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빈웹진: cinéclub

22c 上

파견자

 

 

 

새사람이 되자.

이것이 성한빈의 새로운 신조. 다짐. 목표. 거리가 슬슬 복작복작했다. 1년의 끝에 선 사람들은 짜여진 것처럼 모 아니면 도였다. 아주 허허실실이거나 아주 까칠했다. 세상이 이분법으로 절단날 것 같았다. 심해민은 허허실실이었고 한빈은 아직 갈 길을 정하지 않았다. 기분 좋은 해민에게 끌려 무작정 들어간 주점 '호프는희망'은 모두가 허허실실이었다. 막 가야 할 길이 정해졌다.

사람들이 해류처럼 이리저리 뒤섞였다. 여긴 클럽도 아닌데 모두가 음악에 들떠 있었다. 짠짠짠. 얼굴을 식별하기도 전에 잔이 부딪혔다. 해민은 이미 이역만리쯤 떨어져 세상 떠나가라 웃고 있었다. 그 사이에 둥둥둥 울리는 음악을 뚫고 누군가 마이크를 잡았다.

, . 여러분! 우리는 다신 오지 않을 오늘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남은 미련 다 버리고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즐깁시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성한빈은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맞대고 동조했다. 내일을 모르는 해류들이 휘청휘청.

 

"버리자! 버리자! 버리자!"

 

이내 소복이 무형의 무언가가 잔뜩 쌓여갔다. 누군가의 불행. 결별. 미련. 취업 불황. 현실. 불안. 내일. . 버리자! 버리자! 버리자! 으쌰, 으쌰.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니까. 짠 몇 번 만에 생에 가장 가까운 절친이 된 이름 모를 청춘들이 빠르게 오갔다. 절친이 떠났다가도 생겼다. 세상은 곧 절단날 것처럼 고조되는데 성한빈은 하염없이 허허실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소통다운 소통이 되기는 하는 건지. 기분은 내내 좋기만 했다. 한빈은 그날 그 자리에 정신을 버렸다.

 

 

 

 

 

새사람이 되는 아침. 울렁거리는 속과 뇌를 강타하는 숙취의 고통이 기억을 잔뜩 헤집어 놓는다. 다들 이런 방식으로 새사람이 되는 걸까? 정신 상태만 따지자면 어제와 다름은 틀림없다. 성한빈은 변기를 부여잡았다. 정신이 이보다 더 쓰레기일 수 없다. 거울에 비치는 사람이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티셔츠도 한빈의 것이 아니다. 한빈은 찬물로 얼굴을 때리며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아니 잊으려고 노력했다. 티셔츠 사이로 보이는, 남의 입이 닿았던 몸이 낯설다.

 

성한빈의 인생은 개와 걸이었다. 도개걸윷모에서 개, . 제일 자주 나오는 것. 그런 특별하지도 모나지도 않은 평범한 것. 윷판에 올라 누가 던지는지 모를 윷가락 따라 세상 따라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인생을 사는 누구라도 그렇듯이 윷가락을 직접 쥐는 일, 그러니까 주행 도로를 6-70으로 달리던 차가 120을 밟거나 도로를 이탈해버리는 일이 성한빈에게도 몇 번 있었다. 이를테면 어릴 때 혼자 남겨진 집에서 아빠 면도기로 머리에 고속도로를 내버렸고. 뜬금없이 축구부에 입단했다가 하루만에 관뒀고. 야자 쨌다가 후환이 두려워 그대로 가출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왔다. 한빈에겐 윷판으로 돌아오는 길이 더 중요했다. 마주한 결과가 두 번 볼 것도 없이 빽도였고. 그로 인해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그 돌발이 성한빈은 싫었다. 한빈은 많은 것을 저지르고 동시에 그것들을 금지하면서 속도를 준수했다. 면도기 금지. 축구 금지. 이탈 금지.

딱 한 번. 개와 걸도 아니고 빽도와 도도 아니고 윷과 모 사이쯤이 뜬 적이 있었는데. 국어 교과서에 밑줄을 긋던 어느 날,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한빈은 그날로 그림을 배웠고 밑줄이 아닌 선을 그었다. 늦은 시작에도 손은 점점 빨라졌고 성한빈은 제원대 서양화과에 무사히 입학한다. 그 이후의 탈선은 정말이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돌아가야 하지?

축구부 첫날 흙바닥을 구르며 당장 관두겠다고 마음먹은 다음 날의 근육통만큼이나 욱신거렸다. 허리가 박살 난 것 같다. 걸을 때 엉덩이 근육이 필요하다는 걸 해부학 공부할 때보다도 더 잘 알 것 같다. 커피포트의 물이 부글부글 끓었다. 드문드문 기억 나는 음성이라곤 제대로 된 문장이 없고 장면이라고는 음성보다도 더 외설적이라 한빈은 의식적으로 포트가 내뱉는 김으로 시야를 흐렸다. 무언가 저질렀음이 분명한 고통이 몸을 기울일 때마다 성한빈을 괴롭혔다.

집 안의 시계를 몽땅 엎어놓고 남자와 몸을 맞대는 사이 거리의 사람들은 환호를 질렀다. 포트 소음에 남자가 정신이 드는 듯 이불이 부스럭거렸다. 한빈은 그 낯선 존재를 못 본 척 머그잔에 물을 부었다. 율무차 가루가 진하게 물들어 갔다. 율무차를 젓는 와중에도 온 신경은 이불 소리에 쏠려 있었다. 성한빈은 원나잇 후 함께 맞는 아침에 대한 면역도 대처 메뉴얼도 전혀 없었다. 티스푼을 젓는 손길이 점점 빨라졌다. 안녕하세요 하면 안녕하세요. 옷 좀 주세요 하면 저기 있어요. 아무 말 안 하면 나도 입 다물어야지. 조금만 더 저었으면 반죽이 되었을 율무차를 입에 댄 한빈이 뜨끈해지는 배를 문지르며 뒤를 돌았다.

남자가 일어났다.

성한빈이 허둥지둥 가장 자연스러운 자세를 찾아 몸을 트는 동안 침대에 걸터앉아 목을 돌리는 깨 벗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갈색 머리, 왼쪽 귀에 걸린 은색 링 귀걸이, 훤히 드러난 어깨 같은 것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의 눈이 두어 번쯤 껌뻑였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해피뉴이어."

 

12시간쯤 늦은 단조로운 축복의 인사. . 글로벌한 스타일이구나. 남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회색 후드를 찾아 옷을 입었다. 한빈이 입은 흰 티는 남자가 후드 밑에 받쳐 입던 것이었다. 남자는 직접 입힌 건지 한빈이 알아서 입은 건지 모를 자기 티가 한빈의 몸에 있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집은 한빈의 것인데 왠지 살던 사람은 저 남자 같다. 한빈은 정말이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실은 눈을 뜨고 목격한 게 다 충격이라 그만 말을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빈은 마땅히 자신을 구성할 것을 고를 수 없었다. 허허실실인지 까칠인지, 쿨인지 핫인지, 새사람이 되었는지 여전한지. 그리고 왠지 자신의 다음 스텝을 정하는 건 저 남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망할까 불안에 떨던 사람들은 어떤 아침을 맞이했을까? 그새 옷을 다 입은 남자가 침대 협탁에 엎어놓은 시계를 다시 세웠다. 초침이 전진한다. 남자는 다 식은 율무차를 들고 맹하게 서 있는 성한빈을 향해 말했다.

 

"밥 먹자."

 

세계대전도 밀레니엄 버그도 핵폭탄도 터지지 않은 토요일 오후였다. 오늘은 200011. 21세기의 첫 태양이 떴다.

남자와 세기를 건너와 버렸다.

 

 

 

 

 

 

 

 

22c

 



 

 

 

 

 

일일 나트륨 섭취 권고량은 2,000mg

 

달그락달그락. 뚝배기 안에 담긴 콩나물국밥은 몇 번을 휘저어도 뜨겁다. 세월에 색을 뺏겨 빛바랜 해장국 가게에는 다섯 테이블 정도가 차 있었다. 어딘가 멍한 사람들이 별말 없이 숟가락만 움직였다. 어제의 여파를 오늘 받는 사람들 같았다. 개중 가장 생기 있는 사람이 성한빈 앞에 앉은 장하오였다. 12시간 반쯤 늦은 자기소개가 국밥이 나오기 직전 오갔다. 말도 놓기로 했다. 성한빈은 곧 헤어질 사람들이 자기소개와 반말을 왜 하는지, 원래 다들 원나잇 후 해장까지 함께 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게 쿨-해 보였다.

 

"011-2001-0613. 집 비밀번호는 06133160. 통장 비번도 3160. 모든 인터넷 비밀번호는 hb3160!로 통일하는 편. 제원대학교 4학년 서양학과, 방학했으니 백수. 밤샐 때만 커피 마시고. 섹스할 땐 정상위보다,"

"미쳤어?"

 

척 봐도 경험이 더 많아 보이는 그를 군말 없이 따라왔지만 이제 일어나고 싶었다.

 

". 이거까지 털어놓기엔 너무 핫-한 것 같네."

"......"

"이제 대답할 거야? 술버릇이 원래 그렇냐고."

 

처음 들어보는 자신의 술버릇에 집 뒤졌냐 물었다가 국밥집에서 선호 체위까지 깔 뻔한 한빈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태어나 처음 남자랑 잔 것도 모자라 그 남자에게 모든 신상을 털었다는 거야?

20세긴지 21세긴지 술에 꼴은 자신이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당최 기억나지 않았다. 술버릇이 그러냐고? 그럴 리가. 갖은 술자리 후에도 그런 적은 없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으므로. 성한빈은 이제 자신이 어디까지 신상을 불었는지 겁이 났다. 한빈은 조금 무력해진 채로 고개를 저었다.

장하오는 싱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한빈이 알고 있는 장하오는 한국말 잘하는 중국인이라는 정보가 전부였다. 가지고 있는 정보의 양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억울해진 한빈이 그를 뜯어본다. 첫인상부터 거슬린, 링 귀걸이가 여전히 달랑였다. 귓불을 틈 없이 감싸는 링 귀걸이는 꼭 새끼손가락에 끼는 반지같이 작았다. 그래. 링 귀걸이를 꼈고. ... 또 뭘 알지? 힐끔거리는 동안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국밥으로 시선을 박았다. 되는대로 쇠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그러자 순간 이질적이고 얄팍한 촉감이 느껴진다. 혀는 쇠 맛. 입술은 말캉. 경험한, 경험해 버린 촉감. . 나 저 귀걸이 입에 넣은 것 같아. 한빈은 다급하게 깍두기를 집어 먹었다. 깍두기가 환촉과 함께 으적으적 부서진다.

 

". 너 이 귀걸이 좋아하더라."

"안 물었어."

"."

 

국밥집 기둥 선반에 얹어진 텔레비전에선 앵커의 단조로운 음성이 퍼졌다. 드디어 뉴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장하오가 중얼거렸다. 와버렸네, 2000. 그가 상체를 의자에 기댄다.

 

"왜 안 물어봐?"

"?"

"뭘 원하냐고."

"내가 왜?"

"내가 정보를 쥐고 있으면 뭘 원하냐, 정도는 물어 줘야지. 센스가 없네."

"지금 영화 찍어?"

"어떻게 알았어?"

"?"

 

장하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푸스스 웃었다. 사람 놀리는 농담 같은 연기.

 

"나 영화감독이야."

 

, 아직은 아니고. . 국밥 먹고 열이 오르는지 장하오는 후드를 죽 끌어내리며 옆 의자에 팔을 얹었다. 빗장뼈 조금 밑에 붉은 흔적이 드러났다. 영화감독으로는 보이지 않는, 따지자면 양아치에 더 가까워 보이는 외양.

 

"안 물어보니까 그냥 말할게. 나 영화도 찍고 원하는 것도 있어."

"......"

"성한빈이 내 첫 번째 영화 주인공 해주라."

"안 해."

 

생각이 뇌를 돌기도 전에 입이 부정했다. 그런 속도였다. 그 경이로운 속도에 이번엔 진짜 놀랐는지 장하오 얼굴이 삐뚤어졌다. 한빈은 상대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기 전에 재차 거절을 시도한다.

 

"영화엔 연고도 없어."

"연고라니, 어디 아픈 거야?"

"?"

"다 나으면 그땐 주인공 할래?"

 

한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영화에 인연 없다고. 난 일반인이야. 앞으로도 쭉. 별다른 반응이 없는 장하오는 마지막 한 입을 밀어 넣는 한빈을 따라 가만히 식사했다. 그러다가 불시에 큭큭큭.

 

"그럼, 너 정보 팔아서 떡 사 먹어야지."

 

싱겁다.

 

"뭐 하는 거야?"

"협박?"

 

하하하하하!! 소금도 치지 않은 말이 뭐 그렇게 웃긴 지 장하오가 입을 벌리고 웃었다. 그리고 그보다 한참 느리게 올라가는 손바닥이 입을 가렸다. 아 내용물 다 봤어.

 

"술에 취한 한빈은 종말이 올 거라고 생각했을까?"

"무슨 말인데."

"새해부터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잘못된 거야."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고."

"네가 그랬잖아. 내가 필요해?"

 

그 순간 더블링 치듯 무의식이 밀려온다.

 

"그럼 나랑 자."

그럼 나랑 자.

"."

"뭐든 해줄 테니까."

뭐든 해줄 테니까.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맹물에 소금을 통째로 부어버리면. 꽉 다물렸던 것도 입을 여는 게 당연하잖아. 웃음의 여운이 그치지 않은 장하오는 계속 키득거렸다. 그는 핵폭탄이었다. 그 주둥이에 핵폭탄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우린 잤고. 성한빈은 나한테 다 불었고.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고. 장하오라는 사람은 기어이 새해 첫날부터 소리를 지르게 만든다.

세상은 멸망했어야 했다.

 

 

 

 

 

 

 

 

[죽을래?]

 

그 한마디에 뒤도 안 돌아보고 카페로 뛰어갔다. 카페 'seems like'는 강남에 어느 입구 좁은 건물 2층에 있었다. 나무 데크 계단을 밟고 들어오면 꽤 넓은 내부. 거긴 심해민 누나 심여민의 카페였다. 여민은 비범했고 동시에 안목 있는 사람이었다. 심해민이 친구, 동기, 동기의 친구까지 줄줄이 달고 카페로 갈 때 성한빈도 거기 있었다. 그중 절반이 커피도 못 얻어 마시고 돌아갔다. 남은 인원 중 절반이 커피만 마시고 돌아갔다. 그렇게 남은 소수에게 비로소 아르바이트 제안을 했다. 단연 성한빈이 1순위였다. 심여민의 카페는 한국 외환 위기에도 당당히 자리를 지켜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한빈은 지금도 월수금 알바생. 새해에 시간 되는 알바생이 없다길래 호기롭게 오후에 나오겠다고 해놓고서 정신적 충격이 심해 잊은 것이다. 성한빈은 허둥지둥 앞치마를 둘러매고 여민 앞에 섰다. 해장도 덜 된 정신 상태에 짐짓 한심한 눈빛으로 전신을 훑던 여민은 손짓 몇 번으로 한빈을 제조 대에 위치 시켰다.

어디 가냐고 붙잡을 줄 알았던 장하오는 국밥집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물론 뛰쳐나온 한빈에 폭탄 발언 이후 제대로 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곧 영화감독이 될 장하오. 그는 첫 영화를 앞두고 있댔다. 직접 쓴 시나리오가 통과됐고 한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라 바빠지기 전에 혼자 여행 온 거라고. 로케 겸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도. 영화가 어느 정도의 단계까지 진행됐는지 한빈은 모른다. 주인공 하자는 걸 보면 시나리오만 통과한, 아주 시작 단계인 것 같긴 한데. 영화감독이라. 왜 그랬지?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내가 필요하면 나랑 자, 라니 남자랑 자본 적도 없으면서. 집 비번은 또 왜 불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생전 그런 적도 없는데. 여민이 한빈의 팔뚝을 툭 쳤다.

 

"그라인더 새로 사주려고 애쓰는 거니?"

"."

"안 되겠다. 그냥 카운터 봐."

 

털레털레 카운터로 자리를 옮겼다. 다섯 명쯤 손님을 받았다. 그리고 잠깐 여유가 생겨 어디서 맞은 것 같이 뻐근한 몸을 풀어보다가 입구 반원 창문에 머리가 보여 똑바로 섰다. 종이 짤랑거리며 새 손님을 알렸다. . 장하오다. 순간 카페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 같다. 영화배우는 자기가 해도 되겠구만.

 

"일해도 돼? 몸 안 좋아 보이던데."

"안 따라오더니?"

"뭐 하러? 어차피 어디서 하는지 아는데."

"집 간 거 아니었냐고."

"나도 할 일 있어서."

 

그새 깔롱 부리고 온 장하오는 블랙커피 한 잔을 시키고 카페 정중앙 테이블에 앉았다. 카운터에서 제일 잘 보이는 자리였지만 손님이 밀려들어 자주 그를 가렸다. 장하오는 1시간 반쯤 지나 새로 음료를 주문했다. 이번엔 딸기스무디였다. 한빈은 쟁반에 잔을 담고 그에게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장하오는 가지고 있던 공책을 옆으로 밀어놓고 성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책 위로 길에서 받은 듯한 교회 각인이 새겨진 볼펜이 데굴 굴렀다.

 

"딸기스무디 나왔습니다."

"한빈이 만든 거야?"

"사장님이."

 

볼펜이 멈춘 곳에 시선이 닿았다. 한빈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성한빈'이었다. 한국어 어떻게 배웠냐고 묻자 88올림픽 때 한국이 좋아져서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더니, 글씨가 초등학생만도 못하다.

 

"글씨를 왜 이렇게 못 써?"

"이거? 한글 쓸 일 없어서. 나 중국어는 잘 써."

 

이거 봐, 한빈. 고개가 쉽게 돌아가지 않자, 장하오가 볼펜 꽁무니로 공책을 탁탁 두드렸다. 이거 보라니까? 힐끗 본 글씨는 '성한빈'과는 확연히 비교됐다. 한빈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또 한참 앉아 있던 남자의 세 번째 주문은 다시 커피였다.

 

"이제 가지?"

"성한빈도 내 말 안 듣는데 내가 왜?"

"그거랑은 다르지."

"한빈 도망가서 나도 번호 팔고 왔어."

 

상대도 안 하고 다시 카운터로 돌아왔다. 손님이 잦아들었다. 나른해지는 시간이었다. 물리적 충격을 받은 몸에 긴장이 풀리니 조금만 더 있으면 졸 것 같았다. 이렇게 멍때리고 있으니 어제와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200011일이 아니라 19991232일쯤으로 느껴졌다. 이 자리에 서 있으면 매번 비슷한 풍경이다. 그 사람이 그 사람. 정중앙에 앉은 저 중국인만 빼고. 오로지 장하오만 낯설어서 꼭 혼자 2000년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혼자서만 제 시간을 찾은 사람처럼. 그는 꾸준히 뭔가를 썼다. 속도가 빠르고 망설임이 없어서 한빈은 그가 중국어를 쓰고 있겠거니 짐작했다. 부지런히 움직이던 펜이 멈췄다. 시선을 살짝 들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퇴 근 언 제?

 

당황해서 시선부터 피했다. 퇴근? 내 퇴근 기다리려고 안 가는 건가? 그때 한빈의 애니콜이 짧게 울었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빼내 열었다. 산 지 얼마 안 된 기스 하나 없는 애니콜 미니 폴더가 한빈의 손에 쏙 들어왔다.

 

[.가벼워진.전화기.이리로.오세요.서울시...]

 

스팸... 문자? 진짜 번호를 팔았구나. 폰팔이한테 번호 넘기고 그 돈으로 여기 앉아 있는 거야. 잠이 확 깬 한빈이 그를 맹렬히 노려봤다. 눈을 마주치고 씩 웃어 보이는 그가 전화기를 들었다. 모토로라 스타텍이 들썩였다. 곧 애니콜이 다시 울었다.

 

[농담 이거 내 번호]

[저장 안하면 진짜 번호 팔아 중국 인구 많아]

 

한빈은 보란 듯이 그대로 폴더를 탁 닫아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장하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시선을 맞받아치는데, 심여민이 한빈의 팔을 툭 쳤다.

 

"저 사람은 누구니?"

"내쫓을까요?"

"?"

"자릿세 받아야 할 정도로 오래 있어요.“

 

여민이 고개를 빼 장하오를 훑었다.

 

"놔둬. 여기서 일할 생각은 없대?"

"... 누나."

"삐지긴. 내가 여기서 너밖에 없다고 하면 그것도 우습다?"

 

그리고 죙일 뭐 쓰고 있네. 고개 드는 꼴을 못 봤다. 여민은 그렇게 말했지만, 한빈과는 자주 눈이 마주쳤다. 이제 퇴근하라며 여민은 한빈의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장하오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데리고 갈 거니?"

"아니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성한빈이 앞치마를 벗자, 장하오가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이기는, 벌써 엉덩이가 들썩이는데.

 

 

 

 

"뭘 그렇게 써?"

"주인공 얼굴 정해지니까 시나리오 손 보고 싶어서."

"안 한다고."

"근데 어디가?"

"."

 

까만 모직 코트를 걸친 장하오가 옆으로 바싹 붙었다. 그에게서 물에 빠진 레몬 향이 묻어났다. 그새 향수까지 뿌렸어. 한빈이 한 발짝 거리를 벌렸다. 당황스러울 정도의 거리감이 한국 사회를 겪지 않은 외국인의 천진난만함인지, 꿈을 이루기 위한 절박함인지 한빈은 궁금했다. 왜 따라와? 한빈 집 가서 설명해 주려고. 장하오가 줄곧 끄적이던 공책을 흔들었다. 한빈이 우뚝 섰다. 입을 벌리자 싱거운 입김이 삐져나왔다. 역시 절박함인가.

 

"안 한다니까?"

"진짜?"

"그래. 안 해."

"뭐든 해준다고 했으면서. 이건 뭐든이 아니잖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럼 한빈을 어디에 써먹지?"

"써먹지 마."

 

아아-. 표지가 노란 공책으로 손을 탁탁 치던 장하오가 다시 말했다.

 

". 나 한빈 써먹을 데 있다."

"그러니까 써먹지 말라고."

"나랑 로맨스 영화 같이 봐. 한 열 편 정도."

 

나 사실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거든. 아직 온몸으로 한 계약이 유효하잖아. 순간 입에 귀걸이의 촉감이 스쳤다. 종일 불시에 초인종을 눌러대는 환촉이었다. 무슨 계약. 고작 내가 필요하면 나랑 자라고 한 그 말이 계약이야? 성한빈의 귀가 달아올랐다.

 

"무슨 대단한 계약이라도 한 줄 알겠네."

"그게 싫으면 내 배우 하면 돼."

 

생기가 도는 얼굴은 전혀 추워 보이지 않았다.

 

"어때. 좋은 사랑 영화 알아? 아니면 진짜 사랑도 괜찮고."

 

사랑 영화든 사랑이든, 어제 남자랑 동정 뗀 사람한테 뭘 바라는 거야? 그의 요구가 못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장하오는 악마 같았다. 정기도 빼먹고 정신도 빼놓는다는 점에서. 내 동정 홀라당 가져가 놓고. 그러니까 이건 놀리는 것에 가깝다. 아니 분명 놀리는 거야. 사랑을 정복한 얼굴을 하고 뻔뻔하게 굴기는. 소시오패스가 아닌 이상 사랑의 결여랑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이다.

그래서 열이 받는다. 윷가락을 세 번 연속 던지는 일 따위 정말이지 없었는데. 또다시 윷을 잡는다. 연속 세 번이나? 그렇지만 모두 빽도였는데. 빽도에게 한 번 더의 기회가 있을 리 없잖아. . 모르겠다. 열 받아. 성한빈은 신경질적으로 윷가락을 잡아챈다. 몸으로 한 계약 따위 지키면 되잖아. 영화 따위 봐주면 될 거 아니야.

 

". 잘 알아."

 

공중에서 힘차게 윷이 돌아간다.

영화를 피하려고 선택하는 게 영화라니. 정말 우습잖아.

 

 

 

 

 

 

 

 

출입 금지

 

심여민이 장하오의 이름을 외웠다. 2000년의 1월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장하오는 카페의 단골이 되었다. 하루에 몇 편을 연달아 보면서 해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기각되었다. 장하오는 깊이 있는 분석을 해야 한다며 하루에 하나로 영화를 제한했다. 로맨스 영화 시나리오를 망설임 없이 쓸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는 게 목표이니 협조하라고. 미친 소리하지 말랬더니 협조 안 할 거면 영화 찍자고 난리였다.

카페 밑엔 비디오 가게가 있었다. 오늘 첫 방문을 했다. 장하오가 영화 보자며 카페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한빈은 그 순간 왠지 그가 찾아올 때만 영화를 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계약의 기간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은 장하오라고. 비디오 가게에 들어가자, 인생이 지루해 보이는 주인이 계산대에서 눈짓으로 인사했다. 고개를 꾸벅 숙인 한빈이 가게를 둘러봤다. 사방이 영화 천지다.

 

"난 이거."

 

성한빈은 장하오가 들고 온 비디오를 들었다. 8년 전 대한민국을 휩쓴 구대헌의 액션 영화 <돌아오는 길>이었다. 성한빈 손엔 이미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가 들려 있었다. 한빈은 <돌아오는 길>을 제자리에 꽂았다.

 

"뭐야! 이거 보고 싶다니까?"

"사랑이 필요하다며. 무슨 액션이야."

"액션에 들어간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됐어. 이거 봐."

 

- 한빈 재미없는 사람이네. 한빈은 꿋꿋이 계산대에 <8월의 크리스마스>를 내밀었다. 꾸벅 졸던 주인이 헛기침하며 비디오를 받았다. 며칠? 4시간이요. 주인이 계산대를 탁탁 두드렸다. '하루 단위 대여' . 하루요.

결국 또 집에 장하오를 들이게 됐다. 장하오는 호텔에 살고 카페랑 가까운 성한빈 집엔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어서. 장하오는 여길 또 오네, 하며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는 걸쳤던 코트를 훌렁 벗고 목이 마르다며 금방 몸을 일으켰다. 성한빈은 장하오를 도로 앉히고 직접 물을 떴다. 실은. 요 며칠 끈질기게 따라오는 '그 행위'의 잔상 때문에 한빈은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기억 끊길 때까지 취했으면 그냥 잊을 것이지. 드문드문 기억나는 건 또 뭐람. 귀걸이의 환촉이 느껴진 다음부터 쭉 예고도 없이 그랬다. 옆구리에 환촉이, 그가 물 떠오겠다며 나체로 걷던 여기 주방이. 조각조각 한빈을 찔렀다. 이래서 집에 장하오를 들이는 일만은 막으려고 했는데. 카페-비디오 가게-비디오 플레이어가 있는 성한빈 집. 이 일련의 흐름이 한빈을 더욱 고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성한빈 집에 나란히 어깨 붙이고 앉아 8월의 크리스마스를 시청했다. 한석규가 나오자마자 한빈은 하품을 했다.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눈을 부릅떴다. 영화는 고조되고 심은하는 돌아오지 않는 한석규를 기다리다가 그의 사진관을 향해 냅다 돌을 던진다. 유리가 와장창 깨진다. 그런데 고요했다.

? 나 영화를 보고 있지 않았나. 뭔가 어둡고 조용하다. 이질감을 느낀 한빈이 눈꺼풀을 열었다. 어느새 화면이 겨울로 바뀌어 있다. 보이는 나무가 죄다 누워 있다. 어라. 그러고 보니 텔레비전도 돌아가 있다. 내가 누운 거구나. 한빈은 머리를 댄 무언가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한층 더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일어났어?"

"왜 안 깨웠어."

"잘 때 누가 깨우는 거 싫다며."

"내가 언제."

 

몽롱한 한빈이 웅얼거렸다.

 

"나랑 섹스할 때."

 

가물가물하던 눈이 번쩍 떠졌다. 아침에 나 깨우지 마, 누가 깨우는 거 싫어. 그럼 안 재워야겠다. 그러다 허벅지 안쪽을 쥐어 오는 뜨거운 손. 순간 그 환촉이 느껴졌다. 깜짝 놀란 한빈이 벌떡 몸을 일으켜 파드득 떨어졌다. 벌렁대는 심장으로 소파 끝에 붙어 앉은 한빈이 헛기침을 했다. 자신이 베고 있던 장하오의 허벅지를 힐끗 본 한빈이 금방 고개를 돌렸다. 집에서 영화 보는 건 취소다. 어느새 <8월의 크리스마스>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다.

 

"... 그래서 뭐, 사랑 공부는 했어?"

 

장하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잠수타면 나도 유리창 깨야겠다."

 

심은하가 되겠다는 건가, 지금.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한빈이 거실 불을 켜며 사랑이 느껴지지 않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단다. 비디오 가게에 풀어놓으면 액션 영화 집어 오는 사람 데려다가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라고 하니 당연한 건가 싶기도 했다.

 

"이건 한빈이 잠들었으니까 같이 안 본 거야."

"? 그런 게 어디 있어."

"조건이 안 맞잖아. 같이 봐야지."

 

3분의 2를 꾸역꾸역 봤는데. 하오는 그러니 계약할 때 잘 읽어보고 하는 거라고 한빈을 달랬다. 성한빈은 장하오에게 진지하게 소시오패스냐고 물었다. 괘씸해서 그랬다.

 

 

 

 

금지금지금지

 

휩쓸려 가고 있다. 정확히 그랬다. 성한빈의 일상이 바뀌었다. 뭘 하다가 오는지 모를 장하오가 불쑥 나타나거나 문자를 하면 알바가 끝나고 내려가 비디오 가게 가서 영화를 고른다. 그리고 집보다 먼 과방에 가서 영화를 본다. 장하오와 저녁을 먹는다. 모든 것은 그가 찾아와야 시작되었다.

왠지 장하오가 인생에 들어오고 나서 금지가 날로 많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성한빈의 금지는 저질러야 비로소 금지되므로. 성한빈을 자꾸 저지르게 만든다는 점에서 장하오는 위험한 존재였다.

 

 

 

 

샛길 금지

 

장하오가 왔는데 비디오 가게가 문을 닫았으면 카페 위 당구장에 갔다. 참고로 당구장 위는 독서실이다. 여러모로 위험한 건물이었다. 실력이 안 돼서 맛세이는 엄두도 못 내는 성한빈이 장하오를 개발랐다. 담배 꼬나문 아저씨들이 쉴 때조차 눈길을 안 줬다. 둘의 당구대를 감자탕집 놀이터 정도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의기양양한 성한빈이 내기 걸고 다시 하자고 했지만, 장하오가 다신 안 오겠다고 발악했다. 그다음 당구는 영영 없었다.

 

 

 

 

자만 금지

 

이쯤 되면 돈을 벌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또 문을 안 열었다. 이번엔 5분 거리 볼링장에 갔다.

...

다음 볼링은 영영 없다.

 

 

 

 

액션 금지

 

로맨스 영화를 8개쯤 격파했다. 국적도 가리지 않고 무수한 사랑이 오갔다. 비디오 가게 주인은 영화과 학생들이냐 물었고 성한빈은 어색하게 웃었다.

장하오는 영화를 보는 동안 사랑에 대해 자주 질문했다. 좋아하는데 헤어진다거나. 좋아하는데 만나지 않는다거나. 인물의 독특한 행동이 사랑으로 귀결될 때. 한국어가 궁금한 건지 사랑이 궁금한 건지 모호한 질문도 종종. 가끔은 너라면 어땠을 것 같냐고도 물었다. 장하오는 질문에 성실했다. 한빈은 그가 영화 10편을 차선책으로 내민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한빈은 자신이 맞는 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사랑은 참 두루뭉술했다. 애초에 로맨스 영화로 사랑을 배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언어를 배웠다면 금방 표가 나고 운동을 배웠다면 금방 태가 날 텐데. 사랑은 성장이라는 게 잘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비디오 가게를 빙빙 돌아가며 사랑에 질식할 것 같은 영화를 고르고 있는데, 장하오가 성한빈을 붙잡았다.

 

"오늘은 이거 봐."

"이건 액션이잖아."

"이것도 로맨스래. 나 찾아봤어."

 

성한빈은 그를 끔뻑끔뻑 쳐다보다 말없이 <돌아오는 길>을 계산대에 내밀었다. 하루 대여를 마치고 비디오를 가방에 넣는데 장하오가 어, 했다. 고개를 돌리니 비가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겨울비 싫은데.

 

"위에 내 우산 있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갈게."

"?"

"너 비 오는 거 찝찝해서 싫다며."

"그걸 어떻게,"

 

. 깨달음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지자, 장하오가 비디오 가게를 나갔다. 비가 거세지고 있는데도 처마 내릴 생각도 안 하는 주인은 이제 꾸벅 졸고 있었고 가게는 고요했다. 이만큼 같이 지냈으면 서로를 향해 가진 정보의 양이 비슷해질 법도 한데. 이렇게 보면 또 한참 떨어진 것 같다. 서로를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또 전부를 아는 것 같고. 그것도 한쪽만 다른 한쪽에 대해. 이쯤 되면 기억상실에 걸렸었다고 해도 믿겠다. 그러나 성한빈은 너무 튼튼한 청년이라서 뜬금없는 술버릇이 여전히 혼란스러울 뿐이다.

한빈은 전화기를 꺼내 조용히 쭈그려 앉았다. 메시지에 들어가 그동안 그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오늘 가능?]

[좋은 영화를 찯았어]

[끝날 때 갈께]

[집으로 바로 가도 돼?]

[영화 찍지 안을래?]

[한빈 나 오늘 가]

 

상대방을 알아가기 위한 노력을, 좀 할 걸 그랬나. 한빈은 손을 움직여 작은 자판을 꾹꾹 눌렀다. [장하오] 숫자로만 존재하던 것에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한빈은 그의 번호로 오는 알림을 가장 쨍한 소리로 바꿨다. 그 소리에 비디오 가게 주인이 깜짝 놀랐다가 짜증이 묻은 채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냥 심심해서 그랬다. 그냥. 그냥……. 애니콜을 닫자마자 시야가 온통 그늘졌다. 우산을 활짝 편 장하오였다.

겨울에 내리는 비는 맨살에 닿으면 따가울 정도로 차갑고 억셌다. 한빈의 우산은 일인용이라 어깨가 겹칠 정도로 붙어도 간신히 머리만 지키는 수준이었다. 팔이 척척해졌다. 한빈은 정확히 이래서 비가 싫었다. 몸이 젖어가고 있는데, 과방까지 걷기도 싫었다. 한빈은 입술을 물어뜯다가 하오의 팔을 당겼다. 오늘은 집으로 가자.

한빈이 우산을 접을 동안 하오는 먼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갔다. 한빈은 곧장 가방부터 내려놓고 욕실로 향했다. 수건 두 장을 챙기다가 몸에 들러붙는 겉옷을 벗었다. 그러다 곧 욕실에 들어갈 거라는 생각에 윗옷을 훌러덩 벗었다. 찬 기운에 몸을 살짝 떨었다.

 

"-"

"!!"

 

성한빈이 펄떡대는 심장에 가슴을 가리며 휙 돌았다. 평소대로 했다가 무의식에 방 안의 존재를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바지라도 벗었으면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옷으로 엉거주춤 상체를 가린 한빈에게 흥미로운 눈길이 닿았다. 성한빈은 장하오에게 수건을 던지며 욕실 문을 쾅 닫았다.

장하오에게 씻겠냐 물었더니 수건으로 닦아서 괜찮다고 했다. 장하오가 그새 영화 볼 준비를 다 해놓고 기다리고 있어서 한빈은 머리를 탈탈 털고 소파에 앉았다.

 

"드라이기 안 해?"

"금방 말라."

 

성한빈이 리모컨을 눌렀다. 곧 비디오가 재생된다. 습해진 집안은 눅눅한 비 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니 근처에 축축한 것뿐이었다. 현관은 잔뜩 젖었고. 머리도 덜 말랐고. 장하오와 성한빈의 수건도 물기를 머금었고. 욕실도 물바다. 이대로라면 집에 이끼가 끼고 말 거야. 한빈은 이따가 현관부터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봤다. 구대헌이 초반부터 열심히 구르고 있다.

 

"그날, 어디까지 말했고 어디까지 기억해?"

 

예고 없이 물었다. 고정되었던 하오의 시선이 한빈에게로 옮겨진다.

 

"전부."

"..."

"까진 아니어도 꽤 너를 알지."

 

성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배우 말이야. 이 영화 찍고 불륜설난 거 알아?"

"본 영화야?"

"아니. 몇 년 전에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서."

 

이번엔 장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첩보 요원도 사랑을 하고. 액션 영화에도 사랑이 들어간다. 구대헌이 상대 배우를 구하기 위해 무모한 짓을 시도한다. 그래도 죽지 않는다. 주인공이니까. 저 배우 이름이 뭐더라. 머리를 굴려봐도 배역 이름만 생각날 뿐 깊숙한 곳에서 진짜 이름이 뱅뱅 돈다.

 

"이 영화에 키스 신이 있는데, 그게 그렇게 진짜처럼 보인대."

"오늘 집중을 못 하네."

"좀 지루해서."

"이것보다 덜 지루한 일 있는데. 그거 할래?"

"뭔데."

"영화를 찍는 거야."

"......"

"지루한 영화를 보는 거보다 영화를 지루하게 찍는 게 낫잖아."

 

됐어. 한빈은 다리를 끌어모았다. 한동안 로맨스 영화만 잔뜩 봤더니 액션 영화는 보고 있으면 귀가 아픈 것 같기도 하다. 오늘따라 집중이 어려운 한빈은 하오를 힐끗거렸다. 그가 전부 알지 못한다는 건 한빈도 알고 있다. 그럼 '' 안다는 건 얼마나 안다는 것일까. '전부'보다 훨씬 모호하고 어려운 말이다. 어디까지 말했을까. 왜 말했을까. 장하오가 물어봤을까? 영화를 찍기 위해? 진짜 영화만을 위해 나랑 잔 걸까? 터지던 소음 위로 비지엠이 깔린다. 멍때리던 눈에 초점이 맞는다. 두 입이 맞닿는다.

 

", 저거야. 진짜처럼 보이는 키스."

"총알이 쏟아져도 키스하는 게 사랑이야?"

"아마."

"죽으면 어떡해?"

"죽어도 좋다는 뜻이겠지. , 그만큼 사랑한다."

"성의 없어."

 

텔레비전만 보는 한빈에 하오의 고개가 다시 정면을 향한다. 진짜 연인의 키스라더니. 한빈의 눈엔 진짜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냥 연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역시 재밌기만 하면 거짓이든 진실이든 달려들고 본다니까. 진한 키스를 나눴던 두 사람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난다. 성한빈은 그 얼굴을 골똘히 보며 리모컨을 눌렀다. 비디오가 뒤로 감긴다. 창문 너머 빗소리가 타닥타닥 이어졌다. 한빈은 볼륨을 꾹꾹꾹 눌러 소리를 키웠다. 장하오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한빈, 소리가 너무 커."

 

이건 성한빈의 돌발. 성한빈은 그대로 장하오에게 입을 맞췄다. 잠시 머뭇거리던 입술이 이내 벌어진다. 이 자연스러운 개방은 본능의 영역일까. 축축한 거실에도 총알이 빗발쳤다. 그 와중에 혀가 얽혀들었다. 집안을 습하게 하는 원인 중 가장 축축했다. 이것도 영화를 위한 노력? 장하오가 입천장을 압박하자 한빈의 허리가 움찔거렸다. 구대헌이 현장을 벗어나자마자 한빈이 하오를 밀어내고 입술을 닦았다. 장하오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해됐어?"

"잘 모르겠는데."

"소시오패스 맞네."

 

장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앞으로는 다 이런 식이야? 그럼 나 마음의 준비 하고. 끝이야. 더는 없어. 침만 꼴딱꼴딱 삼키면서 진정하려 애썼다. 귀가 열에 익은 것 같이 먹먹했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하도 모르겠다길래 이해해 보라고. 구대헌의 심정을……. 성한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직 비가 세찬데 창문을 모조리 열고 싶었다. 공기가 필요했다. 이 방은 ..의 농도가 짙어서 질식할 것 같았다.

카메라에 담기지 않기 위해 한빈은 영화 10편을 택했다. 그러므로 한빈에게도 사랑을 탐구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성한빈도 사랑이 뭔지 모르니까. 그런데 다 관두고 싶어졌다. 이 모호함이 사람 피를 말린다. 영화를 보고 사랑을 탐구할수록 다시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진 것 같았다. 사랑은 명확한 형과 태가 보이지 않았다. 한빈이 그의 질문에 답을 하면서 확신을 갖지 못한 것처럼 그가 그럴듯한 로맨스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장하오가 주인공 따라 눈을 굴리다 문득 촉촉한 입을 연다.

 

"한빈은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아."

 

아무 말도 안 했다.

 

"한잔할까?"

 

자신은 준비되었다는 듯 장난스럽게 씨익 웃는 미소. 위험하다. 이번엔 무엇을 금지해야 할까. 성한빈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남길 것만 같은 사람. 그래서 얼른 쫓아내고 싶은 사람. 그런데 왠지 그러지 못할 것 같아서 성한빈은 또다시 겁이 난다.

 

"술 끊었어."

 

사랑이 뭐야. 도대체 뭐야.

 

 

 

 

 

 

 

 

탐색은 위협 혹은 ..

 

성한빈이 책을 와르르 내려놨다. 이게 뭐야. 뻐근한 팔을 털고 있으면 심상치 않은 책을 훑은 장하오가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나보다 더 도움 될 거야."

"우리 마지막 영화는 극장 가서 볼까?"

"내 말 들은 거야?"

"들었어. 선물 고마워."

 

선물 아니야. 도서관 책이니까 다 읽으면 나 줘. 도서관에서 손수 뽑아온 사랑에 관한 철학과 심리학, 과학책이 장하오 앞에 가득 쌓여있다. 향연의 철학자들, 에리히 프롬, 처음 들어보는 뇌과학자들이 빼곡히 이름을 채우고 있다. 마지막을 앞두고 한빈이 방향을 튼 이유는 같이 영화 보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껄끄럽다는 것은, 그러니까 성한빈 내면의 문제였다. 둘이라는 양방향성. 로맨스. 영화. 이 잘 맞춰진 삼박자에 난데없이 얻어맞은 한빈에겐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택한 것은 르네상스였다. 고전으로 돌아가자. 기초를 탄탄히 다지자. 한빈은 설명을 요구하는 장하오에게 냅다 책을 맡기고 카운터로 돌아왔다.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태풍이 불어도 다신 집에 들이지 않을 것이다. 저 멀리서 책을 편 장하오가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빈은 시원하게 웃지 못 해 볼을 부풀렸다.

 

 

 

 

오늘은 미대 라운지에서 만났다. 마구잡이 건네줬던 책은 거의 다 반납했고 남은 것은 플라톤의 향연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었다. 장하오가 향연을 남겨 놓은 게 의외였는데, 책에 한자가 많아서 읽기 쉽다고 했다. 중국인이었지 참. 아직 영화는 9편에 머물러 있었다. 장하오와 책이 잘 맞는 모양이었다. 남은 하나를 본다면 계약 종결.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교내 미화원 두 분이 라운지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장하오가 쇼탱 재방송에 정신이 팔려있길래 결국 자리를 옮겼다.

영화를 보던 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빈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들었다. 4학년이 된 서양화과 성한빈은 슬슬 졸업 작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옆에서 외국인이 한국어로 된 철학책 붙잡고 끙끙거리는 동안 성한빈은 연필을 바짝 깎고 흰 스케치북을 바라봤다. 손이나 풀지 싶어, 비디오 플레이어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창 집중하다 힐끗 쳐다보니 책이 펼쳐지지도 않고 그대로였다. 아예 고개를 돌리자 곧장 눈이 마주쳤다.

 

"뭐해?"

"관찰."

 

그가 줄곧 들고 다니는 공책이 펼쳐져 있었다. 공부해. 그제야 꾸물꾸물 두꺼운 책을 펼쳤다. 한빈도 다시 연필을 움직였다. 장하오는 이따금 단어를 물어봤고 성한빈은 답했다. 한빈은 그가 의외로 성실한 감독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며 물어오는 그의 질문은 섬세했고 또한 그 질문으로 그가 담아내는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시나리오가 완성됐음에도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성한빈은 감시 명목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그런데 어느새 비디오 플레이어를 그리던 손이 인체 구도를 잡는 건. 본능일까. 마침 커튼을 치지 않은 과방으로 햇빛이 예쁘게 비쳐 들었다. 인물과 구도와 배경이 조화로웠다. 그냥 그렇다고. 사각사각사각. 이 구도가 해체되기 전에, 붓 대신 연필을 쥔 인상주의자처럼 스케치에 점점 속도를 냈다. 순간을 잡아야만 하는 인상주의자들의 사명을 답습한 한빈이 가만히 사랑을 헤아리는 얼굴을 마음껏 탐색했다. 성한빈은 생각했다. 조금의 시간만 더 주어지면 좋겠다. 해도 지지 않고 장하오도 움직이지 않아서 조금만 더, 이렇게.

 

"모르겠어."

 

한빈이 그의 빽빽한 눈썹을 채우는데 그가 난데없이 상체를 젖혀 소파에 푹 빠져들었다. 그의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미간 사이가 주름진 한빈이 연필을 멈추지 않은 채 되물었다. 뭘 몰라.

 

"이런 거 말고 실습이 필요해."

"무슨 실습."

 

한빈의 눈이 그의 눈썹 언저리를 훑는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직했다.

 

"오늘은 chu- 안 해?"

 

! 연필심이 뚝 부러졌다. 어긋났던 동공이 정확히 맞닿는다. 그림 정중앙을 횡단하는 선이 생겼다. 한빈은 이를 꽉 물었다. 그때, 애니콜이 웅웅 울었다.

 

[옷 지금 가지고 있어?]

 

성한빈은 일상이 항상 변함없길 바라는 이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상이 理想인 이유는 그것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성한빈의 삶에 장하오가 끼어들었듯이. 영화도 순간도.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안 해."

 

그런 성한빈이 바라본 장하오는 세상을 어떤 예상도 없이 살아가는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렇게 보면, 성한빈과 장하오는 양극단에 서 있었다. 하지만 반대가 끌리는 법이라고... 누가 그러지 않았나? 안 그랬으면 말고. 한빈은 왠지 뜨끈한 귀를 만지작거리며 일어났다.

 

 

 

 

동행 금지

 

사물함에서 쇼핑백을 꺼내 미대를 빠져나왔다. 영화과 교수실은 예술대 교수동 4층에 있고 한빈은 묵묵히 걸었다. 장하오는 혼자 남겨두지 말라며 얼른 한빈의 옆에 따라붙었다. 학기 중의 4분의 1도 안 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학교가 쓸쓸해 보였다.

 

"어디 가는데?"

"옷 전해주러."

"누구한테?"

"구대헌 교수."

 

구대헌은 불륜설 이후 연예계를 은퇴했다. 그 후 잠적한 그는 1년 전부터 제원대 영화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지금은 다들 구 교수의 수업을 듣지 못 해 안달이다. 장하오에게 그간 그의 행적을 말하자 금방 물음표가 되어 돌아왔다.

 

"왜 네가 전하는데?"

"나한테 맡겨서."

"그러니까 왜 너한테 맡겼냐고."

"그냥 거기 있지, 왜 따라왔어."

 

다시 질문이 돌아오기 전에 한빈은 교수실 문을 열었다. 몇 달 만에 다시 찾은 방은 여전히 너저분하다. 방학 중이라 늘 챙겨 입던 양복 말고 편한 캐주얼을 입은 구 교수가 한빈을 맞이했다가 금방 시선이 돌아간다. 장하오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긴 구대헌 교수님. 여긴... 제 친구예요. 장하오."

"반가워요. 구대헌입니다."

"안녕하세요. 장하오입니다. 팬입니다."

 

그 말에 구대헌이 호쾌하게 웃었다. 쇼핑백을 건네받은 구대헌은 고맙다며 한빈의 팔을 쓸었다. 바깥보다 월등히 영화의 농도가 짙은 방에서 장하오의 눈이 바쁘게 굴려졌다. 곧장 옷을 꺼내며 텍을 뜯는 구대헌을 향해 하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사인이 뭐 별건가."

 

그러더니 옷을 내려놓고 깨끗한 종이 찾는다고 부산이다. 종이를 찾은 뒤엔 또 잘 써줘야 한다며 난리고. 한빈은 한 발짝 떨어져 1 1 팬 사인회를 지켜봤다. 제 꿈이 영화감독인데,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래요? 좋은 감독이 될 것 같은데요? 이거 나도 미리 싸인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하하. 솔직히 구대헌의 진짜 팬도 아니면서 구색 갖추는 장하오가 보는 것보다 사회생활을 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 팬 사인회가 끝나고 장하오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지 마요. 한빈이 친구면 내,"

"?"

"내 친구지 뭐. 하하하. 성한빈 씨랑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서."

 

장하오는 사인지를 철학책 사이에 끼우고 가방을 닫았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영화 관련 서적이 빼곡하게 장하오의 배경이 되어 주고 있다. 그와 잘 어울렸다. 장하오가 잔뜩 신이 난 채 다가왔다. 그 검게 빛나는 눈을 보자니 왠지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아졌다. 한빈은 나직하게 말했다.

 

"갈게요. 아빠."

 

그 말에 두 명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간다. 기쁘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곧 벌어진다. 그래, 아들. 옷 고마워. 연락할게. 문고리를 잡은 한빈의 등 뒤로 익숙한 벨 소리가 들렸다. 한빈, 왜 말 안 했어. 바로 옆에서 장하오가 속삭였고. 그보다 훨씬 큰 소리로 구 교수는 통화를 시작했다.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웬일이야! 안 그래도 옷 갈아입고 있어. ? 많이... 바쁜 일이야? 난 언제든 괜찮지.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교수실 문이 느릿느릿 닫혔다.

.

타이밍이란.

 

"한빈은 어머니 성을 써?"

 

장하오가 물었다. 성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성한빈 7세에 깨달음을 얻다.

아빠랑 나는 왜 성이 달라? 너 그거 작년에도 물어봤는데. 까먹었어. 사장님이 성대헌보다 구대헌이 더 스타성 있대. 스타성이 뭐야? 얼마나 더 유명해질지 가늠하는 거. 가늠이 뭐야? 끝나지 않은 질문은 다 날아가고 하나 남은 말. 어쩌면 성한빈 최초의 기억.

아빠가 다른 여자랑 막 입을 문댔다. 총에 맞았고. 주먹이 오갔고. 눈이 밤탱이만 해졌다가 10분 만에 나았다. 그러고는 다시 칼에 찔렸다. 액션으로 흥한 영화배우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구대헌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결혼할 때 그의 팬들은 울부짖었고 그에게 아들이 생겼을 때도 울부짖었다. 불륜설이 났을 땐, 어땠더라. 기억이 안 난다. 그럼 이혼할 땐 다들 웃었을까.

 

"한빈의 마지막 비밀을 알아버린 기분이야."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교수동을 나온 한빈이 코를 훌쩍였다. 대한민국에서 구대헌 아들이 성한빈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 그러니 이건 나름 엄청난 비밀이 맞았다.

 

"사실 영화 열 개 다 보면 말하려고 했는데."

 

구대헌이란 사람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특집 기사가 난 적이 있다. 그는 빠져드는 사람···. 연기에 빠져드는 사람. 그 인물이 되는 사람. 사람들은 그 말과 불륜설을 동일선상에 놓고 떠들었다. 불행한 건, 아빠보다 엄마가 더 괴로워했다는 사실이다.

 

"한빈아. 이번에야말로 내 주인공 해주지 않을래?"

 

당연하게도 다음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바닥으로 처박혔던 한빈의 시선이 느릿느릿 올라왔다.

 

"아니."

"?"

"난 영화배우 같은 거 안 할 거니까."

 

거절했다. 동시에 그런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이번이 도대체 몇 번의 거절일까. 난 왜 거절밖에 못 할까. 엄마는. 엄마는 왜 거짓인 줄 알면서도 이혼을 선택했을까? 진짜 불륜이 아닌 줄 알면서도. 혹시 무언가 느껴서, 아빠가 울어도 무릎을 꿇어도 한 번을 돌아보지 않았던 걸까? 어쩌면 아빠가 배우라서, 그것마저 연기로 느껴졌을까?

어느새 교정에 드문드문 보이던 사람마저 다 사라졌다. 바깥은 춥고 건조하기만 했다.

 

"거짓말."

"뭐가 거짓말이야."

"나 봤어. 네 방에 있던 영화 대본."

 

한빈이 주먹을 말아쥔다.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눌렀다. 장하오는 무작정 덤비는 사람이 아니었다. 성한빈은 그 너덜너덜한 대본을 떠올렸다. 아빠의 방에서 훔쳐놓고 끝까지 돌려주지 않은. 어설프게 구대헌 흉내를 냈다가 자기만의 연기를 찾아가던 시간. 그렇게 꿈꾸던.

 

"방 안 뒤졌다며."

"콘돔 꺼내다가 잘못 연 거야. 난 두 번째 칸에 두거든."

"그걸 지금 말이라고."

"실은 아빠 같은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지?"

 

그래서 노력했잖아, . 으레 자식들이 그러듯, 성한빈도 부모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남몰래 다짐했다. 그래서 머리를 밀고 난 후에도. 축구부에 들어간 후에도. 야자를 짼 후에도. 성한빈은 생각했다. 또 아빠 같은 짓을 하고 말았어. 그러나 그것은 불가항력. 구대헌이 영화를 그만두지 않으니까, 성한빈은 구대헌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만둘 줄이야.

성한빈은 국어 시간에 밑줄을 그으며 생각했다. 제일 돈 많이 들어가는 전공이 뭘까. 악기는 안 돼. 영 재능이 없어. 체육은 힘들어. 안 해. 그래. 미술이야. 미술로 구대헌의 돈을 다 써버리겠어. 그렇지만 한 시대를 들었다 놨다 했던 영화배우 구대헌의 재산은 실로 대단했다. 그는 하이리스크가 되는 일, 도박투자주식보증은 절대 손대지 않았으니 성한빈 따위가 그 견고한 재산을 함부로 앵꼬낼 수 없는 것이었다.

좋은 집에 살고 마음껏 미술을 하고. 그 돈은 모두 구대헌의 인생에서 왔다. 성대헌이 아니라 구대헌으로 산 시간에서. 또한 성한빈의 절반은 구대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한빈은 필연적으로 구대헌을 닮았다. 어릴 땐 정말 구대헌 자체가 되고 싶었고. '' 오랜 시간 동안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뭐? 구대헌은 더는 영화배우가 아니다. 성한빈의 3인 가족은 모두 1인 가구가 되었다.

그러니 궁금한 것이다. 아빠는 왜, 꿈은 포기했으면서 엄마는 포기하지 못할까. 그럴 거면 순순히 이혼은 왜 했지. 아빠의 통화 상대는 엄마였다. 그 벨 소리는 엄마의 번호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먼저 걸려 온 전화를 반갑게 받던 목소리. 이윽고 사그라드는 즐거움. 성한빈은 정말로 사랑이 궁금했다. 어쩌면 장하오보다 더 알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기자회견으로 불륜설은 전부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아빠는 은퇴를 선택했다. 사랑을 선택했다. 성한빈은 붓을 잡는 것으로 꿈을 버렸다.

 

"늦었어."

"......"

"그런 제안할 거면 20세기 성한빈한테 찾아갔어야지."

"한 번쯤은 솔직해져."

 

장하오가 성한빈의 손목을 잡았다. 손가락이 조여오자,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장하오도 느낄 것이다. . 지금 꼭 영화 같네. 성한빈이 이 장면을 본다면, 이 풍경과 구도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것이 의무인 양 거칠고 빠른 붓질을 하겠지. 장하오는 어떨까. 그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 한빈아."

 

장하오가 무엇인가를 기대한다. 어떻게 솔직해질까. 아빠 불륜설 난 영화 보면서 키스했다가 아빠를 이해하게 됐다고? 어쩌면 아빠가 진짜 사랑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고? 그래서 순순히 이혼했을까 봐 무섭다고? 다행히 성한빈은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할 줄 안다. 따라서 침묵한다.

성한빈은 장하오의 현장을 상상한다. 장하오라면 아마도 손목을 클로즈업하다 롱 쇼트로 바꾸겠지. 이 노을은 생에 단 한 번뿐이니 현장의 모두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겠지.

 

"너 영화배우 되고 싶잖아."

"되고 싶기는."

 

오버 더 숄더로 장하오 미디엄 쇼트. 이어서 성한빈 단독 미디엄 쇼트. 그대로 얼굴까지 클로즈업되는 롱 테이크. 난 지금 어떤 얼굴일까. 성한빈은 구대헌처럼 입 맞추던 자신을 떠올린다. 미간이 살짝 찡그려진다.

 

"난 아빠처럼 고생 안 해. 절대 안 해."

 

장하오를 떠올린다.

 

"이제 그만하자."

 

사랑을 떠올린다.

 

"내 정보 팔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도망친다.

 

 

 

 

 

 

 

 

후회 금지

 

"하지만 21세기 성한빈도 꿈을 꿔."

 

먼저 등을 돌렸던 성한빈이 다시 천천히 뒤돌아선다. 장하오의 등이 보인다. 성한빈은 황망하다. 그가 멀어지는 인물을 찍을지, 남겨진 인물을 찍을지 한빈은 이제 전혀 알 수 없었다. 장하오가 붉고 푸른 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주인 없는 프레임 안에 성한빈만이 남는다. 절대 멈추지 않을 노을과 절대 돌아오지 않을 장하오. 모든 것은 종결되고 동시에 발생한다.

그래. 사랑이다.

무언가 내려앉았다. 그가 떠나는 순간 그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 시나리오라니. 지겹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하다. 이게 영화라면 대사 한 줄 없이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울어버릴까? 아니. 눈물은 어울리지 않아. 그래, 그렇다면 그냥 서 있자. 아주 오래. 관객들이 모조리 이해할 만큼 오래오래. 그래도 장하오는 성실한 감독이니까 끝까지 담아 주겠지. 움직이지 않는 성한빈을 오래오래. 이것이 장하오의 영화라면. 이 슬픔도 아름답겠지.

 

 

 

 

그러게 거기 있지, 왜 따라왔어······.

 

 

 

 

 

 

 

 

[반납예정안내] 향연1, 반납 기한 1일 전입니다

 

"스팸 메일도 회사가 있는 걸까요."

"뭐라고?"

 

심여민이 컵을 씻다 말고 돌아봤다.

 

"스팸 메일이요."

"난 그냥 바로 지우는데. 확인하지도 마."

"못 지울 정도로 많이 오면요?"

"너 무슨 야동 사이트 들어갔니?"

"그게 아니라... 누가 판 것 같아서요."

 

여민의 손에 들린 컵이 뽀득뽀득 소리를 냈다. 마지막 컵 하나를 거꾸로 세워둔 여민은 허리를 쭉 펴며 고무장갑을 벗었다.

 

"잘못 걸렸네. 그럼, 뭐 어떡해. 버려야지."

"?"

"새로 만들어."

 

오늘은 손님 없다. 일찍 들어가자. 더 일하고 싶은데 하필 오늘 손님이 없었다. 성한빈은 밀대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느적느적 앞치마를 벗었다. 메일에 들어갔다가 눈을 의심했다. 99+. 메일에서 그런 숫자 난생처음 봤다. 글로벌하기도 했다. 장하오가 정말 갖다 판 모양이었다. 전화기로도 심심치 않게 문자가 왔다. 다 아까 어디서 전화번호 물어본 사람이라는 문자들. 장하오인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모직 코트를 여미면서 코를 훌쩍였다. 책도 안 돌려주고. 반납해야 하는데. 성한빈 정보 홀랑 팔아먹은 장하오는 일주일째 보이지 않았다. 그만하쟀지 누가 오지 말랬나... 목도리를 여미고 걸어가면서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책 돌려달라고 문자 하면 좀 그렇지?

 

 

 

 

결국 문자를 보냈다. 답이 없었다. 전화는 성한빈도 걸지 않았다. 더 이상 번호 물어본 사람들의 문자도 오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틀었다. 이소라의 프러포즈나 멍하니 보다가 시선을 물끄러미 옮겼다. 거실 테이블 한편에 놓인 노란 공책으로. 그랬다. 장하오는 성한빈의 철학책을 가져간 대신 자신의 공책을 놓고 갔다. 실은 가방에 들어 있었다. 언제 넣은 건지 모르겠다. 한동안은 이 공책 때문에 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 가져다 두고는 건들지 않았다. 그런데 도무지 오지 않아서 한빈은 결국 소파에서 내려와 공책을 들었다.

첫 장을 넘겼다. 중국어가 가득했다. 동그라미를 쳤다가 화살표를 이쪽으로 뻗었다가 저쪽으로 뻗었다가. 장면 번호로 이것이 시나리오겠거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마저도 중구난방. 도무지 읽히지 않는 암호 같다. 수많은 한자를 해석하기 거부하는 눈에 보이는 한국어가 반가워 손가락부터 짚으면 비뚤배뚤한 한글은 모두 '성한빈'이었다.

그리고 한자로 꽉 찬 공책의 맨 뒷장은 '장하오'로 시작했다. 한국어였다. 알 수 없는 숫자들이 먼저 보였다. 725. 5270. Zzzhao200! 011-... 성한빈은 곧 그 숫자들을 해석했다. 이해했다. 그 장의 제대로 된 첫 문장은 이것이었다.

 

제 이름은 '여름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한빈이 아주 조용히 숨을 뱉었다. 한 번에 쓴 것이 아닌지 갈수록 글씨가 나아졌다. 볼펜과 연필이 섞여 있었다. 성한빈은 한 장 가득 채워진 장하오의 신상을 본다. 네가 묻지 않으니 내가 알아서 답하겠다는 듯한 답장.

 

단 것은 즐기지 않는 편입니다.

비를 좋아하지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알람을 듣고 한 번에 일어납니다.

잘 도전하는 편입니다.

무교.

수영을 잘합니다.

영화에 대해 오래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장하오는 답장하기 위해 자신의 영화를 통째로 성한빈에게 넘긴 것이었다. 성한빈이 준 만큼 다시 돌려준 장하오 덕분에 한빈도 이제 그를 '' 알게 됐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성한빈과 영화를 좋아합니다.

 

마지막 문장이었다. 성한빈. 공책을 채운 단어 중 가장 정갈한 글씨였다.

 

 

 

 

 

 

 

 

발신 금지

 

성한빈은 메일을 버렸다. 전화번호도 바꿨다. 각종 비밀번호도 바꾸고 현관 비밀번호도 물론 바꿨다. 새사람이 되기 위해. 쿨도 아니고 핫도 아니기 위해. 안전 속도를 준수하기 위해. 아무것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을 참을 수 없는지 장하오를 참을 수 없는지. 대상과 주체가 모호했다.

장하오가 사라져 버린 일상에서 성한빈은 좀 바보가 됐다. 실수가 잦아졌고 별것도 아닌 일에 크게 놀랐다. 여민은 그런 실수에 대해서도, 더는 카페에 오지 않는 장하오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그게 고마웠다. 그렇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알바가 끝난 어느 날. 성한빈은 공중전화 앞에 섰다. 애니콜이 얌전히 패딩 주머니에 있는데도. 동전이 넘어가고 한빈은 다이얼을 천천히 눌렀다. 신호가 갔다. 주변은 캄캄했다. 하필 공중전화 부스가 저 화려한 거리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어서 꼭 낙도(落島)의 등대 같았다. 손에서 동전이 끊임없이 잘그락거렸다. 계속. 그리고 계속.

장하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성한빈은 그 긴 연결음 끝에 장하오가 단지 여행자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저 영화 때문에 온 사람이라는 걸. 영화 때문에 한국을 찾았고, 그러므로 돌아갔다는 걸. 모든 걸 알려주고도 가버렸다는 걸. 등대가 이렇게 빛나는데 찾아오는 배 하나 없었다. 수화기를 제자리에 두고 돌아서자, 어느새 1월과는 더없이 멀어져 있었다.

 

 

 

 

 

 

 

 

그리움 금지

 

이쯤 되니 모두가 적응한 것 같은 21세기의 초여름. 많은 것이 좀 따뜻한 계절. 심해민이 귀를 뚫었다.

 

"뭐냐?"

"뭐가."

"귀에 붙어있는 거 뭐냐고."

"귀걸이."

 

멋있냐? 심해민의 귀에 철썩 붙어있는 링 귀걸이. 성한빈이 인상을 쓴다. 도미노가 와르르 넘어지듯이 심해민 뒤로 누군가의 잔상이 떠오른다.

 

"못생겼어."

 

성한빈은 무감하게 뒤돌아 물감 냄새가 진동하는 복도를 걸었다. 졸업 작품이 한창이었다.

 

 

 

 

[왜 안 와? 오늘 색 들어간다며]

[귀걸이 못생겨서 안 가]

[미친놈]

 

성한빈은 장하오가 생각날 때면 캔버스에 손도 안 댔다. 작품을 망칠까 봐 무서웠다. 그 겨울 성한빈의 스케치를 단숨에 망쳐버린 것처럼. 그리고 한빈은 그때 그 스케치를 멍하니 바라본다. 아직도 그대로다. 수정하지도 다시 그리지도 버리지도 않았다. 그냥 책 사이에 끼워놨다가 가끔 이렇게 꺼내봤다.

애니콜이 길게 울었다.

 

- 진짜 안 오냐.

"."

- 어디 아프냐.

"너 귀걸이 빼면 갈게."

- 미친 새끼야. 열정 가득 성한빈이 웬일이냐?

"내가 무슨 열정이 있어."

- 3, 4월에는 무슨 정신 나간 놈처럼 캔버스에 붙어있더니.

". 답이 없어?"

- . 답도 없고 미래도 없다.

". 나도."

- 엔터 쪽 자리나 알아볼까. 01의 소년들. 타이틀 괜찮지 않냐. 디지털 테크놀로지 때려 박고 막 그냥 랩 살벌하게 하고... 그냥 컴퓨터 공학과에 갈 걸 그랬어.

"심해민, 문맥이 엉망이다?"

- 알어, 인마. 그냥 들어.

 

교수한테 까였는지 그냥 예술 하는 4학년의 흔한 우울인지. 한빈은 거실에 누웠다. 이제 한빈보다 낮은 걸 찾기 힘들었다. 심해민이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돌리니 거실 테이블 밑에 신문의 제일 아래 노란 공책이 보였다. 쨍한 노랑은 빛없이도 빛났다. 한빈은 다시 천장을 쳐다봤다. 실없는 소리가 몇 번 오갔다. 미래가 없는 심해민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 한빈아. 넌 미술 왜 시작했냐?

"돈이 많이 들어간다길래."

 

심해민의 웃음소리가 경박스러웠다. 미친놈. 웃기지 좀 마. 그 웃음을 배경음 삼아 한빈은 속으로 말했다. 진짠데. 나 미술에 열정 없어. 그림을 특별히 좋아하진 않아. 한빈은 문득 장하오에게 이 말을 했을까, 궁금했다. 해민은 한참 웃다가 예고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대로 애니콜을 내려놓고 팔로 눈을 가렸다. 거실 바닥에 가만히 누워 있는데 어딘가 뜨거웠다. 곧 여름이 올 것 같았다.

 

 

 

 

 

 

 

 

Run To You 금지...

 

해가 쨍한 날이었다. 잠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자 바로 뉴스가 나왔다. 김 대통령은 "이번 평양길이 평화와 화해에의 길이 되고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제거해 남북 7천만 모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냉전 종식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라면서 이번 방문이 남북 간의 계속적이고 상시적인 대화의 길이 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빈은 멍하니 뉴스를 보다가 채널을 바꿔 쇼탱 재방을 틀어놓고 다시 부산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DJ DOCRun To You 무대가 시작됐다. 한빈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그동안 작업실에 처박혀 있느라 신경 쓰지 못했던 집안을 모조리 치우기 시작했다. 청소기가 쉼 없이 돌아갔다. 창문을 모두 열었는데도 바람이 불지 않아 닿는 공기가 덥다.

똑똑똑. 누가 문을 두드렸다. 한빈은 옅게 맺힌 땀을 훔치면서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었다. 여름은 예고 없이 온다.

 

"장하오..."

 

여름 하늘도 그렇다. 그 순간 다시 장하오의 카메라 앞에 선 기분이 든다. 이 얼굴. 분명 우습게 보일 것이다. 그대로 굳은 한빈의 뒤로 신난 남자들의 목소리가 퍼졌다. 니 마음의 문을 열어 나를 허락해줘 니 안에 니 맘에 내가 들어갈 수 있게··· 장하오의 손에서 무언가 투두둑 떨어졌다. 적당한 크기의 돌 세 개가 바닥에 요란하게 튀었다. 꼭 심은하처럼 유리라도 깨겠다는 듯이.

성한빈은 노란 공책을 떠올렸다. 제 이름은 '여름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름 밑에 선 장하오는 여전히 1월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이젠 내가 현재를 살고 그가 과거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성한빈이 입에 넣었던 링 귀걸이를 하고 덥지도 않은지 검은 아디다스 저지를 목 끝까지 올린 장하오가 손을 털었다. 그 손을 따라 카메라가 올라오면 장하오의 미디엄 쇼트.

 

"이사까진 못 갔나 봐?"

 

. 정말 장하오다. 성한빈과 영화를 좋아합니다. 장하오는 더 이상 성한빈도 영화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외양으로 서 있었다. 이제 장하오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차게 담길 것이다. 그를 비춘 이후부터 한 번도 끊지 않은 롱 테이크로. 장하오는 이 말을 전하기 위해 아주 오래 연습한 것처럼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나 영화 엎어졌어."

"?"

"생일 축하해."

 

엿이나 먹으라는 듯이. 그리고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계속 비추겠지. 그래, 이건. 일반적인 영화 문법에서 한참 벗어난 촬영이다. 쇼트가 오래 전환되지 않으면 관객들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또는 불쾌해하거나. 하지만 아무도 나를 이 프레임 안으로 끌어들일 수 없을 거야. 이 참을 수 없는 감정은 그 누구도 볼 수 없을 거야. 내가 감독이라면. 그럴 거야······. 장하오가 돌아온 날은 남북 정상회담에 온 나라가 주목하던 2000613.

성한빈의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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