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빈웹진: cinéclub

연애의 온도

한 떨기




 

 

비상은 어려워도 추락은 쉬웠다. 최근 장하오는 그 신물 나는 인생의 진리를 몸소 실감하는 중이었다. 신예 바이올리니스트의 부상. 때 이른 은퇴. 비운의 천재. 무엇이 그를 무릎 꿇게 만들었나. 전문의 인터뷰 심층 취재. 에이전시 공식 답변 거부. 자취 감춘 클래식 샛별. 적나라한 헤드라인이 포털 사이트 뉴스 페이지를 장악했다. 이어진 것은 값싼 동정과 진심 없는 위로들. 솔직히 좆같았다.

 

연주는 가능하겠지만 속주는 불가능합니다. 주치의 소견을 듣는 순간부터 예상했던 결과였다. 물론 재활을 통해 복귀는 가능하겠지만, 많은 노력이 필요할뿐더러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거예요. 짧아도 5년 정도. 그래 봐야 전성기 기량을 회복하진 못할 테지만. 삐이이---. 이명이 시작된다. 연주자로서의 장하오는 그날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통보하는 의사 목소리가 덤덤했기 때문일까. 호들갑은 떨지 않았다. 그렇군요. 짧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이다. 그리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에이전시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통보받은 사실을 통보했다. 휴대 전화 너머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재앙의 당사자인 장하오는, 나름대로 버틸 만했다. 다만 한 가지 절망적인 것은, 자신보다 상처받은 눈을 하고 애써 씩씩한 척하는,

 

오래된 연인 성한빈을 보는 일이었다.

 

“괜찮아. 조금 쉬고 재활하면 돼. 보란듯이 보여 주면 돼. 나도 에이전시랑 같이 재활 프로그램 알아보고 있는데, 성공적인 사례가 생각보다 많더라고.”

“….”

“나 아르바이트 잠깐 쉴까 봐. 연기도 그렇고. 그러니까 당분간 형이 나 좀 먹여 살려라. 그동안 모아 둔 돈 많잖아. 우리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휴양지로? 형 좋아하는 수영 실컷 하고 돌아오는 거야, 어때?”

 

비가 온다. 울지 않는 너를 대신해서 내리나 봐. 창백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리면,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짓고 있는 네가 보인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이명이 뒤섞인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짧게 한숨을 내쉬면,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한빈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한빈아.”

 

장하오는 푹 잠긴 목소리로 마침내 입술을 뗐다.

 

“헤어지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헤어지자, 우리.”

“형, 내가….”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한빈은 놀라지 않았다. 눈썹이 축 늘어진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들썩거리며 안달을 낸다.

 

“내가 잘할게.”

“그래서.”

“응?”

“그래서 안 돼.”

 

네가 나 때문에 자꾸 애쓰려고 해서. 그래서.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하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지친 기색으로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한빈은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연애의 온도

 

cast

장하오

X

성한빈

 

directed by 한 떨기

 

 

 

 

 

장하오와 성한빈은 예술 고등학교 선후배로 처음 만났다. 관현악과와 연극영화과. 접점이라곤 없는 학과였다. 인연을 맺게 한 건 두 사람 모두 도서관에 자주 드나드는 학생이었다는 공통점이었다. 장하오는 한국어를 더 깊게 공부하기 위해서, 성한빈은 문학적 소양을 기르면 연기에 보탬이 될까 해서. 각기 다른 이유로 사서 교사의 애제자가 된 두 사람은 도서관 봉사를 도맡아 하며 친해졌고, 사랑에 빠졌다.

 

그렇게 시작된 연애는 8년 간 이어졌고,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찬물로 세수하던 하오는 문득 의구심을 가졌다. 종지부, 찍힌 게 맞나? 세수를 마치고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눈을 내리면, 나란히 걸려 있는 두 개의 칫솔이 시선에 걸렸다. 같은 디자인에 색깔만 다른, 주기적으로 한빈이 교체해 놓곤 했던 칫솔이다. 그걸 가만히 노려보던 하오는 끝내 커플 칫솔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장을 봐야겠다. 칫솔은 새로 사야겠다. 하오는 찬장에 남은 새 칫솔들을 모두 꺼내어 버리고, 물을 마시기 위해 정수기 앞에 섰다. 그리고 손에 잡힌 머그잔. 이마저도 한빈과 세트로 산 것이다. 하다 못해 당장 신고 있는 실내화조차 커플 아이템이다. 심지어는 도대체 언제 샀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집안 곳곳 한빈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게 당연했다. 한빈의 집이 따로 있긴 했지만 둘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으니까. 하오는 머그잔을 버리는 걸 포기하고 냉수를 한 컵 따라 마셨다. 추억 남은 물건들을 전부 처분하는 것보다 이 집을 통째로 불태우는 게 빠를 터였다. 8년이란, 그런 시간이었다.

 

그렇게 상념에 젖어 있을 무렵, 도어록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쾌한 소리 끝에 누군가 현관에 들어선다. 구태여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범인은 뻔했다. 이 집 비밀번호를 당연하게 외우고 있는 사람. 제집처럼 드나들 자격이 충분했던 사람. 그러나 이제는, 그래선 안 되는 사람.

 

“아침은 먹었어?”

 

하오와 같은 실내화를 신고 입장한 그 사람의 양손에는 장바구니가 각각 들려 있다. 능숙하게 냉장고 문을 열고 장 봐 온 것들을 알맞은 장소에 밀어 넣었다. 한빈은 집 주인인 하오보다 이 집 살림에 능숙했다.

 

“세수했어? 티셔츠가 다 젖었네.”

 

냉장고 정리를 마친 한빈이 찬장을 연다. 칫솔이 사라진 자리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레토르트 식품들을 차곡차곡 담았다. 비워진 장바구니를 차곡차곡 접어 서랍에 넣어 놓은 한빈이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수건을 들고 돌아왔다.

 

“머리도 덜 말렸잖아. 이렇게 돌아다니면 감기 걸린다니다니까?”

 

그러고는 아직 젖어 있는 하오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털어 말려 준다.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 하오는 문득 그의 손에 제 뺨을 묻고 싶어졌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성한빈.”

 

그 단호한 호명에 한빈이 흠칫 굳었다.

 

이 애를 끝내 체념시키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하오는 아득한 여정을 예감하며 긴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어?”

“이제 우리 남이니까.”

“….”

 

놓아준 손목이 허공에 툭 떨어졌다. 멍하니 서서 눈꺼풀을 무력히 깜빡이던 한빈은 이윽고 다시 바지런히 움직였다. 그는 어디에선가 아이패드를 꺼내 와선 하오를 식탁 앞에 앉히고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영어가 가득한 팜플렛을 띄워 하오 앞에 내밀었다.

 

“있지. 내가 회사랑 얘기해 봤는데, 몇몇 재단에서 형을 후원하고 싶다고 제안해 왔대. 그리고 여기는 재활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병원인데….”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

“헤어지자고 했잖아.”

 

그러자 잔뜩 경직돼 있던 한빈의 어깨가 툭 떨어졌다.

 

“형.”

 

아이패드가 식탁 위에 내려놓인다. 한빈은 쓸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우리가….”

“….”

“우리가 어떻게 헤어져.”

 

한빈은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총명한 눈으로 하오를 마주 보았다. 늘 살갑고 다정하던 얼굴에 사뭇 단호한 표정이 떠올랐다.

 

“형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역시나 헤어지는 일이 쉽진 않겠다. 하오는 그러나 끝내 헤어져야 할 연인의 시선을 피하며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한빈은 제 말이 어느 정도 먹혀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규빈이 귀국했대. 다음 주에 보기로 했어. 형 스케줄 비는 날로 잡았으니까 뺄 생각 마. 우리 집으로 초대했는데, 괜찮지?”

 

한빈은 그 어떤 단어보다 ‘우리 집’을 또박또박 선명히 발음했다. 그렇게 들린 것이 기분 탓은 아닐 테다. 형과 내가 있는 이 집은 우리의 집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견고하다고, 투정을 부리는 거다. 하오는 8년 사귄 연인의 속이 빤했다.

 

김규빈은 두 사람의 고등학교 후배로, 공통 지인 중 하나였다. 오래 사귄 연인들이라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장하오와 성한빈은 인맥에도 경계랄 게 없었다.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운 좋게 함께 진학하기도 했고, 무명 배우 한빈이 상대적으로 일이 많은 하오를 물심양면 도왔기 때문에 에이전시 직원들은 그를 매니저 대하듯 했다.

 

“그리고 오면서 실장님이랑 통화했는데….”

“하….”

 

하오가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뱉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었던 휴대 전화를 주워 그대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

 

한빈은 온기 식은 눈으로 그런 하오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제 일은 한빈이 통하지 말고 직접 전화해서 말해 주세요. 걔랑 헤어졌으니까.”

 

한빈은 휴대 전화 너머로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어물어물 뭉개지는 것을 들었다. 하오는 전화를 끊었고, 한빈은 그제야 혼잣말하듯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화풀이를 왜 실장님한테 하냐. 사람 눈치 보이게.”

 

하오는 까맣게 죽은 휴대 전화를 다시 소파에 던졌다. 그리고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숨을 골랐다. 손발이 차게 식고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한빈은 내색하지 않았다.

 

8년을 사귀며 이별한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숱하게 싸워도 보았고, 권태기도 겪었다. 그 지난한 세월을 통과해 오면서 몇 차례 헤어지기도 했으나 번번이 한 달을 못 견디고 다시 붙었다. 이를 지켜보던 지인들은 꼴값이라고들 했다.

 

5년 차였나.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재회했던 날을 한빈은 기억한다. 사소한 일로 싸움이 불거져 더는 안 볼 것처럼 집을 박차고 나갔다가 일주일 만에 귀가했던 날, 한빈은 허탈하게 웃으면서 말했었다.

 

이번 생엔 글렀다. 우리 평생 못 헤어질 것 같아, . 그러니까 이제 헤어지지 말자. 헤어져 봐야 어차피 도돌이표야.”

 

그러자 하오는 물었다.

 

그래도 헤어지고 싶어지면?”

,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그래도 진짜, 진짜로 헤어지고 싶어지면?”

, 왜 그런 걸 생각해. 나랑 헤어지고 싶냐, 형은?”

우리 왜 또 싸워.”

형이 자꾸 꼬치꼬치 캐물으니까 그렇지!”

한빈아.”

.”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언젠가 진짜 나를 떠나고 싶어지면.”

 

그땐 이렇게 말해.

 

“성한빈.”

 

오늘의 장하오가 끝내 냉정한 얼굴로 성한빈을 직시하며 입술을 뗐다.

 

“너랑 있는 게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아.”

 

그날, 자신에게 당부해 주었던 그 말로, 마음을 벤다. 기꺼이 줘 놓고, 비겁하게 선수를 치다니. 묵묵히 그의 말을 견뎌 내던 한빈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려놓았던 아이패드를 잘 정리하고, 의자도 원래 있던 자리에 밀어 넣었다.

 

“형 좀 진정되면, 그때 다시 올게.”

“….”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바로 받을게.”

 

그리고 균열 하나 일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집을 떠났다. 혼자 남은 하오는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아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의연한 척했으나 정말로 괜찮은 건 아니었다. 운전하면 사고가 날 것 같아 일부러 버스를 탔다.

 

장하오는 위악을 떨고 있다. 성한빈은 확신했다. 8년이나 보아 온 연인이 아닌가. 고작 이런 시련 따위에 나를 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듯 되뇌며 도착한 곳이 하필이면 함께 나온 고등학교였다. 모든 추억의 시작점.

 

“한빈이 왔니?”

 

그 시절의 장하오와 성한빈을 유독 아꼈던 사서 교사가 자상하게 반기며 차를 내주었다. 서랍에 감춰 놓고 아껴 먹는 차인데, 한빈이니까 특별히 꺼내 주는 거라고 작게 속삭였다.

 

“그렇지 않아도 하오 소식 듣고 걱정 많이 되더라고.”

“아…. 기사 보셨어요?”

“너희 정말 유별나게 붙어 다녔잖니.”

 

사실이었다. 한빈은 따뜻한 차 한 모금과 함께 쓴웃음을 삼키고, 서서히 눈을 돌려 도서관 내부를 둘러보았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어느 날의 하오는 모두가 하교하고 없는 적막한 도서관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다. 한빈과 사서 교사, 단 둘만을 위한 작은 연주회였다. 바이올린을 조율하는 장하오, 성한빈을 장난스레 흘겨보다 픽 웃어 버리는 장하오, 성한빈이 가장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는 장하오의 모습이 한빈의 휴대 전화 동영상에 담겼다.

 

그때 연주했던 곡을 한빈은 아직도 기억했다. 시대를 초월한 마음. 처음 듣고 마음에 들어 여러 번 연주를 청했던 곡이었다.

 

도서관에서 연주하는 예고 남학생의 영상은 유튜브에 올라간 뒤로 꽤나 화제를 모았다. 처음에는 연영과 버금가는 잘난 외모 때문에, 그다음으로는 유려하고 감성적인 연주 때문에 조회 수가 연일 급상승했다.

 

한낱 평범한 예고 학생이던 장하오가 자신이 존경하던 바이올리니스트로부터 당신을 가르쳐 보고 싶다는 연락을 받게 된 건 그때 그 영상의 유명세 덕분이었다.

 

하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빈의 반으로 달려갔고, 누가 보든 상관없이 그를 꽉 끌어안았고, “이거 꿈이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한빈은 하오를 간신히 떼어 놓고 “형, 정신 차려. 이거 꿈 아니야.” 당부했다. “정말로?” 재차 물은 하오는 말릴 겨를 없이 한빈에게 키스했다. 와, 씨발. 지나가던 남학생이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떨어트리며 감탄했고,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그게 두 사람의 첫 키스였고, 긴 연애의 시작이었다. 참 요란하기도 했지. 한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추억의 장소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네가 옆에 있어 줘. 내 조언 없이도 그렇게 하겠지만. 가장 힘들 때 가장 가까운 사람이 위로가 돼 줘야지.”

“네, 그러려고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하오 괜찮아지면, 둘이 같이 오렴. 늘 연주회 초대만 받고, 괜히 바쁠까 봐 오라는 말 한 번을 못 했네.”

“그럴게요. 하오 형도 선생님 뵙고 싶어할 거예요.”

 

그 대목에서 왜인지 눈물이 차올라 황급히 차를 한 모금 더 넘겼다. 교사는 한빈에게 다정히 물었다.

 

“한빈이 너는? 요즘 오디션은 좀 보고 있어?”

“아….”

 

누군가 자신의 일에 대해 묻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대답할 말이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에는 여러모로 정신도 없었고…. 이제 다시 도전해 봐야죠.”

“너는 잘될 거야, 한빈아.”

“항상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이야. 너는 눈이 맑잖아. 배우에게 그건 큰 장점이야.”

 

교사는 한빈의 손등을 따뜻하게 쥐었다 놓으며 당부했다.

 

“그늘지지 마. 알았지?”

“네, 선생님.”

 

그게 노력하는 대로 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런 솔직한 마음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꿀꺽 삼켰다.

 

학교에서 나오는 길, 다른 말보다도 가까운 사람이 위로가 되어 주어야 한다던 그녀의 조언이 끈질기게 머릿속에 맴돌았다. 발걸음이 점차 조급해졌다. 한빈은 그대로 택시를 잡아 타고 하오의 집으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가 익숙한 층수에 도착했다. 쏜살같이 내린 한빈이 도어록을 붙잡았다. 형한테 뭐라고 하지? 중요한 물건을 두고 갔다는 핑계를 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그 말은 선을 넘었다고 화를 내 볼까? 아님 그냥 평소처럼 태연하게 밀고 들어가? 고민 끝에 떨리는 손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빅. 그러나 평소와 다른 기계음이 한빈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손이 떨려 번호를 잘못 누른 걸까. 한빈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다시 한번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었던 현관문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한빈은 주먹을 들어 현관문을 두드렸다.

 

“형.”

 

처음에는 작게. 그러나 감정이 격양될수록 철문을 내리치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나 이런 장난 재미없어.”

 

그러나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문 좀 열어 봐, 응?”

 

한빈은 주먹질을 멈추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안에 있잖아, 너. 듣고 있는 거 다 알아.”

 

달칵달칵.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투정을 부려도 보았다.

 

“장하오. 문 열어. 이 나쁜 놈아!”

 

기어이 언성을 높였지만 복도를 한 세대가 독점하도록 설계된 아파트였기 때문에 시끄러운 소리에 놀란 이웃이 나와 보는 신파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빈은 끝내 다리가 풀려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고집 센 건 진작 알았지만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이건 너무….

 

“…진짜 같잖아.”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던 한빈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낯선 예감에 손발이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그의 집을 다시 찾은 건 규빈과의 약속이 잡혀 있는 평일 오후였다. 이별했다고 해서 전에 했던 약속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한빈은 규빈과 함께 다시 문 앞에 섰다. 무의식 중에 도어록으로 향하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

 

사정 모르는 규빈은 한 발짝 뒤에서 그가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렸다. 한빈은 가볍게 숨을 고르고 초인종을 눌렀다. 규빈은 의아한 눈치였지만 말을 아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안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한빈은 냄새만 맡아도 그게 어떤 요리인지 알았다. 요리에 재주 없는 하오가 그나마 만들 수 있는 메뉴는 한정되어 있었고, 한빈은 그 음식들을 물리도록 맛보았다. 그래도, 질리지는 않았다. 하오의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었으니까.

 

“형, 잘 있었어요?”

“규빈 왔어?”

“네. 완전 오랜만이네요. 한 3년 전인가? 그때도 형네 집에서 봤었는데. 맞죠?”

“맞아, 그랬지.”

 

파스타와 샐러드. 실패 없는 조합이었다. 하오는 앞치마를 벗어 정리하며 규빈을 맞이했다.

 

“요리할 거면 나 일찍 부르지. 그럼 도와줬을 텐데. 우리 형 힘들었겠다.”

 

한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며 싱크대로 갔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몇 개의 식기를 간단하게 설거지하고, 규빈에게 얼른 앉아서 먹으라며 안주인 행세를 했다. 하오는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부자연스러운 한빈을 가만히 응시했다.

 

“먹자.”

 

세 사람이 테이블에 앉았다. 한빈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하오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규빈도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맛있다. 형 요리 실력이 나날이 느는 것 같아.”

“진짜 완전 파는 것 같은데요?”

 

한빈은 하오가 내놓은 파스타를 입안으로 감추며 칭찬했고, 규빈은 동조했다. 하오는 포크를 건성으로 돌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한빈과 규빈이 파스타를 거의 다 비웠을 무렵까지도, 하오의 파스타는 거의 그대로였다.

 

“형, 왜 이렇게 못 먹어. 어디 안 좋아?”

 

한빈이 하오를 걱정했다. 그러자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하오가 규빈을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규빈아.”

“네?”

“네 첫사랑, 성한빈이었잖아.”

“어…, 그랬…죠?”

 

이건 또 뭐 하자는 수작이지. 한빈은 멍한 얼굴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규빈도 파스타를 먹다 말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 테이블에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건 하오뿐이었다.

 

“그럼 지금은 어때?”

“네? 뭐가 어떤….”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잖아.”

“…혹시 제가 뭘 잘못했나요?”

“그런 게 아니라 알려 주려고. 한빈이랑 나랑….”

“형, 그만해.”

 

결국 한빈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하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뭘.”

“유치하게 뭐 하는 짓이야. 규빈이 앞에서.”

 

하오는 마침내 일그러지고 만 한빈의 얼굴을 물끄러미 본다. 그리고 물었다.

 

“너는?”

 

그래서 너는, 나와 다르게 대단히 어른스러웠냐고. 한빈은 반박할 수 없어 아랫입술만 꾹 깨물었다.

 

“한빈아.”

“….”

“이런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

 

하오는 일면 피곤해 보이는 듯도 했다. 그는 테이블 어디께로 눈을 돌리며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제발 애쓰지 마. 보는 사람도 힘드니까.”

 

당황한 규빈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빈은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깨끗하게 비운 파스타 접시를 싱크대에 처박곤, 규빈이 말릴 새도 없이 집을 나왔다.

 

한빈은 아파트에서 나온 뒤에도 씩씩대며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정처없이 걷다 보니 언제나처럼, 단지 앞 공원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우뚝 멈춰 서서 이를 악다물었다. 어쩌다 하오와 다투고 나면 한빈은 습관처럼 이 공원을 찾았다. 같이 있기도 싫다며 박차고 나와 놓고, 또 멀리 떨어지고 싶진 않다 보니 그렇게 됐다. 공원을 빙빙 돌고 있으면 하오는 어느샌가 따라 나와 한빈을 찾아냈다.

 

, 또 시작이다.”

.”

입술 나온 거 봐. 뽀뽀해 달라는 거야, 뭐야?”

뭐래.”

 

그렇게 몇 바퀴 돌며 실랑이하다 자연스레 손을 잡고, 그러다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까 물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오래된 연인의 일상이었다.

 

한빈은 공원을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하오는 그를 따라 나와 붙잡아 주지 않았다. 장난스레 타박하고 손가락을 얽어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공원에 코빼기라도 비쳐 주질 않았다.

 

더 이상 걷는 것이 무의미한 희망 고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빈은 자리에 멈춰 섰다.

 

장하오가 나를 찾으러 나오지 않는다.

 

그러자 등골이 서늘해진다. 어쩌면, 이건 정말로 어쩌면, 실의에 빠진 형의 어리광 따위가 아닌 걸까. 형이 진짜로 헤어질 마음을 먹은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건 말이 안 되잖아. 우리가 어떻게 헤어져.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왜, 덜컥 겁이 나는 건지.

 

“한빈이 형!”

 

넋이 나가 있는 한빈의 뒤통수를 때린 건 규빈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규빈이 난처한 표정으로 턱을 갉작이며 서 있었다.

 

 

 

 

결국 규빈과 함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한빈은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사과부터 했다.

 

“곤란했지. 미안해.”

“괜찮아요.”

 

마침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진동벨이 울렸다. 규빈이 잽싸게 먼저 몸을 움직여 카운터에서 커피를 받아 왔다.

 

“그냥 좀 다툰 거죠?”

“형은… 뭐래?”

“….”

“헤어졌대?”

 

한빈의 역질문에 규빈은 눈을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 형이 지금 많이 힘든가 봐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너무 우울해하지 마요. 잘 풀리겠죠.”

 

삽시간에 흐려지는 한빈의 얼굴을 확인한 규빈이 조심스럽게 위로했다. 한빈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애써 웃음 지었지만, 비관적인 말이 흘러나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냥 진짜… 잘 모르겠어, 규빈아.”

 

그는 장하오의 세상이 지금 어떤 모양으로 일그러져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짐작할 뿐이었다.

 

장하오는 평생의 꿈을 어린 나이에 이뤘다. 존경하던 바이올리니스트의 제자로 세상에 알려진 뒤로 빠르게 유명세를 탔고, 끝내 사랑받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그는 이십 대 내내 상승 가도였다. 그러다 별안간 벼랑 끝으로 떠밀린 그의 절망을, 한빈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견뎌 줄 작정이었다. 함께 추락하지 않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치고 밀어내도, 영원히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헤어지자.”

 

형의 그 말이, 사랑을 위해 이별을 선택하는 모순적인 위악이 아니라, 이 지난한 연애에 질려 버렸다는 진심이라면, 그럼 나는 진짜 어떻게 해야 하지.

 

“형, 그냥….”

 

깊어지는 한숨의 모양을 눈에 담던 규빈이 그를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그냥 잠깐 내려놔 봐요.”

“….”

“이런 일로 헤어질 사이 아니라는 거 솔직히 형도 알잖아요. 그러니까 하오 형한테 잠깐 시간을 줘요. 너무 기죽어 있지 말고. 응?”

 

규빈의 말이 맞았다. 자그마치 8년이었다. 쉽게 끊어질 인연이 아니었다. 그는 침몰하는 배 같은 인생에서 저라도 밀어내기 위해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게 확실했다. 한빈은 끊임없이 이유를 찾아 붙이며 불안을 가라앉혔다.

 

“네 말이 맞아. 그냥… 형이 나한테 약한 모습 보여 주고 싶지가 않은가 봐. 나라도 흔들리지 말아야지.”

 

한빈이 씁쓸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괜찮은 척하는 얼굴이 사실은 더 아파 보였지만, 규빈은 말을 삼켰다.

 

 

 

 

규빈과 카페에서 헤어진 뒤 한빈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하오와 반동거하다시피 했기에 한빈은 제 보금자리가 때때로 낯설기도 했다.

 

장하오는 유독 연주회를 마친 밤이면 이 집에서 자는 걸 좋아했다. 좁은 침대에 드러누워 한빈이 덮고 자던 이불을 끌어안으며 요상한 소리를 내며 끙끙거리곤 했다.

 

나 그냥 한빈 집에서 살까?”

형네 집이 훨씬 좋은데 뭐 하러?”

그치만 여기는 성한빈 냄새로 꽉꽉 차서기분이 좋은 거야.”

, 지금 완벽하게 변태 같았어.”

 

그럴 때면 한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리면서도, 엎드려 있는 하오의 등 위로 올라타 긴장돼 있던 근육을 꾹꾹 눌러 마사지했다. 연주회를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몸살에 시달리는 하오를 위해 특별히 연마한 솜씨였다.

 

연주회에 모든 기운을 쏟아부은 뒤의 장하오는 마치 햇빛 아래 늘어진 한 마리의 강아지 같았다. 제 마사지를 받으며 끙끙거리던 그를 떠올리자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졌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한빈은 휴대 전화에 충전기를 연결하기 위해 침대 옆 협탁을 건성으로 더듬었다. 손에 걸린 송진과 튜너가 와르르 쏟아져 바닥을 뒹굴었다. 아침 루틴으로 바이올린 연습을 하는 하오를 위해 가져다 둔 것들이었다.

 

“….”

 

이것 봐. 내 집에 형 흔적이 이렇게나 가득한데, 우리가 어떻게 헤어져. 한빈은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휴대 전화에 충전선을 연결시켰다. 혹시라도 악몽을 꾸다 땀에 젖어 깨어난 형이 전화할 수 있으니까. 만약 그러면 한달음에 달려가야 하니까. 그럼 장하오도 우리가 헤어질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실감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약을 꺼내 먹고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침잠할 때였다. 지이잉. 휴대 전화가 울렸다. 장하오일까?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발신인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형?”

- ….

“….”

- 저 유진이요.

 

휴대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맥이 탁 풀렸다. 한빈은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 기다리는 전화라도 있었어요?

“어? 아…. 그냥 실수로…. 미안, 유진아. 무슨 일이야?”

 

한유진은 성한빈이 대학교 4학년일 때 신입생으로 들어왔던 똘망똘망한 후배였다. 예쁘장한 외모와 달리 의외로 시니컬하고 터프한 면이 있어 한빈은 첫눈에 유진을 마음에 들어했다. 학교를 함께 다닌 건 잠깐이었지만 친해지기에는 충분했다. 한빈은 당연한 수순으로 유진에게 하오를 소개시키며 두 사람의 관계를 고백했다. 놀란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유진을 보며 한빈은 생각했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 저는 다른 게 아니고요. 형 오디션 보시라고요.

 

유진은 PD 지망생이었다. 졸업도 전에 업계에 뛰어들어 조연출로 일하느라 동분서주 바쁜 애였다. 건너건너 오디션 정보를 접할 때면 이렇듯 한빈에게 제일 먼저 연락해 오는 형 같은 동생이었다.

 

- 이번에 알게 된 감독님이 차기작 캐스팅 고민하시길래 형 추천 드렸거든요. 프로필 보더니 지금 찾고 있는 이미지에 딱이라고 하시던데요.

“그랬어? 매번 고맙다, 유진아.”

 

왜인지 기운 없는 대답에 휴대 전화 너머의 유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 별로 안 내키세요?

“아니, 오디션이 내키지 않는다기보다….”

- 네?

“…그러게….”

 

한참 어린 후배를 상대로 어른스럽지 못한 태도였다. 그러나 결국은 체념하게 된다. 미적지근하게 반응한 한빈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형이 요즘 좀 피곤한가 봐. 그냥 도망치고 싶고 그렇다.”

 

그러자 유진이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 하오 형 때문에 그래요?

 

PD 지망생이라 그런가. 벌써부터 압박 면접에 재능을 보인다. 배우들과 기싸움도 문제 없겠다.

 

“아니야. 지쳐서 그래. 쉬고 싶어서.”

 

한빈은 밑천 다 털린 주제에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럼 당장 결정하지 말고 조금 더 생각해 봐요. 요새 충무로에서 꽤나 핫한 감독님인데. 이번 대본 슬쩍 봤는데 진짜 괜찮았거든요. 놓치기엔 아까운 기회예요. 다시 연락 드릴게요. 한빈을 최대한 설득한 유진이 전화를 끊었다.

 

끊긴 휴대 전화 화면이 까맣게 점멸했다. 유진과 전화하는 사이 들어온 부재중 전화나 메시지는 전무했다. 한빈은 눈이 아프도록 화면을 노려보다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한빈은 아주 오래오래 자고 일어났다. 얼마만의 늦잠인지 모르겠다. 몇 차례 뒤척이다 완전히 일어났을 땐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침대에서 벗어난 한빈은 냉수를 한 컵 마셨고,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그사이 도착한 연락은…. 도대체 하오랑 무슨 일이냐고 캐묻는 실장님, 잘 들어갔냐고 안부를 묻는 규빈, 단체 카톡방 알림, 그리고 광고 메시지 같은 것들이 다였다.

 

한숨이 나온다. 연락이 잠시라도 안 되면 분리 불안 심한 강아지처럼 안절부절하던 형이었는데. 그랬던 그에게서 거짓말처럼 연락이 뚝 끊겼다. 한빈은 내내 조용한 휴대 전화가 낯설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젯밤 잠들기 전에도, 아침에 일어난 뒤에도 잠깐이나마 통화했을 텐데…. 아니, 애초에 이 집에 나 혼자 올 일이 없었으려나.

 

몇 번이고 먼저 부딪쳐 볼까. 충동적으로 전화를 걸어 보려던 한빈은 문득 규빈의 조언을 떠올렸다.

 

하오 형한테 잠깐 시간을 줘요.”

 

그래,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자. 몰아붙이면 도리어 반감을 갖게 될지도 모르니까. 한빈은 휴대 전화를 협탁 위에 올려 놓고, 지난밤 바닥으로 떨어트렸던 송진과 튜너를 주워 서랍에 넣어 두었다. 형은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부상당하기 전에는 아침마다 바이올린 연습을 하곤 했는데. 그러나 마치 잘 훈련된 개처럼, 모든 의식의 흐름이 한 곳으로 귀결되고 만다.

 

한빈은 고개를 털었다. 끊어내야 했다.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곧장 침대의 이불을 걷어 냈다. 오랜만에 이불 빨래를 해야겠다. 집안 곳곳을 쓸고 닦으며 하루를 보내야겠다. 그러고 나서는 조깅을 해야겠다. 머릿속으로 정신없이 하루 계획을 세우며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장하오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허튼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집중할 대상이 필요했다. 집안을 뒤집어 놓으며 청소에 몰두한 다음에는 내리 영화를 봤다. 집 근처 헬스장에서 지칠 때까지 운동을 하고, 밤이 되면 기절하듯 잠들었다.

 

이 정도면 형한테 충분한 시간이 되었을까. 이제는 내 생각이 좀 날까. 뱉은 말을 후회하고 있을까. 그런데 왜, 연락은 오질 않을까. 얼마나 기다려야 나를 돌아봐 줄 여유가 생길까. 일주일일까. 한 달일까. 그도 아니면 일 년일까. 너무 오래 기다리는 건 힘들 것 같은데….

 

하오에게서 연락이 오는 데는 의외로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휴대 전화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았을 때, 한빈은 제 눈을 의심했다. 너무 간절해서 헛것이 보이는 줄 알았다.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땐 주저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형?”

 

너무 당황해 목소리가 다 갈라져서 나왔다. 목이라도 한 번 가다듬고 받을걸. 한빈은 그 와중에 그런 걸 후회했다.

 

- 지금 나와.

“어?”

- 씻고 나와.

“…어?”

 

휴대 전화 너머로 하오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 집 앞에 와 있기라도 하단 소린가? 서둘러 블라인드를 열고 주차장을 내려다보자 그의 차가 보였다.

 

어쩌면 화해하자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장하오는 서프라이즈를 좋아하는 남자였다. 아무것도 아닌 날 뜻밖의 선물로 자신을 기쁘게 만들 줄 아는 연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른 한빈은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괜한 멋은 부리지 않았다.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하오가 좋아하는 향수를 뿌렸다. 스니커즈를 엉망으로 구겨 신으며 엘리베이터를 잡았다가, 그마저도 기다리기 힘들어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주차장에서 하오의 차를 앞두고는 반가움에 숨이 벅차기까지 했다. 한빈은 그가 저를 두고 출발이라도 할까 서둘러 조수석에 올랐다.

 

“미리 연락하지. 그럼 준비하고 있었을 텐데.”

“….”

 

하오는 그 흔한 안부 인사조차 건네지 않은 채 차를 출발시켰다. 내비게이션에는 알 수 없는 목적지가 찍혀 있었다. 한빈은 안전 벨트를 당겨 메며 아랫입술을 꾹꾹 씹었다. 만나자마자 이렇게나 침체된 분위기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형….”

 

한빈은 흘끔흘끔 눈치를 보다 차가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섰을 때에야 겨우 입술을 뗐다.

 

“그래도 오랜만인데 반갑지도 않냐. 내 얼굴 좀 보지….”

“뭐가 예쁘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179.6cm의 건장한 남자로 살면서 듣기 힘든 예쁘다는 소리, 형 입에서만 골백 번은 듣고 또 들은 것 같은데.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속을까 봐. 하지만 반박해 봐야 의미 없는 기싸움만 될 터였다. 한빈은 애써 화제를 돌렸다.

 

“우리 어디 가는 건데. 응? 말해 줘야 알지.”

“오디션.”

“…어?”

“너 오디션 보러 가는 거라고.”

 

신호가 바뀐다. 하오는 기어를 바꿔 넣고 액셀을 밟았다. 한빈은 뜻밖의 무중력 상태를 경험했다. 이명이 짧게 스쳐 지나간다.

 

“지금 어디 간다고 했….”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 형 오디션 보시라고요.

 

유진에게 그런 연락을 받았었다.

 

- 하오 형 때문에 그래요?

 

어쩐지 못마땅하던 기색의 목소리가 기억을 스쳤다.

 

“…유진이한테 들었어?”

 

자신을 답답하게 여긴 유진이 하오에게 연락한 걸까. 한빈은 못내 초조해졌다.

 

“혹시 내가 형 때문에 오디션 안 보는 것 같다고, 유진이가 그래?”

 

한빈은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물었다. 그사이 차는 목적지에 다다라 어두운 지하 주차장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위태로운 연인들 위로 새카만 그늘이 드리워진다.

 

“그래서 화난 거야, 형?”

“화 안 났어.”

“오해야. 형 때문 아니고, 나 진짜 지쳐서. 쉬고 싶어서 보류했던 건데….”

“오해?”

 

그러자 하오가 차를 주차하며 코웃음쳤다. 마침내 까맣게 안광이 죽은 눈동자가 한빈에게로 향했다.

 

“나 때문이잖아.”

“….”

“그거 나 때문이잖아, 성한빈.”

“아닌데….”

“그래?”

 

한빈의 거짓말을 비웃듯, 하오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호선을 그렸다.

 

 

 

 

오디션 장소는 감독이 졸업한 대학교의 소강당이었다. 감독이 컨택한 여러 명의 신인 배우들이 그 소강당을 찾았다. 성한빈은 그중 마지막 순서의 배우였다. 소강당 무대 위에는 기다란 단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장의 종이가 엎어져 있었다.

 

“하나 선택해서 연기해 볼래요?”

 

감독이 유순한 얼굴로 제안했다. 깐깐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감독이란 작자들은 어딘가 다 조금씩 핀트가 나가 있는 인간들이다. 한빈은 긴장을 놓지 않은 채 종이 하나를 골라 들었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했을 때, 한빈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하필이면….

 

“충분히 읽어 보고 준비되면 시작해 주세요.”

“네.”

 

일전에 연습해 본 적 있는 대사였다. 잠깐이면 전부 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암기력이 아니었다. 뚫어져라 종이를 노려보던 한빈은 잠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려 감정을 가다듬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기분으로는, 이 대사를 겸허히 완성시키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한빈은 체념한 마음으로 종이를 내려놓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내려 감독과 눈을 맞추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헤어지나요?”

 

한빈은 이 대사가 나온 영화를 하오와 같이 보았다. 연애의 온도. 지독하게 이별하고, 또 사랑하고, 다투고, 다시 이별하는, 한 마디로 지긋지긋한 영화였다. 저런 사랑 진짜 이해 안 되지 않아? 한빈은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하오를 향해 물었고, 하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건 되게 아름다운데… 그 끝은 왜 이렇게 추해지는 걸까요.”

 

형,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데. 김민희 얼굴? 아님 이민기 얼굴? 내 얼굴은 어때? 더 예쁘고 잘생겼…는지는 몰라도 더 어린 건 확실한데. 애교 섞인 말에 하오는 마침내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당연한 걸 묻고 이쓰어.

 

“줬던 사랑이 아까워서? 줬던 사랑을 돌려받으려고? 사람 마음 마음대로 안 되는 건데, 단지 자기 혼자 고통당하기 싫다, 뭐 그런 건가요?”

 

뱉는 문장의 어절마다 축축하게 물기가 내려앉는다. 종이를 쥐고 있었다면 대사가 번지고 말았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열백 번 얘기해도 헤어지자는 말 한 마디로 끝나는 게 연인 관계라더니,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만….”

 

애써 담담히 대사를 이어가던 한빈은 결국 위기를 맞았다. 힘을 주고 뜬 눈에 기어이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턱에 맺혔다. 울음을 참기 위해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한빈은 젖은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만 바보가 되는 거죠. 우연히 만나서 우연히 사랑하고 우연히 헤어지고…. 인생 자체가 그냥 우연의 과정인 거죠. 어떤 의미 같은 건 없어요.”

 

대사의 마무리와 함께 소강당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감정에 젖어 있던 한빈은 정신을 차리고 손등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성한빈 씨.”

 

고요히 앉아 있던 감독이 조심스럽게 그를 호명했다.

 

“왜 그렇게 울어요. 보는 사람 마음이 다 짠하네.”

“죄송합니다.”

“아유, 나쁜 뜻에서 한 말 아니니까 그렇게 사과할 것 없어요. 수고하셨어요. 결과는 며칠 내로 연락이 갈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한빈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도망치듯 소강당을 빠져나왔다.

 

오디션을 망치고 말았다. 최대한 담담하게, 그러나 쓸쓸함을 담아 억누르고 절제하며 풀었어야 하는 대사인데, 감정이 과잉된 탓이다. 최악의 실수라는 생각에 자책감이 몰려든다. 그렇지만 오늘은, 오늘만큼은, 이 대사를 담백하게 연기할 수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나 때문이잖아.”

.”

그거 나 때문이잖아, 성한빈.”

아닌데.”

그래?”

 

한빈은 교정을 빠져나오며 저를 비웃던 하오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행이다. 나도 너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거든.”

.”

그냥, 우리 이러는 거 이제 좀 질려.”

.”

자그마치 8년이잖아. 질리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해.”

 

대학교 정문을 빠져나온 한빈이 마침내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차 안에서 장하오는 버석한 얼굴로 영화 대사처럼 현실성 없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성한빈 네가, 이제 그만 네 인생을 살아 줬음 좋겠어. 내 옆자리 말고, 그냥 네 자리에서.”

.”

부탁할게.”

 

한계였다. 한빈은 그대로 자리에 푹 주저앉아 고개를 떨어트렸다.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 같은 건 믿지 않았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비극조차 기꺼이 함께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을 약속하는 것이 사랑의 증명이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비극을 연주하는 그에게 유일한 낙원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래 봐야 허상에 불과한 마음들이었던 걸까. 우리 연애에 영화 같은 순정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굴던 하오를 떠올리자 눈물이 쏟아졌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창피한 줄 모르고 한참을 울었다. 주머니 속 휴대 전화가 울리고 있다는 사실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발신인은 한유진이었다. 한빈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비로소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어, 유진아.”

 

하지만 여전히,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빌어먹게도 화창한 오후였다. 저녁 노을이 질 때까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날씨마저 저를 비웃는 것만 같아서, 하오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커튼이란 커튼은 죄다 닫아 놓은 채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커피를 내렸다. 컵의 바닥을 보는 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간단한 설거지를 마치고 독서라도 할까 책을 집어 들었다가 열 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하고 덮어 버렸다. 뺀질나게 드나들던 연습실 문은 열리지 않은 지 오래였다. 이 집을 인테리어하며 최우선으로 신경 썼던 방음 부스가 무색해졌다. 부상 이후의 그는 일상을 잃었다. 그래서인지 시간은 멈춘 듯 더디게 흘렀다.

 

삶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나 지루한 것이었나. 소파에 기대어 앉아 하오는 생각했다. 유학 생활을 시작했던 유년기, 입시에 매달렸던 청소년기를 지나, 성공에 목말랐던 이십 대 초반까지 그의 매일은 쉴 틈 없이 빡빡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그치며 달려 왔다. 그 모든 게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어 주던 연인 덕분이겠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의 인연은 이 시점에서 종지부를 찍는 것이 맞았다. 더 이상 썩어 문드러지기 전에.

 

잠들기 직전의 밤이었다. 협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 놓았던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배터리는 전원이 꺼지기 직전으로 간당간당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하오는 한숨과 함께 결국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어.”

- 형, 잠깐 좀 나와 주실래요?

 

휴대 전화 너머에서 유진의 난처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하오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 그게…. 한빈이 형이요. 지금 완전 뻗었거든요. 형만 찾아요.

 

어쩐지 주변이 시끄러운 것 같더니 술집인 모양이었다.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인 이유야 묻지 않아도 알 만했고. 굳은 얼굴로 눈을 굴리던 하오는 마침내 입술을 뗐다.

 

“유진아.”

- 네?

“이제 이런 일로 전화하지 마. 나 한빈이랑 헤어졌어.”

- 무슨…. 형, 여기 어디냐면요.

“끊을게.”

 

그래도, 어디인지는 들을걸 그랬나. 그런 생각은 전화를 끊어 내는 순간에 잠깐 했다. 그러나 통화는 이미 종료됐고, 때마침 배터리가 방전됐다. 이 길만이 우리의 운명이라고 점지라도 하는 것처럼.

 

하오는 방전된 휴대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던져 버리곤 이불을 뒤집어썼다.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캄캄한 이불 속에서 한참을 뒤척이다 이따금 깨어나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그러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잠시나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선잠을 깨운 건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초인종 소리였다.

 

긴 한숨과 함께 잠에서 깨어난 하오는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불만을 피력하는 1인 시위의 주인공은 한유진이었다. 문을 열어 주자마자 쏜살같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유진이 멋대로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 마셨다. 이래서 어린애가 싫다. 하오는 미간을 찡그린 채 짝다리를 짚고 섰다.

 

“이게 뭐 하자는 싸가지야?”

“밤새 전화를 몇 통이나 했는 줄 알아요?”

“모르지. 전원 나갔으니까.”

“진짜 이대로 끝내려고 그래요?”

 

대접하지도 않은 냉수로 목을 축인 유진은 씩씩대며 쏘아붙였다. 저 애의 은근히 못돼 먹은 성질머리가 성한빈 앞에서만 유순해지는 꼴이 못마땅했을 때가 있었다. 하오는 쓸데없는 감상을 애써 털어내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유진아. 알 바야?”

“나도 오지랖 같아서 말 안 보태려고 했는데요. 솔직히 이건 좀 아니잖아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요?”

“성한빈은 내 옆에 있어 봤자야. 더 망가지기 전에 여기서 끝나는 게 나아.”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자의식 과잉 아니에요?”

 

밤새 무슨 얘길 들은 건지 유진의 기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한유진 버르장머리는 하여간 성한빈이 다 망쳐 놨다. 하오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유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차라리 잘됐다. 어차피 확인해야 할 것도 있었으니까.

 

“걔 약 먹어.”

“….”

“성한빈 약 먹는다고. 나 몰래.”

 

유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다. 하오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얼어붙어 있던 입술이 느리게 떨어질 때까지.

 

“…어떻게 알았어요?”

 

역시 그랬구나. 하오는 허무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 너도 알고 있었어?”

“형.”

“그동안 나만 병신이었구나.”

 

연주회가 끝난 뒤의 어느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한빈의 집으로 향한 하오는 한빈이 씻는 사이 식탁에서 정체 불명의 약 봉투를 발견했다. 그는 한빈이 나오기 전에 약 봉투를 슬쩍 가방에 감췄다.

 

손가락 부상으로 주치의를 찾았을 때, 그에게 가장 먼저 들이밀었던 건 그때의 약 봉투였다. 그걸 살펴본 의사는 말했다. 신체 상태가 정서에도 영향을 끼쳤을 수 있습니다.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가 않으니까요. 우울증은 언제 진단받으셨죠? 하오는 그제야 알았다. 자신의 연인 성한빈이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람 하나 병신 만든 소감이 어때?”

 

의도치 않게 공격적인 대꾸가 튀어나왔다. 흩어지는 헛웃음에 자조가 섞여 있었다.

 

“비아냥거리지 마세요.”

“듣기 싫음 나가. 안 말려.”

“형, 알잖아요. 한빈이 형은 형이 걱정할까 봐….”

“한유진.”

 

유진은 드물게 초조해하며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제가 괜히 나서서 둘 사이를 망쳐 놓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성한빈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나서는 아이니까.

 

“네가 성한빈 남자 친구야? 대신 변명할 필요 없어. 이유가 뭐였든 이제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형은 말을 왜 그렇게 해요?”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보지, 내가. 그래서 다들 나한테만 쉬쉬한 거 아니었어?”

 

유진은 패배를 직감했다.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진정하고 다시 얘기해요. 연락할게요.”

“어, 차단할게.”

“형은 진짜….”

 

신고 왔던 운동화에 발을 밀어 넣으며 유진이 한숨을 쉬었다. 받든 말든 상관 안 해요. 아무튼 저는 연락할 거니까 차단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그는 맹랑하게 덧붙인 뒤 현관문을 열고 사라졌다.

 

침실로 돌아간 하오는 밤새 꺼져 있던 휴대 전화를 충전기에 연결시키곤 침대에 주저앉았다. 한유진과 대거리를 해서 그런지 오전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두통약을 하나 삼키는 사이 휴대 전화는 전원을 켤 수 있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충전이 됐다. 하오는 전원을 켜자마자 부재중 통화 목록부터 확인했다. 한유진, 한유진, 한유진, 한유진, 한유진…, 그리고,

 

성한빈

성한빈

성한빈.

 

장하오는 세 글자의 이름을 아프게 노려보다 화면을 엎어 버렸다.

 

성한빈은 혼자 사는 법을 알아야 했다. 그동안 너무 내 등만 보고 살았으니까. 내 옆에서 시들어 갔던 거니까. 그걸 나만 몰랐던 거니까. 장하오는 쓴 한숨과 함께 아랫입술을 씹었다. 이미 부트른 입술이 아렸지만, 마음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눈을 뜨자마자 깨질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내일 없이 부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한빈은 빈속에 두통약부터 찾아 먹었다. 맹물에서마저 술냄새가 느껴지는 듯했다.

 

한빈은 휴대 전화를 더듬어 술자리를 같이한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형. 일어났어요?

“유진아. 형 어제 뭐 실수한 거 없지?”

- ….

 

휴대 전화 너머의 유진이 불길하게 뜸을 들였다.

 

- 형이 뭐 술 마시고 사고 치는 사람이에요? 별일 없었어요.

“…다행이다.”

 

겨우 한시름 놓은 한빈이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 좋은 소식 있어요.

“응?”

 

유진은 먼저 전화를 건 사람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때까지도 두통은 여전했다. 한빈은 천장을 향해 누워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했다.

 

- 어제 형 오디션 본 거요. 감독님이 마음에 들었대요. 방금 카톡 받아서 안 그래도 형한테 전화하려고 했어요.

“아….”

- 안 기뻐요?

“아니야, 기뻐.”

- 목소리가 그게 아닌데?

 

내 목소리가 왜…. 그렇게 되물을 순 없었다. 진실이 아니었으니까. 무명 배우인 주제에 오디션 합격 소식을 듣고 마음이 참담해도 되는 걸까.

 

- 장하오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아니라곤 했지만 대답이 늦다. 찰나의 간극을 눈치챈 유진이 표정을 굳혔다. 어쩌면….

 

더 망가지기 전에 여기서 끝나는 게 나아.”

 

그의 말이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지배했다. 묘하게 일그러져 있는 일상의 모양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톡 쏘아붙였다.

 

- 자꾸 질척거리는 거 진짜 매력 없을걸요.

“….”

 

날 선 자신의 말이 형 마음을 엉망으로 난도질한다는 걸 알면서도. 유진은 어렸고, 마음이 상했고, 그만큼 한빈을 아꼈고, 그래서 심술을 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착해 빠진 형은 화 한번 낼 줄 모른다. 유진은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 짜증 나요.

“미안.”

- 알면 이번 영화 진짜 열심히 준비해요. 보란듯이 성공해 버려요. 알았죠.

“응.”

 

고마워. 한빈이 희미하게 대답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전화를 끊은 다음에야 한빈은 통화 목록을 확인했다. 평온하던 눈이 휘둥그레 변한다. 말이랑 다르잖아, 한유진. 사고 같은 거 안 쳤다며!

 

장하오

장하오

장하오.

 

상대에게 남긴 부재중 전화들에 입이 딱 벌어졌다. 그리고,

 

“….”

 

지난 새벽 찍혀 있는, 제가 받지 못한 한 통의 전화.

 

장하오.

 

그 이름 세 글자에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이것부터 확인했어야 하는데. 자책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느새 두통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한빈은 떨리는 손으로 하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통화 연결음이 오래 이어지기도 전에, 하오는 거짓말처럼 전화를 받았다.

 

“형, 나….”

- 집으로 와.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빈은 한참 동안이나 끊긴 휴대 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한빈은 하오의 첫 단독 연주회 날짜가 확정됐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우리 어떤 대화를 했더라. 작은 케이크와 와인을 준비했고, 단둘이 마주 앉아 초를 켰다. 축하 노래를 부르고, 젖어 드는 눈시울을 연신 닦아 내고, 눈이 마주치면 웃고, 그러다 또 울고, 서로의 뺨을 어루만지고, 몸을 섞고….

 

그랬다. 그랬었다. 그의 성공이 제 성공이었고, 그의 행복이 제 행복이었으니까. 마음을 다해 기뻐했고, 온몸을 다해 서로를 안았다. 전신이 땀에 젖고 정신이 몽롱해질 때까지 사랑을 속삭였다.

 

낮부터 하늘이 흐리다 싶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오의 집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바짓단이 축축하게 젖어 있을 정도였다. 한빈은 초조한 기색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서늘하게 내려앉은 장하오의 까만 눈동자가 그런 한빈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는다.

 

“…형.”

 

대답보다 한숨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한빈은 왜인지 혼나는 아이처럼 주눅이 들었다.

 

“들어와.”

 

하오는 마치 초대한 적 없는 사람처럼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는 수건을 가져다 한빈에게 건네곤 소파에 걸터앉았다. 한빈이 익숙한 체취가 묻은 수건으로 옷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는 동안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있잖아.”

 

결국 한빈이 먼저 입술을 뗐다.

 

“나 오디션 합격할 것 같대.”

 

형이 내 인생을 살아 줬음 좋겠다고 했잖아. 그거,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해 볼게. 그러니까, 우리 헤어지지 말자.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목구멍이 빗물에 틀어막힌 듯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무서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결심이 무너지지 않을까 봐. 형이 이 연애에 이미 완벽하게 질려 버리기라도 했을까 봐.

 

“나 좀….”

 

꽉 막힌 목소리가 겨우 길을 튼다. 한빈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형이 나 좀 봐주면 안 돼?”

“한빈아.”

 

그런 한빈을 올려다보는 하오의 시선은 여전히 건조했다.

 

“내가 어떻게 해 줄까.”

 

꾹 틀어쥐고 있던 한빈의 손이 흠칫 떨렸다. 하오는 제 연인이었던 남자의 창백한 뺨을 들여다보며 잔인하게 물었다.

 

“축하해 줘?”

 

그것도 아니면,

 

“안아 줄까.”

 

그 말에 한빈은 마침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다. 하오는 무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불렀어. 몇 번 몸이라도 섞고 나면, 그렇게 미련까지 소진하고 나면, 그땐 남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왜 그렇게까지….”

 

한빈이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내가 사랑했던 하오 형이 맞나?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다가선 하오가 한빈의 손목을 잡아 무겁게 당긴다. 힘 빠진 몸이 딸려가자마자 어깨 위로 하오의 두 팔이 얹혀졌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하오가 한빈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이런 건 쉬워.”

 

그의 입술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벼락이 내려꽂힌 듯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한빈은 이를 악물고 그를 뿌리쳤다.

 

“들어나 보자. 도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억누르던 울분이 기어이 넘쳐 흐른다. 장하오가 원망스러웠다. 고작 이깟 시련에 사랑이 식는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위악이 아니라는 걸 납득할 수 없었다. 절망이 이별 사유가 될 수 있다면, 한빈에게는 하오를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이 수도 없이 많았다. 승승장구하는 형 뒤에서 조연 배역 하나 따 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할 때에도 애써 괜찮은 척하며 견뎌 왔던 그였다.

 

“형 솔직해져 봐.”

“….”

“그냥 나한테 쪽팔려서 그렇다고 말해.”

“뭐?”

“힘들어 죽겠으면서, 맨날 너보다 빌빌거리던 나 같은 거한테 기대기는 자존심 상해서, 그래서 나부터 버리려는 거잖아. 아니야?”

 

한빈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오는 물러지는 기색 없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너도 그랬잖아.”

“…뭐? 내가 언제 형을….”

“너도 너 버렸잖아.”

 

하오는 협탁 서랍에서 꺼낸 약 봉지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제 몸을 맞고 발치에 떨어진 것을 오래도록 응시하던 한빈이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이거 어떻게….”

 

형한테만큼은 평생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유진이도 알더라.”

“….”

“왜 숨겼어? 내 연주회에 지장이라도 생길까 봐?”

“형, 나는….”

“왜 나한테 너를 돌보게 하지 않았어?”

 

전세가 역전된다. 이제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건 하오였다. 느리게 고개를 들자, 눈시울이 붉게 달아오른 형의 얼굴이 보였다.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한빈에게 하오가 물었다.

 

“한빈아, 네가 나를 사랑해?”

“….”

“헌신하면 사랑이야?”

 

말문이 턱 막혔다. 숨기는 게 상책이라고까지 생각하진 않았어도, 그게 최선의 배려일 거라고 자기 위안 삼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다였나? 반짝반짝 빛나는 형에게 초라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랑보다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이기심은 없었나? 기실 한빈에게 그를 원망할 자격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우리 사일 곪게 만든 건 성한빈 너야.”

 

틈을 벌리고 들어온 하오의 말이 상처를 쑤셔 박고 헤집는다.

 

“그러니까 가.”

 

그렇게 말하며, 하오가 한빈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냈다. 벼랑 끝에서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추락해 수렁에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하오를 집어 삼킨 침실 문은 굳건히 닫힌 뒤였다. 뒤늦게 무릎이 꺾인다. 자리에 푹 주저앉은 한빈은 고개를 감싼 채 숨을 골랐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한빈은 바닥에 나뒹구는 약을 챙겨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형, 약 숨겼던 건 내가 미안해. 형한테는 걱정만 끼치는 것 같아서 내가…. 수정의 수정을 거듭하던 끝에 결국 메시지를 전부 삭제했다. 그리고 다시. 형, 내가 잘못했어. 삭제. 그리고 다시. 하오 형. 삭제. 그리고 다시. 있잖아, 우리 만날까? 만나서 얘기할…. 삭제.

 

결국 메시지를 전송하지 못한 채 일주일을 보냈다. 그사이 정식으로 오디션 합격 연락이 왔고 주연 배우로서의 첫 미팅이 잡혔다.

 

“성한빈 씨 레드카펫 걸을 준비 됐어요?”

 

긴장해서 연신 생수를 들이키는 한빈에게 작가가 농담을 던졌다. 나란히 앉은 감독과 작가는 이번 캐스팅이 꽤나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우리 이걸로 천만 갈 거거든.”

“작가님 욕심이 과하시네.”

“감독님, 남자가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장난스레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한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있잖아, 형.

 

“아직 소속사 컨택은 안 해 봤죠? 염두에 두고 있는 곳 있나?”

“아뇨, 아직….”

“이쪽 인맥 좀 있는 거 아니었어요? 오디션 누구 추천이었지?”

“그, 한유진이라고. 제 대학교 후배예요.”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형은 나한테 어떤 조언을 했을 것 같아?

 

“그런 거면 우리가 주선 좀 해 줄까요? 계약도 회사 끼고 하는 게 더 편할 거예요.”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긴장하지 말라고? 혹은 이 순간을 즐겼으면 좋겠다고? 그것도 아니면… 나는 한빈이 네가 인정받을 줄 알았다고 했으려나.

 

“한빈 씨 출연한 독립 영화들 몇 개 찾아봤는데, 눈빛도 좋고 연기도 잘하던데요. 왜 여태 아무도 발견을 못 했지? 우리 입장에서야 럭키지만. 대본 쓰면서도 신인 배우가 맡아 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작가님. 주접은 조금만 짧게.”

“내가 너무 주책맞았나?”

 

어쩌면 제발 현재에 집중하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마저 형 생각만 하고 있네. 평생 꿈꿔 왔던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말이야. 한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대본 리딩 때 뵙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제가 더 잘 부탁드립니다.”

 

그 미팅 자리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었는지, 돌이켜 보면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나오던 길의 햇살이 눈부시다는 생각과, 형이 보고 싶다는 생각, 뭐 그런 걸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빈은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일주일 간 메시지 한 통 보내지 못했던 하오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걸었던 건 반쯤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통화 연결음이 울린 지 오래 지나지 않아 하오는 전화를 받았다.

 

- ….

 

그러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

- ….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해 줄 법도 하지 않나. 하여간 고집 센 남자였다.

 

“형.”

 

결국 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있잖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휴대 전화 너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자신감이 급감한다. 한빈은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머리를 굴렸다.

 

“약 먹는 거 숨겼던 건…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안 그럴게.”

- ….

“나 혼자 이겨내려고 안 할게. 아니, 그것보다 건강할게. 배려하겠답시고 설쳐서 형 걱정 끼치는 일 없게 할게. 그리고 나 지금은 그때보다 많이 호전돼서….”

- 또 거짓말.

 

마침내 들려온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지적한다. 한빈은 차마 변명하지 못했다.

 

“…안 그럴게. 근데 형, 나 있지. 지금 형이 너무….”

 

보고 싶다고, 그렇게 고백하려던 때였다.

 

“저기요.”

“네?”

 

누군가 한빈의 앞을 슬그머니 막아섰다. 형, 잠깐만…. 한빈은 휴대 전화 너머의 하오에게 그렇게 속삭이고 고개를 들었다. 해사한 얼굴의 낯선 여자가 빙글빙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통화하시는데 죄송해요. 아까부터 쭉 지켜봤는데… 이대로 놓치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여자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하오에게도 들렸을 것이다. 한빈은 어찌할 바 모르고 우물쭈물하느라 음소거를 누르지도 못한 채 서둘러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저 만나는 사람이 있어서요.”

“아, 아니에요. 그럴 것 같았는데 혹시나 하고 용기내 봤어요.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여자는 산뜻하게 인사하고 떠나갔다. 자리에 남겨진 한빈은 서둘러 휴대 전화를 다시 들었다.

 

“형, 미안해. 갑자기 누가 말을 걸어서….”

 

장하오는 질투심이 많았다.

 

왜 쓸데없이 웃어 줘?”

? 그야나는 카페 알바생이고, 저 사람은 손님이니까?”

나도 손님이야.”

에이, 형은 손님이 아니라 애인이지.”

 

대학 시절 그가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에 방문할 때마다 어김없이 뾰로통해져서는 종일 심통을 부리곤 했다.

 

, 내가 유명해져서 TV에 나오고 그러면 사람들한테 웃어 줄 일 연속일 텐데 어떡해?”

.”

? 왜 대답이 없지?”

그건 참아야지. 한빈이가 꿈꾸는 일이니까.”

착하네, 장하오.”

 

애써 그렇게 대답했어도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애먼 데만 노려보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오늘의 장하오는….

 

- 그래서, 할 말 끝났어?

 

분명 낯선 목소리를 다 들었을 텐데도 그런 것따윈 중요하지 않다는 투였다.

 

“있지, 형.”

 

마음이 가라앉는다. 핏기가 사라진 듯 손발이 차디찼다. 한빈은 문득 걸음을 멈춘 채 쓸쓸한 얼굴로 힘겹게 입술을 뗐다.

 

“그때 그 말….”

 

어쩌면 이제, 현실을 직면해야 할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이러는 거 이제 질린다는 말…, 진심이었어?”

- 어.

 

장하오의 마음이 전과 같지 않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오랜 침묵 끝에, 인사도 없이 전화가 끊긴다. 까맣게 꺼져 버린 화면이 뜨거워질 때까지도 한빈은 휴대 전화를 내리지 못했다.

 

 

 

 

캐스팅 기사가 공개됐다. 대본 리딩을 마쳤고, 감독 소개로 알게 된 소속사와 계약 조율에 들어갔으며, 크랭크인 일정도 전달 받았다.

 

“서프라이즈!”

 

카페에 나타난 규빈의 손에는 풍성한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뭐야?”

 

놀란 얼굴로 묻자 규빈은 한빈의 품에 꽃다발을 안겨 주며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사심 아니고요.”

“의심도 안 했거든.”

“캐스팅 축하 드려요. 기사 봤어요.”

“고마워.”

 

한빈은 꽃다발에 고개를 파묻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진짜 왜 저래. 질색하는 목소리에 푸스스 웃음을 터뜨린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뭐 마실래? 형이 살게.”

“저 비싼 거요.”

“오, 마침 이 카페는 아아가 단돈 5억.”

“…아저씨 같아.”

 

인상을 찌푸리며 타박했지만, 규빈은 한빈이 최선을 다해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규빈 몫의 음료와 디저트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온 한빈은 빨대까지 손수 꽂아 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는 확실히 평소보다 무리하고 있었다.

 

“곧 출국이지?”

“그렇죠, 뭐.”

 

규빈은 한빈이 시켜 준 음료를 쭉 빨아 올리며 생각했다. 과하게 밝은 척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형, 진짜 괜찮아요?”

“응? 뭐가?”

 

영문을 모르는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응?”

“아, 설마.”

 

규빈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한빈은 그가 당황한 이유가 하오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무슨 일인데. 괜찮으니까 말해 봐.”

“…하오 형 말이에요.”

 

예상이 맞았다. 그런데,

 

“저랑 같이 출국하잖아요.”

 

이런 전개는 반칙이지 않나.

 

“….”

“….”

“…몰랐어요?”

“아니, 어. 응? 어…. 몰랐… 어. 몰랐나 봐, 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고 회로가 정지된 듯한 한빈의 대답에 규빈은 안쓰럽다는 듯이 웃었다.

 

한빈은 창백해진 얼굴로 음료를 마셨다.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데 하필이면 명치에 자존심이 딱 걸려서…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런 한빈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규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재활 치료 받으러 가요. 저 사는 지역 병원에 비슷한 케이스 재활 기간을 혁신적으로 줄인 사례가 있다고 해서요.”

“그래? 어…, 그렇구나.”

 

한빈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규빈의 말이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은 탓이다. 장하오가 한국을 떠날 거라고. 더는, 보고 싶어도 당장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 버린다고. 귀가 먹먹하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한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는 규빈을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나 지금 연습실 나옴 16:19

카페 도착

기자님은 아직 16:50

안읽씹

(화난 이모티콘) 16:53

인터뷰 하고 올게.. 17:02

 

중국 남자는 원래 이렇게 집착이 심한가. 그건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빈이 알고 있는 유일한 중국 남자는 그랬다. 아르바이트 중에는 연락을 할 수 없다는 당연한 설명에도 기분을 풀어 주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평범한 날 불쑥 스마트 워치를 사다 한빈의 손목에 채우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카톡 제때 확인할 수 있겠다.”

이거 차 봤자 답장하긴 힘들걸?”

읽기만 해도 돼.”

아니, 형이 무슨 분리 불안 강아지도 아니고.”

 

한빈은 투덜거리면서도 그날 이후 웬만해선 스마트 워치를 풀지 않았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나서도 스마트 워치를 차고 있지 않으면 손목이 허전할 정도였다.

 

이기적인 장하오. 그렇게 나를 들들 볶았으면서 이제 만날 수도 없는 곳으로 가 버린다니. 괘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한빈은 필기로 가득찬 영화 대본을 눈이 아프도록 읽고 또 읽었다. 이미 머리에 완벽하게 입력된 내용인데도 집요하게 반복했다. 비단 연기 욕심 때문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장하오가 밀려 들어와 그의 온 정신을 잠식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랫입술을 하도 씹어 피가 비칠 만큼 너절해졌다. 한빈은 엎어 놓았던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부재 중 연락은 없었다. 하지만,

 

월요일 두 시 비행기예요.”

나 안 물어봤는데, 규빈아.”

알아요. 그래도, 혹시나 해서요.”

 

규빈이 했던 말이 도무지 잊히질 않아서….

 

현재 시간 11시 38분. 장하오는 공항에 도착해 있을까.

 

한빈은 대본을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날씨는 야속하게도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초조하게 다리를 떨고, 부자연스럽게 눈을 깜빡이고, 기어이 비상용 안정제가 든 약통을 손에 쥐었다 놓았다.

 

“씨발.”

 

결국 불가항력이라는 것을 사실은 알고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달려나가 택시를 잡았다. 택시가 인천 공항으로 달리는 내내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듯했다. 잔돈은 됐어요. 택시비를 현금으로 지불한 한빈은 숨 돌릴 틈 없이 공항으로 달렸다.

 

벌써 출국장에 들어갔을까? 짓무른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망할 장하오는 받아 주지 않았다. 결국 한빈은 쪽팔림을 무릅쓰고 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 형?

“너 지금 어디야.”

- 네? 아…. 잠시만요. 카톡할게요.

 

눈치 빠른 규빈이 상황을 파악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오에게 들켜 일을 망칠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김규빈

저희 공차에 있어요 12:21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걸음을 재촉했다. 등 뒤로 땀이 비질비질 흐르는 게 다 느껴졌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도착한 공차 매장에서 한빈은 두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머리를 굴렸다. 어쩌면 지금쯤 출국 심사대로 향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정신없이 인파를 헤집으며 헤매일 때였다.

 

“….”

 

마침내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장하오!”

 

한빈은 망설이지 않았다. 나란히 걷던 규빈과 하오가 동시에 뒤를 돌아본다. 잠깐 얘기 좀 하고 와요. 규빈은 하오의 등을 떠밀곤 슬쩍 자리를 피했다.

 

“너 가면….”

“….”

“형 너 거기 가면…, 카톡도 제때 못 읽는단 말이야.”

 

그런데도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딴 거였다. 우리 다른 시간에 있게 되니까, 나는 형 네가 뭘 하고 지내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게 된다고. 우물우물 내뱉는 말이 제대로 전해질 리 만무했다. 성한빈은 울고 있었으니까.

 

“한빈아.”

“….”

“이제 안녕 해.”

 

그런 한빈을 물끄러미 보던 하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듣고 싶었던 목소리로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건넨다.

 

“그동안 힘들었잖아. 그래도 마지막에는 웃으면서 인사하자.”

“제발 영영 안 돌아올 것처럼 말하지 마.”

“시사회 못 가서 미안해. 그런데, 앞으로 쭉 나는 못 갈 거야.”

 

가장 기쁜 순간에도, 어쩌면 슬픈 순간에도, 이제는 함께해 주지 못할 거라고 선언하는 듯한 그가 미웠다. 좋아하는 만큼 미웠고, 미워하는 만큼 좋아했다. 그런 마음이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균열의 시작점을 찾기 위해 기억을 헤집을수록 속이 같이 뒤집혔다. 진작 성공했다면 모든 걸 버리고 기꺼이 그를 따라나설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형이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가정 따윈 필요없었다. 그러지 못해서 그가 저를 떠나려는 게 당장의 현실이었으니까.

 

“악수할까?”

 

하오는 초연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눈물 맺힌 망막으로는 그의 다부진 손조차 선명하게 담을 수가 없었다.

 

“…아니.”

“….”

“나 진짜 안 될 것 같아, 형.”

“….”

“제발….”

 

뜨거운 눈물이 뺨을 적신다. 허공에 내밀어진 손이 잘게 떨렸다. 한빈은 하오가 내민 손을 잡는 대신 그의 옷소매를 그러쥐었다.

 

“가지 마.”

“….”

“가지 마, 장하오.”

“….”

“아직 나 사랑하잖아.”

“….”

“사랑한다고 해.”

“….”

“사랑한다고 해 줘.”

“….”

“사랑해.”

“….”

“형 마음이 부족해진 거면 내가 더해서 채울게. 그러니까….”

“한빈아.”

 

하오는 애원하는 내내 조금씩 허물어지는 한빈의 어깨를 잡았다. 아프지만 단호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해야 할 말을 했다.

 

“나는 가야 돼.”

“나도….”

“너는 여기 있어야 되고.”

“….”

“우리는 헤어지는 거야.”

 

한빈의 몸을 지탱해 주던 하오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한빈은 허망한 눈으로 제게서 등을 돌리는 하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걸음을 떼어놓는 순간 선언했다.

 

“이대로 가면 진짜 끝이야.”

 

울먹이는 목소리로. 발음은 다 뭉개져선.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협박을 던진다.

 

“끝이라고…. 장하오….”

 

그러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매정한 뒷모습이 눈에 아프게 박혔다. 그게 공항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괜찮아요?”

“뭐가.”

 

옆자리에 탄 규빈이 걱정했지만 하오는 일부러 표정을 감추며 안대와 헤드폰을 꺼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겠다는 듯 깜깜한 어둠 속으로 스스로를 차단시킨다.

 

“좀 잘게.”

 

그 한 마디에 결국 규빈은 하려던 말을 삼킨 채 한숨을 내쉬었다.

 

하오는 등받이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팔짱을 끼운 채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이 혹시라도 옆사람에게 티가 날까 봐. 그래서 성한빈이 알게 될까 봐 그랬다.

 

가지 마.”

 

흔들리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모진 말을 해서라도 체념시키는 게 맞았다. 걔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거든. 내 한 마디면 당장이라도 한국에 있는 모든 걸 버리고 따라나설 게 뻔했거든. 그걸 어떻게 두고 봐.

 

성한빈은 장하오를 사랑했고 동시에 연기를 사랑했다. 성한빈은 장하오를 꿈의 정상으로 인도해 준 은인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그런 연인에게, 그런 사랑에게 어떻게 나를 위해서 네 꿈을 포기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우리는 헤어지는 게 맞아.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듯 되뇌었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도착한 로스앤젤레스는 지나치게 밝고 화창한 도시였다.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규빈이 사는 주택에서 동거하기로 했다. 따로 살 곳을 알아보겠다고도 했지만 규빈은 어차피 층을 다르게 사용해 크게 불편하지 않을 거라고, 그동안 혼자 사는 게 적적했는데 오히려 잘됐다고 만류했다. 사실은 하오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외지에서 혼자 생활했다면 그 애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을 테니까.

 

한국에서 가져온 짐을 정리하고 마트에서 생필품을 샀다. 지인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된 재활의학과 교수와 면담하고, 회복 플랜을 세워 나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잠시 틈이 생길 때면 혼자 집에 있기는 싫어 모자를 눌러 쓰고 조깅을 나갔다.

 

어느 날은 차를 끌고 무작정 해변으로 향했다. 넓은 바다를 보면 답답한 속이라도 풀릴까 해서. 하염없이 길을 따라 걷던 하오의 눈을 사로잡은 건 하필이면 바이올린 버스킹이었다. 딱 달라붙는 티셔츠에 루즈한 카고 바지를 입은 연주자는 정형화된 바이올리니스트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현이 끊어져 나가도록 활을 움직였다.

 

형, 뭘 그렇게 봐?

 

아, 환청인가. 거기 보지 말고 잘생긴 애인 얼굴을 한 번 더 보지? 성한빈이 옆에 있었다면 그렇게 말했을까. 혹은 말 없이 손을 잡아다 깍지를 끼우고 가만히 위로해 줬을까. 애써 시선을 돌리면 저 멀리 아득한 수평선이 눈에 들어온다. 하오는 그 너머에 있을 한빈을 생각하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너를 잊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만했다. 그래도 숨은 쉴 수 있을 거라고. 너와 헤어져도 지구는 공전하고, 시간은 흐르고,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각자의 세상에서 괜찮아질 거라고 예단했다. 왜 그렇게 미련한 생각을 했던 걸까.

 

그래, 내가 졌다. 하오는 순순히 패배를 시인하며 휴대 전화를 들었다. 잊혀지지 않는 열한 자리의 숫자 앞에 국가 번호를 붙이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휴대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건….

 

-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오는 화면을 확인했다. 눈에 보이는 번호는 정확했다. 성한빈이 전화번호를 바꿨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거였다. 다행이다. 나처럼 구질구질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너라도 마음을 정리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나만큼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다.

 

절망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당장 그 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갈 수도 없는 머나먼 도시에서, 하오는 언제나 다정했던 한빈의 목소리 대신 딱딱한 음성 안내를 반복해 들었다.

 

처음에는 영화 같은 현실에 웃음이 나왔다. 노을 지는 바다를 하염없이 응시하던 그의 표정은 차츰 일그러졌다. 울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자격도 없었다. 뼈아픈 후회도 뒤늦은 절망도 제가 끌어안아야 할 책임이었다.

 

하오는 그저 다시 한번 휴대 전화를 들어 익숙한 번호를 고집스레 입력했다.

 

- 지금 거신 전화는….

 

그게 성한빈이 주는 벌이라면 달게 받고 싶었다.

 

 

 

 

“형, 설거지 그냥 둬요. 내가 이따 한다니까?”

“그냥 하고 싶은 사람이 하면 되지.”

“아니, 그건 그런데 형이 자꾸 이러니까 내가 쓰레기 같잖아요?”

“쓰레기 좀 되면 어때. 바쁜 사람은 그래도 돼.”

“…보통 이럴 땐 아니라고 해 주지 않나?”

 

김규빈은 그렇게 상성이 맞는 동거인은 아니었다.

 

저녁을 먹자마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하오를 발견한 규빈이 안절부절하며 곁을 서성인다. 하오는 어질러진 꼴을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규빈은 1분만을 입에 달고 사는 쪽이었다. 그럼 내가 치우면 되지. 하오는 간단하게 생각했고, 덕분에 규빈은 번번이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게 이들이 시시때때로 티격태격하는 이유였다.

 

그럴 때마다 하오는 생각했다. 한빈이랑도 정식으로 안 해 본 동거를 얘랑 하고 있네. 언젠가 결혼하게 되면 이런 말다툼 같은 걸 꼭 해 보고 싶었는데. 이러고 있는 상대가 고작 김규빈…. 하오는 마지막 그릇을 헹궈 건조대에 올려놓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뭐요. 왜요.”

 

그걸 저에 대한 불만으로 간주했는지 규빈이 뒤로 펄쩍 뛰며 경계했다. 얜 왜 이래? 그런 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하오가 젖은 손을 마른 수건에 닦으며 제안했다.

 

“좀 뛸까?”

“콜.”

 

상성 안 맞는 동거인과 개중 잘 맞는 것 하나는 밤 산책을 좋아한다는 것. 두 남자는 캡 모자를 하나씩 눌러 쓰곤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집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규빈은 혼자 살 때 음악을 들으며 이 공원을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녔다고 했다. 왜 그랬어? 외로워서요. 한국에 돌아가고 싶을 때마다 그냥 뛰었어요. 잡생각 다 사라지라고. 덤덤한 대답에 하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 힘들었겠네. 아, 그걸 말이라고.

 

“형은 어때요?”

 

공원을 한 바퀴 돌았을 무렵이었다. 잠시 멈춰 선 규빈이 턱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물었다.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아도 규빈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럭저럭.”

“무슨 대답이 그래.”

“살 만해.”

“….”

“진짜야. 괜찮지 않으면 내가 여기 있겠어? 한국 갔지.”

 

흐음. 규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하여간 의심은 많아서. 하오는 가지고 나온 물통으로 입을 축이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요? 그 영화, 오늘 개봉한다던데.”

 

순식간에 따라붙은 규빈이 물은 적도 없는 소식을 전했다. 하오는 대답 없이 뛰기만 했다. 규빈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 속에 러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잘 자요. 어, 너도. 각자의 샤워실로 흩어지기 전 건조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방으로 들어온 하오가 모자를 벗어 던지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깊은 모자 아래 가려져 있던 눈이 아슬아슬하게 일렁거렸다.

 

하오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럭저럭은 무슨. 하나도 괜찮지 않으면서 센 척은. 하오는 휴대 전화를 꺼내 다시 익숙한 번호를 누른다. 없는 번호라는 음성 안내는 여전했다.

 

혀엉. 오늘도 연주하느라 고생했어. 피곤하지. 마사지해 줄까?”

 

한빈이는 다정한 남자 친구였다. 괜찮다고 여러 번 만류해도 고집스레 제 위로 올라타선 뻣뻣해진 등 근육을 꾹꾹 마사지해 줄 때면 늘 미안하고 고마웠다.

 

, ?”

으응, 아니.”

무슨 대답이 그래.”

잠 안 와.”

그럴 줄 알았어.”

?”

그럼 우리 산책 갔다 올까?”

 

연주회가 끝난 밤이면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그를 위해 한빈은 일부러 잠들지 않고 기다렸다가 새 벽 두 시쯤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리고 여름이든 겨울이든 상쾌하다 못해 시린 새벽 공기를 마시며 함께 걷다가 돌아와 서로를 끌어안고 잠들곤 했다. 사실은 잠이 무척 많은 너였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날, 남몰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던 것 같다.

 

이렇게 쉽게 저버리게 될 줄 알았다면 맹세 같은 건 하지 말걸 그랬지.

 

형 솔직해져 봐.”

 

하오는 쓰게 웃었다.

 

그냥 나한테 쪽팔려서 그렇다고 말해.”

?”

힘들어 죽겠으면서, 맨날 너보다 빌빌거리던 나 같은 거한테 기대기는 자존심 상해서, 그래서 나부터 버리려는 거잖아. 아니야?”

 

그때 한빈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에게 한빈은 언제나 대단한 사람이었다. 단 한번도 한빈이 빌빌거린다거나, 초라하다고 여긴 적 없었다. 다만, 솔직히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다. 잘하는 건 바이올린 하나뿐이던 나의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나를 위해 희생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전부 다. 그렇게 그 애를 내 옆에 무기력하게 눌러 앉히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존심이 다 뭐라고. 그거 하나 버리고 손 내밀었다면 기꺼이 잡아 주었을 텐데. 그 착한 애한테 상처까지 줘 가면서….

 

하오는 주먹을 틀어쥐었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그 애를 향한 그리움만큼은 불치인 듯했다. 재활에는 차도가 없었고, 하오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모든 걸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버텨야만 했다. 정상 궤도에 오른 한빈의 일상을 흔들어 놓고 싶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 예의라고 여겼다.

 

“冰…。”

 

홀로 서기가 필요한 건 그 애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하오는 소리 없이 자책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한빈의 첫 단독 주연 영화는 관객 수 오백 만을 넘겼고, 한빈은 그해 청룡영화상 남우신인상을 수상했다. 그걸 계기로 유명 드라마 작가의 로맨스 드라마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한 그는 시청률 20프로를 넘기며 라이징 스타로 급부상했다.

 

하오는 이제 유튜브만 틀어도 한빈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한빈은 영화, 드라마는 물론 각종 예능 프로그램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으며 여기저기 얼굴을 비쳤다.

 

- 요즘 인기가 어마어마해요, 성한빈 씨.

- 아무래도 배역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다들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 너무 겸손한 발언 아니에요?

 

어느 날 하오는 한빈의 인터뷰를 발견했다.

 

- 드라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극중 한빛이는 혜지한테 이별 통보를 받잖아요. 그래도 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혜지한테 직진했단 말이죠. 막 지구 끝까지 따라갈 기세였잖아요?

- 그게 한빛이 매력이죠.

- 만약 한빈 씨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한빛이랑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 아, 저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한빈은 생각이 많아진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말을 고르던 한빈은 이윽고 선선한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 저는요. 음. 그냥, 거기까지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 그래요? 의외의 답변인데요?

- 그러니까 제가 이미 몇 번 붙잡았는데도 거절했다면요. 그건 그냥 이유가 뭐였든 저를 그만큼은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서요.

- 맞아. 사실 그게 맞지. 드라마는 다 판타지야.

- 그리고 깨끗하게 잊어 줄 것 같은데요. 그게 저를 버린 사람에 대한 최선의 복수라고 생각해요.

 

하오는 화면 너머의 한빈을 멍하니 바라보다 영상을 껐다.

 

 

 

 

2年 後.

 

“드디어 귀국이네요.”

 

미국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한 규빈의 얼굴은 꽤나 시원섭섭해 보였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형.”

“너야말로.”

 

한국으로의 귀국을 결심한 것은 하오도 마찬가지였다.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주자로 복귀할 만큼의 회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재활 센터의 의견이었다. 그다지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차라리 희망 고문에서 벗어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미국에서의 공부를 완전히 마치고 거취를 고민하는 규빈과 동시에 한국행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도 천운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국이었다. 아직 처분하지 않은 하오의 한국 집에, 이번에는 규빈이 잠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주기적으로 사람을 고용해 치워 둔 덕에 집은 2년 만에 돌아온 것치곤 멀끔했다.

 

“그래서 형은 다음 플랜이 뭐예요?”

 

짐을 풀다 말고 지쳐 거실에 널브러진 규빈이 식사를 준비하는 하오를 흘끗 올려다보며 물었다.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 식탁 위에 올린 하오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교습소를 열까 해.”

“나쁘지 않네.”

“너는?”

“저는 일단 좀 놀려고요. 그동안 체질에도 안 맞는 공부를 너무 했어.”

 

쭉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난 규빈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하오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내일 같이 외출할래요?”

“데이트하자고?”

“농담도. 저 아는 감독님 영화 시사회 있거든요. 초대 받았는데 같이 가요.”

 

하여간 친화력이 좋았다. 그 오랜 유학 생활을 하면서 한국에 있는 지인들까지 살뜰하게 신경 쓰는 성정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저로서는 절대 못할 짓이었다.

 

“교습소도 완전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느니 인맥 좀 늘려서 소개도 받고 하면 좋잖아요. 장하오 돌아왔다고 입소문 좀 내야지.”

“내가 뭐라고 그런 소문이 나겠어.”

“왜 갑자기 겸손한 척?”

“일단 밥이나 먹자.”

 

영 내키지 않는 듯한 반응에 규빈은 식탁에 앉으며 열변을 토했다.

 

“내가 볼 때 형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있어. LA에서도 내내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잖아요.”

“거기 놀러 간 게 아니잖아, 내가.”

“아니, 알지. 형 속 시끄러웠을 것도 알지. 그래도 이제 한국 왔으니까 기분 전환 좀 하라는 거죠.”

“…알았어.”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설득할까. 하오는 어느새 친동생 같아진 규빈을 바라보다 마지못해 승낙했다. 사실은 어쩌면… 성한빈도 거기 올까, 그런 기대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염치 없는 바람이었지만. 하오는 씁쓸하게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운명적인 재회 같은 건 없었다. 규빈과 나란히 상영관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하오는 문득 허탈해졌다. 뭘 기대했던 거야. 조명이 암전되는 순간 스스로를 질책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영화는 잔잔한 분위기의 휴먼 드라마였다. 자극적인 전개는 없었지만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 끝이 궁금해지는 영화였다. 하오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여운에 젖어 있었다.

 

“어땠어요?”

“좋았어.”

“솔직하게 말해 봐요. 좀 지루했지?”

“너 지루했구나?”

“티 나요?”

 

하오에게 농담을 건네며 낄낄거리던 규빈이 목을 길게 빼고 앞쪽을 두리번거렸다.

 

“아, 감독님한테 인사해야 되는데…. 지금은 무리겠다. 우리 뒤풀이 들렀다 가요.”

“…뒤풀이까지?”

“에? 기껏 왔는데 얼굴 도장 찍어야죠.”

 

규빈은 잔말 말라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앞장섰다. 시사회 뒤풀이 장소는 근처의 와인 바였다. 감독님 돈 좀 쓰셨나 보네. 꽤나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규빈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규빈은 하오와 함께 자리를 잡자마자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느라 바빴다.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고, 하오를 형식적으로 소개시키고, 대화가 이어지다 보면 또 다른 사람이 합류해 알은체했다. 결국 오래 지나지 않아 규빈이 자리를 떠나고, 테이블에 홀로 남은 하오는 묵묵히 안주를 축내며 와인을 홀짝거렸다.

 

“앉아도 돼요?”

 

그때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맞은편 의자를 잡으며 물었다. 배우인가. 한눈에 보기에도 훤칠한 남자를 올려다보던 하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씩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백승호예요.”

“장하오입니다.”

“어?”

“….”

“바이올리니스트 아니에요?”

“…저를 아세요?”

“네, TV에 나오신 적 있지 않나요?”

“아….”

 

이곳에서 저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옛날 일인데요. 뒤늦게 덧붙였지만 승호는 그런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잔에 와인을 따르고 건배를 제안했다.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붙임성 좋은 남자네. 얼결에 잔을 부딪히며 하오는 생각했다.

 

“연주회 준비하시는 거예요?”

 

사정을 모르는 승호가 아무렇지 않게 하오의 상처를 후벼팠다. 어쩌면, 앞으로 숱하게 겪어야 할 상황이었다. 와인을 한 모금 넘긴 하오는 최대한 의연하게 대답했다.

 

“이제 바이올리니스트 아니에요. 부상당해서.”

“…몰랐어요. 죄송해요.”

“대신 교습소 오픈하려고요.”

“저도 악기에 관심 있는데. 나중에 오픈하면 배우러 가도 돼요?”

“그럼요.”

 

하등 의미없는 스몰 토크라는 것을 알았다. 하오는 적당히 대꾸하며 대외용 미소를 유지했다. 그때였다. 저와 대화를 나누던 승호의 시선이 어느 순간 엇나가나 싶더니, 어딘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왜 이제 와?”

 

그는 장난스레 타박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익숙한 체취가 먼저 하오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테이블에 성큼 다가선 남자가 승호와 악수하며 서글서글하게 대꾸했다.

 

“스케줄 때문에요. 나도 영화 보고 싶었는데.”

“감독님한테 인사는 드렸어?”

“네, 방금 얼굴 봤어요. 정신없으시던데요?”

“오늘 주인공이시잖냐. 아, 여기 앉아. 하오 씨, 괜찮죠?”

 

하오는 제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짜 허락을 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는지, 승호는 동시에 지인을 제 옆자리로 안내했다. 하오는 당황한 얼굴로 허둥거리다 와인을 쏟았다.

 

“괜찮아요? 좀 취하셨나?”

 

승호가 곤란한 얼굴로 하오를 살폈다. 그사이 동석한 남자가 티슈를 뽑아 쏟아진 와인을 수습했다. 하오는 그 사람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하오 씨?”

“….”

“아, 설마 한빈이는 알아요? 나는 모르는 것 같더니.”

“대한민국에 형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있더라. 여기 장하오 씨.”

 

설마 그럴 리가. 와인을 치우던 한빈이 맑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곤 눈을 들어 하오와 눈을 마주친다.

 

“….”

“….”

“너 알지? 바이올리니스트…. 아니, 바이올리니스트셨던 장하오 씨.”

 

눈을 깜빡이는 한빈의 표정에선 어떠한 감정도 읽기 어려웠다. 하오는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한빈아. 그렇게 부르기도 전에, 한빈이 입꼬리를 올렸다.

 

“유튜브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곧 교습소 오픈하실 거래.”

“그래요?”

“너 다음 역할이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하지 않았어? 선생님 아직 못 구한 거면 하오 씨한테 부탁드리면 되겠다.”

“혀엉. 저 아직 인사도 제대로 안 드렸는데 진도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변죽 좋은 승호의 주선에 한빈이 그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하오는 그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 먼저 손을 내민 쪽은 한빈이었다.

 

“안녕하세요. 성한빈입니다.”

 

- 깨끗하게 잊어 줄 것 같은데요. 그게 저를 버린 사람에 대한 최선의 복수라고 생각해요.

 

어느 날 보았던 한빈의 인터뷰가 오버랩된다. 하오는 그제야 허무하게 웃어 버리며 한빈의 손을 맞잡았다.

 

“장하오입니다.”

 

산뜻하게 악수하고 떨어지는 손에서는 그 어떤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한빈이 바이올린 가르쳐주실 거예요?”

 

승호가 생글생글 웃으며 묻는다. 형, 오늘따라 왜 이렇게 하이 텐션이야?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린 한빈이 안주로 나온 과일을 입에 쏙 넣으며 하오를 향해 물었다.

 

“생각 있으시면 연락 주실래요?”

“…네.”

 

한빈은 매니저의 것으로 보이는 명함을 꺼내 제 이름과 번호를 휘갈겨 하오에게 건넸다. 처음 보는 열한 자리의 숫자를 하오는 그 자리에서 외웠다.

 

“형, 나 강 선생님한테 아직 인사 못 드려서.”

“어, 그래. 저쪽 테이블에 계시더라.”

“갈 때 연락할게요.”

“오케이.”

“연락 주세요, 하오 씨.”

 

정신을 쏙 빼 놓은 한빈이 눈짓으로 인사하곤 자리를 떠났다.

 

폭풍우가 휘몰아친 듯한 느낌이었다.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하오는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명함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와, 나 많이 마셨나 봐. 왜 기억이 없지. 나 뭐 실수한 거 없어요?”

“그냥 내 등에 업혀 왔다는 거?”

“…미안해요, 진짜.”

 

다음 날 깨어난 규빈은 황당한 얼굴이었다. 아는 사람 만날 때마다 신나서 술을 부어 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고주망태가 된 규빈을 챙겨 집으로 돌아온 건 하오였다.

 

“형, 근데….”

“응.”

“어제 한빈이 형 왔었다는데… 봤어요?”

“…아니.”

 

티 나는 거짓말일 게 분명했지만, 규빈은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미국식으로 햄버거 시켜 해장한 규빈은 오전부터 약속이 있다며 나가 버렸다. 어쩌면 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오는 커피 한 잔과 함께 소파에 앉아 전날 받은 명함을 꺼내 들었다. 매니저 이름 위에 쓰여져 있는 성한빈 세 글자와, 열한 자리의 번호를 본다.

 

연락해도 될까.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건 아닐까. 상처 주며 밀어낸 주제에 이제 와서 몰염치하지 않나. 그래도, 목소리 한 번만 들어 보면 안 될까. 없는 번호라는 음성 안내 대신, 그 애 목소리를 딱 한 번만….

 

거기까지 생각이 이렀을 때 그의 손은 이미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통화 연결음이 들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네, 여보세요?

 

꿈에 그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마침내 마음이 놓인다.

 

“나….”

 

하오는 목이 메어 한 차례 헛기침을 해야 했다.

 

“나야. 장하오.”

- 아….

 

다짜고짜 반말을 하시네. 휴대 전화 너머에서 한빈이 재미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깨끗하게 잊어 주겠다던 그의 말에 어디까지 장단을 맞춰 줘야 할지 몰라, 하오는 잠시 침묵했다.

 

- 바이올린 강습 때문에 전화 주신 거죠?

“….”

- 하오 씨?

“…네.”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인 듯 대하는 한빈의 태도가 낯선 것은 당연했다. 우린 아주 오래된 인연이었으니까. 알고 지내기 시작한 이래 그 어떤 순간도 서로가 어색했던 적이 없으니까.

 

- 전화로 말고 한 번 만날까요? 그때 워낙 짧게 봬서.

“그래요.”

- 이따 한 네 시쯤? 카페에서 보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네.”

 

얼결에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예기치 못한 전개에 얼굴이 사색이 된다. 정신없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샤워를 하고,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미용실에 진작 다녀올 걸 후회했다. 심장이 온몸에서 뛰는 듯했다.

 

한빈이 메시지로 보낸 주소지의 카페에 도착한 건 세 시가 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마음을 가라앉힐 요량으로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잔을 들어 올리는 손이 떨려서 하오는 제가 생각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커피 한 잔을 비우고,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처음 온 사람처럼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 카페 문이 열렸다.

 

“….”

 

캡모자를 깊게 눌러쓴 한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자신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얼굴이 밝았다.

 

“또 뵙네요, 하오 씨.”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호칭이다.

 

“하오 씨?”

“….”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음. 뭐 마실래요? 늦었으니까 제가 살게요.”

“같은 걸로요.”

“내가 뭘 마실 줄 알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실 거잖아요.”

“어떻게 알았지.”

 

하오는 한빈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오는 길에 살짝 달렸는지 가볍게 홍조가 오른 뺨이 여전히 사랑스럽다. 모자를 한 차례 다시 눌러쓴 한빈은 계산대를 향해 사라졌다가, 커피를 픽업해 나타났다. 쟁반 위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여 있었다.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한빈이 물었다.

 

“무슨 생각 해요?”

“….”

 

우리가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면,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아무 생각도….”

 

한빈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갈증 난 사람처럼 빠르게 커피를 마셔 없앴다. 그리고 휴대 전화를 꺼내 스케줄을 확인하며 말했다.

 

“아직 크랭크인까지는 시간이 좀 있어요. 물론 연주 장면에는 주로 대역을 쓸 테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로는 배워 놓고 싶긴 해서요.”

“….”

“회사랑 얘기해 봤는데 긍정적인 반응이어서, 절차에도 문제 없을 것 같고요.”

“….”

“다음 작품 들어가기 전까진 광고 말곤 스케줄도 없어서, 수업 시간은 하오 씨한테 제가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

“…왜 말이 없으시지.”

 

하오는 빠르게 용건을 이어가는 한빈을 빤히 바라보던 끝에 마침내 입술을 뗐다.

 

“한빈아.”

“…네?”

“애쓸 필요 없어.”

“….”

“네가 싫다고 하면, 마주칠 일 없게 할게. 그러니까….”

“저는 하오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하오는 알고 있었다. 한빈이 천성에 맞지 않는 거짓말을 할 때 어떤 눈빛이 되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목소리를 내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장장 8년이야.”

“….”

“내가 너를 몰라?”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한빈이 어떤 심정일지, 아마도 속으로 부단히 애쓰고 있으리란 사실까지도.

 

“그러니까 그냥…. 거짓말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럼 이건 어때.”

 

그러자 마침내 한빈이 젖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끊는다. 처음 보는 표정으로 하오를 아프게 응시하며 쥐어짜듯 뱉는다.

 

“나 남자 친구 생겼어.”

“….”

“이것도 거짓말 같아?”

 

그 순간 하오는 한빈과 살갑게 알은체하던 백승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화낼 자격도, 실망할 자격도 그에게는 없었으니까. 하오는 쓸쓸하게 웃었다.

 

“거짓말 아니었으면 좋겠어.”

“…뭐?”

“진심이야.”

 

성한빈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장하오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한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톡 건드리기만 해도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그거 알아?”

“….”

“형 이러는 거 질려.”

 

그런데 한빈아, 왜 네가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 하오는 차라리 그가 저에게 물이라도 끼얹어 줬으면 했다. 뺨이라도 때려 줬으면 했다. 그렇지만 성한빈은 기어이 모질지 못해서, 그 말을 끝으로 도망치듯 카페를 떠나고 만다.

 

남겨진 하오는 참담해진다. 물 한 방울 없이 젖은 사람이 된다. 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진짜 어이없지 않아?”

 

그러니까, 술자리에 불려나온 유진은 벌써 이 말만 다섯 번째 듣는 중이었다. 유진이 도착했을 때 한빈은 이미 소주 한 병을 비운 상태였다. 술도 못 마시는 인간이 고집 부리는 이유는 딱 하나다.

 

“장하오 다 잊었다면서.”

“당연하지! 유진이 너도 알잖아. 나 진짜 멀쩡했잖아. 기억하지?”

“…기억이야 하는데요.”

 

헛웃음이 나왔다. 장하오 미국으로 뜨고 나서 매일 같이 술 마셔 준 게 누군데 이 인간이 벌써 다 잊었나. 그런 말은 속으로 삼키며 잔을 꺼내 소주를 따랐다. 이모, 여기 어묵탕 하나요. 익숙하게 안주를 시키고 기본 안주로 나온 뻥튀기를 씹었다.

 

“근데 지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하냐.”

“뭐라는데요?”

“내가…, 내가 남자 친구 있다니까….”

“네?”

“거짓말 아니었음 좋겠다잖아.”

 

양심은 있네. 유진은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 오히려 다시 만나자고 매달렸다면 그거야말로 염치 없는 인간이었다. 헤어지고 이 형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데, 그걸 이제 와서 어떻게 원점으로 돌려.

 

“그게 왜요.”

“이제 와서 내 앞에 나타나 놓구….”

“….”

“그래 놓구 나 싫으면 사라져 주겠다잖아….”

“….”

“…그게 말이 되나아.”

 

그때 유진은 알았다. 그동안 잊었다고 떵떵거리던 말은 다 거짓말이었구나. 이 인간, 단 한 순간도 장하오 못 잊고 살았구나. 한숨이 터졌다. 유진은 차라리 취하고 싶어 소주를 넘겼다.

 

“근데 왜 거짓말했어요?”

“내가?”

“남자 친구 없잖아요.”

“아, 그거….”

 

한빈이 방금 나온 어묵탕을 휘적이며 실실 웃었다.

 

“괘씸하니까….”

 

내가 언제까지 지만 기다리면서 살 줄 알았나…. 들릴 듯 말 듯하게 구시렁거렸다. 유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없는 말도 아니야.”

“뭐야. 만나는 사람 있어요?”

“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누군데요?”

“부를까?”

“…잠깐만. 이 타이밍에 그 사람 부르는 게 맞아?”

 

맞고 틀리고 판단할 새 없이 한빈이 휴대 전화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마른세수했다. 진짜 모르겠다. 이 밤이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오가 부재중 전화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야심한 시각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하오는 뜻밖의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한유진.

 

전화 잘못 걸었나. 잠깐 고민하던 끝에 콜백 했다. 짚이는 바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 여보세요.

“난데.”

- 하….

 

시끌벅적한 휴대 전화 너머로 한숨 소리가 넘어왔다.

 

- 카톡으로 주소 하나 보낼게요. 올지 말지는 형이 알아서 판단하세요.

 

하여간 버릇 없기는 여전했다. 의문만 남긴 채로 짧은 전화가 끊겼다. 하오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어내며 고개를 갸웃했다. 유진이 카톡으로 보낸 주소에는 주점인 것이 분명한 상호명이 찍혀 있었다.

 

하오는 그대로 수건을 집어 던지고 방금 씻은 몸 위로 맨투맨을 욱여넣었다. 정신없이 신발을 구겨 신는 걸 발견한 규빈이 무슨 일이냐고 의아해했지만 설명할 새가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하오는 주점 밖으로 나와 있는 유진을 발견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그는 하오를 발견하고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야?”

“직접 보시라고요. 진짜 못 봐주겠으니까.”

“뭐?”

“형이 예뻐서 부른 건 아니니까 오해는 마시고요.”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부른 거예요. 유진의 말을 뒤로한 채 주점 안으로 들어갔을 때, 하오는 바로 한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옆에 딱 붙어 시시덕거리는 백승호는 덤이었다.

 

하필 전부 구면이네. 하오는 마른 입술을 말아 물고 저벅저벅 걸어가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어? 하오 씨 또 보네요?”

“안녕하세요.”

 

달갑지 않은 인사치레였다. 승호의 어깨에 기대어 칭얼거리던 한빈이 그제야 반쯤 풀린 눈을 들어 하오를 본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동안에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한빈이, 많이 마셨어요?”

“그새 친해지셨나 봐요.”

 

승호가 한빈의 무릎을 손으로 덮으며 본능적으로 경계했다. 하오는 한빈이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직접 보는 건 진짜 별로네.

 

그때 자리로 돌아온 유진이 하오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만 마시게 해야 할 것 같아요. 이미 너무 취했어요.”

 

유진은 익숙하게 물컵을 가득 따라 한빈에게 건네며 걱정했다.

 

“아, 한 PD랑 아는 사이예요?”

“네.”

 

대답은 유진이 했다. 승호는 떨떠름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조금쯤 경계심을 풀고 유진에게 대신 받은 물컵을 한빈에게 건넸다. 한빈은 여전히 하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을 받아 마셨다.

 

“…집에 갈래.”

 

자리에서 비틀대며 일어나는 한빈을 승호가 서둘러 부축했다. 반사적으로 뻗어진 하오의 손이 길을 잃는다. 승호는 그런 하오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하오 씨 이제 오셨는데 아쉬워서 어떡하죠? 한 PD랑 한잔하고 들어가세요.”

“….”

“한 PD, 나 먼저 들어갈게. 한빈이 걱정은 말고.”

“네? 어…, 뭐….”

 

허무한 결말이다. 한빈은 승호의 부축을 받으며 술집을 떠났고, 하오는 유진 옆에 패잔병처럼 남겨졌다. 이걸 그냥 보내네. 유진은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하오는 한빈이 내려놓은 빈 물잔에 병에 남은 소주를 전부 붓고 그대로 원샷했다.

 

“미쳤어요?”

“한유진.”

“왜요.”

“한빈이, 약은 끊었어?”

“….”

 

뜻밖의 질문에 말문이 탁 틀어막힌다. 유진은 그와 마주 앉아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네.”

“그럼 됐어.”

 

짜증 나. 유진이 속으로 곱씹으며 소주를 넘겼다.

 

“둘 다 진짜 머저리들 같아요.”

 

이제 두 사람에 대해서라면 아주 진절머리가 났다. 그 말에 하오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한심하긴 매한가지였다.

 

 

 

 

승호의 차 조수석에 오른 한빈은 그대로 사과부터 했다.

 

“죄송해요, 형.”

“응? 뭐가?”

“제가 방금 형 이용했어요.”

 

취기 오른 얼굴로, 그래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다는 듯 비장한 고백에 승호가 운전대에 기댄 채 웃음을 터뜨렸다.

 

“알아.”

“…네?”

“대충 눈치챘어.”

“….”

“알고 당한 거니까 죄책감 같은 거 갖지 마.”

 

승호의 반응에 한빈은 허탈한 표정이 됐다.

 

“저 많이 티 나요?”

“조금?”

“…미치겠네.”

 

한빈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끝까지 저를 바라보던 하오의 눈빛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그렇게 갈등하는 사이 승호가 안전 벨트를 손수 채워 주곤 차를 출발시켰다.

 

“그래도 오늘은 집으로 가.”

“….”

“그게 나에 대한 예의잖아.”

“…네.”

 

그렇게 승호의 차에 실려 집에 도착했다.

 

장하오가 없는 사이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집은 그대로였다. 전화번호를 바꾸고도, 그와의 추억이 묻어 있는 이 공간만큼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한빈은 아랫입술이 너절해지도록 잘근잘근 씹었다.

 

- 깨끗하게 잊어 줄 것 같은데요. 그게 저를 버린 사람에 대한 최선의 복수라고 생각해요.

 

그딴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전부 위선이고 가식이었다. 그가 너무 미운데, 그래서 영영 잊어 주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잘 안 됐다.

 

그렇게 바라던 주연 배우가 됐고, 이제는 오디션을 보지 않아도 러브콜이 쇄도했고, 거리를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단 한 가지, 장하오의 부재가 그 모든 성공을 무력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할 수 없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돌아가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한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를 악물고 일상을 회복해 온, 지난 2년 간의 나를 위해서. 한빈은 자꾸만 젖어 드는 눈에 힘을 주며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부동산을 방문했다. 규빈의 지인들에게 조언을 얻어 후보지를 몇 군데로 추리고 발품을 팔았다. 동네 분위기를 비롯해 몇 가지 고려 사항을 꼼꼼히 따져 가며 교습소 위치를 결정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가도 이따금 공허해졌다.

 

그날 이후 한빈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나 남자 친구 생겼어.”

.”

이것도 거짓말 같아?”

 

그때 그 애의 말이 치기 어린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연락할 수 없는 건… 제게 그럴 자격이나 있나 싶어서. 하오는 충동을 억누르곤 했다.

 

그래, 내가 바란 게 이런 거였잖아. 한빈이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 주기를 바랐잖아. 그런데 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 걸까.

 

하오는 교습소가 될 상가에 들어선다. 수강생들이 최대한 오래 머무르고 싶게 따뜻하고 감성적인 분위기로 인테리어할 작정이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텅 빈 공간을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자꾸만, 성한빈 생각에 집중력이 흐려졌다.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완성된 교습소에 가장 먼저 들어서는 건 성한빈이었을 것이다. 로맨틱한 그 애는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왜인지 본인이 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안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교습소를 드나들며 데스크 직원이 할 법한 일을 도맡아 하고, 한빈을 알아본 수강생이 둘이 무슨 사이냐고 수상해하면 하오는 차마 사귄다고 고백할 수 없어 그저 웃고 말았을 것이다.

 

발치에 눈물이 떨어진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스스로가 만들어낸 모순에 갇힌다. 한빈을 밀어냈던 게 정말 그 애를, 그리고 우리를 위한 선택이 맞나. 어쩌면 그 애가 홀로 감내하도록 방치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억지는 아니었나. 부서지고 모나 있던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가 울린다. 발신인은 한유진이었다.

 

- 형….

 

받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 기사 봤어요? 한빈이 형 지금….

 

하오는 상가를 박차고 뛰쳐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무작정 대로변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유진에게 들은 대학 병원으로 가 달라고 애원하듯 부탁하고, 초조하게 마른세수하는 손이 덜덜 떨렸다.

 

교통 사고 났어요. 스케줄 이동하는 중에. 메인 목소리로 더듬더듬 알리는 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명이 찾아왔다. 택시가 달리는 내내 지옥 같았다. 오만하고 이기적인 선택에 대한 벌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만원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비상 계단을 밟아 오르고 또 오르는 동안 땀이 비오듯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한빈이 입원한 병실의 문을 열어젖혔을 때였다.

 

“….”

“….”

“…장하오?”

 

한가한 1인실의 살짝 열린 창문을 통과한 작은 바람이 커튼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얼굴 여기저기 반창고를 붙이고 팔에 깁스를 한 한빈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본다.

 

“冰…。”

 

언젠가의 애칭에, 한빈의 표정이 얼어붙는다. 안으로 걸어 들어간 하오가 한빈을 당겨 끌어안았다. 얼떨결에 딸려온 한빈이 그의 품에서 눈을 굴린다. 슬쩍 밀어내려 해 보아도, 한빈의 허리를 꽉 안은 팔에서는 도무지 힘이 풀릴 줄을 몰랐다.

 

“형, 너….”

 

당황한 목소리에도 하오는 한빈의 목덜미를 파고들 뿐이었다. 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감각은 마비된 지 오래였다. 둑이 무너진 자리에 그리움이 넘쳐흐른다.

 

오랜 후에야 하오를 떼어내고 얼굴을 마주한 한빈은 말을 잃었다. 충혈된 눈, 발갛게 물든 코끝, 너절해진 입술을 가만히 응시하다 고개를 내린다. 헛웃음이 터졌다. 형은 내가 거짓말하는 걸 알았는데, 나는 형이 거짓말하는 얼굴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나 보다. 우리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건 어쩌면 나였을까. 이별의 잔상들이 끈질기게 따라붙어 한빈을 괴롭힌다.

 

“잘못했어.”

 

회한에 잠겨 있는 한빈에게, 하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애절하게 고백했다.

 

“내가 잘못…. 잘못 생각했어.”

“….”

“다시 만나 달라고 안 할게. 없는 듯이 있으라면 그럴게. 근데,”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이 속절없이 젖는다. 하오는 보는 사람마저 아프게 울었다.

 

“나, 네가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없을 것 같아.”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나 봐. 도피하고 싶어서,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도 몰랐나 봐. 덜덜 떨며 그렇게 고백하는 하오는 초라했고, 안쓰러웠고, 또 비참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이번에는 한빈이 먼저 손을 뻗었다. 왼팔에 깁스를 하고 있어 그를 온전히 품에 안을 순 없었지만, 체온을 느끼고 싶어 최대한으로 끌어당겼다. 오랜 방황 끝에 찾은 제자리였다.

 

 

 

 

하오는 그날부로 짐을 챙겨 1인실에 입주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온 규빈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과일 들고 찾아온 유진도 대놓고 혀를 찼지만 그렇게까지 못마땅한 눈치는 아니었다.

 

하오는 한빈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그렇게 큰 부상이 아니라 괜찮다고 만류했지만 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친 건 왼팔인데 왜 밥을 일일이 떠먹여 주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오는 한빈에게 고백했다.

 

“형.”

“….”

“우리 진도가 너무 빠르지 않아?”

 

물론 거절당했다.

 

나를 아직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뾰로통한 지적이 이어졌다. 하오는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심통을 부렸다.

 

“승호 형 부를래.”

“응.”

“규빈이도 오라고 해.”

“알았어.”

 

그날 진짜 백승호를 병원으로 초대한 성한빈은 장하오 앞에서 보란듯이 귓속말까지 해 가며 유치하게 복수했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하오는 한빈이 기다리라면 적어도 2년은 죽은 듯 기다려 줄 수도 있었다. 2년이 지나도 허락해 주지 않으면… 납치라도 할까. 하오는 문득 ‘성한빈, 동성의 전 남자 친구에게 납치당해…’ 같은 자극적인 타이틀의 기사가 포털 사이트를 뒤덮는 상상을 했다.

 

병문안 온 손님들이 돌아가고 난 저녁이었다. 하오는 병실에 쌓인 쓰레기를 치우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한숨을 돌렸다. 지나가는 간호사도 이제 하오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해 왔다. 그렇게 돌아온 병실, 하오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성한빈이 사라졌다. 병실에 딸린 화장실에도, 복도에도 없었다. 갑자기 말도 없이 어딜 간 거야…. 초조한 마음에 한빈이 갈 만한 곳을 부지런히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차츰 손발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하오는 낯익은 간호사를 다짜고짜 붙잡고 물었다.

 

“혹시 한빈이 보셨어요? 병실에 없어서….”

“아, 환자분 아까 보호자 휴게실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요.”

“감사합니다.”

 

하오는 창백한 얼굴로 긴 복도를 가로질렀다. 슬리퍼 한 짝이 벗겨진 것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보호자 휴게실, 하오는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한빈과 눈이 마주쳤다.

 

“한빈아, 왜….”

 

한빈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진 채였다. 여전히 감정이 격양된 상태인지 어깨가 들썩거리는 게 다 보였다. 얼을 뺀 채 그에게 다가간 하오가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눈물을 닦아 주려 손을 뻗었지만 한빈이 사납게 쳐내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장하오 너, 이러다 또….”

“….”

“힘들어지면 또, 나부터 버릴 거야?”

“….”

“다시 안 올 것처럼…. 그렇게 갈 거야?”

 

뱉는 어절마다 물기가 가득했다. 한빈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끅끅대며 하오를 노려보았다.

 

“안 그래.”

 

하오는 다시 한빈에게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순순히 딸려오는 몸을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엉망으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지만, 그런 것쯤은 사소했다.

 

“절대로. 네가 나 싫다고 밀어내도. 모진 말 하고 나쁘게 굴어도. 그래도 끝까지 옆에 있을게.”

“…거짓말….”

“안 믿어도 돼. 그냥 내가 증명할게.”

 

내가 무너뜨린 신뢰니까, 기꺼이 다시 쌓을게. 또 8년이 걸리든, 80년이 걸리든. 그렇게 할게. 그러니까….

 

하오는 한빈을 품에서 살짝 떼어내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꺾었다. 입술이 닿으려 할 때마다 한빈은 고개를 틀어 하오를 피했다. 하오는 단념하지 않고 입술 대신 이마에, 코끝에, 눈물이 흐르는 뺨과 턱끝에 입술을 눌렀다. 커다란 두 손으로 한빈의 양 뺨을 잡고 다시금 입을 맞춘다. 그제야 젖은 숨이 맞닿았다.

 

우리, 이번에는 영원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목숨을 걸고 맹세해도 별안간 들이닥친 위기에 흔들리는 순간은 또 오겠지. 그럼 그때는 지금의 기억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를 선택했던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한번 극복하며 굳은살을 덧댈 수 있지 않을까.

 

맞닿은 입술이 떨어졌다. 하오는 불안해하는 연인과 눈을 맞춘다.

 

“사랑해.”

 

한빈은 그가 진심을 고백할 때의 표정을 알았다. 호흡은 차츰 진정되어 갔다. 사실은 이마저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를 밀어낼 수 없다는 걸 안다. 또 다시, 함정에 빠질 차례였다. 한빈은 이 깊은 함정이 억울하고도 기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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