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시네마
테이제
▣ 영화 <상견니>의 설정을 일부 오마주한 작품입니다.
▣ 영화 <상견니>의 일부 설정을 오마주 했지만, 해당 오마주 작품의 스토리라인과 전혀 연관이 없으며 개별적인 스토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감정시네마
테이제
침대 위에서 불현듯 눈꺼풀이 트였다. 하오는 차갑게 식은 손가락을 구부렸다. 밀랍처럼 온몸이 굳고 있지만, 손가락을 굽힐 힘이 남아 있었다. 형, 괜찮아? 내 목소리 들려? 이따금 한빈의 외침이 귓바퀴를 맴돌았다. 하오가 잠긴 목을 긁으며 읊조렸다. 성한빈, 한빈아. 내 목소리 듣고 있어? 입을 벙긋대던 그때, 머릿속에서 마개가 픽 뽑히는 느낌이 들더니 구멍 사이로 모든 소음이 빠져나갔다. 하오는 적막을 헤아리다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이 죽었다는 판단이 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눈알을 굴렸다. 투명한 창 너머로 파란 물길이 첨벙거린다. 무수한 액체 입자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이곳은, 죽은 자들이 발을 들이는…… 영혼의 방인 걸까. 물길이 일던 창밖은 부팅되는 컴퓨터 화면처럼 숫자 기호들이 떠오르더니 무언가를 비추었다. 그 순간 하오가 질끈 눈을 감았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창밖에 비친 것은, 죽기 전 마지막 기억이었다.
해가 비스듬히 기우는 시간. 한빈의 뒤로 거대한 크기의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다. 뒤돌아 선 한빈이 해처럼 내리쬐는 자동차 불빛에 홀린 듯 발이 묶였다. 앞서 걷던 하오가 순식간에 그를 끌어안고 몸을 던졌다. 가드레일에 거세게 머리를 부딪힌 한빈이 널브러진 하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형. ……괜찮아? ……내 목소리 들려?
붉은 낙조로 젖어드는 하늘. 한빈의 피 흐르는 얼굴. 웅성거리는 행인들. 창밖이 차츰 페이드 아웃 되듯 어두워진다.
머릿속의 마개가 부품처럼 끼워지는 느낌이 든 건 그때였다. 무슨 상황인가 판가름 하기도 전, 마치 죽었다 살아나는 것처럼 차가운 몸에 미지근한 열감이 오르기 시작했다. 움직일 수조차 없이 뻣뻣했던 몸이 삽시간에 예민해지더니 경련했다. 괴로운 듯 뒤척이던 하오가 움찔 두 눈을 떴다. 벽 모퉁이에서 의문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심코 연기를 삼키자 기침이 흘러나왔다. 머릿속이 희부연 안개가 낀 듯 일시에 의식이 느슨해졌다. 무거운 눈꺼풀이 두어 번 깜박거리다 이내 닫혀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매트리스 침대 위였다.
번뜩 몸을 일으킨 하오가 시간을 가늠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처럼, 세상이 고요했다. 피투성이였던 교복이 멀끔해진 채 옷걸이에 비뚜름하게 늘어져 있었다. 거실로 나가자 푹 꺼진 가죽 쇼파에서 과학 논문을 읽던 아버지가 일상적인 투로 묻는다. 일어났냐. 해가 중천이다. 산세베리아 잎을 닦던 어머니는 머뭇대며 몸을 일으켰다.
하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며 읊조렸다.
“저… 사고 나지 않았어요?”
그때 어머니가 흐읍, 울음을 뱉었다. 잇새로 혀를 찬 아버지가 그녀를 향해 눈초리를 던졌다. 헛기침을 한 어머니는 몸을 돌리며 눈물을 훔쳤다.
“꿈을 꿨나 보구나.”
아버지의 무념한 말에 하오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뼈가 불거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피부에 파란 혈관이 마치 누가 만든 것처럼 정교했다. 불시에 머리가 어지럽고 관자놀이가 당겨왔다. 살아있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통각. 정말 살아있었다.
―단순한 꿈이 아닌―영혼의 방은 놀라우리만치 생생했으므로, 하오는 자신이 지금 과거로 와 있다고 판단했다. 사고가 나기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의문이 일었다. 성한빈은 자신처럼 죽지 않았나. 과거로 돌아왔다면……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인가?
1
목기 그릇 속 우유가 넘칠 듯 일렁였다. 시리얼을 퍼먹던 한빈이 미간을 좁혔다. 물끄러미 잡지를 응시하며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2042년 올해 운세
[쌍둥이자리]
갑작스러운 사고 조심 또 조심!
인간에게 사랑을 기대하지 마세요.
엄마가 구독해 놓은 잡지의 별자리 운세. 볼 때마다 생각이 많아져, 찾지 않았는데. 어젯밤 엄마가 읽던 모양인지 식탁에 페이지가 활짝 펼쳐져 있었다.
우물우물 시리얼을 씹던 한빈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제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전했지만, 고전 점성술인 별자리 운세는 간혹 놀라울 만큼 들어맞았다. 또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그는 불안한 듯 예의 잇살을 씹었다.
싱크대로 향해 그릇을 헹구고 흐르는 수돗물을 껐다. 일정을 다시금 상기하며 화장실 거울 앞에서 반팔 위 하복 단추를 잠갔다. 바깥에서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공 미화 로봇들이 거리를 청소하고 있었다. 한빈은 칫솔을 물고 헐거운 창틀을 닫았다. 굵은 빗방울이 리듬감 있게 욕실 창틀을 두드렸다.
닫힌 안방을 흘깃거리며 살금살금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나가니? 헝클어진 머리에 구르프를 말고 있는 엄마가 잠에 취한 눈으로 하품했다. 네, 오늘 조금 늦어요. 깜박 불이 켜지는 형광등 아래 가방끈을 쥔 한빈이 뒤돌았다.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들이 왜 늦는지, 무얼 하는지. 이유를 묻지도 않은 엄마는 화장실 문을 열고 쏙 사라져버렸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본 지가 언제였더라. 보험 회사 영업직인 엄마는 언제나 바빴다. 상담사 중 96퍼센트가 인공지능으로 대체 된 뒤로, 살아남기 위해 좀처럼 일찍 귀가하는 법이 없었고 집에 오면 고객과 통화를 이어갔다. 엄마의 경쟁력은 ‘감정’에 있었다. 비록 아들에겐 베푼 적 없었지만……. 아들은 생일날에 엄마 대신 식탁 위에 놓인 신사임당의 축하를 받았다. 오늘은 그마저도 잊었는지 열아홉 번째 생일 식탁이 허전했다.
한빈은 주인 없는 택배 상자처럼 우뚝 서 있다가, 짙은 한숨을 뱉고 문을 열었다.
2
이가 나간 보도블럭을 서성이던 한빈은 차도를 향해 손을 뻗는다. 달리는 택시들이 무심하게 그를 지나친다. 저녁 여섯 시 서울역. 과학이 발전했지만 인류를 교통체증이라는 지옥에서 구원해주진 못 했다. 택시도 버스도 탈 수 없을 만큼 도로는 극심한 정체를 앓았다. 손에 미니 선풍기를 든 사람들이 광역버스 정류장에 줄을 지어 서 있었다. 택시고 뭐고 오긴 오는 건가. 이따금 아랫입술을 씹는데 손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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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17번째 북클럽 <근미래 소설의 사랑법> 강연 예약자 사전 안내
씁쓸한 눈으로 텍스트를 훑었다. 마지막 메시지를 엄지로 누르던 순간, 짧고 날카로운 경적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개인 택시 한 대가 그의 앞에 멎었다. 한빈이 열린 창문 너머로 외쳤다.
“합정역 가세요?”
백미러로 눈을 마주친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안에 발을 집어넣으려던 순간이었다. 한낮에 에어컨도 틀지 않은 모양인지 무더운 공기가 훅 끼쳤다. 한빈이 살며시 코를 막았다. 알콜냄새 비스무리한 쩐내가 났다. 문 손잡이를 잡고 멈칫대던 찰나, 어깨가 떠밀린 것처럼 차안으로 기우뚱 몸이 기울어졌다.
차는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다리가 붕뜰 것처럼 빠른 속도였다. 침을 삼킨 한빈이 불안한 눈으로 전면 유리창을 응시했다. 여기서 이렇게 빨리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기사님. 앞좌석을 향해 몸을 기울이던 그때였다.
택시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급정거했다. 덩달아 뒤로 나자빠진 한빈이 짧게 탄식했다. 택시 기사가 욕지기를 뱉었다. 그 순간 한빈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무언가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가를 손등으로 비벼댔다.
눈앞의 하복 셔츠가 낯익었다.
“형?”
의외의 인물이 차를 가로막은 채 도로 위에 서 있었다. 노란 명찰에 크로스백을 맨 장하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덜컥 차문이 열렸다. 한빈의 손목을 움켜쥔 하오는 택시를 거칠게 닫았다.
“형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 뭐야?”
“가자.”
“어딜!”
매서운 기세로 한빈을 잡아끄는 하오의 입매가 굳어 있었다. 한빈이 어깨를 비틀어 손목을 빼냈다. 붉어진 손목을 매만졌다.
“어디든.”
“나 강연 들으러 가야해! 왜 이러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걸 말이라고 해? 시답잖은 말에 한빈이 코웃음쳤다. 불현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중충하잖아, 아 진짜. 저게 어떻게 잡은 택시인데!
저기요! 멀어지는 택시를 향해 손을 뻗던 한빈이 순간, 쾅 소리에 어깨를 털었다. 삽시간에 택시가 하얀 연기를 뿜었다. 본네트가 반파될 정도로 심한 충돌 사고였다. 몇 초만 늦게 내렸다면 저 구겨진 차안에 한빈이 있을 터였다.
처참한 광경을 잠자코 바라보던 하오가 고개를 틀었다. 그는 놀란 기색도 없이 사고현장으로 다가서려는 한빈을 막아섰다. 잇달아 손깍지를 끼우고 걸음을 옮겼다. 한빈은 신발끈이 풀린 채로 아스팔트를 불안하게 밟았다. 잠깐만, 형아, 나 신발….
허릴 숙이며 중얼거리자 등을 보이던 하오가 고개를 돌렸다. 망설임 없이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았다. 신발끈을 묶는 손길. 한빈은 아기 다루는 듯한 손길을 익숙하게 받는다.
“저 차 사고 날 거 어떻게 알았어?”
“저 사람 술 마셨잖아.”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았는데? 사람으로 빼곡히 둘러쌓인 현장을 바라보던 한빈이 의문했다. 생각이 많은 한빈이 딴생각을 할까 싶었는지, 하오가 구태여 부연했다. 차선을 막 넘잖아. 새까만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한빈은 어쩐지 울컥했다.
“그래도 이상해. 무슨 형이 히어로야? 외계인도 아니구.”
“나는 더 대단한 사람인데.”
“……나 오늘 강연 예약 했는데 그것도 못 갔어.”
“내가 강연해줄게. 뭐 듣고 싶은데?”
강연은 무슨 강연. 한빈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따금 과하게 스스로를 긍정하는 하오는 능청맞게 어깨만 으쓱였다. 그는 어리광부릴 때는 아이 같다가도 때때로 너무 커다란 어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따라가야 할 이정표처럼 높고 곧아 보일 때가 있었다. 확신에 찬 말을 뱉는 순간이면 과한 표현이 아니라 당연한 진리처럼 여겨졌다. 그러니까 그 어떤 강연보다, 장하오 하나가 낫기는 했다.
한빈은 하오를 따라 상점 거리를 거닐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젖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비가 올 모양인지 공기마저 미지근했다. 가느다란 물방울이 뺨을 스쳐갔다. 골목 어귀 담벼락 앞에 다다랐을 즈음 하오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날씨 좋다! 살아 있는 것 같아. 그가 시원하게 입꼬리를 밀어올렸다. 빗줄기는 점차 굵어지고 있었다. 하오는 주택가를 등에 지고 같은 말을 또다시 외쳤다. 날씨 좋다! 살아 있는 것 같아. 살아있다, 자신이 여기에 있다 알리듯이. 한빈이 문득 말을 꺼낸 것은 그때였다.
“형 괜찮아?”
“뭐가?”
“아니… 아프지 않아?”
하오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무슨 뜻이야. 비가 왜 아파?”
아니야, 아무것도. 한빈이 말을 얼버무렸다. 하오는 이렇다 할 대답 없이 양팔을 벌리며 눈을 감았다. 빗물에 젖은 셔츠가 회색으로 물들었다. 그 옆에서 한빈이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문득 하오가 고개를 기울이며 한빈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네가 느끼는 감정 이름이 뭐야?”
동시에 한빈이 시선을 들었다. 담벼락 위로 뻗어나온 초록잎이 무겁게 젖으며 고개를 숙였다. 초록 이파리들 사이로 하오와 시선이 얽혔다. 하오의 머리칼 아래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 그냥 지금 웃겨……. 즐거움?”
하오는 아, 짧게 중얼거렸다. 신코로 아스팔트 물웅덩이를 물장구치며 말을 이었다. 나랑 있으면 즐거운 거지. 그치? 한빈이 목이 멘 티가 날까 괜스레 헛기침을 뱉었다. 응, 형이랑 있으면 맨날 웃겨. 부쩍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뜨거운 눈두덩이를 문지르던 그때 그들 옆에서 오토바이가 차르르 물길을 가르며 지나갔다. 갑작스런 소음에 하오가 고개를 돌렸다. 한빈은 그의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다행히 그가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3
한빈은 쾅 소리에 몸을 돌렸다.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온 하오가 대뜸 허리를 끌어 안아왔다. 몸이 뒤로 쏟아질 만큼 강한 힘이었다. 형, 왜 그래? 한빈이 굳은 얼굴로 그의 팔을 떼어냈다. 하오는 한빈이 뭐라 하든 버그라도 난 것처럼 같은 말만 되뇌었다. 성한빈, 한빈아. 내 목소리 듣고 있어? 미안해, 내가 미안해. 잠시간 정적이 맴돌았다. 창밖에서 매미 우는 소리가 일시에 정적을 깨뜨렸다.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한빈은 그의 하복 셔츠 목덜미에 코를 묻고 킁킁거렸다. 술냄새는 나지 않았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형.
창문 너머로 매미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올 뿐, 하오는 답이 없었다. 한빈은 문득 벽시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한낮의 시침이 여덟시를 가리켰다. 자주 보지 않기에, 고치지 않았던 시계였다. 고장난 벽시계 옆으로 커튼이 살랑거렸다. 먼지가 부유하는 허공을 바라보던 한빈이 고개를 숙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작년에 우리 처음 기숙사 룸메 됐을 때, 기억나?
무릎을 베고 누운 하오는 죽은 듯 기척이 없었다. 한빈이 그의 높다란 콧대를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그때도 여름이었는데. 형 스무살 고딩이래서 완전 양아치인 줄 알았잖아. 그땐 이렇게 매일 붙어다닐 줄 몰랐어. 과거를 떠올리는 한빈의 얼굴엔, 반갑고도 슬픈 감정이 번져 있었다. 한빈은 혼잣말인지 건네는 말인지 모호하게 중얼거렸다. 살았으면 좋겠어, 살았으면…….
4
점심시간, 소란스러운 복도. 대리석 난간에 기댄 한빈은 스크류바를 입에 물었다.
“장하오!”
장하오를 부르는 소리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계단 난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오가 말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대화 중이었다. 열변을 토하는 친구 앞에 하오는 성의 없이 웃는다. 진짜 성의 없어. 너무하네. 그의 기계적인 표정을 한빈이 시늉했다. 기척을 느낀 걸까. 머리통 하나를 두고 시선이 맞물렸다.
한빈이 제 얼굴을 향해 손짓했다. 나 보는 거야? 하오는 반응 없이 눈만 끔벅였다. 대화에 집중해. 한빈이 입모양으로 벙긋거렸다.
앞 보라구. 다른 사람이랑 말하면서 왜 자꾸 쳐다봐.
하지만 하오는 계속 한빈에게 시선을 던진다. 앞에서 실컷 떠드는 사람을 단숨에 허수아비로 만들더니, 씨익 웃어버린다. 그 웃음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좀전에 성한빈이 시늉한 웃음과는 너무 다른 것이어서. 한빈은 머쓱한 듯 목을 가다듬었다. 이어 뒤늦게 생각했다. 나 지금 좀 바보 같겠지.
“야!”
동급생 현기가 기습적으로 뒤에서 헤드락을 걸어왔다. 반 뒷문에 반쯤 걸쳐진 다리가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었다. 캑캑대던 성한빈이 그의 팔을 찰싹 내리쳤다.
“윽, 놔라 짜식아.”
“또 어디 보고 있었냐.”
현기는 중학교 때 창작원에서 만난 아이였다. 한빈과 그가 다닌 학원은 서울에서 문창 입시 아웃풋으로 손꼽히는 명문이었다. 매특강마다 선착순으로 인원 마감이 되는 곳이었으므로, 직접 방문 등록해야 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대기 번호 40번을 받고 나서야 숨통이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뒤에서 어깨를 두드린 게 현기다. 특강 들으러 와놓고 볼펜도 안 가져온 자식이었다.
“또 장하오냐?”
“형 붙여 임마. 그리고 이제 어지간히 친해질 때 되지 않았어? 우리 너 얘기 많이 했는데.”
“내 얘기를? 왜?”
현기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어 말을 덧붙인다.
“그 형은 좀 그렇더라. 난 원래 그 부류들은….”
동시에 한빈이 미간을 좁혔다. 말실수 했다는 걸 깨달은 듯 현기는 한 손으로 코를 훔쳤다. 둘 사이에 마가 떴다. 해명을 요구하는 눈짓에 현기가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아니 나는 그냥… 그 형이 사람이 아니, 아아아 아니! 사람 같지 않게 좀 비현실적으로 생겼잖아.”
“사람 같지 않게 생긴 건 뭐야?”
“에이씨. 넌 왜 또 그런 거 갖고 물고 늘어지냐? 그 형 좀 말수 적고 그러지 않나. 제대로 대화 안 해 봤어. 감정이 없어 보이잖아. 좀 무섭.”
“무섭다고?”
“아니 사실, 무섭다보기 보다, 뭐 감정이 없다기 보다는 그냥….”
“그냥 뭐.”
몸을 돌린 현기가 복도를 살핀 뒤에 입을 열었다.
“너한테만 좀.”
“말 똑바로 해. 뭔데.”
“너한테만 좀 과보호 하는 경향이 있지….”
“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한빈이 얼이 나간 얼굴로 되물었다.
“남자가 남자를 자기 아래로 두는 일종의 서열 정리말고. 그런 류의 집착이랑은 좀 다르지. 그냥 아빠처럼. 아 좀,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진 말고.”
“새끼가… 뭐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 형이 좀 어려워. 너 옆에 벽이 쳐지는 느낌? 또 최근엔….”
현기가 무어라 덧붙이려다가 말을 삼켰다. 한빈은 송곳니로 아이스크림 막대를 꽈득 깨물었다.
“뭔가 완전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 형이랑 나 그런 사이 아니야. 정말 친한, 영혼의 반쪽 같은 거야. 소울 메이트 같은 거. 그래서 형이 유독 나에 대한 걸 잘 기억해주구.”
“넌 그 말이 더 이상한 걸 모르는 거냐….”
볼멘 소리를 뱉던 현기가 허공에 손을 뻗은 건 그때였다. 야야야, 축구공! 창을 향해 축구공이 날아오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한빈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한빈을 잡아당겼다. 판판한 가슴에 머릴 박은 한빈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표정 없이 내려다보는 그는 의외의 인물, 하오였다. 공은 하오의 어깨를 들이받고 복도를 굴렀다.
맞아, 오해야.
하오는 현기를 향해 태연하게 빙긋거렸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한빈을 향해 옮겨갔다. 괜찮아? 한빈은 입을 뻐끔거리며 괜찮아, 대답했다. 내 말이 맞지? 현기가 딱 그런 표정으로 말없이 혀를 내둘렸다. 한빈은 현기를 향해 설렁설렁 손을 흔들었다. 하오의 커다란 손이 한빈의 뒤통수를 쓸었다. 한빈은 인형처럼 손길을 받았다. 정작 맞지도 않았는데. 맞기는 자기가…….
부정할 수 없었다. 오해가 아니고 과보호가 맞았다. 교실 뒷문으로 들어온 한빈은 퍼질러 잠든 남자애들의 다리를 정글처럼 건넜다. 수업종 울리는 소리, 교과서가 사락 넘어가는 소리, 밖에서 축구공 차는 소리가 순서대로 귓가에 꽂혀들었다. 다 큰 나를, 다 자라기 전부터 엄마에게 어른 취급을 당했던 나를. 장하오만이 아이처럼 여기고 보호한다. 한빈은 과보호라는 말을 사탕처럼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심장이 공처럼 가슴 속을 뛰어 다녔다. 가슴이 쿵쿵거려, 심장 언저리를 손으로 문질렀다.
하오와 있으면 애지중지 소장하는 도자기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택배 상자가 아니라.
5
그날 이후 한빈은 심란해졌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깍지를 끼거나, 신발끈을 묶어주거나, 날아오는 공을 막아주거나, 위험에서 구해주거나. 특별히 친하고, 서로를 오래 생각하고.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남들 눈에 이상해 보인다는 거, 왜 이제 알았을까. 한빈은 눈치 없는 자신을 자책했다. 생각이 실타래처럼 얽혀 머릿속이 복잡했다. 기숙사 책상 위에 어지러이 흐트러진 수능특강과 유인물을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탁상용 캘린더 앞에 우뚝 손이 멈춰선 건 그때였다. 캘린더 날짜가 이상했다.
지금은 7월, 왜 캘린더는 아직 6월이지. 대수롭지 않게 바꿔놓아도 다음날 보면 다시 돌아가 있었다. 게다가 한빈의 생일날에 표시 해두지 않았던 글씨까지 생겨났다. 한빈 생일? 이미 지난 날인데. 한빈은 6월에 머물러 있는 캘린더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오는 왜 자꾸 지난달의 달력을 보는 걸까. 왜 그의 캘린더는 넘어가지 않을까.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샤프심이 툭 부러졌다. 상념에 잠긴 한빈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슴푸레 스탠드를 켜놓은 책상 위 문제집. 인간이 호흡을 불어넣은 완벽한 ‘휴머노이드 R-3338’의 인권 문제… 시민권 부여 한국이 첫 사례. 독서 지문의 내용을 그림처럼 훑어보는데 무언가 팍 터지는 소리가 났다. 한빈이 번뜩 주위를 살폈다. 사위가 어두웠다. 스탠드고 뭐고 다 꺼져버렸다. 정전이었다.
창밖에선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루 내도록 쏟아지는 빗줄기는 장마의 시작을 알렸다. 무연히 빗소리를 듣던 한빈이 잇살을 씹었다. 아, 방에 캔들 같은 것도 없는데. 어떡하지.
휴대폰 후레시를 켜려던 찰나 눈앞에서 손톱만한 불빛이 번쩍거렸다. 캔들을 들고 온 장하오였다. 조명 꺼진 어둑한 방안에서 둘이 그렇게 서 있었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고 세찬 빗소리만 건물을 울렸다.
“웬 캔들이야.”
“가끔 써.”
촛농에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끊긴 전기는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늘 공부는 물 건너간 듯싶었다. 한빈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냈다. 에어컨이 돌아가 방안이 쾌적했다.
“나 옷 갈아입을 거니까 눈 뜨지 마.”
옷장 앞에 선 한빈이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안 보여. 일층 침대에 누운 하오는 도리어 눈을 부릅떴다. 눈 뜬 거 다 보이거든? 이 변태야. 한빈이 쇄골 위로 손을 엑스자 하며 몸을 옹송그리는 시늉을 했다.
이내 하오가 눈두덩이 위에 손등을 덮었다. 진짜 안 본다니까. 빨리 갈아입어.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반팔을 꿰어 입었다. 곧이어 성큼성큼 하오의 앞으로 다가갔다. 엄청 크게 놀래켜야지. 기대 섞인 입꼬리를 올렸다. 그 순간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얼굴이 앞으로 휙 당겨졌다. 부웁. 이상한 소리를 낸 한빈은 그대로 굳었다. 하오의 양손이 그의 뒤통수를 움켜쥐고 있었다. 남의 갈빗대에 입술을 부딪치긴 난생 처음이었다.
“므츤늠.”
“이 아니고 형.”
“늘그 읐네. 느그 믄 흥이야.”
“심심하니까 이러고 있자.”
“므츤늠.”
하오의 몸 위에 볼이 뭉개진 한빈이 중얼거렸다. 버둥거릴수록 하오의 손뼈가 불거졌다. 한빈은 고정 당한 머리통을 마구 휘저었다. 하오가 키득거렸다.
“재밌어.”
“…글븟드으 쁘쁘흐는그?”
“웅. 뽀뽀하는 거.”
금세 한빈의 두 볼을 움켜쥔 하오가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콧대에 고스란히 불빛이 맺혀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눈썹뼈 밑 그림자, 빛을 받은 콧등. 찬찬히 시선을 떨어뜨리는데 하오가 입술을 열었다. 한빈은 붉은 혀가 입술을 가르고 나오는 것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입술 닳겠어 나.”
“뭐 얼마나 닳는다고….”
“그럼 더 닳게 할까?”
지나치게 깜박이는 눈자위. 장하오가 그 모습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수초 간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안개 같은 정적이 둘 사이 가득 끼어 있었다. 아, 왜 이래.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한빈이 하오를 밀어냈다. 그리고 순식간에 무슨 용기가 솟았는지, 불쑥 이상한 질문을 내뱉었다.
“형… 누구 좋아해본 적 있어?”
“성한빈.”
“응.”
“너 진짜….”
하오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그 순간 한빈은 이불을 그러쥐었다. 빗소리, 숨소리. 세상의 온갖 점성이 다 귀로 몰린 것 같다. 이불을 살며시 끌어올려 머리를 숨겼다. 그 안에서 작게 숨을 뱉었을 뿐인데 장하오가 웃었다. 다 보여, 귀 빨개. 그의 입술을 흘긋거린 한빈이 웅얼거렸다. 조용히 해.
“좋아하지. 그런데,”
좋아하는 거 말고. 더한 것도 해. 능청 맞은 투가 나직하게 귀를 간지럽힌다. 요란해진 속을 어쩌지 못한 한빈의 귀가 성냥개비 머리처럼 붉어졌다. 이불 밖으로 눈만 내민 한빈이 도륵 눈알을 굴렸다.
“그거보다 더 한 게 뭔데?”
“그거 있잖아. 좋은 것보다 더 한 거.”
“뭐 변태냐?”
“…무슨 생각하는데?”
아, 씨. 그쪽이 아닌가. 한빈이 입을 합 다물었다. 괜한 생각일지 모른다고 판단이 서자,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말 안 해.”
“나 그거 이름 몰라. 알려줘 여기다.”
“이럴 때만 모르지. 좋아한다는 건 알면서 그걸 왜 몰라.”
“나 바보 맞아. 알려줘, 써줘어.”
한빈이 반신반의하며 하오의 손바닥에 적어내렸다. 좋아하는 것보다 더한 거.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하나였다.
ㅅ
ㅏ
ㄹ
ㅏ
ㅇ
원을 덧그리던 순간이었다. 하오가 성큼 검지를 잡으며 물었다. 너,
“나 이거 하지.”
진지한 투였다. 도무지 웃으며 대응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 혼자 서 있다 불이 켜진 것처럼 한빈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심장이 저 아래로 내려앉았다. 너무 당황해서 아니라는 말도 못하고, 병신 같은 반응이 튀어나왔다.
“몰라.”
몰라, 모른다. 모르는 게 너무 많다. 하오가 베개에 볼을 대며 웃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던 단어를 기어이 먼저 받아내 놓고.
“생각도 많은 애가 왜 모르지…….”
“형은 나 왜 좋아하는데?”
희미한 촛불 빛이 한빈의 하얀 얼굴에 어른거렸다. 하오가 한빈을 향해 바짝 얼굴을 붙였다. 숱이 많은 속눈썹부터 자그마한 입술까지. 찬찬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렇게 쳐다보는데 어떻게 안 좋아해.”
“어떻게 보는데….”
“어떻게 보냐면.”
혼자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하오가 답을 내렸다.
별을 보듯이 본다. 이 눈이, 별안간 나를 특별하게 만든다. 목을 빼고 하늘을 보지 않고서도 너는 별을 보는 아이처럼 기대가 어린 눈짓으로 나를 본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고 버틸까. 이렇게 봐주는 너를.
“뭐야… 무슨 생각 해. 왜 말 안 해줘.”
침묵이 흐르는 사이 한빈이 말을 덧붙였다. 나 사랑하는 거 뻥이지.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민 한빈이 하오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바르작거렸다. 하오는 말 없이 그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었다. 이내 잠이 든 한빈의 숨소리를 세어 보았다. 셀 수 없을 즈음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6
하오는 거친 비명을 뱉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좁다란 침대 시트에 손을 뻗어 온기를 확인했다. 미온이 느껴지자 벽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메마른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한빈이 죽는 꿈을 꾸었다. 죽은 한빈이 자신을 이름을 목놓아 부르고 있었다.
2042년 6월 7일. 한빈이 죽은 날. 시간을 가늠하던 하오는 오늘이 6월 7일 당일임을 떠올렸다.
하오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보통의 시간을 이동하는 이들이라면 똑같은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나, 그들의 경우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언가 다른 과거 여행이란 말인데. 만약 이번에 한빈을 살리는 일에 성공해도, 전처럼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검지로 미간을 문지르던 하오가 결심한 듯 눈을 떴다. 살아남을 한빈을 위해 편지를 적어내렸다. 기분 나쁜 두근거림이 가슴을 울렸다. 잔잔한 통증이 일어, 심장을 짓누르듯 문질렀다.
한빈에게
이걸 읽을 때
내가 옆에 있을까?
나는 요새
아픈 꿈을 꾸고 있어
네가 죽는 꿈 말이야
아주 무섭고 생경한
이 꿈을 이제 끝내려고 해
짧은 노래를 들었다고 생각하자
슬퍼서 자주 듣지 못하지만 아름다운 노래
나를 그렇게 기억해줘
자주 듣던 노래가 더 이상 손이 안 갈 때
나를 잊는 건 딱 그만큼만 아쉬워야 해
이건 슬픔을 구걸하는 편지가 아니야
넌 나를 알잖아
나 같이 잘생긴 남자가 죽으면
세상이 땅을 치고 후회할 거야
그런데 네가 죽으면
나 같이 잘생긴 남자가 평생을 아프겠지
난 아프기 싫어
다만 너의 웃음이 영원하길 바라
그러니 웃으면서 살아
너의 사랑스러움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나는 지금 바보 같은 상태야
오래 앓은 버그처럼
사랑해라는 말은
왜 자꾸 튀어나올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작은 메아리를 써 내리던 볼펜이 허공에 멈추었다. 하오는 편지를 접어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7
어딜 가든, 같이 가야만 한다고. 그날은 하오가 유달리 떼를 썼다. 그 바람에 실기 시험장에 하오가 동행했다. 타기로 예정한 버스는 잔고장으로 운행을 중단했고, 둘은 갈아타기로 결정하며 배차 간격이 먼 버스를 탔다. 불친절한 기사는 확인차 행선지를 되묻자 짜증 섞인 대답을 뱉었다. 하오와 한빈은 나란히 앉아 손을 잡았다. 달리는 차체가 안정적이지 않고 덜컹거렸다. 지나친 속도에 중심을 잡지 못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휘청였다. 창밖으로 강의 교량을 내다본 하오가 한빈을 향해 귓속말을 꺼냈다.
“한빈아.”
“왜?”
“사랑한단 말이 가장 진부하지만 그 말이 진부한 만큼 너를 사랑해.”
“응?”
“세상 사람들이 외친 사랑해를 다 합해도 그보다 더 많이 너를 사랑해.”
한빈이 무어라 입을 열던 그때 차체가 어딘가에 콰앙 충돌했다. 순식간에 중앙선을 침범한 버스는 교량 가드레일에 처박혔다. 기울어진 차체의 유리 파편이 산산이 튀었다. 한빈 대신 창가 자리에 앉은 하오의 상체가 밖으로 튕겨나가던 순간, 한빈의 두 손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여기서 손을 놓는다면 하오의 몸이 버스 아래로 떨어져 내릴 터였다. 안 돼, 형, 제발. 한빈은 이를 악물었다. 하오의 뒤로 깊은 강이 푸르게 흐르고 있었다.
하오는 작정한 듯 한빈의 팔을 떼어냈다. 한빈이 절규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빠져서 어쩌려고! 내 손 잡아 형, 나는 괜찮아. 형이나 살아…… 제발, 제발. 뭉개진 발음이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어깨에 힘을 주었다. 하오를 붙들고 있는 오른팔에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동시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제, 방법이 없었다.
그 순간 행인들이 다리 난간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몸을 겹친 두 인영이 강 저변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8
캡슐 침대 위에서 불현듯 눈꺼풀이 트였다. 하오는 차갑게 식은 손가락을 구부렸다. 밀랍처럼 온몸이 굳고 있지만 손가락을 굽힐 힘이 남아 있었다. 성한빈, 한빈아. 내 목소리 듣고 있어? 하오가 잠긴 목을 긁던 그때, 머릿속에서 마개가 픽 뽑히는 느낌이 들더니 구멍 사이로 모든 소음이 빠져나갔다. 하오는 적막을 헤아리다 마른 침을 삼켰다. 더이상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차츰 생각이 굳어가고 있었다. 떠올리는 단어마다 산산이 조각났다. 성한빈,
성한
빈……….
설비실에 들어선 연구진이 차트를 훑었다.
“언제부터 시작 됐죠?”
“지난달이요. 아마 같이 내리막을 걷다가 사고가 날 뻔한 저를 도와주고, 수리 센터에 다녀온 뒤로….”
“천천히 말씀하세요. 추스르시고.”
연구진이 한빈에게 건조한 위안을 건넸다. 모나미 볼펜이 차트 빈칸을 채웠다. 중국 시장을 겨냥하여 제작된 신체 나이 20세의 휴머노이드. 입양자 장교현, 대만계 화교. 한국 거주. 2039년 구매 후 한 달 전 센터 방문. 잦은 버그가 발생하고 있으나 환불 및 교환 의사 없음. 대리 위탁인…… 학교 친구?
학교 친구는 작은 입술을 불안한 듯 씹었다. 눈가가 죄다 짓무르고 부르터 있었다.
“같이 비를 많이 맞은 날 이후엔 똑같은 말을 반복했어요.”
“구체적으로?”
“저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무언가 꼬인 것 같아요.”
연구진은 상황을 파악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이 휴머노이드의 설계자이자, 사측의 팀장이었다.
“기기 내부에서 정보 교란이 일어난 후에 발생하는 사소한 버그죠. 사람으로 치면 정신 착란. 말을 반복하는 건 루프라는 증상이에요. 보증 기한이 넉넉해서 고쳐서 납품해드릴 수 있고요.”
“그게… 장하오인가요?”
“네?”
연구진의 안경알이 번뜩였다. 한빈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고치면 그게 장하오일까요…. 연구진은 짧게 생각하고 대답했다.
“R-3338이죠.”
장하오가 아니라. 남자의 메마른 반응에 한빈이 매섭게 눈을 치떴다. 시퍼런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 놓고, 기억을 가지게 해 놓고. 그렇게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니. 잔인한 인간들. 몸서리가 쳐졌다.
“수리가 잘 안 되면, 영영 고장날 수도 있잖아요.”
“수리 불가능할 경우 새 제품으로 제공해드립니다. 원치 않으시면 사용 기한에 따라 부분 환불도 가능하구요. 저희 사 휴머노이드의 경우, 추가 사양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 보증 기간이 80년입니다.”
“…….”
“새 제품을 원치 않으신다면 리부팅 할 시 사용 가능 기한이 늘어날 수 있어요.”
“리부팅하면 기억 같은 건 사라지나요?”
“그렇죠.”
“어떻게 사람 기억을…. 장치 하나로…….”
한빈이 고개를 떨구자 연구진이 퉁명스레 읊조렸다.
“저건 사람이 아닙니다.”
한빈은 무너진 표정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둑한 수리실 내부. 캡슐 침대 위에 몸을 늘어뜨린 장하오. 영원히 스무살을 사는 남자는 스스로 기억을 가질 수 없었다. 인간을 위해 자신을 내어줬음에도, 자유를 얻지 못하고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한빈이 마른 얼굴을 쓸었다. 손등에 자꾸 눈물이 묻어 나왔다.
9
다음날 설비실에 소란이 일었다. 인턴 연구원이 팀장에게 다급하게 호출했다. 팀장님, R-3888이 사라졌습니다. 코마 상태일 건데 어떻게 움직인 건지……. 뭐? 수화기 너머 팀장이 황당한 듯 자동차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10
낡은 트럭이 비포장도로 위를 달렸다. 헐거운 바퀴가 모래 바람을 일으켰다. 모난 자갈이 잘그락잘그락 밟히는 소리가 적막을 메웠다. 교복이 아닌 체크 셔츠를 꿰어 입은 한빈은 차가 덜컹일 때마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하오를 흘깃거렸다.
형. 오늘은 형을 반납하라는 연락이 왔어. 고장난 휴머노이드는 연구를 해야 한대. 나 전화 끊고 차단해버렸는데. 괜찮은 거겠지? 엄마한테 연락 가려나? 맞아 죽지 뭐.
열린 차창 너머로 하얀 손이 튀어나왔다. 내던져진 핸드폰이 탕, 탕, 탕 요란하게 바닥을 굴렀다. 한빈은 미련 없이 창을 올렸다.
11
형이 쓴 유서. 아, 유서라는 말 하니까 또 슬프다. 편지라고 하자. 편지 답장을 준비해야겠다.
12
우린 다르지만 닮은 점이 많아서 좋아. 형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니까 나랑 쌍둥이처럼 닮은 것 같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정말 갑자기.
나는 형이 되고 싶은 걸까?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형이 부러워. 너무 사랑하면 그 사람이 되고 싶은 건가 봐.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형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한다.
13
나뭇가지가 비쩍 마른 겨울이야. 일월, 나는 스무 살이 되었어. 형을 훔쳤으니까 좋은 어른은 못 되었고.
트럭 조수석에 형을 태우고 전국을 다 돌아다닌 것 같아. 사계절만 함께 하겠다고 했는데, 이제 봄 하나 남았다. 형한테 여긴 너무 춥나? 혹시 몰라 목도리 해줬는데. 마음에 안 들어도 내 취향이니까 그러려니 해. 불만이면 눈 떠서 뭐라고 하든가.
형이 깨어나길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 나는 어리고 제정신이 아니라 형이 사람이라 믿거든. 사람이 별 건가?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해. 형처럼 사랑을 주는 사람은 살면서 보지 못 했어.
어제는 눈 쌓인 야산까지 차를 몰아 히터를 틀어놓고 구의 증명이라는 책을 읽었어. 담이는 구가 죽고 구를 먹었어. 구를 죽인 인간 세상에 치를 떨면서. 나는 사람이길 원하는가, 의문하면서. 나 또한 때때로 형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해. 형의 눈코입과 손발. 이런 것들이 썩어 없어질 바에 내가 먹는 게 낫다 싶거든. 이따위 사람 새끼이길 원하는가 의문하기도 해. 후에 깨달았지. 난 사람이길 원하지 않아.
형을 훔치고 먹어대는 야만적 존재가 되길 원하지. 너무 사랑하니까. 모든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오던 내가 형 앞에선 무엇도 감출 수 없으니까. 이제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해지고 싶어. 아주 날것의 감정으로 생생하게 밑바닥을 경험할지라도. 내가 이렇게 지독할 수 있다는 건 형을 통해 처음 안 사실이야.
와이퍼를 켜자 두껍게 쌓인 눈더미가 와르르 무너졌다. 차창 밖은 한 눈에 시야가 트일 정도로 새하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통통한 참새가 마른 나뭇가지 위로 날아들었다.
한빈은 따듯한 보온병을 입에 대었다. 물을 한 모금 머금고 히터를 틀었다. 상체를 숙이자 물이 입꼬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닦아내던 그때, 조수석 문 밖에서 긁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소리가 계속되었다. 고양이인가. 의문하며 조수석 문을 열던 순간,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하오의 몸이 미끄러졌다. 한빈이 그를 두 팔로 끌어안은 채 잡아당겼다. 그때였다. 하오가 목도리에 파묻힌 입술을 달싹인 것은.
“성한빈, 한빈아. 내 목소리…….”
눈을 키운 한빈이 턱에 힘을 주었다. 가슴 속에 뜨거운 무언가 끊임없이 솟구쳤다.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가. 목놓아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하오를 끌어안고, 기대에 찬 말들을 던졌다.
“혀엉, 형. 목소리 들려. 엄청 잘 들려. 계속 이름 불러줘.”
“성한빈, 한빈아. 내 목소리…….”
“응, 응.”
“…….”
하오의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지고 있었다. 어느새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한빈은 애써 대답했다.
“응. 다 들려. 다 듣고 있어…….”
“…….”
“잠시만…… 형한테 답장 읽어줄 거야. 잘 들어봐.”
하오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귓바퀴에 대고 읊조리기 시작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뜨거운 눈물이 한빈의 볼을 타고 흐르던 그때였다. 하오가 차갑게 식은 손가락을 구부렸다. 밀랍처럼 온몸이 굳고 있지만, 손가락을 굽힐 힘이 남아 있었다. 그는 뻣뻣한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올렸다.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건 펑펑 퍼붓는 싸락눈과 입김을 쏟으며 울고 있는 한빈이었다. ▣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 부분 해설 (스포주의)
첫 장면에 하오가 물길이 첨벙거린다고 느낀 것은 블루스크린이었습니다. 기계에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하오가 영혼의 방으로 착각한 것은 단순히 자신의 사고 체계였습니다. ‘마개’는 휴머노이드인 하오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부품을 의미합니다. 하오는 스스로 회귀 한 줄 알았지만, 사실 내장된 체내 시계의 고장으로 시간을 ‘가늠’하면서 착각을 해 왔습니다. 몸이 기억하는 바가 인지적 판단까지 지배하고 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