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빈웹진: cinéclub

해피 아워

쿄이

뻐꾸기시계가 고장 났다. 한빈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에 있었던 뻐꾸기시계는 친할머니의 유품이었다. 몇 번의 이사 끝에 세월의 흔적을 맞이한 뻐꾸기시계는 한빈이 고등학교를 입학할 무렵부터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12시 정각이 되면 어김없이 뻐꾹뻐꾹 울던 시계는 새벽 두 시가 되면 울기 시작하였고, 괜히 손을 댔다가 시계가 더 고장이 날 것이 두려웠던 아버지는 시계를 고치지 않은 채 그대로 몇 년을 두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우는 뻐꾸기시계에 대한 미운 마음도 불만도 없었다. 덕분에 새벽 두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새벽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뻐꾸기시계가 고장 난 그때부터 고등학교를 들어가며 부모님이 입학 선물로 사 주신 은색 라디오카세트로 라디오를 듣는 게 버릇이 되었다.

장마가 다 지나간 계절임에도 까만 하늘에 무참히 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뻐꾸기 우는 소리에 일어난 한빈은 열린 창문을 보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고도 없는 비였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내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제멋대로 내린 비는 미처 닫지 못한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 빗물이 창틀 사이를 파고드는 소리가 들리자 한빈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에 손을 대었다. 까만 하늘은 무심하게도 천둥을 쳤다. 깜빡거리는 빛과 온몸을 억누르는 소리에 놀란 두 눈을 질끈 감고서 몸을 움찔거렸다. 신호탄이라도 된 듯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멈출 줄을 몰랐다. 괜한 오싹함에 한빈은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살갗을 드리우는 무서움에 재빨리 은색 라디오카세트의 전원을 켰다. 은색 라디오카세트에서는 홍은철의 영화음악이 진행되고 있었다. 비 때문에 전파가 잘 통하지 않았던 탓인지 라디오카세트는 소리가 끊겼다 연결되었다를 반복했다. 스피커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던 라디오카세트는 안테나 방향을 바꾸고 나서야 자리를 잡아 디제이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 꼭 잃어버린 계절을 찾은 듯한 기분이죠. 장마철처럼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으니 하늘이 개고 나면 다시 한번 여름이 찾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첫 곡으로 한석규의 8월의 크리스마스, 들려드리겠습니다.‘

 

노래의 전주가 나오기도 전에 전파를 잃은 라디오는 소리가 툭 끊겨버렸다. 라디오가 고장이 난 건가 싶어 손바닥으로 라디오카세트의 옆구리를 툭툭 쳤지만 좀처럼 전파를 찾지를 못하고서 치지직 소리를 냈다. 나중에는 노이즈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연결이 끊겼다. 라디오 소리가 채우던 방안은 고요했다. 빗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숨 쉬는 것이 어색할 정도였다. 라디오카세트를 아무리 건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한빈은 라디오카세트의 전원을 껐다. 잠이 전부 달아나버렸지만 침대에 누워야만 했다. 라디오가 없는 새벽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빈이 코드 선을 뽑고서 마루바닥에서 한 발자국 떼자 문밖으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올 일이 없는 새벽이었다.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지만, 두 번째 초인종이 울렸을 때는 의심을 할 수 없었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한빈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거실에 있던 인터폰에 불빛이 켜져 있었다. 한빈보다 먼저 나온 부모님은 인터폰 속 얼굴을 보고서 몸이 얼어붙었다. 까만 밤 인터폰 속 파란색 불빛이 거실을 밝힌 것은 한참 동안의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초인종 소리가 들렸을 때,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지구가 태양을 한 번 돌면 일 년.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돌면 약 한 달. 부모님이 한빈에게 허락을 구한 시간이었다. 스무살을 일 년가량 남겨둔 1999년이었다. 21세기가 도래하기도 전에 서울에 아파트 몇 채를 가지고 있을 만큼 잘 되던 아버지의 건설 사업은 외환 위기를 맞이하면서 부도가 났고, 아파트를 헐값에 팔아 빚 갚는 일에 탕진해야만 했다. 더는 서울에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부모님은 한빈에게 말했다. 딱 일 년 하고도 한 달이라고. 네가 대학교 입학할 때엔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 보겠다고. 부모님은 울먹이며 말했다. 작아지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니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따질 수도 없었다. 한빈이 선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그렇게 상자 가득 자신의 옷을 담으며 열아홉 인생에서 평생 정을 붙이고 살던 서울을 벗어나야만 했다.

짐을 가득 실은 파란색 용달차는 동서남북 어느 쪽인지 모르는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집안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고층 건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논밭 위로 소복이 쌓인 눈은 곧 3월이 다가온다는 것도 잊게 하였다. 꼭 크리스마스가 다시 다가온 것만 같았다. 한빈은 창문 밖으로 손을 뻗으며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바람을 맞이하며 생각했다. 지구가 태양을 한 번 돌아도, 달이 지구를 한 바퀴를 더 돌아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 이름 모를 마을에 도착했다. 지어진 지 오래되어 보이는 주택 앞에 선 트럭은 요란하던 시동 소리를 줄였다. 빨간 지붕이 인상적인 집이었다. 차에서 내려 집 안에 들어섰다. 집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탓인지 사람 냄새 하나 나질 않았다. 주인 잃은 오래된 장식장도 있었다. 사람이 살았던 것 같은 따스한 온기는 없었지만 집안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한빈은 트럭에 있던 짐을 나르던 아버지를 붙잡고서 물었다. 아빠, 여기가 어디야? 단순히 지역명을 묻는 말이었는데 아버지는 짧은 고민을 하고서 한빈에게 대답했다. 친할머니 집.

그제야 두 발로 딛고 있던 그 지역이 할머니 산소 근처라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집을 팔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던, 가족들조차 아무도 발을 들어서게 하지 못하고 아버지 홀로 오고 가던 안식처였다. 태어나면서 할머니 집은 구경 한 번 하지 못했는데, 상황은 아버지 홀로 아픔을 식히던 공간에 초대하고 만 것이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들고 온 뻐꾸기시계를 벽에 거셨다. 말주변이 없어 아버지에게 위로를 덧붙이지 못했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 짐을 옮겼다. 낡은 나뭇결을 따라 남겨진 세월의 흔적은 한빈이 들고 온 짐에 의해서 가려졌다.

짐을 정리하며 한빈의 방에 가장 먼저 두었던 것은 풀어야 할 문제집도 아닌 차마 팔지 못한 라디오카세트였다. 책상 위로 라디오카세트를 올려 두고서 쌓인 먼지를 물티슈로 닦았다. 누구 한 명 한빈에게 닦으라 말하지 않았는데 라디오카세트에 닿은 물기가 언제 마를지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로 닦았다. 겪어 왔던 것과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전혀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살아야 한다는 현실은 한빈의 손가락이 물티슈에 젖어 주름지도록 만들었다. 그러다 문득 든 울컥한 감정에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지 않았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힘들었다. 그래서 죽지 않았다.

3월이 되기 전까지는 방에서 갇혀 지냈다. 부모님께는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며 밖에 나가지 않았지만, 사실은 동네에 적응하기 싫었다. 친할머니 얼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마당에 친할머니가 살았던 동네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 조금만 걸어도 보이는 논이 싫었고, 서울에서 와서 그런지 얼굴이 뽀얗다며 칭찬하는 동네 사람들 말도 듣기 싫었다. 결국 한빈이 선택한 것은 집이었다. 부모님은 한빈이 공부하는 줄 알고 뒷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시며 조용히 방문을 닫아주셨지만, 한빈은 이사 온 뒤로 한 문제도 제대로 풀지 못하였다. 연필을 쥐고서 스무 번째 동그라미를 그렸을 때 생각했다. 한빈은 이 동네가 싫었다. 벗어나야만 했다. 한빈의 안식처를 찾아야 했다.

 

팔자에도 없는 전학은 유쾌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 년이 지나면 대학에 입학하니 조금만 참자고 생각했지만, 앞으로의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자신의 시간만이 거꾸로 달리는 것만 같았다. 학교는 걸어서 30분이 넘게 걸렸으며 버스조차 없어 두 발로 걸어가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안 그래도 늦게 일어나서 지각할 것 같은 마당에 도보 30분의 거리는 무리였다. 조금만 고생해 달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다고 말했지만, 등교 첫날에 후회하고 말았다. 아직 겨울이 다 지나지 않은 3월이었는데도 이마에 땀이 났다. 입고 있던 코트를 벗고 싶었지만 벗지 못했다. 교복 살 돈이 없어 전에 다니던 학교 교복을 그대로 입고 온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엔 일찍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새벽에 나오면 이만큼 덥지 않을 테니 말이다.

차 하나 다니지 않던 아스팔트 도로 위로 자전거 벨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빈의 옆으로 은색 자전거를 탄 소년 한 명이 지나갔다. 발걸음이 잡을 틈새도 없이 재빨리 지나가는 자전거를 보고 있으니 부러워졌다. 적어도 내가 걸어서 가는 것보다 15분은 빨리 도착하겠지. 부러움에 자전거 바퀴 굴러가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잘 달리던 자전거는 갑자기 멈추었다. 자전거를 탄 소년은 뒤를 한 번 쳐다보았다. 한빈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이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들킨 건가 싶어 흠칫 놀랐다. 3초 남짓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앞으로 돌려버렸다.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나 싶더니 소년은 자전거를 탄 채로 뒷걸음질을 했다.

설마 자전거를 타고 가다 뭘 떨어트리기라도 한 건가? 주위에 떨어진 물건을 찾으려 둘러 봐도 보이는 건 굴러다니는 돌멩이뿐이었다. 어느덧 자전거는 한빈의 옆까지 왔다. 외투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모습이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한 발자국 걸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얼굴에 어쩔 줄 몰라 한빈이 두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자 빤히 바라보던 소년이 입술을 떼었다.

 

"너 얼마 전에 빨간 지붕으로 이사 온 걔지? 서울에서 온."

"... 나 알아?"

"여기는 동네가 좁아서 소문이 빨라. 그 동네에 너희 집 이사 온 거 모르는 사람 없을걸. 더군다나 거기 오랫동안 빈집이었잖아."

 

그래서 얼굴을 쳐다보았구나. 괜히 겁먹었네. 한빈은 한숨을 내쉬고서 긴장을 풀었다. 소년의 교복 왼쪽 가슴에는 장하오라는 이름이 박음질이 되어 있었다. 장하오. 발음하기에 군더더기 없는 이름이 단정한 얼굴과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흐음. 콧소리를 낸 하오는 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손가락으로 자전거 벨을 놀렸다. 딸랑거리는 소리가 두어 번 귓가를 스치고 나서야 하오가 물었다.

 

"너 돈 얼마 있어?"

"... 너 날라리 뭐 그런 거야?"

"우리 동네엔 날라리 없어."

"그럼 남의 지갑 사정은 왜 묻는데?"

"백 원 주면 자전거 무료 시승식 해 주려고. 이거 이번에 새로 산 거거든."

"필요 없어. 네 갈 길이나 가."

"너 어차피 사거리에 있는 고등학교 다니는 거 아니야? 네 걸음으로 거기까지 가다가는 지각할걸."

 

달콤한 제안이었다. 자전거를 타면 다리가 아프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의 자전거를 타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교복을 입고 학생인 척을 하는 성인일 수 있는 노릇이고 말이다. 하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잘 차려입은 교복에 학생들이 자주 메는 검정 백팩에 나이키 운동화까지. 특별히 이상한 건 없어 보였다. 한빈이 대답을 늦추자 하오가 한 번 더 물었다.

 

"빨리 말해. 백 원 내고 학교까지 자전거 타고 갈래, 아니면 백 원 안 내고 학교까지 걸어갈래?"

 

한빈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을 하자 하오는 아니면 말고, 라며 시니컬하게 대답하고선 자전거 페달에 발을 대었다. 그 모습을 본 한빈이 다급하게 하오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코트 주머니에 있던 지갑에서 돈을 찾았다. 그런데 백 원은 보이지 않고 보라색 천 원짜리 몇 장만이 지갑 안에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한빈은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며 하오에게 주었다.

 

"나 천 원밖에 없어. 거스름돈 줘."

"내가 장사하는 사람도 아니고 거스름돈이 어딨어?"

"그럼 나 백 원 없는데 어떡해?"

 

한빈이 입술을 삐쭉이며 울상을 짓자 하오는 한빈의 손에 있던 천 원을 가져가고선 대답했다.

 

"천 원 받는 대신 내가 너 열 번 태워주면 되잖아."

"열 번까지는 필요 없어. 구백 원 거슬러 줘."

"깐깐하게 군다. 이따가 학교 가서 거슬러 줄게. 일단 타, 빨간 지붕. 이러다 학교 늦겠어."

 

내 이름은 빨간 지붕이 아닌데.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늦겠다는 말에 자전거 뒷자리에 탔다. 손 둘 곳을 찾다 허리 옷자락을 손으로 꽉 쥐니 하오가 한빈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허리를 안도록 만들었다. 한빈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뭐 하는 거냐 묻기도 전에 자전거가 출발했다. 예고도 없이 출발하는 바람에 한빈은 하오의 허리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살 때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낯간지러움이었다. 얘는 스킨십이 아무렇지도 않나? 한 번도 남자를 안아본 적이 없는 한빈은 손가락 끝까지 저릿한 어색함이 좋은 감정인지 싫은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바람을 따라서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염색은 한 번도 하지 않은 건지 머리카락이 유난히 부드러워 보였다. 하오의 머리카락에 시선을 빼앗긴 틈에 목소리가 들려 왔다. 빨간 지붕아. 누가 봐도 한빈을 부르는 말이었다. 이름도 아닌 지붕 색으로 부르는 게 싫었던 한빈이 말했다.

 

"내 이름 빨간 지붕 아닌데."

"그럼 이름이 뭔데?"

"성한빈."

"한빈? 이름 예쁘네. 무슨 연예인 이름 같아."

"그러니까 빨간 지붕 말고 이름 불러."

"그래. 성한빈, 너 몇 살이야?"

"열아홉 살."

"나도 열아홉 살인데 우리 친구 하면 되겠다."

"나이만 똑같으면 개나 소나 친구가 되나...."

"지금부터 친구 하기로 약속하면 친구인 거지."

"난 여기서 친구 안 사귈 거야."

 

끼익 소리를 내며 자전거가 멈췄다. 고개를 돌려 한빈을 향해 시선을 옮긴 하오가 물었다.

 

"?"

"어차피 일 년만 살고 떠날 거니까. 여기는 내가 원해서 온 동네가 아니야. 마음에 안 들어."

"전학은 왜 왔는데? 설마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사고라도 쳤어?"

"차라리 그랬으면 덜 억울하지. 몰라. 어른들의 사정이니까 자세히는 말 안 할래."

 

빨리 출발하기나 해. 한빈이 핀잔을 주지 자전거 체인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내내 하오의 질문은 끊이지 않았다. 원래 어디서 살았어? 이사 온 지는 좀 지났는데 왜 동네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었어? 나도 그 근처 살아. 우리 아빠가 이장이야. 한빈이 원하지 않은 정보까지 나열하고 있었다. 적당히 대답하며 하오의 말을 듣고 있던 한빈은 하오의 등에 얼굴을 부딪치고선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넌 말이 너무 많아."

"네가 궁금하니까 그렇지."

"같은 남자가 뭐가 궁금해? 징그럽게."

"우리 동네에 사는 또래가 별로 없잖아. 애들은 거의 다 시내에 있는 아파트 살고, 반가워서 그렇지."

"나한테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마."

"난 너랑 친구 하고 싶은데."

"난 친구 같은 거 안 키워."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해. 내가 이사 와서 사귄 첫 번째 친구 해 줄게."

 

바라지도 않는 이야기였다. 한빈은 자신의 입에서 친구 하자는 말 따윈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하오의 말에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미친놈이라며 홀로 씹어대기만 했다.

바람을 가르고 도착한 곳은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자전거 보관소였다. 자전거에서 내린 한빈은 하오를 향해 어색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자전거에 자물쇠를 걸어놓은 하오는 한빈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근데 너 교복 안 입고 온 거야? 우리 학교 교복이 아닌 것 같은데."

"... 아직 교복을 못 사서."

"오늘 체육이 교문 담당이라 안 될 텐데. 머리에 파마한 것보다 교복을 제대로 안 입은 걸 더 싫어해."

"어차피 난 전학생이니까 괜찮지 않아?"

"체육 별명이 뭔지 알아? 미친개야. 잘못 없는 애들도 괜히 트집 잡아서 화를 낸다고. 전학생도 안 봐줄걸."

 

그런 선생님들은 학교에 남아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상황을 피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은 차라리 학교에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짜증이 나 괜한 돌멩이만 발로 찼다. 한빈을 빤히 바라보던 하오가 한빈의 코트로 손을 가져다 댔다. 불쑥 다가온 손에 당황한 한빈이 뒷걸음질을 치자 하오가 말했다.

 

"코트 벗어봐."

 

난데없는 말에 한빈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코트를 벗으라고? 이 자리에서? 그러자 하오는 장난친 것이 아니라는 듯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변태도 아니고 길에서 갑자기 옷을 벗으라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 한빈은 오히려 코트 안이 보이지 않도록 옷을 여미며 대답했다. 싫어. 단호하게 말한 대답에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하오는 말 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마이를 벗어 한빈에게 주었다. , 이거 입어. 선뜻 한빈을 향해 건네진 마이가 당황스러웠다.

 

"이걸 나한테 왜 줘?"

"네가 입고 있는 바지랑 조끼 색이 우리 학교랑 비슷해서 마이만 바꾸면 다른 학교 교복인지도 모를 것 같은데? 내 거 입어."

"그럼 너는?"

"담 넘으면 돼. 선생님한테 안 걸리는 위치가 있거든."

 

하오가 받으라는 듯 마이를 쥔 손을 흔들었다. 굳이 처음 만난 사람을 도와주려고 담까지 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호의에 고민했지만 본인이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한빈은 하오의 마이를 받았다. 입어 보니 사이즈가 맞았다. 하오가

 

"이걸로 하나 적립한 거다?"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 인생은 기브 앤 테이크잖아. 너도 나중에 테이크 해 줘야지."

 

다시 무언가를 줄 생각은 없었던 한빈이 마이를 벗는 시늉을 하자 하오는 한빈을 막았다. 그러면서 무슨 말도 못 하겠다며 툴툴거렸다. 하오는 한빈에게 먼저 가라며 손을 휘저었다. 자신이 부탁한 일도 아닌데 꼭 나쁜 짓을 저지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홀로 결정했다. 어차피 상황을 만든 것은 하오였고, 책임지는 것도 하오의 몫이었다. 한빈은 말했다. 학교 가서 마이 돌려줄게. 그 한마디를 남기고선 자리를 떴다.

교문에는 하오의 말대로 험악한 인상을 가진 체육 선생님이 학생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교복 색상이 차이가 나지 않는 덕에 한빈이 다른 학교 교복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체육 선생님 옆에서 얼차려를 받는 학생들을 보고 있으니 하오의 말을 듣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건물 앞에 도착했다. 하오가 잘 오고 있는지 궁금해졌던 한빈은 뒤를 돌아 하오의 모습을 찾았다. 걸어오는 학생들 중 하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체육 선생님 쪽을 향해 쳐다보니 마이를 입지 않은 채 얼차려를 받는 학생이 보였다. 멀리서 보아 확신할 순 없었지만 하오 같았다. 한빈에게 마이를 빌려주고 정작 본인은 벌을 받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멍청이. 담 넘으면 된다더니 걸린 모양이었다. 속으로 하오가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하오의 행동이 바보 같았다. 절대 저런 바보 같은 애랑 친구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했다.

학교는 크지 않았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 비하면 규모가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반도 한 학년에 세 반이 끝이었다. 심지어 3학년은 학생 수가 적은지 반이 두 개밖에 없었다. 덕분인지 교무실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한빈이 교무실 문을 열자 복사기에 용지를 넣으시던 선생님 한 분이 어떻게 왔냐고 묻자 한빈은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전학생인데요."

", 1반 선생님. 여기 전학생 왔다는데요?"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선생님은 한빈을 발견하고선 자리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쭈뼛대며 걸어가니 담임 선생님은 한빈에게 서류를 가지고 왔냐며 물었다. 한빈은 책가방에 있던 전학 서류를 꺼내 선생님께 건넸다.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는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선생님은 이내 한빈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너 사고 쳐서 온 거 아니야? 서울에서 왔다며. 공부하기는 거기가 훨씬 좋을 거 아니야?"

"? 사고 쳐서 아닌데요. 저 성적도 좋아요."

"전에 학교에서 전교 몇 등이었어?"

"10등 안에는 들었어요."

 

그래? 대답한 선생님은 책상 위로 서류를 올려 두었다. 그리고선 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물었다.

 

"교복은 못 샀다고 들었는데, 산 거야?"

"아니요. 아직...."

 

의아한 눈빛이었다. 입고 있던 하오의 마이 때문이었다. 한빈을 쳐다보던 선생님은 가슴팍에 적힌 이름을 보고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 이거 장하오 거 아니야? 장하오 이름이 왜 네 옷에 적혀 있냐? 둘이 아는 사이야?"

". 그게...."

"설마 뺏었어?"

"? 그건 절대 아니에요!"

"근데 네 교복에 장하오 이름은 왜 써져 있어? 뭐 장하오가 빌려주기라도 한 거야?"

", 장하오가 마이 두 개라서 저 하나 빌려줬어요."

"마이가 두 개라고?"

 

한빈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한빈도 입 밖으로 말을 꺼내고 나서 후회를 했지만 말 중에 절반은 사실이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연이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이거 생활기록부가 올 때까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원 참. 아무튼 대입이 코앞인 거 알지? 일 년밖에 안 남았으니까 되도록 조용히 학교 다녀. 괜히 이상한 물 들어서 선생님 귀찮게 하지 말고."

"...."

"교복은 뭐.... 졸업생이 기부하고 간 교복 있는지 찾아봐 줄게."

 

말이 기부고 실상은 버리고 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남이 3년을 입은 교복은 얼마나 해져 있을까. 오래 입은 교복들은 항상 티가 났다. 엉덩이 부분이나 무릎이 반질반질해져 흔적을 맞은 티를 냈다. 누군가가 입었던 옷을 자신이 입는다는 것이 싫었지만 교복을 새로 사기엔 돈도 시간도 아까웠다. 선생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선생님은 책장에서 필요한 교과서를 꺼내 한빈에게 주었다. 두 손으로 들기에도 무거운 교과서를 한 아름 들고 교무실에서 나오자 전학생이 궁금했는지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구경하던 학생들이 보였다. 선생님은 얼른 교실로 들어가라며 호통을 쳤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게 꼭 동물원의 원숭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에서 전학을 와서 신기한 건지 아니면 고등학교 다 끝나갈 무렵에 전학을 와서 신기한 건진 알 수 없었다.

 

서울에서 온 깍쟁이는 싸가지가 없다는 소문이 났다. 같은 반 친구들이 묻는 말에도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으니 소문이 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장소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친구를 사귀려는 의지마저 없으니 한빈을 흥미롭게 보던 학생들은 금방 관심을 껐다. 처음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학원도 다니지 못하는 마당에 원하는 대학을 가려면 서울에서 살았을 때보다 배로 노력하고 공부해야 했다. 말을 거는 사람이 없으니 쉬는 시간에 공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삶은 혼자 살아갈 수 없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것들에 흙더미가 있고 물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처럼 홀로 버티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교실에 홀로 남은 것은 한빈이었다. 밥을 같이 먹자며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혼자 급식실로 가고 싶진 않았다. 교복도 다른데 밥조차 혼자 먹으면 시선이 몰릴 게 분명했다. 애초부터 점심을 먹지 않은 것처럼 문제집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허기가 져서 문제집 위로 내려앉은 글씨가 읽히지 않았다. 매점이라도 가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의자에 걸쳐 있던 주인 잃은 마이가 눈에 걸렸다. 그제야 하오에게 마이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으로 마이를 만지작거리던 한빈은 잠시 생각했다. 장하오는 밥을 먹었을까.

하오의 반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3학년은 반이 겨우 두 개밖에 없었으니 옆 반에 있을 게 분명했다. 한빈은 복도로 나왔다. 다들 급식실로 간 건지 복도는 사람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장하오도 다른 애들처럼 밥 먹으러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실 안이 보이는 뒷문의 작은 창을 쳐다보며 기웃거렸다. 그러자 창가랑 가장 먼 4분단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뒤통수가 보였다. 한빈이 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을 옆으로 밀자 교실에 있던 남학생은 뒤를 돌아 한빈을 바라보았다. 마주한 얼굴을 아침에 본 그 얼굴이었다. 한빈을 발견하자 하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앞에 선 하오에게 마이를 건넸다.

 

"아까는 고마웠어."

"교복 사면 그때 줘도 되는데."

"아침에 교문에서 혼나는 거 다 봤어. 호의는 한 번으로 충분해. 왜 네 잘못도 아닌데 미련하게 벌을 받아?"

"나는 잘생겨서 선생님이 좀 봐주거든."

 

웃으면서 말하는 게 재수 없었다. 얼굴을 보고 있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 반박을 하지 못했다. 하오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책상 위엔 보름달 빵 봉지와 바나나 우유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한빈이 물었다.

 

"점심은 안 먹어?"

"오늘은 별로 안 먹고 싶어서 매점에서 빵 사왔어."

"다른 친구들은 너 버리고 간 거야?"

".... 원래 같이 먹던 친구랑 싸워서."

 

하오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무리하게 담을 넘을 때부터 알아보았는데 역시나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몇 살인데 친구랑 싸운대. 무엇 때문에 싸웠냐는 말은 묻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한빈이 말했다.

 

"나랑 같이 밥 먹을래?"

"너도 점심 안 먹었어?"

".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

"친구 못 사귀었어?"

", 말은 똑바로 해. 못 사귄 게 아니라 내가 안 사귄 거야."

"전학생 싸가지 없다고 소문 다 났던데...."

"그래서 싸가지 없는 애랑은 밥 못 먹겠어?"

"아니. 너 생각보다 그렇게 싸가지 없진 않아."

 

대답한 하오가 웃었다.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한빈이 고민하는 사이 하오는 팔을 붙잡고서 급식실로 이끌었다. 하오는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시끄럽다고 하고 싶었지만 기분이 좋아 보여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때부터 장하오와 같이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모두 교실을 빠져나갈 때면 하오가 한빈의 반으로 데리러 왔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하오는 한빈을 만나러 왔다. 분명 지금쯤이면 친구와 화해하고도 남을 시기였는데 하오는 자신의 친구는 찾지 않고 한빈만을 찾았다. 웃겼던 것은 그 얼굴을 점심이 되어야만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외의 시간에는 한빈의 반을 찾아오는 일도 말을 거는 일도 없었다. 매일 같이 밥을 먹었지만, 밥을 먹는 시간은 겨우 20분 남짓이었기에 하오와 깊게 친해질 순 없었다. 그래도 그 거리감이 좋았다. 친한 것도 안 친한 것도 아닌 어정쩡함이 한빈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하오와 친구가 되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유효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살았던 때, 아버지 서재에 꽂혀 있던 그리스 로마 신화 책에서 제우스는 모든 인간의 계획을 성취시키지 않는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종교가 없었던 한빈은 제우스조차 믿지 않았고, 오히려 하늘의 신이라 불리우는 주제에 쫌생이 같이 군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계획을 성취시키면 좀 어때서. 마음을 넓게 쓰지 못하는 제우스를 보며 하늘의 신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한빈은 제우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제우스를 보고 있으면 되려던 일도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제우스는 그런 한빈에게 응답하듯 다시는 생각을 부숴버렸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햇볕이 뜨거워지던 시기였다. 창가 자리에 앉던 한빈은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면 창문을 열곤 했다. 그렇게 창밖의 세상을 마주하고 나면 항상 운동장에 있는 하오가 눈에 걸렸다. 축구를 한다거나 별다른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항상 무언가를 들고 운동장을 배회하고 다녔고, 하오의 주변에는 대부분 여학생이 있었다. 처음엔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줄 알았건만 우연히 반 친구에게서 들은 말로는 장하오와 있는 애들은 전부 다 방송부라고 했다. 여러 여자를 동시에 만나는 세기의 남자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틈만 나면 운동장을 돌아다니는 장하오 탓에 지루할 틈은 없었다. 공부하던 한빈이 숨을 돌리기 위해 창밖을 바라볼 때면 항상 하오가 있었다. 나중에는 숨은 그림 찾기 하는 기분이 들어서 재밌기도 했다. 가끔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날이면 혹시 등교를 하지 않은 걸까 걱정했지만 점심시간이 되면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묻지 않았다. 몰래 보고 있던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창문 너머의 장하오를 찾았던 것이 열 번이 넘어가고 나서야 한빈은 깨달았다. 절대 하오와 친구가 되지 않을 거라 말하던 게 무색하게도 하오를 쫓고 있었다. 제우스 말이 맞았다. 인간은 계획한 대로 성취할 수 없었다.

체육 수업을 마치고 목을 축이려 음료수 한 캔을 사서 운동장 벤치에 앉아 있던 날이었다. 하늘은 새파랗지만 두 눈으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빛이 강했다. 더 앉아 있기엔 온몸이 탈 것 같아 음료수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손에 쥔 빈 캔을 구기고서 벤치에서 일어났다.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구령대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을 찾으려 하자 한빈의 눈에 밟힌 것은 하오였다. 구령대 아래 그늘에 서 있던 하오의 손에는 무언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하오와의 거리가 좁혀졌을 때, 하오가 매번 운동장을 배회하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은 캠코더라는 것을 알았다. 캠코더 속에 한빈이 담기고 나서야 하오는 들고 있던 캠코더를 내렸다.

 

"캠코더 네 거야?"

 

한빈의 물음에 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하오의 옆 바닥에 앉고서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말없이 한빈의 눈을 마주치고는 하오는 입을 열었다.

 

"여긴 급식실도 아닌데 나한테 왜 말 걸어?"

"? 너한테 대화하려면 돈이라도 줘야 해?"

"너 나랑 친구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 점심까지 같이 먹는 사이에 그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

"나는 네가 날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점심이 아니면 우리 반에 찾아오지도 않았어?"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고...."

 

하오가 말끝을 흐렸다. 캠코더를 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한빈이 하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캠코더 만져봐도 돼? 한빈의 물음에 하오는 고민도 하지 않고 캠코더를 건네주었다. 작은 사이즈의 캠코더는 한 손으로 들기에도 좋았다.

 

"영상 찍는 거 좋아해?"

". 영화감독이 꿈이거든."

"영화감독? 의외네. 그래서 방송부 하는 거야?"

". 우리 학교에선 관련된 동아리가 방송부뿐이니까."

"그래서 맨날 운동장에 있었구나."

 

꿈을 가진 하오가 부러웠다. 캠코더를 통해 보는 세상보다 자신의 두 눈으로 보는 세상이 훨씬 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전자기기에 무언가를 담으려는 행동이 멋있기도 했다. 한빈은 캠코더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무슨 영화 좋아해?"

"?"

"어떤 영화가 널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갖게 만들었냐는 말이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이 영화 알아?"

"그게 무슨 영화야? 한국 영화는 아니지?"

"미국 영화야. 예전에 아버지가 보여주셔서 처음 알게 됐어."

"무슨 내용인데?"

"배경이 정신병원인데, 이건 말로 하기엔 영화가 아까워. 직접 봐야 해."

"정신병원? 내용이 좀 심오하겠네. 그 영화는 어쩌다가 좋아하게 됐어?"

"나도 뻐꾸기거든."

 

뻐꾸기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한빈의 머릿속에서 뻐꾸기하면 떠오르는 것은 집에 있는 뻐꾸기시계밖에 없었다. 한빈이 입술을 삐쭉이며 이해하기 어렵다며 투정을 부렸다.

 

"내용을 알고 싶으면 소설이 원작이니까 그걸 봐도 돼.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있을걸."

"지금은 시험 때문에 못 보고 끝나면 봐야겠다."

"나도 질문해도 돼?"

"어떤 거?"

"너는 좋아하는 영화 있어?"

 

영화를 좋아한다기보다 영화음악을 소개해 주는 라디오를 즐겼던 한빈은 하오의 질문데 대답하기 어려웠다. 으음. 한빈은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난 좋아하는 영화는 딱히 없는 것 같아. 대신 좋아하는 배우는 있어."

"누군데?"

"심은하. 내 이상형이야. 연기도 잘하고 예쁘잖아."

"그럼 8월의 크리스마스도 봤어? 심은하 나오는 영화 말이야."

"아니. 보고 싶었는데 못 봤어. 아마 그 영화 개봉했을 때 학원 보충 수업 듣느라 바빴을걸."

"나랑 볼래?"

 

한빈이 들고 있던 캠코더를 내려놓아 하오를 바라보았다. 하오는 한빈도 바라보지 못한 채 운동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시내로 나가면 비디오테이프 빌리는 가게가 있어. 거기에 가면 8월의 크리스마스도 있을 거야."

"어디서 보게?"

"우리 집에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곧바로 이어지는 대답이 없자 하오는 물었다.

 

"아직도 나랑 친구 할 의향이 없어서 그래?"

 

대답은 하나였다. 한빈은 하오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던 것이고 점심시간이 되면 하오만을 기다렸다. 자신을 향해 맑은 웃음을 짓는 하오는 한빈의 마음에 든 유일한 친구였다. 뚜렷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거역하기도 어려웠다. 솔직하게 말을 할까. 심은하가 보고 싶은 것보다 너랑 친구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말해 버릴까. 생각했지만 낯간지러웠다. 고작 친구 하나 사귀는 것뿐인데 구구절절한 사랑 고백을 하듯 굴고 싶지 않았다.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하오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나랑 친구 하는 게 고민이 된다면. 나랑 자전거 아홉 번만 같이 탈까."

"."

"내가 너한테 돌려줘야 할 구백 원이 있잖아."

"."

 

하오에게서 돌려받지 못한 구백 원이 떠올랐다. 받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는데, 하오는 기회를 만들고 싶은 사람처럼 말을 덧붙였다.

 

"딱 구백 원 만큼만 같이 자전거 타보고 그때도 나랑 친구 하기가 어렵다면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자는 건 없던 일로 하자."

"...."

"어때?"

 

조심스레 물어보는 말투는 귓가를 울렸다. ? 고개를 흔들며 묻자 머리카락도 함께 흔들린다. 대답을 종용하는 눈빛이 부드러웠다. 같은 남자를 보고도 이런 얼굴을 해도 되는 건가. 얼굴을 보던 것을 멈추고 괜히 운동화 끝으로 시선을 옮긴 한빈이 말했다.

 

"8월에 보자. 여름 방학 때."

"나랑 봐 줄 거야?"

"나 여기 길도 몰라. 네가 아니면 내가 어떻게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겠어."

"나랑 친구 해도 괜찮겠어?"

"안 그래도 너 없으면 친구고 뭐고 아무것도 없거든. 그만 말해."

"그럼 하나만 부탁해도 돼?"

"무슨 부탁? 어려운 건 안 돼. 수행평가 대신해 달라고 하는 거나 그런 건 절대 안 돼."

"어려운 건 아니야. 그냥...."

 

하오가 뜸을 들였다. 뭘 얼마나 대단한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마른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하오가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랑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해 줘."

 

그 말을 듣자마자 한빈은 생각했다. 역시 장하오는 바보였다. 한 번 친구면 당연히 영원히 친구가 되는 거 아닌가? 당연한 말엔 굳이 대답해 주고 싶지 않았다. 캠코더를 들어 운동장에 심어진 나무 한 그루를 카메라에 담았다. 옅은 바람을 타고 나무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나무만 남겨진 것처럼 확대하고는 레코딩 버튼을 눌렀다. 한빈이 찍은 첫 영상이었다. 손가락에 닿은 버튼과 함께 한빈의 세상도 열렸다.

 

틀에 박힌 감정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을까. 꽉 막힌 시멘트 위가 제자리인 줄 알았던 마음은 하오의 말 한마디에 닫힌 틈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매일 아침이면 한빈의 집 대문 앞에서는 딸랑거리며 자전거 벨이 울렸다. 돌려받아야 할 구백 원의 가치만큼 아홉 번만 탈 생각이었던 자전거는 매일 아침 하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 되었다. 하오의 자전거를 타고 좁은 골목 사이를 오고 가며 맞이하는 바람으로 머릿속 복잡한 생각을 씻어버렸다. 보고 싶지 않은 풍경도 익숙해져 갔다. 장하오는 꽃과 풀의 이름을 잘 알았다. 하오의 뒤에 탄 한빈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흙 사이에 제멋대로 핀 꽃의 이름을 물을 때면 대답을 못 한 적이 없었다. 너는 왜 모르는 게 없냐고 물으면 한빈을 향해 너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고. 그래서 그게 아쉽다고 대답했다. 유치한 대답이었지만 싫지 않았다. 하오를 따라 스스로도 유치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괜히 하오의 허리를 꽉 안았다.

하오는 한빈과 친해지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한빈의 교실 안으로는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겨우 벽 하나를 둔 교실일 뿐인데도 하오는 남의 교실은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변명을 하면서 한빈의 반으로 오지 않았다. 한빈이 하오의 반으로 오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기말고사가 다가오던 때는 옆 반에 출입할 수 없었다. 학급의 면학 분위기를 망쳐서는 안 된다며 출입 금지가 크게 적힌 종이를 앞문에 붙여 놓았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하오의 교실에 갈 때가 아니면 반에서 공부하였다. 틀린 문제를 기억하기 위해 오답 노트를 정리하고 있자 누군가 한빈의 앞자리에 있던 의자를 세게 끌어당기는 소리가 났다. 시끄러워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던 한빈은 앞자리를 보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 앉는 것은 자리의 주인이 아니었다. 반에서 가장 질이 안 좋은 남학생이었다. 한 번도 대화한 적이 없는 얼굴이기도 했다. 분명 자신에게 용건이 있을 리가 없는데 남학생은 풍선껌을 터트리는 소리를 내고서 가만히 한빈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한빈의 노트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 넌 서울대 가려고 공부하냐?"

"건드리지 마."

"말도 할 줄 알았네? 교실에선 입도 안 열길래 하자 있는 줄 알았는데."

 

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침묵이 정답이었다. 괜히 말을 얹었다가는 재밌다며 놀릴 게 뻔했다. 한빈은 연필을 쥐고서 노트에 글씨를 적었다. 그것이 10초가 채 지나지 못할 무렵 남학생은 한빈을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너 장하오 이거야?"

 

남학생은 새끼손가락을 굽혔다 폈다를 반복했다. 들고 있던 연필을 내려두고서 쳐다보던 한빈이 물었다.

 

"그게 뭔데?"

"너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시간 없으니까 이해가 되게 설명해. 아니면 선생님께 말씀드리러 갈 거야."

", 이 새끼 진짜 모르나 봐."

"말을 시작했으면 제대로 끝을 내, 헷갈리게 하지 말고."

"진짜 내가 너 불쌍해서 하나만 알려준다."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는 듯 짓는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학생은 한빈에게 가까이 다가오고선 한빈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하오, 호모잖아."

 

처음에는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에 묻혀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한빈이 미간을 좁히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대답은 다시 한번 들려 왔다. 장하오 호모라고. 남자 좋아하는 호모.

상황을 파악하는 것엔 긴 시간이 걸렸다.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멍하니 들었던 말만 곱씹은 한빈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남학생의 가슴팍을 밀쳤다. 교실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빈과 남학생에게로 향했다. 화가 목 끝까지 찬 한빈이 말했다.

 

", 너 지금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 거지!"

"네가 걔한테 직접 물어봐. 솔직히 너 빼고 다른 애들은 다 알걸,"

"확실한 것도 아니면서 나한테 말 전달하지 마."

"확실하지 않다는 건 너 혼자 지레짐작하면서 하는 말 아니야?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

"나는 불쌍한 전학생 구제해 주겠다고 말한 건데. 성의가 아니꼽나 보네? 아니면 너도 그거야?"

"!"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자 교실 뒷문이 열렸다. 복도를 울리는 소리에 뒷문을 열고 들어오신 담임 선생님은 손가락으로 한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교무실로 따라와.

따지고 보면 잘못은 다른 놈이 했는데 혼나는 것은 한빈의 몫이었다. 사람을 밀치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 이유였다. 담임 선생님께 억울함을 토로해도 화를 낸 이유를 제대로 말할 수 없어 해명하기가 어려웠다. 한빈이 일방적으로 잘못했다고 생각하신 담임 선생님은 반성문 세 장을 쓰게 했다. 그것도 에이포 용지에 제일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말이다. 태어나서 반성문을 써본 적이 없었기에 내용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랐고 더군다나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 한빈은 홀로 교무실에 남아 반성문을 쓰는 것이 억울했다. 반성문 때문에 수업에도 들어가지 못한 한빈은 어쩔 수 없이 죄송함을 쥐어 짜내며 반성문을 적었다.

한빈이 교실에서 싸웠다는 소식을 들은 하오는 같이 하교하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하오의 얼굴을 보면서도 똑바로 말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남자를 좋아하느냐 묻고 싶었지만 태연하게 물어야 할지 화를 내며 물어야 할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하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에 하나 진짜로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전혀 받아들인 적 없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울렁거림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일게 했다. 한빈은 하오를 보던 것을 멈추고 땅에 시선을 부딪쳤다. 그냥 오늘따라 화가 많았어. 먹히지도 않을 변명을 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하오의 교실에 놀러 갈 때마다 하오는 남자인 친구들이 아닌 항상 같은 방송부원인 여학생과 대화하고 있었다. 점심 또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먹은 적이 없었다. 첫날에 홀로 빵을 먹고 있던 것도 이상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자고 약속했을 때도 어떤 일이 있어도 친구 해 달라며 약속하던 말소리가 깊이 남아 있었다. 장하오는 정말 남자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 두려움이 섞인 감정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렵 뻐꾸기시계가 또 다시 고장 났다. 새벽 두 시면 울리던 시계가 오후 두 시를 가리키며 뻐꾹 소리를 냈다. 거실에 놓인 책장에서 문제집을 찾던 한빈은 열두 번이나 우는 뻐꾸기시계가 시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좀 고치면 안 되나. 툴툴거리며 문제집을 찾던 중, 익숙한 제목을 가진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였다. 하오가 말했던 영화 제목이었다. 한빈은 문제집을 찾던 것을 멈추고 책을 꺼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책 한 권을 전부 다 읽어버리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오가 스스로를 뻐꾸기라고 칭했던 것은 자기자신을 정신병을 가진 사람이라고 치부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손가락 끝에 남은 마음먼지들을 덜어내니 시간은 8월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여름 방학이 한창이었던 탓에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 없었다. 고등학교 삼학년의 여름방학은 학교와 멀어질 수 없었다. 홀로 보충 수업을 신청한 한빈은 매일 아침 학교를 가야 했다. 무더운 여름에 두 발로 학교까지 걸어가니 자전거가 얼마나 소중했던 존재였는지 깨닫고는 했다. 가끔은 하오가 학교까지 데리러 왔다. 하오는 매번 심부름 갔다가 오는 길에 들렀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오 손에 들린 짐은 하나도 없었다. 거짓말하는 게 뻔히 티가 나는데도 하오는 아닌 척 굴었다. 한빈은 그 행동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매번 그 거짓말에 속아주었다. 이유를 말하자면 큰 뜻은 없었다. 그저 하오를 보면 속아주고 싶었다.

데리러 온 날 중 하루는 심부름이 핑계가 아니었던 건지 가방을 메고 왔다. 또 심부름 갔다 왔어? 놀리려고 한 말에 하오는 줄 것이 있다며 자전거를 세웠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비디오테이프를 하나 꺼내 보여주었다. 비디오테이프에는 ‘8월의 크리스마스가 적혀 있었다. 한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비디오테이프를 덥석 잡았다.

 

"진짜 빌려 왔네?"

", 8월이 왔잖아."

"나는 공부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우리 오늘 볼래?"

"오늘?"

"집에 부모님 안 계시거든. 거실에서 볼 수 있을 거야."

 

집으로 가면 해야 할 공부가 아직 남았는데.... 잠시 고민을 하던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공부하지 않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었다. 여태까지 열심히 공부했으니 한 시간 반짜리 영화 한 편 정도는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빈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하오는 크게 웃음을 지었다. 곧바로 비디오카세트를 가방에 넣고서는 자전거를 움직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까웠다.

넓은 마당이 딸린 하오의 집은 거실이 컸다. 들어오자마자 쇼파에 가방을 두고서 앉은 한빈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큰 텔레비전을 보면서 감탄했다. 이 정도 크기면 영화에 집중이 잘 될 것 같았다. 하오는 과자를 꺼내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물을 가지고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과자 봉투를 뜯어서 펼쳐 놓자 하오는 빌려온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영화를 재생시켰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어떤 내용인지 줄거리조차 모르고 본 영화는 심은하의 얼굴만 머릿속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깊게 남은 것은 한여름의 사랑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사랑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벼랑 끝에 서 있어도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그래서 죽음 앞에 있어도 사랑보단 자신에 대한 연민이 먼저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 속 두 남녀 주인공은 한빈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남은 알 수 없는 마음의 조각들을 주워 담으며 생각했다. 텔레비전 화면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가만히 보던 한빈이 하오에게 물었다.

 

"나도 언젠가 저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너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난 한 사람한테 마음 붙이며 살아가진 못할 것 같아. 그 사람이 떠나가면 너무 슬프잖아."

"...."

"혼자 남겨지는 건 싫어."

"이별이 두렵다고 해서 사랑을 회피하면 안 되지."

"...."

"나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사람한테만 마음 붙이고 사는 거."

 

한빈이 고개를 돌려 하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하오와 눈이 마주쳤다. 하오는 눈빛을 피하지 않고 한빈을 응시하고 있었다. 꼭 말을 전달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리고 싶은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러고선 몸을 기울여 한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목에 닿는 하오의 머리카락에 순간 숨을 참았다. 엔딩 크레딧에 흘러 나오는 노래를 따라 손가락을 까딱거리던 움직임도 멈췄다. 하오는 말했다.

 

"영화 어땠어?"

"... 좋았어.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나도 좋았어."

"어느 부분이?"

"너랑 봐서."

"...."

"이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8월의 크리스마스야."

"...."

"있지. 예전부터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친구가 없었어."

"...."

"우리 집에 오면 병이 옮는대. 아픈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그런 말을 하더라."

"...."

"네가 보기에 나는 어때?"

"...."

"다른 사람 말처럼 내가 이상해 보여?"

 

하오는 고개를 들어 한빈을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불안을 마주한 것처럼 속절없이 휘둘리고 있었다. 하오에게 어떠한 대답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행동의 이유를 만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빈은 하오의 머리 위로 살포시 손을 얹어 다시 어깨에 기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손을 내려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난 너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

"다른 사람이랑 다를 이유도 없어."

"...."

".... 그냥 평범한 거야. 다른 사람들처럼."

 

텔레비전은 검은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검은 화면을 통해 보이는 모습이 이질적인 것을 알면서도 하오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빈은 긴 시간 동안 하오의 어깨를 토닥였다. 완벽하지 않은 위로였지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마음의 방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이상한 감정에 빠지고 싶었다. 빠져나올 방법도 모르면서.

하오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8월의 크리스마스 포스터를 주었다. 심은하를 좋아한다는 말이 생각이 나서 구하러 다녔다는 말에 마음이 저렸다. 너는 안 가져도 돼? 한빈이 물으니 하오는 대답했다. 그건 너한테 보내는 내 편지야. 수신자를 바꿀 수 없다고 하는 말에 한빈은 알았다며 포스터를 받았다. 그리고 그 포스터를 클리어 파일에 넣어 책상 가장 첫 번째 서랍에 넣어두었다.

 

8월이 지나면서 영화 한 편 볼 여유마저 사라졌다.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평소에 공부하지 않던 애들도 연필을 들어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창밖의 나뭇잎은 말라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처음 전학 온 날 입었던 코트를 다시 입고 나서야 겨울이 찾아왔음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본 이후로 하오와는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무언가를 말을 하려면 무거운 감정을 들고 있어야 했고, 수능이 다가오는데 괜한 말을 꺼내는 건 아닌지 고민을 하다가 시간을 멍청하게 흘려보내야만 했다.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제멋대로 흐르는 시간이 미웠지만 수능을 마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그 핑계로 11월까지 달려왔다.

수능을 하루 남겨둔 날이었다. 예비소집일을 갔다 오니 시험이 코앞에 있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내일 가져갈 짐을 챙기던 한빈은 여분의 컴퓨터 싸인펜을 찾기 위해 책상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는 하오가 주었던 8월의 크리스마스 포스터가 보였다. 공부하느라 바빴던 탓인지 포스터가 있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랍에 넣을 때 잘못 넣은 것인지 포스터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그 모습이 싫었던 한빈은 클리어 파일에 있던 포스터를 빼내어 다시 정리하려고 포스터를 들었다. 그러자 미처 보지 못한 포스터 뒤로 굵은 네임펜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한빈에게, 라고 적힌 문장을 읽은 순간 한빈은 포스터를 손에 쥐고서 집 밖으로 나갔다.

숨이 차오르도록 달렸다. 12월이 오고 나면 더는 붙잡을 수 없을 정도로 늦어버릴 것 같았다. 하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편지를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어디부터 변명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정리가 안 되었으면서 무작정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하오의 집 앞에서 한빈은 숨도 고르지 못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이 고장이라도 난 건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빈은 주변에 있는 작은 돌멩이를 주워 하오의 방 창문 쪽으로 던졌다. , .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에 창문을 연 하오는 한빈을 발견했다. 대문 앞에 있는 한빈의 모습에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한 하오는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왔다. 날이 추운데도 마음이 급했는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한빈이 말했다.

 

"나도 널 알아가고 싶어."

"...."

"좋아해."

"...."

"너랑 함께 영화를 보았던 8월이 크리스마스처럼 느껴질 정도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모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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