지각할 것 같은 마당에 도보 30 분의 거리는 무리였다 . 조금만 고생해 달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다고 말했지만 , 등교 첫날에 후회하고 말았다 . 아직 겨울이 다 지나지 않은 3 월이었는데도 이마에 땀이 났다 . 입고 있던 코트를 벗고 싶었지만 벗지 못했다 . 교복 살 돈이 없어 전에 다니던 학교 교복을 그대로 입고 온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다음엔 일찍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적어도 새벽에 나오면 이만큼 덥지 않을 테니 말이다 .
차 하나 다니지 않던 아스팔트 도로 위로 자전거 벨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 한빈의 옆으로 은색 자전거를 탄 소년 한 명이 지나갔다 . 발걸음이 잡을 틈새도 없이 재빨리 지나가는 자전거를 보고 있으니 부러워졌다 . 적어도 내가 걸어서 가는 것보다 15 분은 빨리 도착하겠지 . 부러움에 자전거 바퀴 굴러가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 잘 달리던 자전거는 갑자기 멈추었다 . 자전거를 탄 소년은 뒤를 한 번 쳐다보았다 . 한빈과 눈이 마주쳤다 . 자신이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들킨 건가 싶어 흠칫 놀랐다 . 3 초 남짓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앞으로 돌려버렸다 .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나 싶더니 소년은 자전거를 탄 채로 뒷걸음질을 했다 .
설마 자전거를 타고 가다 뭘 떨어트리기라도 한 건가 ? 주위에 떨어진 물건을 찾으려 둘러 봐도 보이는 건 굴러다니는 돌멩이뿐이었다 . 어느덧 자전거는 한빈의 옆까지 왔다 . 외투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모습이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 한 발자국 걸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얼굴에 어쩔 줄 몰라 한빈이 두 눈동자를 굴렸다 . 그러자 빤히 바라보던 소년이 입술을 떼었다 .
" 너 얼마 전에 빨간 지붕으로 이사 온 걔지 ? 서울에서 온 ."
"... 나 알아 ?"
" 여기는 동네가 좁아서 소문이 빨라 . 그 동네에 너희 집 이사 온 거 모르는 사람 없을걸 . 더군다나 거기 오랫동안 빈집이었잖아 ."
그래서 얼굴을 쳐다보았구나 . 괜히 겁먹었네 . 한빈은 한숨을 내쉬고서 긴장을 풀었다 . 소년의 교복 왼쪽 가슴에는 장하오라는 이름이 박음질이 되어 있었다 . 장하오 . 발음하기에 군더더기 없는 이름이 단정한 얼굴과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 흐음 . 콧소리를 낸 하오는 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손가락으로 자전거 벨을 놀렸다 . 딸랑거리는 소리가 두어 번 귓가를 스치고 나서야 하오가 물었다 .
" 너 돈 얼마 있어 ?"
"... 너 날라리 뭐 그런 거야 ?"
" 우리 동네엔 날라리 없어 ."
" 그럼 남의 지갑 사정은 왜 묻는데 ?"
" 백 원 주면 자전거 무료 시승식 해 주려고 . 이거 이번에 새로 산 거거든 ."
" 필요 없어 . 네 갈 길이나 가 ."
" 너 어차피 사거리에 있는 고등학교 다니는 거 아니야 ? 네 걸음으로 거기까지 가다가는 지각할걸 ."
달콤한 제안이었다 . 자전거를 타면 다리가 아프지 않아도 되었다 .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의 자전거를 타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 눈앞에 있는 사람이 교복을 입고 학생인 척을 하는 성인일 수 있는 노릇이고 말이다 . 하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잘 차려입은 교복에 학생들이 자주 메는 검정 백팩에 나이키 운동화까지 . 특별히 이상한 건 없어 보였다 . 한빈이 대답을 늦추자 하오가 한 번 더 물었다 .
" 빨리 말해 . 백 원 내고 학교까지 자전거 타고 갈래 , 아니면 백 원 안 내고 학교까지 걸어갈래 ?"
한빈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을 하자 하오는 아니면 말고 , 라며 시니컬하게 대답하고선 자전거 페달에 발을 대었다 . 그 모습을 본 한빈이 다급하게 하오의 팔을 붙잡았다 . 잠깐만 . 코트 주머니에 있던 지갑에서 돈을 찾았다 . 그런데 백 원은 보이지 않고 보라색 천 원짜리 몇 장만이 지갑 안에 있었다 . 잠시 머뭇거리던 한빈은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며 하오에게 주었다 .
" 나 천 원밖에 없어 . 거스름돈 줘 ."
" 내가 장사하는 사람도 아니고 거스름돈이 어딨어 ?"
" 그럼 나 백 원 없는데 어떡해 ?"
한빈이 입술을 삐쭉이며 울상을 짓자 하오는 한빈의 손에 있던 천 원을 가져가고선 대답했다 .
" 천 원 받는 대신 내가 너 열 번 태워주면 되잖아 ."
" 열 번까지는 필요 없어 . 구백 원 거슬러 줘 ."
" 깐깐하게 군다 . 이따가 학교 가서 거슬러 줄게 . 일단 타 , 빨간 지붕 . 이러다 학교 늦겠어 ."
내 이름은 빨간 지붕이 아닌데 .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늦겠다는 말에 자전거 뒷자리에 탔다 . 손 둘 곳을 찾다 허리 옷자락을 손으로 꽉 쥐니 하오가 한빈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허리를 안도록 만들었다 . 한빈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뭐 하는 거냐 묻기도 전에 자전거가 출발했다 . 예고도 없이 출발하는 바람에 한빈은 하오의 허리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 서울에서 살 때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낯간지러움이었다 . 얘는 스킨십이 아무렇지도 않나 ? 한 번도 남자를 안아본 적이 없는 한빈은 손가락 끝까지 저릿한 어색함이 좋은 감정인지 싫은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
바람을 따라서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 염색은 한 번도 하지 않은 건지 머리카락이 유난히 부드러워 보였다 . 하오의 머리카락에 시선을 빼앗긴 틈에 목소리가 들려 왔다 . 빨간 지붕아 . 누가 봐도 한빈을 부르는 말이었다 . 이름도 아닌 지붕 색으로 부르는 게 싫었던 한빈이 말했다 .
" 내 이름 빨간 지붕 아닌데 ."
" 그럼 이름이 뭔데 ?"
" 성한빈 ."
" 한빈 ? 이름 예쁘네 . 무슨 연예인 이름 같아 ."
" 그러니까 빨간 지붕 말고 이름 불러 ."
" 그래 . 성한빈 , 너 몇 살이야 ?"
" 열아홉 살 ."
" 나도 열아홉 살인데 우리 친구 하면 되겠다 ."
" 나이만 똑같으면 개나 소나 친구가 되나 ...."
" 지금부터 친구 하기로 약속하면 친구인 거지 ."
" 난 여기서 친구 안 사귈 거야 ."
끼익 소리를 내며 자전거가 멈췄다 . 고개를 돌려 한빈을 향해 시선을 옮긴 하오가 물었다 .
" 왜 ?"
" 어차피 일 년만 살고 떠날 거니까 . 여기는 내가 원해서 온 동네가 아니야 . 마음에 안 들어 ."
" 전학은 왜 왔는데 ? 설마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사고라도 쳤어 ?"
" 차라리 그랬으면 덜 억울하지 . 몰라 . 어른들의 사정이니까 자세히는 말 안 할래 ."
빨리 출발하기나 해 . 한빈이 핀잔을 주지 자전거 체인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내내 하오의 질문은 끊이지 않았다 . 원래 어디서 살았어 ? 이사 온 지는 좀 지났는데 왜 동네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었어 ? 나도 그 근처 살아 . 우리 아빠가 이장이야 . 한빈이 원하지 않은 정보까지 나열하고 있었다 . 적당히 대답하며 하오의 말을 듣고 있던 한빈은 하오의 등에 얼굴을 부딪치고선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 넌 말이 너무 많아 ."
" 네가 궁금하니까 그렇지 ."
" 같은 남자가 뭐가 궁금해 ? 징그럽게 ."
" 우리 동네에 사는 또래가 별로 없잖아 . 애들은 거의 다 시내에 있는 아파트 살고 , 반가워서 그렇지 ."
" 나한테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마 ."
" 난 너랑 친구 하고 싶은데 ."
" 난 친구 같은 거 안 키워 ."
"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해 . 내가 이사 와서 사귄 첫 번째 친구 해 줄게 ."
바라지도 않는 이야기였다 . 한빈은 자신의 입에서 친구 하자는 말 따윈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 그래서 하오의 말에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 그저 속으로 미친놈이라며 홀로 씹어대기만 했다 .
바람을 가르고 도착한 곳은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자전거 보관소였다 . 자전거에서 내린 한빈은 하오를 향해 어색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 자전거에 자물쇠를 걸어놓은 하오는 한빈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
" 근데 너 교복 안 입고 온 거야 ? 우리 학교 교복이 아닌 것 같은데 ."
"... 아직 교복을 못 사서 ."
" 오늘 체육이 교문 담당이라 안 될 텐데 . 머리에 파마한 것보다 교복을 제대로 안 입은 걸 더 싫어해 ."
" 어차피 난 전학생이니까 괜찮지 않아 ?"
" 체육 별명이 뭔지 알아 ? 미친개야 . 잘못 없는 애들도 괜히 트집 잡아서 화를 낸다고 . 전학생도 안 봐줄걸 ."
그런 선생님들은 학교에 남아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 상황을 피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 오늘 같은 날은 차라리 학교에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 짜증이 나 괜한 돌멩이만 발로 찼다 . 한빈을 빤히 바라보던 하오가 한빈의 코트로 손을 가져다 댔다 . 불쑥 다가온 손에 당황한 한빈이 뒷걸음질을 치자 하오가 말했다 .
" 코트 벗어봐 ."
난데없는 말에 한빈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 코트를 벗으라고 ? 이 자리에서 ? 그러자 하오는 장난친 것이 아니라는 듯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변태도 아니고 길에서 갑자기 옷을 벗으라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 . 한빈은 오히려 코트 안이 보이지 않도록 옷을 여미며 대답했다 . 싫어 . 단호하게 말한 대답에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 하오는 말 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마이를 벗어 한빈에게 주었다 . 자 , 이거 입어 . 선뜻 한빈을 향해 건네진 마이가 당황스러웠다 .
" 이걸 나한테 왜 줘 ?"
" 네가 입고 있는 바지랑 조끼 색이 우리 학교랑 비슷해서 마이만 바꾸면 다른 학교 교복인지도 모를 것 같은데 ? 내 거 입어 ."
" 그럼 너는 ?"
" 담 넘으면 돼 . 선생님한테 안 걸리는 위치가 있거든 ."
하오가 받으라는 듯 마이를 쥔 손을 흔들었다 . 굳이 처음 만난 사람을 도와주려고 담까지 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 갑작스러운 호의에 고민했지만 본인이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 한빈은 하오의 마이를 받았다 . 입어 보니 사이즈가 맞았다 . 하오가
" 이걸로 하나 적립한 거다 ?"
" 그게 무슨 소리야 ?"
" 원래 인생은 기브 앤 테이크잖아 . 너도 나중에 테이크 해 줘야지 ."
다시 무언가를 줄 생각은 없었던 한빈이 마이를 벗는 시늉을 하자 하오는 한빈을 막았다 . 그러면서 무슨 말도 못 하겠다며 툴툴거렸다 . 하오는 한빈에게 먼저 가라며 손을 휘저었다 . 자신이 부탁한 일도 아닌데 꼭 나쁜 짓을 저지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홀로 결정했다 . 어차피 상황을 만든 것은 하오였고 , 책임지는 것도 하오의 몫이었다 . 한빈은 말했다 . 학교 가서 마이 돌려줄게 . 그 한마디를 남기고선 자리를 떴다 .
교문에는 하오의 말대로 험악한 인상을 가진 체육 선생님이 학생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 다행히도 교복 색상이 차이가 나지 않는 덕에 한빈이 다른 학교 교복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 체육 선생님 옆에서 얼차려를 받는 학생들을 보고 있으니 하오의 말을 듣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건물 앞에 도착했다 . 하오가 잘 오고 있는지 궁금해졌던 한빈은 뒤를 돌아 하오의 모습을 찾았다 . 걸어오는 학생들 중 하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설마 하는 마음으로 체육 선생님 쪽을 향해 쳐다보니 마이를 입지 않은 채 얼차려를 받는 학생이 보였다 . 멀리서 보아 확신할 순 없었지만 하오 같았다 . 한빈에게 마이를 빌려주고 정작 본인은 벌을 받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 멍청이 . 담 넘으면 된다더니 걸린 모양이었다 . 속으로 하오가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 하오의 행동이 바보 같았다 . 절대 저런 바보 같은 애랑 친구 하지 말아야지 . 그렇게 다짐했다 .
학교는 크지 않았다 . 전에 다니던 학교에 비하면 규모가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 반도 한 학년에 세 반이 끝이었다 . 심지어 3 학년은 학생 수가 적은지 반이 두 개밖에 없었다 . 덕분인지 교무실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 한빈이 교무실 문을 열자 복사기에 용지를 넣으시던 선생님 한 분이 어떻게 왔냐고 묻자 한빈은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 저 , 전학생인데요 ."
" 아 , 1 반 선생님 . 여기 전학생 왔다는데요 ?"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선생님은 한빈을 발견하고선 자리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쭈뼛대며 걸어가니 담임 선생님은 한빈에게 서류를 가지고 왔냐며 물었다 . 한빈은 책가방에 있던 전학 서류를 꺼내 선생님께 건넸다 .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는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선생님은 이내 한빈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
" 너 사고 쳐서 온 거 아니야 ? 서울에서 왔다며 . 공부하기는 거기가 훨씬 좋을 거 아니야 ?"
" 네 ? 사고 쳐서 아닌데요 . 저 성적도 좋아요 ."
" 전에 학교에서 전교 몇 등이었어 ?"
"10 등 안에는 들었어요 ."
그래 ? 대답한 선생님은 책상 위로 서류를 올려 두었다 . 그리고선 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물었다 .
" 교복은 못 샀다고 들었는데 , 산 거야 ?"
" 아니요 . 아직 ...."
의아한 눈빛이었다 . 입고 있던 하오의 마이 때문이었다 . 한빈을 쳐다보던 선생님은 가슴팍에 적힌 이름을 보고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
" 어 ? 이거 장하오 거 아니야 ? 장하오 이름이 왜 네 옷에 적혀 있냐 ? 둘이 아는 사이야 ?"
" 아 . 그게 ...."
" 설마 뺏었어 ?"
" 네 ? 그건 절대 아니에요 !"
" 근데 네 교복에 장하오 이름은 왜 써져 있어 ? 뭐 장하오가 빌려주기라도 한 거야 ?"
" 자 , 장하오가 마이 두 개라서 저 하나 빌려줬어요 ."
" 마이가 두 개라고 ?"
한빈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 한빈도 입 밖으로 말을 꺼내고 나서 후회를 했지만 말 중에 절반은 사실이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 선생님은 연이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
" 이거 생활기록부가 올 때까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원 참 … . 아무튼 대입이 코앞인 거 알지 ? 일 년밖에 안 남았으니까 되도록 조용히 학교 다녀 . 괜히 이상한 물 들어서 선생님 귀찮게 하지 말고 ."
"...."
" 교복은 뭐 .... 졸업생이 기부하고 간 교복 있는지 찾아봐 줄게 ."
말이 기부고 실상은 버리고 간 것이라는 걸 알았다 . 남이 3 년을 입은 교복은 얼마나 해져 있을까 . 오래 입은 교복들은 항상 티가 났다 . 엉덩이 부분이나 무릎이 반질반질해져 흔적을 맞은 티를 냈다 . 누군가가 입었던 옷을 자신이 입는다는 것이 싫었지만 교복을 새로 사기엔 돈도 시간도 아까웠다 . 선생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
선생님은 책장에서 필요한 교과서를 꺼내 한빈에게 주었다 . 두 손으로 들기에도 무거운 교과서를 한 아름 들고 교무실에서 나오자 전학생이 궁금했는지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구경하던 학생들이 보였다 . 선생님은 얼른 교실로 들어가라며 호통을 쳤다 .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게 꼭 동물원의 원숭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 서울에서 전학을 와서 신기한 건지 아니면 고등학교 다 끝나갈 무렵에 전학을 와서 신기한 건진 알 수 없었다 .
서울에서 온 깍쟁이는 싸가지가 없다는 소문이 났다 . 같은 반 친구들이 묻는 말에도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으니 소문이 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장소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친구를 사귀려는 의지마저 없으니 한빈을 흥미롭게 보던 학생들은 금방 관심을 껐다 . 처음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학원도 다니지 못하는 마당에 원하는 대학을 가려면 서울에서 살았을 때보다 배로 노력하고 공부해야 했다 . 말을 거는 사람이 없으니 쉬는 시간에 공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하지만 삶은 혼자 살아갈 수 없었다 . 세상을 구성하는 것들에 흙더미가 있고 물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처럼 홀로 버티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 점심시간이 되자 교실에 홀로 남은 것은 한빈이었다 . 밥을 같이 먹자며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 그렇다고 해서 혼자 급식실로 가고 싶진 않았다 . 교복도 다른데 밥조차 혼자 먹으면 시선이 몰릴 게 분명했다 . 애초부터 점심을 먹지 않은 것처럼 문제집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 허기가 져서 문제집 위로 내려앉은 글씨가 읽히지 않았다 . 매점이라도 가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러자 의자에 걸쳐 있던 주인 잃은 마이가 눈에 걸렸다 . 그제야 하오에게 마이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손으로 마이를 만지작거리던 한빈은 잠시 생각했다 . 장하오는 밥을 먹었을까 .
하오의 반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3 학년은 반이 겨우 두 개밖에 없었으니 옆 반에 있을 게 분명했다 . 한빈은 복도로 나왔다 . 다들 급식실로 간 건지 복도는 사람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 기대는 하지 않았다 . 장하오도 다른 애들처럼 밥 먹으러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교실 안이 보이는 뒷문의 작은 창을 쳐다보며 기웃거렸다 . 그러자 창가랑 가장 먼 4 분단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뒤통수가 보였다 . 한빈이 문을 열었다 .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을 옆으로 밀자 교실에 있던 남학생은 뒤를 돌아 한빈을 바라보았다 . 마주한 얼굴을 아침에 본 그 얼굴이었다 . 한빈을 발견하자 하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느덧 앞에 선 하오에게 마이를 건넸다 .
" 아까는 고마웠어 ."
" 교복 사면 그때 줘도 되는데 ."
" 아침에 교문에서 혼나는 거 다 봤어 . 호의는 한 번으로 충분해 . 왜 네 잘못도 아닌데 미련하게 벌을 받아 ?"
" 나는 잘생겨서 선생님이 좀 봐주거든 ."
웃으면서 말하는 게 재수 없었다 . 얼굴을 보고 있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 반박을 하지 못했다 . 하오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책상 위엔 보름달 빵 봉지와 바나나 우유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 한빈이 물었다 .
" 점심은 안 먹어 ?"
" 오늘은 별로 안 먹고 싶어서 매점에서 빵 사왔어 ."
" 다른 친구들은 너 버리고 간 거야 ?"
" 음 .... 원래 같이 먹던 친구랑 싸워서 ."
하오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 무리하게 담을 넘을 때부터 알아보았는데 역시나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 나이가 몇 살인데 친구랑 싸운대 . 무엇 때문에 싸웠냐는 말은 묻지 않았다 .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 한빈이 말했다 .
" 나랑 같이 밥 먹을래 ?"
" 너도 점심 안 먹었어 ?"
" 응 .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 ,"
" 친구 못 사귀었어 ?"
" 야 , 말은 똑바로 해 . 못 사귄 게 아니라 내가 안 사귄 거야 ."
" 전학생 싸가지 없다고 소문 다 났던데 ...."
" 그래서 싸가지 없는 애랑은 밥 못 먹겠어 ?"
" 아니 . 너 생각보다 그렇게 싸가지 없진 않아 ."
대답한 하오가 웃었다 .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한빈이 고민하는 사이 하오는 팔을 붙잡고서 급식실로 이끌었다 . 하오는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시끄럽다고 하고 싶었지만 기분이 좋아 보여 말을 꺼내진 않았다 .
그때부터 장하오와 같이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모두 교실을 빠져나갈 때면 하오가 한빈의 반으로 데리러 왔다 .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하오는 한빈을 만나러 왔다 . 분명 지금쯤이면 친구와 화해하고도 남을 시기였는데 하오는 자신의 친구는 찾지 않고 한빈만을 찾았다 . 웃겼던 것은 그 얼굴을 점심이 되어야만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 그 외의 시간에는 한빈의 반을 찾아오는 일도 말을 거는 일도 없었다 . 매일 같이 밥을 먹었지만 , 밥을 먹는 시간은 겨우 20 분 남짓이었기에 하오와 깊게 친해질 순 없었다 . 그래도 그 거리감이 좋았다 . 친한 것도 안 친한 것도 아닌 어정쩡함이 한빈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 하오와 친구가 되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유효했기 때문이었다 .
서울에 살았던 때 , 아버지 서재에 꽂혀 있던 그리스 로마 신화 책에서 제우스는 모든 인간의 계획을 성취시키지 않는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 종교가 없었던 한빈은 제우스조차 믿지 않았고 , 오히려 하늘의 신이라 불리우는 주제에 쫌생이 같이 군다고 생각했다 . 인간의 계획을 성취시키면 좀 어때서 . 마음을 넓게 쓰지 못하는 제우스를 보며 하늘의 신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 그때부터 한빈은 제우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 제우스를 보고 있으면 되려던 일도 안 될 것만 같았다 .
그리고 제우스는 그런 한빈에게 응답하듯 다시는 생각을 부숴버렸다 . 여름이 다가오면서 햇볕이 뜨거워지던 시기였다 . 창가 자리에 앉던 한빈은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면 창문을 열곤 했다 . 그렇게 창밖의 세상을 마주하고 나면 항상 운동장에 있는 하오가 눈에 걸렸다 . 축구를 한다거나 별다른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 항상 무언가를 들고 운동장을 배회하고 다녔고 , 하오의 주변에는 대부분 여학생이 있었다 . 처음엔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줄 알았건만 우연히 반 친구에게서 들은 말로는 장하오와 있는 애들은 전부 다 방송부라고 했다 . 여러 여자를 동시에 만나는 세기의 남자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
틈만 나면 운동장을 돌아다니는 장하오 탓에 지루할 틈은 없었다 . 공부하던 한빈이 숨을 돌리기 위해 창밖을 바라볼 때면 항상 하오가 있었다 . 나중에는 숨은 그림 찾기 하는 기분이 들어서 재밌기도 했다 . 가끔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날이면 혹시 등교를 하지 않은 걸까 걱정했지만 점심시간이 되면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묻지 않았다 . 몰래 보고 있던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창문 너머의 장하오를 찾았던 것이 열 번이 넘어가고 나서야 한빈은 깨달았다 . 절대 하오와 친구가 되지 않을 거라 말하던 게 무색하게도 하오를 쫓고 있었다 . 제우스 말이 맞았다 . 인간은 계획한 대로 성취할 수 없었다 .
체육 수업을 마치고 목을 축이려 음료수 한 캔을 사서 운동장 벤치에 앉아 있던 날이었다 . 하늘은 새파랗지만 두 눈으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빛이 강했다 . 더 앉아 있기엔 온몸이 탈 것 같아 음료수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 손에 쥔 빈 캔을 구기고서 벤치에서 일어났다 .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구령대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을 찾으려 하자 한빈의 눈에 밟힌 것은 하오였다 . 구령대 아래 그늘에 서 있던 하오의 손에는 무언가 들려 있었다 . 그리고 하오와의 거리가 좁혀졌을 때 , 하오가 매번 운동장을 배회하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은 캠코더라는 것을 알았다 . 캠코더 속에 한빈이 담기고 나서야 하오는 들고 있던 캠코더를 내렸다 .
" 캠코더 네 거야 ?"
한빈의 물음에 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 한빈은 하오의 옆 바닥에 앉고서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 말없이 한빈의 눈을 마주치고는 하오는 입을 열었다 .
" 여긴 급식실도 아닌데 나한테 왜 말 걸어 ?"
" 왜 ? 너한테 대화하려면 돈이라도 줘야 해 ?"
" 너 나랑 친구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
" 야 , 점심까지 같이 먹는 사이에 그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 ?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 ?"
" 나는 네가 날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
" 그래서 점심이 아니면 우리 반에 찾아오지도 않았어 ?"
"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고 ...."
하오가 말끝을 흐렸다 . 캠코더를 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 한빈이 하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캠코더 만져봐도 돼 ? 한빈의 물음에 하오는 고민도 하지 않고 캠코더를 건네주었다 . 작은 사이즈의 캠코더는 한 손으로 들기에도 좋았다 .
" 영상 찍는 거 좋아해 ?"
" 응 . 영화감독이 꿈이거든 ."
" 영화감독 ? 의외네 . 그래서 방송부 하는 거야 ?"
" 응 . 우리 학교에선 관련된 동아리가 방송부뿐이니까 ."
" 그래서 맨날 운동장에 있었구나 ."
꿈을 가진 하오가 부러웠다 . 캠코더를 통해 보는 세상보다 자신의 두 눈으로 보는 세상이 훨씬 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전자기기에 무언가를 담으려는 행동이 멋있기도 했다 . 한빈은 캠코더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
" 무슨 영화 좋아해 ?"
" 응 ?"
" 어떤 영화가 널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갖게 만들었냐는 말이야 ."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이 영화 알아 ?"
" 그게 무슨 영화야 ? 한국 영화는 아니지 ?"
" 미국 영화야 . 예전에 아버지가 보여주셔서 처음 알게 됐어 ."
" 무슨 내용인데 ?"
" 배경이 정신병원인데 , 이건 말로 하기엔 영화가 아까워 . 직접 봐야 해 ."
" 정신병원 ? 내용이 좀 심오하겠네 . 그 영화는 어쩌다가 좋아하게 됐어 ?"
" 나도 뻐꾸기거든 ."
뻐꾸기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 한빈의 머릿속에서 ‘ 뻐꾸기 ’ 하면 떠오르는 것은 집에 있는 뻐꾸기시계밖에 없었다 . 한빈이 입술을 삐쭉이며 이해하기 어렵다며 투정을 부렸다 .
" 내용을 알고 싶으면 소설이 원작이니까 그걸 봐도 돼 .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있을걸 ."
" 지금은 시험 때문에 못 보고 끝나면 봐야겠다 ."
" 나도 질문해도 돼 ?"
" 어떤 거 ?"
" 너는 좋아하는 영화 있어 ?"
영화를 좋아한다기보다 영화음악을 소개해 주는 라디오를 즐겼던 한빈은 하오의 질문데 대답하기 어려웠다 . 으음 . 한빈은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
" 난 좋아하는 영화는 딱히 없는 것 같아 . 대신 좋아하는 배우는 있어 ."
" 누군데 ?"
" 심은하 . 내 이상형이야 . 연기도 잘하고 예쁘잖아 ."
" 그럼 8 월의 크리스마스도 봤어 ? 심은하 나오는 영화 말이야 ."
" 아니 . 보고 싶었는데 못 봤어 . 아마 그 영화 개봉했을 때 학원 보충 수업 듣느라 바빴을걸 ."
" 나랑 볼래 ?"
한빈이 들고 있던 캠코더를 내려놓아 하오를 바라보았다 . 하오는 한빈도 바라보지 못한 채 운동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
" 시내로 나가면 비디오테이프 빌리는 가게가 있어 . 거기에 가면 8 월의 크리스마스도 있을 거야 ."
" 어디서 보게 ?"
" 우리 집에서 ."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 곧바로 이어지는 대답이 없자 하오는 물었다 .
" 아직도 나랑 친구 할 의향이 없어서 그래 ?"
대답은 하나였다 . 한빈은 하오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 그래서 몇 번이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던 것이고 점심시간이 되면 하오만을 기다렸다 . 자신을 향해 맑은 웃음을 짓는 하오는 한빈의 마음에 든 유일한 친구였다 . 뚜렷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거역하기도 어려웠다 . 솔직하게 말을 할까 . 심은하가 보고 싶은 것보다 너랑 친구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말해 버릴까 . 생각했지만 낯간지러웠다 . 고작 친구 하나 사귀는 것뿐인데 구구절절한 사랑 고백을 하듯 굴고 싶지 않았다 .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하오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
" 아직도 나랑 친구 하는 게 고민이 된다면 … . 나랑 자전거 아홉 번만 같이 탈까 ."
" … ."
" 내가 너한테 돌려줘야 할 구백 원이 있잖아 ."
" 아 … ."
하오에게서 돌려받지 못한 구백 원이 떠올랐다 . 받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는데 , 하오는 기회를 만들고 싶은 사람처럼 말을 덧붙였다 .
" 딱 구백 원 만큼만 같이 자전거 타보고 그때도 나랑 친구 하기가 어렵다면 8 월의 크리스마스를 보자는 건 없던 일로 하자 ."
"...."
" 어때 ?"
조심스레 물어보는 말투는 귓가를 울렸다 . 응 ? 고개를 흔들며 묻자 머리카락도 함께 흔들린다 . 대답을 종용하는 눈빛이 부드러웠다 . 같은 남자를 보고도 이런 얼굴을 해도 되는 건가 . 얼굴을 보던 것을 멈추고 괜히 운동화 끝으로 시선을 옮긴 한빈이 말했다 .
"8 월에 보자 . 여름 방학 때 ."
" 나랑 봐 줄 거야 ?"
" 나 여기 길도 몰라 . 네가 아니면 내가 어떻게 8 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겠어 ."
" 나랑 친구 해도 괜찮겠어 ?"
" 안 그래도 너 없으면 친구고 뭐고 아무것도 없거든 . 그만 말해 ."
" 그럼 하나만 부탁해도 돼 ?"
" 무슨 부탁 ? 어려운 건 안 돼 . 수행평가 대신해 달라고 하는 거나 그런 건 절대 안 돼 ."
" 어려운 건 아니야 . 그냥 ...."
하오가 뜸을 들였다 . 뭘 얼마나 대단한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마른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하오가 말했다 .
" 어떤 일이 있어도 나랑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해 줘 ."
그 말을 듣자마자 한빈은 생각했다 . 역시 장하오는 바보였다 . 한 번 친구면 당연히 영원히 친구가 되는 거 아닌가 ? 당연한 말엔 굳이 대답해 주고 싶지 않았다 . 캠코더를 들어 운동장에 심어진 나무 한 그루를 카메라에 담았다 . 옅은 바람을 타고 나무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 세상에 나무만 남겨진 것처럼 확대하고는 레코딩 버튼을 눌렀다 . 한빈이 찍은 첫 영상이었다 . 손가락에 닿은 버튼과 함께 한빈의 세상도 열렸다 .
틀에 박힌 감정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을까 . 꽉 막힌 시멘트 위가 제자리인 줄 알았던 마음은 하오의 말 한마디에 닫힌 틈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 매일 아침이면 한빈의 집 대문 앞에서는 딸랑거리며 자전거 벨이 울렸다 . 돌려받아야 할 구백 원의 가치만큼 아홉 번만 탈 생각이었던 자전거는 매일 아침 하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 되었다 . 하오의 자전거를 타고 좁은 골목 사이를 오고 가며 맞이하는 바람으로 머릿속 복잡한 생각을 씻어버렸다 . 보고 싶지 않은 풍경도 익숙해져 갔다 . 장하오는 꽃과 풀의 이름을 잘 알았다 . 하오의 뒤에 탄 한빈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흙 사이에 제멋대로 핀 꽃의 이름을 물을 때면 대답을 못 한 적이 없었다 . 너는 왜 모르는 게 없냐고 물으면 한빈을 향해 너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고 . 그래서 그게 아쉽다고 대답했다 . 유치한 대답이었지만 싫지 않았다 . 하오를 따라 스스로도 유치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 괜히 하오의 허리를 꽉 안았다 .
하오는 한빈과 친해지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한빈의 교실 안으로는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 겨우 벽 하나를 둔 교실일 뿐인데도 하오는 남의 교실은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변명을 하면서 한빈의 반으로 오지 않았다 . 한빈이 하오의 반으로 오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 기말고사가 다가오던 때는 옆 반에 출입할 수 없었다 . 학급의 면학 분위기를 망쳐서는 안 된다며 ‘ 출입 금지 ’ 가 크게 적힌 종이를 앞문에 붙여 놓았기 때문이었다 . 한빈은 하오의 교실에 갈 때가 아니면 반에서 공부하였다 . 틀린 문제를 기억하기 위해 오답 노트를 정리하고 있자 누군가 한빈의 앞자리에 있던 의자를 세게 끌어당기는 소리가 났다 . 시끄러워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던 한빈은 앞자리를 보았다 . 그러자 그 자리에 앉는 것은 자리의 주인이 아니었다 . 반에서 가장 질이 안 좋은 남학생이었다 . 한 번도 대화한 적이 없는 얼굴이기도 했다 . 분명 자신에게 용건이 있을 리가 없는데 남학생은 풍선껌을 터트리는 소리를 내고서 가만히 한빈을 응시했다 . 그러고는 한빈의 노트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
" 야 , 넌 서울대 가려고 공부하냐 ?"
" 건드리지 마 ."
" 말도 할 줄 알았네 ? 교실에선 입도 안 열길래 하자 있는 줄 알았는데 ."
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 이럴 때는 침묵이 정답이었다 . 괜히 말을 얹었다가는 재밌다며 놀릴 게 뻔했다 . 한빈은 연필을 쥐고서 노트에 글씨를 적었다 . 그것이 10 초가 채 지나지 못할 무렵 남학생은 한빈을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
" 너 장하오 이거야 ?"
남학생은 새끼손가락을 굽혔다 폈다를 반복했다 . 들고 있던 연필을 내려두고서 쳐다보던 한빈이 물었다 .
" 그게 뭔데 ?"
" 너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
" 시간 없으니까 이해가 되게 설명해 . 아니면 선생님께 말씀드리러 갈 거야 ."
" 와 , 이 새끼 진짜 모르나 봐 ."
" 말을 시작했으면 제대로 끝을 내 , 헷갈리게 하지 말고 ."
" 진짜 내가 너 불쌍해서 하나만 알려준다 ."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는 듯 짓는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남학생은 한빈에게 가까이 다가오고선 한빈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
" 장하오 , 호모잖아 ."
처음에는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에 묻혀 제대로 듣지 못했다 . 한빈이 미간을 좁히며 다시 물었다 . 뭐라고 ? 대답은 다시 한번 들려 왔다 . 장하오 호모라고 . 남자 좋아하는 호모 .
상황을 파악하는 것엔 긴 시간이 걸렸다 .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멍하니 들었던 말만 곱씹은 한빈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남학생의 가슴팍을 밀쳤다 . 교실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빈과 남학생에게로 향했다 . 화가 목 끝까지 찬 한빈이 말했다 .
" 야 , 너 지금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 거지 !"
" 네가 걔한테 직접 물어봐 . 솔직히 너 빼고 다른 애들은 다 알걸 ,"
" 확실한 것도 아니면서 나한테 말 전달하지 마 ."
" 확실하지 않다는 건 너 혼자 지레짐작하면서 하는 말 아니야 ?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
"...."
" 나는 불쌍한 전학생 구제해 주겠다고 말한 건데 . 성의가 아니꼽나 보네 ? 아니면 너도 그거야 ?"
" 야 !"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자 교실 뒷문이 열렸다 . 복도를 울리는 소리에 뒷문을 열고 들어오신 담임 선생님은 손가락으로 한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 너 교무실로 따라와 .
따지고 보면 잘못은 다른 놈이 했는데 혼나는 것은 한빈의 몫이었다 . 사람을 밀치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 이유였다 . 담임 선생님께 억울함을 토로해도 화를 낸 이유를 제대로 말할 수 없어 해명하기가 어려웠다 . 한빈이 일방적으로 잘못했다고 생각하신 담임 선생님은 반성문 세 장을 쓰게 했다 . 그것도 에이포 용지에 제일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말이다 . 태어나서 반성문을 써본 적이 없었기에 내용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랐고 더군다나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 한빈은 홀로 교무실에 남아 반성문을 쓰는 것이 억울했다 . 반성문 때문에 수업에도 들어가지 못한 한빈은 어쩔 수 없이 죄송함을 쥐어 짜내며 반성문을 적었다 .
한빈이 교실에서 싸웠다는 소식을 들은 하오는 같이 하교하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 하오의 얼굴을 보면서도 똑바로 말하지 못했다 . 당장이라도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 남자를 좋아하느냐 묻고 싶었지만 태연하게 물어야 할지 화를 내며 물어야 할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 더군다나 하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 만에 하나 진짜로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 전혀 받아들인 적 없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 남자가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 하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 발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울렁거림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일게 했다 . 한빈은 하오를 보던 것을 멈추고 땅에 시선을 부딪쳤다 . 그냥 오늘따라 화가 많았어 . 먹히지도 않을 변명을 했다 .
생각해 보면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 하오의 교실에 놀러 갈 때마다 하오는 남자인 친구들이 아닌 항상 같은 방송부원인 여학생과 대화하고 있었다 . 점심 또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먹은 적이 없었다 . 첫날에 홀로 빵을 먹고 있던 것도 이상했다 . 8 월의 크리스마스를 보자고 약속했을 때도 어떤 일이 있어도 친구 해 달라며 약속하던 말소리가 깊이 남아 있었다 . 장하오는 정말 남자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 . 두려움이 섞인 감정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
그 무렵 뻐꾸기시계가 또 다시 고장 났다 . 새벽 두 시면 울리던 시계가 오후 두 시를 가리키며 뻐꾹 소리를 냈다 . 거실에 놓인 책장에서 문제집을 찾던 한빈은 열두 번이나 우는 뻐꾸기시계가 시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 좀 고치면 안 되나 . 툴툴거리며 문제집을 찾던 중 , 익숙한 제목을 가진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였다 . 하오가 말했던 영화 제목이었다 . 한빈은 문제집을 찾던 것을 멈추고 책을 꺼냈다 .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책 한 권을 전부 다 읽어버리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 하오가 스스로를 뻐꾸기라고 칭했던 것은 자기자신을 정신병을 가진 사람이라고 치부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
손가락 끝에 남은 마음먼지들을 덜어내니 시간은 8 월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여름 방학이 한창이었던 탓에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 없었다 . 고등학교 삼학년의 여름방학은 학교와 멀어질 수 없었다 . 홀로 보충 수업을 신청한 한빈은 매일 아침 학교를 가야 했다 . 무더운 여름에 두 발로 학교까지 걸어가니 자전거가 얼마나 소중했던 존재였는지 깨닫고는 했다 . 가끔은 하오가 학교까지 데리러 왔다 . 하오는 매번 심부름 갔다가 오는 길에 들렀다고 말했다 . 그러나 하오 손에 들린 짐은 하나도 없었다 . 거짓말하는 게 뻔히 티가 나는데도 하오는 아닌 척 굴었다 . 한빈은 그 행동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매번 그 거짓말에 속아주었다 . 이유를 말하자면 큰 뜻은 없었다 . 그저 하오를 보면 속아주고 싶었다 .
데리러 온 날 중 하루는 심부름이 핑계가 아니었던 건지 가방을 메고 왔다 . 또 심부름 갔다 왔어 ? 놀리려고 한 말에 하오는 줄 것이 있다며 자전거를 세웠다 . 그리고는 가방에서 비디오테이프를 하나 꺼내 보여주었다 . 비디오테이프에는 ‘8 월의 크리스마스 ’ 가 적혀 있었다 . 한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비디오테이프를 덥석 잡았다 .
" 진짜 빌려 왔네 ?"
" 응 , 8 월이 왔잖아 ."
" 나는 공부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
" 우리 오늘 볼래 ?"
" 오늘 ?"
" 집에 부모님 안 계시거든 . 거실에서 볼 수 있을 거야 ."
집으로 가면 해야 할 공부가 아직 남았는데 .... 잠시 고민을 하던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하루 공부하지 않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었다 . 여태까지 열심히 공부했으니 한 시간 반짜리 영화 한 편 정도는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한빈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하오는 크게 웃음을 지었다 . 곧바로 비디오카세트를 가방에 넣고서는 자전거를 움직였다 .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까웠다 .
넓은 마당이 딸린 하오의 집은 거실이 컸다 . 들어오자마자 쇼파에 가방을 두고서 앉은 한빈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큰 텔레비전을 보면서 감탄했다 . 이 정도 크기면 영화에 집중이 잘 될 것 같았다 . 하오는 과자를 꺼내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 물을 가지고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 과자 봉투를 뜯어서 펼쳐 놓자 하오는 빌려온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영화를 재생시켰다 . 영화가 시작되었다 .
어떤 내용인지 줄거리조차 모르고 본 영화는 심은하의 얼굴만 머릿속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깊게 남은 것은 한여름의 사랑이었다 . 죽음 앞에서도 사랑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 벼랑 끝에 서 있어도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 그래서 죽음 앞에 있어도 사랑보단 자신에 대한 연민이 먼저일 것이라 생각했다 . 하지만 영화 속 두 남녀 주인공은 한빈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있었다 . 영화를 보고 난 후 남은 알 수 없는 마음의 조각들을 주워 담으며 생각했다 . 텔레비전 화면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 가만히 보던 한빈이 하오에게 물었다 .
" 나도 언젠가 저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
" 너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
" 난 한 사람한테 마음 붙이며 살아가진 못할 것 같아 . 그 사람이 떠나가면 너무 슬프잖아 ."
"...."
" 혼자 남겨지는 건 싫어 ."
" 이별이 두렵다고 해서 사랑을 회피하면 안 되지 ."
"...."
" 나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한 사람한테만 마음 붙이고 사는 거 ."
한빈이 고개를 돌려 하오를 바라보았다 . 그러자 하오와 눈이 마주쳤다 . 하오는 눈빛을 피하지 않고 한빈을 응시하고 있었다 . 꼭 말을 전달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리고 싶은 것처럼 바라보았다 . 그러고선 몸을 기울여 한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 목에 닿는 하오의 머리카락에 순간 숨을 참았다 . 엔딩 크레딧에 흘러 나오는 노래를 따라 손가락을 까딱거리던 움직임도 멈췄다 . 하오는 말했다 .
" 영화 어땠어 ?"
"... 좋았어 .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
" 나도 좋았어 ."
" 어느 부분이 ?"
" 너랑 봐서 ."
"...."
" 이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8 월의 크리스마스야 ."
"...."
" 있지 . 예전부터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친구가 없었어 ."
"...."
" 우리 집에 오면 병이 옮는대 . 아픈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그런 말을 하더라 ."
"...."
" 네가 보기에 나는 어때 ?"
"...."
" 다른 사람 말처럼 내가 이상해 보여 ?"
하오는 고개를 들어 한빈을 바라보았다 . 눈동자가 흔들렸다 . 불안을 마주한 것처럼 속절없이 휘둘리고 있었다 . 하오에게 어떠한 대답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행동의 이유를 만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 한빈은 하오의 머리 위로 살포시 손을 얹어 다시 어깨에 기대도록 만들었다 . 그리고 손을 내려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
" 난 너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
"...."
" 다른 사람이랑 다를 이유도 없어 ."
"...."
" 넌 .... 그냥 평범한 거야 . 다른 사람들처럼 ."
텔레비전은 검은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 검은 화면을 통해 보이는 모습이 이질적인 것을 알면서도 하오를 벗어나지 못했다 . 한빈은 긴 시간 동안 하오의 어깨를 토닥였다 . 완벽하지 않은 위로였지만 도움이 되고 싶었다 . 마음의 방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 이 이상한 감정에 빠지고 싶었다 . 빠져나올 방법도 모르면서 .
하오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8 월의 크리스마스 포스터를 주었다 . 심은하를 좋아한다는 말이 생각이 나서 구하러 다녔다는 말에 마음이 저렸다 . 너는 안 가져도 돼 ? 한빈이 물으니 하오는 대답했다 . 그건 너한테 보내는 내 편지야 . 수신자를 바꿀 수 없다고 하는 말에 한빈은 알았다며 포스터를 받았다 . 그리고 그 포스터를 클리어 파일에 넣어 책상 가장 첫 번째 서랍에 넣어두었다 .
8 월이 지나면서 영화 한 편 볼 여유마저 사라졌다 .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평소에 공부하지 않던 애들도 연필을 들어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 창밖의 나뭇잎은 말라서 떨어진 지 오래였다 . 처음 전학 온 날 입었던 코트를 다시 입고 나서야 겨울이 찾아왔음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 8 월의 크리스마스를 본 이후로 하오와는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 무언가를 말을 하려면 무거운 감정을 들고 있어야 했고 , 수능이 다가오는데 괜한 말을 꺼내는 건 아닌지 고민을 하다가 시간을 멍청하게 흘려보내야만 했다 .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제멋대로 흐르는 시간이 미웠지만 수능을 마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 그 핑계로 11 월까지 달려왔다 .
수능을 하루 남겨둔 날이었다 . 예비소집일을 갔다 오니 시험이 코앞에 있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 내일 가져갈 짐을 챙기던 한빈은 여분의 컴퓨터 싸인펜을 찾기 위해 책상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 서랍에는 하오가 주었던 8 월의 크리스마스 포스터가 보였다 . 공부하느라 바빴던 탓인지 포스터가 있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 서랍에 넣을 때 잘못 넣은 것인지 포스터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 그 모습이 싫었던 한빈은 클리어 파일에 있던 포스터를 빼내어 다시 정리하려고 포스터를 들었다 . 그러자 미처 보지 못한 포스터 뒤로 굵은 네임펜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 한빈에게 , 라고 적힌 문장을 읽은 순간 한빈은 포스터를 손에 쥐고서 집 밖으로 나갔다 .
숨이 차오르도록 달렸다 . 12 월이 오고 나면 더는 붙잡을 수 없을 정도로 늦어버릴 것 같았다 . 하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 편지를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어디부터 변명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정리가 안 되었으면서 무작정 달렸다 . 그렇게 도착한 하오의 집 앞에서 한빈은 숨도 고르지 못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 초인종이 고장이라도 난 건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한빈은 주변에 있는 작은 돌멩이를 주워 하오의 방 창문 쪽으로 던졌다 . 툭 , 툭 .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에 창문을 연 하오는 한빈을 발견했다 . 대문 앞에 있는 한빈의 모습에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한 하오는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왔다 . 날이 추운데도 마음이 급했는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 크게 심호흡을 한 한빈이 말했다 .
" 나도 널 알아가고 싶어 ."
"...."
" 좋아해 ."
"...."
" 너랑 함께 영화를 보았던 8 월이 크리스마스처럼 느껴질 정도로 ."
영화 <8 월의 크리스마스 > 모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